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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백자의 미적 가치

장성용도예가·계명문화대학 교수최근 독일의 유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이 한류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물결”이라며 세계 팝음악의 중심축이 한국으로 옮겨오고 있음을 기사화했다. 또한 “보편적 음악의 근원지는 지금까지처럼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아시아 국가인 한국에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것이 자율성과 창조성이 우리의 기질과 성향을 잘 나타내는 한 경우라고 본다.상상으로만 가득 찬 기억 속의 그곳은 참으로 아름답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증류된 아름다움, 한치의 가감도 허용되지 않는 정밀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천혜의 풍토와 천재의 이웃을 한꺼번에 타고난 한반도를 무대로 펼쳐진 조선의 지난 시절이 그랬다. 문득 우리는 우리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한국적인 것으로부터의 탈피며 일탈이 반드시 바람직하며 불가피한 현상일까? 반세기 후에는 더욱 격심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고유의 모든 것이 씻겨나갈지도 모른다. 우리의 도자기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무엇을 아름다움이라 여겼는가를 밝혀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조선의 도공들이 쓴 물레는 모두 털털거렸다. 아무리 숙달된 도공의 정성스런 솜씨로도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기처럼 완벽한 대칭의 도자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어딘가 선이 뒤틀리고 좌우가 안 맞고 밑이 살짝 뒤뚱거리곤 했다.당시 조선의 도공들은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모양의 그릇을 만들어내려 애쓰지 않았다. 지극히 무심하게 그릇을 만들어나갔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명기나 예술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욕심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요구됐던 것은 감상의 대상품이 아니라 일용품이었다. 자연 맵시 있는 것보다는 튼튼한 것, 정교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호사스러운 것보다는 소박한 것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일본의 권력자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탐내던 한국의 도자기들은 모두가 이렇게 이름 없는 한국의 도공들이 소탈한 마음으로 구워낸 명기들이었다.가장 완벽한 자연스러움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마저 의식하지 않을 때 나타난다. 아무리 자연스러워지려 하더라도 자연스러워지겠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는 한 부자연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흙냄새가 물씬거리고 생활의 이야기가 스며있고 또 눈물에 젖은 감상 보다는 눈물을 삼키는 잡초처럼 강인한 생활력이 담겨있다.우리가 조선백자를 볼 때에 이런 것을 연상한다. 시골집 뒤주위에 놓여있는 백자, 마치 둘레의 눈에 띌세라 조심스레 숨 죽여가며 사는 은자와도 같고, 때로는 햇빛마저 부끄러워하듯 내방 깊숙이에서 곱게 자라난 양갓집 딸의 가는 목과도 같다. 백자의 흰색은 대리석처럼 차갑도록 다듬어진 것이 아니다. 어딘가 막걸리처럼 구수터분한 맛을 풍긴다. 그것은 시골길을 걷다 먼지를 뒤집어쓴 할아버지의 땀 밴 흰 두루마리와도 같고 첫아이에게 젖을 물린채 꾸벅거리는 새댁의 새큼한 젖내가 나는 흰 무명적삼과도 같다.조선백자는 흰색의 태토로 살을 삼고 청색으로 옷을 삼아 표의를 쓰고 무엇에든 집착된 곳이 없는 마음, 깨끗한 마음, 깊은 것이 흘러나오는 근원으로서 내면적 자연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백자의 색은 넓은 공간성을 제공하는 색이다. 여백은 다양한 가능성을 암시하며,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완결된 공간으로 부각됨으로서 심리적인 여유를 부여하는 색이라 하겠다. 이것은 허색의 상으로서 마음의 평화를 나타내며 이 평화는 생명 있는 유기체의 평화이며 유화, 진실, 사상을 나타내며 심원한 철학적 고찰의 상이 있음을 볼 수 있다.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미지는 달라진다. 눈도 달라진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보고 우리의 눈이 어떻게 달라지든 백자 속에서 자라는 큰 맛 속에 우리는 이러한 역작을 제작한 무명의 사기장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려야 하며, 경외감마저 표해야 할 것이다.

2011-12-01

진보와 보수라는 허울의 설전(舌戰)

강희룡서예가국회 청문회를 거쳐 국무총리로 임명된 정운찬 신임 총리를 옹호하는 내용의 어느 시인의 일간지 기고가 진보·보수 인사들의 상호비방성 설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의 진상은 `천만원짜리 개망신`이란 제목에서 `한때 자신들이 대권 후보로까지 밀었던 사람을 1000만원으로 잡아먹겠다며 벼르는 진보주의자들`이라며 정 총리의 1000만원 수수를 공격한 야당(민주당)을 비난하며 정 총장을 옹호했다. 이 시인의 일간지 칼럼 기고를 두고 지난 9월27일 소위 한국에서 스스로를 진보라 일컫는 입장에 있는 전 중앙대 겸임교수로 있었던 문화평론가 J씨가 `왜 말년을 저렇게 추하게 보내야 하나.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며 이 시인을 비난했다. 이 내용을 두고 전 서강대총장으로 있던 P신부가 지난달 29일 평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J씨에 대해 `저는 그분을 보면 아주 젊은 사람으로서 너무 쫄랑거리는 거 같다. 사람들은 자유가 있으니까 생각 가는 대로 표현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뭐 개가 짖는구나, 로 들린다.`고 힐난했다. 이에 J씨는 30일 P신부로부터 `개가 짖는다.`는 원색적 비난을 접한 뒤 `이분이 아직 선종 안 하시고 살아계셨군요`라며 즉각 반격에 나섰다. 논쟁이 아니라 막말 비방전으로 확전되고 있는 것이다. 소위 한국에서의 보수, 진보를 따지는 인사들의 이 같은 볼썽사나운 논쟁에 대해 네티즌들은 큰 관심을 보이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며 `지식인층의 논쟁이 너무 격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도대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누가 진정한 보수이며 진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세계사적 배경과 한국의 역사적 배경에서 얻을 수 있다. 프랑스 혁명기의 국민공회(國民公會)에서 봉건적인 왕당파가 오른쪽, 부르주아 혁명의 급진화를 주장하는 과격파가 왼쪽, 중간파가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사실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한국의 진보를 대표하는 집단으로는 정치적으로는 민주당 일부, 민주노동당, 사회적으로는 민주노총과 한총련을 비롯한 민중운동 진영,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을 진보적이라고 일컫게 된 데에는 우선 세계정치사적으로 20세기 전반기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그리고 20세기 후반기에는 사회민주주의가 사회적 좌파를 형성했다. 이들을 급진 또는 점진적으로 현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혁명세력, 변혁세력, 또는 진보세력으로 불렀다. 좌파라는 개념 역시 상대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진보 역시 보수의 역개념(逆槪念)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시대에 있어서 어떤 것을 진보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기준들은 현 시대적인 것이면서도 역사적으로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소위 진보운동이라는 것은 안티테제적(Antithese:反定立的) 운동이다. 즉 反자본, 反세계화, 反시장화, 反기업 등 온갖 `反字`로만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으며 최소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측면에서 이 시대 진보의 기준은 명확히 이것이다라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허울만 진보를 뒤집어쓰고 있다. 2005년 11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조사결과에서 나타난 정치인의 진보, 보수 성향의 척도에 대한 여론을 보면 진보 순으로 정동영(56.8%), 이명박 현 대통령(47.1%)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김근태(40.6%)와 이해찬, 손학규, 그 외는 중도(中道) 내지는 보수(保守)로 인식되고 있다. 자칭 진보세력에 대해서 국민들은 보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오히려 현실변화를 추동하려고 노력하는 현 대통령이나 기업경영진에 대해서는 진보적이라고 평가하는 아이러니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현 야당 스스로가 대권후보로까지 천거하려고 하던 분을 여당에서 총리내정자로 임명하자 국회인사청문회에서 기를 쓰며 반대하더니 국감을 통해 벼르는 정치 행태는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저질의식구조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오는 11월에 민노총에 가입할 예정인 통합공무원노조는 스스로가 그들의 조직정체성에 대해 냉철히 판단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공직자들은 어느 누구나 민심이 곧 천심이니 천도무사(天道無私:하늘의 법은 사사로움이 없다.)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2009-10-08

