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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매화를 사랑한 이들

조희룡 ‘매화서옥(梅花書屋)’​을 보았다. 대구 간송미술관 2전시실에 오롯이 홀로 자리한 그림이다. 전시실 입구에는 매화 한 송이가 하얀 꽃병에 꽂혔다. 선비의 서재를 몰래 들어가는 느낌이다. 매화 숲속의 서재라는 뜻의 그림을 만나러 들어갔다. 벽에 매화 한 그루가 가지가 생기고 꽃잎이 피어나 나무가 환해지는 순간이 천천히 그려진다. 영상을 보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매화서옥’ 진품이 우릴 맞는다. 천천히 다가가 매화향에 스며들게 만든다. 그림 속 조희룡이 어떤 향기를 맡고 있을지 짐작이 되었다. 봄이면 경주 통일전에 매화를 보러 찾아간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차 문을 열면 매화향이 마중을 나와 있다. 아직 꽃은 보이지도 않는데 향기로 어서 오라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통일전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큰 연못이 있고, 하얗게 꽃구름이 뭉싯한 매화가 한 그루 보인다. 그림에는 선비의 집 주위로 하얗게 둘러쌌으니 그 향이 숲 가득할 것이다. 매화서옥, 가파른 산기슭 아래 나지막이 자리한 서옥과 그 주변을 감싸는 매화, 그중 한 가지를 병에 꽂아 바라보는 모습이 화폭에 담겼다. 짧은 순간 피고 지는 꽃이 아쉬워 화폭에 담아두었을 매화, 화가는 매화를 좋아하는 병이 있어 스스로 매화 큰 병풍을 그려 자는 방에 이를 둘러놓고 벼루는 매화시경연을 쓰며, 먹은 매화서옥장연을 썼다. 바야흐로 매화백영을 본떠 시를 짓고, 시가 이루어지면 방에 ‘매화백영루’라는 편액을 걸어 자신이 매화 좋아하는 뜻을 통쾌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런데 금방 이루어지지 않아 억지로 읊다가 목이 말라 매화편차로 목을 축이었다. 매일 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다가 입추에 접어드니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며칠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고 잠자리에 들었다. 용케도 알고 귀뚜라미가 창가에 와서 날개를 비빈다. 옛사람들이 만든 절기가 어쩜 이리 딱 맞는지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여름휴가에 24절기에 관한 책 ‘제철행복’을 읽었다. 한 해를 사계절이 아닌 24계절로 나눠 살았던 현명함에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절기마다 먹는 음식이 따로 있고, 절기마다 피는 꽃을 옛사람들은 어떻게 즐기는지 알게 되었다. 12월에 있어 맨 끝의 절기인가 했더니 조선시대는 동지가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다. 궁궐에서는 천문과 지리를 담당하던 기관 ‘관상감’에서 새해 달력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렸다. 책 형태로 만들어진 달력이라 하여 ‘동지책력’이라 불렀다. 신하들에게 절기가 적힌 달력을 선물로 내리면 신하들은 그것을 가까운 친지들에게 나눠 삶의 지표로 삼았다. 조선 후기에는 30만 부나 찍었다고 하니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선물이었다. 24절기 중에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조상들이 팥죽을 먹고 봄을 기다리며 즐긴 풍류가 놀라웠다. ‘구구소한도’라는 풍속인데 양수 9를 길하게 여긴 조상들은 동짓날로부터 아흐레가 아홉 번 반복된 날, 즉 81일째 되는 날에 봄이 온다고 여겼다. 그래서 동짓날에 흰 종이에 매화 81송이를 그려 창문이나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하나씩 색칠해 나갔다. 흐린 날엔 매화 위쪽을, 맑은 날은 아래쪽을, 바람 부는 날은 왼쪽을, 비가 오는 날에는 오른쪽을, 눈이 오는 날에는 한가운데를 칠했다. 마침내 81개가 모두 칠해진 날 창문을 활짝 열고 진짜 매화를 바라보았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낭만적인지, 올해 동지에는 친구들에게 구구소한도를 나누며 색칠 놀이를 권하고 싶다. 81일 동안 색칠하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함께 매화를 찾아 나서는 탐매 모임을 만들어야겠다. 더운 여름을 잊게 하는 옛 어른들에게 배우는 피서법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12

안동 낙동강변을 ‘맨발로 룰루랄라’

입추와 말복이 지나고 더위가 한풀 꺾였다. 그래도 우리 몸이 기억하는 여름 더위는 추석 전까지는 이어지리라. 여름에는 물놀이만한 피서가 없다. 산으로, 계곡으로, 바다로, 강으로, 사람들은 더위를 식히러 떠난다. 하지만 멀리 떠나지 않아도 이 여름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안동시 낙동강변(운흥동300 일원)에 시원한 물에 발 담그고 물속에서 걷기운동을 할 수 있는 곳이 생겼기 때문이다. 최근 탈춤공원 건너 강변에 약 400m 길이의 ‘물속 걷는 길’이 조성됐다. ‘물속 걷는 길’은 안동댐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을 실개천으로 유입해 만든 수로형 산책로다. 시원한 실개천에 파라솔과 의자를 비치해 걷다가 담소를 나눌 수도 있고 간단한 간식도 먹을 수 있다. 주의할 점은 파라솔에서 커피나 간식을 즐긴 후 꼭 뒷정리를 하고 가지고 온 쓰레기는 다시 가져가는 시민의식을 보여주면 좋겠다. 안동시는 지난해부터 낙동강변에 모래길과 적운모길, 자갈길을 조성해 시민들의 맨발 걷기를 장려하고 있다. 자연친화적인 공간에 이번 물속 걷는 길까지 조성되면서 산책을 즐기던 시민들에겐 더 없는 힐링의 장소가 되었다. 접근성도 높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걸을 수 있다. 마침 맨발 걷기에 나선 법흥동 주민은 “그동안 도청 신도시 천년숲 황톳길을 걸으러 일부러 그 멀리 다녀오곤 했는데 안동 시내에도 이런 곳이 만들어져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싱 운동의 붐은 건강과 저속노화에 관심이 끊기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물속 걷는 길’은 초등생 종아리 반 정도의 물 깊이라 아이들과 함께 즐겨도 좋고 어르신들이 운동하기도 안전하다. 파라솔에 앉아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책 한 권 읽는 여유도 즐길 수 있다. 앞으로 잘 가꾸어 장점을 극대화시킨다면 안동의 또다른 명소가 될 것이다. 또, 토요일 밤에는 가까이 낙동강 음악분수 쇼를 관람하고 다양한 공연과 음악 감상도 가능하니 올 여름 남은 더위는 낙동강변에서 여유 있게 보내면 좋을 듯하다. /백소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12

대구형무소 역사관에서 배우는 애국심

대구에는 근대역사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근대역사골목이라는 여행길이 만들어져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끈다. 역사교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중 한 군데인 대구형무소 역사관을 찾아보았다. 대구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감옥이다. 1908년 대구부에 처음 설립된 뒤 1910년에 중구 삼덕동으로 이전됐다. 대구형무소에는 2386명의 서훈 독립운동가가 투옥됐었다. 그 중 216명(국가 서훈 212명)이 순국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로 추모된 195명 (국가 서훈 175명)보다 많은 숫자다. 대구형무소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공간이다. 오늘날 이곳은 그 아픈 역사를 생생히 전하는 역사 교육의 현장이다. 역사관은 대구시 중구 공평동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2층에 있다. 역사관 내부에 들어서면 이육사, 장진흥, 박상진, 김영랑, 이종암 등 대구형무소에 수감 되었던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투옥 당시의 기록이 전시돼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육사 시인은 ‘광야’와 ‘절정’ 등의 시틀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조선의용대 활동 중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장진홍 의사는 1920년 대구 조선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투사로, 그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또 박상진 선생은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인물로, 사형 선고 후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영랑과 독립운동가 이종암 역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는 등 일제에 맞서 저항한 삶을 살았던 분이다. 전역에서 모여든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갇혀 고문과 옥고를 견디며 꺾이지 않는 애국심을 지킨 장소란 점에서 대구형무소는 단순한 수감시설 이상의 항일의 성지로 평가된다. 대구형무소역사관은 과거의 기록이 아닌, 오늘의 우리가 기억하고 이어가야 할 자유와 정의의 정신을 되새기는 장소다. 일제의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발자취는 지금도 여전히 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주고 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가족과 함께 찾아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볼만한 교육 현장이다. 대구형무소 역사관 연락처는 (053)255-2194이다. /유병길 시민기자

2025-08-10

대구공군전우회 그날을 회상하다

대구공군전우회가 광복 80년을 맞아 우리나라 공군 전투력의 모태인 K-2 대구동촌비행장을 둘러보고 선배 전우들의 희생과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신문식(95) 참전용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들을 전해 듣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우리 공군은 연락기 수준인 L-4, L-5, T-6 등 구형 모델의 비행기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 7월 한국공군의 전력강화를 위해 미 극동사령부가 일본 ‘이다즈케’ 기지에 있던 전투기 F-51D(무스탕) 10대를 인수하게 된다. 이것이 시발이 돼 대구동촌비행장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이근석 장군은 동촌비행장에서 직접 비행기를 몰면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장군은 적의 탱크 공격에 직접 나섰다가 불행하게도 안양 상공에서 적의 공격에 피격돼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직하게 된다. 이후 우리 공군은 1952년 5월 황해북도 승호리 철교 폭파와 8월 평양 폭격을 성공시켜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당시 유치곤 장군은 전투기 출격 203회로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유치곤 장군을 기리는 기념관은 현재 대구 달성군 현풍면 유가읍 양리에 있다. 또 당시 활약하던 김영환 장군은 1951년 8월 합천 해인사에 숨어든 공비 토벌을 위해 해인사 폭격을 명령받았지만 국가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과 각종 유산의 훼손을 우려, 기관총 사격으로 적을 퇴치한다. 한국불교 조계종 종단에선 이를 기억하기 위해 해인사 입구에 그의 추모비를 세워 업적을 알리고 있다. 한편 권태정 공군장학재단 이사장과 남상석 전우회 회장, 정중규·이문길 부회장은 6·25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신문식 유공자를 찾아 당시 얘기를 나누며 그를 위로했다. 1930년 성주에서 태어난 신 유공자는 21살인 1951년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 했다. 성주고등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가야산, 지리산 등지로 공비 토벌에 나서는 등 학도병으로도 활약했다. 1953년 1월 공군에 입대해 조종 간부가 됐으나 훈련 중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 공군 헌병대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이후 대구공군기지 헌병대 선임하사로 근무하다 1978년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사업가로 변신해 고향 노인을 위해 각종 봉사활동을 벌였고, 대구공군 6·25 참전 용사회 회장직도 맡아 후배들의 사기진작에 힘을 보탰다. 최근에는 보라매 장학기금으로 1000만원을 기탁했다. 대구공군전우회는 선배 전우들의 희생정신과 업적을 가슴에 새기면서 광복 80년의 의미를 나누었다. /권정태 시민기자

