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1> 한반도의 방향키, 호미곶 새천년길 /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한반도 꼬리 따라 대보~구만리 `새천년길` 2010년 7월 국토해양부는 우리나라 서해, 남해, 동해를 거슬러 아름다운 해안 경관과 지리적 의미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대한민국 해안누리길`을 선정하고 도보여행기`바다를 걷다, 해안누리길(도서출판 생각의 나무)`를 발간, 적극 홍보에 나섰다. 총 52개 구간 중 하나인 `호미곶 새천년길`은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대보1리 버스정류장부터 구만리 구봉횟집에 이르는 약 5km 해안길이다. 한반도를 호랑이의 형상으로 볼 때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하여 붙은 이름 호미곶, 꼬리는 방향키 역할을 하며 꼬리에 힘을 줘야 추진력이 생긴다는 의미를 되뇌며 걷는 이 길에는 내내 동해의 힘찬 파도가 동행한다. 구룡포를 지나 대보1리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해송이 있다. 휘어지고 틀어진 그의 몸은 “내 밥 먹고 구만 허릿등 바람 쐬지마라”는 말이 무색치 않게 이곳이 바람 큰 세상임을 말해준다. KBS방송국 송신소와 호미곶면사무소가 있는 언덕을 허릿등이라 하는데 벌판에 대양(大洋)을 북향(北向)해 노출된 지역이라 한풍(寒風)은 물론 샛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곳이라 생긴 말이다. `봄 샛바람에 목장 말 얼어 죽는다` 는 속담 또한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하니 가히 그 바람의 세기를 가늠하고도 남는다.대일수산과 극동수산을 지나면 멀리 호미곶등대가 눈에 들어온다. 호미곶등대는 높이 26.4m, 둘레는 밑부분이 24m, 윗부분이 17m로 전국 최대 규모이다. 1908년 4월 11일에 착공하여 11월 19일에 준공하고 12월 20일에 점등하였으니 100년이 넘는 셈이다. 건립 당시 등대의 명칭은 동외곶등대(冬外燈臺)였으나 1934년 장기갑등대(長기甲燈臺)로 변경됐고 1995년 장기곶등대(長?燈臺)로 2002년 2월 현재의 호미곶등대(虎尾燈臺)로 변경되었다. 등탑 내 천정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양인 오얏꽃(李花文)이 새겨져 있고 출입문과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 상부는 돔형 지붕 형태에 8각형 평면이 받치고 있으며 하부로 갈수록 점차 넓어진다. 등대 옆에는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를 비롯해 항로표지용품 및 해양관련 자료를 다량 소장하고 있으며 해양수산홍보관과 수상전시장, 야외전시장을 갖추고 있어 학생들의 해양관련 학습장으로도 인기다.호미곶광장은 등대 외에도 볼거리가 많아 휴식겸 둘러보기에 좋다. 바다와 육지에서 서로 마주보게 설치하여 화합과 상생의 의미를 담은 `상생의 손`과 변산반도 천년대 마지막 햇빛, 피지섬 새천년 첫 햇빛, 그리고 이곳 호미곶 새천년 첫 햇빛 등 세 개의 빛이 합화되어 안치된 불씨는 각종 국제대회 성화의 씨불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우리고장의 해와 달 설화의 주인공인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금실 좋게 마주한 형상과 최근에 완공된 새천년기념관도 수만년 전 지질시대 바다에 살았던 생물체의 화석 2,000여점을 전시해 큰 사랑을 받고 있다.특산품을 파는 난전을 따라 난 바닷길에는 검은 바위들이 많다. 소라나 따개비를 따는 사람들과 파라솔 아래 연인들의 모습이 평화로운 길이다. 왼편에 `청포도`로 유명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시비(詩碑)가 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이육사는 호미곶과 가까운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원에서 시상(詩想)을 떠올려 청포도를 지었다고 한다. 시비는 가로 3m, 세로 1.2m, 높이 2.5m 크기로 육사를 기리는 비문과 청포도 시가 새겨져 있고 주변엔 해송이 자라고 있다. 시 한 편을 소리 내어 읽어본 뒤 다시 걷는 길, 한결 싱그럽다.호미곶면소재지 입구 오래된 조선소에 배가 한 척 올라와 있다. 예전에는 `군수한테 시집갈래. 배목수한테 시집갈래?`라고 물으면 배목수에게 시집간다 답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조선소. 이젠 가끔 드는 배를 수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바다에 삶을 밀고 나아갔던 뱃사람들의 정취는 그대로 남아있다. 해변슈퍼를 지나 호미곶우체국 맞은편 골목으로 든다. 근해자망어선들이 간격을 좁혀 정박한 대보항 풍경이 아름답다. 저 흰 등대와 붉은 등대 사이로 삶이 들락거리는 동안 구성진 생의 가락도 깊어졌으리라.방파제 교석초포장마차를 지나 까꾸리계에 이르자 붉은 노을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풍파가 심하면 청어가 밀려나오는 일이 허다해 까꾸리(갈고리의 방언) 로 끌었다는 말에서 유래한 까꾸리계. 풍화작용으로 조각된 형상이 독수리 부리를 닮았다하여 주민들이 이름 붙인 독수리바위 너머 석양은 세상의 모든 수식어를 잠재운다. 그 옆 작은 공원에 서 있는 조난비가 멀리 교석초 물등대를 바라보고 있다. 일본이 청일과 러일 전쟁에 승리해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 일본 수산강습소 실습선인 쾌응환호가 해류 어종분포 연해 수집 등 조사를 위해 동해안에 내항하였다가 구만2리앞 해중에서 좌초되어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조난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 후 당시 그 배의 학생과 승무원이었던 사람들이 이곳에 조난비를 세우고 해마다 참배했으나 해방 후 현지 주민들이 이 비를 훼손i?´ 방치했다가 1971년 10월 제일교포 한영출의 주선으로 비를 다시 세웠는데 지금도 일본인 후손과 관계자들이 찾아와 참배하고 있다. 이곳 교석초 부근은 물살이 세고 파도가 크며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의 능지처참된 왼팔이 버려진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북동풍이 불어오면 수겹의 너울이 밀려와 장관을 이루는 이곳에서 역사의 문장을 읽는다.도착지에 구봉횟집이 있다. 호미곶 앞바다에 `미정호`를 띄워 주인이 직접 잡은 물고기가 수조 가득하다. 범도다리와 국수를 쓰윽 쓰윽 초장에 비벼 따뜻한 멸치국물과 내는 회국수 한 그릇을 마주한다. 새해 첫날이면 광장 가득 해맞이 인파가 넘쳐나고 봄이면 유채꽃 노란 물결과 청보리의 향연이 장관을 이루는 호미곶.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대답하는 눈부신 파도가 한반도의 꼬리를 힘차게 일으키고 있다.권선희시인

2011-07-25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20> 섬의 길을 따라 섬에 안기다 / 울릉군 행남산책길

도동항으로 여객선이 든다. 육지에 다녀오는 귀향객과 한껏 들뜬 관광객들이 쏟아지면 이내 빵빵하게 부푸는 섬. 육지에서 배를 타고 섬에 드는 일은 오랫동안 나를 기다린 품에 안기는 듯 벅찬 설렘을 준다. 울릉도는 화산암의 오각형 섬으로 도둑, 공해, 뱀이 없고 물(水), 미인(美), 돌(石), 바람(風), 향나무(香)가 많다고 해 3무(無)5다(多)의 섬으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보고라 일컬을 만큼 기암괴석과 원시림을 자랑하는 신비의 섬이다. 울릉도의 팔경(八景)인 `도동 모범(暮帆) - 도동항 석양 오징어배 출어 모습, 저동어화(魚火) - 저동 야간 오징어잡이 불빛, 장흥망월(望月) - 사동에 뜨는 달, 남양 야설(夜雪) - 겨울철 달밤 남양의 눈꽃, 태하 낙조(照) - 태하의 저녁 해지는 모습, 추산 용수(湧水) - 추산에 솟는 물, 나리 금수(錦繡) - 나리 동 비단단풍, 알봉 홍엽(紅葉) - 알봉의 붉은 단풍`은 사시사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도동항 방파제에서 행남산책로가 시작된다. 행남산책로는 도동항에서 저동항 촛대바위에 이르는 총 3.8km의 길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마자 펼쳐지는 동해의 물결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서 출렁인다. 수없이 모양을 바꾸며 펼쳐지는 기암절벽과 동굴을 지나며 샛푸른 물빛을 보노라니 마치 섬과 바다 사이에 흐르는 한 점 바람처럼 몸과 마음이 투명하다. 물 위 무언가가 눈길을 잡는다. 가마우지다. 물고기처럼 자맥질을 하고 한참을 헤엄치는 새의 모습이라니.50m 쯤 걷자 자그마한 간이 횟집이 나타난다. `용궁`이란 이름의 이 집은 오목하게 휘어진 바닷가 공터에 파라솔을 펴고 전복, 소라, 성게 등 해산물들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울릉도는 양식이 이뤄지지 않아 모든 것이 자연산이다. 특히 두툼한 자연산 홍합을 끓인 국물 맛은 바다를 훌훌 들이마시는 기분이다. 용궁을 지나 다시 걷는다. 오르고 내리고 휘도는 길. 자연동굴을 지나 쉼터와 낚시터 그리고 약수터를 만나는 동안 아치형의 다리와 계단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갈매기가 날고 갖가지 해안 식물들이 고개를 든다.몽돌해수욕장은 각양각색 크기의 둥그스름한 돌의 세상이다. 지나는 사람들은 마치 의식처럼 바위에 돌을 쌓는다. 누군가는 소망을 올리고 누군가는 근심을 내려놓을 것이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돌탑의 뒷모습이 아슬아슬하지만 어떤 바람도 그걸 함부로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떠나 바다에 이르고 숲에 이르고 강에 이르며 돌아와 다시 떠날 채비를 하는지도 모른다. 행남쉼터 간이횟집 파라다이스도 고무통마다 자연산 해산물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잠시 쉬며 행남이란 이름의 유래를 듣는다. 이 마을은 도동과 저동 사이의 해안을 끼고 있는 촌락으로 울릉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겨울에도 살구꽃을 볼 수 있다는 따뜻한 마을로 마을 어귀에 큰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하여 `행남(杏南)`으로 불리고 있다. 또는 지형이 뱀의 입처럼 생겼다고 하여 `살구남(口南)`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다. 파라다이스 주인은 이곳에서 보는 해맞이와 해넘이는 한 번 본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할 만큼 아름답다고 했다.행남쉼터에서 등대로 오르는 길 왼쪽 돌계단 끝에 한선이 할머니 집이 있다. 마당이 고요하다. 예전엔 가옥이 약 12채 가량 있었으나 이젠 할머니집 한 채만이 남았다. 젊어서는 물질을 했지만 이제는 텃밭 농사와 염소 몇 마리만을 기르며 혼자 사신다. 할머니 댁을 지나 만나는 세 갈래 길에서 오른쪽 행남등대 방면으로 걷는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시누대숲을 지나면 오래된 해송 아래 털머위의 행진이 끝없이 펼쳐진다. 작은 키에 넓적한 얼굴을 든 털머위 잎사귀는 누군가 공들여 닦아 놓은 듯 반질반질하다. 가을이면 온통 털머위가 피워내는 노란 꽃으로 물이 들고 말 길이다. 꿩의 갑작스런 울음이 꿩 꿩 산을 흔드는 오른쪽 산비탈 아래 까만 염소 두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할머니의 염소들인가 보다. 조금씩 숨이 차오를 무렵 소나무 숲 사이로 행남등대(도동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행남등대는 9.1m 높이의 백색 8각형 등대로 울릉도의 동쪽 끝 행남말(杏南末) 끝단(등고 108m)에 위치한다. 1954년 12월 무인등대를 설치해 운영해오다가 독도 근해 조업 선박이 증가하면서 연안표지시설의 필요로 광력을 증강해 1979년 6월 유인등대화 했다. 청명한 날에는 등탑에서 독도를 볼 수 있으며, 저동항의 아름다운 모습과 촛대바위는 물론이고 또 울릉도의 상징인 성인봉의 정상까지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행남등대에서 200m 쯤 오던 길로 다시 내려와 저동항 이정표를 따라 걷다보면 소라계단을 만난다. 소라의 몸속으로 들듯 뱅글뱅글 계단을 돌아내리면 아찔하고 짜릿하다. 소라계단은 STS 원형식 계단으로 57m의 고저차가 있기 때문에 임산부나 노약자 심신장애자가 등반시 일시적인 어지러움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촛대바위 앞에 선다. `옛날 한 노인이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조업을 나간 노인의 배가 심한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않았다. 상심한 딸은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로 며칠을 보낸 후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느낌이 들어 바다에 가보니 돛단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딸은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배가 있는 곳으로 파도를 헤치고 다가갔다. 그러나 파도를 이길 수 없어 지쳤고 그 자리에 우뚝 서 바위가 됐다. 그 후 그 바위를 촛대바위 또는 효녀바위라고 부르게 됐다. 거대하게 솟은 바위가 애달픈 사연과 함께 우두커니 저동항을 등지고 바다를 본다. 어찌 촛대바위 뿐이랴. 섬의 모든 것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반죽 덩어리. 기다리는 것은 언제나 바다에서 오기에 모든 것이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섬의 길을 따라 섬에 안기는 저녁, 묶인 배들이 끼걱끼걱 흔들리는 저동항으로 저녁이 스며든다. 내 몸에서도 바다냄새가 난다.권선희시인

2011-07-18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19> 내 고향은 딴봉입니다 ② 포항시 송도동 형산강