거시기와 단디

최재영서양화가언젠가 영호남문화교류로 전주에 갔을 때다. 개막행사 후 만찬을 들면서 몇 순배의 술잔이 오가다 보니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취기가 올라 얼굴이 벌겋게 된 그곳 작가 한 분의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좌중을 압도한다. “워따! 행님 만나니 거시기하네요 그동안 거시기하고 거시기 했는지라….?” 걸걸한 목소리에 덩치가 보통이 아니다 보니 꼭 조폭영화의 조연쯤 되는 폼에다 거시기 판이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 잡기가 어렵다. 옆에 앉은 다른 분이 “만나서 반갑고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묻는 안부라고 해석해 준다. 그런데 그 옆의 또 다른 분은 “그게 아니고 ”그동안 어떤 작품을 하셨고, 요즘도 작업 많이 하시는지요?” 라는 물음이란다. 듣는 사람에 따라선 제각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전라도의 거시기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황산벌`은 2003년 이준익 감독이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일전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학적으로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노라면 걸쭉한 영호남의 사투리가 스토리의 전개를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어 사투리의 경연장 같아 보인다. 전쟁의 침울하고 극적인 비극을 그렸다기보다 당시를 살았던 보통사람들의 일상들을 조명함으로써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을 창출하려고 한 의도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로 인해서 한 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던 대사가 `거시기`다. 호남지방에서 주로 쓰이는 대표적인 방언으로 알려져 있지만 연구된 바로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통용되었던 사투리라고도 한다. 전라도 이외의 다른 지방에서는 그렇게 흔하게 쓰이지 않다 보니 호남의 고유사투리로 많이 알려졌다. `거시기`의 뜻은 하려는 말이나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갑자기 말이 막힐 때를 비롯하여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많이 쓰인다고 국어사전에는 풀이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뜻의 방언으로 경남이나 평안도 지방에 `거시키` `거서가니` `거석` `머서가니` 등이 있다고 한다. 방언 중에서도 영화연극, TV드라마 등에서 지방색을 돋보이게 하는데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경상도와 전라도 방언이다. 특히 2001년의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는 한국영화사에서 최고 히트를 하면서 부산의 억센 사투리가 전국을 강타하기도 했다. 그 후로 폭력물영화나 방송드라마라 하면 경상도와 전라도 사투리가 들어가지 않으면 아예 작품이 되지 않을 것처럼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영호남사투리가 방송을 워낙 많이 타다 보니 이제는 알아듣기 어려운 토속사투리라기보다 누구나 다 아는 보편성을 띠기도 한다. 최근엔 `단디`라는 경상도 사투리가 뜨고 있다. 지금의 대통령 출신지인 포항이나 경주 등지의 동해안 일대에서 흔히 쓰이던 사투리라고 한다. 같은 경북이라도 이 지역 외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물어보면 생소하게 여긴다. 그랬던 이 `단디`가 요즘 TV의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곧잘 등장하고 하다 보니 새로운 느낌으로 와 닿는다. 대통령 배출이라는 유명세에 의해 부각된 탓인지, 어감이 조금은 특별 해선지는 모르지만 이 지방 출신이면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잔소리이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 월례 고사나 시험이 있는 날이면 “시험 단디 쳐라” 꼭 한마디쯤은 들어야 했던 말이다. `단디`는 단단히 하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인지는 그 어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대로, 똑바로, 단단하게, 확실히, 야무지게, 등등 빈틈이 없도록 잘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주의를 환기시킬 때 많이 쓰는 당부의 의미가 강하다고 보면 되겠다. 요즘은 표준말 사용을 의무로 하는 교육부혜택을 많이 받는 시대가 되다 보니 언어의 획일성이 강조되면서 지방 고유의 사투리가 사라져간다. 이곳에도 이제는`단디`라는 말을 듣기란 쉽지가 않다. 제주도에서 제주방언을 듣기가 어렵듯이 대구에서, 광주에서 그곳 방언을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듣기가 어렵다. 이러다가는 사투리가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앞선다.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2009-10-01

청문회와 판데믹 (pandemic)

강희룡서예가판데믹(pandemic)이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대유행`이란 뜻으로 보통 조류독감, 유행성독감, 신종플루 같은 질병에 사용되는 용어지만 우리 사회의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에게 어울리는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 헌정사는 제6공화국에서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총선거는 정당정치가 정착된 이래 최초로 집권여당이 의석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이른바 여소야대의 정국을 형성하는 기록을 남겼다.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로 바뀌면서 국회의원선거제도도 소선거구제로 바뀌었다. 당시 가장 특징적인 것은 16년 만에 국정감사가 부활되었으며 처음으로 청문회제도가 실시되어 청문회정치라는 새로운 민주정치형태가 등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13대 국회는 의정사상 최초로 청문회제도를 도입함에 따라 신군부의 등장배경 및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과거사의 진실 규명을 위하여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특별위원회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청문회를 개최하였고, 문교공보위원회에서도 80년 이후의 언론통제 및 80년 언론인해직에 관한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우리 의정사상 최초로 열린 이 청문회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국민적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민주사회로 한 걸음 다가섰다. 사회주의나 공산독재정치에서는 볼 수 없는 민주국가의 이 국회인사청문회제도는 곧 국사를 이끌어야 하는 사회지도층들이 고위관료로 나아가는 등용문인 셈이다. 때문에 고위공직 후보자들의 도덕성과 함께 능력, 자질, 업무수행 적절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국회로부터 검증을 받은 후 그 적합성에 따라 인준을 받는다. 지금까지의 이러한 인사청문회에서 공통으로 터져 나오는 판데믹의 세 요소가 있으니 그 첫째가 위장전입이다. 위장전입의 경우 대체로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 부동산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마음이야 고금을 통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가지지만 실제 살지 않는 곳에 마치 살고 있는 것처럼 서류를 꾸미는 범법행위는 현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 자녀에게 불이익을 주며 혜택을 받아야 할 실제 거주자에게 혜택을 못 받게 하는 행위로 건전한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 둘째로는 병역비리이다. 오늘날 지구촌에서 같은 민족끼리 낡은 이념으로 남북으로 나누어져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병역의무는 국토방위라는 절실한 의미를 담고 있다. 21세기 마지막 분단국가, 냉전국가 한반도에서 핵개발과 가공할 만한 지상군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곧 애국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된다. 지금까지 청문회의 대다수 후보자들이 본인을 비롯하여 그 자식들까지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병역면제를 받고 있는 상황은 철저히 파헤쳐 검증받아야 한다고 본다. 또한 이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병역비리로 무임승차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이 땅에 발을 디뎌서는 안 될 것이다. 세 번째 부동산투기이다. 위장전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탈세와도 연관이 있는 부동산투기 행위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황금만능주의 사고방식에서 기인된다. 이러한 결과는 불로소득의 누증으로 인한 빈부 격차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 불안을 조성하며 저소득층 근로자들의 주거 문제를 악화시키고 불로소득으로 인한 사치, 낭비, 범죄적 소비 등이 만연하여 사회의 건전한 기강을 뒤흔들어버린다. 또한 사회 간접 시설 축조 비용의 천문학적 증가로 국가 재정 부담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 지난날부터 현재까지 인사청문회를 통한 대다수 고위공직 후보자들에게 쏟아진 각종 의혹과 법 위반사례는 우리의 지도급 사회에 퍼져 있는 도덕 불감증의 판데믹을 또 한 번 확인시켰다. 도덕적 관념에서 그들은 `사회지도층`이라기보다 여러 가지 적절치 못한 방법과 행위를 서슴없이 총동원하여 부(富)를 축적한 그냥 `부유층`의 한 사람들이었다.

2009-09-24

산아 무한으로 가자!

최재영서양화가국토, 국민, 주권을 가리켜 국가를 구성하는 3대 요소라고 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나라 꼴을 갖추지 못한다. 그리고 강대국이 되는 조건 중에서 국토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국민의 수다. 적어도 나라의 인구가 1억은 넘어야 강대국의 반열에 들 수 있다고 한다. 이웃 일본도 국토는 그다지 넓지 않지만 인구로는 남한의 3배가 넘어 인구수로도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남북한 다 합쳐봐야 7천만 남짓이라고 하니 강대국이 되려면, 콩나물시루가 되더라도 국민의 수를 늘리는 데 힘을 쏟아야겠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으니 문제다. 한때는 아이 덜 낳기 운동이 요란하더니 지금은 아이 더 낳기 운동으로 매스컴이 부산을 떨지만, 갈수록 오히려 출산율은 떨어지고 있으니 이 캠페인은 그야말로 헛구호가 될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아기를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들어가는 양육비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신 그날부터 산부인과를 들락거리면서 체크를 해야지, 일정기간이 지나면 초음파검사에 태교를 위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나 정보를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다. 달이 차서 출산을 하면 병원을 가야 하는데, 순산을 한다 해도 수십만의 병원비가 소요된다. 제왕절개의 난산일 때는 수백만 원이 들어가고, 조기 출산으로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는 경우는 수천만 원이 들어간다고 하니 임신 그 자체가 돈 먹는 하마라는 사실이다. 거기다가 맞벌이하는 부부라면 아이 양육 때문에 어느 한 쪽은 직장마저 쉬든가 끊어야 한다. 아기를 낳는데 벌써 이처럼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다가 아이의 양육비는 출산의 수십 배, 수백 배가 든다고 하니 임신을 한다는 자체가 분명히 모험이다.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인구 늘리기 방책이라며 출산보조금을 지급하고 여러 가지 양육비지원을 약속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코끼리 코에 비스킷도 안 되는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유치원 가기도 전에 들어가기 시작하는 사교육비가 웬만한 중고등학교 교육비와 맞먹는다고 하니 아이 하나 키우려면 부부가 허리가 휘도록 벌지 않으면 안 된다. 요즘은 부부가 버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할아버지의 도움까지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라고 하니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수를 늘리는 캠페인은 웃기는 말장난일 수밖에 없다. 복지정책이 최고인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임신에서 대학교육까지 전액 국가가 책임을 지며 취업보다 임신이 더 낫다고 할 정도로 지원을 해 주어도 출산율이 올라가지 않더라고 하는데 우리처럼 이런 여건에서 출산을 장려한다는 것은 허공에 주먹질이다. 양육비보조라고 내놓은 쥐꼬리 같은 수당도 세 번째 자녀부터라고 하며 앞으론 두 자녀로 확대하겠다고는 하나 이것 역시 복지정책이라고 하기에는 턱없다. 우리 집에는 얼마 전에 새 식구가 태어났다. 며느리를 본지 일 년도 되지 못해 허니문 베이비로 손녀가 태어난 것이다. 꼬물대는 생명의 신비와 경이로움은 안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대부분의 할아버지들이 내 자식보다 더 귀여운 것이 손자라고 한다. 나 역시 그 범주를 뛰어넘지 못하는가보다. 하루하루 커가는 손녀의 모습을 보면서 창조주는 왜 내 자식보다 한 순배를 건너뛴 손자를 더 귀엽게 여기도록 만들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이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의 노고가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라는 염려가 아기를 볼 때마다 문득문득 든다. 사교육비의 부담률이 OECD 회원국 중 최고라고 하며, 대학등록금이 비싸기로는 미국에 이어 2위라고 한다. 갈수록 출산율을 떨어뜨리는 부정적인 내용들만 터져 나오니 적령기를 앞둔 신세대들의 결혼율도 자꾸 낮아진단다. 자식을 낳아 양육해야 하는 어려운 부담을 짊어지지 않으려고 독신을 고집하는 젊은이들도 엄청나게 늘고 있다는 소문이다. 이러고서야 강대국으로 가는 국민의 수를 늘리는 것은 까마득한 일이다. 향우 십수 년 후면 지금의 인구수도 지키지 못하고 급격히 줄어들 전망이라고 한다. 말로만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고 떠들어봤자 효과는 깡통이다. 인구를 늘릴 수 있는 획기적인 정책을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와있음을 정부는 깊이 헤아려야 한다.

