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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겨우내 참아오다 기어이 터졌어라”

“겨우내/ 참아오다/ 기어이 터졌어라// 그립다/ 다 못하여/ 발개 타는 저 볼 보소//속울음/ 얼마나/ 울어/ 저리 온통 뱄을까.//”(김락기 단시조 ‘복사꽃망울’)경북 의성 출신의 시조시인이자 자유시인인 산강 김락기 시인이 최초의 단시조집 ‘봄날’(도서출판 한아름)을 펴냈다. 저자의 창작집으로는 8번째 책이다.저자는 계절에 앞서 출간하게 된 ‘봄 날’시조집에 대해 운율 넘치는 단시조 ‘봄날의 변명’으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봄날이 그리워서//다사로운 볕살 아래/꽃 피는 날 그리워서//시삼동/넘기도 전에/‘봄 날’ 먼저 나왔네.//”천년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 고유의 대표 시가인 단시조는 시조 가운데서도 핵심적 정수라 할 수 있다. 단시조는 45자 내외의 1수로 1편이 되는 시가다. 3장 6구 12소절로 이뤄진 1편 안에 미립자에서 대우주까지 삼라만상을 다 담을 수 있다. 그런 주옥같은 단시조 89편을 모은 시조집이다.문학평론가인 신연우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산강 선생의 시조야말로 우리에게 일상에서 죽어 있던 것들이 사실은 신비한 것, 놀라운 것들임을 알려주는 따뜻한 속삭임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그 속삭임으로 우리는 꽃을, 달을, 폭포를, 얼굴을, 세월을 새롭게 보고, 듣고, 만진다. 독자가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고 평했다.저자는 문학청년 시절부터 시조와 자유시를 써 왔으며, 시조시인 겸 자유시인으로서 저널리즘에 문예 및 시사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문인이다. 시조시인 단체로 최초의 사단법인인 한국시조문학진흥회의 제4대 이사장(2014년∼2016년)을 지냈으며, 현재는 명예이사장이다. 온 국민에게 시조를 보급하고(시조의 범국민문학화), 세계인에게 시조를 알리는 일(시조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김락기 시인특히, 이 책은 저자가 캘리그라피(제자題字), 표지화, 레이아웃, 디자인, 편집 등을 손수 다하는 등 1년 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발간된 것이다. 그만큼 저자가 내용면에서뿐만 아니라 편집, 제작에 공을 들인 작품집이다. 저자는 시조문학 편집장을 거쳤으며. 디자인 공부를 했고, 문인화로 2008년 제27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입선한 바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은 한 면에 단시조 한 편이 수록될 수 있는 자그마한 크기(문고판 수준)로 제작됐다. 누구나 쉽게 포켓에 넣거나 휴대할 수 있도록 해 우리 시조를 늘 가까이에서 쉽게 보고 읊고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책 뒤에 실린 후록부문 한자어에는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 토를 달았다.판매는 여건상 서점에 배포하지 못하고, 저자가 관리하는 발행처(사단법인 한국시조문학진흥회: 010-8960-8689)를 통하거나 제작처(도서출판 한아름: 02-2268-8188)에서 보급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14

젊은예술가,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동경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정신적인 삶. 바로 이것이 대영박물관 깊숙한 곳에 있는 나와 다른 외로운 방랑자들이 스스로를 바쳐야 하는 삶일까? 언젠가 우리를 위한 보상이 있을까? 우리의 외로움은 걷힐까? 아니면 정신적인 삶 자체가 그것에 대한 보상일까? ”_‘청년 시절’94쪽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으로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존 맥스엘 쿳시(78·J. M. Coetzee)의 자전 장편소설 ‘청년 시절’(문학동네)이 번역돼 나왔다.작가 나딘 고디머와 함께 남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쿳시는 평단에서 “종달새처럼 날아올라 매처럼 쳐다보는 상상력을 지닌 작가”라는 찬사를 받아왔다. 쿳시 자전 장편소설 3부작은 ‘우리 시대 가장 과묵한 작가’로 불릴 만큼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쿳시가 자신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잔인할 만큼 솔직한 서술과 절제되면서도 폭발적인 문장으로 쏟아낸 회고록이자 소설이다. 3부작 중 두번째인 ‘청년 시절’은 혁명의 소용돌이로 혼란에 빠진 남아프리카를 떠난 쿳시가 런던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십대 시절을 다뤘으며, 국내 초역이다.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동경과 젊은 예술가의 내면을 휘젓는 모든 감정과 딜레마를 그려냈다. 쿳시의 실제 ‘삶’과 소설적 ‘허구’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을 향해 치밀하면서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스토리텔링이 돋보인다.‘청년 시절’에 나오는 존의 삶과 작가의 실제 삶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청년 시절’에서 존은 결혼하지 않고 ‘영혼의 불꽃’을 알아봐줄 여자를 찾아 시의 영감을 찾아 런던에서 방황하다가 또다른 ‘시인의 나라’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 쿳시는 런던 IBM 지사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가 결혼을 한 뒤 다시 아내와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1965년 박사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청년 시절’에는 작가의 실제 삶과 소설적 허구가 뒤섞여 있다.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기로 거의 ‘전설적인’ 쿳시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드러냈을 리가 없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품 속 내용이 ‘작가의 실제 삶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존이 처한 ‘심리적 현실’이다. 그 심리적 현실이란 젊은 예술가의 내면을 휘젓는 모든 감정과 딜레마이자 정치적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개인의 고뇌다. 쿳시는 ‘진실’을 위해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는 것도, 또한 거기에 허구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설적 ‘허구’ 때문에 ‘사실’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만을 추구했다.이를 통해 쿳시는 과거의 오점을 벗어던지고, 혹은 승화함으로써 진정한 작가로 자신을 재창조해나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그야말로 ‘진실’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윤희정기자

2018-09-14

국내 최초 고대 그리스 대표 서정시 선집 출간

국내 최초로 원문에서 번역한 고대 그리스 대표 서정시 선집 ‘고대 그리스 서정시’(민음사)가 발간됐다. 아르킬로코스, 사포, 세모니데스, 히포낙스, 솔론, 아나크레온, 시모니데스, 테오그니스, 핀다로스 등 열다섯 명 고대 그리스 대표 시인들의 서정시를 한 권에 담았다. 고대 그리스 서정시는 폴리스의 발전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했던 ‘개인’에 대한 의식과 그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운율에 맞춰 표현하며 시작됐다.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등이 신 혹은 신과 같은 형상의 영웅, 제왕, 귀족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전사를 칭송하던 신화와 서사시의 세계관에서, 개인의 일상적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서정시의 세계관으로 변화한 것이다.시인들은 각각 개성적 목소리로, 전쟁에 참여하고,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고,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예찬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실연에 슬퍼하고, 남을 욕하고, 조롱하고, 복수심에 이를 갈고, 가난을 탄식하고, 늙음을 애달파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마음을 노래한다. 분노, 사랑, 슬픔, 욕망, 공포, 혐오, 모욕감, 복수심 등 날 것의 생생한 감정이 날뛰는 시행에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정서의 고갱이”를 발견할 수 있다.최초의 서정시인이라고 불리는 아르킬로코스는 비록 방패를 내던지고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고 크게 외치며, 영예롭게 전사할 것을 권하던 사회적 통념을 비웃는다.“사람들 가운데 누구라도 죽고 나면 존경도 명성도 얻지/못하리라. 차라리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은총을/좇으리라. 가장 나쁜 것은 언제나 죽은 사람의 몫이니.”― 아르킬로코스최초의 여성 시인이자 플라톤으로부터 열 번째 ‘뮤즈’(예술의 여신)라고 불렸던 사포 역시 당시 지고의 가치였던 전쟁의 승리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이라고 노래하는 파격을 보여준다.“어떤 이들은 기병대가, 어떤 이들은 보병대가/어떤 이들은 함대가 검은 대지 위에서/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 이라/말하겠어요.”― 사포고대 그리스 서정시는 당대 그리스인들의 마음과 생활상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만큼,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들의 원형을 시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파혼한 약혼자와 그 아버지를 결국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 아르킬로코스의 악에 받친 저주와 노골적인 모욕의 표현은 근래 온라인 SNS에 넘쳐나는 악성 루머와 비방의 기원을 짐작케 한다.“분명히 알아라. 네오불레는./다른 놈이 가져가라./익을 대로 익어/처녀의 꽃송이는 시들었다./예전에 그녀에게 있던 우아함마저./그녀는 욕망을 어쩌지 못한다./색정에 미친 여인, 젊음의 끝을 보여준다./지옥에나 떨어져라.”― 아르킬로코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07