제철소 건설로 물속에 묻힌 고향생계 찾아 뿔뿔이 타향살이 설움 한국 철강 산업 발전의 꿈은 1960년 대 종합제철 건설 계획 수립으로 구체화 되었다. 비록 자본 기술 경험도 없는 무의 상태였지만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34명은 1968년 4월1일 회사 창립식을 갖고 일관제철소 건설의 대장정을 시작하였다. 1970년 1기 설비 착공식을 가진 포항제철소는 3년 만에 1973년 7월 3일 준공식을 가졌다. 당시 송정리 일대 주민들은 이주 마을인 연일 새마을동네나 해도동 일대에 조성된 주택, 또는 도구 일월동 부근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103만t 체제의 1기 설비로는 우리나라의 철 소요가 절대 부족하였고 그에 260만t 체제의 제2기 설비 확장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공장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형산강 하류의 땅을 이용하기로 하고 1974년 형산강 유로(강 하구의 물줄기)를 포항 시가지 쪽으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75년 딴봉마을 쪽으로 물길을 돌리고 딴봉 일부의 토양을 퍼서 매립한 후 성토 작업은 끝났으며 이어 2고로 공사가 시작되었고 76년 5월31일 드디어 2기가 준공 되었다. 그 후, 경제 대국으로 가는 역동적 발걸음이 되었던 포항제철소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기업으로 세계시장에 우뚝 섰다. 고향을 물속에 묻은 아픔은 아직도 가슴에 생생하지만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선택이었고 거부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는 딴봉 사람들. 36년이란 긴 세월 형산강 물줄기 무심히 흐르는 동안 딴봉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왔고 살고 있을까. 서른 초반 대가족과 이주한 사람이 칠순 바라봐2007년 세운 `딴봉회관` 향수 달랠 유일한 공간“주민들의 이주는 그리 길지 않았어요. 공무원들이 나와서 둘러보고 논과 밭을 기준으로 평당 2천800원 정도 책정된 가격을 통보 하였습니다. 형식상 합의 수용이 되자 이주가 시작됐고 마을 사람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나마 대책이 있었던 사람들은 서둘러 떠날 수 있었지만 막막한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밥을 먹다가 갈대울타리 너머를 바라보면 중장비가 길을 밀어내고 있었어요. 저도 울며 겨자 먹기로 300만원 남짓한 돈을 찾았지요. 하지만 앞날은 까마득했습니다. 송도와 해도에 집을 마련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1차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도구 일월동이나 연일 새마을 동네로 가서 세를 들기도 했지요. 대부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며 형산강 물줄기를 바라보았지만 간혹은 대처로 떠나 소식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날, 딴봉회관에서 석재화(67)씨를 만났다. 54평 남짓한 대지에 32평 규모로 지어진 그곳은 딴봉 사람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2007년 1월에 마련한 회관 벽에는 향수를 달래며 가진 모임의 단체사진이 차례차례 걸려 있었다. 노모를 포함해 열 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이끌고 딴봉을 떠나던 서른 초반의 석재화씨도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배운 건 없고 푸성귀 심어 거두는 재주가 전부인데 그럴 땅도 없으니 할 일은 노동뿐이었지요. 그러나 그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불규칙한 일자리와 수입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1977년 가족을 송도에 두고 배를 탔지요. 부산과 일본을 오가며 화공약품을 실어 나르는 삼부해운 3호였는데 봉급은 적었고 몰래 외제품 장사를 해야만 돈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그 재주도 없는 사람들은 뒷돈도 챙기지 못했고 독한 약품들을 취급하다보니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저도 1년 반 정도 배를 타고는 결국 송도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그러나 그는 1년 후 다시 해외개발공사에 이력서를 내야했다. 그리고 김해 공항에서 오사카로 가서 배를 탔다. 일본서 철재를 싣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풀어 놓고 다시 곡물을 싣고 돌아와 일본 각지에 풀어 놓는 배였다. 선주는 일본인이었으나 다행히 선장을 비롯한 27명의 선원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덕분에 명절이면 배 위에서 명절상을 차리고 향수의 시름을 덜 수 있었다. 월급은 회사에서 직접 집으로 송금하였으므로 가족들에 대한 걱정은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리고 84년 겨울, 5년 남짓 탔던 배에서 하선을 하고 돈을 조금 만들어 송도에서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집을 지어 팔며 조금 일어서는 듯 했으나 위기는 인생살이 굽이굽이 끊이지 않고 왔다. 다른 사람들의 근황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근이 자망선으로 배사업을 하는 친구들과 청림, 도구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이들도 있지만 서울, 강릉, 울산, 대구로 돈벌이를 찾아 떠난 이들은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객지생활을 하는 형편이었다.“85년부터 딴봉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을 할 마땅한 장소도 없었지만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밥을 나누는 일은 행복했지요. 2006년 모임에서 우리 딴봉 출신의 유순자(67)씨가 마을회관을 건립하기로 마음먹고 사비를 털어 대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1월 지금의 딴봉회관을 준공 하였지요. 규모가 제법 컸던 1차 이주민들은 훗날 제철소의 지원으로 자녀들을 위한 장학회를 설립했습니다만 딴봉은 관도 회사도 지역사람들도 모두 잊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고향 딴봉은 잊어서도 잊혀서도 안 되는 포항 사람들 모두의 고향이고 역사입니다.”형산강 둔치에 선 그의 가슴이 스르르 아프다.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나고 세월에 쉬이 늙은 몸이 야속하다. 6·25 사변 중에 북한군이 못 넘어 오도록 솔안다리를 끊었을 때 딴봉 둑을 따라 피난을 가던 사람들, 부녀자와 아이들을 배에 태우고 뱃머리를 붙들고 헤엄치며 넘어가던 사내들의 모습, 시체들이 둥둥 떠내려가던 그 강을 바라보던 딴봉이다. 어떻게든 함께 살아보자고 근대화의 물결에 삶터를 내어주고 물에 잠긴 내 마을 딴봉이다. 저 우뚝 선 공장에 가서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싶은 꿈을 꾸던 사람들이다. 살로, 삘로떼가 날던 갈대밭은 다시 오지 못해도 후손 대대로 딴봉을 기억할 표석은 이 강가에 서야 한다. 바람이 그의 이야기를 물고 상류를 향했다. 비늘처럼 일어선 물결에 강이 꿈틀거렸다. 멀리 형산(兄山)과 제산(弟山) 사이로 노을이 지면 강 너머 포스코는 오색찬란한 빛을 밝힐 것이다.

2011-07-11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18> 내 고향은 딴봉입니다 ① 포항시 송도동 형산강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이다.”모친은 딴봉을 돌아보며 그만 주저앉아 울었다. 옹기종기 어깨를 기대고 살던 낮은 슬레이트 지붕과 골목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푸성귀를 심어 밤낮으로 돌보던 밭도 파헤쳐졌다. 중장비들이 내는 소리에 갈대밭 살로 떼가 날아올랐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깨진 종바리까지 살뜰히 챙겨 수레에 실었지만 추억은 데려오지 못했다. 집과 땅에 대한 보상금 300만원으로 골든당 옆에 겨우 집 한 칸을 마련하고 열 식구의 세간을 풀었다. 하늘을 가린 지붕 아래 몸은 눕혔지만 막막했다. 아,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나.형산강 하구 물빛만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그곳엔 오래전 딴봉이 있었다. 따로 떨어진 봉긋한 마을이라 해서 딴봉이라고 했을까? 딴봉은 송도에서 둑으로 연결된 섬 아닌 섬이었다. 파도가 치면 물이 에돌아 나가던 곳. 강의 모래가 퇴적된 넓적한 땅 위에 약 100여 호가 옹기종기 살았다. 일제강점기때 심은 방풍림 소나무가 있을 뿐 능선 낮은 산도, 마을 어귀마다 부표처럼 선 오래된 당산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기와집 몇 채에 슬레이트나 초가지붕이 대부분이었던 가난한 마을, 초가지붕이 낡으면 연일이나 대송에 가서 나락 짚을 사다가 집집마다 새지붕을 얹곤 했다. 갈대를 베어다 울타리를 두르고 밭을 일구어 온갖 채소를 심고 바닷물을 받아 소금을 고며 온 몸으로 삶을 일구던 순한 사람들이 거기 살았다.초여름이면 갈대숲으로 살로, 삘로라 불리던 철새들이 날아왔다. 자그마한 덩치에 다리가 가늘고 긴 회색빛 새들. 팽이치기 막대놀이가 싫증이 나면 아이들은 소총이나 말총으로 만든 덫을 들고 새잡이에 나섰다. 딴봉에는 말이 없었지만 죽도시장에는 짐을 실어 나르는 말이 많았다. 말총은 소총보다 훨씬 질겼으므로 아이들은 간혹 남빈동까지 말총을 뽑으러 가기도 했다. 궁둥이 쪽으로 살살 다가가 손가락으로 꼬리털을 감아 당기면 화들짝 놀란 말이 뛰었다. 아이들도 꽁지가 빠져라 달아났다. 그렇게 뽑아 온 긴 털을 한 줄로 이어 군데군데 올가미를 만들어 바닥에 놓고는 “살로야, 삘로야” 불러대며 살살 새떼를 몰았다. 새들은 쉬이 날지 않고 뛰듯이 걸었는데 어쩌다가 덫으로 놓은 훌치기에 발목이 걸리면 사냥은 성공이었다. 신이 나서 나무를 주워 다가 불을 피우고 입가에 검정을 묻혀가며 새를 구워 먹었다. 갈대밭을 뒤져 새알을 주워 깨 먹기도 하고 삶아도 먹었다. 물이 좋은 형산강에서 재첩과 조개를 줍고 고스라지를 낚으며 종일 놀다보면 상류쪽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번졌다.딴봉 아이들은 영흥초등학교에 다녔다. 아침 일찍 둑길을 걸어 송도 솔밭을 지났다. 솔밭에는 고아원이 있었는데 아이를 잃어버리면 찾을 수가 없다고 할 만큼 울창했다. 봄이면 솔잎의 새순을 끊어 먹느라 지각을 하기도 했다. 봄풀들 사이로 삥기도 올라왔다. 삥기 속에는 솜처럼 포근한 것이 들어있었다. 맛있었다. 솔밭을 지나면 동빈내항을 가로 지르는 꺼먼 다리까지 은백양나무 가로수가 양쪽으로 나 있었다. 바람이 불면 은백양나무 초록 잎사귀와 뒷면의 은빛이 팔랑거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동빈내항 물줄기는 맑았다. 나뭇가지에 줄을 달아 넣기만 하면 물고기가 올라왔다. 보리가 자라면 보리서리를 했고 은백양나무 너머 밭에서 가지도 토마토도 몰래 따 먹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엔 송도 해수욕장으로 달려갔다. 한 여름 송도해수욕장은 언제나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긴 백사장 가득한 피서객들 사이를 비집고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가 놀았다. 어찌나 모래가 고운지 한 참을 들어가도 부드러운 촉감이 발바닥을 간질였다.가끔 칠성천까지 가서 놀았다. 칠성천엔 돛을 단 배가 지나기도 했다. 배가 지날 때마다 돛이 걸리지 않게 들어 올리던 나무다리도 있었다. 겨울이면 꽁꽁 언 칠성천은 색다른 놀이터가 되었다. 종일 앉은뱅이 썰매를 타고 팽이를 치며 놀았다. 봄이 올 무렵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고무 얼음이라 부르며 서서히 꺼지는 얼음을 풀쩍풀쩍 건너다녔다. 간혹 굼뜬 녀석들은 얼음과 함께 빠지기도 했다. 그 추운 날, 모닥불을 피우고 쫄딱 젖은 옷을 말리면서도 행복했다.배작업을 하는 집도 몇 있었지만 딴봉 사람들 대부분 채소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작은 땅에 심은 채소들은 가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부추, 얼갈이배추, 시금치를 심어 부지런히 가꾸어도 열 식구 배곯는 날이 더 많았다. 여름철이면 아무리 아까워도 채소가 상하면 모두 버려야만 했다. 두 아들을 데리고 리어카 가득 채소를 싣고 죽도시장에 나가 팔아도 국밥 한 그릇씩 사 먹이면 남는 게 없었다. 갈대밭 가에 염전이 있었다. 바닷물을 태양에 말리는 서해안의 염전과는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 달랐다. 흙을 평평하게 깔아 놓으면 그 위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러면 그 흙을 짜서 움막을 지어 놓고 흙에서 나온 바닷물을 어마어마하게 큰 솥에 고으면 소금이 되었다. 움막을 지었던 흙을 다시 깔아 바닷물이 들기를 기다렸다. 간혹 나무로 된 물레방아 비슷한 것을 발로 밟아 바닷물을 끌어올리기도 하였다. 바닷물 탓인 지 흙의 성분 탓인지 모르지만 소금의 질이 좋았다. 처음엔 누르스름하다가 이내 하얗게 변했다.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면 짜디짠 소금도 달달했던 시절이었다.사람들이 모두 딴봉을 떠나자 덩치가 큰 준설배가 마을의 모래를 퍼 날랐다. 작업 속도는 매우 빨랐다. 갈대도 자갈과 함께 퍼 올렸다. 간혹 물고기도 따라 나왔다. 할아버지가 세상 마지막 숨을 놓으신 딴봉, 아버지가 어머니를 맞아 첫 밤을 보낸 딴봉, 오랜 세월 굴뚝 연기로 저녁을 접고 다시 아침을 펴던 고즈넉한 강가 마을 딴봉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새들의 여린 부리가 연신 모이를 쪼던 딴봉이 강물에 그렇게 덮여가고 있었다.계속글 권선희시인

2011-07-04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17> 화석과 함께 살았다… 영덕 경보화석박물관장 강해중