2009-09-24

취직이 출세다

최재영서양화가“20대에 취직하면 가문의 영광, 30대에 취직하면 동네의 자랑, 40대까지 자리를 지키면 나라의 홍복, 50대도 다닌다면 불가사의, 60대까지는 기적” 얼마나 일자리 얻기가 어렵고, 얻었다 해도 그 자리를 지키기가 어려운지를 조소하는 조크라지만 먹고살기가 결코 장난이 아니라는 뜻이다. 50~60년대의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어 본 세대들은 가난이 무엇이고 그때 그 시절의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겪었으니 잘 안다. 먹을 것이 없다 보니 살아남기 위한 민초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묘사한 글에서 초근목피라도 구하려고 헤매는 흰옷 사람들 때문에 산천이 “하얗게 변했다.”고 했다. 영양가라곤 아무것도 없는 풀뿌리, 나무껍질로 배를 채웠으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배만 볼록 튀어나온 모습이 목불인견이라고도 했다. 내전을 겪고 있는 지금의 소말리아나 우간다의 난민을 연상하면 그때 우리의 참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것이 불과 40년 전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하면 지금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제 강점기 내내 씨를 말리는 수탈을 당하다가 그나마 해방을 맞았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일어난 동족상잔으로 국토가 몽땅 거덜이 났으니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던 탓이다. 그래도 우리 민족은 잡초처럼 분연히 일어났다. 세계 그 어느 민족도 따르지 못하는 경제부흥을 일구었다고, 라인 강의 기적을 일구었다는 독일 사람들조차 놀랐다고 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초일류로 거듭나겠다며 나아가고 있다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가슴앓이를 하면서 아파해야 하는 문제들이 산적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때 허기라도 면하고자 마다하지 않았던 힘들고 어려운 작업장들은 모두가 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어렵고, 더럽고 위험하다는 소위 3D업종으로 분류되던 제조, 건설업분야는 상당수가 아시아의 저개발 국가 노동자들이 차지한 것이다. 빼앗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넘겨주었다는 뜻이다. 오늘의 젊은 세대를 키워 낸 부모들은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행복으로 알았다. 그리고 내 자식만큼은 이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하겠다고 오직 대학에 밀어 넣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랬더니 지금은 대졸자들이 넘쳐나게 되고, 학력에 걸맞지 않은 자리는 회피하면서 취업난이라는 묘한 사회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의 여파로 모두들 살기가 어렵다고 야단들이다. 그런데 그 살기 어렵다는 내용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옛날에는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영양소를 얻기조차 어려워서 사느냐 죽느냐로 고심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떵떵거리며 폼 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상대적 빈곤감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한 때 내란이 일어나서 곧 무너질 것처럼 얘기하며 천문학적인 통일 분담금 운운하던, 그 어렵다는 북한이 무너지지 않고 지금도 안하무인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상부 권력계층을 제외한 국민들 대다수가 다 같이 못사니 상대적인 비교 꺼리나 박탈감이 없기 때문이란다. 예전엔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어렵고 힘들 때는 서로 잘났다고 할 건더기도 없으니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때는 지금 같은 불만은 훨씬 덜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의 방글라데시 같이 세계 최빈국이면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것처럼. 힘들 때일수록 사람의 정은 더욱 돈독해진다고 한다. 그래선지 그땐 서로를 위로하며 적은 것이라도 나누어 먹고, 도우며 인정 있게 살았는데, 경제부흥으로 소득이 많아지고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차이가 벌어지면서 비교의식이 확산하다 보니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생활의 질을 말할 때는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물질의 많고 적음에 가치를 두는 경우가 많다. 취업대란이라는 말도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갖고 있는 욕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욕심의 정도가 정해진다는 논리에 비춰보면 해답이 보이니 말이다.

2009-09-17

만약에

최재영 서양화가역사에서는 만약에라는 말이 결코 통할 수 없다고 한다. 만약에 삼국을 고구려가 통일 했더라면 지금의 북경을 포함한 중국의 절반이 우리국토가 되었을 텐데, 6·25 때 맥아더가 좀 더 북진을 했더라면 지금의 남북한은 없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어땠을 텐데, 등등 과거를 뒤돌아보고 회한에 젖어보는 것은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각자의 인생길에서도 이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경우가 있을까? 그러나 지나온 과거를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고 보니 어디까지나 반면거울로 삼을 뿐이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어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갈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상상이 한창 유행한 때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한 국가의 떠올리기 싫은 역사는 물론이고 각자가 살아온 인생길에서 떠올리기 싫은 과거는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은 염원을 풀 수 있지 않을까하는 끝없는 상상에 즐거워 한 적도 있었다. “잘살아보세” 라는 새마을 노래가 온 산천을 진동했던 때가 70년대 벽두다. 경제개발의 기치가 하늘을 찔렀고, 경제부흥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외치며 온 국민을 거세게 독려하던 70년 후반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미술과를 나온 사람이 갈 곳이라 해봐야 교직 아니면 그다지 길이 없었던 때였지만 교직에는 별 흥미가 없었던 나는 같은 동기생과 광고사를 하나 만들어 동업을 해 보자고 뜻을 모았다. 그때는 광고사라 해봐야 간판집이 고작이었던 시절이라 광고사를 만들어 보자고 한 것은 매우 앞서가는 엉뚱한 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광고조형물은 물론이고 메스미디어나 인터넷을 통한 광고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광고업체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고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만 해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분명히 이러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여긴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어느 날 고향엘 내려가서 아버지께 약간의 사무실 임대비만이라도 대 주시면 힘껏 한번 해보겠다고 말씀 드렸다. 결과는 예측한데로 단호한 거절 말씀과 “네 자리는 다 마련해 두었으니 어디에 누굴 찾아가라.” 엄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아버지의 강권으로 본의 아니게 어느 사립 고등학교의 교사로 처음 교직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80년대 초반 교직에 있어본 분이라면 당시 선생님들이 얼마나 홀대를 받으며 하찮은 직업으로 분류되었는지를 잘 알 것이다. 얼마나 인기가 없는 직업이었는지 “멀쩡한 사람이 선생질 하네”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하늘에 별 따기 보다 더 어려운 것이 교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니 세상 참 많이도 변했다. 그래서 시작한 나의 교직생활은 숱한 갈등을 안겨주기도 했다. 같이 교직에 입문했던 많은 동료들, 특히 공과 계통이나 상경계통 출신들은 학기 중에도 월급 많이 준다는 곳이 나타났다며 사표를 쓰고 나가버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지금 나가면 학생들은 어떡하라고, 학기만이라도 마저 채워주고 나가달라.”는 교장의 애원을 몰라라 뿌리치고 떠나가는 선생님들을 볼 때마다 나는 무능하여 남아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학교운영의 최 일선에 있어야할 교감은 도중에 빠져나간 교사를 채우느라 전국의 대학을 돌면서 일 년 내내 동분서주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가장 먼저 도마 위 고기가 된 것이 교육정책이다. 그렇다보니 교직사회도 엄청 많이 달라졌다. 때로는 내가 왜 이 길에 들었든가? 후회도 했고, 때로는 보람도 느끼며 그렇게 힘든 길을 걸어온 날들도 벌써 30년의 세월이 지났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 들어 많은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직종의 하나로 교직을 꼽는다고 한다. 아직도 다른 직종에 비해서 보수가 많지는 않지만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매력이 없는데도 말이다. 모험이나 굴곡을 싫어하는 요즘 젊은이들 눈에는 그렇게 비치는 모양이다. 드러나 보이는 겉모습보다는 깊은 사명감이 없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분야가 교직이다. 돌아보면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쥐꼬리 같은 사명감이라도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 자리를 버틸 수 있었다는 자위를 하면서.

