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에 깃든 신라 역사와 경주 이야기<br/> ⑭ 낭산과 토함지구에 묻힌 신라왕릉 (1) 선덕여왕릉
◇ 경주 시내만 36기의 왕릉이 존재
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 왕릉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우아한 자태로 세월을 이겨낸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봉긋 구릉이 솟았다. 무덤은 모두 5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비인 알영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까지 한자리에 모인 무덤. 그래서 이름도 오릉이다. 오릉은 신라 왕실 무덤의 시조다.
경주는 ‘신라왕릉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라 건국의 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해 경주 시내에만 왕릉이 36기나 된다. 왕릉은 왕의 무덤이다. 살아있을 때 권력의 정점에 섰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거대한 공간 속에 잠들어 있다.
신라왕릉의 무덤 옆은 거의 어김없이 소나무 숲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능의 소나무는 신기하게도 능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숙이고 있다. 마치 충성스런 호위병 같다. 소나무 숲을 거닐다 보면 신라왕들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소곤거리는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왕릉은 떠난 이들이 영면하는 장소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산 자들도 즐겨 찾는 공간이 됐다.
시내에만 왕릉 36기, 가히 ‘신라왕릉의 도시’
도굴범 침입 어려운 돌무지덧널무덤 많고
삼국통일 성공으로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첨성대·분황사 건립, 황룡사 9층 목탑 축조
신라 건축의 금자탑 세운 선덕여왕이지만
저평가 받아서인지 무덤 단출하기 그지없어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유언하며
신하들에게 “낭산 기슭이 도리천”이라 예언
왕릉 조성 32년 후 사천왕사 지어져 증명돼
신라의 왕릉이 처음부터 거대한 구릉 형태의 무덤은 아니었다. 신라 초기에는 주로 고인돌 형태였다가 지하에 판석이나 강돌을 함께 섞어서 장방형의 석관 시설을 갖춘 석관묘(돌널무덤)로 진화했다. 왕을 마립간이라고 부르던 시대에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왕릉을 조성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관이 중심에 있고 부장품들과 함께 묻을 것들을 주변에 놓은 다음, 다시 큰 목관 위에 냇돌을 쌓아, 그 위에 봉토를 덮은 형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굴식돌방무덤(석실묘)으로 변했다. 굴식돌방무덤은 쉽게 말하면 무덤에 방을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돌로 방과 통로를 만들고 흙을 덮어서 만든 무덤으로 널방에 벽화가 남아있다. 벽화의 주제는 사신도, 신라인들의 생활 모습, 천문 등 다양했다.
굴식 돌방무덤은 신라가 불교 국가화되면서 무덤 크기도 이전보다 작아졌다. 불교식으로 화장해서 부장품도 단순했다. 유골만 담은 뼈 항아리와 간단한 흙 인형 정도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경주의 신라왕릉이 고구려와 백제 시대 왕릉에 비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돌무지덧널무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입구가 따로 없어서 구조가 견고하고 도굴범이 침입하기 어렵다는 게 특징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뤄 고구려나 백제보다 왕조가 수백 년이나 지속되었다는 점도 신라왕릉이 지금까지 견고하게 자리는 지키는 원동력이 됐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왕릉 중 시가지 주변에 있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의 경우 대부분 도굴된 적이 없었고 부장품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규모가 작은 고분이나 경주 외곽 산지 고분은 일부 도굴 사례가 있으나, 대체로 다른 왕조의 고분에 비하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신라시대에 왕은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56대 왕인 경순왕까지 모두 56명이었다. 이 중 화장을 한 왕은 문무왕(30대), 효성왕(34대), 원성왕(38대), 진성왕(51대), 효공왕(52대), 신덕왕(53대), 경명왕(54) 등이다. 화장했으니 당연히 무덤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문무왕만은 화장해 유골을 동해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는데,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했다. 일종의 수중왕릉인 셈인데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다. 능이 없거나 소재지가 명확하지 않은 왕도 16명이나 된다.
