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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바르샤바-그단스크-크라쿠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안이다. 지나쳐 온 바르샤바에서는 쇼팽 기념관에 갔었다. 그는 마흔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심장은 고국으로 운반되어 성 십자가 교회에 안치되었다고 했다. 폴란드 사람들은 그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 같았다. 거리에는 쇼팽의 음악이 흘러 넘친다. 한국의 KTX 비슷한 EIP가 바르샤바 역에 다가갈 때면 우리가 민요를 들려주듯 쇼팽의‘야상곡’이 들린다. 이 나라는 국토의 90퍼센트가 평원이라고 했다. 지금 EIP는 세 시간째 산 없는 들판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렇게 평지투성이라면 외적을 막아내기도 몹시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단스크는 시가지가 세계제2차대전 때 파괴되는 바람에 ‘전부’ 전후에 그림, 사진을 보고 복구했다고 했다. 그단스크 올리바 역 바로 옆에 있는 공원은 중세 때부터 조성해 온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했다. 무릇 파괴되지 않는 것, 오래 가는 것은 나쁘지 않다.크라쿠프 근처에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겨울에 조르조 아감벤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을 감명 깊게 읽었었다. 그때 나치 장교가 수용된 유태인들에게 말했단다. 너희들의 소식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알려진다 해도 사람들은 사실이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프리모 레비라는 이탈리아계 유태인 작가가 살아남아 문학으로 자신이 겪고 보고 들은 것을 남겼다. 아감벤은 거기서 인간의 새로운, ‘최저’ 윤리학을 구축했다.태평양 전쟁 때 성노예로 동원된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당한 일을 말하자 일본 정부는 국가가 직접 시행한 그런 일은 없다 했다. 한국의 어떤 사람이 그를 ‘뒷받침’하는 책을 내자, 한 시절을 한다 하던 사람들이 조심성 없이 박수를 쳤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세상에 기가 막히는 일은 옛날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일이 아우슈비츠처럼 ‘비밀’로, 없던 일로 간주되듯, 오늘날의 수용소들도 불문에 부쳐지려 한다.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사람이었다. 한국에 오셔서 땅에 입을 맞추시며 평화를 기원해 주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폴란드 사람이었다. 그단스크에서 바르샤바로 올 때보다 크라쿠프로 가는 길은 더 평평해 보인다. EIP에서는 커피를 무료로 서비스해 준다. 공항에서 바르샤바 시내로 들어올 때는 버스표 때문에 값비싼 수업료를 물었건만.요즘에는 파스칼의‘팡세’를 읽는다.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어 흔들리는 차안에서 읽기 좋다. 파스칼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지만 신에 의한 구원을 간절히 찾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문장 한둘을 잠깐 여기에 옮긴다.110. 세 접대자 영국 왕, 폴란드 왕, 스웨덴 여왕과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은신처나 피난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겠는가.120.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진실을 찾는데 유용하지 않다면 적어도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데는 유용하다. 이보다 더 옳은 일은 없다.폴란드에 와 있다. 하지만 폴란드 왕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말을 규제해야 한다. 늘 그러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눈만은 그래도 똑바로 떠야 한다. 이제 크라쿠프 쪽은 땅이 높아졌다. 아우슈비츠가 가까워지고 있다./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8-06-22

나의 정체를 추적하는 집요한 탐구과정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릭 모디아노(73)의 장편소설 ‘잃어버린 거리’(문학동네)가 출간됐다.그의 작품은 기억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모호하게 뒤섞으며 인간 생의 본질을 조망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열번째 장편소설인 ‘잃어버린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활동이 무르익기 시작한 1984년 발표된 작품으로, 1988년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여자’(책세상)라는 제목으로 맨 처음 국내에 소개됐다. 그동안 모디아노의 다양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온 문학동네에서 ‘현재’의 독자들의 감각에 맞춰 보다 산뜻하고 새롭게 번역을 다듬고 옷을 갈아입혔다.번역자 김화영 교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과 닮은 데가 많다”고 말한다. 사물보다 빛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진 인상주의처럼, 모디아노의 소설에서는 인간의 행위보다 그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대상을 각기 다른 시간에 반복해 그리는 행위를 통해 항상 변하는 빛 그 자체를 그리려 노력했던 인상주의 작가들처럼, 모디아노 또한 비슷한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포착해내려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많은 작품 속에서 인물의 행위는 시간의 힘을 드러내고, 삶을 담는 그릇, 공간을 드러낸다.모디아노의 많은 작품이 언뜻 엇비슷해 보이면서도,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저마다 마력과도 같은 고유의 힘을 갖는 이유는 모디아노가 “어떤 장소의 형언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살려내는 천재”(김화영)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모디아노 특유의 나직하고 억제된 슬픔의 목소리가 만들어낸 세계”(김화영)에 어느새 깊이 빠져들게 된다. 제각각 오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인상주의 회화 작품처럼 모디아노의 소설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해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영국 추리소설 작가 앰브로즈 가이즈는 7월의 어느 일요일, 이십 년 만에 파리를 찾는다. 집필해오던 시리즈와 관련한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이곳에 온 그는, 문득 자신이 스무 살 때까지 파리에 살다 이곳을 떠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폭격을 피해 모두가 떠나버린 듯한 텅 빈 도시에서, 중년의 앰브로즈 가이즈는 다시 이십 년 전 장 데케르라는 이름의 스무 살 프랑스 청년이 돼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나간다. 옛 추억을 더듬던 그에게 찾아드는 파리의 수많은 거리와 반딧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얼굴들…. 폐허가 된 과거에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치듯 떠나야 했던 그는 잃어버린 거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자기 인생의 수사관이 된다.모디아노는 초기작에서부터 한결같이 ‘아이덴티티’에 천착해왔다. ‘나’의 정체를 묻는 집요한 질문은 추리소설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독자의 관심을 잡아둔다. 다만 범행 동기나 범죄자를 쫓는 보통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추적의 대상은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 속 ‘나’의 아이덴티티인 것이다. ‘잃어버린 거리’ 역시 ‘나’의 아이덴티티를 탐구한다. 소설 속 장 데케르라는 화자 역시 “스스로 수사관이 되어” “기억이라는 자신만의 영역에서” 과거를 추적한다.이 탐구의 과정은 시간의 파괴력 때문에 곧잘 ‘절망적’인 것이 된다. 이십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파리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앰브로즈 가이즈는 문득 장 데케르의 모습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라는 두 시점 사이에는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가로놓여 있고, 그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삭막한 도시에서 이 거리를 건너지르는 행위는 때때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아득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6-22

모르는, 몰랐던 사람들끼리 알아가고 이해하며…

동인문학상·현대문학상 수상 작가 조경란(49)이 새 소설집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를 냈다. ‘일요일의 철학’이후 단편소설집으로는 5년 만이다. 조경란은 1996년 등단 이후, 그간 여섯 권의 소설집을 포함해 총 열다섯 권의 단행본을 출간하며, 한국의 대표 중견 작가로서의 자리를 지켜왔다.표제작을 비롯해 ‘매일 건강과 시’, ‘11월 30일’, ‘오래 이별을 생각함’ 등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진 이번 책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한 문장과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고백 조의 어조를 통해 작가가 지난 4년여 의 시간 동안 고민해온 삶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수록 작품 중 다수에서 사람 사이의 시작되는 작은 변화들이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풀어내며, 개인과 타인의 문제를 각자의 삶과 연결해낸다. 더불어 조경란이 지속적으로 다뤄온 가족의 형태에 관한 문제를 섬세하게 파고드는 탐구 의식 역시 이번 소설집에서 이어진다.온전히 나로서의 나, 가족 속의 나, 혹은 사회 속의 나 등 수많은 개인 ‘나’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 모두에게 해당할 수도 있는 소설 속 삶의 여러 모습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문학평론가 황예인은 “작가는 ‘어떻게’에 짓눌려 그 한 걸음을 망설이는 이들의 등을 가볍게 떠밀어주는 듯하다. 목적지를 떠올리며 망설이는 대신 그저 걸으라고, 이미 그것만으로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고. 목적지를 몰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속아왔던 과거가 떠내려간다”고 해설했다.작가는 책 말미에 수록한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을 이렇게 설명했다.“소설집 제목을 ‘모르는 사람들끼리’로 하자는 말이 편집부와 오갔을 만큼 모르는 사람들, 몰랐던 사람들끼리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단편들이 모였다. 많은 사건들을 통과하는 동안 인간은 이 땅 위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횔덜린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 어떤 경우에도 삶이 먼저고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소설의 출발도 거기에 있으리라 믿고, 오늘은 오늘의 글을 쓰고 내일은 내일의 글을 쓸 뿐이다. 누군가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과장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고 조용한 빛을 발산시키는 그런 책을 쓸 때까지.” /윤희정기자

2018-06-22

불안을 잊기 위해 만들어 낸 이야기, 진실인가 속임수인가

‘불안’이라는 키워드로 자신만의 확실한 문학 세계를 공고히 쌓아나가며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최정화 작가의 신작 소설집 ‘모든 것을 제자리에’(문학동네)가 출간됐다.최정화 작가는 2012년 ‘창작과비평’신인소설상으로 등단해 소설집‘지극히 내성적인’, 장편소설 ‘없는 사람’을 출간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2016 제7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인터뷰’, 페미니즘 테마 소설집‘현남 오빠에게’에 수록된‘모든 것을 제자리에’등 단편소설 8편이 담겼다.그동안 예민한 시선으로 온전해 보이는 세계에 스민 균열을 포착해내는 데 초점을 맞췄던 그는 이번 소설집에서 세계가 내포하는 불안을 섬세하게 그려낸다.최정화가 펼쳐놓는 8편의 이야기를 정신없이 읽어나가다보면 어느새 큰 폭으로 진동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표제작인 ‘모든 것을 제자리에’는 붕괴된 건물의 내부를 영상과 이미지로 남기기는 일을 하는 ‘율’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스스로의 자의식을 지웠다고 생각하고 엉망으로 파괴된 공간을 기록하지만 그것을 재현하고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데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느 날 자신이 남겼다고 ‘생각한’ 영상과 기록된 영상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잘못 촬영됐다고 여겨 다시 찾아간 그녀는 그곳에서 뜻밖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또한 단지 푸른 코트를 입었다는 이유로 남편이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하고 있다고 믿는 인물(‘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 자신을 피하는 친구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대는 인물(‘전화’), 새로 이사온 집에 누군가가 계속 잘못 찾아오고, 심지어 그 집이 자신의 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인물(‘잘못 찾아오다’), 사고를 당한 뒤에 자신이 너무 늙어 보인다고 믿게 된 인물(‘내가 그렇게 늙어 보입니까’), 자동 반죽기를 샀을 뿐인데 오 년의 시간이 흘러버려 길을 잃어버린 인물(‘오 년 전 이 거리에서’) 등을 만나게 된다.마치 히스테리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 최정화 소설 속의 인물들은 우리와 멀어 보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의 소설을 읽은 우리는 우리가 불안을 잊기 위해 만들어내는 우리만의 이야기들이 진실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반문하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6-15

