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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주자 이후 道義철학 제1인자”… 성인 추앙받는 대학자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푼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이덕홍 `주자(朱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조선의 일인(一人)` (일본 기몬학파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劑)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님이시여,당신은 성인(聖人)입니다`중국 개화기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조정 부름 수십차례나 고사, 고향 안동서 학문·제자훈도임진왜란때 문집 반출… 日 주류사상계에 독보적 영향묘비문 과장·왜곡 우려, 자신이 직접 96자로 직접 지어▲ 이황 영정더 이상의 극찬은 없다. 한국이 나은 최고의 사상가이자 학자이며,조선 3대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두고 동양권 학자들이 뱉은 말이다.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인 이황(1501~1570). 임진왜란 후 그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왔다.조호익은 그의 `학적지위`를 이렇게 평가했다. “주자가 작고한 뒤 도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의를 전하였다.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퇴계의 성장 과정은 정상적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교육에서 비롯됐다. 그는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의 7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인 춘천 박씨의 훈도 밑에 총명한 자질을 키웠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했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다.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고자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첫 공직을 시작했다. 3년 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38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받았다.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관계(官界)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하지만 조정은 그를 1543년 10월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시켰는데, 그는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초야에 묻혀있는 그에게 조정은 수 차례 등청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당시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단양군수 재직 때 그는 관기(官妓) 두향과 사랑에 빠진다. 그의 나이 48살,두향은 18살이었는데 그녀가 먼저 퇴계에게 러브 콜을 했지만 처신이 너무 곧은 것 때문에 두향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 당시 그는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다. 그런 그의 빈 가슴은 설중매와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시와 서예 그리고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퇴계의 작품 중에는 매화가 많이 등장한다.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을 하다, 51세에 성균관 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5세에 홍문관부제학, 57세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59세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훈도하였다.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그의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퇴계는 자신이 죽기 전 비문을 직접 지었다. 이유는 제자나 지인이 쓸 경우, 꾸미고 과장될 우려를 했기 때문이다.묘비명은 대철학자답게 자신의 생애를 4언 24구 96자로 압축한 것으로 조그만 돌에다 새기게 했다. 1570년 12월 8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성인 퇴계는 떠났다.

2014-09-11

권력 비주류 한계 넘어 한반도 첫 통일국가 이룬 전쟁영웅

