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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고래들이 헤엄쳐와 놀다가던 그 곳, 고래불서 넓은 바다로 자유 찾아 떠나는 꿈을 꾸다

누군가 내게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란색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파란색 중에서도 어떤 파란색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바다의 파란색이라고 할 것이다. 세상의 그 많은 바다 중에서 어느 바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파란색을 지녔는지 궁금해 한다면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영덕 바다에 가보라고 말할 것이다.영덕, 이라고 소리 내 발음하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체온이 조금 내려간다. 한 여름 무더위와 열대야로 고생할 때 써먹기 좋은 방법이다. 나는 종종 영덕으로 상상의 피서(避暑)를 떠나곤 한다. 영덕, 이라고 한 번 더 발음하면 푸른 향기와 함께 파도 소리가 밀려온다. 언제나 상상이 현실보다 풍요롭지만, 영덕에서는 전세가 역전된다.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다. 상상 속 푸른 향기는 바다와 마주하는 순간 구체적으로 분명해진다. 영덕 바다에서는 시원한 쿨워터 향수의 내음이 난다. 박하 성분이 들어간 샴푸 향기가 나기도 한다. 파도에서는 쌀 씻어 안치는 소리, 연극이 끝난 후의 박수소리가 들린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청포도의 온도와 쪽빛 실크 블라우스의 감촉을 지닌 영덕 바다에서 나는 죄 지은 것도 없이 죄인이 된다. 수평선을 훔친 내 눈이 푸른 수의(囚衣)를 입고 푸르디푸른 감옥에 갇힐 때,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기도 싫은 자발적 유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덕에 가면 그 푸름에 그냥 눌러앉고 싶어진다.망망대해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래의 꿈을 꿨다. 푸른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내 불완전한 욕망이 꿈에서 고래를 통해 이루어진 모양이다. ‘고래’는 오랫동안 희망의 메타포가 되어 왔다. 어민들에겐 지금도 ‘바다의 로또’로 불린다. 송창식은 노래했다.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고래 사냥’) 가자고. 1975년의 ‘고래’는 잡으려면 잡힐 것 같은 꿈이었다. 피땀과 눈물의 바다 위에 “잘 살아보자”는 뱃고동 소리가 메아리치면, ‘중동 건설 붐’이라든가 ‘수출 100억불’ 같은 신화들이 커다란 고래가 되어 잡혀들었다.그로부터 30년 후, 바비킴은 다시 노래했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딘가 사랑을 찾아서 하얀 꼬릴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이렇게 너를 찾아서 계속 헤매고 있나. 저 하얀 파도는 내 마음을 다시 흔들어 너를 사랑하게 해”(‘고래의 꿈’)라고. IMF라는 풍랑이 그친 바다에 ‘자수성가’라든가 ‘내 집 마련’이라든가 하는 고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004년의 ‘고래’는 뜬구름 같은 낭만과 사랑의 은유, 거대한 신화에서 작고 앙증맞은 동화가 되었다.그리고 2019년, 두 고등학생 래퍼(강민수, 이진우)는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정호승의 시 ‘고래를 위하여’를 랩으로 개사해 신나게 외쳤다. “넌 내 바다에 놀러와 매일 초음파를 보내. 별이 나를 보며 hello. 아무쪼록 필요해 더 많은 고래… 넌 마음이 너무 탁해. 너를 괴롭히는 시선들을 들춰놔 봐. I don‘t give up! 꿈을 찾아 떠나가 버려”라고.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고래’는 타인의 시선이나 기성세대의 질서가 만든 ‘유리 수족관’을 벗어나 넓은 바다로 “꿈을 찾아 떠나”는 주체적 자아를 상징한다.강산이 네 번 반이나 바뀌는 동안 ‘고래’도 영덕도 다 변했다. 사실 영덕은 고래와 큰 관련이 없다. 물론 영덕에서도 저인망 어선에 밍크고래가 혼획되는 일이 가끔 있지만 과거 우리나라의 고래잡이는 울산 장생포와 포항 구룡포에서 주로 이뤄졌다. 장생포에는 고래문화마을과 고래박물관이 있고, 매년 고래축제가 열린다. 그럼에도 영덕 기행문을 고래 이야기로 연 것은 병곡면의 고래불 해수욕장 때문이다. 희고 고운 모래사장이 이십 리나 펼쳐진 그 해안에 대해 말하기 위해 송창식과 바비킴, 고등래퍼의 고래 노래를 들었다.죽변에서부터 봉평, 망양, 후포 해변을 지나 고래불로 가는 길, 포크에서 레게 그리고 힙합으로 장르가 변하는 사이 당진영덕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영덕은 ‘교통 오지’의 오명을 벗었다. 송창식이 ‘고래 사냥’을 노래한 때나 지금이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인 청춘, 다만 이제는 “삼등삼등 완행열차” 대신 KTX를 타고 서울에서 포항까지 2시간 30분, 포항역에서 다시 기차로 30분을 달리면 영덕에 닿을 수 있다. 영덕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대게지만, 먼 옛날 병곡 바다엔 대게만큼이나 고래가 우글거렸다.고래불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에 의해 붙여졌다. 어린 시절 산에 올랐다가 바다에서 고래들이 흰 물줄기를 뿜으며 뛰노는 모습을 보고 “고래불”이라고 외쳤다 한다. ‘불’은 ‘뻘’의 옛말로 고래불은 고래뻘, 즉 고래가 드나드는 해안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고래가 놀지 않는 해안, 하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고래불 바다는 언젠가 돌아올 범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를 향해 싱그러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저 수평선은 푸른색의 고향일까, 물결이 끊임없이 새 파랑을 새파랗게 새파랗게 해변으로 밀어 보내면, 백설탕처럼 고운 모래가 파랑을 사랑으로 바꿔 해변을 나란히 걷는 연인의 발뒤꿈치를 달콤하게 적셨다.