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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10) 다시, 이스탄불 - 돌마바흐체 궁전과 그랜드 바자르

■ 돌마바흐체 궁전탁심 광장 근처 낡은 호텔에 짐을 맡긴 난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향했다. `돌마바흐체(Dolmabahce Sarayi)` 궁전에 도착해 표를 끊고 들어가려는데 패키지로 온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앞에 서 있다. 8일 패키지로 터키 이스탄불, 그리스 아테네 즉 핵심적인 곳을 본단다. 여대생 세 명도 내 뒤에 서 있다. 그들은 배낭여행 중이란다. 40일 일정 여행인데 생각보다 지출이 크다고 걱정을 한다. 이미 이집트를 여행했단다. 이집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집트에선 입장료를 빼고 모든 값을 반으로 깎아야 해요. 기념품을 반값에 샀는데 다른 데서 더 싸게 파는 거 있죠. 속았다는 생각에 얼마나 화가 나던지.”묻지도 않았는데 덧붙인다.“책에 소개한 도미토리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곳은 망해서 없다는 거예요. 찾아가보니 엄연히 있는데 말이죠. … 택시는 타기 전에 꼭 흥정하고 타세요. 참 이집트 입장료가 비싼 편이에요.”시각은 10시40분이다. 표 끊는 곳에선 세람르크만 입장하는 티켓, 하렘만 입장할 수 있는 티켓. 그리고 세람르크와 하렘 두곳을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권한다. 하지만 입장은 현지 해설가의 안내에 따르기 때문에 단체로 입장해야 한다. 기다리는 동안 안내문을 읽는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티켓을 끊어야 한다. 그것 역시 플래시를 터뜨려서는 안 된다.돌마바흐체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의 궁전을 모델로 지었다. 31대째의 술탄 압둘 마지드 1세의 명에 따라 1843년 착공해 1859년 완공했다. 이 궁전은 토프카프 궁전이 협소하기 때문에 지은 궁전이다. 토프카프 궁전보다 후일 지었기 때문에 더 우아하고 아름답다. 세람르크(Selamik)는 남성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놓인 가구 하나, 벽면에 걸린 그림 한 점, 그 모든 것들이 최상이다. 들어가면서 술탄만 다닐 수 있는 입구 문짝 위 멋진 문양을 본다. 문양이 금으로 입혀 있다. 오스만 제국 시절 각국에서 보내온 전시품을 보노라면 그 정교함과 예술성에 놀라게 된다.`계단의 방`으로 오르는 손잡이 받침대는 베네치아 산 크리스털이다. 곳곳 넓은 홀에는 멋진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초를 꽂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샹들리에 중 단연 인기를 끄는 것은 `황제의 방`에 있는 것이다. 황제의 방에 걸린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보낸 것으로 그 무게만 4.5t이다. 36m 높이의 천정 돔에서 카펫 가까이 즉 바닥에서 2m 정도 내려진 샹들리에를 보면 그만 입이 벌어진다. 촛대가 770개란다.돔에 그려진 그림 또 환상적이다. 돔을 올려보면 마치 구름 위에 내가 있는 착각에 젖게 된다. 이곳에서 술탄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통로를 이동하다 보면 동서남북을 가늠하기 어렵다. 어느 쪽이 동쪽이더라. 하여튼 만나게 되는 카펫, 의자, 장식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서재, 침실, 수세식 화장실 등을 둘러보고 12시쯤 밖으로 나갔다. 문 밖으로 나서자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름다운 물결이 출렁인다. 이만큼 돌마바흐체 궁전은 아름답게 꾸며졌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하렘돌마바흐체 궁전의 하렘은 12시 15분에 입장 가능하다고 쓰여 있다. 패키지 여행자들은 이곳을 찾지 않은 것 같았다. 15분이 돼 입구로 갔다. 어디서들 왔는지 꽤 많은 인원이 줄을 선다.하렘은 왕실의 가정이다. 오스만 시대 후기 6명의 술탄이 이 곳을 이용했다. 공화제가 된 후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도 이 곳을 관저로 사용했다. 그는 1938년 11월 10일 집무 중 이곳에서 사망했다.그가 사용하던 침실은 터키 국기로 덮여 있다. 또 한 가지 그가 사망한 시각이 오전 9시5분임을 상징하듯 그의 집무실과 침실에 있는 시계는 오늘도 오전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응접실에 놓인 벽난로, 의자, 테이블 등 모든 집기가 고급스러웠다. 이곳 역시 목욕탕과 화장실을 구경하게 했다. 세람르크와 구조는 비슷했다. 하렘을 구경하고 나오니 오후 1시 20분이다.■ 토프카프 성채와 지하궁전트램을 타고 토프카프 성채를 구경한 후 지하궁전으로 가기로 했다. 트램엔 제법 많은 사람들이 탔다. 토프카프 역에 도착해 성채 옆을 걸었다. 꽤 길었다. 성채는 낡고 그 안쪽으로 빈민가 같은 허름한 집들도 보였다. 오래되었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골목에 들어설 때는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후미진 곳은 역시 빈민촌이다. 삶의 가난은 어디든 비슷하다. 그곳에서 다시 빠져나와 트램을 타고 지하궁전으로 갔다.지하 궁전의 크기는 세로 140m, 가로 70m, 높이 8m 정도다. 지하 궁전은 치산치수(治山治水)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게 하는 곳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부터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 532년에 만들어진 저수조로 발렌스 수도교에서 물을 끌어와 이곳에 저장했다.표를 끊고 들어가면 우선 천정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기둥을 보게 된다.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기둥의 수는 세로 28줄, 가로 12줄로 총 336개였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90개가 파손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통행할 수 있는 통로를 따라 걷다보면 묘한 기분을 갖게 된다. 좌우로 도열한 기둥이 불쑥 손을 내밀 것 같은 느낌이다. 끄트머리 기둥 아래에서 뱀의 머리를 하고 눈을 부릅뜬 `메두사의 얼굴` 2개를 만나게 된다.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다. 많은 관광객이 메두사의 얼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데, 사진을 찍을 때마다 천정에서 메두사의 침방울 같은 물방울이 뚝! 떨어져 관광객의 이마를 적신다.■ 그랜드 바자르지하 궁전을 나온 난 그랜드 바자르로 향했다.바자르는 이슬람권에서 시장 즉 마켓 또는 재래시장을 의미한다. 그랜드 바자르나, 이집트 바자르를 간다고 해도 특별히 살 것은 없었다. 그저 관광객으로서 그냥 둘러보는 것이다.그야말로 `윈도우 쇼핑`이다. 둘러보다 인연에 닿아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살 수도 있다. 우선 입구에서 좌측 서점 골목으로 들어갔다. 누구보다 책 욕심이 많은 내 자신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외국에 갔다 올 적마다 읽지도 못하는 그 나라 책을 몇 권 기념으로 사온 나였다. 지금은 책꽂이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책을 말이다. 터키를 제목으로 단 책을 넘겨본다. 두껍고 값도 비싸다. 서점가 옆 옷과 가방, 신발 등 일상 용품을 파는 골목은 얼마나 붐비는지 소매치기 걱정을 해야 할 정도다.물건을 파는 많은 상인의 손에 찻잔이 들려있다. 차를 배달하는 사람도 보인다. 그들의 일상에 차는 그야말로 다반사다. 그런 풍경을 보며 미로처럼 뚫린 안쪽으로 들어갔다. 카펫 가게, 골동품 센터. 도자기 상점, 없는 게 없다.“사장님!”“안녕하세요.”“싸요.”“감사합니다.”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나를 보고 우리말로 사람을 끌어당기려 한다. 숄(shawl. 스카프, 머풀러, 목도리)을 파는 가게가 눈에 띈다. 관심을 갖고 쳐다보자 득달같이 점원이 쫓아온다.그랜드 바자르는 터키어로 `카파르 차르스`라고 하는데 지붕이 있는 시장이란 뜻을 갖고 있다. 5천여 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으며, 시장의 출발은 15세기 중반 마호메트 2세에 의해 건설된 이치 베데스텐, 산달 베데스테니라는 2개의 시장이다. 실크로드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이 곳 이치 베데스텐은 금, 은, 보석을 취급하였고, 산달 베데스테니는 주로 비단, 견 등의 옷감 종류를 취급하였다고 한다.지금은 중동의 어느 시장보다 큰 시장으로 알려졌으며 이스탄불을 찾는 관광객은 으레 한번 발을 들여놓는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지금도 가장 큰 길이라 할 수 있는 `쿠윰줄라르`거리 양옆은 금은보석 가계가 금목걸이를 연결하듯 통로 양 옆에 이어져 있다.그랜드 바자르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내려가면 `이집트 바자르`에 닿게 된다. 이곳 역시 여행자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여러 가지 매력이 있다.무엇보다 `이집트`란 이국적 명칭이 시장의 느낌을 새롭게 한다. 옛날 이집트에서 보내온 공물을 이곳에서 취급한데서 이 시장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식료품과 일상용품을 취급하는 시장이란 뜻으로 `스파이스 바자르(향신료 가게)`란 명칭도 갖고 있다. 이 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다양한 열매와 그것을 갈아놓은 향신료에 반하게 된다.우리나라 한약국 악재상자에 넣어놓은 한약재료 같은 열매, 나무, 그것을 갈아놓은 가루들이 색색깔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햄, 치즈를 비롯하여 생선류까지 팔고 있는데 그 종류 또한 몇 십 가지는 된다. 대부분 물건을 무게 단위로 판다.이집트 바자르를 구경한 난 근처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지난 기록을 훑어본다. 고된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들이 흥겹게 한다. 아름다움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것을 여행지에서 깨닫는다.그러면서 난 다음 여행지를 떠올린다.