타인의 침입은 나를 변화시킨다

정밀한 구성과 세련된 분위기로 문단과 독자의 폭넓은 지지를 받아온 손보미의 두번째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우아한 밤과 고양이들’에는 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은 ‘산책’, 제6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임시교사’ 등 9편이 수록됐다.“말로 규정하지 않고 침묵으로 환기하는 스타일”(문학평론가 신형철)이라는 평을 받으며 일상의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손보미는 이번 소설집에서 불가해한 존재의 침입으로 인해 삶이 미묘하게 변화돼 가는 양상을 묘사한다. 평온했던 일상이 흔들리면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는 인물들이 새로운 자아와 관계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작가 특유의 세심하고 정갈한 문체로 담아낸다.손보미의 소설들은 주로 어떤 존재나 사건이 일상으로 틈입해오는 순간에 전개된다.‘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은 헤어진 여자친구의 집에 자꾸 담을 넘어 들어오는 고양이들을 퇴치하러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로, ‘산책’은 밤마다 외출을 나가는 아버지의 집에 딸네 부부가 느닷없이 방문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상자 사나이’는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 번은 꼭 배달되는” 상자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며, ‘고양이의 보은: 눈물의 씨앗’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눈물이 멈추지 않는, 그래서 보통의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없게 되는 사건이 계기다.“나는 가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이다.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천천히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무단 침입한 고양이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냉정한 방식으로. 어쩌면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고양이는 언제나 무단 침입하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무단 침입한 고양이들’, p. 18)손보미는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공격으로부터 늘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돼 있는 삶을 면밀히 관찰한다. 별안간의 공격은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지만 한편으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일상의 균열은 다소 우연적으로 발생하지만 그로 인한 성찰과 반성은 거의 필연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저 불이 모두 꺼지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P부인은 자신이 달려가야 하는 곳은 너무도 명백하다고 믿었었다. 그건 착각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반복되었던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지. 그녀는 항상 그게 용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는 그게 용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곤 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임시교사’, pp. 115~16)▲ 손보미 작가보모로서 젊은 부부의 아이와 노모를 맡아 그들 가족의 생활이 평안히 지속되도록 노력해온 P부인은 어느 날 그 쓸모를 다하여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그 밤 침대에 누워 P부인은 문득 생각한다. 자신이 그들에게 쏟아부었던 헌신이 어쩌면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자신이 여태껏 “용기”라고 생각한 마음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문과 회의는 곧 삶에 대한 보편적인 긍정성으로 갈음된다. “사는 건 그런 거지.” P부인은 잠들기 위해 눈을 감으며 “잘못된 일들이 언젠가 아주 조그마한 사건을 통해 한순간에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회복한다. 그것은 그녀가 지닌 고유의 낙천성이라기보다 그동안 여러 가정을 돌봤던 경험에서 건져 올린, 말하자면 삶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9-07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여라

“나는 매일 모든 것의 끝자락에 가까이 다가간다. 물론 우리 모두는 그쪽을 향해 움직인다. (….) 우리 삶의 가장자리 바로 너머에 드리운 절벽은 무시하기가 어려워진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중‘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글항아리)는 미국에서 완벽한 지성인이자 사회운동가로 존경받아온 파커 J. 파머(79)가 나이듦에 대해 탐구한 책이다. 파머는 UC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수차례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사회 운동과 공동체 교육에 헌신하며 시민멘토로 추앙받았다. 그런 가운데서 자신의 목표와 현실의 괴리 사이를 배회하며 끝없이 고뇌하는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열번째 책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파머가 나이듦에 대해 쓴 에세이 24편과 자작시를 묶었다.에세이들은 파머가 삶의 가장자리인 ‘나이듦’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일곱가지 프리즘으로 굴절시켜 본 것들이다. 책의 부제가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이다. 이글을 통해 그는 모두 극복하기 어려운 험한 절벽을 뒤에 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훈계나 교훈을 주기에 앞서 자신의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또래의 노인뿐 아니라 아직 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울림을 줘 각자가 자신의 경험에 그런 작업을 해보도록 북돋우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그는 나이 드는 우리에게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새와 나무가 삶에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듯,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파머는 “태양 아래 서서 나 자신과 타인들이 생명과 사랑으로 성숙해갈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하면서 만물 가운데 하나로 최선을 다해 매 순간 살아간다”고 얘기한다.“노화라는 중력에 맞서 싸우지 않겠다. 최대한 협력하고 싶다”고 말한다. 파머는 나이듦에 협력할 때 얻게되는 경험들도 유쾌한 문체로 들려준다.“나는 무엇인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 나 자신이다. 배반과 충성심, 실패와 성공 모두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무지이고 통찰이며, 의심이고 확신이다. 또한 나의 두려움이고 희망이다.”완전함과는 거리가 먼 생애 동안 마구잡이로 헤쳐온 오르막 내리막 길에서 삶은 여전히 최고 속도로 거칠게 펼쳐지고 있다. 붙잡고 싶은 욕망과 그로 인한 결핍은 공포를 자아낸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아름다운 것이 둘러싸고 있고, 늙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뜻이므로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싶다는 욕망도 자아낸다. 이제 나이든 저자는 너그러움을 품고 그 안으로 시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파머는 ‘현재 자기 모습 전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란 질문에 세 가지 방법을 내놓는다.첫째 젊은 세대와 접촉하라. 그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며 에너지를 얻고, 그들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원하라. 둘째, 당신이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회피하지 말고, 그것을 향해 움직여라. 벗어날 수 없다면 뛰어들라. 셋째,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자연에서 보내라. 자연은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으며 어떤 것도 배제될 필요가 없음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윤희정기자

2018-08-31

유럽 주요박물관·미술관을 통해 살펴보는 유럽사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유럽에 대한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의 보고’다. 유럽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오랜 세월 동안 형태와 기능 면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해오면서 유럽의 사회적 담론 공간이자 변화하는 생각의 탄생 공간으로서 유럽의 문화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해왔다. 서양사학자들의 모임인 통합유럽연구회가 펴낸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책과함께 펴냄)는 이러한 유럽 박물관, 미술관들의 역사적이고 사회학적인 면모를 다룬다. 단순히 세계적인 작품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이 특정 국가의 랜드마크로서 꼭 들러야 하는 관광명소로만 여겼던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역사학과 사회학의 관점으로 살펴보면 색다르게 다가온다.이 책은 유럽이 분열과 통합, 갈등과 협력 과정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진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 29곳을 통해 살펴본다. 유럽을 대표하는 곳부터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축을 맡고 있는 곳까지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책은 5부 25장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의 탄생에서부터 이데올로기의 시각적 재현 공간이던 근대, 국가의 탄생 속에서 민족적 이데올로기의 재현 공간을 거쳐 사회적 담론 공간으로 변화되는 동시대의 이야기까지, 연대를 고려하긴 했지만 단순히 시대 순으로 구분하고 나열하는 식으로 다루지 않고, 유럽의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통해 유럽과 유럽사를 가장 효율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기획의도에 맞게 다섯 주제에 따라 박물관, 미술관들을 배치했다.1부 ‘박물관의 기원’에서는 기원전 약 30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궁전에 있던 무세이온(Mouseion)을 살펴보며 최초의 박물관은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기획됐는지를 살펴본다.2부 ‘도시/로컬’에서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박물관, 파리 카르나발레박물관, 베를린 눈물의 궁전 등 해당 도시의 역사가 박물관을 통해 어떻게 표현됐는지 그 관계를 살펴본다.3부 ‘국가’에서는 파리 루브르박물관, 본 독일역사박물관, 암스테르담 네덜란드국립해양박물관 등을 다루며 각 나라들이 박물관을 통해 국가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고자 했는지를 소개한다. 4부 ‘유럽/유럽통합’에서는 베르됭·캉 양차대전기념관, 룩셈부르크 유럽쉥겐박물관, 브뤼셀 유럽역사의 집 등을 다루며 유럽이 어떻게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고, 전쟁의 상흔, 민족 갈등 등의 문제를 극복해 하나가 돼야 함을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5부 ‘미래의 박물관’에서는 디지털 도서관 형식의 신개념 박물관 ‘유로피아나 프로젝트’를 살펴보며 미래의 박물관은 어떤 성격을 띨지 조망해본다.중심주제가 박물관과 미술관인 만큼 이 책은 전시된 몇몇 특정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해당 장소의 설립 취지, 위치의 역사성과 상징성, 건물 구조의 특수성, 전시품 배치의 콘셉트, 구현하고자 하는 정체성을 다루며 박물관과 미술관의 성격을 폭넓게 살펴본다.각 장들은 통일된 형식과 관점을 공유하며 해당 박물관과 미술관에 내재된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전체 유럽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려낸다./윤희정기자

