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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대가야 문화유산·농촌자원 결합 `관광활성화`에 답이 있다

본지는 지난 5회에 걸친 기사 연재를 통해 고령군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진단했다. 이번 기획기사의 마지막 회는 곽용환사진 고령군수 인터뷰. 곽 군수는 향후 고령이 그려갈 미래의 청사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2년 연속 우수축제 뽑힌 `대가야체험축제` `2017년 올해의 관광도시` 선정 등 쾌거 지속가능한 문화관광 시스템 만들기 집중산업인력 확보에 유리한 지리적 특성 살려주조·기계·금속산업 클러스터 구축 총력희망·문화·행복·공존·감동·소통 6대전략중점 추진사업 달성에 군민 협조 부탁-반갑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령군은 도농복합지역인데요, 그간 농촌지역 발전을 위해 어떤 사업들을 진행해왔고, 앞으론 무엇을 준비하고 계신지요?◆ 고령의 농업인 비율은 30% 정도입니다만, 농업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50% 이상입니다. 그동안은 농촌생활의 만족도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면 소재지에 대한 종합정비사업과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을 펼쳤습니다. 이를 통해 주거, 도로, 상하수도 등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생활환경이 정비됐습니다.지역 주민의 여가선용과 건강 증진을 위해서는 `대가야문화누리관`을 건립해 공연과 강좌 등 문화행사를 열어왔습니다. 이는 주민들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고령군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대가야의 문화유산과 농촌의 자원을 결합시킨 관광활성화 사업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입니다-딸기와 감자, 수박과 멜론 등은 고령을 대표하는 특산물입니다. 이런 농산물의 홍보와 판로개척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신지요? ◆ 농업인은 생산에만 전념하고, 지역농협이 유통을 책임지는 구조를 정착시킬 것입니다. 유통환경의 변화에 발맞춰 산지 수집과 선별이 가능한 농산물산지유통센터를 건립했고, 고령군 농협조합공동법인을 만들어 딸기를 비롯한 지역 특산물의 판매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약 170억 원의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아이스딸기 등의 가공시설을 지원해 산지가격 안정과 생산기간 연장에도 도움을 주려합니다. 고령의 체험 전문농장은 해마다 10만여 명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향후 SNS 교육과 홈페이지를 통한 지원으로 직거래시스템도 확대할 방침입니다. 친환경 농산물 생산의 증대와 식품안정성 강화도 군이 관심을 쏟고 있는 부분입니다.-고령은 대가야 고분과 각종 역사문화유적이 산재한 `문화관광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고령을 명실상부한 전국적 관광지로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은 무엇인지요?◆ 지난해 고령군은 강원도 강릉시, 광주광역시 남구와 함께 `2017년 올해의 관광도시`로 선정됐습니다. 관광산업 발전에 또 다른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은 세계문화유산 우선등재 대상으로 선정됐고, 대가야문화누리 개관으로 이탈리아 크레모나市와 함께 `동서양 뮤직페스티벌`도 열었습니다.서울시 국악한마당 축제에선 고령군의 대표적 문화콘텐츠인 뮤지컬 `가야금`과 `금의 향연`이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매년 3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대가야체험축제는 2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 우수축제로 선정됐습니다. 앞으로도 농촌체험관광과 지역을 효율적으로 연계하는 관광 활성화사업을 통해 주민들과 함께 지속가능한 문화관광 시스템이 구축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취임 이후 고령군 공무원사회에 긍정적 변화가 있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30여 년의 공직경험을 바탕으로 직원과의 소통, 일하는 분위기 조성, 업무능률 향상을 위해 나름의 정성을 쏟았습니다. 한마음으로 저를 믿고 따라준 직원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간 대가야문화누리관 완공, 고령 교육청 이전, 대가야읍으로의 명칭 변경, 군립 가야금연주단 창단, 전선 지중화 등을 진행했습니다. 이런 성과는 군민과 공무원의 믿음과 자신감 속에서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열심히 일하는 공직자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고, 건전한 직장분위기 조성과 복지향상을 위해서는 `고령군청공무원직장협의회`가 역할을 다하려 하고 있습니다. 화합을 통한 군정의 발전은 변함없는 저의 업무추진 원칙 중 하나입니다. -고령에는 적지 않은 산업단지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를 활성화하고 발전시킬 방안을 설명해주세요.◆ 고령군은 대구시와 인접해있어 산업인력 확보가 용이합니다. 여기에 중부내륙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광대고속도로 등이 지나고 있어 교통인프라도 좋습니다. 동고령·월성·열뫼일반산업단지는 개발계획 승인을 받아 토지보상과 착공을 준비 중입니다. 송곡일반산업단지와 득성물류유통단지 조성사업도 함께 진행되고 있습니다. 2018년 완공이 목표입니다. 이를 통해 낙동강을 축으로 하는 주조, 기계, 금속산업의 클러스터가 구축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체계적인 산업단지 조성 업무지원을 위해 2014년부터 산업단지 조성 전담부서도 신설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무분별한 공장 난립과 난개발에 유의하면서 3~4개의 산업단지 조성을 추가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고령이 탄탄한 생산기반과 높은 생산력을 갖춘 공업도시로도 발전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이탈리아 크레모나시, 서울시 등과의 교류도 활발히 추진해 온 것으로 들었습니다. 어떤 성과가 있었습니까?◆ 크레모나시와는 문화교류 MOU(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이를 위해 크레모나 시장과 박물관장 등이 고령을 방문했고, 연주회와 악기전시회 등도 열렸습니다. `동서양 문화교류 기념 특별연주회` 등을 통해 이탈리아 음악애호가들에게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리는 기회도 마련했습니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좋은 매개체입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연주회 등을 통해 크레모나시와 우호적 관계를 이어갈 것입니다. 문화교류를 통한 상호발전의 좋은 사례가 됐으면 합니다.서울시와는 안정적인 농산물 판로개척과 문화관광의 활성화를 위해 우호교류협약을 맺었습니다. 고령의 특산물 홍보를 위한 협력, 귀농·귀촌인에 대한 지원, 특화된 문화관광자원 교류, 청소년 역사·농촌체험 활성화 등이 협약의 주요 골자입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농·특산물 판촉행사는 서울시민에겐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고령군민들에겐 판로를 확보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올해는 대가야체험축제의 성공을 위해 서울시가 간행물과 전광판을 통한 오프라인 홍보,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홍보까지 협조할 수 있도록 논의를 진행 중입니다. -2016년도 상반기가 거의 다 지나고 있습니다. 올해 고령군이 중점사업으로 추진하는 `6대 전략프로젝트`가 있다고 하던데 진행상황이 어떻습니까?◆ 희망, 문화, 행복, 공존, 감동, 소통을 위한 각종 사업이 전략적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군민소득 4만 달러와 군 인구 4만명 달성을 위한 `건강한 고령경제 4040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투자유치에 적극 나서고, 지역맞춤형 지원을 강화 중입니다. 대가야문화누리를 거점으로 한 문화·예술공연과 평생학습 프로그램도 늘려가고 있습니다.도시가스 공급시설을 확충하는 것과 `다산 행정복합타운` 조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주여건 개선사업을 통해 `살기 좋은 고령군`에 한 발 더 다가가려 합니다. FTA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농업생산을 전문화·자동화하고 노인과 장애인을 배려하는 `희망플러스 사업`도 확대할 방침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군민들과 자주 만나고 그 분들의 애로사항을 귀담아 들어 이를 군정에 반영하려는 노력 또한 지속될 것입니다.-마지막으로 고령군민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다면 말해주시죠.◆ “2015년까지가 민선 6기의 주요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였다면, 올해부터는 그 사업들을 구체화시켜 성과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국정·도정의 방향과 연계해 고령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도록 행정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서민생활 안정과 일자리 창출, 농가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힘을 쏟겠습니다. `희망찬 고령, 행복한 군민`이라는 군정의 최종목표를 이뤄낼 수 있도록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립니다./전병휴·홍성식기자끝

