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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토함산은 신앙적 측면과 함께 국방 수호의 의미

경주의 영산 토함산을 취재하면서 드러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토함산에 있는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지만 실제로 문화유산의 미학적, 역사적 가치에는 무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명저(名著)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토함산의 숨겨진 다양한 이야기를 이해해야 통일신라시대와 오늘날의 경주를 통찰력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연재를 마감하면서 필자 역량의 한계로 토함산의 문화유산에 담긴 밝히지 못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 경주 문화유산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과 대담을 마련한 것은 독자들에게 필자가 미처 짚지 못한 이야기를 전문가의 눈으로 밝혀주기 위함이다. ◇불교적 이상국가 건설이 집약된 토함산“토함산은 신앙(산신신앙)적인 면과 함께 불교에서 지향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려는 신라인의 열망과 국방 수호의 의미가 있는 영산입니다”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지난 8일 본지와의 대담을 통해 통일신라기 최고의 문화예술작품인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가 토함산에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며 이같이 말했다.박 원장은 “토함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에서 신라의 중사(中祀)를 지내던 오악(五岳) 중 동악(東岳)으로 기록돼 있다”고 했다. 신라오악은 산악숭배사상에서 비롯됐으며, 오악동서남북 4방에 가운데의 중방을 합친 것으로, 오악신앙은 5개의 산천을 성역화해 제사지내는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동악인 토함산은 해 솟는 방향과 일치하고 석탈해가 산신으로 모신 점으로 보아 석씨 세력의 상징적인 산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고 밝혔다.그는 토함산은 신앙(산신신앙)적인 면과 함께 국방 수호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9년(364)조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동해안을 통해 침입하는 왜인(왜적, 왜구)의 1차 방어선으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한편으로 토함산은 불교 유적의 성지이기도 했다고 박 원장은 밝혔다. 현재까지 토함산에서 위치가 확인된 불교 유적만 총 19곳이며,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는 유적까지 포함하면 총 27개의 불교 유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는 경주 남산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경주를 넘어 대한민국의 불교 유적 중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불국사와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박방룡 원장은 이승에 부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은 신라의 오랜 꿈이었을 정도로 불교가 나라를 지탱하는 이념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신라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바로 ‘부처의 나라’라고 믿었기에 불국사를 곧 부처님의 나라가 현세에 실현된 낙원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측면으로 박 원장은 신라왕경에서 동해(울산)로 향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다는 점을 들었다. ◇신라왕경에서 동해안 가는 길 왕릉과 사찰신라 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로, 첫 번째는 월성이나 황룡사에서 시작해 분황사, 낭산 북쪽, 명활산성, 천군동사지, 고선사지, 기림사를 지나 감은사로 향하는 경로가 있으며, 두 번째는 불국사, 장항리사지, 감은사로 연결되는 길인데 이 길은 경주 월성에서 시작해 낭산 서편(사천왕사나 망덕사 남쪽)을 지나 현재의 7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다가, 구정동 인근에서 다시 불국사 가는 길로 연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이 길이 중요한 이유는 신라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에 왕릉급 무덤이나 사찰이 있기 때문이다.“불교미술의 권위자인 최선아 명지대 교수는 7세기 후반 사천왕사, 망덕사, 전(傳)황복사 등 왕실과 관련된 주요 불사(佛寺)와 신문왕릉, 효소왕릉 등의 조성이 낭산 일원에서 이뤄졌고, 8세기 전반에는 왕실 관련 사업들이 토함산 일원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여러 불교 사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볼 때 이 시기가 신라 제33대 성덕왕 전후로 추정됩니다. 신라왕경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경로의 울산 방향 끝에는 성덕왕 21년(722)에 조성한 관문성이 있는데 이 성은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과 기능을 했을 것을 보여지며, 사찰과 왕릉이 입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박 원장은 “토함산의 산신이 된 석탈해 왕은 이주민이 신라의 권력을 잡은 대표적인 경우로 석탈해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박 원장은 석탈해왕이 ‘삼국유사’ 제1 기이(紀異) 제4 탈해왕조(脫解王條)에 탈해가 지략으로 호공의 집을 빼앗은 점을 들며 대단한 지략가라고 평가했다. 지략가적인 측면은 남해왕이 자식을 제치고 사위인 석탈해를 태자로 삼을 정도로 석탈해가 남해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이다.“토함산과 석탈해왕은 불가분의 연관이 있어요. ‘삼국유사’ 1권 기이 1 탈해왕조에서 볼 수 있듯이 탈해왕의 무덤을 파내 유골을 토함산에 안치하고 동악신(東岳神)으로 모셨다는 것은 국방적인 것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삼국통일 직후 토함산과 가까운 경주시 양남면 동해안 일대에 왜구의 침입이 잦았으므로 문무왕을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에 장사 지내고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했으며 관문성의 신대리성(新垈里城)을 구축하는 등, 이에 대비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왕경을 수호하는 호국산신 동악신에게 행하는 제사는 ‘삼국유사’가 편찬된 13세기까지 약 700년간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시대로 이어집니다. 2020년 석탈해왕 사당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명문와 및 공반 유물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 제사가 계속됐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다른 나라의 석굴사원과 석굴암이 다른 점에 대해 박 원장은 “석굴암에서 본존을 안치한 주실은 유사사례가 없는 원형당(圓形堂)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석굴암 건축과 부분적으로 유사한 유적은 있지만 석굴암의 주요한 건축적 요소를 모두 지닌 예는 찾을 수 없으며, 이에 그 원류나 모델로 특정 유적을 지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석굴암은 암벽을 파서 만든 인도와 중국 등 다른 나라의 석굴과는 달리 돌을 쌓아 만든 특이한 사례라는 것이다.“석굴암과 유사한 유적으로 대표되는 중국 맥적산석굴 제 43굴과 용문석굴 사안동에서 볼수 있는 둥근 평면과 둥근 천장의 형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석굴암 주실이 지닌 정연한 원형 평면과 비교할 만한 사례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비교적 석굴암 조성 시기와 유사한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굴(6~8세기)은 벽면 상부나 천장에 감실을 반복해 배치된 점 등이 석굴암과 비슷하나 석굴 중앙에 불상이나 예배대상이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건축, 수리, 기하학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걸작박 원장은 다른 나라 석굴사원과 괘가 다른 석불사는 ‘조형예술의 걸작’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신라 불교예술 전성기에 조성한 석불사 본존불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 돼 있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석불사의 돔형 천장을 구성하는 360여 개의 돌은 주실 천장의 또 다른 연판을 향해 모아지는 형태로, 이는 건축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본존불상인 석가여래좌상은 높이 3.45m로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습니다. 불상은 결가부좌 상태에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는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지신(地神)을 소환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할 때 취했던 동작이죠. 금강역사상, 팔부신장상, 천부상, 보살상, 나한상, 사천왕상 등의 다른 조각들도 모두 세부적인 자연스러움에 주의를 기울여 정교하게 조각됐습니다”말도 탈도 많았던 석굴암 복원 논쟁에 대해 박 원장은 1960년대 석굴암 수리 공사를 전후해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주요 논쟁 요소는 돔 전면 광창 설치 여부, 비도 전면의 대문 설치 여부와 그 형태, 목조 전실의 유무, 전실 팔부신중의 평면 형태(절곡형 또는 일직선형) 등이었다.현재까지 석불사 복원과 관련한 논쟁은 진행형인데 현재의 과학으로 밝혀진 부분도 있고 상당 부분은 추정과 가설인 경우도 있어 속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박 원장은 토함산과 그 자락에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하다고도 했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 “불국사는 인공적으로 쌓은 석조 기단 위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신라 불교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어 석굴암(석불사)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손꼽히며, 우리나라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1995)에 등재됐습니다. 이런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영산 토함산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될 때 통일신라시대의 역사가 보다 생동감 있게 후손들에게 느껴질 겁니다”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제20대 국립부여박물관관장과 제8대 부산박물관관장을 역임하고 현재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에 재직하고 있다. 2013년 제16회 자랑스런 박물관인상을 받았으며 ‘신라도성’(학연문화사) ‘경주’(열린어린이) 등을 저술했다. /최병일 작가끝

2022-11-13

그 시대의 역사문화 속 오늘과 미래 문화도 존재

◇토함산의 과거 신라역사박물관과 추억의 달동네토함산 자락에는 경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듯한 다양한 시설들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역사과학관은 경주인들의 과거를 소환하는 곳이다. 신라역사과학관은 경주 민속공예촌 내에 있다. 석불사 관람 전에 필수로 들러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석불사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유리벽이 설치돼 있어 석가탄신일 당일을 제외하고 내부를 볼 수 없다.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라 불리는 본존불의 아름다움은 유리창 안에서도 빛나지만 과학적으로 지어진 석굴 내부 곳곳을 둘러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신라역사과학관은 일제의 잘못된 복원으로 습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석굴암 본존불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던 석우일 관장이 사재를 털어 석굴암의 연구 자료를 모아 전시관을 만들었다. 5/1 크기로 만든 석불사 모형을 필두로 지하전시실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하게 짓고, 세밀한 조각까지 곁들여진 석굴 내부 곳곳을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해 두었다.본존불을 중심으로 석불사 내부의 제자상과 첨차석을 정교한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마치 유리막을 열고 석불사 안쪽 석실로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석굴의 수리적 원리를 최초로 밝힌 요네다 도면도 볼 수 있고 석굴암 관련 서적과 자료도 같이 전시돼 있다.신라역사과학관은 선조들의 놀라운 과학기술과 건축기법의 산물인 문화유적을 세세하게 뜯어볼 수 있는 곳이다. 1500년 동안 단 한 번도 무너지거나 크게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지킨 첨성대의 구조를 세밀하게 공부할 수 있는 1/10 첨성대 모형도 1층 전시실에 자리해 있다.경주 하동공예촌에 신라역사과학관을 만든 이는 석우일 관장이다.석 관장은 “과거의 역사 문화 속에는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문화도 있으며 내일을 살아갈 미래의 문화도 함께 내재돼 있다”고 말했다.석 관장의 생각처럼 전시실 내부에는 첨성대와 석불사 외에도 물시계와 해시계 등 신라시대의 하이테크 기술을 알 수 있는 다양한 과학기술의 성과물들이 전시돼 있다. 조선시대의 천문학적인 깊이를 알 수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목판본이나 세종 19년 만든 시계인 일성정시의, 앙부일구(해시계) 등도 정교한 모형도 같이 전시하고 있다.전시를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하려면 매주 주말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진행하는 상설 해설 프로그램을 따라가면 된다.경주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는 ‘추억의 달동네’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네 옛 삶을 엿볼 수 있는 근대사박물관인 ‘추억의 달동네’는 경주시 보불로 민속공예촌 옆에 있다. ‘추억의 달동네’는 근대사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지난 2014년 12월 개관한 곳이다. 세트장처럼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재현이 좀 투박한 듯하지만, 150개 코너에다 6천여 개의 소품으로 장식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비록 박물관 안에서 재현된 풍경일지라도 지나온 청춘을 바라보는 느낌은 아련하다. 다이얼을 돌리는 전화기, 길게 줄을 서서 사는 영화표, 튜너가 달린 TV, 교련복, 통기타…. 그 시대를 청춘으로 건너온 중년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누추했어도, 누구에게나 빛나는 청춘의 시간이었을 것이었다. 그 빛나는 시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만, 그때의 물건과 정서로 가득 채운 여행지가 추억의 박물관이다. 옛 건물을 재현하고 오래된 물건을 가져다 놓은 곳인데, 그곳에서는 전시된 물건뿐만 아니라 저마다 건너온 자신의 과거의 시간과 마주치게 된다. 기억 속의 공간을 둘러보다 때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이곳에서는 잊혀진 줄만 알았던 동네 풍경들, 이를테면 주황색 공중전화, 연탄재가 쌓인 골목길, 못난이 인형, 앉은뱅이 책상, 원기소, 뻥튀기 도구 같은 것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 곳곳에 나붙은 ‘쥐를 잡자’ ‘10월 유신’ 포스터와 저우룬파(周潤發)가 등장하는 광고지 등도 현실감을 더해준다. 특히 50년대부터 서민, 평민, 양반층 등 계층별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농업인, 이발소, 다방, 만화방, 비디오방, 학교 등 직업별로 당시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골목 주류문화를 꽃피웠던 1970년대 선술집을 재현하여 정과 흥, 그리고 문학과 예술이 함께하는 선술집 문화를 엿볼 수 있고, 군 막사에는 군대의 희로애락 역시 고스란히 재현해뒀다.이곳이 세트장과 다른 점은 풍경 곳곳에 마네킹 크기만 한 인형을 배치해 놓았다는 점. 구멍가게와 전파사, 국밥집, 복덕방의 공간 속에다 인형을 집어넣는 것으로 낡은 흑백 사진 속의 풍경을 완성해 놓았다.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 이름) 교실의 풍경이며, 남녀 학생이 미팅하는 빵집, 경찰과 취객이 실랑이를 벌이는 파출소, 장발의 DJ가 있던 옛날식 커피숍, 가위를 들고 아이들을 부르는 엿장수 등의 모습이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든다.애초부터 관람시설로 만든 곳이라 체험 거리가 풍성하다. 연탄불 위에 설탕을 녹여서 만드는 달고나도 있고, 구워 먹는 쫀드기도 있다. 잘 오려서 옷을 갈아입히는 종이 인형이나 주사위를 굴리며 놀던 뱀 주사위 놀이판도 판다. ‘초등학교’에서는 교복과 교련복을 빌려 입을 수도 있다. 과거의 공간 속에서 보고, 먹고, 사진을 찍으면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박물관 관계자는 “기존 딱딱하고 보기만 하는 박물관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관람객이 옛 골목길을 걸으며 직접 체험하고, 함께 호흡하고 살아 숨 쉬는 체험형 박물관을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토함산의 현재 경주 자연휴양림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토함산 자연휴양림은 경주 3대 성산의 하나인 토함산 남쪽 기슭 깊은 계곡에 있으며 소나무 등 침엽수림 외에 다양한 활엽수와 수목이 자생하고 있다. 1997년 7월에 개장한 토함산 자연휴양림은 천연원시림 안에서 산림욕과 보건 휴양을 할 수 있으며, 특히 활엽수 산림욕이 유명하다. 전체 면적은 123만㎡, 1일 수용인원은 300명이다. 가벼운 등산이나 삼림욕을 겸해 캠핑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다양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자생하고 있으며, 각종 야생동물이 있어 자연체험 학습장으로 제격이다. 캠핑장에는 일반 야영장 40면을 마련했다.휴양림에는 5.18㎞의 등산로를 비롯해 숲속의 완만한 경사면에 야영장이 있고, 숲속의 집, 삼림욕장, 전망대, 체력단련시설, 배드민턴장, 물놀이장, 활터, 씨름터, 산림욕장, 어린이놀이터, 캠프파이어장 등을 갖추었고, 임산물판매장, 민속놀이마당 등이 있다.바닥은 모두 데크로 이뤄졌으며, 사이트 크기는 가로 3m, 세로 3.5m부터 가로 4.7m, 세로 4.2m까지 다양하다.근처에는 신라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인 불국사(사적 및 명승 1)와 석굴암(국보 24), 문무대왕릉(사적 158), 감은사지, 보문관광단지 등 많은 문화유적과 관광지가 있다.◇토함산의 미래 경주 풍력발전토함산의 이웃 산인 조항산 정상부에는 경주 풍력발전이 있다.친환경 청정에너지 생산을 위해 한국동서발전과 동국SC가 건설한 상업용 풍력발전단지로 총 7기의 풍력발전기가 가동 중이다. 풍력발전기는 바람개비 모양을 하고 있다. 말이 ‘바람개비’이지 사실 ‘바람개비’라고 하기엔 너무 크다. 80m 높이의 타워 꼭대기에 무게 11톤, 직경 95m의 거대한 날개가 회전하는 이 피조물의 정식 명칭은 ‘풍력발전기’. 가까이서 올려다보면 거대하다 못해 위엄까지 넘친다. 그러나 조금만 뒤로 물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발전기는 어느새 작은 동산에 꽂혀있는 앙증맞은 바람개비로 변한다. 게다가 하늘과 바다의 푸른색을 배경으로 삼으면 그 풍광이 가히 목가적이다.1만여 가구가 쓸 수 있는 양인 평균 4만 mwh 정도의 전력을 연간 생산한다.산 능선을 따라 띄엄띄엄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는데 ‘바람의 언덕’으로 부르는 이 일대를 365일 일반에 개방하고 있다. 풍력발전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자 ‘경풍루’가 있는 전망대와 함께 바람길 산책로, 피크닉 테이블 존 등이 갖추어져 있다.굽이굽이 만들어져 있는 바람길을 따라가다 보면 억새와 갈대처럼 가을 정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경주풍력발전 ‘바람의언덕’은 일몰, 노을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어 해 질 무렵 찾아보길 권한다. 전망대, 바람길 산책로 등 곳곳에서 석양을 감상하기 좋다. 더러는 일몰 후 조금 더 기다려 별빛 쏟아지는 낭만적인 밤까지 즐기고 가는 이들도 많다./최병일 작가