2025-08-10

견공(犬公)

나는 인간과 무척 친한 동물이다. 어떤 집에서는 나를 ‘반려견’이라 부르며 식구 대접까지 해준다. 인간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친했다 멀어지지만, 우리 견공은 다르다. 우린 맹목적인 충성, 그것 하나로 족하다. 우리 조상 중에는 참으로 영특한 이가 있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하던 날, 우리 견공에게는 앞다리 둘, 뒷다리 하나만 주셨다고 한다. 아니, 그럼 어떻게 걸으라고! 어느 날, 우리 조상이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 움직이지도 않는 가마솥이 네 다리를 떡 벌리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세 다리로 온갖 고생을 하는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화가 난 조상께서는 조물주께 따지러 갔다. 조물주 영감님 하나 물어봅시다, 가마솥은 하루 종일 움직이지도 않는데 다리가 네 개고 저희는 여우도 쫓고, 도둑도 막고, 집 지키랴 바쁜데 우리에게는 왜 다리 세 개만 주십니까? 논리 정연한 우리 조상의 어필에 조물주께서도 듣고 보니 타당한지라 가마솥 다리 하나를 뚝 떼어 우리 조상께 주셨다. 그날 이후로 가마솥은 세 다리, 우리는 네 다리가 되었다. 우리는 안정된 걸음걸이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 감격의 순간을 기려 우리 선조는 유언을 남겼다. “앞으로 오줌을 눌 땐, 조물주가 주신 그 고귀한 다리를 들고 누거라.” 이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수컷 견공들은 한쪽 다리를 들고 오늘도 예의를 지킨다. 얼마나 염치 있는 족속인가. 그런 우리를 인간들은 종종 모욕한다. ‘개고생’이란 말 우리가 언제 인간을 고생시켰단 말인가? 고생은 니들끼리 해놓고, 왜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가? 그리고 ‘개망나니’는 또 뭐란 말인가. 그냥 망나니면 됐지, 왜 굳이 개를 앞에 붙이나? 초등학생들조차 “야, 개 XX야!” 하고 소리친다. 우리 새끼들이 듣기라도 하면 상처받을 일이다. ‘개살구’는 또 어떤가. 보기만 좋고 맛은 없다니? 우리 견공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가장 억울한 건 개판 5분전이다. 듣기엔 마치 우리견공들이 난장판을 만든 것 같지만 사실 이 말은 ‘개판(開板)’, 즉 솥뚜껑을 여는 시간과 관련이 있다. 6·25 전쟁 중 병사들에게 밥을 빨리 먹이려고 취사병이 밥 솥 뚜껑을 열기 5분 전이라 외치던 바로 그 “개판(開板) 5분 전!”이다. 전혀 우리랑 상관없는 말이다. 제발 용어 선택 좀 조심해 주길 바란다. 며칠 전엔 주인님이 전화를 하시더라. “자네들, 우리가 복날에도 안 죽고 살아남았으니, 우리 개띠들 생환 기념으로 한잔 하세!” 이 얼마나 위트 넘치는 인간인가. 주인님이 개띠라서 나는 진심으로 행복하다. 이런 주인에게는 꼬리를 흔들고 싶다. 이참에 ‘견공’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사연을 하나 들려주겠다. 경상도 선산, 해평 땅의 한 역참집에 누렁이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던 이 견공은 하루는 술 취한 주인이 말에서 떨어져 잠든 사이, 들불이 번져오는 걸 목격했다. 놀란 누렁이는 낙동강으로 달려가 수백 보를 뛰어넘어 꼬리를 적셔 돌아왔다. 그렇게 수차례 물을 날라 불을 껐고, 결국 그 자리에서 기진맥진 쓰러져 숨을 거뒀다. 주인이 깨어 보니, 개는 죽어 있었고 꼬리는 그을려 있었다. 그제야 개가 자기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주인은 개를 정성껏 묻어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견공(犬公)’이라 불렀다. 지금도 구미 해평면 낙산리에 가면 그 묘가 있다. 그런 고귀한 전통이 있는 우리가, 욕설이나 듣는 대상이 된 게 참으로 안타깝다. 난 그저 우리 조상처럼 의연하고 당당하게 살다가 ‘개’가 아니라 ‘견공’으로 기억되길 바랄 뿐이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8-10

퍼포먼스 서예 창시자 리홍재 특별초대전

율산 리홍재(李洪宰) 선생은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한국 현대 서예의 대표적 기인(奇人)이자 퍼포먼스 서예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통 서예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와 파괴, 철학과 순간의 예술을 통합한 독창적인 서예가다. 탐구 퍼포먼스, 전통과 현대의 융합적 서체, 그리고 창작하는 그 자체를 예술로 삼는 삶의 철학으로 서예계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시각적 미감을 넘어 삶의 태도와 미학적 가치를 전달하며, 많은 후학들에게도 영감을 주고 있다. 예술 정체성의 전통과 규범을 깨고 자유롭고 파괴적인 서체 공간을 열어가는 그의 열정이 이채롭게 여겨진다. 또 예술적 퍼포먼스는 관객과 공유하는 ‘창작의 순간’임을 보는 이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그는 철학적 태도로 ‘무아의 경지’를 지향한다. 삶과 예술을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해 젊은 나이에 미술계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대구·서울 미술제 초대작가로 선정되었고, 개인전 때마다 출품작들이 큰 반향을 일으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율산은 국전 심사위원,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 수상 등 공적 경력으로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인정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율산은 타묵 퍼포먼스의 개척자로서 1999년 봉산미술제에서 초대형 붓을 활용한 공연을 선보이며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이후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축하 행사를 서울 보신각 특설무대에서 진행했으며, 월드컵 대회와 유니버시아드 대회 개막 퍼포먼스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무흘구곡 전시관 현판, 사명대사 공원 건강문화원 현판, 용화사 일주문·대웅전 주련, 김천시립도서관 표지석, 김천시민운동장 표지석, 백수문학관 현판, 김천혁신도시 준공비 휘호 작업 등이 있으며, 김천시 승격 60주년 자랑스러운 김천인으로도 선정된 바 있다. 김천 배꼽갤러리에서 율산 리홍재는 율산 특별초대전을 8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한 달간 연다. 율산의 지인인 초지 예찬건 국악인은 이번 전시회 축하 편지에서 “리홍재 선생님이 창시한 타묵 퍼포먼스는 전통 서예의 정적인 틀을 깨고, 붓이 마치 살아 있는 혼을 담은 듯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장관을 연출한다”라고 칭송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8-10

서로 존중하는 여행으로 삶의 활력을 되찾자

올여름에는 두 번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한 번은 자매들과의 여행이었고 한 번은 아들딸과의 여행이었다. 세대가 다른 일행과의 여행은 여러 면에서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친정 자매들은 모두 오십을 넘어선 중년들이다. 어렵게 살아온 부모님 세대 어른들보다야 좀 나은 환경에서 살았지만 그래도 힘든 유년을 보낸 세대이다. 절약이 배어있고 뭐든 아껴야 잘 산다고 생각한다. 여행에서도 그런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출발하기 전부터 가장 알뜰하고 효율적인 여행 방법을 연구한다. 먹거리도 미리 준비해서 불필요한 경비를 줄이려 노력한다. 메뉴를 짜고 장을 보고 미리 준비물을 챙긴다. 생수는 얼려서 준비하고 커피나 간식거리도 준비한다. 그러다 보니 짧은 여행에도 짐이 많은 편이다. 숙소를 정할 때도 가성비를 가장 먼저 따진다. 좋은 시설이나 뷰보다는 얼마나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약보다는 현지에 가서 조금이라도 저렴한 펜션을 직접 찾는 것을 선호한다. 일상을 벗어나 쉼을 위하여 여행을 떠나기는 하지만 되도록 아끼고 경비가 덜 드는 여행을 선호하는 편이다. 아이들과 여행을 떠날 때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우선은 여행 계획을 짤 때 숙소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디에 위치하고 어떤 시설을 갖추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고려한다. 예를 들어 바다가 바라보이고 일출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곳이나 외관이 동화 속처럼 아름다운 곳을 선호한다. 또 수영장이 있고 바비큐를 멋지게 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먹을 것도 여행지의 가장 큰 마트를 미리 물색해 두고 현지에 가서 필요한 것을 구매한다. 미리 바리바리 먹을 것을 싸 들고 다니지를 않는다.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과정이라 여긴다. 여행지 선택도 얼마나 사진이 멋지게 나올지를 염두에 두고 선택하는 편이다. 단순히 구경만 다니는 것보다 뭔가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유명한 카페를 일부러 찾아간다. 한 세대 차이지만 여행에서도 이런 다름을 보인다. 자매들과의 여행에서는 가정식처럼 싸 온 음식으로 정겹게 식사할 수 있어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숙소가 썩 훌륭하진 않아도 함께 수다 떨고 같이 자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적은 경비로 부담 없는 여행을 다녀올 수 있어 마음도 가볍다. 아이들과의 여행에서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젊은 층이 선호하는 곳을 체험하고 아이들의 정서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함께 여행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큰 재미다. 세상은 참 빠르게 변화한다. 아이들 세대와 우리는 한 세대 차이지만 모든 면에서 다르다. 두 세대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려면 서로 존중이 필요할 것 같다. 함께 하려면 어른은 아이들의 방식을 존중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방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자신들의 생각만을 고집하면 애써 떠난 여행이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은 아직 진행형이다. 세상은 연일 폭염으로 몸살을 앓는다. 이럴 때 여행을 다녀오면 기분전환도 되고 활력소가 된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여행 스타일로 이 여름을 슬기롭게 이겨내 보자.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07

경주문화관 1918서 만난 ‘반 고흐 in 미디어아트전’

