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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석주 이상룡과 임청각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 지 채 반년이 지나지 않은 1911년 정월 초닷새. 안동의 고성이씨 임청각 종가의 17대 종손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집안 누정인 군자정(君子亭)의 차디찬 마루바닥에 꼿꼿이 앉아 새벽을 맞았다. 이윽고 동녘으로 한 줄기 여명이 칠흑의 하늘을 가르자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몸을 일으켜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에 오른 석주는 조상의 신위 앞에 엎드려 마지막 인사를 올린 후, 위패를 감실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사당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삽을 들어 땅을 파고 위패를 묻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며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였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조상의 위패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내쳤다. 석주가 독립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길에 오르던 날 아침을 그려본 삽화이다. 1455년 세조의 찬탈에 분노하여 영산현감(靈山縣監) 자리를 내 던지고 경기도 광주로부터 안동으로 낙향한 고성이씨 12세손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 읍성 남문밖에 주거를 마련하고, 뒤이어 그의 셋째 아들 임청각(臨淸閣) 이명에 의해 낙동강변에 처음으로 터가 닦인 고성이씨 임청각 종가의 450여년 역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17대 종손의 손에 의해 그렇게 땅에 묻혔다.일제하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애는 몇 개의 변곡점들로 구성된다. 우선은 위정척사의 보수적인 세계관에 안주해 있던 주자학자로서의 삶이다.구한말 대부분의 유학자들처럼, 젊은 시절 석주 역시 신실한 한 사람의 주자학자로서 당시의 혼란은 유교적 가치가 쇠퇴한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각각 을미사변과 을사늑약으로 촉발된 1895년과 1905년 의병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1907년에는 가야산에 의병기지를 건설하는 일에 아예 발 벗고 나선 것은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이었다.그러나 의병기지 건설 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석주는 명분론에 입각한 주자학적 현실대응 방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강운동이라는 새로운 활동방식에 눈을 떠 계몽운동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일본의 강제병합 야욕이 현실화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주자학적 대응방식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양 서적들을 탐독하며 이른바 `신학(新學)`을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나갔다. 이 때 이루어진 신학 연구의 성과는 석주로 하여금 주자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뒤에 계몽운동의 한계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무장투쟁에 돌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마지막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매진한 무장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다. 경술국치로 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석주는 대안으로 무장투쟁을 통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선택하고 이를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일종의 군사정부에 해당하는 군정서(軍政曙)가 상해임시정부가 들어선 후에도 여전히 만주에 존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장투쟁을 중시한 석주의 그런 선택에 힘입은 바 크다. 이 시기 석주는 또한 러시아 혁명을 통해 구체화된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주목하고, 그것을 유학의 대동사회론과 접목시킴으로써 유교적 역사철학에 진보적인 역동성을 부여하기도 하였다.석주의 이와 같은 삶의 변곡점들을 관통하고 있는 정신은 한 마디로 유교를 기본토대로 하되, 만약 시대적 상황을 돌파해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동서와 고금을 불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혁신유림의 자세였다. 그리고 그 혁신이 지향하는 과녁은 나라의 독립이었다. 사당의 위패를 묻고 만주로 떠나기 닷새 전 신정(新正)에 친족들을 불러 송별하는 자리에서 쓴 `나라를 떠나며(去國吟)`라는 제목의 한시 속에도 이 점은 잘 드러나 있다.소중한 산하 삼천리 우리 강토유학의 예법 오백년을 지켜왔네문명이 무엇이길래 노회한 적 끌어 들였나까닭없는 꿈결에 온전한 나라 내동댕이쳐졌네온 대지에 그물 펼쳐진 것 이미 보았거늘어찌 영웅 남아가 죽음을 두려워하랴고향 동산에서 잘 살고 슬퍼하지들 말게나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함께 살지니그러나 이 시는 허언이 되고 말았다. 나라가 독립한 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함께 살겠다던 약속은 석주가 1932년 5월12일 중국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나라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유해를 고국에 싣고 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며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침으로써 지켜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주가 그렇게 바랐던 조국의 광복은 그로부터도 13년 뒤에야 이루어졌고, 그의 유해가 환국한 것은 그로부터도 또 45년이 더 지난 1990년이었다.석주에게는 외아들 준형(濬衡: 1875~1942)이 있었다. 준형은 부친 사후에 일제의 탄압이 만주국까지 뻗쳐오자 노모를 모시고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도 잠시 1942년 9월2일 67세 되던 생일 아침 일본이 동남아를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자 동맥을 끊어 자결했다. “하루를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를 더하는 것”이라는 유서를 남기고.이후 석주의 집안은 석주 자신을 비롯하여 두 동생과 외아들 그리고 사위, 조카 등 모두 9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석주의 증손자는 후손을 남기지 못하였다. 그 결과 21대 종손은 부득불 입후(立後: 대를 이을 종손을 양자로 들이는 일)를 통해 대를 이을 수밖에 없었다.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인 일이 없었고 글 동냥을 하지 않았으며 재물이 없어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는 이른바 `삼불차(三不借)`의 유서깊은 고성이씨 임청각 종가의 450여년의 전통이 문중 전체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과정에서 끊기고 만 것이다. 일신과 집안의 화복 이전에 나라와 공동체의 안위를 더 중시했던, 경북 종가문화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보여주는 전범이 아닐 수 없다. 끝/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2011-05-13