온통 수석에 빠져 살던 어느날운명인 듯 화석과 기이한 만남 화석 수집가 강해중(70)씨는 포항에서 태어나 칠십 평생 포항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철물점을 하던 누나의 일을 도우며 청년기를 보냈다. 포스코가 들어설 무렵 페인트사업을 시작으로 누나로부터 독립한 그는 건설현장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문화에 대한 안목과 수집의 매력을 배웠다. 주로 오래된 민화나 그림을 수집했는데 고향의 정취를 담은 산과 강의 풍경은 평안함을 선물했다. 그러나 아끼던 그림들은 큰 물난리에 그만 엉망이 되고 말았다. 영원한 것이 없음에 허무했다. 사업이 번창할수록 마음은 조급해 지고 삭막해졌다. 그것을 달래려고 다시 택한 것이 자연 수석 수집. 틈 날 때 마다 포항 주변의 개울이나 하천을 돌며 돌을 주웠다. 오래된 마을의 담을 헐어내는 곳에서 운명처럼 만날 돌을 기다렸다. 큰 비가 오면 물이 빠진 뒤 모습을 드러낼 돌에 대한 기대로 잠을 못 이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저 돌이라 여겼던 것들은 숨을 쉬는 개체로 다가왔다. 멀리 문경으로 남한강으로 그저 돌을 찾아다녔다. 돌은 아무말이 없었으나 돌에 새겨진 무늬들은 지나간 햇볕과 바람 그리고 물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뜨거운 여름날 온종일 서성이던 강가에서 만나는 돌 하나는 총각이 한 눈에 반한 아가씨처럼 눈부신 설렘이었다.수석 수집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한 사람과의 인연은 화석으로 향하게 한 화살표가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자연사 공부를 하고 자연사박물관 건립을 위해 서울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본 생애 최초의 화석, 그것은 한 마리 물고기였다. 아름다웠다. 신비로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모든 생명이 죽으면 썩어버리는데 물속에 놓아주면 금방이라도 헤엄칠 듯 선명한 물고기를 품은 돌의 형상이라니. 저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디서 왔을까? 집으로 돌아왔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일주일 후 전화를 걸어 수집 경로를 물었고 그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뜻이 있다면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에 가서 자연사 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서른두 살에 만난 자그마한 물고기 화석은 현재 6천여 점의 화석을 수집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1970년대 초만 해도 일반인의 외국여행은 쉽지 않았다. 때마침 포항상공회의소위원으로 들어갈 계기가 주어졌다. 상공위원이 되면 공장 견학이나 기타 업무상 외국 방문이 가능했으므로 망설임 없이 가입했다. 외국행 일정에서 조금이라도 짬이 나면 가이드를 구해 현지 자연사박물관으로 갔다. 소장한 화석들을 구경하고 구입했다. 처음 구입한 화석은 독일의 삼엽충이었다. 원화로 약 36만 원가량을 지불하고 얻은 그것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예뻤다. 품에 안고 돌아오는 내내 그저 귀한 것을 얻었다는 마음에 마냥 즐거웠다.그렇게 브라질, 소련, 중국등 40여 개국을 쏘다니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석을 수집했다. 현지에서 구입하는 것은 수월했지만 국내 반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우선은 계산서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분명 값을 치르고 샀으나 대부분 개인적으로 소장한 것을 구입하다보니 계산서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설명하고 또 설명했지만 매번 같은 사람이 신기한 돌덩이를 자꾸 날라오니 출입국 담당자들의 의심은 나날이 커졌다. 결국 조사를 위해 화석들을 맡기게 되었고 두 달 후에야 공항 관계자로부터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지질학회에 조사를 의뢰해야 했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화석에 대한 관심이 저조했던 시절이었다.인도네시아에서 나무 화석 규화목을 구할 때는 특히 고생이 많았다. 화석의 크기도 크기지만 한 달씩 체류를 하다보면 잠자리도 음식도 기후도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섬에서 발굴 되는 실정이라 지역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선 이중으로 가이드를 구해야 했다. 돈이 관련된 일이다보니 위험 요소 또한 많았다. 어렵게 화석을 구해도 섬에서 섬으로 옮겨야 했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통나무를 엮어 뗏목을 만들고 산에서 큰 돌을 굴려 실었다. 한 번은 커다란 규화목을 싣고 옮기다가 그만 배가 기울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으나 화석은 무게가 있어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 후 다시 그 곳을 방문해 인력과 장비를 동원해서 화석을 옮겼다. 부피가 큰 화석은 종합상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이 한국으로 들어올 때 컨테이너를 이용해 짐을 실어다 주었다. 어떤 경우는 6개월 만에 오고 후진국의 경우 1년 만에 운반해 올 때도 있었다.수십 년 모은 화석들을 창고에 놔두고 혼자 보기엔 아까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화석을 모으는 일도 한심한데 많은 돈을 들여 박물관을 짓겠다니 모두 바보짓이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결국 포항에서 영덕으로 가는 7번 국도변에 장소를 잡았다. 바닷가 구릉지를 메우고 건물을 짓고 드디어 1996년 경보화석박물관을 개관했다. 한국 최초의 화석박물관이었다. 언론은 물론이고 학회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일반 관람객들이 화석을 보고 신기해하는 것이 기분 좋았다. 가족과 이웃도 그때서야 쏘다닌 세월과 바보스런 행보를 인정해 주었다. 그는 현재 영덕 경보화석박물관 이외에도 경주 엑스포세계화석박물관과 포항 호미곶새천년기념관내 바다화석박물관 등 세 곳에 각각 다른 테마로 화석을 전시하고 있다.그에겐 모든 화석이 소중하다. 그래도 가장 아끼는 것을 꼽으라면 강원도 영월산 2억8천만년 전 고사리 화석이다. 끊어진 형태가 대부분인 열대지방 고사리 화석에 비해 자그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원형이 그대로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집은 큰 병이고 중독입니다. 젊은 날 벌어들인 그 많은 땅과 돈이 다 사라졌지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석을 찾아 쏘다닌 세월과 고집이 자랑스럽습니다” 화석은 아름다운 흔적이다. 46억년 나이의 지구역사와 생태계를 푸는 열쇠다. 그는 요즘도 화석을 찾아다닌다. 하루살이가 이틀 사는 짐승의 세월을 모르고 백 년 사는 인생이 천 년 사는 생을 모르지만 화석은 길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2011-06-27

<16> 역사를 찾아가는 회귀의 길… 울진 관동팔경길

천천히 걷는다. 오르고 내리며 휘어지는 길이 평화롭다. 바다가 살고 바람이 살고 사람들이 심성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길, 길 저편에 허파꽈리처럼 매달린 풍경들 꽃처럼 피고 수백 수천 년의 역사가 뿌리를 흔들지 않고 있다. 관동팔경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경북 울진군 산포리 망양정(望洋亭)에서 평해읍 월송정(越松亭)에 이르는 약 28.8km 해안길이다. 동해의 절경을 따라 이어지는 문학과 역사의 길은 소박하고 아늑한 소항의 풍경까지 품고 있어 그야말로 눈부신 선물이다. 울진버스정류장에서 약 오 리쯤 걸었을까? 망양해수욕장 부근 언덕에 망양정이 있다. 망양정회식당 바로 옆 계단을 따라 솔숲길 굽이굽이 올라 언덕에 서니 바다로 흘러드는 왕피천의 모습과 망양해수욕장의 백사장 그리고 망망대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예부터 해돋이와 달구경이 유명하다는 이곳은 조선조에는 숙종이 친히 들러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송강(松江) 정철(鄭徹)등 조선 시대의 문인들도 풍광을 즐겼다.망양정의 원래 위치는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10여km 떨어진 7번 국도변 절벽 위(기성면 망양리)였다. 그러나 조선 세종 때 채신보가 오래되고 낡았다고 하여 망양리 현종산 기슭으로 옮겼고 그 후 1517년 폭풍우로 넘어진 것을 중종 13년(1518년)에 안렴사 윤희인이 평해군수 김세우에게 부탁하여 중수하였으며 철종 11년(1860년)에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더불어 현 위치인 근남면 산포리 둔산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세월을 감당하는 것이 어디 있으랴. 산포리로 옮긴 망양정 또한 낡아 1958년 중건하였고 2005년 완전 해체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망양정에는 숙종이 내린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란 현판을 비롯하여 숙종과 정조의 어제시가 있으며 2006년 조성된 해맞이공원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망양정에서 내려와 산포4리에서 해안을 따라 걷는다. 거북바위와 촛대바위 등 갖가지 형태의 바위가 마을의 낮은 지붕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울진군에서 지정한 민박마을로 어느 집에 들어도 파도소리 들으며 밤을 보낼 수 있다. 뒷산 약쑥을 베어다 모깃불을 피워 놓고 평상에 둘러앉아 노부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들어도 좋겠다. 진복 2교를 지나 동정항에 이르자 작은 배들이 옹기종기 뱃머리를 맞대고 있다. 찰박이는 배 곁에서 주름 깊은 내외가 그물을 손질한다. `배들이 물위 댓돌에 벗어놓은 코고무신 같다`고 표현했던 전태련 시인의 시 `어부의 신발`을 떠올리며 오산항으로 간다. 해안에는 대게, 미역, 오징어 전복 등 이 지역 특산물이 그려진 축대가 바닷가를 장식한다. 가을이면 저 축대 가득 오징어가 널릴 것이다. 울진군에서 세 번째로 큰 오산항은 1종항으로 인근에서 조업하던 배들이 피항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아침마다 펼쳐지는 정치망 어선들의 활어 입찰 풍경은 그야말로 푸르디푸른 율동이다. 도처에 미역이 널린 오산항 봄 냄새는 또 얼마나 싱그러운가.기성면 망양리에 이르러 `망양정옛터` 이정표 옆 골목을 따라 둔덕으로 오른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노라니 초록 숲에서 빨갛게 익은 산딸기가 쉼표처럼 고개를 든다. 찾는 이 없어 키 큰 풀들만 우거진 망양정옛터에는 늙은 소나무 몇 그루와 그곳이 망양정 터였음을 알리는 비석만이 쓸쓸히 세월을 견디고 있다. 구산항을 지나 운암서원(雲巖書院)과 평해북천교비(平海北川橋碑)를 만난다. 운암서원은 고려 말 충신 백암(白岩)김제(金濟), 물제(勿濟) 손순효(孫舜孝) 양현(兩賢)을 제향하는 서원이며 평해북천교비는 현재의 군무교 자리에 있었던 북천교의 설립 경위와 시기 그리고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비석이다. 황보천을 지나는 군무교를 건너면 드디어 월송정(越松亭) 이정표가 나온다. 평해중학교 뒷담 길을 따라 월송정을 향해 걸으며 평해 황씨의 문중 숲을 바라본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단아한 정자가 연못 속으로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관동팔경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한 월송정은 고려시대에 창건되었고 조선중기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중건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퇴락되었던 것을 1933년 향인(鄕人)황만영(黃萬英)등이 다시 중건 하였다. 그 후 일제말기 제2차 세계대전 중 적기(연합군)내습의 목표가 된다하여 월송 주둔 일본군에 의해 철거당하여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69년 4월 평해·기성·온정면 출신의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剛會)의 후원을 받아 현대식 건물로 정자를 신축하였다. 그러나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하여 1980년 7월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월송정은, 한때 달밤(月夜)에 송림(松林)속에서 놀았다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고 했고, 월국(越國)에서 송묘(松苗)를 가져다 심었다하여 월송정(越松亭)이라고도 했으며 소나무 너머에 있는 정자라는 뜻의 월송정(越松亭)이라고도 불린다. `월송정` 현판은 80년 준공당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로 새겨져 있다.월송정에 앉아 내가 걸어 온 칠십 리 길, 길고 깊은 동해 자락을 펼쳐 본다. 망양에서 오산에서 기성에서 만났던 옛이야기가 둘러앉는다. 소나무숲 너머 백사장에 한 무리 새떼가 내려앉는다. 단풍잎 같은 새의 발자국 위로 파도가 다녀간다. 길 위에 또 하루의 문장을 써 내리고 노을이 진다. 경전 같은 세상이다.

