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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엔 꽃

가령 이런 문장을 읽을 때였다. “아이들의 몸엔 언제나 벌레가 있었다. 그것들을 쫓아 버리기 위해 셔츠 안쪽, 배꼽 부근에 마늘을 채운 조그만 주머니 하나를 꿰매어 달아주곤 했다. 나는 프루스트나 모리아크를 읽을 때면, 이 작품들이 내 아버지가 아이였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환경은 중세였던 것이다.” 작가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가난하고 초라한 아버지를 중세의 환경이라고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알려졌다시피 아니 에르노의 작가적 고집은 겪은 것만 쓴다는 데 있다. 그녀의 적나라한 화법은 제 아버지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예외가 없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들렌느 과자를 적신 홍차 향에 취해 부르주아 창가를 서성일 때, 동시대를 살았던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는 자식들 몸에서 빈대나 이를 퇴치하기 위해 마늘향 주머니를 꿰매 달아야 했다. 핍진(乏盡)한 가계사마저 핍진성(逼眞性)을 획득하는 건 에르노식 화법이 주는 아픈 감동이다.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친구가 생일 선물로 소포를 보냈는데 꽃이 담겨 있다. 사각 유리꽃병과 함께 전지가위도 들어있다. 기대하지 않은 상태의 황홀감인지라 잠시 암전 상태가 된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 기분 전환이 필요했었다. 아버지의 중세를 이야기하는 아르노의 고백이 너무 담담하고 현실적이라 따끔거리고 쓰렸다. 이런 침체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비현실적이리만큼 낭만적인 정서가 펼쳐지다니. 다발을 이룬 꽃 이름도 핑크 라넌큘러스, 호와니, 핑크 튤립, 홍버들 등으로 이국적 위안을 부추겨 주었다.꽃은 그 뒤로도 시리즈로 배달되었다. 한 달에 걸쳐 생일을 축하 받은 셈이었다. 두 번 세 번 꽃이 이어질 때마다 내 중세적 염세가 낭만적 환상으로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구차와 굴욕의 인생 트라우마에 가장 좋은 치료법은 꽃이라 했다. 친구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러니까 오늘의 말씀, 마음이 중세인 사람이 미래로 건너가게 하는 가장 큰 명약은 꽃이다. 그 꽃을 전하는 이야말로 진짜 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6

아기공룡 맛있겠다

아기는 거짓을 모른다. 갓 태어난 아기라면 더더욱. 하지만 거짓만을 모를 뿐 희로애락의 감정은 확실히 느낀다. 순수한 영혼인 아기의 감정은 날 것 그대로이다. 숨김도 없고 과장도 없다. 제가 느낀 그대로 그냥 받아들인다. 거짓을 배울 기회가 없으므로 적대감 같은 것도 모른다. 거짓과 적의는 한 통속이어서 아직 어린 그에게는 먼 이야기이다. 어느 볕 좋은 날 천지가 진동하고 아기공룡 한 마리가 태어난다. 그런데 웬 걸, 태어나보니 혼자이다. 외로워서 슬퍼서 울었다. 외로움이나 슬픔은 학습된 감정이 아니므로 절로 그렇게 되었다. 울면서 타달타달 걸었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린다면? “헤헤헤, 고 녀석 맛있겠다!” 이 장면에서 보통 독자는 아, 끝났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맛있겠다, 라고 선언할 수 있는 존재라면 그가 누구든 갑의 위치에 있을 것이고 그 자체가 위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정작 아기공룡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맨 처음 한 말은 “아빠!”였다. 맛있겠다, 라는 말을 잡아먹겠다는 위협으로 이해한 게 아니라 제 이름을 부른 걸로 받아들인 것. “아빠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잖아요. 내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우리 아빠지!” 아기공룡을 잡아먹으려던 공룡은 뜻밖의 반응에 아빠가 되기로 맘먹는다. 다른 육식공룡과 싸워 아기공룡을 지켜내고, 아기공룡을 이해하기 위해 풀도 뜯어 먹고 열매도 삼킨다.슬픔이나 무서움은 본능적 감정이지만 거짓이나 적의는 학습되는 감정이다. 따라서 아직 세상의 때에 노출될 기회가 없는 영혼에게 맛있겠다, 라는 말은 공포가 아니라 친근함의 의미가 될 수 있는 것. 무심코 내뱉은 `맛있겠다`라는 내 위협은 뜻하지 않게 상대에게 가서 믿음이 되기도 하는 것. 이름을 불러줘야 꽃이 된다는데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이미 꽃인 영혼들이 그런 상황을 만든다. 그 순정한 몸짓을 이해하고 보살피는 무장해제 된 어른에 관한 책이 고 녀석 맛있겠다, 이다. 힐링을 원한다면 서로에게 `하나의 눈짓`이 되는 이 그림책을 꼭 확인하라고 말하고 싶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3

