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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누구의 기억속에 어떤 방식으로 남아 있을지 모를 노래

모든 시인들이 노래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음치에 박치, 몸치인 시인도 적지 않다. `음치시인`에게 노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 들려오는 것.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시인을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또한 많은 수의 독자들은 시를 노래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생생한 과거와 마주한 듯한 사극드라마 촬영장길 곳곳 자리한 시비와 아리랑비도 만나왜군에 황망히 길 터준 신립장군 전설도 들으며외국인들에게도 사랑받는 걷기 좋은 새재길 만끽문경새재 입구에서 1관문까지 셔틀을 이용했다. 버스가 출발하며 운전수가 운영규칙이라도 되는 듯 작은 라디오의 버튼을 누르자, 반가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문경새재 아리랑`이다. 취재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과, 발굴과 보존에 힘썼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까지의 일을 한마디로 압축해보라면 노래에는 기억이 담겼다는 것이다. 겪은 일에 관한 기억이 아니라, 가볼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 얽힌 기억이다.문경새재 1관문 뒤에 마련된 사극드라마 촬영장은 옛 조선을 상상하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촬영장의 한옥 건물들 사이사이를 누비며 그간 책상 앞에서는 느끼지 못한 생생한 과거와 마주한 듯했다.소박한 양반가택의 모퉁이를 돌자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리기에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당 한켠에 둥글게 모여 앉은 할머니 한 무리가 보였다. 봄나들이 삼아 문경새재에 왔다는 점촌 할머니들이었다. 대문 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것밖에는 없는데 집에서 싸온 찐 옥수수며 고구마, 파전에 삶은 계란까지 내주며 반갑게 맞아준다.아시는 아리랑 한 곡 청해 들을 수 있는지 여쭙자 옆에 앉은 푸른 스웨터 차림의 할머니께서 곧장 노래를 불러주셨다. 곡조야 달랐지만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하는 익숙한 노랫말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문경새재 와서 들은 노래를 흉내낸 거라고 한다.자식들은 모두 외지로 나가고 할머니는 집을 점촌으로 옮겼다. 김기현 교수에 따르면 점촌은 전래되어온 민요가 있으나 문경새재아리랑이라 우리가 부르는 민요가 전해지지는 않았다. 행정구역상 다른 곳이다가 문경시와 묶이게 되면서 문경새재아리랑 행사의 한 주체가 되었다. 없던 노래라도 우리가 부르면 그것이 곧 우리 노래라는 말이 떠오른다. 정선처럼 이동이 적었던 곳의 노래는 옛 모양을 유지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노래가 변형되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할머니가 잠깐 들려준 노래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 할머니에게 듣는 문경새재의 전설할머니께서 감주를 한 잔 따라주며 문경새재에 얽힌 전설을 아느냐고 하셨다.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신립 장군은 아느냐고 하신다. 장군 이름은 안다고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어린 신립이 사냥 중에 처녀가 홀로 사는 새재의 한 촌가에 묵었는데, 처녀의 식구는 인근의 괴수에게 모두 잡아먹히고 처녀 혼자 죽을 위험에 처했다. 객의 도움으로 무사히 밤을 넘긴 처녀는 목숨을 의탁하고 데려가주길 청하였으나 신립은 매정하게 곁을 떠난다. 처녀는 원망하며 집을 불사르고 스스로 불타 죽는다. 훗날 장군이 새재에 주둔해 있을 때, 하늘로부터 탄금대로 철수하라는 처녀의 말이 들렸다고 한다. 그것이 장군이 후퇴한 이유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의 주인공은 그 처녀의 원혼이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새재 넘기가 두려운 적군을 앞에 두고 신립 장군이 황망하게 길을 내준 사실은 미스터리로 유명하다. 문경새재에 얽힌 이 전설은, 한양을 버린 임금의 이야기와 닮았다. 왜군이 새재길을 넘고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금은 한양을 버린다. 문경새재를 넘은 것부터가 선조에게는 덜컥할 일이었다. 비극으로 따지면 조선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이어진다. 왕은 자신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느끼고 백성을 버린다. 왜군은 쉽게 함락한 한양에서 배를 불리고 목을 축일 생각이었으나, 도성에는 약탈할 것이 별로 없었다. 개성으로 피난한 왕의 궁궐에 백성이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도성에서 득을 보지 못한 왜군은 한양 인근을 약탈한다. 왜군에 쫓겨 수백리 길을 걸어온 이들이 섞여 있었을 것이다.전쟁이 이들에게 고통인 것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적들이 처들어오면 약탈과 살육을 당하리라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마당에, 혈육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맡길 조정이 기별도 없이 사라졌다. 백성은 불을 지른다. 자기들처럼 힘이 없으면 약탈당하고 죽임당할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해도, 나라가 먼저 자기를 버렸다는 사실이란 이렇듯 용납하기 힘든 것이다.처녀의 전설을 생각하며 새재를 오를수록, 백성을 내친 영웅이 어떻게 저주받는지 상상한 옛사람들의 마음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전설을 입에 담았을까?2관문을 지나서 도적떼와 여행객이 번갈아 쉬어갔다는 마당바위를 지나치다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왜란 이후에도 이 길을 오가던 온갖 인생들이 있었다. 산적도, 산적을 만난 이들도 나무를 할 때는 같은 노래를 불렀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불렀을 노래의 의미며 정서를 상상하기가 힘들다. 신세가 험하기로 치면 따라잡을 수 없는 작부가 탄광촌으로 들어가 불렀을 법한 아리랑의 노랫말은 귀에 익겠지만 직접 듣는 기분이 어떨지도 짐작하기 어렵다.이리도 감히 엿듣기 힘든 노래의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옛 사람의 삶에 밀착된 노래를 찾아듣겠다고 할 때,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제 대답을 해야 할 때이건만, 새재의 마지막 관문으로 향하면서도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바닥이 환히 보이는 도랑과 봄볕에 자꾸만 밝아지는 흙길은 곱기만 해서, 걸으며 상상한 피가 튀는 역사가 민망해질 지경이다. □ 문경새재를 찾은 미국인 관광객 “판타스틱!”6.5㎞ 정도라는 길은 너무나 평평해서 산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이 느낌은 당연한 것인가보다. 적어도 2관문과 3관문 사이에서 만난 미국인 가족을 만나 알게 된 바로는 그렇다. 갓난아이를 태운 유모차 두 대를 끌고 네 살, 여섯 살의 두 아이는 걸려서 3관문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아이들은 개구진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반갑게 인사했다. 문경새재를 걸어온 소감을 물었다. 그는 1초의 고민도 없이 “판타스틱!”이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러면서 산길을 이렇게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이라 했다. 유모차를 끌고 3관문까지 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잘 다져진 넓은 흙길이다.교귀정에서 만난 서울 부부의 얘기도 같았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문경새재를 찾는다는 부부는 “걷기엔 문경새재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맨발로 걷기 대회`가 열릴만한 곳이다.길의 가장자리로 시비들이 갑자기 등장한다. 비석마다 멈춰서 시를 읽었다. 선비였을 이들의 마음 풍경이 다채롭다. 아우에게 바치는 이별의 노래부터 새재의 웅장함과 아름다운 경관에 사로잡힌 노래까지, 이들은 이들대로 무심한 길섶에 자기들의 이야기를 남겼다.3관문에 거의 다다라서는 트로트 한 자락이 들린다. “오빠가 간다/이 오빠가 간다. 내 나이를 묻지 마라/난 영원한 오빠야/사랑은 해도해도 나는 항상 뜨거워...” 등산복 차림에 건장한 남자가 부르는 노래다. 모자엔 선글라스를 얹은 채 아내인 듯 보이는 사람과 함께 이 기분 좋은 길을 걸으며 그는 송대관의 `오빠가 간다`를 부른다. 동네 산책길에서라면 빤한 취향으로 보였을 그 노래가 어쩐지 반갑다. 우리가 저마다 가장 익숙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보여주고자, 중년의 남자는 저 앞에서 “오빠가 간다”며 노래하는 듯하다. 새삼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은 “뽀롱뽀롱 뽀로로” 합창을 하며, 젊은이들은 이어폰을 꽂은 채 각자의 취향을 저격한 노래를 듣는다.이 당연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노래를 찾고 또 남기고자 하는 마음의 정체를 밝히라고 한다면, 상실감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길의 관광객이지 호환과 약탈이 두려운 피란민이 아니다. 누군가 고통 속에서 걸었던 길을, 지금 우리는 관광중이다. 이 길을 춤추며 지났다던 왜군보다도 어쩌면 우리가 조상들로부터 더 멀리 있다고 해도 되리라.드디어 3관문을 지나치기 전, 아리랑비 앞에 섰다. 눈은 아리랑비에 가 있건만, 마음은 얼마 전 SNS에서 본 농담이 차지한다.터키의 문화재 실레 칼리스를 보수한 사진이 농담거리로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다. 숱한 세월 동안 거의 부서진 탑은 보름 동안 삭아버린 연탄재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터키 정부는 그 탑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지나치게 매끈하게 보수된 새 건축물을 닮은 `스폰지밥` 캐릭터가 고 성터의 별명이 되었다. 이 결과를 사람들은 비판적으로 본다. 그런데 터키 문화재 사진 아래 누군가 남긴 댓글이 인상 깊다. “어차피 이것도 세월이 지나면 다 같아지는 것 아니에요?”먼 훗날 이 땅에 와서 길을 걸을 사람들이 우리의 후손일지 아닐지 모르겠다. 그들이 유전적으로는 우리와 가깝다고 해도, 문화적으로도 같은 종족이라 믿을 필요가 과연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옛 시대와는 다르다. 훗날의 사람들이 우리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 사람들 모두에겐 저마다의 노래가 있다고작 반나절을 걸어 만난 아리랑비 앞에서 반세기 이후에 이 돌이 어떤 의미일지 상상하며 땀을 닦았다. 한 시대가 이 길의 아리랑을 기억한 방식을, 후세의 사람들이 좋게 생각해주기를 우선 바란다. 비석 옆에 놓인 앙증맞은 단추함도 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인형의 집처럼 생긴 단추함 안에는 꽃밭이 그려져 있다. 한복 차림의 여인이 그 안에서 한창 꽃놀이를 하는 중이다. 사람들이 인형의 집처럼 보이는 단추함으로 와서 한 번씩 단추를 눌러본다. 단추를 누르면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올라가는 사람이 재미삼아 빨간 버튼을 눌러보고, 내려오던 이가 궁금해서 파란 단추를 눌러본다. 각각의 단추를 누를 때마다 송옥자 씨와 송영철 옹의 노래가 번갈아 길에 퍼진다.이 장난으로 노래는 기억될 것이다. 완전히 다른 맥락이 되었지만, 또 다른 곳에 가서 전혀 새로운 분위기의 다른 노래가 되어 불릴 것이다. 비록 노래를 할 줄 모르지만, 그래서 아리랑 한 소절도 어디 가서 제대로 부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거쳐 가다 들어본 이 노래에 어떤 사연이 담겼는지 기억할 것이다. 우리들에겐 저마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4-18

