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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핍진성을 찾아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에 보면 핍진성(逼眞性)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작가에 의하면 `갈피 너머에 있는 훨씬 뒤쪽의 단어와 표현`을 찾는 행위이다.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것은 개연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책갈피 앞쪽에 해당된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핍진성인데 이는 갈피 훨씬 뒤쪽에 해당된다. 전체적인 플롯을 통해 개연성이 확보 되면 묘사를 통해 글의 핍진성은 완성된다. 내 식의 예를 들자면 “나는 그 여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건 개연성에 머물러 있는 거지만 “코를 찡긋하며 웃던 그 모습에도 미칠 지경이었지”라고 말한다면 핍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핍진성을 구축하는 데는 더 많은 염력과 생각의 힘을 필요로 한다. 문학 용어에서 나온 핍진성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진실의 정도를 말한다. 있음직한 이야기로 독자를 납득시킬수록 소설로서의 힘을 갖는다. 플롯과 캐릭터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소설 요건이야말로 핍진성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핍진성을 구체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훈련이다. 눈썰미가 없으면 좀 전에 만난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사람을 제 삼자에게 설득시킬 길이 없어 그냥 `내 앞에 앉았던 사람`이라고 어물쩍 말하게 되고 만다. 하지만 눈썰미를 훈련하는 경우라면 그가 진자주색 털조끼를 입은 데다, 짧은 단발이었다는 것을 금세 기억해낼 수 있다.소설도 마찬가지다. 훈련하면 글썰미(?)도 생겨나고 나아가 핍진성 획득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눈에 띄는 진자주색 털조끼와 지나치게 짧은 단발을 한 사람을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성격이 특이한데다 단호한 면이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줄 수 있게 된다. 구체적 정황을 담은 묘사 덕에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믿게 하는 원동력은 핍진성이고 그것을 얻으려면 끝없는 연습의 힘 외의 방법은 없다는 걸 김연수 작가의 귀띔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1

허삼관매혈기 대 허삼관

영화 `허삼관` 덕에 소설 `허삼관 매혈기`도 새삼 관심을 끈다. 원작자인 위화만큼 내게 신뢰를 주는 작가도 없다.`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라는 에세이를 읽은 후 단박에 그가 좋아졌다. 그의 글을 인터넷 신조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웃프다`정도가 된다. 자연스런 웃음을 유발하는데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슬픔의 격조가 느껴진다고나 할까.`허삼관 매혈기`에도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학교에서 배운, 문학적 풍자에 관련된 모든 것이 이 한 권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해학, 촌철, 골계, 익살, 조롱, 패러디, 비장, 엄숙 등의 문체적 속살이 잘 드러나는 이 소설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일찌감치 `허삼관`을 보러 갔다. 영화가 원작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단순한 관람기가 맞는 이유는 일단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적 주제를 스크린이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허삼관`의 경우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배경을 옮기다 보니 원작의 중요한 대목인 문화혁명의 광풍 시절이 빠져 버렸다. 한국전쟁 직후라는 배경이 중국의 지난했던 한 시절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허삼관이 매혈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소설만큼 절절하지도 실감나지도 않았다. 확실한 재미 요소인 시대적·공간적 배경이 바뀜으로서 당위성을 잃고 가족 신파 쪽으로만 강조할 수밖에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허삼관 매혈기`는 `평등`에 관한 알레고리라고 작가는 말한다. 허삼관이 굳게 믿는 평등은 쉽게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이다. 못된 짓을 한 하소용이 불치병에 걸리는 건 당연하고, 단 한 번의 아내 과오에 복수하는 길은 자신 역시 바람 한 번 피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방식의 평등이다. 하지만 그 평등에마저 못 가진 자는 온전히 다가갈 수 없다. 작가가 숨겨 놓은 진짜 평등이란 죽음 앞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성애라는 한 내용을 작가와 감독이 어떻게 달리 표현했는지 궁금한 이들은 이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고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20

탄력적 사고

쌍둥이 중 누가 장자여야만 할까. 흥미 있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쌍둥이 중 늦게 태어난 아이가 맏이가 된다는 것. 상상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 일초라도 먼저 태어나면 형이 된다는 동양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접하니 무척 신선하고 신기하다. 사람의 생각이란 다양한 것. 현대 유럽 사회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도 우리만큼 위계질서를 잡아주는데 집착하지 않는다. 형 동생이라는 개념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전통 왕가에서나 우리식으로 하자면 시골 종갓집 같은 데서는 여전히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단 그들이 생각하는 형·동생에 대한 정의는 보편 정서와 다르다. 먼저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늦게 태어난 아이가 형이 된다. 먼저 수정된 아이가 자궁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느긋하게 나온다는 속설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는데 그건 과학적 근거가 없으니 넘어 가더라도 나머지 한 이유에는 솔깃해진다. 약한 아이가 먼저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안에서 강한 아이가 밀어내 준 뒤 천천히 나오게 된다나. 강한 자가 곧 형이라는 편견이 살짝 깔리기는 했지만 공감이 가기도 한다. 형이 꼭 동생에 비해 덩치가 크고 의리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힘 세다고 먼저 박차고 나가는 형을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흐뭇한 이야기다.쌍둥이 중 누가 맏이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 차원에서 논할 이야기는 못 된다. 산아의 위치에 따라 운명적으로 먼저 나오고 나중 나오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가 형이고 동생이냐를 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일뿐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같은 조건에서 내가 먼저 빛을 봤으니 내가 형이라는 생각도 옳고, 내가 형이니 네가 먼저 빛을 보라고 떠밀어주는 생각도 옳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쌍둥이를 규정하는 순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탄력적 사고를 하면 세상에 진실이 아닌 게 없게 된다. 사람 생각은 다 다르고 저마다 옳으니./김살로메(소설가)