2018-08-31

우리학문의 탈식민적 지식 생산에 대하여

▲ 피에르 부르디외‘아틀라스의 발’(문학과지성사)은‘현대 사회학의 거장’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의 삶과 사상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부르디외는 사르트르, 바르트, 푸코, 데리다와 함께 프랑스 사상의 보루였으며, 사회철학이 독일의 하버마스와 영국의 기든스에 의해 양분된 상황에서 가장 프랑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의 문제를 개입시킴으로써 사회학의 지평을 넓힌 학자라고 할 수 있다.부르디외 이론을 번역, 소개해온 문화연구자 이상길 교수의 20여 년간의 연구가 농축된 이 책은 부르디외의 삶과 학문 세계를 긴밀하게 연결하며 부르디외가 제시한 사회학적 방법론을 부르디외 자신에게 적용시켜 쓴 새로운 ‘사회학적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 이상길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부르디외의 수용 문제를 성찰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했다.한 통계에 의하면, 부르디외는 푸코, 하버마스, 기든스, 고프먼을 훨씬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회학자로 꼽혔으며, 매년 다양한 학문 분과에서 부르디외를 인용하거나 부르디외를 다룬 단행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장’ ‘하비투스’ ‘구별짓기’와 같은 부르디외의 개념들이 일상적으로 쓰이게 됐으며, 대부분의 저작이 우리말로 옮겨져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연구의 지체 상황은 의미심장하다는 평가다.이 책의 1부 ‘지식인의 초상’에서는 부르디외의 생애와 학문 세계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과 당대 프랑스의 정치·역사·학문적 상황을 분석하며 부르디외의 지적 기획이 그가 거쳤던 사회적 궤적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진화해갔는지를 조명한다.저자는 부르디외의 지적 하비투스를 재구성함으로써, ‘사회학적 자기 성찰’ ‘연구 경계의 위반’ ‘철학과 사회과학의 융합’ ‘이분법적 사유 관행에 대한 거부’ 등 그를 사회학의 대가로 만든 연구 노동의 원리들이 어떤 맥락 속에서 발전한 것인지 살펴본다.‘장champ’은 다양한 분야의 경험연구에 빈번하게 활용되는, 부르디외의 철학을 특징짓는 핵심 개념 중 하나다. 부르디외는 한 저서에서 장에 대한 일반 이론을 구축해 출간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었는데, 이는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2부 ‘이론적 지평’에서는 장이론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며, 이를 경험연구에 투입하고자 할 때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을 검토함으로써, 분석 틀로서 장이론이 갖는 난점들과 그 보완 방향을 모색한다. 또한 장이론이 내포하는 투쟁 중심적 사회관과 공리주의적 인간관의 면모를 살펴보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 부르디외의 시도가 어떤 딜레마에 봉착하는지 이야기한다. 3부 ‘수용의 단층’은 부르디외 사회학을 ‘서구 이론’으로 대상화해, 우리 학계가 부르디외의 이론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검토한다. 특히 부르디외의 저작 중 어떤 책이 어떤 식으로 소개됐고 번역에서 제외된 글은 무엇인지, 번역자는 어떠한 이들이며 번역을 통해 어떠한 상징자본을 얻게 되는지, 부르디외의 책들을 출판한 출판사들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는지 등 부르디외 저서의 출간과 관련된 전후의 사정을 꼼꼼하게 되짚으며 번역을 통해 드러나는 사상의 ‘굴절’ 양상을 관찰하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다.국내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의 유입과 맞물려 서구 이론을 무분별하게 추종하는 태도와 현실과 괴리된 이론의 만연이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르며 우리 학문의 ‘종속성’에 대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저자는 학문의 종속적 구조 개선을 위해 필요한 선결 과제들 중 하나가 이론문화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라고 주장하며,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체계적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지적 수단을 제공한다고 이야기한다. 부르디외가 마지막 강의에서 썼던 비유를 빌리자면, 성찰성이란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이다. 우리가 성찰성을 그토록 중시한 부르디외의 이론에 충실한 방식으로 그것에 관해 말하려면, 그 이론을 논의하는 우리의 두 발이 과연 어디를 어떻게 딛고 있는지 끈질기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시각에서 부르디외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역설적이지만 우리 학계가 탈식민적 지식 생산을 위한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을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과정으로서 의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24

한국 작가 134인의 서평과 함께 읽는 세계문학 고전

출판사 문학동네는 세계문학 고전을 읽은 한국 작가들의 서평을 엮어낸 책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을 증보판으로 새롭게 펴냈다.문학동네는 앞서 한국 대표 작가들이 좋아하는 세계문학 작품 감상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네이버 카페를 운영하고 그 결과물을 2013년 책으로 처음 출간한 바 있다. 초판은 ‘안나 카레니나’부터 ‘은둔자’(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0)까지 총 97편의 서평을 담았다.이번 증보판은 기존 판본에 ‘불타버린 지도’(세계문학전집 111)부터 ‘제5도살장’(세계문학전집 150)까지 서평 34편을 더했다.이 책에 함께한 작가는 모두 134명. 황석영, 황정은, 편혜영, 정지돈, 정세랑, 임현, 이기호, 손보미, 성석제, 김영하, 김애란 등 소설가와 허수경, 정끝별, 이병률, 심보선, 유희경, 박연준 등 시인, 황종연, 신형철, 서영채, 김형중, 권희철 등 문학평론가, 사회학자 정수복, 김홍중, 싱어송라이터 루시드 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대를 아우르는 작가들이 참여했다.여러 분야의 많은 필자들이 참여한 만큼 비평, 에세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쓴 짧은 소설, 등장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작품 구절을 따서 지은 시 등 글의 형식 또한 필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며, 각 필자가 어떤 작품을 골랐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남다르다.감각적인 스타일이 돋보이는 소설가 백영옥은 고전 중의 고전‘안나 카레니나’를, 가만가만 내면을 응시하는 소설가 이혜경은 소설가 김영하의 번역으로 만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거침없고 솔직한 시어로 자기만의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 김민정은 영문학의 마녀로 불리는 앤절라 카터의 소설집 ‘피로 물든 방’을, 불행과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 깊이 공감하는 소설가 김애란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의 참상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킨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골랐다. 이번 증보판에는 사소한 풍경에서 삶의 비의를 포착해내는 시인 이규리가 읽은 페소아의 고백적 단상 ‘불안의 책’,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간직한 소설가 최은영이 읽은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걸작 ‘디어 라이프’ 등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모든 글의 끝에는 해당 작품과 원작자 소개를 덧붙여 독자의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돕고자 했다. /윤희정기자

2018-08-24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함께했다

“보람있는 삶이란 이웃과 사회에 대한 ‘사랑이 있는 의무’에서 온다. 그 열매는 주는 즐거움과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즐거움이다. 받기만하는 즐거움보다 찾아서 누리는 즐거움은 높은 차원의 행복이다. 그러나 베푸는 즐거움과 그 대가로 주어지는 즐거움은 가장 높은 차원의 즐거움이다.” (‘행복 예습’p.56)한국 1세대 철학자이자 명수필가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최근 에세이 ‘행복 예습’(덴스토리 출판사)을 펴냈다.평남 대동에서 1920년에 태어나 한국 나이로 99세, 백수(白壽)를 맞은 김 명예교수는 100세가 코앞인 요즘도 일주일에 두어 번 강연을 하고, 신문사 두 곳에 칼럼을 연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지난 2월 과거에 쓴 수필을 모아 출간한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한 저자는 이번 책에서 행복에 관한 단상을 본격적으로 풀어놓는다.책은 크게 4가지 주제로 나뉜다.행복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행복의 조건’, 저자가 꼽은 행복의 가장 큰 원천 중 하나인 ‘일하는 기쁨’,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들’, 그리고 저자의 인생 찬가인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노라’이다.담백하면서도 사색이 깃든 저자의 글은 때로는 우리를 미소 짓게 하고, 때로는 인생의 의미를 묻게끔 이끌어준다.▲ 김형석 교수저자는 장수하며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다고 설명한다.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고, 정신적 여유와 독서를 즐기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것도 공통점이다.그는 과거와 미래에서 행복을 찾는 태도를 지양하고, 현재에 행복이 머물도록 연습하라고 조언한다.과거에 매몰되면 자유와 행복을 창출하는 적극성이 약화하고, 성공을 꿈꾸며 치열한 경쟁 속에 살면 현재를 내실 없이 빼앗긴다는 것이다.저자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행복의 원천은 바로 사랑. 그는 “그는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행복이 함께했다는 사실을 체험했다”며 “사랑의 척도가 그대로 행복의 기준이 되곤 했다”고 털어놓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17

