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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가장 완벽한 매복 기습작전, `무적불패 17연대 신화`를 낳다

6·25 전쟁이 발발한지 2주째로 접어드는 1950년 7월중순 북한 제2군단은 조기에 소백산맥을 넘어 아직도 대전과 청주지방에서 분전중인 국군 및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전을 전개할 기도하에 그들의 선봉인 제15사단을 속리산 동쪽의 깊은 계곡으로 투입해 상주~김천 축선으로 돌파구를 확대코자 중앙돌파를 계획했다. 이때 국군 제1군단은 이 지역의 적정이 불명해 군단 정찰대로 하여금 화북~화서면 간의 공백지대를 탐색중 14일 정오경에 동비령에 다다른 동 정찰대가 북괴의 첨병소대를 발견하고 이를 기습, 12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육군본부는 보은에서 함창으로 이동중인 제17연대를 이곳 화령장에서 정지시켜 정찰대와 함께 이 적을 현지에서 저지 격멸토록 명령했다. 매복 작전을 전개한 연대는 5일동안에 걸쳐서 상곡리와 중달리 그리고 동관리 등을 오르내리며 유리한 지세를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그들 제48연대의 주력을 격멸했다. 이어 25일 현지에 도착한 제1사단이 그 임무를 인수해 지연전을 폄으로써 국군은 전선전에 걸쳐 시간 여유를 얻어 제1군단은 안동지구로 이동하고 제2군단은 함창-상주 전선을 맡았다, 또한 미 제24사단을 비롯한 미 제25사단과 미 제1기갑사단도 상주-김천 정면에 병력을 전진하는 등 낙동강 방어선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北 1개사단 격멸한 5일간 전투, 아군전사자는 4명 불과… 민·관·군 합심 값진 승리전승기념공원을 산악지구 테마공원으로… 전투현장 재현·트레킹 코스도 개발 방침□  1차 교전-상오리 전투화령장은 속리산과 주흘산으로 연결되는 소백산맥 지대를 말하며 800m 고지와 깊은 계곡으로 협로였다.또한 보은~상주 간의 25번 도로와 괴산~상주 간의 977번 도로의 접합점에 있기 때문에 소백산맥 방어에서 중요한 전략적 교통의 요충지였다.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 기습남침한 북한 인민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7월 중순에 총력을 기울여 소백산맥 일대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하지만 전력이 부족하였던 국군은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했고 이점을 간파한 북한 인민군은 국군의 대비가 없는 공백지대인 977번 도로에 예하 15사단을 투입해 조기에 상주를 점령하고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이전에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직행하려고 했다.이러한 상황에서 국군 제2군단 제17연대 제1대대장 이관수 소령은 정찰대를 파견해 때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북한군 전령 1명을 생포해 북한군 1개 대대가 어제 밤 이곳을 통과해 상주로 진출했으며, 본대인 제48연대가 후속할 예정임을 알게 됐다.대대장은 북한군 사이에 끼인 상태로 상주 쪽으로 행군할 것이 아니라 상곡리에 매복해 북한군 제48연대 본대를 기습할 것을 결심하고 7월17일 오후 3시께까지 전투 준비를 완료한 후 북한군의 접근을 기다렸다.이윽고 16시께, 제1대대가 매복중인 상곡리에 북한군의 행군대열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선발대대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관계로 경계를 풀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바로 그때 제1대대의 모든 화기는 일제히 불을 뿜었고 1시간의 공격 끝에 북한군 제48연대는 붕괴돼 버렸다.이 전투로 제1대대는 250명의 적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1천200여정의 소총 등 수많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는데 전사는 이를 `상곡리 기습전`이라 명명했다.□  2차 교전-동관리 전투다음날 제17연대 제2대대가 화령장에 도착했고, 마침 북한군 제15사단의 제49연대가 제48연대를 후속할 예정이라는 귀중한 첩보를 입수했다.국군 제17연대장 백인엽 대령은 제49연대마저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제1대대를 현 위치인 상곡리에, 제2대대를 상곡리 북서쪽 동관리에 매복시켰다.그리고 3일 후 도로를 따라 밀집종대로 행군하며 내려온 북한군 제49연대는 제2대대의 포위망 안에 완벽하게 갇히게 됐고 기습에 순식간 무너져 버렸다. 이 작전으로 적 356명 사살, 26명을 포로로 잡고 박격포 16문 등 다수의 전투장비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연이어 올렸다. 이 공로로 제17연대장(김희준 중령)과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는 영예를 안았던 반면에 적 15사단의 상주 공격 시도는 무참히 좌절되고 말았다.결국 화령장 전투는 가장 완벽한 매복 기습작전을 전개해 최소한의 희생으로 적의 주력을 섬멸한 공세적 방어전투의 모범적 전례가 됐고 `무적불패 제17연대` 신화의 출발점이 됐다. 