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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명절엔 칼등

면도용 양날 칼이 있다. 어렸을 땐 흔히 상표명인 `도루코`로 불렸다. 전기면도기가 보편화된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도루코 하나씩은 거울 선반에 놓여 있곤 했다. 눈에 잘 띄었기에 급하면 연필깎이용으로도 쓰였다. 필통 안에 있어야 할 학용품용 칼이 없으면 별 생각 없이 도루코를 집어 들곤 했다. 손잡이도 없는데다 얇고 양날인 칼은 어린아이가 만지기에는 위험했다. 예쁘게 연필을 돌려 깎을 욕심에 무리하다가 손끝이 베이고 손톱 끝을 날리곤 했다. 두렵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아쉬우니 자꾸 손이 가곤 했다. 그 와중에도 의아했던 것. 손잡이가 없어도, 칼날이 얇아도 참을 수 있는데 왜 도루코 칼날이 아래위로 양면일까. 홑 날이면 손가락을 안 다칠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면도를 하기에 나름 최적화된 효율적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그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크면서 자연스레 그 의문은 해소되면서 덤으로 이런 단상 하나를 얻었다.칼이 제대로 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칼등이 받쳐 줘야 한다는 생각. 즉 칼은 칼등이 있기 때문에 제 칼날을 빛낼 수 있다. 아무리 잘 드는 칼이라도 칼등이 없으면 위험하다. 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칼등이라는 보호대가 있기 때문에 맘 놓고 칼 손잡이를 쥘 수 있다. 한쪽 날마저 잘 드는데 등마저 날렵한 칼날로 이루어져 있다면 아무래도 잡기가 저어된다. 양날 도루코로 연필 깎다 손끝 베던 것처럼 움찔하게 된다. 필요악인 칼날은 칼등이 있기 때문에 칼잡이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양날 달린 시퍼런 칼날로 옳고 마땅한 이야기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뭉툭하고 덤덤한 칼등이 감싸는, 좋고 그러려니 한 이야기도 나쁠 것은 없다. 칼날이 바른 이야기라면 칼등은 좋은 이야기이다. 칼날이 이성이라면 칼등은 감성이다. 칼날에 칼등이 따르는 이유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설날이다. 바르고 이성적인 것도 괜찮지만 좋고 감성적인 보따리들을 더 많이 펼치는 명절 연휴가 되기를 바라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8

옵션 인생

친구가 새 차를 샀단다. 해외에 사는 친구인데 망설이다 국산차를 샀단다. 비슷한 연비의 도요타나 혼다에 비해 조금 싼 것도 있고 애국도 하고 싶어 그렇게 했단다. 친구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 국내에서보다 싼 가격인데다 서비스에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십여 년 이상 그 차종을 몰았던 남편도 별 불만이 없더라는 말로 나는 무조건 잘 샀다고 응원을 했다. 그런데 친구 말이 의미심장하다. 차를 사긴 했는데 찜찜하단다. 알람 장착하고 방수 코팅하고 등등, 약간씩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차 값이 올라갔기 때문이란다.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당연한 현실이므로 나는 이런 카톡 문자를 전송했다.“기본으로 시작해 옵션으로 마감하는 게 삶이다.”그렇다. 짧은 여행에서도 그런 걸 느낀다. 패키지여행의 최대 묘미는 싼 값에 편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거다. 항공료도 싸고 숙박비도 할인이 된다. 자유 여행에 비해 움직임이 타이트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자유여행에서 느껴야 할 불안이나 압박에 비하면 참을 만하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고 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는 패키지여행만큼 편리한 것도 없다. 하지만 패기지 여행의 최대 약점은 바로 옵션이다. 관광지마다 상점을 순회하는 것이 애교 섞인 불만이라면, 관광 코스를 덤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뭉근한 압박이 된다. 이럴 경우 나는 심리적·신체적 위해가 걱정 되지 않는 한 무조건 옵션을 선택한다. 어차피 여행사에는 옵션 항목 전제하에 일정을 짠다. 그러니 옵션 사항보다 나은 일정을 감행할 자신이 없으면 그 일정을 따르는 게 속편하다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옵션은 기본에 없는 쾌락이나 즐거움을 수반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옵션을 택할 이유도 없는 게 인생이다. 내 책무를 줄이고 싶을 때 기본을 속삭이고, 내 위안을 구하고 싶을 때 옵션을 외치는 게 삶이기도 하다. 기본 없는 시작 없고 옵션 없는 마감 없는 게 생이더라. 중요한 건 기본이든 옵션이든 한 번 택했으면 그걸 즐기면 그만이라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5-02-17