우리나라 전쟁 `영웅(英雄)`을 꼽는다면 으뜸이 신라 김유신(庾信) 장군이다.김유신 장군은 한반도를 영역으로 한 우리나라를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 주인공이다.전쟁사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약소국이면서 적대국가를 무찌른 것은 강력한 지도력과 국민 근성이 함께한 합작품이다.특히 왕(王)이 아니면서, 죽어서 왕(王)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이가 `유신`이다.하지만 일각에서는 정치군인이란 비판도 있지만 투철한 국가관의 소유자여서 현재에까지 그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몰락한 가야왕조 후손… 전쟁 공로로 입지 구축김춘추와 연합해 정국 주도하는 핵심 실세로 부상죽어서 `왕` 칭호… `유신참마` 등 많은 일화 전해져김유신은 경주(慶州) 김씨(金氏)가 아닌 경남 김해 지역을 근거로 한 가야(伽倻) 김씨다.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 그가 바로 김유신의 증조부다. 따라서 유신은 몰락한 가야 왕조의 후손이다.당시 삼국이 분리된 상황에서 당시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군사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 필요했다.여기에 유신의 선조들은 신라 진골(眞骨)층에 편입되어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무력은 나·제동맹을 깨고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점령한 공로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켜 신라 최고의 관등인 각간에까지 올랐다.재미있는 것은 유신의 부모인 서현과 만명 부인 간의 결혼이다.만명은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인 왕족이다. 보수집단인 신라 권력층과 편입된 진골과의 혼인과정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버금간다. 삼국사기에 그 일화가 전한다.서현을 만나 첫눈에 반한 만명.만명은 아버지의 반대로 집안에 감금된다. 이런 가운데 서현은 만노(현 충북 진천) 군수로 발령나자 만명은 도망쳐 나와 동행한다.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유신이고, 그의 태생지는 만노다. 이로써 서현도 신라 권력층에 다가선다.유신도 아버지와 같이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徒)를 이끌었다.그의 최초 전공은 34세 때 고구려와의 낭비성(娘臂城) 전투에서다. 신라는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한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그가 정치 및 군사적으로 입지를 구축한 전투는 대야성(현 경남 합천)이다.642년(선덕여왕 11) 7월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8월에는 고구려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대중국교통 거점인 당항성(黨項城.현 경기도 화성시)을 공격해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을 죽이는 등 신라가 대패했다.이때 유신과 김춘추의 진가가 발휘된다.유신은 `군사`, 춘추는 `외교`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춘추는 당(唐)나라에서 20만 명을 지원받았다. 대야성에 밀려난 신라는 압량주(현 경북 경산)에 최전선을 구축하면서 사령관으로 유신이 되었다. 유신은 여기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백제의 가혜성(加兮城)을 비롯한 7성을 함락시키는 등 상실된 대야성 지역은 그에 의해 점차 탈환되어 가고 있었다.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은 그의 군사적인 기반이 되었고, 특히 선덕여왕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시켜 주는 데 큰 몫을 했다.이로써 유신은 `군권`, 춘추는 `외교권`을 장악하면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했고,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왕실의 핵심세력을 형성했으며, 삼국통일(三國統一)이란 대업을 거두었다.당시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일화다.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했다.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그는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지나쳐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는 “우리 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 출발했다. 이에 군사들은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 분발하자, 백제군이 그 기세만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유신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에서도 국가관(國家觀)이 묻어 나온다.젊은 날에 화류계 절세미인 천관이 운영하던 기방에 다니면서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이 일을 안 어머니 만명부인은 유신에게“치국평천하( 治國平天下)를 꿈꾸는 사람이 주색에 빠져서 어찌 큰일을 이룰 수 있겠느냐” 며 크게 질책했다. 이후 그는 천관의 집에 발길을 끊기로 다짐하고 무예와 학문에 열중했다. 그러다 유신이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귀환하던 중 말 위에서 졸고 있는 사이 애마(愛馬)가 습관적으로 천관의 집에 가자 칼로 말 목을 베어버렸다. 이것이 유신참마(庾信斬馬)다. 