한국적 정서로 다시 읽는 바이런의 시

피천득의 번역 시 선집 ‘착하게 살아온 나날’(민음사)이 출간됐다. 본래 ‘내가 사랑하는 시’(1997)라는 제목으로 출간됐으나 이번 개정판에서 제목과 목록 구성을 바꾸고 미발표 번역 시도 수록했다. ‘착하게 살아온 나날’은 본문에도 수록된 바이런의 시 ‘그녀가 걷는 아름다움은’의 한 구절로, 피천득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시의 마음과 시인의 자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남을 누르고 이겨야 할 수 있는 세계에서 시는 사실 잘 읽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오히려 시를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착하게 살아온 나날’은 피천득이 여유와 기쁨이 사라진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건네는 다정하고도 다감한 선물이다.“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소, 연한 얼굴빛은착하게 살아온 나날을 말하여 주느니모든 것과 화목하는 마음씨순수한 사랑을 가진 심장”―조지 고든 바이런‘그녀가 걷는 아름다움은’부분많은 사람들에게 수필가로 알려져 있으나 피천득은 시로 문학을 시작했고, 그 기저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애송했던 동서양 유수의 시들이 있다. 피천득의 작품 전반에 드리워진 “순수한 동심”과 “맑고 고매한 서정성”의 발현은 그곳에서부터다. 1부 ‘천사도 아니지만’에는 피천득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가운데서도 가장 애송하는 시편을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 것과 새롭게 윤문한 것이 함께 수록돼 있다. 한국 정서에 맞게 14행 정형시를 3·4조와 4·4조로 번역한 ‘셰익스피어 소네트 다시 쓰기’는 피천득의 번역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2부 ‘사랑이 기울 때’에는 피천득에게 시인의 꿈을 심어 준 바이런, 워즈워스, 예이츠, 디킨슨 등 서양 시인들의 시가 수록돼 있다. 이번에 추가된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시 세 편과 마찬가지로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세계 명시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부 ‘돌아가리라’에는 도연명, 두보, 보쿠스이, 타고르 등 동양 시인들의 시가 수록돼 있다. 사사로운 감정을 제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행간들을 천천히 좇다 보면 마음에 와닿는 한 편의 여유와 한 줌의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자르다가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산 공기가 석양에 맑다날던 새들 떼 지어 제집으로 돌아온다여기에 진정한 의미가 있느니▲ 피천득말하려 하다 이미 그 말을 잊었노라” ―도연명‘음주(飮酒)’이처럼 “그 어떤 현실의 속리와도 결탁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며 위대한 정신세계를 구축”한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기 위해 피천득은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시인이 시에 담아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을 것. 둘째, 우리나라의 시를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번역할 것. 그는 ‘정서의 번역’을 염두에 두고 한국 독자들이 세계 명시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도록 토착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정정호 중앙대 영문학과 명예교수는 피천득의 번역을 “영문학자나 교수로서보다 모국어인 한국어의 혼과 흐름을 표현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토착적 한국 시인으로서의 번역”이라고 평가하며 “그는 번역을 부차적인 작업으로 보지 않고 문학 행위 자체로 보았다”라고 말했다. 번역 시를 읽고 있음에도 우리말로 쓴 시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좋은 것은 모름지기 나눠야 한다는 깨끗하고 천진한 마음으로, 그는 ‘사랑의 수고’를 자처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6-15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그때 그 일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그때 그 사람이/그때 그 물건이/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더 열심히 파고들고/더 열심히 말을 걸고/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더 열심히 사랑할걸….//반벙어리처럼/귀머거리처럼/보내지는 않았는가/우두커니처럼…./더 열심히 그 순간을/사랑할 것을….//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인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전문)한국 현대 시단의 ‘거목’정현종(79) 시인이 1989년년 펴낸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가 복간됐다.이 시집은 출판사 세계사에서 초판이 발행된 이후 2005년 2판이 나오기도 했으나, 이후 절판돼 서점에서 구해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판권을 가져와 ‘문학과지성 시인선 R시리즈’로 이번에 새롭게 펴냈다.이 시집은 정현종 시인의 네 번째 시집으로, 대표작 중 하나인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을 비롯해 시 64편이 담겼다. 1980년대 폭력과 저항, 공포와 죽음이 압도하는 가운데 생명의 가치와 인간의 사랑을 강조한 시들로 높이 평가받는다.‘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서 생명에 대한 애착은 그 기저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에 한층 각별하다. 이 시집의 시들은 시대의 공포와 죽음을 목도한 시인이 1980년대를 휩쓴 폭력과 거친 세상을 비판하는 한편, 나아가 고통을 회피하기보다 감싸 안으려 한 흔적이기도 하다.▲ 정현종 시인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첫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얼마전 방영된 tvN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다뤄져 더욱 널리 알려졌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숨쉬는 정현종의 시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는 1970년대의 ‘섬’(‘나는 별아저씨’)에서부터 지난해 연말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방중 때 낭송됐던 ‘방문객’에 이어, 등단 50주년인 2015년 발표한 ‘그림자에 불타다’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53년 시 인생. 그 허리께쯤 위치하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정현종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제격인 시집일 것이다. 1965년‘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정현종 시인은 지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의 묵직한 주제를 무겁지 않은 시어로 풀어내 한국 주지주의 시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 등을 역임했고, 201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윤희정기자

2018-06-08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 온다. 사랑하면 그 사랑은 달아나기 십상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첫사랑은 실패로 남는다. 사랑을 이론서 안에서만 이해한 치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며 순정한 사람들을 기만해왔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충만해진다는 것은 거짓이다. 사랑은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다만 혼란이다.” - 김살로메 ‘사랑하지 않아야 사랑이’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견 소설가 김살로메씨가 산문집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아시아)을 펴냈다.작가는 작정하고 일천 글자로만 된 미니 에세이를 썼다. 작가가 찍은 10여 편의 사진과 함께 80편의 짧은 산문을 엮었다. 일상에서 느낀 가족, 이웃, 문학에 대한 순간의 심상을 캐리커처처럼 그려냄으로써 글 쓸 당시의 작가의 내면 풍경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다. 단상 속에서 그는 이웃과 사람을 불러내고 책과 문학을 품는다. 그러다가 깨치거나 반성할 것이 있으면 메모를 한다. 대개 소설이 되는 그 기록에서 씨앗 같은▲ 김살로메아침놀이나 비에 젖은 꽃잎처럼 떨어져 나온 말들이 미니 에세이가 됐다. 소설로 묶기에는 따뜻한 말들, 이를테면 아무리 싸우려고 해도 미소부터 나오는 하루, 뺨을 때리는데도 안아주고 싶은 상대, 떠벌이지 않아야 할 때를 놓쳐버린 찰나의 비애, 무심결에 맞서는 매서운 바람의 기척 등, 때론 스미거나 번지는 말들이 한 편의 산문집이 됐다. 그의 글은 투명하다. 투명한 사람이 쓴 투명한 미니 에세이. 막 소리 내어 욕망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분명히 남다른 감각과 체험을 지닌 작가다. 세계와의 충돌을 인정하지만 조화로운 공존 또한 모색하려는 성찰적 자기 고백. 더하고 보탤 것 없이 작가는 이 짧은 산문을 통해 쨍한 유리창처럼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이 미니 에세이는 한마디로 사람과 문학을 바탕으로 한 김살로메 작가의 일상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다./윤희정기자

2018-06-01

‘중년 수컷 고양이 피타고라스는 머리에 USB 단자를 꽂은 이상한 생김새로 인간으로부터 모든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말하며…’

이번에는 ‘고양이’다.프랑스의 인기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7)가 2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알려졌다시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우리나라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작가 중 한 명이다. 교보문고가 지난 2016년 집계한 과거 10년간 작가별 소설 누적 판매량에서 그는 1위에 랭크됐다. 자국인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더 사랑받는 건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미를 배가시키는 작가 특유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총 2권으로 이뤄진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소설 ‘고양이 1·2’(열린책들)는 프랑스에서는 2016년 출간돼 전작‘잠’보다 높은 인기를 누리며 현재까지 30만부 가량 판매된 소설이다.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타자의 시각을 도입해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이 지구에서 인간이 차지해야 할 적절한 위치를 끊임없이 고민해 온 베르베르의 작업은 이미 첫 번째 작품인 ‘개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이번 ‘고양이’에서는 그 문제의식이 그동안 좀 더 성숙해지고 발전해 왔음을 알게 된다.이 소설은 애완동물이긴 하지만 소통이 잘 안 된다고 여겨지는 고양이의 눈으로 세상을 관찰해 새로운 관점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가 종종 타자의 눈을 통해 우리 모습의 이상하고 추한 면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인간의 곁에서 삶을 함께하는 다른 종족 고양이 눈으로 보면 인간의 삶이 모순투성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소설은 인간사회의 가장 끔찍하고 어리석은 측면인 종교에 대한 광신, 그로 인한 대립과 테러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인 암컷 집고양이 바스테트는 집사인 나탈리에게 사랑받으며 안락한 삶을 꾸려왔지만, 최근 집주변에서 부쩍 총소리가 들리고 나탈리가 울며 불안해하자 어떤 위기를 감지한다. 그러다 옆집의 특이한 중년 수컷 고양이 피타고라스를 만나게 되면서 삶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한때 실험동물이었던 피타고라스는 머리에 USB 단자를 꽂은 이상한 생김새로, 자신은 그 통로로 인간으로부터 모든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말하며 인간의 역사와 고양이의 역사를 들려준다. 바스테트는 피타고라스에게 흠뻑 빠져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와 함께 인류와 고양이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그러다 결국 걱정했던 일이 현실이 돼 바스테트가 살고 있는 파리에 전쟁이 벌어지고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 사이 죽은 시체를 뜯어먹는 쥐가 창궐하고, 쥐를 통해 페스트균이 무섭게 퍼진다. 파리에는 이제 남은 사람이 얼마 되지 않고, 고양이를 비롯한 모든 동물이 쥐떼의 습격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피타고라스는 주인이 남긴 휴대폰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난관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한다. 바스테트는 타고난 소통 능력으로 다른 동물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꿈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대화하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된다.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는 버려진 고양이 무리를 이끌고 남은 인간들과 힘을 합쳐 수십만 마리의 쥐떼를 상대로 큰 전투를 벌인다.이 소설의 원제는 ‘Demain les chat’, ‘내일은 고양이’라는 뜻이다. 인류의 미래를 고양이에서 찾는다는 의미로 읽힌다. 남성이 아닌 여성을 화자로 내세워 책 전체에서 남성 중심의 세계관과 ‘수컷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윤희정기자