2016-05-30

`하늘이 선물한 땅`서 알알이 영그는 희망

짙푸른 녹음 위에 점점이 떨어진 눈송이 같았다. 어린 시절 재잘거리며 흥얼대던 추억 속 노래가 함께 떠올랐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파 보나마나 자주 감자//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파 보나마나 하얀 감자.”취재를 위해 고령군 개진면 감자밭을 찾았던 날. 땅 위로 드러난 새하얀 감자꽃과 땅 속에 숨어 알알이 영근 감자가 동시에 고개 들어 기자를 반겼다. 검댕을 입에 묻힌 채 호호 불며 까먹던 바로 그 감자,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만든 도시락반찬으로 거의 매일 만나던 바로 그 감자였다. 때로 기억은 냄새를 동반한 맛의 형상으로 다가온다.동고령농협 “서울 경매사 초청 등으로 전국화 노력” 군도 무인항공방제 지원 등 품질향상 적극 도와봄·초여름 수확하는 `답전윤환방식`이 우수품질 비법고령군 개진면 옥산리에서 25년째 감자농사를 짓고 있는 김종규(47)씨. 무작정 대처(大處)로 떠나고만 싶었던 20대를 지나 혈기방장한 30대를 거쳤고, 이제 세상사 미혹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불혹(不惑)을 넘긴지도 오래. 자타공인 `감자달인` 김씨가 운전하는 트랙터가 지나는 곳마다 알 굵은 감자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무슨 마술 같았다.“여기서 나오는 감자는 무엇보다 맛있습니다. 대구건 서울이건 따질 것도 없어요. 한 번 개진감자를 맛본 사람들은 반드시 두 번, 세 번 다시 찾게 됩니다. 요즘엔 밀려드는 택배주문 탓에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비닐하우스 4동과 1만6천530여㎡의 노지에서 감자를 키우고 있는 김씨는 “감자 재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 우리 지역”이라는 자랑을 하면서도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다름 아닌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주문이 늘어가면서 감당해야 하는 택배비용. “인근 지방자치단체에선 우체국 등과 계약을 맺어 농산물 택배비를 지원해준다고 들었다. 고령군도 지역 농산물의 판매 활성화를 이룰 수 있도록 택배비를 일부라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는 게 김씨의 소박한 바람이다. 이는 직거래를 통한 생산자와 소비자간 신뢰구축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이날 수확되는 감자의 작황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동고령농협 개진지점 권순목 지점장은 “이미 수많은 언론보도를 통해 개진감자의 품질과 맛은 확인이 됐다. 서울 가락동 공영도매시장의 경매사를 초청해 고령에서 생산되는 감자를 보여줌으로써 경매에서 높은 가격이 나오도록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말로 향후 `개진감자의 전국화`와 판로 개척에 소홀함이 없을 것임을 약속했다.지금까지도 고령군은 비용의 100%를 지원해 연 3회 무인항공방제를 실시하는 등 개진감자의 품질 향상과 홍보에 적지 않은 힘을 쏟아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역의 특산물이 제대로 자리 잡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민·관의 유기적인 협조가 필수 중에 필수다.대구시 달서구에서 감자 수확을 돕기 위해 김종규 씨의 감자밭을 찾은 김영순(62)씨는 “여기서 일한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나이 되도록 먹어본 감자 중에선 이곳 개진면 감자만한 게 없더라”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자신이 캔 커다랗고 실한 감자를 보여주었다. 그런 김씨의 웃음이 더없이 환했다.고령에서 생산되는 감자가 좋은 품질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낙동강변을 따라 형성된 양질의 토양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봄과 초여름에 감자를 수확하는 `답전윤환방식`을 통해 밭을 논으로 전환하는 것도 개진감자가 우수한 품질을 담보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1820년대 재배 시작… 지역선 1900년대 초반부터 농기센터, 바이러스 없는 씨감자 제공 생산량 제고농민·군청·농협·농기센터 협업으로 명품감자 생산농업전문가들은 이를 “담수효과로 연작장해(동일 작물을 같은 밭에 연속적으로 재배할 때 작물의 품질과 수확량이 떨어지는 현상)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그렇다면 감자가 우리 땅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몇 가지 학설이 존재하지만 그중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1820년대 중반 청나라 사람들이 한국의 인삼을 몰래 캐러 왔다가 가지고 온 감자를 남기고 돌아갔다”는 것이다.고령에서는 1900년대 초반부터 개진면 일대에서 감자를 길러 먹기 시작했다. 이후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1970년대에 들어서면부터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농경지가 대형화됐다”는 게 동고령농협의 부연이다.조선시대부터 전해져오는 각종 농사관련 서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큰 하천이나 강의 중·하류 지역은 유기질이 풍부하고, 토양입자가 미세하여 감자와 양파, 마늘과 수박의 재배에 적합하다. 반면, 강의 상류 지역은 토양입자가 굵어 무와 당근, 파 등이 잘 자란다. 이것에 근거해도 고령 개진면은 감자농사를 위해 `하늘이 선물한 땅`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동고령농협은 그간 생산단계에서부터 유통단계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해 개진감자의 생산성을 높이고 감자농사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고령군농산물산지유통센터 설립과 집하장, 저온저장고, 자동선별기계 등의 도입을 통한 인프라 구축 등이 그 생생한 사례다.기자가 고령군농업기술센터를 찾았던 날. 서창교 작물환경계장은 품질 좋은 씨감자 배양을 위한 연구에 골몰하고 있었다. 2012년부터 운영을 시작한 기술센터 조직배양실은 개진감자의 미래를 좌우할 주요한 공간 중 하나다.서 계장은 “재배농가들이 직접 원종생산을 함으로써 좋은 씨감자를 자체적으로 길러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며, “바이러스 없는 씨감자로 재배를 하면 생산량을 최대 20% 이상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령군에선 오늘도 농민과 군청, 농협과 농업기술센터가 즐거운 마음으로 협력하며 개진감자의 내일을 설계하고 있다. 고령의 5월, 활짝 피어난 하얀 감자꽃 같은 탐스런 미래가 익어가고 있다.멜론, 독특한 향기와 맛으로 시원한 여름을… 성인병 예방은 물론 항산화작용으로 미용에도 그만압도적인 맛·당도, 농협중앙회 평가서도 인정받아이상(1910~1937·본명 김해경). 비단 문학에 큰 관심을 가진 이들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작가의 이름일 것이다.`오감도` `날개` `봉별기` 등 오래 기억될 한국문학사의 걸작을 남긴 그는 폐병을 앓던 스물일곱 살의 어느 날 밤,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멜론 향기가 맡고 싶네.”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일본의 도쿄. 식민지의 지식인이었던 그가 이국(異國)에서 그리워한 것은 멜론으로 상징된 이상향의 향수가 아니었을까.지금 고령은 1930년대 이 땅 최고의 시인을 매료시켰던 바로 그 멜론의 향기로 가득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고령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무네트멜론(과일의 표피에 그물 무늬가 없는 멜론)`의 생산지였다. 2001년부터 시작된 고령 멜론의 일본 수출은 해외에 한국 농산물의 우수성을 알린 좋은 사례로도 기록됐다. 80여 년 전 이상이 머물렀던 도쿄. 현재 그곳에 사는 한국동포들은 이제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한국 멜론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게 됐다.멜론의 원산지는 북아프리카 혹은, 인도나 중동으로 추정된다. 쌍떡잎을 가진 속씨식물로 둥근 모양의 과일이며, 과육은 품종에 따라 흰색이나 연한 녹색을 띤다. 재배 지역에 달리해 앞서 언급한 무네트멜론과 함께 네트멜론(표피가 그물과 같이 갈라져 있는 멜론) 등이 생산된다.고령의 무네트멜론은 맛과 당도에서 타 지역 멜론을 압도한다. 동고령농협이 주도해온 선진적인 재배·출하시스템 또한 2012년 농협중앙회가 주관한 `한국 멜론 평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그 효율성을 인정받았다.비타민A와 C는 물론 베타카로틴이 다량 함유된 멜론은 항산화작용과 함께 피부 미용에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몇 전문가들은 멜론이 “심장병과 뇌졸중 등 성인병 예방에도 좋은 과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수분이 많아 쉽게 포만감을 느끼는 까닭에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도 인기”라는 게 고령 멜론 생산농가들의 설명이다.고령에서는 파파야, 양구, 홈런 등의 이름을 가진 다양한 품종의 멜론이 재배된다. 재배 면적은 약 100ha. 모두 133 가구가 멜론농사를 짓고 있으며, 한 해 생산량은 2천600t 정도로 추산된다. 고령 멜론의 출하 시기는 4월부터 6월. 멜론의 향긋한 향기와 달콤한 맛에 빠져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이 고령 방문의 적기(適期)다./전병휴·홍성식기자

