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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니체의 사상을 가장 직관적으로 담은 詩선집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서양 문명사상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시선집 ‘네 가슴속의 양을 찢어라’(민음사)가 출간됐다.니체는 열 살 남짓한 어린 시절부터 시를 썼고, 글을 쓸 수 있던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시인이었다. 니체에게 시 쓰기는 사유하기와 같은 의미였고, 철학적 사유 자체가 하나의 시적 성찰이었다. 그는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가장 직관적이고 명료한 형태, 즉 시로 풀어냈다. 이번 시선집은 10대 소년 시절의 ‘청춘 시절의 시’부터 정신적 암흑기에 들어섰던 1889년 직전의 ‘디오니소스 송가’까지, 대표시를 선별해 총 5부로 구성했다.“그대 시인의 동경은독수리 같고, 표범 같고,그대의 동경은 수천의 탈을 쓰고 있다,그대 바보여! 그대 시인이여!……그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양 같은 신을 바라다본다 - ,사람들 가슴속의 신을,사람들 가슴속의 양을 찢는다,찢으며 웃는다 -그것, 그것이 그대의 기쁨이다,표범의 기쁨이요 독수리의 기쁨이다,시인과 바보의 기쁨이다!”―‘바보여! 시인이여!’에서니체는 “자신이 창조가가 되지 않는 한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는 기존의 도덕과 관념,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이미 정해져 있는 선과 악이라는 기준을 넘어, 오직 스스로 진실을 추구하고자 한다. 니체의 시는 자주 독수리, 표범, 사자와 같은 강한 자연의 짐승의 모습을 빌려, 양으로 대변되는, 세속적 규범에 순종하는 “미덕”을 찢어발긴다.“모든 미덕 앞에서 나는죄를 저지르고 싶다,아주 큰 죄를 짓고 싶다!모든 명성의 나팔들 앞에서나의 공명심은 구더기가 되고,그런 나팔들 아래에서 나는가장 낮은 자가 되겠다….”―‘명성과 영원’에서복종을 거부하기에 그는 위험에 스스로 처하고, 성장하기 위해 안락함과 행복을 뿌리치고 고난과 불행을 택한다. 모든 인간적인 가치, 선과 악, 연민과 자기 경멸까지도 넘어서야만 진정 자유로운 ‘초인’이 될 수 있다. 니체는 이 모든 것을 시로써 노래하고 선포한다.“더 이상 길도 없다! 주위엔 심연과 죽음 같은 정적뿐!”너는 그걸 원했다! 너의 의지는 길에서 벗어났다!자, 방랑자여, 잘했다! 이제 차갑고 맑게 바라보라!너는 길을 잃었으니 네가 의지할 것은 위험뿐이다.―‘방랑자’에서“바람과 함께 춤추지 못하는 자,끈으로 묶여 마땅한 자,묶인 자, 불구의 노인,위선에 찬 멍청이들, 명예만 중시하는바보들, 덕을 칭송하는 등신들,우리의 낙원에서 모두 꺼져라!거리의 먼지를 소용돌이치게 하여모든 병자들의 콧구멍에 집어넣어병자들 패거리를 몽땅 몰아내자!”―‘미스트랄에게’에서니체는 가만히 앉아 읊조리지 않는다. “그대는 벌써 얼마나 오래도록 / 그대의 불행 위에 앉아 있었나?” 그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나 걷고 뛰고 끝내 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준다. 평생 지독한 근시였으며, 끔찍한 편두통과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렸던 니체는 이러한 육체의 고통에 대비되는 명랑한 정신으로 진정한 자유를 탐구하였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경쾌하고 활달하게 춤추는 듯한 시의 문체와 표현은 니체의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내는 그릇이 됐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28

우리시대 최고 작가들의 숨김없는 내면 고백과 소소한 일상

한국문학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상문학상은 해마다 신년 벽두에 수상작을 발표한다. 그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작가는 ‘수상 소감’과 함께 ‘문학적 자서전’을 발표하는데, 이 ‘문학적 자서전’은 작가들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독자들에게 여과 없이 말해주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작가들이 감정의 심연까지 드러내는 이 특이한 글쓰기가 유별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라도 말해주고 싶은 작가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은 글이다.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숨김없는 내면의 고백을 읽고 있으면,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어떻게 소설가로 출발하게 됐을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어떤 책을 읽었을까?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을까? 등등 작가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었던 호기심이 절로 풀린다.또한 아하, 이분은 이렇게 글 솜씨를 갈고 닦았구나. 아하, 또 이분은 이런 삶의 고통을 글로 승화시켰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감동하게 된다. 작가들이 살아온 저마다의 이력을 보며 감동하는 이유는 이처럼 한 사람의 작가에 대해 알아보려고 기대했던 것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아무 일 없다는 듯 툭툭 바지를 터는 것 같은 소박함에서부터 한 자리에서 봄과 겨울을 동시에 겪으며 살아가는 일상의 희망과 아픔까지, 한 사람의 작가가 아닌 일상의 소소한 삶을 사는 한 사람의 인간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이상문학상 대상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문학사상사)는 이렇게 우리 시대 최고 작가들의 이야기가 다정하고 소담하게 담겨 있다.가나다순으로 수록한 작가들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제각각의 세계관과 함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때로는 살며시 미소 짓게 하는 사연부터 울컥 치미는 슬픔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까지, 상처와 아픔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따스하고 잔잔한 시선으로 전한다. 그립고도 소중한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이상문학상은 그 전통과 권위로 보았을 때 한국 문단에서는 하나의 역사에 해당한다.신년 벽두에 출간되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출간을 기다리는 독자도 수만 명에 이른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제1회부터 꼬박꼬박 구입해 소장하고 있는 독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상문학상 수상은 작가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영광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작 자체가 우리 문학사에 불멸의 작품으로 자리 잡는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이 책은 역대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 작가들이 대상 수상 그해 집필한 ‘문학적 자서전’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집필하고 수정하고 보완하고 편집해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문학적 자서전’ 코너가 신설된 것은 1993년 제17회 이상문학상 때부터다. 이 책에서는 1993년 제17회 대상 수상 작가 최수철부터 2019년 제43회 대상 수상 작가 윤이형까지, 연락이 닿지 않거나 개인 사정으로 싣지 못한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 총 스물두 명의 대상 수상 작가들의 글을 실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28

행복보다 더 큰 가치를 가르치다 ‘아미시 육아법’

“부모가 눈앞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이는 슬프고 외롭다고 느낍니다”‘육아는 방법이 아니라 삶의 방식입니다’(판미동)는 보수적 기독교파를 이르는 아미시 교인들의 육아 지혜를 모은 책이다.아미시(Amish)는 사랑과 용서, 비폭력을 신념으로 삼으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실천하는 미국의 개신교 공동체다.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의 종교 선택의 자유를 주장해 기성 종교들로부터 박해를 받아 18세기에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재세례파가 그 기원이다. 현재까지도 그들은 18세기식 복장을 유지하고, 전기, 자동차, 휴대폰 등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며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낯설고 유별나다고도 볼 수 있는 삶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등 31개 주에서 33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가족당 평균 7명의 자녀를 두는 대가족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저자 세레나 밀러는 오랜 기간 아미시 문화를 연구하면서, 침착하고 공손한 아미시 아이들과 쉽고 편안하게 육아를 하는 듯 보이는 아미시 부모들에 매력을 느꼈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아미시 부모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현대 사회의 육아와의 중대한 차이점을 발견했다. 자신의 아이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일반적인 부모들과는 달리, 아미시 부모들은 행복을 주요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성실하고 공감할 줄 아는 사람, 일하고 베풀 줄 아는 사람, 즉 가치 있는 사람으로 아이들이 자라기를 바랐다. 행복이란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생기는 ‘부산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식이나 외모, 소유물을 뽐내는 ‘호흐무트(Hochmu·교만)’를 피하고, ‘우프게바(Uffgevva·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다.)와 ‘겔라센하이트(gelassenheit·내려놓음)’의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 아미시 육아의 핵심이다. 거기엔 순간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달래는 방식으로 키워진 아이들, 물건을 너무 많이 소유하고 뚜렷한 가치와 규칙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결국 불행해지곤 한다는 역설이 깔려 있다.아미시가 스마트폰, 인터넷, TV 등 모든 현대 문명을 멀리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려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는 게 좋을지 먼저 신중하게 고민할 뿐이다. 모든 일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마다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가족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다. 만약 새로운 기술들이 가족의 공존과 소통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면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다.스마트폰, 인터넷, TV 등은 아이들을 선정적이고 무분별한 정보와 광고에 노출시킨다. 부모가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들고, 가족 간의 소통을 단절시켜 아이들에게 정서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4세와 18세 사이 1천명의 아이들에게 부모가 모바일 기기를 사용할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묻는 조사에서 아이들은 “슬프고, 화나고, 짜증 나고, 외롭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저자는 아미시 아이들이 안정되고 자기 삶에 만족하는 듯 보이는 이유에 대해 “이미 필요한 관심을 다 받고 있기 때문에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징징대거나 못되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아미시 육아의 오랜 지혜는 효율적인 육아 방법을 찾는 데 몰두하는 우리 육아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돼 줄 것이다. /윤희정기자

2019-03-21

‘서정적 전위’ 위선환 여섯번째 시집 출간

“(….)골격은/사,람,과,죽,음,과,주,검,이,일,체,로,서,일,치,한,주,체,의,형,식,인,것.”― 위선환 시 ‘죽은 뼈와 인류와 그해 겨울을 의제한 서설’ 부분서정시의 대가 위선환(78)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시작하는 빛’(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는 총 5부로 나뉘어 69편의 시가 실렸다. 이 시집에서 위선환 시인은 탁월한 시적 감각과 깊은 사유로 확보된 ‘서정적 전위성’을 다시 한번 유감없이 보여준다.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혁웅은 “위선환 시인이 다시 시를 쓰기까지 30년이 걸렸던 것은 어쩌면 시적 허용―정확히는 시적 자유―을 한국어에서 보편문법의 일부로 재도입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설파한다. 1960년대 위선환의 시는 당대의 어떤 시적 경향에도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당시 그가 보여준 시적 행보는 30년이 흘러 2000년대 시인들에게서 고스란히 되풀이됐다. “처음 시를 쓸 때부터 보편문법 너머에서 생성되는 어떤 것을, 이를테면 명사(주어)의 존재론이 아니라 형용사(술어)의 존재론을 겨냥하고 있었”던 그의 이런 “시도는 당시에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해설에서 밝히고 있거니와, 그럼에도 한국 시는 그가 걸었던 그 길로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긴 시간을 보낸 후 시인이 새로 쓴 시들을 갖고 나타났을 때, 이 시들은 우리 언어의 보편적 가정을 전복하는 특별한 언술을 내장하고 있었다”고 권혁웅은 덧붙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21

언어의 붓으로 그려낸 ‘옛날’에 대한 스케치

공쿠르상을 받은 프랑스 문학사의 거목 파스칼 키냐르(71)의 소설 ‘눈물들(Les Larmes)’(문학과지성사)이 번역 출간됐다. 신화나 역사에서 과소평가됐거나 망각된 인물을 끌어내 조명해온 키냐르는 이번에도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 니타르와 사료에 단 한 줄로 남은 그의 형제(아르트니)를 소환해 소재로 삼았다.키냐르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옛날’로 수렴되는 ‘옛날’에 대한 담론이다. 빅뱅 이론을 신봉하는 키냐르의 ‘옛날’은 우주의 시초인 빅뱅, 즉 원초적 분출로, 우리가 부재했던, 사람으로 치면 수태 이전의 세계다. 그렇기에 우리가 볼 수 없었으며 앞으로도 볼 수 없는, 우리 자신이 결여된 이 세계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키냐르는 작품 속에서 독서, 글쓰기, 음악, 회화, 춤, 자연의 관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옛날에 접속하고자 했다.역사상 첫 프랑스어 문서인 스트라스부르 조약을 기록한 니타르와 그의 쌍둥이 형 아르트니, 그리고 그들의 주변인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소설 ‘눈물들’은 언어(프랑스어)를 사람처럼 하나의 주인공으로 삼아 키냐르가 평생 천착했던 주제인 옛날을 묘사한다. 하나의 언어가 탄생하는 빅뱅의 순간으로부터 키냐르의 ‘옛날’을 엿볼 수 있게 한다.이 소설은 여느 키냐르의 작품과 같이 문장과 문장, 지식과 상상력 사이의 여백에서 독자의 숨겨진 감성과 상상력을 이끌어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21

왜 우리는 술을 마시고 알코올에 탐닉하는가?