2015-01-19

남은 시간

혼자 집을 지킨다. 남편은 출장 가고, 딸내미는 근무하고, 아들은 놀러 갔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이 되니 몸이 으슬으슬하고 떠도는 공기에도 한기가 서려있다. 입에서 쓴 내가 나고 어깻죽지에 동통이 밀려온다. 몸살기니 쉽게 잠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잡념만 뭉친다. 이럴 땐 식구들의 응원보다 나은 기 보충제는 없다. 괜히 가족 대화방에다 투정서린 문자를 남겨 본다. `이 밤 모두 나 빼놓고 잘 있제? 외롭다.``내일 (집에) 간다.` 애교나 과장을 모르는,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딸내미의 답문이 일착이다. 비교적 싹싹한 아들 답문도 나을 게 없다. `어머니, 파이팅.` 선심 보너스처럼 달린 하트 이모티콘이 민망하다.`숙소 들어가는 중` 남편의 답문마저 초간단하다. 그래도 마음 온도만큼은 문자에 비할 바 아니리라.아니나 다를까 숙소에 든 남편에게서 금세 전화가 온다. `외롭다`는 말의 의미를 직해할 수 있는 사이는 역시 부부밖에 없구나. 일상 그대로의 몇 마디를 나눌 뿐인데도 위안이 된다. 전화기를 끊자마자 덤으로 문자 하나를 보내온다.모 회사가 제작한 가족사랑 홍보물이다. 클릭하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영상이 뜬다. 일 년, 이 년 아니면 몇 개월. 결과표를 받아든 사람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남은 생애에서 우리가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는 것. 일하고 자고 사람 만나 사교하고 등의 시간을 빼고 나면 가족과 마주하는 시간은 너무 모자란단다. 친절히도 가족시간 계산기가 덧붙여져 있기에 적용해보았다. 남은 시간을 많이 할당 받고 싶어, 잠이나 기타 여가 시간을 내 패턴보다 조금 줄여서 입력했다. 그래도 겨우 7개월.으슬으슬하던 몸에 열감이 확 돋을 정도로 정신이 퍼뜩 든다. 이해하겠거니, 하는 전제를 깔고 다른 것에 비해 늘 후순위로 미루기만 했던 가족의 일. 평균 수명으로 봐도 삼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가족을 위한 남은 시간이 고작 7개월이라니. 숙연한 책임감으로 잠 못 든다한들 이 밤은 할 말이 없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16

방과 밥

가족을 이뤄 산다는 것은 방과 밥을 완성하는 일이다. 편히 쉴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 꾸밈없이 마주할 수 있는 가족을 위한 밥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 갖춘 노래이다. 하지만 순간순간 그걸 잊고 살 때가 많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의 심심함이야말로 최상의 버라이어티 쇼였음은 상실의 고통을 맞이한 후에야 알게 된다. 자책과 상실과 극복에 관한 토론 거리를 준비하느라 본 `아들의 방` 영화가 너무 먹먹하다. 이탈리아 항구 도시, 상담의인 지오반니 가족은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의 일상을 엮어간다. 휴일 아침 아들과 조깅을 하기로 했지만 응급 환자의 호출에 응하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새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던 아들은 익사하고 만다. 함께 있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지오반니는 주저앉는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천직이었던 지오반니도 자신의 상처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내와 딸의 상실감도 만만찮다.아들의 죽음이 있기 전 그들의 식탁은 평화와 안식의 상징처였다. 무탈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들이 죽기 전까지는 결코 알지 못했다. 식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무너져 내린 가족의 식사 장면 앞에서 심장이 조여 오는 통증을 참아야 했다.아들의 여자친구의 등장으로 그들에게도 치유의 기회가 생긴다. 안드레아의 죽음을 모르는 그녀는 안드레아가 찍은 그의 방 사진을 보여주며 그 방을 보고 싶어 한다. 아들의 방을 함께 둘러보면서 새삼 그 아이의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알게 된다. 남은 가족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온다. 그녀의 방문을 계기로 지오반니 가족은 진정으로 안드레아를 떠나보낼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동행인과 히치하이킹 중인 그녀를 배웅하다 보니 프랑스 국경까지 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안드레아를 놓아줄 수 있게 된다. 죄책도 비탄도 상실도 애도도 결국 자신이 극복해야 된다는 것 더불어 평범한 날의 한 끼 밥, 무탈한 날의 소박한 공간이 얼마나 최상의 행복 조건인지를 가슴으로 알게 된 하루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15