고래들이 헤엄쳐 와 넉넉히 놀다 가던 고래불에서 사람들은 모두 고래 분수처럼 시원한 웃음을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그 웃음이 바다를 더 파랗게 물들였다. 연인들은 해변을 걷고, 걷다가 모래 위에 하트를 그리거나 서로의 이름을 적고는 파도가 그걸 지울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그 모습을 부러워하며 해수욕장을 나서자 소나무 숲에 조성된 고래불국민야영장에는 형형색색 텐트들이 만화 ‘스머프’처럼 아기자기한 동화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어른들은 텐트 앞에 모여 앉아 바비큐 파티를 즐기고, 물놀이장에선 아이들의 물장구 사이사이로 무지개가 반짝였다. 연인과 가족, 친구들이 그려내는 여러 사랑의 풍경들이 고래불 해수욕장의 얼굴이다. 어느 책 제목을 빌면, 고래불에서 우리는 ‘바다의 얼굴, 사랑의 얼굴’(김얀)을 볼 수 있는 것이다.영덕군이 동해안을 따라 고래불에서부터 축산항, 대게 공원으로 이어진 해파랑길을 ‘블루로드’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알겠다. 고래불에서 나와 대탄리의 ‘해맞이공원’으로 가는 내내 차창 너머로 푸른 그림들이 늘어선 화랑이 열린다. 자연이라는 거장의 작품들, 해맞이공원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풍력발전단지의 거대한 풍차가 푸른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몸이 떠오르고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영덕 바다의 푸른빛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수평선 끝까지 날아가고 싶게 만드는 아득한 신비감과 황홀감이 있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는 어디에도 없다.푸른 바다는 넓고 높은 사람을 낳아 기른다. 영덕은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져 동해와 닿는다. 북동쪽에는 태백산맥의 분수령인 칠보산과 등운산이 솟아 있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어깨에 바다를 짊어지며 동해를 향해 달려가는 지형이다. 서부산지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과 송천 등 영덕 땅을 흐르는 물줄기들은 영해평야와 영덕평야, 금호평야를 이룬다. 이 천혜의 자연 속에서 목은 이색과 신돌석 의병장이 태어났다. 두 분 다 영덕 출신으로 영해에는 목은 이색 기념관이 있고, 축산에는 신돌석 장군 유적지 및 생가가 있다. 시를 6천 수나 짓고 “붓을 잡으면 곧 써 나가기를 마치 바람 불고 물 흐르듯 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던 천재 문장가와 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태백산 호랑이’의 자취와 숨결을 느껴보는 것 또한 영덕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감동이다.신돌석 장군 유적지에 바윗돌 들기 체험장이 있는데, 제일 큰 돌을 들어 올린다고 객기를 부렸더니 허리가 뻐근했다. 휴식이 필요한 시간, 다행히 강구항으로 가는 길에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아름다운 카페가 있다. SNS에서 사진 찍기 좋은 곳, 연인과 함께 데이트하기 좋은 핫플레이스로 소문난 집이다.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칠한 외관이 카리브해의 카페를 연상시키는 ‘카페 봄’에는 통유리로 된 포토존과 야외 데크가 있어 바다를 가까이서 만끽하며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기 좋다. 이곳 카페에 오면, 젊은 연인들은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거나 푸른 바다와 함께 보석처럼 빛나는 애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커피잔의 얼음이 녹는 줄도 모르고, 어느 노총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에서 천불이 나 아이스커피를 원샷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봤다고 한다.헛헛한 속을 달래려 강구항의 한 노포(老鋪)를 찾았다. 청송식당은 1976년부터 장사를 했다. ‘할배 방앗간’과 ‘머리 만들기 미용실’, ‘마법의 빵’ 등 주변 가게들과 끼리끼리 정겹고 정다운 강구시장 안에 있다. 식당이 아니라 오래된 가정집을 연상케 하는 모습, 허름한 마당을 지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기억 속에 자리한 냄새가 풍기는데 그 옛날 시골 할머니 집에 갔을 때 나던 따뜻한 내음이다. 이 집은 미주구리회 전문이다. 경북 지역에서 물가자미를 미주구리라고 부르는데, 뼈회로 잘게 썬 것을 양념초장에 무쳐 먹는다. 주인 할머니께서 미주구리회 한 접시와 특제 양념초장을 내오셨다. 초장을 회에 몇 국자 부어 젓가락으로 부지런히 무쳤다. 한 젓가락 크게 집어 입안에 들이니 뼈회의 고소함과 양념초장의 새콤달콤함, 그리고 매운 고추의 알싸함, 쪽파와 양파의 아삭함이 한 번에 느껴졌다. 반쯤 먹고 나머지 반은 밥에 비벼 회덮밥으로 먹었다. 밥을 주문하니 “우리 집 반찬 좀 먹어보라”며 김치와 젓갈, 멸치조림, 감자 볶은 것, 된장국을 내어주셨다.카드 결제가 되지 않아 새마을금고에 가 현금을 인출하고 왔더니 주인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마른 등을 쓰다듬고 계셨다. 아까 보았던 고래불의 푸른 파도가 두 눈 가득 차오르는 순간, 시인은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정호승, ‘고래를 위하여’)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확실히 알았다. 영덕 바다는 사랑을 위하여 푸르다는 것을.      /시인 이병철

