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세탁기 없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오래전이지만, KBS ‘일요스페셜’에 세탁기 안 쓰는 사람으로 출연했을 만큼 세탁기를 안 썼다. 잠시 세탁기를 들인 적도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오래지 않아 없앴다. 그런데 석 달 전 손목에 이상이 생겨 빨래를 짤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세탁기를 사게 된 것이다.
마침 중고거래 장터에 새 상품이 반값에 나왔다. 인수하려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하고 용달비를 추가로 물어야 해서 대단히 유리한 조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물건을 사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세탁기용 수도가 없다는 것이다. 세탁기 쓸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오래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집수리센터에 가서 사진을 보여주고 견적을 받았으나 직접 와서 보고는 못 하겠다고 한다. 사진만 보고 부른 견적이 너무 싸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비용 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했지만 이유도 묻지 못하고 중고거래 동네생활에 사정을 올렸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눔으로 해주겠다고 나섰다.
전문업자도 안 한다는 일을 생면부지 남을 위해 나서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이유를 물었다. ‘생활 속에서 부품 몇 개로 DIY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일들을 도와드리는 것뿐, 금전을 받을 만큼 전문은 아닙니다. 우울한 일상에서 몰랐던 것도 배우게 돼서 해드립니다.’
드디어 세탁기가 들어와서 나눔 해주시는 분이 오기로 했다. 하필 전날 폭우가 내리쳐서 계단참에 빗물이 흥건히 고였길래 얼른 나가서 물웅덩이를 말끔히 쓸었다. 집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다 치웠다. 그러면서 과연 내가 돈을 지불하는 집수리업자가 와도 이렇게 했을까 의문이 들면서 ‘환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환대’는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그의 대학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출간된 지 10년이 되어가는데도 지금도 여러 독서 모임에서 선정되고 있다. 사람을 교환가치로만 생각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묵직한 문제의식이 시의성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현경은 프롤로그에서 그림자나 웃음, 눈물이 없다면 사회에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우화 몇 개를 소개하며 그림자나 웃음, 눈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만 환대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림자나 웃음, 눈물을 환대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재해석하고 싶다.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가 공공성을 창출하는 ‘사람’이 되는 조건이 바로 환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눔을 해준 분은 동네생활의 몇 글자만 보고 기꺼이 도움을 약속했고 90분에 걸쳐 세탁기 수도를 연결해주고는 공구 가방을 따릉이에 싣고 ‘손목 아프지 마세요’ 인사를 남기고 어떤 선물도 거절한 채 홀연히 떠나갔다.
김현경은 환대와 증여를 구분하면서 준 것을 잊어야 환대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나눔해준 그 분이야말로 진정으로 환대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다만, 받은 것도 잊어야 환대라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준 사람은 잊어도 받은 사람은 잊지 않는 것, 그것이 환대의 완결이 아닐까.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