비굴한 사회

박노자 교수의 신작 `비굴의 시대`가 배송되어 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는 암울하다. 하기야 사회학자의 분석이라는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갑갑하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날마다의 경험으로 알게 된다. 우리 현실을 지배하는 가장 큰 흐름은 자본 이데올로기이다.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사회는 내남할 것 없이 그것에 경도되어 모든 가치 판단을 돈과 연관 짓는다. 국민 대부분은 중하급 월급쟁이이거나 영세한 자영업자들이다. 그들에겐 능동적 힘을 발휘할 기회도 패기도 없다. 나머지 십 퍼센트도 안 되는 자산 계급이 이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착각하고 길들여진다. 노력하고 몰입하면 그 십 퍼센트, 아니 일 퍼센트의 그룹과 같아질 수도 있을 거라고. 어쩌면 그런 무모한 착각 덕에 자본주의의 페달을 밟는데 적극적 동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못 가진 자가 득을 취할 일은 거의 없다. 극소수인 가진 자를 위해 수많은 보통 사람 또는 그 이하의 구성원들이 그들을 떠받치는 구조, 이것이 천민자본주의의 실상이다.국가와 자본은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데다 교묘하고 조직적이다. 가진 자나 권력자가 갑질을 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지속되면 불의에 거부하거나 투쟁할 힘마저 잃어버린다. 자본이 만든 비겁의 굴레에 구성원은 머물고 자본은 그 시대를 백분 활용한다.비굴한 시대상의 좋은 예시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처럼 정당한 분노는 그들의 것이지만 그 분노를 제대로 부려놓을 수가 없다. 불합리와 부조리의 난장 앞에서도 적극적 연대나 공감은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자본의 노예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별자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희망 잃은 시대를 진단하는 활자 앞에 밑줄 긋기조차 착잡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14

웬만해선

동창모임을 앞두고 한 친구가 더 이상 모임에 합류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분위기 메이커에다 주변인을 챙기는 넉넉함 덕에 모두 의지하던 친구였다. 멤버들이 전국에 퍼져 있어 겨우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상황인데 못나올 정도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다. 친한 한두 명은 사정을 알 터이나 대부분은 상황을 잘 모르니 카톡 단체방에는 불이 났다. `희정이가 빠지면 나도 탈퇴다, 회장은 책임지고 희정이를 고대로 모셔 놔라, 희정이 없는 모임은 연탄 없는 난로다.` 등 남자애들의 농 섞인 걱정 문자가 올라왔다. 카톡방에서 나가 버린 희정이가 그 문자들을 못 본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 중 한 문자에 눈길이 간다. “웬만해선 안 올 애가 아닌데.” 이 한마디 안에 희정이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총체적으로 녹아있음을 느꼈다. `웬만해선`이라는 매혹적인 한정어 때문이었다.누군가로부터 `웬만해선`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만 살아도 잘 살고 있는 거다. `웬만해선 그럴 사람이 아냐, 웬만해선 그렇게 힘들어 할 애가 아니지, 웬만해선 지치지 않을 사람인데, 웬만해선 늘 남을 우선하던 사람이지.` 등의 예문처럼 `웬만하면`이라는 말이 타자를 향할 때는 참으로 듣기 좋다.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최대 표현법 같기 때문이다.반면에 `웬만해선`이라는 말이 스스로를 향할 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웬만해선 내가 이런 실수 하지 않는데, 웬만해선 내가 흥분하지 않는데, 웬만해선 내가 약속을 어기지 않는데.`등등의 사례처럼 `웬만해선`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남발하면 신뢰가 반감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타자에게 바라는 변명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웬만해선` 이라는 말은 타자를 이해하거나 감싸주고 싶을 때 더 어울린다. 스스로를 향하는 `웬만해선`이라는 말은 아낄수록 좋다. 꼭 써야 한다면 변명이 아니라 자기반성용이라야 한다. 역시 실천이 어렵다. 그나저나 웬만해선, 이라는 다사로운 수식어를 받는 희정이에게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김살로메(소설가)

2015-01-13

직속(直屬)

변함없이 고만고만하기만 한 저녁, 어두워지는 시간의 깊이만큼 검은 공허감이 밀려온다. 습관처럼 한 편의 시를 읽고, 한 문장의 산문에 밑줄을 긋는다. 길 떠나 한뎃잠 설친 간밤의 피로가 여전하다. 그래도 문맥은 제대로 와 가슴에 꽂힌다. 누가 뭐래도 읽고 쓰는 일의 직속일 때가 가장 평화로운 자극이다. 최승자의 시 한 편을 묵독한 후 글벗이 건넨 김연수의`소설가의 일`을 펼쳤다. 앞장 색지에 빼곡하게 남긴 글벗의 친필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님을 알게 된 것, 제 인생의 크나큰 행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밑줄 팍팍 그었고, 도전도 얻었고 용기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희망에 겨워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신파에 잘 빠지는 어설픈 초보라 과하게 감격했는지도 모르겠으나, 님께도 분명 의미 있는 책일 거라 여겨 삼가드립니다.” 친구가 되는 일의 숭고함, 한 권의 책이 주는 용기와 도전 정신, 그 책이 친구에게 가서 같은 의미를 줄 것이라는 확신, 인용한 몇 구절 속에 무릎 담요 같은 포근한 진심이 담겨 있다.김연수 산문의 일부 요지는 이렇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쓰기에 왕도 없다. 매일 읽고 쓰면 된다. 쓰고 싶다고 타령할 그 시간에 그냥 쓰면 된다. 쓰는데 재능 같은 건 없고 재능은 잠겨 있지도 않다. 그것이 글쓰기의 비밀이다.“꿈인지 생시인지 /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 / 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 꿈인지 생시인지 / 나도 베란다에서 /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최승자의`물 위에 씌어진 3`의 시편이 김연수의 산문 내용과 겹쳐진다.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간다. 뭉근한 열정의 김연수는 매일 소설을 쓰고, 꿈인지 생시인지 기로에 선 최승자는 시간 맞춰 화분에 물을 준다. 골방에 틀어 앉은 또 다른 열정가는 글밭에 씨를 뿌린다. 종이의 직속이 되어 글씨를 뿌린다. 쓰는 자에겐 그것이 정치요 경제이며 사회의 전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12