오랜 비가 그치니 다시 무더운 날씨다. 날씨를 핑계 삼아 쉬고 싶었으나 어린 아들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방문지를 고민하다 연꽃이 만발했단 소리에 살짝 솔깃했으나 그뿐. 뜨거운 날씨로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마침 경주는 근래에 들어 여기저기서 유명작가들 전시회로 전시 풍년이다. 그 덕에 이름값 좀 한다는 작가들의 작품을 큰 비용 들이지 않고 근거리에서 편하게 만나 볼 수 있다. 그중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고르니 경주문화관1918에서 진행 중인 빈센트 반 고흐전이 당첨됐다. 작가의 유명세도 있지만 미디어아트전이란 점이 점수를 더 얻었다. 10살이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사물들도 함께 움직여줘야 좋아할 나이다. 무료관람이라 입구에서 인원수만 확인하고 들어갔다. 이번 전시의 특별한 점은 전시 공간이 하나라는 점이다. 국내 최초 스토리몰입형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한 전시다. 영상물은 시간 단위로 상영 중이므로 가급적 시간표를 확인 후 맞춰 방문하는 편이 좋다. 공간 안으로 들어서자 온 사방이 고흐의 그림으로 가득 찼다.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흔한 레플리카 전시려니 했던 예상은 완전히 깨져버렸다. 약간의 당혹감으로 내부를 돌아보니 바닥엔 보드라운 매트가 깔려있고 관람객들은 둥근 방석 위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저마다 편안한 자세와 방향을 택해 관람중이었다. 네면 중 편한 쪽을 택하면 된다. 영상은 총 6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다. 챕터1에서는 나는 빈센트 반 고흐 ‘나의 희망, 나의 열정, 나의 세상’이란 주제로 이야기가 보여진다. 챕터2에서는 노래로도 잘 알려진 별이 빛나는 밤에 작품이 등장한다. 공간은 순식간에 둥근 별빛으로 가득 찬 밤하늘이 되었다. 이렇게 멋진 밤하늘이라니. 감탄이 나왔다. 때때로 정말 아름다운 풍경 작품들을 만나면 상상을 해본다. 실제로 이런 풍경을 현실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그야말로 꿈 같은 세상일 것이다. 챕터3에선 조금 무거워진다. 화사한 해바라기도 환상적인 밤하늘도 아닌 현실 속 인물들이 나타난다. 희미한 조명 하나에 의지해 사람들은 감자를 먹고 있다. 초상화라면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귀부인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인물들이다. 도자기 같은 피부에 홍조를 띈 모습이 아닌 거칠고 투박하며 볕에 그을린 노동자의 모습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던 고흐는 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남겼다. 다음 챕터에선 폴 고갱과 해바라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고갱을 만나는 기쁨에 해바라기 그림까지 준비한 고흐지만 둘은 너무나 결이 다른 영혼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결국 한쪽 귀를 붕대로 둘둘 감은 고흐의 자화상으로 마무리된다. 챕터 5에서는 동생 테오와 아몬드 나무 이야기가 이어진다. 고흐 평생의 후원자이자 기댐목이었던 동생 테오. 어쩌면 서로의 버팀목이었는지 모른다. 끝으로 챕터 6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태양 ‘영원한 태양을 그리는 화가’로 영상은 마무리된다. ‘반 고흐 인 경주’ 미디어아트전은 경주문화관 1918에서 진행된다. 전시 기간은 7월 8일에서 9월 18일까지다. 회차당 관람 가능 인원은 3~40명이며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5시 30분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07

불볕더위 식혀주는 여름 피서지 경주 옥산서원 계곡

문을 열고나서면 곧장 마주하게 되는 불볕더위. ‘연일 무더위 지속 중’이라는 안전안내문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고 사람들은 시원한 곳을 찾아 바다로 계곡으로 서둘러 피서를 떠난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지나는 여름 한낮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열대지방 사람들이 느긋할 수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여름휴가라며 아들 품에 안긴 손자들이 온다. 영일대 해수욕장은 지난 산불피해 이후 폭우로 떠내려 온 나무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고, 포항 형산강 야외물놀이장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가성비 좋은 공간이긴 하나 그늘막이 있다지만 감당해야 할 볕이 너무 강하다.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 가까이 경주 옥산서원 계곡으로 향한다. 이곳은 손자를 안고 온 아들이 어릴 적 자주 찾았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안강 들녘을 지나 옥산서원으로 향하는 길. 내리쬐는 불볕더위를 온몸으로 즐기는 벼들이 들녘을 녹색으로 빼꼭히 채우며 넘실거린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그 풍경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시원하다. 옥산서원 계곡으로 들어서니 울창한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에 실린 요란한 매미 소리조차 정겹다. 비 온 뒤라서인지 미니폭포 아래는 청장년들이 다이빙을 즐길 정도로 물이 깊고, 바위 위를 흐르는 얕은 물줄기는 볕에 데워져 아기들이 놀기에 안성맞춤인 따뜻한 물놀이 공간이 절로 마련된다. 이 곳은 단순한 피서지를 넘어 선비의 정신이 깃든, 조선 중기 대학자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곳으로 선조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유서 깊은 교육기관이다. 옥산서원 편액 ‘玉山書院’은 추사 김정희 글씨다. 유홍준 교수는 이를 “솜으로 감싼 쇠덩이, 송곳으로 철판을 꿰뚫는 힘”이라 평한다. 석봉 한호가 쓴 ‘無邊樓(무변루)’와 ‘求仁堂(구인당)’ 외에도 당대 명필들의 글씨를 감상할 수 있다. 뒤편 독락당(獨樂堂)은 회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를 위해 지은 곳이다. 그의 철학과 삶의 자세가 오롯이 담긴 이 공간에 그를 찾아 이곳을 다녀간 퇴계 선생의 기운도 서려있다.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옥산서원은 독락당,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독락당에 얽힌 이야기. 회재 선생의 서자였던 잠계 이전인(유일 혈손)은 부친의 유배지를 찾아가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학문을 계승한다. 유배지 평안도 강계에서 돌아가시자 엄동설한 혹한 속 대나무로 만든 운구죽을 지고 그 먼 길을 걸어 홀로 고향으로 시신을 운구한다. 사후 명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친의 복권(復權)도 이룬다. 그가 간직해온 부친의 유품들과 운구 죽은 험난한 세월에도 대를 이어 목숨처럼 지켜져 오늘날 옥산서원 유물관에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지만 적서(嫡庶)의 차별에 의해 회재 선생의 종택 무첨당은 양자의 후손인 17대 종손이, 옥산서원 독락당은 잠계공의 후손 종손이 각각 지키고 있다. 계보와 정신의 흐름까지도 살아있는 곳이다. ‘자옥산 깊은 곳에 초려 한 칸 지어두고// 반칸은 청풍주고 반칸은 명월주니// 청산은 들일 데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회재 선생은 독락당에서 ‘靑山曲(청산곡)’을 지어 읊으며 그야말로 자연을 그대로 품었다. 선비가 풍류를 즐기던 전통과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한여름의 하루. 단순한 피서를 넘어 마음의 여백까지 마련한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07

제1회 ‘비슬산 일연문학상’ 공모

(사)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가 지역 문학의 저변 확대와 역량 있는 문인 발굴을 위해 ‘제1회 비슬산 일연문학상 작품공모전’을 개최한다. 이번 공모전은 천년고찰 유가사와 비슬산의 정신을 계승하고, 문학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기획됐다. 특히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대사의 이름을 문학상에 사용함으로써, 달성의 역사성과 한국 시문학의 미래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더했다. 공모 부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본상’은 등단 10년 이상의 대한민국 국적 시인을 대상으로 하며, ‘비슬작가상’은 같은 조건의 달성문인협회 소속 작가에게 수여된다. 다만 최근 5년 이내에 타 문학상에서 당선된 작품이나, 상금 700만 원(비슬작가상은 200만 원) 이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작품은 응모할 수 없다. 본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700만 원, 비슬작가상 수상자에게는 200만 원이 각각 수여된다. 접수는 우편으로만 가능하며, 마감일은 11월 10일(당일 소인 유효)이다. 접수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명천로 331,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이다. 당선작은 오는 12월 1일 발표되며, 시상식은 12월 중순 개최될 예정이다. 이번 공모전은 달성군과 달성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진행된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 관계자는 “이번 공모전을 통해 비슬산 자락에서 한국 현대문학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8-07

우리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

여행은 설렘을 동반하는 말이다.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잠시 ‘떠남’이 주는 여유를 즐기다 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꽤 새롭다. 우리가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이고 여행이 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국내이건 해외이건 장소는 상관없다. 정여울 작가는 ‘여행의 쓸모’에서 여행을 ‘일상의 뒤치다꺼리에 잠식되지 않는 시간, 타인의 시선에 일희일비하며 상처받지 않는 시간, 그런 시간의 발자국을 조금씩 늘리는 것’이라고 썼다. 일상이 반복되고 있는 아이들과 여행의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방학이어도 매일 학원과 학교로 향하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아이들에게 잠깐의 여유를 찾아 지난 주말 국립중앙박물관 관람과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DDP 건축투어를 하기로 하고 자세한 건 아이들에게 맡겼다. 주말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방학과 휴가가 있는 때여서 박물관이 개장 전임에도 불구하고 줄이 몇 겹이나 만들어져 있었다. 많은 인파에 놀랐는데 대부분 이른 아침부터 여러 지역에서 자녀들과 함께 중앙박물관으로 온 부모들이었다. 오전 10시 개장과 동시에 입장이 시작되고 우리는 특별전이 열리는 ‘마나 모아나’로 향했다. 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같았지만 영화 ‘모아나’를 재미있게 본 터라 오세아니아의 전통 예술과 철학을 상상하며 관람을 시작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카누 영상이 나와 우리들을 태우고 전시실 안으로 데려간다. 전시실 안은 카누와 장신구들이 여러 컨셉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입장권에도 독특한 글자와 가면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조각상들이 어디서 본 듯한 이국적인 향기를 풍겼다. 전시실에는 그들의 삶을 이어주던 카누가 실제 모습 그대로 놓여 있다. 그들에겐 항해의 기술이 중요했던 것처럼 파도와 뜻밖의 재난을 피하기 위한 날씨도 중요했다. ‘호스’는 그들이 항해 시에 가지고 다닌 날씨 부적이었는데 작은 조각 하나에도 바다의 삶에서 살아남기 위한 간절함이 느껴진다. 장례 의식을 치를 때 쓰이는 장신구들 가면, 돼지 뼈로 만든 남성의 장신구가 남성의 강인함을 상징한다고 했다. 카누와 장신구들은 그들의 손끝에서 바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출구로 나오니 앉을 수 있는 자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점심 후에도 상설 전시를 보기 위해 재입장을 해야 했는데 여전히 입장하는 줄이 길게 이어졌다. 다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건축투어를 하러 갔다. 늦게 예약하는 바람에 건축 투어는 두 자리가 남아 아이들만 투어를 하기로 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도착하니 어울림광장에서는 여름 축제로 스케이트보드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무대를 에워싼 사람들 사이로 전해졌다. 어울림마당에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에는 서울의 수돗물 ‘아리수’를 홍보하기도 하고 건물이 연결되는 그늘진 곳에서는 서울거리공연이 열려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기둥 없이 만들어진 건물이 독특한데 입구인 B2부터 4충까지 이어진다. 4층의 잔디사랑방에는 저녁 어스름에 밴드의 공연이 열리고 있다. 건축에 관심을 둔 아이는 건축에 관한 용어를 알아들을 수 있어 좋다고 만족해했다. 남은 시간 광화문 교보문고와 해리포터 팝업스토어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소비를 즐기고 포항으로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돌아왔다. 2층의 계단참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며 종일 걸었지만 불평이 없으니 아이들이 주도하는 여행이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05