2016-05-23

청정 가야산과 낙동강 맑은 물 `크나큰 마음`으로 길러

비닐하우스 속에서 조그맣게 피어난 노오란 꽃송이를 본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에델바이스처럼 애달픈 전설을 담고 있는 꽃도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빛깔이다. 바로 수박꽃. 이 수박꽃의 꽃말은 `크나큰 마음`이다. 한국에서 재배되는 과일 중 크기에서 수위를 다투는 큼지막한 수박에 썩 잘 어울리는 꽃말이 아닐 수 없다. 수박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고대 이집트에서도 수박을 길러 먹었다니 우스개처럼 이야기하자면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과일이라 할 수 있다.원산지는 아프리카, 15세기께부터 한반도 재배 당도 뛰어나고 수분높은 `우곡 그린수박` 유명세귀향 20년차 최송기씨에 새로운 길 열어준 효자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통치자였던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새하얀 은쟁반에 담긴 새빨간 수박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한 조각 집어 드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르게 찾아온 초여름 더위가 어느 순간 잊힐 것이다.수박이 고향인 아프리카를 떠나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 시기는 15세기 중반을 전후해서였다. 한국의 경우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백성들이 수박을 재배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수박은 서기 1천500년 이전부터 한반도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준 달콤한 과일이었다.시과(時瓜), 서과(西瓜), 수과(水瓜)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수박. 경북 고령군은 바로 이 수박으로도 유명한 고장이다. 고령군청 관계자는 “청정한 가야산과 낙동강 맑은 물이 길러내는 수박은 청량감이 뛰어나고 당도가 높다”는 말로 고령의 특산물로 자리 잡은 `우곡 그린수박`을 자랑했다.최송기(52) 씨는 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1996년 한국에 불어닥친 경제 불황의 여파에 하던 일을 정리하고 고향인 고령으로 돌아왔다. 귀향 20년차인 최 씨는 최근 우곡면 들판에서 올해 첫 수박 수확을 했다.660㎡짜리 비닐하우스 17동을 이용해 아내와 수박농사를 짓는 그는 “농경지에는 지하수 시설이 잘 정비돼 있어 물 걱정은 없어요. 외려 올해는 비가 자주 내리는 통에 애를 먹었죠”라고 했다.“거기다가 강한 바람도 불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모든 농사가 다 그렇지만, 수박농사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며 웃음을 보이는 최 씨. 옆에 있던 마을 주민 역시 “하느님과 동업하는 게 수박농사”라는 농담을 보탰다.서울에서 사업으로 이루지 못한 성공을 수박농사로 절반쯤은 이뤘다는 최송기 씨는 “고향에서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준 수박이 내게는 효자”라는 말도 덧붙였다. 실제로 그가 재배해서 판매하는 `우곡 그린수박`은 전국적으로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 까닭에 고령에서 생산된 수박의 거의 대부분이 서울과 수도권에서 소비된다.“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일단 한 번 맛을 보라”며 빨갛게 잘 익은 수박 한 조각을 기자에게 건네는 최 씨의 손길에서 넉넉한 시골의 인심이 묻어나온다.“제가 어릴 때는 비닐하우스가 아닌 노지(地·비닐이나 지붕 따위로 가리거나 덮지 않은 땅)에서 수박을 길렀어요. 원두막에서 지켜보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한두 통씩 몰래 따먹던 수박 맛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라는 추억담을 들려준 최 씨. 과거를 떠올리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수박 수확현장에 자리를 함께 한 주민들도 “인정을 나누고 사는 건 옛날이 훨씬 좋았다”며, “요즘은 시골에 아이들이 없어 수박을 서리하는 풍경도 전혀 볼 수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그 아쉬운 표정에서 고령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씨를 읽을 수 있었다. 배수성이 좋은 모래성분의 땅과 진흙성분이 많은 점질토가 고루 분포된 고령은 예로부터 “수박농사에 적합한 환경”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수박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크게 재배기술과 토양의 조건, 기후와 종자개발 등이다. 고령은 이중 토양의 조건과 재배기술이 타 지역에 비해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령군이 수박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 재배지와 생산량은 매년 늘어났다. 1970년대 초반엔 우곡면에서 처음 시작한 비닐하우스 재배방식이 성공함에 따라 인근 성산면과 개진면에서도 같은 방식의 재배를 연이어 시작했고, 그때부터 `명품 고령 수박`의 역사가 시작됐다.수박의 맛과 품질을 높이는 노력과 함께 진행된 수박 관련 이벤트(고령 수박 한마음축제)와 직판장 개설 등은 KBS를 포함한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는 고령 수박이 전국적으로 그 이름을 알리는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토양과 재배기술이 타지역 비해 월등 일조량이 풍부하고 일교차가 큰 날씨도 한몫무기질·비타민 등 다량함유 피로회복에 그만수박은 과일 중에서도 특히 수분 함량이 높다. 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루어진 수박은 무기질, 비타민, 아미노산 등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피로회복에 도움을 준다. 또한, 수박의 포도당과 과당은 인체에 흡수되는 속도도 빠르다.`한국식품과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뇨제로서 부종에 효과가 있고, 신장염, 요도염, 방광염 등에 좋으며, 해열 작용도 하는” 과일이 바로 수박이다.그렇다면 고령군 우곡면, 개진면, 성산면에서 생산되는 수박은 다른 지역에서 재배되는 수박과 어떤 차이점을 보일까.“구릉성산지로 이루어진 고령은 온난하고 연중 일조량이 풍부하며, 내륙에 위치해 있어 일교차도 크다. 그렇기에 당도가 높고 식감이 뛰어난 수박의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이 고령군 농협 관계자의 설명이다. 여기에 “낙동강변에 형성된 충적평야의 비옥한 토질도 고령 수박을 맛있게 만들어주는 한 요인”이라고 덧붙였다.차츰 높아지는 기온에 불어오는 바람에서 초여름의 향기가 느껴지는 5월 중순. 식구들이 모이는 오늘 저녁엔 시원하고 달콤한 고령 수박 한 통을 가운데 놓고 수박꽃의 꽃말처럼 서로를 향한 `크나큰 마음`을 정겹게 나눠보면 어떨까. 부인병과 위장 장애에 좋은 향부자잔뿌리는 불에 태워 없앤 뿌리줄기 말려서 사용사질양토가 최적지… 전국 재배면적 70%나 차지해마다 가을이면 고령군 들녘은 해질 무렵의 노을보다 더 붉게 타오른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불을 질렀냐고? 물론 아니다. 복통 등의 위장 장애와 월경불순 등 부인병에 효험을 보이는 작물이며, 요즘처럼 약이 흔치 않았던 시절엔 폐결핵에도 사용했던 향부자(香附子)를 수확하는 풍경이다.사초목 사초과의 식물인 향부자는 수확한 덩이줄기의 잔뿌리는 불에 태우고 뿌리줄기를 햇볕에 잘 말려 앞서 언급한 증상에 약재로 사용한다.고령 들판을 환하게 밝히는 불빛은 바로 이 향부자의 가는 뿌리는 태우는 광경이다.딸기, 수박, 감자 등과 함께 향부자는 고령 농가소득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효자 작물이다.농업전문가들에 의하면 “고령의 사질양토는 모래땅을 좋아하는 여러해살이풀인 향부자가 자라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한다.현재 고령군에서는 20여 가구가 향부자 농사를 짓고 있다. 재배농가 수는 많지 않지만, 향부자가 뿌리를 내리고 커가는 땅은 24ha로 전국 재배면적의 70%에 해당되는 작지 않은 규모다. 해마다 거둬들이는 수확량도 150t에 육박한다.천혜의 자연환경에서 자란 고령군 다산면의 향부자는 품질이 좋고, 약효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오래 전부터 받아왔다. “다산 향부자를 한 번 이용해본 이들은 꼭 다시 찾게 된다”는 게 고령 농민들의 자랑거리다.고령에서 향부자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지금보다 재배지가 훨씬 넓었으나, 현재는 낙동강변 개발사업 등으로 노곡, 곽촌, 평리 지역이 재배를 포기한 탓에 경작지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 향후 고령군청은 향부자와 관련된 각종 현대식 가공시설을 구축하고, 재배·수확 과정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농가소득 확대에 도움을 줄 방침이다.약재상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향부자가 진통 작용과 자궁수축억제 작용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시퍼렌(cyperene), 시퍼놀(cyperol), 코부손(kobusone) 등의 지방산이 다량 함유돼 있기 때문”이다.지금으로부터 1천800여 년 전에도 향부자는 귀한 약재였다. 중국 위나라의 왕이 사신을 보내 오나라에서 향부자를 구해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이런 사실을 알고 고령 향부자를 먹는다면 좀 더 좋은 약효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전병휴·홍성식기자