2011-06-20

<15> 뇌성산(城山) 뇌록()을 찾아서 ② 포항시 남구 장기면

김동욱 교수 일행이 보내 온 편지는 장기 뇌성산 뇌록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뇌성산에서 채취한 뇌록으로 얻었다는 색채를 금락두 선생은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은은한 녹색의 부드러운 색조를 피워 올리는 그것은 우리 고유한 단청의 바탕색 그대로였다. 잊히우는가 싶었던 뇌록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었다. 놀랍게도 장기 뇌성산 뇌록에 관한 여러 문헌의 기록도 이런 저런 경로로 찾아왔다. 각 지역의 토산품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에서 뇌록이 공물로 명시된 곳은 유일하게 경상도 장기현 뿐이었다. 조선후기에 작성된 모든 건축 공사 관련 문헌도 뇌록을 경상도 뇌성산에서 조달했다는 흔적을 보여주었다. 순조 5년(1805년) 인정전영건도감의궤((仁政殿營建都監儀軌 창덕궁 인정전을 다시 짓는 공사 기록)에는 갑자(甲子) 2월 경상감영(慶尙監營)에 보내는 공문에 뇌록 20두(斗)를 장기현에서 조달할 것을 명령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또한 순조 30년 (1830년)에는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경희궁에 내전을 다시 짓는 공사 기록)에도 경인(庚寅) 3월 경상감영에 뇌록 500두(斗)를 장기현에서 조달할 것을 명령한 내용과 순조 34년 (1834년)창경궁영건도감의궤(昌慶宮營建都監儀軌 창경궁 내전을 다시 짓는 공사 기록) 역시 신묘(辛卯) 7월 경상감영에 뇌록 700두(斗)를 보낼 것을 명령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경복궁 근정전은 정궁이면서도 고종이 황제로 선포되기 전에는 문과 문살에 뇌록을 칠하지 못하다가 황제로 선포한 다음에 비로소 뇌록으로 칠하였다고 하니 경복궁을 복원할 때 까지도 장기 뇌성산의 뇌록 채굴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한 두(斗)를 약 한 말의 양으로 가정한다면 뇌성산이 품었던 뇌록은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음을 짐작케 했다.단청의 역할은 외면적으로는 건축물의 표면을 다양한 색상으로 칠하여 장엄하며 권위와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온습도의 변화에 의해 목재의 노화와 부후를 방지하고 충해방지를 통해 목재건축물의 내구성 향상과 목재면의 결함을 은폐하면서 미화함에 그 목적을 두었다. 수평부재에 가칠의 기본적 색상으로 반드시 뇌록색을 칠한 이유를 짚어 볼 때 뇌록은 오묘한 색상뿐 아니라 그 기능 면에서도 탁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라가 직접 명을 내려 채굴했던 뇌성산의 뇌록은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었을까? 뇌록은 난연(難燃), 불연(不燃)으로 화재로부터 비교적 안전하였으며 중금속이 함유되어있지 않았다. 칠이 벗겨지는 박리(剝離)나 박락(剝落)으로 인한 재도장 주기를 길게 했다. 또한 일광에 의한 변퇴색이 거의 없었으므로 풍파 다녀가는 긴 세월에도 오랫동안 편하고 자연스러운 색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안타깝게도 조선시대 말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천연안료 뇌록은 자취를 감추었고 일제시대부터 크롬산화물 등의 유해 화학안료를 사용한 페인트가 단청에 칠해지기 시작했다. 뇌록색을 내기 위해 밝은 녹색인 시아닌그린 또는 쑥색계통의 피그모솔그린 두 가지를 주색 안료로 국내산 또는 외국산 다른 안료와 함께 조색해 사용하는 것이다. 천연 뇌록 빛은 뽀얗고 은은한 옥색초록빛이었지만 화학안료로 조색한 뇌록 빛은 초록기가 센 탓에 무거운 감이 든다. 당연히 단청이 주는 깊은 멋이나 향취가 없고 기능 또한 천연 뇌록이 지니는 장점들을 화학 안료들은 절대 따라가지 못했다.그토록 귀한 뇌록이 생산되던 뇌성산은 그저 야산으로 방치 되고 있다. 뇌록을 채취하던 뇌록지 역시 무너진 돌무더기와 우거진 풀숲에 덮여 간다. 뇌록이란 말과 쉰 개의 초배기를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던 사람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간혹 산이 좋아 뇌성산성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뇌록에 관한 이야기는 여전히 아득하다. 안타까운 마음에 김동욱 교수 일행이 전해 온 `장기면 뇌성산의 단청안료 유적지 조사의견서`를 토대로 금락두 선생은 1996년 3월 포항시를 통해 뇌성산 뇌록 터를 국가 지정 문화재(사적)로 지정해 줄 것을 경북도청에 요청했다. 관련된 각종 옛 문헌을 조사하고 양식에 맞게 서류를 작성하며 뇌록에 대한 과학적인 고증과 함께 당국의 보존대책이 절실하다고 써서 올렸지만 수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이 없다.오래 전, 북으로는 호미곶면, 동해면 일부, 구룡포읍을 다 아우르고 남으로는 양남, 양북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곳이었던 장기현. 그러나 지금의 장기면은 남쪽은 감포읍 서쪽은 오천읍 북쪽은 구룡포읍에 둘러싸여 동해만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면 한 방울도 외지로 빠지는 게 없고 또 한 방울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없다는 장기면은 얼핏 오지 아닌 오지가 되어가는 듯도 하다. 그러나 역대에 걸쳐 군사적 요충지로서 북방의 계원(契圓)세력과 왜구(倭寇)에 대비한 축성(築城)을 쌓았고 의병 활동 또한 활발했던 곳, 또한 벽지로 인정되어 유교의 대가인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과 실학파(實學派)의 태두(泰斗)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유배되어 살았던 곳, 많은 서원과 향교가 품었던 학문의 향취가 후손들에게 은은하게 전달되고 있는 곳이다. 들추는 곳마다 일어서는 옛 이야기들은 문명 사회에 있어 소중한 심성 조율의 몫을 하게 될 것이다.장기면 뇌성산이 품은 뇌록에 관한 관심 또한 화학 안료에 의존해 밝고 화려함만으로 재 치장되는 유적들의 단청을 되살릴 마지막 열쇠는 아닐까. 뇌록(綠), 인삼(人蔘), 자지(紫芝), 오송(蜈蚣지네),봉밀(蜂蜜꿀), 치달(雉獺꿩과 수달), 동철(銅鐵) 등의 칠보(七寶)가 있어 나라에 진상하였다고 전해지는 뇌성산이 깊어가는 녹음으로 또 한 계절을 지나고 있다.

2011-06-13

<14> 뇌성산(城山) 뇌록()을 찾아서 ① 포항시 남구 장기면

신창리 날물치를 지나자 멀리 동악산 아래 고즈넉한 장기면 소재지가 들어온다. 찰방하게 물이 든 논에서 어린 모들이 뿌리를 내리고 산딸기 익어가는 밭마다 초여름 햇살이 쏟아진다. 뇌록()을 찾아가는 길, 옛날 궁궐이나 절의 건축물 단청을 칠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가칠의 재료였다는 뇌록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지녔을까?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등의 내전 공사기록지인 의궤(義軌)마다 장기현의 뇌록을 채굴해 조달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다. 유독 뇌성산의 뇌록이 나라의 명에 의해 진공(進貢)품으로 채굴된 이유는 무엇일까?뇌록이 어찌 생겼습니까? 장기면 충효관에서 만난 금락두(71세) 선생께 여쭌 첫마디였다. 선생은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푸른색과 녹색이 묘하게 섞인 그것은 얼핏 돌멩이 같아 보였으나 아주 고운 흙이 굳어서 생긴 덩어리였다. 장기면 영암리에서 모포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에서 보이는 모포리(칠전) 뒷산인 뇌성산에서 구했다는 뇌록, 나는 그 자그마한 것의 발자취를 더듬어 긴 여행을 떠난다.장기면 방산이 고향인 선생이 뇌록을 만나게 된 것은 고향 장기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할 80년대 무렵이었다. 당시 경북교육청에서 지역에 있는 자료들을 찾아 공부를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는 우연히 들었던 뇌록을 수소문 하던 중 놀랍게도 제자 중에 그것을 아는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날을 잡아 모포리, 학계리 인근에 사는 남학생들을 데리고 현장 답사에 나섰다. 소 먹이러 산으로 들로 다니던 녀석들이라 길이 따로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산을 오르더니 제법 익숙한 솜씨로 땅을 파고 뒤졌다. 그리고 뇌록을 찾아냈다. 아이들은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지 못했으나 어른들로부터 `뇌록` 또는 `매새` 라고 들었으며 뇌록을 채굴하는 곳을 `매사구디이` 혹은 `쉰구디이` 라고 부르고 있었다. 선생은 돌과 돌 사이의 흙 (매:매흙의 준말)이 끼인 것 같은 광물 (새:광석속에 금분이 끼어있는 잔 알갱이)이라는 의미에서 `매새`라 부르게 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쉰구디이` 라는 말의 뜻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채굴 장소는 두 군데가 있었는데 우측 편은 깊이가 30~40미터 가량으로 패여 그 아래 조그만 소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 좌편 돌무더기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터는 반대편 쪽 산 밑으로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엇비스듬 파내린 굴이 보였다. 세월이 흐른 탓에 온통 잔돌로 채워져 있어 깊이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폭은 약 7~8미터 정도로 넓었다. 파내려가면서 퍼올린 불룩한 흙무더기는 마치 작은 산이 하나 솟은 것 같았다. 그 위에 누군가는 묘를 써 놓았을 정도였다.선생은 정녕 이것이 뇌록이 맞는지도 궁금했고 뇌록을 팠던 구덩이를 가리키는 이름 또한 궁금해 마을로 내려와 이일우씨를 찾아갔다. 그는 뇌록이 맞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뇌록 채굴 작업의 과정은 들을 수 없었다. 채굴 작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마을 사람이 아니었으며 필요할 때만 외부로부터 동원되어 오곤 했다. 어느날, 그것을 파던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수런수런 전해졌다. 궁금한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갔을 때 굴을 파던 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시신 또한 볼 수 없었다. 다만 입구에 대나무로 만든 도시락인 초배기만이 50개 놓여 있었는데 적어도 쉰 명은 무너진 구덩이에 갇혀 죽었을 것이라 여기고 그 후로 그 곳을 `쉰구디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뇌록지는 명주실을 두 줄로 겹쳐 돌을 매달아 넣으면 서너 꾸러미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제법 많은 물이 고여 있어 소 먹이던 아이들이 웃통을 벗고 뛰어 들어 헤엄을 치기도 했는데 매우 차가웠으므로 입술이 파랗게 물들어 금방 뛰쳐나오곤 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장사꾼들이 동네를 찾아와 뇌록을 수소문하며 구하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뇌록이 막연히 색칠정도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선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뇌록터에 올라가 손으로 괭이로 캐서 모아 놓으면 장사꾼들이 와서 돈을 치르고 사갔다. 마을에 다녀 온 후 선생의 뇌록에 관해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기록이나 문헌을 달리 구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세월이 또 흘렀다.1996년 1월24일, 경기대학교 고건축학 전공인 김동욱 교수와 일행 두 명이 물어물어 뇌록을 찾아 왔다. 그들은 문헌을 통해 뇌록이 유일하게 포항의 장기면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확인하기 위해 닿은 것이다. 한겨울의 오후 서너 시는 어둠이 급속히 찾아오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먼 길을 달려 온 그들은 무엇보다 현장이 궁금했으므로 선생과 동행해 뇌성산으로 갔다. 예전보다 길은 더욱 험했다. 방목하는 염소들을 위해 울타리를 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 그곳은 수북한 염소똥과 잡풀만이 무성했다. 15~20분 쯤 올랐을까? 현장에 닿았을 때 일행들이 놀라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두 눈은 휘둥그레지고 입으론 연신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한 번 그곳을 찾은 뒤 채취한 약간의 뇌록을 들고 그들은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한 통의 편지와 뇌록을 분석해 색깔을 낸 견본을 하나 보내왔다......(前略)서울에 올라온 이후에 뇌성산에서 채취한 약간의 뇌록 시편을 가지고 가루로 빻아 옛날 장인들이 하듯이 아교를 섞어 칠을 해 본 결과 아주 만족할만한 색깔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뇌록가루 약간과 시험적으로 해 본 칠을 재료로 해서 문화체육부 산하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 김동현 실장님을 찾아가 그간의 과정과 뇌성산의 현황이라든가 뇌록의 칠등을 보여준 결과 대단히 큰 관심과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뇌성산에서 채취한 뇌록이 우리나라 전통건축에 사용하는 단청의 본래 색깔을 만들던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중략)1996.2.29. 경기대학교 김동욱, 삼성건축 장순용 드림.