가볼만한 곳-안동 임청각

일제, 항일의 맥 끊으려 앞마당에 철로 가설 안동시 법흥동 안동댐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년·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선생의 고택이다.이곳은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한 일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용(用)자 형태의 임청각은 1515년 조선 양반들이 살았던 목조건물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건축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성 이씨 집안의 종택이기도 한 이 집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법흥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1500년대 초에 99칸의 대저택으로 조성됐으나 일본강점기인 1930년 후반에 중앙선 철도가 집 마당을 가로지르면서 50여칸으로 줄어드는 아픔을 겪었다.안채·사랑채·행랑채와 크고 작은 마당의 배치가 이채롭다. 임청각 현판 글씨는 퇴계 선생의 것이다.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 안엔 이현보·이항복 등의 시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집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국가원수)을 지낸 석주 이상룡 등 아홉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고 한다. 사당 건물이 있는데 위패를 모시진 않는다임청각 주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벽돌탑인 국보16호 안동 신세동 7층 전탑이 있으며 안동댐과 보조댐 사이의 아름다운 호수를 가로지르는 월영교가 볼만하다.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 신세동 7층 전탑은 1천년 넘게 풍상을 견디며 꿋꿋한 자태를 뽐내 왔지만, 일제가 불과 몇 미터 옆에 철길을 내는 바람에 70년 가까이 밤낮으로 소음과 진동에 시달리면서 급격한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벽돌로 된 탑을 전탑이라고 하는데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 전탑을 두고 우리나라 전탑의 시원과 조형미를 보려면 안동으로 가야한다”고 극찬하고 있다.전탑은 석탑과 달리 흙을 구워 벽돌로 만들어서 쌓은 탑을 말하는데, 탑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공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전탑이 석탑에 비해 그 수가 적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다리중간 팔각정과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안동호 속의 조명과 형형색색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대는 물안개 피어오르는 밤의 환상적인 데이트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다.고택체험과 함께 유교와 전통문화의 고장답게 안동은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관리하고 전시하는 21개의 박물관과 전시관이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특히 유물 없는 박물관으로 국내 첫 디지털박물관인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은 안동문화권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고 문화유산과 전통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또 바로 옆에 조성된 웅부공원은 옛 안동대도호부의 수문장 교대의식이 재연돼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안동민속박물관은 유교문화 중에서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인 평생의례와 생활문화인 의식주 생활, 학술과 제도, 수공업, 민간신앙 그리고 안동문화권의 다양한 민속놀이 등을 연출하고 있다.이외에도 안동댐과 해상촬영장, 월영공원, 물박물관, 공예문화전시관 등 다양한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1-05-13

⒂ 회헌 안향과 소수서원

영주 시내에서 순흥쪽으로 한적한 길을 달리다보면 맑은 시냇가에 울창한 소나무숲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개울 너머 일련의 고건물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이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은 1543년(중종 38) 이 지역 출신이자 고려말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처음 도입하여 한국 사상계의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회헌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아울러 유생교육을 겸할 목적으로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였다.이곳은 안향이 어린 시절 공부를 했던 숙수사(宿水寺) 터이기도 했다.이후 1548년(명종 3) 당시 풍기군수였던 퇴계 이황이 참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서원을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하여, 백운동서원에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이에 1550년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최초의 서원에 배향된 이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이라는 사실은 참 절묘한 인연인 것 같다. 또 이황이 서원을 널리 보급하고자 했던 것은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통해 후일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안향의 살았던 시기를 생각하면 이 역시 절묘하다. 올바른 정치를 행할 수 없을 때는 후진 양성에 힘써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안향은 그 삶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700년 전 안향의 삶을 통해 난세를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보자.안향은 1234년(고려 고종30) 흥주 평리촌 학교(鶴橋·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 옆의 본가에서 태어나 1305년(충렬왕31)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초명은 유(裕)였고, 훗날 향(珦)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문종의 휘가 그의 이름과 같았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조선시대에는 안유로 불리웠다.그가 태어났던 시기는 무신정권이 전성을 구가하던 때이며, 그가 과거에 급제했던 해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몽골의 본격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했던 1260년(원종1)이었다. 또 그의 관로는 매우 화려했고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몽골인 출신 권력자의 미움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었다. 그리고 재상이 된 뒤에는 `행동을 조심하여 감히 다투지 않았다`고 평가받았다. 원나라의 지나친 압박과 견제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고 있는 정치적 현실을 그대로 수긍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안향이 무사안일주의였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재상에 오르기 전 그는 매우 적극적인 관료였다. 1271년(원종12) 서도(西道)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청렴하다는 평을 받았고, 다시 내시원의 관료가 돼서는 내시원의 오래된 폐단을 혁파하였다. 또 1275년 상주판관에 임명되어 3년간 재직하면서 요신(妖神)을 받들고 군현을 횡행하며 관민(官民)을 현혹시키던 여자 무당 3명을 치죄하기도 하였고, 일본 원정을 위한 전함 건조·군량 저축, 가혹한 세금 징수 등으로 곤경에 처한 백성들을 소생시키기 위해 노력을 다하였다. 이를 보면 청렴을 바탕으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열전을 보면, `안향은 장중(莊重)하면서도 인자하니 사람들이 모두 경외하였다. 재상이 되었을 때 일을 도모하는 것과 판단력이 뛰어나 동료들이 순응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그런데 몽골 출신 관료나 그와 결탁한 관료들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원나라의 제후국으로 격하한 고려의 관료로서는, 몽골 출신 관료를 억제할 힘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마도 섣부른, 혹은 감정적인 대응은 화만 미칠뿐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현실에서 안향이 기대를 걸었던 것은 교육이었다.사실 안향 자신이 뛰어난 학자였다. 안향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하며, 과거 급제 후 비서성이나 한림원과 같은 문한 기관에 주로 임명되었다. 중견 관료되는 국자 사업으로 국학의 생도를 교육하는 위치에 있었다. 재상이 되어서는 집현전대학사나 감수국사와 같은 문한직을 겸직할 정도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리고 만년에는 항상 주희의 진영을 걸어두고 경모하였으며 마침내 호를 회헌이라고 할 정도로 주희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려고 하였다.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학문 연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후진 양성이었다. 그가 `국학을 발전시키고 현량한 후진을 양성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비록 일을 사직하고 집에 있어도 늘 교육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평가받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안향은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제력을 아낌없이 교육에 투자하였다. 1301년(충렬왕27) 국학(성균관)을 중건할 때 안향은 자신의 저택을 국가에 바치고 토지 30결과 남녀 노비 각 100인을 국학에 귀속시켰다. 조선 전기에 안향의 후손들이 성균관에 입학하였을 때 성균관 노비들이 `우리의 상전이다`라고 했다고 하며, 성균관 관원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후하게 대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안향이 국학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상당한 재산을 기부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가 지공거, 즉 과거 시관이었을 때 급제자 30여 인 모두에게 돈피이불을 선물하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성리학을 도입하였다. 1290년(충렬왕16) 3월 24일 충렬왕, 왕비, 세자가 원에서 돌아올 때 함께 귀국한 안향이 원의 대도(大都)에서 주자서를 필사하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하여 돌아왔다. 1304년(충렬왕30)에는 국학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섬학전을 확보하고, 그 돈의 일부로 중국에서 육경, 제자(諸子), 사서(史書)를 사와 국학에 비치하게 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개혁적인 후진들이 양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에 의해 원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또 고려의 묵은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나타날 수 있었다.이황이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훗날을 기약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던 것이나 안향이 현실 정치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도 후진 양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은 같은 맥락이었던 것이다. 원나라에 비해 열세일 수 밖에 없는 고려의 현실을 직시하고 안정된 내치를 도모하고 문풍을 진작시킴으로써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난세를 살아가는 지혜를 700년 전 안향 선생의 삶을 통해 다시 한 번 배우게 된다./이욱(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실장)