로버트 더들리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교수가 쓴 ‘술 취한 원숭이’(궁리 펴냄)는 왜 우리가 알코올을 좋아하고 마시는지 과학적으로 탐구한다.저자는 지난 2000년 영장류가 과일을 먹는 행위와 알코올 섭취의 진화학적 기원을 다룬 ‘술 취한 원숭이 가설’(drunken monkey hypothesis)을 학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그런 그가 연구실과 열대 우림 지대를 오가며 알코올 소비와 중독의 진화학적 기원을 탐구한 결과를 담았다. 왜 술을 마시고 언제부터 알코올에 끌렸는지, 왜 음식을 먹을 때 술을 찾는지, 유전적으로 술을 더 좋아하고 알코올에 강한 사람이 정말 있는지 등에 대한 물음에 답한다.책에 따르면 초기 인류가 당과 소량의 알코올이 함유된 잘 익은 과일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면, 이 발효의 과학을 잘 이해하고 있는 지금의 인류는 맥주, 포도주, 증류주 등의 술을 다양하게 때로는 과하게 즐기고 있다. 알코올을 과도하게 소비하는 양식이 광범위하게 확대된 것이다. 과일에 포함된 소량의 알코올은 정글에서는 안전하게 작동되었지만 슈퍼마켓에서 맥주, 포도주 혹은 증류주를 마구 구입할 수 있게 되면서 이제 알코올은 위험한 것으로 변했다. 반면 자연 환경에서는 동물들이 과도한 양의 알코올에 노출되는 일은 결코 없다. 원숭이가 술에 취해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은 자연계에서 관찰하기란 힘들다.저자는 독성학 분야의 중요한 개념인 호르메시스 이론을 비중 있게 설명한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질을 소량씩 투여하면 건강에 이롭다는 얘기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알코올에 전혀 노출되지 않아도, 과도하게 노출돼도 문제다. 적은 양의 술이 인간과 동물에게 이로운 효과를 준다는 데이터는 많다. 알코올이 심장 질환을 유도할 수 있는 동맥경화반 형성을 줄이며, 항균 작용이 있는 알코올 덕분에 감염성 세균을 제어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알코올은 긍정적 효과와 부정적 효과를 모두 가지고 있다. 물론 성별, 지역, 개인에 따라 알코올 반응은 제각각이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 사람들 중에는 적은 양의 술을 마셔도 얼굴이 금세 붉게 변하는 이들이 많다. 알코올대사에 관여하는 효소는 그 종류도 다양하고 변종이 많은데, 동아시아인은 대체로 알코올 대사 중간 산물인 독성물질, 아세트알데히드를 천천히 분해한다. 반면 서유럽 사람들은 아세트알데히드 분해효소가 빠르게 대사된다.알코올 중독의 기원과 관련해 재미있는 단서는 알코올 섭취와 단맛 선호도가 서로 관련될 수 있다는 가설이다. 알코올과 당은 과육에 들어 있는 성분이며, 자연계의 동물에게 알코올은 당과 함께 노출되는 물질이다.한편, 인간이 술을 마시면서 당(와인, 맥주, 혼합주는 상당한 양의 탄수화물을 포함하고 있다)을 함께 섭취하면 간 대사 효소 활성이 증가해 알코올 대사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고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14

“다원화 시대, 무엇이 더 나쁜지도 모르겠지만…”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마크롱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프랑스, ‘브렉시트’로 혼선을 빚고 있는 영국에서 오늘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진정한’ 정치의 실현을 위해서 ‘새로운’ 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시도가 도처에서 이뤄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해 준엄히 경고하는 자유주의 정치사상가들, ‘지성’의 반대편에 ‘반지성’을 설정하는 정치평론가들부터 ‘좌파 포퓰리즘’(샹탈 무페)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좌파까지.그 모든 분석에서 공통적인 지적은 정치가 예전같이 작동하지 않으며, 대중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지구적 세계화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귀환이라는 도식 속에서 ‘포퓰리즘’은 비이성과 연결되고, ‘난민 혐오’는 극복해야 할 부정적 감정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도식은 결국 계몽이나 각성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남긴다.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이것은 아직도 중요한 논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전략적으로도 멍청하다. 무엇이 더 나쁜지도 모르겠지만.”(188쪽)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이졸데 카림(60)은 ‘나와 타자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민음사)에서 ‘타자’와 ‘변화’를 축으로 새로운 논의를 전개한다. 현재의 변화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전의 과거와 비교해야 한다.‘상상된 공동체’인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베네딕트 앤더슨의 이 유명한 개념에서 방점은 ‘상상’에 있다.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상상’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민족이 단지 허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족은 허구의 개념인데도 우리를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개인들은 그냥 여성이기보다 한국 여성이고, 독일 남성이거나 팔레스타인 남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민족 규정은 불과 지난 20~30년 사이에 침식됐다.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에 동질성을 제공한 민족이 침식되면서, 동질 사회가 천천히 사라졌다. 즉 다원화 사회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 변화의 본질이다.이졸데 카림이 ‘타자’를 말할 때, 이는 관용이나 환대라는 윤리학적 개념을 또다시 역설하는 것이 아니며, 자아와 타자를 둘러싼 기나긴 형이상학을 재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카림은 타자성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시내 어디에나 있는 케밥집, TV를 틀면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마트 계산대에서 마주치는 외국인 노동자에서 본다. 현재 우리는 길에서, 매체에서 ‘이방인’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다. 이 이방인들은 ‘그들은 누구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다시 말해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다.‘나와 타자들’은 정체성을 둘러싼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개인주의의 층위를 역사적으로 구분한다. 첫째, 19세기 국민국가가 형성될 때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동등한 개인들이 처음 출현했다. 이것이 1세대 개인주의다. 둘째, 1960년대에 와서 정당과 같은 소속을 통한 운동이 각자의 정체성을 통한 개인의 운동으로 분화된다. ‘정체성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2세대 개인주의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의 다원화 사회에서 대두한 3세대 개인주의다.1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다른 존재로 변화했고, 2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주장했다면, 오늘날 주체는 ‘감소’된다. 다문화 속에서 ‘당연한’ 문화가 사라지며, 정상성을 규정했던 남성, 민족, 이성애자 주체가 헤게모니를 잃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60쪽) 타자 혐오는 바로 이 ‘작아진 자아’가 취하는 방어 태세다.“오늘날 우리는 ‘세계적인 문제를 지역적으로 풀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세운다. 우리는 그 문제를 풀고 싶지 않다. 우리는 거부한다. 울타리를 치고, 장벽을 세우며, 철조망을 쳐서 변화의 반대편에 설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방어인 동시에 내면적인 방어다. 불안한 주체를 완전한 주체로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장벽 뒤에서 옛날의 완전한 정체성은 배타적이고 폐쇄된 것으로 바뀌고 만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바꾸는 다원화 사회에 살고 있다. 돌아갈 방법은 없다.” ─ 본문 중에서/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14

기형도, 30주기 시 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출간

기형도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그런 날이면 언제나이상하기도 하지, 나는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서로를 통과해가는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중략…)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중략…) ”- 기형도 시 ‘어느 푸른 저녁’부분29세에 요절한 시인 기형도(1960∼1989)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가 활동했던 1980년대는 산업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로 넘쳐나고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존재 의의를 상실한 현대인들의 내적공허가 심각한 때였다. 기형도는 이러한 시대적 현실을 시에 담아 기존 시들의 대결구도를 넘어서 기형도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힘든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했는데 상실이나 죽음과 관련한 작품은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이러한 기형도의 시는 젊은 독자층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쉬운 언어로 표현했지만 깊이가 있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깊은 울림을 줬다.‘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기형도(1960∼1989) 시인의 30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시들을 오롯이 묶은 기형도 시 ‘전집(全集)’이다.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1989)에 실린 시들과 미발표 시들 97편 전편을 모으고,‘거리의 상상력’을 주제로 목차를 새롭게 구성한 책이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정거장에서의 충고’와 함께 생전의 시인이 첫 시집의 제목으로 염두에 뒀던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여전한 길 위의 상상력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두터워지는 기형도 시의 비밀스런 매력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그의 시를 찾고 또 새롭게 읽기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이유일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14

‘자신을 태우지 않고 빛나는 별은 없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 사랑’ 등으로 유명한 시인 류시화(61)가 신작 에세이‘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더숲)를 펴냈다.표제작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외에 ‘비를 맞는 바보’‘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라’‘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불완전한 사람도 완벽한 장미를 선물할 수 있다’‘인생 만트라’‘자신을 태우지 않고 빛나는 별은 없다’등 삶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진실한 고백 ‘나는 너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좋아’, 어차피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고 또 하고 끝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마법을 일으키는 비결’도 실었다.만약 우리가 삶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지금의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물이 돼 돌아오리라는 걸 알게 될까?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라고. 인생의 굴곡마저 웃음과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통찰이 엿보인다. 흔히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어떤 붓은 쇠처럼 깊게 새기고 불처럼 마음의 불순물을 태워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사색하게 한다.‘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는 인생에 다 나쁜 것은 없다는 작가의 경험과 깨달음을 담고 있다. ‘시인’을 ‘신’으로 알아들은 사람들 때문에 신앙 공동체에서 쫓겨난 일화, 화장실 없는 셋방에 살면서 매일 근처 대학병원 화장실로 달려가며 깨달은 매장과 파종의 차이, ‘나는 오늘 행복하다’를 수없이 소리내어 반복해야 했던 힌디어 수업, ‘왜 이것밖에 주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것만이 너를 저것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어떤 목소리, 신은 각자의 길을 적어 주셨으며 그 표식을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 가장 힘든 계절의 모습으로 나무를 판단해서는 안 되며 꽃이 피면 알게 되리라는 진리.어떤 이야기는 재미있고, 어떤 이야기는 마음에 남고, 어떤 것은 반전이 있고, 또 어떤 것은 눈물이 날 만큼 감동적이다. 시인은 단 한 줄의 문장으로도 가슴을 연다.류시화는 명상서적을 주도적으로 번역하고 영적 스승들을 만나 왔지만 주장이나 이념이 먼저인 작가가 아니다. 다만 자신을 성장시킨 우연한 만남들, 웃음과 재치로 숨긴 만만치 않은 상처의 경험들, 영혼에 자양분이 돼준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게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짓게 한다. 글들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이야기 전달자’를 넘어 ‘이야기 치료사’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는다. ‘삶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알아 가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저자는 ‘작가는 비를 맞는 바보’라는 소설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정리한다.“나 자신이 ‘오갈 데 없는 처지’라거나 ‘공동체에서 쫓겨난 마귀’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생각하자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이, 빗줄기에 춤을 추는 옥수수 잎이, 촛농이 떨어지는 창턱까지도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런 시적인 순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07