새로운 문화콘텐츠는 과거 아닌 현재서 찾아야

“영천아리랑을 영천 사람이 모른다. 영천아리랑은 애초에 북한의 용천아리랑이었다. 적어도 1922년의 자료에서 확인한 바는 그렇다. `용천`을 잘못해서 영천이라 적은 것이다.”김기현 교수의 말은 초반부터 충격적이었다. `남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사실은 이러하다`는 식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닌지라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는데, 우리가 이런 사실관계를 밝힐 때는 학술적으로 책임질 만한 전공자를 찾아야 한다. `민요전승론`이 전공인 김기현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정부 지원을 받아 1986년에서부터 1983년 사이에 밀양아리랑 조사를 했다. 박춘석 씨의 아버지 박남춘이라는 분이 밀양에서 기방을 했는데 기생을 시켜 레코드로 곡을 만들어냈다. 밀양 말로 부른 것이 아니라 서울·경기 지역에서 불리던 `양산도` 가락이었다. 근본이 기생의 노래니 특수계층의 노래가 된다. 이를 근거로 밀양아리랑은 경기민요라고 했더니 크게 혼이 났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밀양 분들이 부르니까 밀양 노래가 되었다는 것이다.”밀양아리랑은 없었으나 이제는 있다는 말을 기자가 과연 이해하는지 김 교수는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한편으로생활밀착형 노래가 특별장르로 정착전승의 주체 따라 다양하게 변용돼□변사와 관객, 나무꾼과 기생문경아리랑이 학자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물었다.“아리랑은 지역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불렀던 민요였다. 그러한 노래가 오늘날에 와서 특별한 하나의 장르로 탈바꿈한 것이다. 밭 매고 모내기할 때 부르던 생활 밀착형의 노래가 나운규의 영화가 히트하면서 특별한 노래양식이 되어버렸다. 예컨대 정선아라리에서 아라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 말이라기보다는 노래임을 알려주는 말이다.후렴이 있는 노래를 일컫는 `알아리`가 지금의 아리랑이 된 것이다. 그에 상대되는 개념으로는 맨아리가 있다. 맨아리는 후렴이 없는 맨노래라는 뜻이다. 나운규 이전에는 아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다만 각 지방마다 전승되던 민요가 있을 뿐이었다. 1930년대에 오면서 민요에 아리랑이라는 후렴이 붙은 곡이 많이 만들어진다. 영화 아리랑의 영향이다.”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영화 한 편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는 말이 믿기 힘들었다.“1927년과 1928년에 걸쳐 영화 `아리랑`을 본 사람이 70만 명이 넘는다.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1930년대 들어가면 아리랑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나운규가 영화주제곡으로 만들어 넣은 아리랑은 기녀 집단에 의해 다듬어진 것이다. 일본식 곡조인데 반조로 돼 있어서 슬프다. 변사가 나와서 노래하고 설명도 했는데 이것이 인기를 얻으며 음반으로 만들어졌다. 이 노래를 또 기녀 출신의 가수가 부르고 히트를 친다. 그래서 더욱 알려지게 된 것이다.”김 교수는 문경아리랑의 기원설에 대한 생각도 상세히 밝혔다.“1894년도에 헐버트가 듣고 채보한 노래도 기생들이 부른 노래다. 문경아리랑을 주목하는 이유는 1870년대부터 경복궁을 짓는데 일꾼들이 다 서울로 올라갔다. 경상도 사람들은 전부 문경새재를 지나갔다. 7년에 걸친 경복궁 공사의 고통을 잊기 위해 자기 고향 노래를 부른다. 각 지방의 아리랑이라고 하는 노래들이 오늘날 서울에 모여든 것이다. 그런데 그 노래를 기생과 소리꾼들이 부르게 된다. 전문적으로 노래를 불러 먹고 사는 사람들이 그 노래를 마구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오늘날 경기아리랑이고 긴아리랑이다.”노랫말이 문경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당시의 사람들이 알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서울 사람들이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런 노래를 부르니까 기생들이 그걸 퍼뜨리는 것이고 나중에는 헐버트가 들은 것이다.”결론은 헐버트의 아리랑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원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인상적인 것은 따로 있다. 아리랑을 변형시킨 변사와 관객과 일꾼과 소리꾼, 그리고 기생의 존재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후손에게 장차 전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유네스코가 주목한 것은 사람이 아닌 `종목`전승이란 변사와 관객처럼 마주한 관계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일꾼과 기생처럼 마주할 일이 없는 이들이 섞이는 일이다. 우리가 문경아리랑의 원형이라 불렀던 송영철 옹의 이야기가 김 교수의 이야기 속에서는 여러 전승주체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진다.“변형된 아리랑이 아닌 고형의 아리랑이 아직까지 불리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정선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변형되지 않고 남아있는 아리랑이라고 해서 그 아리랑이 모든 아리랑의 원류라고 지칭해서는 안 된다.”김 교수는 태백산맥에 걸쳐서 불린 민요들을 상상해보라고 했다. “옛날에는 인접 지역으로도 이동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고립된 지역은 고유성과 독자성이 있을 수 있지만 모심기 노래 같은 경우는 다 똑같이 부른다. 그 민요가 정선에는 아직 남아 있는 것이고, 다른 지역은 나름대로 변형되어 전승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노래 중에 고형의 아리랑이 정선에 남아 있었을 뿐이지 거기서부터 퍼져나갔다고 할 수 없다. 그 고형의 아라리가 슬프고 애잔하고 청승맞으니 부르는 것이다. 송영철 옹이 나무할 때 아리랑을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송 옹의 노래는 투박했다. 우리가 그것을 문경아리랑의 특색이라 여길 때, 피치 못할 오해가 있다. 그 질박함은 문경의 것이 아니라 일꾼의 것이다. 전승 주체가 다양함에 따라 들리는 특색인 것이다.“유네스코가 사람을 등록한 것이 아니라 종목을 유산으로 등재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김 교수의 조언이다. 종목을 유산으로 삼았다는 것은 어떤 지역이나 계층, 전문가가 점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이 노래, 아리랑을 얼마나 소유하려고 노력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다음으로 문경아리랑의 장르적 변용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우리 시대의 전승 주체는 나무꾼도 기생도 아닌 다양한 장르의 생산자라고 여겨져서다.“변용과 과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실을 확대해서도 안 된다. 자부심은 좋지만 확대·과장해서는 양질의 콘텐츠로 승화할 수 없다. 확대·과장된 아리랑이 언뜻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지만 오히려 아리랑의 가치를 스스로 깎는 일이다. 아리랑의 가치는 그것의 활용과 변화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유네스코 등재 거치며 왜곡현상 커져철저한 기준 정해 전수 실태조사 해야진실에 기초한 콘텐츠 개발이 중요□찾을 수 없는 `뿌리`를 찾아서김기현 교수는 아리랑 전문연구자로서 누구보다 아리랑이 널리 불리기를 소망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다시 아리랑이 주목받게 된 것이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리랑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이들 때문이다. 김 교수의 말에 따르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일을 계기로 아리랑을 왜곡하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아리랑 일만수 사업은 `아리랑`에 의미를 싣기보다는 `서예`라는 것에 더 의미를 둬야 한다. 노래 `아리랑`을 시각예술 아리랑으로 장르변환 한 것이다. 꼭 서예가 아니어도 좋다. 그림으로, 소설로, 영화로 얼마든지 변용될 수 있다. 아리랑은 천의 얼굴로 바뀔 수 있다. 그 중에 `서예`라는 하나의 얼굴로 바꿔본 것이다. 아주 큰 사업이었다. 사업비도 만만치 않고 500일이 넘는 시간과 공력이 투여됐다. 도록을 만들어 해외 한국어학과가 있는 127개 대학과 문화원에 보내기도 했다. 문경시의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없었던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틀리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아리랑은 `유네스코 사건`을 거치며 또 변화할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게 될 사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다. 아리랑은 기생과 나무꾼처럼 운명이 서로 다른 이들을 한 데 묶는 특유의 역동성으로 기념적인 종목이 되었다. 후손에 전하려면 이 종목이 건강해야 한다. 문경아리랑의 연구에 뛰어드는 후학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렸다.“문경 지역의 아리랑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 문경아리랑의 뿌리를 어디서 찾겠는가. 당연히 찾을 수 없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무대에서 공연되는 노래만으로는 문경아리랑 전체를 알 수 없다. 공연 시간은 정해져 있고 곡의 다양성 면에서도 한정적이다. 반복해서 부르고 듣지 않으면 잊어버리는 것이 민요의 특성이다. 철저한 기준을 정해서 전승 실태조사를 해야 한다.예를 들면 상주아리랑은 1950년대 기생 김소희가 부른 신조아리랑이다. 지금에 와서야 상주아리랑이 된 것이다. 김소희는 전라도 광주 사람이고 육자배기 풍으로 아리랑을 불렀다. 사설에도 상주에 관련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학자는 어떤 문화건 진실이 줄고 거짓이 범람하면 생명력이 짧아진다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에 기초해야 하는 학자로서 후학들에게 대중의 이런 성질을 강조하고 싶다.”▲ 경북대 김기현 교수부화뇌동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진실의 여부를 가장 잘 파악하는 것 또한 대중이다. 대중문화의 본질 중 하나는 사실인지 아닌지가 빨리 간파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문경새재를 배경으로 드라마나 소설을 쓰고자 하는 창작자들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콘텐츠의 기반을 과거에서 찾지 말고 현재에서 찾길 바란다. 특히 구전되는 민요의 경우는 옛날에서 찾으면 거짓말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제가 문경아리랑에 대해 더 이상 논문을 쓰지 않는 이유는, 더 이상의 `사실`을 만나지 못해서다. 사실을 만나지 못하면 거짓을 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문경 아리랑이 소설이나 영화화 된다고 해도 문경아리랑이 지닌 지금의 가치면 된다. 민요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좋은 민요인가? 변형의 과정을 포함해 지역민들에게 사랑받는 문경아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장르 변용되기에 충분하다. 1960년대에 탄생한 노래는 좋고 요즘 K팝은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노래는 골동품이 아니다. 많으면 좋고, 오래되면 좋고, 원류면 좋은 게 아니다. 그런 잘못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의식들이 과장과 왜곡을 낳는다.”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4-11

