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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 수리적 비례에 기반한 美 의 만다라”

등록일 2022-08-21 19:33 게재일 2022-08-22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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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   ⑨  신이 빚은 솜씨 ⑵<br/>            과학적 원리로 본 석불사
석불사 석불의 두상

□자연 활용해 습기 제거한 신라인의 지혜

석불사의 석불은 예술적 측면에서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1000년 전 신라인들의 과학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지난호에도 언급했듯이 석불사 발견 이후 보수작업을 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습기 제거였다. 일제가 석불사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콘크리트를 사용해 석굴암의 외벽을 막은 것은 당시 기술의 한계라고 해도 현재까지 석불사 습기 제거 문제는 뚜렷하게 개선된 것이 없다. 1963년대엔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크리트 외벽 바깥으로 약 1m의 공간을 두고 다시 콘크리트 돔을 씌웠다. 하지만 이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실내에 에어컨을 설치해 습도 조절을 해야 했다.

첨단 건축기법을 사용해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했음에도 석불사의 습기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경덕왕 때인 8세기 중엽 착공돼 무려 1천200여 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신라인들의 지혜와 과학적 수준을 경시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석불사의 습기 제거 원리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한 것이었다.

석불사 조성 당시 외벽에는 직경 10㎝가 넘는 자갈들이 1m가량 쌓여 있었다. 이 자갈층이 바로 석굴암의 습도를 조절하는 자동 제습 장치였던 것이다. 습기 차고 더운 외부 공기는 자갈층을 통과하면서 수증기가 응축돼 자갈에 남고 공기는 차가워진다. 자연의 원리를 이용한 에어컨인 셈이다. 이렇게 차가워진 공기는 밀도가 높아 자연히 아래쪽으로 흘러 석굴암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송풍기가 없어도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내부를 꾸준히 채우게 돼 석굴암 안은 항상 뽀송뽀송한 상태가 유지된 것이다.

석불사 아래로 흐르던 지하수도 바닥 온도를 벽면의 온도보다 낮게 유지해 불상 표면에 맺히는 이슬(결로)현상을 막아주던 자동 제습기였던 셈이다.

일제가 보수작업을 한다고 콘크리트로 돔을 만들고 지하수의 물길을 바꿔버린 것이 오히려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일으켰다.

故한석홍 기증 사진자료(석불사 본존불과 주실안의 존상들).
故한석홍 기증 사진자료(석불사 본존불과 주실안의 존상들).

1963년 석불 보수 공사를 재개할 때도 지하수가 석불사 습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수의 물을 퍼내기 위해 동파이프를 묻어 석불사 밖으로 물을 빼내려고 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였던 이태녕 박사는 역사학회에 ‘석굴암의 구조와 습기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석굴암 석면(石面)의 결로현상은 석면의 온도 조절이 균형을 잃은 데서 일어난다. 일제 때 보수하기 이전(즉 원형)에는 석굴 밑에 있는 바닥 돌에서만 결로현상이 나타나고 풍화작용도 이곳에서만 심했다. 그러나 일제 때 두 차례에 걸친 보수 공사에서 바닥을 강회로 보강하고 샘물을 연관으로 돌리고 요석 뒷면에 콘크리트를 다져 넣었기 때문에 온도가 낮아야 할 바닥돌의 온도가 높아지고 반대로 요석 부분의 온도가 낮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벽면에 물기가 돌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이태녕 박사는 신라인이 왜 석불사 지하에 샘을 만들었는지를 간파한 것이었다.

신라인들은 단지 습기 문제만을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석굴 내부에 정체된 공기가 바깥 공기와 자연스럽게 순환할 수 있는 환기구를 만들었다. 환기구는 석불 본존불 어깨높이에 있다. 주변 벽에 감실 구멍이 10개가 뚫려있는데 이것이 자연의 환기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석불의 받침돌도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감실 폭이 받침돌보다 더 넓다. 석굴 내에 정체된 공기는 감실과 받침돌 사이에 생긴 틈 사이로 자연스럽게 순환한다. 이러한 공기 순환 방법은 석굴 안팎의 온도 차를 좁혀 습기를 자연스레 억제한다는 원리다.

석굴 천장부에도 환기구가 있었다. 돔형 천장 천개석 부분에 작은 석재를 끼워 틈을 만들어 자연스러운 환기구 역할을 했다.

내부로 들어오는 동안에 공기는 차가운 돌을 만나 습기를 빼앗겨 석굴 내부에는 제습된 공기가 들어오게 된다. 밤에는 반대로 작용해 건조해진 내부 공기가 돌에 맺힌 습기를 머금고 석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석불에 다양한 습기 제거 장치가 있음에도 석불사 외부를 콘크리트로 만들었으니 석불이 습기에 노출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시대와 박정희 시대에 있었던 두 번의 석굴암 보수 공사 때, 습기를 누수로 판단해 외벽에 2겹 콘크리트 돔을 만들고 석굴 안 샘물도 밖으로 뽑아내는 관을 설치했다. 이로써 석굴은 숨 쉴 구멍이 막히게 되었고 자연적인 습기 제거 시스템도 없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외벽 자갈·지하수… 결로 막은 자연 제습기

천장부와 감실 구멍·석불 받침돌 환기구 役

바닥 반사광 활용 석불사 자연조명 만들어내

동해 수평선 향한 석불… ‘새로운 시작’ 의미

돔 둘레 360도 태음력 1년·지름 24척 1일 상징

‘자연·건축·천문’ 집대성한 신라의 과학 지표

요네다 미요지가 실측한 석불사의 평면도와 입면도.
요네다 미요지가 실측한 석불사의 평면도와 입면도.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독창적인 석불

석불사의 자연조명도 지금까지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이다. 원래 석불사는 돔형의 천장으로 막혀있는 구조이기에 태양광이 직접 닿을 수 없다. 그런데도 석불의 위엄을 신라인들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조명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반사광을 활용해 조명을 해결했다고 한다. 전실 부분이 개방된 상태에서 석굴 바닥 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일종의 거울효과를 낸 셈이다. 햇빛이 반짝이는 석굴 바닥 면에서 반사되어 석불사 구석구석을 비추게 만든 것이다.