2011-05-06

가볼만한 곳 - 부석사

우리나라 最古의 목조건물 `무량수전` 있는 고찰 부석사로 유명한 영주는 둘러볼 곳과 먹을거리가 많아 풍성한 여행이 기대되는 곳이다. 순흥면 일대의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 선비촌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 ◆부석사영주의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는 고찰이다. 부석사 가는 길은 단상에 빠져들기 좋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구간이 짧아 아이들도 별 어려움 없이 일주문까지 걸을 수 있다.신라 문무왕 16년, 서기 676년 의상조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무량수전 외에도 국보급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무량수전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은 정겹게 느껴진다.부석사 외에도 영주에서 볼 만한 명소는 소수서원과 선비촌이 있다.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이며 선비촌은 경북의 유교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아이들에게 교과서 밖 학습장으로 손색없는 목적지다.주세붕 선생이 세운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소수서원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국가 공인 사립대학쯤으로 생각하면 된다.고려 말 유학자 안향을 제향하고 그의 정신을 잇기 위해 주세붕이 세운 사원이다. 퇴계 이황이 군수로 부임하면서 사액서원이 됐다.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인 회헌영정(국보 111호)은 소수서원의 자랑거리이다.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 지내기 위해 사묘를 세우고 그 이듬해 안향 선생을 봉안, 학사를 이건해 백운동서원이라 칭했고, 중종 39년에는 안축, 안보를 배향하고 명종 3년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명종 5년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의 시초가 됐다. 이후 인조 11년(1633년) 주세붕을 추향해 향사를 지내고 있다.소수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강당과 그 뒤로 직방재와 일신재, 동북쪽에는 학구재, 동쪽에는 지락재가 있다. 또 서쪽에는 서고와 고려 말에 그려진 안향 영정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가 안치된 문성공묘가 있다.우리나라의 대학자이자 선비로 이름이 높은 퇴계 이황(1501~1570)은 회헌 안향을 사모했다. 두 사람은 동방 성리학의 성현이다. 고려의 안향이 최초로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들여왔다면, 그 학문은 퇴계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2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안향의 선학에 대한 퇴계의 외경심과 사랑은 소수서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건물 배치의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에서 당시 학자들의 기품을 느끼게 한다. 서원 입구에는 숙수사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우뚝 서 있다. 유생의 터에 보존돼 있는 불교의 상징에서 당시 학자들의 너른 마음을 읽을 수 있다.모든 건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원 옆으로 낙동강의 작은 젖줄인 죽계수가 흐르고 개울 건너편 아담한 바위에는 주세붕이 직접 쓴 경(敬)자가 붉게 새겨져 있다.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의 첫 글자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소수서원의 교훈이자 학문의 목표이며 안향이 우리나라에 주자를 들여오고 전파한 의미이기도 하다.소수서원으로 들어가면 선비촌과 박물관을 함께 관람할 수 있다.옛날 가옥에서 전통생활 체험할 수 있는 민속촌◆선비촌선비촌은 전통가옥에서 숙박을 겸해 전통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민속촌.1만8천평 부지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과 아담한 초가 등 12채의 가옥을 비롯해 강학당, 물레방앗간, 대장간, 정자 등 모두 40채의 건물이 조선시대의 자연부락을 원형 그대로 재현했다. 선비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가옥은 넓은 대청 공간이 돋보이는 해우당 고택. 툇마루로 통하는 문을 열면 소백산의 국망봉과 연봉들이 풍경화처럼 한눈에 들어온다.소백산 정상인 비로봉이 정원처럼 보이는 두암고택과 인동 장씨 종가, 소박한 멋과 절제미가 뛰어난 중류층 가옥인 김상진 고택도 하룻밤 묵어가기에 좋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05-06