`언브로큰`

오랜만에 조조로 개봉영화 한 편을 봤다. `언브로큰`. 일본 극우파들이 자국 내 상영을 결사반대한다는 바로 그 영화다. 감독을 맡은 안졸리나 졸리에 대해서도 입국 금지 서명 운동을 펼칠 정도라나. 호들갑을 떨며 그들이 흥분할 만큼 일본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영화일까 싶은 호기심에 개봉 첫날 일찌감치 달려가 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주된 내용은 베를린 올림픽에 달리기 선수로 출전한 바 있는 한 미국 남자의 일본 제국주의 포로 생환기이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점잖은 수위의 묘사가 이어졌다. 원경험자의 증언을 충실히 반영하느라 그런지 스토리텔링에 과장이 없었다. 밋밋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조금 지루했다. 고춧가루와 젓갈이 잘 배합된 김장김치를 기대하고 독을 열었는데 심심한 동치미가 담긴 독을 만난 기분이랄까. 그 어디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시 일본국의 잔혹한 포로 학대기는 없었다. 어느 집단에서도 있을 수 있는 고만고만한 포로수용소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미국인 포로를 산 채로 장작처럼 태웠다거나, 죽인 다음 인육을 먹었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장면은 그림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가 당하는 폭행과 수치심은 관객이 몸서리 칠 정도의 극한의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 장면들에 저 난리를 칠까 싶을 정도로 순화된 장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우익집단의 극단적인 보이콧 현상이 도리어 입소문이 되어 이 싱거운 영화의 롱런을 돕게 될지도 모르겠다.반성을 하면서 몽니를 부리면 그나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반성은 간데없고, 원폭 피해자라는 결과적 아픔만을 내세워, 진짜 피해자의 근원적 고통을 외면하려 드는 그들의 합리화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만이 만행이 아니다. 인간 실존의 위엄을 짓밟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도 그에 못지않았다. 가장 직접적인 피해 국민으로서 영화보다 더한 잔혹성을 연출했던 그들의 잘못이 반성으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온건한 묘사이긴 하지만 그들의 실체를 전하는 이 영화가 오래 상영되었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9

파이의 유머

이백 여일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소년 파이. 물론 혼자가 아니다. 무시무시한 벵골 호랑이와는 육지를 만날 때까지 함께 한다. 끝내 둘은 살아 돌아온다. 이 어마어마한 진실은 소년 파이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솔한 경험이다. 하지만 누가 파이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 보고도 제대로 믿지 않는 게 사람이다. 아니 보고도 제 식으로만 믿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어찌 본 적도 없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을 믿으란 말인가. 있는 그대로만 믿으라고 곧잘 말들 한다. 하지만 그 말조차 믿을 게 못된다. 있는 그대로의 기준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그 무엇은 본성 그대로의 형상과 내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개별자의 눈에 비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는 현실에서는 `개별자가 본 대로`가 되기 일쑤이다.이런 철학적 사유를 깊이 있게 파고든 소설이 `파이 이야기`이다. 얀 마텔의 유머 감각에 한 번 빠지고, 단순하고 쉬운 문체에 두 번 넘어가고, 진중하고 의미심장한 주제에 세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작품이다. 소년 파이의 태평양 표류기랄까. 인도의 한 도시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네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고 이참에 팔린 동물들과 함께 화물선에 오른다. 배는 난파되고 가족 중 파이만이 살아남아 벵골호랑이와 망망대해에서 표류동거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삶의 철학에 빗대 풀어 놓았다. 삶의 방식과 종교 문제 및 인간의 본성 등,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도마 위에 오른다.비현실적인 파이의 후일담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의심을 감안해 파이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버전으로 등장인물들을 각색해 능청을 떤다.“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밝은 모습으로 말하는 파이의 유머가 슬퍼 보이는 건 왜일까. 세상엔 너무 많은 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별자 숫자만큼의 진실을 믿고 싶어 하는 한, 파이의 유머는 단순한 유머로 보이지만은 않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8