2022-10-30

‘석조미술의 꽃’ 석가탑과 다보탑… 신라인들 시대정신 표현

◇비례와 비대칭의 조화 석가탑과 다보탑신라시대의 석탑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이미 지난 연재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지만 이번 회에서는 신라 석탑사에서 가진 의미에 한정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대웅전 앞에 동서로 자리 잡은 석가탑과 다보탑의 아름다움은 완벽한 비례와 서로 다른 비대칭을 통한 조화의 미에 있다”고 했다. 석가탑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는데, 이는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인도의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탑 주변에는 장대석을 두르고 8개의 연꽃을 조각해 주위에 놓았다. 이곳은 석가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드는 대중들이 앉는 자리다. 3층으로 우뚝 솟은 외관에서는 당당함이 느껴진다. 반면 다보탑은 갖가지 보석이 장식돼 있고 수천의 난간과 감실이 있다. 난간과 감실, 연꽃, 꽃술 등을 절묘한 형태로 고안해냈다. 다보탑은 땅에서 솟아난 탑이기에 위부터 살펴보면 원→팔각→사각이라는 구성으로 진행된다. 세부 조각이 정교해 화강암을 다듬어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이렇게 서로 다른 비대칭의 쌍탑은 지대석의 너비와 기단과 탑신의 높이가 일치한다. 석가탑은 직선적이고 단순하며, 다보탑은 곡선적이고 복잡한 구조로 비대칭을 보이지만 양 탑이 모두 동일한 높이와 체감의 대칭을 지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움을 통해 진리를 표현하려 했던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이 이 쌍탑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신 관장은 석가탑과 다보탑이 법화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동아시아로 전래 된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읽혔던 경전은 ‘법화경(法華經)’이다. ‘법화경’에서는 다른 경전보다 많은 부분에 걸쳐 불탑 공양과 그 공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법화경’에서 불국토는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으로 완성된다. 즉 석가여래가 진리의 법인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가 그것이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땅속에서 보탑의 모습으로 솟아난다.석가탑과 다보탑은 이처럼 ‘법화경’을 통해 가장 극적인 장면을 담은 ‘견보탑품(見寶塔品)’에 의거 해 만들어졌다. ‘법화경’, ‘견보탑품’의 극적인 내용은 일찍이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아 많은 석굴 내 조각과 벽화로 조성됐다.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의 만남을 현실 공간에 탑으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경전에서 말하는 탑의 형태를 독창적 예술로 승화한 것이 석가탑과 다보탑이다.두 탑은 기하학적인 비례를 보인다. 완전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불국사가 43당척을 기준으로 정연한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데, 석가탑과 다보탑도 마찬가지로 43당척의 1/3이 양 탑의 지복석의 길이와 비슷하며 이를 기준을 설계했다.미술사학자들은 석가탑의 경우 7세기 감은사지탑 등에서 보이는 초기 전형 양식의 장중함에서 씩씩함만을 거두어 수려함을 덧입혔다고 평가한다. 석가탑은 8세기 석탑의 전형 양식이다. 이는 이후 우리 석탑의 보편 양식으로 계승되면서 우리의 미감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다보탑은 난간과 기둥, 지붕으로 구성된 누각식 건축으로 이국적이며 공예적이다. 탑은 기단부터 차례로 사각, 팔각, 원형의 기하학적 평면이 균형 있게 중첩됐다. 각 층은 다양한 모습의 난간, 기둥 등의 부재가 벽체로 막힘없이 결구 돼 내·외 공간이 겹쳐진다. 무엇보다 다보탑은 다양한 기교를 발휘할 수 있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잇고 있다. 돌을 떡 주무르듯 해서 만든 최고의 작품으로 당시 석탑 예술의 최절정이라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팔각면석의 독특한 석불사 석탑석불사에 있는 삼층석탑은 해발 565m, 석불사 석굴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언덕 위에 있다. 석불사 삼층석탑이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스님들이 수도하는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사전 통보 없이 방문하는 경우 출입할 수 없다.석불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만든 석탑으로, 높이가 3.03m이다. 일제강점기에 무너질 위험이 있어 해체·복원한 바 있고, 1963년 기단부가 파묻혀 일부 복원했다. 기단은 2중이며 면석이 팔각으로 된 점이 다른 탑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대부분 신라시대 석탑 받침돌은 정사각형이다. 그러나 석굴암 삼층석탑 받침돌은 두 겹, 즉 이층이며 둥글다. 나머지 3층으로 된 몸돌과 지붕돌은 4각의 일반 석탑들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다. 기단 위 탑신은 일반형 탑과 같은 방형으로 탑신과 옥개가 각각 1매로 돼 있다. 기단의 높이가 1.2m로 탑 전체 높이의 약 5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원과 팔각, 사각으로 이루어진 평면의 균형과 탑신부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삼층석탑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911호로 지정됐다.마동삼층석탑은 불국사 서북쪽 언덕의 밭 가운데 서 있는 탑이다. 경주 마동에 있어서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마동삼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대략 8세기 후반으로 추측된다.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탑의 꼭대기 층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이 있다.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의 복발(覆鉢)을 제외한 부분은 없어졌다. 탑의 총 높이는 5.4m다. 기단은 2겹으로 쌓되 아래 기단의 돌 위에 포개어 얹은 납작한 돌(갑돌)과 가운데 돌은 각각 8매의 돌을 짜 맞추어 만들었다. 처마와 처마가 맞닿은 전각(轉角) 모서리와 아랫면에는 풍경을 달아매기 위해서 뚫은 구멍이 각각 7개씩 1조(組)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석탑이 있는 곳은‘삼국유사’권5, 대성효이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조에 기록된 장수사(長壽寺)의 옛터라고 전한다.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은 무술을 닦을 때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큰 곰을 잡았다. 날이 저물어 현재의 석탑이 있는 부근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날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말하기를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라고 했다. 대성이 겁에 질려 용서해달라고 빌었더니 귀신은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지어주겠는가?”라고 물었다.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김대성은 일체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해 이곳에 절을 짓고 몽성사(夢成寺)라고 했다가 뒤에 장수사라고 개명했다.마동삼층석탑은 한국 석탑의 전형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이 없는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의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8부중신 조각 이채로운 숭복사지 석탑경주시 외동면 토함산(吐含山) 기슭에 있었던 숭복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파진찬을 지낸 김원량이 창건한 사찰이다. 숭복사는 원래 ‘곡사(鵠寺)’라 했다. 원성왕이 죽자 이곳에 능을 만들고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겼다.숭복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문에 남아 있다. 헌강왕 때 이 절의 이름을 대숭복사로 했다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지만, 절터에서 발견된 기와편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근래까지 절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다가 1931년, 세상에 알려졌다. 1931∼1935년 사이에 발견된 비편(碑片)을 통해 이곳이 숭복사지임을 알게 됐다. 이 숭복사 비편은 그 뒤로도 절터와 골동품점 등에서 잇달아 발견돼 현재까지 13편이 남아 있다. 총 100자에 달하는 글씨가 판독됐다.숭복사지에는 동서로 탑 2기가 있다. 숭복사지 삼층석탑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기단부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양각돼 있고, 1층 옥신의 4면에는 문비(門扉)가 조각돼 있다. 각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이 4단으로 된 삼층석탑이다. 동탑은 서탑과 같은 크기와 양식으로 보이나 현재는 일부 파괴된 기단부와 1층 옥신, 2개의 옥개석만 남아 있다.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어 아래·위층 기단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특히 위층 기단에는 기둥 조각 사이의 면마다 8부중신(八部衆神·불가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한다는 여덟 무리의 수호신)의 모습을 조각했다. 탑신의 몸돌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 네 면에는 문(門)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 받침을 두었다.현재 두 탑은 일부 석재가 파괴되거나 없어진 채 남아 있다. 동탑은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층 몸돌과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서탑도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3층 몸돌과 3층 지붕돌,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토함산의 석탑들은 불교사원과 동시에 건립됐음을 알 수 있다. 토함산이 신라의 동악으로 숭상받아 오면서 왜구를 물리치는 진산 역할을 했던 만큼 사찰은 물론 석탑도 호국 성향이 짙었다. 또한 토함산의 석탑은 기존 석탑 양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양식을 창출한 석탑의 발원지이기도 했다./최병일 작가

2022-10-24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 삼층석탑의 시원이 된 감은사지석탑

◇통일신라 불교문화의 상징 석탑신라시대는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웠던 시기였던 만큼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비롯해 수많은 사찰이 건립됐다. 경주에 천년고찰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불국을 꿈꾸었던 신라인들의 열정적인 불교 사랑에 기초했다. 경주에 석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설혹 사찰이 무너져 폐사지가 돼도 절의 근간이었던 석탑만은 굳건히 사찰을 지키고 있다. 석탑은 돌로 만든 불교식 탑이다.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탑을 세운 뒤 자신의 사리를 그 속에 보관하라고 하면서 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사리란 화장한 뒤에 남은 뼈(유골)를 말한다. 현대적 의미로 탑은 유골함인 셈이다. 탑 속에는 사리 외에도 옷가지와 발우, 문서 등도 함께 넣었다. 석탑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면 탑의 몸체를 받쳐주는 기단부가 있고, 탑의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부와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로 나뉜다. 보통 탑신부 안에 빈 공간을 만들고 부처님이나 이름 높은 스님의 사리를 보관했다.상륜부는 장식용 조형물인데 대개 위에서부터 보주, 용차, 수연, 보개, 보륜으로 나뉜다. 바퀴처럼 생긴 조형물을 보륜(寶輪)이라고 한다. 그 위에 왕관처럼 생긴 모자 모양의 보개(寶蓋)가 얹어져 있다. 보개 위에는 꽃씨 주머니 형태 혹은 불꽃 모양의 수연(水煙)이 있고 그 위에는 동그란 구슬 모양의 용차(龍車)와 보주(寶珠)가 자리한다.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4세기 무렵에는 목탑을 많이 만들었지만 7세기부터는 석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목탑은 아무래도 보존하기 힘들고 화재에 취약했기 때문이다.벽돌로 만든 전탑이나 돌을 벽돌처럼 쌓아 만든 모전 석탑, 청동으로 만든 청동탑, 쇠로 만든 금동탑 등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석탑이 가장 많다. 석탑은 불탑의 중심이었다.인도와 중국이 전탑, 일본이 목탑이 많았던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 석탑이 유독 많은 이유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고 돌을 잘 다루는 석공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석탑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백제는 목탑 형태가 많았고 신라는 전탑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9층 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신라 경주의 분황사지 9층모전석탑에서 알 수 있듯 규모도 크고 모양도 제각각이었다.통일신라의 새로운 불교문화는 삼국통일 후 20여 년간 당나라와 전쟁을 끝낸 680년쯤부터 시작됐다.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에 당나라 문화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통일신라의 석탑은 679년 건립된 사천왕사 목탑과 682년에 건립된 감은사삼층석탑에서 기본을 이루었다. ◇감은사지 석탑이 삼층석탑의 시원통일신라시대에는 이전의 탑 건축보다 재료가 다양해졌다. 석탑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목탑과 전탑, 금동탑들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 이후 점차 탑의 규모가 작아졌으며 쌍탑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형태도 뚜렷하게 변화가 있었다.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석탑인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전형적이었다. 이 양식은 건립 이후 약 250여 년간 지속된다.통일신라시대는 다른 어떤 시기보다 많은 양의 탑이 건립됐다. 경주지역에 머물던 탑 건축은 9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감은사지석탑은 통일신라 전(全)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진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이 됐다. 석탑은 백제에서 시작됐으나 재료가 석재였을 뿐 목탑의 구조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복잡한 목조 구조 형식의 석탑에서 거대한 판석을 다듬어 조합하는 판석식 석탑으로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도 감은사지 석탑이 시발점이었다.요즘 말로 감은사지 석탑이 미니멀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다 보니 번잡하고 불필요한 건축 요소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기를 중심으로 많은 양의 석탑이 건립됐기 때문에 거대한 석탑보다 소형석탑이 대량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먼저 결구 방식이 변화했다고 밝혔다. 백제의 석탑과 8세기 이전 통일신라 초기 석탑은 기둥과 면석 지붕돌이 모두 다른 돌로 조각 결합 돼 있다. 8세기 이후의 석탑은 기단 덮개돌은 하층과 상층이 각각 8매, 4매의 돌로 결합 돼 있으나 기단 면석에는 기둥과 면석이 하나의 돌에 함께 조각돼 있다. 9세기에 이르면 탑의 부재는 더욱 간단해져 하층과 상층 기단 면석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각각 1매의 돌로 결구했으며, 심지어 탑신과 지붕돌을 같은 돌로 조각해 쌓기도 했다.이전 시대에 비해 탑의 비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감은사지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과 같은 초기의 삼층석탑에서 2중 기단과 탑신은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지표의 점유 면적을 넓혔다. 8세기 이후 불국사 석가탑을 기점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이 동시에 추구됐다. 9세기 이후의 석탑은 안정감보다는 상승감만을 강조해 기단과 탑신이 가늘고 길게 (細長形) 변화했다. 단층기단 석탑이 자연 암반이나 토단 위에 건립되는 것도 가늘고 길게 만드는 비례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같은 세장형의 탑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그대로 전승됐다.8세기 이후 석탑의 공예화, 조각화가 이루어지는데, 조각상이 탑 표면에 나타난 것도 통일신라시대 탑의 특징이다. 토함산에 건립된 석탑에서 인왕상, 팔부중상을 새긴 석탑이 나타난다. 9세기 이후에는 탑의 크기가 더욱 축소되면서 좀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미려고 하는 공예적 요소가 나타난다. 석굴암 삼층석탑의 경우에는 기존의 형태를 탈피해 건축한 토함산 석탑 예술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통일신라석탑은 8세기 이후에는 심오한 불교사상을 배경으로 독특한 형태의 독창적인 탑들이 만들어졌다. 불국사다보탑은 기단부터 탑신, 상륜에 이르기까지 화강암을 다듬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다. 동일형태의 쌍탑이 일반화돼 있던 신라시대에 불국사다보탑과 같은 이형석탑은 불교미술의 토대가 되는 경전에 충실했다. 표현에 있어서는 다른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창안과 파격을 시도한 통일신라 탑파미술의 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호국적 성격을 띤 토함산의 석탑들현재 토함산 일대에 남아있는 불교사찰과 그곳에 건립된 석탑은 10기 남짓이지만 토함산 외곽으로 약간만 범위를 넓혀도 두 배가 넘는 많은 탑이 건립됐다.신용철 양산박물관장은 “토함산 석탑의 분포는 고대부터 발전했던 교통로와 그것을 중심으로 건립된 사찰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신 관장은 고대 교통로로 신라 및 통일신라 시기의 수도를 일컫는 신라왕경에서 동해구(東海口, 토함산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 동해로 들어가는 하구 일대를 가리키는 말)에 이르는 길과 왕경에서 울산을 잇는 토함산 서쪽을 따라 진행하는 길이 있다고 밝혔다.먼저 신라왕경에서 동해구까지의 길에는 장항리사지 오층석탑과 만호봉사지 석탑이 있다. 두 석탑은 문무왕의 장례처인 동해구와 감은사에서 구해온 만파식적에서 알 수 있듯이 호국적인 성격을 띤다. 게다가 이 탑들은 탑신부 4면에 인왕상을 배치해 호국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신라왕경에서 울산을 잇는 토함산 서쪽을 지나는 길을 따라 형성된 사찰의 탑들은 석가탑과 다보탑, 마동 삼층석탑 등인데 신라탑파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토함산에 있는 석탑 중 이미 언급한 석가탑과 다보탑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석탑을 언급하라면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을 들 수 있다. 장항리사지 오층석탑은 이미 지난 회 폐사지 편에서도 언급한 석탑이다. 동탑은 계곡에 붕괴된 상태로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해 금당터와 서탑 사이에 부재를 모아두었다. 서탑은 1923년 도굴범이 사리장치를 탈취할 목적으로 폭파한 것을 1932년 복원했다.여기서 다시 장항리사지 석탑을 언급하는 것은 이 석탑이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이행과정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장항리사지 이전 석탑은 대개 각 부분을 여러 개의 판석으로 조립·제작한 것과 달리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제작했다. 즉 탑 부분을 결구하는 결구식 탑에서 완성된 부재를 쌓아 올리는 누적식 탑으로의 이행이 이 석탑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만호봉사지(일명 시부걸사지) 석탑은 사실 어디에 있었는지도 불분명하다. 인왕상이 부조된 돌기둥 상을 출토한 절터가 만호봉사지가 아닐까하는 추측이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1층에 전시하고 있다. 인왕상은 모두 나신의 상반신으로 중앙을 향해 몸을 꺾은 역동적인 자세로 모두 권법인을 취하고 있다. 하나의 상은 오른손에 보주를 쥐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유물 카드에는 1930년 10월 인왕상 석주 4기가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박물관으로 반입된 것으로 돼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의 조사보고서에는 1931년 6월 만호봉사지에 대해 “사지는 만호봉 중턱에 남면을 하고 있으며 탑 잔석의 파편이 그 계곡에 있다. 옮겨진 탑 조각 잔석은 여기서 옮겨진 것으로 전한다”라고 돼 있다.학계에서는 만호봉에서 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만호봉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사지에는 옥개석 1매, 기단석 및 갑석의 일부가 남아있다./최병일 작가

2022-10-16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왕릉’

◇진위논란에 휩싸였던 신문왕릉경주의 왕릉은 아름답다. 무덤이 아름답다는 말은 썩 어울리지 않지만 신라왕릉을 갔다 온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둥그렇게 원형을 그린 언덕에 부드럽게 솟은 곡선은 주변의 수풀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시내에 있는 왕릉들은 현대적인 건물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죽음이란 두렵고 낯선 것이다. 하지만 왕릉은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 아니다. 왕릉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왕릉은 죽음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 친근감까지 느껴지는 왕릉이라고 하면 신문왕릉이 으뜸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지난 호에도 언급했던 ‘만개의 파도를 잠재운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신화와 관련된 인물이다. 신문왕은 귀족들에게 주는 땅인 녹읍을 폐지해서 귀족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했다. 교육기관인 국학을 정비해 유교 교육을 행하고 지방행정과 군제를 정비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12년(692)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신문왕릉은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데 이전 시대 왕릉보다 장식물이 늘어나고 섬세한 조각들이 돋보인다.신문왕릉은 신문왕의 능이 아니라 아들인 효소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있다. 효소왕릉설의 근거는 황복사 삼층석탑의 금동사리함기에 두고 있다. 본래 황복사 삼층석탑은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했다. 몇 년 뒤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죽자 706년에 신문왕의 차남 성덕왕이 금동사리함에 불사리나 다라니경을 넣어 죽은 신문왕, 신목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경주 낭산 동쪽에 있는 황복사 터 옆에 능터가 있는데 그것이 진짜 신문왕의 능이라는 것이다. 이 능은 신라왕릉 주변을 장식하는 십이지신상이 파괴된 채로 흩어져 있었으며 봉분도 무너져 있었다. 구황동 왕릉지라 불리는 이 유적은 2017년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구황동 왕릉지는 왕이 묻힌 무덤이 아니라 미완성된 왕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신문왕릉이 사실은 효소왕릉이라는 견해는 빛을 잃었다. 이근직 전 경주대 교수는 황복사 터 동쪽에 있는 진평왕릉이 신문왕릉이라는 견해를 펼치기도 했다.왕릉의 주인이 정확하게 확인된 경우는 몇 기가 안된다. 선덕여왕릉과 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된 무열왕릉, 흥덕왕릉, 원성왕릉, 성덕왕릉, 헌덕왕릉 정도만 이견 없이 왕릉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증받았다. 대부분의 신라왕릉은 ‘OO왕릉으로 추정된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토함산 근방에 있는 대표적인 왕릉은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이다. 두 사람은 형제 관계로 신문왕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다. 32대 효소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고 효소왕이 승하하자 33대 성덕왕이 왕위를 이었다.효소왕은 이름이 이홍이며, 695년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 등 시장을 개설해서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와 일본 등과 활발하게 수교를 진행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왕릉은 둘레석도 없고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 무덤으로 아무런 특징이 없다.오히려 친동생인 성덕왕릉의 무덤이 외견상 더 화려하다. 둘레석은 물론이고 병풍처럼 판석을 삼각형 받침돌이 받치고 있다. 받침돌 사이에는 십이지신상도 있고 돌사자상과 석인상까지 있다. 왕릉 전방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대형 비석 받침인 귀부(龜趺)도 남아있다.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신문왕릉의 무덤이 효소왕릉이 아니냐는 주장도 왕릉이라기에는 효소왕릉이 너무 빈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무신상이 이채로운 원성왕릉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원성왕릉은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 중 방문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원성왕릉은 신라 38대 국왕 김경신의 능이다. 원성왕은 즉위한 후 지방행정 개혁을 단행해 총관을 도독으로 바꿨다. 무엇보다 신분으로 관리가 되는 족벌제를 타파하고 준 과거제도인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능력 있는 관리들을 대거 등용했다. 독서삼품과를 통한 관리제도의 개혁은 진골 귀족의 견제로 큰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독서삼품과는 신라 사회를 문치주의로 바꾸며 훗날 고려가 유교를 확립하고 과거 제도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또한 저수지의 효시가 된 벽골제를 증축하고 발해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원성왕은 798년 12월에 별세했다. 사후 왕의 유해를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화장한 후 왕의 유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 때문에 현재의 원성왕릉이 실제로 원성왕의 유해가 묻힌 곳이 맞느냐는 논쟁이 일기도 했다.왕릉을 조성한 자리에는 본래 곡사라는 절의 연못이 있던 자리인데 연못을 메워 능을 조성했다. 능자리가 샘이 솟는 곳이다 보니 물이 괴어 왕의 시신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했다. 궁리를 거듭하다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시신을 안치했다. 이런 이유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掛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연못에 돌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었다는 것이 유력한 설로 내려오고 있다.실제로 괘릉에 가면 능 뒤편으로 깎은 석축에서 물이 흐르는데,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수로를 따로 만들었음을 볼 수 있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둘레석(護石)이 빙 둘러 있다. 이 돌에 무복을 입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돼 있다.한때 괘릉은 문무왕의 가묘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문무왕은 왕의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해서 동해바다에 뿌렸다지만 제사를 지낼 장소가 필요했을 터이고, 괘릉이 물과 관련된 설화가 있는 만큼 문무왕의 가묘가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일견 설득력이 있지만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발견되면서 원성왕릉으로 인정됐다.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완성도가 높고 보존상태가 뛰어나기로 손꼽힌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이나 여러 석물은 그야말로 괘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유물들이다.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는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됐다. 경주 원성왕릉을 중심으로 좌·우 입구에 한 쌍씩 석조상들이 배치돼 있으며 문·무인 4점, 사자상 4점, 석주 2점으로 총 10점이다.호인상(胡人像)이나 석사자 등 석물의 구성, 괘릉의 앞에 놓인 단면 육각형 기둥, 그리고 무덤과 배치 관계를 보면 당나라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해도 될 만큼 당의 왕릉과 많이 닮았다. 신라 후기부터 당의 복식이나 일부 제도들을 모방했으므로, 당나라 묘제를 왕의 무덤에도 비슷하게 적용했다고 보고 있다.석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 모습을 한 무인상이다. 무인상은 소그드인(페르시아인)으로 추정된다. 무인상은 동서문화의 교류적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무인상은 외투 안쪽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있다. 뒤쪽에는 복주머니 같은 것을 둘렀는데 계산기 역할을 하는 주판 등을 넣는 산낭(算囊)이라고 추정된다. 성덕대왕 능 석인상을 계승한 원성왕릉 문·무인상들은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절정이다. ◇네모 형태의 독특한 구정동 방형분효소왕릉과 성덕왕릉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구정동 방형분은 독특한 고분 중 하나다. 엄밀하게 말하면 구정동 방형분은 신라 왕릉이 아니다. 경주 신라왕릉은 대부분 둥근 구형인데 이 무덤은 방형(네모 모양)으로 조성됐다. 당시 방형 무덤은 장군총이나 태왕릉 모양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식 왕릉의 특징 중 하나다. 방형 무덤의 주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고구려의 왕족으로 통일신라에서 벼슬을 얻어 귀족이 된 안승이나 그 후손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그러나 네모 모양이라는 점 외에 내부는 전형적인 신라 후기 굴식 돌방무덤이다. 무덤 외부의 호석 십이지신상이나 무인상, 사자상도 신라 후기 왕릉 양식이다.무덤 한쪽에 안으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는데 내부는 이미 도굴당해 돌로 만든 관만 있고 텅 비어있다. 내부가 열려있어 들어가서 볼 수 있다. 쪼그려 앉아 내부를 살피니 지하실 특유의 냄새와 습기가 밀려온다. 앞쪽 중앙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지만 입구가 낮고 좁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네 모서리에 기둥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이 기둥에 원성왕릉의 무인상과 같은 이방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은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 경주 월지의 입수쌍조문 사자공작무늬 돌 등과 함께 통일신라와 서역이 교류했던 증거로 꼽힌다. 이 기둥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전시하고 있다./최병일 작가