선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 1년에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명활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대등은 귀족의 대표로 왕위에도 오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비담이 난을 일으킨 구실은 `여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그러나 유신은 이 난을 평정하면서 권력층을 입성한다.진덕여왕이 사망하자 마침내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왕위에 오른다. 드디어 보수 귀족 세력에 맞서 소수 개혁파 세력이 승리하면서 그는 대각간에 오르고 65세 때 귀족회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는 등 정국을 주도하는 실세로 부상했다.춘추는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주류`는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의 연결은 이미 아버지 대부터 시작됐다. 유신 아버지인 서현과 춘추 아버지 영춘은 낭비성 전투를 함께 이끈 동지였다. 진지왕이 왕위에서 폐위되면서 왕이 될 수 없었던 춘추 집안과 패망한 나라의 왕족이었던 유신 집안. 엄격한 신분제 사회 신라에서 두 집안은 `비주류`라는 공통점이 두 집안을 결속시키는 촉매제가 됐다.또한, 혼맥도 이어진다. 춘추의 부인은 유신의 동생 문희다. 또 유신 부인도 춘추의 셋째 딸이다.승승장구하던 유신이 65세 때 철천지원수였던 백제를 당나라와 연합하여 멸망시키자, 당 고종은 그에게 봉상정경평양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으로 봉했다.이어 73세 때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나당 연합군 사령관 격인 대총관이었지만 고령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무열왕이 전쟁에 참가하고, 그는 국내 통치를 맡았다. 고구려를 멸한 뒤 그는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하고서 직접정치나 군사활동을 안 하고 지배층의 원로로 내부 단결과 전략수립 등 자문역을 했다.당 나라는 백제 등이 멸망하자 백제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를 두어 삼국 전체에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유신은 당의 침략에 맞섰지만, 당대에는 물리치지 못하고 그가 죽은 뒤 문무왕 때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는 79세 일기로 임종했다.지금도 김유신 장군은 전국 곳곳에서 호국신(護國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는 분명 영웅 중의 영웅이 틀림없다./윤종현기자yjh0931@kbmaeil.com

2014-09-04

`황소의 반란` 꾸짖은 총명한 신라청년으로 唐서 명성

“네가 당나라에 가서 10년 내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마라.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을 터이나 아무쪼록 부지런히 공부하여 이 아비의 소원하는 바를 잊지 말고 꼭 공을 세우도록 하라”이 말은 신라의 최고의 천재이자 문장가 그리고 유불선 통합을 주창했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나이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 떠나기 전 아버지 견일(肩逸)이 아들에게 당부한 말이다.당나라로 유학, 18세때 외국인 대상 `빈공과` 장원급제육두품이지만 신라 기성세력 견제로 초야에 묻혀중국 평가는 최고… 기념관 건립·업적 소개 등 추앙한국 교육 열이 높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도 아는 사실이다.특히, 오바마 대통령도 한국 교육열과 풍토에 대해 극찬을 하는 등 `대한민국의 힘이 교육에서 비롯됐다`며 인정하기도 했다.대표적으로 서울 강남 8학군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교육투자는 보통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보이는 등 비난과 질시가 함께한다.그렇다면 그언 1300년 전에 코흘리개 아이를 수천 리 떨어진 타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치원의 부는 당시 부유층인 6두품인 최씨며 6성의 하나로 진골(眞骨) 다음가는 상위 신분계급이며, 수도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일대 명문 집안이다. 치원이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총명한 것도 분명하지만, 그의 집 경제력과 부모의 열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명성을 떨친 그는 본국인 신라에서는 유학파에 대한 견제 등으로 비운의 인물로 사라졌다.신라 문성왕 19년(877)에 서라벌(현 경주) 미탄사지 남쪽에서 태어난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천재(天才)` 소리를 들었다.당시 신라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많이 보냈다. 신라가 유학을 장려한 것으로 보면 `인재양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같은 원동력이 당시 고구려,백제 등 삼국 중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도 `삼국 통일` 이란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선덕여왕 때부터 시작된 당나라 유학에는 `국비 유학생`도 있었고 `사비 유학생`도 있었다.국비 유학생은 귀족층 자제들인데, 당나라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다분히 `인질` 성격을 띠었다. 