마음 세탁소

경주시 안강읍 산대 11리에는 빨래터가 남아 있다. 중복에 가족들과 옥산서원 근처에 낙지볶음을 먹고 복달임하려고 들렀다. 동네 어디쯤이라고 대충 듣고 찾아가니 못 찾아 길가 텃밭에서 빨간 고추를 한 소쿠리 딴 아주머니께 여쭈었다. 오던 길로 되돌아 가면 공원에 소나무 있고 운동기구 있는 곳이 나오니 거기가 빨래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공영주차장 벽에 빨래하는 그림이 환하게 우릴 반겼다. 주차장 바로 앞이 화전소공원이었다. 공원 둘레에 색색의 백일홍을 심어서 소담스러운 풍경이었다. 팔각정이 보여 다가가니 어르신들이 모여 윷놀이로 더위를 잊고 계셨다. 어디서 왔냐며 올라앉으라며 권하셨다. 포항에서 빨래터 구경하러 왔다고 하니 시원한 냇물에 발도 담궈 보라며 웃으셨다. 바로 옆에 맑은 물이 흐르고 운동기구가 잔디를 따라 놓였다. 돌계단을 따라 빨래터에 내려가 발을 담궜다. 시원한 물이 종아리까지 적셨다. 물고기들이 바닥을 헤엄치고 다녔다. 칠평천에서 내려오는 물이 빨래터를 지나 공원 밑으로 흘렀다. 이름만 빨래터인 건 아니다. 실제로 주민들은 집에서 빨기 어려운 커다란 돗자리 같은 것들을 이곳에 갖고 와서 씻는다. 환경보호를 위해 화학 세제는 금지다. 조선의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도 빨래터가 그림의 소재였다. 그림 속 아낙네 몇이 개울가에서 빨래한다. 그림 왼쪽의 어린아이가 딸린 여성은 머리를 풀어 헤쳐 감은 뒤 다시 땋는다. 그 아래의 여성은 긴 빨래를 비틀어 짜면서 건져낸다. 그 오른쪽에 방망이질하는 여성 둘이 무슨 이야기인지 한참 이야기 삼매경이다. 그림 오른쪽 위의 갓을 쓰고 쥘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양반이 보인다. 신윤복의 그림 ‘빨래터의 사내’를 보자. 개울가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여인, 흰 천을 펼치는 할미, 그리고 목욕을 마쳤는지 젖은 어여머리를 땋고 있는 젊은 여성이 보인다. 왼쪽의 젊고 늘씬한 몸매의 사내는 활과 화살을 들고 눈길은 젊은 여성에게 꽂혔다. 오래전부터 빨래터는 남성과 여성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황진이의 어머니는 18살에 병부교 다리 밑에서 빨래하다 양반을 만나 황진이를 낳았고, 고려 태조 왕건은 빨래터에서 만난 여성과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고려의 두 번째 왕이 된다. 빨래터는 여성들 고유의 일터이자, 수다 떠는 곳이다. 여성의 합법적 집을 나오는 탈출로였고, 동네 소식을 듣고 빨래를 두드리며 스트레스도 해소했다. 여름철엔 밤에 나와 아낙네들이 멱을 감으며 더위를 쫓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주민들은 화전 빨래터를 ‘마음 세탁소’라고 부른다. 빨래를 핑계로 모여 앉아 수다도 떨고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물멍을 하다 보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고 했다. 낮에는 마을 어르신들과 주변 주간보호센터의 어르신들이 꽃구경하러 찾아오고 오후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저녁에는 산책을 나온 주민들이 운동기구도 이용하고 벤치에 앉아 이야기도 나누는 동네 사랑방이 된다니 사람 사는 공간이었다. 도시화로 집마다 세탁기를 들이며 빨래터 풍경은 사라졌다. 안강읍 산대 11리의 빨래터에도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났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 2021년 부녀회와 청년회가 주축이 된 ‘화전마을 꽃두레’가 경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주관한 주민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공모사업에 선정되면서부터 공원 만들기에 속도가 붙었다. 철마다 피는 꽃을 심고 마을주민이 화합해 성과를 보이니 3년 연속 공모사업에 선정되는 결과를 얻어냈다. 안강읍 산대11리 화전마을은 여전히 냇가에 모여 정을 나누는 빨래터를 가진 마을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05

가족끼리, 연인끼리 ‘봉화 계곡여행’ 떠나요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다. 후끈후끈한 태양은 바다로 계곡으로, 산과 강으로 피서를 떠나게 만든다. 눈치 볼 것 없는 숲속 조용한 계곡 여행은 매력적이다. 가족들이 오붓하게 즐길 수 있는 봉화엔 불볕더위를 식히고 호젓하게 휴가를 보내기 좋은 계곡이 많다. 백리장천 고선계곡, 사미정계곡, 반야계곡, 석문동 참새골계곡, 우구치계곡 등이 바로 그곳들. 그중 어느 곳을 여행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고선계곡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청정지역인 고선계곡은 태백산에서 발원한 계곡 중 가장 길어 100리에 이르며, 풍부한 수량과 울창한 숲, 기암괴석의 절벽은 태백산 계곡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힌다. 고선계곡 상류는 열목어가 서식할 정도로 깨끗하다. 계곡 길은 그다지 넓지 않고 예부터 주민들이 다니던 길을 포장했다. 편리를 위해 계곡과 산을 훼손해가며 도로를 확장하고 테크길을 만든 피서지와 다른 부분이다. 고선계곡은 자연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더욱 가치가 커 보인다. 펜션, 민박이 있으며 노지캠핑이나 숲 그늘에 자리 잡고 물놀이 하기도 좋은 곳이다. 외길로 나란히 이어지는 계곡은 굽이굽이 백리장천이다. 민족의 영산 태백산답게 아름다운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사미정계곡 태백산, 문수산, 구룡산에서 발원한 운곡천 물줄기는 춘양면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물줄기 따라 옛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학문과 인생을 논하던 정자가 많이 남아 있다. 정자 자체의 아름다움과 억겁의 세월이 만들어 낸 자연, 그곳에 사미정 정자가 있다. 또한 사미정 계곡이 자리했다. 맑고 깨끗한 풍광으로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기에 손색이 없었던 이곳에는 굽이친 계곡 따라 암반과 소나무가 어우러지고 너럭바위가 푸른 물길을 만들어 낸다. 물고기와 다슬기를 잡으며 여유 있게 지낼 수 있는 물놀이 장소다. △반야계곡 백병산(1154m) 묘봉(1169m), 민등산에서 시작한 물길이 반야계곡이며 석포면에서 낙동강과 합류된다. 반야계곡은 10여km의 길이로 잔잔한 시냇물처럼 흐르는 분위기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기암절벽과 협곡이 있어 웅장함의 비경을 만들고 있다. 신록이 가득한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 계곡은 청명한 물과 새소리를 벗 삼기에 좋다. 복잡한 계곡이나 피서지의 모습이 아니라 오붓한 정겨움이 묻어 나오는 풍경이다. 계곡의 시원한 경치와 물소리, 때 묻지 않은 깨끗함 속에서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피서지다. △석문동 참새골 백두대간 줄기로 태백산과 구룡산 자락이 흘러내리고 맑고 깨끗한 자연 절경으로부터 감동의 깊이가 고스란히 전해 오는 곳이 참새골이다, 찌르듯 곧게 자란 춘양목이 울울창창 하늘을 가리고, 짙푸른 계곡, 길섶으로 물소리와 바람 소리 청명하다. 천연의 요새로 전쟁 때 피난하던 곳이며, ‘정감록’에 기록된 전국 십승지 중 한곳이다. △우구치계곡 백두대간 봉화 구룡산, 삼동산, 옥돌봉에서 출발한 물줄기는 우구치계곡을 거쳐 영월로 이어져 남한강에 합류한다. 우구치 계곡은 영월 내리천의 최상류로 맑은 물과 우거진 산림으로 원시 자연을 품고 있는 계곡이다. 오지의 풍경을 간직한 우구치계곡은 금정계곡이라고도 하며, 춘양 서벽리 백두대간 수목원에서 88번 도로 영월 방향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가닿을 수 있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05

사진으로 보는 광복 80년 대구 북구 80년

대구시 북구(청장 배광식)는 어울아트센터 갤러리 금호에서 대한민국 광복 80주년 및 북구 8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전 ‘사통팔달로 通(통)하다’ 를 지난달 28일부터 오는 16일까지 개최하고 있다.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1950년대 금호강 백사장에는 드럼통에 삶아낸 빨래가 햇살에 마르곤 했다. 그 사이 모래밭에서는 아이들이 두꺼비 집을 지었고, 축제 날이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들이 풍악을 울리며 팔거천 나무다리를 살금살금 건너곤 했다. 지게꾼과 자전거를 탄 삼촌, 중년 신사들도 불어난 물살을 피해 조심스럽게 무태 금호강의 나무다리를 건넜다. 이처럼 강변의 삶과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 대한민국 산업화 여기서 출발하다 골목마다 기계 소리가 대구의 새벽을 채웠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실을 잣던 누이들, 얼굴에 새까만 탄가루를 묻힌 채 땀 흘리던 형님들. 그들이 세운 대한민국 최초의 안경공장, 겨울을 따뜻하게 만든 대성연탄, 지우개 시장을 석권한 화랑고무, 최고 품질의 섬유를 생산한 제일모직. 이 모든 것이 대구 북구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이 되었다. □ 북구에서 축제가 열린다 1948년 고성동에 대구종합운동장이 건립되며 지역 축제의 서막이 올랐다. 이승엽 선수가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달성하던 날, 대구 시민들은 잠자리채를 들고 희망에 부풀어 환호성을 질렀다. 해방 기념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어린이날 등 역사적 순간마다 대구종합운동장은 시민들의 잔치판이 되었다. □ 도시화, 변화의 바람이 불다 1960년대 근대화·산업화의 물결은 북구에도 거센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사람과 문화가 가장 먼저 교류하던 대구역과 대구역광장은 소통의 중심지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옛 모습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시절 삶의 흔적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 그날의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공장 지대는 학교와 도서관, 관공서로 탈바꿈했고, 너른 들판은 주거단지로 변모했다. □ 행복이 흐르는 금호강 새 시대 꽃 피다 대한민국 광복 80년, 북구 설립 80년. 산업화의 출발점이던 북구는 이제 금호강을 따라 행복이 넘치는 새시대의 꽃으로 거듭나고 있다. 함지산 선사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은 공단의 북구를 거쳐 금호강 팔거천 동화천과 함께 미래를 여는 행복의 북구로 진화하고 있다. 사통팔달 관문 도시이면서 사람, 자연 문화예술 첨단산업이 어우러진 스마트 문화도시, 과거의 흑백사진 속 꿈과 희망이 오늘의 행복으로 피어난 이곳, 대구광역시 북구는 오늘도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유병길 시민기자