2012-03-30

(9) 셀주크 성요한 성당과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시린제 마을

택시로 성모 마리아 집에서 성요한 성당까지 15분 걸렸다. 택시 기사는 셀주크 성요한 성당 정문에 나를 내려준다. 관광지 치곤 꽤나 조용하다. 사람이 없다. 대리석으로 쌓은 아치형 정문으로 들어가자 표를 끊으란다. 성 요한 성당 역시 폐허의 빈 건물이다. 받침돌과 돌기둥만 널려 있다. 규모가 대단하다. 성 요한은 우리가 알고 있듯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이다. 44년 유대인 왕 헤로데 아그리파의 박해를 피해 그는 에페소로 왔다. 에페소는 요한 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한 지역이다.그는 에페소에 머물며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보살피기도 했다.건물은 십자 형태지만 동서로 길게 지어졌다. 본관에는 6개의 돔이 천정을 받치고, 그 주변 부속 건물은 본관보다 낮게 지어졌다. 사제가 예배를 집행했을 제대 쪽에서 일반 신도들이 앉았을 공간을 바라본다. 스스로 움직일 줄 모르는 벽돌 기둥이 겨울 낮은 하늘을 받치고 있다. 신자 자리 뒤편 서쪽으로 에게해의 끝자락이 펄럭인다. 요한 세자는 파트모스(터키) 섬에서 전교를 하다가 다시 에페소로 돌아와 95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요한의 전교에 큰 의미를 부여한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이곳에 그의 교회를 짓게 했다. 때는 6세기. 가로, 세로의 길이가 110m, 140m다. 제대 밑에 요한 세자를 모셨다는 글씨를 새긴 주춧돌(후세 사람이 새겼음)이 있다.곳곳에 초기 교회의 건물 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흔적이 있다. 물로 세례를 주었다는 세례실, 그리고 고백소, 보물창고, 제의실…. 사라진 교회의 원형을 축소해 모델로 복원해 놓은 유리 상자를 보면 이 교회가 얼마나 멋지고, 우람했는가를 느끼게 한다. 둥근 돔이 본 건물에 6개, 부속 건물에 4개나 있다. 복원된 이 교회를 상상해보곤 다음에 왔을 때 그런 모습으로 복원돼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상상을 해본다.북쪽으로 성채 하나가 둥글게 있다. 셀주크 성채다. 지진으로 벽에 금이 가, 위험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성 요한 성당을 나온 나는 성 요한 성당 서남쪽에 있는 이슬람 사원 `이사베이 자미(ISABEY CAMII)`를 구경했다. 특별한 느낌이 없는 이사베이 사원을 나와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걸으며 `하암` 건물도 보았다. 둥근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은 이 건물은 1364년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고대 로마 시대 전형적인 목욕탕이다.아르테미스 신전 역시 폐허의 땅이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바닥에 깔린 돌덩이와 쓰러지지 않은 대리석 기둥 하나. 아르테미스 신전은 BC 8세기경에 세워졌는데, 장대하고 화려하여 고대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였다고 했다.처음에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의 협조로 건조되었는데, BC 356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탄생일 헤로스트라토스의 방화로 소실된 후 재건하였지만 지금 역시 폐허로 남아 있다. `…아르테미스라는 이름도 그리스계(系)가 아니고 옛 선주민족(先住民族)의 신의 이름이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원래는 대지, 특히 야수들이 사는 들판을 주관하는 모신(母神)으로서 동식물의 다산(多産)과 번성(繁盛)을 주관하는 것으로 믿어, 출산과 어린이의 발육을 수호하는 신이 되기도 하였다. 소(小)아시아의 에페소스에서 신앙되던 아르테미스의 상(像)은 가슴에 무수한 유방을 갖고 있었으며, 고장에 따라 특징 있는 숭배를 받았는데, 옛날에는 인신공희(人身供犧)를 하는 고장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로마 신화에서는 디아나와 동일시되었다.`내가 신화의 주인공 아르테미스를 사전에서 특별히 인용하는 이유는 셀주크 고고학 박물관에서 아르테미스 상을 다른 전시물보다 관심있게 보았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 신전과 셀주크 고고학 박물관은 걸어서 10여 분 거리다.에페소 고고학 박물관은 에페소와 그 근처에서 발견된 유물유적 2만5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1천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처음 들어간 입구 방에 2세기 작품의 마루쿠스 아우렐우스 상이 눈에 띄고 `소크라테스의 방`이 보인다. 에페소와 소크라테스? 이곳에 소크라테스의 방이란 이름이 붙이게 된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프레스코가 있었기 때문이란다.1세기께 조각된 `쉬고 있는 병사`는 그 솜씨로 놀라웠지만 붉은색 받침 위에 놓여 강열한 인상을 주었다. 관심을 끈 것은 이미 앞에서 인용했던 `아르테미스` 상이었다. 기원전 1세기의 것은 머리 위 장식이 더 달렸다. 다른 것은 2세기의 것. 머리에서 다리 부분까지 다양한 상징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풍요와 다산, 순결 등 온갖 것을 아르테미스는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을 조각상에 새겨 넣은 것이다.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것을 아르테미스 상은 보여준다.에페소 `하드리아누스 신전` 문에 붙어 있는 부조가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부조물 위에는 원래 모습의 사진도 걸려 있어 이해에 도움을 준다. 이것이 진품이고, 에페소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깨어진 것을 발굴해 그것을 원래 상태로 붙여 하나의 작품으로 전시한 것들을 보며 망가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원형을 잘 보관하는 민족이 문화민족일 것이다. 종교적 믿음의 차이로 파생되는 우상 파괴 역시 문화재를 없애는 안타까운 현상이다. 지금도 지구상 많은 나라에서 우상 숭배라며 우수한 문화재를 파괴하고 있다. 또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문화재는 조각나 훼손되고, 원형을 되살릴 수 없게 한다. 또 하나는 무지에서 비롯한 파괴다. 인류 문화자산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먹고 살 수 있는 기본적 욕구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먹고 살만할 때 사람들은 문화에 눈을 더 크게 뜨기 때문이다.40여 분간 박물관에 머물렀다. 밖에 나왔을 땐 오후 3시를 넘기고 있었다. 노군이 `시린제(SIRINCE)` 마을에 가보잖다. 관광안내 책자에 소개된 곳으로 포도주를 많이 생산하고 있는 터키 내 그리스 풍의 마을이다. 자동차가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 시린제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50분.시린제 마을은 산중턱 넓은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마을 자체가 아담하고 예쁘다. 그리스풍이면 성당이 있을 법한데, 작은 주차장 부근에 있는 이슬람 사원이 먼저 눈에 띈다. 흰색으로 페인트칠한 벽과 붉은 기와지붕이 지금까지 보았던 터키 여느 도시의 마을 풍경과 사뭇 다르다. 비탈진 길옆으로 가게가 빼곡하다. 돌을 타일식으로 반질반질하게 깔아놓은 길바닥도 운치 있다. 가게에 전시한 물건들이 고풍스럽고, 색상이 곱다. 각종 악세사리, 초, 수건, 그 사이 포도주는 약방의 감초처럼 꼭 끼어 있다. 전문 와인 숍에 들어가 본다.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일반 과실주. 온갖 술이 벽면에 비스듬히 놓여 있다 젊은 주인은 시음해 보라며 예쁜 잔을 건넨다. 와인 한 모금 입에 털어 넣자 입안이 양치질한 것처럼 깔끔해진다. 난 그곳에서 저녁을 포도주 반주로 먹자고 제안했다. 제철이 아닌지 손님들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가게 난로불이 꺼져있다. 시음한 집 역시 설렁한 편이다. 시음한 집을 나와 굴뚝에서 연기 나오는 집을 찾았다. 오군이 손가락으로 공터 옆의 집을 가리킨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기가 있다. 난롯불을 지피고 있다. 우리 넷이 난롯불 곁에 앉았다. 안팎에 많은 의자가 있지만 손님은 우리뿐이다. 창 쪽 벽면으로 성모 마리아 상도 놓여있다. 벽면은 낡은 건물 깨어진 대리석을 붙여 놓은 것처럼 울퉁불퉁하다. 그 위 예쁜 접시를 장식으로 걸어놓았다. 중앙에 있는 철제 난로에선 화목이 불꽃을 피우며 활활 탄다. 이들은 터키에 살지만 얼굴 모습, 삶의 모든 방식이 그리스적이다.메뉴판을 가져왔다. 이쪽의 메뉴판이야 으레 `닭고기` `소고기` `양고기`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음식을 주문하고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와인 종류도, 값의 차이도 다양했다. 이 집은 시음할 수 있는 술이 없다. 레스토랑이기 때문이다. 레드 완인 `VIN CENZ SIRINCE` 한 병을 주문했다. 20리라. 싼 것은 6리라 하는 것도 있다. 빵과 와인이 나왔다. 주인은 와인병 코르코 마개를 조심스럽게 열어 한 잔씩 권한다. 암적색 색깔이 입맛을 돋운다.“건강하고 멋진 여행을 위하여!”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맛있었다. 혼자 뚝닥뚝닥 치킨과 비프를 그릴에 구어 내온 주방장이 훌륭해 보였다. 터키 여행은 겨울철보다 늦은 봄이 어울릴 것 같다. 한 여름은 너무 덥고, 또 겨울은 춥고-.식사를 마칠 때 와인 한 병도 다 비웠다. 주인과 작별인사를 나눈 우린 다시 시린제 와인 골목을 걷는다. 셀주크행 시린제 막버스는 10분 후 출발한다. 술을 포장하는 천이 멋지다. 종이곽이 아닌 천으로 만든 포장천 밖에는 `시린제`란 글씨가 씌어 있다. 사고 싶지만 다닐 여행지가 아직 많이 남았다.오늘 저녁 우리는 이곳에서 이스탄불로 떠나야 한다. 아름다운 마을 시린제를 뒤로 하고 떠나려니 무척 아쉽다.