‘소음의 시대’ 필수 사치품 ‘침묵’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방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침묵센터는 최근 성장하고 있는 산업 가운데 하나다. 미국 LA 선셋 대로가 끝나는 곳에 위치한 ‘레이크 쉬라인(Lake Shrine)’ 사원은 “고독한 침묵”을 약속한다. 외국의 풍경만이 아니다. 힐링, 휘게, 욜로, 소확행의 중심에는 고요함이 있다. 고독과 침묵에 대한 수요는 우리 시대의 특징인 ‘소음’에서 발생한다. 소음의 시대. 침묵은 거의 멸종됐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연결돼 있다. 더욱이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현대인의 진짜 비극은 바쁨에 대한 욕구에마저 익숙해져 있다는 데에 있다. 필요한 건 자기만의 방만이 아니다. 방에 있어도 소란은 끊이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침묵이 필요하다. 그러나 침묵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모두에게 똑같이 열려 있지 않다. 침묵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불평등하고 어떤 이에게 침묵은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침묵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침묵인가.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자기만의 침묵 : 소음의 시대와 조용한 행복’(민음사)은 노르웨이의 극지 탐험가이자 작가인 엘링 카게(56)가 남극 탐험 과정에서 경험한 침묵을 바탕으로 철학, 음악, 문학, 미술을 망라하는 다양한 분야의 저명한 사람들이 어떻게 침묵을 정의하고 자기만의 침묵을 만들어 냈는지 탐색한 생활 철학서다.예수, 아리스토텔레스, 비트켄슈타인, 존 케이지, 뭉크, 올리버 색스 등 철학, 음악, 문학, 미술을 망라하는 다양한 분야의 저명한 사람들이 추구한 침묵 애호는 관념으로서의 침묵을 생활 수단으로서의 침묵으로 변화시킨다. 다양한 사례와 자료를 통해 침묵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실생활에서 침묵을 만들어 가는 방법을 무겁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이 책은 침묵이 인생을 경험하는 우아한 방법이자 시간을 사용하는 신비로운 체험임을 증언한다.엘링 카게 /민음사 제공누구나 침묵할 수 있지만 모두가 침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침묵에 대한 여느 책과 달리 이 책은 카게의 독특한 이력에서 나오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침묵의 체험기다. 본문 중간중간 극지의 절대 고독을 전하는 사진 역시 카게가 직접 찍은 것이다. 설상 스쿠터도 개썰매도 식량 저장소도 없이 세계 최초로 북극에 도착한 엘링 카게는 1993년, 역사상 최초로 혼자, 그것도 걸어서 남극에 도착했다. 1994년에는 에베레스트 정상에도 올랐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며 타임지로부터 “모험의 한계를 밀어내고 있는 현대의 탐험가”라는 극찬을 받은 그가 한계 상황에서 마주한 것은 침묵의 순간들이다. 존재의 결정체와도 같은 그 완결한 순간의 경험은 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잊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함께하는 삶의 무기가 됐다. 그의 체험은 침묵에 대해 우리가 물어야 할 33개의 질문과 대답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이야말로 경험하는 책이다. 침묵이 우리 시대의 필수‘사치품’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카게는 “당신이 경험하는 침묵은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침묵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라”며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침묵이 있다”고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3-07

대학 교수 38년 경험 담아‘행복한 교수론’ 방향 제시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가 최근 펴낸 ‘교수는 무엇으로 사는가’ (한국학술정보)는 오늘날 ‘대학의 위기’ 속에 계속되고 있는 ‘교수의 위기’를 극복하고 ‘보람 있는 교수생활’로 안내하려는 대학교수 38년 경험에 토대를 둔 ‘행복한 교수론’이다.책의 내용은 교수의 3대 책무라고 할 수 있는 교육, 연구, 봉사를 중심으로 저자의 경험과 현직 교수들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분석하면서 행복하고 보람 있는 교수생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제1부 ‘교수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는 교수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대학의 위기상황에서도 왜 교수에게는 ‘딸깍발이 선비정신’이 요구되고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제2부 ‘대학에서의 교수’에서는 교수의 연구활동 및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교수들의 비상한 관심사인 성과연봉제, 강의평가, 보직과 캠퍼스 폴리틱스(campus politics) 등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으며, 특히 지방대학의 ‘불편한 진실’과 지방대 교수의 부가적 책무가 왜 필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다.제3부 ‘국가사회와 교수’에서는 봉사자로서의 교수를 다루고 있는데, 교수에게 있어서 진정한 봉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면서 돈과 권력에 유착되어가는 폴리페서(polifessor)들은 대학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변창구 교수마지막으로 제4부 ‘교수의 보람과 행복’에서는 교수생활의 진정한 보람과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38년 교수의 경험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당면한 대학위기를 극복하고 행복한 교수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총장과 후배 교수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안을 편지글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부록’에는 ‘정년퇴임 고별강연’과‘대학신문과의 고별인터뷰’가 실려 있다.변창구 교수는 “‘교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지난 38년간 교수로서의 삶을 회고하면서 정리해봤다”며 “내가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유용한 경험들, 즉 ‘교수의 추구가치와 그 진로’가 오늘날 위기의 교수들에게 ‘한 가닥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말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2-27

한국사회 갈등, 실태 점검에서 대안까지

포스텍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소장 김승환)가 최근 펴낸 ‘막힌 사회와 그 비상구들’(아시아)은 한국사회가 직면한 여러 갈등문제의 실태를 점검하고 이를 타개할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박태준미래전략연구’시리즈로 기획한 열한 번째 단행본인 이 책은 한국사회 내부의 분절과 단절이 얼마나 심각한 사회적 중증인가를 정확히 진단해 당대를 더불어 감당해나가는 시민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해법을 제안하고,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개인이라는 인간에게 왜 정신과 물질에 대한 균형감각과 조화의식이 요구되는가의 문제를 존재의 근원적 시선으로 성찰하고 있다.세대 간 분절, 세대 내 단절, 계층이동 단절, 젠더갈등, 소득 양극화 심화, 이념 대립,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 청년취업 절벽…. 지금도 거의 아우성 수준으로 회자되는 그 말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벽’이 가로놓여 있다는 뜻이다. 열리고 또 열려서 아주 활짝 열린 한국사회 내부에 인간의 눈에는 드러나지 않게 가로놓인 ‘벽’, 이편과 저편을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갈라버린 ‘벽’을 ‘심각한 막힘’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벽, 그 막힘의 이름을 이 책은 ‘막힌 사회(blocked society)’라 매긴다. ‘벽’의 그림자는, ‘막힌 사회’의 그늘은 그 벽을, 그 막힘을 뚫고 나가려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불만과 저항의식 또는 낙담과 절망의식으로 쌓여간다.인간이 물질과 정신의 완전한 합일로 이뤄진 존재인데다 인간들이 이뤄놓은 사회가 인간의 정신에 항시적으로 ‘비교’를 자극하니 모든 사회적 불평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은 끊임없이 시행돼야 하고 또 그리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단지 그것마저 ‘돈’의 문제에 얽매일 위험이 상존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물질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정신적 차원의 삶, 영성적 존재로서의 삶도 추구하면서 ‘물질주의로 기울어지지 않고 욕망과 영성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일상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인간의 길-그 진정한 ‘비상구’는 어디에 어떻게 만들 것인가?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의 에세이 「‘물질주의’에 관하여」는 물질주의의 근원을 탐구해 물질주의와 정신적 가치의 사이에 실체로 버텨선 ‘벽’을 비춰주고 있으며, 한준 연세대 교수(사회학과)의 「한국사회의 계층 양극화, 김원섭 고려대 교수(사회학과)의 「한국 노동사회의 갈등: 내부자─외부자의 복지정책」, 김왕배 연세대 교수(사회학과)의 「세대갈등과 인정 투쟁」, 배은경 서울대 교수(사회학과·여성학협동과정)의 「한국사회의 젠더와 젠더갈등: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의 「더 나은 한국사회를 위한 분절문제와 해소방안: 이념갈등」은 제목 그대로 오늘의 한국사회 내부에 견고하게 가로놓인 ‘벽’들과 그것을 뚫고 밝은 미래로 나아갈 ‘비상구’를 가리키는 에세이들이다.포스텍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 연구·자문위원인 이대환 작가는 프롤로그 「왜 ‘막힌 사회’와 ‘비상구들’인가?」에서 기획의 시대적 의미와 수록 에세이들을 조명한 데 이어 물질과 정신의 균형·조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조건의 본질을 탐색하고 있다.한편, 지난 2013년 2월 출범한 포스텍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는 미래사회를 조망하고 대응전략을 탐색하는 연구에 주력하고 있으며, 그 결실들로서 ‘박태준미래전략연구총서’를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2-27

‘문지르면 묻어날 피의 역사’ 를 온 몸으로 써 내려간…

“백두에 머리를 두고/ 한라에 다리를 뻗고 눕는다/ 강산은 여전히 아름답고/ 바람은 싱그러운데/ 배꼽에 묻힌 지뢰와/ 허리를 옥죄는 유자철선(有刺鐵線)이 아프다” ( 강민 시 ‘꿈앓이’ 중에서) ‘백두에 머리를 두고’(창비)는 1962년‘자유문학’에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잔잔한 창작 활동을 해온 시단의 원로 강민(86) 시인의 시선집이다.이 시선집은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에서 94편을 가려 뽑고 신작시 4편을 더해 모두 98편의 시를 주제별로 갈라 4부에 나눠 실었다. 시인으로서의 숙명 같은 경건함이 느껴지는 이 시선집을 통해 시대와 인간을 화두로 삼고 격동의 세월을 건너온 원로 시인의 치열한 시대인식과 역사의식 그리고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농울치는 시 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이 시집에는 혼돈의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굴곡진 삶과 “문지르면 묻어날 피의 역사”(‘노래’)의 격랑 속에서 온몸으로 써내려간 문학적 연대기이자 한국현대사의 비망록이라 이를 만하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감수성이 엿보이는 초기 시에서는 젊은 날의 고뇌를 읽을 수 있고, 시대의 어둠에 굴하지 않는 양심과 지조가 서린 후기 시에서는 현실 문제를 깊이 성찰하는 지사적 결기를 느낄 수 있다.오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양평 동오리에 터를 잡은 전원생활의 맑은 시심에서 일구어낸 최근 시편들(연작시 ‘동오리’ ‘인사동 아리랑’)에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와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오롯하다.시인은 전쟁과 분단과 독재로 이어지는 질곡의 역사를 몸소 겪으면서 삶의 애환과 시대의 고통을 노래했다.6·25전쟁 당시 ‘장정 소개령’으로 끌려가던 모습(‘삼도천(三途川) 기행 1’), 1·4후퇴 때의 죽음의 행진(‘미로(迷路)’), 내무부 청사 앞의 4·19혁명 시위대(‘비망록에서 1’), 개발독재 시대의 철거 현장(‘비망록에서 2’),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기상도(氣象圖)’)는 불의의 현실에 맞서 “병든 민주주의의 회로”(‘오월, 바보새에게’)를 제대로 돌려놓고자 하던 촛불의 광장까지 한국현대사의 장면장면을 재현하는 시편들을 대하노라면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전율을 느낀다. 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소망을 간직해온 시인에게 역사의 미로는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시인은 문단에 발을 들인 지 30년 만에 첫 시집을 내고 시력 57년 동안 단지 네 권의 시집을 펴냈을 뿐이지만 ‘걸어다니는 한국문단사’라 불릴 만큼 문단의 산 증인으로서 문학의 삶을 살아왔다.사상이나 학벌이나 지연 등 세속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순정한 마음으로 세상을 감싸안아온 시인은 우리 시대의 ‘마지막 휴머니스트’이자 “가장 인간적인 시인”(구중서)으로 불리기도 한다.시인의 나이 86세. 그렇게 청춘의 한 시절은 가고 이제 황혼의 언덕에 올라섰지만 시인은 오늘도 꿈의 본향을 찾아 “추억의 앨범 속”(‘명동, 추억을 걷는다’) 어느 거리를 헤맬 것이다. 이 무잡한 세상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흘러 멀리 가는 강물”(염무웅, 발문) 소리가 저 “꺼지지 않는 진실”(‘꺼지지 않는 불꽃’)의 광장 한복판에 우렁우렁하다.시선집을 엮은 평론가 염무웅은 “강민의 문학은 우리에게 너무 겁내지 말라는 청신호를 보낸다. 그의 시는 흔히 말하는 난해와는 거리가 멀다”며 “시인은 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갈망을 시의 바탕에서 놓지 않았다”고 말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2-27