2025-08-03

가야산의 동천(洞天)을 찾아서

동천의 근원은 당나라 현종 때 도교의 사마승정(647~735)이 기록한 천지궁부도에 기원하며,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고구려 보장왕(642~668) 때로 산천에서 경치가 매우 빼어난 곳을 이른다. 또한 이중환의 ‘택리지’ 산수편에는 ‘최치원이 남해 금산에 노닐고 바위에 금산동천이라고 암각 해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시문에 나타난 선비들의 이상향은 바로 자연 속에서 일상의 고단함을 벗어던지고 이상적인 세계로 가는 길, 바로 선(仙)을 간절히 동경한 것 같다. 전국에는 약 200여 개 동천이 있는데 경북과 경남에서만 140개 정도 있다고 하니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아름다운 풍경이 많다는 것이 행복하다. 오늘은 그 중 한 곳인 가야산에 숨겨진 동천을 찾아 소개한다. 가야산은 성주군과 고령군, 거창군과 합천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봉은 상왕봉으로 치인리계곡과 백운동계곡 그리고 홍류동계곡이 있다. 여기서 소개하는 숨겨진 동천의 석문은 홍류동계곡 상류 쪽 해인주유소 앞마당 입구에 있다. 계곡으로 이어지는 샛길 아래에 옥류동천(玉流洞天)이라 암각되어 있다. 크기는 대략 가로 1m 세로 70cm이다.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십여 년간 조정에 참여하며 신라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가야산에 들어와 명명한 명소들. 무릉교, 칠성대, 홍류동, 자필암, 음풍뢰, 취적봉, 완재암, 광풍뢰, 제월담, 분옥포, 낙화담, 첩석대, 회선암, 학사대까지 현재 석문은 8개가 발견되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앞 다투어 명소를 찾아 둔세시의 차운시를 남겼으며 이때부터 동천의 문화는 우리 고유의 선비문화로 이어져 ‘구곡’과 ‘팔경’ 문화를 낳았다. 특히 가야산은 고운 선생과의 인연이 특별하다. 신라를 뒤로하고 왕건의 세력에 동조할 수 없었던 그는 말년에 가족 모두를 데리고 산에 안겼다. 그리고 동천에서 만난 나무와 바위, 계곡의 물소리와 바람 소리는 그의 현실 세계의 상처를 씻겨주고 마음을 달래어 평안을 선물하였다. 그 결과 그는 유·불·도에 대한 깊은 조예가로 계곡 바위에 갓과 신발만 남겨둔 채 홀연히 신선이 되었던 것이다. /김성두 시민기자

2025-08-03

대구서 시작한 순 문예지 ‘죽순’ 창립 80년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대구에서는 일본 강점기에 빼앗긴 한글과 우리말을 되찾고자 전국 최초로 시 전문지 ‘죽순(竹筍)’이 발간됐다. 전국 최초의 시 전문지 죽순 발간의 주역이 모인 죽순문학회(회장 문성희)가 올해로서 창립 80주년을 맞는다. 죽순문학회의 80년 자취를 되돌아 보았다. 조국 광복을 맞은 1945년, 석우 이윤수 시인을 중심으로 그해 10월 뜻을 같이하는 문인들이 모여 죽순시인구락부가 창립된다. 이것이 죽순문학회의 출발점이다. 이듬해인 1946년 5월 1일 시 전문 월간지 ‘죽순’(4․6배판 46면)의 창간호가 드디어 발간(1000부)된다. 창간호 때부터 1949년 7월 12집을 발행할 동안 죽순 회원은 모두 23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전국에서 활동하는 시인이 67명 정도였으니 대구를 중심으로 문예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죽순’ 창간호에는 발행인 이윤수를 비롯하여 유치환, 이응창, 오란숙, 박목월, 이호우, 이영도, 김동사 등 17명이 시를 게재했고, 호를 거듭할수록 참여 동인이 늘어나 1949년 12집으로 종간될 때까지 3년 2개월 동안 60여 명의 시인이 235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죽순’은 용지난과 원활치 못한 당시의 전기 사정으로 1949년 제4권 3호(11집)에 임시 증간호를 더하여 열두 권으로 종간을 선언하고 동면에 들어갔다. 1947년 석우 이윤수가 운영하는 명금당에 다시 동인들이 모였 다. 김소운이 죽순시인구락부에서 상화시비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에 회원들이 동의하면서 1948년 3월 8일 대한민국 최초로 달성공원에 상화 시비가 건립된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죽순문학회 회원들은 문학 수도 대구를 중심으로 국군의 활약을 작품화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군인들의 사기 증진을 위해 문인들 중심의 문충구국대도 만들었다. 상고예술학원 설립에도 참여, 전시문단을 형성하여 종군작가단, 전선시첩 등 각자의 영역에서 전쟁을 기록하고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죽순’ 지 종간에도 죽순문학회 동인들은 매년 3월 14일이면 상화시비를 탐방하며, 시비건립 기념행사를 가지면서 재기를 다졌다. 1979년 마침내 복간을 했다. 1986년 서울 죽(竹)식당에서 황금찬, 이석, 이윤수, 장수철, 김요섭, 조병화가 만나 제1회 상화 시인상을 제정했다. 1986년 제1회는 이설주 시인이 수상을 한데 이어 2008년 제23회 수상자 정호승에 이르기까지 죽순문학회가 혼신의 힘으로 시상을 이어갔다. 이후 이상화 기념사업회가 발족함에 따라 죽순문학회는 현창사업을 더욱 빛내기 위하여 이 상을 기념사업회에 이관했다. 그럼에도 ‘상화’와 ‘죽순’, ‘죽순’과 ‘상화’는 이런 인연으로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지속되었다. 이 상의 운영위원으로 하오명 시인과 장호병 시인이 다년간 참여했고 송영목 시인이 심사를 맡기도 했다. 특히 죽순의 긴 역사와 함께 한 상화시인상을 이상화기념사업회에 이관하는 데는 쉽지 않은 결단이 필요했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때 죽순시인구락부 동인들이 의기투합해 달성공원에 상화시비를 세웠고, 상화시인상을 제정했으며 또 상화시 전국백일장도 열었다. 1대부터 7대까지 죽순문학회를 이끌어 온 회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죽순을 창립한 이윤수 회장이 1대를 맡았고 윤장근 소설가는 2대 회장을 맡아 ‘죽순문학상’을 제정했다. 3대 손영목 평론가는 ‘죽순시인상’을, 4대 하오명 수필가는 ‘죽순 카페’를 구축하고 ‘한국의 문학비’를 발간하였다. 5대 장호병 수필가와 6·7대 김창제 시인은 ‘석우 이윤수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죽순 회원 50명은 상화의 나라 사랑과 민족정신 그리고 석우 이윤수 시인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지금도 문학활동에 정진하고 있다. /손수여 시민기자 <자료제공=문성희 죽순문학회 회장>

2025-08-03

가치관이 반듯해야 한다

지난 달 두류공원에서 열린 ‘치맥 축제’ 현장을 찾았다. 많은 인파가 모였다. 볼거리 공연과 먹거리가 넘쳐나는 풍성한 잔치였다. 대구지역 명소 소개와 대구 10미(味)까지 맛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타 시도에서도 지역 홍보에 참여했다. 그런데 광고성 일부 현수막에 “인맥보다 치맥이다”이란 글귀가 보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전 상 ‘인맥(人脈)’이란 “학문, 출신, 경향, 친소 등의 한 관계로 얽힌 인간관계”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말은 사람 중심이란 말이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먼저다. 어떻게 사람이 아닌 ‘개, 소, 말’이 먼저인가? 아무리 ‘황금만능’이라고 하지만 ‘사람’보다 ‘물질’이 먼저인 것은 아니다. ‘치맥’은 무엇인가? 다른 어떤 의미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어 chicken과 ‘맥주’의 앞말을 딴 합성어다. 이런 말을 만들어 ‘인맥’에 대비시킨 것을 대수롭지 않게 ‘언어 유희’라 웃어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자라는 꿈나무들에게나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문화를 이해하려는 많은 외국인에게 이 말은 결코 좋은 구절이 될 수 없다. 요즘에는 지구촌, 세계 곳곳에 한류 타고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 실용성’이 인정받고 ‘한국어’를 제1의 외국어로, 국제공용어로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만약에 우리 국민 모두가 분별력 없이 이런 언어문화에 빠진다면 나라 모양이 어떻게 될까? 자칫 ‘개판인 세상’이 아니 되겠는가?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도 여야 할 것 없이 당대표 경선으로 표심을 다지기 위해 고심하고 입후보자들은 ‘치맥 축제’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가 되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세심하게 바라보는가? 가치관이 반듯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나라가 복지국가, 문화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인맥보다 치맥이다” 이 말의 거부감 때문에 나는 좋아하던 맥주도 치킨도 먹기가 싫어졌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인맥 없는 치맥’은 무엇을 위한 잔치인가, 의구심이 솟구쳤다. 우리는 언제 다시 “치맥을 나눈 탄탄한 인맥”을, “숙성된 맛 치맥, 성숙한 멋 인맥”을 볼 수는 없을까? 졸속한 행정이나 얄팍한 장사꾼으로 얼룩진 무늬 걷어내고 천년 고목의 결 고운 나이테처럼 반듯한 세상, 진정한 기업가 정신이 그리운 세상이다. 사람이 먹는 치킨과 맥주이다. 치맥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인맥을 넓혀주는 ‘치맥축제’가 되어야 한다. 지난해보다 많이 달라진 홍보 현수막 구절에서 희망이 보인다. 그래서 한국문화를 창조하고 선도하는 성숙한 시민의 ‘파워풀 대구’를 보고 싶다. /손수여 시민기자

2025-08-03

대구 서문시장 등 ‘온누리상품권 환급행사’

해양수산부가 전통시장 활성화와 내수 승인을 위해 8월 1일부터 5일까지 전국 전통시장에서 ‘온누리 상품권 환급행사’를 진행한다. 행사에 참여하는 점포에서 ‘국산 수산물’ 구매 시, 참여 합산 금액에 따라 온누리 상품권으로 즉시 환급을 받을 수 있다. 3만4000원 이상 구매 시 1만 원, 6만7000원 이상 구매 시 2만 원의 온누리 상품권이 지급된다. 행사 기간 중 농림축산 식품부는 4일~ 8일까지 축산물도 같은 혜택이 적용된다. 행사 기간 중 한 사람당 수산물, 축산물 자체 최대 2만 원까지 환급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이번 행사는 대구에서 서문시장(2지구 건해산물 상가), 신평리시장, 관문상가시장, 신매시장, 와룡시장에서 진행된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 환급 활동을 통해 이번 여름, 알뜰한 장보기가 가계에도 보탬이 되고 전통시장도 활성화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급 불가 항목 (환급 제외 대상으로 환급 시 부정 환급으로 간주 될 수 있음) △본인 확인 수단 미지참 시, 환급 불가 △제로페이 수산대전 모바일 상품권으로 구매한 품목 △정부 비축 수산물 방출 품목 △일반 음식점에서 구매한 품목 △법인 및 사업자(개인, 기업) 카드로 구매한 품목 △수입산 및 비 수산물 품목 △행사 기간 외 구매 영수증 등이다. (중복 환급 방지를 위해 본인 확인은 필수) △점포에서 손님 대신 대리 수령 불가. △한 분이 여러 장 가져와 가족 이름으로 대리 수령 불가. 환급 불가 항목 (환급 제외 대상으로 환급 시 부정 환급으로 간주 될 수 있음) △본인 확인 수단 미지참 시, 환급 불가 △제로페이 수산대전 모바일 상품권으로 구매한 품목 △정부 비축 수산물 방출 품목, △일반 음식점에서 구매한 품목, 법인 및 사업자(개인, 기업) 카드로 구매한 품목 △수입산 및 비 수산물 품목 △행사 기간 외 구매 영수증. 등이다. 궁금한 사항은 1877-2430으로 문의하면 된다. 김윤숙 시민기자