이 전투가 바로 동관리 기습전이다.□  화령장 전투의 교훈5일간의 전투로 북한군 1개 사단이 격멸됐지만 아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다. 당시 전투를 지켜본 미 군사고문관 스카레기 소령은 “1, 2차 세계대전을 다 겪어 보았지만 이처럼 통쾌한 전투는 처음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아군은 압도적인 대승을 거뒀다.수적으로나 화력면에서도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아군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유리한 계곡지형을 잘 이용했고, 무엇보다 적이 눈앞에 다가오는 긴박한 순간에도 지휘관의 사격통제에 따르며 철저하게 전장군기를 유지했기 때문이었다.화령장 전투의 승리는 민관군이 힘을 이뤄낸 값진 승리였다. 북한군의 이동을 신고한 노인, 북한군에 대한 첩보를 제공해 준 경찰, 연일 계속된 전투에 지친 장병들에게 식사를 제공해 준 마을 주민, 지리를 잘 알고 있어 주변정찰에 직접 동행하며 도움을 주었던 청년, 이들 모두가 화령장 전투 승리의 주역이었다. 아군은 이 전투의 승리로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결정적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17연대 전 장병은 1계급 특진하는 영예를 얻었다.□ 화령장전투 전승기념공원 조성상주시 화서면 화령초등학교 송계분교 일원에 추진되는 상주화령장 전투 전승기념공원은 경북도 낙동강 호국평화벨트 조성사업과 연계해 진행된다.부지면적 2만7천㎡에 110억원이 투입돼 내년 말 완공계획이다. 주요시설은 기념관, 추모공원, 광장, 체험시설 등이다.6·25전쟁중 육군 단독의 최초 전승지구로 낙동강 방어선 구축의 시간적 기반을 제공한 곳 답게 기념공원을 나라사랑 정신계승, 청소년 호국안보 교육장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상주 화령장전투는 6·25전쟁 중 한국군에 의한 최초의 승전지로, 지난 1980년 상주시 화서면에 화령장지구 전적지가 조성됐다. 지난해 장비전시장에 탱크와 장갑차를 전시하는 등 전시장과 조형물을 보수하고, 산중턱에 있는 전적비까지 방부목 계단을 설치하고 곳곳에 조망테크도 만들었다. 전적지에는 화령장전투의 요도 및 홍보판을 제작, 설치하는 등 말끔히 정비했다. 경북도는 산악지구 테마공원을 만들어 전투현장을 재현하고 서바이벌, 산악트레킹 코스도 개발할 방침이다.6·25 참전유공자회의 한 관계자는 “호국공원이 완성되면 우리나라를 이끌고나갈 젊은 세대들에게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한 목숨 초개와 같이 버렸던 선배전우들의 애국심을 피부로 느끼게 될 것”이라며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한반도 적화야욕을 새삼 상기시키는데 큰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호국벨트 조성 착착각 지역 호국공원들관광명소 부상 기대▲ 김원석 경북도 사회복지과장“경북은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 스스로 일어나 몸을 던진 호국의 중심으로 그 중요성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김원석 경북도 사회복지과장은 “특히 6·25전쟁당시 전세를 역전시킨 낙동강전투의 중심이 경북인만큼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호국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사업이 지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칠곡 영천 포항 등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며 대반격의 전환점이 된 낙동강 방어선의 역사적가치를 재조명하고, 전후세대에게 호국안보교육, 전투병영체험, 추모와 체험공간, 여가기능등을 융합한 복합형 호국공원은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호국공원은 지역의 관광명소로 탈바꿈 돼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부가적인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그는 경북곳곳에서 추진중인 호국공원은 주변의 우수한 자연환경을 적극 활용함과 동시에 새로운 개념의 안보주재 테마파크로써 자리매길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경북은 지난 2010~2016년 7년여에 걸쳐 약 1천500억원을 투입해 7개시군에 걸쳐 낙동가 호국벨트 조성사업을 추진중이다.그는 경북은 과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수십년간에 걸친 외침속에서도 우리민족과 얼을 보존하기 위해 분골쇄신한 선조들의 뼈가 묻힌곳인 만큼 호국공원조성으로 민족을 지켜낸 고장이라고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창훈기자myway@kbmaeil.com

2013-11-25

파죽지세 적군, 세번의 탈환으로 막아내다