2009-09-10

저출산과 인간의 가치

강희룡 서예가인구감소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얼마 전 둘째 아이부터 보육비 전액을 부담해준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인간의 노동력이 경제활동 수단의 전부였던 원시수렵 또는 원시 농경사회에선 자식은 핵심 자산이었다. 이로 인해 과거시대는 다산(多産)이 부와 번영을 약속하던 시대였다. 고대의 암각화나 우리 지방의 칠포리 암각화 역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고대의 미술로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우리는 과거 세대에 비해 새로운 사회구성원을 생산하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피임시대`를 살고 있다. 20세기의 경제발전을 이뤄낸 선진국에게 지금의 저 출산율은 이제 사회적 현상을 넘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렇듯 아이를 덜 낳는 정확한 이유에 대해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Fortune)`은 얼마 전 상품가치와 비용대비 수익이라는 경제 원리를 들어 원인 분석을 내놓았다. 예전의 출산은 높은 상품가치(아이의 가치)에 비해 투입 비용도 적었다. 일정량의 곡물과 주거, 의복 등의 요소만 투입하면 그뿐이었다. 실로 비용대비 수익성이 높았던 것이 섹스와 출산이었다고 `포천`은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육아의 수익성은 한국전쟁 이후 부부의 재결합으로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가져왔으며 육아에 드는 비용은 여전히 제한적이었고 기대 수익은 높았다. 이렇게 증가된 인구는 경제개발을 기조로 한 60년대와 70년대의 국가산업발전에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과 육아성장에 드는 고비용으로 인해 육아의 수익률 곡선은 급격히 꺾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미국사회만 해도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재학 자녀를 둔 가계는 학비로 허리가 휠 정도다. 여기에다 남들 하는 만큼 사교육 흉내를 내는 데 드는 비용 부담 역시 만만치 않다. 대학을 보냈다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힘들게 대학을 졸업했지만 좁은 취업문으로 아이를 기다리는 것은 냉혹한 현실뿐이다. 과연 `당신 아이의 순자산 가치는 얼마인가. 양육비용 대비 수익성은 얼마인가.` 라는 질문은 인간성을 떠나 사람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는 비인간적 논리로만 비치나 포천은 진실은 늘 불편함 속에 있다고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며칠 전 생후 3일 된 아기가 통신매체에서 부모와 중개인을 통해 거래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부부는 결혼식도 올리지 않는데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아이를 키울 여건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병원비 마련과 입양 절차를 알아보면서 인터넷에 입양 관련 질문을 올린 이 부부는 중개인과 연락이 닿았고, 20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생후 3일 된 자신의 아이를 직접 건네줬다. 하지만 이 중개인은 약 1시간 뒤 이 아이를 역시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사람에게 460여만 원에 다시 넘겨졌다. 어려운 경제력을 이유로 자식을 팔고 사는 사회까지 온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입양을 꺼리고 혈연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 왜곡된 물질만능주의 등이 한꺼번에 맞물려 생긴 결과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아이를 낳은 뒤 키울 수 없어 유기하거나 죽이는 부모도 있는데 차라리 입양을 시키는 것이 낫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돈을 받고 아이를 넘기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동은 상품이나 거래의 대상이 아니며 의사 표현이 어려울 뿐 완성된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팔아 버리는 비인륜적인 행위는 결국 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 출산율 증가를 위한 정부의 금전적인 지원도 좋지만 유아부터 성인교육까지 전인교육을 바탕으로 한 올바른 교육목표로 저비용 고효율의 교육결과를 창출할 때 이러한 사회병리현상은 자연 해소될 것이다.

2009-09-10

개하고 뛰지 마라

개의 생애에서 없었으면 하는 계절이 여름일 게다. 사람과 친근해서 가장 사랑을 받는 짐승이면서 여름 복날이면 혹독한 수난을 당해야 하는 개의 운명이 측은하다. 우리말 가운데는 욕지거리가 유난히 많다는 점이 조금은 특별하다. 특히 영어권에 비하면 욕설의 가지 수는 수배가 된다고 하니 부끄러운 것인지 그만큼 표현의 다양성으로 보아 자랑으로 여겨야 하는지 아리송하다. 그것은 우리의 어휘가 그만큼 고차원적이라는 것에 기인한다면 너무 자랑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처럼 표현의 다양성 덕분으로 욕지거리의 가지 수가 많아진 것은 틀림없다. 그중에서 개에 빗댄 욕지거리가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은 특이한 현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서도 개를 비하시킨 구절이 여러 군데 보인다.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삼상17)” 인간과 더불어 사는 동물 가운데는 소, 돼지, 말, 염소, 닭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이처럼 반려동물 가운데 가장 친숙한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유난스럽게 욕지거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유독 개가 욕지거리의 대명사로 통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어렵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많이 쓰는 욕설 가운데 `개새끼`가 단연 으뜸이다. 길거리에서 또래들이 어울려 있는 곳을 지나치다 보면 틀림없이 듣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욕설이다. 우리말에는 나이나 장소, 상황에 따라서는 같은 새끼라도 그 어감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새끼를 갖다 붙이면 욕설이 되기도 하고 애정 표현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유독 개새끼만큼은 어떤 상황에 쓰더라도 욕지거리로 통하게 되는 속성을 보인다. 사람과 가장 친숙한 동물이고 보니 개에 얽힌 얘기도 많다. 경북 구미시 해평면 신양리에는 1994년에 경북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된 의구총(義狗塚)이 있다. 의로운 개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 의구총이 생겨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그 옛날에 이 마을에 김성발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충직한 누렁이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개를 데리고 출타했다가 모처럼 만난 지인들과 기울인 한잔 술에 취기가 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풀밭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잠든 그 풀밭 근방에 불이 나고 말았다. 잠든 주인의 곁을 지키고 있던 누렁이는 위험을 알아차리고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하여 깨웠으나 만취한 주인은 일어날 줄을 모른다. 그러자 누렁이는 한참이나 떨어진 낙동강까지 뛰어가 강물에 풍덩 뛰어들어 온몸을 물에 적셔서 주인의 주변 가까이 타들어 온 불을 끄기 시작했다. 이를 수 없이 반복했다. 늦게야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상황과 온몸이 그을리고 탈진하여 죽어 있는 누렁이를 보고서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하고 그 주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누렁이의 시신을 고향마을 뒷산에 묻어주고 그곳을 구분방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 현종6년(1665)에 선산부사 안응창이 이 얘기를 전해 듣고 미물인 개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은 어떻게 의리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의구전(義狗傳)을 지었고, 훗날에는 의구도가 그려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1993년 개발 때문에 지금의 위치로 이장하고 말끔히 정비하여 의구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과 함께 오늘날까지도 의에 대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 이처럼 개란 짐승은 충직하고 의리를 잘 지키는 것으로 인간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욕지거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아무래도 아이러니다. 개에 관한 이런 조크도 있다. “개하고 뛰지 마라. 개랑 뛰었다가 지면 개만도 못한 놈, 비기면 개 같은 놈, 이기면 개보다 더 독한 놈이 된다.” 피할 건 피하라는 세상 이치를 개라는 매개체에 비유한 조크지만 단순한 우스개로 여길 수가 없어 보인다.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데…. 서로가 잘났다고 싸움질해대는 인간사가 개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자못 궁금해진다.

2009-09-03

청일 간도협약은 무효다

간도(間島)는 백두산 북쪽의 만주 지역 일대로 서간도와 동간도로 구분되며 간도라 하면 우리가 흔히`연변`이라고 부르는 중국 길림성 동쪽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지역인 북간도를 가리킨다. 지형적으로 볼 때 간도는 남서쪽의 백두산을 주봉으로 장백산맥이 자리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이 지역은 원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이쪽으로 뻗어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 멸망 후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으나 여진족은 농경보다 유목·수렵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 비옥한 지역이 오랫동안 개척되지 못하였고 조선 후기 조선의 유민(流民)들이 들어가 이 불모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간도의 영유권 분쟁은 만주에 청조가 세워진 후 백두산을 중심으로 조선과 청나라 간에 국경선의 시비가 계속되다 숙종 38년(1712)에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다. 이 정계비 내용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하여 이 분수령에 비를 세운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토문강`이 어느 강인지를 두고 훗날 두 나라의 시빗거리가 된 것이다. 처음 정계비 건립 후 간도 귀속 문제가 별 탈이 없었으나 19세기 중엽에 들어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면서 청나라의 봉금과 조선의 월경 금지가 소홀하자 함경도민들의 두만강 월경 농사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야기되었다. 청조와 조선 사이에 외교 분쟁이 첨예화되면서 조선은 백두산정계비에 의거하여`토문강`이 송화강 상류에 있는 지류인 토문강(해란강)을 가리키므로 간도는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으며, 청나라는 두만강이 `토문강`이라고 억지 주장했다. 그 후 1885년부터 1888년에 걸쳐 청과 조선 간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었다. 토문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송화강의 지류로서 두만강과 하등 관계가 없고 그들이 건립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은 분명히 두만강과는 별개의 강으로 토문과 두만강 동일설은 억지주장인 것이다. 17년 후 대륙진출이 꿈이던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대한제국에 대한 장악을 강화하고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여 갔다. 이로 인하여 1906년 10월에 대한제국은 통감으로 와 있는 이등박문에게 공문을 보내어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의 보호를 의뢰하게 되었고 일본은 1907년 8월 간도에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는 한편 북경주재 일본공사를 통하여 청과의 간도 영유권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도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주장하였고 이를 위하여 일본이 제시한 근거는 지금 보아도 상당히 치밀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이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고 주장한 데는 역사적인 사실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그들의 대륙침략계획에 대한제국을 합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확정될 경우 일본은 대한제국의 합병만으로 간도도 당연히 수중에 넣게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09년 일본은 대륙침략정책을 수정하여 교묘한 계략으로 간도가 청의 영토인 것으로 하는 간도협약을 체결하였다. 소위 `동삼성육안`이라는 것으로 흔히 만주지방이라고 하는 청나라의 동부의 3개 성, 즉 흑룡강성, 길림성, 봉천성(요녕성)에 관한 6개의 안이라는 것으로 일본이 안동과 봉천간의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우리 땅 간도가 청의 영토라고 인정해주는 협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현재 중국과의 국경선인 양 되어 있는 두만강-백두산-압록강 선의 국경형태가 형성된 것도 이 간도협약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 협약이 법적으로 유효한 국경합의라면 두 국가가 새로이 유효한 합의를 변경하지 않는 한 최종적이며 영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간도협약이 유효한 국경합의가 아니라면 이 협약에 기초하여 확정된 현재의 국경선은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고, 따라서 원칙적으로 그 이전에 유효하게 존재했던 국경선이 한중 양국의 국경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탈한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주체국인 우리의 의견은 배제된 채 체결된 을사늑약과 청일 간도협약으로 억울하게 100년 가까이 중국 땅이 되어버린 간도는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이 한 때 지배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감상적 민족주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국제법은 100년을 시효로 한다지만 불평등 조약에 의거하여 점유한 영토나 협약은 무효이며 국제법의 관점에서 볼 때도 간도가 우리나라의 영토라는 법적 판단에 의한 것이다. 며칠 후 9월4일이면 간도를 빼앗긴 지 100년이 된다. 이제 국민 모두가 민족정기를 한데 모아 간도를 되찾을 촛불을 국제사회에 높게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2009-08-31