석불사는 구조에서도 신라 건축술의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신라인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해 지상 세계인 전실은 네모꼴로, 하늘 세계인 주실은 둥근 모양의 돔 천장으로 꾸몄다. 특히 천장은 네모난 판석들 사이에 비녀 모양의 긴 돌 30개를 박고 그 위에 잡석들을 쌓아 눌러줌으로써 힘의 균형을 보장하는 특이한 공법으로 완성했다. 신라인들은 당시 중근동이나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돔의 형태는 받아들이되 축조법은 우리 식으로 개조한 슬기를 발휘한 것이다.

도면 국보 경주 석불사 석굴 제2석불사 조성공사 본존불 좌대 상세도.
도면 국보 경주 석불사 석굴 제2석불사 조성공사 본존불 좌대 상세도.

석불사는 당시 천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석불사는 직사각형 모양의 전실, 전실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부분인 비도, 본존불상이 있는 원형의 주실 등 3개소로 구성된다. 그중에서 특히 주실의 돔형 천장은 당시 천문학의 결정체다. 주실의 돔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을 상징하며, 지름 24척은 1일 24시간을 나타낸다고 한다. 석불사의 석불이 향하는 방향도 무수한 논쟁을 낳았다. 석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동남쪽 30도로 동해 바다의 수평선이 바라다보이는 장소다. 1960년대 석불사 보수 공사 총감독을 맡았던 황수영 박사는 석불이 문무대왕의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東海口)를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대왕암과 석불상을 왜의 침략에 대한 수호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천우 박사가 진단학보에 낸 ‘석굴암에서 망각된 고도의 신라과학’이라는 논문을 통해 석불의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29.4도)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동짓날 일출은 1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석불의 방향은 ‘일년의 시작’ 혹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천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었던 셈이다.

일제가 변형해서 보수했던 석불의 배치(왼쪽). 이를 고증에 의해 바로 잡은 모습(오른쪽).
일제가 변형해서 보수했던 석불의 배치(왼쪽). 이를 고증에 의해 바로 잡은 모습(오른쪽).

□천문과학적 원리까지 숨겨진 석불의 신비

석불사에 천문과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밝혀낸 사람은 일본인 토목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였다. 193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고건축 측량을 맡았던 요네다가 기술한 짧은 논문인 ‘석굴암 석굴의 천체 표현사고’에 따르면 “석굴암의 평면은 석굴암 구성의 기본이 되는 반경12척(직경 24척으로 1일 24시간의 12각과 일치)의 원이다. 이는 1년 360일의 360도와 일치한다. 굴의 개구부 12척은 1일 12각과 일치한다. 또한 궁륭(활이나 무지개같이 한가운데가 높고 길게 굽은 형상. 아치 모양의 구조물) 천장은 같은 원둘레에 유구한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 중심에 원형(태양)과 큰 연꽃이 새겨져 있어 구면의 각판석 사이 전석(벽돌)은 모든 별자리의 별을 상징하고 있다”고 했다. 석불사는 석가모니가 상주하는 정토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석불사 전체는 인간이 느끼는 세계인 천체 우주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요네다는 천문과학적인 측면뿐 아니라 석불이 수리적 비례에 기반한 미(美)의 만다라(蔓多羅)임을 최초로 실증해낸 위대한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의 ‘조선상대건축의 연구’중에서 ‘경주 석굴암의 조영계획’은 석불사를 만든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수치로 재현시켜놓았다는 점에서 ‘석불학의 위대한 노작’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석불을 실제로 측면한 유일한 도면이기도 했다.

요네다는 석굴 조영을 하면서 당시 신라인 기술자들이 사용했던 자에 주목했다. 자의 길이를 알아야 석불의 정확한 길이를 측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국사와 석불사를 측량한 수치와 그전에 있었던 보수 공사의 측량 결과를 토대로 신라 기술자들이 쓰던 자는 0.98곡척(29.7cm)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네다는 이 길이를 당척(唐尺)이라고 이름 붙였다. 당시 당나라에서 쓰던 자의 길이와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측량한 결과 본존불의 얼굴 너비는 2.2자, 가슴 폭은 4.4자, 어깨 폭은 6.6자, 결가부좌한 양 무릎의 너비는 8.8자였다. 이를 비율로 보니 1:2:3:4였다. 이 부분의 기준이 된 1.1자는 본존불 자체 총 높이의 10분의 1에 해당했다.

인류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건축은 물론 인체 조형에서도 각 부분의 크기에 비례배분을 설정해 인체의 안정감이나 균형을 꾀했다. 가장 이상적인 몸의 비례는 석불의 예와 같이 1:2:3:4의 비율이다. 본존불이 불상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완벽한 몸의 비례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병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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