2016-05-16

깨끗한 물과 기름진 흙… 이유있는 `고령딸기 전성시대`

고령 출신으로 33년간 교육행정직 공무원으로 일했던 정득상(58·운수면)씨. 짧지 않은 공직생활을 마친 그는 이제 막 `인생 2막`을 열어가고 있다. 정 씨의 곁에 고령의 특산물인 `향기로운 보물`이 발갛게 빛나고 있으니 바로 딸기다.지난해 명예퇴직한 정 씨는 `내 사랑 딸기농원 대표`라는 바뀐 명함을 가지게 됐다.“과학영농을 실현해 일손은 줄이면서도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극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5천600여㎡의 딸기밭을 어린이 딸기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앞으로 농원의 재배시설을 보다 과학화·고급화해 딸기체험 전문공간인 동시에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하는 힐링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정 씨는 “공무원 시절보다 수입이 줄었지만 꿈꾸던 2번째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낀다”며 환하게 웃었다.1989년 도입 `전조재배 기술`로 대량생산꿀벌도 찾게하는 유기농법으로 품질 제고연평균 수백t 수출… 농가소득 효자로실제로 농원엔 아이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적지 않게 방문해 고령 딸기의 달콤한 맛에 매료되곤 한다.“대가야의 유적지인 고령엔 많은 관광상품이 존재한다. 딸기도 그중 하나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덧붙여 전한 정득상 씨.고령군이 내세워 자랑하는 특산물 중의 하나인 딸기. 딸기의 역사는 저 멀리 고대유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신 프리카에게 바치던 과일이 바로 딸기였다. 성모 마리아 역시 딸기를 즐겼다고 한다.이와 관련된 재밌는 전설도 전해온다. 딸기를 너무나 좋아한 한 여신은 천국을 방문하는 사람의 입술에 딸기즙이 묻어 있으면, 그가 딸기를 훔친 것으로 여기고 지옥으로 보냈다. 맛있는 것을 양보하지 못하는 건 인간이나 신이나 비슷했던 모양이다.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재배종 딸기는 유럽과 미국에서 자생하던 몇몇의 야생종을 교배시킨 것으로, 이를 본격적으로 기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그렇다면, 고령에서 딸기 재배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고령군청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1973년이 고령 딸기 재배의 역사가 시작된 해다. 그해 쌍림면 안림리 600여 평 밭에 딸기모종이 심어졌다. 이후 1980년부터 `반촉성재배`가 일반화됐고, 1982년에는 쌍림면 곽해석 씨 등이 촉성재배를 시작했다.1989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전조재배 기술`은 딸기 수확량을 대폭 늘였고, 이때부터 `고령 딸기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더불어 수출의 길도 열렸다.1994년 시작된 딸기 수출은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본격화됐다. 현재도 고령은 연평균 수십에서 수백 톤의 딸기를 수출한다. 이는 농가소득 증대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주말 두 딸과 농장에서 딸기수확체험을 한 이혜미(대구시) 씨는 “딸기가 재배되는 현장에서 직접 딸기를 따보는 경험이라 아이들이 너무 즐거워한다”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맛도 새콤달콤 해서 나도 맛있게 먹었다”는 이 씨.고령에서 생산되는 딸기는 맛뿐 아니라 영양가도 높다. 딸기에 함유된 펙틴(pectin)은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고, 쿠엔산과 포도당 함량이 높아 회복단계에 있는 환자에게 영양을 보충해주기도 한다.동맥경화와 변비에도 효과를 보이는 딸기는 칼로리와 지방 함유량이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또한 “비타민C 보충에는 딸기만한 과일이 없다”는 게 고령군청 관계자의 설명.고령 딸기가 오늘날의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까지는 적지 않은 노력이 있었다. 딸기 재배농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가야산 줄기 미숭산과 만대산의 깨끗한 물과 일대의 기름진 흙이 고령 딸기의 맛을 알렸다. 유기농법에 의한 재배도 품질 향상의 요인이 돼주었다”고.여기에 농약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꿀벌을 통해 수정을 진행하는 것도 고령 딸기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양질의 과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고령군의 딸기 재배면적은 경상북도에서는 1위(30%), 전국적으로 보자면 15위(약 3%)다. 