2018-06-01

‘창밖은 오월인데’ 그리운 ‘인연’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수필가 피천득의 수필집‘인연’과 작가의 유일한 창작 시집 ‘창밖은 오월인데’개정판이 최근 민음사에서 출간됐다.‘인연’은 한국 수필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킨 명산문으로, 오랜 시간 서정적·명상적 수필의 대명사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전 작품이 희박한 한국 수필 분야에서 ‘인연’은 1996년 초판 출간 이후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베스트셀러이자 독보적인 스테디셀러다.민음사가 5월(29일)에 태어나 5월(25일)에 작고한, 피천득의 생일과 기일을 맞아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 펴낸 수필집과 시집은 기존 독자들에게는 피천득 문학의 미감을 다시 한번 음미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피천득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피천득이라는 기분 좋은 산책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인연’은 피천득 특유의 천진함과 소박한 생각, 단정하고 깨끗한 미문(美文)으로 완성된 담백하고 욕심 없는 세계다. 이번 개정판에는 기존에 수록된 원고 외에 ‘기다리는 편지’,‘여름밤의 나그네’ 두 편을 추가했다. ‘기다리는 편지’는 중국 상하이 유학 시절 편지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글이다.‘여름밤의 나그네’는 한여름 밤 길 위에 선 나그네의 풍경을 한 편 서사시처럼 그렸다.그 외에도 자신이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인연’을 꼽는다는 박준 시인의 발문과 고(故)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피천득과 나눈 우정을 쓴 추모글, 피천득 작가의 아들 피수영 박사의 추모 글을 수록해 다양한 관점에서 피천득 작가를 바라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시집 ‘창밖은 오월인데’는 종전에 ‘생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피천득 유일한 시집을 제목을 바꾸고 새롭게 편집해 펴낸 것이다. 피천득 문학의 핵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이 가장 잘 드러난 이미지가 5월이고, 그와 같은 오월의 청신함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창밖은 오월인데’라는 시이기 때문이다. 극도로 절제된 언어와 여운이 가득한 시상이 이루는 조화가 편편마다 절묘하다.“창밖은 오월인데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라일락 향기 짙어 가는데너는 아직 모르나 보다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2014‘창밖은 오월인데’에서이번 개정판의 11장은 추가된 시편들로 구성됐다. 참여시 성격이 강한 ‘불을 질러라’, 초창기 동물을 모티프로 쓴‘양’ 등 모두 7편을 수록해 피천득 시를 보다 총체적으로 다채롭게 조망했다. “마른 잔디에 불을 질러라!/시든 풀잎을 살라버려라!/죽은 풀에 불이 붙으면/히노란 언덕이 발갛게 탄다/봄 와서 옛터에 속잎이 나면/불탄 벌판이 파랗게 된다//마른 잔디에 불을 질러라!/시든 풀잎을 살라 버려라!” -‘불을 질러라’ 전문)출판사 측은 “대체로 길이가 짧고 위트 있으면서도 심오한 세계관을 담고 있는 시집 ‘창밖은 오월인데’는 언어의 절약과 정서적 여유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놀라운 시집이다. 단순하고 착한 심성이 섬세한 느낌과 합쳐지며 추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로 나아가는 형식은 일본 하이쿠와 영미 시 소네트 형식이 결합된 독창성을 만들어 내며 1세대 영문학자이자 20세기를 온몸으로 겪어 낸 지식인으로서의 언어 감각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윤희정기자

2018-05-25

아테네·피렌체·항저우·애든버러·캘커타의 공통점은?

아테네, 피렌체, 항저우, 애든버러, 캘커타, 빈, 실리콘밸리…. 대륙도, 면적도 제각각인 이 도시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 한 시대를 풍미한 창조적 천재들이 있었다.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문학동네)는 베스트셀러 ‘행복의 지도’의 저자로 뉴욕타임스와 미국 공영방송 NPR의 해외특파원으로 활동한 에릭 와이너가 시대를 풍미했던 창조적 천재들이 찾아 떠난 여정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왜’ 창조적 천재가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에서 풍성히 배출됐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지금까지의 천재 논의가 개인의 자질 같은‘내면’에 집중됐다면,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는 천재를 만든 ‘외부’ 요인을 주목한다.천재들이 융성한 일곱 도시를 직접 걸으며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관점을 두루 아우르면서 하필 그 도시에서 왜 그토록 창의성이 폭발했는지를 도발적이면서도 유쾌하게 파헤친다.“빌 브라이슨의 유머와 알랭 드 보통의 통찰력이 만났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필력과 해박함을 두루 갖춘 저자는 거듭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천재의 발상지를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또한 천재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적절한 인용 등을 근거로 들며 한 도시가 어떻게 천재의 창조성을 진작했는지 분석할 뿐 아니라 창의력을 기르는 데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사회적 대화의 단초를 마련한다.기원전 5세기 아테네부터 오늘날 실리콘밸리까지 어느 시대, 어떤 도시였던 간에 천재는 모두 균열 속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그들이 활약한 분야는 제각각이었다. 에릭 와이너는 그 이유를 “나라에서 존경받는 것이 그곳에서 양성될 것이다”라던 플라톤의 말에서 찾는다.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속 도시들은 저마다의 대상에 경의를 표했다. 지혜를 우러러본 아테네는 소크라테스를 얻었다. 아름다움을 숭상한 피렌체에서는 르네상스 거장들이 등장했다. 실용적 태도로 삶을 ‘개선’하고자 한 에든버러에서는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흄 등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악기를 연주할 정도였기에 빈에서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태어날 수 있었고, 커피숍이라는 지적 교차로에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기에 세기말 빈에서 근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실패를 끌어안기에 실리콘밸리에서 첨단의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천재들의 도시를 답사한 와이너는 천재에 대한 통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천재는 유전이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독창성을 북돋우는 문화의 산물이므로 천재성은 사적 행위가 아니라 공적 참여라고.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한 아이를 길러내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면 한 천재를 길러내는 데는 한 도시가 필요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5-25

우리나라 풍수는 마음 편하고 자연 통하는 곳이 명당

오늘날 우리에게 풍수는 미신과 실용, 신비와 경험,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모호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가십성 TV 프로그램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무속인이나 도인을 섭외해 엘로드(L-rod) 막대기로 수맥을 찾거나 “땅의 형세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1천200여 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 민족의 삶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은 풍수는 단순히 과학으로 극복해야 할 비과학적인 구례(舊例)에 불과한가. 한국인에게 풍수는 무엇이며 한국풍수의 정체와 특징은 무엇인가.‘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 그 실천과 활용의 사회문화사’(한길사)는 우리 시대의 ‘산가'(山家)로 불리는 저자 최원석 경상대 명산문화연구센터 교수갖풍수’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책이다.저자의 주요 저서인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 ‘산천독법’이 우리 민족과 산의 관계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접근했다면, ‘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은 풍수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한다.풍수 논문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은 최원석 교수는 ‘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에서 한국 풍수는 이른바 ‘생활풍수’이자 ‘마음풍수’라고 주장한다.저자는 “우리 민족에게 풍수는‘생활’과 밀접한 삶의 중요한 요소였으며 ‘살 만한 터전’을 가꾸는 일 자체가 풍수였던 것”이라고 설명한다.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풍수는 일종의 미신처럼 격하됐고 저자는 이러한 풍수 인식을 안타까워하며 우리 풍수의 본모습을 밝히려 애쓴다. 각종 사료와 도판, 저자 본인이 직접 찍은 각종 사진을 활용해 한국풍수의 구체적 상을 밝히고 동아시아와 서구에서 풍수가 어떻게 연구되는지 소개함으로써 풍수의 학문적 가능성을 살핀다.저자는 8세기께 중국에서 들어온 풍수가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자리 잡았는지 설명하면서 지배층이 수도를 정하거나 왕궁, 왕릉을 조성할 때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풍수를 내세웠다고 지적한다.예컨대 고려는 개성을 도읍으로 삼았으나, 위기를 겪을 때마다 서경인 평양이나 남경인 서울로 천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좌청룡과 우백호에 둘러싸인 혈(穴) 앞 땅을 명당으로 여기는 논리를 배제하고 사람 사는 마을을 직접 가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산과 물이 적당히 있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는 것이다.저자는 “한국인은 풍수 논리에 삶을 끼워 맞추기보다 살아가는 방도로 풍수를 유연하게 활용했다”며 “부족하다 싶으면 보완해서 살 만한 터전으로 만드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설명한다.그는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에 불교가 결합하면서 ‘마음풍수’가 됐다고 강조한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보살이 산천에 깃들었다는 관념이 퍼졌고, 마음이 편안하고 자연과 통하는 곳이면 명당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역설한다.저자는 이를 ‘자연과 마음의 만남의 미학’으로 요약하면서 “한국에서는 풍수에 역사, 사회, 문화, 사람, 환경이 녹아 있기에 그 자체만 따로 떼어내서는 실체를 볼 수 없다”고 역설한다.우리 풍수 문화의 정체성을 분석한 저자는 지리산 마을, 용인 묘지 등에 풍수를 어떻게 적용했는지 살피고 조선시대 주요 풍수 사상가인 장현광, 윤선도, 권섭, 이중환, 최한기가 설파한 풍수론을 소개한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5-04

‘詩 중에 그림 있고 그림 중에 詩 있다’