예민한 두 사춘기 소년의 마음 속 얘기 들여다보기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로제 마르탱 뒤 가르(1881∼1958)는 193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20세기 전반의 사회사를 정신적 맥락에서 거대한 벽화로 재현해낸 작가다.민음사는 최근 그의 대표작 ‘티보 가의 사람들’ 첫 권에 해당하는 ‘회색 노트’(민음사)를 출간했다.지난 2000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정지영 교수가 필생의 역작으로 선보였던 ‘티보 가의 사람들’을 가볍고 읽기 쉬운 쏜살문고로 다시 정리해 선보인다.‘티보 가의 사람들’은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등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거장들이 입을 모아 격찬한 작품으로, 웅대한 대하소설의 시발점이자 일종의 교양 소설 혹은 성장 소설이다.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나 억압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 성장한 앙투안과 자크 티보 형제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자유분방한 프로테스탄트 집안의 다니엘과 자크가 교류하면서 빚어내는 우정과 영혼의 교감을 들여다볼 수 있다.완전히 상반된 집안 출신인 둘은 남몰래 우정을 나눈다.이들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둘이 공유하는 ‘회색 노트’다.‘회색 노트’를 통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인생의 고뇌와 방황, 정열과 반항의 충동을 절절히 공감하고, 또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8-17

거장이 꼽은 인류 문명의 위대한 순간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1885∼1981)의 명저 두 권이 국내 번역 출간됐다. 민음사는 최근 불후의 명저 ‘철학 이야기’와 ‘문명 이야기’를 통해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을 철학과 역사의 세계로 안내한 윌 듀런트의‘위대한 사상들’과 ‘노년에 대하여’를 펴냈다.‘위대한 사상들’은 윌 듀런트가 선정한 인류 문명의 ‘위대한’ 순간들의 목록이 한 권의 책에 담겼다. 교육을 위한 최고의 책 100권부터 위대한 사상가 10인, 위대한 시인 10인, 인류 진보의 최고봉과 세계사의 결정적인 연도들까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의 모음집이라 할 만하다.이 책 ‘위대한 사상들’에서 듀런트는 지식 소매상의 원조답게 공자와 볼테르, 단테와 키츠, 뉴턴과 다윈을 가로지르며 사상과 문화의 지형도를 그려 보인다. 독자들은 거장의 섬세한 숨결로 살아난 천재들의 업적을 통해 인류의 빛나는 지적 유산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위대한 사상가 10명, 위대한 시인 10명, 교육을 위한 최고의 책 100권, 인류 진보의 최고봉 10가지, 세계사의 결정적인 연도 12개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듀런트는 위대한 사상가 10명으로 공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코페르니쿠스, 프랜시스 베이컨, 아이작 뉴턴, 볼테르, 임마누엘 칸트, 찰스 다윈을 꼽는다.뉴욕 타임스에서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꼽은 듀런트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문명사학자다. 또한 지식과 교육,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일생 동안 대중 강연과 저술 활동에 헌신한 작가이기도 했다. 듀런트는 가톨릭 신앙과 사회주의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며 여러 사상을 탐색하던 시기에 출세작 ‘철학 이야기’를 집필했다. 스스로의 철학적 실존적 고민이 배경이 됐을, 삶과 지식이 어우러진 이 매력적인 철학 입문서에 대중의 호응도 엄청났다. ‘철학 이야기’의 대성공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진 후에는 50여 년 동안 ‘문명 이야기’집필에 몰두했다. 총 11권, 1만 페이지에 1만 년 인류 문명사를 담은 이 기념비적 대작은 제1권‘동양 문명’부터 마지막 ‘나폴레옹의 시대’까지 출간될 때마다 어김없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노년에 대하여’는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미공개 원고를 묶은 사실상 마지막 저서다.▲ 윌 듀런트청춘, 중년, 노년, 죽음, 종교, 재림, 도덕, 인종, 여성, 전쟁, 예술, 과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단상을 수록했다. 듀런트 사후에 소재를 알 수 없어 거의 사라질 뻔했다가 30여 년이 지나 극적으로 발견된 원고들이다. 스물두 편의 짤막한 글은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신과 도덕, 전쟁과 정치, 예술과 교육 등 인생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20여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그중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고 마침내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은” 듀런트 만년의 아쉬움과 홀가분함을 살릴 수 있도록 ‘노년에 대하여’를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사람을 위해 대가가 남긴 정제된 지혜의 메시지를 만날 수 있다.‘노년에 대하여’를 통해 듀런트는 유연하고도 균형 잡힌 사색의 결을 보여 준다. 청춘의 성급함을 경계하면서도 그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만들어 내는 변화를 간과하지 않으며, 노년에 깨닫는 지혜를 칭송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10

고요한 움직임으로 감각을 일깨우는 소설집

▲ 김유진“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면 몸속 깊은 곳에서 즉각적으로 온기가 피어났다. 마치 고통에 반응하는 엔도르핀처럼, 솟아난 온기는 아담한 동굴의 형태로 그를 에워쌌다. 동굴의 내부는 오래전 마주잡은 K의 손바닥만큼이나 부드럽고 따듯해, 태희는 그 안에서 안전하게 고독을 즐길 수 있었다. 그즈음 그가 읽는 책에는 유폐와 황홀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곤 했다.”(‘보이지 않는 정원’중)세련되고 강렬한 이미지와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으로 인상적인 소설세계를 꾸려나가고 있다는 평을 받는 작가 김유진(37)씨가 세번째 소설집 ‘보이지 않는 정원’(문학동네)을 펴냈다.이번 소설집에는“비극을 겪은 이후의 상당히 강렬하고, 그러면서 할 얘기는 다 하는 세련된 소설”(문학평론가 신수정)이라는 호평을 받은 ‘비극 이후’를 비롯해 2012년 여름부터 올해 봄까지 꾸준히 쓴 총 여덟 편의 소설이 실렸다.문학평론가 김나영은 “(김유진의 소설은) 말(언어)로 쓰이고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몸짓과 소리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 의미를 증폭시키는 이야기”라고 평가했다.젊은작가상과 황순원신진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음악, 무용, 미술과 관련한 풍부한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는 그의 소설을 통해 독자의 감각을 더 예민하게 일깨운다.소설집 첫머리에 놓인‘비극 이후’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이륙한 비행기 안의 상황을 묘사하며 시작된다. “다른 비행기는 결항이라면서 왜 네 것만 아니야? 그러다 사고라고 나면 어쩌라고 그래?”라며 불안해하는 엄마에게 수인은 “죽으면 뭘 어떻게 해, 할 수 없지”라고 대꾸할 뿐이다. 수인이 죽음에 초연할 수 있는 건, 이번 여행이 연인과 이별한 뒤 충동적으로 떠난 것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추락할 듯 기체가 급강하하기 시작하자, 막연하게 상상했던 죽음의 모습은 생생하고 강렬하게 수인의 몸을 통과한다. 자신도 놀랄 만큼 큰 소리로 “무서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목적지에 도착하자 비는 그쳐 있지만, 빽빽한 안개로 둘러싸인 사방은 비행기 안과 다를 바 없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현재의 상황은 옛 애인을 애도하는 혹은 애도할 수 없는 ‘비극 이후’의 시간이 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공간 안으로 독자를 강하게 끌어당긴다.연인의 죽음 혹은 연인과의 이별 때문에 혼자 남게 된 인물들뿐만 아니라 “홀로이고자 하는 충동”으로 ‘혼자 됨’을 선택한 인물의 모습 또한 이번 소설집의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다. 표제작 ‘보이지 않는 정원’은 ‘두 사람’이 아니라 ‘혼자서’ 하는 사랑의 풍경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완만한 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그 앞으로는 강이 끝없이 펼쳐지는 마을, 아름답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고요한 이곳에서 나고 자란 ‘태희’는 어머니를 도와 민박 일을 하며 지낸다. 이 조용하던 공간에 소설가 오정이 머물게 되면서, 평화롭던 태희의 일상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혼자 있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나 강렬할 때 우리는 어떤 선택까지 하게 될까. ‘보이지 않는 정원’은 그 선택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타인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정하고 고요한 공간과 대조해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10