작가와 화랑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인데

`순망치한`이란 말이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이다. 이해관계가 밀접한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그 영향을 받아 온전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의리를 지키고, 서로 협력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임을 깨우치게 하는 말이다. 세상에는 이런 순망치한의 관계가 아닌 경우가 그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이런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문제다. 특히 미술계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많아서, 순수를 생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작가들이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대구에서 개인전을 가질 때다. 두 사람의 화랑 사장이 우리나라에서 꽤 알려진 어느 작가의 작품을 앞에 놓고 고객에게 얼마를 불러야 할지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그림을 사고파는 것이 그들의 업이고 보니 상품가치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수준 낮은 소비자에게 왜 이만한 값이 매겨진 것인가? 그 이유를 찾는 모습이었다. 그 작품은 물방울 작가로 잘 알려진 작가의 초기작품이었다. 그들이 가격을 매기기 위한 조건들이 조금은 황당했다. 화면 전체에 그려진 물방울 개수를 일일이 헤아리고, 물방울 각각의 크기와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를 커다란 돋보기로 비춰보면서 살피는 것이었다. 캔버스 천은 무엇이고, 물감은 어떤 제품이며 붓 터치는 어떤 방향으로 나있는지까지도 모두가 다 가격산출의 근거가 된다는 것. 이들에게는 작품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매기는 데 필요한 요소들만을 후벼 파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질 때도 역시 똑같은 현상을 목격했다. 나는 1년에 수차례씩 그룹전이나 부스 전 참여를 권유받는다. 내막을 잘 몰랐던 초창기에 서울의 어느 기획사가 한다는 부스 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부스 대관료와 팸플릿 비로 수십만 원을 지불하고 많은 운송비를 들여서 열흘 동안 전시를 했다. 처음 주최 측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조건들로 보면 중앙화단에 작가를 알리는 홍보 효과도 클 뿐만 아니라 작품도 제법 매각된다는 말이 가난한 작가들에게는 달콤한 꿀맛이라고 여겼다. 순진하게시리 오직 그들의 말만 믿고 참여를 했지만 그것이 그들의 장삿속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안 것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주최 측에서 이미 띄우기로 약정된 작가의 들러리로 지방의 작가들을 초대한다는 형식을 빌려, 실속을 챙기면서 무슨 선심이나 쓰는 양 순진한 지방작가들을 꼬드긴 것이다. 전시 중 마침내 옆에 있었던 작가의 소품 한 점이 관람 온 사람에게 우연히 팔리게 되었다. 그러자 주최 측에서 처음 제시했던 작품매각 조건을 무시하고 5:5로 반을 내 놓으라고 했다. 그들이 처음 제시한 조건은 3:7로 매각 시 작가가 70%를 가져간다는 것이었는데 온갖 구실을 붙여서 기어코 절반을 갈취한 것이다. 그 일을 목격한 이후에도 별별 달콤한 제안의 전시회에 출품했다가 작품이 팔렸다는 연락만 받고 결국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사기를 당한 예도 더러 보았다. 그 후론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출품만 해줘도 된다는 제의를 거절한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법적 대응으로 맞서면 될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복잡한 문제에 얽히는 것을 싫어하는 작가들의 심리를 이용한 장사치들의 고단수 계산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품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작가를 발견하면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서 소위 전속작가라는 올가미를 씌운다. 그리고 잘 팔릴 수 있는 그림을 아예 주문식으로 강요한다. 한 달에 몇 호이상이라는 규정으로 작가의 고혈을 빨아대는 것이다. 가난한 작가에겐 처음에는 만지기 힘든 돈이었으니 그들의 요구도 감지덕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함정이었음을 깨닫고 나면 이미 건강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다. 그렇게 그려진 작품은 세월 지나면 그림일 뿐이지 작품은 되지 못하니, 결국 작가는 자신의 무덤을 파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술을 알고 예술가를 인정하며 순망치한의 관계로 상생할 줄 아는 화랑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9-08-27

미인박색(美人薄色)?

`미인박복`이란 단어는 있어도 `미인박색`이라는 말은 없다. 여자의 미모가 너무 뛰어나면 반드시 시기하는 잡귀가 있어, 갖은 수단으로 괴롭히고 끝내는 불행을 자초하게 만든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아름답다 보니 추하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기가 막혀도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며칠 전 몹쓸 꼴을 목격하곤 이게 바로 말도 안 되는 기 막히는 일이구나 여겼다. 가깝게 지내는 이웃 부부와 시내 어느 회 식당에 점심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날도 그 식당에는 제법 많은 손님들이 붐비고 있었고, 약간 떨어진 저만치 옆자리엔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회 접시를 중간에 두고 연신 소주를 들이키며 무슨 심각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눈길이 간 것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뛰어난 그 여자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신경을 건드린 탓이다. 벽면에 붉은 색깔로 커다랗게 붙여놓은 금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로 연신 뿜어대는 담배연기가 특급 골초 수준이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줄담배를 피워대는 그 여자뿐이었고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태도가 못내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가 담배연기가 하필 우리 쪽으로 자꾸 몰려오면서 매캐한 냄새를 풍기니 같이 간 이웃 아주머니가 아무래도 너무 심하다고 여겼든지 그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아주머니 왜 쳐다봐요?” 하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당황한 건 이쪽 아주머니 “아아니! 거길 본 게 아니에요.” 그리고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른 무슨 말이 있었다면 물고 뜯기라도 해 보겠다는 서슬에 이웃 아주머니가 당황한 것이다. 나이로 봐서도 딸내미쯤 돼 보이는 그 젊은 여자의 당돌한 태도는 아무리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한계에 부딪힌다. 바로 이를 두고 기가 막힌다는 거다. 젊은 여자의 순간적인 태도로 보아 전혀 남을 의식한다거나 아래위를 알아 처신하는 예의는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 젊은 아가씨의 당돌한 행동을 보면서 이것이 오늘날 한국사회가 처한 현실이라고 빗댄다면 너무 무리한 표현일까? 요즘 길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아가씨들을 보노라면 미인 아닌 사람이 없다. 한국인의 유전자가 어느 날 갑자기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인지 유독 아가씨들의 외모가 엄청나게 예뻐졌다. 황인종 가운데서 가장 이목구비가 잘 생기고 피부가 하예서 어딜 가도 미인으로 대접받는 한국인들이라곤 하지만 달라져도 갑자기 너무 많이 달라졌다. 한국 의술 가운데 선진국을 뺨치는 것이 성형외과라고 한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성형외과는 연중 내내 예약이 밀린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의사의 성형기술은 소문나 있다는 것이다. 소문답게 너무 완벽하게 뜯어고친 탓인지는 모르지만 다들 미스코리아에 나가도 손색이 없는 미모들이 거리를 활보하니 보기는 좋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세태고 보니 너도나도 외모 가꾸기에 혈안이 된 듯하다. 올여름에도 많은 여대생들이 성형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그런데 앞모습은 한결같이 근사하고 발랄해 미스코리아를 뺨치는데 뒷모습이 개판이다. 껍데기는 날로, 날로 예뻐지고 있는데 마음까지도 따라가 준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한 때 공전의 대 히트를 했던 유행가 가사가 왜 이다지도 아쉬워지는지 모르겠다. 우먼파워라는 말이 있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의 능력이 돋보여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여성들의 능력이 인정을 받고 사회발전을 위해서 효율적으로 발휘될 수 있을 때 진정한 우먼파워가 되는 것이다. 외형적인 아름다움만 쫓아가며, 속마음은 사회규범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여성은 추하다. 앞모습 못지않게 뒷모습도 아름다운, 진정 미인박색이 아닌 여성이 아름답다.