⒁수운 최제우와 용담정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국운의 쇠잔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서서히 어둠과 고통의 터널로 빠져들고 있었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어 감에 따라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가 붕괴되고, 잦은 `서양 오랑캐`(洋夷)의 위협에 두려움은 높아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척의 세도정치와 지배계층의 권력 다툼은 정점으로 치달았고, 삼정의 문란과 이를 틈탄 벼슬아치들의 탐학, 잇단 기근과 질병의 창궐은 백성들을 깊은 도탄의 수렁으로 빠뜨렸다. 1811년 홍경래의 난 이래 끊이지 않던 민중봉기가 1862년에 이르러 진주민란으로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과 고통에 따른 몸부림이었다.시대 도처에 넘쳐나는 고통과 모순은 경주 현곡 출생의 민감한 영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를 불러냈다. 6대조 이래 벼슬을 내지 못한 채 기울어져 가던 경주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었지만 학문에 몰두하지 못해 여의치 못했고, 변변한 경제적 기반도 없었다. 기울어져 가던 가세는 당시 나라의 형편을 닮아있었고, 그의 불우함과 고뇌는 당대 백성들의 고통과 둘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호구지책으로 나선 떠돌이 장사꾼 생활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수많은 민초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고통에 눈뜨게 했다. 이로써 그는 개인적 차원의 아픔을 넘어서 시대를 앓게 된 것이다.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얻은 결론은 혼란한 사회와 불안과 공포로 가득한 사람들의 마음을 구하는 길은 하늘의 뜻[天命]`을 깨닫고 따르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천명을 찾아가는 구도의 걸음은 1856년 울산 처가살이 시절부터 1859년 10월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고향 구미산 용담정에서의 수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찾아 받들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은 결국 1860년 4월 5일의 절대적인 종교체험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늘에 정성을 드리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하늘의 소리를 듣는 신비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체험은 세상을 구할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으로 이어졌고, 이후 1년에 걸쳐 그것은 말과 행동으로 모습을 이루게 된다. 동학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동학의 포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해 오고 동학이 점차 세력을 형성해 가자 정부와 지방의 유림 등 보수 기득권 세력들의 견제와 탄압이 찾아왔다. 그들이 보기에 동학은 본질상 서학과 동일하며 유학의 가르침을 어지럽히는 이단이었던 것이다. 이에 최제우는 1861년 호남지역으로 피신했다 다음해 다시 경주로 돌아왔는데, 이 시기 동안`논학문(學文)`·`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어 동학의 교리를 체계화한다. 이후 최제우는 1860년의 깨달음 이래 채 4년이 안 되어 체포되어, 이듬해 3월 대구감영에서 `사특한 가르침으로 올바른 도리를 해쳤다`(邪道正)는 죄목으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진다.`동학`은 동쪽의 진리라는 의미이다. 동학이라고 이름한 것은 서양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적 토대인 서학에 맞서는 동쪽, 곧 이 땅의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깨달은 진리를 담은 4편의 한문체 논설과 9편의 한글가사는 사후 해월 최시형에 의해 동학의 기본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로 편찬되어 세상에 나왔다.동학 경전은 수운 최제우라는 한 영혼이 시대의 어둠과 고통을 깨치려는 간절한 염원으로 품어낸 사유의 산물이다. 그것은 모순의 현실에 대한 극복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혁적이다. 그런데, 현실을 넘어서는 변혁의 가르침이라 해도 현재의 말과 생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최제우의 동학은 고립적이거나 평지돌출의 사상이 아니라 그가 접했던 다양한 사상들의 창조적 절충이고 변용(正)의 산물이다. 즉, 그는 유·불·선과 기타 민간신앙 등 전통사상의 계승과 창조를 통해 변혁의 길을 찾았던 것이다.전통사상 중에서도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유학, 곧 주자학이다. 그런데 당시 주자학은 비록 영향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에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배사상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제우 자신 역시 양반 집안에 나고 자랐기 때문에 주자학적인 사유형식에 훈습되어 있었다. 따라서 동학의 가르침은 많은 부분에서 주자학적 사유에 뿌리를 둔 논리 형식이나 개념과 명제를 매개로 해 전달되었다.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동학이 전통사상인 유학의 지향이나 사유방식을 적지 않게 공유하고 있다면, 동학의 이론적 창조성과 실천적 혁신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유학자들과 달리 동학 창도자 최제우가 당시 민중들의 고통과 시대의 어둠에 대해 관조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아픔으로 삼아 대면하고 타개하려 했기 때문이다.시대의 고통과 어둠은 더 이상 `누천년에 운이 다한` 유학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현실은 한가한 이론적 분석이 아니라 시대의 고통과 어둠에 맞서고 행동하는 결단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동학은 유학에 의거하되 유학을 넘어서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서`에 대적하는 `동`의 진리, 옛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 모순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변혁의 의지를 담고 있다.우리 사상사를 돌아볼 때 동학은 이 땅에서 거둔 창조적인 사상의 목록에 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성취 중의 하나이다. 동학에서 우리는 유학이 기획하고 지향했지만 현실적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상의 궁극적 실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동학은 유학이 봉건사회의 현실적 한계로 인해 이론적 천명이나 불완전한 구현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인간존중과 만인평등 사상을 실현해 낸 것이다. 그것은 최제우라는 시대적 아픔에 동참한 인물의 강렬한 열망과 사상적 반추를 통해 유학을 넘어서는 사상적 개벽과 시대의 어둠을 깨치는 실천적 개벽을 이루어내었기에 가능했다.우리가 동학을 주목하는 것은 그 속에서 자유, 평등, 인권 등 근대적 이념의 자생적 원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학은 부자유스럽고 차별과 부조리한 억압이 넘쳐나는 현실에 맞서 사람은 하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의 인간관을 천명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절대적 자유의 존재이고 평등하고 고귀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동학은 중세의 어둠을 깨치고 왕조의 끝자락에 팽배한 불안을 넘어서서 근대를 향한 빛과 희망을 주었으며 시대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었던 것이다./박경환(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2011-04-29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 `聖化門` 눈길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龜尾山) 자락에 있는 용담정(龍潭亭)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도를 얻어 가르침을 펼친 천도교의 발상지다. 용담정은 대신사가 1864년 이단으로 몰려 참형당한 후 폐허로 남아 있다 1914년 복구됐다.성지 입구에 이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는 `성화문`(聖化門)의 친필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여름과 겨울 각각 한달씩 일반인 단체에게 개방되는 수도원에는 연간 500여명 안팎이 수련을 위해 찾는다.용담정 아래 용담수도원을 세우고 주변 일대를 공원처럼 단장했다.주차장에서 바로 정문인 포덕문(布德門)이 보인다. `포덕`은 한울님의 덕을 세상에 편다는 뜻. 문짝은 없이 네 개의 석주를 일직선상에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기와지붕을 얹었다. 출입구를 세 칸으로 나눈 뜻은 천도교 세 가지 기본 교리를 상징하겠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 `사람을 한울님같이 섬기자`는 사인여천(事人如天), `모든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이다.포덕문을 들어서 300m쯤 숲길을 오르면 오른편에 용담수도원이 보인다.정면 3칸, 측면 8칸의 팔작 기와지붕으로 평범한 전통 한옥 양식이지만 콘크리트 건물이다.수도원 외벽이 모두 백색이다. 이는 한울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안정과 평화를 나타내는 한울님의 정적인 마음이다.다시 100m쯤 오르면 성화문(聖化門)이 나온다.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하는 문이다. 전통 한옥의 목조 3칸 대문인데, 가운데 문짝에 궁을(弓乙)의 문양이 선명하다. 궁을은 수운 대신사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영부(靈符)를 형상화한 것이다. 마음 `心`자를 표현한 것인데, 모양이 태극(太極) 같기도 하고 활 `궁(弓)` 자를 나란히 놓은 것 같기도 하다.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문득 길이 10여m의 평범한 석조 다리 용담교가 나타난다. 그 너머에 용담정이 있다.정면 5칸 측면 3칸의 아담한 크기로 용담정은 있다. 별 특징 없는 기와지붕의 전통 목조 한옥.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에 대신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정 양 옆에는 궁을 영부가 또한 모셔져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04-29