본의에 충실하되 이해하기 쉽게

“핵심을 아는 대가는 어려운 원리도 쉽게 푸는 힘이 있다”중국의 3대 석학 중 한 명인 장치청의‘주역 완전해석’(상)(판미동)이 번역 출간됐다.저자는‘주역’이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전문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돼 왔고, 또 그 과정에서 역학이 풍성하게 발전할 수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어떤 방법으로 해석을 하든지 원래의 뜻은 결코 변형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학계에 통용되는 정통 판본인 ‘주역정의(周易正義)’를 원전 해석의 근거로 삼았으며, 이정조의 ‘주역집해(周易集解)’, 정이의 ‘이천역전(伊川易傳)’, 주희의 ‘주역본의(周易本義)’ 등 역사적으로 저명한 ‘주역’ 학자들의 해석을 폭넓게 소개해 독자들이 직접 판단할 수 있게끔 돕는다. 형훈과 성훈 등 고대의 한자를 해석하는 법을 총동원해 ‘주역’의 본의에 충실히 다가가는 한편, TV에서 선보인 강연의 경험을 살려 이를 좀 더 쉽고 명쾌하게 전달할 뿐만 아니라, 지난 30년간 ‘주역’을 삶에 활용해 실천하는 가운데 얻은 깨달음들을 소개해 변화에 대응하는 원리, 길함을 따르고 화를 피해 가는 지혜를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또한 저자 본인이 개발한 독창적인 개념인 ‘입정관상법(入靜觀象法)’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공개하기도 했다.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문명’ ‘문화’ ‘인문’이라는 말은 모두 ‘주역’에서 유래했다. 비괘(賁卦)의 ‘단전’에서는 “(강유교착) 천문야. 문명이지 인문야. 관호천문이찰시변 관호인문이화성천하[(剛柔交錯) 天文也. 文明以止 人文也. 觀乎天文以察時變 觀乎人文以化成天下.]”라는 말이 나온다.(상권 p.542~544) 이는 “(강유가 뒤섞이는 것) 이것이 천문이고, 문명으로서 그치게 하니 이것이 인문이다. 천문을 관찰하여 사시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교화하여 이룬다”는 뜻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뒤섞이는 것이 하늘의 문채(文彩) 즉 ‘천문(天文)’이라면, 인간 사이에서 밝고 맑은 마음이 있어서 예의에 머무르는 것이 곧 ‘인문(人文)’이라는 말이다. 또한 태괘(泰卦)의 “위아래가 사귀어 그 뜻이 같아진다.(上下交而其志同也.)”(상권 p.393)에서 ‘뜻의 방향이 같은 무리’라는 뜻의 ‘동지(同志)’라는 말이 유래했고, 혁괘와 정괘에서 옛것을 뜯어고쳐 솥을 새것으로 바꾼다는 뜻의 ‘혁고정신(革故鼎新)’(하권 p.250)이라는 성어도 주역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처럼 주역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사유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정치, 윤리, 종교, 문학, 예술, 경제, 군사, 전통 천문학, 수학, 역법, 음률, 의학, 농사학, 화학, 물리학 등의 분야에 두루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주역에 녹아 있는 만물에 대한 통찰, 이성적 사유와 삶의 경험, 위기의식이 담긴 인생의 지혜 등은 동양철학 사상과 문화의 원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에 저자는 ‘주역’은 “인류 문화 역사의 중심축이 되는 시기인 기원전 500년경, 부호와 문자 시스템이 어우러져 탄생한 역작”이자 “중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유가와 도가 학파에서 동시에 추앙 받는 경전” “중국 과학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생명과학 분야 모두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고전”이라며 그 의의를 설명한다. 또한 30년간 쌓아 온 유 · 불 · 선을 아우르는 지식과 깨달음을 통해 ‘주역’의 핵심을 통찰하며, 역사 속의 사건과 오늘날의 사례를 접목하고 그것을 ‘주역’ 큰 뜻에 비춰 풀이해 고전의 가르침을 현재의 생생한 지혜로 되살린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03

인기를 얻을 것인가, 호감을 줄 것인가

미치 프린스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교수(임상심리학과)는‘모두가 인기를 원한다’(위즈덤하우스 펴냄)에서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얻고 싶다면 인기를 향한 갈망을 이해하고 제대로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미치 프린스틴 교수는 인기가 유명 스타나 셀러브리티, 정치인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가치가 아니며, 보편적인 인간의 본능이라고 강조한다. 이 본능은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사랑, 성공, 몸과 마음의 건강, 더 나아가서는 행복까지 좌우할 수 있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기를 향한 욕망을 조절하기는커녕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답답해하며 괴로워한다는 것.저자는 혼자가 편한 사람이든, 어디서나 주목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든 인기를 향한 갈망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기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 저자는 인기를 ‘지위(status)’와 ‘호감(likability)’으로 나누어 인기의 속성과 인간의 심리를 분석한다. 첫 번째 유형인 지위는 그 사람이 유명한지, 많은 사람들에게 모방의 대상이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미치 프린스틴은 이 유형의 인기만 추구하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기의 유형은 호감이라고 말한다. 호감은 친근하고 믿을 만한 사람, 함께 시간을 보내면 즐거운 사람들의 특성이다.어떤 유형의 인기를 추구했는지, 호감을 얻는 데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따라 어떻게 삶이 변화했는지 추적한 연구 결과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인기의 강력한 영향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알려준다. 특히 어디서나 호감을 얻는 사람들의 특징과 그들이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법을 보여주는 다양한 임상 실험과 연구들은 평소 인간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03

지옥같은 세계… 그것을 이길 사랑을 노래한다면

‘황금빛 모서리’‘이탈한 자가 문득’등으로 오랜 시간 널리 사랑받아온 김중식 시인이 두번째 시집 ‘울지도 못했다’를 펴냈다. 그는 다소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회자된 시집 ‘황금빛 모서리’( 1993)로 독자에게 여전히 익숙한 시인이다. 첫 시집을 탈고하고 1997년 언론사에 입사했던 김종식은 2007년부터 국정홍보처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통령 비서관실에서 뛰어난 문장력과 정치 감각으로 연설문 작성을 맡기도 했던 그는, 이후 2012년부터 약 3년 반 동안 주 이란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문화홍보관으로도 재직했다. 시집 ‘울지도 못했다’는 이전 김중식의 시 세계가 집중한 암담한 현실 인식 위에 그간의 다양한 생활 경험에서 비롯한 낙관성이 더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김 시인은 이 세계를 지옥이라고 진단했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랑을 노래했기에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시인은 이 세상, 곧 지옥의 세계를 면밀히 관찰한 결과 천국이 저 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충만해 있다면, 바로 지금 이곳이 천국과 같음을 노래한다. 머물러도 떠돌아도 사랑이 있다면 바로 그 머물고 있는 그곳이 천국이었던 것이다.1990년대 당시 시집 ‘황금빛 모서리’는 한국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시집으로 손꼽힌다. 그의 시는 매우 실험적인 듯하면서도 시의 전통을 버리지 않았고, 시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자유로웠다. 다소 자학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시들이 담겼지만, 그때부터 생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남달라 “따뜻한 비관주의자”(문학평론가 강상희)라고 명명되기도 했다.“사막처럼 끝없고 지옥처럼 끓어오르는 생,/그러나 “풀잎은 노래한다”/혁명이 아니면 사치였던 청춘/뱃가죽에 불붙도록 식솔과 기어온 생/돌아갈 곳 없어도 가고 싶은 데가 많아서/안 가본 데는 있어도 못 가본 덴 없었으나/독사 대가리 세워서 밀려오는 모래 쓰나미여,/바다는 또 어느 물 위에 떠 있는 것인가/듣도 보도 못 한 물결이 옛 기슭을 기어오르고/두 눈은 침침해지고 뵈는 건 없는데/온다는 보장 없이 떠나는 건 나의 몫/신마저 버린 땅은 없으므로 풀잎은 노래한다.”2013 김중식 시‘그대는 오지 않고’ 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03

사회적·물질적 성공의 핵심요인 ‘운’

▲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로버트 H. 프랭크 지음글항아리 펴냄인문, 1만5천원누군가 사회적으로 꽤 성공했다고 말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실력, 노력 그리고 행운. 경쟁이 너무나 격렬한 우리 시대에 최종 승자 그룹 안에 끼기는 무척 힘들다. 당락을 결정짓는 실력 차는 1이지만, 그것이 안겨주는 경제적 보상은 100까지 벌어져 초기의 사소한 차이가 최종 결과에서는 엄청난 증폭을 보인다. 재능과 노력만으로 승리가 보장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세 가지 중 마지막 ‘행운’은 없어선 안 될 요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외로 ‘운’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패를 설명할 때는 운이 나빴다고 말하는 반면, 성공의 요인을 짚을 때는 행운의 영향을 과소평가한다. 정말 그럴까?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 경제학 석좌교수인 로버트 H. 프랭크는‘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글항아리)에서 운이 사회적, 물질적 성공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와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행운에 관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크리스토프의 말을 들어보자. “아낌없이 사랑해주고, 자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주고, 도서관에서 책 읽는 습관을 길러주고, 음악 레슨을 받게 해준 부모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당신들에겐 커다란 행운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그렇다. 운은 유전자와 환경이 버무려진 결과다. 당신의 부모가 따뜻하다면, 당신이 남들보다 머리가 좀더 좋다면, 외모가 썩 괜찮다면,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를 타고났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면 운을 타고난 셈이다. 왜냐하면 두둑한 보상을 받을 업무를 더 잘 수행할 가능성이 높으니까(태생적으로 의지가 약하거나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 인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경쟁사회에서 불운한 위치에 처해 있다).행운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미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녀는 유권자들에게 고도로 발달한 법 제도와 교육 시스템, 사회적 인프라가 갖춰진 나라에서 태어났으니 당신들은 운이 좋은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이 나라에서 혼자 힘으로 부를 이룬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 밖에 공장 하나를 지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기 우리가 낸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를 통해 시장으로 상품을 운반할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가르친 직원들을 고용하겠죠. 여러분의 공장은 안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금으로 유지하는 경찰과 소방관이 있기 때문입니다.”저자는“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에 있어서 행운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그리고 이들 실력주의자의 문제는 단순한 착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공공 투자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모두에게 좋은 환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세금을 내기 싫어한다는 것이다.저자는 보다 많은 사람이 행운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 환경을 개선하는 방안으로 누진소득세 대신 누진소비세를 제안한다.소비에 대한 한계세율이 올라가면 저축과 투자가 촉진되고 더 나은 사회기반시설을 위해 투자할 추가적인 세수가 창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7-27

