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테니스를 끝낸 후에 가끔 Y호프집에 들린다. 이 집의 분위기는 들뜨지 아니하고 안정감이 있다. 그 가운데 정겨움도 있고 사람 사는 냄새도 난다. 자리가 다 차도 한두 사람 앉은 것처럼 수선스럽지 않다. 여기에 오는 손들은 거개가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하긴 주인부터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천성이 그런 것 같다. 어쩌면 그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일지도 모른다.
호프 한두 잔에는 오이나 당근 조각이면 안주가 된다. 그런데도 번데기를 갖다 준다. 조금 있으면 새우깡도 가져온다. 달라고 하지 않는데 그냥 알아서 가지고 온다. 구태여 말을 안 해도 우리는 주인의 친절함을 안다. 왜냐하면 서비스로 말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손님 입장에서 보면 말로 서비스를 대신하는 것보다 낫다.
호프집 주인을 보면 내가 자주 가는 음식점 생각이 난다. 음식점 중에는 입은 친절하지만 맛은 별로인 집이 있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나 맛에 승부를 거는 집도 있다. 희한하게도 그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집을 자주 찾아가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프집과 음식점 주인의 `불친절함` 속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진국 같은 것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홀로 호프와 있어도 외롭지 않다. 자작자음하면서 사색으로 대화를 대신하면 된다. 사색은 맛의 의미를 잘 붙잡아 준다. 애주가는 술의 진미를 `속닥함`에서 느낀다고들 한다. 자작은 속닥함의 꽃이다. 사색의 경지를 소요하는 희열을 얻고자 자작을 즐긴다.
봄비의 낙숫물이 통통거리는 날, 호프집에 앉아 자연의 빗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빗소리에서 우주의 호흡이 느껴지는 것은 우주의 그것과 나의 숨결이 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나 하늘에 저녁놀이 엷게 물든 날, 홀로 호프집에 앉아 사색에 잠겨 보라. 나는 이런 행운을 쥔 적이 있다. 그간 바쁘게 사느라 깜빡 잊어졌던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나 아폴리네르의 `미라보다리` 같은 프랑스의 명시하고 사색의 깊은 곳에서 만난 일 말이다. 베를렌의 시 속에 쇠잔해진 가을 낙엽이 전해주는 우수와 미라보의 다리를 걸으면서 아폴리네르가 떠올렸던 연인을, 나는 백년이 지난 지금, 사색 속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얻은 것 같은 기분에 호프 맛이 배로 더했다.
법정 스님 수상집의 표지를 열면 작가의 사색에 잠긴 사진이 보인다. 명문장이 깊은 사유의 품속에서 쑤욱 밀고 나옴을 엿볼 수 있다. 문장마다 철학이 담긴 표현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파리의 화가 고갱의 `마포에 유채`도 타히티에서 치열한 사색 끝에 얻은 걸작이다. 사색은 개성과 색채를 융합시키고 나아가 심원한 철학까지 온전히 보여 준다. 명작은 사색의 열매다. 사색은 명작의 어머니다.
사색은 망각을 걷어내어 잊혀진 기억들을 새록새록 되살아나게 해 준다. 사색에 젖어들면 긴장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이럴 때 자신을 조용히 관조해 볼 수 있다. 사색은 성찰과 수양을 통해 정신을 단련시킨다. 사색은 여유로움에서 돋아나므로 시작부터 편안하다. 숱한 사색의 편린들을 소중히 여기며 가슴 가득 안고 사는 사람들을 보라. 그 원질에는 어머니 마음 같은 따스함이 깔려 있다.
찻집도 괜찮겠지만, 나에겐 이런 호프집이 좋다. 배경이 주제를 구현하듯, 이 집의 배경도 끊임없이 사색을 자극시켜 주기 때문이다. 고요한 사색은 내 마음에 걸린 일상의 수고로움과 소소한 불평, 쓸데없는 욕심들을 거두어 간다. 주홍색 등불이 음악 소리에 젖어있고, 사람들의 마음이 술잔으로 따뜻해진 호프집 낭만은 나의 생각을 쉬게 하지 않는다. 사색은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며 성급하게 내렸던 결론을 되새겨 보게 함으로써 삶에서 반전의 지혜를 주기도 한다.
술잔 속의 거품처럼 생각이 인다. 가득 담긴 호프처럼 사색이 찬다. 누구로부터, 정해진 화제로부터 멍에를 쓰는 것보다 얼마나 열려 있는가! 대화가 아낙이라면 사색은 무한한 꿈을 가진 소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