2012-03-23

(8) 에페소 박물관과 성모 마리아의 집

내가 묵은 쿠산다시는 에게해를 바라보는 항구도시다. 일어나 창 밖을 보니 구름이 끼었다. 8시30분 숙소에서 나와 20km 남짓 떨어진 에페소로 향했다. 셀주크에서는 3km 정도 떨어진 곳이지만 우리는 바닷가 쿠산다시에서 묵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택시 기사가 먼거리라 택시로 가야한다고 한다. 기사의 말을 무시하고 걸어서 간다. 나처럼 걷는 서양인이 저 앞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기독교 신자라면 대부분 에페소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성경 `에페소서!` 사도 바울로가 에페소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쓴 편지글 형태의 신약성경이기 때문이다. 성경학자들은 바울로가 에페소에 2년 이상 머물렀다고 한다. 에게해를 배경삼은 대극장… 반원형 구조에 2만5천명 수용발바닥 크기로 출입 여부 판단하는 옛 사창가 안내판 `눈길``성모 마리아의 집`서 받은 은총으로 여행에너지 듬뿍 충전성경 에페소서를 떠올리며 에페소 박물관 북문으로 들어갔다. 관람은 쉽지 않을 듯 했다. 엄청난 유적을 수박겉핥기로 본다 해도 시간이 만만찮아 보였다.북문 왼쪽 극장체육관(연극연습장)을 거쳐 대극장으로 향했다. 대극장은 2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반원형 극장이다. 피론산 비탈을 이용해 기원전 3세기에 건립하였다. 지름이 154m, 높이가 38m인 반원형 구조다. 무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관중석에서 무대를 본다. 무대에 있는 성인이 작은 아이처럼 보인다. 대극장 무대는 서쪽방향이다. 무대 뒤편 아르카디안(항구) 거리가 보이고 멀리 에게해도 보인다.기원전, 에게해 바닷가는 에페소 대극장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즉 대극장 밖 항구거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건너오는 도중 지진과 카이스트로스 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와 오늘의 해안(셀주크 성 요한 교회에 해안선이 어떻게 바뀌었나 그려놓은 부조가 있음)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 건축하여 로마 시대에 확장한 이 대극장에선 아직도 종종 공연을 하고 있다.세계의 연기자, 성악가들은 이곳을 찾았을 때 자신의 끼를 펼쳐보는 꿈을 꿀 것이다. 대극장을 나온 난 항구거리를 둘러본 후 마블거리로 옮겼다. 그 때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이 제법 굵다.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 둘러쓰고 빠른 걸음으로 남문으로 향했다. 어디 빗방울 피할 만한 처마가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서 있는 돌덩이들이 비를 막아주지 않는다. 하나하나 돌들이 문화유적의 귀중한 자산이지만 떨어지는 빗물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빗방울을 맞을 뿐이다. 내가 남문에 서성일 때 빗방울이 수그러든다. 이내 빗줄기는 그쳤다. 안내소에서 지도 한 장을 구입했다. 남문쪽에서 다시 대극장으로 가며 지도를 짚어본다. 지도는 알아보기 쉽도록 번호와 그곳의 명칭을 써 놓았다.“2번은 아고라. 3번은 오데온(Odeon). 오데온은 1천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음악당으로 당시에는 지붕이 있었음. 4번은 플라타네이온(Prytaneion) 고관들의 회의와 리셉션 장소, 시의회장. 사방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에는 여신 헤스타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었다고 함. 5번 도미티안 광장, 6번 도미티안 신전, 7번 메미우스의 비(Memmius Monument). 폰토스의 난에서 에페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 그의 아들 가이우스, 손자 메미우스를 상징하는 비로 후기 헬레니즘 시기에 지은 것이란 함, 비의 내용은 할아버지 술라를 칭송하는 내용이라 함, 8번 크레테스 거리(Curetes Street), 9번 헤라클레스의 문(Heracles Gate) 크레테스 거리에 세운 헤라클레스의 조각을 새긴 문. 그 맞은 편에 니케 부조가 있는데 이것은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형에 있었다고 함. 10번 트라이누스의 샘(Trajan Fountain) 샘 중앙에 실물 크기의 황제 석상이 있었다고 함. 11번 스콜라스티카 목욕탕(Varius Bath), 12번 하드리아누수 신전(Temple of Hadiran) 2세기에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바쳐진 건물, 13번 수세식 화장실(Latrina)…. 17번 셀시우스 도서관(The Library of Celsius). 18번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Mazeus Mithridates Gate) 아고라로 이어진 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노비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가 노비에서 해방되고 그 감사의 뜻으로 세운 문, 19번 아고라(Agora). 20번 대리석 길(Marble Road)” 나름대로 꼼꼼하게 지도를 짚어보며 에페소를 관람한다. 에페소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입성으로 해방되었다. 그 모든 곳 하나하나가 역사의 한 자리에서 많은 인물들과 맥을 같이 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예를 든다면 17번 셀시우스 도서관은 시장터 옆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로마의 관리였던 디벨리우스 셀시우스(A.D 60 - 114년)가 아버지를 기념하여 건축(무덤 위)하였다. 알렉산드리아(현, 이집트), 페르가몬(현, 터키)과 함께 세계 3대 도서관으로 정면 벽에는 지혜, 운명, 학문, 미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도서관 내부에는 5만권 정도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단다. 당시 책들은 양피지와 파피루스로 책이 상하지 않게 통풍이 잘 될 수 있도록 건물을 설계하였다.헤라클레스 문과 메미우스 기념묘, 도미티아누스 신전의 중간에 니케의 여신상이 있다. 세계적인 스포츠 기업 `나이키`사가 기업 상징 마크를 만들 때 참고 했다는 니케의 여신상은 많은 관광객들의 손길에 오른쪽 가슴에 손때가 묻어 있다. 왼손은 월계관을 씌워주는 월계관이 들려 있으며,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아마도 종려 나뭇잎으로 추정한다.그곳에서 많은 어른들의 입에서 빠뜨리지 않고 이야깃거리가 되는 한 곳을 더 소개하자면 브로델(사창가) 입구 대리석에 그려진 발바닥이다. `사랑의 집`을 가리키는 안내판 역할을 하는 이 표지는 그곳에 들어가려면 그 발보다 커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미성년자란 증명을 발바닥으로 재었다는 그 이면에는 젊은이들의 성적 욕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모든 것이 그야말로 노천 박물관이다. 1천800여년 전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에페소 곳곳을 견학하고 내가 다시 남문에 닿은 시간은 낮 12시가 넘었을 때였다.남문 밖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식당 주인에게 거리를 묻자, 에페소 남문에서 성모마리아 집까지 8km란다. 십리를 30분 잡는다면 한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물론 가는 도중 구경거리가 있으면 쉬엄쉬엄 구경하면서 말이다. `성모 마리아의 집`으로 향하자 택시가 쫒아온다. 어디 가느냐는 말에 나는 그냥 `마더스 하우스 -The House of the Virgin Mary`라 했다. 그러자 꽤 멀기 때문에 걸어갈 수 없단다. 성모마리아의 집에 들렀다가 셀주크까지 가는데 35리라만 내라고 했다. 그냥 걷는다고 하자 기사는 얼마면 되겠냐고 묻는다. 20리라. 잘라 말했다. 되돌아갈듯하다 다시 나를 부른다. 오늘은 한가하니 그 돈으로 태우겠단다. 내가 택시를 타자 택시 기사는 산비탈로 차를 몰았다. 생각보다 친절한 기사였다.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만약 걸어서 갔다면 완전 등산을 하는 꼴이 될 뻔했다.감사했다. 산길 정상에 올라 반대편 산자락을 조금 내려갔을 때 자동차 통과세를 받으며 입장료도 받는다.가톨릭 신자로서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영광이고, 은총이다. 택시기사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에게 들어가 보라고 안내한다. 안으로 들어갈 때 만난 우리나라 사람들. 나 혼자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다니? 다른 관광지에서는 수도 없이 만나기에 무덤덤했는데….그들은 성지순례 왔다고 했다. 반가웠다. 인솔한 분과 인사를 나누고 사진도 한 컷 찍었다. 그들은 이미 성모 마리아의 집에서 기도도 하고 셀주크로 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입구에 한글로 된 안내문이 있다.성모 마리아 집 둘레엔 나무들이 울창했다. 왼쪽으로 들어가는 계단 옆에 성모 마리아 상이 세워져 있다. 분위기 자체가 숙연해지며, 푸른 나무를 비롯하여 그 모든 것들이 많은 은총을 베풀 것 같은 느낌을 준다.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를 낳은 어머니,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돌아가신 예수의 모습을 쓰린 가슴으로 끌어안았을 성모 마리아. 기독교 중 개신교는 성모 마리아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반면에 구교 가톨릭에 선 성모 마리아의 존재를 예수 다음 단계 정도로 놓는다. 사랑하는 아기 예수를 낳은 분이기에. 그들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도우미(?)로 여기고 그들 통해 기도한다.`성모 마리아의 집`은 크기가 작았다. 안에 들어서자 아치형 벽돌 가운데 모신 성모 마리아 상이 보인다. 앞에는 꽃이 꽂혀 있고, 촛불이 밝다. 바닥은 카펫이 깔려 있다. 유럽인 몇 명이 무릎을 꿇고 기도 중이다. 나도 조용히 앉아 주모경을 받친다. 가족의 평안과 내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여행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드린다.여행은 이런 감동에서 끊임없는 힘을 충전한다.