무방비 상태의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영덕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7월초. 동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한군 제5사단이 울진 부근에서 국군에 의해 그 기세가 저지되면서 잠시 멈추게 된다. 6월 29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는 울진에 도착한 후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15일 정도 적의 진공을 지연시킨 후 평해를 거쳐 7월12일 영덕으로 철수, 영덕 부근에 연대 전투지휘소를 설치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7월14일에는 먼저 설치돼 있던 제3사단 지휘소를 포항으로 옮긴 후 미8군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 영덕지구를 고수하기로 결정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 제5군단장은 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진격이 늦은 제5사단 지휘부를 질책하는 한편, 북한군 제12사단으로 하여금 안동을 거쳐 포항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는 전투를 독려했다. 영덕지역에서 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북한군 제5사단은 상부의 질책과 제12사단의 안동을 우회한 포항 점령의 작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7월17일 여명을 기해 영덕 북방 화수동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23연대를 집중 공격해 왔다.적의 맹렬한 공격에 제23연대는 영덕을 적의 수중에 넘기고 영덕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영덕이 안동과 영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포항방어를 위한 최일선의 전초기지로써 그 중요성이 높아 국군과 미8군은 영덕을 재탈환하기로 결정했다. 제3사단은 미8군으로부터 105㎜ 곡사포 부대를 지원 받은 후, 7월18일 새벽 제23연대와 독립대대가 영덕탈환 작전을 펼쳐 영덕을 다시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적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화림산 쪽으로 패주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7월 19일 전열을 정비한 북한군은 다시 영덕을 공격해 강구까지 진출 강구와 영덕의 중간에 위치한 181고지, 즉 금호리 뒷산 일대를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공방을 계속했다. 이러한 181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공방은 이후 7월 29일까지 계속됐으며, 7월 29일 아군은 영덕을 세번째 탈환하고 영덕 북쪽 2㎞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1950년 7월 북한군 영덕 일대 아군 후방지역 교란 극심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 성공보장 위한 양동작전전투 경험 없는 어린 학도병 수백명 고귀한 희생 치러□ 지품 삼화동 전투개전초에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제5사단 이외에도 북한 제766유격부대가 이미 영덕지역으로 침투해 영덕에서 안강지구에 이르는 아군의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따라서 7월12일 울진에서 영덕으로 후퇴한 제3사단 23연대장은 적 정규군의 공격이 있기전에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7월15일 아침 35명의 고참 중대원을 선발, 화림산 좌단으로부터 34번도로 북방일대에서 주간에는 수색정찰, 야간에는 매복으로 적 유격대의 영덕침입을 저지하고 이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대원들은 첫날 주간에 삼화리 일대를 수색한 후 야간에는 오천리 마을 뒤의 오솔길 양측에 매복을 하면서 중기관총 1정을 우측대열 중간에 배치했다. 밤이 깊어지자 소대 규모의 적들이 오솔길을 따라 접근해 왔다.대원들은 적들이 오솔길 가운데 들어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일제히 기습사격을 가해 완전히 섬멸한 후 적 증원부대의 공격에 대비 약 4㎞ 동쪽의 화림산 좌단에 새로 매복을 했다. 대장인 박관영 상사는 35명의 대원을 3개조로 나눠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좌측에 중기관총을, 정면에는 2.36인치 로켓포를 배치하고 사격개시 신호는 로켓포의 초탄발사로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아군의 대유격 특공대원들은 적의 증원부대가 다가오도록 조용히 기다렸다.이윽고 먼동이 터 오를 무렵 풀이 우거진 전방에서 인기척과 함께 적 유격대원들의 조심스런 접근이 포착됐다. 대원들은 초긴장 속에 적 유격대가 `ㄷ`자형의 정면으로 들어 올 때까지 쥐죽은 듯이 기다렸다.마침내 적들이 올가미 가운데로 들어오자 박관영 상사의 로켓포가 섬광을 일으킴과 동시에 전 화기가 적들을 향해 불을 뿜었으며, 일부 도주하는 적들은 아군과의 백병전에 의해 모두 섬멸됐다.