물은 높은 곳에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의심해본 일 없는 그 물리적 진실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강어귀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사한 몇 년 전부터 짬이 나면 강물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남달리 풍부한 서정적 심성 때문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가늠하기 어려운 물결 방향 때문이었다. 상식으로야 바다가 보이는 쪽이 낮은 쪽이니 그곳으로 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물길은 하루에도 심심찮게 그 방향을 바꾸곤 했다. 아침나절 분명 뭍에서 바다로 흐르던 물줄기가 오후가 되면 바다에서 뭍을 향해 바뀌어져 있곤 했다. 신기하면서도 의문스러웠다. 급기야 `모든 강은 바다로 모인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론으로만 성립하는 헛말이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강 하구에서는 물이 역류해 내륙 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는 제멋대로의 결론을 내려놓기까지 했다. 아침에 바다로 흐르던 물이 오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륙 깊숙한 곳으로 밀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물결 때문이었다. 지형 특성상 하구는 강폭이 넓은데다 강심의 높낮이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물 흐름이 완만하니 바람 없는 날에는 호수처럼 강 물결이 잔잔하다. 하지만 강한 서풍이 불어오면 바다로 향하는 물결은 파도가 몰려오는 것처럼 드세게 일렁인다. 도도한 물줄기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동풍이 몰아치면 물결은 방향을 틀어 내륙을 향해 밀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물결 표면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거꾸로 흐르는 강은 없다. 바람결 따라 표면의 물결이 거꾸로 반사될 뿐, 속 깊은 물은 변함없이 바다로 흐른다. 어떤 사안 앞에서 그것이 잘못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제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겉 물결이 역류한다고 물길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의 물은 위에서 아래로 묵묵히 흐른다. 그 깊은 속은 결코 역류를 허락하지 않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7

사이드 브레이크

아들녀석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웃는다. 같이 웃자며 넌지시 고개를 돌려보니 사이드 브레이크 해제를 하지 않고 주행하는 차 동영상 장면이다. 운전면허 교습 중이라 자동차 주행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다 만난 장면 같았다. 운전 경력은 오래됐지만 시쳇말로 `김여사 운전법`에서 별 나아질 게 없는 나로서는 그 장면이 충격이었다. 장면 자체보다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은 상태에서 주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이 충격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자동차 구조를 모르는 나로서는 `주행할 때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려야 한다.`는 그 사실만 깊게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해제하지 않으면 애초에 차가 움직이지 않는 줄 알았다. 김여사 운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도 한두 번쯤은 브레이크가 올라간 상태로 주행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뻑뻑하고 무거운 차체의 느낌이 발끝에 감지되는 순간 곧바로 겁을 먹고 주변을 살폈던 기억이 난다.동영상 속 차는 잘만 달린다. 터널을 통과하는 것 같은데 사이드 브레이크 해제 없이도 정속 주행이 되고 있다. 다만 뒷바퀴가 돌지 않는다. 사이드 브레이크의 주된 기능은 뒷바퀴를 고정하는 것인 모양이다. 계속 달린다면 타이어 마찰열 때문에 불이 날 것만 같다. 그 장면을 찍은 사람이나 옆에서 달리던 다른 운전자들이 그 사실을 운전 당사자에게 알려 줬을까. 남의 일 같지 않아서인지 그 생각이 앞선다.제대로 알지 못하면 무모해진다. 강직하고 자신만만하다고 생각할수록 그런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다. 운전대에 앉아 있는 동안은 자신이 무모한지조차 모른다. 뒷바퀴가 구르지 않아도 정주행하는 데 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운전`이라는 세계에 돌입한 운전자는 경고등이 울려도 차체에 무리가 가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어떤 징후를 감지할 감각조차 나만의 운전이라는 세계에 할당해버렸기 때문이다. 탄내 나고 출력 저하되고 연비 악화되고 부품 마모되어도 모르고 가는 인생길, 누군가의 진심어린 제동이라면 반기고 반길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6

실천해야 꿈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두 권의 책과 손수 뜬 손목 워머를 받았다. 고마우면서도 부끄러웠다. 언제나 한발 늦은 마음 씀, 한 박자 늦은 배려심을 자책했다. 보답으로 집에 오자마자 책을 일독했다. 두 권 다 자기계발서인데, 먼 곳에서 열린 저자 강연회에 참석해서 내 이름으로 사인까지 받아왔다. 자기계발서 종류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친구의 정성에 감복해 절로 귀히 여겨 읽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한 가지 쯤의 매력, 그것이 자기계발서들의 특징인데 이번 책들의 요지도 그랬다. `꿈을 이루려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 변해야 한다.` 꿈꾸는 자는 많아도 꿈을 이루는 자는 드물다. 꿈을 향한 실천적 행동, 그것이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이런 책들은 꾸준히 독자들에게 어필된다. 당장 실행에 옮기지 못하더라도 책을 읽는 그 순간만은 충분한 자극제는 되어주기 때문이다. 열심히 꾼다고 꿈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실천 없는 꿈은 한여름 밤의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의 괄호 속에는 `실천해야` 라는 엄청난 인내를 요하는 한정어가 숨어 있다.왜 극히 일부분의 사람은 꿈을 실현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만 꿀까. 개인적으로`절박함의 정도`에 따라 일차적으로 길이 나뉜다고 본다. 절박함은 방해꾼과도 같다. 걸림돌이 크고 잦을수록 꿈을 꿀 기회도 그 열매를 딸 가능성도 높다. 넘어지려하거나 넘어진 자의 절박함이 실현된 꿈으로 나타나는 예는 얼마나 흔하던가. 그저 아무 일 없거나 다만 평화롭기만 한 사람들은 꿈 꿀 이유가 없다. 꿈조차 꿀 필요 없는 충만한 안식으로 제 안이 가득 찬데 무에 꿈이 필요할 것인가. 그들은 꿈 따위로 애면글면 자학 모드를 설정할 이유가 없다.꿈꾸는 자라면 절박함이 있고, 절박하면 꿈꾸게 되어 있다. 꿈만 꾸고 실천하지 않으면 절박하지 않은 거다. 꿈이 꿈으로만 남아있는 건 내 절박함이 그 꿈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으로만 있는 꿈은 꿈이 아니다. 실천해야 꿈이다. 새해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한 마디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5