그는 서경(西京)에 체류한 지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급제했다.`빈공과`는 당(唐) 이 외국인의 벼슬길 진출을 위한 과거제도다.신라 청년의 우수성을 대당제국에 떨친 그는 20세에 강남도(江南道)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로 등용된다.현위는 한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관으로 영장(令長).승(丞) 다음으로 높은 고관이었다.그러나 그는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書糧)이 떨어져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도움을 받았고,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다.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表狀)·서계(書啓) 등을 작성했다.특히,그는 난을 일으킨 황소를 글로 제압한 격황소서(檄黃巢書)는 `명문`으로 손꼽힌다.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이때 군무(軍務)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으로 엮어졌다.885년 28살에 신라로 돌아왔지만, 신라는 쇠운(衰運)을 맞고 있었다.당시 신라 조정은 사양(斜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랜 적폐(積弊)가 그대로 고질화돼 곪아 터지고 있었는데, 중앙의 권력심층부에서 이를 부채질하고 있었다.해외에서 얻은 명성이나 익혀 온 경륜(經綸)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성세력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육두품(六頭品)은 신라 17관 등에서 여섯째 등급인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그 이상의 승진은 용납되지 않았다.당시 신라사회는 진골이 권력층이었다. 그의 귀국을 기뻐한 헌강왕은 그를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에 임명하고 외교문서 등의 작성을 담당시켰다.하지만 국정은 혼란스러웠고,이어 왕위 다툼 등으로 신라 세 번째 여왕이 등극하는데 그녀가 `진성여왕`이다.진성여왕은 각간(角干) 위홍과 사통(私通)하는가 하면 위홍이 죽고 난 후에는 나이 어린 미장부(美丈夫) 두세 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기기도 했다.이렇게 되니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이 부분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어지러운 세상이고 지식인의 수난시대였던 것 같다.이같은 난세 속에 당에서 배운 그의 능력은 펼 길이 없었다. 신라 조정은 큰 그릇을 받아들일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34세 되던 해 그는 외직인 지방관으로 나가게 된다. 태산군(太山郡) 태수(太守)다. 태산군은 지금의 전북 태인(泰仁)이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치원이 서쪽(중국)으로 가서 배워 많이 얻은 바 있다고 자부했다. 동(신라)으로 돌아와서 장차 자기 뜻을 펴려고 했지만, 쇠퇴해 가는 말기라 의심하고 꺼려서 용납되지 않았다. 드디어 외직으로 나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그가 한직으로 나간 것이 자의 반 타의 반이다. 894년 2월 진성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 시무책은 `비정상의 정상화` 등 적폐 해소책으로 추정된다. 이 또한 반영되지 않자 그는 금강산을 떠나 이름 모를 사찰에서 유명을 달리한다.치원이 위대한 것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입증시켰다.지난해 6월27일 시진핑은 박근혜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환영사에서 통일신라시대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한시(漢詩) `범해(泛海)`를 인용 소개했다.또한 지난 7월 2차 한·중 정상회담 차 방한만 시 주석은 서울대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한국과 중국은 역사가 유구하다`며 `범해(泛海)`를 다시 거론한 것은 현재 및 미래 한·중국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중국에서 최치원에 대한 평가는 대단하다. 그가 벼슬을 한 적이 있는 양저우시(揚州市)에서는 당성(唐城) 유적지에 최치원 기념관을 짓고 10월 15일을 `최치원의 날`로 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다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고 있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으며, 시문은 평이근아(平易近雅)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顧雲)·나은(隱)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사륙집(四六集)·(계원필경)이 소개되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立傳)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다.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020년(현종 11)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성묘(聖廟: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되었다./윤종현기자yjh0931@kbmaeil.com