견훤 설화, 이 매력적인 스토리텔링과 만난다면…

섬진강 서쪽에서 주로 불린다고 하여 `서편제`라 부르는 소리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얼마나 되는가? 구절이나 가락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러나 호기심만 생긴다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이 세기말을 휩쓸고 다음 세기로 넘어와 다음 세대의 기억으로 든든히 자리잡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영화가 있었다. 새재길 금하굴에 전해지는 `지렁이설화`현대적 상상력 더해 새 이미지로 재생`문경` 배경의 소설·드라마 탄생도 기대문경아리랑은 결국 `길`의 이야기소설 `반지원정대`·웹툰 `신과 함께` 등토속적 신화 인물 캐릭터화 시도해볼만아리랑은 노래다. 그래서 고유의 리듬과 음악성을 배제하고 말이나 언어를 통해 미적 정서를 드러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경아리랑의 사설과 가락과 곡조를 모르더라도, 문경아리랑을 후대에 길이 남길 방법이 있다. `서편제`와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서편제`는 영화이기 전에 소설이었다. 고 이청준의 작품이 감독을 감동시키고, 감독의 눈에 띈 배우들이 장단을 맞추고 소리를 남긴다. 문경아리랑이라고 이런 경로를 타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서편제`처럼 소리꾼의 이야기여도 좋겠지만 상상을 소리에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서편제`가 주는 감동은 가부장적 예술혼인데 한 글자로는 `한`이다. 한을 형상화할 방법을 꼭 소리꾼의 이야기에서만 찾아보자고 한다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이들이 있다. 바로 한국의 시인과 작가들이다.그들에게 문경아리랑의 스토리텔링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이병일 시인은 “문경아리랑에도 설화나 탄생배경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현대적인 정서를 버무린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전통성과 결합해 재미있고 독특한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다. 옛것이 주는 익숙함과 현시적이지 않은 특징 때문에 낡고 닳은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안에는 은폐된 역동성이 있다. 창작자로서는 그 숨겨진 역동성을 발견해 내는 일이야 말로 흥미를 끈다. 문경새재 넘어가는 길에 금하굴이 있다. 견훤과 관련된 지렁이 설화가 얽혀있는 곳이다. 이런 상상의 이미지는 새로운 이야기와 이미지를 불러낸다.”시인이 예로 든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후백제 견훤의 설화다. 설화에 따르면 견훤의 아버지는 토룡이다. 여기서 토룡은 지렁이를 말한다. 동침하고 사라지는 남자의 옷에 부호의 딸이 몰래 실을 꿰어 둔 바늘을 꽂아둔다. 날이 밝은 뒤 그 실을 따라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는 이야기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에는 오래 묵은 지렁이를 용이 되기 전 단계라고도 했다. 이병일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절로 시를 쓰고 싶은 게 당연하다고 한다.이 시인의 상상력은 문경아리랑이란 노래 안에서 고개를 밖으로 돌려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재미있는 요소들을 향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옛것을 새것으로 바꾸는 걸 좋아해요. 드라마 `정도전`, `장영실`, `육룡이 나르샤`를 보세요.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야기를 고전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펼쳐내죠. 의복이나 어법을 비롯한 역사적인 풍습 속에서요. 옛것은 낡은 게 아니에요.”□ 드라마의 가능성이 곧 한류의 가능성영화나 드라마는 현대의 가장 파워풀한 매체다. 문경아리랑을 알리는 데 영화나 드라마처럼 좋은 매체는 없을 것이다. 이 시인처럼 문경아리랑의 주변과 저변에서 매력을 느끼는 드라마 창작자들에게 만일 문경아리랑을 알리는 임무를 준다면 어떻게 될까? 근래에 문경아리랑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해졌다고 하더라도 당장 문경아리랑의 역사적 기원이나 전승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까?소설가 이은선 씨는 옛것을 현대화하는 작업에 심취해 있다. 옛것을 그대로 살려내는 재미에 빠지는 작가들도 있지만, 이 씨처럼 현대화하는 데서 작업의 힘을 얻는 이들도 있다. 이들이 말하는 현대화란 어떤 것일까? 작가마다 대답이 다를 것이 당연하겠으나, 이들의 현대적 상상력이 어떨지 기대하게 해줄 작품이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고 신기섭 시인의 작품 `문경`이 그것이다. `문경`은 한 편의 시지만, 수십 편의 드라마로 만들어질 만큼의 깊이를 담은 작품이다.“아리랑을 소설로 쓴다면 뻔한 얘기나 한스러운 얘기 말고 현대적 감각에 맞는 에피소드들을 총동원할 것 같다. 아리랑의 현대화가 계속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구전되면서 그 긴 시간들을 다 이겨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리랑은 끊임없는 현대적인 변형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노래다. 그 옛날에도 아리랑은 진화해왔다. 아리랑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형될 것이다. 소설가로서 옛것과 끊임없이 교신하는 매체로서의 아리랑 다시쓰기를 해보고 싶다. 토속적인 장면에서 떠올리는 아리랑이 아니라 현대적인 장면에서 떠올리는 아리랑을 생각한다. 요즘은 엽전 위조범의 아내 이야기를 쓰고 있다. 오히려 과거의 소재들이 내 관심을 끄는 편이다.”이 씨 같은 소설가들의 관심과 작업이 지속된다면, 문경이라는 도시에 담긴 근대적 풍경과 현대적 인물이 소설이나 드라마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문경아리랑을 비롯한 전국의 모든 아리랑에 근대화의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우리는 확인한 바 있다.□ 장기적인 투자로서의 문학제강원도 정선군의 정선아리랑문화재단은 `정선아리랑 문학상 공모전`을 개최했다. 정선아리랑 콘텐츠 개발을 위한 원천 스토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조정래의 `아리랑`이라는 대하소설이 출간돼 성공을 거둔 예가 있으니 한번쯤 눈을 줄만한 공모전이다. 그런데 공모전을 통한 콘텐츠 개발의 한계도 뚜렷해 보인다. 아리랑 하면 이미 관심사에서 멀어져 있는데다가 낡은 느낌을 준다. 민족주의적인 색채도 쓰는 쪽이나 읽는 쪽에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공모전의 수상작이 이름을 얻고 불후의 명작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 같은 출판시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고 할지라도 작가의 개인적 성취로만 남는 일이 더 많다. 사람들에게 이슈가 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문학시장 자체가 너무 작다.물론 어떤 이는 작은 시장을 이점으로 여기기도 한다. 투자비용이 적고 오래 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작품이 탄생하면 지금 당장은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많은 것이다.그러니 당장의 소득은 없을지라도 씨앗을 심는 정도의 의미가 있다. 소득이 눈에 당장 띄지 않더라도 지역의 세계화에 오래도록 기여하는 방법이 문학임을 더 말해 무엇할까. 다만, 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작가들의 재능 말고도 확인할 것이 있다. □ 문학의 힘은 보편성에서 온다“보편적이고 현대적인 서사구조가 강한 그림책이나 동화는 많이 들어오지만 그 나라의 전통적인 정서가 강하면 우리 정서와 안 맞는다는 명분 아래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다.” 교수이자 아동문학가인 김서정 씨는 전통적 소재가 아동출판 시장에서 접해온 장애를 이렇게 말한다.“어린이 책은 어른책보다 보수적이고 국수적인 성향이 있다. 동화가 어른들의 가치체계를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용도로 발생된 의도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이 확립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나라의 가치관이나 문화를 도입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데, 자기 나라의 문화는 열심히 가르치려고 한다.”이 말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는 계몽성이 문화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는 얘기다. 두 번째 의미는 출판시장의 거부반응이 말해준다. 그동안 아동출판시장에서는 이른바 한류에 도전했던 작가의 기획들이 `한국적 가치체계`를 대중화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김서정 교수의 말은 한국의 작가들이 아리랑에서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을 길어 올릴 때 세계화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길 이야기의 뿌리를 찾아서문경아리랑은 결국 `길`의 이야기다. 길을 걷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길가는 이들이 서로 무리 짓는 데서 오는 반가움이 문경아리랑에 담겼다. 천리길이 품은 특수성은 셀 수 없기도 하겠지만, 기나긴 길의 이야기에서 보편성을 찾아낸다면야 왜 없겠는가.반지 이야기를 영화화한 `반지 원정대`는 서로 원한 어린 종족이 하나의 무리를 짓는 데서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다. 두 번째로 영화화된 `두 개의 탑`에서는 베어지는 나무들이 주요한 캐릭터로 동원되었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J. R. R. 톨킨은 북유럽 신화와 고대 언어로 오늘날의 판타지 장르를 만들어낸 장본인으로 이제는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톨킨의 이 반지 이야기도 1980년대 한국에 처음 소개될 때는 제목이 `머나먼 산, 머나먼 강`이었다. 북유럽의 낯선 문화는 산과 강을 내세운 여행담의 모습으로 아이들과 만났던 것이다.주호민 씨의 `신과 함께`는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길을 다룬 웹툰이다. 토속적 신화 인물을 캐릭터화 해서 흥행하는데 성공했으며, 한국적 신화를 현대적 테마로 되살려내면서 평자들의 호평도 얻어냈다. 토속의 현대적 상상물이라는 어려운 미션을 그야말로 신화적으로 수행해낸 셈이다.작가가 다양한 매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기획의 산물이다. 한국의 신화를 공부했으며, 공부한 바를 분류하고, 분류된 지식 중에서 대중의 흥미를 끌 요소를 스토리화하는 과정에서 전진 배치함으로써 대중의 반응을 `유도`했다.문경아리랑이 웹툰으로 만들어진다고 가정해보자. 전통적 요소가 착수단계부터 한계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작가가 어떤 자료를 수집하고 거기서 어떤 영감을 얻는지 어떻게 제한하여 짐작할 수 있겠는가. 사회가 할 일은 우리시대 웹툰 작가를 비롯한 모든 분야의 창작자들이 문경아리랑에 관해 읽을거리와 볼거리와 들을거리를 준비해놓는 것이다.자료 가운데 어떤 것이 영감을 줄지 예단할 수는 없다. 자료가 많을수록 상상할 여지도 풍부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극과 퓨전극이 여러 방송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는 역사학과 드라마 시장을 잇기 위해 역사콘텐츠라는 학문까지 낳았다. 역사가 풍부해야 드라마도 히트할 수 있음을 이미 여러 사람이 알고 있다. 문경아리랑을 어떤 식으로건 다룬 웹툰이 나오기까지는 작가의 능력만이 아니라 사회가 오래도록 합의해서 쌓아온 자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4-04

문경새재서 선비와 호랑이 사냥꾼을 만날 수 있다면…

관광 해설자 이춘자 씨에게 물었다. 문경새재를 찾은 관광객들은 어떤 식으로 문경아리랑을 접하고 가게 될까? “아시다시피 옛길박물관에 아리랑 상설 전시 공간이 있고요. 문경새재 옛길 2관문에 또 문경 아리랑 비석이 있어요. 비석 옆에는 아리랑이 흘러나오는 스피커가 있어서, 자연 속에서 아리랑을 눈으로 보고 귀로도 들을 수 있죠.” 문경시는 실제로 얼마 전 박달나무를 새로 심었다. 생태공원을 들러 가지 않는 관광객들도 문경의 명물인 박달나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관광 해설자 입장에서도 더 자연스럽게 문경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소개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문경시에서 성황리에 매년 열리는 축제는 `달빛 사랑 여행` `전통 찻사발 축제` `맨발로 걷기 대회` 등이다. 사과와 오미자, 한우축제도 있다.축제 관계자들은 “관광객들이 많은데, 이분들이 하룻밤 자면서 이벤트를 제대로 즐기고 가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문경문화원에서 주최하는 `달빛 사랑 여행`은 과거시험길을 직접 체험해보는 야간 이벤트다.문경새재라는 명승지의 풍경과 달밤 산길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축제다. 이벤트 중에는 `문경 아리랑 공연`도 있다. 그런데 이춘자 씨의 말에 따르면, 이 공연은 일방형이라고 한다. 함께 부르고 어울리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14년째 펜션 `강이 있는 풍경`을 운영해 온 김희태 씨는 “문경을 찾는 관광객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문경새재를 거쳐 간다”고 말했다. 문경시의 관광문화개발이 문경새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경새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펜션임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치르는 여러 축제들이 숙박업에 끼치는 영향은 거의 전무하다고 한다.“축제 기간 동안 문경새재 입구는 복잡해지는데 숙박 관광객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문경이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해 있잖아요.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숙박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거죠. 몸소 체험하는 축제가 없으니 관광객들의 발을 붙들지 못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체험하는 축제로는 맨발 걷기 대회라는 체험 축제가 제일 나은 것 같아요.”실제 문경에서 펜션을 운영한다는 것은 관광객의 요구 사항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저희 같은 사람들의 의견도 좀 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김 씨의 말은 그래서 더 일리 있어 보인다.“관광객들은 전통문화에 흥미를 느껴요. 체험 관광을 좋아하죠. 레일바이크가 그렇고 걷기대회가 그렇습니다. 문경은 정말 문화적으로 활용할 것들이 무궁무진한데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문경시민으로서 답답해요.”□ 관광객이 머물만한 매력적 환경 만들어야김 씨는 흥밋거리를 만들어 하루 묵을 걸 이틀 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문경시에서 관광업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며 그것이 결국에는 문경의 산업이라고 했다. 방문객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두 사람이 하는 말에는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 뭔가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종필 문경시 관광진흥과장에게 아리랑이 관광과 축제에 어떻게 접목되는지 직접적으로 물었다. “지금 현재 아리랑 축제를 기획하진 않았습니다. 민간단체들이 주도적으로 해나가면서 시에서 후원을 해주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입니다.”김희태 씨나 이춘자 씨가 들었다면 섭섭할 얘기다. 그러나 내막을 알면 꼭 그렇지도 않다. 민속원이 펴낸 `새로운 축제의 창조와 전통축제의 변용`에서 이승수 씨는 문화관광축제의 문제점을 여섯 가지로 압축했다. 그 중 네 가지가 축제를 벌이는 주체의 문제다. 지역을 다녀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점이 관 주도형 축제가 많다는 것이다.관이 주도하면 아무래도 운영상 경직성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공금을 집행하는 데서 관은 아무래도 느리고 조심스럽다. 역동적인 운영을 끌어내기 어려운 이유다. 관이 주도하다보면 시민의 자발성은 아무래도 식는다.민간과 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실이 아리랑 축제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이란 다름 아니라 `아리랑에 대해 기대하고 오는 관광객들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수요가 불명확한데 적극적으로 수요를 창출하기가 과연 관의 입장에서 쉽겠는가. 관광축제는 지역의 누구나 필요성을 느끼기는 하지만, 시장의 자발적 힘으로 실현시키기엔 걸림돌이 의외로 많고도 크다. 김희태 씨의 견해와 달리, 관광축제는 콘텐츠로서 덜 매력적이라는 것이 전문연구자의 지적이다. 문경시는 세계군인체육대회처럼 큰 규모의 사업에서 다른 지자체라면 빠지기 쉬울 적자의 늪을 뛰어넘어 흑자를 보여주고, 도단위 경창대회가 생기자 시단위 경창대회를 폐하는 등의 효율성을 보여준 적이 있다. 겹치는 행사를 축소시킬 줄 안다는 것은 효율을 위해 그만큼 과감하다는 뜻이다.조급하게 만들어 망치느니 준비된 선수에게 외주를 주어서라도 자발적 참여를 후원하고 싶다는 입장을 이해 못할 것은 없다. 자발적 참여를 후원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외주를 줄 수 있다는 뜻이리라. 민간업체가 어느 정도의 지원금을 받아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이다. 김희태 씨는 이에 대해 “외주를 맡겼을 때 지역색을 잃어버리고, 단편적인 내용의 행사들이 주를 이루게 돼 있다”고 말한다.다들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행사를 도맡아 할 줄 아는 누군가 주도해서 지원금을 타내고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고 생각해보자. 어디선가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관이 주도하지 않는 문화관광축제는 안 그래도 주체가 불명확한데 이런 잡음마저 들리면 형평성의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관광축제 연구자가 제기한 여섯 문제 중 하나는 축제가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는 지역이 편중돼 있다는 것이다. 지역축제는 누군가에게만 상대적으로 희소식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외주를 줄 경우 외주업체가 지역의 대표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통합의 이 같은 저해요소를 시가 섣불리 지원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테마가 있는 `아리랑 민속마을` 조성에 노력 기울여행사가 많은 도시일수록 지역행사에 의존하는 전문업체의 생태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전문업체들의 경영마인드는 창의적이기 쉽지 않다. 노래로 치면 이미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고, 실험보다는 현상을 유지하는 쪽의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울산의 산악영화제에 참여한 케이터링 업자 나종하 씨의 말도 참고할 만하다. 그는 오십 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부스를 마련했다. 모든 수익은 자신이 가져간다는 소리에 재료도 신나게 준비했다. 그러나 행사가 열린 사흘은 케이터링 업자인 그로서는 처참했다. “마지막 날 설비 대여료를 치를 때 대여업체와 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나 씨는 말했다. 줄 돈이 없었던 것이다.지역행사를 쫓아다니는 이른바 `보따리장수`들의 경험이 이러하다. `문화서비스업`이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수요 한 줄기가 자리 잡기까지 축제라는 시장 자체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다. 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는 언제나 있었고, 그에 따른 합의와 예산도 탄생해왔다. 그러나 이 투자는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어서, 결국엔 시정을 담당한 이들도 머쓱해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대다수의 지자체 입장에서 이 생존의 길은 운명이다. 대체 축제는 어때야 한다는 말인가? 한국민속촌의 사례는 전통체험이라는 시장의 수요를 어떻게 창출하는지 보여주는 한 예다.한국민속촌은 벨을 누르고 도망가는 장난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할 때는 정작 없었던 줄임말을 만들어냈다. `벨튀`가 그것이다. 민속촌은 1970~80년대에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가는 심정을 느끼게 한다. 대문 안에는 주인을 연기하는 단역이 있어서 화를 버럭 내주기도 한다.이종필 과장은 “문경새재 아리랑을 보급하고자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합니다. 문경읍 고요리의 고요 아리랑 민속마을을 조성한 이유가 그것”이라고 했다.고요리는 아리랑 마을로 지정된 하초리와는 십 리 넘게 떨어진 곳이다. 하초리가 문경아리랑의 기원지로서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맞지만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도 따로 길을 내고 있다는 얘기다.하초리가 기념장소인 동시에 살림공간이라면 고요리는 응접공간인 셈이다. 고요리에서는 노래를 배울 수도 있고 부를 수도 있다. 테마가 있는 아리랑 민속마을을 조성해서 관광객과 문경이 어우러지도록 하는 것이 계획이다. 체험, 전시 등을 주민과 관계자들이 계획단계에서부터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고요리 중간계획 보고회에서는 관광객들이 테마 숙박을 하면서 아리랑 전수와 연수도 하는 프로그램이 그려졌다.여기에 한 가지를 더 그려보고 싶다. 문경새재 길에서 옛날에 있었을 법한 사건과 캐릭터들을 재현해낼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이 사업을 함께 하는 그림이다.소설 `객주`의 인물들이 오갈 수 없을까도 싶고, 과거만 십년 째인 `잉여`선비들이 철없는 객담을 건네다 관광객에게 구박을 당하는 코미디가 있으면 어떠할까도 싶다. 호랑이 사냥꾼의 호위를 받으며 달빛 여행길을 걷는다거나, 대동여지도를 펼치며 출발지와 행선지를 묻는 김정호를 만나보고도 싶다. `걷기`로 나날이 유명해지는 문경새재의 아련한 길에 누군가 이처럼 구체적으로 드라마틱한 그림을 그려줄 수는 없을까.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3-28