2019-07-07

차다못해 흘러넘치는 통통한 살을 그 단단한 껍질에 가두느라 게, 너도 참 힘들었겠구나

유년의 추운 겨울밤이었다. 그때는 눈이 참 예쁘게 내렸다. 하얀 스웨터를 짜 입은 아스팔트 골목에 가로등 불빛이 글썽거리고, 저기 모락모락 눈발을 부옇게 지우며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곳엔 어김없이 영덕게 용달트럭이 서 있었다. 술 한 잔 걸친 아버지가 게 몇 마리 담은 비닐봉지 들고 휘적휘적 눈길을 걸어 집에 오면 내복 차림의 나와 여동생은 입에 침을 번들거리며 방방 뛰었다. 층간소음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게 두어 마리를 아랫집에 가져다주고 밥통에서 지금 막 찐 야채호빵 여러 개를 받아 왔다. 가위로 자르고 젓가락으로 쑤시고 입으로 쪽쪽 빨면서 발라먹는 게살 맛은 정말 황홀했는데,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하고 또 달짝지근한 것이 쫀쫀하다가 몰캉거리다가 이내 입 안에서 사라지면 그렇게 안타까웠다. 엄마는 살 많은 부위를 우리에게 다 주고 뾰족한 끝마디만 입에 대곤 했다. 여섯 식구가 둘러앉아 양은쟁반에 부려놓은 붉은 게를 나눠 먹던 그 겨울밤이야말로 완전한 행복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서울 소년인 내게 대게는 특별한 먹거리였다.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택배가 쉽지 않고, 수산시장에 가면 “바가지 쓴다”던 시절이다. 골목길 어귀에 찜통을 얹은 트럭이 서는 날에만 맛볼 수 있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온 식구가 형광등 아래 앉아 게를 다 먹고 나면 엄마는 남은 껍질로 육수를 내 된장국을 끓였다. 참 알뜰하게 먹었다. 이제는 서울에도 대게 전문식당이 많이 생겼다. 수산시장에 가거나 산지에서부터 당일 택배로 받아 편하게 먹을 수 있다. 유통 시스템이 발전하는 사이 대게는 가족의 별미에서 친구들과의 술안주로, 연인과의 데이트 음식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다. 마룻바닥에 둥글게 모여 앉아 대게를 먹던 가족들은 흙으로 돌아가거나 요양병원에 눕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나만 홀로 옛 동네에 남아 반지하방 창틈으로 다시 오지 않는 영덕게 트럭을 기다린다.“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백석, ‘여우난곬족’)백석은 1920년대 평안도 지방의 명절 풍경을 시에 자주 그려냈다. 콩가루차떡과 고사리와 도야지비계 따위는 명절 때나 돼야 먹을 수 있는 별미였을 것이다. 모처럼 맛있고 푸짐한 식사를 해 즐거워진 가족들은 “웃고 이야기하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는 놀이에 열중하며 “하로에 베 한필을 짜”고, “배나무접”을 하고,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느라 “눈물을 짤 때가 많은” 삶의 고락을 잊어버린다.백석의 시에서 국수, 무이징게국, 곰국, 달송편을 차려낸 식사가 그렇듯, 서울의 어느 가족에게도 대게를 먹는 일은 일종의 축제였다. 따끈한 김과 달큰한 비린내가 함께 피어오르는 쟁반 앞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는 특정한 외부 세계의 물질을 똑같이 몸속으로 들인다는 점에서 유대와 결속의 의미를 갖는다. 함께 울진이나 영덕에 가본 적 없지만, 대게를 먹음으로써 나와 부모 형제 몸속엔 붉은 피 말고도 동해의 물빛과 파도와 뜨거운 해돋이가 푸른 피가 되어 똑같이 흘렀던 것이다.‘대게’와 ‘영덕게’는 꽤 오랫동안 동의어로 여겨졌다. 많은 사람들이 대게 하면 영덕부터 떠올린다. 그만큼 영덕은 대게의 대명사로 일찍이 명성을 얻어 지금껏 대게 생산지로 제일 각광받아 왔다. 그 점 때문에 나는 영덕 대신 울진으로 대게 식도락의 걸음을 돌렸다. 시인이므로 기성의 권위와 질서, 상투성을 거부해야 한다는 건 근사한 핑계고, 사실 단순한 이유에서다. 영덕 강구항은 너무 번성한 탓에 수선스럽다. 특히 네온사인을 칭칭 두른 대게 간판과 조형물들이 천지사방 가득해 여기가 지구인지 게에게 침공당한 ‘크랩톤 행성’인지 헷갈릴 판이다. 울진 후포항도 비슷하다. 사람 없고 조용한 곳을 찾다보니 그나마 덜 ‘게판’인 죽변항으로 흘러들게 되었다.큰(大) 게가 아니라 다리 생김이 대나무를 닮아 대게다. 박달나무처럼 속이 꽉 차 살이 단단하면 박달대게다. 즉 박달대게 한 마리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심겨진 셈이다. 영덕과 울진과 포항은 대게의 ‘메카’가 자기네 고장이라고 서로 주장한다. 자망어업으로 잡은 것만 박달대게로 인정할 수 있는데, 영덕과 포항 구룡포에만 자망협회가 있어 ‘협회’가 없는 울진의 대게는 자망으로 잡아도 ‘공식’ 박달대게가 아니라는 이상한 이야기도 들린다. 이처럼 대게 ‘원조’ 논쟁들이 대개 ‘게 소리’다. 한 바다에서 잡아 영덕에서 사들이면 영덕 대게, 구룡포에서 사들이면 구룡포 대게, 울진에서 사들이면 울진 대게가 된다는 것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더는 다투지 말자.들숨에 게 찌는 냄새가 훅 들어오고, 날숨은 아까시 냄새에 흩어지는 죽변항을 천천히 걸었다. 죽변(竹邊)은 대숲의 기슭이다. 대게 식당들이 늘어서 있는데, 내 나름대로 깐깐한 조건을 두고 저울질했다. 그 조건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호객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 소위 ‘스끼다시’로 불리는 곁들임 음식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셋째, 외관이나 장사 수완이 세련됨보다는 투박함 쪽으로 기울어질수록 좋다. 그런 식당이라야 상차림과 가격에 거품이 안 껴 생산지 대게의 참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식당이 세 조건을 충족하고 있어서 선택이 쉽지 않았지만, 상호명의 콩글리시가 정감을 일으키는 ‘대원대게센타’로 결정했다. 