호라티우스의 시학

문예미학에 대한 성찰은 시대를 초월한다. 글 관련 사색이나 작법은 역사 이래 철학자들의 최대 관심거리 중의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철학자마다 시작(詩作)에 관한 나름의 생각들을 풀어놓기를 즐겼다. 당시는 연극이 유행하던 시대였고, 그 중에서도 비극은 문학의 최고 형식이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각 철학자들의 `시론`은 대개 비극에 관한 사유와 작법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딱히 비극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문예 전반에 관한 사유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근대 이후의 문학인들이나 철학자들이 지녔음직한 고뇌들이 그때 이미 넘쳐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니 신기하다. 내게 있는 `시학` 관련 책은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호라티우스 그리고 롱기누스 등의 것이 같이 실려 있는데, 호라티우스 편의 글쓰기 기술에 관한 부분은 글로 고민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뜨끔하면서도 웃음이 난다.호라티우스의 말을 맥락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내 식으로 편집해보았다.`쓰는 자들은 대개 올바른 것의 겉모양만 보고 속아 넘어간다. 간결하게 쓰려고 애쓰다가 모호하게 쓰고, 섬세하게 쓰려다가 맥없고 힘없는 글을 선보이고 만다. 장엄하게 쓰려다 보면 부자연스러워지고, 감정의 비약을 피하려다 보면 소심하게도 땅바닥을 기는 꼴이 되고 만다. 단일한 소재에다 대담한 변화를 꾀해 생기를 불어넣고자 한다더니 숲에다 돌고래를 그려 넣고 파도에다 멧돼지를 그려 넣는다. 기술이 없으면 잘못을 피하려다 또 다른 실수를 한다.`맞는 말만 하는 호라티우스. 그의 지적 앞에서 다시 반성문이다. 써놓고 보면 모호하고, 고치고 보면 맥없고, 다시 보면 부자연스럽고, 완성이다 싶어도 땅바닥을 기는 글을 생산할 때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퇴고할 때마다 멧돼지가 있어야 할 곳에 돌고래가 날뛰고, 돌고래가 있어야 할 곳에 멧돼지가 튀어나오는 경우는 쓰는 한에서는 평생 지속되리라. 디테일한 호라티우스의 짧은 시론에 깜짝 매력을 느낀 한나절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2

갈망한다면

의연하면 이기고 흔들리면 진다. 목표 앞에서 단단하면 끝내 살아남아 손을 흔들고, 어리바리하면 자기연민에 빠져 결국 손을 놓는다. 목표 지향적인 이들은 우선 스스로를 확신한다. 낯설고 두려운 것에 맞설 내공이 있는데다 마음이 단단하니 흔들림이 없다. 그들은 일단 목표를 정하면 저지르고 본다. 여행이든 글쓰기든 취업이든 마찬가지다. 머뭇거리며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후회나 자책보다 재지 않고 저지른 뒤의 공허와 허탈이 그래도 낫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성취감 뒤에 오는 공허일지라도 다다르지 못한 자책에 비하면 훨씬 나은 자긍심 아니던가. 하지만 마음이 무른 자는 그 마음을 굳히는 것부터 버겁다. 자기 확신이 따라주지 않으니 목표는 부정확하고, 실천하는 방법 역시 부실하기만 하다. 당연히 주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고, 쓸 데 없이 소심해지기도 한다. 상담가 고코로야 진노스케가 말했다. “자신이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의 100명 중 98명이 응원을 해도 깨닫지 못한다. 응원해주지 않는 두 명이 있다는 현실만을 계속 비관한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98명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장기판이나 바둑판에서 구경꾼이 판을 더 잘 읽을 때가 있다. 이 경우 자기 확신이 있는 대국자는 구경꾼을 의식하지 않는다. 판을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구경꾼은 구경꾼일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연민에 갇힌 대국자는 스스로 구경꾼 역할까지 자초한다. 주관적 뚝심으로 제 목표를 밀고 나가기보다 객관적 잣대로 제 행위의 타당성을 검열하기 바쁘다. 갈망과 자기검열이 함께 하는 자리에 의외의 승전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껏해야 답보상태나 현상유지라는 밋밋함이 있을 뿐이다.그러니 건전한 목표라면 주저하기보다 시도할 지어다. 스피노자의 통렬한 한 마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그걸 하기 싫다고 되뇌는 것과 같다.” 갈망한다면 우선 자기 부정이나 자기 연민의 감정부터 걷어내라. 뻔뻔하게 단단할수록 목표점에 한층 가까워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1

욕망의 투사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타일러라는 미국 청년이 있다. 똑똑하고 야무진데다 선하기까지 한 그를 보노라면 엄마 마음이 되어 절로 흐뭇해진다. 웬만한 한국인을 능가하는 어휘구사력에다 지성과 감성까지 갖춘 그의 유일한 단점은 키가 많이 작다는 것이다. `키가 많이 작다`는 이런 판단이야말로 얼마나 부끄러운 행위에 해당되는지 타일러가 가르쳐준다. 그가 말한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지 않은 것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었다.” 라고. 우리와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타일러에게 단신 콤플렉스가 없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대중적 잣대가 곧 가장 옳은 생각`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상태라면 그의 단신은 배려해야 할 사항이 되고 만다. 방송용 화보 촬영을 할 때 자신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소위 말하는 깔창이 들어간 신발을 주는 것을 보고 타일러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키가 작다는 사실이 졸지에 동정 받거나 감춰야 할 사안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우리 식으로 보면 배려한다고 한 행동이 미국적 환경에서 자라난 그에게는 무례한 오지랖으로 비쳤을 것이다.본인은 괜찮은데 타자가 괜찮지 않은 것, 대중적 잣대는 이런 욕망을 부추긴다. 아나운서는 반듯한 이미지여야 하고, 남자라면 모름지기 키 정도는 커줘야 하는 것, 이런 시각들에 대중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길들여진 그 생각은 참 생각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 내 욕망의 잣대가 되어 버리고 타자의 욕망까지 관장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만다.타자의 욕망을 내가 정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한데 욕망의 기준을 정해 놓은 우리는 타자에게까지 그것을 적용하는 무례를 범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다는 것. 어떠한 그럴듯한 외형도 깊이 숨은 내면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도 우리는 보이는 대로 일반화하고 규격화하기를 즐긴다. 그것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내 욕망이 곧 타자의 욕망이라고 단정해버리기까지 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10