그림 그리는 시인, 김주대(53) 시인의 문인화첩‘시인의 붓’(한겨레출판)이 출간됐다.김주대 시인은 1만3천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페이스북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5년 전,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방법을 물어물어 배워서 서툴게 문인화를 그리기 시작한 시인은 이제는 믿을 수 없이 정교한 붓질로 깊고 너른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와 그림이 조화를 이룬 그의 문인화는 글과 그림이 각자 줄 수 있는 감동의 합, 그 이상을 불러일으킨다.이 책은 한겨레 신문에 ‘시인의 붓’이란 코너를 통해 연재한 작품과 페이스북을 통해 근래에 발표한 작품 등 총 125점의 작품을 엮은 시인의 두 번째 시화집이다. 깨진 사발부터 길고양이까지, 명절 때 못 내려간 사람들이 밝힌 불빛으로 빼곡한 도시의 풍광부터 눈으로 뒤덮인 적막한 묵정밭까지, 시인의 내면과 세상만사가 교차하며 삶의 본질과 근원을 향한 질문을 던진다.책에 실린 문인화 125점의 소재는 매우 다양하지만 어떤 경향성을 보이기도 한다. 1부는 사시사철의 다정한 풍경을 담았다. 2부는 그릇, 연적 등 일상의 소품을 모았다. 3부는 어르신의 여러 모습을 통해 삶을 통찰한다. 4부는 해태, 석탑, 불상 등 우리나라 불교 미술과 공예를 시인의 눈으로 재해석했다. 5부는 어린아이와 동물을 통해 기쁨을 그렸다. 6부는 도시와 골목의 풍경을, 7부는 시인의 일상을 담았다.일찍이 김주대 시인의 시는 ‘우리 시단에 매우 드문, 격정과 성찰의 결속’(유성호 문학평론가, ‘감각과 기억과 서사의 미시물리학’,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이란 평가를 받은 적 있다. 그의 문인화 역시 시와 마찬가지로 격정과 성찰의 사이를 오간다. 진솔하면서 인간적인 토로가 있는가 하면 내향적이고 반성적인 인내와 성찰이 공존한다. 역동적이면서 잔잔하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동시에 홀로 떨어져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그 삶은 고마운 사람들과 미안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다. 김주대 시인의 글과 그림을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자신의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는 말은 이런 그림과 글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제 그림은 문인화의 전통 위에 서 있다고 믿습니다. 애초에 시가 없었으면 그림이 있을 수 없는 거죠. 제게 그림은 시의 시각적 확장이에요. 시는 제 작업의 기본이자 최종 목적지입니다. 전업 화가들 그림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제 그림이 그나마 인정받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시적인 발상’ 때문이라고 생각해요.”김주대 시인은 자신의 그림이 시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시에서 출발해 시로 도착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선 그림과 시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그림을 보면 시를 읽는 듯한 인상을 받고, 글을 읽으면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의 문인화는 그림과 시가 만나 창조한, 시인 특유의 새로운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시 중에 그림 있고, 그림 중에 시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시화본일률(詩畵本一律)의 묘리를 체험적 생활 화법으로 구현해내고 있다.‘시인의 붓’은 시와 그림이 서로 심미적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새 독자들을 맑고 고요한 중심으로 인도한다. 시란 말하는 그림이고 그림은 말하지 않는 시라고 했던가. 그는 시를 통해 귀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을 보여주고, 그림을 통해 눈으로만 들을 수 있는 말을 들려준다.한편, 김주대 시인은 상주 출신으로 1990년 ‘도화동 사십계단’(청사 출간)을 비롯, ‘꽃이 너를 지운다’(창비시선),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현대시학) 등 6권의 시집을 냈다./윤희정기자

2018-05-04

한 인간의 평생을 지배한 고통 ‘홀로코스트’

▲ 다비드 그로스만 /문학동네 제공‘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문학동네)는 이스라엘 문학 거장 다비드 그로스만의 장편소설이다.지난해 영국 맨부커 인터네셔널상을 받았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은 영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판된 소설에 수여하는 상으로 2016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에 널리 알려진 문학상이다. 영미권에서 노벨문학상 못지않은 권위를 자랑한다.‘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그로스만이 1986년 발표한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는 저자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홀로코스트가 남긴 트라우마를 다뤘다. 2014년 이스라엘에서 처음 출간돼 히브리어 전문 번역가인 제시카 코언 번역으로 2016년 영미권에 출간돼 영미권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작가를 마르케스와 귄터 그라스 급의 거장 반열에 올렸다.그로스만은 전작 ‘땅끝에서’, ‘시간 밖으로’ 등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다. 이스라엘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되기도 했다.1982년 첫 작품 ‘결투’를 출간한 이래 깊이 있는 지혜와 섬세한 감성,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소설, 논픽션, 희곡, 아동서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고,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이탈리아 발룸브로사상, 프랑크푸르트 평화상 등 세계 유수의 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현실을 과감하게 작품으로 옮기며, ‘글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가이자,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에서 작가는 도발레라는 이름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두 시간 남짓 펼쳐지는 그의 공연을 한 편의 소설로 그려낸다. 공연의 시작과 함께 소설이 시작되고 공연이 끝나며 소설도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처럼 독특하고 참신한 설정 속에서 그로스만은 시시때때로 농담을 섞어가며 도발레라는 한 인간의 평생을 지배한 고통의 근원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이 개인의 비극에 유대인의 고통스러운 역사, 이스라엘 현실에 대한 풍자를 함께 녹여내 삶의 고통과 유머가 공존하는 희비극을 탄생시킨다.이스라엘의 도시 네타니아에 위치한 작은 클럽. 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무대에 오른다. 이름은 도발레 G. 오늘 쉰일곱번째 생일을 맞은 그는 찢어진 청바지에 금색 클립이 달린 빨간 멜빵으로 멋을 부리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었다. “날씨가 좋아도 간신히 158센티미터”인 키에 갈비뼈가 무시무시하게 드러날 정도로 야윈 몸으로 무대에 올라선 도발레는 여러 테이블에 앉은 다양한 나이와 직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스스로를 “웃음을 사는 매춘부”라 칭하며 과장된 몸짓과 활기찬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짓궂은 농담을 건넨다. 그리고 그 관객 사이에 이 소설의 서술자인 은퇴한 판사 아비샤이가 있다.어린 시절 도발레와 함께 과외 수업을 받으며 아주 잠시 마음을 터놓는 우정을 나눴던 아비샤이는 사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도발레를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도발레가 불쑥 전화를 걸어 자신의 쇼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한다.도발레는 때로 웃기는 농담을 하고 때로 관객을 조롱하며 공연을 이어간다. 그의 공연을 몇 번씩 봤던 게 분명한 사람들과 처음 온 사람들, 한때 그와 알고 지낸 사람들이 섞여 있는 관객은 처음에는 그의 농담과 조롱에 호응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도발레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는 열네 살 때 갔던 군사 캠프와 그후에 벌어진 개인사를 풀어놓기 시작하면서 공연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도발레의 공연을 통해 아비샤이를 포함한 관객은 도발레가, 아들의 실질적인 생활을 돌봐주지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뒤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리지만 아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래보다 왜소했던 그가 학교의 다른 아이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도 듣게 된다. 아비샤이는 자신이 알았던 사실(도발레가 괴롭힘을 당했고 자신이 그를 외면했었다는 것)과 몰랐던 사실(그가 부모로부터 학대당했다는 것)을 들으며 도발레와 함께 군사 캠프에 있었던 때를, 도발레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날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른 관객들이 공연에 불만을 표하며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계속 그 자리에 앉아 그의 공연을, 그의 고통의 근원을 묵묵히 지켜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4-27

행복한 삶? 불행의 함정을 피하는 기술을 습득하라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했다. 그런데 행복과 멀어지는 건 왜일까. 더 나은 미래, 더 행복한 인생을 가져다준다는 수많은 해답들이 있었다. 그러나 열심히 그 답들을 따라 해도 내 인생이 그다지 달라지는 것 같지 않다. 왜? 한 가지 개념, 한 가지 법칙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조용히 생각의 변화를 일으킬 때다.‘불행 피하기 기술’(인플루엔셜)은 ‘불행’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52가지 생각의 도구를 제시한다. 저자는 스위스 출신의 경영학박사 롤프 도벨리다. 롤프 도벨리는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 경제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경영인, 냉철하고 능력 있는 투자가, 인기 있는 강연자다. 스위스항공 그룹 산하 여러 계열사에서 CEO를 역임하면서 경영인으로서 높은 성과를 냈다. 현재는 과학, 철학, 예술, 경제 분야에서 대표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세계적인 지식 교류 커뮤니티인 월드마인즈를 운영하고 있다. 전작 ‘스마트한 생각들’과 ‘스마트한 선택들’은 전 세계 40여 개의 언어로 번역돼 250만 부 이상 판매됐다.냉철한 기업가, 능력 있는 투자가, 인기 있는 강연가, 전 세계를 누비는 지식인답게 롤프 도벨리는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오랜 질문에 대해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접근법을 제안한다.그가 소개하는 52가지 방법은 인생을 살면서 매번 빠지는 불행의 함정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하는 생각의 도구들이다. 불행의 함정들은 이런 것이다.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실제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목을 매달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소비를 하고, 내일은 물론 오늘의 일에도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과거를 분석하는 일 등등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도 이런 오류에 툭하면 빠진다.“좋은 삶은 돈이나 재능, 주변의 사람들과는 관계없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오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내 생각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머리를 잘 쓰느냐에 행복이 달려 있다”라고 말하는 롤프 도벨리. 그가 말하는 ‘이 52가지 머리 쓰는 방법’은 너무 많은 것들이 주어져서 정작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오늘날의 시대에 필요한 ‘영리한 행복의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연습’이란 개념을 통해 인간의 가능성을 보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연습해보자./윤희정기자