“아리랑무형문화센터는 모든 아리랑 품을 둥지”

그간 `문경아리랑`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고윤환 시장이 지난 16일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문경아리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유에서부터 향후 계획까지를 가감 없이 털어놓은 고 시장과의 인터뷰를 게재한다.아리랑 정신 깃든 새재 입구에 아리랑무형문화센터 만들어야악보집·음반 제작 등 활발한 홍보세계화포럼 개최로 위상 제고 한몫아리랑도시 목적은 `대동과 상생`시민 동참으로 시너지 효과 기대- 문경시를 대표할 만한 이미지중 왜 하필 `아리랑도시`였는지요.△ “사람에게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듯이, 지역도 그 지역만의 정체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양반의 고장 안동, 삼백의 고장 상주처럼 그 도시의 특성에 부합되는 이름이 있는 반면, 문경시의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뚜렷한 이미지를 찾아내 제시하진 못했습니다.문경하면 그래도 문경새재가 랜드마크인 것은 자타가 인정하듯이 분명하고, 옛길, 성곽, 아름다운 자연과 백두대간의 중심이 바로 이곳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문경새재 길을 넘어갈 때 부르는 아리랑이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아리랑은 적어도 100여 년 전까지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질 않았습니다. 그동안 학자들에 의해 수없이 많은 이론들이 만들어지곤 했지만 뚜렷한 근거를 제시한 내용은 없습니다.10여 년 전 세상에 처음 소개된 아리랑 악보는 국내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육영학교의 교사와 선교사로 이 땅을 밟은 호머 헐버트에 의해 처음으로 악보가 그려지고 가사가 채록되어진 것입니다. 이때 기록된 세계 최초의 아리랑 가사 중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 다나간다`는 이 한 줄의 기록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기록상의 정체성이 되며 더 나아가 문경새재 아리랑의 정체성이 되는 셈입니다.”- 문경아리랑에 애착을 가지시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제게는 조금 특별한 경험이 있습니다. 2007년 8월부터 1년 동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파견 연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흑인 국장이 있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 공직사회에서 흑인이 국장까지 진급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로 이 분의 퇴임기념식에 초대를 받아 살고 있는 동네까지 가게 되었는데, 의식행사와 공식적인 퇴임행사를 마친 후 흑인들끼리만 모인 자리에서 어깨동무하면서 흑인영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화로운 아프리카에 노예사냥꾼들이 나타나 무자비하게 잡아간 흑인들이 바로 그들의 조상인 것입니다. 짐승같이 그렇게 캄캄한 절망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들에게 미국은 얼마나 힘든 현실이었겠습니까.아프리카부터 이어온 그들이 조상을 잊지 않고 살아오고 있는 반면, 우리 국민들은 2세대만 지나면 우리의 말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생각한 것이 바로 아리랑이었습니다. 아리랑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정서를 나타내고 온 국민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경에서 아리랑 관련축제가 개최되지 않는 이유가 있는지요.△ “현재 문경에서 개최되는 모든 행사는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이 되는 행사이면서 필요한 부분에만 예산이 투입되고 있으며, 중복되는 예산은 최대한 절감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문경에서 아리랑 축제는 하고 있지 않지만 8년째 문경새재 아리랑제는 추진하고 있으며 매년 다양한 주제를 통해 아리랑 행사의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이하는 아리랑제에서는 전 국민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아리랑민화 공모전과 시민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아리랑 노래부르기, 아리랑 가사 짓기 등 참여형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지역민이 함께 동참하고 참가자들이 의미를 찾는 행사를 만들다 보면 다른 지역과 자연스럽게 차별화되는 행사가 되리라고 봅니다.”- 타 지역의 아리랑 축제 중 관심이 가는 행사는 무엇인지요.△ “우리나라 아리랑 축제중 가장 오래된 축제를 꼽으라면 정선아리랑축제를 들 수 있으며 요즘 생겨난 축제중 가장 큰 아리랑 관련 행사는 서울아리랑페스티벌입니다. 아리랑 관련 행사는 전국적으로 춤과 공연을 위주로 대동소이한 부분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정선아리랑축제의 경우 정선군민과 축제참가자 모두가 함께하는 축제로 자리매김 하는 부분이 좋은 사례라고 봅니다.” - 아리랑의 브랜드 가치를 어떤 식으로 높일 계획입니까.△ “아리랑은 문경만의 브랜드가 아닙니다. 아리랑은 대한민국의 브랜드이며, 우리나라 모든 국민의 브랜드이며, 해외에 나간 동포들이 향수에 젖는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문화융성의 시대입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이 바로 아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전국적으로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식어가고 있는 추세이며 국민적, 국가적 브랜드로 자리매김 하려면 아리랑이 있는 지자체는 물론이고, 해외에 있는 동포들에게도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 마련을 지속적으로 해주는 방법 밖에 없다고 봅니다..”- 아리랑 도시를 계획하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요.△ “일반적으로 아리랑에 대해서 사업을 추진한다면 예전부터 구전되어온 과거의 아리랑을 하는 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의 경우는 미래의 아리랑을 하기 위해 아리랑도시를 선포한 것입니다. 아리랑 도시를 계획하면서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으나 앞으로가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아리랑은 분명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며 영원성이 있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노래를 벗어나 아리랑이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리랑 사업을 추진하면서 어떤 성과와 보람이 있었습니까.△ “지난 5년간 추진해온 문경시의 아리랑 사업은 손가락으로 꼽지 못할 만큼 다양하고 많습니다. 국립아리랑박물관 사전타당성 조사 용역과, 국회정책토론회, 아리랑 악보 및 음반 발매, 이스탄불 아리랑 공연, 서울 광화문에서 아리랑제 개최, 문경새재 아리랑비 건립 등 아리랑 저변 확대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특히 이중에서 우리나라의 모든 아리랑 가사를 수집하고 분류한 1만68수를 120명의 서예가들이 동참해 문경한지에 500일간이라는 시간에 걸쳐 쓴 `서예로 담아낸 아리랑 일만수`의 완성사업이 가장 크고, 기억에 남는 아리랑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랑 박물관이 문경에 건립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요?△“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리랑박물관이 아니라 국립 아리랑무형문화센터입니다. 박물관은 말 그대로 죽은 것을 전시하는 정적인 공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리랑은 죽은 것이 아닌 앞으로도 계속 영생할 우리의 삶이자 정체성인 것입니다. 더구나 이 나라의 모든 중요한 시설들은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에 집중하여 건립되고 있으며 점점 지방이 축소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리랑은 지방에서 발전했으며 실제로 아리랑 앞에는 지방의 지명이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리랑의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인 것입니다.아리랑의 정신과 역사가 함께하는 문경새재 입구에 아리랑무형문화센터를 건립하여 유네스코 정신의 실천과 우리나라의 모든 아리랑을 한 곳에 모아 우리 민족의 아리랑을 한 곳에서 보고, 느끼고 함께 불러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아리랑무형문화센터 건립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무엇보다 문경새재아리랑은 문경 사람이 제일 잘 불러야 하고, 가장 많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아리랑 대부분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전승이 되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문경은 이 부분에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일환으로 아리랑 악보집을 만들고, 편곡을 하고, 아리랑 음반을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널리 홍보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리랑세계화포럼을 만들어 학계 아리랑 관련 권위자와 국내 최고의 지성인, 기업인들이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아리랑 관련 포럼과 연구활동이 활발한데, 어떻게 보시는지요.△“그동안 아리랑에 대한 각종 사료의 부족으로 연구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을 사실입니다. 아리랑이라는 것이 민요인 관계로 현장조사에 의존하는 힘든 점도 있지만, 결국 그러한 기초자료의 조사가 많이 이루어진 결과 지금의 조사자들은 조건에 맞는 연구도 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아리랑은 결국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아리랑을 연구하던지 간에 하나의 아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리랑과 연결되는 특수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포럼과 연구가 활발해진다는 것은 아리랑의 위상이 그만큼 올라간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문경아리랑과 관련한 인터뷰를 진행 중인 고윤환 문경시장.- 문경이 `아리랑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함께 동참하는 것이 시민들의 할 일이 아닌가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자신의 일을 추진하고, 그러면서 아리랑에 대한 사랑과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시민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시민이 공감하지 않는 사업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민들이 함께 했을 때 정체성으로 자리 잡을 수 있고, 시너지효과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문경시가 꿈꾸는 아리랑 도시란 어떤 공간입니까.△ “아리랑으로 모든 시민이 하나 되는 것이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아리랑을 매개가 되어 서로가 조화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미래에 다가왔으면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자 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리랑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정신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대동과 상생입니다.”- 지금까지 추진해온 아리랑 사업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해 12월 우리는 두 가지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는 서예로 담아낸 아리랑 일만수의 보급을 위해 아리랑도록을 만들어 이날 도록출판기념식을 했으며, 또 하나는 앞으로 미래 문경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 아리랑 도시를 선포하였습니다. 문경의 출향인과 아리랑 관계자, 시민 등 500여 명이 세종문화회관에 모여 힘든 여정을 거쳐 온 우리의 노력 결과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미래 아리랑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지금까지지 해온 일들도 무수히 많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아리랑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지역민이 하나 되는 그날까지 문경시의 아리랑 사랑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3-21