영혼이 잠식당할 때

“어느 날엔가 국가를 상대로 일을 하는, 잘나가는 회사의 직원인 한 친구가 내 월급이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아레스, 당신은 착취당하고 있어요.`하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실제로 착취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살면서 모든 사람들은 착취당하기 마련이므로 나는 허영과 영광과 경멸과 질투와 불가능으로부터 착취를 당하느니 차라리 직물 사업을 하는 바스케스 씨에게 착취당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서 발견한 문구이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는 고뇌하고 기록하는 영혼의 산책자이다. 같은 생각 앞에서 작가는 기록하고 독자는 공감한다. 그게 작가와 독자의 차이점이다. 공감의 독서만큼 값진 것도 없으니 이 경우 작가와 독자는 서로 이기는 게임이 된다.유능한 고양이가 살찐 쥐를 차지한다, 는 서양 속담이 있다. 페소아의 저 인용글에서 `잘나가는 회사의 직원`은 살찐 쥐에 해당된다. 반면에 작가의 분신인 소아레스는 비쩍 마른 쥐에 해당될 것이다. 페소아 입장에서는 살쪘든, 말랐든 쥐는 쥐일 뿐이다. 고양이에게 먹힌다는 면에서 그 둘의 운명은 같은 셈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살면서 모든 사람들은 착취당하기 마련`이므로.있는 자의 쾌락은 없는 자의 눈물 없이는 지탱할 수 없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구조이고 신자유주의의 실체이다. 허무주의적 견지에서 현실을 보면 어차피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구조로 세상은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페소아의 통찰을 더 깊이 허무주의적 입장에서 살피면 다음과 같은 말도 성립된다. 외부의 그 어떤 상황도 자신 내면보다 우선하지는 않는다는 것. 지속 가능한 내면의 일상성이 유지되는 한 바스케스 씨를 위해 일하는 소아레스는 평화롭다. 힘겨워도 허영과 불가능을 위해 혹사당하는 것보다는 양심적이기 때문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스스로 제 영혼을 갉아 먹는다는 인식을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자의식에 곰팡이가 스미는 그 때야말로 소아레스는 바스케스 씨를 떠나야 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9

이미테이션 게임

다른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훈련이 인간사회만큼 더딘 곳도 없다. 세상의 반 이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관념이나 시스템은 별 검증 없이 이상한 것으로 기정사실화되어 버린다. 가장 보편적 진리는 다양성임에도 독보적 천재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닫혀 있다. 천재성의 실천에만 주력하는 그들 남다른 삶의 방식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는 늘 역부족이다. 하지만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기계가 잘못이 아닌 것처럼, 평범한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가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기계와 사람의 구조가 다른 만큼의 사람과 사람 사이엔 다양성이 존재한다. 몰두형 천재는 감정에 서툴 수밖에 없다. 모든 관심을 한 곳에 `몰빵`하다 보니 사회적 가면을 학습할 기회가 없다. 미화와 과장 없는 직설화법을 구사하는 그들은 친구 관계를 확장시킬 이유 같은 것도 댈 줄 모른다. 학창시절부터 이런 성향 때문에 폭력과 왕따에 시달렸던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은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크리스토퍼를 우정이 아닌 애정의 감정으로 의지하게 된다. 수학과 퍼즐에 능한 튜링은 나치 독일의 암호체계인 에니그마 해독에 투입된다. 자신이 만든 암호해독기를 크리스토퍼라 부를 정도로 죽은 친구나 학창시절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이해받지 못한 고독한 천재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기계인가 인간인가, 범죄자인가 전쟁영웅인가? 동료나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채 에니그마 해독에 온힘을 다한 그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었던 가장 절실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날 혼자로 내버려두지 마, 혼자가 되기 싫다고, 이런 절규는 아니었을지. 남다른 사람이라고 아픔, 외로움, 사랑 등의 감정이 없을 리 없다. 비범한 사람들 덕에 세상은 점점 더 나아졌지만 평범한 우리는 정작 그 비범한 자들의 서툰 감정을 깊게 헤아리지 못했다.컴퓨터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의 비화를 영화화한 `이미테이션 게임`. 한 인간의 실존에 관한 담담한 보고서인 이 영화는 근래 만난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6

다시 앨리스 먼로

책 읽기가 점점 힘듭니다. 게으름과 한 통속인 잡념이란 밥상을 쉬 물리지 못하는 탓이 제일 크지요. 늘 그렇듯 읽는 속도가 새 책 쌓이는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하는 나날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당신의 대표작 `디어 라이프`는 자주 제 손길 가까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앨리스 먼로냐고 누가 묻는다면 여성적 시각에서 품어 안은, 서늘하면서도 아프고 따뜻한 이야기가 모두 내 것 같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열 네 개의 단편 중 공감가지 않은 것은 두어 개 뿐, 나머지 모두는 내 맘을 알고 쓴 작품 같았습니다. 오늘은 그 중 사랑과 트라우마, 두 주제에 관한 소회만 말씀드리겠습니다.사랑에 관한 한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변한 게 없습니다. 첫사랑을 잊었다거나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사랑이 변해서가 아닙니다. 변하지 않은 그 사랑을 현실 속에서 마주쳤을 때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지요. 우연히 번화한 거리에서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을 만난다면 사랑에 관한 한 변한 게 없다는 진실만을 확인하게 될 뿐이지요. 당신 말대로 마구 솟구치는 심장박동 소리와 부자연스런 손동작이 그걸 증명해주니까요.사람마다 죽을 때까지 넘을 수 없는 트라우마 한두 개쯤은 지니고 있지요. 이 또한 당신은 작품을 통해 증명하고 있군요. 심리상담가를 찾아가도, 누군가를 만나봐도 해결되지 않는 근원적 슬픔이자 고통인 그 무엇. 누가 대신 넘어줄 수 없는 그 옹벽은 너와 내가 함께 하는 식탁과 함께, 시간이라는 치료제가 더해질 때 어느 정도 넘을 수 있다는 걸 당신은 말하고 있군요. 하지만 모든 걸 받아들이려는 노력에도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실체 없는 헛것의 실체 또한 트라우마라는 걸 보여주기도 하는군요.착실하게 살아왔고, 착실하게 살 것만을 주문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어울리지도 않고 큰 감흥을 주지 못할 거라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회한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왔더라도 그 삶이 가치 있고,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진행되더라도 담담하게 지켜낼 수 있는 사람에게 맞춤한 책이라고 당신의 이름을 빌려 권하겠습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5