하지만, 한국 농촌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고령화로 인해 딸기농사를 포기하는 가구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01년 619가구(재배면적 235.8ha)이던 딸기 재배농가는 2005년에는 549가구로 줄었고, 이어 2010년에도 내리막길을 걸어 498가구(206ha)로 감소했다. 지난해 고령의 딸기 재배농가는 385가구로 재배면적은 180ha.고령군청은 이 같은 딸기농가 감소추세를 “노인가구가 많아지면서 영농포기를 선언하는 집들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딸기 재배 중심지역인 쌍림면이 지속적인 감소 추세를 보이지만, 대가야읍과 덕곡면은 소폭이나마 재배농가가 늘었다”는 게 군청의 이어지는 부연.노령화로 인한 영농포기 농가 늘어노동력 절감 가능한 고설재배법이 대안딸기체험관광 등 고부가가치 산업 변신그렇다면 줄어드는 딸기 재배농가를 위한 미래의 대안은 없을까? 경북 농업기술원과 고령군청 등에 따르면 노동집약적인 딸기 재배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고설재배법`과 딸기관광체험의 확산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고설재배법이란 철재 파이프와 상토(모종을 가꾸는 온상에 사용되는 토양) 등을 이용한 벤치시설에서 딸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딸기 재배와 관련된 모든 작업을 쪼그려 앉아서가 아닌 서서 할 수 있도록 변화시킨 재배법이다. 이를 통해 노동력과 시간은 절감하면서, 품질과 수확량은 획기적으로 높였다.딸기체험관광은 딸기 농사를 단순한 1차산업에서 고부가가치의 혁신적인 산업으로 변화시켰다. 대구 등 인근 대도시의 가족단위 나들이객을 딸기농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체험관광은 대가야박물관과 지산동 고분군 등 고령 문화유적과의 연계관광으로도 유명해지고 있다.얼마 전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척 한 사람은 “거기서 딸기를 먹어보고는, 한국의 딸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게 됐다”는 말을 전했다. `사람의 몸과 사람이 살아온 땅은 본래 하나`라는 신토불이(身土不二)란 이럴 때 사용되는 게 아닐까.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도 고령 딸기의 달콤한 향기가 바로 곁에서 풍겨오는 듯하다. 낙동강변 사질양토가 품어 기른 개진감자高녹말함유량에 입소문으로 유명세`경북우수농산물` 상표까지 획득군 블로그서 다양한 요리법 소개저 멀리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칠레와 페루. 그곳 안데스산맥에서 태어나 경북 고령군 개진면으로 이주해 와서 이름을 드높이는 농작물이 있다. 술을 만드는 알코올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하고, 1800년대 중반 극심했던 `아일랜드 대기근` 때는 수백 만 명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고, 구하기도 한 이것은 뭘까? 그렇다. 바로 감자다.낙동강변의 사질양토(沙質壤土·진흙이 비교적 적게 섞인 보드라운 흙)에서 재배되는 까닭에 씨알이 굵고 깨끗한 흰색을 드러내는 고령 개진감자는 녹말 함유량이 높아 전국에서 최고 품질로 자타가 공인한 농작물이다.고령군 개진면과 성산면 등의 지역은 낙동강 동쪽 경계를 따라 곡류하는 강물이 형성시킨 충적토가 넓은 평야를 만들어냈다. 개진감자는 바로 이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다. 외부적 조건이 감자 재배에 그저 그만인 지역인 것.농업전문가들에 의하면 “큰 하천이나 강의 하류지역은 유기질이 풍부하고, 토양입자가 미세해 감자와 양파, 마늘 등의 재배에 최적지”라고 한다. 여기에 고령은 구릉지역으로 이루어져있어 일조량이 풍부하고, 내륙이라 일교차가 큰 것도 감자가 제 맛을 내기 위한 최상의 조건에 부합한다.고령에서 감자가 주로 재배되는 곳은 개진면과 성산면, 우곡면이다. 이들 지역은 낙동강 연안으로 고령의 동쪽이며 대구시 달성군과 인접해있다. 품질 좋은 감자를 생산하는 이들 지역을 홍보해 판로를 개척해주는 일등공신은 `고령군 블로그`. 고령에서 수확된 감자의 특징과 효능, 성분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이 블로그는 감자를 이용한 각종 요리도 소개하고 있어 방문자들에게 인기다.`들깨감자옹심이`와 `감자영양밥`은 고령군이 개발한 `대가야진찬`의 주요 메뉴이기도 하다. 이러한 요리의 주요재료인 고령 감자는 2005년 `경북우수농산물` 상표를 획득했다. 이후 군은 농가의 소득증대에 보탬이 되고자 집하장 및 자동선별시설 설치 등을 지원해오고 있다.개진면과 성산면 등에서 재배되는 감자는 먼저 `입소문`으로 유명세를 탔다. `고령 감자 인지도 조사`에 따르면 “TV 등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18.5%)”는 답변보다, “먼저 먹어본 주위 사람의 평가를 들었다”는 대답이 42.0%로 훨씬 높게 나타난 것.감자는 철분과 비타민C가 풍부하고, 칼륨과 식이섬유도 듬뿍 담고 있는 대표적인 알칼리성 식품이다. 오늘 저녁엔 `건강밥상`을 떠올리며 고령 개진감자로 감자국, 감자조림, 감자볶음 등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전병휴·홍성식기자