문화의 전파, 어울림의 장 마련이 먼저

여행은 세상을 바꿔왔다. 떠돌던 수렵채취의 무리가 농사를 배운 것부터 그랬고,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물질을 접할 때도 그랬다. 고대 영웅들이 무리를 엮어서 세력을 규합하는 방식도 여행이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고대국가의 종교 또한 이역을 다녀온 고승들의 여행을 통해 변화하고 다듬어졌다. 고착된 문화가 변화의 기회를 맞을 때는 여행자의 힘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제국 체류담을 `동방견문록`으로 남겼고, 앙투안 갈랑은 17세기에 중동을 여행하고 18세기에 `아라비안나이트`를 전했다. 유행 수준이 아니라 문화가 새로이 생겨나는 수준의 변화에 이들의 여행이 기여한 바는 엄청나다. 우리 땅에 나타난 여행객은 돌아가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이다.전통문화 확산의 첫 단추는 `접촉`스타일 변화 시도는 매력적 결과물로 나타나 □ 아리랑이 힙합에게 배워야 할 것들이어령 교수는 한류가 IT로 전파된 최초의 문화라고 했다. 한류는 그럴지 모른다. 그럼 우리가 한류가 되기 전의 문화는 어떻게 우리에게 왔을까? 힙합은 인터넷 이전의 문화전파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홍서범이 `김삿갓`을 발표했을 때 그는 자신의 곡이 힙합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음악이라고만 했다. 한 사람이 한 번 시도해보는 정도의 의미로 김삿갓은 최초의 랩으로 기억된다. 김영대 씨가 쓴 `한국힙합`에 따르면, 힙합을 최초로 제대로 전파한 것은 현진영이다. 그때도 사람들은 힙합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러나 힙합문화의 씨앗은 뿌려진 셈이었다.그의 안무와 곡풍을 대중은 지금도 기억한다. 문화는 이렇듯 이름 없이 전파되기도 한다. 힙합마니아들이 서로의 정체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은 PC통신이 등장한 뒤였다. AFKN이나 몇 장의 음반만으로 힙합장르의 규칙을 추론해낸 국내파와 이른바 `본토`를 다녀온 사람들이 논쟁해가며 `한국이 힙합을 한다면`이라는 가정을 현실로 만든다. 창작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음원을 서로 교환하면서 힙합에 대한 이들 자신의 안목과 곡의 수준이 높아진다.가리온과 피타입, 버벌진트가 바로 이 `마니아` 소속이다. 선구적 연예인이 대중에게 일으킨 열풍이 씨앗을 심으면, 일부 마니아그룹이 그것으로 열심히 농사를 짓고, 훗날 모두가 한국 특유의 외래문화라는 소출을 얻는다는 사실을, 한국힙합은 가르쳐주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마르코 폴로 한 사람에게 문화전파를 기대하지 않는 시대다. 인재 하나만으로도 안 되고, 회관 하나만으로도 안 된다. 인터넷 하나만 믿어서도 곤란하다. 모두가 할 일이 있는 것이다.전통문화 확산의 첫 단추는 접촉이다. 책이나 음반을 통해서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건 또는 직접 찾아가서건 전통 문화와의 만남이 있어야 확산시킬 수 있다. 확산은 전통의 자발적 전승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접촉이 확산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접촉자가 별다른 흥미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면 의도했든 아니든 전달력을 잃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의 반응이 갈리는 것과 같다. 홍보를 하지 못한 저예산 영화가 상영관을 늘리기 시작하는 것은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들의 전파력 때문이다. 그 전파력이란 간단히 `이거 너도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아리랑이 근대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신의 상징이 되는 과정 또한 이러하지 않았을까? `당신도 이것을 보았으면 좋겠다.`보사노바 뮤지션으로 알려진 싱어송라이터 나희경은 1998년 `컴 뮤직 엔 엠피쓰리`라는 책을 통해서 보사노바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거기에는 보사노바 리듬에 대한 소개와 샘플 시디까지 들어 있었다.그때 들은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밟아보지 못한 땅에 이렇게 새롭고 매력적인 음악이 있다니!` 놀라웠다. 그래서 남미 쪽 음악을 찾아 듣게 됐다. 그러다 보사노바와 삼바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2010년도에 브라질로 직접 찾아갔다. 거기서 반년 정도 생활하면서 본격적으로 보사노바 음악을 하게 되었다.나희경의 브라질행은 접촉자로서 대상에 매력을 느끼고 그 때문에 공유하고픈 마음이 자연스레 생긴 경우다. 마음은 몸을 브라질까지 이끌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음악적인 앎이 있다. 나희경은 외국인으로서 브라질 전통음악을 오해할까 두려웠다고 한다. 외부인의 눈으로 본 전통문화에는 편견과 과장이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그녀가 브라질을 찾아갔을 때, 보사노바 1세대는 거의 다 세상을 떠난 뒤였다. 다행히 호베르트 메네스칼, 오스바울드 몬테네그로를 만났다. 아직 살아있는 보사노바 1세대 아티스트였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진짜 보사노바 음악을 알게 된다는 희열이 있었다. 직접 가보지 않았다면, 보사노바가 하나의 전체로서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가서 활동한 덕분에 어떤 부분들이 그 전체를 이루는지 알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리랑 통신사는 오지 않는다나희경에게 전통음악의 변형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음악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음악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중심부를 건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이다. 다만 그 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형식은 얼마든지 변형시킬 수 있을 것이다.”옷을 바꾸고 스타일을 바꾸더라도 다른 사람이 되진 않는다. 악기들은 전통적이지만 음악적 스타일의 변화는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가 발견한 부분이란 심층과 표피의 관계였다. 그는 이러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문화접변 자체의 의의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매력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문경에 통신사절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희경 씨의 경우대로라면 해외건 국내건 음악인과 어울릴 음악인이 필요하다. 바깥의 음악인들이 찾아올 만한 음악적 요소가 `문경아리랑`에 있다고 일단 전제한 뒤에 그렇다. 음악인들이 문경에 온다면, 그곳이 문경아리랑을 접하기 가장 좋은 곳이어야 한다는 뜻이다.이들이 원하는 아리랑은 보는 아리랑이기도 하지만 듣는 아리랑이다. 음악적으로 영감을 줄 수 있는 아리랑이다. 가능하다면, 자생적으로 아리랑을 음악적으로 영위하는 창작주체가 있어야 한다. 1세대 보사노바 가수들이 대부분 사라졌더라도 한 두 명의 음악인에 의해 전통음악이 거듭날 수 있음을 나희경 씨는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그런데 이런 경우는 드물다. 문경에 오는 이들은 음악인들이 아닌 관광객이다. 문경새재는 연 4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국민관광지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한국인들이 꼭 가보고 싶은 관광지 1위`에 뽑히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문경세재의 뛰어난 자연환경과 각 명소들에 깃든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있었다.문경시는 산업화와 근대화 물결 속에서 운 좋게 옛길을 지켜낸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 `영남대로`라 명명된 길이 어떻게 포장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흙길일 수 있었을까? 세계적으로도 이런 친환경적인 `대로`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교통의 요충지였다고 하는 문경새재가 이런 산 속의 길로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수밖에 없다.그런 와중에 듣게 된 소리는 매우 흥미로웠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때문이란다. 박정희 대통령이 문경시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할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문경새재의 옛길을 훼손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는 얘기다. 관광객들 흥미 이끌고 기억에 남길흥미있는 퍼포먼스 곁들인 공연 필요□ 관광객에게 `함께 즐길` 무언가를 제공해야사람들이 문경에 무엇을 보러 오는지는 이로써 명확해진다. 문경을 찾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자연경관과 문화유적들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문경이 이러한 관광객을 그냥 관광객으로 돌려보내고 있는 듯하다. 잠재적인 전파자로 돌려보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잠재적인 전파자가 될 수 있을까.문경아리랑을 전파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문경에 오는 사람은 없다. 보사노바를 한국에 알리고 역으로 브라질에 아리랑을 소개하고 있는 나희경 씨 또한 그것을 의도하진 않았다.“공유하고 확산시켜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움직여지진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음악 고유의 아름다움 때문에 움직여지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물론 사명감으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음악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것이라고 봐요.”나희경의 음악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나희경의 말에 비춰보건대 전통문화는 의도치 않게 확산된다.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온 여행기자 류진 씨는 `시샤`라는 수호신의 탈을 쓰고 마당극에서 일본의 민요를 접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각 나라의 민요에 흥미를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고 공감할만한 부분도 극히 적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무형문화재를 공연으로 만나 볼 수 있다는 것은 말로만 들었을 때엔 매우 뜻 깊은 일 같지만 많은 여행객들은 그런 인류학적 퍼포먼스에 관심이 크지 않다. 오히려 여행지에서 파는 기념품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흔하다.“보통 파티문화가 익숙한 나라는 음악공연을 할 때 무대에 나가서 같이 즐기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웬만한 민요 공연에서는 강강수월래 같은 퍼포먼스가 있죠. 다 같이 춤을 추거나 혹은 노래하는 사람 앞에 마련된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돼요.”류진 씨의 말이다.“노래만 하는 공연보다는 퍼포먼스가 함께 있는 공연, 판을 만들어 다 같이 함께 노는 공연이 흥미롭고 즐거운 편이죠. 기억에도 남고요. 그러다보면 한국에 돌아 와서도 여행지에서 익혔던 민요를 흥얼거리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처음 본 사람과 눈을 맞추고 같이 춤추고 그게 아니라면 같이 박수를 치고 몸을 들썩이며 함께 하는 공연은 인상적이다. 그 나라의 고유한 전통 악기,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특유의 리듬, 그 나라의 이국적인 의복 등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면 매우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문화를 향유하게 되고 기억에 남는다. 문경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일반 관광객들이 즐길만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3-14