2022-10-10

거대한 공간 속 잠든 왕, 굽은 소나무 호위병 돼 지키고

◇ 경주 시내만 36기의 왕릉이 존재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 왕릉으로 향했다. 구불구불 우아한 자태로 세월을 이겨낸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봉긋 구릉이 솟았다. 무덤은 모두 5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비인 알영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까지 한자리에 모인 무덤. 그래서 이름도 오릉이다. 오릉은 신라 왕실 무덤의 시조다.경주는 ‘신라왕릉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라 건국의 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해 경주 시내에만 왕릉이 36기나 된다. 왕릉은 왕의 무덤이다. 살아있을 때 권력의 정점에 섰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거대한 공간 속에 잠들어 있다.신라왕릉의 무덤 옆은 거의 어김없이 소나무 숲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능의 소나무는 신기하게도 능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숙이고 있다. 마치 충성스런 호위병 같다. 소나무 숲을 거닐다 보면 신라왕들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소곤거리는 대화가 들리는 듯하다. 왕릉은 떠난 이들이 영면하는 장소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산 자들도 즐겨 찾는 공간이 됐다. 신라의 왕릉이 처음부터 거대한 구릉 형태의 무덤은 아니었다. 신라 초기에는 주로 고인돌 형태였다가 지하에 판석이나 강돌을 함께 섞어서 장방형의 석관 시설을 갖춘 석관묘(돌널무덤)로 진화했다. 왕을 마립간이라고 부르던 시대에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왕릉을 조성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관이 중심에 있고 부장품들과 함께 묻을 것들을 주변에 놓은 다음, 다시 큰 목관 위에 냇돌을 쌓아, 그 위에 봉토를 덮은 형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굴식돌방무덤(석실묘)으로 변했다. 굴식돌방무덤은 쉽게 말하면 무덤에 방을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돌로 방과 통로를 만들고 흙을 덮어서 만든 무덤으로 널방에 벽화가 남아있다. 벽화의 주제는 사신도, 신라인들의 생활 모습, 천문 등 다양했다.굴식 돌방무덤은 신라가 불교 국가화되면서 무덤 크기도 이전보다 작아졌다. 불교식으로 화장해서 부장품도 단순했다. 유골만 담은 뼈 항아리와 간단한 흙 인형 정도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경주의 신라왕릉이 고구려와 백제 시대 왕릉에 비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은 돌무지덧널무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입구가 따로 없어서 구조가 견고하고 도굴범이 침입하기 어렵다는 게 특징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뤄 고구려나 백제보다 왕조가 수백 년이나 지속되었다는 점도 신라왕릉이 지금까지 견고하게 자리는 지키는 원동력이 됐다.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왕릉 중 시가지 주변에 있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의 경우 대부분 도굴된 적이 없었고 부장품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규모가 작은 고분이나 경주 외곽 산지 고분은 일부 도굴 사례가 있으나, 대체로 다른 왕조의 고분에 비하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신라시대에 왕은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56대 왕인 경순왕까지 모두 56명이었다. 이 중 화장을 한 왕은 문무왕(30대), 효성왕(34대), 원성왕(38대), 진성왕(51대), 효공왕(52대), 신덕왕(53대), 경명왕(54) 등이다. 화장했으니 당연히 무덤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문무왕만은 화장해 유골을 동해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는데,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했다. 일종의 수중왕릉인 셈인데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다. 능이 없거나 소재지가 명확하지 않은 왕도 16명이나 된다.물론 고구려의 동명왕릉, 백제의 무령왕릉만이 전해지는 것에 비하면 신라의 왕릉은 역사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석탈해왕도 풍수지리 활용초기 신라왕릉은 흙 봉분 외에 따로 비석이나 자연석 같은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다. 무열왕릉부터 비석을 세우고 봉토 밑에 자연석으로 둘레에 호석을 설치했다. 신문왕릉부터는 문인상, 무인상, 십이지신상 등 수호석을 장식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원성왕릉과 흥덕왕릉 시기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능묘 제도가 거의 완성되었다고 본다.조선시대 왕릉은 대개 풍수지리를 따져서 소위 명당자리에 묘를 썼다. 그렇다면 신라왕릉은 어떤 자리에 묘를 썼을까? 풍수지리는 도읍·궁택·무덤의 터를 잡기 위해 점을 치는 일종의 관상학인 까닭에 상지학(相地學)으로 규정되며, 본래는 대지의 신을 믿는 지모신(地母神)적인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삼국시대 이전에도 풍수지리는 이미 일상에 파고든 상태였다. 토함의 수호신인 석탈해가 반월성(半月城) 쪽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를 참고했다는 사실은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동해안으로 들어와 한동안 한지부(漢祗部)에 머무르던 석탈해는 하루는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땅을 선정하려 했다. 양산 아래 호공(瓠公)의 집터가 길한 땅임을 알고, 계략을 써서 그곳을 빼앗아 거주한 것도 풍수지리에 능통했기 때문이다.탈해에 관한 기사만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풍수지리설이 유행했다 할 수는 없지만, 당대에 풍수지리적 지식이 민간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풍수지리적 지식은 궁실이나 왕릉·사찰 등의 터를 선정하는 데 중요하게 쓰였다. 원성왕릉을 위시해 오늘날 전해지는 왕릉이나 절터가 모두 풍수지리설의 조건에 맞는 곳이 있으니 말이다.원성왕릉의 경우 지하수가 흐르는 땅에 묘를 썼다. 이는 풍수지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묘 아래로 물이 흐르는 곳은 흉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풍수지리에 대한 관념이 신라시대에는 조금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통일신라 말기 대학자인 최치원이 글씨를 쓰고 비문도 세운 숭복사비(崇福寺碑)의 내용에 따르면 왕릉을 정하는 기준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에는 왕릉을 만들 때 좋은 땅을 찾아 토지를 구입해 관청과 고을 사람에게 명해 가시를 베고, 소나무를 심어 꾸미는 과정이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르면 능색전(陵色典)이라는 왕릉 관리 관청을 따로 설치해 왕릉 입지 선정과 향후 관리가 체계적으로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경주 신라왕릉은 오릉을 중심으로 서남산지구에 11기가 있고, 동남산지구에 2기, 선도악지구에 6기, 금강산 지구에 2기, 낭산과 토함산지구에 모두 9기가 있다.◇ 업적에 비해 단출한 선덕여왕릉토함산지구에 있는 왕릉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선덕여왕릉이다. 선덕여왕릉은 정확하게 말하면 토함산이 아니라 낭산(狼山)에 있다.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점 외에도 재위 시절 다양한 업적을 쌓은 군주였다. 그녀는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했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했다. 업적에 비해 저평가를 받아서인지 선덕여왕릉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아랫부분에 자연석 석축 2~3단만 쌓았을 뿐이다.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은 신라 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천명 공주와 덕만 공주였다. 덕만 공주가 선덕여왕에 올랐는데, 여성이 최초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신라의 폐쇄적인 신분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성골만 오를 수 있었다. 성골의 경우 성골과 성골 사이에서 태어날 때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의 성골 신분은 덕만 공주와 함께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승만 공주(진덕여왕) 뿐이었다.선덕여왕의 치세 기간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신라 문화의 꽃을 피웠지만 백제의 의자왕에게 마두성을 포함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기기도 했다.647년에는 비담의 난을 겪기도 했다.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분은 ‘여자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의미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여성 군주에 대한 입지가 좁았음을 알 수 있다.선덕여왕을 떠올리면 결혼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음갈문왕(飮葛文王)’과 결혼한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만 아이는 낳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선덕여왕은 재위 중 여러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유언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도리천이 어디냐고 하자 선덕여왕은 “낭산 기슭이 도리천”이라 일러주었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 꼭대기로, 사천왕 위에 있는 부처님의 세계다. 인간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유언에 따라 낭산에 왕릉을 만든 지 32년 후, 능 아래쪽에 사천왕사가 지어졌다. 여왕이 잠든 곳이 ‘도리천’임이 증명된 것이다. /최병일 작가

2022-10-03

동해에서 만파식적 얻은 신문왕이 쉬어갔다는 기림사

◇부처님의 수행처 ‘기림’이 절 이름토함산은 불국사와 석불사 외에도 19개소에 달하는 사찰이나 불교 유적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기림사와 골굴사는 반드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찰들이다. 양북면 호암리에 있는 기림사는 ‘토함산이 동해의 안개를 마시고 내뿜으면 그것을 흡수하여 담아낸다’는 함월산 자락에 있다. 신라 신문왕이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얻은 다음 왕궁으로 돌아갈 때 기림사 앞 개울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절이기도 하다. 해방 전까지는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린 큰절이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불국사의 말사가 됐다.부처님이 수행하던 시절 인도에는 ‘죽림정사’와 ‘기원정사’가 있었다. 부처님은 20년 넘게 기원정사에 머물렀는데 그 정사가 있던 숲을 기림(祇林)이라 불렀다. 이곳 기림사도 부처님이 정진했던 기림에서 왔다. 기림사는 신라 초기 천축국(인도)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창건 당시 기림사의 이름은 임정사(林井寺)였다. 우물 정(井)으로 절 이름을 지었듯 이 절의 사적기(事跡記)에는 다섯 가지 맛을 내는 오종수(五種水)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적광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 옆 장군수를 마시면 신체가 튼튼하고 기개가 있는 장군이 나온다는 이야기 내려온다. 장군수는 장군(독립운동가)의 출현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메워버렸다고 한다. 오종수는 장군수를 비롯해 물맛이 좋은 오탁수, 눈이 맑아지는 명안수, 마음이 편안해지는 화정수, 단 이슬과 같은 감로수인데 지금은 화정수만 기세 좋게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다섯 가지 물은 차를 달이는 최고의 물로 알려져 있다. 기림사는 창건 초기부터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오종수를 길어 부처님께 차를 다려 공양하는 것(獻茶)을 수행법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기림사 약사전에는 국내 유일의 헌다벽화(獻茶壁畫)가 있다. 이 절의 역사가 차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희귀한 그림이다. 임정사는 이후 원효대사가 절(도량)을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칭했다. 창건 시기는 선덕여왕 12년(643년)으로, 1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풍스런 사찰이다. 철종 14년(1863년), 본사와 요사채 113칸이 불타 없어졌는데 당시 지방관이던 송정화가 중건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림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고색창연한 대적광전을 비롯, 수령 500년 이상 된 큰 보리수나무와 목탑 터가 있는 지역과 성보 박물관, 삼성각, 명부전, 관음전 등이 있는 지역이다.선덕여왕 때 건립된 후 무려 8차례나 중건한 대적광전(大寂光殿)은 기림사의 주 건물로 정면 문짝에는 소슬 빗살로 문양을 만든 꽃 창살이 아주 예쁘게 장식돼 있다. 단청은 입히지 않았지만 채색을 한 어느 꽃보다 아름다워 몰래 떼어가고 싶을 정도다. 소박하면서도 단아하다. 부안 내소사 꽃살문이 천하일품이라 하지만 기림사의 꽃살문도 이에 못지않다. 대적광전은 이전에는 대웅전이란 명칭을 사용하다가 ‘진리’를 의미하는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을 모시면서 대적광전으로 명칭을 바꿨다.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대덕광전 안에 모셔진 3불로서 중앙이 비로자나불이고 좌측이 약사불, 우측이 아미타불이다. 이 부처님들은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다시 금칠 한 것이다.대적광전의 적(寂)은 번뇌가 없는 고요한 진리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월당 김시습의 영당도 있는 곳대적광전 오른쪽에는 응진전과 목탑 자리가 있다. 오백나한을 모신 응진전은 각기 다른 모습의 나한(부처님의 제자)이 모셔져 있다. 나한의 모습이 개성이 강하고 사실적이어서 앞에 서 있으면 마치 말이라도 걸어올 것만 같다.마당에는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어진 기림사 삼층석탑이 있다. 불국사의 다보탑이나 석가탑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삼층석탑 지붕돌에는 세월의 더깨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기단의 오른쪽은 주저앉았고 받침돌 가운데는 홈이 파여 있다.기림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관음전이다. 천수 천안(千手 天眼)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인데 수많은 손과 눈이 마치 공작이 날개를 펼친 것 같다. 천수 천안은 수많은 중생을 보아야 하고 수많은 중생에 손을 내밀어 구제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대적광전 왼쪽에는 약사전과 진남루가 있다. 진남루는 ‘남쪽을 제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남쪽은 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전략적 요충지로 의병과 승병이 활동하던 진원지 역할을 했으며 승군지휘소도 이곳에 있었다. 삼천불전의 부처님은 불상마다 수인이 다르다. 삼천불전은 특이하게 고려청자 빛깔의 불상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부처님이 어디에나 항상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건칠보살반가상(乾漆菩薩半跏像)은 기림사 내 유물전시관에 보존돼 있는데 누구나 들어가서 무료 관람할 수 있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고 그 위에 삼베를 감고 다시 진흙을 바른 다음, 옷칠을 반복해서 만든 후 속의 진흙을 빼 버린 부처님이다. 국내에는 건칠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가치가 크다.기림사는 매월당 김시습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문 곳은 용장사였지만 매월당의 영당(사당)은 기림사에 있다. 매월당 생전에 인연이 없던 기림사에 영당이 차려진 이유는 용장사에서 치루던 제사가 고종의 금령으로 철거되자 경주 유림들이 이를 애석해하며 기림사 경내에 영당을 재건했기 때문이다.김시습은 원래 유학자였지만 단종 3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세상사에 뜻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해 전국을 유랑했다고 한다.기림사 마당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보리수가 자란다. 목탑이 있던 자리에서 나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이 눈물겹기만 하다. ◇‘한국의 소림사’ 골굴사기림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골굴사는 선무도로 잘 알려진 절이다. 절 입구에는 다양한 선무도 동작을 한 조각들이 열을 지어 전시돼 있다. 역동적인 입구부터 10여 분 정도 올라가니 골굴사 사찰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글이 보였다.선무도는 스님들의 참선 수행 방법 중 하나다.달마대사가 중국의 소림무술을 창안한 것처럼 우리 선승들이 깊은 산속에서 면벽수행(벽을 보면서 참선을 하는 것)을 하며 산짐승들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 한국형 무술 선무도다. 국난이 닥쳤을 때는 스님도 승군이 되어 전쟁터에 나섰는데 선무도를 익힌 스님들은 그들을 이끄는 중추 역할을 했다고 한다.일주문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골굴사와 선무도 대학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골굴사는 불교문화 체험 프로그램인 ‘템플스테이’가 생겨나기도 전인 1992년부터 선무도 수행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선무도 대학은 불교 무술로 알려진 선무도를 체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골굴사 주지 적운 스님이 설립한 곳이다.골굴사는 기림사를 창건한 광유 일행이 자연 굴을 다듬어 만든 국내 최초의 석굴사원이다. 석불사의 석굴보다 기원이 오래된 석굴인 셈이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화가 정선은 이곳을 배경으로 유명한 ‘골굴석굴도’를 남기기도 했다.골굴암이 세워진 이곳은 옛날 화산 분출로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암석은 비바람에 약해 쉽게 깎여나간다.암석이 비바람에 깎일 때 암석 안의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 빠져나가 수많은 구멍이 생겼다. 이 구멍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졌다. 이런 구멍들이 수없이 발달한 것을 ‘타포니(tafoni)’라고 부르는데, 골굴사의 골굴암은 타포니 동굴을 다듬어서 석실을 만들고 불상을 배치한 석굴이다.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신라인들이 암석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대웅전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바위벽을 타고 감실에 부처님이 모셔져있다. 자연 석굴에 지붕을 얹어 만든 간이 법당이다. 인공석굴로 가는 길은 제법 높이가 있는 돌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부처님께 향하는 길이 가파르고 길어 마치 한걸음, 한걸음 험난한 수행의 여정을 떠나는 것 같다.석회암에는 모두 12개의 석굴이 있다. 굴마다 작은 불상이 있거나 설법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암벽 제일 꼭대기에는 마애불상이 온화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높이는 약 4m, 너비는 약2.2m다. 곱슬머리인 나발의 정수리에는 상투(육계)가 있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왼손은 단전에 오른손은 손상된 모습이지만 오른쪽 무릎으로 향하고 있다.감실 밑 작은 석굴에는 원효대사가 열반에 든 법당굴이 있다. 겉모습은 일반 법당과 비슷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천장도 벽도 모두 석굴로 돼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사가 입적한 뒤 아들 설총은 아버지의 뼈를 갈아 실물 크기의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설총은 한때 법당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최병일 작가

2022-09-26

감은사지, 문무대왕의 왜구 격퇴 염원 서려 압도적 장엄함

◇항왜의 정신을 담아 건설한 감은사폐사지는 아무리 번성했던 절터라 해도 처연한 느낌이 든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흔적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폐사지는 풀 섶에 탑만 홀연히 서 있거나 돌덩어리나 기왓조각만 쓸쓸하게 흩어져 있다.그 텅 빈 공간에 무슨 아름다움이 남아 있을까 싶지만 폐사지를 방문하게 되면 묘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다.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풍경소리와 염불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고 향 내음이 나는 것 같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진작가이자 폐사지 여행전문가였던 이지누 선생은 “폐사지는 무엇을 외우는 곳이 아니라 교리나 절의 역사 이런 것 다 떼놓고, 천년 세월을 품은 주춧돌 위에 앉아 느끼는 곳”이라고 했다.그런 점에서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感恩寺)지는 진정한 울림을 주는 폐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감은사지는 혼자 있어도 다른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적막함이나 쓸쓸함이 없다. 감은사지에서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장엄하게 서 있는 두 개의 석탑이다. 장대하고 압도적이다. 몇 개의 유구와 두 개의 삼층 석탑(국보 제112호)만 있는데도 드넓은 사적지가 꽉 찬 느낌이다. 유홍준 교수 말처럼 쌍탑이 연출하는 공간감이 장중하고 드라마틱하다. 탑은 부처님의 무덤이다. 부도탑이나 주춧돌, 기단석도 폐사지의 풍경을 이루지만 탑만 있어도 부처님의 형상이 느껴질 정도로 존재감이 확실하다.신라는 ‘탑의 나라’라 할 정도로 수많은 탑이 있다. 그 중 좌우에 같은 탑을 세우는 감은사의 쌍탑 1금당 형식이 수많은 사찰 가람배치의 표준이 됐다. 불국사 석가탑이 완벽한 조형미의 절정이라면 감은사 쌍탑은 석가탑으로 향하는 신라미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셈이다.감은사지 석탑이 삼층탑이라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백제의 정림사지나 의성 탑리의 석탑 장항리 석탑은 모두 오층석탑이다. 삼층석탑보다 오층석탑이 더 시각적으로 입체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삼층석탑을 만든 이유는 통일된 새 국가의 이미지에 맞는 탑을 건설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보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된 탑이 새 시대에 각광 받았다는 것이다. 삼층 밖에 안되는 탑에 상승하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지대석을 사용했다. 상·하 지대석은 층수에 포함되지 않지만, 안정감을 주면서 동시에 상승감도 주는 역할을 한다. 상층부에는 길이가 3.9m나 되는 철찰주를 꽂았다.감은사탑은 우리나라 삼층석탑 중 가장 큰 규모로 총 높이가 무려 13m나 된다. 철찰주를 제외하고도 무려 9.1m나 되는 장중한 스케일을 자랑한다.감은사지는 토함산에서 발원해 양북면을 가로질러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의 하류에 있다. 감은사는 문무대왕의 왜구 퇴치의 염원이 담긴 절이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통일 군주 문무왕은 바다 건너 왜(倭)가 무거운 걱정거리였다. 왜의 침입은 신라를 초기부터 괴롭혔다.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대왕이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를 격퇴하고자 감은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다. 감은사의 원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였다. 하지만 불사 건축은 문무왕 생전에 끝내지 못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문무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된 뒤 동해에 안장됐으며,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불사를 이어받아 682년에 감은사를 완공했다.원래 감은사지 금당터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용혈)을 하나 뚫었다고 한다. 용이 된 문무대왕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었다. 감은사지 동쪽의 봉길해수욕장 맞은편에는 작은 바위섬이 있는데, 이곳이 왕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보관한 대왕암(大王岩)이다. 문무대왕릉(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문무대왕을 참배하기 위해 만든 작은 정자 이견대(利見臺)가 있다.이견대는 ‘주역’의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利見臺人), 하늘을 나는 용이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라는 의미의 글귀에서 따온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커다란 용이 바다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 건물은 1970년에 발굴조사 된 초석에 근거해 1979년 새로 지은 것이다.감은사는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다와 물길이 이어지게 만든 구조 등을 보아 문무대왕릉과 함께 세트로 계획,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감은사를 완성한 신문왕은 동해에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 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문왕은 이견대에 와서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했다. 그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그런 이유로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명작 고선사탑경주시 보덕동 암곡리 경주박물관 뒤뜰에 있는 고선사탑은 감은사 석탑과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모양이 닮았다. 스케일과 형태는 거의 감은사탑과 비슷한데 하늘을 찌를 듯한 찰주가 없고 선의 마무리가 약간 부드럽다. 좌중을 압도하는 장중함은 감은사탑 못지않다.원래 고선사탑이 있던 고선사지는 토함산 북쪽 기슭의 암곡동에 있었다. 1975년 덕동호가 건설되면서 암곡동 고선사터가 물에 잠기면서 고선사터에 흩어져 있던 여러 문화재와 삼층석탑과 비석 받침 등을 국립 경주박물관 야외로 옮기게 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명작인 고선사탑이 감은사지 석탑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고선사는 신라 신문왕(681~692) 때 원효대사가 주지 스님으로 계셨던 곳이다. 고선사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원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비문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비문을 지탱하던 비신 아래 거북이 모양의 받침 부분은 유실됐다가 1968년 경주시 동천동 인가 우물터에서 발견됐다. 동네 아낙들이 중요문화재인 것을 모르고 빨래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고려사에도 고선사가 나온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선사의 규모는 감은사보다 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금당터는 물론, 강단터와 중문터 등의 건물 규모가 상당하고 기와 전돌 등 수많은 문화재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추론하고 있다. ◇도굴범에 의해 훼손된 장항리사지토함산 동남쪽 계곡에 있는 장항리사지도 빼놓을 수 없는 통일신라시대 절터다. 절터가 있는 계곡은 대종천의 상류로 감은사터 앞을 지나 동해로 흘러간다. 절을 지은 연대나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데, 장항리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사지’ 혹은 ‘탑정사’라고 부르고 있다.절터에는 서탑인 오층석탑과 파괴된 동탑의 석재, 그리고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의 석조불대좌는 2단이다.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 모양이다. 서탑은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장항리사지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금광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발파 작업을 위해 다이너마이트가 이용됐다. 1923년 도굴꾼이 서탑의 사리장엄구와 불상 내부의 복장물(腹藏物)을 노리고 광산에서 훔쳐 온 다이너마이트로 탑과 불상을 폭파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약 10여 년간 불상과 탑은 파손돼 흩어진 채로 방치됐다. 1932년 서탑을 복원하고 파손된 불상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탑은 1966년 대종천 계곡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모아 복구했다.장항리사지는 계곡 사이의 좁은 공간을 이용해 쌍탑을 세우고 그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을 보이나, 아직 강당과 회랑의 자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병일 작가