2018-04-27

‘돈’에 관심 있는 모든 이를 위해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라 전해지는 17세기 튤립버블현상에서 최근 투자자들의 자금이 집중적으로 몰리는 암호화폐 뉴스에 이르기까지 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져 왔다. 돈을 모으고 불리는 수단은 너무나 다양하고 돈이 유통되고 거래되는 경로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최근 출간된 ‘돈의 원리: 인포그래픽 경제 팩트 가이드’(사이언스북스)는 돈과 경제 시스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경제 지식을 알차게 담은 경제 대백과사전이다. 이 책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유, 작은 신생 기업이 재정적 실패를 겪는 가장 큰 이유, 과거 튤립버블과 최근의 암호화폐 급등 현상, 주택담보대출의 종류 등 우리가 일상에서 떠올릴 법한 사소한 궁금증부터 다양한 경제 뉴스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시사상식을 두루 담았다.책은 영국 명문 출판사 돌링 킨더슬리(DK)가 기획했으며 전 세계 7 개국에서 번역·출간됐다. 화려한 인포그래픽에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 복잡한 돈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사실 여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는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는 철저히 배제했다. 교과서로는 알 수 없는 경제 원리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자 하는 청소년이나 경제 보는 눈을 키우고 효율적으로 자산을 관리하려는 어른에게도 실용적인 가이드북이다.이 책은 크게 네 장으로 나눠져 있다. 각각의 장은 ‘돈의 기초’, ‘영리 활동과 금융 기관’, ‘정부 재정과 공적 자금’, ‘개인 금융’이다. 부록으로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돈’장은 한국 독자들을 위해 국내의 경제 전문가가 우리나라의 경제 시스템을 풀어 설명한 장으로, 한국어판에서만 특별히 만나볼 수 있다.‘돈의 기초’장에서는 돈의 역사와 등장 배경, 근대 경제학의 등장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돈과 가치의 관계를 조명한 게오르크 지멜의 책 ‘돈의 철학’과 토머스 그레셤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화폐 법칙 등 화폐에 관한 여러 이론이 소개돼 있다.‘영리 활동과 금융 기관’에서는 시장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기업과 금융 기관의 경제 활동을 살펴본다. 기업이 자본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금융 상품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금융 기관은 어떤 식으로 돈을 활용해 운영하는지 탐구한다. 2012년 리보 스캔들을 포함해 주식 시장의 흐름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정부 재정과 공적 자금’장을 통해 정부가 한 국가의 경제를 통제하는 방법과 세금으로 재정을 관리하는 법을 알 수 있다. 성공적인 재정 관리를 위해 정부가 관리해야 할 것들과 더불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초인플레이션, 2012년 그리스 부도 등 재정 실패의 사례들도 담고 있다.‘개인 금융’장은 재산을 모으는 여러 가지 수단과 퇴직 생활 이후의 계획, 채무 이용 및 신용 관리 방법과 더불어 디지털 시대의 암호 화폐도 함께 다루고 있다. 주택 구입 자금 대출(mortgage)라는 단어의 유래와 원리, 그 종류가 세부적으로 설명돼 있어 독자들에게 실용적인 도움을 준다. 자산 배분은 전략적인 조합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 개인 투자자에게는 꾸준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 등 모두를 위한 경제 조언도 제공한다.마지막으로는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임현준 연구원이 ‘우리나라의 돈’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의 금융 기관과 기업, 조세 제도와 보험 제도 등을 정리한 글을 수록했다. ‘한국은행’, ‘금융 감독 체계’, ‘금융 기관’, ‘기업 회계’, ‘한국거래소’, ‘우리나라의 조세 제도’, ‘4대 보험’, ‘주택 담보 대출과 신용 카드’로 이뤄져 여덟 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 장을 통해 국내 경제 전문가가 정리한 우리나라의 고유한 경제 시스템을 알아볼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4-20

“암은 절망의 병이 아니라 자기사랑의 기회”

수필가인 김국현(63) 비지니스코리아 고문(전 한국지방재정 공제회 이사장)이 최근 암 투병기 ‘봉선화 붉게 피다’를 출간했다. 경북 안동 출신의 김 고문은 성균관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19회로 공직에 입문, 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 행정자치부 인사국장, 의정관 등을 역임한 바 있다. 김 고문은 지난 2006년 간암이 발병한 이후 병원 입·퇴원을 거듭하면서 느낀 생각과 체험을 바탕으로, 암으로 투병 중인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고 치료에 도움이 되고자 지난 투병생활을 책으로 엮었다. 그는 투병기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지난해 6월 간암이 재발한 후 가평의 깊은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푸른 숲과 청명한 햇빛은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공 예감으로 이곳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을 글 속에 담아두기로 작정했▲ 김국현씨다. 산방에서 느끼는 감정은 나날이 달라지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가치관이 변화되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작지만 강한 호박벌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회고하면서,“암은 죽음과 절망의 병이 아니라, 건강관리와 자기 사랑의 기회”라고 역설했다. 그는 또“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활환경을 변화시켜야 하며, 몸이 원하는 음식을 먹고 적당한 운동과 평안한 마음관리로 자연치유를 통한 면역력 보강이 절실하다”고 강조하면서 “인생에 고난이 없으면 삶이 풍요로워질 수 없다. 시련이 있어야 기적이 온다. 시련과 실패가 있으면 영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고 말했다. 김 고문은 투병 중에도 불굴의 의지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수필가로 등단해 두 권의 수필집을 펴낸 바 있다. 저서로서 수필집‘그게 바로 사랑이야’와 ‘청산도를 그리며’가 있으며, ‘인면와(人面瓦)의 미소’로 한올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와 산영수필문학회, 한올문학회 회원이다. /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4-20

불가능, 그 상실을 고스란히 수용하며

삶의 소소한 단면들을 깊이 있는 시어로 풀어내는 유희경(38) 시인의 새로운 시집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오늘 아침 단어’(2011),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2017) 이후 쓰고 고친 66편의 시가 오롯이 담겼다. 이전 시집에서 탄생과 죽음의 시간을 넘나들며 형용 불가능한 감정을 정제해 보였던 유희경은 이번 시집에서 그 불가능성을 고스란히 수용한다.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과 관계의 불능성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것이다. 시인은 한순간 분명하게 나타나 감미로운 전율을 주지만 그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무하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감각적 체험을 예민하게 포착, 적확하게 묘사해낸다.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은 우리가 놓쳐버리기 십상인 세계의 일면들을 시인 고유의 감각으로 섬세하게 풀어낸 결과다. 일상적인 풍경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가능성과 그 장면들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어떤 인칭이 나타날 때 그 순간을 어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둠을 모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어떤 인칭은 눈빛부터 얼굴 손 무릎의 순서로 작은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내며 드러나 내 앞에 서는 것인데 [….] 인칭이 성별과 이름을 갖게 될 때에 나는 또 어둠이 어떻게 얼마나 밀려났는지를 계산해보며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 인칭의 무게로 생각한다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부분 /윤희정기자

2018-04-20

자연·삶에 대한 투철한 탐구와 모험

시인이자 산문가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가 걷기와 산책, 여행을 주제로 집필한 다섯 편의 에세이를 엮은 ‘달빛 속을 걷다’(민음사)가 출간됐다.1817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교직 생활을 거쳐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에 대항해 자발적 아웃사이더로서 억압적인 국가 체제와 배금주의를 초월하고자 했던 ‘진정한 자유인’ 소로가 남긴 이 다섯 편의 에세이에는 이제껏 ‘월든’의 저자로만 알려졌던 그의 다채로운 면모와 웅숭깊은 사유가 가득 담겨 있다.소로는 평생의 친구이자 초월주의를 함께 주도했던 랠프 왈도 에머슨과 동일한 이상을 공유했으나 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갖위대한 실험’을 몸소 실천하는 행동가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2년 2개월 2일 동안 월든 호숫가에 머물며 완전한 자유와 자족적인 생활을 직접 성취해 보인 ‘월든’을 비롯해 부당한 국가 권력에 저항해 투옥까지 불사하며 써 내려간 ‘시민 불복종’, 세속적인 부와 덧없는 명예를 경계하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솔직하게 반추한 ‘원칙 없는 삶’에 이르기까지 소로의 사상과 작품은 그의 삶과 경험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달빛 속을 걷다’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들도 소로의 섬세한 관찰, 투철한 탐구, 거침없는 모험심을 그대로 반영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자연과 매번 아름다운 풍경과 사색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계절의 변천, 신의 지문이 깃들어 있는 동식물의 경이로운 생태, 그 모든 것에서 취할 수 있는 감동과 깨달음을, 소로는 생생하고 수려한 문장으로 전해준다. 더불어 사회 혁명과 의식 전환이 횃불과 유혈로만 가능한 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늘 마주하는 자연을 세심히 관찰하고, 심지어 별다른 생각 없이 나선 산책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뤄질 수 있음을 매우 설득력 있게 이야기해 준다.‘달빛 속을 걷다’에는 표제작을 필두로‘걷기’, ‘가을의 색’, ‘겨울 산책’, ‘하일랜드 등대로’가 차례로 수록돼 있다.먼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낮의 세계’와 대비를 이루는 명상적이고 정신적인 ‘밤의 세계’를 다룬 ‘달빛 속을 걷다’에는 한평생 소로가 탐구했던 대자연의 위대한 잠재성, 그것을 발견해 내야만 하는 당위성이 시적인 문체로 담겨 있다. 소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규격화된 삶을 대변하는 낮만을 찬양하며 밤의 어둠과 모호성을 두려워하고 멸시하지만, 실상 밤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심오한 영역과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잠재력까지 일깨워 준다고 설파한다.이어지는 ‘걷기’에서는 소로의 강도 높은 문명 비판을 시작으로 속되고 천박한 세태에 대한 저항이자 실천으로서의 ‘걷기’가 다채로운 예와 함께 다뤄진다. 소로는 진정한 ‘걷기’, 즉 자연과의 참된 ‘교감’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스스로 십자군이 돼 맞서 싸우겠다고(“걷는 동안 우리는 성지를 지키는 십자군이 된다.”) 의연히 다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걷기’는 우리가 물질 너머의 세계를 내다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간단하며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을의 색’과 ‘겨울 산책’에서는 각기 다른 계절의 정경이 병풍처럼 세밀한 묘사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로는 ‘가을의 색’에서 미국의 가을을 수놓은 다종다양한 초목들을 들여다보며 신세계(미국)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무용한 것의 유용함을 역설하며 한낱 미물에게도 저마다 생명력과 인간이 숙고해 볼 만한 진귀한 가르침이 있음(“가장 보잘것없는 식물이라도 충실하게 관찰하면 머지않아 독특한 가을의 색을 띨 것이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겨울 산책’에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겨울은 ‘죽음과 침묵의 계절’(“달력에 겨울은 바람과 진눈깨비를 맞으면서 외투를 여미는 노인으로 그려져 있지만, 겨울은 명랑한 벌목꾼이나 혈기 왕성한 젊은이처럼 보인다.”)이 아니라 주장하며 얼어붙은 대지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생명의 강렬한 약동을 하나하나 지적해 보여 준다. 그런 한편 소로는 엄혹한 계절이기도 한 겨울을 관조하며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 하는 바를 열심히 새겨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끝으로 조금은 이색적인 ‘하일랜드 등대로’에선 소로가 지닌 ‘자연 과학자’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험난하고 녹록하지 않은 바닷가 환경에 겨우겨우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같은 해안을 바라보더라도 이방인과 주민의 관점은 서로 아주 다르다. 이방인은 폭풍우 치는 바다를 찬양한다. 그러나 주민은 그 장면을 보면서 가까운 친척의 조난을 떠올린다.”)가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만만하지 않은 등대 운영과 그것에 의지해 항해하는 뱃사람들의 애환, 이들의 생존에 무관심한 정부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소로의 가치관과 관심사가 한데 어우러진 작품이기도 하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4-13