□ 축산 도곡지구 적 전차 습격전1950년 7월 하순께는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선까지 진출 아군 제3사단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공방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3사단 지휘부는 서울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던 22연대를 사단에 복귀시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181고지를 점령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22연대가 마침내 181고지 일대를 점령해 영덕지구 방어를 위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적 전차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 따라서 22연대장은 적 전차를 없애지 않고는 아군의 작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판단, 이들 전차의 파괴를 위한 특공대를 조직했다.이들은 침투 도중 전방 약 3㎞ 지점에서 적 1개 소대 규모가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고 3면에서 포위 공격 4명을 제외한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생포된 4명 중 3명은 이 지역에서 북한군에 강제로 징집된 신병으로 아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을 하겠다고 해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적의 전차대에 소속된 정찰병으로 전차의 움직임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어 특공작전에 많은 도움이 됐다. 특공대원들은 포로를 앞세우고 적 전차 진지까지 무사히 접근했다. 적 전차 진지에는 3대의 전차가 있었다. 대장은 3명의 포로를 1명씩 각조에 배치해 각 조가 1대씩 적 전차를 파괴하도록 지시했다. 각 조의 조장은 포로를 이용, 전차병을 유인해 전차의 해치를 열도록 했으며 적 전차병이 해치를 열면 포탑 옆에 숨어있던 특공대들이 일제히 수류탄을 해치 안으로 집어넣어 적 전차 3대를 모두 파괴시켰다.임무를 완수한 특공대는 재빨리 철수했다. 그러나 철수도중 상곡재 부근의 138고지 동쪽에서 적의 경계부대에 발각돼 치열한 접전 끝에 후미의 3조는 행방불명이 되고 1·2조만 귀환했다.□ 장사 상륙작전잊혀진 전투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적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 14일 전격 이뤄졌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장사상륙작전은 참전병 779명중 600여명이 18세부터 19세까지의 어린 학도병들로 불과 보름 동안의 훈련을 거쳐 해군 수송함인 LST문산호에 몸을 싣고 9월13일 부산항을 출발, 다음날인 14일 새벽 5시께 영덕군 장사해안에 도착했다.이 날은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바람이 세차고 파도가 높은 가운데 안개마저 자욱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장사동의 남쪽 해안으로 접근하던 문산호는 상륙직전 좌초하면서 상륙작전 자체가 자칫 수포로 돌아갈 형편이 됐다.하지만 미 구축함의 지시에 따라 작전은 감행되었고 장사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대대 규모의 적은 문산호를 향해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아군은 해안가에 로프를 결박해 헤엄을 쳐가면서 상륙작전을 감행했으나 전투경험이 없는 선발대는 수많은 희생을 당했다.아군은 계속해서 상륙을 감행 적5사단과 열한 전투를 벌여 적군의 동부지구 후방 보급로를 완전 차단하고, 적의 후방 주력을 동해안으로 유인 집결토록 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토대를 마련했다.이 작전으로 110명의 부상자와 129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39명이 구조선에 오르지 못하고 해안에 남는 등 많은 희생이 따랐다.이때 생존한 학도병들은 `장사상륙작전참전유격동지회`를 결성 매년 영덕군과 더불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정규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지못한 서러움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고귀한 희생정신은 올해 착공되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조성사업`의 준공과 더불어 깨끗이 씻겨나갈 거라고 믿고 있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상징탑, 추모광장 등 설치LST문산호도 재현키로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은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일원 6만8천㎡ 면적에 309억원의 예산을 투입 상징탑, 추모광장등을 공원부지내 설치하고 LST문산호를 재현한다. 