2022-09-19

한국문학 거장 동리와 목월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다

□동리목월 경주가 낳은 위대한 문인토함산은 수많은 예술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토함산에 깃들어 있는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인물은 수없이 많았다. 토함산과 불국사, 석불사를 가장 화려하게 표현한 이는 상허 이태준이었다. ‘조선의 모파상’이라 불리던 천재 소설가답게 그가 표현한 토함산은 매혹적이다. 김동리 선생 김동리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 ‘화랑의 후예’ 당선소설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등소재·정서에서 민족정신 ‘정수’ 느낄 수 있어작품 ‘을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박목월 시인 박목월경주의 자연, 문학적 상상력 터전과 자양분1954년 시 ‘불국사’ 발표불교적 선 의식 바탕 절제된 언어로 그려내동리·조지훈과의 인연이 맺어진 곳도 경주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 펴내 “산의 고요함은 엄숙한 경지였고 잠이 깊이 들지 못함은 소리 없는 여명을 놓칠까 함이었다. 우리들은 보송보송한 채 중보다도 먼저 일어나 하늘이 트기를 기다렸다. 하늘이 튼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사람으로는 모래알만큼 적어서 기다리고나 있어야 할 거대한 탄생이었다. 몇만 리 긴 성에 화광(火光)이 뜨듯 동해언저리가 벙짓이 금이 도는 듯하더니 은하색 광채가 번져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 어둠은 둘레둘레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나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토함산과 불국사를 사랑했던 또 다른 인물은 경주가 낳은 한국문학의 거장 김동리와 박목월이다. 토함산 불국사 주차장과 관광안내소를 지나면 동리목월문학관 이정표가 보인다. 불국사 정문 앞 작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너른 마당에 푸른 기와의 동리목월문학관이 서 있다. 동리목월문학관은 2006년 건립됐고, 두 위대한 문인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문학상도 제정했다. 문학관 로비 왼쪽의 동리문학관과 오른쪽의 목월문학관이 마주 보고 있다. 마치 쌍둥이처럼 닮은 두 곳의 문학관은 문인의 흉상과 서재가 재현돼 있고 자필 원고, 문학 자료, 생활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넓이도 각각 224.7㎡로 동일하다.이곳에는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유족들로부터 기증받은 자료가 소장돼 있다. 두 작가의 자필 원고 200점, 시집·소설집 등 문학 자료 1천500여 점, 생활 유품 250여 점 등 국내 문학관 중 가장 많은 자료가 있다.‘동리문학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김동리(金東里·1913~1995) 흉상과 마주한다. 흉상 뒤편에는 ‘동리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라는 이어령 교수의 글이 적혀 있다.김동리는 1913년 경상북도 월성군 경주읍 성건리 186번지에서 아버지 김임수와 어머니 허임순의 5남매 중 3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시종(金始鍾)이다. 김동리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고, 어머니는 그런 현실을 피해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다. 김동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1934년 신춘문예 공고를 보고 각 신문사의 상금을 모두 타볼 작정으로 한 달 만에 소설 3편, 희곡 2편, 시 3편, 시조 3편을 써서 응모하는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만 가작으로 뽑힌다. 1935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고,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다솔사와 해인사 등에서 은거한다.동리의 작품 소재와 정서에서 민족정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등은 대부분 고향 마을 경주에서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들이었다. 특히 ‘을화’는 토착문화의 전통을 인류의 보편성으로 인정받으면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문학관에는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그의 작품과 손때 묻은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박목월에게 시적인 영감을 준 경주‘목월문학관’에서도 시인 박목월(朴木月·1915~1978)의 흉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흉상 뒤에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란 시구가 적혀 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시 ‘나그네’다. 문학관에는 시인의 생애와 문학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연보가 걸려있다. 목월문학관에는 친필 원고와 서신, 시집, 동시집, 산문집과 시인이 직접 발행한 잡지 ‘심상’과 ‘여학생’, 시인이 받은 훈장과 상패, 감사패 등이 전시돼 있다. 한국 문단의 거목이자 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진 시인은 경북 월성군(지금의 경주) 서면 모량리에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면 수남리다. 본명은 영종(泳鍾)이다. 1933년 동시 ‘통딱딱 통짝짝’과 ‘제비맞이’가 특선·당선되며 문단에 등단한다.그는 자연과 교감하면서 향토적인 서정을 작품에 담았다. 특히 그에게 경주의 산과 하늘, 자연은 그의 문학적 상상력의 터전인 동시에 시의 자양분이 됐다. 목월문학관은 박목월의 작품 시기를 초기·중기·후기로 나눠 구성했다. 초기 시는 자연과 향토적인 정서를 배경으로 창작한 작품들이다. ‘윤사월’과 ‘청노루’, ‘나그네’와 ‘산도화’ 등이 초기 시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중기와 후기 시는 삶에 대한 찬가와 문명 비평적 경향성을 띠고 있다.박목월은 경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이곳에서 시적 영감을 얻었다. 그런 이유로 목월문학관에서 경주를 배경으로 한 시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는 토함산을 시로 표현하면서 “밤 골짜기의 물소리./구름이 밝혀든 초롱을/아아 동해너머로 둥둥 떠가는 진보라빛 환한 봉우리 하나”라고 노래했다.목월의 아들 박동규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놀러 갔던 불국사에 대한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초등학생 시절 아버지 회사에서 불국사로 야유회를 간 적이 있다. 신발을 살 여유조차 없던 때라 어머니는 야유회 전날 시장에서 옥양목을 끊어다 내 모자와 신발을 만들어주셨다. 먼 길을 걷느라 내 발에서 피가 났고 천으로 된 신발은 붉게 젖었다. 아버지는 뒤늦게 이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놈아 내가 너의 아버지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괜찮아’하면서 등을 내미셨다.” 박 교수는 “그날 땀이 흥건한 아버지의 등에 업혀 토함산을 올랐고 집까지 업혀 왔다”며 “내 뺨에 아직도 아버지의 땀이 묻어있다. 그 땀에 사랑의 본질이 감춰져 있다”고 회상했다.그런 아들이 15세가 되던 1954년 목월은 시 ‘불국사’를 발표했다.“흰 달빛/자하문(紫霞門)//달 안개/물 소리//대웅전(大雄殿)/큰 보살//바람 소리/솔 소리//범영루(泛影樓)/뜬 구름//흐는 히/젖는데//흰 달빛/자하문//바람 소리/물 소리”목월의 자연 친화 사상과 불교적 선(禪) 의식을 바탕으로 한 이 시는 달빛이 내려 비치는 불국사의 고요한 정경을 절제된 언어로 그려냈다.불국사 청운교, 백운교를 건너면 자하문(紫霞門)이 나온다. 자하문에서 범영루(泛影樓) 좌경루를 지나 금당 옆문으로 들어가서 부처님을 친견한다. 긴 회랑들은 자하문, 범영루, 경루, 강당 등 큰 건물들과 어깨를 겨누고 둘러서서 대웅전과 탑을 중심에 두고 감싸고 있다.이런 전각들의 구조적 짜임새를 눈여겨봤던 목월의 탁월한 안목은 차치하고, 시에 등장하는 흰 달빛과 달안개, 솔 소리, 뜬 그림자 등은 불국사를 자주 드나들지 않았다면 보기 힘든 절경 중 절경이다. □목월, 김동리와 조지훈과 경주로 맺어지다김동리와 교류가 이뤄진 곳도 경주였다. 김동리는 박목월보다 세 살 위다. 대구 계성학교에 2학년까지 다니다 서울 경신학교로 전학해 박목월의 중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경신학교에 다니던 김동리가 휴학해 경주로 내려와 있던 1934년의 겨울방학 때였다. 목월은 동리가 1935년과 1936년 연이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학적 자극을 받았다. 동리와의 만남으로 외로움을 벗어나기도 했지만 문학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시인 조지훈과의 지극한 인연의 시작점도 경주였다. 시 ‘승무’의 조지훈 시인도 월정사에서 1년여를 살다 나와 이듬해 봄 목월을 만나기 위해 경주를 찾았다. 서로 일면식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발표한 시를 통해 문학의 깊이를 알고 있었다. 목월이 기차역에서 한지에 ‘박목월’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써서 들고 있자 지훈이 이를 알아봤다. 당시 목월은 스물여섯, 지훈은 네 살 아래인 스물 두 살이었다.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두 시인은 이렇게 처음 만나 따뜻한 ‘문학적 동지’가 됐다. 지훈은 열흘 넘게 경주에 머물렀다. 불국사를 답사하던 중 석굴암 앞에서 촬영한 사진은 지금도 회자 된다.황금찬 시인은 박목월과 조지훈 시인이 석불사(석굴암)로 올라가던 날을 ‘석굴암 가던 날은 대숲에 복사꽃이 피고 진눈깨비가 뿌리는 희한한 날이었다. 불국사 나무 그늘 찬술에 취하여 떨리는 봄옷 외투를 덮어주던 목월의 체온이 생각난다’고 회고한다.조지훈은 경주에서 보름이나 머물렀다. 이때 조지훈은 경주에서 머물며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목월에게 바치는 한 편의 시를 썼다.“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칠백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이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완화삼’ 전문)‘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를 보내자, 목월은 ‘나그네’라는 시로 화답했다. 두 시인의 만남은 광복 후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으로 꽃을 피운다.경주 토함산과 불국사, 석불사는 단지 역사의 아이콘일 뿐만 아니라 서정주, 박목월, 김동리 등 당대 최고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모여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위대한 작품을 생산해 낸 문학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최병일 작가

2022-09-04

작은 석굴 사원에서 최고의 예술적 성취를 느끼다

□ 감실 안의 석상 엄격한 좌우대칭의 형식석불사는 돌로 만든 작은 석굴 사원이다. 인도의 아잔타나 중국의 둔황 석굴 사원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규모지만 조형미나 예술적 성취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 수준의 성취를 보인다.석불사를 보수하면서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석불의 훼손을 우려해 석불 입구를 아예 유리로 막아버렸다. 석불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본존불과 사천왕상 등의 일부 조각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석실 내부는 시각적인 제약으로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사진까지 찍을 수 없어서 석불사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석불의 구조는 사각형의 앞방을 지나면 뒷방으로 이어지는 이중구조다. 통로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사천왕이 자리고 잡고 원형의 뒷방으로 들어가면 방 벽면에 여러 불상들이 좌우 대칭으로 새겨져 있다. 둥근 천정은 360개의 넓적한 돌로 교묘하게 축조되어 있다.석굴 내부에는 다양한 조상(彫像 조각상)들이 있다. 먼저 석굴의 둥근 주실은 석불 조성의 뜻이 총집중되어 있는 공간이다. 석불사에는 본존인 여래좌상1구를 중심으로 팔부신중상(8구) 인왕상(2구) 사천왕상(4구) 천부상(2구) 보상상(3구) 나한상(10구) 감실좌상 등이 있다.이 많은 상들은 엄격한 좌우대칭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석굴을 반으로 접으면 완벽하게 겹치게 했다. 이와 같은 좌우 대칭은 고대 조형미술에서 지켜온 하나의 기본원칙이다.전문가들은 석불사의 변화무쌍하면서도 안정감있고 통일성을 보이는 사찰의 모습은 유례가 없다고 했다.우선 석불사 본존불부터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본존 부처님은 높이 총 326㎝ 대좌 높이 160㎝ 기단 상대석 폭은 272㎝의 거대한 불상이다.본존불은 세계문화유산가운데 종교성과 예술성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조각했지만 모난 곳 없이 부드럽게 빚어낸 솜씨는 가히 명불허전이다.우선 석불사 석불은 나선형의 나발과 삼도를 하고 있다. 나발(螺髮)이란 소라 나(螺)와 머리털 발(髮)이다. 원래 인도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위로 거둬 모아 상투를 틀고,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 터번을 둘렀다. 더위나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나발은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아 올려진 머리카락 모양을 말하며, 육계는 그런 나발들을 정수리에서 묶어 세운 상투를 의미한다.석불의 목 주위에는 3개의 주름이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삼도(三道)라 한다. 이는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을 뜻하는 탐진치(貪瞋癡)나 삼독(三毒) 또는 중생들이 살아가다 죽고 이후 윤회(다시 태어남)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세 가지 단계인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를 뜻한다고도 한다.석불의 눈은 가늘고 길다 눈썹은 온화하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석불의 인자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숭고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다. □ “시선의 원근을 고려해서 정밀하게 조각”석불의 머리는 마치 소라같은 그루터기가 가득 붙어있다. 원래 인도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위로 거둬 모아 상투를 틀고,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 터번을 둘렀다. 더위나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도는 계급사회, 자연히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높은 신분일수록 상투와 터번에 많은 금은보배를 장식했고, 이러다 보니 상투가 더 높아졌다. 초기 불상조각가들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머리카락을 정수리 부근에서 묶어 상투를(후일 육계란 명칭으로 불림) 만든 형태의 불상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상투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었으나, 불상 양식이 점차 정교해지면서 끈은 사라지고 상투만 표현됐다.머리에서 위에서 비치는 두광(頭光)에서는 진리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두광은 본존상과 분리되어 본당의 벽에 새겨졌는데 자세히 보면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다. 좌우는 224.2㎝임에 반하여 상하는 228.2㎝로 아래위가 긴 타원형이다. 실제는 타원이지만 참배객의 자리에서 보면 원형으로 보인다.일제시대 활동했던 천재 미술사가 이여성은 ‘석굴암 조각과 사실주의’라는 책에서 두광의 모습이 얼마나 절묘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서술하고 있다. “두광의 연판은 상부와 하부의 소밀(疏密 성김과 빽빽함)의 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바 이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의 원근을 고려하여 먼 것은 세밀히 새기고 가까운 것은 드물게 새긴 것이다. 이것은 회화의 원소근대(遠小近代)의 원근법을 반대로 처리함으로써 시각상 착각을 피하고저 한 것인 만큼 그 용의가 얼마나 주도하였나(용의주도하였나) 하는 것을 능히 엿볼 수 있다.”고 했다.석불의 가사(부처님의 옷)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불상이나 승려가 가사를 입은 모습에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通肩)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우견편단이 있다.어깨는 둥글고 가슴은 알맞게 넓고 살결이 고와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하다. 허리는 잘록하여 늘씬한 세련미를 더하고 가부좌를 튼 다리는 안정감 있게 바탕을 이룬다. 곧추 세운 등은 기품 있는 자세를 형성하고 매초롬한 피부는 부드러운 건강미를 형성한다.불상의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항마촉지인이란 좌선할 때 오른손을 풀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을 말한다. 이는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얻었고 땅의 신(地神)이 이를 증명하였음을 상징하고 있다.수많은 사람들이 석불상에 매혹되었지만 그중에서도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의 글은 가히 압권이다.“누가 능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 뜻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불상이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무런 착잡한 수법도 보지 못한다. …모든 의미는 그 단정한 용모에 모여 있다. 그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입은 다물고 눈은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어둡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석굴안에 앉아서 깊은 좌선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간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무의 경지이다. 어떠한 참된 것도 어떠한 아름다움도 이순간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일제의 한국강점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난하고 조선의 문화유산을 사랑한 대표적인 일본 미학자답게 석불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남김없이 쏟아놓고 있다.그렇다면 본존불은 어떤 부처님일까? 석가모니불인지 아미타여래인지 혹은 비로자나불인지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모습에 비추어 석가여래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황수영 박사같은 이는 아미타여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부처님 제자와 불법신 등 다양한 석상석굴 내부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입상도 석불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석실 내부에 모두 8구가 조각되어 있는 팔부신장(八部神將)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을 말한다. 원래는 8구가 모두 온전했는데 동쪽 끝의 2구가 석벽이 무너져 파손되고 매몰되었다. 이후 일제 초기에 복원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팔부신장은 각각 아수라(1상)를 중심으로 용신(4상), 금시조라고도 불리는 가루라(5상) 같은 인도 신화 속에 나오는 존재들이다.주실 입구에는 금강역사 입상이 양측에 1구씩 배치되어 있다. 2구 모두 한쪽 팔을 들어 주먹을 쥐었고 다른 손은 내리고 있다. 마치 무예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듯한 모습이다. 석굴에 이르는 짧은 통로 남북 양벽에는 대부분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사천왕상 4구가 조각되어 있다. 천왕은 무복을 입고 3개의 상은 모두 긴 칼을 잡았는데 그중 북쪽의 상만은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굴 안에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2개의 천부상이 있다. 첫 번째 안치된 상은 민간 신앙에서 가옥 안에 있다고 믿는 제석(帝釋)이며 그 반대쪽(남쪽)은 범천(梵天)이다. 범천은 인도 고대 신화에 나오는 만유의 근원인 브라마를 신격화한 우주의 창조신으로서 비슈누, 시바와 함께 3대 신으로 불리며 이후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천부상 옆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도래하고 있다. 이들 2구의 보살은 석굴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석굴 뒷벽 중앙에는 십일면관음상이 있다. 이름 그대로 머리가 십이면으로 되어 있는데 중생들의 성품에 따라 얼굴 모습을 달리하여 적극적으로 교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십일면관음상 좌우로 5구씩 부처님의 십대 제자가 배치되어있다. 십대 제자의 모습은 인도 사람의 특징이 그대로 보인다. 높은 코와 깊은 눈이 인상적이다.제자들은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마하가전연, 아나률, 우파리, 라후라, 아난타 등 불교인들이라면 능히 알만한 인물들이다. 이들 석상은 모두 머리를 깎고 발목까지 걸쳐진 가사를 입었으며 두 어깨를 걸치거나(통견), 오른쪽 어깨를 나타내고 있다.(우견편단)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다. 어떤 이는 향로를 또 어떤 이는 승려들이 공양(식사)할 때 사용하는 식기인 발우(鉢盂), 또 어떤 이는 목이 긴 형태의 물병인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미술사학자 고유섭은 “우리는 무엇보다도 잊어서 안될 작품으로 경주의 불상을 갖고 있다.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귀중한 보물은 이 석굴암의 불상이다”라고 말했다. 유리속의 본존불 앞에 서서 차가운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신라인들을 생각했다. 높고 낮음 없는 부처님의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이 신비로운 석불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최병일 작가