페미니스트 나혜석, 100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신간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은 한국 근대 페미니즘 작가 나혜석(1896∼1948)의 자전적 에세이다. 열일곱 편의 소설, 논설, 수필, 대담을 가려 뽑고 현대어로 순화한 이 책은 나혜석의 삶을 나혜석 자신의 글로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보다 나은 독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장영은 성균관대 한국학연계전공 초빙교수가 시대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해설을 덧붙여 이해를 도왔다.나혜석의 논설은(논설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인터뷰 역시) 지금 영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봐도 전혀 낡지 않았다. 약 100여 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나혜석에게 글쓰기는 ‘은밀하고 사적인 취미’가 아니었다.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여성들과 소통하며,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와 맞서 싸우려 했다.“나는 열여덟 살 때부터 20년간을 두고 어지간히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 즉, 우등 1등 졸업 사건, M과 연애 사건, 그와 사별 후 발광 사건, 다시 K와 연애 사건, 결혼 사건,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활약 사건, 황옥(黃鈺) 사건, 구미 만유 사건, 이혼 사건, 이혼 고백서 발표 사건, 고소 사건, 이렇게 별별 것을 다 겪었다.”-‘신생활에 들면서’에서나혜석이 밝힌 바와 같이 그녀는 당대 시대를 앞서간 여성 지식인이었으나 희대의 스캔들에 휩싸여 35세에 이혼한 후 고된 말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많은 글을 남겼으며, 논설과 문학을 넘나드는 문필 활동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관에 도전했다.이 책은 5부로 구성됐다. 1부에는 소설을, 나머지 부에는 논설, 수필, 인터뷰, 대담을 가려 뽑았다.각 부의 말미에는 나혜석과 함께 이광수, 김기진, 김억 이렇게 네 명의 문인이 1930년대 당시 미혼 남녀들이 결혼을 늦게 하는 풍조를 비평하는 ‘만혼 타개 좌담회’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윤희정기자

2018-04-13

조선의 마지막 유의, 석곡 이규준 삶·정신 조명

“내 삶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이 세 가지 있었다. 가난했던 것, 집안이 변변치 못하여 스승을 얻지 못한 것, 조선말, 혼란기에 태어난 것이 내 삶을 끌고 왔다.”조선말 실학자이자 한의학자였던 석곡 이규준(1855~1923) 선생의 애국 애민 정신을 소설로 풀어낸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동화작가 김일광이 펴낸 역사소설`석곡 이규준-백성을 섬긴 마지막 유의`(내인생의책)는 석곡 이규준이 10세 때이던 1865년부터 1923년 조선의 마지막 유의로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과정을 문학적인 상상력을 더해 재구성했다.원고 1천매 분량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조선말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에서 태어나 1923년 일제강점기에 세상을 떠났던, 그야말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살았던 이규준의 가난과 궁핍함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학문의 경지를 열어나가 백성들의 생활 곳곳으로 다가가는 의술을 펼쳤던 유의(儒醫·유교 교리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통해 의술을 펼치는 의사)로서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작가는 석곡의 삶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말을 살려 쓰려고 노력했으며 뜻을 바르게 알리기 위해 몇 군데 한자를 함께 적기도 했다. 또한 석곡의 전문적인 유학 사상이나 한의학의 전문 지식은 되도록이면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석곡 이규준이 100년 전 역사적 혼란기를 어떤 생각과 모습으로 살아갔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방해할 것을 우려해 향토사학자 황인, 석곡도서관의 서형철과 함께 석곡의 자료를 찾아 연구하고 관련 학계 학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8년 여전부터 유학 관련 책과 여러 글을 탐독하는 것은 물론, 학회를 빠짐없이 찾아다닌 끝에 작품을 탄생시켰다.또한 이규준의 제자였던 석재 서병오 기념관이 있는 대구를 비롯해 부산 등지를 방문해 이규준의 포항 뿐 아니라 영남지방의 대 실학자로서의 면모까지 치밀하게 묘사했다.무엇보다도 그는 이규준이 가난 속에서도 독학으로 천문학·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기(氣) 철학과 양명학에서 깨달음을 얻어 허준, 이제마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한의학자로 근대 한의학의 서곡을 울렸지만 그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규준의 학문과 정신을 재조명한다.이규준이야 말로 백성들의 생명과 정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삶을 살다간 숨은 영웅이라는 것. 아울러 선생의 염담허무(恬淡虛無·마음을 편히 하고 담담하게 하며 비우고 없애는 것) 정신이 오늘날 혼란한 시대와 고단한 우리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석곡 이규준소설은 선생이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 갯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위해 낮에는 논밭으로 나갔으며 밤에는 골방에 찾아들어 스스로 학문의 경지를 열어나가는 한편 가난했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 나는 처지를 알고 어렵게 익힌 학문을 자신의 부귀를 위해 쓰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 곳곳으로 다가가 병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석곡의 모습을 그렸다. 곤궁함을 에너지로 삼아 삶의 완성을 끌어낸 석곡의 투철한 애민정신이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던진다.황원덕(동의대 한의과대) 교수는 서평에서“석곡 선생은 유교의 경전인 `십삼경`을 주소하고, 이를 요약하여 `석곡심서` `경수삼편`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선생께서는 삶을 통해 자연이라는 생명체가 나와 한가지니, 나를 사랑(仁)하고 용서(恕)하듯이 다른 이에게도 그리 하라는 사상을 보여주셨다. 특히 수기이경(修己以敬)을 강조하셨는데, 사랑과 용서에는 치우침이 없어야 하고(中), 상대를 대할 때는 과(過), 불급(不及) 없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나타나야 만물과 내가 하나 될 수 있다(和)는 말이다. 이런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때(誠) 비로소 시비가 없어지고 국가와 사회가 온전히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고 적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4-06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잔잔하고 그윽한…

“자고 나면 그 언저리 선혈이 돋더라가고 나면 그 뒷자리 바람만 일더라동백꽃환한 새벽도물소리로 지더라.”(조영두 시조 `사랑꽃`)포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영두 시인의 첫 시조집 `떠나보면 안다`(부크크) 속에 나오는 시조를 읽으면 마치 한 폭의 오래된 수채화를 보는듯 잔잔하고 그윽한 울림이 온다. 인습에 물들지 않은 맑고 순수한 영혼을 만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그의 작품 속에는 가슴 저 밑에서 묻어나는 아련한 그리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해준다.조 시인은 1996년 시조문학 3회 천료로 등단했으며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또 한 번 실력을 인정받은 탄탄한 기량을 갖춘 시조시인이다. 그는 평생을 초등학교 교단에 몸담아 오면서 성실하고 존경받는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으며 지난 2월 정년퇴임 했다.오랜 침묵 끝에 발표한 이번 시조집에 담긴 작품들은 사람살이의 고단함, 역동성 등을 노래하면서 소재를 시적으로 읊었다.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 이해를 이끄는 시들은 시인의 오랜 시간 발화 내용과 형식을 통합한 미학적 결심임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조 시인은 “한 점을 찍는다. 그 사이 큰 산을 넘고 바다 같은 강도 건넜다. 그 길에 같이 한 시가 있어 세상이 여유로웠다. 앞으로 또한 그럴 것이다”고 소감을 전했다.시조집은 `청산도` `등대는` `돌아앉는 섬 하나` 등 시조 50여 편이 총 3부로 구성됐다. 1,2부는 아프게 통과해온 지난 시간들에 대한 충실한 재현 과정을 작품 속에 담았다. 그 시간들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기억에 자신의 열정을 남김없이 바치는 첫 모습을 선명하게 풀어냈다. 3부는 7년간 근무했던 울릉도에서 만났던 개척민들의 애환에 얽힌 이야기와 풍광을 조용하고 잔잔하게 묘사했다.▲ 조영두 시인`떠나보면 안다`시집 제목은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인 `울릉도 4-빗소리`중 “떠나보면 안다 빗소리의 여운을/ 절해고도 외딴 사택 지붕 위로 떨어지며/한밤중 가슴 때리는/아! 그리운 이여”싯구에서 따왔다.원정호 시조시인은 해설 `활화산 같은 진솔한 서정의 숲`에서 “시인이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가꾼 진솔한 서정의 숲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늑한 휴식처를 제공해 주리라 확신한다. 시조 전편이 그의 천선에서 볼 수 있듯이 조용하고 잔잔하며 소박하다. 그러면서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애절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조 세계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그리움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조영두 시인은 경북 영천 출생으로 맥시조문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경북문인협회, 여강시가회, 맥시조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4-06

한 장의 그림과 만나는 우리시대 삶과 인생

`내가 사랑한 명화`(문지푸른책)는 6·25 한국전쟁이란 일관된 소재로 `분단문학`이란 독특한 지평을 일군 소설가 김원일(76)의 미술 산문집이다.저자가 2000년 펴낸 미술 산문집인 `그림 속 나의 인생`의 개정판으로 20여 년 만에 새로운 구성과 판형, 디자인으로 또다시 선보이게 됐다. 새로운 글을 추가하되 기존 글 몇 편은 삭제했고 새롭게 글을 다듬어 펴냈다.“그림이란 일절 선입관 없이 그림 자체로만 감상해야 한다는 원칙론에도 불구하고, 감상자들은 그 그림에 뒤따르는 에피소드와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작품을 해석하려 한다. 소설 쓰기가 생업인 나 역시 한 장의 그림을 볼 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화가의 당시 삶을 엿보려는 습성이 있다”라는 작가의 고백처럼, 그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화가의 부단한 생애와 그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비록 미술에 문외한이더라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으며,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된 총 마흔여섯 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소설을 읽듯 다양한 인생사를 경험할 수 있다.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작가가 평생에 걸쳐 사랑해온 그림(또는 조각) 46점이 걸린 마음의 화랑을 순회하며, 그림이 거는 말이나 그 그림에 하고 싶은 말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추적하고 그려낸다.이를 통해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오래 사랑받은 46점의 명화들이 작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이미지로 새롭게 읽히니, 내성적인 소년 시절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순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작가의 그림에 대한 애정과 해박한 지식, 소설가다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책이다.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미술 감상의 길잡이` 또는 `그림 읽기 안내서`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화가의 생애를 보며, 자신의 삶과 문학을 그 이미지에 접목시킨다. 이데올로기를 좇아 가족을 버리고 북으로 떠난 아버지, 홀몸으로 자식들을 키워낸 어머니, 지독한 가난과 두려움으로 점철되었던 성장기, 막내아우의 죽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좌절과 가위눌림, 자신의 창작에 영감을 주었던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가 책을 통해 펼쳐진다. 이렇듯 이 책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그로 인한 가족과 개인의 수난의 역사가 있고, 평생토록 그 경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해온 작가의 치열한 사색과 독특한 체험의 기록이 담겨 있다. 차라리 노(老)작가의 인생 고백에 가깝다 할 수 있으니, 책 곳곳에 삶의 굴곡과 무거움이 승화된 작가의 인생의 깊이가 여운처럼 남는다.책은 전체 6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렘브란트의 `두 개의 원이 있는 자화상`을 시작으로 로댕, 뭉크, 호퍼, 자코메티, 프리다 칼로, 베이컨의 작품을 소개한다. 자기 성찰, 예술혼의 자만심과 오기, 열정 등 예술가의 초상이라 일컬을 수 있는 여러 모습을 담고 있는 글들이다.2부 `사랑과 열정`은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비롯해 앙리 루소, 고흐, 클림트, 로트레크, 코코슈카 등의 작품을 소개한다. “삶이란 고해”이나 사랑 혹은 열정이 있기에 예술이 존재하고 삶은 또 반짝임을 이야기하는 글들이다.3부 `도전과 파괴, 재창조`는 쿠르베의 `만남(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비롯해 마네, 드가, 세잔, 마티스, 뒤샹 등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고 상식을 파괴하여 새로운 예술 장르를 창조해낸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4부 `자연, 이상향`은 우리에게 친근한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비롯해 윈즐로 호머, 고갱, 샤갈 등을 통해 인간이 돌아가고 싶은, 혹은 지향하는 자연, 고향, 이상향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소개한다.5부 `시대와 현실`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콜비츠의 `시립구호소`, 벤 샨의 `광부의 아내` 등 험난한 삶의 파고와 역사의 격동기를 표현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6부 `삶의 유한성`은 엘 그레코의 `베드로의 눈물`,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 등을 소개하며, 유한한 인간의 삶과 슬픔, 그렇기에 인간이 희구하는 종교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30

