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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시인 윤동주와 일본인

등록일 2016-03-04 02:01 게재일 2016-03-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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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아마 윤동주일 것이다. 소월(素月) 김정식이나 미당 서정주를 애호하는 독자들도 적잖을 테지만. 소월의 정한(情恨)과 미당의 친일(親日)은 나름의 한계를 가진다. 나는 육사(陸史) 이원록 시인을 제일 사랑한다. 이육사-윤동주 시인은 간악한 일제강점기를 의연하게 견뎌낸다. 그들로 한국 문학사는 암흑기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 전 일본 후쿠오카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일본인들이 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 자리에 윤동주 시비(詩碑)를 세우려 하는 것이다. 내년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인데, 일본인들은 그날을 시비로 기리고자 하는 게다. 한국인도 애송하는 `서시`를 함께 읽고 동주를 사모하고 기리는 일본인들이라니! 각박한 염량세태(炎凉世態)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시인과 역사를 일본인들이 추억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일본인들의 문학사랑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대략 800만 정도의 일본인들이 전통적인 단시(短詩) `하이쿠(俳句)`를 즐긴다는 통계가 있다. 명치시대를 살다간 하이쿠의 명인 다쿠보쿠는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짧은 만화영화 `언어의 정원`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 시가집인 `만엽집`이다. 이밖에도 선승(禪僧)들의 선시나 중국에서 전래된 각종 한시(漢詩)를 애호하거나 창작하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작년에 중국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소주(蘇州)를 찾아갔다가 `한산사(寒山寺)`에 몰려든 일본인 관광객들과 마주쳤다. 50대 이상으로 이뤄진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산사에서 주목하는 것은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이었다. 단 한 편의 시로 중국 문학사에 등재된 장계의 7언 고시 `풍교야박`은 일본의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고 한다.

15년 전까지만 해도 윤동주의 시도 일본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고 전한다.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는 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는 정황(情況)까지 서술하면서 시인의 사인(死因)을 밝히는 것이 일본인들의 소명(召命)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일본과 일본인은 더러 생뚱맞게 어긋나곤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맹방(盟邦) 미국과 미국인의 형상이 어긋나는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주와 장계 두 시인의 예에서 나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실감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어떤 국어 교과서에도 일본과 중국의 시인이나 작품은 소개돼 있지 않았다. 뜬금없이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나 `별` 혹은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같은 서양문학을 배운 기억이 새롭다. 지근거리(至近距離)의 중국과 일본문학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구미의 문학을 가르친 저의(底意)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한반도는 근본적으로 한문-유교-도교-불교 문화권에 속한다. 남북한과 중국-대만 그리고 일본은 동일한 문화권에서 상호 교류하면서 장구(長久)한 세월을 살아왔다. 이런 역사적인 전통과 문화권 공유는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커다란 자산이자 전통의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

때마침 이준익 감독의 `동주`가 상영되고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합의”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보인 정부는 역사적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그런 시점에 동주 시비를 건립하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이라니!

죽는 날까지 맑음과 곧음과 보편적 사랑을 설파했던 동주와 반일투쟁에 평생을 헌신했던 백마 타고 온 육사. 우리에게 영원한 정신적 자양과 성찰의 근거를 만든 두 시인을 초봄에 사유한다. 반면에 연변의 용정에 자리한 윤동주 박물관과 서툰 중국어로 번역된 낯선 시편(詩篇)들이 널브러져 있는 풍경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항일시인 윤동주가 아니라,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소개되는 윤동주! 이 나라 문화 책임자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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