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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명품 서열다툼 치열한 ‘한우’ 조선 시대서도 귀했던 ‘문어’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토종 육쪽마늘 먹여 키웠다는 의성 한우 새콤달콤 오미자 사료로 섞는 문경 한우 좋은 육질 ‘최고 기후’서 자란 안동 한우 자투리 고기까지 혀를 녹일 맛 경주 한우 ▲경북에서 ‘가장 맛있는 한우’는 어디 있을까?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부르던 시절 이야기다.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 여덟 살 동네 꼬마들끼리 ‘자랑 배틀’이 붙었다. 기사 딸린 자가용을 가진 집에 사는 친구 하나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지난주 내 생일날 아빠, 엄마랑 해운대 갈빗집에 가서 소고기를 엄청 많이 구워 먹었어. 진짜로 맛있더라.” 모여 앉아 있던 나머지 꼬마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50년 전은 ‘소고기를 구워 먹은 것’이 자랑이 되던 시대였다. 그날 그 자리, 소고기를 구워 먹어본 적이 없던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째서 내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돼지갈비도 한 번 사주기 힘든 가난한 노동자일까, 왜 나의 엄마는 땅투기로 남편 월급의 10배를 벌어들인다는 복부인이 되지 못했을까’라며 신세 한탄을 했다면 거짓말이고. 그저 구워 먹는 소고기의 맛은 어떨지 궁금했다. 물론 우리 집에서도 가끔 소고기를 먹긴 했다. 그러나, 한 근도 아닌 국거리용 소고기 반 근을 사와 무와 콩나물을 잔뜩 넣고 큰 솥에 끓여 식구 네 명이 한 그릇씩 나눠 먹는 방식이었다. 구운 소고기를 먹기 어려웠던 건 동네 친구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당시는 국민소득이 1000달러를 겨우 넘긴 시점. 너나없이 살림살이가 한빈했던 게 정한 이치였으니. 시간이 흘렀다. 국민소득 30000달러를 넘어선 게 벌써 오래전. 이제 소고기 구이는 샐러리맨들의 ‘그저 그런 회식 메뉴’ 정도로 인기가 하락했다. 동네마다 숯불에 철판 올리고 구워먹는 소고기 갈빗집이 흔전만전이다. 경상북도엔 한우 사육 농가가 적지 않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랑을 부른다. 당연한 수순처럼 “다른 곳과 비교하지 마세요. 우리 지역에서 기르는 소의 맛이 최고에요”라는 마케팅이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다. 최근 10년 가까운 시간을 경북에 자리 잡고 밥을 벌어먹었다. 여행을 좋아하니 멀지 않은 영남 각처를 돌아다니며 구운 소고기를 맛봤다는 건 구구절절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토종 육쪽마늘을 먹여 키웠다는 의성 한우, 새콤달콤 오미자를 사료에 섞는다는 문경 한우, 기후 자체가 육질 좋은 소를 만들기 최적이라 말하는 안동 한우, 손질하고 남은 자투리 고기까지 혀를 녹일 맛이라는 경주 한우…. 그것들 중 ‘최고의 소고기’는 뭐였냐고?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니, 답을 하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시계를 뒤로 돌려 조선 시대로 가보자. 500~600년 전엔 소가 농경 사회를 지탱시키는 가장 중요한 아이템 중 하나였다. 사람이 하는 농사일의 열 몫 이상을 소가 해냈다. 그러니, ‘상일꾼 중 상일꾼’인 소를 도살해 먹는다는 건 용서 못할 죄였다. 이른바 우금(牛禁·소 잡는 행위를 금지함)이 생겨난 이유가 있었다. 이를 어기면 식솔 전체를 삭풍 휘몰아치는 함경도나 평안도로 쫓아내는 벌을 내렸으니 그게 전가사변(全家徙邊)이다. 소고기 한 번 구워 먹고 멸문(滅門) 당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있겠는가? 당연히 없을 터. 조선의 ‘우금’은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지속됐다. 