첫 마음으로

희붐한 새해가 밝아 온다. 다행히 쾌청한 날씨다. 해마다 그랬듯이 마루로 나가 동녘하늘을 바라본다. 첫 마음이듯 한 해의 첫 해를 그렇게 맞이한다. 아주 옅은 빛의 아침노을이 깔리고도 한참 지나서야 2015년의 새 빛은 그 붉은 머리끝을 드러냈다. 우리집 마루에서의 일출 시각은 일곱 시 사십 분경이었다. 해 뜨기까지의 기다림과 설렘의 시간은 길었다. 하지만 막상 뜨기 시작한 해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하늘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분명 새 빛이건만 변함없는 그 빛 자체의 모습에서 오히려 신선함을 느끼는 그런 감정이었다. 달아나듯 떠오르는 빛을 향해 상투적이긴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소망을 빌었다. 새해엔 모두에게 좋은 일이 더 많이 가닿기를.스마트폰 알림판에도 온통 붉은 해가 솟았다. 저마다의 덕담으로 피워 올린 햇살꽃이 폰 곳곳에 만발했다. 연중 최고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햇살꽃 앞에서 나도 일일이 상대의 안부와 안녕을 기원한다. 첫 마음결 같으면 뭐든 안 될 게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때마침 지인분이 보내온 새해맞이 덕담 시구가 보인다.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 첫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 학교에 입학하여 새책을 앞에 놓고 /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 늘 새마음이기 때문에 /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새로운 마음을 지닌다고 있던 `헌 마음`이 당장 사라지는 것도, 새로운 그 무엇이 곧장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첫 마음의 다짐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늘 좋은 일만 이어지는 것이 삶이라면 첫 마음 같은 건 필요치도 않다. 그러니 새해에는 저마다 꿈 꿔도 좋다. 그 꿈이 꼭 이뤄지기를 기원하는 건 너무나 인간적인 바람이니 그 또한 당연하다. 다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첫 마음이 지닌 실천력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 간절한 첫 마음의 실천력, 그 덕목이 올 한 해 내 가슴에도 그들 가슴에도 올올이 심어지기를 바라고 바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5-01-02

최선의 갈무리

또 한 해가 저물었다. 파다 만 우물처럼 물은 솟지 않고 갈증만 남았다. 우물은 내년에 계속해서 파면 될 것이고 우선 급한 갈증부터 해소하기로 한다. 올해를 넘겨서는 안될 것부터 체크한다. 갈무리는 잘해야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한다. 기실 초대랄 것도 없다. 바깥 밥 먹고 겨우 티타임이나 마련하는 자리이다. 하지만 건성으로 주부 타이틀을 쥐고 있는 나 같은 이에겐 그 정도도 쉬운 게 아니다. 마루부터 둘러본다. 치우고 손봐야 할 것 투성이다. 장식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약봉지와 각종 파스, 몇 달은 방치해 놓았음직한 보조식탁 위의 더께 쌓인 고지서들, 주인 손길에서 멀어진 지저분해지고 풀 죽어 있는 창가의 화분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 왕도는 없다. 그저 찬찬히 해나가야 한다. 불필요한 물건들을 치우고 청소기를 돌린다. 내 깜냥으로 감당하지 못했던 화분들도 정리한다. 목 꺾여 숨넘어가기 직전인 폴리셔스에 물을 주고, 누렇게 말라가는 관상용 대나무의 잎 끝을 잘라준다. 물을 너무 자주 줘 물러버린 알로에의 가지를 솎아낸다. 여름 지나 한 번도 닦지 않아 희붐한 먼지 알을 까고 있는 인도고무나무의 넓은 잎을 닦아준다.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들 근본적으로 달라질 건 없다. 약봉지는 장식대 위에 내리꽂히는 햇빛에 바랠 것이고, 날아든 고지서는 빚처럼 식탁에 쌓일 것이며, 화분은 여전히 창가에서 목이 타들어갈 것이다. 살아가는 한 나는 약봉지고, 고지서고, 화분이다. 먼지 쌓이고 수선스러우며 말라가는 그것들을 손님이 온다고 해가 바뀐다고 확 버릴 수는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 갈무리 할 뿐이다. 유효기간 남은 약은 약보관함으로, 철 지난 고지서는 분리수거함으로, 단장을 마친 화분은 그 자리 그대로 남겨둔다. 치우고 버리고 솎아내기만 했는데도 마루 풍광이 달라졌다. 목간 마치고 거울 앞에 선 색시처럼 새치름하고 깔끔하다. 이 정도면 됐다. 친구들도 새해도 맞을 정도는 되었다. 갈무리는 완벽히 바꾸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정리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31