1달러 단상

캄보디아에서는 1달러의 힘이 세다. 앙코르와트의 도시인 씨엠립에서는 적어도 그렇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1달러의 위용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비자와 입국을 담당하는 심사대를 통과하려면 1달러의 웃돈이 필요하다. 일렬로 앉아 있는 담당자들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원딸라`를 외친다. 입국 수속 때 웃돈이 필수처럼 따라붙는 곳이 이곳 캄보디아란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은 터라 요구하는 그들에게 1달러씩을 헌납해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다. 입국을 하려는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는다. 웃돈을 주지 않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입국 지연을 시키기 때문에 팁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불합리한 관행조차 그 나라의 문화려니 하는 마음이 있어야 편한 여행이 된다. 캄보디아에서 1달러는 어디서건 유효하다. 호텔 매너 팁은 당연한 거고, 급할 때 도움을 주던 현지 보조 가이드에게도 1달러,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꼬마 악동에게도 1달러, 수상가옥촌 배 위에서 앵벌이하던 아기에게도 1달러. 그렇지, 전신 마사지하던 안마사에게는 고마운 나머지 5달러의 팁을 건네기도 했구나. 그러고 보니 입국 심사 때만 강제적 팁이지 나머지는 스스로 우러난 팁의 행렬이었다. 단 며칠간의 씨엠립 여정은 그렇게 1달러에서 시작해 1달러로 끝나는 느낌이었다.누군가는 말한다. 버릇 되는데다 자생력을 잃게 하니 팁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과연 그럴까. 자생력은 정치적 여건이 만든다.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을 다그칠 수는 없다.`기브미 초콜릿`을 외치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때도 초콜릿을 건네는 쪽이 옳았지, 자생력 운운하며 때 묻은 고사리 손을 외면한 쪽이 옳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구조적 가난과 부패 앞에서 백성은 언제나 무죄이다. 오직 정치에 그 죄를 물을 일이다. 애절하게 구걸하든 교묘하게 강탈하든 그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단죄의 제일 대상은 백성을 방치하거나 그 상황을 즐기는 정치세력일 뿐이다. 잠시 본 캄보디아는 1달러의 힘에 갇혀 있는, 아직은 가난한 나라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6

웃을 수 있을까

늙는 것도 서럽다는데 노년을 제 의지대로 가꾸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이듦의 애상을 말해주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 세 가지`라는 우스개가 강한 페이소스가 되어 귓전을 때린다. 자기 연민이 가득한 문구 앞에 서니 언젠가는 맞이할 노년의 풍경이 예고 영화처럼 스친다. 노령화 사회에 어설피 방치된 노년 자신들의 현실 감각을 들여다보노라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이것이 나와 당신의 미래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노년에게 중요한 세 가지 중 첫 번째가 이러면 병신된다, 라나.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미리 주고 타 쓰는 사람, 재산을 부인 또는 남편에게 다 주고 타 쓰는 사람, 재산이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죽는 사람.” 어찌 이리 맞는 말만 하는지.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노년의 미래를 담보하는 확률은 (있기만 하다면!) 재산이 높지 자식이나 마누라가 높은 게 아니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현실인데도 우리 시대 어른들은 여전히 자식 앞에서 배우자 앞에서 약하다. 내리사랑이나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런 행동을 강화시킨 측면도 있을 것이다.두 번째가 이러면 바보된다, 이다. “자식에게 미리 상속하는 사람, 손주 봐주려고 큰집 장만하는 사람, 손주 봐주려고 친구모임에 빠지는 사람.” 이 말도 어쩜 이리 콕콕 찌르는지. 특히 손주 봐주려고 큰집 장만하고 친구 모임에 빠진다는 대목에서는 울컥해진다. 절대 손주 봐주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다가도, 닥치면 결국 총대를 메게 되는 이는 할배·할매가 아니던가. 육아를 책임져주지 않는 사회에서 안심하고 맡길 여력 중 제일 순위가 가족 노년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는 잠재적 대기 상태자가 된다.마지막 하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한다, 이다. “참을 걸, 즐길 걸, 베풀 것!”정말 맞는 말이도다. 이건 노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참고, 즐기고, 베푸는 일의 숭고함은 만사의 진리이다. 한데 이조차 기본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이니 다소 버거운 실천 요강이긴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3

표준어의 범위

표준어일까 아닐까. 사전에 오르지 않은 좋은 단어를 만날 때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혼자 에너지를 소모하곤 한다. `벗장이`라는 순우리말을 예로 들자. 낯선 낱말을 발견했으니 검색은 필수. 포털 사이트의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대신 네이버용 `지식in 오픈국어` 사전을 검색하니 설명이 나온다.`일에 익숙하지 못한 바치(장인), 또는 뭔가 배우다 그만둔 사람`이라고 친절히 안내해준다. 여기서 갈등이다.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고, 특정 사이트용 오픈사전에 나오는 낱말은 표준어인가 아닌가? 내 식 방법으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의지하기로 한다. 역시 올라있지 않은 단어이다. 의문은 깊어진다. 공인된 사전에 나오지 않는 단어는 표준어인가, 아닌가?우선 표준어 개념부터 정리하기로 한다.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쓸 공용어의 자격을 부여받은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고 규정되어 있다. 어느 정도 한정 지은 개념인데도 애매하기만 하다. 모든 단어 하나하나를 표준어다, 아니다로 구분해 주지 못하는 한 이런 표준어에 대한 혼란은 계속될 것 같다. 1장 총칙이 규정한 표준어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은 단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단어들 중 공인된 사전에 오르지 못한 단어는 표준어가 아닌 것일까, 이런 의문이 꼬리를 문다. 다시 `벗장이`라는 예의 낱말로 돌아가자. 벗장이는 표준어인가 아닌가. 나로선 모르겠다. 사전에 나오지 않으면 표준어가 아니라는 말도 이상하니 표준어라고 봐도 좋을 것 같고,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 아니니 비표준어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오픈사전에 나올 정도의 말이면 표준어로 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모든 신조어가 무분별하게 표준어 자격을 획득하는 것은 반대지만, 죽어가는 순우리말 중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사전에 등재하고, 표준어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준어의 범위를 모르니 갑갑하고 헛갈리기만 한다. 사전에 오르지 않은 벗장이 같은 낱말은 표준어인가,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5-02-12