2022-08-28

“석불, 수리적 비례에 기반한 美 의 만다라”

□자연 활용해 습기 제거한 신라인의 지혜석불사의 석불은 예술적 측면에서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1000년 전 신라인들의 과학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지난호에도 언급했듯이 석불사 발견 이후 보수작업을 하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습기 제거였다. 일제가 석불사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콘크리트를 사용해 석굴암의 외벽을 막은 것은 당시 기술의 한계라고 해도 현재까지 석불사 습기 제거 문제는 뚜렷하게 개선된 것이 없다. 1963년대엔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크리트 외벽 바깥으로 약 1m의 공간을 두고 다시 콘크리트 돔을 씌웠다. 하지만 이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실내에 에어컨을 설치해 습도 조절을 해야 했다.첨단 건축기법을 사용해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했음에도 석불사의 습기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경덕왕 때인 8세기 중엽 착공돼 무려 1천200여 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신라인들의 지혜와 과학적 수준을 경시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석불사의 습기 제거 원리는 자연의 원리에 순응한 것이었다.석불사 조성 당시 외벽에는 직경 10㎝가 넘는 자갈들이 1m가량 쌓여 있었다. 이 자갈층이 바로 석굴암의 습도를 조절하는 자동 제습 장치였던 것이다. 습기 차고 더운 외부 공기는 자갈층을 통과하면서 수증기가 응축돼 자갈에 남고 공기는 차가워진다. 자연의 원리를 이용한 에어컨인 셈이다. 이렇게 차가워진 공기는 밀도가 높아 자연히 아래쪽으로 흘러 석굴암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송풍기가 없어도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내부를 꾸준히 채우게 돼 석굴암 안은 항상 뽀송뽀송한 상태가 유지된 것이다.석불사 아래로 흐르던 지하수도 바닥 온도를 벽면의 온도보다 낮게 유지해 불상 표면에 맺히는 이슬(결로)현상을 막아주던 자동 제습기였던 셈이다.일제가 보수작업을 한다고 콘크리트로 돔을 만들고 지하수의 물길을 바꿔버린 것이 오히려 석굴암의 습기 문제를 일으켰다. 1963년 석불 보수 공사를 재개할 때도 지하수가 석불사 습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지하수의 물을 퍼내기 위해 동파이프를 묻어 석불사 밖으로 물을 빼내려고 했다.서울대학교 화학과 교수였던 이태녕 박사는 역사학회에 ‘석굴암의 구조와 습기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석굴암 석면(石面)의 결로현상은 석면의 온도 조절이 균형을 잃은 데서 일어난다. 일제 때 보수하기 이전(즉 원형)에는 석굴 밑에 있는 바닥 돌에서만 결로현상이 나타나고 풍화작용도 이곳에서만 심했다. 그러나 일제 때 두 차례에 걸친 보수 공사에서 바닥을 강회로 보강하고 샘물을 연관으로 돌리고 요석 뒷면에 콘크리트를 다져 넣었기 때문에 온도가 낮아야 할 바닥돌의 온도가 높아지고 반대로 요석 부분의 온도가 낮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벽면에 물기가 돌고 있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이태녕 박사는 신라인이 왜 석불사 지하에 샘을 만들었는지를 간파한 것이었다.신라인들은 단지 습기 문제만을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석굴 내부에 정체된 공기가 바깥 공기와 자연스럽게 순환할 수 있는 환기구를 만들었다. 환기구는 석불 본존불 어깨높이에 있다. 주변 벽에 감실 구멍이 10개가 뚫려있는데 이것이 자연의 환기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석불의 받침돌도 과학의 원리가 숨어 있다. 감실 폭이 받침돌보다 더 넓다. 석굴 내에 정체된 공기는 감실과 받침돌 사이에 생긴 틈 사이로 자연스럽게 순환한다. 이러한 공기 순환 방법은 석굴 안팎의 온도 차를 좁혀 습기를 자연스레 억제한다는 원리다.석굴 천장부에도 환기구가 있었다. 돔형 천장 천개석 부분에 작은 석재를 끼워 틈을 만들어 자연스러운 환기구 역할을 했다.내부로 들어오는 동안에 공기는 차가운 돌을 만나 습기를 빼앗겨 석굴 내부에는 제습된 공기가 들어오게 된다. 밤에는 반대로 작용해 건조해진 내부 공기가 돌에 맺힌 습기를 머금고 석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석불에 다양한 습기 제거 장치가 있음에도 석불사 외부를 콘크리트로 만들었으니 석불이 습기에 노출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일제시대와 박정희 시대에 있었던 두 번의 석굴암 보수 공사 때, 습기를 누수로 판단해 외벽에 2겹 콘크리트 돔을 만들고 석굴 안 샘물도 밖으로 뽑아내는 관을 설치했다. 이로써 석굴은 숨 쉴 구멍이 막히게 되었고 자연적인 습기 제거 시스템도 없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독창적인 석불석불사의 자연조명도 지금까지 논란이 일고 있는 부분이다. 원래 석불사는 돔형의 천장으로 막혀있는 구조이기에 태양광이 직접 닿을 수 없다. 그런데도 석불의 위엄을 신라인들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조명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신라인들은 반사광을 활용해 조명을 해결했다고 한다. 전실 부분이 개방된 상태에서 석굴 바닥 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일종의 거울효과를 낸 셈이다. 햇빛이 반짝이는 석굴 바닥 면에서 반사되어 석불사 구석구석을 비추게 만든 것이다.석불사는 구조에서도 신라 건축술의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신라인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반영해 지상 세계인 전실은 네모꼴로, 하늘 세계인 주실은 둥근 모양의 돔 천장으로 꾸몄다. 특히 천장은 네모난 판석들 사이에 비녀 모양의 긴 돌 30개를 박고 그 위에 잡석들을 쌓아 눌러줌으로써 힘의 균형을 보장하는 특이한 공법으로 완성했다. 신라인들은 당시 중근동이나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돔의 형태는 받아들이되 축조법은 우리 식으로 개조한 슬기를 발휘한 것이다. 석불사는 당시 천문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지를 가름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석불사는 직사각형 모양의 전실, 전실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부분인 비도, 본존불상이 있는 원형의 주실 등 3개소로 구성된다. 그중에서 특히 주실의 돔형 천장은 당시 천문학의 결정체다. 주실의 돔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을 상징하며, 지름 24척은 1일 24시간을 나타낸다고 한다. 석불사의 석불이 향하는 방향도 무수한 논쟁을 낳았다. 석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동남쪽 30도로 동해 바다의 수평선이 바라다보이는 장소다. 1960년대 석불사 보수 공사 총감독을 맡았던 황수영 박사는 석불이 문무대왕의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東海口)를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대왕암과 석불상을 왜의 침략에 대한 수호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천우 박사가 진단학보에 낸 ‘석굴암에서 망각된 고도의 신라과학’이라는 논문을 통해 석불의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29.4도)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동짓날 일출은 1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석불의 방향은 ‘일년의 시작’ 혹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천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원리가 숨어 있었던 셈이다. □천문과학적 원리까지 숨겨진 석불의 신비석불사에 천문과학적 원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밝혀낸 사람은 일본인 토목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였다. 193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고건축 측량을 맡았던 요네다가 기술한 짧은 논문인 ‘석굴암 석굴의 천체 표현사고’에 따르면 “석굴암의 평면은 석굴암 구성의 기본이 되는 반경12척(직경 24척으로 1일 24시간의 12각과 일치)의 원이다. 이는 1년 360일의 360도와 일치한다. 굴의 개구부 12척은 1일 12각과 일치한다. 또한 궁륭(활이나 무지개같이 한가운데가 높고 길게 굽은 형상. 아치 모양의 구조물) 천장은 같은 원둘레에 유구한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 중심에 원형(태양)과 큰 연꽃이 새겨져 있어 구면의 각판석 사이 전석(벽돌)은 모든 별자리의 별을 상징하고 있다”고 했다. 석불사는 석가모니가 상주하는 정토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석불사 전체는 인간이 느끼는 세계인 천체 우주를 보여준다는 것이다.요네다는 천문과학적인 측면뿐 아니라 석불이 수리적 비례에 기반한 미(美)의 만다라(蔓多羅)임을 최초로 실증해낸 위대한 심미안의 소유자였다. 그의 ‘조선상대건축의 연구’중에서 ‘경주 석굴암의 조영계획’은 석불사를 만든 신라인들의 정신세계를 수치로 재현시켜놓았다는 점에서 ‘석불학의 위대한 노작’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석불을 실제로 측면한 유일한 도면이기도 했다.요네다는 석굴 조영을 하면서 당시 신라인 기술자들이 사용했던 자에 주목했다. 자의 길이를 알아야 석불의 정확한 길이를 측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국사와 석불사를 측량한 수치와 그전에 있었던 보수 공사의 측량 결과를 토대로 신라 기술자들이 쓰던 자는 0.98곡척(29.7cm)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요네다는 이 길이를 당척(唐尺)이라고 이름 붙였다. 당시 당나라에서 쓰던 자의 길이와 동일했기 때문이었다.측량한 결과 본존불의 얼굴 너비는 2.2자, 가슴 폭은 4.4자, 어깨 폭은 6.6자, 결가부좌한 양 무릎의 너비는 8.8자였다. 이를 비율로 보니 1:2:3:4였다. 이 부분의 기준이 된 1.1자는 본존불 자체 총 높이의 10분의 1에 해당했다.인류는 헬레니즘 시대부터 건축은 물론 인체 조형에서도 각 부분의 크기에 비례배분을 설정해 인체의 안정감이나 균형을 꾀했다. 가장 이상적인 몸의 비례는 석불의 예와 같이 1:2:3:4의 비율이다. 본존불이 불상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완벽한 몸의 비례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병일 작가

2022-08-21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된 지고의 最美”

□생동감 넘치는 세계 유일의 인공 석축물“이윽고 공단 같은 짙은 어둠 위에 뿌연 환영이 드러나심, 그 부드러운 돌 빛, 그 부드러우면서도 육중하신 어깨와 팔과 손길 놓으심, 쳐다보는 순간마다 분명히 알리시는 미소, 전신이 여명이 쪼여질 때는, 이제 막 하강하신 듯, 자리 잡는 옷자락 소리 아직 풍기시는 듯. 어둠은 둘래 둘래 빠져나간다. 보살들의 드리운 옷 주름이 그어지고 도틈도틈 뺨과 손등들이 드러나고 멀리 앞산 기슭에서는 산새들이 둥지를 떠나 날아간다. 산등성이들이 생선가시 같다. 동해는 아직 첩첩한 구름갈피 속이다. 그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여명의 영주(領主)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태준의 수필 ‘여명(黎明)’의 일부 토함산에서 석불사(석굴암·이하 석불사)를 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유홍준 교수는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 됨을 이루는 지고의 최미(最美)”라고 극찬했다. 석불사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 이가 어찌 이태준과 유홍준 교수뿐이겠는가!유치환 시인은 ‘석불암 대불’에서 “목 놓아 터트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니/ 천년을 차가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라고 노래했다.미술적인 심미안이 부족한 필자의 눈에도 석불사의 석불은 놀라울 정도의 생동감이 느껴진다.‘우담바라’를 쓴 소설가 남지심은 “가까이에서 마주한 본존불의 얼굴은 분명 돌로 조각된 것인데,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 세포조직을 보는 것처럼 생동감이 느껴졌다. 감은 듯 보이던 눈은 선명하게 뜬 상태였고 금방이라도 숨소리가 들릴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이었다”고 석불의 모습을 묘사했다.석불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세계 유일의 인공 석축물이고,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신라 조각 미술의 정점이다.석불사의 잘못된 이름인 석굴암이 널리 알려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석불사를 암자로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실상 석굴사원에 가깝다. 석굴사원은 기원전 2세기경에 인도에서 시작해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유행했다. 주로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절벽에 조성되다 보니 시내의 사찰보다 보존 상태가 좋고, 많은 석굴사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아잔타 석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국의 원강 석굴, 맥적산 석굴 등이다. 우리나라에도 석불사를 비롯해 굴골암이 있고 경주 남산 칠불암과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제2석굴암), 양산시의 미타암이 있다. 석굴사원이 발달한 중국이나 인도에 비해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한반도가 조각하기 힘든 돌인 화감암과 석질이 단단한 청석(靑石)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조각 난이도가 높은 화감암으로 마치 살아 꿈틀대는 것 같은 매끄러운 석불을 깎은 것을 보면 한국인들의 손재주가 얼마나 탁월한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석불사는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시기 재상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작품의 완성도나 신비롭기 그지없는 불상의 모습만 보면 여러 세기에 걸쳐 사랑받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석불사에 대한 기록은 빈약하기 그지없다.신라시대 국가적 사업으로 지어졌지만 고려 건국 이후 귀족 세계에서 멀어진 석불사는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 간간이 언급된다. 조선 중기 유학자인 정시한(1625~1707)의 산중일기를 보면 “석문 밖 양쪽 바위에 각각 불상 4, 5위씩 새겨져 있는데 기이하고 묘한 것이 하늘이 빚은 듯하다. 석문은 돌을 무지개처럼 쌓아 올렸으며 그 가운데에 커다란 석불상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모셔져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석불사가 거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숙종 29년(1703), 영조 34년(1758)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크게 중수했다는 정도가 전부다. □제국주의 통치를 위해 석불사를 이용한 일제조선시대에 석불사가 세인의 기억에서 잊혀지게 된 것은 한양이 도읍지가 되면서 신라시대의 중심도시였던 경주가 평범한 지방 도시로 위상이 떨어졌기 때문이다.불교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석굴암도 해발고도 565m 산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히고 방치되었다.조선 말기에는 곳곳에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빈 절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틈을 타고 도굴꾼들이 사찰 문화재를 마구 탈취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나마 석불이 높은 산중에 있어서 도굴꾼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1902년 8월 세키노 타다시,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 일본제국의 유명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지만 석불사는 방문하지 않았다. 그만큼 석불사는 역사 속에서 존재가 희미했다. 조선 후기인 1891년 풍양 조씨 가문에서 석굴암이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한 우체부에 의해 석불사가 발견된 1907년까지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우체부는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까지 우편 배달을 가다 지금의 양북면 범곡리에서 능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석불사인지 몰랐던 그는 당국에 문화재처럼 보이는 물건이 있다고 신고했다. 당시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 사학자들이 석불을 찾았을 때는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했다.당시 조선은 일본과 서구 열강에 의해 수탈당하던 때라 석불암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던 시기였다. 하지만 조선을 식민지화하려고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던 일제는 석굴암에 주목했다. 비록 무너진 상태였지만 불교 조각의 걸작임을 알고 있었다.1910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산간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해 경성부로 옮긴 후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막상 해체를 시작해보니 돌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이전이 불가능했다.석불사의 발견과 함께 석불사에 대한 가치평가가 진행됐다. 일제는 석불사를 ‘조선고적도보’에 소개했다. 국어학자 안확의 글과 일본인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미술사에서도 석굴암을 부각했다. 당시 일본 최고의 민예 이론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석굴암 조각에 관하여’에서 석불을 ‘영원의 걸작’이라며 찬사를 보냈다.일제가 석불에 대해 집착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석굴암 등 신라의 미술문화를 한반도 문화의 최정점으로 두고 이후 문화가 점점 퇴락해 조선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조선은 퇴락하는 국가이고 일제가 석굴암의 가치를 재발견해 보수해 줄 정도로 고도로 문명화되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잘못된 보수로 인해 결로와 습기 생기기도조선 총독 데라우치는 석불사를 시찰한 뒤 보수하기로 결정하면서 일제의 야심찬 유적 복원이 시작되었다.이로 인해 석불사의 석굴은 창건 이래 처음으로 완전해체되어 수술대에 놓였다. 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했다. 1914년 8월 말에는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했다.수리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보호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덮어씌웠는데, 이는 나름대로 당대 최신 건축 기법을 이용한 첨단 수리 방법이었다. 문제는 콘크리트가 방수에는 탁월해도 방습에는 취약하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었다.콘크리트로 인해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가 커져 석불 내부에 습기가 더 많이 차고 이슬이 맺히는 결로 현상이 발생했다. 게다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암 벽을 손상시켰다.당시 공사를 주도한 사람들은 석공 전문가가 아니라 철도를 놓던 터널 공사 전문가였다. 당연히 석굴암에 의도된 설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이들이 방습을 위해 도입한 조치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보수공사가 끝나자마자 엄청난 결로와 이끼가 출몰했다. 습기에 노출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탄산염과 칼슘염이 누출되어 화강암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1917년에는 누수와 습기가 심해져 바닥과 천장 위까지 물이 스며들었다. 천장 방수를 위해 다시 보수공사를 했으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습기가 심해지면서 천장에 푸른 이끼까지 생겼다. 석불의 보수공사 비용만 무려 2만2천726원이었지만 결로나 이끼가 끼는 현상은 바로잡지 못하고, 이끼 세척과정에서 본존불을 비롯한 조각들이 마모되기까지 했다.결로 현상은 해방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아 급기야 1966년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런 상태로 석불을 개방했고 문제가 심각해지자 1976년에는 유리문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현재는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을 지나면서 보는 것만 가능하다. 습기와 바람에 따른 문화재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에는 현대 과학의 산물인 공기 순환 설비가 돌아가고 있다. 다만, 매년 단 하루 부처님 오신 날에만 예외적으로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날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마저도 내부에선 사진 촬영은 금지된 상황이다. /최병일 작가