마음 공부

누구나 맘속 평화를 갈망한다. 모든 문제는 화평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왜 심리적으로 한결 같은 평화가 지속되지 않는 걸까. 욕심 때문이다. 모든 화의 근원은 욕심이다. 미운 사람이 생기는 건 내 욕심에 그가 차지 않기 때문인 거고,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도 내 욕심이 부른 화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조절되지 않는 게 사람이다.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라며 조물주는 인간의 그런 행동을 느긋이 즐긴다. 평화를 바란다면 우선 기대할 것이 없어야 한다. 기대할 것, 즉 기댈 곳이 없으면 절로 평정심은 따라온다.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새벽녘에 금궤 덩이가 머리맡에 놓여 있기를 바라고, 방주를 지휘하는 노아처럼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나만 선택해줄 것 같은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평정심은 이내 허물어진다. 일단 평정심을 유지하기만 하면 사물이나 상대에게 흔들림이 없게 된다. 그 무엇이 내 곁에 없어도 살 수 있고, 그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게 된다. 중심이 잡힌 그 마음이면 비로소 사물이나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일상의 괴로움 대부분은 그 무엇이 내 곁에 없어서 그렇고, 그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그렇다. 모든 건 내 편협한 생각의 우물에서 비롯된다. 그 물은 깨끗하지도 향긋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내 우물만은 그럴 것이다, 라고 믿고 싶어 한다. 갇혀 있는 상태에서 열린 상태로 만드는 부단한 마음의 노력 그것이 곧 중심을 찾는 길이다. 중심이 잡히면 무엇이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중심을 향하는 공부가 마음공부이다. 그것만 제대로 되면 사물 때문에 번잡할 일도 사람에게 흔들릴 일도 없게 된다.`사람의 마음은 그의 책이고 벌어지는 사태는 그의 선생이며 위대한 행동은 그의 웅변이다.` 매콜리가 한 말이다. 올 한해 내 마음이란 책에도 많은 선생이 다녀갔다. 숱한 선생이 다녀갔지만 아직 위대한 행동인 웅변의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터진 목으로 웅변이 되어 나오도록 하는 길, 그 마음의 중심 길에 닿기 위해 남은 날도 정진할 따름인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2-30

향취인지 악취인지

제 사정은 제가 제일 잘 안다. 그 말은 대개 옳다. 상식과 교양의 울타리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제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 스스로를 너무 잘 알아 괜히 움츠러들고 소심해지는 게 보통 사람의 행동 패턴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잘 알고 단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치기도 하게 되는 게 사람살이이다. 방학을 맞아 기숙사에 있던 아들이 귀가했다. 학기 중에 짬을 내 집에 들른 적은 있었지만 완전히 짐을 싸들고 온 것은 이 년만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 때부터 외지 생활을 한 터라 기숙사 생활이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했다. 온몸의 기가 다 빠져나간 듯하다고 했다. 이번 겨울만은 집밥을 먹으며 원기를 회복하고 싶다고 했다. 귀가한 아들의 묵은 한뎃잠 보따리를 풀었다. 새 옷이든 빨랫감이든 가리지 않고 지독한 홀아비냄새 난다. 다른 친구들에게 냄새 풍기는 게 미안하지도 않냐고 물었다.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다. 기숙사 생활 특성 한 공간에서 지내며 공동 세탁기를 쓰다 보니 다른 친구들 사정도 다르지 않단다. 즉 저들끼리는 홀아비 냄새가 나는지조차도 모른단다. 좁은 공간에서 혈기왕성한 청춘들이 북적대다 보니 궁상 섞인 냄새가 밸 수밖에 없나보다.한 울타리 안에서는 잘 모른다. 그 냄새가 향취인지 악취인지. 울타리 밖에 나와야 비로소 그 냄새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것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제 삼자가 말해줘야 알게 된다. 중요한 건 그 삼자의 말조차 실로 진실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제 삼자 또한 자신의 울타리 안에 머물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이 고통인지 환희인지 울타리 안에서는 잘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울타리 안에서는 누구나 같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향취와 악취를 다 지녔지만 향취를 풍기는지 악취를 풍기는지 정녕 스스로는 모르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제 일자 눈썹은 보지 못한 채 남의 팔자 눈썹 보고 웃고, 제 낯 예쁜 것 맞는데 거울을 의심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29

하얀 지팡이

경상북도 시각장애인 복지관 문예교실 팀의 창간 문집이 발행되었다. 진심을 담아 축하드린다. 회원들을 만나 함께 공부한 지도 벌써 이 년이 지났다. 따뜻한 감성과 진지한 열정으로 글쓰기 강좌에 임하던 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손 끝에 감각을 모아 점자 교재를 읽어 내리던 박만철 님, 행여 교재의 좋은 글을 놓칠세라 포인트 굵은 글씨를 집중해서 들여다 보던 양현주 님, 시각장애인용 컴퓨터를 활용해 강의 내용을 섬세하게 기록하던 오세종 님, 봉사의 여왕이신 임복희 선생님이 준비해온 명작을 온 귀를 열어 고요히 감상하던 김창원 님, 진심이 담겨 더욱 느리고 어눌해진 말투로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던 장태욱 님 등, 글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어느 누구에 뒤지지 않았던 회원님들 얼굴 하나하나가 떠오른다.모인 우리가 한 공부는 글쓰기와 문학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곧 사람살이에 관한 공부였다. 어차피 문학도 사람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밤새 써온 작품을 함께 읽으며 웃고 울었던, 사람을 향한 그 마음이 곧 문학하는 본질이었다. 눈이 아닌 오롯이 마음으로만 보는 그 여정에 동참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결실을 모아 창간호인 `하얀지팡이`를 엮어낸 것을 회원들과 함께 기뻐하련다.다른 긴 말보다 문집에 실린 회원의 글 몇 구절을 전하는 게 더 의미가 있으리라. “(지나던 객이 무심코 던진 말이) 저 아들 눈이 멀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엄마가 돌아가시든지 고생하시든지 아니면 저 아들이 죽거나 고생하셨을 겁니다. 원인은 조상님들 묏자리입니다, 라고 단정하는 것이었다. 함부로 내뱉는 그 여자의 말에 어머니와 나는 충격을 받았다. 옆에 있는 돌과 대빗자루를 들어 저 몹쓸 여자를 힘껏 때려주고 싶었다. 그때 내 심정은 돌 맞은 개구리였다. 인생 여정을 거치는 동안 나도 어언 죽지 않을 만큼의 면역이 생긴 개구리가 되었다. 이제는 웬만해선 남이 울 때 함부로 웃지 않고, 남이 웃을 때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장태욱 님 글)”/김살로메(소설가)