⒀영남 퇴계학맥의 숨은 주역, 정부인 장씨

기호학파와 함께 조선후기의 학술사와 정치사를 양분했던 영남 퇴계학파는 내부적으로 두 갈래의 학맥으로 분화된다. 서애 류성룡을 계승하는 서애학맥과 학봉 김성일을 이어받는 학봉학맥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학봉계는 학봉에서 시작해 경당 장흥효-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손재 남한조-대산 이상정-정재 유치명-서산 김흥락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형성한다. 여기서 경당에서 갈암으로 이어지는 초기학맥은 일종의 가학(家學)적 연원관계를 이룸으로써 학봉학맥이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했다.이 가학의 성격은 석계가 경당의 사위이고 갈암이 석계의 아들이라는, 초기계보 사이에 존재하는 혈연적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이 계보는 자연스럽게 이 관계를 연결시키는 한 여인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그 여인을 매개로 경당은 아버지이고 석계는 남편이며, 갈암은 아들인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남 퇴계학파의 중심적인 줄기 가운데 하나인 학봉학맥의 초석 형성사의 숨은 주역, 그가 바로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이다.정부인의 이름은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이다.`정부인`은 아들인 갈암이 뒤에 이조판서를 역임함으로써 추증받은 품계이다.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인 1958년 11월 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경당 장흥효와 안동권씨 사이에서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났다.경당은 영남 퇴계학파의 초기학맥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통상 퇴계문하의 고제로 월천 조목과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그리고 한강 정구 네 사람을 꼽는다. 경당은 이들 가운데 월천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에게 모두 배움으로써 퇴계학의 적통을 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호를 퇴계철학의 중심개념인 `경(敬)`에서 따와 `경당(敬堂)`이라 한 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정부인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학문과 덕성에 대한 소양을 익혔다. 한 번은 경당이 제자들에게 중국 송나라의 사상가 소강절이 주장한 천지자연의 변화원리인 원회운세(元會運勢)의 이치에 대해 말하였으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부인이 그 수치를 정확히 계산해 대답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정부인은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도 남다른 성취를 보여 아들을 군대에 보낸 이웃집 노파의 애끓는 모정을 읊은 학발시(鶴髮詩)를 비롯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소중함을 노래한 경신음(敬身吟), 보슬비의 운치를 운율감 있게 노래한 소소음(蕭蕭吟), 성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노래한 성인음(聖人吟) 등의 시를 남겼다.이 가운데 성인음은 다음에서 보듯이 마치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뵈”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퇴계의 도산십이곡 가운데 제9곡을 연상시킬 정도로 성인의 자취를 배우고자 하는 여군자(女君子)의 열의를 엿보인다.성인의 때에 태어나지 못해성인의 모습 뵙진 못했으나성인의 말씀은 들을 수 있으니성인의 마음씀은 족히 알겠네정부인은 19세 되던 해인 1617년 영해 나랏골에 살던 8살 위인 석계 이시명에게 시집을 갔다. 당시 석계는 이태 전 부인을 사별하고 슬하에 1남 1녀를 둔 상태였다. 때문에 정부인으로서는 석계와의 결혼이 받아들이기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부인은 결혼 후 전부인의 소생을 친자식보다 더 살뜰히 키워 여섯 살이던 아들 상일을 매일 5리나 떨어져 있는 선생의 집에 업고 다니며 글을 가르쳤고, 나중에 자신의 소생들이 무엇을 물어오면 반드시 형에게 물어보게 함으로써 집안의 위계를 세웠다. 나랏골 재령이씨 충효당 가문을 연 시아버지 운악(雲嶽) 이함(李涵)이 이를 보고 자신의 손자는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아온 것이라고 이웃들에게 말했을 정도였다.전 부인 소생을 포함해 정부인은 슬하에 모두 7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웠는데, 그 가운데 둘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셋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넷째 항재(恒齋) 이숭일(李崇逸)은 학문적으로도 큰 성취를 이루어 영남 퇴계학맥의 중심인물들로 활약하였다.특히 갈암은 영남남인의 영수로서 당시 정적 관계에 있던 서인을 상대로 정국을 주도함으로써 영남학파의 정치적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갈암은 정부인의 생애를 기록한 글에서 어머니는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고, 60년 가까이 아버지와 살면서 늘 받들어 공경하고 서로 대하기를 손님과 같이 하였으며 매사를 반드시 아버지께 여쭌 뒤에 행하였다고 회고하였다.정부인은 이처럼 시집살이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친정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시집 온 후 1년에 한 번은 문안을 갔고 어머니와 사별한 후 아버지 경당 선생이 재혼해 3남 1녀를 두고 돌아가시자 어린 동생들과 계모를 아예 시집 인근으로 이주시켜 보살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주도 모셔와 제사를 거르게 하지 않음으로써 친정의 가계가 보존되도록 힘을 기울였다.정부인의 부덕(婦德)은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라는 책자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이 책은 정부인이 노년에 자신의 살림지혜를 종합하여 모두 146종의 음식조리법을 소개한 것으로, 영남 양반가의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그런데 이 책 속에는 영남 양반가의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전통이 스며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음식디미방`과 함께 영남 양반가의 음식문화를 오늘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조리서로 `수운잡방(需雲雜方)`이 있다. 안동 예안에 세거하던 광삼김씨 예안파의 김유(綏)가 지은 것인데, 석계의 첫 부인이 바로 이 김유의 증손녀이다. 따라서 `음식디미방` 속에는 정부인의 친정인 안동장씨 경당문중과 시집인 재령이씨 충효당 그리고 광산김씨 예안파 이 세 가문의 음식문화가 고스란히 집대성되어 있는 셈이다.그야말로 영남의 음식문화를 오늘까지 전하는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2011-04-22