전시·교육기능과 5D시물레이션체험관, 세계최초 퇴함(退艦)담력체험장 등을 갖춘 기념관을 바다위에 설치, 단순히 볼거리 위주를 탈피해 전후세대는 물론 전후3세대까지 국난극복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즐기는 교육의 장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영덕군민들은 동서고금의 전사를 막론하고 1개대대, 그것도 실전경험이 없고 훈련도 부족한 학도병들이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끈 결정적 계기를 만든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영덕군은 지난 2007년부터 추모음악회, 학술세미나, 국군의날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통해 장사상륙작전의 재평가와 기념공원 조성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노력해온 결과 2009년 국가보훈처의 협조로 총사업비 240억원을 확보하게 됐다. 이후 실시설계 과정에서 동해안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안정성 문제가 대두돼 사업비가 증액됐다.군민들은 세계최고의 호국전승공원인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공원 조성사업이 완공되면 군사·역사적 재평가와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되새기는 교육의 장은 물론 관광객 천만시대를 열어가는 전초기지 역할을 맡아 지역경기 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3-11-20

6·25전쟁 초반 불리한 전세 극적 역전시킨 `구국의 일전`

영천전투는 6·25전쟁 초기 아군에게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전쟁의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방어선에서 위기를 구한 구국의 일전이었다. 이 전투는 1950년 9월 2일부터 13일까지 국군 8사단이 북한군 2군단의 공격을 방어한 6·25전쟁의 일대 전환점이 된 전투였다. 한국군 8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을 궤멸시키고 승기를 잡았다.1950년 8월 말 북한군 2군단 15사단은 영천 동북 입암리에서 2개 연대를 증원받고 최종 공세를 준비했다. 이들의 목표는 영천을 점령한 다음 대구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국군 8사단은 보현산과 입암 남쪽 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한 후 이미 전초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영천은 신령ㆍ구산동ㆍ입암으로부터의 도로 교차점으로, 대구와 경주 방향으로의 도로망이 발달돼 있고 중앙선ㆍ대구선ㆍ동해남부선 등 철도의 분기점으로 군사요충지다. 이곳이 뚫릴 경우 대구와 경주 방면이 위협을 받게 되며 국군 1ㆍ2군단이 분리되는 동시에 동서 간의 보급로가 차단된다. 따라서 이곳은 낙동강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영천전투 메모리얼파크 사업, 279억원 투입 내년 말 완공호국원·마현산 일대 `호국추모`·`전쟁체험` 권역구분 조성 □ 북한군 9월 공세와 영천의 위기북한군 전선사령부는 1950년 9월 2일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명령했다. 북한군 15사단도 이날 야간 영천을 목표로 일제히 공격했다. 국군 8사단은 적의 야간공격을 받고 분전했으나 3일 새벽 우일선 16연대의 방어진지가 무너지면서 영천북방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국군 8사단은 4일 오후까지 기룡산 능선을 따라 방어선을 편성했다. 사단은 왼쪽부터 21연대, 16연대와 3연대 1대대, 7사단 5연대를 배치했다. 육군본부는 신령에서 작전 중인 7사단 8연대를 영천의 8사단으로 배속 전환시키고, 7사단 공병대대도 추가로 투입해 영천지구의 전력을 강화했다. 북한군 15사단은 9월 5일 새벽 1시 각종 포의 지원 하에 전차 5대를 선두로 3개 방면에서 공격을 개시했다.국군 8사단은 중앙의 16연대와 3연대 1대대가 적의 공격을 받아 수 시간 만에 돌파돼 위기를 맞았다.좌우측 21ㆍ5연대도 적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부득이 영천 북방으로 물러났다. 육군본부는 5일 지휘 일원화를 고려해 국군 8사단을 2군단으로 배속 변경했다. 군단장은 적이 영천 돌파에 주력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국군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개 연대를 8사단에 배속해 영천을 고수하기로 했다.당시 다부동과 신녕도 위기였기 때문에 이는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었다. 군단장은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차부대의 지원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직접 미 1기병사단과 8군사령부를 방문해 지원을 요청했다.적측에서도 이날 영천 점령의 지연 책임을 물어 15사단장 박성철을 경질하고 부군단장 조광열을 임명해 영천 돌파를 재촉했다. 이날 밤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중앙의 16연대가 영천 외곽까지 밀리고 있었다. 이때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8연대로 역습을 전개해 가까스로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게 됐다. □ 적의 돌파구 봉쇄와 반격 준비9월 5일 야간부터 북한군 15사단은 영천을 공격하기 시작해 다음날 새벽 수대의 전차를 선두로 읍내로 진입했다. 