전통 변형으로 대중에게 다가서는 노력

문경아리랑 전승자인 송영철, 송옥자 두 분만큼 한 많고 두 분만큼 민요를 꾸준히 사랑한 사람들이 없었을까? 경상북도를 통틀어 이런 분들이 왜 없겠는가. 단지 이 분들이 서로 모른 채로 장터와 터미널에서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낸 힘은 따로 있었다. 문경아리랑보존회까지 매개역할 한 문경문화원 이창교 前 원장항토민요경연대회·농악경연대회 등전국 최초로 행사 만들어 보급 공로전통-현대음악 공존하는 다양한 시도로재해석된 아리랑, 문화콘텐츠 역할 기대`향토민요경창대회`라는 이름의 무대는 한 사람의 희생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이창교 전 문경문화원장이다. 이 원장은 1985년도부터 2003년까지 18년간 문경문화원을 매우 주도적이고 도전적으로 이끈 사람이다.처음 이창교 원장이 취임할 당시는 문화원이 매우 침체된 상태였다. `문경향토가사집`도 이 원장이 사비 4천만원을 들여 만들어낸 것이라 하니, 보통 애정으로는 불가능할 일이다.현 문경문화원의 사무국장인 이욱 씨는 “1980년대에는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긴 했지만 직원들 월급을 주지 못하는 문화원도 허다했다”며 당시의 열악한 상황을 설명했다.이 원장이 취임하고 한 달. 막상 문화 사업을 하려고 하니 재정형편이 어려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문화원 운영에 관련한 비용 일체를 원장이 감당하기로 마음먹은 후에야 본격적인 문화 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운이 좋아 부를 쌓게 되었다. 사비를 출원해서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화인프라를 형성하는 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원장의 회고담이다. 이창교 문화원장과 김광수 사무국장이 문경문화원을 꾸리고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향토사 자료를 수집하고 필요한 문헌을 모으는 일이었다. 문화 사업을 제대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술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경문화원 소속으로 서울 규장각에 파견된 연구원 둘은 4개월 여 동안 규장각 근처 여관에 기거하면서 문경에 관한 옛 문서들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그렇게 모아온 귀한 자료들은 이후 향토사 자료 발굴의 근원이 되었다.그리하여 `종합향토지`발간 작업에 착수한지 1년 만에 향토자료 종합지 `문경대관`을 3천 부 발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매년 한 권씩 향토사 연구지를 발간하게 되었다.향토사연구지 발간의 사회적 의미는 크다. 단순 기록의 차원을 넘어, 지역의 고유성을 기반으로 한 의미 있는 문화사업의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당장에는 물가에 놓은 넓적돌 하나지만, 그 하나를 밟고 올라 다음 돌을 놓고 또 그 다음 돌을 놓으면 결국엔 징검돌이 된다. 문경문화원은 향토사 연구지 발간을 시작으로 각종 문화 사업을 다채롭게 전개해 나갔다. 문학, 음악, 연극, 미술, 서예 등 여러 분야의 대회와 교육을 실시하고 문화 강좌를 개설하고 합창단을 만들었다. 문경문화원이 이렇듯 시민들로 하여금 자발적 문화 활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시민들은 참여활동을 통해 지역 문화에 작게나마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은 관심의 씨앗이 자라나 시민들 스스로 지역문화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 채울 수 있도록 만든다. 문경문화원이 시민들의 문화적 에너지를 발산하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전통은 강요하는 것이 아닌 향유하는 것김광수 사무국장의 회고에 따르면 문경문화원에서 주최한 향토민요경창대회, 농악경연대회는 전국 최초다. 전국 최초의 사업을 이끌어간 성과는 상당했다. 문화원의 주도로 생겨난 행사들은 하나씩 다른 운영체로 옮아갔다. 특히 `향토민요경창대회`는 `경북향토민요경창대회`로 이어졌고, `시민합창단`은 `시립합창단`이 되었다. 어떤 문화 사업을 시도하든 잘 가꿔 다른 지자체에서 욕심을 내도록 만들었다면 성공적이다. 문경문화원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능력에 탁월했다. 그리고 문경시는 문경문화원이 개척해놓은 시장을 보기 좋게 키워나간다. 상호간 능력 교류를 통해 상생하는 관계인 것이다.요컨대, 문경문화원이 우리에게 보여준 문화계승의 사회적 기반이란 이런 것이다. 첫째, 향토문화의 가치를 뒷받침해줄 학술적 기반 마련. 둘째, 향토 문화의 발굴과 보존. 셋째, 시민들의 참여 유도로 요약된다.송영철, 송옥자 전승자에서 사단법인 문경아리랑보존회로 이어지기까지의 이 흐름은 문경문화원이라는 매개체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사회적 기반`에 의지한 전통 문화의 계승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대중에게 어필하는지를 묻는 다면 긍정적인 대답을 얻긴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문화의 자생은 어렵다. 사람들은 전통을 강요당하기보다 향유하고 싶어 한다. 한복은 가장 한국적인 의복이다. 전통문화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 물론 한복을 생활화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결혼식을 비롯한 특별한 날에는 굳이 한복을 찾는다. 명절 특집 방송마다 유명 연예인들이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디자인은 또 어떤가. 점잖고 정통적인 것들뿐인가? 아니다. 소매가 좁은 것, 동정을 없앤 것, 저고리가 긴 것, 치마가 짧은 것, 고름이 가는 것 등등 다채롭다.전주 한옥마을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복 대여점이 즐비하다.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은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복을 차려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복의 특징적인 디자인을 차용해 만든 독특하고 전통적이며 동시에 세련된 현대 의복도 많다. 누구 하나 한복을 입으라고 강요하는 이 없지만 어떤 형태로든 한복을 향유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한다.이처럼 어떤 전통은 세상을 향한 통로를 다양하게 만들어 놓음으로써 전통으로의 접근을 유도한다. 한마디로 광범위한 취향 저격이다. 대중들은 강제로 하는 건 싫어하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좋아한다. 한복도 그랬고 아리랑도 그랬다. 아리랑에서 신민요로 넘어갈 때도, 신민요에서 트로트로 넘어갈 때도 그랬다.대중들이 부르길 원하고 듣고 싶어 하는 노래는 늘 있어왔다. 아리랑 이후의 노래들을 살펴보자. 대표적으로 `연락선이 떠난다`, `목포의 눈물`, `황성 옛터`, `오동동 타령` 등 트로트의 기라성 같은 노래들이 그렇다. 특히 항구를 노래하는 게 많다. 항구에서 가족이나 연인을 떠나보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탄광이나 광산의 인부로 끌려가기도 했다. 부산항 부두는 울며불며 헤어지는 사람들의 오열이 그치지 않는 이별의 항구였다고도 한다. 이렇듯 사람들이 부르고 듣고 싶어 하는 노래는 가사의 내용이 구체적인데다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 주는 `문경아리랑` 돼야이제, 이러한 원리로 지금의 문경 아리랑을 점검해 볼 때다. 이러한 원리란 다름 아닌, 자발적으로 향유할 만큼의 요소가 `문경아리랑`에 있는가이다. 꼭 문경아리랑이 아니라도 `아리랑`이 현대적으로 불려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것은 오리지널을 어떻게 변형하는가에 달려있다.작사가 김석태 씨는 “`문경새재아리랑`은 트로트지만 신민요 풍으로 만든 노래”라고 자신이 작사한 트로트 곡 `문경새재아리랑`을 소개했다. 토속민요 문경아리랑에 장르적 변화를 준 이유에 대해서는 “요즘 대중들에게 좀 더 쉽고 익숙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가사의 내용도 문경 아리랑의 대표 사설과는 많이 다르다. 시대적으로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 힘들다는 게 그 이유다.그밖에도 전통의 변형을 시도한 경우는 많다. `팝핀 현준과 박애리 부부`는 비보이와 국악인의 만남이다. 브레히트의 원작을 판소리로 재창조한 소리꾼 `이자람`도 있다. `니나노난다`는 기계와 인간, 디지털과 아날로그, 동서양의 이질적인 질감을 버무린 `퓨처 판소리`라는 장르를 개척한 부부 밴드다.문경아리랑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는 니나노난다는 “전자음악이 고수의 추임새 역할을 하는 식”이라고 `퓨처 판소리`란 장르를 이해하기 쉽게 소개했다. 해외공연의 반응을 묻자 “언어의 장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감하는 걸 보면 놀라울 정도다. 전통적인데 현대음악적인 요소가 접목되어 외국인들에게 익숙함과 낯설음을 함께 주기 때문에 색다르게 느끼는 것 같다”며 국내 반응과 비교했다. “국내에서는 한국의 전통을 좋고 특별한 것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오히려 서양음악을 더 익숙하고 세련된 것으로 여기는 상황을 설명했다.▲ 이창교 전 문경문화원장우리는 전통을 모른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통은 계승될 수 없는 환경에 처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우리가 새로이 받아들인 것은 전통과는 거리가 먼 이국의 문화였다. 전통에 대해 방기하는 분위기가 46년 동안 지속되었다. 우리의 생활반경에서 전통문화를 대신해 채워진 이국의 문화는 의식주 전반에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도 전통적인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아리랑은 대중적 인기를 끌거나 향유하고 싶은 문화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실정이다. 월드컵 응원가로 불렸던 윤도현의 `아리랑`이 그 경우의 마지막이었다.문경아리랑이 문화콘텐츠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많은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요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요소들을 개발하고 제공함으로써 아리랑의 재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리랑의 자발적 향유를 꿈꿔볼 때가 아닌가 한다.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3-07

“기생되려 하느냐” 멀고 힘들었던 전승의 길

송옥자 씨가 송영철 옹의 노래를 접한 것은 1997년도 여름의 일이었다. 문경문화원이 주최한 민요경창대회였다. 한 노인의 투박한 노래를 듣다가, 몇 년 전 시에서 제작해 마을회관마다 배포한 테이프에서 들은 소리를 기억해냈다.“4년 동안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때 시에서 홍보용으로 제작된 테이프를 나눠주었는데 거기에 송영철 옹이 부르신 문경아리랑이 있었어요.” 그때까진 송 씨도 그저 민요를 좋아하던 마을 주민의 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송 씨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민요를 듣는 남다른 귀가 있었다. 그런 끼를 타고난 경우였다. 송 씨는 어릴 적부터 민요를 배우고자 했지만 번번이 장애를 만나온 인생이었다. 이 좌절은 송 씨를 우울증까지 몰고 갔다. 병원에서는 송 씨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처방을 했다. 단연 민요였다. 그런데 송 씨가 해야 할 `좋아하는 일`은 취미 수준 이상이어야 했다.민요를 좋아해서 즐겨 듣고 부르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활동에 몸담기 시작했다. 주로 소리를 배우고자하는 노력이었다. 소리를 배울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처음엔 상주까지 시조를 배우러 다녔다. 그러다 부천역 근방에 있던 국악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송옥자씨는 소리를 배우고자 했던 자신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직면해야했던 현실에 대해서 토로했다.“국악원을 등록해 놓고서도 수업에 참여하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여자들 삶이 그렇잖아요. 게다가 제가 맏며느리여서 집안 제사도 많고 김장도 해야 하고...” 그런 와중에 그녀는 경기 국악대회에 참가해 예선을 통과했고 그것을 계기로 자신감을 갖게 된다.전수자 송옥자 씨, 스승과 운명의 만남어릴때부터 꿈꿔온 `소리의 길` 늦깎이로 시작1997년 송영철 옹의 소리 들으며 代 이을 결심시할머니의 문경 토속아라리 가락 영향도 받아실제로 그녀는 1995년부터 지역의 민요경창대회에 참가했고 상도 받았다. 그러다가 특별히 문경아리랑의 전승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가 1997년이었다. 3년간 송 씨는 문경아리랑을 경창대회에서 불렀고, 우수상을 받기까지 했다. 송 씨는 시할머니의 소리를 생활 속에서 늘 접하며 살아왔다.“시할머니가 소리를 참 잘했어요. 다듬이질을 하며, 물레를 돌리며 소리를 했는데 그게 다름 아닌 아리랑 후렴구가 없는 문경의 토속아라리였어요. 그런데 그땐 정말 그 소리가 청승맞게 느껴져서 듣기 싫었던 기억이 나요. 생활 속에서 근근이 불려지던 아라리를 이해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거죠. 그런데 이만큼 살고 나니, 이젠 그 청승맞던 소리가 이해가 돼요.” 그러다 1997년 향토민요경창대회에서 문경아리랑으로 우수상을 받은 바로 그 해, 다른 대회서 자신의 아리랑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줄 스승을 만났다. 그가 바로 송영철 옹이었다. 송 옹의 목을 통해 나오는 문경아리랑은 삶의 질곡들을 고스란히 전해줄 듯 꺾은 음의 연속이었다. 반주 없이 부르는 아리랑은 노동을 하고 있는 듯 힘겹도록 음절마다 굽이쳤다. 고된 몸의 소리를 토로하기에 가장 알맞은 호흡이라 느껴졌다. 뱉는 숨이랄지 몰아쉬는 숨소리까지도 진솔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실제의 삶 자체에서는 박자를 맞추듯 맞춰지는 게 없었다. 아리랑의 진수가 송 옹의 소리에 있음을 깨달은 송 씨는 끊겨가는 아리랑의 맥을 잇겠다고 결심했다.소리를 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야 이전부터 했지만, 불러야 할 소리가 무엇인지, 어떤 아리랑의 대를 이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은 1997년 그 대회장에서였다.凡人의 생에 맡겨진 전수의 업 고된 몸의 소리 토로하는 힘겨운 음절 정제작업전문가 아닌 제한된 여건의 개인에겐 힘겨운 과제병마와 싸우면서까지도 채록 등 멈추지 않아문경아리랑은 음악적으로는 가다듬어지지 않은 노래였다. 송영철 옹과 송옥자 씨 모두 전문 국악인이나 유명인이 아닌 제한된 여건 속의 개인들이다. 그러다보니 음악적으로 정제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민요를 꾸준히 공부해왔던 송옥자 씨는 송영철 옹의 소리를 토대로 박자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2004년도에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하고 1년 뒤 남편이 뇌졸중으로 와병하게 되었을 때도, 병원에 입원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문경의 민요와 아리랑을 50여 수 노트에 채록하는 등 아리랑에 대한 집념이 상당했다. 송옥자 씨의 이러한 노력은 여러 경창대회에서 수상의 영예가 되어 돌아왔다. 연로한 문경아리랑의 전수자는 그렇게 해서 다행히 대를 잇게 된 것이다.문경 아리랑이 어떻게 대물림되었는지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한 두 인생이 아리랑 곡선을 그리며 교차하는 것이 보인다. 송옥자 씨가 태어나던 해인 1951년은 송영철 옹이 징용을 다녀온 지 6년이 지난 시점이다. 밭에서 일하다가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가 태평양전쟁을 겪고 하와이와 중국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온 송 옹은 귀환할 때 바지 주머니에서 사할린 광산에서 밥그릇으로 사용한 조개껍데기와 물병으로 사용한 소라를 가지고 온 것을 꺼내어 보여주었다고 한다. 송 옹이 어째서 진정한 전승자인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바깥에서 불렀던 노래는 외국으로 떠나기 전 고향에서 익힌 노래다. 그의 노래가 그 누구의 노래와도 다른 이유는 고향을 강제로 떠났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리꾼의 삶을 생각하며 아리랑을 들으면 전통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굴곡의 차이도 들려온다. 가히 태평양을 반 바퀴 돌았다고 해도 될 만큼 파란만장을 살아온 송 옹과 같은 분들이 적지 않다. 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에게 고향의 노래가 무슨 의미인지 더 물어서 무엇하랴. 이때 부르고 듣는 아리랑의 무게를 우리는 감히 짐작도 못한다. 그가 부르는 것은 끌려간 당시의 동포들이 들었던 바로 그 아리랑이다.그가 불렀을 아리랑은 지구상에서 아리랑을 가장 절절하게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바로 그 곡조다. 후대의 한국 영토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그 아우라를 송 옹의 노래는 갖고 있었다.지역아동센터에서 10개월 동안 민요를 가르쳤던 이춘자(55) 씨는 “어른들도 잘 모르는 아리랑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아이들이 의외로 잘했다. 그런데 송영철 할아버지의 소리는 민요에 재미를 붙인 아이들조차 재미없다며 꺼려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송영철 옹의 화면을 방과 후 교실 한 벽면에 띄우는 순간, 아이들의 반응은 분명하다. 아이들은 그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송곡 같다는 것이 이유다.문경아리랑은 아이들이 알 수 없는 경험이 담겨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녹아 있는 문경의 소리였다. 아리랑의 곡조를 가르칠 수는 있지만 아리랑에 실린 경험과 상처까지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아이들의 반응은, 전통이 그냥 전달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전통이 소중한 줄을 아는 이들은 투박한 소리와 소박한 몸짓에서 의미를 찾아낼 줄도 알지만, 그런 맥락을 알 턱이 없는 어린 눈들의 감각에는 전문 소리꾼의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탄복할 만한 것이 있어야 끌린다. 전통이 어린 재능을 알아보고 일찍부터 준비시키려면 전통 또한 기예로서 힘이 있어야 한다.우리사회가 함께 전수해야 할 아리랑징용 다녀온 송영철 옹 삶의 무게감이 실린 가락어린 전수자들에겐 낯선 감성으로 다가와 불편유산으로 남기려는 소수의 희생 값지게 평가해야송옥자 씨 회고담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열 살 때 그녀는 금동마을 장터에서 사당패 경기민요를 듣고 소리꾼처럼 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다.그때만 해도 민요는 이른바 민중의 노래라고 할 수 있었다. 볼거리 환경 자체가 지금처럼 요란하지 않았으리라 여기기 쉽지만, 근대화된 장터에 나타난 민속음악단에겐 아이의 흥미를 돋울만한 요소가 그만큼 있었다는 것이다.송영철 옹의 진솔한 아리랑을 기예로 다듬으려 노력한 송옥자 씨가 열다섯 살에 소리 공부를 하고 싶다고 대전의 아버지에게 편지했을 때, 그녀가 들은 것은 “기생이 되려고 하느냐”는 호통이었다. 아버지 세대의 이런 반응이 낯설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아이가 아니라 성인으로서도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해 인생을 바치는 일이 명예롭다면, 그 명예는 결과로나 올 일이다. 가족에게나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그런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기가 안 그래도 두려운 마당에 재능까지 갖추어야 한다면, 그런 사회에서 전통이 전승되기란 힘들 것이 당연하다. 아리랑은 요컨대 다수의 유산으로 남겨야 하는 만큼 소수의 재능을 필요로 한다. 소수의 재능이 필요한 사회가 소수의 희생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면 그 사회는 합의를 통해 뭔가를 마련해야 한다. 1970년대 직조공장 여공이었던 송옥자 씨가 문경 출신의 옆집 하숙생과 결혼했을 때, 송영철 옹이 살던 문경은 총각들이 결혼을 하려고 해도 배우자를 찾기 어려워 도시로 나가야 했을 시기였다. 1960~70년대에 전통문화의 대를 잇는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흐름과 반대방향을 택했음을 뜻했다. 이런 종류의 관심은 1980년대가 돼서야 하나둘씩 나타난다. 문경아리랑이 본격적으로 전수되기 시작한 1980년대는 민속문화에 대한 관심은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민속문화를 남기려는 합의가 아직은 등장하지 못한 때였다.아리랑 전수는 발굴이 돼야 가능하다. 송영철 옹이 세상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송옥자 씨가 생활반경을 떠나 전파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도 우선은 누군가 문경아리랑을 발굴하고 실체를 선언해주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문경엔 다행히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다.송옥자 프로필 (1951년생)1986 송영철 옹의 `문경새재아리랑`을 음반으로 접함1995 문경시 주최 제3회향토민요경창대회 장려상 수상1998 문경시 주최 제6회향토민요경창대회 장원 (문경새재아리랑)1998 경상북도 주최 제5회향토민요경창대회 우수상 수상(문경새재아리랑)1999 경상북도 주최 제7회향토민요경창대회 장려상 수상(문경새재아리랑)2000 제2회 전국향토민요경창대회 (상주)장려상 수상(문경새재아리랑)수상2001 제3회 전국향토민요경창대회(상주)장려상 수상(문경새재아리랑)수상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 결성2005 경북도주최 제11회향토민요경창대회 (상주)최우수상 (문경새재아리랑)2006 대구KBS 다큐 `영남의 민요` 3부작 출연2008 `문경의 민요와 아리랑을 찾아서` (문경시·2008년)에 자료제공제1회문경새재아리랑제 주관, 문경아리랑 108수 발표2010 제2차 한국구비문학대계 문경 편 문경아리랑 108수 제공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2-29