나보코프 찬미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만큼 흡인력 있는 작가도 드물다. `롤리타`에서 `절망`에 이르기까지 그가 꾸린 글의 향연에 취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가버린다. 나보코프라는 문장의 블랙홀에 빨려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풍부한 어휘가 정제된 문장이 되고 그것이 서늘한 통찰로 다가올 때, 등장인물들이 겪는 욕망과 상처는 금세 내 것이 되고 만다.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쓰지도 않는, 적나라한 솔직함으로 진군해오는 그를 미워하려도 미워할 수가 없다. 최근에 그의 자전 에세이 `말하라, 기억이여`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가 새로운 잔재미까지 발견했다. 내용에만 치중했을 때는 지나쳤던 나보코프의 소설가적 감수성이 잘도 보였다. 책 중간에 수록된 가족사진에 주석을 단 나보코프의 표현이 솔직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페테르부르크의 집 정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에는 자신을 비롯해 여덟 명이 등장한다. 부모 외에도 동생 세 명과 친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보인다. “친할머니는 내 두 여동생들을 장식용으로 불안정하게 안고 있는데, 실제로 사는 중엔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 이모는 부모님이 여행을 간 동안 우리를 돌보아 주었고 조언자가 되어 주었다. 남동생이 이모의 왼쪽 팔꿈치에 달라붙어 있고, 이모의 다른 쪽 팔은 나를 안고 있다. 나는 내 칼라와 스트레사를 미워하면서 벤치의 팔걸이에 올라 앉아 있다.”한 장의 사진으로도 그려낼 수 있는 한 집안의 미시적 가계사라니. 작가 덕에 독자는 그의 친할머니는 인정이 메마르고, 이모할머니는 다정다감하며, 엄마는 두 어른에게 자식을 양보(?)한 채 가족과 동떨어져 카메라를 무서워하는 개나 보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달갑지 않은 차림새로 카메라를 응시해야 했던 어린 작가의 심사도 이해하게 된다. 나보코프 같은 당사자이자 해설자를 만나야 가능한 일이다. 사진 속 생명력은 포장되고 과장된 낭만이 아니라, 진솔하고 적나라한 기억으로 작동한다. 천상 소설가인 나보코프에게 그런 `찌름`을 전하는 일은 눈 비비고 책상에 앉는 일처럼 습관화된 쉬운 일이었으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5-02-11

네 가지 덕

조선시대 천재 수학자라는 어떤 소개글에서 최석정이란 이름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앞서가는 수학자가 있었다니. 기분 좋은 충격으로 관련 자료를 검색한다.`구수략`이란 수학서를 저술했는데 기존 지식과 더불어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수학 이론이 정리되어 있단다. 수학도 모르고 한문도 모르니 책 내용을 간단히 설명해 놓은 글도 나로서는 독해불가하다. 수학에 관련한 그를 알기는 포기하고 인간 최석정을 살짝 들여다본다. 그는 영의정을 지낸 최명길의 손자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영의정까지 지낼 정도로 학식과 덕망이 있었다. 문신 학자답게 자식을 훈육한 네 가지 덕목이 전해지는데 내용이 담박하면서도 직설적이다. 수학자로서의 위용보다 수신제가하는 아비로서의 모범적 면모에 눈길이 더 간다. 네 가지 덕목은 마음수련이 필요한 나 같은 이에게 유용한 말씀들로 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기본은 인간이 되는 것, 옮기는 동안엔 공부가 된다. 겸손도, 근면도, 세심도, 안정도 이렇게 어려운데, 콕콕 찌르니 뜨끔하다.“네 가지 덕을 지녀라, 경계한다. 너는 교만하지 말라. 교만하면 덕을 손상하게 된다. 어찌해야 교만하지 않을까? 핵심은 겸손에 있다. 경계한다. 너는 게으르지 마라. 게으르면 직분을 망치게 된다. 무엇으로 게으름을 없앨 것인가? 요점은 부지런하고 삼가는 데 있다. 경계한다. 너는 성글게 하지 마라. 생각이 성글면 새게 마련이다. 무엇으로 성근 것을 다스릴까? 자세히 살피면 된다. 경계한다. 너는 경박하게 굴지 마라. 기운이 뜨면 날리게 마련이다. 어찌해야 경박함을 누를까? 고요 속에 잠기면 된다.풀이한다. 겸손은 덕의 기초다. 근면함은 일의 줄기다. 꼼꼼함은 일의 핵심이다. 고요함은 마음의 본체다. 군자가 겸손을 지키면 덕을 높일 수 있다. 능히 부지런하면 하는 일을 넓힐 수 있다. 자세하고 신중하면 정사를 세울 수 있다. 차분히 고요하면 마음을 보존할 수 있다. 군자가 이 네 가지 덕을 행한 뒤에야 자신을 간직하고 사물에 응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을해년(1695) 겨울에 쓰노라.”/김살로메(소설가)