꿈은 꿈을 강요하는 행위와 양립할 수 있는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유미주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유토피아가 표시되지 않은 세계지도는 잠시도 쳐다볼 가치가 없다”라고 했듯 인간은 이제껏 시대를 막론하고 더 나은 삶을 꿈꿔왔다. 팍팍한 현실에선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각자 꿈꾸는 소망은 다를지언정 안락한 미래와 이상향에 닿고자 하는 염원은 비슷할터. 아마 현실의 삶이 버거울수록 그 바람은 더욱 간절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유토피아 문헌서지학자인 라이먼 타워 사전트의 `유토피아니즘`(교유서가)은 초기 근대문학과 유토피아론부터 오늘날 계획 공동체나 코뮌이라 불리는 실천적 유토피아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니즘이 발현된 다양한 형태를 고찰한다. 또한 비서구권 전통의 유토피아니즘, 그리스도교 전통의 유토피아니즘, 유토피아니즘과 정치이론의 관계 등 유토피아를 둘러싼 갖가지 논쟁을 살피면서 유토피아니즘의 모순적 성격을 탐구하고 그것을 조율한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원했지만, 유토피아니즘은 모든 문화적 전통에 존재해왔다. 유토피아니즘은 어디서나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을 밝혀줬지만, 개선안의 구체적 내용과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됐다. 일부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가 돼버렸고, 그 디스토피아를 물리치기 위해 다른 유토피아가 동원되기도 했다. 유토피아는 인간에게 필수적이면서도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유토피아`라는 개념`유토피아(utopia)`는 토머스 모어가 만든 말로, 그가 1516년에 라틴어로 출간한 책에서 묘사한 허구의 나라 이름이다. 보통 이상향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장소나 위치를 뜻하는 `topos`와 부정(否定)이나 부재(不在)를 뜻하는 접두사 `ou`에서 따온 `u`를 결합한 것이다. 모어가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유토피아는 `행복의 땅, 좋은 곳`을 뜻하는 `에우토피아(Eutopia)`로 불린다. 유토피아는 결국 그저 아무 곳도 아닌 곳이나 어디에도 없는 곳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좋은 곳을 가리키게 됐다. 유토피아는 모어가 만든 단어였지만 그 개념은 이미 길고도 복잡한 역사를 지닌 것이었다. 시대적으로 모어를 한참 앞서는 유토피아 이야기들이 있었고, 모어 다음에는 다양한 종류의 유토피아를 일컫는 신조어들이 추가됐다. 나쁜 곳을 뜻하는 `디스토피아`도 이제는 표준적 용어로 자리잡았다. 유토피아 이야기의 특징은 어떤 좋은 곳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그려낸다는 데 있다. 거기에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정치·경제적 체제뿐만 아니라 결혼과 가정, 교육, 식사, 일 등이 묘사된다. 이렇듯 변화된 일상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유토피아 문학이며, 유토피아니즘이 추구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일상의 변화인 것이다.△ 유토피아니즘,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사람들은 언제나 삶의 조건에 불만을 품은 채 더 좋은 삶의 비전을 그렸고, 죽은 뒤에도 더 나은 방식으로 존재가 계속되기를 소망했다. 인류가 맨 처음 더 나은 삶을 꿈꾼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한 개인들이 그들의 꿈을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형태로 언제 처음 기록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최선의 연구 방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모든 유토피아 이야기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사는 방식이 개선될 수 있는지 묻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답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대체로 현재의 삶과 유토피아의 삶을 대조해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이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밝히고, 상황을 개선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를 제안한다. 그런데 유토피아니즘과 관련해서도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놓고 견해차가 존재한다. 자칫 일반적 범주로서의 유토피아니즘과 문학 장르로서의 유토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선도 빚어진다. 유토피아니즘은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관련된 꿈과 악몽을 가리키며, 그 속에서 그려지는 사회는 그들이 사는 사회와는 완전히 다르다.△ 계획 공동체의 모델유토피아는 단순한 공상일 수도 있고, 바람직한 사회나 못마땅한 사회에 관한 묘사이기도 하며,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경고, 현실에 대한 대안, 혹은 달성해야 할 모델이기도 하다. 계획 공동체는 유토피아적 실천으로서 더 나은 삶이 지금 여기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역할을 맡는다. 인류와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는 유토피아적 관점은 희망 아니면 공포다. 희망은 대체로 유토피아를 낳고, 공포는 대체로 디스토피아를 낳는다. 기본적으로 유토피아니즘은 희망의 철학이다. 희망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모든 노력에 필수적이다. 다만 여기에 잠재된 위험은, 누군가는 바람직한 미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제 생각을 그것을 거부하는 타인에게까지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질문한다. “그들의 꿈은 그들의 꿈을 강요하는 행위와 양립 가능한가? 자유가 부자유를 통해, 평등이 불평등을 통해 달성될 수 있는가?”△ 유토피아니즘의 두 얼굴유토피아니즘의 힘과 위험을 모두 인식하게 된 작가들과 이론가들은 모호하고 덜 단정적이며 더욱 복합적인 유토피아를 제시해왔다. 그런 유형의 유토피아를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상대적 유토피아`라 불렀고, 자유주의 철학자 존 롤스는 `현실적 유토피아`라 불렀다. 저자는 이런 접근법이 유토피아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피하게 해준다면서, 인간은 열정적 신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만 자신의 신념이 터무니없음을 인식하고 비웃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또 유토피아는 그리스 비극에 비할 만하다면서, 인간은 감히 유토피아를 탐낸 뻔뻔함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점도 상기시킨다. 희망, 전적이거나 부분적인 실패, 낙담과 희망의 폐기, 그리고 희망의 회복. “이 변증법은 우리 인간성의 일부다. 유토피아는 희망찬 삶에 대한 비극적 비전이며, 이 비전은 언제나 실현되며 또 언제나 실패한다. 우리는 희망하고, 실패하고, 그런 다음 다시 희망할 수 있다. 거듭되는 실패를 감내하는 가운데 우리가 건설하는 사회는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저자의 결론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3-23

재료 본래의 생명력을 살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요리

유명 자연 요리 연구가 문성희(68)씨가 40년 요리 인생 철학을 전하는 요리 에세이를 펴냈다. `문성희의 밥과 숨`(김영사)은 재료가 가진 본래의 생명력을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 가장 훌륭한 요리라는 자신의 요리 철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담고 있다. 운명적으로 요리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 권위 있는 요리학원 원장이자 각종 매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인의 삶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간 이유, 자유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방황과 탐구, 세계적인 명상학교 브라마쿠마리스에서의 수행과 생명의 법칙을 깨닫게 된 과정. 쉽지만은 않았던 그 시간들을 치열하게 통과하며 지금에 이른 저자의 산문들이 삶의 신산함과 감동을 준다. 책은 모두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저자의 인생 이야기이며, 2부는 저자의 요리 철학이 응축된 음식 이야기다. 음식은 총 20가지가 담겼고, 저자와 저자의 딸이 각기 10가지씩 소개한다. 저자는 몸과 마음의 정화와 보양을 돕는 죽을, 딸 김솔은 오감을 깨우고 영양도 풍부한 혼밥요리를 택했다.마치 옆에서 조곤조곤 들려주는 듯 차분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이야기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저자의 요리 철학이 단지 손끝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영혼의 평화에 대한 깊은 모색과 명상에서 빚어진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23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철학자, 그리고 다시 찾아온 행복

현대사회에 대한 통찰력 있고 날카로운 비판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린 `피로사회`, `투명사회`의 저자이자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신작 `땅의 예찬`(김영사)이 출간됐다. 1999년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한병철은 2012년 4만2천권이 판매되는 등 열풍을 몰고왔던 `피로사회` 이후 10여 권의 저서가 번역,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다. 한국과 독일에서 최근 동시에 출간된 `땅의 예찬`은 저자가 3년 동안 정원을 일구며 겪은 일을 담담하게 풀어낸 책이다.저자가 정원 가꾸기를 시작한 이유는 어느 날 땅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노라 결심한 뒤 개인 정원을 `비밀스러운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이라고 명명하고는 식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온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땅을 일구며 비밀의 정원을 가꾸면서 그는 그곳에서 디지털 세계에서 잃어가던 현실감, 몸의 느낌이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정원 일을 하면서 그는, 변화된 공간감각과 시간감각에 대해, 기다림, 인내와 희망에 대해, 색깔과 빛과 향기에 대해, 수국과 옥잠화에 대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와 낭만주의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철학적으로 명상한다. “정원에서 일하게 된 뒤로 나는 전에 몰랐던, 강하게 몸으로 느끼는 특이한 느낌을 지니게 되었다. 땅의 느낌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어쩌면 땅이란 오늘날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행복과 동의어인지 모른다.” _32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16