일제 치하 경주 사회, 경주 시민의 삶 총망라

최부식 시인경주문화원(원장 김윤근)이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제치하 경주사회와 경주민의 역정을 총망라한 ‘일제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를 발간했다.경주시 지원사업으로 발간된 이번 책에는 그간 경주에 소개되지 않았던 수백 장의 사진들이 소개돼 있으며, 당대 경주사회의 흐름과 경주민의 고단했던 삶의 역정을 낱낱이 증언하는 수백 건의 신문기사(동아일보(1920~1940년) 기준)와 각종 자료가 실려 있어 선대 경주민의 삶과 경주사회를 생생하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다.책에는 서장인 ‘가히 살만한 땅이로다’에서부터 종장인‘역사는 우리와 더불어’까지 모두 11개장에 45편의 소제목으로 나눠 일제치하 경주에서 일어났던 거의 모든 사안들을 정리·분류해 그 의미와 의의를 전개시킨다. 부록으로 조선시대의‘경주읍내전도’(1798년)와 일제의‘경주읍내시가약지도’(1931년)를 담아 시대흐름에 따른 경주시가지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또한 서구열강과 일본·중국의 정세 속 조선과 경주를 비교시킨‘경주중심으로 보는 연표‘, 3·1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검거된 사람들의 심문내용까지 실어서 독립을 바랐던 우리 선조의 간절하고 굳센 의지를 생생하게 살필 수 있다.저자 최부식(시인·경주문화원 이사)씨는 여는 글에서 “경주는 신라이고, 신라는 경주입니다”라고 전제한 뒤,“천년왕국 신라가 남긴 대다수의 유적유물이 경주에 있고, 이는 국민과 경주시민의 자부심이지만 신라를 이은 고려 조선은 물론 현 경주의 모습으로 빚어진 일제치하의 경주에 대한 자료와 연구는 그간 상대적으로 매우 무관심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살펴야 현재의 경주에서 신라까지 볼 수 있으며, 경주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적었다.최씨는 이어 “일제치하의 경주는 오늘과 가장 가까운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전반의 경주시가지와 경주민의 일상적 삶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이 태부족하고, 증언해줄 선대인들이 떠나고 살아계신 분들도 연로해 기억도 희미하다”면서 집필의 동기와 어려움을 토로했다.저자는 그 어려움 속에서 새로 발굴한 수많은 사진들과 신문기사들을 통해 일제치하 경주와 당대 진실에 한 걸음 더 생생하게 접근토록 했다.그 내용들은 정리해 보면, 일제치하 경주에 어떤 일이 펼쳐졌을까? 일제의 지배에 경주민은 그저 복종, 순응, 묵시적 동의를 하면서 살았을까? 결코 아니었다. 경주민들은 대한제국 말엽부터 의병항쟁을 통해 일제침략에 맞섰다. 일제치하에 들어가면서 최 부잣집의 형제들은 은밀하게 독립운동을 펴고 군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는 한편, 다양한 방법으로 경주사회에 힘을 보탰다. 3·1독립만세 거사를 앞두고 경주의 천도교들은 특별수련회에 들어갔으며,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경주민들은 활발한 만세운동으로 저항했다.일제가 미곡증산을 통한 수탈에 나서기 위해 수리조합 설립에 나서자 수백 명의 안강민들은 시위를 펴면서 동척과 일본인 지주들에 맞섰다. 일제의 식민지교육에 분노한 어린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나서고, 청년들은 각종 야학운동을 펼치며 경주민의 자각을 촉구하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 누구도 듣도 보도 못한 금관이 등장하자 경주민들은 금관이 경주에서 떠나가지 않게 반대운동을 펼쳤고, 금관고를 지었다. 동아일보는 전국에 이를 알리는 운동을 펴면서 우리의 역사문화적인 자각을 일깨우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켰다.일제의 첫 ‘신라제’개최의도를 간파한 청년들이 축등을 파손시키자 일제는 ‘적색비사사건’이라면서 경주 감포 포항 울산에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키는 철저한 압정을 시행했다. 일본지주의 횡포에 경주민이 검거되자 경주민들은 경주경찰서를 포위해 석방을 외쳤다.경주민들은 일제의 폭압에 항의하고, 진정서를 내면서 집단적인 저항도 마다하지 않았다. 경주는 물론 조선인들은 광복이 될 때까지 항일투쟁을 펼쳤다. 그럼에도 일제는 중국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징용징병, 근로정신대, 위안부를 끌고 갔으며, 전쟁의 광기 속에 수많은 경주민들은 만주 등지로 떠나가고, 일제는 온갖 물자를 수탈했다. 신문기사는 경주에서 벌어진 그들의 만행들을 고발·증언하고 있다.일제는 점령지 경주와 경주민들에게 압제와 수탈을 강요해 우리의 선대인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그 시대를 견뎌야만 했다. 그들의 압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경주민들은 교육, 문화예술, 체육, 종교, 경제생활을 엮으면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을 일본인들과 섞여 살 수밖에 없었다.‘일제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는 당대 경주사회 흐름을 낱낱이 밝혀,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그 시대를 산 선대 경주민의 모습을 눈앞에 펼쳐 보이도록 하고 있다.경주문화원 김윤근 원장은 “이 책은 일제를 통한 근대기 경주 역사를 최초로 정리한 것이며, 그 내용들은 바로 우리 어머니·아버지, 그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곧 우리 경주의 역사로, 내일의 경주를 위해서 많은 시민들이 책을 서로 돌려보면서라도 꼭 읽어주기 바란다”고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2-21

나를 경영하는 지혜 나를 바르게 하는 공부

“공손하게 사람을 대하면 욕을 면할 수가 있고, 청렴으로 일을 처리하면 재앙을 면할 수가 있다.”“말은 간결하게 하고, 걸음은 신중하게 한다. 마음을 언제나 한 일(一) 자 위에다 둔다.”-‘열여덟살 이덕무’중에서18세기 조선의 문예 부흥을 주도한 문장가이자 북학파 실학자로 알려진 이덕무가 젊은 날에 쓴 자기 다짐에 대한 글들을 한자리에 모은 ‘열여덟 살 이덕무’(민음사)가 출간됐다.서얼 출신의 이덕무는 절박한 가난 속에서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며 바른 정신을 지니고 살고자 날마다 하루 하루의 다짐을 적고 또 적었다.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18세기 지성사를 탐구해 온 고전학자 정민이 그중 네 편의 글을 엮고 해설을 달았다. 생활의 다짐과 공부의 자세를 스스로 끊임없이 되새기고자 적은 이덕무의 글에는 온유하고도 굳건한 품성이 그대로 드러난다.이 책은 이덕무가 열여덟 살에서, 스물세 살 나던 젊은 5년간의 기록들이다. 메모광이던 그는 생계를 위해 엄청난 양의 책을 통째로 베꼈다. 늘 빈 공책을 놓아두고, 좋은 글귀와 만나면 그때마다 옮겨 적었다. 스쳐지나가는 단상도 붙들어 뒀다. 이 과정에서 건져 올린 짤막짤막한 말씀의 언어들이 문집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세월과 정신은 한번 시들면 다시 되돌릴 수가 없으니 눈앞의 시간을 아껴 소중하게 보내야 한다는 뜻을 담은 ‘(歲精惜譚)’, 공부하며 스스로 경계로 삼아야 할 내용을 짤막한 글로 써서 모은 ‘(戊寅篇)’, 쾌적한 인생을 살기 위한 여덟 단계 ‘(適言讚)’, 어린 두 누이를 생각하는 오빠의 마음을 담은‘(妹訓)’. 이 네 편의 글들은 젊은 날 이덕무의 초상 그 자체다.“이덕무가 이 글을 쓴 나이보다 세 배는 더 산 내가 그의 젊은 시절의 글을 읽고 감상을 달면서, 나는 인간이 과연 발전하는 존재인가를 물었다. 문화가 진보를 거듭했다고 하나 삶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생각도 했다.” “이덕무는 내 뼈에 새겨진 이름이 되었다.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짠하고 또 따뜻해진다.” ― 정민/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2-21

꾸밈없이 순수한, 그러므로 낯설고도 반가운…

“나는 그대 안에 집 하나 지어두고/밤이나 낮이나/비가 오나 바람 불 때/내 집이 온전하나 살펴봅니다/그대도/내 안에 집 하나 짓고/봄날 제비처럼/무너진 곳이 없나 삐뚤어진 곳이 없나/드나듭니다/비새는 마음 없나 휘 둘러 보고 날아갑니다” - 이기홍 시 ‘제비집’전문청도 태생으로 중등교사를 지낸 이기홍 시인이 첫 시집 ‘낮달이 있는 저녁’(일송북)을 내놓았다.70여 편이 담긴 이번 시집은 30여 년간 틈틈이 쓴 글을 한 곳에 모아 묶어냈다. ‘고향에서’, ‘소녀’, ‘장마’, ‘낮달’, ‘가을아침’, ‘구두 한 켤레’등 가슴속에서 아무런 가미 없이 솟아오른 시편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생활어, 살아있는 언어로 우리네 일상과 시국과 향수와 그리움 등을 쉽고 솔직하고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외에도 홀로 시를 쓰며 깨친 언어관이나 시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편들도 많이 눈에 띈다. 그래서 “소통도 감동도 없는 시로 끼리끼리 추켜 주며 독자들은 나 몰라라 하는 자폐증에 빠진 작금의 우리 시단에 반성을 주는 시집으로도 읽힌다”는 평도 나오고 있다.이경철 문학평론가는 “이기홍 시인의 이번 시집 ‘낮달이 있는 저녁’은 소재의 폭도 넓고 주제도 깊이가 있다. 존재의 집이랄 수 있는 언어와 시에 대한 시부터 고향과 일상과 시국과 사랑과 그리움을 소재와 주제로 잡은 시까지, 이 폭넓고 깊은 시편들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일상에서 마치 일기처럼 우러나고 있어 쉽고 자연스럽게 읽히는 게 특장”이라고 평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2-14