비결

`작가란 무엇인가`시리즈 세 권이 독서계를 강타하고 있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한 모음집인데, 뉴욕 발 문학 잡지인`파리리뷰`에 게재된 세계적 작가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우선 1권부터 사서 읽기 시작했다. 움베르토 에코에서 윌리엄 포크너까지 각 작가들은 나름의 진솔한 어법으로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를 풀어 놓는다. 소설보다 인터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와 진중성을 동시에 확보한 책이다. 나머지 두 권도 별 망설임 없이 사게 될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 편의 한 예가 눈길을 끈다. 짧은 답 몇 개를 이어가는 그의 태도에 확신이 서려 있다. 얼핏 무신경하게 보이는 그 답변이 희한하게도 울림도 주고 따끔거림도 준다. 책이 처음 출간되고 유명해질 때 다른 작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요, 전혀.” 당시에 작가 친구는 있었느냐는 질문에도 `한 명도 없었다`고 대답한다. 나중에 친구나 동료가 된 작가가 있느냐는 물음에도 역시`아니요,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오늘날까지 작가 친구는 한 명도 없느냐고 인터뷰어가 재차 묻자 “없다고 생각돼요.” 라고 짧게 답한다.`주변 정리가 되어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만고의 진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저처럼 단호하게 확인까지 해주니 쓰라린 울림이 올 수밖에.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은가? 비결은 간단하다. 혼자이기를 즐기면 된다. 일단 친구 만날 시간에 책상에 앉아야 한다. 찻잔 마주하며 인간사 궁금해 할 시간에 펜을 놀리면 된다. 괜찮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자기 암시로 무작정 써야 한다. 하루키의 확신에 찬 저 단답은 이렇게 말한다. 혼자 견디며 독하게 쓸 자신이 없으면 작가되기를 포기하라고. 그런데 철저하게 혼자이기만 하면 되는 이 쉬운 방법이야말로 실천하기엔 가장 어렵다. 뭔가에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면 그건 혼자만의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몰입도 최상인 그 순간을 유지하려면 친구조차 들이지 않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내 글쓰기가 한참 먼 이유를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4

경험 안에서의 문화

가장 호의적이고 흥분할 만한 안동에 대한 이미지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안동식혜`를 택하겠다. 열두 살, 고향인 그곳을 떠난 이후로 안동식혜 맛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나이 드는 탓인지 어릴 때 접했던 그 맛이 몹시 당겼다. 궁하면 구하고 급하면 나서렷다. 난생 처음 안동식혜 담그기에 도전해봤다. 늙은 엄마에게 달려가 부탁하기에는 염치없고, 솜씨 좋은 올케나 언니는 너무 멀리 있고. 일단 급한 대로 전화통을 붙잡고 언니에게 제조법을 물었다. 그래도 못미더워 인터넷 검색까지 보탰다. 고두밥을 짓고 무와 당근은 채 썰었다. 불려 치댄 엿기름물에다 고춧가루와 생강도 우려냈다. 썬 재료와 뜨신 밥을 엿기름물에 섞어 설탕 간을 한 후 하루를 삭였다. 놀라워라, 어릴 때 먹던 그 향과 식감이 코와 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납작하게 썬 배와 사과를 곁들이고 볶은 땅콩까지 고명으로 얹으니 얼추 식혜 모양새가 나온다.한데 나보기에 만족스런 첫 작품이 아들에겐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 먹는 시늉만으로 완곡하게 거절한다. 비주얼 면에서 안동식혜는 그리 산뜻한 편은 못 된다. 심하게 말하면 `꿀꿀이죽` 같다거나, 걸러서 표현해도 `물김치` 같다고 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식욕을 자극하는 모양새는 아니다. 접할 기회가 없었던 아들에게 부담스런 음료인 것은 당연하다. 가자미식해나 삭힌 홍어를 첫 대면할 때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그 맛에 적응하게 되면 좋아지게도 된다. 그 과정을 거친 남편이 비교적 잘 먹어줘 다행이지만, 내 식욕에 겨워 한 통이나 담근 식혜 앞에서 아들 입맛을 접수하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문화란 그런 것이다. 태생과 함께 한 것이라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나중에 경험한 문화가 껄끄러우면 일단 저어하게 된다. 거기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강요의 눈총 대신 배려의 눈길로 기다려줘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거기서 그쳐야 한다. 완벽히 타자를 이해하거나 이해시킨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후천적 문화 경험 앞에서 언제나 취향이 우선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3