자, 그렇다면 과연 조선 왕조를 통과하는 동안 소를 잡아먹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 이는 유치한 질문이다. 당연히 있었다. 어떤 냉혹한 금기도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꺾을 수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 ‘소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조선의 금기에 개의치 않았던 건 왕과 종친(宗親), 정승과 판서, 참판 등 최고위 권력자들이었다. 일례로 김옥균과 홍영식은 으리으리한 아흔아홉 칸 기와집 사랑방에서 화로에 소고기를 구워 먹으며 갑신정변을 모의했다. 젊은 참판 두 사람은 그걸 난로회(暖爐會)라 불렀다. 그들에겐 ‘우금’ 역시 깨뜨려야 할 조선의 적폐 가운데 하나였을까? 이제 경북의 소고기 이야기로 돌아와 앞서 물음에 답하자. 어느 고장의 한우가 가장 맛있었냐고? 의성 한우, 문경 한우, 안동 한우, 경주 한우 모두가 나름 일미였다. 기대한 답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누가 있어 감히 구운 소고기 맛의 우열을 명확히 가려낼 것인가? 동해 ‘피문어’ 큰 몸집에 ‘대문어’라 불리기도 유럽·인도 등지선 무서워하며 터부시하지만 연산군의 수라상에도 올려진 ‘별미 중 별미’ 잘 삶은 문어, 소고기나 양고기 부럽지 않아 ▲“42kg짜리 문어를 본 적이 있는데...” 한강 아래에선 가장 큰 수산물 집산지로 지목되는 경상북도 포항 죽도시장엔 문어를 사고팔며 잔뼈가 굵은 50대 중반의 사내 권순찬 씨가 산다. 그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 한 토막. “문어가 커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심드렁하게 내가 물었다. “살아있는 걸 본 문어 중 가장 큰 게 42kg 아입니까. 단순히 무게만 들으니 실감이 안 나지예? 그 놈이 8개 다리를 쫙 펴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으면 6인용 텐트를 펼친 것만 합니더. 내가 겁이 없는 사람인데, 아주 가끔 그런 거물(巨物)이 그물에 걸려 당겨질 때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아마 심장 약한 분들은 무서워서 비명을 지를낍니다.” 대한민국. 동해에는 살 색깔이 붉은 피문어가 살고, 남해엔 바닷가 돌 틈에 돌문어가 서식한다. 돌문어가 많이 잡히기에 그것만 먹어본 남쪽 바다 사람들은 동해안 피문어의 크기를 쉽게 짐작하지 못한다. 피문어를 달리 부르는 명칭은 ‘대문어’. 말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큰 문어라 그렇다. 앞에 언급한 베테랑 문어장수 권씨는 30kg이 넘어가는 거대한 문어를 드물지 않게 보고 살았다. 어지간한 초등학생 몸무게에 육박하는. 한국에선 문어가 싼값에 자주 맛보는 먹을거리가 아니다. 꽃처럼 예쁜 모양으로 정성스레 삶은 문어가 차례상에 올라가는 명절이 다가오면 가격이 금값은 아니지만, 은값에 육박할 정도로 치솟는다. 시간을 맞춰 잘 삶은 문어는 구수한 향기에 쫄깃한 식감이 소고기나 양고기를 훌쩍 뛰어넘는다. 식혀서 얇게 썰어낸 차가운 문어수육은 미식가들의 고급 술안주로도 손색이 없다. 맞다. 우리나라에선 비싸서 그렇지 없어서 못 먹는 게 문어다. 그런데 재밌다. 문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나라도 없지 않다. 이건 내가 직접 겪은 체험이라 거짓말이라고 타박 받을 이유가 없다. 인도와 캄보디아가 그런 나라들 중 하나다. 2005년 인도의 바르칼라 해변과 2011년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바닷가. 던져놓은 어부의 그물에 문어가 걸려 올라오면 징그럽다는 듯 재빨리 떼어내 다시 바다로 던져버렸다. 그 광경이 이상스럽고 놀라웠던 내가 물었다. “왜 버려요? 저 맛있는 걸.” 별 해괴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눈망울로 인도와 캄보디아 어부가 답했다. “야, 너는 크라켄 몰라?” 아... 크라켄. 결국은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생겨난 어쩔 수 없는 ‘차이’였구나. 비단 문어를 먹는 행위만이 그런 게 아니다. 베트남 여행에서 만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게알을 티스푼으로 맛있게 떠먹는 날 보며 ‘대체 저런 괴이한 걸 왜 먹지’라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으니. 