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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월의 모시적삼

이순혜 수필가 오전 10시, 추모 묵념 사이렌이 울린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을 위해 머리 숙여 감사하는 마음을 새기자는 뜻을 담는다. 묵념 이후에는 현충탑 앞에서 헌화와 분향을 하고 추모 공연, 국가유공자 표창 등 순서로 추념식이 진행된다.모처럼 휴일이라 느긋한 아침을 먹고 형산강변을 걸었다. 10시, 묵념 사이렌 소리에 빛바랜 기억 한 부분이 푸시시 일어난다. 생각이 완전히 여물지 않은 터에 새겨진 기억이다. 아버지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여러 가지 일을 시작했고, 너무 앞서간 꿈은 알록달록하거나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넘어져 상처가 많았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새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자주 넘어져 평생을 조심스럽게 살다 가신 아버지이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톺아보다 아버지를 위한 헌시를 바쳤다.‘유월의 모시적삼’- 충혼탑 앞에서 -천둥소리 한 귀퉁이 찧어내다천지에 놀란 찔레향이 아리도록 매운 날입니다무더기무더기로아까시 마저 떨어지는데유월의 하얀 모시적삼은 충혼탑 앞에 서 있습니다시퍼렇다 못해 먹빛이 되었던60년, 다 받아냈기에아버지,당신은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국화입니다아니, 그 먹빛의 한(恨)한숨으로 쌓아한 겹 무심이 되었기에유월의 끓는 햇살에 서 있는 흰 모시적삼은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한 송이 국화입니다아홉 번 밀리고 밀린 싸움그날의 *형산강은검붉은 울음을 토악질하고포성에 묻혀버렸습니다여기 이 산 어디쯤일까저기 저 강 어디쯤일까아버지,당신이 썼던학도의용군의 삐뚤어진 모자를하얀 이 드러내며 고쳐주었던옛 친구의선한 눈망울이파편처럼 찢어져 묻힌 자리에는오늘도 말이 없습니다불러도 보고쓸어안아 보아도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아득한 날의 안부일 뿐저 질긴 세월을 낱장으로 뜯어다 놓아버렸습니다살아 있다고 마음껏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속울음 삼켰을아버지묵념 사이렌 소리에바람도 나무도 잠시 눈을 감고이제야 학도의용군 이름아래어깨동무하고 있을 생각에칠 벗겨진 한 줄 비문처럼 저도 눈을 감습니다세상에서 가장 무겁고도 가벼운아버지그 주름진 국화위에6월이 글썽입니다*형산강 · 625 당시인 1950년 8월 11일부터 9월 23일까지 44일간 2천300명이 넘는 국군과 학도병이 전사한 치열한 격전지형산강은 아직도 말이 없다. 말을 안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이 쏟았던 피와 땀을 모두 받아들였을 강이다. 그러고는 말없이 흘려보냈다. 역사의 현장에서 어떤 이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고, 어떤 이는 짧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이도 있겠다. 좀 더 적극적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이도 있다.아버지 생각을 깊게 했다. 아주 조금은 아버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미안한 게 많아 마음껏 일하지 못한 아버지 덕분에 우리 집 쌀독은 자주 바닥을 드러냈다. 넓고 편하고 좋은 집을 찾지 않아 우리 집 서까래는 거무튀튀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다 어린 자식들 생각에 화려한 세상의 것을 좇다가도 금방 접어버렸다.이제 아버지 생각을 떨쳐 보냅니다. 더는 봄 앓이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훨훨 날아간 저 학도병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내 몸을 주고 정신을 주었던 아버지. 이제는 밥벌이에 힘들었던 일과 생각의 뒷골목에서 평생을 움츠렸던 그 무엇에도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삼 남매를 내보내고 한 번씩 보내주었던 따스한 눈길만을 기억하겠습니다.아버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끝