20세기 프랑스 문학 거장, 뒤라스 작품의 정수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독자적인 문체와 작품 세계를 창조한 마르그리트 뒤라스(1914∼1996)의 정수가 담긴 작품집‘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민음사)이 출간됐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에 저항하면서 전위적인 시공간, 미묘하게 뒤얽힌 인물 심리를 해체적인 문장으로 선보이며 한평생 파격적인 문학을 관철해 온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렇듯 전혀 경험해 본 적 없는 낯선 독서 경험을 제공하는 그는 특정 문학 사조에 사로잡히는 일을 거부하며, 오늘날 프랑스 대학 및 고등학교 과정에서 가장 빈번히 거론되고 읽히는 작가로서 지위를 확립했다. 여성만의 경험과 욕망을 어떤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고, 적나라한 문장 그대로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뒤라스의 작품은 종종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수많은 독자들을 열광하게 하고, 정신 분석학을 비롯한 각 영역 연구자들을 당혹하게 한 그의 글쓰기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하나의 신비로 남아 있다. 게다가 영화와 연극 등 장르와 형식을 넘나들며 기존 문학의 틀을 파괴하고 재창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스타일 면에서도 미증유의 우주를 만들어 냈다.‘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에 수록된 표제작 ‘글’은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뒤라스의 문학 세계를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선사한다. 작품 활동 내내 (자신의 문학이 편협하게 이해되는 것을 경계해) ‘글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던 그는 오로지 이 책의 ‘글’을 통해서만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민낯을 보여 준다. 여기서 저자는 글에 관해, 글로 쓰인 것에 관해, 글을 쓰는 행위에 관해 말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책에 대해서, 그 책을 쓰는 저자의 고독에 대해서 말한다. 뒤라스에게 글은 고독과 광기의 동의어이며, 글을 쓰는 것은 그녀가 즐겨 사용한 표현대로 “목소리 없이 외치기”다. ‘글’에는 저자 특유의 소설 세계를 이루는 내면의 고통, 응축된 정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광기가 거의 날것으로 드러나 있다.‘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에는 ‘글’말고도 네 편의 작품이 더 실려 있다. 쓰인 순서대로 보자면, 가장 앞선 것은 뒤라스가 이탈리아 국영 텔레비전 방송의 지원을 받아 만든 영화‘로마의 대화’(1983)의 글인 ‘로마’다. 영화에서는 로마 나보나 광장과 아피아 가도 등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보여 주는 영상 위로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남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여자와 남자가 옛 로마에 대해, 그리고 영화에 대해 말하고, 로마의 티투스와 유대의 베레니케, 그 불가능한 연인들의 사랑에 대해 다시 말한다. 그리고 그 위로, 아주 희미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남녀의 사랑이 새겨진다.이어 ‘회화전’은 뒤라스가 1987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예술가 로베르토 플라테의 회화전을 위해 쓴 글이고, ‘순수한 수’는 1989년에 불로뉴비앙쿠르 르노 공장의 폐쇄가 결정됐을 때 쓴 글이다. ‘순수한 수’에서 뒤라스는 르노 공장에 평생을 바친 노동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벽’을 세우고자 독자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실제 이십 년 후인 2010년에 베트남 출신 예술가 투 반 트란에 의해 불로뉴비앙쿠르의 르노 공장에서 일한 사람들의 숫자 ‘199491’을 새겨 넣은 설치 미술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젊은 영국인 조종사의 죽음’은 뒤라스가 여름마다 머물던 트루빌 근처의 작은 도시 보빌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 막바지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노르망디 숲으로 추락해 사망한 스무 살의 영국인 조종사가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 선 뒤라스는 자신의 삶과 문학을 돌아본다. 또한 뒤라스는 그 “영국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베트남에서 죽어 공동 묘혈에 던져진 작은오빠의 죽음을 기억해 내고, 또한 독일인들에게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죽음을 떠올린다.이 책에는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뿐 아니라 매체와 장르를 초월해 ‘사랑의 불가능성’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색가, 잔혹한 전쟁의 끔찍한 실체를 고발하는 반전주의자, 자본가 계급의 부당한 횡포에 당당히 맞서는 노동 운동가, 그리고 지인의 예술 세계를 섬세한 눈길로 응시하는 인간 뒤라스의 모습이 각기 다른 색채로 가득 담겨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2-14

이 세상에 말 못하고 이름없는 것들에게 건네는…

곽재구 시인. /문학동네 제공‘사평역에서’의 시인 곽재구가 여덟번째 시집‘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를 펴냈다.1981년 등단해 올해로 39년차 시인으로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서민들의 애환과 아픔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낸 시 ‘사평역에서’로 널리 알려져 있다.그가 7년 만에 펴낸 이 시집은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은 미발표시 73편을 묶었다. 특히 해설 대신 시인이 직접 우리말의 자모로 써내려간 산문을 실어 특별함을 더했다.처음 시를 만났던 유년의 기억과 더불어 매일 열 편의 시를 쓰겠다고 결심했던 스무 살 적 시쓰기 십계명을 되새기며 김소월, 윤동주, 정지용을 차례로 호명하는 시인의 산문은 ‘별 헤는 밤’과 ‘향수’를 필사하던 그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시어로 들어앉은 우리말들의 예쁨을 발음하며 몸으로 새겨 읽기 좋은 이번 시집은 유유히 차분히 느릿한 여유를 삶 가운데서 찾고픈 이들에게 어린이처럼 투명해진 시심(詩心)으로 안내하는 교과서라 하겠다.우리 땅에 지천으로 흩어진 풀꽃 같은 헐벗고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삶에 대한 끈끈한 진실’을 노래해온 시인 곽재구. 고통스러운 풍경을 묘사할 때에도 맑고 순수한 서정성으로,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끝내 와야만 하는 희망의 세상을 지금 여기에 불러냈던 그. 아물지 못할 우리의 상채기들을 수선해내는 그의 시를 읽으며 우리 모두는 인간의 따뜻함을 조금씩은 더 희망하게 됐으리라. 그렇게 절망보다는 희망을, 고통보다는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 힘써온 곽재구가 일별해낸 민중의 풍경은 80년대를 버텨줄 한줄기 서정성이 돼줬다. 강언덕에 누워 마을 하나하나의 꿈과 사랑과 추억의 깊이를 만나고 그것을 시의 밑그림으로 삼았던 곽재구. 아주 오래전부터 한 강을 사랑해왔다고, 그 강의 이름은 내게 늘 처음이었으며 열망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는 그에게 고요하게 흘러가는 강물소리는 삶이 흘러가는 흔적이자 이 땅의 모든 서럽고 쓸쓸한, 가슴 먹먹한 목소리였다. 그가 삶의 밑바닥에서 퍼올린 마르지 않는 사랑은 순천(順天)의 샛강 동천을 타고 흘러 “이야기의 바다”로 가는 마법을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시의 본질은 대화이며 이야기하는 거라고,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말 못하고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시인은 증명해 보인다. 내 안의 침묵에 머무는 시인의 귀에는 세상의 모든 목마른 소리들이 들린다(‘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허리를 내어주고,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평생을 강물의 노래만을 들으며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선 징검돌. 깊은 겨울, 눈을 막아주고 추운 바람을 맞아주는 나무의자(‘징검다리’)의 침묵은 시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된다. 시인의 시 속에서 말 못한다 여겨지던 사물과 풍경은 제 목소리를 얻고, 징검돌은 미르가 돼 날아오른다. 이름 없던 돌과 풀에게 시인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이름과 관계를 선물한다.곽재구 시인. /문학동네 제공시인은“아픈 사람은 더 아프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는” 이 세상에서“가난한 사람이 따뜻해지는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라면 먹는 밤―성래에게’). 가진 것 없는 우리가 표할 수 있는 유일한 경의는 서로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일이다(‘강은 노래하고 푸른 용은 춤추네’). 하나뿐인 손으로도 ‘나’는 ‘너’에게 감자를 구워주고 시를 써주고 종이배를 접어줄 수 있다. 우리가 손을 내민다면 그 손은 한 개에서 두 개가, 두 개에서 열 개가 된다. “성에 낀 영혼”을 따뜻하게 안아줄 서로의 손(‘손’). 그때 시는 우리에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깊은 밤 “심장 제일 가까운 곳”에 켠 노란 불빛 하나(‘초원의 노래’)가 돼 줄 것이다.시집은 ‘시인의 말’, 1부 ‘당신이 있어 세상이 참 좋았다’, 2부 ‘어린 물고기들과 커피 마시기’, 3부 ‘바람은 어디로 가나’, 4부 ‘눈사람은 눈사람을 사랑하였네’, 산문 ‘강은 노래하고 푸른 용은 춤추네’로 구성돼 있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2-07

美 전설적 판타지 소설가 르 귄 에세이 선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황금가지)는 휴고 상 5회, 네뷸러 상 6회 등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고 ‘어스시의 마법사’로 세계 3대 판타지 소설에 이름을 올린 미국의 전설적인 판타지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의 생애 마지막 에세이 선집이다.2010년부터 5년간 블로그에 남긴 40여 편의 글을 엮었다. 일상의 주변에서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사사로운 소재에서부터 사회 주요 이슈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폭넓은 식견과 혜안을 엿볼 수 있다.총 일곱 장(章)으로 구성됐으며 각기 여든을 넘긴 노년의 삶과 현대의 문학 산업, 그리고 젠더 갈등과 정치적 이슈 등 주요한 이야기를 담은 네 장과 르 귄의 마지막 반려묘 파드와의 만남과 사건을 다룬 파드 연대기 세 장으로 나뉘어 있다. 존 스타인벡과의 일화, 미국의 도덕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적인 비유, 흥미로운 독자들의 편지와 욕설 문화에 관한 노작가의 세심하고 담백한 유머, 늙음과 삶에 대한 사려 깊은 사색 등 시종일관 예리한 관찰력과 짜임새 있는 문장으로 출간 직후 대중과 평단의 극찬을 끌어냈다. 2017년 12월 출간돼 휴고 상 및 PEN/다이아몬스타인-슈필보겔 상을 수상했으며, 저자인 어슐러 르 귄은 2018년 1월 22일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1장 ‘여든을 넘기며’에서는 ‘늙음’과 ‘스러지는 것’에 대한 작가로서의 고뇌를 담아내는 한편,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해 항변한다.2장 ‘문학산업’을 통해서는 욕설이 남용되는 최근 문학 작품들,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 수상자가 결정되는 문학상들, 전자오락의 영향을 받은 아이들의 글쓰기 등에 대한 우려와 함께 판타지 문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돕고 일부 평론가들의 비하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하는 등 현대 문학 산업에 대한 빼어난 통찰을 보여준다.특히, 3장 ‘이해하려 애쓰기’에서는 사회적 주요 현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담아냈는데, ‘남자들의 단합, 여자들의 연대’와 ‘분노에 관하여’에서는 20세기 후반의 페미니즘을 돌아봄으로써 현재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에 지혜를 주기도 하며, ‘온통 거짓’과 ‘필사적인 비유에의 집착’에서는 거짓을 일삼는 정치인과 성장만을 고집하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꼬집기도 한다. 또한 군대의 제복 문화, 종교적 신념, 내면의 아이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득 담아냈다. /윤희정기자