소박한 시인의 감성이 한 폭 수채화처럼

▲ 하재영 시인“넓은 이파리를 가진 식물을 보면/어른이 된 난 아직도/이파리 하나 뚝 따서/머리에 쓰고 싶다./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도 괜찮고/따가운 햇살도 따갑지 않게/ 저쪽 길 좁아지는 곳까지/무사히 갈 것 같다./엄니 마중 올 것 같은 저쪽까지”(하재영 시‘토란 잎’) 포항의 중견시인 하재영 시인이 두 번재 시집 ‘바다는 넓은 귀를 가졌다’(도서출판 전망)를 출간했다.지난 2001년 낸 첫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이후 17년 만에 펴낸 이 시집은 총 3부로 나뉘어 총 86편과 시인의 산문이 수록돼 있다.‘봄비’‘낮잠’‘베란다 행복’‘기계장날’등 시인의 시들은 시인의 따뜻하고 소박한 감성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담았다.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시인은 이번 시집을 펴내면서 “시를 통해 나는 내 이웃의 아픔을 만나고, 자연의 경이를 발견하고, 우주의 찬란한 빛을 맞이한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시는 매일 넘겨보는 정화의 숲이며 삶을 가치롭게 안내하는 수레바퀴”라고 소감을 전했다. 시인은 또한 “나의 시 이미지는 난해함을 벗어나 삶의 길에서 찾을 수 있는 금쪽같은 감성 시어라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시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쓰는 것이 시의 질박한 맛인가를 아닌 게 아니라 향기롭게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하재영 시인은 1988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돼 등단한 이후 1989년 ‘아동문예’작품상 동시 당선,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2년 계몽사아동문학상 장편소년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동화집으로 ‘할아버지의 비밀’, ‘안경 낀 향나무’와 시집 ‘별빛의 길을 닦는 나무들’이 있다. 푸른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포항문예아카데미 원장, ‘포항문학’ 발행인으로 활동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7-27

조선말기 역사와 민중의 삶 생생하게 그려

구도소설 ‘만다라’로 유명한 김성동(71) 작가가 여섯 권 분량의 장편소설 ‘국수(國手)’(솔출판사)를 완간했다. ‘국수’는 1991년 한 일간지 연재를 거쳐 1995년 전체 4권으로 출간됐는데, 작가는 이번에 5권을 새로 쓰고 앞 1~4권도 대폭 개작해 전6권으로 완간해 내놓았다.‘국수(國手)’는 우리 고유 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역작으로써, 행간마다 우리말의 토속적이면서도 구수한 맛이 배어나는 작품으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박경리의 ‘토지’를 잇는 대서사시로 평가되고 있다.‘국수(國手)’는 바둑에서 쓰는 말로 주로 알려졌지만 애초 소리, 악기, 무예, 글씨, 그림 등 나라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나 일인자를 지칭하는 말.본 이야기를 담은 5권과 별권 1권까지 전 6권의 소설 ‘국수’는 임오군변(1882)과 갑신정변(1884) 무렵부터 동학농민운동(1894) 전야까지 각 분야 예인과 인걸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충청도 내포지방(예산·덕산·보령)을 중심으로 바둑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소년 석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이름난 화적이 되는 천하장사 천만동, 선승 백산노장과 불교 비밀결사체를 이끄는 철산화상, 동학접주 서장옥과 그의 복심 큰개, 김옥균의 정인인 기생 일매홍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김성동 작가는 “사람들이 전부 바둑소설이라고 하는데, 우리 조선은 말 하나 속에 여러 가지 뜻이 있었어요. 다층적인 거죠. ‘국수’는 손 수(手)자가 말하듯이 재주가 뛰어난 자에게 바치는 민중의 꽃다발입니다. 의술이 뛰어나도 국수, 그림을 잘 그려도 국수, 싸움을 잘 해도 국수예요. 바둑만 남고 다 사라졌어요. ‘국수’를 바둑소설이라고 하면 스스로 무식하다고 하는 것밖에 안 돼요. 바둑을 중요한 모티브로 끌고 가는 게 있지만, 각계각층의 이야기가 많아요.”라고 소개했다. 김 작가는 또 이 땅에서 사라진 우리 말을 작품 속에 되살리려 애썼다고 했다. 제6권에 해당하는 ‘國手事典(국수사전)-아름다운 조선말’은 1∼5권 작품에 사용된 풍물과 우리 옛말을 풀이해 담았다. 문학평론가인 임우기 솔 출판사 대표는 이 소설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사라지거나 오염되고 왜곡되기 전 조선의 말과 글, 전통적 생활 문화를 130년이 지난 오늘에 되살리며 생동감 넘치는 서사와 독보적이고 유장한 문장으로 그려낸 것은 실로 경이로운 문학사적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2018-07-20

심리치유 에세이와 자기계발 워크북이 한권에

내면아이 치유, 그림자 껴안기, 감정과 욕구 돌보기…. 복잡하고 고단한 현대사회를 살아내기 위해 마음치유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딘가에서 몇 번쯤은 들어본 말들일 것이다. 심리코칭 전문가 김은미의 신간 ‘마음성장학교’(한겨레출판)는 10여 년 현장 코칭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가를 찾아가지 않고도 홀로 마음치유 및 성장 프로그램을 해볼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책은 심리치유 에세이와 자기계발 워크북이 비슷한 비중으로 한 권에 담겨 있다. 전문가의 조언을 담은 ‘읽는 책’에 머무르지 않고 단계별로 직접 생각해보고 적어보고 느껴볼 수 있는 워크북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각 장별로 치유와 성장으로 가는 목표를 제시하고,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펼쳐지고, 뒤이어 다양한 코칭 도구들이 삽입돼 있다. 심리치유에 머무르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삶의 변화와 성장까지 이끌어준다.또한 어려운 심리학 이론 대신 저자가 직접 겪은 삶의 경험들을 상세히 녹여 독자들이 쉽게 감정을 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동안 현장에서 거창한 심리 이론을 설명하는 것보다 코치의 내밀한 경험을 솔직히 털어놓을 때 참가자들도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험에 따른 것이다.이외에도 10여 년간 현장에서 활용한 다양한 코칭 방법 중 참가자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둔, 검증된 도구들이 집약돼 있다. 독서, 글쓰기, 드라마 보기, 음악 듣기 등 손쉽게 실천해볼 수 있는 방법들을 포함해 존 브래드쇼의 내면아이 질문지, 자아인식도구인 ‘조하리의 창’이나 윌리엄 글라써의 욕구 강도 질문지, 모치즈키 도시타카의 보물지도 만들기 등 마음성장에 유용한 도구들이 가득 들어 있다.이 책은 ‘삶의 가치를 되찾는 8주 코칭’이라는 부제처럼 총 8주 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각 장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므로 1주부터 순차적으로 읽고 따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윤희정기자

2018-07-20

기상천외한 상상력, 삶의 비극을 웃다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날렵한 유머 감각으로 삶의 비극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소설가 박형서(46)의 다섯번째 소설집 ‘낭만주의’(문학동네)에는 ‘권태’ ‘시간의 입장에서’ ‘외톨이’ ‘거기 있나요’등 6편의 중단편이 실렸다. 소설은 어디서도 접해본 적 없는 흥미로운 사건을 구상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일찍이 삶의 권태로움을 알아차린 한 여자가 무심코 던진 불씨에 미국 대륙이 통째로 불타오르고(‘권태’) 무분별한 유전자조작으로 인해 닭의 멸종이 임박하며(‘시간의 입장에서’) 난쟁이 신분으로 태어난 뒤 몸만 커져버린 ‘키 큰 난쟁이’가 아이를 여읜 슬픔을 ‘일반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써야 한다(‘키 큰 난쟁이’). 아내가 바다에 빠져 익사하자 비탄에 잠긴 남자가 연구를 거듭해 지구상에서 바다를 날려버릴 계획을 세우며(‘외톨이’) 미시우주를 만들어 문명의 발생과 진화를 연구하던 과학자가 절대적인 힘의 유혹에 빠져 미시우주계의 신으로 군림하기도 한다(‘거기 있나요’).하지만 박형서 소설의 진정한 묘미는 이런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들에 현실성을 불어넣는 작가의 놀라운 설득력에 있다. 예를 들어 ‘권태’에서 작가는 미국의 지형과 자연환경, 화염의 물리적 성질에 입각해 불길의 진행 경로를 치밀하게 설정함으로써 미국 전역을 남김없이 태워나간다.‘외톨이’에서는 보잘것없는 외톨이였던 재봉사의 아들이 과학 이론을 짜깁기해 시대를 뒤흔들 성과를 이룩했다고 익살스럽게 눙치는가 하면 그가 발명품을 완성하기까지 수행한 연구의 과정과 동원된 이론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채워넣어 아내를 잃은 한 남자가 장엄한 바다를 상대로 복수극을 펼친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가능할 법한 서사로 만든다./윤희정기자