2015-02-10

쿨하게 도다리

밤 잔 원수 없고 날 샌 은혜 없다, 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원망도 은혜도 한가지로 희미해진다. 아등바등 일희일비하는 것의 무소용함을 깨쳐주는 말이렷다! 요즘의 `쿨하다`라는 말도 이 속담과 일맥상통하리라. 지인들과 아침 바닷가에 나갔다. 사진도 찍고 해풍도 느낄 겸 떠난 짧은 여행이었다. 흐린 날의 포구는 고즈넉했다. 자맥질과 날갯짓을 번갈아하는 살찐 갈매기들만이 그 적요를 기분 좋게 깨우는 정도였다. 방파제 입구, 그물을 손질하는 할머니의 등이 보였다. 바다를 향해 앉은 초로의 등짝에 고달픔의 흔적이 서렸다. 앞섶이 투영된 삶이 곧 등의 생애가 아니던가. 그물에 낀 바다풀을 걷어내는 할머니의 비껴 앉은 등짝에 대고 조심스레 셔터를 누른다. 찰칵, 소리에 놀란 할머니가 돌아보았다. 렌즈를 들이댄 무례가 들킬세라 괜스레 말을 걸어본다. 도다리 잡는 그물을 손질한다고 했다. 도다리는 겨울이 제 철이라고 했다. 그물만 현처럼 뜯고 있던 할머니는 헤퍼진 객들의 추임새에 맞춰 잘도 설을 풀어놓는다. 내친 김에 도다리를 먹어볼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기 뭐 어렵나, 있는 밥에 회 쳐서 묵으면 되지.`한다.작업복을 훌훌 벗어던진 할머니가 댁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후하게 친 회와 매운탕을 후딱 끓여주고 바쁘다며 다시 나가버렸다. 알아서 먹고 가란다. 따신 배를 두드리며 만찬 값을 치르러 포구로 나갔더니 그물 있던 자리에 할머니는 없다. 차려준 일만 기억하지 값 받을 생각은 멀리도 두었다. 한참 뒤에 나타난 할머니는 그새 바다에 나갔다 왔단다. 값을 치르든 말든 참으로 쿨하시다.바다 앞에 서면 몸은 바지런해지고 맘은 헐거워지나 보다. 오래 일렁이고 자주 질척여 본 자만이 흔들림에서 자유롭다. 그 고비를 넘기면 만선의 기쁨조차 영원한 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밀려드는 파도를 마주하지 않은 생이 어디 있을까. 바다의 온갖 의성어를 가슴에 가두어 `쿨함`의 의태어로 키워낸 오도리의 할머니. 아무리 봐도 쿨함은 생의 파랑주의보를 맛본 자의 여유다. 잠 설치고 나온 보람이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9

꽃보다 답시(答詩)

유희춘보다 송덕봉이다. 조선 중기 학자인 미암 유희춘이 현대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된 것은 `미암일기` 덕이 크다. 미암일기의 가장 큰 매력은 당시의 일상사를 미시적 시선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나 학문 및 인격 수양 등에 관한 내용을 넘어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한 생활상을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는 물론 독자에게는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해준다. 큰 웃음을 주는 부분 중의 하나가 유희춘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다. 하도 재미있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글감으로 써먹곤 한다. 시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당시 정치인들처럼 유희춘도 유배 및 기타 사정으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편지였다. 유희춘이 안부를 물으면 송 부인이 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당대 여류 문장가로 손색이 없는 송덕봉 여사의 유머 코드 및 카리스마는 무척 현대적이라서 통쾌하다.꽃 흐드러지고 음악 소리 쟁쟁해도 좋은 술 어여쁜 자태엔 흥미 없더라, 참으로 맛있는 건 책 속에 있더라, 뭐 이런 내용의 유희춘 시에 대한 송덕봉 여사의 답장은 이렇다. “봄바람 아름다운 경치는 예부터 보던 것이요, 달 아래 거문고 타는 것도 같은 한가로움이지요. 술 또한 근심을 잊게 하여 마음을 호탕하게 하는데 당신은 어찌 책에만 빠져 있단 말입니까!” 한 마디로 `놀고 있네, 잘난 척 하지 말고 즐겨야 할 땐 즐길 줄도 알아라.`고 남편에게 일갈한다.관직 생활한다고 서울에 올라갔을 때는 홀로 서너 달 지내면서 일절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은혜 입은 줄 알라면서 편지로 생색을 낸다. 이때 송 여사의 답시.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당연한 일인데, 겨우 몇 달 독숙했다고 고결한 체하며 은혜를 베풀었다 하시오. 당신은 아무래도 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병폐가 있는 듯 하오.”암만 봐도 미암보다는 덕봉이다. 아니다, 이런 치명적인 매혹을 지닌 아내를 기록한 이는 미암이니 선생의 승리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5-02-06

욕먹어야 도움 된다

욕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길지도 않은 생, 좋은 말만 듣기도 모자라는데 흠 잡히는 말까지 들으며 살고 싶은 이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꼭 좋은 말만 주고받아야 건전한 관계가 유지되는 건 아니다. 욕 좀 먹고 쓴 소리 좀 들을수록 자기성장에 도움 될 때도 있다. 가령 글쓰기 모임의 합평 시간이 그렇다. 몸에 좋으려면 쓴 약을 마다하면 안 되듯이 습작에 도움이 되려면 쓴 말도 받아들여야 한다. 오랜만에 에세이 한 편을 써서 합평자리에 나갔다. 자신이 없었다. 늘 글을 쓰면서도 글을 두려워하는 쪽인데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분야가 에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내용상으로는 자신을 까발려야 하는데다, 문체상으로는 고도의 미학성까지 확보해야 한다. 말이 쉽지 여간한 내공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다. 밑바닥까지 까고 싶다, 라는 무장해제하는 마음과 어느 정도의 장막은 치고 싶다, 라는 최소의 자존 사이의 타협물이 에세이다. 무장해제하자니 자존에 생채기가 돋고, 자존을 챙기자니 재미와 감동이 반감되는 분야가 에세이다. 그러니 에세이 쓰기가 어려울 수밖에.초고라 각오는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많은 욕을 먹었다. 소설체 문체다, 호흡이 길다, 가르치려든다, 풀어졌다, 문장 간 유기성이 없다 등의 진솔한 평가가 이어졌다. 내 식으로 그 말들을 이어본다. `소설처럼 호흡이 긴데다, 풀어 쓴 글은 문장이 따로 놀고 꼰대기질까지!` 웃자고 한 소리다. 내 약점을 아는지라 합평해준 이들 마음이 곧 내 마음 같았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했던 그 말씀들을 감사히 받자왔다.완벽하지 않아도 쓰는 게 행복한 사람은 써야 한다. 히라노 게이치로가`소설 읽는 방법`에서 말했다. “아무튼 계속해서 써나간다는 저돌적인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쓰고 쓰고 또 쓴 끝에 덜어낼 것은 모두 덜어내고 단지 문장만 남은 글이라는 게 작가로서 이상적인 문체가 아닐까.” 쓰는 과정에서 합평이 필요하고 욕(쓴 소리)은 쓰는 이를 크게 한다. 모두 덜어내고 문장만 남은 글의 팔 할은 욕이 만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5