물론 고구려의 동명왕릉, 백제의 무령왕릉만이 전해지는 것에 비하면 신라의 왕릉은 역사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 석탈해왕도 풍수지리 활용
초기 신라왕릉은 흙 봉분 외에 따로 비석이나 자연석 같은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다. 무열왕릉부터 비석을 세우고 봉토 밑에 자연석으로 둘레에 호석을 설치했다. 신문왕릉부터는 문인상, 무인상, 십이지신상 등 수호석을 장식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원성왕릉과 흥덕왕릉 시기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능묘 제도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본다.
조선시대 왕릉은 대개 풍수지리를 따져서 소위 명당자리에 묘를 썼다. 그렇다면 신라왕릉은 어떤 자리에 묘를 썼을까? 풍수지리는 도읍·궁택·무덤의 터를 잡기 위해 점을 치는 일종의 관상학인 까닭에 상지학(相地學)으로 규정되며, 본래는 대지의 신을 믿는 지모신(地母神)적인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풍수지리는 이미 일상에 파고든 상태였다. 토함의 수호신인 석탈해가 반월성(半月城) 쪽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를 참고했다는 사실은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동해안으로 들어와 한동안 한지부(漢祗部)에 머무르던 석탈해는 하루는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땅을 선정하려 했다. 양산 아래 호공(瓠公)의 집터가 길한 땅임을 알고, 계략을 써서 그곳을 빼앗아 거주한 것도 풍수지리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탈해에 관한 기사만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풍수지리설이 유행했다 할 수는 없지만, 당대에 풍수지리적 지식이 민간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풍수지리적 지식은 궁실이나 왕릉·사찰 등의 터를 선정하는 데 중요하게 쓰였다. 원성왕릉을 위시해 오늘날 전해지는 왕릉이나 절터가 모두 풍수지리설의 조건에 맞는 곳이 있으니 말이다.
원성왕릉의 경우 지하수가 흐르는 땅에 묘를 썼다. 이는 풍수지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묘 아래로 물이 흐르는 곳은 흉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풍수지리에 대한 관념이 신라시대에는 조금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 말기 대학자인 최치원이 글씨를 쓰고 비문도 세운 숭복사비(崇福寺碑)의 내용에 따르면 왕릉을 정하는 기준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에는 왕릉을 만들 때 좋은 땅을 찾아 토지를 구입해 관청과 고을 사람에게 명해 가시를 베고, 소나무를 심어 꾸미는 과정이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능색전(陵色典)이라는 왕릉 관리 관청을 따로 설치해 왕릉 입지 선정과 향후 관리가 체계적으로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신라왕릉은 오릉을 중심으로 서남산지구에 11기가 있고, 동남산지구에 2기, 선도악지구에 6기, 금강산 지구에 2기, 낭산과 토함산지구에 모두 9기가 있다.
◇ 업적에 비해 단출한 선덕여왕릉
토함산지구에 있는 왕릉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선덕여왕릉이다. 선덕여왕릉은 정확하게 말하면 토함산이 아니라 낭산(狼山)에 있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점 외에도 재위 시절 다양한 업적을 쌓은 군주였다. 그녀는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했다. 업적에 비해 저평가를 받아서인지 선덕여왕릉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아랫부분에 자연석 석축 2~3단만 쌓았을 뿐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은 신라 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천명 공주와 덕만 공주였다. 덕만 공주가 선덕여왕에 올랐는데, 여성이 최초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신라의 폐쇄적인 신분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성골만 오를 수 있었다. 성골의 경우 성골과 성골 사이에서 태어날 때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의 성골 신분은 덕만 공주와 함께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승만 공주(진덕여왕) 뿐이었다.
선덕여왕의 치세 기간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신라 문화의 꽃을 피웠지만 백제의 의자왕에게 마두성을 포함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기기도 했다.
647년에는 비담의 난을 겪기도 했다.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분은 ‘여자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의미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여성 군주에 대한 입지가 좁았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을 떠올리면 결혼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음갈문왕(飮葛文王)’과 결혼한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만 아이는 낳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은 재위 중 여러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유언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도리천이 어디냐고 하자 선덕여왕은 “낭산 기슭이 도리천”이라 일러주었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 꼭대기로, 사천왕 위에 있는 부처님의 세계다. 인간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유언에 따라 낭산에 왕릉을 만든 지 32년 후, 능 아래쪽에 사천왕사가 지어졌다. 여왕이 잠든 곳이 ‘도리천’임이 증명된 것이다. /최병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