2018-07-13

따사로운 햇살같은 한편의 휴머니즘

“바람개비가돌고 돌아초침과 분침이 숨차다바람개비가 내 어린날의빛바랜 기억을 돌리고 있다바람개비가 물레처럼 돌면내 어린날의 편린들이 그리움으로피어난다”- 양경한 ‘바람개비’전문대구의 중진 시인인 양경한 시인이 10번째 시집 ‘찔레꽃 피는 풍경’(북스리틀)을 펴냈다.수필가, 아동문학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양 시인은 지난 40여 년 동안 시집 10권, 시조집 5권, 수필집 10권, 동시집 45권, 동화집 36권, 전기집 10권, 전래동화집 10권을 펴냈다. 경북 의성 출신으로 1985년 ‘월간 문학공간’으로 등단해 한국시문학상, 자유시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아동문학상, 영남아동문학상, 전국교원예술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제첩 파는 누이’, ‘감꽃 떨어지는 밤’, ‘저물어 가는 빗소리’, ‘배경이 되고 싶다네’, ‘꽃잎 지는 어느 봄날’등 총 5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번 시집에는 100여 편의 시가 실렸다.시들은 자연과 인간의 감성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해 시가 깊은 삶의 경륜 속에서 섬세한 감성의 발현이 따사로운 햇살같은 느낌을 주는 한편 휴머니즘이 밑바탕을 이뤄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양 시인은 “비록 작은 시집이지만 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2018-07-13

삶의 통증을 앓아내고 얻는 것 ‘사람다움’

동시대의 문학과 풍경, 사람과 사건을 견고하고 명징한 언어로 묘사해온 이영광(53)의 다섯번째 시집‘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몸의 시학에 관한 한국문학사의 가장 전위적인 실천으로 평가받았으며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수록된‘나무는 간다’(2013)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이영광은 1998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한 이래 다수의 시집과 선집을 출간하며 시대와 존재의 고통을 체화한 시들을 선보였다. 시인 신경림이 “이 땅에 사는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을 섬뜩할 만큼 치열하고 날렵하게 형상화했다”(‘제11회 미당문학상 심사평’)라고 호평한 것처럼 이영광은 참혹한 현실과 죽음의 경계에서 시적 언어로 생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부단히 애써왔다.그런 그가 이번 시집에서는 사람이 지닌 한계이자 매개인 ‘몸’을 통해 ‘사람다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이곳’에서 물러서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의 난폭과 몰이해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것은 “부서지지 않는 강인함이 아니라 막다른 곳에서 서서히 허물어지면서, 허물어짐으로써, 허물어지기 때문에 버티어내는 자의 강인함”(이장욱)을 연상시킨다. 이영광은 현실의 위협에 맞춰 변화를 꾀하기보다 자신이 지금 감지하는 통증과 몸의 언어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사람다운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고통과 상처를 기꺼이 감내해야만 비로소 사람다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없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끝없는’ 몸부림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사람’일 수 있다는 숭고한 시적 증명이자 실천의 결과를 이룩해낸다.이영광은 삶에서 일어나는 파문에 정직하게 괴로워하는 시를 써왔다. 이는 “견디면 견뎌지는 어떤 것을 조금씩 견”디며 사는 쥐의 입장을 쓴 시 ‘덫’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쥐는 “시궁창, 썩은 마음의 양식, 강철의 어둠”을 “달콤히 오독”하며 살아간다. “가도 가도 구멍뿐인 생”을 요리조리 피하다가 끝내 “견딜 수 없는 덫”에 걸려든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통증이 그를 엄습”하는 순간 놀랍게도 그는 “너무도 큰 쾌락”을 감지한다.이영광은 ‘알 것 같은 어제’(과거)와 ‘알 수 없는 오늘’(현재)이 이루는 부정교합의 층위에서 시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눈에 띄는 점은 그가 성급히 희망을 움켜쥐고 미래로 나아가기보다 앎과 알지 못함의 간극을 골똘히 응시함으로써 마비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쓴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에도 “징역 살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함으로써 “이 신기한 지옥”을 쉽사리 벗어나려 하지 않는 모습에서 반복된다(‘무인도’). 이영광에게 삶을 제대로 실감하는 일이란, 즉 사람답게 사는 일이란 어떤 확신과 오만도 없이 현실의 괴로움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예전에, 수술받고 거덜 나 무통 주살 맞고 누웠을 적인데/몸이 멍해지고 나자, 아 마음이 아픈 상태란 게 이런 거구나 싶은/순간이 오더라고, 약이 못 따라오는 곳으로 글썽이며/한참을 더 기어가야 하더라고/마음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래? 물으면,/몸이 고깃덩이가 된 뒤에 육즙처럼 비어져 나오는/그 왜,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 같은 거,/그 눈물을 마음의 통증이라 말하고 싶어”―‘마음 1’ 부분시인에게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은 “눈물”이며 “마음의 통증”이다. 이처럼 이영광은 보이지 않는 마음, 우리가 타인에게 꺼내 보여줄 수 없는 의지가 결국에는 처절한 고통을 앓고 난 이후의 몸으로 발현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능동적 통증’을 통해서만 사람이 사람이기를 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양경언의 해설처럼 이영광은 “통증을 앓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로 한 자”이며 “수인의 숙명”을 타고난 자다.양경언 문학평론가는 추천의 말에서“오직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생과 겨뤄보고자 하는 이의 고아한 악력이 고스란히 시로 남았다. 우리 중에 누군가는 그걸 먼저 하고, 그런 먼저의 시간이 시의 다른 문을 연다. 시인이란 말의 끝없는 의미는 이럴 때 새겨질 것”이라고 평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7-13

핏줄과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 비극 담아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66)의 장편소설 ‘빨강머리 여인’(민음사)이 국내 번역 출간됐다. 작가의 열 번째 장편인 이 소설은 자국인 터키 내에서만 40만부가 팔린 화제의 책이다.1985년 출간한 ‘하얀 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오르한 파묵은 이후 ‘새로운 인생’, ‘내 이름은 빨강’, ‘눈’, ‘소설과 소설가’를 출간하며 혁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작가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터키 문학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작가를 넘어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로 거듭난 그는 정치 소설, 민족주의 등 다양한 주제의 소설을 선보여 왔다.실험적이고 독창적인 구조로 동양과 서양의 문명의 충돌을 다룬 그의 문학은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문학적 토양에는 터키 역사를 모티브로 한 자신만의 작품세계가 있었다.그는 ‘빨강머리 여인’에서 가장 충격적인 서사로 꼽히는 그리스 신화이자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와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를 엮어 신화 속 아버지와 아들을 현대로 불러들인다.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질학 엔지니어 겸 건축업자가 된 한 중년 남자의 회고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을 통해 자아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여러 인물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수많은 은유적인 표현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빠르게 변화하는 이스탄불의 모습과 핏줄과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비극적인 단면이 담겨 있다.이스탄불에 사는 주인공 화자는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날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뒤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대학 준비를 위한 학비를 벌기 위해 옆집에 우물을 파러 온 기술자 우스타를 따라 이스탄불에서 30마일 떨어진 왼괴렌으로 떠난다.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된 주인공은 우물을 파는 방법과 기술을 가르쳐주고, 아들을 대하듯 갖가지 조언도 해주는 우스타를 따르게 되고 점점 그를 아버지로 느끼게 된다. 우스타 역시 그를 신뢰하며 ‘아들’이라 부르고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또 주인공은 그곳의 시내에서 빨강 머리를 한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땡볕 아래서 일을 하는 내내 그녀를 생각하며 가까워질 기회를 노린다. 어쩐 일인지 그녀 역시 그를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해준다. 유랑극단의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빨강 머리 여인은 30대 중반으로, 주인공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다. 그리고 어느 날 단둘이 있게 된 두 사람은 동침하게 된다. 다음날 수면 부족 상태로 우물 파는 일에 돌입한 주인공은 우물 꼭대기에서 흙이 꽉 찬 양동이를 놓쳐 버리는 예기치 않은 실수를 저지르고 황급히 그곳을 떠나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온다. 주인공은 이후 우스타와 있었던 일을 잊으려 애쓰며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질학 엔지니어가 된다. 첫사랑인 빨강 머리 여인과 약간 닮은 또래 여성을 만나 결혼도 한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이는 생기지 않고 부부는 자식을 키울 열정을 사업을 키우는 데 쏟는다. 함께 설립한 회사는 승승장구해 주인공은 부자가 되고 회사 광고에도 출연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알 수 없는 인력에 끌려 다시 왼괴렌을 찾은 주인공은 빨강 머리 여인을 만나고,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에 얽힌 진실을 듣게 된다. 민음사 측은“‘빨강 머리 여인’은 풍부한 은유와 복잡한 복선이 점층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역작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수수께끼를 집요하게 파고든, 미스터리의 궁금증과 스릴러의 긴장감을 주는 오르한 파묵 최고의 소설”이라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2018-07-06

빅데이터 인공지능의 시대, 역사학이 가야할 방향은?