2022-08-07

초의선사 머물며 추사 김정희와 아름다운 편지 나눠

□초의선사가 불국사 머물며 시 짓기도불국사는 통일신라시대 과학 기술의 수준과 건축술, 예술적 감수성이 오롯이 담겨 있는 시대의 걸작품이다. 오랜 역사를 버티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자리잡은 만큼 숨겨진 이야기가 풍부한 곳이기도 하다. 불국사와 관련된 유명인사 중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초의선사의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롭다. 추사 김정희는 잘 알려있듯이 추사체를 일군 조선 최고의 서예가다. 1817년 김정희는 우정을 나눈 초의선사와 경주에 머물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법명이 의순(1786~1866)으로 해남 대흥사의 제13대 종사이자 국내 다도의 중흥자로 유명한 스님이다. 다도만큼 학식도 높아서 추사 외에도 실학의 선구자인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마음의 위안을 준 덕승(德僧)이었다. 김정희와 초의선사는 서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깊게 교류했다. 그중에서도 초의선사가 불국사에 머물며 지은 시에는 김정희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장면이 나온다.불국사에서 옛일을 생각하며 9수 [佛國寺懷古 九首 丁丑六月在慶州]오래도록 순시하고 있는 그대가 못내 그리워 / 苦憶先生久在行자하문 밖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네 / 紫霞門外看新晴세상에서 불국은 차라리 얻기라도 쉽지만 / 佛國人間寧易得서로 만나 못 다한 정을 누릴 수 있을까 / 相邀始可遂閑情시를 받은 김정희는 당대 문장가 답게 아래 시를 써서 화답했다.초의의 불국사시 뒤에 쓰다 [題草衣佛國寺詩後]연지의 다보탑이 법흥의 연대라서 / 蓮地寶塔法興年선탑의 꽃 바람이 한결같이 아득하이 / 禪榻花風一惘然이게 바로 영양이 뿔을 걸어 놓은 데라 / 可是羚羊掛角處어느 누가 괴석에다 맑은 샘을 쏟았는고 / 誰將怪石注淸泉마지막 연의 괴석에 맑은 샘은 물은 수구를 통해 연지의 괴석 위로 떨어지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지금도 비가 내리는 날 불국사 청운교 옆에서 볼 수 있다. □이병기, 이태준 등 수많은 문인들이 경탄김정희와 초의선사가 주고받은 시의 소재가 된 불국사는 수많은 문학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우리 문학 속에 불국사가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제 강점기였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가치에 대해 주목한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고미술품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불국사를 일본의 유명사찰인 동대사나 청수사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절로 인식했던 것 같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경주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를 품은 보물같은 곳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고미술학자나 사학자들이 경주로 몰려들었다. 경주 붐이 일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왜 일본인들이 경주에 대해 경탄 하는지 알고 싶어서 경주를 하나둘 찾기 시작했다.조선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이 경주를 찾고 글을 남기자 그 뒤를 이어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오기 시작했다. 경주가 ‘수학여행 1번지’가 된 것도 이때 부터였다. 수학여행은 대체로 2박3일 코스였고, 불국사와 석굴암은 당시에도 중요 관람 코스 중 하나였다. 휘문고보 선생이었던 가람 이병기는 수학여행 인솔교사로 3번이나 경주를 방문했고 여행기를 언론 매체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병기 선생이 1927년 10월 조선일보에 연재한 ‘가을의 경주를 찾아서’에는 당시 불국사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주지 스님은 두어 상좌를 데리고 날마다 이 보배들을 구경하러 오는 손님네의 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염불도 할 겨를이 없는 모양이다”이병기 선생은 석굴암과 관련한 시조를 쓰기도 했다.한 고개 또 한 고개 고개를 헤어오다토함산 넘어 서서 동해바다 바라보고저믄날 돌아갈 길이 바쁜 줄을 모르네보고 보고 지어 이곳에 석굴암이험궂은 고개 넘어 굽이 굽이 도는 길을잦은 숨 잰 걸음 치며 오고 오고 하누나(석굴암(石窟庵) 전문)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집으로 불리는 ‘국경의 밤’을 간행한 파인(巴人) 김동환도 불국사를 사랑한 문인이었다. 유명잡지인 ‘삼천리’에 ‘불국사의 동백꽃’이라는 시와 ‘백마강과 불국사를 주제로 한 기행문, ‘불국사의 서전(瑞田) 황태자’라는 수필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현진건 불국사의 아름다움에 몰입했던 소설가는 ‘빈처’의 현진건이었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시절 고도순례(고도순례)-경주(1929)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신라 천년의 화려했던 역사를 지면 위에 살려냈다. 특히 불국사의 아름다운 정경과 석굴암의 빼어난 예술적 감각 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글은 지금까지도 명문(名文)으로 손꼽히고 있다. 불국사에 깊은 인상을 받은 현진건은 이후 석가탑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무영탑’이라는 소설을 내기도 했다.상허(尙虛) 이태준의 불국사 사랑도 현진건 못지않았다. 한국 근대문학의 첫 번째로 꼽는 명문장가인 그는 1935년 ‘조광’지에 발표한 ‘불국사 돌층계’라는 작품을 통해 불국사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신라 사람들이 밟던 층계로구나! 생각하니 그 댓돌마다 ‘쿵’ 울리면서 예전 사람들의 발자취 소리가 어느 틈에서고 풍겨 나올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떤 모양의 신발을 신었던 것일까? 그때 부인들의 치맛자락은 얼마나 고운 것이, 또 얼마나 긴 것이 이 층계를 쓰다듬으며 오르고 내린 것일까? 나는 아득한 환상에 잠기며 그 말 없는 돌층계를 폭양(暴陽) 아래에 수없이 오르고 내리고 하였다. 지나간 사람들 발자취, 우리는 어디서 그것을 만져 볼 것인가. 바람에 쓸리고 빗물에 닳았으되 그들이 밟던 돌층계만이 그래도 어루만지면 무슨 촉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어서 가을에 한번 다시 가서 그 돌층계를 만져도 보고 밟아도 보고 싶다.”- 수필 ‘불국사 돌층계’ 일부이태준의 단편 소설 ‘석양’에도 불국사가 나온다. 소설 속 여주인공 타옥에게 불국사는 절이라기엔 너무나 목가적인 서정이 무르녹아 있다. 청운교, 백운교의 흐르는 듯한 돌층계에는 곧 무희라도 나타나 춤추며 내려올 듯하다고 표현한다. 석가탑, 다보탑 두 탑과 범영루에 걸터앉아 흰 구름을 보기도 한다. 호텔에서 영지를 내려다보며 슬픈 전설을 통해 또한번 허무를 이야기한다. 불국사에서 사흘을 머물며 석굴암의 예술적 황홀감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십일면관음상의 손등을 만져보기도 한다.소설 속 이야기는 해운대에서 마무리되지만 경주가 주무대다. 오릉과 불국사, 석굴암 영지 등 유적지 명소들을 배경으로 남녀 간 사랑의 덧없음과 허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YMCA 야구단’ □영화 ‘YMCA 야구단’의 촬영지촬영지로도 불국사는 인기가 높았다. 1970년대 무협 홍콩 영화를 보면 불국사가 종종 소림사로 나올 때가 있다. 1978년 성룡이 출연한 ‘권정(금강혈인)’이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이 경직된 사회여서 본토 촬영이 불가능했고 홍콩 땅은 너무 좁아서 사찰을 배경으로 할 촬영지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전통건축이 비슷하게 생긴 한국에서 중국 무협 배경으로 촬영하곤 했는데 불국사는 가장 적합한 촬영지였다고 한다.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불국사가 신라 황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영화 ‘YMCA 야구단’에서는 여주인공인 정림(김혜수)이 동료인 대현(김주혁)과 함께 불국사의 다보탑을 방문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역시 불국사에서 직접 촬영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사실 옥의 티에 가깝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을사조약을 전후한 구한말인데, 당시 불국사는 폐사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가수 현인의 데뷔곡이자, 현인을 가요계의 정상에 오르게 만들어 준 곡인 ‘신라의 달밤’의 가사 1절에는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또한 그의 노래 중에서 ‘불국사의 밤’은 불국사를 배경으로 한 노래다.세계 언론 속에 불국사러 국영뉴스채널·스페인 일간지신비함 간직한 꼭 찾아야할 명소‘2021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경북 대표 관광지로 첫 이름 올려불국사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찰로 전세계 언론에 소개됐다.2014년 불국사와 석굴암, 템플스테이, 한글이 러시아 국영뉴스채널 24TV를 통해 소개됐다. 24TV는 “오랜 신비함을 담고 있는 한국의 불교 사찰들”이라는 제하로 불국사와 석굴암 방문기를 보도했다. 방송은 불국사가 ‘행복한 나라의 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하며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찰이 여러 번 훼손되었지만 한국인들은 항상 불국사를 재건했다고 설명했다. 또 불국사는 서울에서 상당히 먼 거리인 경주에 있지만 고속열차를 이용하면 2시간 만에 경주역에 도착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불국사의 상징인 석가탑과 다보탑은 불국사 사원과 조화를 이루고 주변의 자연경관과 혼연일체가 된 듯 자연스럽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석굴암에 대해서는 해발 750m에 있는 동굴 사원으로 연꽃 위에 앉은 부처가 동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어 매일 아침마다 첫 태양빛을 받는다고 묘사했다.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EL PAIS)는 2019년 한국 관광을 할 때 꼭 찾아야 할 명소는 경주 불국사라고 소개했다. 기사에 따르면 불국사는 신라 시대의 절로 주변에 국보 7개나 있으며 토함산 중턱의 암자 석굴암과 공동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엘파이스는 황룡사가 거대한 규모로 유명한 절이라면, 불국사는 치밀한 구성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글로벌 최대 여행 플랫폼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선정하는 ‘2021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에 경북의 대표 관광지 불국사가 처음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전세계 1위 여행 전문 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er)는 매년 약 9억여 건의 여행자들의 리뷰와 의견을 기반으로 전세계 상위 10%의 우수한 여행지를 선정해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전세계 여행자 선정 관광지)’를 발표한다. /최병일 작가

2022-07-31

천년의 세월… 당대 불교미술의 정수를 만나다

□ 신라인의 예술성 금동비로자나불불국사에는 불교 경전의 원리가 가람배치에 그대로 녹아있다는 것을 지난 회에 밝힌 바 있다. 불국사는 ‘법화경’과 ‘무량수경’, ‘화엄경’에 근거한 세 개의 불국토가 모여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비로전이 있는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의 세계가 모여 있는 것이 불국사가 염원했던 불국(佛國)인 것이다.불국사에 있는 유물들은 당대 불교미술의 정수가 담겨 있다. 금동비로자나불 좌상(국보 제26호)을 비롯해 금동아미타불 좌상(국보 제27호), 대웅전 앞에 있는 석가탑(국보 제21호)과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신라문화의 국제성과 독창성, 신라인의 예술적 창의력이 응집되어 있다. 우선 비로전에 모시고 있는 금동비로자나불 좌상부터 살펴보자. 비로자나(毘盧遮那)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라는 의미다. 금동비로자나불은 불상외에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대좌와 광배가 있었지만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원래 금동비로자나불은 대웅전에 모셔져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 시절 금동아미타불상과 함께 극락전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비로전 주존불로 안치됐다. 금동비로자나불상은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제 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금동비로자나불 불상은 양감과 적절한 신체비례 등에서 이상적이면서 세련된 8~9세기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우선 눈썹이 길게 반원으로 그려져 있고, 이마와 눈두덩을 구별짓는 음각선이 한 줄 조각되어 있다. 불상은 남성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어깨는 떡 벌어져 있고, 젖가슴은 중량감(量感)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허리는 잘록하고 아랫배가 은근히 나왔다. 앉은 자세도 특이하다. 얕은 듯하면서도 옷감이 흘러서인지 유난히 넓게 앉아 있는 것 같다.천년의 세월을 견딘 불상인데도 마치 며칠 전에 제작이 끝난 것처럼 황금 도금이 벗겨진 것 없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광배를 제외하고는 손상된 부분도 거의 없다. 전신에 자비와 위엄이 넘친다. 반쯤 뜬 눈 뺨은 윤기있고 복스럽다. 턱은 두툼하면서도 약간의 군살이 있다. 그 모습 때문에 더 자애로운 느낌이 든다. 부처님의 법의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조각했는데 옷 무늬까지 처리한 부분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 모양은 대단히 이색적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제작된 비로자나불이 대부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불상의 예술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통일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인 최치원 선생은 ‘대화엄종불국사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幷序)’라는 글을 써 칭찬할 정도였다.극락전의 본존불로 봉안된 금동 아미타불좌상은 ‘무한한 수명’이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미타유스’(Amitayus)에서 유래하여 중생들에게 염불을 통한 극락왕생의 길을 제시하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한문으로 번역하면 무량수(無量壽)다.아미타불 좌상은 비로자나불좌상과 거의 동시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만들었지만 부처님의 형상은 비로자나불과는 조금 다르다. 원만하고 자비롭지만 동시에 약간 근엄한 느낌을 준다.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짧은 목과 양감이 느껴지는 건장한 남성의 체구, 두 무릎이 넓게 퍼져서 안정감을 주는 것은 비로자나불과 거의 비슷하다. 옷깃 안쪽에서 밖으로 늘어지는 옷 접힘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형상화했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마치 상투처럼 두툼하게 머리카락이 솟아 있다. 어깨높이로 들어 약간 오므린 왼손은 손바닥을 보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약간 구부리고 있다. □ 석가탑 2층서 발견된 세계적인 보물불국사의 유적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역시 석가탑이다. 석가탑의 정식명칭은 불국사 3층 석탑이지만 석가탑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데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옆에 나타나 설법내용이 옳다고 증명했다고 한다. 석가탑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을, 다보탑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을 줄인 말이다.석가탑은 수많은 설화와 소설 속에서 거론된 불국사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유명세만큼 석가탑은 영욕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어야 했다.1796년 정조대왕이 불국사에 하사품을 내려주었다는 ‘불교고금역대기’의 짧은 기록이 전부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불국사는 잊혀진 절이었다.그러다 불국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6년 9월 8일 중앙일보에 게재된 석가탑과 관련된 기사 때문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국보 제21호 석가탑이 지난 8월29일 밤 동해 남부 일대에 있었던 미진(2도가량)으로 흔들려 탑이 6도가량 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탑신 4개 처가 떨어지고 2층 갑석 하단부가 균열이 있었음이 8일 현지 조사에 돌아온 도교육위원회 직원에 의해 밝혀졌다”고 했다.하지만 추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놀랍게도 석가탑의 훼손 원인은 지진이 아니었다. 석가탑의 유물을 훔치려던 도굴꾼들이 벌인 짓이었다.도굴꾼들은 석가탑 안에 보물이 있다는 풍문을 듣고 유물을 훔치기로 했다. 9월 3일 야심한 밤 경주 지역 택시를 대절해 불국사에 도착한 도둑 일당들은 석가탑 1층 옥개석을 들어 올려 보물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돌이 너무 무거워서 돌을 들어 올리는 잭(jack)이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당은 이튿날 밤 11시에 다시 석가탑으로 갔다. 이번에는 일당 중 한 명이 대구에서 긴급 공수한 더 큰 오일 잭을 동원했다. 1층 옥개석을 간신히 들어 올리긴 했지만 보물이 없었다. 며칠 후 다시 불국사를 찾은 일당들은 이번에는 3층 옥개석을 들어 올렸으나 유물을 찾지 못하고 석가탑에 상처만 입히고 말았다.석가탑의 파손이 도굴범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문화재보존위원들은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했고, 이후 9월 19일 도굴꾼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 도굴꾼들은 경주 불국사 뿐만 아니라 황룡사 초석, 통도사 승탑 등 무려 13개의 사찰에서 값을 헤아리기 힘든 보물들을 닥치는 대로 도굴했다고 한다.이후 문화재 관리국은 석가탑을 원상으로 복원하기 위해 10월 13일부터 석가탑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복원작업은 엉망이었다. 당시 10월 14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복원작업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기사에 따르면 탑 위층부터 차례대로 해체하던 중 2층 옥개석을 들었을 때 2층 탑신석의 사리공 안에서 사리 장치를 발견하였다. 천만다행으로 도굴꾼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보물을 발견했다는 기쁨도 잠시 2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던 장비가 부러지면서 2층 옥개석이 미리 내려놓은 3층 탑신 위로 떨어졌다. 3층 탑신은 세 조각으로 부서졌다. 아찔한 사고에 현장을 지켜보던 주민과 관광객들은 탄식과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도굴범들 때문에 훼손되었던 석가탑이 재차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다행히도 사리장엄구 등 탑신 2층에서 발견한 유물들은 훼손없이 무사히 수습할 수 있었다. 사리탑 안에는 작은 탑, 구리 거울, 구슬, 순금 종이로 감싼 진신사리가 들어 있는 은항아리 등이 천여 년이 넘은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흥분시킨 것은 같이 발견된 비단으로 싼 목판본 불경이었다. 전체 길이가 5m에 달하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다.하지만 석가탑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6년 11월 석가탑에서 나온 유물 중 사리 46개가 담겨 있던 녹색 유리 사리병을 한 스님이 옮기다 떨어뜨려 깨뜨린 것이다. 이후 깨진 유리 사리병은 억지로 이어붙인 상태로 국립경주박물관 창고에 보관 중이다. □ 화려하고 여성적인 다보탑의 매력석가탑과 함께 불국사의 상징과도 같은 다보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석가탑과 같다. 절 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10원짜리 동전에도 새겨져 있는 다보탑이다.석가탑이 남성적이라면 다보탑은 대단히 화려하고 여성적이다. 사면에 놓인 계단을 오르면 육중한 기단이 팔각의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난간석과 연꽃잎 모양의 창문도 독특하다. 신라 조형예술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조각들이 담겨 있는 것도 특징이다. 위로는 대나무, 매화 등 사군자 조각도 보인다. 다보탑은 1925년 일본인에 의해 전면 해체, 보수되었지만 아무런 보고서도 남기지 않고 또 탑 속에 발견된 사리 장엄구 등 많은 유물의 행방도 알 수 없어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탑에 조각된 돌사자도 원래 네 마리였으나 세 마리가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다고 한다.앞에서 바라보는 다보탑은 한쪽이 살짝 기울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함산의 능선과 기와지붕의 용마루 선과 탑의 정상부를 이루는 선이 일직선으로 떨어지다 보니 생긴 착시 현상일뿐 실상은 똑바로 서 있다고 한다./최병일 작가

2022-07-24

불국사 화려한 외양 뒤에는 불교의 원리가 녹아있다

□ 복원에서 제외된 구품연지터취재를 위해 수많은 사찰을 가봤지만 불국사만큼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하는 절은 별로 없다. 여러 번 보았기에 가람 배치도 훤하고 절에 대해 잘 아는 듯하나 누군가 불국사에 대해 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실제로 불국사의 화려한 외양은 알아도 불교의 원리가 설계에 철저하게 녹아있는 절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문 것 같다.불국사 고금창기에 따르면 불국사는 규모가 무려 2천여 칸(3.64㎞)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불국사는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소실돼 폐허가 됐다. 17세기 초부터 복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사찰로서 명맥만 유지하다 1969~1973년에 걸쳐 현재의 형태로 복원했다. 유감스럽게도 복원은 온전한 형태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때 불교의 원리와 경전에 충실했던 초기 형태로 복원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사이에 구품연지(九品蓮池)라는 커다란 인공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은 조선 영조 3년까지 존속하다 사라졌다고 한다. 절 내로 유입되어야 할 물이 고갈되고 토사가 덮치면서 자연스럽게 매몰된 것으로 보인다.1973년 불국사 복원 당시 구품연지터로 추정되는 동서 39.5m, 남북 25.5m, 깊이 2~3m 정도의 연못 석축이 발견됐다. 그러나 단체관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복원에서 제외됐다고 한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보랏빛 물안개가 피어난다는 자하문(紫霞門), 물 위에 뜬 누각 같다는 범영루(泛影樓), 물 위의 흰 구름 같은 다리 백운교(白雲橋), 푸른 구름을 닮은 청운교(靑雲橋)도 모두 구품연지를 중심으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서방 극락정토를 묘사한 ‘관무량수경’에 “극락정토에는 연꽃이 피어있는 큰 연못이 있다. 물은 맑고 깨끗하여 바닥이 들여다보이고 꽃들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극락정토의 대중들은 이 연지에 둘러앉아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라고 쓰여있다. 이 연못이 바로 구품연지다.주요 사찰마다 연지를 조성하는 것은 일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을 이미 사바세계를 떠나 불국토에 들어선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불국사 고금창기에 의하면 토함산에서 계곡을 타고 흘러 내려온 물이 절 마당의 지하를 거친 뒤 유구를 거쳐 구품연지에 흘러내리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해가 쨍하게 맑은 날이면 물가에 생기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범영루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물길도 막혔고 석재 유구만 남아 있다. □ 그렝이 기법으로 만든 불국사 석축불국사가 불완전하게 복원되었는데도 꾸준히 찾게 되는 이유는 어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절의 형태 때문일 것이다.불국사는 사찰 입구를 지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석축부터 남다르다. 유홍준 교수는 불국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석축(石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불국사의 석축물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유 교수의 말에 저절로 수긍이 간다. 삼국유사에도 불국사 석축에 대해 “동부의 여러 사찰 중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했을 정도다.불국사의 석축 조성방법은 크기가 다른 돌을 깎아서 맞추는 한국 전통 건축기법인 ‘그렝이 기법’을 사용했다. 경사지에 두 개의 단을 조성하고 거기에 석축을 쌓았는데, 아랫단은 자연석을 수평으로 절단하지 않고 곡면에 맞추었다. 윗단은 다듬은 돌로 인공적인 미가 풍기도록 쌓았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변화를 주는 석축은 다른 사찰들과 확연히 다르다.‘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를 쓴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불국사의 석축에 대해 “크고 작은 자연 괴석들과 잘 다듬어진 장대석들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장단 맞춰 쌓아 올린 이 석단의 짜임새를 바라보면 안정과 율동, 인공과 자연의 멋진 해화(諧和)에서 오는 이름 모를 신라의 신비로운 정서가 숨 가쁘도록 내 가슴에 즐거운 방망이질을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특히 범영루 아래의 석주는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석단 위에 널판같이 뜬 돌인 판석(板石)을 세웠는데, 밑부분은 넓고 중간돌기둥을 지나면 다시 가늘고 길어진다. 기둥 돌은 전부 8개씩 다른 돌로 되어 있고,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조립했다. 범영루 석주는 수미산(須彌山)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수미산은 현실에 있는 산이 아니라 불교 설화 속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불국사의 석축물들은 단순히 불교 건축의 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승과 속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석축 밑은 범부의 세계이고 석축 위는 불국토인 셈이다. 흔히 청운교와 백운교가 좌우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계단의 윗부분이 청운교고 아랫부분이 백운교다. 돌로 만든 33개의 다리를 거쳐 자하문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석가탑, 다보탑이 나오는데 이는 상징적으로 불국정토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 각각의 건물이 독립된 독특한 가람배치불국사는 가람 배치도 특이하다. 일반적인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전각이 배열되었는데 불국사는 회랑, 즉 담장을 쳐 각각의 건물들을 독립시켰다.불국사의 주요 건물인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자하문, 좌경루와 뒤쪽 대웅전까지 회랑이 빙 둘러 있다. 중심건물 뒤에 강당(무설전)을 둔 고대 가람의 전형적 배치형식이다. 회랑은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이 반영된 건축물이다. 정문으로 바로 들어가 부처님을 마주하는 것은 불경한 행위로 여겨 회랑이 일종의 차양막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회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다. 원래 불국사 회랑이 지금처럼 꽉 막힌 모습이 아니라 기둥 위에 지붕만 얹은 일종의 개방식 회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많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 나왔던 석가탑과 다보탑의 그림자가 구품연지에 닿으려면 지금처럼 막힌 구조의 회랑이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불국사를 관람하면서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라 자하문으로 들어설 수 없도록 막아버린 점이다. 자하문을 넘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마주해야 하는데 오른쪽 언덕배기를 올라 대웅전과 무설전이 있는 경내로 바로 진입하게 된다.불국사 보존의 문제나 안전상의 이유가 있겠지만 사찰을 지을 때 석축을 만들고 구름다리를 만든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 33계단을 반드시 거쳐 경내로 들어오게 했던 이유는 세속의 인간이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서 부처의 경지를 깨닫기 바랐던 불교적 사유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자하문을 넘어 대웅전에 들어서야 석가탑과 다보탑의 존재가 명징하게 각인된다. 두 탑은 마치 대웅전을 호위하는 무사처럼 늠름하다.석가탑과 다보탑은 석가모니가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다보여래(다보부처님)가 현신한 다보탑이 땅속에서 솟아올라 그 설법을 듣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불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극락전이다.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극락전은 칠보교와 연꽃 모양의 돌이 맵시 있는 연화교를 올라야 만날 수 있다. 연화를 넘어서면 극락세계의 정문인 안양문(安養門)이 나오고 극락전의 아미타불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2007년 정해년, 현판 뒤 처마 밑에 숨어 있던 길이 50㎝ 정도의 목조돼지상이 극락전에서 발견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불국사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훼손됐다가 조선 후기에 재건된 건물이다. 훼손되기 전에도 극락전 현판 뒤에 황금빛을 띤 목조돼지상이 있었다는 사료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선 후기 이후 복원과정에서 누군가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찰 건축에 돼지상을 만들어 숨겨 넣은 곳도 불국사가 유일하다. 황금돼지를 만든 이유에 대한 설은 대략 두 가지다. 황금이 뜻하는 풍요와 부를 중생들이 충분히 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졌다는 설, 앞만 보고 달리는 멧돼지처럼 수행자도 멈춤 없이 정진하라는 의미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극락전의 황금돼지상이 유명세를 타다 보니 극락전 앞에 쇠로 만든 황금돼지상을 따로 만들었다. 외국 관광객들이 불국사를 찾아 황금돼지상을 어루만지며 인증 사진을 찍는 것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최병일 작가