2014-12-26

김밥이 웃는 시간

종강을 앞둔 모 프로그램, 반장을 맡은 분이 수업에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을 해왔다.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면서도 결석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그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다. 아이가 아파 주사라도 한 대 맞히고 오려나 싶었다. 삼십 분 정도 늦은 그녀의 표정에 근심 끼가 돌지는 않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마칠 때였다. 여느 때처럼 점심은 어디서 먹지, 하고 고민하는데 반장님 왈 오늘은 `자기 동네 후미진 곳에 자신만 아는 맛집`이 있으니 거기로 가보잔다. 모두 환호했다. 차림은 소박하고 맛은 담백하며 값까지 착할 것, 내가 생각하는 대중적이면서도 진정성 깃든 맛집의 조건은 그러했다. 동네 후미진 곳에 자신만 아는 맛집이라면 그 조건에 딱 맞을 것이었다.맛집에 대한 기대감의 수다꽃을 피우며 우리는 꼭꼭 숨어 있는 그곳을 향했다. 그런데 앞서 운전하던 반장님이 멈춘 곳은 어떤 아파트 주차장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맛집에 가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만 아는 후미진 맛집`은 다름 아닌 자신의 집이었다. 초대한다고 귀띔을 하면 회원들이 부담을 느낄까봐 깜짝 이벤트를 한 것이다. 말 할까 말까 밤새 고민하며 준비하느라 수업에도 살짝 늦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 급히 마트에 들러 작은 선물을 마련했다. 그조차 서로 준비하겠노라고 실랑이를 벌였다. 겨울바람이 몹시 찼다. 그럼에도 뭔지 모를 따뜻한 기운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그미가 차려낸 것은 소박하고 깔끔한 김밥 밥상이었다. 신선한 야채와 고기 등속으로 김밥 속을 꾸려놓았다. 주인장의 야문 손길이 빛나는 도자기 그릇 앞에서 각자 미니 김밥을 제조하기(?) 바빴다. 김밥을 마는 빠른 횟수만큼의 웃음꽃이 피어났다. 준비한 재료와 밥을 싹쓸이하고도 아쉬워할 정도로 맛난 점심이었다.어떤 사람, 어떤 그룹마다 풍기는 특유의 기운이 있다. 그 분위기는 자체로 고유한 성질을 지니는 건 아니다. 사람이 분위기를 만든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24

문제가 문제다

표현법만 바꿔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르침은 매우 유용하다. 말과 몸은 세상을 지배하고 그 영향력은 우주까지 미친다. 말하고 느끼는 방식이 긍정에 가까울수록 우리 삶도 한층 긍정에 가깝게 된다. 마음에 찬 생각도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서걱이는 모래밭에서 화사한 꽃밭으로 거듭 나게 된다. 본성이 우리를 부추기고 자극하더라도 스스로 방식을 순하게 작동시키면 세상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전자제품 고객 센터를 예로 들자. `고객불만팀`이란 이름보다는 `품질 보증팀`이란 이름이 여러 모로 효과적이다. 고객 입장에서도 부담스럽지 않고, 부서원 입장에서도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된다. 고객 불만팀이란 용어는 고객 입장에서는 별 불만스럽지 않은 사항인데도 내가 까다롭게 구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을 들게 하고, 부서원 입장에서는 해결해야할 업무를 지닌 느낌이 들어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품질 보증팀이란 용어로 바꾸었을 때는 고객 입장에서는 더 나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위안을 지닐 수 있게 되고, 부서원 입장에서는 최고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맛볼 수 있게 된다.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뭐든 문제가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으되, 그것이 문제로 남는 게 아니라 더 좋은 쪽으로 해결되는 그 무엇이라고 하게 된다면 있던 문제도 문제가 아닌 게 된다. 따라서 `문제`라는 말만 삼가도 좋은 삶의 태도를 지닐 수 있다고 심리학 책은 강조한다. 문제는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개별자의 태도에 있다.`아까 네가 전화했다는 말 들었어. 무슨 문제라도 있니?` 이런 말보다는 `아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어? 궁금한데.` 이렇게 대화법만 바꾸어도 긍정 지수가 높아지고 상큼한 나날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문제가 없는 관계나 사회는 없다.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드러운 의지이다. 부정적인 이미지인 `문제`라는 말 자체만 자제해도 문제의 반은 해결된다는 가르침을 마구 전파하고 싶은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