2025-08-03

고명환 작가 강연회를 다녀오다

지난 26일에는 고명환 작가의 강연회에 다녀왔다. 고명환 작가는 2024년 한강 작가와 함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다. 전직 개그맨이 작가가 되어 이룬 성취에 대해서도 듣고 싶었고 독서에 대한 노하우를 직접 듣고 싶었다. 요즘 독서법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서 설레며 참석했다. 주말 아침 시간인데 참석한 사람들이 많았다. 젊은 층도 보였고 중년여성들도 제법 많았다. 작가는 TV에서 볼 때보다는 조금은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넘쳤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힘찬 외침과 열정적인 강의를 했다. 독서 전도사로 알려진 작가는 책을 읽으면서 달라지는 자신을 관찰해보라고 했다. 두 달 책을 읽고 주변을 관찰하면 매일 보던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그것은 내 안에 담긴 언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언어의 폭을 넓혀야 함을 강조했다. 가장 좋은 방법인 독서는 무조건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틀 집중해서 책을 읽었으면 그 뒤에는 산책을 하라고 했다. 이 부분이 굉장히 신선했다. 그저 파묻혀서 책만 읽는 것이 아닌 자연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하늘, 나무, 바위, 흙 이런 자연을 몸으로 접하면서 생각하면 사유의 폭이 넓어지고 읽은 내용이 몸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다른 여러 유익한 강의 내용이 많았지만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이 자신의 한계를 짓고 그 속에서만 살려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할 때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월급 300만 원이면 그 안에서만 자신을 규정하고 그 테두리를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00만 원 받는 사람으로만 행동하고 더 발전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에 많은 수긍을 했다. 작가는 하류지향적인 삶을 살지 말라고 말했다. 시민기자도 나이 오십이 넘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그런 말이었다. 이 나이에 무얼 하겠나. 이제 누가 써주기나 할까. 이미 사회에서 물러나 더 이상 역할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단정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말 못하게 되는 것을 볼 때이다.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작가는 이런 비유를 들었다. 나이 삼십 넘어서 피겨스케이트를 배워서 열심히 연습하면 김연아 선수처럼 할 수 있느냐 물으면 다들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작가가 된 것은 그것과 같다고 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작가가 된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뜻밖의 일이라 했다. 하지만 자신은 작가가 되었고 여러분들도 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고 도전만 하면 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작가의 ‘녹슬어 사라지지 않고 닳아서 사라지겠다’고 외치는 확신에 찬 목소리에 많은 힘을 받았다. 아침이면 누가 듣든 말든 큰소리로 긍정 확언을 외치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독서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자신도 성장한 작가가 작은 거인처럼 보였다. 무더위로 들끓는 여름이지만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잠시 이 더위를 잊어보는 것은 어떨까.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7-31

우리 곁의 작은 이웃, 길고양이

집에서 나서는 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마다 나는 집 앞 작은 공원에서 고양이를 찾게 된다. 공원 한쪽에는 고양이 사료와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다. 저녁 무렵이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고양이 손님들을 위한 배려다. 매일 이 자리를 지키며 고양이들을 챙기는 이는 일명 ‘캣맘’, 고양이 엄마다. 그녀가 돌보는 고양이는 대여섯 마리쯤 되어 보인다. 고양이들과 가까워지고 싶어 살며시 다가가 보지만, 번번이 도망가기 일쑤다. 편의점에서 고양이 간식을 사서 가져다 줘도 녀석들은 눈치를 살피며 다가오지 않는다. 간식을 바닥에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다가와 먹기 시작한다. 신뢰를 얻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걸 매번 느낀다. 어느 날,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던 캣맘을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고양이들의 이름과 특징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친해지기 어려웠던 고양이, 아픈 고양이, 식욕이 많은 고양이 이야기를 애정있게 전해주었다. 고양이들 대부분은 중성화 수술을 받은 듯, 한쪽 귀 끝이 작게 잘려 있었다. 고양이들과 가까워지고 싶은데 나만 보면 도망간다고 하소연하자, 그녀는 고양이 한 마리를 쓰다듬으며 자신도 신뢰를 얻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밤거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골목 구석구석에 작고 부드러운 생명이 숨 쉬고 있다. 담벼락 위를 조용히 오르내리는 발자국 소리, 쓰레기봉투를 뒤적이다가 깜짝 놀라 튀어나오는 그림자, 해가 지면 아무렇지 않게 배를 드러내며 누워 있는 털복숭이들. 이들은 어느새 도시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눈에 익은 존재이지만, 마음으로 다가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집에서 기르는 반려묘와는 달리, 길고양이는 오롯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과 도시의 소음,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더욱 경계심 많고, 민첩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도망간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고양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길고양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캣맘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먹이를 챙겨주는 것을 넘어서, 고양이들의 터전을 만들어주고 중성화 수술과 치료를 통해 건강한 생존을 돕는다. 과거에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밤새도록 울어대던 고양이 소리가 익숙했지만, 이제는 그 모습이 눈에 띄게 줄었다. 번식력이 강한 고양이의 특성상 개체 수 조절은 필수이며, 중성화는 그 첫걸음이다. 캣맘의 활동은 단순한 ‘고양이 돌봄’을 넘어 지역 생태계의 조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유기 동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에도 일조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생명에 대해 책임감 있는 태도를 기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활동을 반기는 것은 아니다. 고양이들이 한 곳에 몰리며 소란스럽다고 느끼는 주민들도 있다. 사료 그릇 주변이 지저분해진다거나, 배설물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선 배려와 규칙이 필요하다. 캣맘 역시 스스로 지켜야 할 매너가 있다. 정해진 시간에만 먹이를 주고, 먹이가 남지 않도록 치운다. 사료는 깨끗한 그릇에 담아 위생을 지키고, 배설물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모래를 깔아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민들과의 소통이다. 오해를 줄이고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일은 단순한 ‘먹이 주기’가 아니라, 생명과 공존에 대한 실천이다. 이 작은 이웃이 우리 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동네를 더 따뜻하고 건강한 공간으로 만드는 시작일 수 있다. /김소라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7-31

사유의 방과 의궤 앞에서 우리의 아름다움을 다시 마주하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는 지금 두 개의 상설 전시가 많은 이의 발길을 이끈다. 하나는 삼국시대 국보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 두 점이 안치된 ‘사유의 방’, 또 하나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로 반출됐다가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전시다. 두 전시는 MZ세대에게도 인기 있는 핫 플레이스로 조용하고 정적인 박물관 이미지를 탈바꿈시키며 우리 문화유산이 가진 고요한 아름다움으로 시대와 세대를 뛰어 넘어 감동을 주고 있다. ‘사유의 방’ 입구 벽면에 쓰인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글에서 이미 숙연해진 마음으로 고요하고 어두운 통로를 지난다, 그 끝에 은은한 황토 빛 속, 아늑한 곡선의 공간이 숨이 멎을 듯 펼쳐지고, 그 한복판에 반가부좌로 앉아 오른쪽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국보 중의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그 은근한 미소를 마주한 순간, 문득 떠오르는 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다. 진정,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15년 기록에 따르면, 새로 지은 궁궐을 본 온조왕이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평을 남긴다. 이는 조선 건국 초 정도전이 ‘조전경국전’에 인용하면서 통치 철학으로 계승되었고, 현 국립중앙박물관장 유홍준 교수의 저서 ‘나의 문화유적답사기’에서도 소개되며 널리 알려진다. 우리 문화의 품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사유의 방은 절제된 조형미와 사유의 깊이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그 자체로 명상이며 예술이다. 같은 2층 ‘외규장각 의궤’ 공간에는 145년 만에 돌아 온 왕실 기록유산의 정수가 전시 중이다. 의궤란 조선왕실의 중요한 의례, 행사, 건축 등을 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왕조의 기억을 담고 있는 보고(寶庫)다. 이러한 귀중한 책들이 잦은 외침(外侵)으로 소실될 것을 우려한 정조가 안전한 강화도로 옮겨 보관한 곳이 외규장각이다. 하지만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로 상륙한 프랑스 군에 의해 외규장각의 많은 책이 소실(燒失)되고 약탈당한다. 그렇게 그 의궤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힌다. 그러다 고 박병선 박사가 베르사유 별관(폐지창고)에서 297권의 의궤를 발견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진다. 한국의 끈질긴 반환요구 끝에 2011년, ‘5년마다 갱신하는 조건의 영구대여’ 형식으로 돌아온다. 이는 전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이 약탈 문화재를 쉽게 돌려주지 않는다는 불문율 속에서 매우 이례적인 성과다. 하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다. 참고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직지심체요절’은 프랑스에 있다.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중국서적코너’에서 한국의 고서를 발견한다. 한자로 쓰였다는 것이 중국 서적으로 분류된 이유다.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80년 먼저 인쇄되어 우리 활자 인쇄술의 정점이자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지만, 현재 프랑스는 반환이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는 선사시대에서 근세까지의 유물들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전시되어 있고 2, 3층에는 다양한 기증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엇보다 전시된 많은 유물들이 약탈한 것 없이 오롯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느낀다. 우리가 소중히 지켜온 것, 어렵게 되찾은 것, 아직도 찾아야할 것들. 두 상설 전시는 단순한 전시가 아니다. 그 자체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고 주권이며, 미래를 향한 사유의 공간이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7-31