자격미달

까마귀는 효의 화신이다. 새끼가 자라면 늙은 어미를 위해 기꺼이 먹이를 물어온다. 우리 정서 상 긍정의 의미보다 부정의 의미로 더 자주 쓰이는 까마귀도 `효`에서만큼은 그 어떤 대상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미물인 까마귀도 효를 본능적으로 실천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효를 모른대서야 되겠는가, 라고 빗대 말하고 싶을 때 우리는 이`반포지효`를 들먹인다. `안갚음`이란 말이 있다. 반포지효의 순우리말 버전쯤이 되겠다. 이때 `안`은 부정의 뜻을 지닌 동음 부사와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길게 발음해야 한다. 안갚음에서 `안`은 마음이나 가슴을 일컫는다. `저 물도 내 안 같을까`라는 예의 쓰임처럼 여기서 `안`은 곧 마음이다.효에 대해서 말하려다 사설이 길었다. 안갚음의 주체는 자식이고 대상은 부모이다. 재미있는 것은 안갚음의 대상인 부모의 입장에서 효를 말하는 순우리말도 있다는 것. 바로 `안받음`이다. 즉, 부모께 효도를 하는 것은 안갚음이고, 부모가 효도를 받는 것은 안받음이다.`안받음` 이라는 말 때문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했다. 내리사랑과 효는 같은 맥락이다. 가족 간의 사랑이라는 면에서는 둘 다 같은 의미를 지닌다. 다만 내리사랑은 효에 비해 더 본능적이다. 오죽하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이 있겠는가.그런데 내리사랑도 내리사랑 나름이다. 실천력이 딸리는 내리사랑도 사랑이 맞기나 한 걸까. 요 며칠 자괴감만 늘어났다. 방학을 맞아 모처럼 집에 있는 아들녀석의 먹거리조차 제대로 못 챙기는 나날이 이어졌다. 한결 같은 핑계는 바쁘다는 것. 괜히 미안해서 조기 한 마리 달랑 구워주고도 맛있냐고 묻고, 떡볶이 한 접시 해주고도 엄마 솜씨 괜찮지, 라며 리액션을 구걸한다. 엄마 마음을 아는 아들 왈, `어머니 자학하지 마세요. 동의를 구하지 않으셔도 엄마는 소중한 제 엄마입니다.`한다. 눈물 난다. 누가 내리사랑이라고만 했나. 나 같은 불량엄마는 `안받음`자격이 없다. (자학 모드로) 아들아, 네 안갚음을 안 받을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4

눈 내리던 날

낮에는 친구들과의 점심 모임에 나가고, 오후에는 모처럼 딸 아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내켜하지 않는 아이들을 구슬려 예매를 하고 일단 점심 모임에 갔다. 저들은 저들대로 시내에서 볼일을 본 뒤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을 나서는데 진눈개비가 날린다. 설마 쌓이는 눈으로 변하랴 싶었다. 오늘따라 주차 공간이 없다. 상가 동네를 두 바퀴나 돌아도 마땅찮다. 슬슬 짜증이 돋는다. 다른 골목으로 접어드니 다행히 저 안쪽에 빈 공간이 보인다. 얼른 주차를 한 뒤 우사인 볼트처럼 달린다. 여전히 진눈깨비는 날린다. 이십 분이나 늦었다. 그래도 괜찮다. 다른 친구들 사정도 비슷했으니.점심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린다, 교통 흐름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내린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때 아들에게서 문자가 온다. 눈이 많이 내리니 조심해서 오란다. 영화관까지 가는데 몇 발자국이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상영 시간에 딱 맞춰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차 지붕마다 함박눈이 쌓였다. 그런데 웬 걸, 내 차 뒤에 누군가 호기롭게도 대각선 주차를 떡하니 해놓았다. 앞 유리에 쌓인 눈을 걷어내고 연락처를 찾으니 전화번호 쪽지가 아래로 쏙 빠져 있다. 번호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영화를 포기할 수 없어 택시라도 잡기로 한다. 눈 오는 날 택시 잡기는 공중을 지나는 제트 비행기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 포기하고 다시 내 차로 돌아온다. 몰골은 이미 옷 입고 사우나 한 꼴이다.영화도 못 보고 집에도 못 가고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그제야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112를 누른다. 친절한 대한민국 경찰이라니! 차 번호를 댔더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란다. 얼마 뒤 차주인이 나타났다. 내 편견대로 여성 운전자다. 민망해하는 표정에다 대고 버럭 소리를 질러 본다. 조금 분이 풀린다. 그 와중에 김여사인지 박여사인지 왈, 어떻게 경찰이 내 전화번호를 알았지, 한다. 나는 대답대신 속으로 대한민국 경찰은 전지전능하거든요, 라고 대꾸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3