그대 안의 진실, 내 안의 허구

확신과 객관성은 동거하지 않는다. 자신할수록 거짓에 가깝고, 고집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진다. 본질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다. 별은 별이고, 달은 달이다. 다만, 존재하는 그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세상에 다 보여주지는 못한다. 별과 달을 어떻게 새기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반짝이는 별을 보고 누군가는 훌쩍인다고 말하고, 비치는 달을 가리켜 어떤 이는 숨는다고 느낄 수 있다. 원피스 한 벌 때문에 색깔논쟁이 붙었다. 인터넷 상, 그 줄무늬 옷은 사람에 따라 흰색과 금색 또는 청색과 검은색으로 달리 보인단다. 호기심에 동참해보았다. 별 짓을 다해 봐도 내 눈엔 흰색과 금색 옷으로만 보인다.하지만 청색과 검은색으로 인지하는 사람도 거의 삼십 퍼센트에 이른단다. 어떤 사람들은 둘 경우의 색이 다 보이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는 제 삼의 색깔로 보이기도 한단다. 놀랍게도 그 옷의 원래 색깔은 청색과 검은색이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래 색과 다른 색으로 그 원피스 색깔을 인지한다는 뜻이다.사실 그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조명의 차이, 시신경이나 망막의 상태, 빛에 대한 적응 정도 등에 따라 사람의 눈은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어차피 색깔이라는 것도 사람이 정한 것이고, 그 색깔 개념을 사람마다 똑 같이 받아들이라는 법도 없다. 미묘한 유전적 차이 또는 처한 심신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색깔로 인식할 수도 있다.세상을 보는 눈 역시 마찬가지다. 진실은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눈은 이쪽저쪽 다를 수 있다. 진실 앞에서조차 다르다고 틀린 건 아니다. 똑 같은 원피스라도 내 눈에는 흰색으로, 네 눈에는 청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 눈에 비치는 그것만이 옳고, 네 눈에 보이는 그것은 그르다는 생각 자체이다. 보이는 대로 보는 타자의 현실이 곧 자아의 현실이다. 다만, 그 속에서 내가 보는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훈련만은 하고 또 할 일이다. 섣불리 확신하거나 함부로 고집하는 일에서는 멀수록 좋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3-02

엽총과 치안 강국

비교적 치안 강국에 속한다. 우리나라를 두고 한 말이다. 개인의 총기 소지를 금하는데다 방범 시스템도 이만하면 족하다. 가장 무서운 흉기인 총으로부터 자유로운데다, 웬만한 골목엔 CCTV까지 설치되어 있다. 금상첨화로 치안 담당 공권력도 동네마다 둥지를 틀었다. 국민 안전을 지켜주는 체계로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그에 비해 치안 공백인 나라는 어떠한가. 잘못 엮이면 흔하디흔한 총구 앞에서 제 목숨을 씨름해야 한다. 치안에서만큼은 선후진국 구별이 안되는 나라도 많다. 못 살면 못 사는 대로 공포에 떨고, 잘 살면 잘 사는 대로 불안에 겨워한다. 치안은 총기류 개인 소유 허·불허 정책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총기류 개인 불허국에 해당하는 우리나라가 이만한 안전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국민 된 복에 속하는 일이다.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새다. 우리도 더 이상 총기로부터 안전한 국가가 아니다. 끔찍한 엽총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죄 없는 세 사람이 어이없는 죽임을 당했다. 사냥용총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맘만 먹으면 누구나 총기류를 손쉽게 만질 수 있다는 현실에 분개한다. 치안에서만큼은 어느 선진국 못지않게 한수 위라고 자부했던 그 마음을 철회하고 싶을 만큼 불안하고 불편하다.엽총은 그 위력에 있어, 공기총에 비할 바가 아니란다. 큰 멧돼지도 한 방이면 즉사시킬 수 있을 만큼 화약 성능이 강한데다 연발까지 가능하단다. 나쁜 맘을 먹기만 한다면 충분히 인명 살상용 무기로 변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총포 화약에 관한 단속법이 있으면 뭐하나. 악용하려는 자 앞에 무용한 지침은 있으나마나다. 평범한 사냥용 총이 살상용 범죄에 활용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그 체계를 점검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 엽총 관리 시스템이 아무리 합법적으로 운용된다 해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소용없다.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16만 자루의 총기가 전국을 누비는 나라, 이 때문에 더 이상 치안을 자랑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어선 곤란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27

