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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낙동강 1300리 물길의 예천 삼강 주막

주막은 술과 밥을 팔면서 나그네를 유숙시키던 집을 말한다. 통행이 많은 주요 길가뿐만 아니라 장터, 큰 고개 밑의 길목, 나루터 등에 있었다. 길가는 나그네는 물론 장보러 가는 자나 장을 따라다니는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주막은 세상의 정보를 수집하는 중심지 구실을 하였고, 피곤한 길손에게는 휴식처가 되었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흥을 즐기는 구실도 했다. 주막의 표지로 문짝에 `酒`(주)자를 써 붙이거나 酒자를 쓴 사방등을 처마 밑에 달기도 했다. 주막의 주인을 `주막쟁이`라 하고 밥을 짓고 술을 파는 여자를 `주모`라 불렀다. 주막에서 팔았던 술은 주로 탁주(막걸리)였다. 과거라도 있을 때면 양반 손님을 위하여 청주가 등장하기도 했다. 안주로는 육포, 어포, 돼지고기 수육, 빈대떡, 산적, 생선구이, 멸치, 콩 볶음도 있었고, 해장국, 장국밥이 대표적인 요깃거리였다.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3강 주막은 원래 3채가 있었다. 나루터에서 마을로 통하는 `배나들길`가에 30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있었는데 1934년 대홍수 때 두채가 넘어지고 현재의 주막만 남게 되었다. 당시 3강 나루터에는 배가 2척이 있었는데 한척은 소에 짐을 실어 그대로 실을 수 있는 큰 배였고 한 척은 사람만 태우는 작은 배였다고 한다. 배는 1970년대 초까지 운용되었다.삼강마을은 5백여 년을 지켜온 청주 정씨 삼강파의 집성촌이다. 이곳 지명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 3강이 합쳐지는 곳이라 삼강이라 명했다. 삼강나루에 주막이 들어선 때는 1900년 전후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주막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밭 `田`자형 겹집이다. 앞줄은 작은방과 큰방, 뒷줄은 정지와 봉당이 각기 좌우로 놓여있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기능에 충실한 합리적인 평면구성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정지의 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모가 벽에 적어놓은 외상장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외상을 주면 흙벽에 주모가 칼로 금을 그었다. 세로로 짧은 금은 막걸리 한잔이고 긴 금은 막걸리 한 되란 뜻이다. 외상값을 다 갚으면 가로로 긴 금을 그어 표시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라 불렸던 유옥련 할머니는 2005년 12월 삼강주막이 문화재로 지정된 후(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 복원된 주막을 보지도 못하신 채 2006년 돌아가셨다. 문화재 지정조사차 찾았을 때 할머니께서 내어주신 털털한 막걸리와 멸치볶음 안주 맛이 아직도 입가에 생생하게 맴돈다. 지금 이곳에 가면 맛난 두부와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낙동강 1300리 물길에 유일하게 남은 주막. 앞으로도 잘 보존되어야 할 텐데…/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1-10-06

임하댐 수몰지역에서 건진 정재종택(定齋宗宅)