2011-06-07

<13> 수백년 숨결이 사는 마을, 덕동(德洞) ②

정자 천정서 우연히 찾은 궤 한짝엔130여년 만에 빛보게 된 유산들이…고문서, 유물 등 덕동민속전시관 만드는데 큰 도움 정월 대보름날, 대동회를 소집한 사람들은 수초군(首草軍)을 선발했다. 수초군은 마을의 규범을 관할하는 사람으로 특히 농사와 관련된 행위 전체를 이끌었고 임기는 1년 이었다. 수초군의 자격에는 신망 있는 사람, 자신의 이익 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심성이 우선이었다. 수초군으로 선정되면 노임을 세세하게 책정했다. 논매는데 얼마, 밭매는데 얼마, 남자와 여자, 또 중노동과 경노동에도 차이를 두었다. 사람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만을 책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목하는 소가 곡식에 피해를 주었을 경우에도 벌금을 매겼으며 녹비채취에 대해서도 결정하였다. 이것을 영(命)친다고 했는데 몇 월 며칠 어디서 어디까지라는 구역을 정했다. 수초군 아래 숫총각을 한 명 두었다. 숫총각은 수초군의 지시를 전하거나 벌금 받으러 가는 것 등 잔심부름을 했다. 그렇게 수초군의 지휘 아래 덕동의 한 해 농사가 시작되었다. 양력 8월15일 무렵,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조석으로 초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면 수초군의 주재 아래 서래치 행사가 열렸다. 서래치는 세서연(洗鋤宴)으로 `호미씻이` 즉 농사를 마치는 날이란 뜻이다. 그 해 어느 집 농사가 제일 잘 되었나를 가늠하는 품평회에는 주로 머슴들이 주인공이었으며 장원을 뽑아 노고를 칭송했다. 농사의 등급이 조정되면 주인댁에 저마다 음식을 분담시켰다. 상(上) 농가는 떡, 중(中) 농가는 술, 하(下) 농가는 감주나, 안주 등을 명하면 흔쾌히 수락하고 장만했다. 수초군은 당일 모인 음식 또한 정성이 깃든 순으로 1, 2, 3등을 평가한 후 사례를 했는데 현금이 아니라 수건이나 담배 등으로 정을 표시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음식을 나눠 먹으며 축제 같은 하루를 보냈다. 정성껏 함께 잘 살자고 의욕을 돋우고 권장하는 목적이었다. 존재감과 연대감의 확인과 더불어 삶의 평안을 기원했던 시절이었다.머슴을 위주로 행해졌던 것이 세서연(洗鋤宴)이었다면 양반들은 종경도 놀이를 즐겼다. 종정도(從政圖), 승경도(陞卿圖)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관직도표`로서 말판에 정1품에서 종9품에 이르는 문무백관의 관직명을 차례로 적어 놓고 윷가치나 윤목(輪木)을 던져 나온 숫자에 따라 말을 놓아 하위직부터 차례로 승진하여 고위 관직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조선시대 양반의 자제나 부녀자들이 남편 또는 자식의 입신출세를 소망하여 연초에 관운을 점치고 승진을 기원하기 위해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등급이 많고 칭호와 상호관계가 복잡하여 체계화된 개념을 갖기가 어려웠는데, 이 놀이를 통해 자연스레 관직제도를 익힐 수 있었다. 또한 벼슬을 썼다가도 귀향을 가고 사약을 받고 또 다시 관직에 오르는 등 생의 희로애락을 느껴보는 의미도 컸다.누렇게 바랜 종경도를 펼쳐 바라보는 이동진(81세)씨, 그는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고향인 덕동으로 30세 때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고서들이 가득했다. 제일 큰 집인 사우당에는 책방이 별도로 있을 정도였다. 상자 가득 고서적을 포개 놓은 모습이 생생하다. 선조들의 흔적을 귀히 여기고 잘 보관하여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으나 사는 일에 바빠 미적거리는 사이에 하나 둘 사라진 책들, 그 안에 담긴 무수한 이야기들은 어디로 갔을까?그러나 그의 나이 쉰이 넘어서면서 농기구부터 생활가구까지 옛 물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선조들이 남긴 유산들을 모아 보존하자는 의견에 흔쾌히 동참했고 남아있던 것들을 기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다리를 놓고 올라간 정자의 천정에서 궤를 하나 발견했다. 그 안에서 나온 보자기를 풀어 보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눈물이 났다. 수백 년 만에 전해진 조상의 선물은 그야말로 타임캡슐이었다. 공서와 세덕사에 대한 명문을 비롯하여 토지 매매 관계, 마을을 방문한 사람들의 본관은 물론이고 함께 온 노비와 말의 수량, 심지어 식사를 하였는지 잠을 자고 갔는지 까지도 세세히 기록한 천배록(薦拜錄), 삼베에 쪽물을 들인 세덕사 향사 예복과 제복, 한지를 일일이 꼬아서 만든 바랑과 옥수수 등 긁개 까지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13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온 물건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숙종 정묘년에 처음 공사를 시작해 실로 3대에 거쳐서야 완성한 `사의당(四宜堂)`. 훗날 사의당 본체를 세덕사의 문루로 바치고 `우리 가문 학문의 연원`이라는 뜻의 `연연루(淵淵樓)`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1871년 전국에 불어 닥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연연루는 세덕사와 함께 훼철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이에 사림(士林)들은 연연루를 지키기 위해 의논에 들어갔다. 그 결과 연연루는 본래 세덕사의 건축물이 아니었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다시 본래의 사의당으로 되돌릴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온 동민들이 동원되어 하룻밤 사이에 담을 쌓았다. 서원과 독립된 건물로 구분하고 사의당과 용계정의 옛 현판을 달아서 훼철되는 화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주변의 물건들을 보자기에 담아 깊숙이 보관하여 후대에 전한 선조들의 지혜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552호로 지정된 포항 덕동 여주 이씨 문중 소장 고문서 67점을 비롯해 목판과 천배록, 호적단자 등 다양한 유물과 유고를 전시한 덕동민속전시관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우정 고택과 애은당 고택, 이원돌 가옥 등 여전히 고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마을 덕동, 세월이 흘러 정월 대보름에 열리던 동제도 여름철에 약식으로 행해지고 수많은 세시 풍습 또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2011년 4월10일 덕동 사람들은 `화수회`에서 `보존회`로 이름을 개명하고 숨어있는 전통과 자연의 매력을 전하고자 새로운 행보를 시작했다. 수백 년 숨결을 간직한 덕동의 삼기(三奇)와 구곡(九曲)의 물소리 그리고 팔경(八景)의 자태가 들려 줄 이야기가 궁금하다.

2011-05-30

<12> 수백년 숨결이 사는 마을, 덕동(德洞) ①

―당나무가 들려주는 동제(洞祭)―동제로 마을 안녕 한마음 기원한 여강 이씨 집성촌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1리에 있는 마을 덕동(德洞)에 들어서니 솔숲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가 깊다. 고요하던 호산지당의 물결이 비늘처럼 일어서고 용계천 청아한 물소리에 고택의 문설주가 귀를 연다. 이곳은 경주 양동마을에 사시던 사의당(四宜堂) 이강(1621~1688)공께서 360여년 전에 거처를 정해 세거(世居)하게 된 여강이씨(여주이씨)집성촌이다. 덕(德)이란 `사람이 일상에 있어서 마음을 바르게 쓰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 마을 사람들의 심성이나 가풍은 분명 그 이름을 향했을 터, 단아한 자태의 침곡산을 배경으로 가꾸어 온 자연과 자손대대 간직한 유물의 향취만으로도 이방인의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곳에서 전시관을 운영하는 이동진(81) 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동제(洞祭)를 지내고, 세서연(洗鋤宴)을 치르고, 종경도(從卿圖) 판에 윷목을 던지던 오래 전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흘러 나왔다. 제사 주관하는 제관 엄격한 기준으로 선발마을대표 자격 금기 지키며 치성으로 드려정월 보름을 이틀 앞두고 깊을 대로 깊어진 겨울 날씨는 매서웠다. 마을 입구 당나무가 가지마다 세찬 바람을 품어 안고 우우 크게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당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주변을 쓸고 새끼를 꼬아 당나무에 금줄을 두르고 그 갈피에 한지를 말아 끼우고는 빙 둘러 앉았다. “자, 이제부터 금년 동제를 주관할 제관(祭官)을 뽑겠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회의를 주도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근엄하였으므로 모두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첫째, 산후 7일 전에 있는 남자는 안된다. 둘째, 당일 제사를 모시는 사람도 아니 된다. 셋째, 3촌이나 5촌 중 복을 입은 복인(服人) 역시 일반 상주와 같은 행세를 해야 하므로 제외된다. 그 외에도 불길하거나 불결한 것을 모두 피한 사람만이 제관의 대상이다” 나이에 대한 규정은 없었으나 반드시 관자(冠者)라야 했다. 혼인을 기준으로 관자와 동자를 구분했는데 혼전의 동자(童子)는 혹여 나이가 많더라도 아이 취급을 했으므로 제관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여보게, 자네가 올해 제관이 되어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빌어주시게” 어르신은 제관을 공표하고는 그를 일으켜 세워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내렸다. 이에 거부란 없다. 그만큼 엄하게 선발되는 과정이기에 지명 받은 순간부터 그는 개인의 몸이 아니라 마을의 몸이 되는 탓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금하며 궂은일이나 허튼 일에 가담하지 말아야 하며 부인과의 잠자리 역시 삼가 해야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당나무 주변을 시작으로 제관이 된 사람의 집에 이르는 길에 황토를 한 줌씩 뿌리기 시작했다. 4~5m 간격으로 일정한 폭을 유지하며 고불고불한 골목을 따라 뿌린 황토는 “이 집은 당제를 지낼 제관의 집이니 불결한 사람은 부디 이 길을 피해 달라”는 무언의 경고이며 당부의 표시였다. 제관으로 선정된 날 밤, 그는 목욕을 하기 위해 용계천으로 갔다. 얼음이 서걱거리는 물속으로 몸을 담갔다. 놀랍게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행여 마음을 잘못 가다듬어 제사를 지내면 마을에 무슨 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무감과 책임감이 전율로 배어든다.다음날 아침, 제관은 밀짚모자를 푹 눌러 쓰고 안강으로 장을 보러 나섰다. 되도록 상대방에게 얼굴을 안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장터에는 그 말고도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두엇 눈에 띈다. 자연부락별로 비슷한 시기에 동제가 열리기 때문에 인근 마을의 제관들 역시 장을 보러 나온 것이다. 제관은 미리 생각해 놓은 상점으로 바로 갔다. 상인은 그가 제사장을 보러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이것은 얼마입니까?” 얼굴을 쳐다보지도 보여주지도 않고 물건 값을 부르는 대로 치른다. 제기부터 제사에 쓰이는 고기, 과일, 초, 창호지등 모든 물건들을 동제 때마다 새로 구입하지만 한 푼도 깎지 않아야 한다.동제가 열리기 전날 밤, 제관과 그의 처는 함께 용계천으로 나가 목욕을 했다. 동제는 제관 부부만이 지내기 때문이다. 새벽 한두 시경 닭이 울 무렵을 맞춰 실과, 고기 다 갖추고 한지 위에 떡가루를 넣고 쪄서는 칼로 자르지 않고 통째로 올렸다. 금새끼를 두 번 둘러놓은 당나무의 허리에는 아무 글자도 쓰지 않은 백지를 접어 꽂고 두 자루의 초에 불을 켰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고 돌아서니 놀랍게도 금새끼에 꽂은 종이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누군가 가까이 와있었다는 소리다. 그 종이를 가져다 글을 쓰면 글씨가 잘 써진다 해서 빼가는 것이지만 누구도 나쁜 짓이라 여기지 않았다. 간절함이 담긴 것이 지닌 영험함을 오히려 모두가 믿었다. 철상(撤床)할 무렵 닭이 울었다. 시간이 잘 맞은 것이다. 그러나 깨어 있었던 건 제관 부부만이 아니었다. 제를 치르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제관과 똑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다시 정자에 모였다. 두루마기에 정장을 하고 저마다 제관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어른이라 할지라도 젊은 제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동제에 올린 음식을 나누어 먹었으나 부녀자에게는 주지 않았다. 어른들부터 차례로 음복(飮福)을 하고 나서 제수음식 장을 본 기록을 열어 그 비용을 똑같이 나누어 분담했다. 제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 보다는 마을의 안녕을 모두가 함께 기원하고 그 보살핌 역시 골고루 나누고자 하는 의미가 컸다. 등짐지고 가는 사람도 동제가 열리는 날 그 마을에 머물게 되면 제례를 따르고 의복을 갖추었으며 음복은 물론 동제를 위해 지출된 경비(經費)도 마을 사람들과 똑같이 냈다. 머무는 동안은 그도 마을 사람의 일부로 인정한 탓이다. 그것을 송계 유사는 꼼꼼히 정리하였다. 동제가 끝난 뒤에도 다음 제관이 정해질 때까지 1년 내내 행실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행여 나로 인하여 마을에 혹은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정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런 그를 귀히 여겼다. `나` 보다는 `우리`를 소중히 여기던 시절이었다.