2022-07-17

바로 여기에, 신라인들의 간절한 佛國 염원 담겨

□임란 때 불태워지는 등 숱한 환란 겪어앞에서 토함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펼쳐놓은 것은 결국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불국사를 다시 소환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것은 사실 대단히 난감한 일이다. 경주라는 땅에 한 번도 발을 딛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경주에 와서 불국사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불국사는 1980년대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까지는 제주도와 더불어 신혼부부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고, 중고등학생에게는 수학여행지로 유명했다.그런데 정작 불국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들은 드물다. ‘1000년 전 신라인들은 왜 불국사를 건립했던 것일까, 불국의 나라가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해본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해외에서 온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불국사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과소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 유명한 관광지라는 인식으로 역차별받는 것은 아닐까.불국사는 창건 이후, 숱한 세월 동안 우여곡절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방화로 불타 사라졌다가 조선 영조 41년(1795)에 대웅전이 다시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에 불국사는 사찰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전각이 골조만 남아 있었다. 1924년 대웅전을 수리하고 다보탑을 해체 보수했다.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가 사라졌다. 개보수 작업도 졸속으로 이뤄져 1945년 해방 당시 석가탑은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1969년 정부에서 불국사 복원위원회를 구성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해 1973년 6월 복원을 마쳤다. 주춧돌과 빈터만 남아 있던 무설전·관음전·비로전·회랑 등을 복원했고, 대웅전·극락전·범영루·자하문 등을 새롭게 단장했다. 이때도 과학적인 고증이 이뤄지지 않은 채 졸속으로 복원이 이루어져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1973년 불국사 복원공사를 할 당시 10만2천여 명이 투입돼 무려 5년 동안 공사를 진행했다. 석공만 3만3천9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공사에 들어간 자재도 엄청났다. 고령기와 30만 장, 목재 63만 재(才), 석재 42만5천t이 소요됐다.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투입되다 보니 당시 돈으로 무려 4억 원의 복원 경비가 들었다. 당시 서울 반포아파트 한 채 가격이 500만 원 정도였으니 무려 아파트 80채 정도를 지을 수 있는 엄청난 돈이 복원공사에 들어간 셈이다.불국사 공사는 창건 당시에는 엄청난 인력과 물량이 투여된 국가적 사업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김대성이 751년(경덕왕10) 불국사 건설 시작해 774년에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국가에서 완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751년 경덕왕 때 김대성이 창건한 것이 정사불국사의 창건을 언급하고 있는 사료로는 삼국유사와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등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751년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불국사사적과 고금창기에는 528년(법흥왕15) 불국사가 창건돼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불국사의 창건연대가 무려 223년이나 차이가 난다.불교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불국사 사적과 불국사고금창기는 사료적 가치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유홍준 교수는 불국사사적과 고금창기가 “사찰의 연기와 옛날부터 전해오는 얘기, 그리고 화엄에 관계되는 것이면 불국사의 역사에 맞건 안 맞건 억지로 끌어 붙였다는 혐의를 면할 수 없다”고 말한다.삼국유사 연기설화에 나오는 불국사 창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모량리(牟梁里, 현재 경주 효현리 일대)에 경조(慶祖)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아주 넓으며 정수리가 평평해서 마치 성(城)과 같았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큰 성이라는 뜻의 대성(大城)이라 지었다. 대성의 집안은 너무 가난해서 양육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대성의 어머니 경조는 복안이라 불리는 부잣집에서 품팔이를 해 얻은 밭 몇 마지기로 간신히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점개(漸開)라는 스님이 흥륜사(興輪寺)에 육륜회(六輪會, 오늘날의 법회)를 베풀고자 복안에게 시주하기를 권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복안은 흔쾌히 면포(綿布, 베) 50필을 시주했다.이에 점개 스님은 “당신이 보시를 잘하니 천신(天神)이 항상 보호해주실 것이오.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어 안락하고 장수할 것입니다.”라고 축원했다.대성이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뛰어 들어와 어머니에게 우리가 경작하는 밭을 법회에 시주해 후세의 복을 얻자고 설득했다.어머니는 대성의 말을 기특하게 여기며 아들의 말을 따라 밭을 점개스님에게 시주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모량리에 살던 대성이라는 자가 지금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이후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왼손을 꽉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손을 폈는데 손안에 ‘대성(大城)’이라 쓰인 금빛 두 글자가 있었다. 이 일을 하늘의 뜻이라 여긴 김문량은 환생한 아이의 이름을 대성이라 지었다. 또한 모량리에서 김대성 어머니 경조를 김문량의 집으로 데려와 부양했다.대성은 장성한 후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장수사를 짓고 난 이후 불심이 더 깊어진 김대성은 자비심과 원력이 더욱 깊어졌다.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국보 24호 석굴암)를 창건했다고 한다. 물론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두 불사를 개인이 일으켰다는 것에 의문을 품는 학자도 있다.불국사 창건설화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당시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김대성이 공사를 총괄했고 불국사 창건에 신라가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부처님 나라 꿈꾼 신라인의 염원 녹아 있어그렇다면 신라는 왜 그토록 엄청난 공사를 시작한 것일까? 불국사가 세워질 무렵 신라의 조형 및 건축문화는 최고전성기였다. 경덕왕은 통일신라 문화의 꽃을 피운 걸출한 위인이었다.지금까지도 걸작으로 평가받는 성덕대왕 신종, 독특한 석탑 양식과 탁월한 조형미가 돋보이는 화엄사 4사자 삼층 석탑, 유려한 석재 가공 기술과 온화한 불상의 분위기가 잘 살아나는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등이 대표적이다. 자연과 인공이 만들어낸 조형예술의 극치로 불리는 안압지도 이 당시 기술로 만들어졌다.신라인들의 예술 감각은 멀리 당나라에서도 인정받았다. 경덕왕은 당 대종이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 분의 부처님을 모신 3m 높이의 가산(假山)’을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당 대종은 이 선물을 받고 ‘신라의 교묘한 기술은 하늘이 만든 것이지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로 신라 예술의 수준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점이었다.이런 이야기들이 불국사 창건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무엇보다 불국사 창건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들의 염원이 모아진 결과였다. 우리는 흔히 국사를 진행하면 필연적으로 민초들의 희생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중국의 만리장성이 건립되었을 때 수많은 중국인들이 고된 노역에 희생됐다. 그러나 불국사를 건립했을 때 신라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기록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지을 때 ‘아미타불’이라고 염불을 외웠다고 한다.불국사는 강제 동원된 노동력이 아니라 신라인들의 순수한 신심과 염원이 모여 세워진 건축물인 것이다.그렇다면 왜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지으며 기쁘게 자신을 희생했을까?불국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신라인들은 불국사를 세우며 부처님의 나라를 꿈꾸었다.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다른 나라가 아닌 바로 여기 신라가 부처의 나라가 되길 염원한 것이다. 부처님의 나라는 아무도 차별받지 않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이상적인 국가였다. 대립과 전쟁이 없는 나라이자 누구도 굶지 않는 평화의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최병일 작가

2022-07-10

‘아사달과 아사녀’는 영지 못의 물길이 되고…

‘아사달이 석가탑을 완공하기를 기다리던아사녀는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자 못에 몸 던져후대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부르고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탑을 무영탑이라 불러…’현진건이 연재한 소설 ‘무영탑’에서 설화 유래경주시 예산 투입 ‘영지설화공원’으로 변모이야기 바탕 2024년까지 ‘설화체험관’ 건립□아사달과 아사녀 슬픈 전설 깃든 영지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영지(影池)는 토함산과 관련된 곳 중 가장 풍성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영지는 불국사역 구정로터리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울산 쪽으로 가다 보면 보이는 저수지다.예전에는 베스를 잡던 낚시터였지만 지금은 경주시가 예산을 투입해 영지설화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주변이 깔끔해졌다. 산책로와 어린이 놀이터가 생겼고, 2024년까지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설화체험관이 건립될 예정이라고 한다.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영지 못 주변을 둘러보면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하게 된다. ‘아사달과 아사녀’ 설화는 단지 전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영지 못의 물길이 되고 산책로를 만드는 근간이 됐다.연못 너머로 토함산이 보인다. 토함산 어깨쯤에 아사녀가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며 그림자가 보이기를 바랐던 불국사의 석가탑이 있다.석가탑을 창건할 때 재상 김대성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이라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러 석가탑 조성을 맡겼다. 그에게는 아내 아사녀가 있었다. 아사달이 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몇 달이면 돌아올 것 같았던 남편은 한 해 두 해가 흘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빨리 석가탑을 완공하고 남편을 기쁘게 만날 날만을 고대하던 아사녀는 기다리다 못해 불국사로 찾아갔다.그러나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천 리 길을 달려온 아사녀는 남편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애달픈 마음에 날마다 불국사 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로나마 남편을 보고 싶어 했다.이를 보다 못한 한 스님이 꾀를 내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그곳에서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 금기가 깨질 것을 두려워한 스님의 거짓말이었다.이를 철석같이 믿은 아사녀는 다음날부터 온종일 못을 들여다보며 탑의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무심한 수면에는 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상심한 아사녀는 고향으로 되돌아갈 기력조차 잃고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고 한다.한편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영지 못으로 한걸음에 달려갔으나 아내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못 주변을 방황하고 있는데, 아내의 모습이 홀연히 앞산의 바윗돌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고 또 그 웃는 모습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 되기도 했다.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각을 끝낸 아사달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이후의 이야기는 전해진 바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가 비치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했다.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 준 무영탑무영탑은 수많은 문학인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특히 민족시인 신동엽은 ‘너를 새기련다’ 라는 시를 통해 아사달의 다함 없는 사랑을 노래했다.너를 조각하련다 너를 새기련다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이 하늘 끝나는 날까지이 하늘 다하는 끝 끝까지찾아다니며 너를 새기련다.바위면 바위에 돌이면 돌몸에미소 짓고 살다 돌아간 네 입술눈물 짓고 살다 돌아간 네 모습너를 새기련다.나는 조각하련다. 너를 새기련다.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정이 닳아서 마치가 되고마치가 닳아서 손톱이 될지라도심산유곡 바위마다 돌마다네 모습 새기련다.그 옛날 바람 속에서미소 짓던 네 입모습눈물 머금던 네 눈모습그 긴긴 밤오뇌에 몸부림치던 네 허리환희에 물결치던 네 모습산과 들 다니면서 조각하련다. 아사달과 아사녀 설화는 빙허(憑虛) 현진건이 1938~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무영탑(無影塔)’에서 유래한다. 무영탑은 석가탑 건립 뒤안길에 서린 전설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현진건은 마치 역사 속 실화처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는 ‘소설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정확히 말하면 역사서 어디에도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아사녀에 대한 기록은 일본 동경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불국사 고금창기(경상도강좌대도호부 경주동령토함산 대화엄종불국사고금 역대제현계창기·慶尙道江左大都護府 慶州東嶺吐含山 大華嚴宗佛國寺古今 歷代諸賢繼創記)에 일부 나온다. 영조 16년(1740) 5월에 동은(東隱) 화상이 지은 고금창기는 불국사의 역사적 배경과 건축물, 유물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기록돼 있다. 현재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사적기로 평가되고 있다.고금창기에는 “석가탑은 일명 무영탑이라고 한다. 불국사 건축 때 불사를 맡았던 장공(匠工)이 있었는데 그는 당(唐)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어 아사녀(阿斯女)라고 했다. 아사녀가 오빠인 장공을 찾아왔으나 (당시 건축책임자로 추정되는) 대공(大功)이 아직 석가탑이 완공되지 않아 장공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장공은 날이 밝는 대로 서방 십 리쯤 된 곳에 가면 천연 못이 있을 터이니 그 못에 가면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 했다. 그녀는 대공의 말을 따라 연못에 가보았지만 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석가탑의 이름을 무영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이에 따르면 석가탑을 조성한 이는 ‘장공(匠工)’이다. 장공은 높은 기술을 가진 장인을 일컫는 말일뿐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아사달’이라는 이름은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화처럼 아사녀는 아사달의 아내도 아니다. 고금창기 원문에 나오는 ‘매(妹)’자는 누이를 뜻하는 것이지 아내는 아니라고 한다. 더군다나 장공은 백제의 후손이 아니라 당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아사달 설화는 소설의 상상력이 빚은 허구아사달과 아사녀 설화는 신라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니라 소설 무영탑에서 작가가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정설이다.아사녀가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것도 근거 없는 이야기다.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면 왜 연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느냐고 스님에게 가서 따지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영지의 위치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많다. 설화의 이야기처럼 불국사 석가탑이 완공되면 영지에 모습이 비칠 것이라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석가탑의 그림자가 11km(28리) 너머에 있는 영지 못에 비치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영지는 불국사 경내의 백운교, 청운교 앞 구품연지를 가리킨다는 추측이 더 현실적이다.영지 연못 우측 솔밭에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인 영지 석불좌상이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4호 석불좌상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대략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얼굴은 뭉개졌지만 몸체와 대좌 광배 등은 모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비바람 등 세월의 흔적으로 망가진 듯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 고의로 훼손한 듯하다.영지를 돌아 나오는 순간 수면 위로 햇살이 비추며 윤슬이 반짝였다. 문득 아사녀의 미소를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최병일 작가

2022-07-03

알에서 태어난 석탈해… 춘분이면 후손들은 제사를 올린다

토함산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신라 4대 왕 석탈해다. 유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석탈해는 고대국가 신라를 탄탄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 속에서 석탈해는 대단히 미스터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 왜국 동북 1000리서 온 것으로 추정석탈해는 출생부터 의문에 싸여있다. 석탈해는 용성국(龍成國) 혹은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자로, 왕비가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자 아버지인 함달파왕이 이를 불길하게 여겨 버리라고 했다. 왕비는 비단에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배는 처음에 금관가야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인들이 배의 알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다시 바다로 띄워 보냈고 이후 진한(辰韓) 아진포구(阿珍浦口)에 닿았다.마침 해변에 있었던 한 노파가 배를 발견하고 궤짝을 열어보니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아이가 있어 거두어 길렀다는 것이 신라본기에 나오는 석탈해의 출생에 관한 기록이다.여기서 말하는 용성국은 왜국의 동북 1천리에 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도 “나는 본래 용성국 사람”이라는 구절이 있다. 용성국은 정명국이라고도 하고 다파나국, 완하국, 화하국이라고도 한다. 당시 왜국은 지금의 일본 규슈섬을 가리킨다.용성국의 위치에 대해 다파나와 음이 비슷한 일본의 다지마국(但馬國)이나 히고노국(肥後國) 다마나군 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떤 이는 일본의 고대 소국 중 하나인 탄바(丹波)국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 개국공신인 협보가 세운 국가이다 보니 이곳이 다파나국이 아니냐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왜국 동북쪽 1천리 바깥에 있었다는 사료에 근거한다면 석탈해는 오히려 러시아의 캄차카 지방에서 온 것이라는 설도 있다. 캄차카 일대에 석탈해의 탄생설화와 비슷한 설화가 있다. 철을 다루는 야장을 타르사드(tarxad) 혹은 타르퀴안(tarquan)이라고 하는데 탈해라는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또 다른 주장은 석탈해가 절강성 일대 양쯔강 하류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 부근에서 유일하게 한반도 남부 지방에 있는 남방계 고인돌이 발견됐다는 게 근거다. 고인돌을 만들던 사람들이 바닷길을 따라 절강성과 한반도 남부를 왕래했던 기록으로 보아 석탈해가 이들의 후손이라는 것이다.마한 진한 변한 등 삼한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 배를 타고 동쪽으로 탈출한 세력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로 석탈해를 마한사람으로 기록한 사서도 있다.석탈해는 외모도 특이했다. “신장이 3척이요, 머리둘레가 1척(삼국유사)”이라는 기록이 있고 “너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고 골상이 특이하니(삼국사기)”라는 기록도 있다. □ 알에서 태어난 특이한 출생 이력사람이 알에서 태어난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는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고대신화에서 영웅이나 건국 시조의 탄생을 신비화하고 초인적(超人的)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알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난생설화다.역사학자 이덕일은 난생설화가 회이족~동이족 등에 걸친 문화이며, 은나라의 시조도 난생설화를 사용했음을 강조한다. 난생설화는 동이족에서 보이는 공통된 특징으로, 일본과 중국에는 난생설화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모모타로(桃太郞)라는 복숭아에서 나온 사람이 장성해 영웅이 되었다는 설화는 있지만 알 속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없다.현재 중국인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한족(漢族)의 원류가 되는 화하족에서는 난생설화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서국(徐國)의 32대 군주인 서언왕 신화에서 난생설화가 보이는데 서국이 동이족 국가인 것을 보면 결국 난생설화는 고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설화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부여를 비롯해 고구려·신라·가락의 건국신화는 모두 난생설화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석탈해(昔脫解)·김알지(金閼智)·수로왕(首露王)·동명왕(東明王) 등이 모두 그러한 예다.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물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해모수(解慕漱) 가 결혼해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낳았다. 동명왕도 커다란 알에서 나온 난생설화의 주인공이다.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줏빛 알에서, 수로왕은 구지봉에 내려온 황금알에서 태어났다.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난생설은 고대 민족의 신앙에서 비롯된 우주관이고 민족 철학이라 한다. 이러한 설화는 특히 동북아시아 지방 민족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난생설화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현대인도 마치 알에서 태어난 것 같은 현상을 볼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태아는 어머니 뱃속에서 양막에 둘러싸여 성장하다 출산 전에 양막이 파열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드물게 파열하지 않은 양막에 둘러싸인 채 아기가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 모습이 마치 알에서 나온 것처럼 보여 난생설화가 유래된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양막에 쌓여 태어난 아이의 모습은 신기한데, 천 년 전 신화와 전설의 시대에 이런 아이가 태어났다면 당연히 알에서 사람이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생설화를 확장하면 조류를 숭상했던 우리 조상들의 문화와도 일맥상통한다. 민간신앙으로 세운 솟대는 성역이나 경계의 상징 또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이 솟대에 올려진 조각은 물오리나 봉황, 황새, 기러기 같은 새의 형상이다. 새는 대표적인 난생 동물이다. 이런 이유로 인물의 상서로움이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를 퍼트린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 학문과 예절이 출중한 인물로 성장고기잡이하는 노파의 손에서 자란 석탈해는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머리도 대단히 영특했다. 당시 재상인 호공의 집이 좋다는 것을 알고 이를 빼앗고자 그의 집에 몰래 숯과 숫돌을 묻어두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안은 원래 대장장이인데 호공의 집이 원래는 자신의 집이라고 관가에 소를 제기했다. 관가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대라고 했다.이에 석탈해는 땅을 파면 숯과 숫돌이 나온다고 말하고, 한번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보니 숯과 숫돌이 나오자 이를 근거로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삼국사기에 나온 이 이야기는 원문 그대로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경주 동해 변에 이주한 석씨 일가가 수렵 생활을 했으며, 철을 다룰 줄 알았고, 이주민인 석탈해 집단과 원주민인 호공(박씨 일가)과 대립해 석씨 집단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당시 2대 왕인 남해차차웅은 학문과 예절에 뛰어난 젊은이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탈해를 입궁시킨다. 신체도 출중한 그에게 이름을 물으니 말하지 못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성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이에 남해왕은 “청년이 태어날 때 까치들이 울다가 날아가고 남은 아기였으니 까치작(鵲)에서 새(鳥)를 날려버리고, 남은 글자인 옛석(昔)으로 성을 삼고, 궤를 열고 알에서 태어났으니 이름은 탈해(脫解)로 함이 좋겠다”고 해 석탈해라는 성과 이름을 얻게 됐다.석탈해는 이후 기원전 8년, 남해왕 5년에 왕의 맏딸 아효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고, 10년에는 신라 최고의 관직인 대보(현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곧바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사양했다. 자신보다 지혜가 더 뛰어난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석탈해보다 더 많고, 치아가 한 개 더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후 유리이사금에게 왕위를 넘겨받은 석탈해는 서기 57년 신라 제4대 왕으로 등극했다.□ 경주 곳곳에 석탈해 왕의 흔적 남아석탈해 왕의 흔적은 경주 일대 곳곳에 남겨져 있다. 양남면에는 석탈해 왕의 탄생을 기리기 위한 탄강비각이 있다. 동천동에는 석탈해 왕의 왕릉이 있고, 그 옆에는 석탈해 왕을 기리고 제사를 모시기 위해 광무 2년(1898년) 건립한 숭신전(崇信殿)이 있다. 매년 춘분이면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삼국통일의 과업을 이룬 문무왕은 600여 년 전 황산진에서 가야군과 싸워 크게 이긴 석탈해 왕의 유골을 파내 생전 모습 그대로 조각상(塑像)을 만들고 토함산에 봉안했다. 이후 석탈해 왕을 토함산에 동악신으로 모시고 계속 국사(國祀)를 지냈다고 전한다. 국사를 지낸 흔적이 있는 토함산 정상의 석탈해 사당터에는 고려 후기에 중건된 건물의 흔적도 있다. 중심 건물지의 서편에서 토석축으로 벽체를 조성한 1칸의 부속 건물지도 확인됐고, 이 건물지에서는 철제마(쇳물을 부어 만든 말 인형), 토제마(흙으로 구운 말 인형)를 비롯해 청동방울, 통일신라시대 암막새편, 평기와, 고려시대 명문기와, 해무리굽 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 등이 출토됐다. 화로나 잔 받침 등 제사와 관련된 청자와 분청사기도 발견됐다.문화재청 관계자는 “고려 후기 몽고족의 침입 이후 계사년(1353)에 불국사와 함께 탈해 사당도 중건됐음을 알 수 있는 자료”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등 지리지와 여러 문집의 기록을 보면 탈해 사당에서 조선 전기까지 제사를 지냈다”라고 말했다. /최병일 작가