포은중앙도서관에서 느긋한 하루 즐기기

아침부터 훅하고 열기가 밀려든다. 오늘도 휴대폰에선 어김없이 폭염이 지속되니 건강에 유의하라는 안전안내 문자가 도착한다. 더운 공기를 피해 도망치듯 발길이 닿은 곳은 포은중앙도서관이다. 이제는 이른 아침부터 카페가 아니라 도서관을 찾는 일이 일상의 루틴이 되었다. 오전 9시 전이라 늘 붐비던 지하 주차장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고요하다. 빈자리가 많으니 기분 좋게 주차하고 1층으로 올라섰다. 지하 주차장에서 바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1층 로비로 향한다. 도서관의 분위기를 먼저 훑는 느낌이랄까. 로비에선 여러 행사 알림 안내판과 어딘가 집의 거실에 있어야 할 소파에 편히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 요즘 트렌드에 맞춰 사진 촬영 하는 곳과 도서관을 부지런히 오가는 취업 준비생들, 방학을 맞아 부모님과 함께 도서관을 찾는 어린이들을 맞이한다. 로비를 거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민기자가 즐겨 찾는 5층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히 아이에게 부탁받은 반납할 책도 있다. 반납 후, 다시 빌릴 책을 살피지는 않는다. 집에는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남아 있으니 읽지 못할 책을 꼭 빌리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서가의 책 제목을 눈으로 훑는다. 공부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책 사이를 거니는 그 고요한 기분이 괜히 좋다. 사람들이 말을 아끼는 공간이라서인지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책을 펼친다. 책날개를 펼쳐 저자 소개를 읽으며 이 책의 내용도 어렴풋이 짐작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자리를 잡은 창가 책상 앞에 앉았다. 챙겨온 신문과 책으로 무선 노트에 필사할 요량이었다. 마침 챙겨 온 시집은 서효인의 ‘여수’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문장을 따라 쓰다 여수를 떠올렸다. 그러다 새 둥지 모양의 둥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즐기며 양산을 쓰고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준다. 점심시간을 맞아 3층 휴게실로 향했다. 3층의 배움터에선 인문학 강좌를 마치고 수강생들이 막 나오고 있었다. 그 틈에 지난 일 년간 아카데미 수업을 함께 했던 지인을 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휴게실에선 여름의 열기처럼 이미 여러 사람들이 앉았다. 점심 후엔 2층 야외공간으로 향한다. 공원 같은 느낌이 들어서 포은중앙도서관에 오면 종종 들르는 곳이다. 긴 벤치에는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와 아이가 쉬기에도 좋아 보인다. 그 옆을 근처의 직장인이 거닐고 있다. 저녁에는 로비에서 특별한 프로그램이 시민기자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4월에 시작해 두 번째 진행되는 ‘렉처 콘서트, 클래식 비화(秘話)’다. 해설로 진행된 음악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는, 100년 전 음악이지만 좋아서 지금도 연주되는 것이 클래식(고전)’이라 해설자가 정의하며 헨델과 쇼팽 그리고 베르디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강연 사이 사이에는 피아노 연주와 함께 소프라노와 테너의 노래도 감상했다. 도서관의 짧은 공연에서도 성악가들이 이렇게 옷을 잘 갖춰 입고 노래를 하니 더 감동이었다. 도서관은 이렇듯 굳이 목적이 없어도 남녀노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곳이고 예약하지 않아도 발길이 닿는 곳이다. 최근에는 여름 인기 휴가지에 도서관이 포함될 정도다. ‘어딘가에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 같은 곳일 것’이라던 보르헤스의 말을 떠올리며 폭염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도서관에서 느긋한 하루를 즐기는 건 어떨까.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7-29

포항의 여름을 즐기는 방법

배롱나무가 한껏 붉은 빛을 뽐내는 계절이다. 하필 무더운 여름에 피는지, 그래서 더 고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중에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현내리 두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도원정사에 꽃을 구경하러 나섰다. 기계면 소재지로 들어서니 동네 뒤로 내비게이션이 안내한다. 조용한 마당에 차를 대니 솟을대문이 맞이한다. 문이 잠겼나 싶어 가까이 가 손으로 미니 끼익 소리를 내며 밀렸다. 문을 열자마자 연못이 우릴 반긴다. 연잎이 가득해 물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조선 3대 정원인 영양의 서석지도 마당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연꽃을 가득 담은 연못이 있어 건물보다 못이 주인공 같았는데 도원정사가 딱 그렇다. 대문에서 건너편 건물까지 못 중앙에 나무다리가 놓였다. 대문 옆에 배롱나무가 섰고, 건너편 다리 끝에 한 그루가 붉게 웃으며 연못에 제모습을 드리운다. 다리와 계단에 꽃잎을 떨구어 지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곳에 잘 오셨노라고. 정사(精舍)란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 수양을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도원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말동의 호로 그를 기리기 위해 창건하였다 한다. 1480(성종 1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이 즉위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며 많은 시문('도원문집')을 남겼다. 댓돌에 올라 솟을대문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늘따라 하늘의 구름이 장관이다. 대청에 앉아 학문을 논하던 선비들이 저절로 시를 읊게 만들었을 풍경이다. 한참 꽃놀이를 즐기고 나니 배가 고팠다. 기계 들이 보이는 곳에 중국집이 있어 들어갔다. 조용한 동네라 손님이 없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만석이었다. 짜장면을 비비며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주방에 어르신이 부모님이고 50년이나 짜장면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멀리서도 옛날 짜장맛이 그리워 찾아온다고 했다. 달콤한 짜장면으로 추억까지 맛보았다. 면 소재지에서 서숲을 지나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니, 소나무 숲이 또 나타났다. 지가1리 마을숲이라는 이름표를 보고 우리 조상님들이 곳곳에 마을숲을 만들었구나 감탄하며 지나는 순간, 가로수가 요즘 보기 드문 미루나무였다. 잠시 차를 세우고 찰칵, 이제 기북으로 향했다. 덕동숲을 걷기엔 더운 날씨라 멀리서 보고 다시 경북수목원으로 차를 몰았다. 덕동마을에서 수목원까지 구불구불 산을 오르고 내렸다 다시 올라야 했다.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아서인지 칡과 아카시가 스물스물 길 안으로 넘어왔다. 경북수목원에 도착하니 기온이 시내보다 4도 정도 내려갔다. 차에서 내려면 숨이 턱 막히는 아랫동네와 달리 시원한 바람과 새소리가 우릴 맞았다. 나무 그늘이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가니 곳곳에 돗자리를 깔고 눕거나 앉아 여름을 즐기는 어르신들로 숲이 꽉 찼다. 늦은 점심을 싸 와서 먹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우리처럼 산책하며 숲에서 더위를 식혔다. 수목원의 계절은 조금 늦어 수국이 이제 피기 시작했다. 무궁화 동산에 색색의 꽃이 폈고, 연못 중앙 독도 주변에 분수가 물줄기를 뿜었다. 한참 물멍을 때리며 가져간 냉커피를 나눠 마셨다. 노랑어리연 사이로 잉어와 붕어가 오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키 큰 메타세쿼이아 사이로 맨발 걷기를 하고 수돗가에 발을 씻으니, 온도가 1도 더 내려간 듯하다. 수목원에서 내려가는 길, 멀리 영일만이 눈에 들어왔다. 산을 다 내려오니 아직 뜨거운데도 길가에 노지 수박을 팔고 있었다. 빨갛게 복숭아가 익어가고 있었다. 여름이 뜨겁게 애쓰는 이유였다. 포항을 크게 한 바퀴 돌아 집으로 향하니 눈도 마음도 온통 푸르렀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7-29

100년 전 안동 모습이 궁금하세요?

역사는 기록한 자에 의해 진일보해 왔다. 모든 기록은 역사와 현재에 대한 증명이자 증거이다. 그중 사진은 그 어떤 기록보다 더 직관적이고 강렬한 파급력을 지녔다. 사진 한 장으로 울고 웃는 사람들은 사진 속 풍경 하나에, 건물 하나에 그리고 당시의 추억까지 더해 그 서사를 완성 시킨다. 그렇기에 지난 7월 19~28일 안동시립박물관 별관전시실에서 열린 ‘안동 근대역사 사진전’은 그 의미를 더한다. 재단법인 경안노회유지재단이 주최하고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후원한 이번 사진전은 1900년 미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사로 파송돼 이후 신설된 안동 선교부에 부임한 한국명 오월번(Arthur Garner Welbon) 선교사와 1924년 안동 선교부에 배속받은 안변암(Benjamin N. Adams) 선교사가 보관하고 있던 사진을 모아 공개한 것이다. 오월번 선교사는 경북북부지역 초기 선교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1909년 설립된 안동교회가 지역의 중심교회로 역할을 하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그러다 1928년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후에 손녀인 프리실라 여사가 조부의 선교 편지와 자료, 사진 등을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하였다고 한다. 전시된 사진에는 낙동강변에서 빨래를 하거나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길어 나르는 여인부터 연자방아를 돌리고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고 다듬이질을 하고 솜을 틀어 옷을 만들고 삼베를 짜는 여인까지, 190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안동사람들의 일상과 삶이 흑백사진 속에 기록되어 있다. 짚으로 엮은 달걀 줄을 들고 있거나 땔깜이 가득한 지게를 지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짠한 마음이 들었다가 1910년대 법룡사와 영호루, 봉정사, 제비원석불 모습에는 감탄이 나온다. 특히 천막교회로 시작해 16칸 ㄱ예배당, 목조 예배당을 거쳐 지금의 석조예배당까지 안동교회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가 있다. 또, 3.1운동으로 복역한 안동교회 장로 김병우 김익현의 수감기록 카드 등 안동 근현대사의 역사적 발자취를 직조한 기록물을 선보였다. 오월번 선교사는 안동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달력을 제작해 미국의 후원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1911년 당시의 임청각과 서악사, 법흥사지 칠층전탑 등 안동 시내 전경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지난 28일 1차 전시를 끝내고, 9월 17~28일 안동교회 100주년기념관 역사전시실 및 로비에서 2차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백소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7-29

대구 수성못 법이산 봉수대를 아세요

대구 수성못 남쪽에 있는 법이산에는 조선시대 사용했던 봉수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수성못 남쪽에서 20분 정도 올라가면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나 평소 많은 사람이 찾지는 않는다. 봉수대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을 이용해 적들의 동향을 파악해 상부에 알렸던 군사 목적의 통신수단이다. 조선시대 봉수대는 왜구의 주요 침탈지인 동래현에서 시작하여 한양까지 연결하는 주요 봉수인 ‘직봉’ 5개소가 있었고, 그 아래 직봉마다 하위 봉수인 ‘간봉’을 두어 운영했다. 법이산 봉수는 제2거 직봉의 하위 8간봉 중 하나다. 부산 천성보 봉수에서부터 이어져 당시 성주의 각산봉수, 대구의 성산 성황당에서 신호를 받아 경산의 시산 봉수로 전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이산 봉수대와 관련된 기록은 경상도지리지(1425년), 해동지도(1705년,) 대동여지도(1861년) 등의 고지도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신동국여지승람(1530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법이산 봉수 유적지에는 기우단(가물 때 비오기를 제사 지내는 단)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봉수대는 비가 오면 오히려 불편했을텐데 봉수대 인근에 기우단이 만들어진 것은 매우 특이한 점이다. 2019년 가온문화재연구원에서 이곳을 발굴 조사한 적이 있다. 발굴 조사에 의하면 봉수대 방호벽 둘레가 106.5m에 달했고, 배 모양의 봉수로, 남북에 인접하여 동서로 길게 만들어진 돌무지 시설, 계단형과 개방형의 출입 시설 2곳이 확인되었다. 또 유적지 내에서 백자류와 옹기 파편, 기와류 등도 출토됐다. 배 모양의 방호벽은 외적이나 산짐승으로부터 봉수군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봉수대에서 출토된 적이 없는 백자류 파편이 출토된 것은 기우단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법이산 봉수대는 대구지역 첫 봉수 문화재로 대구시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수성구청은 봉수대를 포함한 일대의 종합 정비 계획을 수립 중이다. 또 앞으로 법이산 봉수대의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위해 추가적인 준비도 하고 있다고 한다. /안영선 시민기자