슬픔의 위로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마사코 가방에 들어 있던 것은 버섯이었다. 지나치듯 잡힌 그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건 그것이 영화 속에서 슬픔을 씻어 주는 매개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조주인공인 마사코는 공항에서 가방을 잃고 무작정 카모메 식당에 합류한다. 상처 있는 자들의 안식처인 그곳에서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음식과 대화와 마음 나눔으로 위안을 받는다. 식당 주인이자 단아하고 상냥한 주인공 사치에, 눈을 감고 손가락이 지도를 짚어준 대로 이곳 헬싱키로 떠나온 미도리, 일상의 짐이란 무게에 지쳐 과감하게 일탈을 감행한 마사코. 조화롭게 변주되는 이들 셋의 일상에 헬싱키 사람들의 호의적인 호기심이 보태지면서 카모메 식당은 서서히 분주해진다.상처 없는 성장 없고, 슬픔 없는 열매 없다. 그 핍진성의 울타리 안에 비춰지는 모든 등장인물이 다 나 같고 이웃 같다. 그래도 가장 위로해주고 싶은 인물은 마사코이다. 오래 간병한 부모를 잃은 상실감,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한 수치심 등이 상처가 되어 유리병의 잼처럼 눌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마사코. 그미에게 삶은 곧 `짐`이다. 그 짐을 부려놓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짐을 잃어버리는 슬픔의 아이러니. 핀란드 말을 모르지만 슬픔으로 술에 쩐 동년배 헬싱키 여자를 성심껏 위로해줄 줄도 안다. 통하는 건 말이 아니라 마음이기에.핀란드 사람들이 평화로워 보이는 건 슬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숲이 그 슬픔을 위무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게 된 마사코는 숲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야생버섯을 줍는다. 나중에 가방을 찾게 되었을 때 그 안에는 노란 버섯이 가득하다. 슬픔의 위로를 숲, 구체적으로 버섯에다 비유한 걸게다. 소란스럽고 탐욕스러운 것이 아니라 소담스럽고 자연적인 것을 가슴에 담음으로써 슬픔을 정화하는 상징성.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내 맘에만 있고, 핀란드에는 없을 것 같은 슬픔 따위는 없다. 우아한 사치에의 말을 빌리자.“물론이죠. 세상 어딜 가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법이지요.”/김살로메(소설가)

2015-02-26

배우기와 가르치기

“배우는 것은 적에게서 배우는 것마저도 항상 안전하지만, 가르치는 것은 친구를 가르치려는 것마저도 안전한 경우가 거의 없다.” 콜턴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란다. 무척 공감이 가는 터라 따로 포스트잇에 적어 놓았다. 사람들은 가르치려 드는 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한수 가르쳤음을 인정받으면 좋아하게도 되는 게 사람이다. 적에게 배우는 것조차 안전하다는 말은 적 입장에서 보면 한수 가르쳤음에 대해 뿌듯해하는 것이 되고, 친구를 가르치려는 것마저 안전하지 않다는 말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가르치려드는 자 앞에서는 영원한 친구로 남기 어렵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얼마나 가르치기를 좋아하면 적의 안전을 담보해가며 가르치려 들 것이며, 얼마나 가르치려는 사람을 싫어하면 친구의 안전을 위협해서라도 가르치려는 것을 방어할 것인가.저 명언을 이제 `배우기`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것보다 누군가에게서 배우겠다는 태도가 훨씬 맘이 편하다. 적에게서도 배우겠다는 자세는 겸허함에서 나온다. 악의 없이 오로지 배울 것을 선언한 사람에게 불안이나 공포를 선사할 적은 없다. 친구에게도 마찬가지다. 배우겠다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으면 가르치려 들던 친구조차 그 배우겠다는 아우라에 흡수되어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만다.인용한 명언의 내 식 결론은 이렇다. 사람에게는 가르치려드는 나쁜 본성이 있다. 가까운 친구 앞에서도 그 태도는 안전하지 못하다. 그러니 그 본성을 누르고 수련해라. 누구를 만나든, 특히 약자 앞에서 한수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가르침의 허세로 인정받기보다 배우겠다는 진심으로 다가서는 일이 언제나 우선이다. 공평한 신의가 있는 사람은 배우려하고, 지혜롭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가르치려 든다. 타인을 통해 배움을 얻으려 하는 자는 실로 지혜롭고, 먼저 나서서 가르치려 드는 자는 실은 가장 바보 같다. 뭐, 이런 단상을 얻었다. 적고 보니 이조차 가르치는 풍월이다. 부끄러워라, 내 인품도 어지간히 뻔뻔하도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25

담배가 뭐기에

정조 임금은 애연가였다. 나쁘게 말하면 골초였다. 그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의하면 담배는 만병통치약이었다.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고, 소화와 변을 도우며, 시문을 엮고 담소를 나눌 때도 필요할 정도로 유익하지 않은 점이 없다고 했다.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는지 흡연 장려를 하는 책문을 내리고, 대학자들을 모아놓고 `담배`를 주제로 시험을 치르게 할 정도였다. 백성에게도 적극 권했다. 이 풀이 아니면 답답한 속을 풀지 못하고 꽉 막힌 심정을 뚫어주지 못하니 담배를 백성들에게 베풀어 그 혜택을 함께 누리고자했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남령초(담배)만한 것이 없다며 백성을 상대로 예찬론을 폈다. 몸 편하고 맘 녹일 수 있다면 온 백성이 흡연가로 거듭나도 좋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담배에 대한 상식이 오늘과는 달랐던 시대이니 왕의 논지는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왕이 주도한 흡연의 시대가 끝까지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담배의 폐해를 직시한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거기에도 굴하지 않고 담배를 고수하던 왕이었지만 사회 문제로 인식되자 한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쌀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수익성을 좇아 담배농사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담배 농사 금지 조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왕은 담배가 얼마나 유익한데 농사를 금해야 하느냐, 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술 못지않게 담배를 좋아했던 정조 임금이 단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국민 건강 증진 목적의 일환으로 담뱃값 인상을 실시했던 취지가 무색하게 국회 한쪽에서는 저가 담배 검토론이 흘러나온다. 흡연자 건강보다는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게 표밭 일구기에는 더 유리한 모양이다. 금연정책의 진정성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국민(특히 저소득층) 부담을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미리 다른 방법을 모색했어야지 지금 와서 딴 소리다. 담배가 뭐기에 국민을 상대로 장난치나. 담배의 폐해에 대해서는 몰랐으나, 담배를 권장함으로써 백성을 위하려 했던 정조 임금의 진정성부터 배워라./김살로메(소설가)