정재종택(定齋宗宅)의 본래 자리는 현재 임하호 한가운데가 된 임하면 수곡(水谷) 2리에 있었다. 정침, 대문채, 사당, 외양간채 등으로 구성된 이 건물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전주 유씨 무실파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의 종가로 정재의 증조부인 류관현이 조선 영조 11년에 세운 집이다. 이곳에 있던 종택이 수몰되지 않고 현 위치로 이건돼 보존될 수 있었던 데는 사연이 있다.1986년 임하댐 건설사업이 시작되면서 이곳의 수몰민은 이주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자 250년 이상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종택이 막상 수몰이 된다고 하니 후손들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농지는 그나마 보상을 받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지만 건물의 이건(移建)은 보상을 받지 못하면 엄두도 못 낼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건 보상비를 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종택의 문화재지정은 후손들에겐 절체절명의 일이었다.당시 필자는 안동댐 수몰지역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안동 임하댐, 영천 자양댐, 청도 운문댐 등지의 수몰지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임하댐 지표조사 당시 송현 김일진 박사(전 영남대학교 교수)를 중심으로 그 문도의 필자와 당시 박사과정의 장석하(현 경일대학교 교수), 백영흠(현 대구대학교 교수), 조영화(현 대경대학 교수), 정명섭(현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 교수), 이호열(현 부산대학교 교수), 변숙현(현 청도 한옥학교 교장), 곽동엽(현 대진대학교 교수), 하종한(현 경남도립거창대학 교수) 등이 지표조사팀으로 구성 된다.필자가 경상북도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문화재지정조사 보고서에는 칼라 사진을 사용하던 때다. 그런데 정재종택은 관리를 잘 하기 위한 마음에 후손들이 근년 니스칠을 많이 한 탓에 사진만 보면 마치 새집처럼 보였다. 건물의 내력이나 역사성은 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손색이 없을지 모르지만 칼라사진에서는 원형변경 등의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었다. 필자는 고민 끝에 흑백사진으로 다시 찍어 보고서를 제출하게 된다.문화재지정심의위원회 당일 위원장은 “왜 이 집만 흑백사진이냐?”고 질문해왔다. 필자는 “하필 그 때 준비한 칼라 필름이 다 떨어져 부득이 그러했노라”고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장(故 김영하 박사)이 크게 웃으시면서 이는 필시 조사자의 고건축에 대한 건축적 애착이 깊은듯하니 문화재로 지정하자고 위원들에게 청했다. 곡절끝에 정재종택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돼 수몰 전 수곡2리 마을 바로 뒷산 정재 류치명의 묘 바로 곁에 무난히 이건할 수 있게 되었다.이렇게 인연을 맺은 정재종택은 후일 필자의 학위논문 서론에 인용할 정도가 되었고, 당시 종부(故 이숙경 여사)가 집안내력으로 내려온 `송화주`를 담기라도 하는 날이면 필자와 포항공대 초대학장 故 김호길 박사를 함께 불러 주곤 했었다. 비가 유난히 많은 올 여름, 새삼 정재종택의 사랑마루에 앉아 송화주를 마시며 옛 수곡2리를 담고 있는 `임하호`를 내려다보고 싶어진다./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1-08-04

극락전에 감춰진 안동 봉정사 대웅전(安東 鳳停寺 大雄殿)

봉정사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두 개의 축을 지닌 건축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서측에는 극락전이, 동측에는 대웅전이 나란히 남향을 하고 있다. 흔히들 봉정사 하면 극락전을 일컬어 왔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인 극락전에 묻혀 그동안 대웅전은 세간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던 봉정사 대웅전이 1963년에 보물 제55호로 지정됐다가 2009년에는 다시 국보 제311호로 승격 지정되었으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대웅전은 1962년 해체 수리 때 기둥머리(柱頭) 아래 테두리처럼 불거져 나온 굽받침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고, 판독하기 어려운 묵서명도 발견됐는데, 여기서 선조 34년(1601)에 서까래를 다시 거는 공사를 했다는 내용이 발견되었다. 또한 1999년 완전 해체 수리 시 발견된 법당 중창기에 의하면 1435년에 중창한 기록이 있어 적어도 대웅전 건립은 그 이전인 조선 초기나 고려 말의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대웅전의 건축규모는 정면 측면 모두 3칸이고 지붕 모양은 측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합각)지붕이다. 또한 구조적으로 기둥과 지붕 사이에 지붕의 하중을 기둥에 고르게 전달해주기 위해 만든, 흡사 사람이 두 팔을 벌려 머리 위의 무거운 물체를 받쳐 든 모양으로 가공한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구조와 관계없이 설치된 고려 후기 이후의 다포식 건축양식이다.대웅전 전면 기단위에 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린 마치 일반 건축의 루(樓)마루 같은 것이 있다. 일반 주거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 사찰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대웅전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한 막돌기단을 높직이 쌓고 그 위에 난간을 돌린 마루를 깐 공간을 볼 수 있다. 다시 그 마루에서 건물 안쪽으로 들여다보면 실내 바닥은 기둥 사이에 장귀틀을 걸고 그 장귀틀에 직각 방향으로 건 동귀틀 사이에 마루널을 끼워 넣은 우물마루를 확인할 수 있다. 안쪽에 마루가 깔려 있는데 바깥쪽에 왜 마루를 또? 법당 안으로 들어가 보면 중앙 후면에 높은기둥(高柱)을 2개 세우고 그 기둥 사이에 불벽을 만들어 탱화를 걸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석가모니불상을 중심으로 그 왼편에는 문수보살, 오른편에는 보현보살을 봉안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불단 상부를 자세히 보면 우물 정자 모양의 격자형으로 만든 천장 일부를 한 단 더 높인 보개 천장을 만들어 닫집을 대신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 또한 매우 특이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웅전 내부 단청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정도면 대웅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봉정사하면 극락전 하던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앞으로는 봉정사 대웅전 건물 전면 기단위에 설치한 마루나, 내부 불단 상부의 움푹 들어간 특이한 닫집, 그리고 고색창연한 내부 단청까지 관심 있게 둘러볼 것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1-07-28