가볼만한 곳-영양군 두들마을

훌륭한 학자·독립운동가·소설가 이문열 배출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院里里) 두들마을은 인조 18년(1640)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1674) 선생께서 터를 잡으셨으며 4자 숭일(恒齋 李嵩逸)이 선업(先業)을 잇고, 방후손(傍後孫)들이 더해져 재령이씨(載李氏) 집성촌(集姓村)이 됐다. 마을 이름은 마을이 언덕(두들) 위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것이다.이곳은 일찍이 크게 문풍(文風)이 일었던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조선시대에는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과 밀암 이재(密菴 李栽) 등이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문을 계승·발전시켜 후학에게 널리 했다. 근세에는 의병대장을 지낸 내산 이현규(奈山 李鉉圭), 유림대표로 파리 장서사건에 가담한 운서 이돈호(雲西 李暾浩)와 이명호(李命浩), 이상호(李尙浩) 등 독립 유공자와 이병각(李秉珏), 이병철(李秉哲) 등 항일 시인이 이곳 출신이다.이 마을에는 모든 여성에게 길이 사표(師表)가 될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의 자녀교육에 대한 전범(典範)과 부덕(婦德)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 곳은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의 고향으로 그의 문학세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펼쳐진 무대이기도 하다.◆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정부인 장씨(貞夫人 張氏:1598~1680), 선조 31년 경북 안동 금계리(溪里)에서 태어나서 숙종 6년 83세를 일기로 영양 석보촌(石保村)에서 타계했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됐다.정부인 장씨는 왜란으로 전국이 쑥대밭이 돼 있던 정유재란 다음 해에 태어났으므로, 이후 광해군 통치에 뒤이은 인조반정(1623년)이라는 정치적·사상적 혼란기를 겪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636)이라는 이전 역사에 없었던 치욕적인 국가적 수모까지 겪으면서 살아간 세대에 속했다.◆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정부인 안동장씨의 학문과 예술, 자녀교육에 대한 전범(典範)을 기리기 위해 1989년 10월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朴永錫)이 짓고, 장상조(張相朝)가 썼다. 이 유적비의 배면(背面)에는 부인의 대표적인 한시(漢詩 `소소음(蕭蕭吟)`이 각인돼 있다.◆석계고택(石溪古宅)안동 대명동(大明洞)에서 석계(石溪)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숙종 1년(1675) 4남 숭일(嵩逸)이 모친 정부인 안동장씨를 모시고 고향에 돌아와 선인의 옛터에 집을 중수하고 당호(堂號)를 항재(恒齋)라 했다.석계고택은 일자형의 사랑채와 안채를 흙담으로 막아 허실감(虛失感)을 메우고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고, 사랑채는 후면에 감실(龕室)을 설치한 삼량가(三樑架)의 구조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로 지정돼 있으며, 32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집이다.◆광산문학연구소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해 소설가 이문열씨의 고향인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에 광산문학연구소를 건립하고 2001년 5월12일 개소식을 가졌다. 이 연구소가 들어선 석보면 원리리 두들 마을은 재령이씨의 집성촌으로 2000년 10월 전통문화마을로 지정된 마을로서 민속자료 제91호인 석계고택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와 정부인 안동 장씨의 유적비등이 있는 유서깊은 고장이며, 두들마을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 등의 배경 장소로도 유명하다.◆석천서당(石川書堂)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선생이 영해부에서 석보로 이주해 초당(草堂)을 지어 유생과 아들들을 강도(講道)한 곳으로 영조 46년 (1771) 중수(重修) 하고, 당호를 석천서당(石川書堂)이라 했다. 그 후 고종 28년(1891)에 중건(重建)해 현재에 이르며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79호로 지정돼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04-22

⑫ 서애 류성룡과 충효당

임진왜란이 종전을 향해 막바지로 치닫던 1598년 11월19일, 7년여 전쟁 기간 동안 만 5년을 영의정으로 봉직하면서 전쟁을 진두지휘하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파직되었다.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서애에 의해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어 전쟁 기간 내내 조국의 바다를 지켜냈던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일본군 전함 300여척을 격파하고 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며 전사한 바로 그날이었다.서애의 파직은 정치적 반대파의 탄핵이 빌미였다. 종전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반대파들은 서애가 국정을 책임지는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일본과의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잘못 이끌었다고 비판하였다. 서애의 공을 거론하며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였던 선조도 거듭된 탄핵에 마침내 굴복하여 파직을 단행하고, 이어 12월6일에는 모든 관작까지 삭탈하는 추가 조치를 취하였다. 삭탈관작의 수모를 당한 서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이듬해 2월 고향 하회마을로 낙향하였다. 이후 반대 여론이 가라앉자 선조는 1601년 서애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전쟁중의 공훈을 기려 1603년에 풍원부원군, 1604년에 호성공신에 연이어 임명하였다.하지만 서애는 그때마다 직위를 사양하였고 공신상을 그리기 위해 선조가 보낸 화공도 돌려보냈다. 대신 서애가 고향 하회에 은거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일은 임진왜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 기록에서 서애는 승전보다 패전의 경험을 더 담아내려 노력하였고, 특히 지휘자들의 잘잘못을 소상히 기술하는 데 공을 들였다. 기록의 목적이 승전의 헹가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서애는 저술의 이름도 `지난 일을 반성하고 경계시켜 뒷날의 우환을 예방하기 위한 기록`이라는 뜻에서 `징비록(懲毖錄)`이라고 명명하였다. 나라와 백성들에 대한 서애의 사랑이 물씬 묻어나는, 임진왜란에 대한 가장 완벽한 기록인 국보 132호 `징비록`이 탄생하는 배경이다.서애 류성룡은 1542년 의성 사촌마을에 있는 외가에서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명한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이 형이다. 유년시절을 하회에서 주로 보낸 서애는 21세 되던 해 아버지의 권유로 도산으로 퇴계 이황을 찾아가 문하에 들었다. 당시 서애를 가르쳤던 퇴계는 그의 사람됨을 보고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후 1566년 25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1570년에는 율곡 이이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에 관료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로서, 뛰어난 관료에게만 내리는 특전이었다. 이후 홍문관수찬, 이조정랑, 도승지, 경상감사, 대사헌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두 해 전인 1590년에 우의정에 올랐고 그 이듬해에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형조정랑으로 있던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하고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발탁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592년 4월 운명의 전쟁인 임진왜란을 맞는다.1592년 4월14일 부산포 공격을 시발로 조선에 발을 디딘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4월30일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3일만인 5월2일 개성에 도착한 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영의정인 이산해를 파직하고 서애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서애 역시 좌의정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조정의 여론에 밀려 임명 당일 저녁 곧바로 파직하였다. 하지만 서애는 이에 개의치 않고 풍전등화에 직면한 나라를 구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전세가 계속 불리하게 전개되자 선조의 중국 망명을 거론하는 조정에 대해 어가가 한 발짝이라도 이 땅을 벗어나게 되면 조선은 더 이상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며 반대한 것도 그이고, 냉철한 정세 판단을 토대로 임금의 피난지를 함경도가 아닌 평안도로 결정하여 결과적으로 선조를 무사하게 한 것도 그였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며 구원병 파견을 성사시킨 것도 그였다.이와 같은 활약에 힘입어 1592년 12월에 평안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비상시국에 중앙에서 지방에 파견하는 최고 군령권자가 된 것이다. 이어 충청, 전라, 경상 삼도 도체찰사를 역임한 서애는 1593년 10월 영의정에 다시 임명됨으로써 전쟁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1598년 11월19일 반대파의 탄핵으로 물러날 때까지 서애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전쟁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이런 점에서 임진왜란은 곧 류성룡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서애는 이 과정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두고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고 평했던 스승 퇴계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늘이 내린 재상`으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수행해냈던 것이다.서애는 효성도 뛰어나 관직생활 틈틈이 노모를 봉양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겸암과 형제간 우대도 남달랐다. 서애가 평생 추구한 가치는 이처럼 가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는 그가 죽음 얼마 앞두고 자손들에게 남겼다는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숲 속엔 새 소리 그치지 않고문 밖엔 쿵쿵 나무 찍는 소리죽고 사는 일 또한 자연의 이치이나평생 부끄러운 일 많아 한스럽네권하노니, 자손들아 반드시 삼갈지니충효 외에 힘 쏟을 일 따로 없음을세계문화유산인 안동 하회마을의 서애종택에 들어서면 사랑채 대청마루 위에 `충효당(忠孝堂)`이라는 당호가 예스러운 서체로 방문객을 맞으며 서애 선생의 그런 가르침을 오늘에 되새기게 한다. 젊어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 학문을 닦던 원지정사와 징비록을 집필한 장소인 옥연정사 그리고 위패가 모셔져 있는 인근의 병산서원도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현장들이다./박원재(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2011-04-15