죽변항에서 꽤 유명한 집이다.가게 밖 수조에서 먼저 대게를 골랐다. 주인장이 울진 박달대게를 추천했다. ‘박달’ 완장을 차지 않은 ‘비공식’ 박달대게이지만 씨알이 크고, 살이 꽉 찼는지 배와 다리가 단단했다. 집게발을 거세게 흔들어대는 녀석의 등딱지에는 밤색 난낭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국산의 상급 대게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등딱지에 흰 석회와 따개비가 붙어 있는 것은 보통 러시아산이다. 박달대게 몸값을 익히 알고 있어 꽤 긴장했는데, 주인장은 내 예상보다 훨씬 싼 가격을 불렀다. 격하게 감동해서는 단 한마디 흥정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일일연속극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을 보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대게를 찌는 30분이 마치 30년처럼 느껴졌다. 기다림에 목이 말라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기본 상차림은 단출하다. 미역줄기 볶은 것과 콩자반, 생선과 함께 익혀 시원한 맛이 일품인 김치, 도토리묵과 매실장아찌, 그리고 말린 도루묵 조림이 전부다. 경북 바닷가 식당에서는 말린 도루묵 조림이 흔한데, 이게 또 별미다. 천관녀 집으로 가는 김유신의 말처럼, 젓가락이 자꾸 도루묵으로 향하는 걸 겨우 멈추고는 맥주로 입을 헹궜다. 대게가 상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묵언의 수행자가 된다. 바깥의 찜통에서 몽글몽글한 김이 솟을수록 내 간절한 허기는 세월의 자욱한 안개 너머 그 옛날 영덕게 트럭이 서 있던 골목으로 달려간다. 허공에 흩어지는 저 희부연 김마저 달고 고소하구나. 찜통 앞을 지키고 선 사람은 주인장인가 내 아버지인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등대지기처럼 보인다. 냄새와 풍경, 추억, 그리고 게 찌는 이의 마음까지를 두루 음미할 때 비로소 게 맛을 알 수 있다. “너희가 게 맛을 알아?”라는 유행어는 그냥 우스개가 아닌 것이다.마침내 대게가 상에 올랐다. 은빛 스테인리스 쟁반 위 크고 아름다운 선홍빛 대게가 내 눈엔 수평선을 가르고 솟아오르는 태양보다 장엄하다. 일일드라마를 보던 며느리가 능숙한 가위질로 먹기 좋게 대게를 손질해주었다. 집게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살이 꽉 차다 못해 흘러넘쳤다. 이 통통한 살을 껍질에 가두느라 게도 참 힘들었겠다. 게 다리를 든 것인지 닭다리를 든 것인지 헷갈려 하면서 게살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달달하고 짭조름한 육즙이 입 안에 팡팡 터졌다. 누가 내 몸에다 게 삶은 육수를 바가지로 들이붓는 느낌이었다. 입 안에 몰아치는 육즙의 해일, 잘못하다간 입 밖으로 질질 흘리기 십상이라 나는 서둘러 ‘육즙주의보’를 발령해야만 했다. 앞니에 처음 닿을 때는 껌처럼 탄력 넘치던 속살이 두어 번 오물거림에 완전히 풀어져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 어떤 키스도 박달대게와의 입맞춤은 이길 수 없다. 고소하고 담백하고 ‘단짠단짠’하며 슴슴하고 또 쫄깃쫄깃 탱글탱글 살살 녹는 게살 맛에 취해 음미고 뭐고 허겁지겁 게 다리를 빨아먹었다. 게살 한 입 먹고 소주 한 잔 마시다보니 어느새 테이블엔 게 껍질과 빈 소주병만 쌓여 있었다. 대게 등짝지에 눌러 담은 내장 볶음밥과 홍게 된장국까지 다 먹고서야 대게 탐미(耽味)와 탐식(貪食)을 마쳤다.먼 등대불빛을 보며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게를 먹던 시절을 떠올렸다. 지난날을 추억해봤자 마음만 축축해진다. 동생에게 집게발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며 게 다리 개수까지 세어놓던 그 때가 뭐 그립다고. 귀한 박달대게를 혼자 배 터지게 실컷 먹으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 코끝은 왜 시린 걸까. 바닷가 시골 밤거리를 홀로 걸으면 일찍 불 꺼진 간판들이 내 어느 한 시절 같다. 그리움은 게 찌는 냄새와 고장 난 네온사인으로 오고, 외로움은 아까시 향기와 냉동창고 수은등으로 온다. 죽변항 허름한 모텔을 향해 터벅터벅, 술 한 잔과 게살 한 점이 아쉬워 편의점 들러 맥주 한 캔과 인스턴트 게살을 집어 들었다. 늦봄의 항구에 달빛이 첫눈처럼 하얗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날 밤 꿈엔 영덕게 용달트럭이 대게 대신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가득 싣고 탈탈탈, 엔진 소리를 내며 기어왔다. 꿈속에서도 게 찌는 냄새가 나 코를 심하게 골았다. 잠귀로 들은 용달차 엔진 소리는 내 코 고는 소리였던 것이다.      /시인 이병철

2019-06-30

‘구비구비’ 청동물길 따라 ‘울울창창’ 초록협곡 지나니 오색연등 극락풍경이…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바다가 푸른 몸집을 불리는 동안 내륙의 금강송 군락은 거대한 초록 성채를 이루는 중이었다. 초록을 향해 걸어갈수록 나는 점점 바닷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불영사 계곡이 있는 금강송면 하원리는 울진 바다로부터 불과 18km 떨어져 있지만, 천축산 소나무 숲의 울울창창함이 바다를 잠시 잊게 만들었다. 불영사 계곡은 광천과 몸을 합치고, 광천은 왕피천으로, 다시 왕피천은 동해로 흘러든다. 나는 바다와 기수역을 오가는 한 마리 은어처럼 불영사 계곡을 따라 흐르다 왕피천에서 눈을 씻고 망양 바다에 마음을 내어 말릴 작정이었다.그런데 불영사 가는 길, 금강송 군락이 발목을 오래 붙잡았다. 백두대간 소나무들의 침엽이 공중을 찌를 때마다 햇살인지 아까시인지가 톡톡 터지며 달짝지근한 꽃내음 뿜어내는데,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해 있는 동안 오후가 깊어지고 있었다. 