말 못할 심정 담은 희로애락 덩어리

문경까지 가는 길은 아리랑의 뿌리를 찾는 일 만큼이나 멀었다. 아침 7시에 포항역에서 출발해 문경 시내에 위치한 점촌역까지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버스와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했다. 아리랑의 기원을 찾는 일 또한, 갈아타기의 연속이었다.어떤 이들은 문경아리랑이 경복궁 중수를 계기로 생겨나서 퍼졌다는 것으로 그 기원을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헐버트가 채보한 서양식 악보에서 문경새재 대표 사설 한 구절을 확인한 것만으로, 그것이 곧 문경아리랑이라 쉽게 단정 지을 수 없고, 경복궁 중수라는 하나의 사건만으로 문경아리랑의 기원을 설명한다는 건 무리가 있다.연못에서 산신령이 나타나 “네가 잃어버린 도끼가 금도끼냐? 은도끼냐?” 물어올 때, “금도끼가 바로 제 도끼입니다”하고 싶은 마음이 누군들 없겠는가. 하지만 진짜 잃어버린 도끼가 무엇인지 안다면, 도끼 두 자루를 모두 얻을 수도 있다.`아리랑`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경복궁 중건 때 부역꾼으로 끌려가는 낭군을 향해 `아리랑`(我離郞)이라고 한탄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 원납전을 가혹하게 거둬들이자 백성들이 원망하며 `아이롱`이라 노래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 알영(閼英)을 찬미하며 부른 것이라는 설 등 모두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다.민속학을 전공한 문경시 옛길박물관 안태현 박사는 위와 같은 다양한 어원에 대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수긍했지만, “설은 설일 뿐, 문헌자료의 부족 등으로 확증할 수는 없다”며 아리랑의 어원으로 아리랑의 근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안 박사의 생각은 `아리랑`이란 단어에 집착하면 각 지역에 산재하는 다양한 아리랑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문경새재 영남대로 `길의 경험`안동서도 청송서도 울산서 마저도 한양 천리길 관문새재와 이어진 모든 길에서 비롯된 공감이 노래로문경아리랑, `박달나무민요`에 후렴구 아리랑 붙어1929년도 여름 두 달 동안,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한 남학생이 영남의 큰길과 샛길을 다니며 서른 개 군의 민요를 조사했다. 그는 이 논문으로 졸업하고, 훗날 한국민요사의 최초 연구자(이재욱)로 기억된다. 그가 남긴 표를 보면, 경상도 민요의 태반에 문경새재가 들어간다. 안동, 의성, 청송, 영주의 민요 제목이 아예 `문경아 새재야`인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 먼 울산에서도 그렇다.청도 사람들은 문경새재 대신에 `뒷동산 산천`이라 노래한다. 청도를 지나는 길을 생각하면 그럴싸하다. 창원에서는 문경새재가 아니라 거제봉산이 등장한다. 민요의 이 다양성이 말해주는 바는 하나다. 이 노래들은 지역을 오가는 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당신이 조선시대에 떨어졌다면, 당신이 위험한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아리랑을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 중에서도 문경아리랑의 대표 사설을 부르는 게 최고의 선택이다. 조선사람 태반에게 문경새재는 어떤 공간보다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꿔 말해, 그 시기란 모두가 천리 길의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문경새재의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각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9개의 주요 도로 중 가장 대표적이었다.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채 보름이 안 걸렸다고 한다. 영남 좌로가 15일, 영남 우로가 16일이 걸렸다고 하니, 그중 가장 빠른 길이었던 셈이다. 최단 거리를 자랑하는 길이자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가진 문경의 영남대로는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이 특히 선호하던 길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 넘고 물 건너 이문(利文)을 좇아 팔도강산을 다녔던 보부상들도 이 길을 걸었다.보름간, 영남대로의 길은 저녁마다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더 가까이서 들려온다. 아무리 익숙한 길이라도 두렵다. 호환이 두려운 일행의 누군가 소리를 시작할 때, 모두가 지나온 문경을 떠올린다. 최근에 드라마로 볼 수 있다는 김주영의 `객주`에는 이런 경험이 생생히 담겼다. 봉삼이란 사내가 문경새재를 넘는 도입부에 박달나무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 깊다.우리 세대에도 길을 담은 노래가 있다. `남행열차`의 비 내리는 호남선과, 흐르는 강물 위의 `제3한강교`가 그것이다. 젊은 세대가 아무리 분위기를 살려 부른다 해도, 그 길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들의 감흥에 비할 수 없다.영남대로를 걸어보지 않은 사람도 아리랑에서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천리길 경험의 보편성이 영남대로와 이어진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 보편성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문경아리랑`의 기원이다. 가까운 의성에서 먼 울산까지. 사람들이 굳이 문경새재를 입에 올리는 이유를 전부 알 길이야 없겠으나, 천리길에 걸친 노동요의 응집성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울산의 촌부가 불렀을 `문경아 새재야` 소리에서 그 험난한 길을 넘은 자들의 의지와 긍지를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울산 촌부의 이 노래를 문경아리랑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안태현 박사는 “어느 지역의 아리랑이건 그것의 기원은 토속민요라고 할 수 있다”며,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즐겨 부르던 민요에 아리랑 후렴구가 따라 붙은 것”이라 설명했다. 민요란, 전국 방방곡곡에서 저마다 달리 생겨난 노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라는 공통된 후렴구가 각 지역의 민요 뒤에 붙어 특색 있는 다양한 아리랑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문경아리랑 또한 문경의 대표적인 민요인 `박달나무 민요`에서 시작된다. 송영철 옹이 문경아리랑을 “나무하러 가서 부르는 노래”라고 한다든가 일제강점기, 문경새재의 풍물을 소개하면서 언론에 `박달나무 민요`로 소개된 점을 보아서도 아리랑의 기원이 민요에서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리랑`이란 우리 민요 중에서도 그와 같은 후렴이 들어간 노래들의 주요 특징을 꼬집어 통칭하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하고 후렴을 부르다 보면 사설로는 미처 말하지 못한 심정들이 실린다. 특정한 경험을 드러내지 않는 후렴구야말로 모두를 통합하기 좋은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아리랑은 말로 다 못할 심정을 담은 희로애락의 덩어리가 된다. 그렇게 `아리랑`이란 후렴구는 민요 뒤에 붙어 민요를 살려 놓았다. 경부선 철길과 새로 닦인 도로의 등장`임자없는 나룻배에 임자가 없는 것`은 철교 때문이듯새로난 길은 고개 넘는 고통을 잊게 했고 가사도 잊어라디오에서 흐르는 유행가 민요 밀어내고 대중 속으로후렴구인 `아리랑`만 남고 가사의 다른 내용이 우리와 결별하게 된 것은 철길과 도로의 시대가 오면서부터다. 경부선 철길과 도로가 생겨나면서 새재를 넘는 경험이 전승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걷지 않으면 고개를 넘는 고통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토속 아리랑의 정서에 공감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문경새재가 어째서 각 지방의 아리랑에 등장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격차는 컸다. 사설과 가사와 곡조를 단서로 발원지를 찾아나서야 할 만큼 우리의 일상에서 문경새재 옛길은 까마득히 멀어졌다.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가 만들어졌을 때, 나룻배에 임자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라면 설명이 달리 필요 없었다. 기차가 다닐 철교가 놓이는데 강을 오가던 나룻배의 임자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리랑은 임자 없는 나룻배 신세였다. 우리가 아는 아리랑은 어떤 아리랑인가? 민족적 저항과 인내의 상징이자, 결집과 정체의 상징이다. 아리랑은 아이러니하다. 민족적 상징이 강해지는 동안, 우리는 아리랑에 공감하지 못할 민족이 되어왔기 때문이다.나운규의 `아리랑`은 우리 민요의 공통후렴구를 더 강하게 호명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었던 아리랑이라는 단어에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나운규 이후의 사람들은 민족적 저항의 상징을 그 말에 심었다. 우리가 아리랑을 기억하게 된 가장 강한 동력장치가 이때 장착된 셈이다. 철도와 도로를 대체한 것은 라디오와 유성기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1927년도 처음으로 라디오가 개국했을 당시 초대 청취자 세대는 1440호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라디오로 들은 음악이 유행하면서 천리길을 직접 걸었던 민요의 전승자들은 매체에 귀 기울이는 대중이 되었다. 나이든 세대들이 주로 전통 음악을 선호하는 데 반해 젊은 세대들은 전통가요를 낡은 것으로 여기고 신식 유행가를 더 듣고 싶어 하였다. 또한 같은 세대라 해도 서로 자기 고향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아우성치던 때였다. 같은 아리랑이라도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세대마다 선호가 갈렸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수요가 공급을 만들어내는 원리에 따라, 누군가의 아리랑은 조용해지고 누군가의 아리랑은 확산된다.문경아리랑은 철도와 도로와 라디오와 음반이라는 새 시대의 매체 옆에서 소리 없는 민요가 되어갔다. 천리길의 중간기점으로서 떨치던 명성은 관광지의 명성이 되었다. 그 사이 문경의 민요를 부르던 사람들은 탄광으로 내려가거나, 대도시로 떠났다.문경아리랑의 기원을 묻는 일은 이처럼 갈아타야 할 일이 많았다. 아리랑은 정선이 먼저냐 문경이 먼저냐 하는 식이라든가, 문경새재의 부역 경험이 경복궁 중수를 통해 전국에 퍼졌을 것이라든가 하는 기원에 대한 상상력은 비역사적이다. 우리가 얻은 답은 첫째가 먼 옛날의 경상도 아리랑이 한 줄기 천리길로 묶인다는 것이다. 문경아리랑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두 번째 답은 그 길이 낳은 민요 중 하나라는 것이다.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우리가 옛날 아리랑를 부르던 조상들과는 성격이 다른 전승자라는 사실이다. 특히 후렴구 아리랑을 중심으로 민요 아리랑을 `우리`의 것으로 자각하고 소중히 하려고 노력한 것은 근대를 겪으면서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로 이 이유로 아리랑의 기원을 혼동한다. 그럴 만도 하다. 역사의 고개를 여러 번 넘으며 아리랑은 하나의 기원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졌다. 분명한 것은, 세계문화유산의 위상을 얻은 시점에서 아리랑으로 통합된 이 겹겹의 기원을 단순화하고 지역화하려는 욕망이야말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철로가 비껴간 문경새재는 오늘날 영남대로 옛길을 고스란히 지켜냈다. 처음 옛길박물관에서 접한 책자의 제목이 이제서야 묵직하게 다가온다. `길 위의 노래, 고개의 소리, 아리랑`. 이 세 구절의 온전한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 걸은 걸음을 세어보니, 문경을 찾아가기가 힘들다고 느꼈던 일이 머쓱하게 느껴진다.강남진기자/이소연시인