2009-08-20

과학과 윤리

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는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해 전투가 끝났으나 일본은 필리핀에서 연합군에 맞서 싸우는 등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중대한 결심을 내린다. 그 결과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사상 최초의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으로 불리는 2개 원자폭탄이 각각 투하된 것이다. 이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20여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고 두 도시를 거의 완파시켰으며 8월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미국 정부가 2차대전 중 비밀리에 추진한 암호명 `맨해튼 계획`의 결과였던 것이다. 핵폭탄 제조의 발단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할 것을 우려한 아인슈타인이 1939년 8월 미국 과학자 질라드와 위그너의 권유로 당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핵무기개발 촉구 편지가 도화선이 되었다. 이 핵개발의 중심에는 당시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물리학자 율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함께 연구에 투입된 여러 과학자들과 핵폭탄의 핵심이 되는 기술들을 개발하여 성공을 거두면서 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데 한몫을 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양분된 국제사회는 1949년 8월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을 계기로 미소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당황한 미국 정부는 소련의 폭탄을 능가하는 슈퍼폭탄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핵무기 연구를 계속 지시하게 하였다. 핵무기의 가공할 결과에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당시 오펜하이머는 슈퍼핵무기 개발을 지시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핵무기의 개발을 금지하자는 그의 제안은 반공주의가 극성인 19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라는 마녀사냥에 휩싸이게 된다. 53년 12월 그에 관한 적대적인 내용을 담은 군 보안보고서가 발표되어 과거 잠깐의 급진적인 공산주의 활동 경력, 소련 간첩 명단 제출의 지연, 수소폭탄 제조 반대 등과 연루되었다는 명목으로 기소당했다. 보안 청문회는 오펜하이머의 모반혐의가 무죄임을 발표했으나 그의 군 기밀에 대한 접근을 금지시켰다. 이후 오펜하이머는1966년 프린스턴을 퇴직하고 다음해에 후두암으로 죽을 때까지 미국 정보부의 감시하에 시련을 겪는 불우한 삶이었으나 과학자의 역할을 열정적으로 다하게 된다. 오늘날 세계국가들은 군사적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여 국제사회에서 핵무기보유국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북한도 오랜 세월을 핵무기 개발로 세계에서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위협하는 미사일 시위와 핵실험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핵개발은 과학기술의 결정체이지만 무기로 변하는 순간 엄청난 규모의 자연과 생명을 파괴할 수 있다. 이렇듯 편리하고 훌륭한 과학도 그 양면성으로 인해 때론 우리에게 치명적이 될 수 있다. 무분별한 과학기술의 개발과 사용은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있으며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보유를 과시할지 모르지만 동족의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다. 6자회담이 잘되고 한반도에서 경제적 문화적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오랜 세월 동안 갈라졌던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첫발이 아닌가. 새로운 원리와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과학이지만 과학 그 자체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와 별개라는 이른바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관념은 퇴색되고 있다. 핵무기나 화학물질의 개발이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자연과 인간에 큰 영향을 주자 과학연구도 윤리적 행위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과학이 윤리에 의해 통제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강하다. 생명공학의 줄기세포 연구로 서울대 황우석의 `난자 의혹`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현대과학 연구에 있어서 윤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렇듯 오늘날 과학기술 개발과 사회적 윤리관의 제어는 현대인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인간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전제를 앞세운 과학과 생명의 존엄성을 기조로 한 윤리관은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며 이끌어가야 하는 두 개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2009-08-18

어리석은 동물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생이불유(生而不有)위이불시(爲而不恃)장이부재(長而不宰)시위현덕(是謂玄德) `낳았으되 소유하지 아니하고, 행하였으되 기대하지 아니하며, 길렀으되 마음대로 부리지 아니하니, 이를 일러 그윽한 덕이라 한다.`” 이 말을 학자들에 따라서는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인 뜻은 자기 소유라고 여겨서 가지려하지 말며, 자기가 이룬 것이라고 해서 대가를 바라지 말고, 자기가 키웠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 마음이 참 도를 깨우치는 덕스러움이다. 라고 해석하면 어떨까? 인간이 놓지 못하는 과욕을 스스로 깨우치고 겸양의 미덕을 쌓으라는 뜻으로 해석해 봄직도 하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절대로 자기의 도를 넘어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주어진 대로 먹고 마시며 거처하고 생육하되 어디까지나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이 순리를 저버리고 과욕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스스로가 지옥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끝없이 욕심만을 쫓아가는, 만물의 영장이라서 가장 지혜롭다는 착각에 빠진 어리석은 동물이 인간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정치권의 모 인사께서 끗발 세다는 검찰총장자리를 준다기에 옳다구나 하고 덥석 물었다가 지금까지 분에 넘치는 욕심 덩어리들이 줄줄이 엮이어 나오면서 개망신을 당했다. 꼭 갓 삶은 무를 한입에 덥석 물었다가 이빨이 몽땅 빠진 똥개 꼴이 된 것이다. 인사청문회다 뭐다 해서 뒷구멍 파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텐데 그만한 판단도 없이, 준다는 자리에만 급급하다 보니 그만 얼이 빠진 것이다. 나라의 법을 올바르게 관리해야 하는 막강한 자리를 뒷구멍에 구린내가 진동하는 이런 인사가 그 자리를 차지했더라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노자의 이 말을 자식을 거느린 만천하 부모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쯤으로 보면 또한 어떨까? 대부분의 부모는 내가 낳은 자식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소유이니 양육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길렀으니 기대감도 엄청나다. 지금까지 수고하여 키웠으니 당연히 부모의 말씀도 잘 따라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모든 부모들이 바라는 기대치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낳았으되 결코 내게 속해있는 한 부분으로 여기지 말며, 길렀으되 기대하지 말며, 이를 다 행했으니 내 뜻대로 부릴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현 정부 초기 때 영어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영어조기교육 붐이 겨울바람에 이는 산불 같았다. 무턱대고 자녀교육이 유행에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름대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다고 한다. 언어에 뛰어난 소질을 타고 난 아이는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빨리 언어를 익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외교관이나 국제무역 등 외국어를 발판으로 하는 분야에 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데도 내 아이의 소질은 안중에도 없이 너나 할 것 없이 유행을 쫓아가는 꼴이다. 예능이나 체육에 소질이 있건 없건 유명인물이 나왔다면 그쪽으로 또 우르르 몰려간다. 북풍 한파에 이리저리 휘몰리는 물결 같은 형세가 우리나라 엄마들의 교육관이다. 아이의 인격을 바르게 키우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오직 유명세와 많은 수입이 보장된다는 것에 아이의 장래를 맡기려 한다. 이러니 전인적 인격을 갖춘 자녀로 양육하기란 어렵다. 거기다가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까지도 덤으로 얹어서 아이들을 내몰다 보니 아침부터 파김치가 된 아이들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야 하는 부분이 지덕체를 조화롭게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지만 강조했으니 머리만 비대했지 생각이 따르지를 못한다. 예의도 없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가 하는 염려가 앞선다. 문득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 오래 전에 강조했던 노자의 염려가 오늘 우리들이 진정으로 고민해 봐야 할 화두로 다가옴을 느끼면서.

2009-08-13

어머니의 안티카페

요즘 인터넷에선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10대 여중생이 개설한 `엄마안티카페`에 실린 글이다. `자식을 상처 입혀 괴롭히는 부모가 부모인가. 우린 너희의 노예가 아니야` 라는 주로 자신의 어머니나 가족을 욕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이 카페의 글을 보고 네티즌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한다. 이 카페 내용에 찬반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양편에서 공감하는 편은 패륜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아동폭력으로 학대당하며 자란 아이라면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안티카페를 개설한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공감했고, 어떤 이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학업성적=사회계급이라는 등식이 아이들을 입시 악몽으로 내몰고 있다며 교육 현실을 비판했다. 반대의견은 대체로 패륜의 극치다. 인륜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 카페 개설자는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며, 다음에 아이 낳아보면 정신 차릴 것이라며 강한 질타를 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기르는 숭고한 뜻이 담긴 `어머니`라는 칭호는 그 깊은 의미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실종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인간관계속에서 살다 죽는다. 때문에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형성시키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좌절하거나 고민하게 되고 그로 인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된다. 신속성과 다양성이 요구되는 현대인에게 있어 자신의 상승된 신분과 역할의 요구에 따른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요구하는 데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지식이다. 이 지식주입의 틀을 교육제도로 볼 때 이 제도가 완성된 인격체에 미치는 역할은 매우 중대하다고 본다. 한국교육에서 주입식교육이나 강압적 교육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우리 민족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교육방식이 다음 세대로 연결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결국 이 악순환은 반복되어 명문대학 입시용으로 변절되면서 획일적인 주입식교육이 경쟁력만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의 의식 속에는 선생님의 감시하에 우리는 `학교라는 감옥`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명문대를 위해 `자나깨나 공부 공부`하는 부모의 강력한 주문에 아이들은 반복적이고 원하지 않는 강박적 사고로 인해 정신적으로 불안장애의 하나인 강박장애의 정신질환을 본인도 모르게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안티카페를 개설한 학생은 내면의 보이지 않는 벽이 이미 자신과 가족을 비롯한 바깥세상을 갈라놓은 것이다. 도덕과 윤리가 결여된 단편적인 지식만 있는 사회는 큰 화를 불러오거나 그 민족 자체가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다. 도덕과 윤리를 갖춘 완전한 인격체로의 성장은 사랑을 기초로 한 가정교육에서 시작되므로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성이 상실되고 원초적인 부모 자식의 관계가 파괴된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를 잃어버린 사회 아닌가. 공자가 13년간 천하를 주유할 때 진과 채나라에서 함께 고생하던 공문사과(孔門四科: 덕행, 언어, 정사, 문학)에서 뛰어난 열 명의 제자(孔門十哲)중 덕행으로 뛰어났던 민자건(閔子騫)은 본명이 손(損)으로 자(字)가 자건이다.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보이는 내용으로 민자건(閔子騫)의 어머니가 죽은 뒤 아버지가 재취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하루는 민자건이 아버지를 위해 수레를 몰다가 말고삐를 놓치자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아보니 손이 얼어 얼음장 같았다. 옷이 얇고 헤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가 후처 소생의 두 아들을 불러 그들의 옷을 만져보니 두툼하고 따스했다. 이에 아버지는 화가 나서 후처와 이절(離絶)하려고 했다. 하지만 민자건은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만 홑옷을 입지만 어머니가 떠나시면 세 아들이 모두 추위에 떨게 됩니다`라고 말씀드리며 부탁을 청했다. 이에 아버지가 감동하여 이절하지 않았다 전해진다. `논어 선진편`에 공자가 말하기를 `효성스럽구나, 민자건이여 남이 그의 부모나 형제의 말만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없구나`라는 기록을 보아 그의 효심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선조들은 시경을 읽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슬프고 슬프구나 부모님이시여! 나를 낳으시느라 애쓰고 수고하셨도다. 그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하나 하늘같이 다함이 없구나`(哀哀父母, 生我?勞, 欲報深恩, 昊天罔極)라는 대목에 이르면 책을 덮어 놓고 목 놓아 울었다 한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에서 우러나는 행동으로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오늘날 이처럼 부모님 생전에 이런 구절을 읊으며 눈물 흘릴 자식이 몇이나 되랴.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2009-08-07

