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원(祈願)의 기원(起源)을 찾아 동해안 칠포리를 향한다. 이곳에는 암각화가 곳곳에 있다. 비바람에 지워져 암각화인지 모르는 것도 있고, 언덕이나 골짜기에 있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게 많다. 발품을 파는 만큼 얻는 게 있으리라는 생각에 신발 끈을 야무지게 조인다. 칠포해수욕장을 조금 벗어나자 야트막한 산 초입에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그 뒤에 큰 가마솥만 한 바위가 보인다. 안내판이 없다면 하릴없이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바위로 여길 것이다. 수풀을 헤치고 들여다본다. 거무튀튀한 표면에 희끗희끗한 돌꽃이 피었고, 군데군데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점을 찍어놓은 듯하고 상형문자 같기도 하다.까마득한 옛날, 그러니까 겨우 쇠붙이로 연모를 만들 줄 알던 때, 이 땅에 조상들이 새겨놓은 문양들이다. 사다리꼴, 윷판, 북두칠성, 그리고 의미 모를 문양들…. 피라미드 밀실에 보존된 벽화처럼 내세관이 그려진 것도 아니고 반구대 벽화처럼 장엄한 스토리가 새겨진 것도 아니다. 이 문양은 울퉁불퉁한 돌 위에 점을 찍은 듯 줄을 그은 듯 투박하게 새겨져 있다. 더 큰 호기심을 품고 내륙으로 차를 돌린다. 곤륜산 동쪽을 끼고 개천을 따라간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니 더는 길이 없어 차를 버리고 걷는다. 안내판 저만치 묵정밭 한가운데에 거북처럼 웅크린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너럭바위는 갈라지고 일부는 부스러졌지만, 성혈과 별자리 문양이 또렷하다.기도문을 읽듯 문양을 하나씩 손으로 짚는다. 나와 선사시대 사람과 세월의 거리는 삼천 년이다. 까마득한 옛날로부터 전해오는 기도문이 내 손끝에 닿았을까, 아이를 많이 점지해 달라는 어머니, 사냥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하는 아버지, 배곯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들, 비를 내려 가뭄을 물리쳐 달라는 제사장, 그들의 간절한 기도가 내 손끝으로 전해오는 것 같다. 자동차를 곤륜산 서쪽으로 향하니 ‘오줌바위’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세상에는 멋진 이름이 많다만 왜 하필이면 오줌바위인지 궁금하다. 이정표를 따라 신흥리 북골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려 골짜기를 따라 걷는 동안에도 바위의 이름이 지어진 내력이 자꾸만 궁금해진다. 십여 분쯤 걸었을까. 왼편 산비탈에 묘한 풍경 한 점이 보인다. 오줌바위다. 검고 누르스름한 바위가 골 따라 길게 뻗어 있다. 가까이 올라가서 보니 바위에 굴곡이 만들어지고 웅덩이가 있다. 마치 강이 흐르는 모양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의문이 풀린다. 바위가 아래로 길게 누웠는데 마치 오줌이 흘러내린 형상이다.오줌바위에 올라, 한 발 한 발 떼면서 바닥을 살핀다. 오래도록 물이 흐르면서 물길을 냈고, 그 물길 따라 자그마한 웅덩이가 생겼다. 걸음을 옮기니 군데군데 윷판형 그림과 별자리 고누판, 그리고 기하학적 문양이 보인다. 하늘의 말씀을 공손히 담고 제단에 음식을 바치는 의식을 치러낸 흔적이다. 모든 기도는 하늘로 올라간다. 산과 강을 누비며 수렵하던 원시의 기도가 그랬고, 무엇이든 이룰 것 같은 문명 시대의 기도도 그렇다. 인간의 힘이 한계에 닿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하늘을 향해 기도한다.
이순혜 수필가
문명의 빛이 세상을 환히 밝혀도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한량없이 작은, 자연의 힘에 비하면 아주 나약한, 게다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어딘가에 기대왔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던 사람들은 하늘이 있어 팍팍하고 거친 삶을 위안할 수 있었다.어느새 서녘 하늘이 붉게 물든다. 사람들은 고단한 일상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발에서부터 올라온 피로가 허리까지 번져도 마음은 한결 가볍다. 종일 발품을 판 소득이 풍성하다는 충만감 때문이리라. 암각화는 하늘과 소통하는 플랫폼이다. 어둠이 세상을 덮으면, 암각화 일곱 웅덩이에 고인 물에 별이 뜨겠지. 그러면 기원은 하늘로 올라가고 칠성별은 지상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반짝일 것이다.
2022-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