2012-03-16

(7) 파묵칼레(PAMUKKALE)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오후 8시 카파도키아 네이부쉐르에서 터키의 남서부에 있는 셀주크행 버스를 탔다. 짐칸에는 장거리 버스 특유의 여행객 가방과 배낭이 잔뜩 실렸다. 내 자리는 뒷자리 왼편 창가다. 버스는 9시 30분 휴게소에 잠시 멈췄다. 이후 나는 잠이 들었다. 새벽 두 시 버스는 `키르아즐리바체(KIR AZLIBAHCE)` 휴게소에 도착했다. 출발 후 6시간 후다. 몇 번 쉰 것 같은 데 잠결이라 쉬었다는 느낌이 없다. 기사가 바뀐다. 장거리를 한 사람의 기사가 운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곳 휴게소에서 다른 기사가 운전석에 앉고, 안내하는 차장도 바뀐다. 휴게실에 들러 차 한 잔 주문했다. 7시간의 한국과 시차를 따져본다. 한국은 오전 9시다. 출근을 마친 사람들이 일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다. 차는 다시 출발하고 왼편 하늘에는 별들이 선명하게 빛난다. 새벽 5시 50분, 우리의 목적지`데니즈리(DEMIZLI)`에 도착했다. 원래 셀주크 가까이 있는 쿠산다시 숙소에 짐을 보관하고 이쪽 파묵칼레로 오려했던 계획이었으나 그 방법은 시간을 많이 낭비한다 하여 데니즈리에서 내리게 되었다. 파묵칼레까지 가는 돌무쇠(소형버스)를 탔다. 6시30분 출발한 버스는 50분에 짐을 맡길 수 있는 파묵칼레 여행사에 도착했다. “잘 오셨습니다.”여행사 직원이 제법 한국말을 구사한다. 빵과 커피로 아침을 해결하고 골목을 조금 걷자 설산같은 흰 산이 눈앞을 가린다. 마을과 산과 이어진 바닥에는 물이 고였다. 바로 그 유명한 파묵칼레 온천이다. 이곳 역시 세계문화유산지역이다.`히에라폴리스`의 대극장·공동묘지숱한 지진속에서도 원형 잘 보존해구전속 성 빌립보 교회·다리도 감상우리나라 다랑이논 형태의 온천부채 모양으로 흘러내려 형성돼온천연못속 푹신함에 피로가 싹파묵칼레(PAMUKKALE)파묵은 목화, 칼레는 성을 뜻한다. 목화성. 얼마나 푹신푹신한 땅이면 목화성이라 이름을 붙였을까. 사실 파묵칼레는 부드럽고 따스하다. 겨울철임에도 찬기가 없다.논두렁 같은 곳에 건물 한 채 놓여 있다. 표를 끊고 천천히 비탈길을 오른다. 곳곳에서 하얀 김이 솟아오른다. 손으로 물을 만져본다. 따스하다.그 때 눈에 띄는 글씨`You are only allowed to walk on the cascades in this area. Please take your shoes off. 이곳에선 신을 벗고 허락된 길로만 다니세요.`안내문 중`cascades`란 단어 뜻을 상상해 본다. 사전을 찾았을 때 이 단어의 뜻이 `여러 단으로 된 작은 폭포`란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았다. 파묵칼레 온천은 작은 논만한 석회암 연못이 테라스 형태로 층층 이어져 있다. 한국의 남해 남면의 가천리, 강원도 높은 산비탈, 지리산 중턱 다랑이 논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석회암 연못에 발을 담근다. 발밑이 따스하고 푹신하다. 시원하다. 성수기가 아니라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다. 온천수 배출구에서 그 흐름을 조정하여 일정한 곳에 물이 고여 넘치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물이 없는 빈 연못이 더 많다.햇살 강하게 내려쬐는 날 눈처럼 흰 빛에 선글라스는 필수다. 하얀 석회암은 온천수에 함유된 칼슘 중탄산염 성분이 이산화탄소와 물, 산소와 결합해 응결된 현상이다. 기원전부터 이런 현상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물 바닥은 조금씩 높아지고, 흘러나온 물은 부채꼴 형태로 흘러내린다. 그 모습 자체가 흰 설산을 연상시키는 장관이다. `히에라폴리스`의 대극장·공동묘지숱한 지진속에서도 원형 잘 보존해구전속 성 빌립보 교회·다리도 감상히에라폴리스(HIERAPOLIS)파묵칼레 관광에서 놓쳐서는 안 될 곳이 온천수 위쪽의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다. 성스러운 도시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히에라폴리스는 기원전 2세기께 페르가몬 왕국의 초대 텔레포스왕의 아내 히에라를 기리기 위해 이곳을 `히에라폴리스`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하에라폴리스 박물관을 제외하곤 모든 구경거리들은 노천에 널려 있다.박물관은 이곳에서 출토된 조각상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을 나왔을 때 공간이 넓어 어디로 발을 옮길지 망설이게 된다. 박물관 옆길로 온천시설 `테르말`을 지나 `아폴로신전`을 거쳐 `대극장(원형극장)`으로 뚫린 길을 밟는다. 사면에 산재한 옛건물 파편이 유구한 역사의 마디마디로 넘어져 있다. 지진과 세월의 상처에 쓰러진 것들이다.대극장은 히에라폴리스 지역 중 높은 지역에 있다. 현재 무대 뒤쪽으로 입장하게끔 되어 있다. 옛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대극장은 기원전 2세기경 하드라아누스 황제에 의해 세워져 206년 베르스 황제 시대에 완성하였다. 중앙 세 번째 좌석에서 여섯 번째 좌석까지의 공간에 설치된 귀빈석이 특별나다. 원형 대리석으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선을 그어놓은 것 같다. 아래층 22단, 위층 25단으로 무대 위 배우의 음성이 잘 퍼져나갈 수 있도록 꾸며졌다. 1만5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과 같은 과학 시설 없는 상태에서 뒷자리까지 소리를 전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선 나름대로의 과학적 측량과 건축기술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래위로 통행할 수 있는 통로도 8개나 된다. 당시 발달한 토목건축 현장이다.내 자신이 청중이 되어 중간 자리에 앉았다가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뒷자리로 옮겨본다. 과거에도 오늘날 공연장과 같이 표를 예매했을 것이다. 뒤에 쳐진 돌담 울타리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한 눈에 무대가 내려다보이고, 무대 뒤편으로 저 밖 낮은 온천 지역이 보인다. 더 멀리 공간을 달리하여 이곳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 보인다. 산정의 눈이 하얗다. 여러 번의 지진에 많은 것들은 폐허가 되었는데 이곳만은 유별나게 생생하다. 원형 극장을 나선 나는 윗길로 발을 옮겼다. 그 길은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다. 헬레니즘 때의 고분, 로마시대의 석관, 무덤 등이 널려 있다.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보관 상태가 좋은 묘지란다.그 곳에서 마을로 향하지 않고 올리브 과수원이 있는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마르티리움(성 빌립보 교회)을 바라본다. 성 요한과 함께 하느님 말씀 전파에 앞장 선 성 빌립보는 우상 숭배로 뱀을 모시고 있는 이곳 이교도들의 우상인 뱀을 십자가로 죽였다. 이 행동으로 빌립보는 처형당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성 빌립보 성전을 통해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교회다. 밑으로 성 빌립보의 다리가 있다. 과거에는 물이 많이 흘렀는지 놓였던 다리는 지진 등으로 파괴되어 보이지 않는다.성벽을 따라 내려가며 보게 되는 석관들. 최대의 묘지터다. 여러 형태의 무덤이 보인다. 우리나라 봉분같은 무덤도 있다.목욕탕, 바실리카, 도미티안 문….북쪽 목욕탕과 많은 나무들이 자라는 부근 묘지까지 걸어가며 역사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과거에서 미래를 연결하는 현재가 역사의 중심축이란 생각도 해본다. 그 이유는 살아있는 내가,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과거 사람이 살았던 터에서 미래를 발견하는 힘을 얻는다는 것은 지혜다. 우린 그런 지혜를 늘 필요로 하지만 현실에 발 묶여 과거와 미래를 놓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11시40분 파묵칼레를 출발한 버스는 새벽에 내렸던 데니즈리 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 대합실 부근에서 터키식 캐밥으로 점심을 때운다. 우리가 탈 버스는 데니즈리 발 12시 35분 버스였다. 목적지는 셀주크(SELCUK). 세 시간 걸린다고 했다. 두 도시 다 터키의 서쪽 바닷가에 있다. 버스는 비옥한 땅을 밟는다. 양쪽으로 과수원이 이어진다. 올리브 과수원, 오렌지 과수원, 오렌지는 겨울철인데도 아직 푸른 이파리 사이로 노란 색을 띠고 있다. 길거리 가로수도 오렌지다. 2시20분 `아이든(AYDIN)`에 도착했다. 손님이 내리고 탄다. 차장이 노인이 들고 갈 짐을 짐칸에서 꺼내 휴게실까지 옮겨준다. 터키인의 보편적인 정서다. 터키인의 친절함은 여행하며 자주 보게 된다.버스 안은 금연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스가 쉬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담배를 피운다.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시 한 편을 메모한다. 여행 중 두 번째로 쓰는 시작(詩作)이다.괴레메 바위너의 아픔을 알고 있는 것은 우주거룩하다는 것은세월의 벽돌 위 십자가를 반듯이 세우는 일맨살 한 부분 찢어세월로 찧으며피처럼 진하게 흐르고 있는 햇살 한줌을 만난다바람 흐름에 손톱 발톱 깎듯눈비 쏟아짐에 정강이 뼈 동강난 괴레메 바위네 몸 속 눈물 마른 지 너무 오래해가 지는 늦은 오후별 찰랑이는 한 겨울 자정 12시잠시 네 곁에서 새가 된다오래 버틴다는 것은 상처를 깁는 일흐른 시간 안에 먼저 흐른 시간을 자꾸 기억하는 일2시30분 버스는 `아이든(AYDIN)`을 출발했다. 왜 난 셀주크로 향하는 버스에서 괴레메를 다시 떠올렸을까? 카파토키아 괴레메의 강렬한 인상이 아직 나의 마음 사진첩에 포개져 있기 때문일까? 달리던 버스가 멈춘 때는 3시20분. 목적지 셀주크다. 카파도키아에서 밤새 달려와 본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 역시 그 위에 아름답게 포개질 것이다.내일은 셀주크 가까이 있는 그 유명한 에페소와 그 주변을 찾을 것이다.