2015-02-24

분기점에서의 선물

몸은 공장이다. 온통 새 부품으로 시작하는 공장은 잘도 돌아간다. 고장도 없다. 쉼 없이 공산품을 생산한다. 공장주의 뜻에 따라 품목을 바꿔가며 창의적인 제품들을 잇달아 내놓는다. 하지만 천년만년 지속될 것 같은 그 작업도 어느 일정 시점에 이르면 정체 현상을 빚거나 삐걱거리게 된다. 쌩쌩하던 기계는 헐떡이게 되고, 마모된 흔적으로 가동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심한 경우엔 엔진 이상이 생겨 시스템 자체가 돌변하기도 한다. 사람 몸이 꼭 그러하다. 건강할 땐 `제 몸이란 기계`에 이상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호흡이 달리지도 않고, 마모도 되지 않으리라 착각한다. 하지만 청춘은 짧고 노년은 길다. 체력은 어느 순간 급격이 떨어진다. 몸의 기갈은 마음 성능까지 갉아 는다. 몸이 곧 마음이니 창의력과 의욕도 반감된다. 말 듣지 않는 몸이 부리는 정신은 허공에 뜬 구름 같다.몸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 분기점을 50대로 보고 있다. 생물학적 나이 50이 넘으면 대체로 신체적 여건에 급격한 변화가 온다. 공장 가동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꾸준히 몸 관리를 해온 사람은 이때가 닥쳐도 육체적·정신적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최선의 부지런을 다한다. 그때그때 부속품을 갈아 끼우고 자주자주 기름칠을 해왔기 때문에 분기점이 와도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게으른 나 같은 사람은 제 몸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도 노력은 하지 않고 그들을 부러워만 한다.100세 시대라고들 한다. 단순히 100세까지 오래 산다는 의미라면 저 말은 소용이 없다. `건강한` 100세가 아니라면 그 평범한 시대가 온다 해도 불행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오래살기가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살기에 방점이 찍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래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사는 한 건강했으면 좋겠다. `건강하게`의 여러 요강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들은 자기 관리의 달인이다. 건강이야말로 욕심 있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다. 노력 없는 값진 선물이 어디 있으랴./김살로메(소설가)

2015-02-23

명절엔 칼등

면도용 양날 칼이 있다. 어렸을 땐 흔히 상표명인 `도루코`로 불렸다. 전기면도기가 보편화된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도루코 하나씩은 거울 선반에 놓여 있곤 했다. 눈에 잘 띄었기에 급하면 연필깎이용으로도 쓰였다. 필통 안에 있어야 할 학용품용 칼이 없으면 별 생각 없이 도루코를 집어 들곤 했다. 손잡이도 없는데다 얇고 양날인 칼은 어린아이가 만지기에는 위험했다. 예쁘게 연필을 돌려 깎을 욕심에 무리하다가 손끝이 베이고 손톱 끝을 날리곤 했다. 두렵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아쉬우니 자꾸 손이 가곤 했다. 그 와중에도 의아했던 것. 손잡이가 없어도, 칼날이 얇아도 참을 수 있는데 왜 도루코 칼날이 아래위로 양면일까. 홑 날이면 손가락을 안 다칠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면도를 하기에 나름 최적화된 효율적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그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크면서 자연스레 그 의문은 해소되면서 덤으로 이런 단상 하나를 얻었다.칼이 제대로 칼로서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칼등이 받쳐 줘야 한다는 생각. 즉 칼은 칼등이 있기 때문에 제 칼날을 빛낼 수 있다. 아무리 잘 드는 칼이라도 칼등이 없으면 위험하다. 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칼등이라는 보호대가 있기 때문에 맘 놓고 칼 손잡이를 쥘 수 있다. 한쪽 날마저 잘 드는데 등마저 날렵한 칼날로 이루어져 있다면 아무래도 잡기가 저어된다. 양날 도루코로 연필 깎다 손끝 베던 것처럼 움찔하게 된다. 필요악인 칼날은 칼등이 있기 때문에 칼잡이를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양날 달린 시퍼런 칼날로 옳고 마땅한 이야기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뭉툭하고 덤덤한 칼등이 감싸는, 좋고 그러려니 한 이야기도 나쁠 것은 없다. 칼날이 바른 이야기라면 칼등은 좋은 이야기이다. 칼날이 이성이라면 칼등은 감성이다. 칼날에 칼등이 따르는 이유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설날이다. 바르고 이성적인 것도 괜찮지만 좋고 감성적인 보따리들을 더 많이 펼치는 명절 연휴가 되기를 바라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8