바다를 잊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해수욕장과 대게를 떠올리며 울진에 왔을 행락객들은 이미 금강송 두꺼운 껍질이 촘촘하게 펼친 그물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솔가지 사이로 불영사 계곡이 서늘한 빛을 내비치는 순간, 감탄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수 만년 솔잎을 삼켜 온몸이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불영사 계곡, 15km에 달하는 청동거울 물길은 웅장함과 세밀한 아름다움을 함께 뽐낸다. 계곡은 그저 바위와 물이 아니라 여울 소리, 물 내음, 새 소리, 나무 그늘, 수면에 비친 하늘, 나비 날개, 돌 틈으로 숨어드는 물고기가 한 몸을 이룬 유기체적 우주다. 불영사 진입로 구간에서는 물가로의 접근이 제한되지만 불영사 일주문을 나와 계곡 중류로 내려가면 누구나 그 차고 맑은 우주에서 탁족과 천렵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살갗에 내려앉는 더위보다 마음에 쏟아지는 속세의 불볕이 더 따가웠기에, 나는 보석빛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고는 마음의 피서를 위해 불영사로 걸음을 재촉했다. 부처의 그림자가 내 안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길 바라면서.길디긴 초록 협곡을 빠져나오자 불영사 너른 마당엔 흰 불두화와 붉은 철쭉이 꽃대궐을 차려놓고 방문객을 맞이했다.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호랑나비가 꽃덤불로 날아들어 마치 무위사(無爲寺)의 파랑새처럼 극락 풍경 한 폭을 완성하는 동안 나는 경내 한 바퀴를 천천히 걸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절 이곳저곳에 오색 연등이 걸려 있었다. 간절한 마음들에는 색(色)이 있어 금방 눈에 띄는 법일까. 울긋불긋한 저 소원들은 이미 부처에게 가 닿았을 테고, 내 마음은 당신에게 가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지겠지. 범종이 걸린 범영루 앞 연못에는 부처의 그림자 대신 한 여인의 얼굴만 떴다가 졌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평온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부처가 꽃향기로, 햇살로, 약수 한 사발로, 소슬한 바람으로 내 안에 들어온 것이리라.불영사에서 나는 세 번 놀랐다. 우선 사찰 주변의 풍경에 감동했다. 조선 중기 문장가 임유후가 불영사에 머물며 남긴 14수의 5언 절구는 불영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삼각봉(三角峰), 좌망대(坐忘臺), 오룡대(五龍臺), 해운봉(海雲峰), 단하동(丹霞洞), 부용성(芙蓉城), 학소(鶴巢), 향로봉(香爐峰), 청라봉(靑螺峰), 종암봉(鍾岩峰), 금탑봉(金塔峰), 용혈(龍穴), 원효굴(元曉窟), 의상대(義湘臺) 등 14곳의 천혜비경을 노래하고 있는데, “푸른 계곡 반석은 여기 저기 놓여있고”(‘향로봉’) “구름은 금모래 위로 지나가”(‘단하동’)는 절경을 보노라면 누구나 마음에 아름다운 문장 하나씩 품을 수밖에 없겠다. 다음엔 그 규모와 단정함에 감탄했다. 깊은 산중에 그렇게 큰 사찰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풍경에 눈을 뺏겨 자꾸 멈춰 서긴 했지만 경내 한 바퀴를 걷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규모가 큰데도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점이 마음을 흡족케 했다. 미관을 해치는 현수막이나 공사 자재는 볼 수 없었고, 나무와 꽃, 채마밭을 가꿔놓은 섬세함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두 번 놀라고 세 번째, 비구니 사찰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무릎을 쳤다. 구석구석 정갈함에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특히 불영사는 사찰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매년 가을마다 사찰음식축제를 열어 사람들에게 건강한 자연 밥상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불영사에선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음식을 만드는데, 김치와 된장은 속인(俗人)들이 그 비법을 탐낼 정도라고 한다. 절의 회주인 일운스님은 사찰음식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스님께 절밥 한 그릇 얻어먹고 싶었지만, 미련한 중생은 주지육림을 향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한 채 불영사 일주문을 나섰다. 저녁엔 대게 다리를 빨며 소주를 마셔야 하니까.대게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자 그제야 잊고 있던 바다가 생각났다. 초록이 환하게 밝혀드는 천축산에서 나와 바다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다 이내 멈춰 섰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쳐가듯 낚시꾼인 나는 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기 때문이다. 경북 민물고기생태체험관은 왕피천과 광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위치해 있다. 모든 하천은 본류와 지류의 합수머리에서 물고기들의 서식이 가장 활발한데, 체험관은 나름대로 터를 잘 잡은 셈이다. 경북 바닷길이 시작되는 동해안의 허리 울진에서 민물고기 구경이라니, 조금은 생경하지만 웬만한 유명 아쿠아리움 못지않게 공을 들인 수족관에는 형형색색의 우리 민물고기들이 애니메이션 영화 ‘니모를 찾아서’를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군무를 추고 있었다. 