2012-03-09

(5) 도예공방 그리고 터키 전통춤 `세마춤`과 `벨리 댄스`

괴레메 박물관을 견학한 후 에센테페의 `부모자상` 바위를 찾았다. 이 바위는 카파도키아를 상징하는 대표적 바위다. 버섯바위 형태의 커다란 바위 두 개와 작은 바위 하나가 그림엽서 속에 자리를 튼다. 엽서 속에 쏘옥 들어가는 멋진 풍경이다. 컵 장식으로도 들어가고, T-셔츠 속에도 들어간다. 괴레메 마을을 배경으로 있는 이 바위를 사람들은 엄마 바위, 아빠 바위, 자식 바위라 일컫는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버스로 10여 분 달리자 `데브렌트`의 낙타봉이 나타난다. 응회암 바위들이 세월의 흐름에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켰다.가지각색이다. 낙타봉은 그 형태가 낙타를 닮았다.돌아다니던 개 한 마리가 멈추자 낙타봉과 입 맞추려는 모습이 된다. 사진을 찍는다. 종종 사진은 현실보다 피사체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힘을 갖고 있다. 내가 찍은 이런 사진이 후일 내 과거를 보다 아름답게 추억하는 힘이 될 것이다. 카파도키아의 지형을 보노라면 깨닫게 된다. 오랜 세월의 풍상은 자연의 손길이면서 또한 그 자체가 신의 손길임을. 참으로 기묘한 기암괴석 모습 하나 하나가 그야말로 감탄사를 터뜨리고,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하고, 다시 오도록 마음 먹게 한다. 보이는 모든 것들은 비와 바람과 햇살로 뭉쳐놓은 시간일 것이다.멋진 풍경의 잔상을 머릿속에 끌면서 이동한다. 터키에서 가장 긴 강이라 일컫는 크즐마크 강을 내려다본다.▲ 밸리 댄스를 추는 댄서크즐마크 강은 카파도키아의 아바노스란 마을을 관통한다. 황톳빛 강물이 주는 천혜의 혜택으로 이곳 사람들은 바닥 흙을 가지고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것도 기원전부터…. 그렇기에 아바노스는 터키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가장 유명한 곳 중의 하나다. 기원전부터 빚어온 아바노스 도자기수백서 수천만원짜리 작품도 수두룩`스머프 마을` 파사바의 전경 정겨워아바노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넌다. 다리 건너 마을에 있는 도예 공방을 견학하기로 했다. 공방은 토굴이다.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자 미로처럼 생긴 터널이 연결된다. 도공들의 작업 현장이 펼쳐진다. 흙을 치대는 곳, 물레로 도자기를 빚는 곳, 도자기에 무늬와 그림을 넣고 새기는 곳, 굽는 곳, 완성된 도자기를 전시 판매하는 곳.안내하는 직원이 우리를 보고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코리아라 하자“대한민국 짝짝짝!”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의 위력이 이곳에서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우리를 맞는 그는 기본적인 한국어를 사용하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들르기 때문일 것이다. 관광객을 맞은 도공이 물레를 돌리며 시범을 보인다. 컵을 만드는데 한 번의 손길로 뚜껑까지 빚는다. 신기하다. 능숙한 기술이다. 관광객이 실습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친절하게 설명도 곁들인다. 실습을 끝낸 우리 일행들은 그림 넣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도예가가 도자기에 물감 넣은 장면을 유심히 본다. 보통 정성이 아니다. 붓으로 세밀화를 그리는 화공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손놀림이 차분하고 정교하다. 작품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장면을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담는다.작품 전시실에서는 도자기를 판매한다. 전문 도공의 작품 값이 만만치 않다. 눈에 차는 작품 값을 물으면 백만원 이상이다. 천만원 이상하는 것도 수두룩하다.갖고 싶지만 얇은 주머니를 의식한다.도예가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기 위해 밤을 낮처럼 투명한 의식으로 보낸 때도 있을 것이다. 오랜 역사의 흔적이 닥지닥지 묻은 도자기 공장을 나온 우린 만화영화 `스머프 마을`의 배경으로 등장했다는 `파사바`로 갔다. 이곳 역시 요정 같은 버섯바위가 널려 있는 곳이다. 고대의 수도사 성 시메온이 머문 바위가 있어 `수도사의 골짜기`라고도 한다.수도승의 명상 춤 `세마춤`에 숙연한국서도 선풍적 인기 끈 밸리댄스열정적인 춤 동작은 `황홀경` 선사▲ `파사바`의 요정 같은 버섯바위.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카파도키아 고원 햇살이 땅 끝으로 기울 때였다. 긴 해 그림자를 요정같은 바위는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고원의 겨울 해가 진다. 짧은 햇살이 여행객의 발길을 재촉한다.파사바를 거쳐 로즈 밸리 마을을 지나자 해는 노을만 남기고 있다. 지나는 마을 이름이 `선셋`이다. 어딘지 모르게 노을에 걸맞은 이름이다. 숙소로 되들어가면서 나는 운전석 옆에 놓인 책자를 뒤적거렸다.낯선 의상으로 춤추는 사진이 나의 눈을 확 끌어당긴다. 달콤한 유혹이다.홍보용 책자에 실린 곳에서 공연하는 시간을 물으니 저녁 8시에 공연한단다. 공연 장소는 우리 숙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고 했다.원하면 기사분이 안내하겠다고 덧붙인다.터키의 댄스 중 밸리 댄스는 꼭 보고 싶었던 춤이다. 이틀 전 이스탄불 갈라타 타워 레스토랑에 들렀지만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우리를 안내한 기사는 밸리 댄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터키의 전통 춤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약했다. 이스탄불에 비해 입장료는 훨씬 쌌다. 더욱이 입장료에 음료는 말할 것도 없고 주류까지 포함된다고 했다.1시간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다.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하루의 많은 일정이 피곤하게 했다. 여행 일정에 피곤을 끌고 다니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던 나였다.다른 사람 몇과 7시 30분 호텔 앞에서 차를 기다렸다. 차를 타고 간 곳은 숙소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아사르 바바(YASAR BABA)`란 곳이다. 지하였다. 들어가는 입구가 제법 넓고 깨끗했다. 지하지만 홀은 넓었다. 이곳 마을은 많은 것들이 지하로 만들어진 기분이다.홀을 중심으로 테이블이 문어 다리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다. 홀 자체가 공연장이고 주변 테이블이 관람석이다. 홀 천장에는 만국기가 달려 있다. 태극기를 찾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찾아보았다. 풍선 뒤에 태극기 하나가 보인다. 풍선에 가려 있었던 것이다.내가 들어갔을 땐 사람 서너 명밖에 없었다. 일본 사람들이 단체로 들어왔다. 일본 사람들은 한 줄로 질서를 지키며 자리에 앉는다. 이어서 유럽인 몇 명도 관람객으로 들어온다. 중국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한국 사람도 들어온다. 홀 주변 테이블은 다국적 관광객이 꽉 찼다.공연은 정확히 8시부터 시작했다.첫 공연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첫 번째 공연은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고 사회자가 말한다.세마젠의 세마(Sema)춤이다.▲ 데브렌트`의 낙타봉을 배경삼아 돌아다니던 개 한 마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세마춤은 터키의 중남부 콘야 지역에서 발생한 이슬람교 한 종파인 메블라나에서 데비쉬라고 불리는 수도승들의 명상 춤이다. 이 세마춤은 춤이 아니라 기도다. 수백 번 때론 수천 번 회전하면서 무아지경의 상태로 신과 가까이 하고자 하는 수행법이다. 단순해 보이는 복장이다. 하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원통형의 높은 모자는 묘비를 의미하고, 넓은 치마는 수의를 뜻한다. 흰색저고리 위에 무덤을 상징하는 검은 망토를 입는다.침묵 속에 무희들은 팽이 돌리듯 자신의 몸을 돌리고 돌린다.숙연해진다. 종교의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은 춤을 추지 않고. 춤추는 세 명의 무희들 사이를 걸어다녔다. 무희들은 홀을 가득 채우며 빙빙 돌았다. 흰 바지 위에 입은 치마로 하얀 꽃을 활짝 피우듯 넓게 펼쳤다. 원심력과 구심력을 이용한 춤이다. 우아하다. 은은한 불빛 밑 분위기가 차분해진다.흰치마에서 반사하는 색깔과 사진촬영 불가라는 `엄명`이 세마춤에 대한 인식을 기묘하게 한다.터키 전통무용이 시작되었다. 사내들이 처녀에게 구애하는 풍경을 춤으로 꾸민 내용이다. 갖은 선물을 처녀에게 전하지만 처녀는 마음에 차지 않는다. 스토리가 있는 춤이다. 선물보다 멋진 남자를 찾는 여자의 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끝나자 사내 네 명이 나와 신명나게 발을 움직인다. 그 발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보는 사람의 숨을 가쁘게 한다. 무용이 끝나자 관중석에 있는 손님들을 무대로 불러들인다.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시간이다.우리나라 강강술래 비슷한 모습으로 모두가 즐겁다. 한바탕 터키풍의 춤사위가 끝나고 무대는 새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테이블에는 터키 전통술이라며 와인이 제공된다. 독주도 제공하는데 독하다. 맥주를 주문하니 맥주도 갖다준다. 두 시간 정도 흘렀을 때였다. 내가 보고 싶던 밸리 댄스 공연이다.천장에서 무희 한 명이 무대로 내려오는데 의상이 섹시하다. 잠자리 날개 같은 무용복에는 금빛, 은빛 장식을 달았다. 사이키 불빛에 그 장식이 종소리 들리듯 반짝반짝인다. 모든 이의 시선을 한곳으로 모은다. 딴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전통음악에 맞춰 손끝을 비튼다. 엉덩이, 가슴 놀림이 야하다. 그 율동이 끈적끈적하다.밸리 댄스는 다산을 비는 터기의 전통춤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춤이 끝나자 각 테이블에 있는 남자 한 명씩 불러 밸리 댄스의 기본 동작을 가르친다. 따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언어가 필요 없다. 몸동작이면 된다. 손끝과 발끝의 움직임, 엉덩이의 흔듬. 멋지다. 흥겹다. 관중석에서 폭소가 터진다. 불려나온 사내들의 엉덩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그 모습이 웃음거리다. 무대에 초대한 손님을 테이불로 보낸 무희는 다시 춤을 선사한다. 공연은 댄서의 열정적인 몸놀림으로 매듭지으며 다시 천정에서 내려온 투명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사라진다. 밸리 댄스의 춤동작이 잔상으로 술잔에 어린다. 이국의 밤이 깊어진다.10시30분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까지 가는 밤하늘에 마차부자리의 카펠라가 반짝인다. 한국에서도 쉽게 찾던 밝은 별이다.