기습을 당한 16ㆍ8연대는 더 이상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영천 남쪽으로 철수했으며, 영천을 점령한 적은 곧바로 경주 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했다.8사단장은 즉시 군단에 증원 부대를 요청하고 오수동에서 철수부대를 재편성했다. 이날 오후 좌전방 21연대를 공격하던 적 15사단 45연대도 남하해 영천의 돌파구 확대를 기도했다. 이날 오전 사단 공병대대는 군단장의 요청으로 도착한 미군 전차 1개 소대(5대)의 지원 하에 영천읍내로 돌입했다.공격부대는 영천역을 경비하고 있던 소수의 적을 격퇴하고 영천을 탈환했으며, 이때 40여 대의 차량과 10여 문의 대전차포를 노획했다. 공병대대는 전차의 지원 하에 완산동으로 진출했으나, 저녁 무렵 조교동 일대의 적으로부터 역습을 받을 위험이 있어 다시 물러났다.9월 6일 오후 국군 2군단의 증원부대인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가 영천에 도착했다. 이로써 8사단은 비로소 영천 동북방에서 돌파 저지선을 형성하고 예비부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9월 7일 새벽 국군 21연대가 적 103연대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했으며, 19연대도 아침 무렵 적의 보급지원부대를 기습해 큰 전과를 올리고 다음날 오후 2시 45분 영천을 장악한 적을 격멸하고 영천을 다시 탈환했다. □ 총반격작전과 적 부대의 포위 섬멸국군 2군단은 10일부터 총 반격전을 개시했다. 군단은 영천 북쪽에서 21ㆍ19연대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영천 남쪽에서는 5연대를 선봉으로 총 5개 연대가 반격했다. 5연대는 포병과 공군기의 지원 하에 임포동 부근의 적을 기습해 차량 50대, 야포 10여 문을 파괴하는 전과를 달성했으며, 10ㆍ8ㆍ11연대도 미군 전차의 지원 하에 일제히 유상동, 유하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16연대는 재편성 후 작산동으로 진출해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적을 추격했다. 8연대는 우측 11연대가 1사단으로 복귀하자 그 지역까지를 담당하고 5연대와 협조해 북진했다. 5연대는 임포동 부근의 적 56연대 본부를 공격해 전차 2대, 박격포 6문을 노획하면서 적을 격멸했으며 이로써 5일간이나 차단됐던 영천~경주 사이의 도로가 완전히 개통됐다. 이무렵 적은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총반격을 받아 거의 전멸된 상태에서 분산 철수하고 있었다. 영천 남쪽에서 적을 추격하던 10연대는 11일 21ㆍ19연대 사이 신흥동을 경유해 곧바로 평천동으로 진출했으며, 21ㆍ19연대도 월곡동ㆍ운천동으로 각각 진출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각 공격부대는 12일 마침내 9월 공세 이전 8사단 주저항선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반면 적 15사단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 영천전투 결과영천전투는 낙동강방어선에서 돌파되느냐 사수하느냐를 가름할 만큼 전쟁의 전환점이 된 중요한 전투였다.특히 9월 5~6일 대구와 경주가 위협받을 무렵에 영천이 돌파되어 그 위기가 더욱 가중됐다.북한군 2군단은 5개 연대를 투입해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로 진출하려 했으나, 국군은 이곳에 7사단 3개 연대는 물론 1, 6사단의 각 1개 연대도 투입해 3개 사단으로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육군과 군단의 시의 적절한 지휘조치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국군은 영천 부근에서 적 사살 3천799명, 포로 309명, 전차 5대 파괴, 장갑차 2대, 차량 85대, 소화기 2천327정 등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달성했으며, 후에 적의 지휘부가 평가한 바에 의하면 영천의 상실로 전체 작전의 패색이 짙게 됐다고 분석했다.□호국성지 전투메모리얼파크충절의 고장 영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조성사업은 고경면 청정리 소재 국립호국원과 마현산 정상의 창구·교촌동 일대 11만1천320㎡부지에 조성된다.내년 말까지 279억원(국도비 75%)이 투입돼 영천호국기념관 호국둘레길 염원의 마당 영천전투전망타워 시가전 고지전체험장 지휘통제센터 등을 만든다.전투메모리얼 파크사업은 호국추모권역과 전쟁체험권역으로 구분해 조성한다. 호국추모권역에는 영천호국기념관, 기억의 연못, 염원의 마당, 하늘길 등이 들어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순국선열을 조용히 추상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장소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전쟁체험권역은 영천전투 전망 타워, 영천시가전 체험장, 야외 숙영 체험장, 고지전 체험장, 국군 훈련장, 지휘통제센터, 충혼탑 주변 정비를 해 학생들에게 전쟁의 체험을 해봄으로써 평화의 중요성을 각인시킨다는 계획이다.경북도 사회복지과 이복영 사무관은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청소년들의 애국에 대한 인식전환과 아울러 세계적 추세인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통한 역사의식 함양 및 관광활성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다크 투어리즘=역사적으로 비극적이거나 잔악무도한 사건이 발생한 곳 또는 그러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곳을 여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아우슈비츠(폴란드), 뉴욕 그라운드제로, 진주만, 킬링필드(캄보디아)등이다./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3-11-11