2019-02-07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죽음, 곱씹는 생의 의미

소설가 윤대녕(57)이 여덟번째 소설집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문학과지성사)로 돌아왔다. 그의 소설집은 2013년 ‘도자기 박물관’ 이후 5년 만이다.삶의 의미를 좇는 존재들의 구원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윤대녕은 1990년대 한국 문학의 새 흐름을 연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해 ‘은어낚시통신’,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달의 지평선’ 등의 작품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다‘누가 고양이를 죽였나’는 그가 2015년 여름 ‘문학과사회’에 발표한 ‘서울-북미 간’을 시작으로, 역시 ‘문학과사회’ 2018년 가을호에 발표한 ‘누가 고양이를 죽였나’까지 3년여 동안 쓴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렸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나는 ‘작가인 나의 죽음’을 경험했고,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으리라는 예감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라고 ‘작가의 말’에서 고백하고 있듯, 이번 소설집은 ‘세월호 참사’ 이후 그에게나타난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2015년 1월에 뿌리치듯 한국을 떠나 북미로 간 윤대녕은 그곳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 생각했다. “우선 단 한 편의 소설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밤마다 거미줄을 치듯 한 줄 한 줄 글을 씀으로써” 비로소 그는 스스로를 작가로 인정하게 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작가의 말’). 이렇게 북미에 체류하는 동안 씌어진 작품은 소설집의 앞부분에 나란히 실린 ‘서울-북미 간’ ‘나이아가라’‘경옥의 노래’세 편이다.각각의 작품에는 래프팅 사고로 죽은 딸과 여객선 침몰로 죽음을 당한 이들(‘서울-북미 간’), 6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세상을 뜬, 친혈육은 아니지만 유년을 함께 보낸 삼촌(‘나이아가라’), 한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한 연인(‘경옥의 노래’)을 떠나보내기 위한 애도의 여행이 그려진다.윤대녕의 작품에서 ‘여행’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의 이전 작품 속 인물들은 ‘존재의 시원’을 찾아 길 위를 떠돌았고, 그 여정은 등장인물의 예민한 감수성과 신화적 이미지들이 결합된 언어로 장관을 이뤘다. 그러나 이번 소설집에서의 ‘여행’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씌어진다.그것은 “죽은 자의 흔적을 좇는 여행, 죽고자 떠나는 여행,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부터 기원한 여행”으로, “이번 소설집에서 윤대녕의 인물들이 떠나는 모든 여행은 죽음을, 그것도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죽음을 싸고돈다.”(김형중)한편, 특수 청소 하청 업체를 운영하며 아무도 모르게 방치된 죽음을 수습하는 일을 하는 장호를 통해 처절한 죽음의 현장을 다루는 작품 ‘밤의 흔적’은 압도적인 죽음의 장면 속에 자살에 실패한 여인의 꿈을 병치시키며 생의 의미를 곱씹게 하기도 한다.이렇게 다시 씌어진 ‘여행’ 외에 변화는 또 있다. 한때 “‘생물학적 상상력’으로 ‘사회학적 상상력’의 고갈을 극복하고 1990년대 한국 문학을 개시했다는 평을 받았던 윤대녕이 쓴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폭력과 억압으로 가족에게 군림하는 늙은 국가주의자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드러내놓고 표출하고(‘총’), 가부장적인 폭력과 거기에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동료애적 연대를 그려 보이는가 하면(‘누가 고양이를 죽였나’), 세월호 참사와 삼풍백화점 붕괴를 연결시킴으로써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면하게 한다(‘서울-북미 간’).이 밖에 자신에게는 사랑이었으나 상대에게는 상처였던, 하여 오해로 비틀려 결국 자신의 삶에서 쫓겨나 오랜 세월 바깥을 떠돌아야 했던 늙은 배우의 이야기를 담은 ‘생의 바깥에서’와 청동기 시대 선사 취락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여인상과 평생에 걸쳐 사랑에 빠진 수호의 이야기를 그린 짧은 소설 ‘백제인’도 책의 말미에서 한 편의 영화처럼, 블랙코미디처럼 읽히며 이번 소설집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9-01-24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망명 정부의 도시 ‘다람살라’

인도 북부 히마찰프라데시 주의 도시 다람살라. 히말라야 산맥 캉그라 계곡에 위치한 이곳에 1950년 중국의 침략·점령 이후 1959년 망명해온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인들이 이끄는 티베트 망명 정부가 있다. 다람살라는 티베트 망명 정부가 들어서 있고 티베트인들이 주로 거주하며 달라이 라마의 거처가 있는 윗동네 맥그로드 간즈와 주로 인도인들이 거주하며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한 아랫동네로 나뉜다.‘작은 티베트’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엔 티베트 요리를 파는 식당을 비롯 티베트 도서관, 박물관, 병원, 그리고 티베트 수도 라싸 현지에 남겨져 중국의 관광지가 된 코라 순례길, 역시 티베트 수도 라싸에 위치한 달라이 라마의 여름 궁전 노블링카, 네충 사원, 남걀 사원, 축락캉 사원 등이 이곳에도 같은 이름으로 재건돼 있다.지난 20여 년간 인도를 드나들며 ‘Are you going with me?’와 ‘길 끝나는 곳에서 길을 묻다’등 인도인들의 삶과 문화를 글로 담아냈던 임 바유다스(임헌갑) 작가가 최근 펴낸 ‘다람살라에서 보낸 한 철’(아시아)은 국내 최초의 다람살라 여행기로 화제가 되고 있다.저자는 달라이 라마, 티베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다람살라를 돌아보는 여정 곳곳에서 소중한 메시지를 발견해 독자들에게 전한다. 그것은 ‘세상에 인간의 삶보다 중요한 건 없다’로 요약된다.저절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압도적인 풍경은 작디작은 존재인 인간을 보살피는 듯하고, 우리네와 다를 바 없는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들은 길고 큰 역사를 담고 있는듯하다.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기 전에는 ‘다람살라’라는 곳을 이름 정도만 들어봤을 테고 가볼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가 자유롭게, 호기롭게, 오밀조밀하게 소개하고 이야기하고 대화하는 다람살라를 죽기 전에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어진다. /윤희정기자

2019-01-24

“라, 라 붉은 루주를” 바르고 외출해반짝이는 반지와 귀고리를 훔치고별과 어둠을 훔치고…

“날 내버려두지 마세요, 나는 갸르릉갸르릉 낡은 바이올린처럼 울고 낡은 바이올린처럼 웃어요 이 현기증 나는 노랑을 노란 갈증을, 낡은 내 그림자는 당신을 붙잡지 못하겠지만 우린 모두 폐인이 되어서야 조금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안녕, 달콤한 슬픔의 중독이여.”-김말화 시 ‘밤의 카페’전문포항에서 활동하는 여류 김말화 시인이 자신의 인생이 담긴 시집‘차차차 꽃잎들’(애지)을 펴냈다.그의 시집 출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20년 가까이 써내려간 수백편의 시만큼의 농도 짙은 감성이 시집 가득 배여 있다.쓸쓸한 시공간을 섬세하고 개성 있는 감성으로 불러내 충만과 탄생의 공간으로 치환한다. 소멸 쪽으로 기우는 시간들과 녹슨 추억을 닦아 허공에 내거는 시적 주체들은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와 있는 오늘과 새로울 것 없는 내일의 세계로 허밍허밍, 차차차, 걸어간다.시집에는 주로 상실과 슬픔을 노래하는 밤의 서정들을 적은 시 57편이 실렸다.‘보름달 증후군’에서는 “라, 라 붉은 루주를” 바르고 외출해 반짝이는 반지와 귀고리를 훔치고 별과 어둠을 훔치는 화자가 나오고, ‘밤의 카페’에서는 “상처를 할퀴는 건 이별이 아니라 얼음 같은 그대의 키스에요” 라고 말하는 무희가 등장하고, ‘달맞이꽃’에서는 “밤마다 등에 별을 박고 짐승처럼”우는 화자가 있다. 한숨과 회한의 시어들 사이로 낯선 이미지들을 충돌시켜 상실과 슬픔을 빗질하는 시선이 새롭다.표제는 시 ‘벚나무 집에 갇히다’에서 따왔는데, 연분홍 벚꽃잎이 꽃비로 내리는 풍경을 차차차 스텝으로 바라본 시선도 인상적이다. 이처럼 붉은 시간을 노래하는 시인의 화법은 절묘한 리듬을 거느리고 있어 마치 육성을 듣는 듯 생생하다.김말화 시인.해설을 쓴 이병철 평론가는김말화 시인의 시세계를 “사막에 내리는 천 개의 달빛”으로 요약하며 “과거를 향해 보내는 가장 아름답고 곡진한 작별인사”라고. “뼈아픈 자기진단을 통해 타자와의 합일에 이르고 있다”고 말한다.늦은 나이에 시 공부를 시작했고 더 단단해지기 위해 하늘을 보는 버릇이 있다는 김말화 시인은 ‘우포늪’에서 “늪은,/ 늪의 탯줄을 따라 새로 태어나고 있다”고 밝혔듯 우리 생의 쓸쓸하고 아픈 시간들을 잘 달여 ‘시, 시집’이라는 좋은 그늘로 엮었다.김말화 시인은 포항 토박이로 2008년 ‘포항문학’으로 등단했다. 포항문인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현재 시동인 푸른시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1-17

1920년대 프랑스 전원마을을 배경으로 인간 존재의 본성·욕망·좌절 냉철히 그려낸 걸작

미국 문학사에서 독특하고 이색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글렌웨이 웨스콧의 대표작 장편소설 ‘순례자 매’(민음사)는 길지 않은 분량과 뛰어난 가독성으로 한 호흡에 빠르게 읽히는 작품이다.이 소설은 비록 지난 세기에 쓰인 작품이지만 마치 어젯밤 벌어진 술자리를 기록한 것처럼 생생하며, 지극히 모던한 방식으로 ‘사랑과 욕망’이라는 감정을 담고 있다.일견 20세기 중반의 귀족적 생활양식과 이성애 결혼 제도를 희화화한 것처럼 보이는 ‘순례자 매’는 웨스콧의 정수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 ‘순례자 매’인 루시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성과 욕망, 좌절과 적응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한 차례의 전쟁, 지난 세기의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술렁이던 1920년대 프랑스.‘순례자 매’의 화자(이자 작가의 분신) 알윈 타워는 1920년대 후반, 프랑스의 전원 마을 샹셀레에 자리한 절친한 친구이자 미국 출신의 부호 알렉산드라 헨리의 저택에 머물며 하루를 보낸다. 앞으로 닥쳐올 어떤 파국(2차 세계대전)을 전혀 예감하지 못한 듯, 지루할 정도로 고요한 이곳 샹셀레에 세계 전역을 여행하는 지방 귀족이자 유산 계급의 컬렌 부부가 찾아온다. 화려한 용모를 지닌 데다 수다스러운 컬렌 부인, 그녀의 남편이자 어딘가 권태로워 보이는 얼굴의 래리 컬렌. 그리고 그들 사이에 엄숙하게 버티고 앉은 한 마리의 매, 루시. 오직 반나절 동안, 아름답고 나른한 풍광을 배경으로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는 밑도 끝도 없는 열망과 치명적인 불만,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감정의 도가니가 칼에 베인 상처처럼 움푹 입을 벌린다. 마치 연극 무대에 오른 듯 스러져 가는 모든 것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컬렌 부부와 그들의 어긋나 버린 관계를 잔인할 만큼 냉정하게 관찰하는 주인공, 또 저택 뒤편에서 자기들만의 격정적인 드라마를 피로(披露)하는 하인들…. 샹셀레 저택에 짙은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순례자 매’는 마침내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1-17

“지친 벗들에게 희망의 메신저 되고파”