2016-05-09

主山 품에 고이 안긴 700여기 무덤은 살아있는 야외박물관

고령군 대가야읍 주산(主山)에 높이를 달리하며 솟아난 고분들. 5월 햇살 아래 부드러운 곡선을 드러낸 700여 기의 무덤은 보는 이를 나른하게 압도한다. `나른한 압도`란 반어(反語) 아니면 역설이다. 어법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지산동 고분군`을 설명하기엔 이만한 표현도 없을 듯하다.취재를 위해 고령을 찾았던 날. 봄볕은 옛사람의 유택(幽宅) 곁에 누워 평화로운 낮잠에 빠져들고 싶을 정도로 나른했다. 능선을 따라 때론 촘촘하게, 때론 듬성듬성 자리한 수백 개의 무덤 속에 담긴 갖가지 개인적 사연을 상상하는 일은 기자의 능력 밖이기에 막막했다. `개인사의 총체`라 할 역사의 무게에 압도되는 순간이었다. 대가야읍을 병풍인양 감싸고 있는 주산의 남쪽. 고대왕국 대가야의 흥망과 부침을 보여주듯 웅장한 크기로 조성된 능묘(墓)들. 한국 최초로 발굴된 순장 왕릉인 지산동 44호 고분과 45호 고분. 그 일대엔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이 세상사 시름을 잊고 꿈도 없는 잠에 빠져있다.“이곳은 대가야 시대에 만들어진 최대의 고분군으로, 1600여 년 전 제작된 독특한 형태의 토기와 철기, 말갖춤(말을 부릴 때 쓰는 도구)을 비롯해 왕이 사용한 금관과 금귀고리 등 화려한 장신구가 출토된 지역”이라는 게 대가야박물관 정동락 학예담당관의 설명이다.44·45호 고분은 한국최초 발굴 순장왕릉돌덧널무덤까지 2만기 이상 무덤 존재장기리 암각화 등은 암각화 연구의 효시왕릉전시관·우륵박물관 등 테마별 구성`대가야박물관` 고대왕국 역사문화 한눈에□대가야 왕족의 공동묘지… 순장풍습 확인되기도통상 `삼국시대`라 하면 고구려, 신라, 백제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지산동 고분군의 규모와 미려한 출토 유물들은 대가야를 `또 하나의 고대왕국`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2013년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지산동 고분군이 등재된 것은 이러한 견해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얼마 전 고령군은 학술기관에 이 지역에 관한 정밀조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700여 기의 고분 외에, 육안으로는 확인이 어려운 돌덧널무덤(돌로 네 벽을 쌓은 형태의 무덤)까지 포함하면 무려 2만 기가 넘는 선인들의 유택이 지산동 고분군을 채우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쉽게 이야기하면 왕과 귀족들이 영원한 안식처로 택한 대가야의 공동묘지였던 셈이다.이에 관해 대가야박물관 손정미 학예사는 “지름 40m 이상의 고분이 1기, 30~40m 사이가 5기, 20~30m 사이가 13기 정도로 조사됐다. 규모가 큰 고분엔 왕과 왕족이 묻혀 있을 것이고, 다소 작은 봉분 아래에는 귀족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서기 400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대가야가 멸망한 562년까지 조성된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견되는 특징 중 하나는 `순장(殉葬·지배계급이 사망하면 그와 관련된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것)`이다.정 학예담당관은 지산동 고분군 중 대가야의 순장 풍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으로 44호 고분을 지목했다. “왕이 묻힌 가운데 돌방 주위로 창고로 보이는 돌방 2개가 확인되고, 주변에 32개의 순장 돌덧널이 배치돼 있다. 40여 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 이는 현재까지 발견된 순장묘 중 가장 큰 규모에 해당된다.21세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야만에 가깝지만, 대가야 외에도 세계 각처에 존재했던 여러 고대국가가 순장의 풍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장기리 암각화와 고령향교 거쳐 대가야박물관으로1971년 발견돼 `암각화(巖刻畵)`라는 단어를 한국에 알린 장기리 암각화는 고령군이 간직한 또 하나의 문화적 보물이다. 바위에 그림이나 도형을 새기거나 그린 암각화는 구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종교의식 등을 짐작하게 해주는 사료다.“장기리 암각화를 필두로 안화리 암각화, 지산동 30호 고분 개석 암각화, 봉평리 암각화 등 고령군 4개 장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암각화는 문헌연구가 어려운 시대를 탐구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고령은 암각화의 고장”이라고 손 학예사가 부연했다.고령은 대가야의 정치적 중심지인 동시에 유학 교육의 요람이기도 했다. 대가야읍의 연조리에 있는 고령향교가 이를 말해준다. 주산의 기세가 부드럽게 꺾이는 위치에 들어선 고령향교. 그 자리는 애초에 왕실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이후 대가야가 사라지면서 왕궁 터였던 위치에 물산사라는 이름의 사찰을 지었다. 이는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가는 대가야 사람들을 염두에 둔 신라의 유화책 중 하나이기도 했다.불교국가에 가까웠던 고려시대까지는 번성한 절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물산사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유교를 숭상한 조선왕조는 물산사 자리에 향교를 지어 유학자들을 양성하게 했다. 고령향교는 끊임없이 출렁여 온 역사의 흐름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지산동 고분군과 장기리 암각화, 고령향교를 둘러봤다면 이제 대가야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길 차례다.주산 기슭에 자리한 대가야박물관은 2000년 가을에 개관했다. 고대왕국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최대 규모의 순장묘 지산동 44호 고분을 재현한 `대가야왕릉전시관`과 `대가야역사관`, 악성 우륵과 가야금을 테마로 한 `우륵박물관`으로 나눠 구성한 것이 이채롭다.경남 사천시에서 2시간을 달려 박물관을 찾은 김정단(25·사회복지사) 씨와 신학범(34) 씨는 “1년에 한 번쯤 삼천포사회복지관 원생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 대가야인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획전시가 인상 깊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어 신 씨는 “주산 능선을 따라 들어선 고분 속 왕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며 웃었다.이처럼 많은 역사적 유산과 양질의 문화 인프라를 가진 고령군. 가정의 달인 5월.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를 준비하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다면 고령으로의 역사·문화 답사여행을 권한다. 문(文)과 예(藝)의 향기 스민 문화재들지산동 고분군과 주산성, 장기리 암각화와 대가야 궁성지 외에도 고령에는 각종 문화재와 민속자료들이 산재해 있다. 이는 고령군이 문향(文鄕)인 동시에 예향(藝鄕)임을 말해주는 증거물이다.보물과 사적을 포함한 국가지정 문화재 10여 개, 민속자료와 기념물을 망라한 경북도지정 문화재 11개 등 고령에서는 모두 30개의 사적과 문화재들을 만날 수 있다. 산책하듯 걸으며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공간에 다름없다는 이야기. 그 중 자녀의 손을 잡고 함께 둘러볼 만한 것들을 소개한다.지산리 당간지주·반룡사 다층석탑 등 30개의 사적과 문화재도 만날 수 있어▲보물:고령읍 지산리에 자리한 `지산리 당간지주(보물 54호)`는 옛 절터에 세워진 커다란 석조물이다. 서로 마주보는 2개의 기둥으로, 미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지나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8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조선 중기의 학자였던 오운의 종가에서 보관해온 `죽유 오운 종손가 문적(보물 1203호)`은 7종 122점의 고문서로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경제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보물 1725호로 지정된 `김종직 종가 고문서`와 `정종 적개공신 교서(보물 1835호)` 역시 대가야박물관에 보관돼 조선 사람들의 생활상을 짐작케 해준다. ▲유형문화재: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세를 떨친 암행어사 박문수의 선조 묘 아래 설치된 `만남재`, 고령 박씨의 재산분배와 노비 관련 문서를 모아놓은 `고령 박씨 소윤공파 문적`도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둘러봐야 할 문화재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창건된 반룡사의 다층석탑과 동종(銅鍾), 목조 비로자나삼존불상 역시 고령의 자랑하는 문화재다.고령 개포동 석조 관음보살좌상도 빼놓을 수 없다.▲민속자료와 기념물:영남학파의 조사(祖師)로 불리는 김종직의 종택에서는 제자 양성에 힘썼던 선비의 향기와 만날 수 있다.인근 고을 학자들이 모여 학문적 토론을 벌이던 `벽송정`과 부드러운 표정의 둥글둥글한 형상이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대평리 석조 여래입상` 등도 교육·문화적 의미가 있는 볼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한 김면 장군의 호국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적도 고령 방문자라면 반드시 들러야할 곳이다.그는 학자인 동시에 조선 제14대 왕 선조에 명에 의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전병휴·홍성식기자