환상과 현실 사이

환상과 현실은 다르다. 생텍쥐페리, 라고 말하는 순간 작가의 프로필보다 어린왕자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금발머리에 길고 푸른 외투를 걸친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의 다른 이름이 곧 어린왕자가 될 정도이다. 어린왕자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쏟아내는 별빛 같은 명대사들도 곧 생텍쥐페리 자신의 내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입장을 편집자가 정리한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을 읽는다면 그에 대한 무한 긍정의 환상을 지녔던 나 같은 이는 다소 충격을 받게 된다. 어린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만을 기억하는 일이 독자로서는 행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마마보이, 우울증환자, 바람둥이, 대머리, 변덕쟁이 기타 등등 인간적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내 콘수엘로 입장에서 그녀의 자취를 따라 편집된 책이라 다소 과장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는 콘수엘로의 마음을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했다. 방황하는 자유영혼이 그의 콘셉트였다. 시댁식구도 주변인도 인정해주지 않는 결혼 생활에서 남편인 그마저 무관심과 바람과 떠남을 반복하며 그녀를 외로움이란 수렁 속에 방치했다.그는 콘수엘로가 보이지 않을 때야 비로소 그녀에 대한 사랑이 확인되는 사람이었다. 방치한 뒤에야 소중함을 알게 되는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명대사가 되어버린 `네가 길들인 장미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한다`는 그 부분은 어쩌면 갈무리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참회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콘수엘로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잡아두고 길들이기 위한 남편의 언술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생텍쥐페리와 콘수엘로의 사랑은 그들 입장에서는 온전한 사랑이었겠지만 객관적인 면에서는 불공정한 사랑이었다. 공정이나 공평으로 사랑의 본질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콘수엘로에 감정 이입되다 보니 생텍쥐페리에게 헌사를 남발했던 지난날이 괜히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독자는 작품으로만 만날 때 행복하다. 완벽한 작품일수록 작가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다. 오늘의 결론, 약점과 실수로 뒤범벅이 된 삶일수록 작품성에 기여하는 바는 크도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02

꺾이거나 흔들리거나

선조들은 우화를 만들고 후손들은 거기에서 지혜를 얻는다. 그렇다고 모든 우화가 개인을 완전히 설득시키는 것은 아니다. 라 퐁텐느 우화 중에 유명한 `참나무와 갈대`편을 보자.크고 강한 참나무는 개울가의 갈대를 은근히 비웃었다. 저건 뭐, 바람이 없어도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금세 가는 허리를 허공에다 굽실대는 것이다. 저렇게 줏대 없이 살 바엔 콱 죽어버리는 게 낫지, 참나무는 생각했다. 폭풍우가 몰아쳤다. 튼튼한 뿌리와 너끈한 허리로 참나무는 바람을 견디려했다. 웬 걸, 안간힘을 썼지만 뿌리는 통째로 뽑히고 허리는 갈가리 찢어졌다. 떠내려가던 참나무가 죽을힘을 다해 갈대에게 물었다. “니들은 어째 안 뽑혔노?” 맞장 뜨지 않고 흔들리며 바람이 지나는 길을 터줬기 때문이라는 현명한(?) 대답이 들려온다.우화 내용에 공감이 갈듯말듯 미묘해진다. 라 퐁텐느가 말하려는 가장 큰 주제는 강한 게 강한 게 아니고 약한 게 꼭 약한 것만은 아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지혜로우면 살고 어리석으면 죽는다, 라는 말도 성립되겠다. 저항하면 죽고 피하면 살 수 있다는 논리로까지 연결되고, 갈대의 행보에 과연 지속적인 행운이 따라줄 것인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갈대에게 무슨 큰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인가. 약하지만 현명하게 살아남아 강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갈대, 그렇다고 갈대가 강자 입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심한 농부의 낫질 한 번, 장난스런 아이들의 손끝 한 번에 바로 스러지고 마는 게 갈대의 운명이다. 살아남아도 갈대는 갈대요, 죽어도 참나무는 참나무일 수밖에 없다.굽히면서 당당하고, 빳빳하면서 비굴할 일은 세상에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만사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은 그 모순의 경계에 우리 삶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참나무나 갈대의 상황 중 어떤 것이 옳다고 속단할 수도 없다. 현실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승자나 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의 상황 논리에 따라 꺾이거나 흔들리며 그렇게 우리는 살아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30

롤랑 바르트 식으로

롤랑 바르트의 `밝은방`은 펼치는 순간만은 설렌다. 하지만 사진에 대한 문외한인데다 작가만큼 `엄마`에 대한 궁극의 핍진한 애정을 체화하지 못해서 그런지, 막상 그의 사유를 온전히 내 것으로 옮겨오는 데는 좌절하곤 한다. 난해한 그의 글은 폐부 깊숙이 찌르다가도 어느 순간 리듬이 끊긴다. 번역 탓도 있으리라. 같은 내용이지만 절판된 `카메라 루시다`는 덜하다는데 싶어 검색해보니 중고 값이 무려 15만원! 열 배 이상이나 올랐다. 두 책을 비교해가면서 나름의 독해를 시도하려했던 일은 미뤄진 숙제가 되어 버렸다.사진에 대한 막연한 매력을 품게 된 것은 롤랑 바르트 덕이다. `밝은방`에 나오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에 관한 개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난 뒤의 일이다. 롤랑 바르트는 지식인 마마보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엄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교통사고로 죽기 직전까지 그가 한 일은 엄마에 대한 애도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밝은방`에서도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 보며 자신만의 사진론을 역설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사진에 대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공통된 심상 또는 보편적 정서를 스투디움이라 한다면, 구경꾼 개별자의 `폐부 깊숙이 찌르는 세부적 무엇`을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객관적이고, 평면적이고, 대중적이며, 이해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입체적이며, 개인적이며, 소통 부재해도 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사진은 푼크툼의 눈썰미를 발설하는 일이었다.`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정하지 않았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에서 발견한 그녀의 눈빛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롤랑 바르트만이 제 어머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찌름`의 모습이지 무관심한 타인이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 이미지는 아니다. 푼크툼의 정서는 내밀하고 부분적이며 섬세하다. 한 장의 사진에서 발견하는 자신만의 `알아보거나 눈치 챔`의 특수한 감흥, 이 느낌을 자극해주는 매개체로서 롤랑 바르트의 `밝은방`은 곁에 둘 만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9