2014-08-28

고려창업 개국공신으로 왕건에 도덕정치 강조한 `멘토`

몸에 비늘 등 신비한 탄생설화 지닌 파평윤씨 시조왕건 아들 혜종 견제로 경주 대도독 부임, 30년 선정잉어와 얽힌 전설 유명… 포항 묘터 최고명당 꼽혀파평윤씨(波平尹氏) 시조(始祖) 윤신달(尹辛達).그는 신라 천 년 사직이 기울고 후삼국의 격동기에 왕건(王建)과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훈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이어 그는 태자를 교육시키는 태사(太師) 봉해지는 등 고려 초기 대표적인 인물이다.또, 그는 문무를 겸해 인의지도(仁義之道)를 제창했다. 특히 그는 고려 개국에 따른 민심수습(民心收拾) 일환으로 왕건에게 국정운영을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해야 한다고 주입시키는 등 멘토인 왕사(王師) 역도 했다.그의 탄생 과정은 신비하다.신라 진성왕 7년(893년) 8월15일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로리 파평산 기슭 용연(龍淵)에서 옥함 하나가 떠 있었다. 이를 발견한 노파가 건져 열어 보니, 여기에는 오색 찬란한 깃털에 싸여 서기를 발산하는 옥동자가 들어 있었는데 그가 신달이다.아기의 양쪽 어깨에 일월(日月)을 상징하는 붉은 사마귀, 발에는 북두칠성 형상의 7개 점, 좌우 겨드랑이에 81개 비늘이 돋아 있었다. 손금이 윤자(尹字)와 같아 노파가 성을 윤씨(尹氏)로 정했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던 그는 파평산 금강굴에서 용마(龍馬)를 얻어 무예를 익히며, 파평산 정상을 비호같이 오르내렸다. 장성한 후에는 왕건 등과 막료가 되었다.당시 후삼국 분위기로 궁예 곁에는 왕건,윤신달, 신종겸, 홍유 등 쟁쟁한 명장 걸사들이 있었다. 세력을 확장한 궁예는 국호를 후고구려로 하고 강원, 함길, 평안, 황해도의 북방지역을 장악,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태봉`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그러나 태봉왕 궁예는 날로 난폭하고 잔악해져 중신을 학살하는 등 민심이 흉흉했다.이런 가운데 덕망이 높은 왕건에게 조정백관을 비롯 백성들이 따르게 되자 태봉왕은 왕건이 반역할까 두려운 나머지 관심술을 써서 “나를 반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고 호통치며 죽이려 하자 왕건은 소리치며 물러나왔다.그후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유검필,박술연 등 제장들과 의논 끝에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키로 한 후 궁궐로 쳐들어가자 궁예는 궁중에서 빠져나와 강원도 부경으로(현 평강) 도망치다 피살됨으로 궁예의 폭정은 종지부를 찍었다.918년 왕위에 등극한 왕건이 태조가 되어 국호를 고려라 칭하고, 송도를 도읍으로 정한 후 이탈된 민심의 호응을 얻었다.이어 신라 경순왕이 투항하고 이듬해 후백제 신검까지 정벌하는 등 완전한 민족통일을 이룩했다.이 과정에 신달은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신달은 2등 공신에 책훈되어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공호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았다. 신달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와 도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했다. 그러나 태조 왕건 승하 후 왕위에 오른 혜종(943년)은 신달을 견제했다. 혜종은 그의 아들 휘를 볼모로 하고,그의 나이 51세 때 동경(현 경주) 대도독에 임명하여 신라 유민을 다스리게 했다.그의 진가는 경주에서 발휘됐다. 당시 신라의 패망으로 현지인들이 고려에 불만이 누적됐지만 그는 `도의정치`로 선정을 베풀어 평화를 유지케 했다. 그리고 그의 동경 대도독 재임기간은 30년 동안 송도에 있는 가족과 한번도 상봉하지 못한 혈육이별의 아픔을 겪었다.그는 임지에서 81세 일기로 현지에서 생을 마쳤는데 고향인 파평(현 파주)이 너무 멀었기에 현 포항시 기계면 봉래리 구봉산 사원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렀다.그의 생전에 유명한 일화다.어느 해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은 물론 산야에 초목이 고사할 지경에 이르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국왕이 제문을 지어 올리도록 문신들에게 지시했다.그러나 문신들이 갑작스런 일로 생각이 안 나 주저하는 것을 본 신달은 “군신이 죄가 있으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을 마르고 타게 하나이까”(宣君臣之有罪甘受 災殃 奚草木之無知等 蒙草熱)란 글귀로 써 놓았다. 이를 지켜본 왕과 대신들이 명구라며 탄복을 하였으며,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쏟아졌다 한다. 또 파평 사저에서 송도로 말을 타고 조정에 입궐 당시 임진강 여음탄을 매일 도강했다. 그때마다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육지를 다니듯 하였다 하여 말이 물을 마신 나루를 여음 또는 음진이라 불리게 됐다. 그 후 용마가 죽자 기념하기 위해 파평산 치마대에 철마를 만들어 세웠으나 조선시대 철공(대장간)들이 이를 사용하고자 훔쳐 달아나다 직사 했고 후한이 두려워 흙으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윤씨와 잉어에 대한 전설은 신달의 5대 손인 윤관의 일대기에도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 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와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 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 한다.