황쏘가리부터 갈겨니, 피라미, 납자루, 어름치, 산천어, 각시붕어, 돌고기, 마자, 누치, 꺽지, 모래무지, 쉬리, 잉어, 금강모치, 동사리, 동자개 등등 아름다운 이름들 하나씩 부르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와 함께 금모래 반짝이는 강에서 족대질하던 어린 날의 작고 예쁜 친구들, 그 많던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기억에서 그 예쁜 이름들이 사라지는 것보다 이 땅의 하천에서 은빛 물고기들이 자취를 감추는 속도가 더 맹렬하다.반가움과 쓸쓸함이 뒤섞인 표정을 수족관 유리에 새겨두고 발길을 돌렸다. 불영사 계곡에서는 지상의 초록빛 축제를 감상했고, 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서는 수중의 알록달록한 빛을 보았으니 이번엔 지하의 색을 만날 차례다. 성류굴은 천연기념물 제155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관광동굴이다. 얼마 전 신라 진흥왕이 560년에 행차한 것을 기록한 명문(銘文)이 발견되기도 했다. 총 길이 870미터 중 약 270미터가 개방된 ‘지하의 금강산’에는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이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상과 권진규의 테라코타가 흉내 낼 수 없는 기묘한 자연미를 뽐내고 있다. 머리가 큰 관계로 안전모를 정수리에 얹어두고는 좁고 축축한 동굴 내부로 내려갔다. 동굴 내부는 사철 섭씨 15도를 유지한다. 땅 속의 에어컨에 땀을 식히며, 머리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한 걸음씩 조심스레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동굴 탐방은 내게 ‘인디아나 존스’가 된 것 같은 모험심을 선사했다. 어둠으로 뒤덮인 지하의 색채는 검정이지만, 조명과 어우러진 신비한 빛이 젖은 몸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다 신기한 광경들, 특히 천장에서 동굴 내부의 호수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는 그야말로 자연의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사운드였다. 종유석을 쓰다듬어보았다. 부드럽고 반들반들한 촉감이 마치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이의 살결 같았다. 땅 속에서 그리움의 깊이가 더 캄캄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동굴을 나서야만 했다.지상과 지하를 두루 다녀온 자에게 울진의 동녘은 차안과 피안이 무화된 세계를 보여준다. 이제 바다와 하늘의 색채를 볼 시간이 됐다. 바다 따로 하늘 따로 볼 필요가 없다. 울진에서는 바다와 하늘이 동색(同色)이기 때문이다. 망양정에 올랐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라고 노래한, ‘하늘의 끝’ 같은 바다가 울진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동해다. 망양정에서 망망대해를 보며 정철은 ‘세상의 끝’, 즉 우주와 저승에 대한 상상을 했던 것이다. 망양정에 오르니 파도가 끊임없이 아까시 향기를 밀어 올렸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향기에 취했을까? 아무리 눈을 씻어도 수평선이 희미했다. 어느 것이 바다고 어느 것이 하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16년 전 스무 살 여름, 학과에서 망양정으로 ‘신라의 푸른 길’이라는 문학 답사 기행을 왔다. 푸른 바다 앞에서 그 아이의 웃음은 더 눈부셨다. 그때 미친 듯 짝사랑하던 여학생은 지금 두 딸의 엄마가 됐다. 내가 정말 그 시간을 살았었나? 모든 게 꿈만 같다. 망양정 너머 동해의 부윰한 분홍 저녁이 마음으로 스며들 때 비로소 알았다. 사랑과 미움이 한 몸이라는 것을, 그리움과 기다림도, 어제와 오늘도, 삶과 꿈도 모두 저 분홍 저녁 속으로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을.달이 뜨기만을 기다려 월송정을 찾았다. ‘만 그루 소나무 가운데’ 지어진 아름다운 누각이다. 월나라 소나무가 심겨졌다고 월송정(越松亭)이라는데, 달 속의 소나무 月松이 훨씬 아름답다. 달빛 윤슬을 반짝이며 은백색 파도를 밀어오는 바다, 달빛과 구름과 소나무 그림자가 수묵화를 이룬 하늘, 바람 불 때마다 소슬한 소나무 향기가 살갗에 와서 닿았다. 조선 임금 숙종이 “한번 올라 바라보매 흥겹기 그지없다”고 노래한 정자에서 처마 끝에 걸린 달을 한참 바라보니 내가 바로 세상의 왕이었다. 막걸리 한 잔 생각이 간절했으나 찢어진 청바지와 다 해진 운동화 차림의 거지 왕에게 술상을 차려줄 이는 없다. 월송정의 달빛을 한 겹 걸쳐 겨우 남루함을 가린 채 죽변항으로 향했다. 코끝을 찌르는 아까시 냄새보다 상상 속 대게 찌는 냄새가 더 진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울진이 펼치는 황홀한 색의 축제는 죽변항에서 마침내 완성된다. 잘 익은 대게의 붉은 등딱지와 17.5도의 소주를 담은 초록 병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 이병철

2019-06-23

설렘 가득 안고 떠나는 ‘경북의 푸른 바닷길’ 1천300리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동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해방감과 시원스러움을 선물하는 ‘경북의 보물’이다. 짙푸른 바다를 따라 들어선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마을마다 귀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동해의 푸른 길 537km를 스토리텔링화 한다면 ‘최고의 관광자원’이 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하다.경북 동해안은 많은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남해와 서해만큼 관광객이 찾아오지 않는다. 경북도로선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바다와 그곳을 삶의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 동해만의 독특한 문화와 맛깔스런 음식, 해양스포츠 등 다양한 즐길거리와 역사 유적을 찾아내 소개하는 일은 경북이 ‘관광 1번지’로 도약하는데 작지 않은 도움을 줄 것임이 분명하다.