2012-02-24

(3) 토프카프 궁전과 고고학 박물관

두개의 성탑 사이에 우뚝선 `제국의 문` 1천200여명 조리사가 요리 하던 주방오스만 제국의 위용 다시 한번 느껴성 소피아 성당에서 나오니 오후 1시가 지났다. 으레 12시에서 오후 1시에 끼니를 해결했는데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난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 주변에서 식당을 찾아보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세계 3대 미식국 중 한 나라라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점심을 굶는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찾아보지만 식당은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문화유적이다. 영국의 문명학자 토인비의 말마따나 그야말로 노천박물관이다.“다음 코스는 어디로 갈까?”손 군과 오 군에게 물었다.“토프카프 궁전에 가요”▲토프카프 궁전에서 바라본 보스포루스 해협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나온 우린 토프카프 궁전으로 향했다. 토프카프 궁전은 아야 소피아에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배에서는 꼬르록 소리가 났다. 그곳 주변 역시 식당은 보이지 않는다.토프카프 매표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매표소와 좀 떨어진 매점(Disom)에서 과자와 음료로 점심을 때우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에는 토스트를 팔았다. 치즈 토스트를 시켰다. 치즈 토스트는 빵 가운데 치즈를 넣고 구운 빵으로 생각보다 고소하고 맛있다. 느긋하게 토스트를 먹은 후 콜라도 한 캔 시켰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본 느낌이다. 잠시 눈을 감고 내가 본 것을 되새긴다.그때서야 머릿속에서 정리가 된다. 요기를 면한 후 표를 끊으려 할 때 문제가 생겼다.입장 티켓 한 장으로 모든 것을 구경할 수 없다. 그러니까 궁전 안의 하렘(Haram)과 보석관(Treasury room)은 표를 특별하게 새로 끊어야 했는데 벌써 매진된 상태다. 하루에 일정한 수의 사람만 수용하다보니 오후 2시도 안 되어 표가 떨어진 상황이다. 그렇다고 내일 다시 오자니 그것도 문제다. 이스탄불에는 이곳 말고도 보아야 할 곳이 많다.고고학 박물관, 지하궁전 뿐만 아니라 신시가지 쪽의 돌마흐바체 궁전, 보스포루스 크르즈 투어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 코스다. 하렘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마음을 어둡게 찍어 누른다. 소를 잡았는데 우황이 없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기분이다. 매표소 벽에 하렘은 10시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관람 가능하고 30여 분 소요된다고 쓰여 있다. 어느 곳을 가든 여행 중에는 포기할 것이 있다.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일 수 없다. 생각을 기분 좋은 쪽으로 끌고 간다. 그래, 후일 이곳을 찾게 되면 그 때 보자.후일 다시 이곳을 방문할 수 있을까? 세계 곳곳 가보고 싶은 데는 많은데 여행했던 곳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다시 찾고 싶은 도시. 그런 도시를 꽂는다면 이스탄불이 해당되지 않을까?▲ 토프카프 궁전에 전시된 보물함.같은 곳을 여러 번 찾았던 중국의 상해와 연변이 떠올렸다. 해외여행의 출발은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다 보니 친목 모임에서 결국 갔던 곳을 여러 번 가게 된 것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방문했던 상해와 연변, 처음 찾았을 때와 너무 변화된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탄불 역시 그럴 것이다.5년 후 아니면 10년 후 이 도시를 다시 찾는다면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유적은 백 년 전이나, 오백 년 전이나 30년 후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시가지 언덕 위의 토프카프 궁전은 터키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오스만 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면적만 해도 70평방미터나 된다.투르크어(語)로 토프는 `대포` 카프는 `문`을 뜻한다. 직사각형 형태의 토프카프 궁전 조감도를 보면 한 나라를 운영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다 있다. 술탄(왕)의 거주는 모든 행정력이 집중되는 곳이고,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각종 시설을 유치했을 것이다.궁전 내부에는 대형 식당, 하렘, 도서관, 병원, 모스크 등 온갖 시설이 있다.`제국의 문`은 일명 `예의의 문`이라고도 하는데 과거 말을 타고 이 궁궐에 들어가려던 사람들은 이 문 밖에서 내려서 걸어야 했다. 좌우 첨탑은 서양의 성채를 연상시킨다. 매표 후 들어가는 문이 `제국의 문`이다. 두개의 성탑 사이 뚫린 이 `제국의 문`을 지나면 제 2정원이 나타난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알렉산더 대왕` 조각상제국의 문 지나 정원 오른쪽으로 중국 ·일본 도자기 전시실이 있다. 동양의 도자기라 그런지 눈에 익다. 중국의 도자기는 청색이 선연하다. 일본의 도자기는 오늘날 일식집에 흔히 만나는 그릇처럼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이어 유럽 도자기와 은수공예품 전시실이다. 세공한 무늬가 가히 왕실의 제품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방기구 전시실은 과거에 주방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종탑처럼 천장을 높게 만들어 요리할 때 풍기는 연기와 냄새를 내보낼(환풍) 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다. 1천200여 명의 조리사가 매일 2만여명의 식사를 준비했다는 이 주방은 대형 조리 기구를 비롯해 당시 사용했던 각종 식기류를 전시하고 있다.`행복의 문`을 지나 제3정원에 들어서기 전 알현의 방에 들어섰다. 바로 토프카프가 과거 행정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이다. 술탄이 대신들과 국정을 논하던 방이다.제3정원 오른쪽으로 보석관이 있다. 그 보석관에는 86캐럿의 큰 다이아와 그 주면에 49개의 물방울 다이아를 박은 명품 보석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구경하는 것은 후일로 미룰 수밖에 없음을 이미 표를 끊으며 설명한 바 있다.보석관 옆은 도서관이다.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제3정원에서 제4정원으로 넘어가면 정자 아프타리예와 1638년 바그다드를 정복한 기념으로 세운 `바그다드 쾨스퀴`가 있다. 아프타리예는 우리나라의 정자에 해당하는 건물로 이곳에 들어서면 보스포루스 해협을 볼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 석관 그 자체가 조각품트로이부터 키프로스 출토 유물까지세계 5대 고고학박물관 이름값 `톡톡`▲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사이프러스의 유리그릇`다시 제3정원으로 들어와 입구(출구)쪽 오른쪽으로 과거 술탄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술탄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침실, 식당, 욕실 등 술탄과 가족들이 얼마나 화려한 생활을 하고, 술탄 자신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구조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술탄의 방 앞이 `하렘`이다. 궁전 속의 왕궁이라 할 하렘은 3시도 안 됐는데 이미 문이 닫혀 있다. 왕을 둘러싼 여자들과 자식들이 생활하며 남겼을 유물이 어땠을까, 란 생각을 해본다. 어디든 최고의 권력 밑에는 중상모략과 치정과 각종 암투가 깔려 있을 것이다.토프카프 궁전을 빠져 나가며 내게 이스탄불은 차후 다시 찾을 내 여행 목록 속의 한 곳임을 내 자신에게 약속한다. 눈앞에 두고도 구경하지 못한 토프카프 궁전의 `보석관`과 `하렘`이 있기에…. 결국 본다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지만 말이다. 토프카프 궁전을 빠져나온 손 군과 오 군, 그리고 나는 고고학 박물관 입구에서 서성였다. 그곳은 아야 소피아나, 토프카프 궁전처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표를 끊고 철제문을 들어가자 건물 옆에 나뒹굴다시피 놓여 있는 석조물이 눈에 띈다.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끌어안은 상태로 우리를 반기고 있다. 이곳은 패키지 여행 상품의 필수 코스는 아닌 것 같았다. 너무 조용해 박물관 앞을 거니는 고양이 발자국 소리도 느낄 정도라면 과장이 지나칠까.사실 한국의 여행사에서 진행하는 지중해권 여행 상품 중 이스탄불을 빠질수 없는, 빼서도 안 되는 곳이다. 그 이스탄불에서도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토프카프 궁전은 으레 들어있지만 고고학 박물관은 넣지 않는다.고고학 박물관 역시 토프카프 궁전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은 오른쪽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관람하면 된다. 이곳에는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신화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들의 조각상도 수두룩하다.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알렉산더 대왕 조각상과 그의 석관이다. 영토 확장에 온힘을 기울인 그의 치적은 책과 영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지 않는가.환조 형태의 알렉산더 대왕에는 그가 확장한 영토를 지도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제 8전시실에 전시된 알렉산더 대왕 석관은 레바논 시든이란 곳에서 발굴한 것이다.▲ 레바논 시든에서 발견된 `알렉산더 대왕 석관`석관 앞에 머문다. 석관 자체가 멋진 조각품이다. 한 채의 건축물이다. 덮개도 예쁘게 꾸며져 있다.석관 둘레 조각은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와의 전투 장면, 사자와 수사슴 사냥 장면이 현장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알렉산더 대왕 석관이 있는 1층은 트로이와 구석기에서 프뤼기아 시대 출토품 중심으로 꾸며져 있고, 2층은 키프로스, 시리아, 레바논 등지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을 돌아다니면서 전시물 밑에 붙여 놓은 설명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 곳이다. 세계 5대 고고학 박물관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는 말 만큼 많은 유물을 볼 수 있는 곳이다.2층 높이로 만들어진 트로이 목마도 전시되어 있고, 어린이를 위한 박물관도 특별하게 설치해 놓았다. 주 전시실 앞에는 타일 벽화 전시실과 모스크 내부의 기도실을 엿볼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많은 사람이 없기에 조금 빨리 관람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의 깊이는 역사와 곁들여야 제 맛을 볼 수 있다.빨리 관람했음에도 시간은 벌써 문 닫을 시간이다. 박물관을 나서자 새로운 이스탄불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2012-02-10