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운주산 구봉하 유원에 예장 된 윤신달의 묘 면적은 2천900여평,봉강재 2천200여평 그리고 이 묘를 관리하기 위한 전답과 임야가 34만 평으로 왕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이 묘는 풍수지리상 후손들이 무궁하게 발복한다는 금계포란형(鷄抱卵型)으로 천하명당이다. 국내 풍수학자들이 최고 명당으로 꼽는 묘터다. 이 묘는 한 동안 실묘됐다가 조선 영조 때 25대 봉정공이 경주영장으로 부임하여 묘소 부근을 파헤쳐 대부윤(大夫尹)이라 크게 부서진 비석 한 조작을 발견했지만 신달의 묘로 입증하지 못했다.1739년 경상관찰사로 부임한 양래공이 7일간 그 주변을 샅샅이 뒤져 선지금강(先之剛)이라 새겨진 비편을 찾아내어 태사공 윤신달의 묘소임을 확인했다.다음해 묘역을 봉축하는 한편 묘비와 기타 석물을 갖추고 제전 1석 지기를 마련하여 해마다 10월10일 시제를 정하여 지내다가 지금은 10월1일 추향제를 봉행하고 있다.봉강재(鳳岡齋)는 신달 묘소를 모시는 분암영역(墳庵領域)으로서 재사 본당인 봉서암(鳳棲菴)을 비롯 봉강서원, 봉강묘, 강학당 등 부속건물이 있다./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2014-08-21

이성계·정도전 세력 제거, 방원 킹메이커로 화려한 등장

8·15 해방 이후 국내 정치가 안정적이었던 때는 별로 없다. 특히 해방 후 유입된 좌익세력이 국내 정치에 일정부분을 차지하면서 진보층으로 고착화됐고, 이후의 기성 정치권 또한 영·호남을 기반으로 보수세력화되는 등 이분구조로 뿌리를 내려버렸다. 현재의 정치도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국가나 국민을 위한다고 밝히고는 있으나 늘 양측이 대립각을 세우면서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실정이다.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까지 당시 시대 정치 상황도 현재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권력 수성이냐`, `쟁탈이냐`라는 두 가지 핵심 문제도 여전히 치열한 진행형이다.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돼야 한다는 국민적 기대 속에 옛 사람들의 정치형태를 6회에 걸쳐 재조명해 본다.고려말 좌천·유배 굴곡 딛고 복권 `오뚝이 인생`조선 건국 반대하다 방원 만나 새로운 정치역정태종 절대적 신임으로 무한신뢰의 군신관계 유지이방원(태종)을 왕좌에 오르게 한 킹 메이커는 하륜(河崙·1347-1416)이다. 다시 말해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던 것이다. 하륜은 방원을 보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왕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주군으로 모셨다. 방원의 정치적 동지이자 책사가 된 하륜은 결코 군주를 넘어서지 않고 철저하게 뒤에서 보필하는 음지의 `실세`였다. 특히, 그는 이씨 왕조가 500년 지속되도록 하는데 밑그림을 그리는 등 조선왕조 초기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륜은 고려와 조선을 넘나든 난세의 뛰어난 지략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권력의 핵심이었다.하륜은 고려 말 충목왕 3년(1347)에 태어났다. 18살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그러나 고려가 패망할 때 까지 그의 행적은 순탄하지 않았다.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을 때 신돈의 비행을 공박하다 좌천되기도 했고,최영의 요동 정벌을 반대하다 유배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또 복권돼 중책을 맡는 등 `오뚝이` 인생을 살았다. 더욱이 그는 이색, 정몽주 등 고려 왕조`존속파`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면서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하기도 했었다. 그의 정치적 격변은 역동기 속에 방원을 만나 정치적 코드를 맞추면서 가는 길이 달라진다. 특히 그는 왕권강화의 주창자가 됐다. 당시 조선이 개국했지만 정세는 불안했다. 이유는 왕권을 둘러싼 정쟁이 끊이지 않아서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그는 당시 실세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고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진다. 이어 방원(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된다. 정국을 주도한 건 이때부터다. 당시 조선은 개국을 했음에도 중국 명(明)나라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륜은 1402년(태종 2년) 좌정승이 되어, 명나라 영락제(永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간다. 그는 그곳에서 `새 천자가 이미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으니, 청컨대 우리 왕의 작명을 고쳐 주소서`라며 명을 설득, 조선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 왔다1416년 70세로 치사(致仕·나이 70세이면 관직을 왕에게 되돌리고 나이 들었음을 고하는 뜻으로 정년 퇴직 )한 그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의술·성경(星經)·지리 등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문한(文翰)을 주관하여 `동국사략` `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다. 