젊은 시인 이병철이 바로 이 역할을 맡아 ‘경북의 푸른 바닷길’ 1천300리를 독자들과 함께 걷고자 한다. 2020년은 ‘대구·경북 관광의 해’다. 동해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소개할 본지의 기획 연재기사가 ‘대구·경북 관광 활성화’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혹은 내가 투구게처럼 갑갑하게 느껴지고 이 한 줌 하찮은 삶도 갑자기 자갈밭을 갈고 있는 보습처럼 못 견디게 더워져서, 마침내 삶의 화두가 뻗쳐올라와 물집투성이인 얼굴이 되었을 때 다시금 나는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석굴암 본존불상 아미타불과 경주에서 강릉까지 가는 7번국도를 떠올리고 있었다.”윤대녕의 소설 ‘신라의 푸른 길’을 스무 살에 읽었다. 첫 단락만 읽고도 벌써 몸을 떨며 전율한 스무 살 여름, 나는 경주에서 속초까지 가는 7번국도를 여행했다. 경주 감포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에서 출발해 호미곶을 경유하는 동안 두 눈이 파랗게 짓물렀다. 울진 월송정과 망양정에 올라 송강 정철을 생각하고, 동해 추암 촛대바위와 양양 낙산 해변의 일출을 불덩어리처럼 삼켰다. 새벽까지 마신 술 냄새로 숨 쉴 때마다 대기를 오염시키며, 좀비처럼 설악산 대청봉까지 오르기도 했다.지금 돌아보니 꽤나 조숙했던 여행이다. 아니다. 그저 또래들보다 조숙하게 보이고 싶던 지적 허영의 방랑이었다. 그때 고작 몇 줄 주워 읽은 문장, 마구잡이로 눈에 욱여넣은 풍경들, 주머니가 얇아 컵라면 따위로 때운 식사만으로 동해의 바닷길을 다 알았다고 생각했다. 다 안다고 생각하니 시시했다. 그래서 십여 년 동안 그 길에 다시 오르지 않았다. 동해보다는 남해로, 바다보다는 강으로, 영남보다는 호남으로, 국내보다는 국외로 나다니는 사이 나는 서른 중반이 되었다. 포항은 볼락 낚시한다고 자주 드나들었지만 경주와 영덕은 생김새마저 가물가물했다. 철 지난 영화처럼 색이 바란 ‘푸른 길’을 다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복원시킨 건 한 편의 시였다.시인은 “화랑세기에 의하면 내 출생지가 사막이라고 기재되었으나/ 앞뒤 문장은 사나운 모래폭풍에 유실되었다”(이경교, ‘모래의 시’)고 고백하면서 ‘화랑세기’ 필사본을 둘러싼 진위논란의 풍문을 주석에 붙였다. 거기서부터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화랑세기’와 관련된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전래동화쯤으로 여기던 ‘삼국유사’를 다시 들여다봤다. 특히 소설가 김별아의 연재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을 탐독한 것은 모처럼 정신을 달뜨게 한 황홀한 독서 체험이었다.그렇게 며칠 밤 ‘신라’로 거슬러 간 내 마음은 결국 십여 년 동안 덮어두었던 ‘신라의 푸른 길’을 다시 펼치게 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 그리고 경주발 강릉행 버스에서 ‘나’와 우연히 동석한 ‘안인숙’은 서른네 살 동갑인데,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나는 그들과 비슷한 감수성으로 ‘신라의 푸른 길’을 소설처럼 걷고 싶어졌다. 그러자 동해 바닷길이 내 내면에서 마치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서정주, ‘화사’)을 지닌 한 마리 뱀이 되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당위는 충분했다. 경북매일신문이 마침 경북 바닷길 537km 기행문의 연재를 제안해온 것이다.여행과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다시금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책 몇 권, 그리고 운명처럼 ‘수로부인’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헛된 기대감도 함께 가방에 넣었다. 부산, 통영, 거제, 남해가 얼마나 아름다운 수평선을 지녔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여수, 순천, 보성, 목포가 거느린 남도 음식의 황홀한 맛도 익숙하다. 나는 수도권에서 가까운 속초와 안면도에 가 일출과 일몰을 보고, 여름휴가는 제주도로 다니는 서울 사람이다. 나와 경북 바닷길 537km는 아직 손도 잡지 못한, ‘썸’ 타는 사이인 셈이다. 경북 바닷길의 ‘맛과 멋’을 탐색하는 여정은 연애와 흡사한 호기심과 설렘을 일으켰다. 그 푸른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내 온몸을 투명하게 물들일 동해의 스킨십을 나는 거부하지 않으리라.설렘은 늘 불안과 함께 온다. 잠이 불편했는지 어깨가 결렸다. 악몽을 꿨으니 그럴 만했다.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전날 밤, 달리기 시합을 앞둔 여덟 살 소년의 꿈에 뱀이 출몰했다. 부엌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살모사 한 마리가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그 꿈을 꾸고는 1등으로 골인했다. 길몽이었지만, 지금도 생생한 그 꿈의 질감과 색감과 냄새는 분명 불길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뱀은 내게 매혹이자 공포의 원형(原形)이 되었다.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면 꿈자리에 꼭 뱀이 기어 온다. 동해안 여행을 앞둔 밤, 거의 30년 전 그 매혹과 공포의 꿈을 다시 꿨다. 어떤 불안이 영혼을 잠식했을까. 아마도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 수도꼭지에서 기어 나와 내 허벅다리부터 목덜미까지를 휘감은 것 같다. 수많은 이들이 동해 바닷길을 이야기해왔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모국어 활자로 인쇄되는 모든 매체가 7번국도 기행문을 한 번씩은 실었을 것이다. 이미 지나치게 많이 소비된 그 길을 무슨 재주로 새롭게 노래한단 말인가. 