2016-05-02

영호남 잇는 경북의 관문, 문화융성·경제발전 두 토끼 잡는다

번성했던 고대왕국 대가야. 경상북도 고령군은 빛나는 문화유산으로 한국사에 기록된 대가야의 후손들이 삶을 이어가는 고장이다. 본지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지난날의 영광을 되살려 보다 나은 내일을 열어가고자 하는 고령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기사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가야체험축제 등 관광·문화산업 정착 `2017년 올해의 관광도시` 선정 쾌거로산업단지 확대 등 신성장동력 창출 총력성공한 도농복합지역 `한발 앞으로`올해 여든넷의 이도원 옹과 여든여섯 황진호 옹이 기억하는 고령의 과거는 지금으로선 상상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렸다. 고령군 개진면 신안리에 거주하는 두 어르신은 입을 모아 “우리 고장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풍경으로 바뀌었다”며 “내가 어렸던 시절과 비교하면 몰라보게 편하고 살기 좋아졌다”고 말했다.이 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중학교를 다녔다. 그가 기억하는 대가야읍은 초가집 천지였다. 갈대나 볏짚을 이어 지붕을 올린 초가집은 화재의 위험성을 상시적으로 안고 있었고, 위생과 생활의 편의성면에서 현대의 주택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다들 하루 세끼를 챙겨먹기도 힘들었던 시대.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없었으니, 이 옹은 고령중학교까지 또래 친구들과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비가 오면 진흙투성이가 되고, 자갈까지 튀는 비포장도로에 가끔씩 나타나던 목탄차. 이 차 짐칸에 운전수 몰래 올라타 본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당시 대구를 오가려면 금산재를 넘어야했다. 지금은 벚꽃 흐드러진 아름다운 고갯길로 변한 금산재. 하지만 예전엔 꼬불꼬불한 산길이라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그로 인한 인명피해도 적지 않았다. 모두가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뚫리기 전 이야기로 이젠 30분안팎의 시간이면 고령에서 대구로 갈 수 있다.이 옹은 이앙기가 보급되던 시절의 기억도 떠올렸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어색해하며 이앙기 사용을 주저했는데, 이제 모두가 기계에 올라타서 모를 심고 있으니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며 이 옹과 황 옹이 웃었다.유년시절부터 변해가는 고령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나이 들어온 두 어르신의 고향사랑은 남달랐다. 이들은 “대가야 체험축제 등으로 고령이 전국적인 관광도시로 발전하고 있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역사와 문화의 향기 가득한 우리 고장을 많은 사람들이 찾아줬으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 현재, 1읍 7면으로 나뉜 인구 3만6천여명의 도시여든을 넘긴 노인세대가 기억하는 고령의 과거가 위와 같았다면, 오늘날의 고령은 어떤 모습일까. 행정구역상 1읍 7면으로 나뉜 고령군의 전체 예산규모는 2천763억원, 인구는 3만6천여 명이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남북을 가로지르고, 동서는 광주~대구고속도로가 이어준다. 50km 거리엔 대구국제공항도 위치해있다.곽용환 군수는 고령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배후에는 “21세기 들어 대가야 역사문화 관광자원을 개발하고, 낙동강과 가야산의 청정 환경이라는 자연적 입지를 활용해 근교농업을 발달시키려 한 군민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설명한다.가난한 농촌마을에서 도농복합지역으로 탈바꿈한 고령군. 초가집 사이로 매연 뿜어내는 목탄차가 다니고, 좁은 비포장도로 인해 불편을 겪던 과거의 모습은 이제 역사책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의 노력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대가야 문화누리 개관`과 `대가야교 건립`, `서울시와의 우호교류협약 체결`과 `도시가스 공급 시대 개막`이라는 크고 작은 성과를 이뤄냈다.고령은 한때 찬란한 문화와 함께 번성했던 대가야의 도읍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서에 따르면 대가야는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까지 520년간 이어진 왕국으로 추정된다. 5세기 이후 고령과 합천 등 내륙 산간지역은 농업기술과 제철기술을 빠르게 발달시켜 문화중심지로 주목받았다. 대가야가 이처럼 번성했던 시절에는 백제, 신라와 힘을 규합해 고구려를 침입하기도 했고, 554년에는 백제와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이 싸움에 패해 국력이 급속히 쇠약해져갔다.정치제도 면에서는 인접국인 신라와 백제에 미치지 못했으나, 가야금을 제작하고, 수준 높은 음악을 만들어낸 대가야의 문화적 성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또한, 대가야 시대 지배계급의 거대한 무덤이 조성돼 장관을 이루는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은 고령이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적이다.□ 문화융성과 함께 경제발전으로 다가올 미래 준비 이와같은 대가야의 문화전통을 이어받은 고령군은 이를 관광산업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지속해왔다. 군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대가야 체험축제`는 ◆거리 퍼레이드 ◆금관 제작체험 ◆대가야 목공체험 ◆대가야 순장체험 ◆녹색테마 생태관체험 등의 프로그램으로 많은 수의 관광객을 고령으로 불러들였다.