(2)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와 성 소피아 성당

6개의 첨탑(미나레, minaret). 술탄아흐메드 사원의 푸른 지붕 위 6개 첨탑이 블루 모스크임을 안내한다. 블루 모스크의 탄생은 그 앞에 우뚝 서 있는 성 소피아 성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솔탄아흐메드 지역으로 이곳 모든 건축물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오스만 제국 14대 왕인 술탄아흐메드 1세는 성 소피아 성당보다 멋진 사원을 건축가 마흐메드 아가에게 짓도록 했다. 1609년 착공해 1616년 완공한 블루 모스크는 술탄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수많은 황금이 제공되었다. 그런데 황금(알툰 - Altun)과 6(알트-alti)란 숫자는 동음이의어로 건축가 마흐메드 아가는 첨탑을 6개로 지으라는 줄 알아들었다.착각이었을까?아니면 건축가의 의도적 오류였을까? 창작물에는 창작자의 의도적 오류로 그 작품이 보다 빛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되고 있는 블루 모스크 첨탑 이야기는 그 곳을 찾는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블루 모스코 내부벽면과 돔에 사용된 청색의 이즈니크 타일 2만 1043장은 이 사원의 애칭(愛稱) 블루 모스코로 불리도록 하였다.블루 모스크 사원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로마 시대 마차 경주장이다. 일명 `히포드롬`.U자 형태의 로마 시대 대경기장으로 세로 500m, 가로 117m의 넓은 공간이다. 그곳에는 오스만 제국 시절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 해시계, 조각상 기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에서 만들어졌다는 25.6m의 오벨리스크(테오도시우스 1세의 오벨리스크라 불림 - 이것과 비슷한 것을 난 이집트 룩소르 카르나크 신전에서 만났다.), 479년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져온 8m 높이의 뱀머리 오벨리스크,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7세가 940년 만든 콘스탄티누플 오벨리스크가 있다.그 곳 주변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구경한다. 여행은 걸어야만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손 군과 오 군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이야기를 나무며 걸고 또 걷는다. 그러면서 감탄한다.요즘도 축제 등의 많은 행사를 갖는 장소가 `히포드롬`이다.히포드롬을 거쳐 블루 모스크로 갔다. 블루 모스크 내부는 앞서 방문했던 슐래이마니예 사원 내부와 별다른 것이 없다. 다만 청색 계통의 타일을 많이 사용했다는 것이 앞에 찾았던 사원과 다를 뿐이다.▲ 터키 전통복을 입고 차를 파는 상인예배실로 들어가며 구두를 벗는데 우리글이 눈에 띈다. `블루 모스크의 복원을 기원합니다. 약간의 기부를 부탁합니다.`7개의 외국어와 함께 종이에 써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다는 일례다. 바닥에는 넓은 카펫이 깔려 있어 관람하는 동안 양말 밑이 푹신하다. 모든 모스크는 신을 신고 들어설 수 없다. 신도들은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 마음까지 깨끗이 씻는다.높이 43m의 돔 주변에는 260여 개의 창을 뚫어 자연 빛이 잘 들어오도록 했다. 대부분의 모스크 내부는 비슷하다. 그리스 정교회처럼 내부에 성상 등의 상징물을 설치하지 않는다. 돔을 세우기 위한 기둥이 몇 아름 돼 보인다.블루 모스크 내부를 둘러본 후 맞은편에 있는 아야 소피아로 발을 옮겼다.발길을 옮기는 내 발걸음 잎으로 심장의 박동이 느껴진다. 아! 아야 소피아!오래 전부터 내가 보고 싶던 성당을 보게 된 설렘으로 심장의 박동이 손끝까지 이어진다. 화창한 날씨다. 걸음을 옮기는 길로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들이 발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일찍이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곳.비잔틴 예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건축물 아야 소피아. 학교 다닐 때였다. 세계사를 배우며 후일 이스탄불에 가게 되면 꼭 아야 소피아 성당을 구경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꿈이 이뤄진 것이다.천천히 발을 옮기며 카메라를 잡는다.아야 소파아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찰칵! 찰칵! 찰칵!맑은 날처럼 마음과 몸이 경쾌하다.1934년이었다. 아야 소피아의 덧칠된 이슬람 흔적을 지우고 박물관으로 문을 연 때는….아야 소피아는 537년 완공됐다. 360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건립한 교회가 이 성당의 출발점이다. 비잔틴 제국이 1453년 오스만 터키에게 정복당한 후 이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블루 모스크아야 소피아로 가면서 성당을 바라본다. 둥근 돔의 지붕이 생각을 초월한다. 엄청 크다. 터기 전통의상을 입은 두 명이 물통(석류차)을 어깨에 메고 관광객과 사진을 찍는다. 사진 찍는 것은 공짜지만 물통에 들은 석류차를 팔아주어야 한다. 많은 관광객이 그들과 함께, 아야 소피아 또는 블루 모스크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다.분명 짧은 시간 찍힌 사진은 후일 추억으로 마음 밭에서 자랄 것이다.푸른 색 잔디가 깔린 정원을 지나자 아야 소피야 입구다. 검문은 철두철미했다. 들어가기 위해선 짐 검사는 물론 온몸 X선 검사까지 받아야 한다. 티켓을 끊고 들어가려 줄을 섰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앞에 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슬람 믿음을 갖고 있는 땅이지만 기독교 믿음을 갖고 있는 유럽 관광객이 제일 많다.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터키 이스탄불을 경유하는 여행객 중 이곳을 빠뜨리고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건물의 왼편을 통해 들어가게 된 우린 우선 1층에 머물며 천정 돔을 본다. 돔 높이는 약 56m, 지름 또한 33m로 거대하다. 중앙에 태양이 그려져 있는 돔은 40개 석재가 둥근 천장을 받치도록 만들었다. 그 사이 있는 창문을 통해 은은한 빛이 돔을 돋보이게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돔이란다. 천정 돔 안에는 내가 알 수 없는 아랍어 글자가 보인다.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덧칠일 것이다.동행한 손 군과 오 군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넓은 공간에서 멍하니 사방을 둘러본다. 흩어져 구경한 후 한 시간 뒤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취향에 따라 길게 또는 짧게 볼 것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나는 아래층 벽면부터 유심히 살펴보기로 마음 먹는다. 벽면 곳곳에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사도들을 그린 성화가 눈에 띈다.황제의 문, 성전에 들어가는 정문이라 할 수 있다.▲ 아야 소피아 내부 `마리아의 손 모양`문 안쪽 위 벽화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축복을 내리는 예수의 모자이크`상이 그런대로 제작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예수의 오른손에 들고 있는 책에는 `너에게는 평화를, 나에게는 세계의 빛이 되라`란 글귀가 씌어 있다.모스크가 된 후 설치한 `마흐라브`는 성지 메카 방향에 자리 잡았는데 온통 금색이다. 그 곳과 대각선 쪽에 베르가마의 항아리가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큰 항아리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또 하나 세인의 관심을 끄는 곳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방향 입구 지주에 붙여진 동판이다. 동판의 가운데가 뚫려 있다. `마리아의 손 모양`이라 일컫는 곳으로 관광객을 안내하는 가이드는 그곳에 멈춰 그곳에 대한 설명을 빠뜨리지 않는다. 엄지를 그곳에 넣고 한 바퀴 돌리는 시범까지 보인다. 그렇게 하면 소원 성취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어느 사람인들 꿈이 없으랴. 그 곳을 지나는 숱한 사람들이 그 흉내내기에 그 곳 동판이 닳을 정도로 하얗게 윤이 나 있다.돔과 가까운 위층으로 오르는 길은 `ㄹ` 모양의 비탈진 길이다. 계단이 아니다. 바닥이 반질반질하다. 2층 후진 돔에 어린 예수를 무릎에 앉힌 성모 마리아상이 모자이크 돼 있다.하느님을 믿는 신도들의 신심을 알 수 있는 성상이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당이었음을 보여주는 성화를 이슬람교도들이 파괴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원본을 탁본하듯 되살린 성상을 액자에 넣어 벽면 앞에 전시했다. 제대 오른쪽 2층 회랑에는 여러 점의 모자이크가 있다.그 중 `디시스(Deesis)`상은 아야 소피아의 과거와 현재를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직사각형 형태의 오른쪽 위모서리에서 왼쪽 아래 모서리로 잇는 성화는 세월의 흐름 속에 겪은 풍랑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가운데 예수의 성상과 오른쪽 세례자 요한의 모습, 왼쪽 얼굴 부분만 드러난 성모 마리아의 모습 역시 과거에서 오늘까지 오며 겪은 풍상을 엿보게 한다.성전 가운데에 서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묵상에 빠져본다.믿음이란 무엇일까?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사상, 서로 다른 환경. 그런 것들의 차이에서 사람은 반목하고, 파괴하고, 살생을 범하지 않았던가.그 사소한 차이의 갈등은 아직도 우리 인류에 전쟁, 이별, 슬픔 등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는가?가볍게라도 눈 맞춤해야 할 부분이 많은 아야 소피아를 빠져나가다 다시 되돌아간다.나를 끌어당기는 어떤 손길 때문이다.하지만 잠시 성전의 돔과 돌기둥, 햇살 하얀 유리창, 벽화를 바라보곤 목례를 하듯 고개를 숙이고 출구로 향한다.헤어졌던 손 군과 오 군을 만난다. 그들의 눈에도 많은 느낌이 들어 있다.말로 표현 못할 많은 감정이 눈에 고여 있음을 나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이심전심이란 용어가 그 낯선 곳에서 함축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잇고 있었다.