창덕궁 내 사대부집 연경당의 사랑채

창덕궁 연경당의 대문인 장락문(長門)을 지나 행랑마당으로 들어서면 두 개의 중문(中門)이 보인다. 그 중 동쪽에 위치한 솟을대문 구조의 장양문으로 들면 바로 사랑마당이 된다. 사랑마당을 향해 중문간에 연접해 있는 행랑채는 광과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양문을 지나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인 연경당이 마주 보이고 동쪽으로는 서실인 선향재(善香齋)가 서향을 하고 자리해 있다. 특이하게 사랑채가 안채와 붙어서 연속된 동(棟)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자세히 보면 사랑마당 사이에 나지막한 담장을 둠으로써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성의 공간인 안채를 구분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 사대부집 사랑채와 안채가 앞뒤로 위치한 것과는 다른 배치 방법이다. 사랑채는 좌측에서 2칸 온돌침방, 2칸 온돌 사랑방, 2칸 대청, 1칸 누마루 순으로 구성돼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채는 주인양반의 공간으로 항상 문객들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반기는 주인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손님이 되어 사랑채로 들어서 본다.사랑채 동쪽에는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중앙에 대청을 둔 선향재라 부르는 서고(書庫)가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선향재는 `좋은 향기가 서린 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좋은 향기란 책 향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사랑마당은 사랑채와 선향재로 적정한 정도로 둘러싼 위요(圍繞)감을 가진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선향재는 그 이름답게 책을 읽고 보관하는 곳이므로 건물 앞쪽에 따로 동판으로 지붕을 내어달아 햇빛을 막고 있다. 그리고 이 동판 지붕 가장자리에 정자살로 짜여진 문짝 모양의 차양을 달고 이를 조절할 수 있게 끈을 달아 놓은 것이 아주 특이하다. 천정에는 이 차양을 올리고 내릴 때 쓰는 도르래를 설치해 놓았다. 이 차양은 단순히 햇살을 막아 주는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닌 듯하다. 필자의 생각으론 오히려 이것은 하인들이 끈을 오르내리면서 선향재 안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주인을 위해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사랑채의 선향재 뒷동산에는 나지막한 단을 지어 화계(花階)를 만들고 동산 위에는 단청을 하지 않은 농수정(濃繡亭)이라는 정자를 두었는데,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네모지붕으로 지붕 꼭대기엔 아름다운 절병통이 꽂혀 있다. 정자 4면의 창은 완자(卍字)무늬의 사분합(四分閤) 들개문으로 하여 모두 들어 올릴 수 있게 하였다.사랑마당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역시 사랑채와 안채를 나눈 담인 것 같다. 이를 `내외담`이라 하는데 이 담을 볼 때 조선시대의 남녀유별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내외담에 문이 있긴 하지만 손님이나 식객이 집안에 있을 땐 이 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시 양반집의 법도였다고 하니 연경당 사랑채 마당에서 내외담을 따라 들면서 당시의 법도를 상상해 볼 수 있다./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1-06-09