2016-02-22

고난한 부역의 역사 고스란히 담아내다

2012년 12월 5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 `아리랑`이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등재되면서부터 아리랑과 관련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의 관심이 보다 뜨거워졌다. 지역 사회의 아리랑 주도권싸움 또한 심화됐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다양해야 할 아리랑의 저변이 축소되고 획일화 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본지는 서양식 악보로 가장 먼저 세계인들에게 대표 사설 일부가 소개된 아리랑임에도 불구, 다른 지역 아리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문경아리랑`의 가치를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한다.“문경아리랑?”문경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을 보낸 이 들이 “문경아리랑을 아느냐”는 질문에 보인 반응이다. 갑작스러운 물음을 접한 이들은 하나 같이 “웬 아리랑 얘기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리랑은 분명히 둘도 없는 한국의 상징이건만, 그 뿌리를 근처에서 찾고자 하면 오리무중이다.정선아리랑학교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아리랑은 아리랑 또는 이와 유사한 음성이 후렴에 들어있는 민요의 총칭”이며, 남북을 통틀어 약 60여 종 3천6백여 수가 전해온다고 한다. 평안도 하면 서도아리랑, 강원도는 강원도아리랑과 정선아리랑, 함경도에는 함경도아리랑과 단천아리랑, 어랑타령, 경상도에는 밀양아리랑, 전라도에는 진도아리랑, 경기도에는 긴아리랑이라는 식으로 숱한 아리랑들은 지역 분류에 따라 이름을 얻었다.지자체 입장에서는 이들 아리랑이 곧 지역의 얼굴이다. 꼼꼼히 거두어 대를 물려나가야 할 상징으로 아리랑만한 것이 없다. 국내에서는 지역을 대표하고, 세계 속에서는 한국적인 상징으로 알려진 아리랑. 발리우드 영화의 춤사위는 인도를 떠올리게 하고, 가부키 분장을 보는 순간 일본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아리랑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1865년 시작된 경복궁 중수 공사 전국 아리랑 유행시킨 계기 마련문경새재 오가는 영남 일꾼들부역꾼 노동요로 재탄생 시켜그렇다면 경상도의 아리랑은 어떤가? 현재로선 밀양아리랑 하나뿐이다. 남천강이 영남루를 지나고, 밤에는 아랑각을 비춘다는 사실이 밀양아리랑 속에는 들어 있다. 순식간에 밀양 인근의 전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힘. 그것이 이름을 얻은 아리랑의 힘이다.경상도에는 아직 이름을 각인시키지 못한 아리랑이 많다. 노래로 능히 보존할 수 있음에도 기억 속에서 사라진 역사가 많다는 뜻이다.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가네홍두깨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질로 놀아나네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아리아리랑 고개로 날 반겨주소지금은 고인이 된 송영철 옹이 부른 문경아리랑의 일부다. 1980년대 문경 사람들은 문화원을 주축으로 문경아리랑의 발굴과 보전을 위해 아리랑을 채보하고 주민의 육성을 녹음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비석도 세우고, 한글 서예로 일만 수 아리랑을 남기기도 했다. 문경에 박물관을 세우고 아리랑도시 선포식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문경아리랑의 전초기지는 이제야 생겨났다. 그러나 아직도 문경아리랑은 찬밥을 먹고 있다. 학계에서는 그 존재를 의심받고 세간에서는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아리랑으로 인식돼 왔다. 문경 옛길박물관 여운황 학예사는 다른 지역에 비해 문경아리랑의 인지도가 낮은 이유를 “문경이 탄광도시였고 먹고 사는 문제로 바빴기 때문에 아리랑 연구가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문경아리랑의 약세는 안타까운 일이다. 비단 문경 사람이나 경북도민만이 아닌, 한국인으로서의 아쉬움이다. 문경아리랑이 아리랑 전체의 탄생배경을 캡슐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아리랑의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경복궁과 한국의 아리랑이 어떤 관계인지 안다. 1865년부터 7년간 진행된 경복궁 중수는 다른 지역의 아리랑을 한양에 유행시키는 계기가 됐다. 강원과 경상에 유행하던 민요가 경복궁 중수라는 사건 덕분에 한군데 모였고, 한양 사람들은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리랑 곡조를 듣게 됐다.경북대 김기현 교수는 `문경새재 소리 아리랑의 아리랑사적 위상`을 통해 경복궁 중수공사 상황과 관련 지어 아리랑의 통속화를 설명한다. 문경의 토속민요였던 문경아리랑이 경복궁 중수 공사를 통해 전혀 다른 차원의 문화 즉, 통속 아리랑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중화되었다는 이야기다. 경복궁에서 함께 부역하며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노래가, 요즘말로 `대세`가 되어 수십 년이 지난 1930년대에 이르면 서울의 본조아리랑에 모습을 드러낸다. 북한 명창 김관보의 창을 기준으로 보면 1950년대까지도 불린다. 경복궁 중수 공사가 일종의 방송망이 된 셈이다. 문경새재는 지리적으로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험한 고개였다. 동시에 영남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영남의 일꾼들은 경복궁에 댈 물자를 짐으로 지고 왔다. 공사 자재를 문경에 가져다 놓으면, 그걸 또 충주나루까지 날라야 했다. 삼남에서 온 부역꾼들이 한양 내 거주하는 사내의 4배였다.여운황 학예사는 “실제로 `경복궁 중수` 시기에 문경새재의 박달나무로 공사 현장에서 사용된 연장의 손잡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사설 마지막에 `다나간다`는 표현은 문경새재의 나무들이 대량으로 베어져 헐값에 팔려나가는 상황에 대한 현지 사람들의 반감과 상실감이 표현된 것이다.토목공사에 쓸 삽과 망치자루를 만드느라 문경의 박달나무들은 씨가 다 마를 지경이 됐다. 하루치 노동이 끝난 뒤를 상상해본다.고단한 몸을 놀리며 부역꾼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때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일꾼들이 서로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 문경새재를 넘어온 사람들은 저마다 고달픔을 털어놓는다. 한창 땀 흘리던 낮에 들은 재미난 민요 소리를 누군가 다시 청한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가네”.문경 고갯길의 고생담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다음날의 부역에서 이 노동요에 공감하는 이들이 더 늘어난다. 문경아리랑은 전국에서 강제 동원된 부역꾼들에게 동병상련의 공감을 얻어 다른 지역의 아리랑에 비해 상대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진다. 요약하면 `경복궁 중수`는 동원된 일꾼들의 고향 민요가 다양하게 불리던 현장이라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문경아리랑은 부역의 앞뒤 맥락을 가장 직접적으로 담은 덕분에 일꾼들의 마음을 묶는 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초 서양식 채보 아리랑 남긴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논문서 대표사설 그대로 실어대중화된 문경아리랑 가치 인증이처럼 널리 불리게 된 문경아리랑이 통속화된 현장을 찍은 사람이 있다. 그 사진은 필름이 아닌 한 장의 악보다. 1896년 미국인 선교사 H.B 헐버트의 논문 마지막 단원에 `코리아 보컬 뮤직`(Korea vocal music)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악보는 최초의 서양식 채보 아리랑이다.어느 지역의 아리랑도 최초의 아리랑이라고 함부로 명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경아리랑을 언급할 때 최초라는 꾸밈말이 고집스럽게 따라붙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헐버트 박사가 채보해 외국에 소개한 서양식 악보에 문경아리랑의 대표 사설 일부가 그대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영문으로 기록된 사설을 우리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아라릉 아라릉 아라리오/아라릉 얼사 배 띠어라문경새재 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 다나간다문경 주민들과 일부 학자들은 문경아리랑이 헐버트 박사의 채보 기록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이 ~으로 다나간다`는 패턴은 문경아리랑 대표 사설의 특징적인 부분으로, 즉흥적으로 모방해 차용하기 좋은 구조를 취하고 있기에 확산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선교사였던 헐버트가 문경아리랑의 대표 사설 한 구절을 남겼다면, 그로부터 30년 뒤에는 신문들이 문경아리랑의 원형인 박달나무 민요를 전한다. 외국인이 듣고, 신문이 기록할만큼 이 노래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이와 관련 안태현 학예사는 “1925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포함한 다수의 매체에서 문경아리랑 원형 네 구절을 확인한 바 있다”며 “그보다 이른 시기의 다른 매체에서도 문경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며 문경아리랑을 함께 실었다”고 덧붙였다.그밖에도 문경아리랑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로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여행기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8), `신찬속곡집`(1923), `조선속곡집`(1929), 일제강점기 때의 엽서 등이 존재한다.문경아리랑은 역사의 지난한 고갯길을 넘어왔다. 낡고 빛바랜 표지의 오래된 문헌들 속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문경아리랑의 존재가 고맙게 느껴진다. 힘겹게 과거를 살아낸 문경아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 생명력이 질긴 노래다.강남진 기자/이소연 시인

2016-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