다 말하면 시가 아니다

시는 저마다의 맛과 멋으로 해석될 때 시적 기능을 담보한다. 시 한 편마다 정답의 해설이 있다면 그 시는 시가 아니다. 산문이 되어 버린다. 명쾌한 산문이 되는 순간 장막의 시는 그 매혹을 상실해버린다. 시적 긴장, 시적 함축이란 말 속에는 적어도 `아리까리함`의 용인이라는 포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시를 풀이하는 데는 모범 답안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각설하고 고영민 시인의 `입춘`을 묵독한다. “봄은 오네 / 강가에는 한 무리의 철새가 모여 있네 / 모여 있는 곳으로 봄은 오네 / 강물은 반짝이고 / 흐름은 졸리네 / 한 구의 시신을 끌고 오네 / 나는 열두 살 / 오후 세 시” 시적 상황 속으로 감정이입을 한다. 바로 어제도 달려갔던, 지금은 달라져버린 고향의 풍광 속으로 스며든다. 여과지를 넘는 물처럼 내 심상은 열두 살 오후 세 시 무렵의 입춘을 투과하고 있었다. 시에서처럼 강물은 반짝였고 그 흐름은 졸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한 무리의 철새 대신 한 쌍의 산노루가 마른 풀 섶으로 후다닥 사라진 정도랄까.한 구의 시신을 끌고 오네, 라는 시구에서 잠시 멈췄다. 처음에는 스러지는 겨울을 상징하는 동네 어르신의 장례행렬 이미지가 떠오르다가, 봄을 맞기도 전인 어린 동무의 멍석말이 주검도 그려졌다. 하지만 오랜만에 바라본 고향의 언 강에서 쪼개진 얼음덩이를 본 순간이 떠오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날 풀려 떼밀려오는 얼음조각을 본능적 시적 감성으로 낚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여기까지 닿자 시인의 뜻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시인에게 새해 인사를 가장한 문자를 보냈다. 시체의 의미를 묻는 내 같잖은 질문에 즉각적인 답문이 왔다. 역시 시인다운 답변이었다. 시인답다고 말하는 건, 답을 듣고도 시인이 말하는 시체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명쾌한 답을 내는 건 산문가의 일이고, 시인은 역시 에두를 때 시인의 품격을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어떤 답을 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기련다. 그렇다, 그렇게라도 시인 흉내를 내보는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8

행복은 전염될수록

행복은 전염될수록 좋다. 유행가 가사처럼 행복해야해, 라고 소망한다. 큰 변고 없이 살아왔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이소라가 난 행복해, 라고 페이소스 짙은 목소리로 노래할 때 그것이 진짜 행복해서인 것은 아니지 않나. 대부분 행복한 듯 아닌 듯 무덤덤하게 생활한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기는 한 건가 의문을 가지고 조금 심각해지기도 한다. 한데 아무래도 행복해지려면 깊은 자기성찰과 함께 구체적인 몇 가지 다짐이 있는 게 낫겠다. 우선 소유에서 오는 행복감이 전부가 아님을 깊이, 반복적으로 훈련해야겠다. 샤넬 가방과 모피 코트가 주는 행복감 - 아, 아직까지는 꿈에서라도 이런 소유물에 대한 환상이나 집착은 없다! -은 길어봤자 일주일이나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울적한 맘에 기분 전환용 쇼핑을 한 뒤 맛보았던 짜릿한 기분이 순간을 넘기지 못했음을 상기해보라.반면에 사람이나 여행 또는 독서가 주는 행복감은 일 년 아니 잘만 하면 평생 간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한시라도 돈 없이 살 수는 없다. 따라서 경제활동을 위한 신성한 노동은 찬양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단순히 물질을 얻기 위함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물질적 소유물보다 `경험`을 사는 데 돈의 목적을 두는 게 훨씬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그 경험의 범주는 사람마다 다르다.건강하다는 전제가 깔린 하에서 최대 행복의 또 다른 실천 방법은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좋아하자, 라는 것. 행복을 전파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내가 행복해진다. 반면에 불행을 공작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나 역시 불행해진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긍정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 곁에 줄을 서고, 불행해지고 싶으면 순경(順境)에도 비탄과 부정의 연설을 하는 이 곁에 붙으면 된다. 오죽하면 친구의 친구가 행복해도 내게 행복의 기운이 전해진다는 말이 있을까. 행복은 전염될수록 좋다. 그렇다면 나부터 행복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7