포항지역에서 ‘정치 전문가’로 잘 알려진 정치학박사 김만수(57)씨가 자서전적인 성격을 띈 책 ‘김만수의 SNS通 365’(자치시대)를 펴냈다.김씨는 선거홍보전략센터를 운영하면서 정치권에서‘당선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정치 기획과 홍보에 남다른 실력을 보여왔다.영덕 태생인 김씨는 단국대와 영남대 행정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학을 전공했다. 2017년 7월에는 영남대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시골장터에서 국회의원후보들의 합동연설회에 매료돼 웅변을 시작해 1997년 3·1 민족정신계승 전국나의주장웅변대회에서 ‘민족의 봄’이란 연제로 스피치인의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을 경북최초로 수상했다.그동안 대통령선거에서 후보자 수행연설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지난 20여 년간 ‘선거홍보전략센터-YJ’를 운영하면서 후보자들에게 로고송과 홍보물 기획·제작 TV 토론 및 선거연설문을 작성·지도해 국회의원과 광역단체장, 광역 및 기초의원 등 500여 명의 당선자를 배출해 ‘당선 제조기’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김씨의 25번째 저서인 ‘김만수의 SNS通 365’은 저자가 지난해 6·13 지방선거를 기획하면서 개정한 페이스북을 통해 페친들과 지난 365일 동안 소통하고 공유한 사진과 글들을 한 데 묶은 것이다.1, 2장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와 관련된 내용들로 ‘사진으로 보는 별난 이력’과 ‘참회록(懺悔錄)’을 담았다. 3장은 평범한 일상을 다룬 ‘동행’, 4장은 ‘6·13 선거와 SNS의 위력’, 5장은 그 동안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한 칼럼 중 일부를 정리해‘마중물 논단(論壇)’으로 분류해 정리 수록했다. 서체는 SNS상의 서체를 사용했으며, 화면 캡쳐 방식으로 편집했다.김씨는 서문에서“그 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주목한 건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많은 날들을 긴밤 지새우며 SNS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도 삶에 지치고 방황하는 동시대의 벗들에게 부족하나마 나름 희망과 용기를 주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 함께 더불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책을 엮으면서 나는 나를 되돌아보고 적극적인 피드백을 통해 내 마음을 가다듬고 싶었다. 나도 이젠 좀 더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주변의 벗들에게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맑고, 달달하고, 따뜻한 글과 사진들을 올려 희망의 메신저로 거듭나도록 노력할 수 있기를 스스로에게 채찍하고 다짐해 본다”고 적었다.김만수 다산소통연구소장.김만수씨는 현재 포항에서 다산소통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학·관공서·기업체에서 ‘인간관계, 리더십, 스피치’를 주제로 한 활발한 강연활동을 벌이고 있다.저서로 ‘연단의 메아리’, ‘선거연설과 당선전략’, ‘조국을 위하여-가슴으로 말한다’, ‘화술의 강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스피치 방법론’ 등이 있다. 오는 19일 오후 3시에는 포스코국제관 대연회장에서 이번 저서 출판 기념회를 겸한‘김만수 박사 북콘서트’를 갖는다. ‘김만수의 SNS通 365’도서 판매수익금은 소외된 이웃을 위한 봉사기금으로 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1-17

묵직한 역사와 날렵한 무협 넘나드는 분방한 이야기 속 권력의 맨얼굴 포착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성석제가 역사소설‘왕은 안녕하시다 1,2’(문학동네)로 돌아왔다.‘투명인간’이후 5년 만의 장편소설이자 원고지 3천 매에 달하는 본격 대작 역사소설이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전반부를 연재한 뒤 오랜 시간을 들여 후반부를 새로 쓰고 전체를 대폭 개고해 완성했다. 조선 숙종 대를 배경으로 우연히 왕과 의형제를 맺게 된 주인공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왕을 지키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모험담이 특유의 흥겹고 유장한 달변으로 펼쳐진다. 묵직한 역사소설과 날렵한 무협소설을 넘나드는 분방한 이야기 속에 역사의 흐름과 권력의 맨얼굴, 당대를 살아간 보통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주인공 성형은 한양에서 제일가는 기생방 주인인 할머니 덕에 놀고먹는 “장안에 호가 난 알건달에 파락호”. 이야기는 그가 어느 날 우연히 비범한 풍모의 꼬마를 만나 그와 의형제를 맺으면서 시작된다. 알고 보니 꼬마는 장차 대위를 이을 세자(숙종)였고, 얼마 뒤 그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성형은 졸지에 그림자처럼 왕의 주위에 머물며 왕을 지키는 왕의 최측근이 된다.어린 왕이 남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목소리를 높이는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 위태로운 왕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성형은 궁궐 안팎을 오가며 각계각층의 사람살이를 경험하고 왕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을 판별하며 왕의 안위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숙종 연간의 정치사가 권력의 중심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남인으로, 다시 서인으로 뒤바뀌는 세 차례의 어지러운 환국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 희빈 장씨의 등장에서 폐비, 인현왕후의 복위로 이어지는 왕실의 권력투쟁이 얽혀 있음은 익히 아는 바. 하지만 왕의 숨은 형으로 암약하는 가상의 인물, 시정잡배 출신답게 지체 높은 이들에게 고분고분한 법이 없는 성형의 눈과 귀에 포착되고 그의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익숙한 역사적 소재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로 탈바꿈한다.성형은 자신의 정체를 감춘 채 권력의 향방을 가르는 결정적인 국면을 목도하거나 은밀히 그에 개입하며, 할머니의 배경과 인맥을 바탕으로 장사 수완을 발휘해 왕실의 재산을 불리는 데 힘쓰기도 한다. 진기한 칼을 얻어 위기에 처한 왕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청나라의 무예 고수와 대결을 벌이는 활약도 펼친다.‘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김만중을 형님으로 모시며 가까이하기도 하고, 강직한 선비로 이름높은 박태보를 지켜보며 흠모하기도 하고, 훗날 희빈 장씨가 될 장옥정에게 연심을 품기도 한다. 종횡무진 숨가쁘게 이어지는 사건의 갈피마다 성석제 특유의 능청스러운 유머가 곁들여져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읽기를 쉬이 멈출 수 없게 한다.성석제 작가. /연합뉴스왕과 왕을 둘러싼 세력들 사이의 갈등과 암투, 대립과 이합집산이 거듭되면서 주인공 성형과 갖가지 인연으로 맺어진 이들의 운명도 권력의 향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다. 왕은 어느덧 자신의 자리를 위해 숱한 목숨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두려운 존재가 돼가고, 성형과 왕의 관계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왕은 안녕하시다’는 왕의 의형제 성형의 모험담인 동시에 권력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명분과 도리, 왕의 말 한마디와 신하와 유생의 상소 한 장이 엄청난 위력을 지닌 무기가 돼 진퇴와 생사를 가르고,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민심을 움직이고 어느새 실체가 돼 드러나는 과정이 신랄하게 그려진다. 숙적을 끝내 죽음으로 몰고야 마는 잔인한 권력의 맨얼굴과 그럼에도 대의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이들의 결기가 선명하게 맞부딪친다.그러면서도 ‘왕은 안녕하시다’는 역사가 결국 뭇사람들의 오욕칠정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당대의 정세와 경제, 문화뿐 아니라 세태와 풍속, 보통 사람들의 생활상과 음식과 시정의 패설과 속요에 대한 관심이 이야기의 바탕에 짙게 깔려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생생한 무대 위에서 어떤 이는 웃고 어떤 이는 웃으며, 누군가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애쓰고, 어떤 이는 사라지고 어떤 이는 남는다는 것, 그러면서 세상과 사람은 조금씩 다른 것이 돼간다는 것. 그렇게 성형의 이야기는 곧 작가의 말처럼 “역사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꾸거나 역사 그 자체가 된 무명 또는 익명의 존재”(‘작가의 말’)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온다./윤희정기자

2019-01-10

바다를 통해 본 동아시아 700년 문명 교류사

우리는 흔히 역사를 육지에 기반을 둔 국가를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기에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일국사의 관점에 머물기에 십상이고, 고개를 든다고 하더라도 몇몇 이웃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바다의 관점에서 보는 역사는 다르다. 바닷길을 통해 연결된 수많은 이웃이 시야에 잡히면서 인식의 범위를 크게 확장한다. ‘바다에서 본 역사’(민음사)에서 바다는 육지의 부속물이나 자연의 경계가 아니라 ‘해역’이라는 주체적인 역사 공간으로 제시된다.이 책은 여러 역사가가 모여 명확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함께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도쿄 대학 부학장인 석학 하네다 마사시를 필두로 일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장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스물여덟 명이 참여했다. 각책은 바다에서 본 동아시아의 역사를 크게 △1부: 1250~1350년, 열려있는 바다 △2부 : 1500~1600년, 경합하는 바다 △3부: 1700~1800년, 공생하는 바다 등 세 시기로 나눠 엮어졌다.△‘개방’: 세계 제국 몽골이 바닷길을 잇고 동서 교류를 촉진하다당 제국 시절부터 중국의 대도시와 항구는 바다를 건너온 상인과 사절, 승려로 붐볐다. 바다와 그 건너편에서 온 사람과 물품은 익숙한 존재였다.13세기에 등장한 몽골(원)은 동아시아의 바다가 지닌 개방성을 더욱 강화했다.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제국이 탄생하면서 ‘팍스 몽골리카(몽골의 평화)’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바닷길 또한 전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와 모로코의 이븐 바투타는 이 시기에 중국을 여행하면서 세계 최대의 항구인 천주의 번영에 관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경합’: 유럽 세력이 등장하고 동아시아의 바다가 지구 전역과 연결되다16세기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바다는 격변을 맞이했다. 명 제국의 해금(海禁) 정책과 조공 체제가 흔들리면서 전통적인 질서가 무너지는 가운데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랐다. 1571년에는 에스파냐가 필리핀에 마닐라시를 건설함으로써 멕시코의 아카풀코와 연결되는 태평양 항로가 탄생했다. 책은 지구 전역을 연결하는 무역이 시작되면서 나타난 경쟁의 양상에 주목한다.△‘공생’: 육지의 정치권력 강화와 함께 해양 세력들이 자립성을 상실해 가다중국에서는 명이 청으로 교체되고,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가 성립하면서 육지의 정치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성해졌다. 동아시아 각국은 강해진 힘을 바탕으로 해양 세력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청 제국은 대만을 점령했고, 에도 막부 휘하에 있는 사쓰마 번은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을 침공했다. 책은 육지의 정치권력이 바다를 어떻게 통제하고 활용했는지를 보여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1-10

“책은 쓰인 것보다 읽히는 데 가치 있어”