2025-07-27

소가야, 바다에서 피어난 가야왕국

남해안과 낙동강 유역 일대는 예로부터 사람과 물산이 오가는 교통과 교역의 요충지다. 이 지역에 자리 잡은 소가야는 가락국 수로왕의 동생 말로왕이 세운 나라다. 오늘날 경상남도 고성 지역을 중심으로 진주와 산청까지 세력을 넓혔다. 소가야는 중국과 백제, 왜를 잇는 해상 교역의 중개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사력이나 정치면에서는 아라가야나 가락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소했지만, 바다를 품은 지리적 이점 덕분에 활발한 외교와 문화 교류를 펼칠 수 있었다. 209년, 소가야는 포상 8국의 연합군에 속해 가락국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말았다. 같은 뿌리를 지닌 나라들끼리 피를 흘려야 했던 이 사건은 소가야의 독자적 자립 의지와 복잡한 정치적 현실을 보여준다. 이후 광개토태왕의 남정으로 가야 전체가 크게 위축되자, 소가야는 아라가야와 함께 재기를 모색했으나 6세기 중반, 끝내 신라에 항복하고 역사 속으로 퇴장하게 된다. 소가야의 흔적은 오늘날 경남 고성군 일대의 고분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회화면 봉동리에는 소가야 왕실의 마지막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고분군이 있다. 시조 말로왕에서부터 9대 이형왕에 이르는 아홉 무덤이 줄지어 있다. 고성김씨 종친회에 따르면, 이 고분군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일 향사를 올린다고 한다. 인근 과수원 주민이 이곳에서 토기 조각과 철기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음을 전했다. 그러나 왕릉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들은 일제강점기 도굴과 훼손으로 인해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다. 고성읍 송학리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 사이에 조성된 무덤들로, 사적 제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가야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은 고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둥근 토기 형태로 설계되어 소가야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1층에는 전통 놀이 체험 공간과 북카페가 있고, 2층 전시실에는 송학동 고분군과 내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만나는 기마무사 모형이 인상 깊다. 투구와 갑옷을 갖춘 무사가 무장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에서 위풍당당한 기상이 전해진다. 실제로 발굴된 투구에서는 금동 장식이 확인되어 소가야의 정교한 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손잡이 달린 잔, 구멍 난 단지, ‘고(古)’자가 새겨진 굽다리 접시 등은 당시의 미감과 생활상을 생생히 전해준다. 박물관을 나서며 남쪽 바닷가의 남포항을 찾았다. 2008년 국가 어항으로 지정된 이곳은 조용한 어촌이지만, 오래전 바다를 통해 소가야가 외부 세계와 활발히 교류했을 것을 떠올리면 감회가 남다르다. 비록 지금은 역사서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지만, 바다의 힘을 품고 문화를 꽃피운 소가야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김성문 시민기자

2025-07-27

풍류

풍류란 뭘까? 산 좋고 물 좋은 데서 바람 맞으며 “캬~” 한숨 내쉬는 것, 그것만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저 풍경 구경하며 감탄사 날린다고 풍류객 대접받을 수는 없는 거다. 풍류에는 뭐가 있어야 하느냐, ‘격’이 있어야 한다. 자연과 어우러질 줄 아는 멋, 품격, 거기다 약간의 삐딱함과 짬에서 나오는 자유로움까지 곁들여야 제맛이다. 풍류 좀 안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옷을 곱게 입는 걸로는 어림도 없다. 조선시대 진짜 풍류객들은요, 살짝 삐딱했지만 품위는 있었고, 거리낌은 없었지만 궤도는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인물 중에 김삿갓 김병연이 있다면, 그에 못지않게 정신 줄 놓은 풍류객이 있었으니, 바로 백호 임제 선생이시다. 이 양반, 풍류를 즐겼는지라 서른 나이에 겨우 급제했다. 벼슬길에 올랐지만, 글보다 술, 공맹보다 낭자에게 더 끌렸던 분이다. 그가 평안도 부사로 제수 받고 도임하러 가는 길에 개성에 들렀는데, 그곳엔 전설의 기생 황진이가 살고 있었다. 막 도착했는데 들리는 소식이, “어이구, 황진이 그 분, 석 달 전에 돌아가셨슈~ ”날벼락 맞은 임제, 고기 한 근에 술 한 병 싸들고 황진이 묘소에 곡차 올리고 시를 읊는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었는가/홍안은 어디 가고, 백골만 남았는가/잔 들고 권할 이 없으니, 그대를 슬퍼하노라.” 절절하다 못해 촉촉한 시 한 수.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뭐야, 사대부가 기생 무덤에 제를 지내고, 거기서 시를 읊었다고?” 유교 경전 끼고 다니며 트집 잡던 양반들이 이걸 빌미로 고변했고, 결국 임제는 파직 당했다. 하지만 임제, 이런 걸로 꺾일 인물 아니다. 벼슬길에서 쫓겨나면 또 어떠랴, 세상이라는 무대를 다시 유람 삼아 떠나면 그만. 관복 벗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풍류의 길로 다시 나선다. 수원 어느 주막에 들른 임제, 술도 좋고 안주도 좋은데 주모 얼굴이 아주 절세미인이다. 아니나 다를까, 술 몇 잔 돌자 주모 마음도 돌고, 시 한 수 던지자 눈빛이 반짝인다. 결국 그날 밤, 주막 방 안은 달빛보다 더 아련했으리라. 그런데 다음 날 문제가 생긴다. 한양 가서 장사 나갔던 주모 남편이 무슨 초고속으로 돌아왔다. 닷새는 걸릴 길을 하루 만에 온 걸 보니, 오다가 감이 떨어졌든지 찜찜한 예감이 들었든지. 어쨌든 그 사내, 백호가 주모와 운우지정을 밝히고 있을 때 문 열고 들이닥치며 도끼부터 번쩍 들었다. 임제는 놀라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좋소, 내가 죄인입니다. 다만 죽기 전에 시 한 수만 읊게 해주시오.” 죽는 원은 들어주는 게 상례라, 남편이 지필묵을 내주었다. 그러자 임제는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시를 썼다. “어젯밤 장안에서 술 취해 왔더니/복사꽃 한 가지가 농염하게 피었더라/그대는 어찌 이 꽃을 번화한 땅에 심었는가/심은 이가 그른가, 꺾은 이가 그른가” 이걸 보고 남편은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럴 만했구먼’ 싶었던 거다. 꽃이 예쁘면 벌 나비 오는 건 자연의 이치 아니던가. 주모의 미모를 그런 주막에 내놓은 자신도 잘못이 있다며, 오히려 술상 내어 대접했다 하니, 이쯤 되면 시가 목숨도 구하는 법이다. 임제는 절세 미남이자 시인이었다. 세상의 틀을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살았던 진짜 풍류객이었다. 그의 삶은 도포자락처럼 너울거렸고, 그의 시는 술잔처럼 가볍되, 울림은 깊었다. 풍류란, 틀에 갇히지 않고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삶의 기술이다. 백호 임제가 그랬듯, 오늘 하루쯤은 바람 부는 대로, 마음 흐르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방종현 시민기자

2025-07-27

한국족보,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추진

17세기 이전 간행된 20여 한국 족보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회의실에서는 한국 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상임대표 이주영·이하 추진위) 출범식이 열렸다. 이날 20여 문중의 한국 족보를 소개하는 실물 전시회도 함께 개최됐다. 이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한국 족보는 우리나라 최초 족보 ‘안동권씨 족보 성화보(成化譜)’를 비롯해 17세기 이전에 간행된 ‘청송심씨 족보-을사보’, ‘대종보-영일정씨 감무공파 족보’, ‘고령신씨 세보’, ‘함양박씨 족보’, ‘진양하씨 세보’, ‘신편광주이씨 동성지보’, ‘파평윤씨 성보’, ‘천안전씨 세보’, ‘창녕성씨 족보’, ‘청주한씨 세보’, ‘야로송씨 족보’, ‘동래정씨 족보’, ‘순흥안씨 족보’ ‘청주이씨 족보’, 전주이씨의 ‘장의공자손보’, ‘청밀양박씨 ’, ‘신창맹씨 족보’, ‘평양박씨족보’, ‘계림김씨세보’ 등 20여 성씨 족보다. 우리나라 최초 안동권씨 족보인 성화보는 경북 안동시 도촌리에 있는 도계서원 만대헌(晩對軒)에 소장돼 있었던 조선 성종 7년(1476)판 초간본으로 1980년경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성화보(成化譜)’는 서거정이 쓴 서문에 ‘족보의 초안은 권제(권근의 장남)가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약 30년 동안 권근의 아들, 손자, 외손자 등 외손이 증보한 뒤 관찰사가 간행한 것이다. 시조 권행부터 8세 권리흥까지는 단선으로, 이후는 외손 포함하여 총 9000명 가까운 방대한 인물을 수록한 만성보(萬姓譜) 형식이다. 권근은 공민왕 1년(1352)에 안동부에서 태어나 18세 때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다. 추진위는 성화보 등 20여 종의 한국 족보는 수백년이 넘는 진본으로 조선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산이며 인류유산 보존에 손실이 없도록 유네스코 세계기유산에에 등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이주영 추진위 상임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족보’의 역사적 가치는 일개 중흥을 넘어, 더 나아가 한민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인류 모두의 자산이므로 적절히 보호되고 보존되어 미래세대에 전수되어야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권영시 시민기자

2025-07-27

대구 봉산문화회관, ‘세계 현대미술의 오늘’해외작가 초대전 개최

대구시 중구에 위치한 봉산문화회관(관장 노태철)은 오는 7월24일부터 8월31일까지 41일간, 해외작가 초대전–‘세계 현대미술의 오늘’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독일·러시아·미국·멕시코·오스트리아·파라과이·스페인·한국 등 8개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 57명이 참여해 1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국제 교류 전시는 예술감독으로서 오랜 경험을 가진 노태철 관장이 기획한 것으로 ‘세계 현대미술의 오늘’이라는 주제를 통해 세계 각국의 현대미술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특히 2025년은 한국인의 파라과이 이주 6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해 파라과이를 대표하는 작가 3명이 특별 초청되었다. 전시회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예술과 스페인 문화가 융합된 남미 미술, 게르만 문화 전통을 계승한 독일·오스트리아 미술, 다양한 이민 감성이 담긴 미국 현대미술, 130여 개 민족이 어우러진 러시아 미술 등 각국의 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이 반영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노 관장은 인사말을 통해 “세계는 문화로 연결되어 있으며 예술은 그 문화를 가장 생생하게 증명하는 언어”라며 “이번 전시를 통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예술이 어떻게 공감하고 소통하는지를 경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대구 도심 한복판에서 세계 각국의 현대미술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로 예술과 문화, 세계와의 소통을 경험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뜻깊은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전시 하루 전인 23일에는 봉산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작가와의 만남 및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포럼 김인호 회장을 비롯한 관계자 50여 명이 참석했다. 전시 개막식은 24일 류규화 중구청장, 윤찬식 전 파라과이 주재 한국대사, 티므르 골라프 러시아 총영사, 이창환 대구예총 회장 등이 참석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