포항미술관 개관을 기다리며

스페인에는 빌바오라는 도시가 있다. 15세기 이래 스페인 최고의 철강도시였지만 80년대 제철산업의 쇠퇴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으나 `문화산업부흥`이라는 기치 아래 바스크 자치의회가 구겐하임 빌바오미술관을 세우면서 문화관광지로 기사회생했다. 20년 전 미국 워싱턴미술관을 방문했을 때다. 1941년에 개관되었다는 미술관의 크기에 놀랐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을 비롯하여 르누아르, 피카소 등 12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전 유럽의 회화작품과 미국 현대미술 등 명작만 3만 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어 그 질과 양에 놀랐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오히려 보기 힘든 대작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경제력을 실감하는 곳이기도 했다. 2차 대전 후 한창 어려울 때 유럽 여러 나라들이 팔아먹은 미술품을 보기 위해 그들이 도리어 워싱턴미술관을 찾고 있다고 했다. 또한 소장품들 모두가 꼭 어제 완성한 것 같이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보존 관리하고 있는 것도 부러운 일이었다. 미술관 앞의 잘 꾸며진 넓은 공원에는 연일 수많은 관람객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미연방수도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특징 없는 이 도시를 가장 미국다운 도시로 만든 것은 바로 이 미술관 때문이라는 설명이 꽤 설득력 있어 보였다. 그때 나는 포항에도 워싱턴미술관 백분의 일만 되는 미술관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고 부러워했다. 그랬던 그 바람대로 비록 크기는 훨씬 못 미치지만 11월 하순이면 포항 시립미술관이 개관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자랑스럽다. 국내에서는 도청소재지가 아닌 중소도시에 시립미술관이 개관되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한다. 진정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급변하는 시대상에 부응하는 빠른 행보라고 할 수 있다. 이곳 포항은 철강으로 성장하였지만 2천 년대에 접어들면서 언제까지나 철강이란 단일브랜드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시대적 변화가 예고되었다. 철강도시로서 진전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조짐들이 급속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포항발전의 주체였던 포스코가 매년 구조조정으로 직원이 감소되면서 전체적으로 시 인구가 줄기 시작했고, 포항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급조된 느낌의 도시인상 때문에 수십 년을 살았으면서도 더 이상 눌러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 인구 감소로 이어졌다. 문화적 향수를 충족시켜 진정 살고 싶은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고, 이러한 자각들이 포항미술관 건립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포항은 이제 철강도시라는 단일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산업도시로 전환되는 기로에 섰다. 영일만 항에 이어 배후산업단지인 경제자유특구가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포항은 국제물류중심의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도약해 나갈 것이다. 거기에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새로운 관광도시로도 탈바꿈할 것이다. 이러한 위상에 어울리는 선진문화기반이 구축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주체들 가운데 포항미술관이 중심에 서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명이다. 이미 포항미술관을 이끌고 나갈 민간전문가 중심의 인적구성은 확보된 상태다. 그러나 완전한 민간주도형 운영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자율성을 갖고 독창성과 개성적인 미술관으로 위상정립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포항시가 충분히 검토하여 포항시의 복속기관이 아니라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 기관으로 과감하게 독립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볼 때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때 한반도의 중심이었고, 일본을 비롯한 세계로 뻗어나간 전진기지였다는 점에서 세계문화의 동향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여 문화수출의 구심점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앞으로 광역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해 갈 포항의 문화적 욕구를 충분히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시설을 확충해 가면서 운영요원들의 정보력과 효율적인 기획력 등이 조화를 이루어 21세기 해양문화의 새로운 발원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포항미술관의 역할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제 개관하는 포항 시립미술관이 지금은 비록 작은 규모지만 이 지역과 우리나라의 문화, 나아가 세계의 문화발전을 주도하지 못하리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앞으로 우리 시민들의 깊은 애정과 관심이 끊이지 않을 때 분명히 가능하리라 믿는다.

2009-08-06

민주주의와 위앙

전국시대 말기의 위나라 공족(公族) 출신인 위앙은 일찍부터 형명학(刑名學)에 조예가 깊었다. 위나라에 사관(仕官)하려 하였으나 받아주지 않아, 진나라로 가서 효공에게 채용되면서 부국강병의 계책을 세워 당시 보수파였으며 인의를 바탕으로 인치를 내세우던 유가(儒家)와 투쟁하면서 형법, 가족법, 토지법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후일 진 제국 성립의 기반을 세운다. 그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상(商)을 봉토로 받으면서 상앙이라 불렀다.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로서 법가(法家)의 원조(元祖)였으며 통일국가 형성기에 관한 귀중한 사료인 그의 저서 상군서(商君書)가 전해지고 있다. 위앙이 처음 진나라로 왔을 당시 진나라의 백성들이 엄청난 생활고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진효공에게 백성들의 어려운 상황을 거론 후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자 합리적인 법 체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신법을 반포한 후 처음부터 이 신법을 악법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례가 빈번한 보수적인 사회상황에서 개혁적인 신법을 따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수도의 남문에 긴 장대를 세워놓고서 누구든지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긴 사람에게 황금 열 덩어리를 준다고 명령했다. 귀족들과 정부에 대한 오랜 불신과 손 한번 움직여 금 덩어리를 얻으리라는 기대를 백성들은 아무도 믿지 않아 장대를 옮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금을 금 쉰 덩어리로 올렸다. 그러자 한 사람이 호기심에 장대를 북문으로 옮겼더니, 정말로 상금을 탔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나라의 명령에 의심을 품지 않게 되었다 한다. 그 후 귀족의 세록제(世祿制)를 폐지하고 농사와 전쟁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큰상을 내리고 관직과 작위를 내리되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에게는 세금과 부역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각 부족들 간의 고질적인 물로 인한 분쟁으로 법을 어기고 과격하게 행동을 일으킨 자들을 진효공과의 논쟁 끝에 재가를 얻어 처형하기에 이른다. 또한 위앙은 신법 시행 중 태자가 법을 범하자 태부 공자건(公子虔)은 참수형에 처하고 사부(師傅)인 공손가(公孫賈)는 묵형(墨刑)에 처벌하여 법 앞에서는 누구든 평등하며 법을 어기면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는 결과를 보자 백성들이 비로소 신법을 따랐다 한다. 법가사상의 21년간 진나라의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엄격한 법치주의 정치를 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서 효공이 죽자 반대파들에 의해 거열형(裂刑)에 처해지지만 이 법은 기원전 207년 진나라가 항우에 의해 망할 때까지 진나라의 통치수단이 되었다. 고대 봉건군주제 사회에서 그가 세운 법의 지위고하에 대한 평등정신은 오늘날 우리의 민주사회에 전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본다. 우리는 예로부터 문화민족으로 자랑해 왔다. 우리나라에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상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봉건적인 전제군주 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개화파의 일부는 새로이 들어온 서양의 근대 사상을 수용하고 새로운 정치체제의 수립을 주장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의 모든 항일 투쟁 세력은 새로운 민주적인 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을 임시 헌장을 통해 분명히 내세우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법치주의이다. 준법정신은 법률을 지켜나가는 정신이며 그 나라 국민들의 민주의식이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하겠다. 문화가 발달된 나라일수록 법률이 잘 지켜진다. 미개한 나라일수록 국민들 사이에서 법률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타협이 안 되면 결과에 순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신이건만, 소수가 다수의 결과를 부정하고 `부정의 부정`이라는 극단적 사고로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다면 선거는 왜 하는가. 그들도 분명 결과로 국회의원이 되었을 텐데, 국회에서 해머나 소화기가 등장하고, 공중부양하고, 때리고, 부수는 난투극의 `난장판 국회`의 본보기가 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개인이나 집단의 영욕과 향락을 위해 민주주의로 위장하고 무차별 폭력이 정당화되는 시위현장이나 범법행위가 적당한 변론으로 합리화되고 있는 것이다. 관습과 도덕 그리고 법률로써 규율이 지켜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우리의 현 사회를 고대(古代) 법가사상의 원조인 위앙이 지켜본다면 그는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민주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지 말라. 진정한 민주주의는 준법정신을 토양으로 자란다고,` 공동체의 질서의식은 좋은 습관과 좋은 이웃을 만들며 아름다운 도덕은 우리 사회를 평화로운 터전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09-07-31