2011-05-23

<11> 바다를 걷다. 영덕 고래불 명사이십리길

영덕군 병곡면 병곡리에서 영해면 대진리에 이르는 바닷가 길을 걷는다. 고운 모래밭의 길이가 무려 8km에 다달아 명사이십리라는 이름을 얻은 곳, 이곳은 2010년 국토해양부에서 아름다운 해안 도보여행 구간으로 선정한 `해안누리길`의 하나다. 대한민국 서해, 남해, 동해에 이르는 52개 구간 중 솔숲사이로 난 길과 모래밭에 뿌리를 내린 풀들이 내어 준 길, 그리고 고운 모랫길의 감촉을 두루 경험할 수 있다하여 `삼색의 길`이라 불리는 고래불 명사이십리길은 어떤 풍경과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영덕 영해에서 태어난 고려후기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이 유년시절에 상대산(183m)에 올라가 앞바다의 고래가 하얀 분수를 뿜으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고래뿔`이라 말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고래불은 수심이 얕고 물이 맑아 몇 년째 전국 최우수 해수욕장으로 선정된 곳이다. 해수욕장 오른편 둔덕 자그마한 용머리공원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오르면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휘어진 명사이십리 전체 구간이 한 눈에 들어온다.출발지인 고래불해수욕장에서 영리해수욕장까지 약 3km 구간은 솔숲길을 택한다. 빽빽하게 자라 하늘을 가린 소나무 사이로 약 1m 남짓한 폭의 산책길이 고불고불하게 이어져 있다. 쌓인 솔갈비 위로 떨어진 솔방울들과 바람이 불 때마다 스치는 솔향에 몸과 마음이 청정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오른쪽으로 하얀 돌의 길이 나타난다. 갖가지 굵기의 맑은 돌이 박힌 지압로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 본다. 이내 도톨도톨한 돌길에 발이 익숙해진다. 지압로가 끝나는 곳에 자그마한 쉼터가 있다. 고래가 바다 위로 몸을 드러낸 형상과 물방울이 튀는 조각이 마치 솔숲 사이에 바다를 옮겨 놓은 듯 싱그럽다. 고래의 등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는 솔숲을 벗어나 다시 걷는다.영리해수욕장부터는 척박한 모래밭에서 자라는 샛푸른 식물들의 향연이 끝없이 펼쳐진다. 염분기 많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뜨거운 햇살 아래 온 몸을 밀며 악착같이 바다로 가는 갯메꽃 무리와 방풍의 질긴 생명력이 눈물겹다. 풀밭길을 걸으며 문득 내가 걸어 나온 솔숲을 바라본다. 바다쪽 소나무는 해풍을 견딘 탓에 거의 눕다시피 자란다. 모래밭에 닿을 듯 말 듯 한 키 작은 해송들이 결국 숲 속에 죽죽 뻗은 나무를 키우는 것이리라. 이 길은 오래전 해안 초소가 있었던 탓에 초병들이 낸 길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보이는 참호의 흔적은 새삼 분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무너진 참호엔 모래만이 가득한데 제법 고급스런 의자 두 개가 하얗게 바랜 채 놓여있다. 대부분 타이어를 걸쳐 놓은 것에 비하면 그 자태가 매우 이색적이다. 아마도 꾀가 많은 초병이 어디선가 끙끙 날라다 놓은 모양이다. 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밤새 나누던 긴 이야기는 어디로 갔을까? 군데군데 끊어진 철조망이 발갛게 녹이 슬어 뒹군다.조그만 경고 팻말 앞에서 풀밭길과는 작별이다. 그곳은 해안 식물에 관한 연구를 하기 위한 환경부 조사구역이기 때문이다. 바다 가까이로 나가 모래길을 걷는다. 조개껍질 하나 없는 깨끗한 모래밭에는 새들의 발자국이 단풍잎 모양으로 수없이 찍혀 있다. 작고 가냘픈 발자국을 지우고 돌아가는 얇은 파도 위로 내 그림자가 선명하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아직 걸어가야 할 아득한 길이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악착스레 걸어 온 길이 보인다. 그 가운데 온점처럼 서 있는 내가 보인다. 삶의 어느 자리가 이토록 선명하게 생을 생각하게 하였던가.어디선가 새들이 날아온다. 몇 마리에서 몇 십 마리로 순식간에 불어난 새떼가 시끄럽게 지저귄다. 영리해수욕장을 지나 덕천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1.9km 구간은 새들의 세상이다. 조개껍데기와 자갈이 깔린 오목한 곳마다 점박이 알들이 지천이다. 두 개 혹은 세 개씩 낳아 놓고 근처를 떠나지 않았던 새들에게 이방인의 등장은 비상사태일 터, 알들을 보호하려는 모습이 감동스럽다. 지붕도 없는 저 둥지에 어찌 햇볕만이 내리 쬐었겠는가. 분명 비도 다녀갔으리라. 그런 날 어미는 알을 품고 앉아 하염없이 제 날개를 적셨을 생각에 뭉클하다. 걸음을 재촉하자 새들은 조금 더 선회하다 긴장을 풀고 이내 흩어진다.덕천해수욕장에서 솔밭길은 다시 시작된다. 고래불에서 만난 길과 비슷하지만 긴 모래밭을 걸은 후라 그런지 느낌이 다르다. 바다 쪽으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음수대가 있고 솔숲에는 고즈넉한 산책로가 있다. 금방이라도 물을 튕기며 헤엄쳐 오를 것 같은 고래 모형 앞, 쉼터를 만들기 위해 베어낸 소나무의 밑동이 그대로 의자가 되어 있다. 걸터앉아 땀을 식히며 자리를 내어 준 나무의 한 생에 대해 생각한다. 이곳에는 쉼터 뿐 아니라 운동기구, 전화놀이 벤치, 풀장 등 계층을 막론하고 즐길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좀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싶어진다. 머리카락 하얀 할아버지 한 분이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다. 그 소리에 숲이 술렁인다. 나뭇가지들이 두리번거린다. 새와 풀과 길의 귀도 쫑긋 선다.덕천해수욕장에서 대진해수욕장에 이르는 길은 약 송천을 만나 잠시 끊어진다. 송천은 서읍령, 독경산 등에서 발원하여 심산계곡을 지나 약 40여 km를 흐르다 대진해수욕장에 이르는 맑은 하천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잔잔한 물결이 피는 송천은 마치 호수 같다. 폭이 그리 넓지는 않으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으니 잠시 도로를 이용해 송천교를 지나 도착지인 대진해수욕장으로 간다. 바라보는 어느 곳이든 푸른 바다가 푸른 하늘의 팔을 베고 있다. 파도를 벗 삼아 느리게 행복하게 걸어 온 명사이십리길, 삶의 조급한 짐들을 다 내려놓은 나는 자유다.

2011-05-16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10> 낡은 국수들이 부르는 노래 ②

국수를 널면서 할머니는 바람을 살핀다. 반죽 보다 바람에 더 민감한 것이 국수다. 바람이 많이 불면 촘촘하게 널고 바람이 잔잔하면 간격을 조금 넓혀 넌다. 반죽 실패는 드물지만 바람에 의한 실패는 지금도 간혹 생긴다. 갈바람이 불면 국수는 이내 바삭바삭해져 버린다. 너무 빨리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갈바람과 하늬바람이 섞여 오면 눈으로는 차이가 없어 보여도 삶았을 때 동강이 많이 난다. 햇볕에 말리는 국수는 뭐니 뭐니 해도 샛바람이 최고다. 할머니는 대보에서 구룡포쪽으로 불어오는 샛바람, 바다에서 불어오는 갈바람, 산에서 내려오는 하늬바람을 몸과 마음으로 감지한다. 국수 가락이 바람에 살짝 말라 빠닥빠닥해 지면 일단 걷어야 한다. 창고에 보관 했다가 다음날 오전에 한 번 더 말린 뒤 재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단에 필요한 도구는 간단하다. 약 25cm 간격으로 다섯 개의 쇠기둥이 양쪽에 선 재단틀과 손잡이가 양쪽에 달린 큰 칼, 그리고 매무새를 정리하기 위한 사각 나무판이 전부다. 건조장 바닥을 깨끗하게 쓸고 닦은 뒤 풀 먹인 듯 잘 마른 국수를 한 줄씩 걷어 틀에다 올리고 먼저 양끝을 자른다. 그리고는 쇠기둥을 기점 삼아 다시 세 등분으로 자른다. 큰 다발이 흩어지지 않도록 질긴 종이로 띠를 둘러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부러져 바닥에 떨어진 국수 가락은 하나하나 주워 따로 담는다. 세 종류의 국수를 모두 걷어 재단 작업을 하다보면 하루는 참으로 급히 저문다. 아들들이 제 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는 다시 주말이 올 때까지 탁자에 앉아 큰 다발을 풀어 작은 다발을 만들고 상자에 차곡차곡 담으며 간간이 장사를 한다.제일국수공장 오래된 국수틀은 롤러가 세 개인데 요즘 나오는 기계는 큰 롤러가 여섯 개다. 손을 안 써도 자동으로 감기고 순서대로 알아서 척척 옮겨간다. 게다가 한 시간에 서른 포대나 국수를 빼는 기가 막힌 실력을 가졌다. 손도 모자라고 힘도 들어 그것으로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가격이 엄청나다. 게다가 기계의 크기도 제일국수공장 규모로는 감당할 수 없다. 아들들은 고생하지 말고 땅을 좀 사서 조립식 창고를 지어 인부도 좀 고용하고 건조도 열풍으로 쉽게 하라고 하지만 할머니는 그럴 생각이 없다. 돈도 돈이지만 큰 공장에서 만드는 국수가 하나도 부럽지 않기 때문이다. 큰 공장에서는 거대한 롤러로 밀기 때문에 색깔은 희고 매끈해 보인다. 그러나 선풍기나 열풍으로 건조를 시키므로 한 번 삶아 건져 놓았다가 다시 손님들에게 데워 낼 때는 떡떡 붙어서 잘 풀리지 않는다. 비가 다녀가고 눈이 다녀가 까다롭긴 해도 하늘이 베푸는 자연풍만큼 국수 맛을 옳게 내는 것은 없다는 걸 할머니는 잘 안다.“오래 전 우동집들은 손으로 쳐서 면을 만들었어. 고등학교 중학교 졸업식날 짜장면 손님이 몰려오면 감당할 수 없어 우리 공장에 우동 국수를 주문하기도 했지. 물 한 양동이 달라해서 주면 그 물에 하얀 것을 넣어주며 그걸로 반죽을 해달라고 하데. 그 물을 손으로 만지면 매끈매끈 했어. 그게 뭔지 모르지만 우동 국수를 빼면 색깔이 노르스름하고 삶아 놓으면 유난스레 쫄깃쫄깃 했지.”예전에는 날마다 국수를 만들었다. 하루에 40포대나 되는 밀가루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주말에만 약 30포대 정도로 국수를 만든다. 일손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국수 소비 역시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예식장이고 장례식장이고 쉽고 편하게 음식을 주문하는데다 무엇보다 먹고사는 일에 궁색하지 않은 시절이다. 슈퍼에 가면 갖가지 국수가 다 있는데도 아직 국수 삶아 파는 집에서는 제일국수공장 국수를 찾는다. 구룡포초등학교 앞 찐빵과 단팥죽으로 유명한 철규분식도 황외과 앞 할매국수집도 수십 년 단골이다. 장사하는 이들에겐 이윤을 남기라고 일반 국수보다 양을 조금 더 담는다. 요즘은 장기면에서 산딸기축제를 할 때 특산품 홍보를 위해 산딸기 즙을 가져와서 국수를 빼달라고도 하고, 또 콩이 몸에 좋으니 콩가루를 섞어서 콩국수를 해달라고 주문하는 식당도 있다.장터에 세집이 나란히 앉아 국수를 만들던 시절도 옛말이다. 대보국수공장은 아저씨가 돌아가시자 일을 접고 포항 시내로 이사 나갔고 오천국수공장은 떡집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연일에도 셋이 합동으로 차린 국수공장이 있었는데 오래 전 큰 비에 그만 문을 닫았고, 오천에도 포항에도 이젠 가내 수공업으로 국수를 만드는 공장이 없다. 국수공장을 지나면서 봄 햇빛에 국수 마르는 냄새를 킁킁 맡던 기억도, 고운 국수 가락 몰래 끊어 똑똑 분질러 먹던 추억도 사라졌다.“지금 걸린 간판 나이가 마흔한 살이야. 개업할 때 우체국장이 직접 나무판에 써서 걸어주었지. 그 양반은 혼자서도 국수를 자주 끓여 먹곤 했어. 글쎄 포르르 끓어오를 때 찬물을 솔솔 뿌리고 또 끓으면 찬물을 뿌려가며 잘도 끓였지. 우리집 국수를 유난히 좋아하던 그 양반도 돌아가셨다.”할머니는 국수가 한없이 기특하다. 이 가느다란 것에 묶여 세상 구경 한 번 옳게 못하고 살았지만, 아이들을 다 가르치고 시집 장가보내고 집도 사주게 했다. 국수를 만들며 시름을 건너왔고 국수를 주고받으며 이웃과 정분을 쌓았다. 그러나 이렇게 국수 가락 쥐고 노는 재미도 언젠가 힘이 달리면 그만 둬야 한다. 거친 손끝에서 뽀얗게 묶이는 국수 다발이 서서히 저무는 장터를 보고 있다. 탈칵탈칵 제일국수공장 국수틀 돌아가는 소리, 샛바람이 불면 좋아라 국수 가락 마르는 소리, 언제까지 그 노래 들을 수 있을까?