‘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21세기, 역사학의 길을 묻다’(문학과지성사)는 역사 대중화에 힘쓴 역사학자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일상화한 시대에 역사학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한 결과를 기록한 책이다. 김기봉 교수는 역사학을 학문의 틀에 가두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 사극, 역사소설 등 대중 역사문화 전반을 아우르며 활발히 역사비평 작업을 해왔다.‘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에서 김 교수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가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한 데 대해 반기를 든다. 그는 역사를 과학과 진보 과정이라는 프레임으로 해석한 카의 이론에 반박하면서 사실(史實)은 하나여도 담론은 여럿이라는 점에서 역사에는 문학성이 있다고 설명한다.그는 역사를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나누는 오래된 체제를 청산하고, 일국사(一國史)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역사 서술을 지식이 아닌 상상력으로 해야 역사학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조언한다.저자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그의 정의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아니라 문제의 시작임을 밝히며, 카를 비롯해 국가, 민족, 사회, 진보, 혁명, 계급 등 근대의 거대 담론 역사학 프레임에 대항하는 시도로 등장한 탈근대 역사 이론을 제2부에서‘오늘의 역사학’으로 소개한다.이와 더불어 저자는 제3부에서 유사 이래 가장 크고 빠른 문명사적 변화와 연관 지어 다각도로 ‘내일의 역사학’을 전망한다. 먼저 글로벌 시대와 다문화 사회를 맞아 일제 식민사학의 유산인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나누는 3분과 체제를 청산하고, 민족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글로벌 한국사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마지막으로 새롭게 등장한 문명사의 유형인 ‘빅히스토리’를 통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도전에 직면하여 전환기를 맞은 인류 역사와 역사학의 미래에 관해 고찰한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7-06

“설머리 먼동과 형산의 노을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포항에서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신동화(65) 시인의 첫 시집 ‘달빛 소리’(좋은땅출판사)가 출간됐다. 신동화 시인은 1980년대 초 포항문학의 출범기에 ‘형산강’ 연작시와 같은 서정성 높은 시들을 발표하며 시인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저자가 향토 문화를 기반으로 쓴 시들을 수록해 시집을 발표했다.시집은 제1부 ‘형산강, 그 영원한 생명의 젖줄’, 제2부 ‘가을 민들레 하얀 홀씨’, 제3부 ‘바닷소리’, 제4부 ‘인연의 소리’로 구성돼 있다.시인의 ‘형산강 6-살아있는 목숨을 위하여’라는 시를 소개한다.“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제복에 묻혀 아침저녁/자전거 페달을 밟으며/강마을 강둑을 달리며/소리 없이 깊이깊이 흐르는 강물을 보네./온통 매캐한 냄새와/거대한 굴뚝마다 쿨럭쿨럭/제철공장 하늘을 덮는 구름덩이/자맥질로 하루해를 보내며/겨울 때 씻던 강은 아니지만/바람이 봄을 몰고 오는 강둑에는/강바람에 강버들 눈이 트고/정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징용 나가 소식 없는/큰아들 생각만 하시던 할머니/저 강물에 한 줌 재 되어 흐르고/”(이하 생략)이 시는 1980년 대 중반 포항문인협회의 기관지인 ‘포항문학’에 발표된 ‘형산강’ 연작 시 중의 한 편이다.김만수 시인은 신동화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푸근하고 넉넉한 인간미를 바탕으로 지역의 정서와 정신을 절제된 언어의 교직으로 표현해 냈다. 시인의 감각적 사유(思惟)와 미학적(美學的) 감성(感性)이 잘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시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음을 본다”고 평했다.저자는 첫 시집을 내면서 “설머리 먼동과 형산(兄山)의 노을 따라 참으로 먼 길을 휘휘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돌아보니 아득하고 눈물겹습니다. 그리운 사람들, 정겹고 따스한 인연들 있어 행복했고 함께한 아름다운 시간들 노을 속에 가만히 붉습니다”고 소감을 밝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6-29

비밀 있으신가요… 비밀에 의해 유지되는 일상

▲ 김인숙 소설가. /문학동네 제공“내게 이 소설들은 시간이다. 지나가는 것, 흘러가는 것. 거기, 멈춰 있는 것. 조용한 문장을 쓰고 싶었으나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지 못할 때가 많았다. 혼자 쓰는 글보다 혼자 하는 말이 더 많아졌다. 질문들. 부당한 것에 대해. 여기, 나, 사람들.”김인숙(55) 작가가 신작 소설집 ‘하루의 영원한 밤’(문학동네)을 출간했다.제12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빈집’을 비롯해 표제작과 ‘델마와 루이스’, ‘빈집’, ‘토기박물관’,‘아홉번째 파도’ 등 8편이 담겼다. 올해 등단 35년을 맞은 작가의 원숙한 세계를 보여준다.등단 이후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방황과 자유에 대한 희구를 그렸던 작가는 이후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작품으로, 개인의 삶을 세밀하게 응시하는 작품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갱신해왔다.이번 소설집은 삶의 매서운 진실을 묘파해내는 김인숙 소설의 매력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작가가 새롭게 개척해나가고자 하는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는 평이다.문학평론가 신형철은 “페미니즘 로드무비의 통쾌함과 뜻밖의 스릴러적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최근 김인숙 소설의 특별한 변화”라고 설명했다.표제작 ‘단 하루의 영원한 밤’에는 노쇠해 정신이 점차 혼미해져가는 노교수가 등장한다. 삼십 년 전 어느 하루의 일탈로 제자에게 사생아를 낳게 한 뒤, 제자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야 했던 모욕과 평생을 싸워온 그에게 남은 기억은 이제 삼십 년 전 그날 하루뿐이다. “최후의 생존을 위해 남겨놓을 수 있는 만큼만 남겨놓은” 그 기억을 붙든 채 노교수는 희미한 숨을 쉬고 있다. 삶을 감내하다가 결국 스러져가는 노교수를 지켜보는 또다른 제자 ‘그’의 삶에도 창피하고 모욕적인 순간들이 얼룩처럼 묻어 있다. 어느 밤, ‘그’는 자신의 삶과 노교수의 삶을 겹쳐 보기 시작한다. 생의 통증을 느낀 그 밤이 노교수의 마지막 기억처럼 사는 동안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 자신은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델마와 루이스’는 아흔이 가까운 나이의 두 자매가 가출을 감행해 바다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제목에서 보듯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소설은 영화와 달리 두 주인공을 노인으로 설정함으로써 노년의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델마와 루이스가 중년의 식당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을 만나 이뤄내는 여러 세대 여성들 간의 유쾌한 연대를 부각시킨다. 그러나 델마와 루이스의 자식들은 노년의 일탈을 황당해하기만 할 뿐 이들이 왜 가출했는지는 영영 알지 못하고, 소중한 비밀을 간직한 자매의 마지막 여행은 우리에게 뭉클한 여운으로 남는다.‘빈집’은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증오심을 느끼곤 하는 한 여자가 그럼에도 삶을 그러안기로 결심하는 결말 뒤에 남편의 충격적인 비밀을 덧붙인다. 여자가 본 남편의 모습은 극히 일부일 뿐이며, 남편이 여자에게 느끼는 감정 또한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 소설은 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비밀의 무한성을 독특한 공간으로 형상화하면서 비밀에 의해 일상이 유지되는 역설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토기박물관’은 영어학원에 같이 다니는 나이든 여성 ‘미라’와 ‘제니’가 어느 오후 우연히 토기박물관의 전시를 관람하게 된다는 단순한 줄거리로 요약되지만, 읽다보면 곧 정밀하게 계산된 구성임을 체감하게 만드는 수작이다. 노년 여성의 가벼운 히스테리처럼 읽고 지나온 문장들이 어느새 사랑과 고독의 증세로 다시 읽히면서, 문장 하나하나가 결말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단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김인숙 작가는 20살때인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받았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