민속 전통·건축물 잘 보존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한 풍산 유씨(柳氏)의 씨족마을이다.하회마을은 산과 강이 `S`자 모양으로 어우러져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이라 한다.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모습을 띠고 있다. 또 행주형(行舟形)이라 해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는다.유성룡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의 피해도 없어서 전래의 유습이 잘 보존돼 있다. 허씨터전에, 안씨 문전에, 유씨 배판이라는 말대로 최초의 마을 형성은 허씨들이 이룩해 하회탈 제작자도 허도령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허씨들이 벌초를 한다고 한다.화천(花川)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해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댁(北村宅),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南村宅)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유씨들이, 변두리에는 각성(各姓)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2개의 문화가 병존한다.지금까지 보물이나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은 양진당(보물 306), 충효당(보물 414), 북촌댁(중요민속자료 84), 원지정사(遠志精舍:중요민속자료 85), 빈연정사(賓淵精舍:중요민속자료 86), 유시주가옥(柳時柱家屋:중요민속자료 87), 옥연정사(玉淵精舍:중요민속자료 88), 겸암정사(謙菴精舍:중요민속자료 89), 남촌댁(중요민속자료 90), 주일재(主一齋:중요민속자료 91), 하동고택(河東古宅:중요민속자료 177) 등이다.이 마을에는 충효당과 양진당이 대표적 종가로 두 기둥을 이루고 있다. 양진당·충효당·남촌댁·북촌댁 등 큰 가옥들은 사랑채나 별당채를 측면으로 연결하거나 뒤뜰에 따로 배치하는 등 발달된 주거 구조를 보이고, 장대한 몸채·사랑채·많은 곳간·행랑채가 공통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특히 사랑방·서실·대청·별당과 같은 문화적 공간을 지니는 점은,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일반 서민들이 소유한 최소한의 주거 공간과는 확연하게 구별된다.또 이 마을에는 남촌댁과 북촌댁이 반가의 두 기둥으로 버티고 서 상하를 어우러지게 한다. 그뿐이랴, 화천서원과 병산서원이 또한 두 서원으로 학문적 기둥을 이루고 있다. 옥연정사와 겸암정사가 서로 교류하며 마을의 기둥으로 자리 잡고 있다.병산서원은 서애가 후학을 길러내는 도량으로 삼았다. 차경(借景), 경치를 빌려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말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풍절벽과 낙동강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은 지금에 와서도 한번쯤 다녀가지 않으면 건축학도라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지금도 병산서원에서는 수시로 학회가 열리고 학술토론이 벌어지는 경학장이 된다. 서애의 학문과 사상, 우국충정의 뜨거운 혼이 식지 않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학자들이 몰려들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04-15

