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반란’ ‘유혈 진압’ 등 과오에도<br/> 궤변으로 정당화·적반하장 막말<br/> 물가 불안 해소·김재익 등용 등<br/> 경제성과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8시 40분께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87년 6월 항쟁으로 88년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온 지 33년 만이다. 지난 달에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공과 과가 분명했다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권력 비리와 5·18 책임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천문학적인 추징금 독촉에도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말한 일화는 시대를 풍미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과오는 분명하다. 군사 반란을 통한 집권, 5·18 유혈 진압, ‘땡전 뉴스’로 대표되는 언론 장악, 철권통치와 인권 탄압, 천문학적 비자금 축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는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때로는 적반하장의 막말을 뱉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1980년 5월 당시 신군부 쿠데타 세력이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며 수많은 희생자가 나온 사건이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추궁과 사과 요구에도 단 한 번도 미안한 기색을 드러낸 적이 없다. 국회 5공비리·5·18 특위가 1989년 12월 증인으로 불렀을 때 그는 변명으로 점철한 발표문만 읽고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퇴장해 야유를 받았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하나회 청산 과정에서도 재판에 출석해,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말한 것은 그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준 대목으로 꼽힌다.
12·12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도 그는 회고록에서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권력을 잡기 위한 하극상 반란이라는 법원의 판결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헌법과 국민이 정해준 임기를 마치면 물러난다는 당연한 원칙을 지키는 선례를 우리 헌정사에 처음으로 기록해놓겠다”며 자신의 단임 실천을 자찬했다.
한달 전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생전 유언으로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고 밝힌 점과 노 전 대통령의 아들 재헌 씨가 2019년 8월 국립 5·18 민주 묘지를 찾아 참배와 사죄 표명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경제 평가는 긍정적… 김재익 경제수석 등용 등
과오가 분명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지만, 경제 성과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전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고질적인 물가 불안의 해소와 중화학공업의 전면적 구조조정에 초점이 맞춰졌다.
우선 전 전 대통령은 공권력으로 공산품 가격 인상을 억제했다. 근로자 임금과 추곡 수매가는 묶고, 수입규제는 풀어 공급비용이 올라갈 여지를 줄였다. 여기에 예산까지 동결·긴축해 시중에 돈이 더 풀리는 것을 막았다. 실제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81년 21.4%, 1982년 7.2%로 낮아지더니 1983년 3.4%까지 내려갔다.
이와 함께 박정희 정부 때 과도하게 추진했던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투자도 정리했다. 당시 주요 중화학업종의 가동률은 40~60%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생산 재원은 중화학에 묶여있어 다른 분야에는 활용되지 못하는 등 경제가 심각한 불균형 상태를 유지했다.
물론 이를 모두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공으로 돌리기에는 무리다. 군부 출신의 전 전 대통령과 혁명 동지(?)들이 경제에 대해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 전 대통령은 ‘경제 가정교사’로 불린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등용하면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고도압축성장을 ‘안정성장’으로 바꾸는 경제정책의 기조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인물이다. 전 전 대통령이 그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전권을 맡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1983년 10월9일 북한 공작원들의 미얀마(당시 버마) ‘아웅산 묘역 테러’로 유명을 달리했다.
어쨋든 경제의 체질이 바뀌면서 성장 기반도 다잡았다. 때마침 세계적인 3저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까지 겹치면서 한국 경제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매년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통해 글로벌 시장을 향한 발판도 마련했다.
故 전두환 전 대통령(1931∼2021) 연보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출생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 입학
1961년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쿠데타 지지 시위 주도
1973년 육군 준장 진급
1976년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1977년 육군 소장 진급
1978년 육군 제1사단장. 북한 제3땅굴 발견
1979년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0·26 사태 수사. 12·12 군사반란 주도
1980년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계엄군과 공수특전여단 광주 투입, 5·18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삼청교육대 설치. 육군 대장 진급 뒤 예편.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선거 당선. 대통령 취임
1981년 민주정의당 입당, 초대 총재로 추대.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대통령 취임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개최
1987년 4·13 호헌조치. 6월 민주항쟁 전국 확산.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 요구 수용
1988년 대통령 퇴임. 백담사 첩거
1989년 국회 ‘5공 비리 청문회’ 참석
1996년 5·18 사건에서의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 1심에서 사형과 2천259억원 추징금 선고. 항소 후 2심에서 무기징역 감형과 추징금 2천205억원 선고
1997년 대법원 2심 선고 확정.특별사면 후 석방
2017년 회고록 출간.조비오 신부 유족 등이 사자 명예훼손 혐의 형사고소
2021년 11월 23일 사망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