대구 방어의 최일선, 인천상륙작전 성공 토대가 되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프로야구 코리안시리즈로 수많은 사람들이 TV를 보거나 야구장을 찾아 열광했다. 투수의 공 하나, 타자의 스윙 하나에 웃고 울고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루의 일상을 마무리하고 지인들과 소주를 한잔 하거나 운동 등 취미생활을 하면서 마음껏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일상이다. 하지만 이 평화로움 뒤에는 호국선열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으나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않은게 사실이다. 다만 그런일이 있었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과거의 고통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평화를 누리는 우리는 과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또 후손들에게 평화를 물려줘야 한다. 올해 정전 60주년을 맞아 대구와 경북을 사수했던 칠곡 다부동 전투를 비롯 영천, 상주 등 지역의 치열한 전투지역을 찾아 지금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짚어 본다.경북도 호국벨트사업의 시발점 `낙동강 호국평화공원` 내년말 완공태극기 형상 조성, 전시관·낙동강전투체험관·4D영상관 등 들어서□ 칠곡, 다부동·왜관 전투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석적면 중지리 일대는 여는 시골마을과 다를바가 없었다.한적한 농가에는 잘 익은 빨간 감이 자태를 뽐내며 길손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다. 하지만 몇 십년전 이곳은 그야말로 격전지 였다. 수많은 우리의 아버지와 형님들이 목숨을 바쳐 이곳을 사수했다. 하지만 지금은 평온하다. 호국기념관의 덩그란 전적비 등 각종 기념물만이 그날의 함성을 잊지말라는 듯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반만년 역사를 통해 가장 참담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1950년 6월25일 새벽. 소련과 중공의 지원아래 북한의 김일성은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남침 3일만인 6월28일 수도 서울을 함락시키고 그 여세로 낙동강까지 남하했다.한반도 땅 어느 한 곳 포화와 화약의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남하하는 적을 막기위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이곳 다부동에서 벌어졌고, 그 결과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이 가장 많았다. 다부동과 왜관일대는 유학산과 가산이 있어 방어선이 향성 되었으며, 이 곳이 뚫리게 되면 대구가 적 지상포화의 사정권내에 들어서게 됨에 따라 다부동과 왜관은 대구방어의 가장 중요한 전쟁터가 됐다.1950년 7월 21일,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자 김일성은 수안보 전선까지 내려와 8.15 광복행사를 기필코 대구에서 하겠다며, 북한군 3사단은 성주를, 10사단은 고령, 13사단은 상주로 15사단과 1사단은 각각 선산과 효령으로 투입해 집중공세를 폈다, 아군은 왜관의 작오산(303고지), 석적포남(328고지), 숲데미산(518고지), 유학산(839고지)과 다부동, 중구동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북한군과 맞서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으로 도하한 후 3일이 지난 8월4일 낙정리일대에서 시작된 낙동강 전투는 8월 16일 맥아더의 융단폭격 작전을 도화선으로 9월16일 천생산 탈환작전을 성공함으로써 잔적을 소탕한 9월 24일에야 끝이 난다.55일간의 전투에서 1만7천여명의 북한군, 1만여명의 국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두달간의 치열한 방어전투로 전쟁의 흐름을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반격의 계기가 돼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 다부동 전적기념관다부동은 1950년 8월, 북한군 5개사단이 왜관과 다부동 전선에 집중 투입돼 8월15일까지 대구를 함락 할 기세로 총 공세를 감행했다. 