“독서는 우리 삶에 유익하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개인적 삶에 눈을 뜨게 해 주는 대신 그 삶을 대치하려 한다면 독서는 위험해진다. 즉 진리가 성숙된 사고와 감성의 노력에 바탕해야만 실현 가능한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손에 이미 만들어져 책갈피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완성된 물건으로 간주될 때, 그리하여 단순히 서재 선반들에 꽂힌 책들에 손을 뻗어서 펼친 다음, 몸과 마음이 쉬는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맛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될 때 독서는 위험해진다.”ㅡ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에서‘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민음사)는 영국 굴지의 사상가이자 사회 운동가 존 러스킨과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학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표 작품 3편을 번역한 책이다.존 러스킨에게 ‘책’은 소중했다. 곧 사라질 형편없는 책을 논외로 하고도, 그는 좋은 책 중에서 곧 사라지는 좋은 책을 기어이 거둬 냈다. 지식을 전달하는 유익한 책, 지각 있는 친구의 말처럼 유쾌한 여행담, 재치있는 토론, 소설 형식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아까워도 솎아 내고, 그제서야 남은 오래 두고 볼 좋은 책의 가치를 그는 역설한다. ‘참깨 : 왕들의 보물’은 잠재적 독자로 하여금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외쳐 보기를 권한다.목소리를 증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소리를 보존할 목적으로 쓰인 책, 작가 내면의 진실한 영감을 총동원해서 그러모은 한 사람의 비문(碑文) 같은 책이 건네는 호의와 교훈을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한편 ‘백합 : 여왕들의 화원’에서 러스킨은 당시의 소외된 여성 교육을 독려하는데, 이때 근거로 삼는 출처 역시 책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월터 스콧의 문학을 독파하며 남자 영웅의 부재, 여자 주인공의 지혜와 미덕을 도출해 내는 데서 고전의 독서가 사회적 감각의 회복제이자 개인의 행동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오랜 가치를 입증해 준다. 독서로써 무감동을 벗어나 감정의 동요를 경험하고 공감을 회복하자는 러스킨의 고루할 정도로 순박한 제안은 가치 중립적인 텍스트의 물량에 압도당하기 바쁜 21세기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언어도, 사는 지역도 달랐으나 러스킨의 예술론, 취향과 삶의 방식 면면까지 고무됐던 마르셀 프루스트는 자기 나라에 러스킨의 메시지를 소개할 목적으로 ‘참깨와 백합’을 번역한다. 그때 옮긴이로서 붙인 서문이 우리가 잘 아는 에세이 ‘독서에 관하여’다. 어린 시절부터 책벌레였고, 학습보다는 자유로운 독서의 취미를 일찍부터 들였던 프루스트에게 책이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프루스트는 러스킨을 옮기면서 새로운 반감을 마주한다. 책은 씌인 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데 가치가 있으며, 정작 수용자가 얻는 책의 효용은 내용 자체가 아니라 독서를 둘러싼 개인적인 체험·경험임을 깨달은 것이다.러스킨의 ‘씌인 책’과 프루스트의 ‘읽히는 책’ 경험이 한 권의 책에서 가능함은 물론이다. 러스킨이 돼 이 책을 쓴 절박한 동기와 선한 의지를 음미해 봄과 동시에, 프루스트가 되어 “진정 우습다고 생각되는 말에만 웃”고, 이 책이 “유명하건 상관없이 바로 제자리에 갖다 꽂”는 것도 우리에게는 자유다. 이 자유 속에서 무엇을 기억할지, 무엇을 취할지는 우리 독자의 몫일 터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1-03

삶에 찌든 뭇사람에 즐거움 준 포항 기인 권달삼 이야기

“권달삼은 돈이 없었다. 하도 가난해서 제사 모실 형편이 안 될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삿날을 그냥 넘길 수도 없고 해서 고민하다가 돈 안 들이고 제사 모시는 방법을 그의 번뜩이는 머리로 떠올렸다. 지방을 하나 써서 흥해 시장으로 달려갔다. 먼저 과일전에 가서 사과와 배 앞에 지방을 붙여 놓고는 절을 한 다음에, 어물전으로 옮겨 조기 앞에 지방을 붙여 놓고는 절을 하는 방법으로 제사를 지냈다 한다”-‘포항의 기인 권달삼 이야기’중 ‘시장 바닥에서 지내는 제사’포항에 살았던 전설적 인물 권달삼(1881∼1952)은 우리나라에서 기인으로 명성을 가진 봉이 김선달, 하원 정수동에 버금가는 포항지역의 해학자였다. 그는 임기응변으로 숱한 일화를 남겨 삶에 찌든 뭇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또 촌철살인의 독설과 풍자로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 이 지방에는 그의 재담과 유창한 화술로 인해 ‘산에는 산삼, 바다에는 해삼, 육지에는 달삼’이란 속설이 전해질 정도였다고 한다.포항문화원이 최근 펴낸 ‘포항의 기인 권달삼 이야기’는 민속학자 박창원씨가 지난 1988년부터 2000년까지 현지조사를 통해 17명의 제보자로부터 수집한 권달삼 이야기 55편을 실었다.이 책은 1장 권달삼과 권달삼 이야기, 2장 풀어쓴 권달삼 이야기, 3장 권달삼 전설연구, 4장 포항말로 채록한 권달삼 이야기 등 총 4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은 권달삼과 권달삼 이야기를 대략 소개하고 있으며 2장은 대표적인 권달삼 이야기 중 40편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적었다. 3장은 권달삼 전설에 대한 연구 논문을 실었으며 4장은 1990년대에 제보자로부터 녹취한 자료 55편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몇 가지만 읽어 봐도 그의 일화 속에 담긴 해학과 재치에 저절로 미소짓게 된다. 특히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들에게 봉이 김선달을 뺨치는듯한 그의 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온다.특히 권달삼 이야기 속에는 요즘 들을 수 없는 채록 당시의 포항 사투리들이 많이 섞여 있어 쏠쏠한 재미를 더해준다.사투리라는 것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촌스럽고 품위 없는 말이라는 편견도 있지만 그 지역의 정서와 문화가 그대로 녹아있는 친근한 언어이기에 사투리 자료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박창원씨는 “최근 권달삼과 같은 기인으로 유명한 김선달 이야기가 영화로 제작되고, 정만서나 방학중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되거나 스토리텔링의 자료로 쓰이는데 비해 권달삼 이야기는 연구나 활용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아쉬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포항문화원에서 ‘일월문화’ 시리즈로 ‘권달삼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묶게 된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01-03

민족주의 지식인 안재홍의 생애와 사상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학자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이끈 ‘고절(高節)의 국사(國士)’ 민세 안재홍의 삶을 그린 ‘안재홍 평전’(민음사)이 출간됐다.한국 정치사상 연구에 매진해 왔으며 안재홍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한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의 질곡을 거치며 민족의 독립와 통일민족국가 건설에 힘썼던 안재홍의 삶을 통해 고결한 정치 리더십의 전범을 보여 준다. 이 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최초로 독도 현지조사를 실시한 내용 등 안재홍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고루 담았으며, 단순히 생애를 전달함에 그치지 않고 두 편의 논문(‘1930년대의 안재홍의 문화건설론 연구’,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역사의식과 평화통일의 과제’)을 통해 안재홍의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1891년(고종 28년)에 태어나 구한말의 기울어 가는 국운과 불안한 시국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안재홍은 일찍이 글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는 문장명세(文章鳴世)의 뜻을 세웠다. 주권을 빼앗긴 엄혹한 시대에 그는 시대일보 논설위원과 조선일보 주필, 부사장, 사장을 거치며 직설탁견(直說卓見)의 날카로운 논설로 일제를 비판하고 청년외교단사건, 신간회 창립,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에 관여하며 정치·사회·문화 다방면에서 국내 항일운동의 맥을 이어 갔다. 해방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부위원장, 국민당 당수, 좌우합작 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미군정의 민정장관, 한성일보 사장 등으로 활약하며 분단 시대의 고단한 정치 과정에서 통일국가의 건설을 위해 진력했다. 그러나 민족의 평화통일과 진정한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안재홍의 정치 활동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당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 발발과 뒤이은 납북으로 중단되고 말았다.1965년 3·1절에 눈을 감을 때까지 안재홍의 일생은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일관된 삶이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부터 여타 많은 보수적 인사들과 달리 공산주의 세력과의 접촉도 두려워 않은 참된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자주 노선을 기반으로 한 안재홍의 민공협동(民共協同) 노력은 1920년대 신간회 활동과 해방 후 건준 및 좌우합작위원회 참여로 나타났다. 또 그는 미군정기에 어지간한 정치인이라면 모두 꺼려한 민정장관으로 일하면서 극좌와 극우를 배제하는 민족진영 중심의 통일국가 건국을 기도했다. 납북된 후에도, 그를 대남 정치 공세에 활용하고자 하는 북한 정권의 계속된 간섭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나는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로서 여생을 생활하여야 할 것”이라며 자신의 이념을 지켰다. 이로정연한 논리와 언행일치한 처신으로 오로지 민족의 자주와 통합을 바랐던 그의 삶은 분열과 갈등을 좀체 극복하지 못하는 현재의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납북된 많은 인사들이 그렇듯이 안재홍도 분단의 파고에 휩쓸려 한동안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안재홍의 저술을 모으는 작업이 추진되고 1970년대 후반 해방 전후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정치학, 역사학, 언론학, 사회학, 교육학 등 여러 분야에서 안재홍을 연구한 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인 정윤재 교수 역시 일찌감치 안재홍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30여 년간 안재홍과 관련한 다수의 자료를 발굴하고 수합해 그의 활동과 사상을 분석해 온 정치학자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행해진 조사와 연구를 망라해 언론인으로서, 항일운동가로서, 그리고 국사학자로서 안재홍의 생애를 촘촘히 조명하며, 국제적 민족주의론과 다사리이념으로 대표되는 정치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하고 있다.민세 안재홍안재홍의 국제적 민족주의론과 다사리이념은 해방 이후의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좌파 급진 혁명을 제어하고 친일 협력자들의 정치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었다.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과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대한 비판적 대응에서 비롯한 ‘국제적 민족주의’는 정치적 자주독립과 문화적 독자성을 전제로 하는 국제 교류와 이를 통한 세계 평화의 구현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또한 ‘다사리이념’은 “모두를 다 사리어(말하게 하여) 정치에 참여케 하는” 정치 방식으로서의 진백(盡白)과 “복지를 증진시켜 모두를 다 살리는” 정치 목표로서의 진생(盡生)의 가치를 묘합해 한국 민주주의 정치 과정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자 한 시도였다. 이러한 독자적 사상을 바탕으로 통일된 민주공화국 건설을 위해 분투한 안재홍은 민족 구성원 모두를 건강한 공동체로 끌어안고자 했던 ‘순정우익(純正右翼)’, 즉 순수하고 바른 우익의 모범을 보인 정치 지도자이자 사상가였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12-27

유교,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접근 방법

우리나라는 유교문화가 사회 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사회다. 예절과 효 등을 중시하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등의 문화는 유교의 그것이 틀림없다. 이렇듯 우리 생활에 유교가 부지불식간에 배어있지만 정작 유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또한 사실이다.타임과 월스트리트저널의 특파원으로서 20년 가까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자가 만든 세상’의 저자 마이클 슈먼은 한국을‘세계에서 가장 유교적인 나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유교의 원조국인 중국을 제치고 유교문화의 대표가 된 한국. ‘유교적’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유교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수필가이자 정형외과 전문의(상주시립요양병원) 이원락(74)씨는 최근 펴낸 저서 ‘유교문화의 미래전망’(중문출판사)에서 중국과 달리 건국 이래 ‘한결같이 유교적인 국가’였던 한국사회에서 유교는 오늘에 이어 미래에도 살아있을 우리의 전통이라고 강조한다.이씨는 “서양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공동체 중심, 인륜중심, 상대의 처지를 먼저 고려하는 문화로 이뤄진 유교적 세상에서 후손들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펴내게 됐다”고 말했다.그는 “세상을 더 보람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접근 방법이 유교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가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에 더해 예(禮)와 더불어 우리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유교”라고 설명했다.책은 ‘유교란’을 시작으로 ‘유교와 환경’, ‘삶과 유교’, ‘노년에서 나의 생각들’등 총 5장에 걸쳐 299쪽으로 엮어졌다.이씨는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이타(利他)적인 삶이 유교의 생명이고 시대적 가치라고 주장한다.공자가 천명(天命)을 운위(云謂)하면서 그토록 제창한 인의(仁義)라는 두 글자는 도덕성의 대표이고 그 속에는 인류의 소망과 꿈이 깃들어 있다는 것. 세계의 평화와 대의, 정론(正論)이 그 속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