크라켄은 고대 유럽 설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끈적이는 8개의 거대한 다리로 범선(帆船)을 휘감아 깊은 바다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그곳 바다에도 인간의 상상력을 위협하는 커다란 문어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선 몸의 길이가 10m를 넘나드는 문어나 오징어의 사체를 본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거기에다 유럽에선 오래 전부터 문어 같은 두족류를 혐오하고 무서워하는 경향이 강했다. 인도와 캄보디아도 북유럽처럼 바다에 인접한 국가다. 그러니, 누구도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캄캄한 심해, 거기 사는 거대한 문어를 터부시했던 게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공포는 상상력에서 잉태된다. 뭐 그건 어째도 좋다. 한국은 북유럽, 인도, 캄보디아와 달리 문어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그러니, 잘 삶아 큼직한 접시 위에 올린 말랑말랑 쫄깃쫄깃한 문어의 몸통과 머리, 다리를 거부할 이유 또한 없다. 문어는 500년 전 조선시대 때도 고관대작이 즐기던 별미였다. 모친 상실의 콤플렉스를 피와 살점이 튀는 끔찍한 살육으로 되갚음 했던 연산군 이융(李㦕·1476~1506)은 취식 스타일이 독특했는데, 그가 금덩어리처럼 여겼던 게 문어와 사슴 요리였다. 기이하게도 사슴의 혀와 꼬리, 갓 삶아내 당장 꿈틀거릴 듯한 문어를 연산군의 수라상(水剌床) 올렸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남아있다. 그렇다. 한국에선 문어의 맛이 왕도 매혹했던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6-24

‘두부와 송이버섯’ 혀와 코를 매료시킨 영남의 별미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 /편집자 주 ▲산초기름에 구운 두부 드셔보셨나요? “먹고살 만한 시대가 오면 음식 관련 TV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난다”는 이야기가 떠돈 게 20세기 후반, 혹은 21세기가 시작되던 즈음이다. 내가 20대 말과 30대 초반을 살던 시절. 실제로 그랬다. 공중파 방송이 앞다퉈 전국의 맛집은 물론, 세계 각국의 별나고 특별한 요리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재료를 사용해 기이한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별미가 세상엔 많고도 많았다. 헌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때 본 수백 가지 요리 중 기억에 또렷하게 남은 건 가격부터 사람을 깜짝 놀래키는 곰 발바닥으로 만든 요리나, 염장한 북해산 철갑상어알이 아닌 우리가 익숙하게, 자주 먹어왔던 평범한 음식을 소개한 프로그램이다. 대략 20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MBC였던지, KBS였던지 흐릿하다. 늦은 밤 TV 속에 등장한 70대 노파가 카메라를 마주 보고 한숨을 쉬며 이런 말을 했다.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던 커다란 가마솥 앞에서였다. “아이고, 내가 전생에 죄가 많아 이번 생에서 두부를 만든다 아입니까.” 무슨 말일까? 흔해빠진 두부 가게를 운영하면서 ‘전생(前生)’까지 언급할 이유가 있을까? 그땐 나도 어렸으니 생각이 단순했고, 세상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단편적일 때다. 말 그대로 동네 반찬가게에서부터 마트 식품코너까지 지천에 널린 게 두부지만, ‘제대로 된 두부’를 만들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일견 단순하게 보이는 ‘두부 만들기’는 시작부터가 쉽지 않다. 두부 맛을 좌우하는 콩의 선택이 첫 번째 과제. 공기 맑은 산간 지역에서 기른 해콩을 찾기 위해 경상북도와 강원도 산간 농가를 뒤지는 일은 피곤하고도 사람을 지치게 하는 작업. 