2011-05-09

<9> 낡은 국수들이 부르는 노래 ①

41년째 이어온 구룡포 장터 국수공장치렁대는 면발새 세월의 더께 켜켜이 구룡포 장터 제일국수공장, 할머니가 쌓인 국수 가락을 한 줌씩 저울에 올려 정확히 가늠하고는 아래 위 척척 길이를 맞춘다. 각을 세운 탁자 모퉁이에서 딱풀 한 점 콕 찍어 흰 종이 띠를 두른다. 벽에 기댄 밀가루 포대들과 긴 국수틀, 추가 달린 묵직한 저울이 할머니처럼 오래 그곳에 살고 있다. 감포가 고향인 이순화 할머니(72세)는 24살에 구평리 당수나무 부근으로 시집을 왔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휘휘 불어오는 바다 가까이에서 호롱불을 밝히고 시어머니와 시누이, 동서 내외가 함께 살았다. 몇 년 후 옹기장수가 세를 얻어 장사를 하고 있던 집을 샀다. 구룡포 장터에 있는 작고 허름한 일본식 목조 가옥이었다. 바람이 큰 날에는 집까지 파도가 밀려왔다. 시어머니께서 옹기장사가 팔다 남은 옹기를 그대로 받아 놓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하게 된 옹기장사. 오천 옹기공장에서 옹기를 가득 실은 달구지를 끌고 소가 비포장 길을 걸어왔다. 외상으로 한 달구지를 받아 다 팔면 갚고 또 받아 팔고. 그렇게 벌어 학고방 같던 집을 조금씩 수리하며 살았다.옹기장사를 할 때 곁에 대보국수공장, 오천국수공장이 있었다. 당시 구룡포에는 영남국수공장, 털보국수공장등 모두 합치면 여덟 개나 있었는데 어디든 국수는 팔렸다.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해 옹기장사는 뒷전이고 날마다 놀러나갔다. 국수공장을 하면 일이 많으니 아무래도 술도 덜 마시고 덜 나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옹기장사를 접고 국수공장을 열었다. 기계를 사들이고 기술자를 고용해 2년 동안 부지런히 보고 배웠다. 일은 고되지만 벌이는 옹기보다 나았다. 할머니 나이 서른한 살에 시작한 일이니 꼬박 41년 동안 가내 수공업으로 국수를 만들어 온 것이다.너나 할 것 없이 식구는 많고 먹을 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시래기고 뭐고 된장 풀어 끓이다가 굵은 국수 가락 뚝뚝 분질러 넣고 양을 부풀리면 온 식구 둘러 앉아 허기를 채웠다. 잔치고 뭐고 큰일을 치를 때도 국수를 삶았다. 나무상자로 네 상자 다섯 상자씩 사다가 가마솥을 걸고는 커다란 채반에 줄을 달아 국수를 잔뜩 올려놓고 물이 팔팔 끓으면 푹 집어넣었다가 건져 찬물에 씻었다. 잘 익어 말간 국수를 한 덩이씩 돌돌 말아 광주리에 쌓았다가 그릇그릇 담아 싱거운 멸치 국물을 얹은 게 고작이었지만 손님들은 국수 그릇 앞에 행복하게 모여 앉았다.밀가루는 포항 도매상에서 가져 왔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반죽이 적당치 않아 실패도 했다. 그러나 실패한 국수는 다시 반죽 할 수 있었으므로 몸이 고될 뿐 손해는 없었다. 국수는 굵기에 따라 20반, 22반, 24반, 26반, 27반등 여러 가지인데 숫자가 클수록 면이 가늘다. 지금은 크게 우동, 중면, 소면으로 나뉘지만 예전엔 우동면 보다 훨씬 더 굵은 면도 만들었다. 처음엔 나무로 된 반죽통이 달린 기계를 썼다. 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대꼬챙이로 일일이 받아 건지고, 걸고, 길이를 눈으로 가늠해서 칼로 잘랐다. 젖은 국수를 널고 말리고 걷어 재단을 마치기까지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데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야속한 할아버지는 생각처럼 일을 많이 도와주지 않았다. 여전히 틈만 나면 친구 찾아 술 찾아 마실을 다녔다. 종종거리며 국수공장 일을 마치면 집안일이 할머니를 기다렸다.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겨우 빨래를 할 수 있었던 고단한 세월이었다.“우리 영감? 살아계셨으면 나와 네 살 차이니 올해 일흔여섯 이지. 그렇게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던 양반은 결국 쉰둘에 위암 수술을 받았어. 그리고 예순에 돌아가실 때까지 대구 병원에 12번이나 입원을 했지. 수술하고 술만 안 잡쉈어도 더 살았을 텐데….”할아버지께서 앓아누우면서 그나마 거들던 손을 놓자 할머니는 두 아들의 힘을 빌어야 했다. 아들들은 기특하게도 할아버지 빈자리를 야물게 채워 주었다. 큰 아들은 단기병으로 지서에 근무 할 때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쉬고 했는데, 아침에 퇴근하면 바로 일을 도왔다. 그리고 다음날엔 종일 마른 국수를 재단까지 해 주고 저녁 무렵 출근을 하곤 했다. 장터에 있던 국수공장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세월에 제일국수공장이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던 건 두 아들 덕이다. 모두 장성해서 번듯한 직장을 가졌지만 지금도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말마다 들어와서 할머니와 국수를 만든다. 제일국수공장은 이제 일주일에 한 번 국수틀이 돌아가고 건조장 가득 뽀얀 국수가 널린다.밀가루와 소금 그리고 물이 국수의 모든 재료다. 국수를 만들기 이틀 전, 할머니는 고무통에 소금을 넣고 물을 부어 나무로 휘휘 저어 놓는다. 덜 녹은 소금과 이물질들이 가라앉고 난 뒤 맑은 소금물만 떠서 반죽에 쓰기 때문이다. 반죽통에 밀가루를 세 포대 붓고 그 위에 맑은 소금물과 맹물을 섞어 반죽을 하는데 이유는 소금물로만 하면 국수가 짜지기 때문이다. 간도 간이지만 물과 밀가루의 비율을 잘 맞춰야 되지도 묽지도 않은 반죽이 된다. 그건 오로지 할머니 몫이다. 반죽이 되면 작은 아들은 롤러로 납작하게 밀며 돌돌 감는다. 다 감으면 두벌치기에 들어간다. 처음 밀어 놓은 것을 두 장으로 겹쳐 다시 한 번 조이며 롤러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더욱 납작하고 야물어 진다. 그 후에는 국수 크기에 따라 틀을 끼우고 국수 가락을 뺀다. 요즘은 기계가 좋아 국수를 걸칠 시누대를 차곡차곡 넣어 놓으면 탈카닥 탈카닥 국수 가락을 걸고 올라가고 저절로 알아서 적당한 길이로 잘라진다. 큰 아들은 얼른 시누대에 걸린 국수를 들고 뒷마당과 옥상에 굵기별로 분류해 넌다. 세월이 할머니와 아들들의 손발을 척척 맞게 했다.

2011-05-02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8> 저 바다에 고래가 살았다 ③

80년대 중반부터 고깃배는 사라지고새로 허가받을 날 기다리다 세월만… 그 당시만 해도 뱃사람들 하는 일에는 일본 사람들 풍습이 쪼매씩 남아 있았다. 그네들이 이래 보믄 말이지. 무신 날만 되므는 찹쌀모찌 그거를 마이 맨들았그든. 집을 새로 지우든지 배로 새로 하믄 큰 다라이로 한 가득 모찌를 맹글어가 속에다가 돈으로 옇는기라. 떡마다 다 옇는기 아이고 드문드문 옇지. 그래가 다라이로 이고는 젤로 높은 데로 올라가가 이래저래 막 떤지는기라. 이짝으로 내삘고 저짝으로 내삘고. 그라믄 돈 든 모찌로 주워야 재수로 좋타꼬 마캐 몰리 가그든. 묵을 기 읎??시절이니 가릴 기 뭐이 있겄노,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지. 와 떡을 떤지고 했나 인자 가마이 생각해 보믄 그기로 주울라카믄 수그리야 안되나. 배도 글코 집도 글코 그 앞에서 수그리믄 절로 하는택이 아이가. 우리 배들도 그기를 쪼매썩 따라하곤 했다. 그라지만 인자는 누가 그란 거로 하나? 전번에 우리 사우도 배 새로 한다 캐서 포항 가 봤드이 그마이 쓸데읎??짓으로 안하데. 배에서 이래 내려오는 나무를 하나 놔놓고 거다가 음식을 잔뜩 채리더라고. 채리가지고는 마 여럿이 모여가 묵고, 다 묵고 난 뒤에는 배에서 내리놓구 말드라. “살아 생전에 다부 고래잡을 날 있을라는가”“기적 울리는 고깃배 기다릴 날 있을라는가”가마보자. 내가 고랫배로 73년도에 시작해가 85년도에 마쳤으이 어불더불 십이 년이나 한기라. 그때 전국에 고랫배가 스물 한척인데 스무 척이 경남이고 한 척이 경북인데 그기 우리 배 용운호였는기라. 하마 내 나이 팔십 둘이니 손 놓고도 20년이 훌쩍 지났구마. 그때는 이 나라 저 나라 고래잡는 나라끼리 조합맨키로 계가 있았는데 영국 아주머이가 대장이라. 85년도에 그 아주머이가 말하기를 딱 5년만 잡지말자 캤지. 그 이유가 말이다. 이래 잡아 들루다보믄 씨알이 다 말라뿐다, 그라이 쪼매 쉬었다가 다부 잡자 그 말이었재. 그라이 5년 후에는 허가를 다부 해가주고 고래를 잡는다 캤는기라.그 당사 우리 촌놈들이 중앙청에 참 마이 올라갔데이. 가이 첫 먼저로 느그가 그간 잡은 맨큼 뭐이든 허가로 바꿔 주끄나 하데. 그래 다부 울산에 내리가이 돈 있는 놈으는 트롤선 할라 이라고 우리 같이 돈 읎??놈들은 우짜든동 배로 지대로 값을 쳐가 팔라 카고 지각각 원하는 기 달랐는기라. 와 그렇노 하믄 죽변부터 저 속초꺼정 스물 한척이나 트롤선으로 허가를 내줘뿌믄 우리는 마캐다 앤 죽나. 그래 마 막 데모를 해가 트롤선 허가로 막았지. 그라이 이번에는 지각끔이라. 콜프장 허가 받는 놈, 택시 허가 받는 놈, 지 원대로 받드라. 우리는 뭐나 규모도 약하지럴 돈도 읎지?? 돈 있는 놈이사 즈들 뜻대로 하지마는 읎??놈들은 이도 저도 숩지 않은 기라. 그래 스물한 척에 세 척일랑 고래가 올개는 어데로 가고 오는지 살피는 수용선으로 하고 열여덟 척만 허가를 바꾸차 이래 됐다. 한 사람이 두 척 세척 가진 경우에는 이나저나 뭐이 아숩겠노.내는 아무것도 바꾸치 않고 고래를 앤잡아도 고랫배 허가를 가주 있겠다 한기라. 그라지만 그게 어데 쉽나. 바다에 나가 고래로 잡으므는 괘않지만 월급있재, 또 묵여야 되재, 행여 고래 잡아 들루나 감시하는 영국사람 따라 댕기는데 그눔 월급꺼정 줘야되재. 그라고 또 돌아 댕기는 장소 죄다 적아가 영국에 마캐 보고꺼정 해야 하는 기라. 속시끄럽기가 이만저만이 아이지. 그래 마 이래저래 5년이 지나이 이기 뭐 아무 소식도 읎는??우야노. 치아뿌리야재.대구 동청에 가믄 서류가 한 짐이라. 5년 후에 다부 한다고 말해놨으이 고랫배 안하는 사람도 서류를 여가 앤글나. 고랫배 타던 선원들도 옇고, 오징어배 타던 선원들도 옇고 마캐다 고랫배 할라 캤다. 내는 솔직한 말로 그때는 마 하믄 하고 말믄 말고 했지. 해상업이 어데 좋은 일만 있나 바람만 불어도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오는 긴데.그란데 또 몇 년 지나 중간에 뭐시라 고랫배 우짜고 저짜고 말이 있는 기라. 그래 내 생각했지. 고랫배가 스물한 척에 세 척이 지금도 있으이 나무지 열여덟 개를 다부 허가로 주믄 우얄까? 하지만도 세 척을 줄똥 열 척을 줄똥 모르지. 대통령이 빽이 있다고 마음대로 하나, 경상도에 고랫배 죄다 주믄 전라도는 농사만 짓나. 전라도도 배하고 싶은 사람 있다는 말이지. 형님요, 내 좀 허가 주소 하믄 앤 줄 수도 읎?? 그렇다고 빽으로 주나. 빽으로 주믄 대가리 싸움나지. 그라믄 예전에 고랫배하던 사람들로 우선 시킬랑가? 그라믄 뭐하노. 생각하나마나 을매 안가가 쏘옥 드가뿌고 말드만, 요순간에 고랫배가 또 들썩들썩 하는 기라. 인자 포항방송국에서 고래가 이만치 있는데 잡아가 일본에 수출로 하믄 몇십 억썩 벌어가 올 낀데 이기 와 안하고 이라노 하매 앞으로 고랫배 허가를 내 줄라카믄 전에 경험 있는 사람으로 줄라꼬 했단 말이다.그때 우리 큰 아들이 그라데. 아부지요. 고랫배하던 사람들이 다 살았나카믄 몇 키 안 남고 다 죽았어요. 지가 아부지 뭐시 해가 될똥 앤 될똥 그거는 모르지마는요 한 분 해볼끼요. 그래 마 니 맘대로 해봐라 했더이만 차로 타고 울산으로 부산으로 어데로 앤댕긴데가 읎드?? 언젠가 서울서 대학 선생들이 낼로 찾아와서는 이래저래 묻고해가 내 잡은 나가수 고래 사진도 우예 알아가꼬 책에 얹아 놨드란 말이지. 근데 이 사람들이 보이 몇 년도에 어느 배가 몇 마리 잡고, 어느 배가 몇 마리 잡았는지 싹 다 기록해 놓은 기라. 그래 우리 아들이 그기를 가주고 참작을 해가 용운호가 언제 어느 놈 몇 마리, 흥안호가 언제 어느 놈 몇 마리, 이래 서류로 꿰매가 올리 놓기는 했다. 마 안되믄 고만이고 올리나 보자고 올리는 놨다마는 앤즉까지 소식 한 장이 읎?? 모리겠다. 살아생전에 다부 고랫배 몰고 나가 고래 잡을 날 있을라는가. 항구다방에 앉아 저거 바다로 보믄서 빽빽 기적 울며 들아오는 배 기다릴 날 있을라는가.