옵션 인생

친구가 새 차를 샀단다. 해외에 사는 친구인데 망설이다 국산차를 샀단다. 비슷한 연비의 도요타나 혼다에 비해 조금 싼 것도 있고 애국도 하고 싶어 그렇게 했단다. 친구의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 국내에서보다 싼 가격인데다 서비스에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십여 년 이상 그 차종을 몰았던 남편도 별 불만이 없더라는 말로 나는 무조건 잘 샀다고 응원을 했다. 그런데 친구 말이 의미심장하다. 차를 사긴 했는데 찜찜하단다. 알람 장착하고 방수 코팅하고 등등, 약간씩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차 값이 올라갔기 때문이란다.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당연한 현실이므로 나는 이런 카톡 문자를 전송했다.“기본으로 시작해 옵션으로 마감하는 게 삶이다.”그렇다. 짧은 여행에서도 그런 걸 느낀다. 패키지여행의 최대 묘미는 싼 값에 편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거다. 항공료도 싸고 숙박비도 할인이 된다. 자유 여행에 비해 움직임이 타이트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자유여행에서 느껴야 할 불안이나 압박에 비하면 참을 만하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고 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는 패키지여행만큼 편리한 것도 없다. 하지만 패기지 여행의 최대 약점은 바로 옵션이다. 관광지마다 상점을 순회하는 것이 애교 섞인 불만이라면, 관광 코스를 덤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뭉근한 압박이 된다. 이럴 경우 나는 심리적·신체적 위해가 걱정 되지 않는 한 무조건 옵션을 선택한다. 어차피 여행사에는 옵션 항목 전제하에 일정을 짠다. 그러니 옵션 사항보다 나은 일정을 감행할 자신이 없으면 그 일정을 따르는 게 속편하다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옵션은 기본에 없는 쾌락이나 즐거움을 수반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옵션을 택할 이유도 없는 게 인생이다. 내 책무를 줄이고 싶을 때 기본을 속삭이고, 내 위안을 구하고 싶을 때 옵션을 외치는 게 삶이기도 하다. 기본 없는 시작 없고 옵션 없는 마감 없는 게 생이더라. 중요한 건 기본이든 옵션이든 한 번 택했으면 그걸 즐기면 그만이라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5-02-17

1달러 단상

캄보디아에서는 1달러의 힘이 세다. 앙코르와트의 도시인 씨엠립에서는 적어도 그렇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1달러의 위용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비자와 입국을 담당하는 심사대를 통과하려면 1달러의 웃돈이 필요하다. 일렬로 앉아 있는 담당자들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원딸라`를 외친다. 입국 수속 때 웃돈이 필수처럼 따라붙는 곳이 이곳 캄보디아란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은 터라 요구하는 그들에게 1달러씩을 헌납해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다. 입국을 하려는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는다. 웃돈을 주지 않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입국 지연을 시키기 때문에 팁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불합리한 관행조차 그 나라의 문화려니 하는 마음이 있어야 편한 여행이 된다. 캄보디아에서 1달러는 어디서건 유효하다. 호텔 매너 팁은 당연한 거고, 급할 때 도움을 주던 현지 보조 가이드에게도 1달러,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꼬마 악동에게도 1달러, 수상가옥촌 배 위에서 앵벌이하던 아기에게도 1달러. 그렇지, 전신 마사지하던 안마사에게는 고마운 나머지 5달러의 팁을 건네기도 했구나. 그러고 보니 입국 심사 때만 강제적 팁이지 나머지는 스스로 우러난 팁의 행렬이었다. 단 며칠간의 씨엠립 여정은 그렇게 1달러에서 시작해 1달러로 끝나는 느낌이었다.누군가는 말한다. 버릇 되는데다 자생력을 잃게 하니 팁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과연 그럴까. 자생력은 정치적 여건이 만든다.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을 다그칠 수는 없다.`기브미 초콜릿`을 외치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때도 초콜릿을 건네는 쪽이 옳았지, 자생력 운운하며 때 묻은 고사리 손을 외면한 쪽이 옳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구조적 가난과 부패 앞에서 백성은 언제나 무죄이다. 오직 정치에 그 죄를 물을 일이다. 애절하게 구걸하든 교묘하게 강탈하든 그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단죄의 제일 대상은 백성을 방치하거나 그 상황을 즐기는 정치세력일 뿐이다. 잠시 본 캄보디아는 1달러의 힘에 갇혀 있는, 아직은 가난한 나라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6

웃을 수 있을까

늙는 것도 서럽다는데 노년을 제 의지대로 가꾸는 분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이듦의 애상을 말해주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 세 가지`라는 우스개가 강한 페이소스가 되어 귓전을 때린다. 자기 연민이 가득한 문구 앞에 서니 언젠가는 맞이할 노년의 풍경이 예고 영화처럼 스친다. 노령화 사회에 어설피 방치된 노년 자신들의 현실 감각을 들여다보노라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이것이 나와 당신의 미래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노년에게 중요한 세 가지 중 첫 번째가 이러면 병신된다, 라나. “모든 재산을 자식들에게 미리 주고 타 쓰는 사람, 재산을 부인 또는 남편에게 다 주고 타 쓰는 사람, 재산이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죽는 사람.” 어찌 이리 맞는 말만 하는지.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노년의 미래를 담보하는 확률은 (있기만 하다면!) 재산이 높지 자식이나 마누라가 높은 게 아니다. 애석하게도 그것이 현실인데도 우리 시대 어른들은 여전히 자식 앞에서 배우자 앞에서 약하다. 내리사랑이나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런 행동을 강화시킨 측면도 있을 것이다.두 번째가 이러면 바보된다, 이다. “자식에게 미리 상속하는 사람, 손주 봐주려고 큰집 장만하는 사람, 손주 봐주려고 친구모임에 빠지는 사람.” 이 말도 어쩜 이리 콕콕 찌르는지. 특히 손주 봐주려고 큰집 장만하고 친구 모임에 빠진다는 대목에서는 울컥해진다. 절대 손주 봐주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다가도, 닥치면 결국 총대를 메게 되는 이는 할배·할매가 아니던가. 육아를 책임져주지 않는 사회에서 안심하고 맡길 여력 중 제일 순위가 가족 노년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는 잠재적 대기 상태자가 된다.마지막 하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한다, 이다. “참을 걸, 즐길 걸, 베풀 것!”정말 맞는 말이도다. 이건 노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참고, 즐기고, 베푸는 일의 숭고함은 만사의 진리이다. 한데 이조차 기본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일이니 다소 버거운 실천 요강이긴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