신왕조 초기의 한양천도, 문물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며 외교정책에 능해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를 해결했다.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권력 실세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주군의 의중을 확인한 뒤에 그에 맞는 국가정책을 수립했기에 가능했다. 또, 그는 자신의 의견이 주군의 의견과 충돌할 경우에는 주군의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스타일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신(君臣)간에 피어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은 이 두사람보다 더한 관계는 없을 것이다.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태종 16년(1416년) 10월23일 하륜이 자신의 병세를 알리는 상서(上書)를 임금에게 보냈다. `하륜이 후하게 성은을 입어 길에서 병은 없었으나,이 달 12일에 예원군에 이르러 비로소 턱 위 오른쪽에 종기가 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13일 정평부에 이르러 정릉, 화릉을 알현하고 이틀 머물러서, 또 질침 100여 매를 쓰고 19일 도로 정평에 이르러 삼가 상은(上恩)을 입어 특별히 내신(內臣)을 보내어 내온을 주시니, 신이 병중에 지수(紙受)하고 감격하였습니다. 22일에 또 내의를 보내어 병을 묻고 구료하셨습니다. 신이 쇠하고 늙은 가운데에 다행히 사명을 받았으나 병 없이 빨리 돌아가서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지금 종기의 형세가 점점 넓어지고 아파서 베게에 엎드려 신음하는데 내의(內醫)가 봉교(奉敎)하고 와서 치료하여 주니, 신이 감격하여 목이 메어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아픈 하륜에게 태종이 `주치의`를 보내자 감읍해서 쓴 친전(親展)인데, 70이 된 신하가 19살이나 적은 왕에게 보낸 병세보고서여서 읽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릴 정도로 세세하다. 또, 왕의 권위와 신하의 도리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지금 상황을 비교하면 퇴직한 정부 관료가 병환이 있자 대통령이 주치의를 보내 치료케 한 것 과 같다. 하륜의 병세가 심각하자 태종은 또 내의 이헌과 양홍달를 보내 치료케 했다. 이헌이 태종에게 고하길 “하륜의 병이 급합니다”하니 태종은 반감(飯監)을 시켜 내선(內饍)을 가지고 정평에 가게하고 명령하였다. “조석 반찬은 내가 먹는 것과 똑같이 하라” 하륜졸기(河崙 卒記)를 보면 두 사람과의 관계는 더 끈끈하다. 하륜이 정평에서 졸(卒)하자 태종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생선이나 육류가 없는 간소한 반찬)하면서, 쌀과 콩을 각각 50석과 종이 200권을 치부하고 예조좌랑 정인지를 보내어 사제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원로 대신은 인군의 고굉(股肱·팔과 다리)이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살아서는 휴척(休戚·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죽으면 은수(恩數)를 지극히 하는 것은 고금의 바뀌지 않는 전례이다. 생각하면 경(卿)은 천지가 정기를 뭉치고 산악이 영(靈)을 내리받아 고명정대한 학문으로 발하여 화국(華國)의 웅문(雄文·깊은 생각과 힘찬 기상이 세련된 문장으로 표현된 글이나 글씨)이 되었고,충신 중후한 자질로 경세(經世·세상을 다스림)의 큰 모유(謨猷·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해 세우는 원대하고 담대한 꾀)가 되었다....(중략)….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에 대한 마음을 다하여 먼길의 근로하는 것을 꺼리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이 중하기 때문에 경이 한 번 가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는가? 아 슬프다. 사생의 변은 인도에 떳떳한 것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이후로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의를 결단하여 성색(聲色·말소리와 얼굴 빛깔)을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의 편안한 데에 둘 사람을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하륜 사후에도 태종은 끊임없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가 죽자 부인 이씨가 애통하여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제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부디 술을 마시고 슬픔을 절도있게 하여 상제를 마치라”며 약주를 하사했다. 조선초기 왕이나 재상중 어진이나 초상화가 없는 이는 태종과 하륜이다. 하륜의 묘는 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산 기슭에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014-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