그럼에도 ‘두부 맛집’ 주인장들은 마다하지 않는다. 자, 이제부터 또 여러 난제가 등장한다. 선택된 콩을 얼마나 오랫동안 물에 불릴 것인지, 불린 콩을 삶는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간수(습기 찬 소금에서 녹아 흐르는 짠 물)로는 어떤 걸 선택할지, 부드러운 두부가 엉기고 응고될 때까지는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려면 밤을 꼬박 새우는 게 일상사라고 한다. 이쯤 되니 앞서 말한 그 할머니가 ‘전생의 죄’를 이야기하며 짙은 회한을 털어놓은 것일 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잘 만든 두부 한 모는 세계에서도 이름이 높은 와규(和牛) 맛에 뒤지지 않는다. 콩의 단백질이 고가의 소고기 단백질을 압도하는 것. 그 맛의 비결을 투여된 시간과 지극한 정성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서너 해 전. 경북 상주의 유명 관광지를 취재하러 갔다. 밥때가 돼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을 서성거렸고, 동네 사람이 추천해준 고풍스런 옥호(屋號)의 식당 문을 열었다. 주방에서 비릿함을 누르는 잘 익은 콩의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식물성 단백질에서 건강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들기름에 구운 손두부는 영남은 물론 호남과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음식이 됐다. 그런데, 그 집은 두부를 ‘산초기름’에 굽는다고 했다. 두부와 산초라…. 생경한 조합이다. 음식에 관해 모험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맛은 어땠냐고? ‘천하일미’라고 하면 호들갑을 떤다고 욕을 먹을 터. 하지만, 산초기름 두부구이의 감칠맛은 아마 최소 10년은 혀와 코가 기억할 것 같았다. 딸려 나온 된장찌개와 더불어. 된장 역시 재료가 되는 건 콩이다. 허니, 그날 점심은 ‘콩의 향연’ 또는, ‘콩의 심포니’라 칭해도 무방했다. 협연자는 산초기름. 그 식당은 창업주가 40년, 물려받은 딸이 20년, 그러니 같은 자리에서 60년째 운영 중이다. ‘전생에 죄가 많은’ 두 여자의 고생이 만들어낸 ‘두부’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저 진미(珍味)라는 흔하디흔한 표현만으로 모자랄 것 같다. ▲송이버섯, 이 향기를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아우라(aura)’는 무시무시한 단어다. 무슨 뜻이냐고? 백과사전의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 사람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 이러니, 아우라란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카리스마(charisma)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경지를 지칭하는 것일 터. 올해 여든다섯이 된 영화배우 알 파치노. 그의 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휘는 ‘아우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하다. 시시껄렁한 싸구려 건달로 분했을 때, 뉴욕으로 옮겨간 이탈리아 마피아의 우두머리를 연기할 때, 20세기 말 세상을 절멸시키려는 악마로 등장했을 때…. 그는 배역에 따라 눈빛과 몸짓을 능수능란 바꾼다. 때론 젊은 깡패 같고, 어느 땐 조직폭력배 두목 같고, 드물게는 진짜 악마 같다. “배우로서의 그는 돌올하고 탁월하다”는 영화평론가의 말에 감히 누가 반기를 들겠는가. 2004년이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 컨벤션홀에서 전인권 콘서트가 열렸다. 당시 내 나이 서른셋, 전인권은 공자가 말한 바 지천명(知天命). 쉰이었다. 대상포진으로 입술 아래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최악의 컨디션임에도 전인권은 ‘당장 죽어도 좋다’는 듯 절규했다. 