축제 기간 동안 연계행사로 준비한 `악성 우륵 추모제`와 `대가야 왕릉제`, 실경뮤지컬 `가야금` 공연, 인형극 `가야금을 사랑한 달깨비` 등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지역의 문화유산을 관광과 효과적으로 연계시킨 고령군의 노력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어냈다. `대한민국 문화관광 우수축제 선정`과 `2017 올해의 관광도시 선정`은 그 사례라 할 수 있다.고령군청의 설명에 따르면 올해도 문화와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고령이 지닌 문화자산으로 대가야 문화융성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군의 다짐은 대가야역사문화발전위원회 운영과 군립 가야금연주단의 연주회 개최, 뮤지컬 등 문화공연의 확대와 대가야체험축제 자립기반 마련 등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대가야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노력도 고령군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다. 이를 위해 2018년을 목표로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대가야 종묘 건립사업과 대가야 시조의 어머니 정견모주와 이진아시왕 표준영정 제작사업을 펼치고 있다.올 한해는 외국과의 문화교류도 활발히 진행할 예정이다.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열리는 국제 현악기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다큐멘터리도 제작할 예정”이라는 게 고령군청 관계자의 설명. 여기에 고령군 청소년들이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를 방문해 문화적 감수성을 나누는 기회도 제공할 계획이다.문화융성과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도 고령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다. 향후 100년을 준비한다는 각오로 경제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고령군은 군민 4만 명, 군민소득 4만 달러 달성을 위한 `4040 프로젝트`를 세우고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는데 지혜를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 현재 가동 중인 동고령 일반산단, 열뫼 일반산단 등 기존의 5개 산업단지를 10개까지 늘려간다는 방침이다.`문화융성`과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분주하게 뛰는 고령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령이 이뤄낼 미래의 성과에 주목하고 있다.▲ 우륵의 영정.`대가야의 예술가` 우륵가야금 만든 한국의 3대 악성궁중음악 개혁에 큰 역할을 맡았던 조선의 박연, 빼어난 거문고 연주자였던 고구려의 왕산악과 더불어 한국예술사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우륵(于勒)은 고령군이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역사 인물이다.출생과 사망연도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서기 551년 제자들과 함께 신라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유추해볼 때 6세기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중국 악기인 쟁(箏)에서 영감을 받은 우륵은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작곡해 대가야가 `문화강국`으로 이름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행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가야금을 다루는 우륵의 기예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는 대가야의 국운이 위태롭게 기울던 무렵이었고, 이에 절망한 우륵은 아끼는 제자 몇몇과 함께 신라로 망명한다. 정치적 망명이 아닌, `문화적 망명`에 가까웠다.우륵의 감각과 높은 예술적 성취를 아꼈던 진흥왕은 신라 악사들이 가야금과 노래를 배울 수 있도록 도우라고 우륵에게 명한다. 지척에서 사라져가는 자신의 고국을 바라보며 타국 사람들에게 음악을 전수했던 우륵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를 상상해보면 그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어렵지 않게 전해져온다.우륵을 시기한 일부 신라 악사들은 “대가야의 음악은 음란하고 속되어 나라를 망쳤으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했지만, 진흥왕은 이런 목소리를 잠재우고 “사람의 심성을 곱게 하고, 세간의 바른 법도를 따르게 하는 것이 우륵의 연주”라며, 대가야의 음악을 신라의 궁중음악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진흥왕의 호방한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우륵이 태어난 곳은 `삼국사기`에 아주 짧게 언급된다. 이 때문에 출생지를 놓고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우륵은 우리 지역 사람”이라며 설전을 벌여왔다.이와 관련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고령읍 북쪽 금곡(琴曲)은 우륵이 여러 악공과 더불어 가야금을 연습한 곳`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간 고령군은 대가야읍에 우륵박물관(2006년 3월)을 건립하고 2014년에는 `악성 우륵의 꿈`이라는 체험축제를 열어 30여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으로 “우륵의 고향은 고령”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왔다. 또한, 군이 주최하거나 주관하는 `전국 우륵 가야금경연대회`와 `우륵, 금(琴)의 향연` 연주회도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전병휴·홍성식기자

201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