2022-06-26

야생화 피는 ‘천국의 화원’… 천년세월 담았네

□ 다양한 동식물 서식하는 생태관광지우리 시대의 가객 송창식은 토함산을 이렇게 노래했다.“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 가슴 속에 품었어라 세월도 아픔도 품어 버렸어라 터져 부서질 듯 미소짓는 님의 얼굴에도 천년의 풍파세월 담겼어라 바람 속에 실렸어라 흙이되어 남았어라 님들의 하신양 가슴속에 사무쳐서 좋았어라 한발 두발 걸어서 올라라 맨발로 땀흘려 올라라 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 천년의 두께로 떠바쳐라 산산히 가루져 공중에 흩어진 아침 그 빛을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 돌이 되거라.” 글 싣는 순서1 토함산의 역사와 전설2 토함산의 동·식물3 토함산의 수호신 석탈해4 토함의 전설 담긴 영지5 ~ 8 불국의 나라를 꿈꾸다9 ~11 신이 빚은 솜씨 석굴암12 유흥준 교수와의 대담13 천년고찰의 향기 기림사14 흔적만 남아도 부처님 형상 폐사지15 토함산 자락의 마을들16 ~17 토함과 얽힌 문화예술 인사18 토함의 과거를 이야기 하다19 토함의 현재를 이야기 하다20 토함의 미래를 이야기 하다가객의 노랫말처럼 토함산은 천년의 풍파 세월이 담겨 있다.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은 높이 745m로 경주에서는 단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토함산의 서쪽에는 불국사가 부채모양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佛國寺扇狀地). 북서쪽에는 추령(楸嶺), 남쪽으로는 동산령(東山嶺)이 있고, 경주에서 감포(甘浦)에 이르는 도로는 추령을 통과하며, 산세가 웅장하고 경치가 수려하다.토함산이 밋밋한 산이라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토함산을 포함한 토함산 지구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생태관광지로도 손색이 없다.토함산은 다양한 야생화가 피는 ‘천국의 화원’이기도 하다. 앵초, 변산바람꽃, 개별꽃, 둥근털제비꽃, 각시붓꽃, 은방울꽃, 조개나물, 둥근잎 천남성, 줄딸기꽃, 괴불나무, 팥배나무, 남산제비꽃, 연분홍분꽃, 복수초, 병꽃, 분홍색 노루귀, 백합과인 중의무릇, 고추나무꽃 등의 희귀종 야생화들이 함께 자생한다. 탐방로 주변 계곡에서 자주 보이는 선괭이눈을 비롯해 별꽃, 꽃다지, 현호색 등이 지천으로 핀다. 족두리꽃, 광대수염, 미나리냉이 등은 발에 치일 만큼 흔하게 발견된다. 산 중턱에선 또 다른 명물인 앵초의 군락지도 볼 수 있다. □ 생태적 가치 높은 토함산 습지경주국립공원 토함산 지구에는 두 개의 습지가 있다. 동대봉산(680m) 정상부근 해발 500m 지역에 있는 토함산 습지와 암곡 습지가 그것이다. 두 곳 다 산지형 습지인데 암곡습지가 1만3천228㎡로 토함산 습지(3천824㎡)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암곡습지에는 오리나무, 산수국, 진퍼리 새 등 식물 70종 정도가 자라지만 규모가 훨씬 적은 토함산 습지는 그야말로 식물들의 천국이다. 꽃창포, 노루오줌, 버드나무 등 식물 132종이 분포하고 있다.토함산습지는 지난 2010년 발견됐다. 탐방객들의 발길이 미치기 힘든 다소 외진 곳이어서 습지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토함산 지구는 이름난 불교유적지를 품고 있어서 토함산 등대봉산 등에 경주인들이 즐겨 찾았다. 수많은 이들의 발길이 쏠렸던 지역에서 천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습지가 오랜 세월 동안 발견되지 않은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토함산 습지는 작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다.습지의 규모는 폭 30m, 길이 100m 약 3천㎡의 타원형 모양의 평지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각종 수생식물과 야생동물이 서식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습지 주변에는 물이끼를 비롯한 각종 수초들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들이 마치 풀밭 모양으로 습지 곳곳에 빽빽이 서식하고 있다. 야생동물의 서식처 역할을 하는 습지답게 지금까지도 동물들의 발자국을 흔하게 볼 수 있다.습지는 제법 높은 지역에 있지만 습지를 가득 채운 뒤 계곡으로 흘려보낼 정도의 물이 땅속에서 계속 솟아오르는 샘터도 있다.무장봉에 있는 암곡습지는 국립공원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알려지지 않은 관심 받지 못한 산지습지 중 하나다.암곡습지는 토함산과 시루봉(502m)을 잇는 능선에 오래전부터 생겨난 산지형 습지로 생태적 가치가 뛰어나다. □ 멸종위기 야생생물 서직지인 암곡습지암곡습지는 다양한 멸종위기 야생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국립공원공단 경주국립공원사무소는 2020년 암곡습지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Ⅱ급인 벌매를 발견했다. 벌매는 경주국립공원단지에서 최초로 발견된 종이다. 이밖에 암곡습지가 담비, 삵, 참매 등 멸종위기 야생생물과 깃대종인 원앙의 서식지 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멸종위기 야생생물이 다수 발견된 암곡습지를 비롯한 암곡초지 일원은 지난 2021년부터 5년간 약 15억 원을 들여 집중 복원·관리하고 있다.경주국립공원의 멸종위기 야생생물은 국가관리를 시작한 2008년에 12종에서 2020년에는 23종으로 늘어났다. 경주국립공원사무소는 야생생물과 서식지를 보호하기 위해 여섯 곳의 국립공원특별보호구역을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국립공원관리공단 경주국립공원사무소는 지난해 12월 31일 자로 고시된 국립공원 공고에 따라 멸종위기 2급 식물 경주국립공원 토함산지구의 애기송이풀 자생지를 국립공원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국립공원 특별보호구역은 공원 내 핵심 생물종 서식지를 특별하게 보호 관리하기 위해 일정 기간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경주국립공원 토함산지구에 자생하고 있는 애기송이풀은 2012년 7월 개정된 야생동식물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한국특산 식물이다. 분포지는 경기 가평군과 연천군, 강원 횡성군, 경북 영양군으로 알려진다.경주국립공원 관계자는 “최근에 자생지가 발견된 경주국립공원은 국내 남한계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21개 국립공원 중에서 최초로 발견됐다”라고 설명했다.국립공원관리공단 관계자는 “애기송이풀 자생지에 대한 특별보호구역 지정은 기존에 이 지역이 야생화 단지로 알려지면서 주변 식생이 야생화 사진작가들에 의해 일부 훼손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적극 추진하게 됐다”며 “향후 현장관리를 강화해 애기송이풀 자생지 보전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 야생화가 지천에 핀 자연마을 ‘시부거리’토함산지구에서 습지와 함께 주목할 만한 곳이 바로 애기송이풀 서식지 인근의 시부거리마을이다.변산바람꽃, 노루귀, 복수초 같은 야생화 관찰지로도 유명한 시부거리마을은 애기송이풀 탐방지로도 이름이 높은 토함산 지구의 자연마을이다.청정하고 건강한 생태계가 잘 보존되고 있는 시부거리 마을은 사방이 토함산에 폭 안겨있는 듯한 형상이다.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한 ‘애기송이풀’에 대한 안내판도 볼 수 있다. 시부거리마을은 약 200년 전 오천 정씨 집성촌에서 시작됐다고 한다.‘시부거리’라는 마을 명은 정착 당시의 마을 앞 논이 커다란 늪지대여서 물이 많이 나오고 잡초가 자라는 마을 환경을 묘사한 것이다.사실 시부거리마을은 오지에 가까운 동네였다. 그러다 오랫동안 야생화를 찾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봄이 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른 봄, 봄꽃이 필 무렵부터 야생화가 피는 5월까지 탐방객이 가장 붐비는 시기라고 한다.전국에서 야생화 개화 소문을 듣고 사진작가와 사진동호회원들이 찾는 단골 촬영지기도 하다. 발 닿는 길 주변으로는 수십 종의 야생화들이 약초, 산나물들과 함께 자생하고 있다. 산벚꽃과 연달래, 참꽃의 수줍은 분홍은 낙화로 사라졌지만 개화 시기를 달리해 피어나는 야생화들이 사람들을 반긴다.이곳에서 본 멸종 위기종인 애기송이풀은 존재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마치 플라맹고를 추는 여인의 치마폭이 연상됐다.애기송이풀을 보고 돌아서며 귀하고 소중한 청정 생태계의 보고인 토함산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재평가돼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야생화나 산나물 등 야생식물의 채취금지 등의 소극적인 보호 작업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가치를 찾는 적극적인 작업들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천년 세월 동안 묵묵하게 버티며 경주를 지켜온 토함산이 말없이 건네는 화두일 것이다./최병일 작가

2022-06-19

불국정토 꿈꾸던 신라인들 품어안은 진산

신라인들에게 토함산은 어머니와도 같은 산이었다.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어서 제주인들의 숨결이 되었듯이 신라인들에게 토함산은 호국의 염원을 담은 진산으로 지극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신정일치 시대였던 신라 시대는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하늘이나 산신에게 제를 지냈다. 아무 곳에서나 제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신라인들은 신성하게 여겼던 영산을 찾았다. 당시 신라에는 토함산 등 5개의 영산이 있었다. 이를 오악(五岳)이라 불렀다.신라 오악은 중국의 음양오행사상과 산악신앙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때 오악은 동쪽의 타이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헝산(衡山), 북쪽의 헝산 (恒山), 중부의 쑹산(崇山)이 있다. 중국 역시 조정에서 대사를 앞두고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신라의 ‘경주 5악(五岳)’은 선도산이 서악(西岳)이고 남산이 남악(南岳), 백율사 뒤편에 있는 소금강산이 북악(北岳), 토함산이 동악(東岳), 경주에서 제일 높은 단석산이 중악(中岳)이다. 이중 토함산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리 잡고 있어 불교의 성지이자 유적지로 이름이 높다. 흔히 불국사와 석굴암은 위대했던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마치 영혼의 인장처럼 뇌리에 찍힌 낙인 같다고도 할 수 있다.불국사와 석굴암을 칭하는 말의 성찬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당연히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었던 신라인들의 진심은 오직 불국(佛國)하나였을 것이다. 왜 신라인들은 부처의 나라(佛國)를 꿈꾸었을까? 부처의 나라가 고단한 민초들의 삶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신라인들은 모든 열정을 바쳐 신묘한 석불을 제작한 것일까? 너무도 잘 알려진 불국사와 석불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허황한 미명이 아닌 입체적이고 살아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실체를 느낄 수는 없을까. 신라인들이 불국사와 석불을 만들면서 전해주고자 했던 불국정토의 꿈을 공유하고 싶어 지금까지 엄청난 이들이 토함산에 올랐을 터다. 필자 마음도 똑같다. 토함산 취재에 나서면서 신라인들의 소박한 숨결만을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출발에 앞서 불국사와 석굴암의 예술적 문화사적 의미 등은 이번 기획에서 아예 내려놨다. 필자가 그만한 역량을 갖춘 것도 아니고 이미 수많은 이들이 빼어난 저술을 남겨놓은 바 있어 말을 보탬은 무지의 소치만 드러낼 뿐이니까. 오히려 가장 순진무구한 눈으로 토함산의 예술문화를 찬찬히 살펴보려 한다. 있는 그대로 살피다 보면 문득 신라인들이 전해주려던 진심에 닿아있지 않을까?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은 토함산. 다른 산들도 저마다 정기를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토함산에 비견키는 어렵다. 토함산은 신라초기 위대한 제왕 석탈해와 연결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고, 경주 신라와는 영광과 아픔 등이 얽히고 설켜 있다.이번 연재는 토함산을 시작으로 석탈해의 신화는 물론 불국사와 석굴암 등 토함산에 깃들어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씩 그려내려 한다. 취재를 마칠 무렵에는 신라인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염원의 일단을 독자들과 함께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글 싣는 순서1 토함산의 역사와 전설2 토함산의 동·식물3 토함산의 수호신 석탈해4 토함의 전설 담긴 영지5 ~ 8 불국의 나라를 꿈꾸다9 ~11 신이 빚은 솜씨 석굴암12 유흥준 교수와의 대담13 천년고찰의 향기 기림사14 흔적만 남아도 부처님 형상 폐사지15 토함산 자락의 마을들16 ~17 토함과 얽힌 문화예술 인사18 토함의 과거를 이야기 하다19 토함의 현재를 이야기 하다20 토함의 미래를 이야기 하다 □ 구름을 토하고 삼키는 형상에서 유래토함산을 제대로 느끼려면 역시 온몸으로 부딪혀야 한다. 책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한 걸음씩 토함산에 발을 내디뎌야 비로소 산이 가진 역사성이 체득되게 마련이다.길을 오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동악 토함산의 유래다. 토함산은 한자로는 ‘吐含山’이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머금고 토하는 산’이라는 의미다.토함의 유래를 살펴보니 대략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전해진다. 먼저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토함산은 바닷가 근처에 있어서 안개가 자주 끼고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것 같다 해서 붙여졌다는 것이다. 토함산에는 동해의 습기와 바람이 변화무쌍하게 올라와 마치 그 형상이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하는 비현실적인 모습을 연출한다.실제 토함산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온산을 뒤덮다가 어느새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고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지듯 비현실적인 경관을 연출한다.불교 보물을 품고 있는 산답게 부처님의 진리를 언제든 머금고 토해낸다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또 다른 설은 토함산의 수호신인 석탈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탈해의 탈해는 토해(吐解)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석탈해왕의 또 다른 이름인 토해가 토함과 비슷한 음으로 발전해 토함산이 되었다는 것인데, 조금은 억지스럽기도 하다. 아마도 석탈해왕과의 인연 때문에 생겨난 설화인 것으로 추정된다.토함산이란 지명이 석탈해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질지 몰라도 석탈해의 주요 근거지는 토함산인 것은 분명하다. 석탈해가 동악의 신, 즉 토함산의 신으로 추앙받는 것도 그의 주요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 토함산 무한한 가능성 가진 길지풍수적으로 토함산은 명당의 풍모를 갖춘 곳이다. 토함산의 옛 이름은 토월산이었다. 풍수가들은 반달(半月) 혹은 초승달 모양의 땅 모양(地勢)을 길지로 본다. 초승달과 반달은 막 시작하거나 아직 성장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앞으로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반달형의 지세를 풍수적 길지로 보고 그런 곳에 동읍지를 정하거나 주택을 지어 살게 되면 모든 기운이 상승해 발복과 장래의 발전성을 가져다준다고 한다.울산 쪽 방향인 경주 외동읍에 있는 영지에서 토함산을 풍수적으로 보면 ‘여성이 머리를 감고 있는 모양(옥녀세발형)’이라고들 한다. 토함산에서 경주 시내 쪽으로 뻗은 산의 형세도 여성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인다.신라 천년의 힘이 어쩌면 토함산에서 발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토함산은 동해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바다로 침입해 오는 외적의 침입을 빨리 감시할 수 있었다. 소위, 국방의 요새였던 것이다. 토함산과 관련해 우리 역사의 전면에 나선 최초의 기록도 전해진다.삼국사기에 따르면 BC14년(신라 남해차차웅11년)에 왜인들이 민가를 약탈하자 박혁거세의 아들인 남해차차웅이 6부의 군사 1천명을 동원해 왜인을 내쫓았다. 신라군이 왜인들을 토벌하느라 신라왕성을 비우자 신라와 적국이었던 낙랑군이 재빨리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을 공격했다. 낙랑군의 공격이 이뤄진 날 밤에 묘하게도 낙랑진영으로 유성이 떨어졌다. 혼비백산한 낙랑군이 퇴각을 하면서 신라군의 추격에 대비해 돌무더기를 알천에 쌓아놓고 물러갔다. 토함산의 동쪽에서 추격에 나선 신라 병사들이 알천에 이르러 낙랑군이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많은 것을 발견하고 적병이 많다고 여겨 추격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토함산과 시내 알천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연상시켜주고,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아는 신라 병사들의 지혜를 돋보이게 해준다. 역사가들 또한 동해에서 경주로 진입하는 중간에 토함산이 있었기에 외적이 경주 침입을 계획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한다. 토함산의 역할과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토함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불국사 주차장에서 천천히 올라 석굴암 정문에서 토함산 입구로 몸을 틀어 성화채화지를 거쳐 정상에 오르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 토함산 ‘3년 동안 화재’ 흥미로운 기록도한참을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울창한 편백 나무 숲길이 나타나고, 편백 나무 숲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성화채화지 입구가 나온다.이곳 토함산의 성화채화지는 매년 개최되는 경북도민 체육대회 때 성화 채화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화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삼국사기에는 토함산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이야기 나온다. “신라시대 진평왕 31년 정월 모지악의 땅이 타기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꺼졌다.” “무열왕 시대에 토함산의 땅이 타다가 3년 만에 꺼졌다”는 것이다. 토함산이 무려 3년간이나 불탔다는 것은 아마도 천연가스나 석유가 매장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기도 한다. 토함산이 성화채화지가 된 것도 어쩌면 우연이 아닌 역사의 배려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성화채화지를 지나면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토함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정상에 서면 보문호와 덕동호를 비롯해 멀리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까지 굽어볼 수 있다. /최병일 작가

2022-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