성주 한개마을 북비고택(北扉古宅)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 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입향하여 560여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가 집성촌을 이룬 전통 마을이다. 2007년 12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로 지정된 이곳은 마을 뒤 영취산(331.7m)이 좌청룡 우백호로 마을을 감싸고 있고, 마을 앞에는 서남쪽으로 백천이 흐르고 있다. 옛날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마을 앞에서는 말을 타고 지나가지 못하고 반드시 내려서 말을 끌고 지나야만 했다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 영향으로 근대에 와서 이 마을 앞으로 철길을 내려하자 극구 반대해 결국 철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1980년대 초부터 전통마을 고건축 조사를 위하여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 마을에 이제는 교리댁, 북비고택, 한주종택, 월곡댁, 진사댁, 도동댁, 하회댁, 극와고택, 첨경재 등 11곳이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3㎞에 달하는 마을 토석담장길 또한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되는 등 마을 전체가 조선시대 생활상과 주거상을 엿볼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필자가 방송국 작가와 피디에게 소개한 집만 해도 한주종택의 한주정사와 교리댁, 북비고택 그리고 마을 토석담장길까지 여럿이었다. 이처럼 오랜 인연으로 TV 다큐프로 `그곳에 살고싶다` 녹화를 위해 북비고택을 찾았을 때다. 소담한 사랑채 사랑마루에 올라 주산을 바라보며 안채에서 정성껏 차려 내주신 다과상을 앞에 놓고 주인과 마주앉아 `북비고택`에 대한 내력과 건축적 특징에 대하여 다담을 나누었다.북비고택은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口`자형 반가와는 달리 남측이 개방적인 건축배치 구성을 하고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좌측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ㄱ`자형과 `一`자형으로 각각 남향을 하고 있는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l`자 형으로 아래채를 동향으로 배치해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차폐하고 있다. `口`자형 민가에서처럼 사랑채가 안채 앞을 가리지 않으면서 중문없이 내외공간을 분리해 놓았다. 이렇게 하여 사랑마당 측에서는 안채가 조금도 보이지 않도록 꾸민 것이 이채롭다. 안채에 들기 위한 중문을 설치하지 않고도 대문채에서 사랑마당 앞을 지나 안채에 들도록 하여 하였다. 자연환경에 순응해 소박하면서도 은근히 아래채로 안채와 안마당을 차폐시킨 것은 건축당시 유교사상의 숨은 배려까지 엿볼 수 있는 독특한 평면구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대문채 우측 토석담장의 행랑채로 드는 협문 상부에 `북비`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조선 영조50년(1774)에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李碩文)이 사도세자 참사 후 그를 사모하여 북향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은거한 충절이 깃든 곳으로 후일 그를 북비공(北扉公)이라고 칭했고 지금도 북비고택의 행랑채로 남아 있다./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1-05-19

영양남씨 4백년 세거지 괴시마을

상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 사랑채, 하괴시마을 안길1975년 겨울, 혼자 동해안을 따라 걸어 내려오다 해질녘에 다다른 곳이 괴시마을(濠池村, 호지마을)이었다. 넓은 평야를 안고 뒤 산세가 마을을 감싼 `入`자 형국의 30여호 남짓한 고을이었다. 당시 대학원 졸업논문자료 수집 차 민가 조사를 나선 때였다. 괴시마을은 이렇게 필자와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 마을을 힁허케 먼저 둘러보고 고택 담장 넘어 굴뚝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 중앙부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口`자형 정침과 우측에 사당이 보이는 고택 사랑방 앞에 서서 하룻밤 유하기를 청해 보았다. 잠시 뒤 사랑방 띠살문이 열리면서 문지방에 허리춤을 기댄 채 곰방대를 문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이 고개를 내밀면서 “추운데 얼른 안으로 들라”하셨다.해질녘의 바닷바람은 몹시 차가웠다. 얼른 쪽마루아래 큼지막한 디딤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사랑방에 올라 어르신께 넙죽 큰절부터 올리고 사연을 고하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사랑방 뒷문을 열고 큰소리로 외치셨다. “아가 작은 사랑에 군불 넣고 손님 상차리거레이” 하시며 하룻밤 유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밥그릇보다 훨씬 높게 퍼 담은 대두밥으로 석식을 마치니 어르신은 이런저런 이야기 보따리를 슬슬 풀어놓기 시작하셨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양남씨 시조의 도래설이었다.신라 경덕왕 14년(755) 당나라 헌종의 봉명사신(奉命使臣,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외국으로 가던 사신)으로 하남성 봉양부 여남 사람 김충(忠)이 일본에 안렴사(按廉使, 지방장관)로 갔다가 소임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신라 땅 영덕 축산항 죽도(竹島)에 표착하였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난(755~763)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였고 표착지 축산항은 바다와 경치가 좋고 인심이 유덕하여 신라 경덕왕에게 이곳에 살게 해주기를 청하여 이를 당나라 천자(天子, 헌종)에게 알리고 이곳에 사는 것을 허락받은 후, 신라 경덕왕이 사성(賜姓, 임금이 공신에게 성을 지어주는 일)하기를 남쪽에서 왔고 본고향이 여남이라 남씨(南氏)로 하였다고 한다. 아직도 어르신의 얘기가 귓가에 생생하다. 그 집이 바로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경북민속자료 제75호)`이었다.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 호수)가 있어 호지촌이라 부르다가 고려말 목은 이색선생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중국 구양박사방(歐陽博士坊)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귀국 후 괴시(槐市)라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 안을 가로지르는 토담길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口자`형 평면의 전통 가옥들이 배치되어 있어 경북 동해안에 또 하나의 가볼만한 반촌의 모습을 지닌 곳으로 생각한다./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1-05-12