국군은 제1, 8사단이 주축이 되어 미 제1기병사단과 함께 수십차례의 밀고 밀리는 혈투끝에 적의 공격을 막아낸 곳이다. 9월초, 북한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최후의 공격을 감행했으나, 국군과 UN군의 우세한 화력과 반격으로 이 곳에서 주력부대가 섬멸됐다. 결과 국군은 대구·다부동선을 고수하고 반격의 보루를 확보하게 된다. 이를 기념해 국방부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1981년 11월 30일 건립했다. 현재 많은 학생들이 이곳을 찾아 호국과 평화의 중요성을 공부하고 있다.□ 왜관지구 전적기념관다부동과 마찬가지로 북한군이 대구를 침공하기 위해 최후의 공세를 편 곳으로, 낙동강을 두고 일대 격전을 치른 곳이다. 1950년 8월, 왜관읍 주민들에게 소개령이 내려지고 탱크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북한군을 차단하기 위해 왜관 (구)철교(낙동강 인도교)를 폭파하면서 왜관 전투는 시작된다. 북한군 5개사단이 투입돼 총공세를 펼치자, 국군은 작오산, 숲데미산, 유학산, 다부동, 중구동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공방전이 시작된다.한국전쟁 당시 도하를 막고자 낙동강의 다리들이 모두 끊겼으나, 북한군 4만여명이 집결해 대규모 도하작전을 벌이자 맥아더장군에게 폭격을 요청한다.B29기 98대가 왜관 서북방 67km (약목, 구미일대)에 26분동안 9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이 폭격으로 북한군 4만명중 3만명이 죽었으니 1초에 20명, 1분에 1천150명의 사상자를 낸 유명한 `융단폭격작전`이다.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왜관지구 전적기념관이 조성됐다.□ 호국평화공원칠곡 낙동강 호국평화공원이 지난 6월 25일 착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이 곳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전 국토의 5%만 남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최후의 보루로 방어선을 구축한 곳이다.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재조명함으로써 자라나는 세대에게 호국과 평화의 소중함과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는 안보교육의 장으로 조성하기 위해 기념관 공사가 한창이다. 총사업비 547억원(국비 230억원, 도비 115억원, 군비 202억원)으로 석적읍 중지리 왜관지구전적기념관 일원에 23만2천㎡ 규모로 2014년말까지 완공할 계획이다.낙동강호국평화공원은 경북도 호국벨트사업의 시발점이며 나아가 칠곡군의 호국브랜드화 사업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미래 신성장 동력의 중추사업으로 추진하게 됐다. ◆ 공원시설 현황메인시설인 호국평화기념관은 지하2층 지상4층에 연면적 9천218㎡로 휘날리는 승전의 태극기를 형상화 했고 바깥 외형은 수호의 성벽을 표현하고 있다. 내부에는 호국전시관, 낙동강전투체험관, 어린이평화체험관, 4D입체 영상관, 컨벤션센터, 세미나실, 카페테리어, 전망대 등이 들어선다. 옥상은 공간을 활용해 야외전시장, 공연장, 전승의 마당을 꾸며 소규모 행사와 공연이 가능한 문화공간으로 조성된다.외부공간은 호국광장, 화합의 광장, 스토리벽, 상징조형물, 전쟁테마놀이터로 구성했으며 특히 스토리벽은 워싱턴 DC의 한국 전쟁 참전용사 기념관을 벤치마킹해 야외에서도 자연스럽게 낙동강방어선전투를 쉽게 알 수 있도록 계획됐다. 또 왜관지구전적기념관 610㎡를 리모델링해 상설 및 기획전시실로 사용하고, 주변에는 상징적인 낙동폭포와 문화광장을 조성, 문화와 휴식이 있는 쉼 공간으로 변모된다.◆ 기대 효과직접 전투를 체험하는 최첨단 4D 전투영상관, 다부동의 전차전을 체험하는 라이더, 입체영상사격장, 어린이 평화체험관 등 체험시설로 특화해 어린이와 청소년, 성년 등 모든 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시설이 도입된다. 누구나 손쉽게 찾아와서 보고, 듣고, 즐겁게 체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호국안보의식과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국제적인 호국안보 체험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다.칠곡군 호국의 고장 위상정립과 관광활성화를 위해 산재한 호국문화 유산들을 체계적, 전략적으로 정립하고 개발하는 호국브랜드화 사업의 핵심 선두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지역주민들을 비롯한 대구와 구미 등 인근의 250만 시민이 손쉽게 찾아와서 여가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쉼터로 자리매김이 기대된다. 그 결과 지역경제 활성화와 더불어 인구유입 효과와 지역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경북도 김원석 사회복지과장은 “호국평화공원은 정부 지자체 등이 합심해 엄청난 규모로 조성하는 만큼, 완공되면 청소년들에게 안보호국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육의 장과 아울러 관광명소화 돼 지역경제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2013-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