2012-02-02

(1) 이스탄불에서 맞은 새해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한 해의 끝날을 나는 이스탄불에서 맞고 보낸다. 또 새 해 첫날을 동양과 서양을 잇는 이스탄불에서 맞고 보낼 것이다. 호텔에서 눈을 뜬 시각은 오전 3시다. 소변을 보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다시 눈 뜬 시각은 6시다. 불을 켜고 오늘 여행할 곳에 대해 책을 읽어본다.사실 여행지에 대한 사전 공부가 부족했다. 바쁜 일정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사전 지식 없이 여행에 합류했다. 그렇다고 무지한 것은 아니다. 오래 전 학교 교육에서 배운 지식이 머릿속 어느 부분을 아직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이스탄불은 크게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그리고 아시아 쪽이다. 그 세 구역의 해협을 다리와 배로 잇고 있다.여행할 곳이 너무 많다. 지도상의 구시가 쪽을 훑어본다. 토인비는 이스탄불을 노천 박물관이라 했다. 불루 모스크, 소피아 성당, 지하궁전, 그랜드바자르, 고고학 박물관, 슐레야마니에 사원….여행은 선택이다.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여행객에겐 시간이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시간뿐만 아니라 그 시간에는 돈의 지출이 곁들여져야 한다. 시간과 돈의 지출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성패는 달려 있다.지도를 짚어보며 몇 군데를 집중적으로 선택하기로 한다. 빼놓아서는 안 될 성소피아 성당, 그리고 불루 모스크, 고고학 박물관을 새해 첫날 구경하기로 결정한다.아침으로 호텔에서 빵과 과일, 그리고 치즈를 골랐다. 호텔식 뷔페다. 여러 종류의 치즈가 놓여 있어 두 개를 빵에 곁들였다. 먹지 않던 음식이라 조금 두려움이 앞섰지만 이쪽을 여행하면서 즐겨야 할 음식이라 의도적으로 손을 댔다. 아침을 먹는 도중 커피가 제공되었다. 일회용 커피에 젖어 있던 내게 원두커피는 씁쓰레한 맛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짙은 향이 좋았다.더불어 국물 대신 오렌지 주스를 컵에 따라 왔다. 맛은 한국이나 이 곳이나 별 차이 없다.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갈 때 일행 중 손 군과 오 군이 뒤따라온다. 손 군과 오 군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대학 2학년이다. 동행하잔다. 대학 2학년생으로 오군은 컴퓨터를 전공하고, 손 군은 약대생이다. 잘된 일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동행자가 있다는 것은 마음의 의로가 된다. 또 택시를 탈 경우에도 경비를 절감할 수 있고 짧은 내 영어에 그들의 영어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우리들은 숙소와 가까운 탁심 광장 근처에서 구시가로 가는 방법을 찾았다. 탁심 광장은 우리나라의 명동거리와 비슷한 번화가다. 지난 밤 제야 행사가 열린 곳이다. 오늘 구경하기로 한 관광지는 모두 구시가지에 있다. 첫날이기 때문에 지리도 익힐 겸 신시가에서 구시가를 잇는 갈라타 교까지 차를 이용하고 그곳에서 걷기로 했다. 길가에 서 있는 경찰한테 갈라타 교까지 가는 방법을 묻었다. 몸짓 발짓 섞어가며 서툰 영어로 설명하는 경찰의 놀라운 친절에 나는 슬며시 당신 앞에 있는 경찰차를 이용하면 안 되냐고 했다. 안 된단다. 한참 설명하던 그는 안 되겠는지 우리 일행 셋을 경찰차에 타라고 한다.신나는 일이다.`테쉐퀴르-탱규!` 하며 경찰차 뒤쪽 자석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운전대 앞에 앉은 경찰이 시동을 걸지만 차는 끔쩍 않는다. 그는 우리들을 내리라고 하더니 시내버스로 안내한다. 두 정류장 지나 내리면 그곳에서 갈라타 교가 가깝다는 표시를 손으로 한다.우린 버스를 타고 유럽 화가들의 그림에서 익히 보았던 지중해 풍 지붕을 내려보았다. 붉은 색 기와지붕이 햇살에 반짝였다. 지난 밤 뿌리던 빗줄기는 어디로 간 것인가. 좋은 날씨가 고맙다. 원래 이쪽의 겨울은 우기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날을 기대한다는 것은 바람일 뿐이라는 앞선 여행자의 언질이 떠올랐다.버스기사가 내리란다. 우린 내려 그곳에서부터 걸었다. 갈라타 교라고 생각하고 걸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그 다리는 갈라타 교가 아니고 아타튀르크 다리였다. 다리 가운데엔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많다. 잡힌 고기는 고등어도 있고, 꽁치도 보였다.아타튀르크 다리 앞쪽(구시가지) 제일 높은 지대에 우뚝 솟은 첨탑이 보인다. 지도에서 그곳 건물을 살펴보니 슐레이마니에 사원이다.우린 그곳을 첫 목적지로 꼬불꼬불 비탈길을 올라갔다. 어느 도시든 높은 곳에 오르면 방위 파악이 쉽고, 다음에 찾아야할 곳을 눈대중으로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높은 곳은 으레 전망대 하나 있어 도시를 내려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도시의 높은 곳에는 모스크다. 우리가 간 길은 슐레이마니에 사원 뒤쪽이었다. 낡은, 오래된 터키 전통 가옥이 눈앞에 펼쳐졌다. 목조건물인데 깨어진 유리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다.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슐레이마니에 사원 동편에서는 이스탄불의 동편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신시가에서 구시가를 잇는 갈라타 교도 눈 아래 있었다. 원래 우리는 갈라타 교를 건너려 했던 것이 그곳보다 북쪽에 있는 아타튀르크 다리를 건넌 것이다.정문을 찾기 위해 건물을 반 바퀴 돌아야 했다. 둥근 돔 옆의 뾰족한 첨탑이 푸른 하늘을 찌른다. 회당에 들어갈 수 있는 외국인 전용문이 폐쇄되어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터키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울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가죽으로 늘어놓은 문을 들치고 안에 들어서자 커다란 돔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황금빛 돔 표면에는 많은 그림이 그려졌고, 그 둘레는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이 뚫려 있다. 또한 돔에서 밑으로 늘어진 초꽂이는 원형으로 둥글게 둥글게 큰사람 키 높이까지 내려와 있다. 동편으로 뚫린 벽면의 유리에 그린 그림이 햇빛에 아름답다.슐레이마니에 사원은 오스만 제국 최전성기인 슐레이만 1세가 지은 건축물이다. 1520년 왕위에 오른 그는 1566년까지 통치한다. 그는 재위기간 동안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동유럽을 정복한다. 영토 확장과 국력 강화에 앞장선 그는 신의 은총에 감사하기 위해 이 사원을 짓는다. 최고의 건축가인 미말시난을 초빙하여 이스탄불에서 제일 높은 지대에 최고의 건축물을 짓게 했던 것이다.어느 시대든, 어느 왕조든 강성기에 멋진 건축물을 짓는다.인도의 샤자한이 타지마할이란 건축물을 지은 것도 그가 강한 힘을 갖고 있을 때였다. 이집트 람세스 2세 역시 그랬다. 강한 왕들은 그들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남들이 모방할 수 없는 건축물을 창조한다.건축물에서 힘을 느끼게 하는 정치력이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장소다. 그 이면에는 백성들의 피눈물이 깔려 있음을 역사를 조금 공부하면 알 수 있다.슐레이마니에 사원 주변 4개의 첨탑은 술래이만 1세가 오스만 제국의 네 번째 술탄이었던 것을 상징한다.실내 오른쪽 남쪽에서 이슬람 신자들이 코란을 공부하고 있다. 그들은 코란을 공부하며 마호멧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려 노력할 것이다.하루 5번의 예배는 물론 코란에서 금기시하는 것을 최대한 지키려 할 것이다. 슐레이마니에 사원을 빠져나온 우리는 그곳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이스탄불 대학이 눈에 들어왔다. 터키에서 이름난 대학이다.어느 곳이든 대학 근처는 젊은이들이 많다.그 곳 역시 그렇다. 겨드랑이에는 책을 끼고, 젊은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희망과 꿈을 이마에는 달고 있는 학생들이 분주하게 오간다.대학 앞 노천에 있는 서점을 보며 조금 걷자 그랜드 바자르(시장)란 글자가 보인다. 이스탄불 대학은 그랜드 바자르와 붙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그랜드 바자르지만 그곳을 둘러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공공시설 즉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 것들을 낮엔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루 모스크에 가기 위해선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는 시장 안을 거쳐야 했다.곳곳에서“안녕하세요.”“감사합니다. 아저씨.”등등의 호객 소리가 들린다. 아직 동남아 유명 관광지에서 듣던 `천원!`이란 소리는 없다. 그랜드 바자르를 벗어나 얼마쯤 걷자 길 건너 공원지대 밑으로 청색 지붕 돔이 햇살에 푸르다.이파리 떨군 겨울나무 사이로 청색 돔과 6개의 첨탑이 보인다.6개의 첨탑. 저 6개의 첨탑이 불루 모스크를 상징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책에서 익힌 상태다. 계속

2012-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