2011-04-25

경북 해양문화 속 人·生·길 <7> 저 바다에 고래가 살았다 ②

에미고래 잡아온 날 구룡포앞바다선새끼고래 밤새도록 희한한 울음소리 사램이 고래만같으믄 자식 놔 놓고 달라날 눔 아무도 읎??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고래, 빌기도 많이 빌었지 고래가 말이다 굉장히 영리하데이 소보담 더 영리해. 이래 보므는 우리가 고래를 발견 앤하나. 보믄 부부간에 새끼를 데불고 가는 기 보인다. 식구 세키가 이래 막 가는기라. 철선들은 일본말로 소나라카는 걸 갖고 댕겼지. 소나는 일본 사람들이 쓰던 기곈데 고래 잡는데는 왔따지만 다른 잡어들이 마카 피해를 보는기라. 그래가 일본에서는 법으로 쓰지 몬하게 했지. 그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다가 썼다. 그 소나를 고래가 잠수로 몬하게끔 물 속에 잡아옇고 요래 15° 요래 15° 그라니까 30° 각도로 전파를 쏴뿌는기라. 고래도 귀가 있데이. 가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카믄 미친다 아이가. 막 튀 오르지. 한 10분만 그래 튀쌌타보믄 마 퍼져뿌리지. 우리 목선들은 소나가 없으이 그저 마 대포 갖고만 잡았다.신랑각시 요래 가다보믄 제일 뒤가 숫놈이라. 아하고 마누라하고 앞세우고 지는 뒤에서 가는기라. 암만 쫓아도 꼴찌서 간다. 희안채? 그라다가 배는 자꾸 달라붙재, 어린 새끼는 심이 딸려 쳐지재, 아고 안되겠다 싶으믄 에미가 요래 지 날개에 새끼를 언자가 간다. 그기로 가마이 보믄 사램이 고래만 같으믄 자석 놔 놓고 달라날 눔 아무도 없을기라는 생각이 든다. 조매 맴이 짠하지만 우야겠노. 내는 사램이고 지는 괴기니. 그래 다부 맘 붙잡아 매고 좆는다. 우리는 숫놈부터 잡아야 하는기라. 그기 말이다. 암놈부터 죽여뿌믄 숫놈은 막바로 달라빼지만 숫놈에게 포를 놓으면 암놈은 절대 안달아나고 주위를 맴돈다. 교미할 때는 또 우짜는 줄 아나? 희안테이. 이래이래 가다보믄 고래들이 마 우글우글 한기라. 그기 암놈 하나에 숫놈들이 예닐곱마리썩 몰려있다. 그때도 순서대로 잡아야 하는기라. 암놈부터 쏴뿌렀다가는 다 놓친다. 숫놈 다 달라뺀단 말이다. 숫놈들은 마 잩에??죽그나 말그나 그저 암놈만 쫓는기라. 한 분은 이란 일도 있었다. 에미고래를 잡아 데불고 왔는데 고날 밤새도록 구룡포 앞바다에서 희안한 소리가 나는기라. 동네 사램들이 마카 잠을 설쳤는데 알고 보이 새끼고래가 지 에미 잡히간거로 알고 마 방파제 너머 꺼정 와서는 울었던기라.해상사업을 할거 같으믄 미신을 마이 믿어야했다. 영감 할무이 비가오나 눈이오나 음력 초이틀 날에는 절로 하나 맞춰놓고 거 기도하러 가는기라. 절도 쪼매난 절이재. 몬 잡을 거 같으믄 해나 부정타가 몬 잡았는가 싶아가 또 점바치한테 물으러 간다. 가믄 뭐가 걸리가 옛날 선조 뭐시 할배가 읃??잡술라고 한다카고 그라믄 또 굿을 한다. 온마리 고기에 삼실과 사고 떡하고 술받고 또 점바치가 용왕님 문어 좋아한다고 하믄 문어 한 마리 산다. 문어는 비싸그던. 비싸이까네 한 마리로 사믄 요 갖다놓고 빌고 조 갖다놓고 빌고 그랬다. 몇 십만 원썩 들았다. 그때만 해도 몇 십만 원이라카믄 돈이 마이 큰기라. 크고 말고재. 그란데 그래 굿을 하믄 놀랍기도 하재. 또 한 마리 잡아들루는 기라. 그 재미로 절에 가가는 죽을 똥 살 똥 영감 할매가 비는기지.큰 고래는 자주 몬 잡았다. 목선이니 큰 놈으로 만나믄 다부 달라빼야지. 꽁지로 툭 치믄 우야노. 50자 짜리는 높이가 사다리 놓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큰데 우예잡노. 새끼 서른다섯 자 짜리 만해도 이짝에 사람이 서믄 저짝 사람이 앤 보인다. 그 큰 놈이 바닷물 속으로 쑤-욱 드가뿌믄 배가 우예 되겠노 말이다. 어쩌다 쪼매 큰 놈을 잡으므는 창 같은 거로 배때기를 푹 찔라뿔고 기계로 돌리가 창에 주사기맨즈로 에어를 여야 한다. 에어를 여믄 바람이 붕-드가 고래가 안 뜨나. 그라믄 인자 끌고 오는 기 쪼매 수월해 지는기라. 고기는 좀 상치. 그라이 싸게 끄집고 와가 싸게 헤쳐야 한다. 부두에 올리자마자 이양 끊카야 한다. 고래가 떠억 들아오믄 경매 보는 사람들이 지다리고 있다가 하마 이기는 몇 자고 요기 살키 을마 나온다카는걸 다 알고 있다 말이지. 그래 인자 경매를 옇는데 단가가 을매다 을매다 하믄 막바로 해부하는 사람들이 마 지다란 칼로 이 만치씩 뜯아내는기라.고것도 나날이 해 놓으이 끊가내믄 딱딱 맞다. 껍데기는 발라내고 살키만 끍아내??기 희안타. 그래가 얼음 쑤그리옇고 그라고 인자 경매보던 사람들도 집에 냉장고 채려놓고 대가리 꽁지 같은 거는 인부들로 시키가 즈들 집에도 실아다 놓는기라. 고래는 말이지 한개도 버릴 기 읎?? 아주먼네들이 고래 뼈가치 가주고 불로 활활 때가주고 고기를 삶아가 썩썩 상그라가 파는데 경주, 포항 사람들이 사러온다. 그라믄 마 을매다 을매다 값으로 매기고 그럼 몇 관 줄라카믄 팔고 했재. 돈 있는 사람들으는 살키를 사 묵지만도 읎??사람들으는 그랄 수 있나. 그란데 희안한 거는 제각끔 입맛이 천지차인기라. 어떤 사람으는 전신에 지름치인 껍디기를 참말로 잘 묵는다. 내 아는 울산 포장 하나는 살키는 절대로 안 묵고 내 지름치만 사 묵는더라. 하루에 한 분썩 그 지름치로 안 묵으믄 몬 산다카드라.살키 떡떡 비가고 남는 껍질로 크다란 솥에다 옇고 불로 땔거 같으므는 지름이 둥둥 뜬다. 그라믄 그 지름을 도람에 붓는기라. 그 지름은 비누공장에서 사러오지. 지름이 어느 정도 빠지고 난 찌끄라지는 또 우야노 하믄 그 또한 묵는 사람이 있는기라. 그기 바로 고래과잔기라. 우리 클 때 저 대보 사는 사람들으는 살로 서 말을 몬 묵고 시집왔다 캤다. 살은 읎??고작 보리뿐이었재. 논이 있는 거는 골짝인데 논이 있는 사람들으는 그때만 해도 부자인기라. 전신에 밭이고 고구마 심쿠고 보리 심쿠고 살밥으는 제사 지낼 때나 구경했지. 우리 마누래가 대보 사람인데 지금도 누가 보리밥 묵으러 가자카믄 막바로 돌아앉는다. 그마이 몬 살던 시절에 지금처럼 뭐시 묵을게 뭐이 있었겠노. 눈깔사탕도 돈이 있어야 사 묵고 엿가락도 냄비나 고무신이 있어야 사 묵지. 그라이 고래과자는 최고였다. 하모 최고품이지. 그눔을 질겅질겅 씹아 묵으므는 쫄깃쫄깃한 기 고소했는기라.

2011-04-18

<6> 저 바다에 고래가 살았다 ⑴

“고래 꿰차고 들어올 때 그 기분 우예 말로 다 하노” 울산 철선들으는 2월 초순부터 조업을 시작했지. 장생포를 출발해 젤로 먼저 경기도 서해안 소청도로 갔다. 거그서 한 달 정도 조업하다가 쪼옥 내리와가 고래들이 동해안 울릉도 쪽으로 싸악 빠져 다시 북상하므는 마 한 철 조업이 끝났지. 그라지만 우리 목선들으는 멀리 몬갔다. 근방에서 조업으로 했는데 보리가 누렇게 익을 때쯤 대보(호미곶) 저 짝 바다로 고래 떼가 마 풀쩍풀쩍 솟으며 왔다. 보믄 마 멋졌는기라. 철선에는 보통 해부장꺼정 데불고 댕겼으이 한 12~13명이 탔지마는 목선에는 보통 7명 태운 배가 있았고 많아봤자 9명인기라. 선장 있고 기관장 있고 젤로 으른인 포장이 있았다. 법적으로는 선장이 으른이지마는 실제로는 포 쏘는 사람, 포장이 젤로 으른 인기라. 또 밥하는 화장이 있고 2등 세라, 1등 세라 그라고 숩게 말하믄 밤으로 경비를 서는 도방새가 있았다. 도난사고라든가 화재예방 무시 그란 기를 책임지는 사람이재. 또 갑판장도 있았고, 조기장도 있았고, 보조역할을 하는 남부두도 있았다. 고랫배 타는 사람들으는 뭐시 눈이 좋아야 한데이. 고랫배에는 지다란 망루라카는 기 있고 그 우에 망통이 있았는데 거는 화장도 올라가고 포수도 올라가고 날씨가 춥으므는 서넛이 교대로 내 오리락거렸다. 올라가믄 첨에는 쪼매 겁도 나지마는 이내 기분이 좋아진다. 망루 끄트머리 망통에 올라앉아 고래를 발견할 때는 180°로 샐피고 고래로 발견한 후에 고래가 마 물 속으로 다부 푹 드가뿌믄 그때는 360°로 살핀다. 우예그랬노카믄 고래란 놈이 콧구멍으로 숨을 수고 다시 바다로 드가뿌믄 이눔이 뭐시 어데서 다시 튀 나올 똥 모리는기라. 그래그래 고래를 발견하믄 첨에는 엔진으로 팍 돌리고 시커먼 연기로 퍽퍽 내지마는 이내 속력을 낮차가 고래 가는대로 살살 따라 붙인다.작은 배는 선장이 붙이고 쪼매 큰 배는 마 지각끔 몫이 있아가 손발로 척척 맞춰가매 가찹게 붙인다. 망망대해에서 이래 댕기다가 고래를 터억 보믄 말이지 누구라도 마 먼저 씨게 괴함을 지르는 기라. 우예든동 뭐라카든지간에 남이 알아들으믄 되는 기재. 높은데 망통에서로 보믄 물속으로 이래 고래가 가는 기 보인다. 그기로 `이로`라 카는데 이로를 보고 고래 머리가 가는 코스로 배가 따라 붙도록 지시를 해줘야하는 기라. 왼쪽으로 나오믄 `보루`, 정면에서 나오믄 `헷또`, 인자 오른쪽으로 나오믄 `시라보루`. 고래가 다시 튀 나오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주깨는기지. 그란데 망루에서로 지껄이믄 이 아래꺼정 잘 앤 듣기재. 그래 인자 호수로까 맨든 나발문지로 생긴 거로 망통에서 소리치믄 한눔이 중간에 귀로 대고 듣고 있다가 바리 기관장에 전해주는기라. 이기는 뭐시 한 치도 삐뚤믄 안된다. 딴 배도 다 한가지지마는 고랫배는 맘이 화합이 되야 했는기라. 일으는 쪼매 몬해도 되지만 선원들이 화합으로 앤하믄 몬 쓴다.옛날에는 헛빵이 많았다. 그라다가 울산에 고랫배 두 척 갖고 있는 회사가 있았는데 그 집 아들이 수산대 나와가 가다나수라는 거로 맨들었다. 창살 아래 네 가닥을 줄로 묶아 놓은 기재. 줄 뒤에 닝구라고 철사까 만들어가 한 방 맞으믄 가지가 벌어져가 다시는 앤 나오도록 했는기라. 우짜다 그기 고래 등가지로 빗나가믄 등가지 살이 마 다 나가 뿌리는데 그기는 헛빵해도 다시 감아가 썼다. 첨에는 총 끝이 빼쪽했다. 그란데 가마이 보이 우리 와 물 우에 돌로 던지믄 앤드가고 탕탕 튀 오리는 거 맨쿠로 물살이 있으니까네 자꾸 튀 오리는 기라. 그래 낸중에는 끝을 뭉툭하게 끊았다. 뭉툭하므는 더 안 들아갈 거로 알았는데 뭐시 잘 드가고 물 우로 튀는 게 없는 기라. 고래가 물 우로는 3분의 1밖에 앤 올라오고 3분의 2는 물 밑에 있으이까네 맞추기가 힘들었다. 물결 오리락 하재 배는 가마 있나 지도 오리락 하재 경험이 읎으??어렵지. 이래 나가가 마 `나가수` 같은 거로 한 마리 잡으므는 딴 거는 앤 잡는다. 워낙 크이까네 글치. 전에는 뭐시 나가수로 두 마리로 잡아 들룬 역사도 있다하더만 그거는 몇 년 가가 한 분썩 있을까 말까고 보통 나가수라꼬 잡으믄 한 마리만 차고 들아오고 했는기라. 욕심 난다고 닥치는대로 할 일이 아니었재.근방에서 고래를 잡으믄 젤로 가차운 데로 간다. 포항꺼정 갈라믄 멀그든. 항에 배들 꽉꽉 찼재, 시간 오래 걸리재, 대보등대 있는데서 잡아가 구룡포꺼정 들어올라카믄 십 리인데, 포항 들어갈라카믄 이십 리인기라. 거다가 또 팔고 돈 찾아와야하이 귀찮시럽고, 아침에 일찍 나가야 하이 불편코, 그래마 젤로 가차운데로 가는기라. 죽변도 첨엔 그기 읎았는??하도 고래로 잡으이 거서 위판하고로 허가를 받아가 겨우 생겨난기라. 그라이 고 죽변 근방에서 잡으므는 보이스로 `선주 올라오시오` 이리 치는기라. 배는 거가 풀아놓고 기다리믄 선주가 다부 가가 잡느라 욕봤다고 안주하고 정종 한 병 사가 배에 올리주는기라. 경매하믄 10분에 3은 선원들, 그라니까 100만원 받으므는 30만원은 선원들로 주고 나머지는 지름대고 뭐시 뒷바라지 했으이 선주가 갖는기지.고래를 꿰차고 들어올 때는 말이지. 기분 그기로 우예 말로 다 하노. 딴 배는 잡아도 그냥 뛰-이하고 오는데, 우리 배는 잡으믄 빽~빽 씨게 기적을 불어 제치치고 말이재. 멋졌데이. 부두에서로 아- 고래 잡았다 카믄서 몰리들고 기분 좋지. 좋구 말구로. 어른 아 할 것없이 마카다 구경을 나오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읎데?? 개들꺼정 기 나와가 동네가 다 들썩들썩 했다.맨날 나갈 수 있나. 바람 불아도 앤되재. 비가와도 앤되재. 하모, 몬 나가는 날로 더 많지. 그때는 인자 고래 잡을 때 젖았던 줄로 말리고 인자 다음 작업을 위해 가주고 로프 같은 거 풀아가 다시 감고 딴거 미비한 거로 갑판장이 챙기가주고 밑에 사람들하고 배 청소도 하고 그랬는기라.

201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