착각

원숭이가 많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가면 재미있는 원숭이 낚시가 있다고 한다. 목이 잘록한 호리병에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먹이를 넣고 나무에 매달아두면 원숭이가 와서 그 먹이를 꺼내기 위해 손을 집어넣었다가 움켜쥔 주먹 때문에 손이 빠지지 않아 결국은 잡히고 만다. 주먹을 펴 버리면 간단히 빠져나올 수 있는데도 움켜쥔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동물세계에만 있는 것일까? 우리 인간세상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움켜쥔 재물을 놓지 못해서 죽는 순간까지 바락바락 악을 쓰다가 끝내는 어느 하나도 잡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간다. 결국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여기며 착각에 빠져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일찍부터 많은 현자는 욕심을 버리고 사는 삶이 복되다고 했고,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남에게 베푸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 재물을 많이 가진 부자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비유한 말이다. 미국의 대부호였던 카네기가 전 재산을 사회 환원 차원에서 기부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미국의 수많은 부자들이 애써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근래에는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같은 사람이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미련 없이 내놓기도 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도 생전에 5억 달러 이상이나 자선단체와 사회복지기관에 기부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서 미국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약속했던 전 재산 기부의사를 밝혔다. 퇴임 후 살 집 한 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처음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인 1995년에 펴낸 `신화는 없다`는 저서에서 “아내와 나는 우리의 재산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007년 대선 당시 검찰의 `BBK 의혹` 무혐의 발표 직후 선거연설방송을 통해 “우리 내외가 살집 한 칸이면 족하며 그 외의 재산 전부를 내놓겠다”는 구체적인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내놓은 금액은 한국감정원이 감정한 부동산 395억원과 예금 8천100만원에서 임대보증금과 연계된 채무를 뺀 나머지 금액 331억4천200만원으로 살던 집 한 채를 뺀 전 재산이다. 앞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돈이 없어 공부를 포기하거나 가난을 대물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청소년 장학 사업에 사용하겠다고 했다. 어려울 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것에 감사하며 그분들의 은혜를 갚는 길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놓아 또 다른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며 평소에 자주 얘기했던 것을 실천하는 본보기로 보인다. 현직 대통령직에 있는 분이 재산 전부를 기부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든 일이기에 이번의 이러한 결심은 결코 평범한 용기는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통령임기를 끝낸 사람들 거의가 재물에는 자유롭지 못하고 쇠고랑을 차거나 예우를 박탈당하는가 하면 그 자식들까지도 세상의 비난을 받는 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이라고 해서 국제적인 망신이라고 국민들 모두가 안타까워한다. 나라의 최고 자리에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텐데 그분들은 왜 그다지도 재물에 연연했던 것일까 어차피 짊어지고 가지도 못할 재물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재물에 노예가 된 그분들께 다시 한 번 이 성구를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

2009-07-30

예술가의 학벌

모 TV방송에 `스타킹(star king)`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다양한 끼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여 그 주의 우승자를 가리는 프로그램인데 그동안 이 방송을 통해 많은 사람이 다양한 재주를 뽐내기도 했고,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도 했다.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무용과 여대생이 스피커음향의 공기진동으로 빈틈없는 춤 실력을 보여주어 시청자들을 감동시켰고, 양손연주로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놀라게 한 고등학생, 웃는 연기와 우는 연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치원생, 성인가수를 뺨치며 트로트의 진수를 보여준 초등학생 등등. 세상에는 드러난 스타들도 많지만 숨은 재주꾼들이 더 많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려진 사람 중 식당의 수족관을 관리한다는 포항의 김성태씨는 내게 특별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는 성악을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훈련받은 적도 없지만 천부적인 성악가 재질을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고, 얼마 전엔 일약 세계적인 성악가로 변신한 영국의 폴포츠와 함께 노래하면서 한국의 폴포츠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 한창 뜨고 있는 폴포츠는 어눌한 발음에 구질구질해 뵈는 서른 후반의 휴대폰 판매원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엉망인 치열과 멍청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교통사고로 쇄골이 부러지고, 종양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의 스타킹과 비슷한 영국 1TV의 스타 발굴 프로그램인 `2007년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서 최고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역시 처음부터 성악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조차 싫어했지만 우연히 친구 차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듣고부터 흥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고 한다. 재주꾼으로 갑자기 알려진 이들 모두가 그 방면에 정규과정을 밟으면서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준비해 왔던 사람들은 아니다. 타고난 저 마다의 끼를 자각하고 그 재주를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나가면서 기회를 만났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예술계만큼 학력을 따지고 계통을 따지는 곳도 없다. 어느 대학을 졸업했느냐 하는 것이 기량을 앞장서 끌고 다닌다. 그렇다 보니 그 방면에 진출하려는 학부모들은 기를 쓰고 유명하다는 대학에 자녀를 넣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찾는다. 끼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서 각종 경연대회나 공모전에서 우수한 입상경력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학력이 우선하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잘 안다. 내 주변에도 그림이 좋아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공모전에도 출품하여 많은 입상경력을 쌓았지만 학력의 콤플렉스를 뛰어넘지 못해 결국 중도포기를 했거나 늦깎이로 대학을 나온 분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딜 가도 있다는 것. 그럼 왜 유독 예술계만 학력타파가 되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예술 그 자체가 기술이나 기교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기교나 기술이 예술성을 우선하면 유치하고 천박해진다. 그래서 대학에서 제대로 배워서 그 바탕 위에 세워질 때 고도의 정신문화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사상적인 기반이 충분히 세워지지 못하면 모사는 뛰어나겠지만 끊임없는 발전을 주도하는 창조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새길 필요가 있다. 기술이 따르지 못하는 예술도 문제겠지만 무조건 학력위주의 예술계라는 비난을 하는 것도 아집이다. 예술이 고도의 가치를 창출해야 할 때 진정한 문화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2009-07-23

인정머리

수년간 캐나다에서 살았던 어느 후배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좋은 환경에 풍요롭고 근사한 문화생활을 한다고 해서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그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늦은 나이에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처음 느낀 캐나다의 인상은 어딜 가나 울창한 숲, 널려 있는 아름다운 호수와 맑고 파란 하늘에 매료되어, 하나님이 처음으로 지었다는 에덴동산이 꼭 이랬을 것이라고 여겼단다. 환경만큼이나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이라고 여기며 한국의 습관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그곳 생활에 적응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고 한다. 한 달, 두 달, 그곳 생활에 익숙해지니 아름다운 숲 속에 묻혀서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일상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하더란다. 종일 거리를 돌아다녀도 쓰레기 하나 볼 수 없는 깨끗한 거리, 경찰관이 있건, 없건 절대 어기는 법이 없는 교통질서, 이웃을 위해선 숨소리조차 조심하는 그들의 공중도덕을 보면서 그것이 선진국민의 자세로 여겼고, 그런 그들이 참으로 존경스럽더라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느꼈던 그 신선한 충격들이 차츰 무거운 짐이 되더라는 것.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는 분위기가 엄청난 무게로 다가오면서 그것이 이웃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담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느끼는 이웃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더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는 것이 인정머리다. 서구인들 사이에서 인정머리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한다. 기부문화는 발달해 있지만 인정을 나눈다는 의미에서는 매우 인색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혈연으로 맺어진 단일민족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그곳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 법질서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을 이해는 했지만 나라 전체의 인상은 진정으로 이것이 사람 사는 곳인가라는 회의였다고 한다. 정이라면 모든 것이 통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정서에 길들여진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지다 보니 그렇게 느낀 것은 당연했으리라.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여기는 정 문화는 순기능도 많지만 역기능도 많다고 하여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외국생활을 오래하고 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이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들과 경쟁하여 이길 수 있었던 한 요인으로서 바로 이러한 면을 꼽는다. 현대자동차가 공장을 인수하여 미국에 진출했을 때의 일이다. 그곳 최말단 생산라인의 직원 중에서 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 한국인 임원들이 문상을 갔다고 한다. 처음엔 그 직원이 “왜 남의 상가에 와서 사생활에 관여하느냐?”며 오히려 화를 내더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남이 어려울 때 찾아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데 “당신이 한국기업에 있기 때문에 한국예법에 따르다 보니 그랬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지만 처음엔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그 후 다른 직원의 대소사에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임원들이 찾아가서 위로하고 축하도 해주니까 미국인들도 서서히 마음 문을 열더라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회사에 근무하는 미국인들은 그러한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단다. 그래선지 이직률이 극심한 미국에서 가장 이직률이 낮은 곳이 한국회사들이라고 한다. 임금이 조금 낮더라도 인정미가 있는 곳을 그들도 떠나기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법 조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혼탁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법 위에 있는 것이 인정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의 이런 미덕이 점점 사라져간다. 풍요한 물질 만능의 서구사회보다 조금은 부족해도 인정이 넘쳐나는 우리나라가 한 수 위라는 생각을 가져보자.

2009-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