경북의 정신문화를 찾아서 ⑪ 회재 이언적과 양동마을

`실천적 주자학` 영남학파의 주춧돌을 놓은 청백리 지난 해 여름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의 원래 이름은 양좌리(良佐里)이다. 양월리(楊月里) 왼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처음에는 `양좌(楊左)`라 했는데, 뒤에 어진 인물들이 많이 나와 `양좌(良佐)`로 바꿔 불렀다고 전한다.조선시대 양동이 배출한 어진 신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있다. 외삼촌과 조카 사이인 이 두 사람은 양동마을을 양분하고 있는 대성인 월성손씨와 여강이씨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특히 이 가운데 회재는 조선유학사의 첫 번째 논쟁으로 주목받는 `무극(無極)·태극(太極)` 논변을 통해 당시 학술적으로 뿌리를 내리던 주자학의 실천적 성격을 명확히 함으로써 영남학파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조선유학사 첫 논쟁 `무극·태극` 논변으로 유명휼륭한 철학자에 강직한 선비·효 실천한 군자회재는 1491년 11월25일 외가인 경주 양동의 월성손씨 대종가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다. 10여세를 넘기면서 외삼촌인 우재에게 글을 배우며 차츰 주자학에 대한 소양을 쌓기 시작하여 24세 때 문과에 급제했다. 급제 이듬해 고향인 경주에서 국립학교 교수에 해당하는 주학교관(州學敎官)을 지내면서 주자학에 대한 탐구에 매진했는데,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와의 유명한 무극·태극 논변은 이처럼 학문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젊은 시기인 27세 때 이루어졌다.주자학에서 `리`는 모든 만물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본이치이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근본이치인 `사람의 리`가 있기 때문이며, 대나무가 다른 나무와 구분되는 것 역시 대나무를 대나무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대나무의 리` 때문이다. 요컨대, 어떤 사물을 그 사물답게 하는 이치가 곧 `리`인 것이다. 태극은 이런 모든 사물의 개별적 이치들의 근원이 되는 궁극의 이치를 가리킨다.`무극·태극` 논변의 핵심은 이러한 태극의 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망기당은 태극은 모든 개별적인 `리`의 근본에 해당하기 때문에 초월적이며 고차원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태극인 `리`를 체득하기 위한 공부 역시 마음의 본자리를 중시하는 내면 공부를 통해야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다.하지만 회재는 망기당의 이런 생각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이치를 깨우칠 것을 요청하는 주자학의 근본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라 여겼다.회재에 따르면, 세계의 궁극적 이치인 태극은 초월적이며 고차원적인 것 아니라 사람다움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일상들을 통해 구현된다. 세상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답고 신하답고 부모답고 자식답고자 하는 우리들의 도덕적 행위 하나하나 속에 태극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를 체득하기 위해서는 내면 공부에만 집중하면 안 되고 `다움`을 구현하려는 일상의 구체적인 도덕적 행위들을 병행해야 한다. `리`에 대한 회재의 이러한 입장은 뒤에 후배인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리`의 능동성을 중시하는 영남학파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이 때문에 퇴계는 무극·태극 논변에 비친 회재의 입장을 유학적 진리의 참모습을 밝히고 거짓된 학설을 물리친 쾌거라고 높이 평가했다.회재는 철학자로서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훌륭한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옳음을 위해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선비였고, 집이 매우 가난하여 식솔이 굶주릴 때도 있었다고 명종실록의 졸기(卒記)가 전할 정도로 청렴했던 청백리였으며, 모친에 대한 효를 다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몸소 실천한 군자였다.40세 때 사간원의 사간으로 있으면서 당시 국정을 농단하던 김안로(安老)가 세자의 스승에 임명되려 하자 그가 소인(小人)임을 들어 반대하였는데, 이 일로 김안로 추종자들의 미움을 사 벼슬이 좌천됐다. 하지만 그런 뒤에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아 결국은 탄핵을 받고 42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회재는 옥산(玉山) 자락에 독락당(獨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오직 학문과 수양에만 매진했다.이후 김안로의 실각으로 47세에 다시 벼슬에 나아간 회재는 홍문관제학과 경상도관찰사, 의정부좌찬성 등의 요직을 거치며 바른 정치를 위해 노력했다.그러나 중종 사후 이른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권력투쟁으로 빚어진 어수선한 정국은 올바른 정치를 구현하려는 그의 노력을 좌절시켰다. 그 결과 양재역 벽서사건의 여파로 윤원형 일파에 의해 1547년 관직이 삭탈되고 평안도 강계로 귀양가는 비운을 맞는다. 회재는 귀양지에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진했는데, 현재 전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기에 저술된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학문적 성취와 달리 회재는 귀양지에서 7년을 보내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553년 11월23일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그러나 회재의 인물됨은 사후에 바로 평가받아 1560년 명종에 의해 관직을 복권됐다.이어 1568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받고 명종의 묘정에 배향됐으며, 1610년에는 마침내 문묘(文廟)에 종사됨으로써 역사적 평가에 마침표를 찍었다./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회재 흔적 어린 향단과 무첨당회재는 효자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중종이 병환중인 노모를 모실 수 있도록 건물을 하사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이다. 향단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지금도 양동마을 어귀에 서서 회재의 효성을 후대에 전한다. 양동마을에는 향단과 함께 회재의 손자인 이의윤(李宜潤: 1564 ~ 1597)이 할아버지의 학덕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는 삶은 살지않겠다는 뜻에서 당호를 정했다는 종택 무첨당이 있어 회재의 숨결을 후세에 전한다. 이웃 안강에 있는 옥산서원과 독락당 역시 회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유적이다.

2011-04-08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

한국 전통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500여년 역사 자랑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민속마을.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손(孫), 이(李) 양성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 마을이다. 2010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984년 12월24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됐다.여강이씨의 문중에서 1560년경에 세웠으나 화재로 소실돼 1917년경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해 양반가옥과 초가 160호가 집중돼 있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의 양가문에 의해 형성된 토성마을로 손소와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해 명공(名公)과 석학을 많이 배출했다.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이곳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해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 기와집과 이를 에워싸고 있는 고즈넉한 110여호의 초가로 이뤄져 있다.양동마을은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져 있으며 와가와 초가 등이 한 폭의 동양화다.부채 살 같이 펼쳐지는 한옥의 멋. 마치 한복의 고운 선을 연상케 하는 담장들과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집들의 조화는 가장 한국적인 멋스러움이다. 싸리문이 열리고 누군가 반가이 맞아 줄 것 같은 고향집 같은 온화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이 초가집에서부터 물봉동산까지는 편안하며 여유로운 길이다.코스별 언덕위에서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사진 촬영 인기장소가 여러 군데 있다. 고목아래 보이는 기와집 옆 초가들은 옛날 기와집에 살던 양반들이 거느린 소작농이 살았던 집이라 한다.양동마을은 다른 여행지에서 느끼는 북적거림 없이 때 묻지 않은 마을풍경과 낮은 토담 길 사이를 걸으며 긴 역사의 향기를 넉넉하게 감상할 수 있다.최근 유네스코 등재 이후 다양한 체험코스와 유익한 유교 전통문화와 관습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 있어 역사여행을 겸한 가족여행지로 로 최적지다.사전에 마을의 배치와 답사 코스를 파악하고 문화재의 소재를 확인한 후 답사하는 것이 좋다. 단, 마을을 둘러볼 때는 집안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으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해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주변에 이언적의 낙향지인 독락당과 장기갑등대박물관, 감포항, 동해 등의 관광지가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