그날, 전인권의 노래를 들으며 어떤 짐승을 떠올린 건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포효를 멈추면 숨이 끊기는 운명을 지닌 아마존 정글의 전설 속 맹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선글라스 속에선 내내 아우라가 번득였다. 전인권이 아니면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음식 이야기’를 한다면서 잡설이 길었다. 폐일언. 경상북도 영덕과 봉화, 울진 등지에서 귀물(貴物)로 대접받는 ‘어떤 버섯’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서설이 과했다.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은 ‘송이(松耳)’ 스토리다. 혀와 눈이 아닌 코로 먼저 맛보는 버섯. 서양엔 훈련된 돼지가 냄새를 맡게 해 채취하는 버섯이 있다. 참나무 뿌리에 붙어사는 트러플(truffle·송로버섯)이다. 이 버섯 역시 향이 좋기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다. 하지만, ‘송이버섯’의 향기에 비할 수 있을까? 울울창창 짙푸른 소나무 숲에서 자라는 송이는 경북 북부와 강원도, 북한과 중국 등이 주산지인 귀한 식재료다. 버섯이지만 기이하게도 생선처럼 비늘이 있고, 옅은 갈색의 몸통은 사방 백리로 오묘한 냄새를 뿜어댄다. 탱탱하고 쫄깃한 식감이야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송이의 가장 큰 미덕은 ‘아우라가 깃들어있다’ 말해도 좋을 향기. 이게 먹는 버섯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는 이유다. 한국엔 음식 이야기를 잘 풀어내는 작가가 몇 있다. 소설가 성석제도 그중 하나다. ‘숨겨진 맛집’을 찾아다닌 그의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끼니때가 한참 멀었음에도 배가 고파온다. 바로 그 성석제가 쓴 산문 가운데 하나엔 서울 신촌의 일식집에서 ‘엄지손톱만 한’ 송이버섯 조각이 발산하는 향에 놀랐다는 경험이 담겼다. 그것에 비하면 내가 겪은 ‘송이 섭식’ 체험은 스케일이 폭력적(?)일 정도로 크다. 대략 20년 전. 경상북도와 강원도 경계에 신당을 차린 늙은 무녀(巫女)를 만났다. “당신 사주를 봐주겠다” 하길래 “난 그런 걸 믿지 않는다”고 했더니, 눈가에 주름을 만들어 웃으며 “그럼 송이에 술이나 한잔 하고 가라” 했다. 달콤한 제의를 왜 거부하겠는가? 무녀가 가마솥만한 커다란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콸콸’ 붓고 어마어마한 양의 송이버섯을 가져다 넣었다. 일행 셋이서 kg당 80만 원이 넘는 송이를 족히 2kg은 먹었던 듯하다. 괴발개발 기사나 쓰는 한빈한 월급쟁이가 평생 맛볼 송이버섯을 하루에 다 먹은 셈이었다. 그 송이는 ‘놀라운 향’이 없었겠는가? 그럴 리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난봄 경북 일대를 잿더미로 만든 산불 탓에 올해는 물론, 향후 30년 가까이 영덕, 봉화, 울진의 송이버섯을 맛보기 힘들다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비단 미식가만이 아니다. 3등품 송이의 향기라도 맡고 싶은 이들의 실망감이 클 것 같다. 이 상황은 ‘아우라가 깃든 버섯의 비극적 절멸’인가? 조금 슬프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6-17

이야기와 함께하면 더 깊은 맛 나는 ‘영남 음식’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해 엮은 것이다. 홍 기자는 한국기자협회 미디어 리터러시 위원장이다...편집자 주 포항의 별미 ‘물회’… 고추장 본연의 맛으로 양념, 맹물·과일즙 부어 먹으면 일품 뱃일로 고된 시절 갓 잡은 생선에 찬물 붓고 훌훌 말아 넘긴 한끼, 삶이 담긴 음식 영남 북부 양반들이 귀하게 먹던 음식 ‘안동국수’… 고급 생선 ‘은어’로 끓인 한 그릇 투명하고 깔끔한 국물·매끄러운 면발… 별다른 고명 넣지 않아도 시원한 맛 자랑 ▲어부의 고단한 살과 일상이 만들어낸 별미 ‘물회’ ‘물’과 ‘회(膾)’는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인가? 최소한 내겐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진. 제법 열정적인 연애가 지속되던 날들이었다. 