포스트모더니즘 선각,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출간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대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그는 20세기 중반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각자로 평가받는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사 형식으로 문학과 철학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문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탈구조주의자들에게도 발견이 된다. 탈구조주의자들은 그들의 논리 전개를 위해 보르헤스의 텍스트들을 인용하기도 했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는 주로 권력적인 이분법의 사고를 해체하는 논리나 경직된 의미해석을 반대하는 논리에 적용됐는데 대표적인 해체주의자 데리다와 푸코의 이론들이 그 예가 된다. 보르헤스의 글을 굳이 장르에 포함시킨다면 환상문학에 속할 수 있다. `타자`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보르헤스 소설의 서사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보르헤스는 자신 문학의 관심사는 시간과 영원과의 게임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시간이 동일한 것에 주는 차이에 많은 주목을 했다.보르헤스는 이처럼 독특한 소설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생전에 수천 쪽에 달하는 에세이도 남겼다. 당대 작가들의 전기, 철학 사상, 아르헨티나의 민속학, 정치와 문화 비평, 강연록 등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글을 써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산문 작가로도 유명했다. 도서관 사서로 오랫동안 일하고 국립도서관 관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방대한 독서량과 지식, 이를 바탕으로 한 폭넓은 저작으로 `20세기의 도서관`으로 불리기도 한다.민음사가 최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방대한 지식과 사유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논픽션을 묶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을 펴냈다.전집은 총 7권으로 묶였으며, 이번에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영원성의 역사`, `말하는 보르헤스`까지 세 권이 먼저 나왔다. 그의 산문 전집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올 하반기에 나머지 네 권이 나와 완간될 예정이다.이번 전집에서는 보르헤스의 비범한 사유가 태동하던 청년기부터 지적 자만심으로 패기만만한 장년기, 자신만의 한 세계를 완성한 노년기까지 그의 세계관과 철학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온전히 엿볼 수 있다.△ 1부 `내 희망의 크기`이 작품은 그의 전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크리오요`, `팜파스`, `문학과 언어`에 대한 애정과 우려 등을 담고 있다. 그는 크리오요주의를 “세상과 개인, 신은 물론 죽음과도 소통하는 철학”으로 정의하며 아르헨티나의 원초성을 되살린다. 아르헨티나의 언어성에 대한 고찰, 크리오요 문학 작품과 스페인 및 영국 문학 작품의 분석이 이어지며 루고네스, 루이스 데 공고라, 케베도 등에 대한 초기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역자 김용호 교수는 이 작품이 “삶을 긍정하고 기쁨의 원천으로 삼았던 가우초를 복원시키고, 콤파드리토들을 가우초의 생명력을 도시로 가져온 영웅으로 바라봄으로써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문화를 정립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고 설명한다.△2부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언어는 항상 자신을 감동시키고 고양시키지만 그에 대한 의심 또한 그치지 않았던 보르헤스는 `단어의 탐구`,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에서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쳐 한 문장을 이해하는가?`라고 물음을 던지며 인지언어학적 관심을 펼친다. `글로 쓴 행복`, `또다시 은유`, `세르반테스의 소설적 행동` 등에서는 날카로운 비평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며 `탱고의 기원`, `두 길모퉁이` 등에서는 아르헨티나의 민족적 전통과 그 기원을 찾는 탐험이 그려진다.“문학의 영속적인 목표가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학이 우리 삶의 핵심이 되는 단어를 이미 다 말했고 문법과 은유를 통해서만 혁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나는 감히 이를 부정한다. 미분화(微分化)된 노동은 넘쳐 나고 영원한 것, 즉 행복과 죽음, 우정에 대한 유효한 표현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등 문학이란 무엇인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궤도 또한 곳곳에 녹아 있다. 역자 황수현 교수가 “민낯의 보르헤스”라고 쓴 것처럼,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보르헤스 이전의 “다소 공격적이거나 비판적이며 때로는 유머로 눙을 치는” 혈기 왕성한 보르헤스를 만나 볼 수 있다. △3부 `에바리스토 카리에고`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의 좌절과 실패를 따뜻하게 노래한, 19세기 말을 대표하는 시인 에바리스토 카리에고에 대한 산문집이다. 역자 엄지영 교수의 표현처럼 “전기라는 장르의 규칙에 대해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카리에고라는 시인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하는 일종의 전 텍스트”로서 “새로운 글쓰기의 실험”을 형식에서부터 공고히 한다. 이 작품은 한 시인의 삶과 기억의 편린, 그가 남긴 시를 다루면서도 `탱고의 역사`, `말 탄 이들의 이야기`, `단도` 등에서는 20세기 초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근원적 의미와 풍요로운 전설까지 다채롭게 복원한다. 생명의 원초적 힘을 상징하는 아르헨티나인들의 태도, 그 호전적인 힘과 함께 독립적인 개인을 넘어서는 영원성, 증식하는 미로, 여러 시간이 공존하는 미학적 사건이 어우러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3-16

“칭찬과 비난에 부화뇌동 전 사람 같은 사람의 말인지 살피라”

고전에서 시대정신을 길어 올리는 인문학자 정민 교수가 현대인에게 필요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전하는 책 `석복(惜福)`(김영사)을 펴냈다. 책은 풍부한 식견과 정치한 언어로 풀어낸 세상과 마음에 대한 통찰의 총망라라 할 수 있다. 선인들의 지혜가 깃든 100편의 네 음절 한자문구를 마음 간수, 공부의 요령, 발밑의 행복, 바로 보고 멀리 보자 등 4가지 주제에 나눠 담았다.△제1부 마음 간수: 나를 돌아보고 생각을 다잡는 마음 간수법책의 첫머리를 여는 장은 `석복겸공(惜福謙恭)`이다. `석복`은 비우고 내려놓아 복을 아낀다는 의미다. 광릉부원군 이극배(1422~1495)는 자제들을 경계해 이렇게 말한다. “사물은 성대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자만해서는 안 된다(物盛則必衰 若等無或自滿).” 그러고는 두 손자의 이름을 수겸(守謙)과 수공(守恭)으로 지어주었다. 그는 다시 말한다. “처세의 방법은 이 두 글자를 넘는 법이 없다.” 자만을 멀리해 겸공(謙恭)으로 석복하라고 이른 것이다.△제2부 공부의 요령: 생각과 마음의 힘을 길러줄 옛글 속 명훈들이달충(1309~1385)의 `애오잠(愛惡箴)`에서 유비자는 무시옹에게 칭찬과 비난이 엇갈리는 이유를 묻는다. 무시옹의 대답은 이렇다. “기뻐하고 두려워함은 마땅히 나를 사람이라 하거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인지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인지의 여부를 살펴야 할 뿐이오(喜與懼當審其人吾不人吾 之人之人不人如何耳).” 즉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칭찬이라야 칭찬이지, 비난받아 마땅한 자들의 칭찬은 더없는 욕이라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일은 드물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주장만 내세우며 틀렸다 맞았다 단정한다. 그럴 때는 어찌해야 할까? 내 마음의 저울에 달아 말하는 사람이 사람 같은 사람인가를 살피면 된다. 이 꼭지의 제목은 `당심기인(當審其人)`이다. `마땅히 그 사람을 살펴보라`는 의미다. 칭찬과 비난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제3부 발밑의 행복: 사소함을 그르쳐 일을 망치는 사람들을 위한 치침`검신용물(檢身容物)`에서는 검신, 즉 `몸가짐 단속`에 대한 명나라 구양덕의 말 “사소한 차이를 분별하지 않으면 참됨에서 멀어진다(毫釐不辨 離眞愈遠)”가 등장한다. 관대한 것과 물러터진 것은 다르다. 굳셈과 과격함은 자주 헷갈린다. 성질부리는 것과 원칙 지키는 것, 잗다란 것과 꼼꼼한 것을 혼동하면 아랫사람이 피곤하다. 자리를 못 가리는 것을 남들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착각해도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진무경(陳無競)이 제시한 용물, 곧 `타인을 포용하는 방법`도 설명한다. 진실한 사람은 외골수인 경우가 많다. 질박하고 강개하면 속이 좁다. 민첩한 사람에게 꼼꼼함까지 기대하긴 힘들다. 좋은 점을 보아 단점을 포용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매섭게, 남에게는 관대하게 해야 한다.△제4부 바로 보고 멀리 보자: 당장의 이익과 만족에만 몰두하는 세태에 대한 일침유관현(1692~1764)은 필선(弼善)으로 서연(書筵)에서 사도세자를 30여 일간 혼자 모셨던 인물이다. 사도세자가 죽자 여섯 차례의 부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김낙행(1708~1766)이 제문을 지어 보냈는데 거기에는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 두 가지를 꼽은 대목이 있다. “먼저 가난하다가 나중에 부자가 되면, 의리를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先貧後富 人鮮好義), 궁한 선비가 뜻을 얻으면, 평소 하던 대로 지키는 이가 드물다(窮士得意 鮮守平素).”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을 의미하는 `난자이사(難者二事)`다. 없다가 재물이 생기면 거들먹거리는 꼴을 봐줄 수가 없다. 낮은 신분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못하는 짓이 없다. 결국은 이 때문에 얼마 못 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사람이 한결같기가 참 쉽지 않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8-03-09

세상은 냉정히 흐르고 나는 아직도 거기에…

황혜경(45)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첫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2013) 이후 5년간 쓰고 고친 63편의 시가 담겼다.“빨리 팔고 빠지는 점포들을 여럿 알고 있다/며칠은 가방 어떤 날은 신발 다른 날은 양말 하루는 벨트와 지갑/명료함이란 그런 것이다/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복서의 주먹을 기억한다/단단함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아기 새 같은 것을 움켜쥐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유리의 소리를 머금고 있는 듯 shining(샤이닝)과 dark(다크) 사이에” (`shining과 dark 사이에` 중)시인은 “지나간 확실한 것을 믿는 마음으로 확실하게 지나간 것에 기댄다”고 말했다.“나는 언제나 늦되는 아이였다”라는 등단 소감처럼 황혜경은 현 시대의 급속한 변화와 미래지향적인 삶보다 늘 지나간 시간을 되짚어보고 그 낱낱의 의미를 헤아리는 데 공들여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현실과 자아의 괴리를 목도하곤 했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바로 그 세상의 냉정한 흐름과 자신이 지닌 고유한 리듬 간의 어긋남을 토로하고 있다.“매미가 울더니 귀뚜라미가 울고/눈이 내리니 또 꽃이 필 것이다/절기는 예감하는 나보다 명확하다”―`어려운 예감` 부분명징한 사실성의 세계는 황혜경이 끊임없이 실패를 겪는 언어의 세계를 의미한다. 여기서 언어란 그 자체로 실체성을 갖지 못하고 다만 의미를 발생시키는 지시체로서 소통의 한계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황혜경이 마주한 언어의 세계에서 나는 너와 필연적으로 불화를 일으킨다.“거울 앞에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니? 처음에 나는 나를 생각하다가 너를 생각해 너는? 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깃든 너를 바라봐”―`베란다 B`부분/윤희정기자

2018-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