또 하나의 석굴암, 보안암(普安庵)

시집간 딸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문화재 보존과 원형 복구 기술 개발을 위해 건축환경학적 측면에서 연구를 해오던 필자였다. 토함산 석굴암 석굴의 원형 복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와 가장 유사한 또 다른 석굴을 찾아 석굴의 실내 환경 측정 데이터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했었다. 우리나라의 석굴 수는 대략 180여개가 된다. 그 중 토함산 석굴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해 찾은 곳이 경남 사천시 천왕산 해발 570m 동쪽 기슭에 위치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 `다솔사 보안암석굴`이었다. 판석(板石)을 이용해서 만든 이 석굴은 보는 순간 모든 조건이 토함산 석굴 원형복구에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토함산 석굴암의 석굴은 정상 동쪽 바로 아래 경사면에 작은 평지를 조성하고 그 곳에 대좌(臺座)를 놓고 결가부좌한 본존불을 봉안한 후 그 좌우에 팔부중과 인왕상 그리고 사천왕상을 배치했다. 다시 그 위에 커다란 판석(板石)을 가구(架構)하여 전방후원(前方後圓)의 석조건축으로 본존불 상부를 궁륭형 돔(Dome)식으로 구축한 축조굴이다. 1913년부터 1915년 사이 일본인에 의해 1차 훼손된 석굴암은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끝내 원형복구에는 실패했다. 단지 석굴 내 습윤을 방지하고 이끼가 끼지 않도록 공기조화설비를 갖춘 지금의 석굴 구조로 변모시켜 놓았을 뿐이다.석굴사원이란 한 마디로 바위를 뚫어 만든 사원을 말한다. 그런데 토함산의 석굴은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암질(岩質)이 다르다. 인도나 중국은 사암(沙岩)이거나 흑대리석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뚫기가 매우 어려운 화강암이다. 결국 개착석굴(開鑿石窟)이 어려운 우리나라의 현실이 경사지를 `ㄴ`자형으로 고르고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든 다음 그 곳에 특이한 형식의 석굴을 조성한 것이다.토함산 석굴암과 유사한 석굴을 찾긴 했지만 난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암자에는 비구니 스님 두 분이 계셨는데 석굴에서는 참배 외에는 다른 어떤 행위도 일체 금한다는 것이었다. 석굴 실내 환경 자료 수집을 위해서는 온열환경 측정은 기본이고 촬영도 해야 하는데 실로 암담한 노릇이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스님께 고3 딸의 수험을 핑계로 천배를 올리겠다하고 부인이 2시간여 기도하는 동안 실내온열환경을 숨죽여가며 측정하여 데이터를 손에 넣고 부리나케 하산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찍은 사진이 모두 반씩만 현상된 게 아닌가. 황당했다. 다시 찍으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때 고3이던 딸은 그 후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고 10년 후 박사학위까지 취득했지만 토함산 석굴암 석굴 원형 복구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1-04-28