30대 초반인 사내와 20대 중반인 여자가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경북 안동까지,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짙푸른 파도 일렁이는 동해안 영덕 바다로 여행을 갔다. 대게가 맛있는 철이었다. 비싼 갑각류를 잔뜩 먹고 두주불사로 마신 다음 날. 해장 음식을 찾아 영덕 강구항 조그만 식당으로 갔다. 거기서 난생처음 ‘물회’란 걸 만났다. 크고 붉은 모조 보석이 박힌 금반지를 낀 호호백발 할머니가 잘게 썬 가자미 위에 양배추와 파, 고추장인지 초장인지 모를 시뻘건 양념을 듬뿍 올린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을 가져왔다. “시원하게 찬물을 부어 먹어봐. 속이 확 풀릴 거야.”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유년과 소년기를 보냈기에 회는 낯선 음식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백부를 따라다니며 자갈치와 마산 어시장에서 수십, 수백 차례 먹어본 익숙한 것이니까. 그런데, 멀쩡한 횟감에다 뜬금없이 물을 붓는다?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게 맛이 나쁘지 않았다. 방금 손질한 날생선 특유의 쫄깃한 식감을 지닌 회가 아닌 물컹이며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회라니... 색다르고 생경한 요리 체험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나도, 여자 친구도 달게 한 그릇씩 비웠다.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독특한 맛이었다. 그리고, 덧없이 1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40대 중반에 삶의 터전을 경북 포항으로 옮겼다. ‘물회’로 유명한 도시다. 바닷가는 물론, 시내에도 물회를 주된 메뉴로 파는 식당이 흔전만전이다. 당연지사 거기서 살게 된다면 누구나 자주 물회를 먹게 된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포항의 물회 음식점들. 각각의 식당마다 조금씩 다른 레시피를 가졌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양념장을 만들 때 고추장, 식초, 설탕을 섞는 비율과 철마다 달라지는 생선의 종류, 횟감에 붓는 물을 만드는 방식 등. 10년쯤 살다보니 다수의 관광객들은 자극적인 ‘단맛’이 강한 물회를 선호하고, 나이 지긋한 바닷가 어르신들은 과일즙이나 청량음료를 섞지 않은 전통 방식 고추장으로 양념해 맹물을 부은 물회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두어 해 전이다. 구룡포에서 반세기 이상 뱃일을 해온 건장한 노인을 만났다. 취재를 핑계 삼아 지척에서 물결 일렁이는 포구 목로에 술병을 놓고 마주 앉았다. 그날 안주가 우연찮게도 물회였다. 서너 잔 낮술에 취한 늙은 어부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가 흑백 테레비를 보던 시절부터 배를 탄 사람 아입니꺼. 지금이야 이렇게 멀끔한 식당에서 물회를 먹지만 옛날에야 그랬겠습니까. 뱃일이 생각보다 무지하게 힘들어예. 새벽부터 바다 나가서 그물 내리고, 올리고를 반복하다 보믄 제대로 밥 챙겨 묵을 시간이 없지예. 그저 잡아 올린 가자미, 볼락, 청어 같은 걸 손에 잡히는 대로 뼈째 칼로 썰어서 물 붓고, 찬밥 한 숟가락 말아 훌훌 마시듯 1~2분 만에 한 끼 때웠다 아입니꺼. 힘든 시절이었지예. 그때 생각하믄 세상 참 좋아졌다 아입니까.” 말을 마친 어르신이 젊은 시절 추억에 잠긴 듯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서야 제대로 알았다. 물회는 지난날 바닷가 뱃사람들의 고단한 노동과 힘겨운 일상이 만들어낸 음식이란 걸. 물회에 얽힌 ‘20세기 뱃사람들의 역사’를 말해준 그를 만난 이후부터다. 포항 죽도시장 식당 테이블에 오른 양념장 얹힌 가자미회나 청어회를 보면 물을 붓기 전 먼저 마음속으로 고마움과 바람부터 전한다. “세상의 모든 생선을 우리의 식탁에 올려주는 어부들의 고된 삶에도 행복과 웃음이 깃들기를. 그들이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기를.” ▲‘안동국수’냐? ‘안동국시’냐? 그것이 문제로다 정확히 기억한다. 2019년 여름이다. 