최선의 선택

인간은 자신이 규정해 놓은 원칙이나 신념에 따라 행동화한다. 오랜 시간을 거쳐 경험하고 축적된 여러 상황들은 자기내면화라는 깔때기를 거치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개성이라는 고유 행동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 행위는 이타적인 것을 지향할 수도 있고, 이기적인 것을 욕망할 수도 있고, 보편타당한 것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 어떤 방식이라도 타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면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고유한 행동 패턴은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개별자의 행복감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보편적이든 누구나 제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신이 난다. 몸과 마음이 절로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하지만 삶은 제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내 좋은 쪽으로만 되는 게 삶이라면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고민할 이유가 없다. 바라는 대로 그 길을 가기만 하면 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에게나 삶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그들 좋은 쪽으로 되어가게끔 운명 지어졌다. 그러다 보니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할 때도 있고 그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닌 상황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평생 고민하다 죽음에 가닿는 것 그것이 삶의 길이다. 이 길을 가야 편한데 저 길을 가게끔 불편하게 만드는 시지포스의 운명, 이것이 삶의 실체적 진실이다.원하지 않은 맞선 자리 앞에서 부모가 성화를 하면 단호한 아들이라면 끝내 나가지 않을 것이고, 맘 약한 아들이라면 억지로라도 그 자리에 나가게 될 것이다. 둘 다 편치 않다는 점에서는 같다. 부모의 요청을 거절한 아들은 불효에 대한 자책으로, 마지못해 선 자리에 나간 아들은 그 상황에 대한 거부감으로 맘이 불편하다. 찜찜함의 자책도, 홀가분한 부담도 결국은 자신의 일이다. 이런 상황은 운명처럼 계속된다. 그래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나마 자신의 내면이 더 요청하는 쪽으로 따르는 수밖에 없고 그 판단의 기준도 여럿이다. 그래도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내게 좋고 행복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5-01-26

치환의 기만

문화의 다양성은 시각의 차이에 기인한다. 한류 바람을 타고 `K-팝`못지않게 `K-드라마`도 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분석 하나. 우리 드라마는 서구 시각에서 볼 때에 불편함을 유발하고 의아함을 살 수도 있다는 것. 얼핏 떠오르는 몇 장면. 연적에게서 여주인공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여성의 손목을 낚아채는 남자, 테스토스테론 과다 분비를 검증 받기라도 하듯 여주인공을 벽에 밀어붙이는 남자, 마음을 열지 않는 여주인공의 내숭만큼 쌓인 제 울분을 자랑하듯 주먹으로 유리창을 내리찍는 남자, 등이 불편 유발 장면의 대표적 예이다. 한국 드라마 시청을 위한 안내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 할 만큼 서구적 시각에서 보면 이런 장면들은 이해가 되지 않고 불쾌한 모양이다. 문화는 길들여짐이다. 관습화된 암묵적 약속이 모여 문화가 된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낚아채거나, 벽에 밀어붙이는 행위 등은 `남성다운 멋`으로 치켜세워지거나 용인되는 분위기다. 드라마에 몰입하는 그 어떤 시청자도 그 장면에서 폭력이나 성차별을 먼저 읽지는 않는다. 남자는 강하고 멋있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묻혀 그 장면들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일 수 있다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것들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반면에 그들이 이런 장면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로 본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나는 강한 남자이고 내 여자 내 맘대로 보호(?)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라는 시각이 통용되는 사회를 이해 못하는 것이다. 무서운 건 그런 장면을 보면서 공감하고 박수치는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여성 스스로라는 것. 관습적 수요가 있으니 맹목적 공급이 따르는 셈이랄까. 어떤 환경에서는 물리적 액션이 낭만적 정서로 봐지기도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폭력적 의아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게 얼마나 주관적 기만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생각게 되는 대목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3

투사와 감정이입

심리학 용어에 투사((projection)라는 게 있다.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을 일상용어로 바꾼다면 `남 탓`쯤이 될 것이다. 투사에 대한 개념을 지금보다 덜 이해했을 때는 감정이입이란 말과 헷갈렸다. 타자의 상황을 빌려온다는 점에서는 투사나 감정이입이나 같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감정이입이 타자의 상황에 동조하고 수긍하고 몰입하는 내 감정이라면, 투사는 타자의 상황을 통해 잘못된 나를 빼버리거나 부정한 채 타자를 비난하는 내 심리를 말한다. 남의 슬픔이나 기쁨 앞에서 내 것인양 동화되는 것은 감정이입에 속한다. 어린이집에 보낸 아이가 열악한 보육 여건에 방치되었다거나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도했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그 아이 편에서 분노하고 동조한다. 겪지 않아야 될 상황에 처한 아이가 내 아이 같고 내 이웃 같기 때문에 저 깊은 곳에서 본능적인 흥분이 솟구친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상처 입은 아이나 엄마에게 절로 공감하게 된다. 감정이입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반면에 남의 슬픔이나 기쁨 앞에서 내 행위의 저속함을 방어하기 위해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은 투사에 속한다. 어린이집 아이가 열악한 보육 환경에 방치되고 폭행을 당하는 것은 내 순간의 실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 라고 책임 전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근무 여건이 맞지 않는 사회 환경 탓이고, 보살피기엔 너무 손이 많이 가는 아이 탓이다, 라고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잘못을 돌린다. 인간이기에 이런 무의식적인 자기방어본능이 발동하게 된다. 투사의 전형적인 예이다.인간은 감성의 동물인 동시에 자존감의 동물이다. 예술이나 일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타자에게 동화되는 것도 인간이요, 용납할 수 없는 부정적인 행동이나 감정을 남에게 뒤집어씌워 죄의식을 덜고 싶어 하는 것도 인간이다. 심리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두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는 인생 과정이 곧 도덕적·보편적 가치 판단 훈련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