두 성씨가 동거해 온 양동마을 관가정

우리나라 전통 가옥은 아궁이에 부뚜막이 붙어있는 부엌(정지)이 안방과 함께하는 `日`자형 평면구조가 기본이다. 그런데 양동마을 관가정을 처음 찾았을 때 손씨 문중의 종가(宗家)로 알고 여느 때처럼 실측을 시작했는데 안방에 붙어 있어야 할 부엌이 없었다. 안채 좌우 어느 쪽에도 부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관가정은 주생활 전용 주거공간과는 차별화 된 용도의 건물로 밖에 볼 수 없다. 몸채 안마당인 중정(中庭)에서 우익사 전면부에 우측 외부공간으로 드나드는 통례칸이 있어서 이곳을 따라 밖으로 나와 보니 어김없이 그곳에는 종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당이 내삼문과 함께 몸채 우측 배면에 자리하고 있었다.그런데 통례칸을 지나다보니 사랑채 문간방 사이에 실내 아궁이가 있었다. 건물의 소유주는 이곳을 부엌이라고 말하지만 그곳에는 부뚜막도 없었고 더더욱 조선시대 반가(班家)의 사랑채에 정지 기능을 갖춘 부엌은 부설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곳은 소유주의 설명과는 달리 문간방에 단순히 난방을 하기위한 아궁이로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그래서 양동마을의 관가정은 사랑채 누마루 위에 걸린 편액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이 말해주듯 이 건물은 살림집 기능으로서 보다는 넓은 안강 들녘에서 농사일 하는 것을 누마루나 사랑방에 앉아 여유롭게 관리하고 또한 종갓집의 일상사인 사당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고려해서 초창 때부터 주생활 위주 보다는 문중의 대소사에 필요한 공간 확충과 효율적인 들판의 농사 관리 기능을 갖춘 용도로 건축된 듯하다.요즘 중요민속자료 제189호이던 양동마을이 2010년 7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찾고 있다. 양동마을은 지금부터 553년 전인 1458년 청송에 살던 당시 25세의 손소(孫昭, 1433~1484)가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된다. 손소의 장남이 처가의 대를 잇게 되자 차남이 상속자가 되는데 그가 바로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이다. 한편 손소의 외동딸에게 이번(李番·여주 이씨)이 장가들어 두 아들을 두고 일찍 사망하자 아들들은 외가인 양동마을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 맏아들이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다. 이때부터 양동마을은 손소의 후예인 월성 손씨 가문과 이언적의 후예인 여강 이씨 가문이 한 마을에 동거하는 양성씨족(兩姓氏族) 마을이 된다.손중돈이 1514년에 건립한 관가정은 마을 입구 왼편에 전망이 좋은 언덕위에 있다. 관가정은 정면 5칸 측면 6칸으로 `口`자형 평면 구성을 이루고 있고 우측 뒤편에 사당이 있다. 전면 사랑채는 누마루로 꾸민 2칸 대청과 2칸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마루의 정면은 개방되어 있다. 양동마을 관가정에 가면 부엌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볼거리가 될 것 같다./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1-04-21

평지위의 고상식 주거 상주 양진당

197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된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에 위치한 `상주 양진당(尙州 養眞堂)`은 풍양 조씨 장천파 문중 소유로 2008년 7월 보물 제1568호로 승격 지정된 조선시대 중기의 건물이다. 1808년 중수 당시 남긴 중수기에 의하면 양진당은 서애 유성룡의 제자이며 퇴계학파의 맥을 이어받은 검간(黔澗) 조정(趙靖, 1666~1636)이 1626년 처가인 안동군 임하면 천천동에 있던 건물을 해체해 배편으로 낙동강 건너 현 위치에 이건한 것이라고 한다. 1981년 해체당시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서 인조 4년(1626)에 착공하여 3년 후인 1628년에 완공했고, 1794년 쇠락한 집을 다시 고치기 위해 14년 간 준비한 후 순조 7년(1807)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실측조사 당시만 하더라도 상주 양진당은 거의 허물어지기 직전의 폐가였었다. 그 당시는 건물의 정침(正寢)만 남아 있었고 상주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의 양통집(겹집) 평면구성이었다. 특히, 정침 툇마루 상부는 겹처마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꾸민 수법이나 서까래 끝을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附椽)과 같은 모양을 취하게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치목(治木) 수법이다.양진당의 평면구성은 정면 9칸, 측면 7칸 규모의 `口`자형 평면을 한 고상식(高床式) 구조인데 정침 퇴칸 전면에 세운 6개의 높은 기둥을 보면 상하층 하나의 기둥을 세운 통재를 사용하였는데 특이하게도 하나의 기둥에 마루 하부는 방형(4각형)으로 치목하고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었다. 게다가 고상식 건물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주생활 공간의 바닥을 지면에서 2m정도 높게 해 난방을 위한 구들을 설치한 것은 조선시대 주거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귀중한 사례다.최근 양진당의 대문채를 복원하여 지금은 건물 평면이 `口`자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문화재 지정 당시는 대문채가 없는 `ㄷ`자 형의 집이었다. 실측조사당시 없었던 전면의 대문채는 1966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2004년 12월 발굴조사를 통해 다시 복원한 것이다. 또한 정침 좌우 전면에 연접해 설치한 익사는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좌측 익사 2층은 안방에서 연결하여 고방으로 꾸며놓았고, 우측 익사도 끝부분 두 칸을 고방으로 꾸몄다. 고방의 규모가 다른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 당시 가문의 위세를 느끼게 한다.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고상형(高床形) 주거에 저상형(低床形) 구들이 절충된 점이 특이하고, 평지에 지은 주거건축이면서도 고상구조로 꾸민 것은 건물이 위치한 곳이 하천에 가까워 만일의 경우 침수에 대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풍양 조씨 장천파 문중에서 매년 여름 문중의 청소년들을 이곳에 모아 문중 교육을 하는 것 또한 이채로웠다./영남이공대 교수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2011-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