지금은 어울리지 않게 이름 앞에 ‘고(故)’자를 붙인 음식평론가 황광해(1957~2024) 선생과 안동역 인근 허름한 국숫집에 들었다. 점심은 먹었고, 저녁 먹기엔 이른 어중간한 시간. 뭘 모르는 내가 괜한 폼을 잡았다. “요즘은 어딜 가나 제대로 된 국수 맛을 보기 힘들어요. 밀가루 냄새가 풀풀 나서요. 그렇지 않나요?” 마주 앉았던 황 선생이 가소로운 듯 씨익 웃더니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밀가루로 만들었는데 밀가루 냄새가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냐?” 그날 우리가 먹은 걸 ‘안동국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지역색을 드러내며 고풍스럽게 ‘안동국시’라 불러야 될까. 무어라 칭하든 그날 내가 맛본 건 ‘생애 최고의 국수’라 해도 과장이 아닐 듯하다. 영남 북부는 이른바 ‘반가(班家)’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 곳이다. 종택(宗宅)이라 불리는 멋들어진 기와집이 적지 않고, 거기엔 아직도 조선시대 유교적 전통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섬기는 종손과 종부가 살고 있다. 안동 김씨, 의성 김씨. 진성 이씨, 풍산 류씨…. 16~18세기 이 나라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집안의 후손들이 각자 가문의 자긍심을 지키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가문들의 종택을 찾아가 나이 지긋한 종손, 범절 깍듯한 종부와 만나는 기회를 몇 번 가질 수 있었다. 취재를 업으로 하는 기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 가운데 하나였다. 먼지 한 톨 없이 걸레질 된 반질반질한 대청마루에 앉아 그해 여든셋이 됐다는 종부가 가져다준 안동식혜를 받아들었다. 식혜에 고춧가루가 보이다니…. 영남 남부에선 보지 못한 스타일이다. 그러면 또 어때. 한 모금 마시니 땡볕에 달아오른 이마부터 시원하게 식는다. “손님이 오셨는데 아무 것도 드릴 게 없어 송구하다”는 단아하게 나이 든 종부의 겸양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듯 쪽진 머리의 팔순 넘긴 할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비취색 고운 비녀가 햇살에 반짝였다. “처음 시집와선 힘들었니뎌. 열여덟에 아무 것도 모르고 남편 하나 보고 여기로 왔으니까예. 사내들이 은어 잡아오믄 끓여서 국물 만들고, 밀가루에 콩가루 쪼매이 섞어 국수 반죽 밀어 철마다, 때마다 오시는 수십 명 손님상을 차려내야 했다아입니껴. 아마 젊은 양반은 모를낍니더. 우리 동네에선 제사 때도 국수를 쓴다 아입니껴.” 시간을 투자해 ‘안동국수’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찾아본 건 그 종부 할머니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도 뒤졌다. 실제로 ‘안동국수’라 불리는 음식은 과거 영남 북부의 양반들이 먹던 별식이었다. 은어로 국물을 냈다는 것도 고문헌에 남아 있는 사실이다. 은어는 ‘수중군자(水中君子)’로 불리는 물고기. 조선 시대엔 왕에게 진상하던 생선이었다. 한양으로 은어를 특급배송(?)하는 하위직 벼슬아치가 있었을 정도. 은어 배송이 실패하면 치도곤을 맞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 귀한 물고기를 사용해 국물을 내고, 옛날엔 지금처럼 흔치 않았던 밀가루로 면을 만들었으니 수백 년 전 국수는 지금과는 그 위상 자체가 판이했을 터. 그해 여름. 취재를 함께 간 황광해 선생을 채근해 ‘제대로 된 안동국수’를 만드는 식당에 찾아갔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전처럼 은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국물은 투명하며 깔끔했고, 면발은 더없이 매끄러웠다. 별다른 고명을 얹지 않았음에도 특별하지 않은 국수가 내는 ‘특별한 맛’에 매료됐다고 해야 할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하다. ‘국수’라고 이름 한 걸 만나는 끼니때면 언제나 여든셋 키 작은 안동 종부와 수중군자 은어를 먼저 떠올리는 건.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