몹시 골똘해졌다.석가탄신일을 하루 앞둔 5월 둘째 주 토요일, 아침 일찍 차에 짐을 실었다. “불현듯 행장을 꾸리고 나는 정말 투구게 같은 모습으로 어깆어깆 길에 오른 것”이다. 낚시 도구들도 빼놓지 않았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가는 이 시기라면 울진과 영덕, 포항에서 농어와 볼락, 성대, 광어 등을 루어낚시로 노려볼 만하다. 하지만 물고기보다는 풍경을, 이야기를, 사람을, 맛을 더 많이 낚아야 한다. 그걸 실패하면 그때 물고기나 낚으며 답답한 속을 달래볼 심산이었다.서울을 빠져나와 경부고속도로에서 원주 방향 중부내륙고속도로에 진입해 충주, 문경, 봉화를 차례로 지나는 동안 기행문의 주제와 구성에 대해 고민했다. 6개월 동안 매주 한 편, 여름 초입에서 겨울의 문턱까지 나는 독자들에게 꽤 웃기고 꽤 진지하면서 또 레퍼토리가 다양한, 신뢰할 만한 이야기꾼이 되어야만 한다.그러기 위해서 동해와 그곳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와 선조들이 남긴 의미 있는 역사를 제대로 알 때까지 거듭 ‘눈이 시린 경북의 푸른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본격적인 연재에 앞서 거듭 밝혀두건대 이번 기행은 부산 기장에서 강원 고성까지 이어지는 7번국도 전체 구간을 답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주에서 울진까지 경북 바닷길로 한정했다. 지역 언론의 역할에 부합하고자 함인 동시에 보다 섬세하고 미시적인 시각으로 7번국도의 ‘허리’를 관찰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첫 번째 여정에는 울진과 영덕을, 두 번째에는 포항을, 세 번째에는 경주, 네 번째에는 다시 포항, 다섯 번째에는 울릉도를, 여섯 번째에는 다시 경주를,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에는 단풍에 울긋불긋 물들거나 또는 첫눈이 소담스레 내린 경주에서 울진까지를 두루 걷기로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이다. 여행자는 즉흥과 이탈의 아름다움을 늘 사랑해야 한다.울진으로 가는 길, 활짝 열어둔 차창으로 “아까시 아까시 희디흰 꽃 냄새가 홍수로 번지”(김선우, ‘범람’)고 있었다. 7번국도 전체가 아까시 내음을 짙게 뿜어내는 한 마리 짐승으로 몸을 뒤챘다. 그 냄새에 나도 짐승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꽃향기 환하게 밝혀드는 축제가 정신을 나른하게 하는데, 양 옆으로 스쳐 지나는 풍경들이 생경했다. 빽빽한 녹음 아래 새로 지은 펜션과 카페, 모던한 폰트의 간판들, 젊은 남녀들은 최신 유행의 난해한 패션을 걸치고 불영사를 향해 걸었다. 나는 뱀이 허물을 벗듯 새로운 몸짓과 숨결로 생동하는 경북 바닷길을 보았다.“언제까지 ‘신라의 푸른 길’에만 머물러 있을래?”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어떤 각성을 재촉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내 걸음이 너무 늦게 당도했을까. 경북 바닷길 537km는 이미 망양정과 월송정, 영덕대게, 구룡포 과메기, 호미곶 상생의 손,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 등과 함께 ‘힙스터’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핫플레이스 카페와 럭셔리 풀빌라, 대게 피자와 과메기 파스타, 재즈 페스티벌이 공존하는 낯선 차원이 되어 있었다. 동해안을 따라 상하로 구불구불하게 굽은 국도가 어느새 낮게 누워 수평의 길이 되었다. 수평의 길 위에선 시간도 수평이 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일직선상에 나란히 병렬되어 시간 구분은 무의미하며,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모두 ‘영원’이라는 초월적 시간 안에 통일되는 것이다. 신라 천년 왕들의 무덤과 젊음의 거리 ‘황리단길’이 마주보고 있는 경주처럼 말이다.이제 나는 그 영원의 길을 걷고자 한다. 금강송 군락이 내 머리에 초록 휘파람을 부는 불영사 계곡으로 첫 걸음을 내딛는다. 저쪽 영원에서 이쪽 영원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의 화두를 내 귓가에 속삭인다. 경전이나 교리가 아니더라도 참선하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정말일까? 걷다 보니 어느새 극락도 부처도 가깝게만 느껴진다. 오늘은 불영사에 가 부처의 그림자를 보고,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라고 노래한, ‘하늘의 끝’ 같은 바다를 보러 망양정에 올라야겠다. 저녁엔 울진대게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셔야지. 술 한 잔에 파도와 아까시 냄새와 금강송 군락에서 우는 밤새소리를 모두 담아서.날이 밝으면 “대진 지나 명사 이십리의 풍경이 관광엽서처럼 펼쳐진 울진을 지나 양정, 봉평해수욕장을 지난 다음 죽변”에 가야겠다. 경주에서 동해로 가는 윤대녕의 소설과는 반대 방향으로, 봉평해수욕장과 양정, 울진, 고래불과 대진 명사 이십리를 지나 영덕으로 흘러들고자 한다. 그 전에 생대구탕부터 한 그릇 먹을 셈이다. 오늘밤 소주 네댓 병쯤 우습게 마실 테니까. 담백하고 맑은 국물에 겨우 속을 푼 내가 “신라의 길이면서 또한 땅과 바다가 만나는 영원의 길”을 하행하는 동안 수로부인은 경주에서 강릉으로 올라올 것이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 그녀에게 꺾어 줄 꽃이 천지사방 잔뜩 피어 있다.     /시인 이병철시인 이병철은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늘한 슬픔과 뜨거운 열망이 동시에 읽히는 작품들로 주목받는 젊은 시인. 시집 ‘오늘의 냄새’, 산문집 ‘낚;시-물속에서 건진 말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를 출간했으며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등에 여행기와 칼럼을 쓰고 있다.

2019-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