2023-06-25

꿈을 쏘다

달그락달그락, 콩콩거리는 소리가 난다. 숨소리를 낮추며 소리 나는 쪽으로 깨금발로 걷는다. 까치였다. 사람이 있는 줄 모르는지, 까치는 연통을 계속 쪼아댄다. 까치, 참 오랜만에 본다. 반가운 소식을 물고 왔나, 잔뜩 기대하며 까치의 몸놀림에 눈을 떼지 않는다. 숨까지 참고 지켜보는데 까치는 푸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갔다.지난달 25일, 첫 한국형 독자 우주발사체 누리호가 우주로 향해 날아갔다. 누리호의 3차 발사 성공으로 우리나라는 우리 힘으로 우주발사체와 인공위성을 발사해 서비스할 수 있는 ‘스페이스 클럽’에 11번째로 가입하게 되었다. 18시 24분, 굉음을 내며 누리호가 우주로 날아갈 때, 많은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 태극기를 흔드는 아이 어른 모두 환한 표정이다.이 기쁨을 같이 나눌까 싶어, 하루 늦은 다음 날 전남 고흥으로 향했다. 고흥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꽃길이었다. 길에서 만난 노랗게 핀 금계국은 삼백 킬로가 넘는 길을 환하게 이끌어 주었다. 고속도로 옆에서 노란 꽃물결을 펼쳐주며 ‘어여’ 가보라고 꽃등으로 길 밝혔다. 확 지나가는 꽃등을 오래 담고 싶어 산을 향하면 거기에도 군데군데 꽃물결로 환했다. 기분 좋은 소식을 듣고 고흥으로 가는 길이라 그런가, 그 길에는 꽃마저 등 밝히고 있었다.수백 킬로를 달려왔는데, 고흥은 생각보다 차분했다. 밀려온 물이 썰물이 되어 빠져나간 듯하다. 우주센터 주변은 우주로 가는 길목이라 아직도 들썩일 줄 알았다. 그런데 학부모 서너 팀, 젊은 연인 한 쌍, 그리고 나뿐이었다. 다행히 한 사람이 열 명 몫을 하느라 분주했다. 매표소 앞에서 큰소리로 친구들을 불러 주민등록증은 준비하라고, 그래야만 할인받을 수 있다고 소리 지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모이는 열 명 남짓한 사람이 전부였다. 광장을 휘돌아 보아도 손으로 꼽을 만한 사람뿐이었다.나로우주센터는 우리나라에 한 곳밖에 없는 우주센터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인공위성 발사장이기도 하다. 우주로 향한 꿈과 희망이 시작된 곳이다. 나도 예매하고 우주과학관에 들어갔다.우선, 애니메이션 상영하는 시간에 맞춰 관람했다. 유치원, 초등학생과 학부모들이 아이 손을 잡고 영화를 봤다. 10분 정도의 짧은 영상이었지만, 우주로 향하는 꿈과 희망이 여운으로 남았다. 이 아이들이 우주로 향하는 길에서 꿈을 키우게 해 달라는 소망을 빌었다. 우주과학전시관에는 인공위성과 우주공간이 테마로 구분되어 쉽게 즐길 수 있다. 기본원리를 파악할 수 있는 곳, 로켓 존, 인공위성 존, 우주탐사 존이 있어 관심 있는 곳이 있다면 시간을 넉넉히 두고 구경하는 게 좋다. 우주탐사 존이 발길을 붙잡았다. 우주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할까, 무엇을 먹을까, 국제우주정거장에서는 어떤 일을 할까, 평소에 궁금했는데 이곳에는 알기 쉬운 설명과 실제 물건들이 놓여 있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이순혜 수필가 차를 돌려 우주 발사전망대로 향했다. 도착하니 5시다. 한 시간 남짓 관람할 수 있다. 안내데스크에서 매표하고 7층 전망대에 올라갔다. 전망대는 인기가 가장 많은 곳이다. 360도 회전하는 전망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다도해를 바라보는 느낌은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한 바퀴 회전하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 그때쯤이면 찻잔이 커피를 훤하게 드러낼 때다. 풍광에 빠져 잠시 잊은 게 있다. 저 멀리 형제섬이 보이고 나로우주센터가 보인다. 이곳에서 해상으로 17km 직선거리다. 망원경으로 발사대를 조명했다. 보슬비가 내려 망원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미루어 짐작한 곳에 눈을 고정했다. 어제 저곳에서 누리호가 우주로 날아갔다는 생각에 초점을 맞춘 그 언저리에 보슬비인지 눈물인지 눈가가 촉촉하다.다도해 섬들과 나로우주센터에도 어둠이 막 내려앉는다. 못다 이룬 내 꿈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리는 사이, 하늘에 하나 둘 별이 떠오른다.

2023-06-11

바람은 어쩌다가 몰려다니는 것일까

외할머니는 바람을 몰고 다녔다. 사방 십 리에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생김새는 여장부 같고 목소리까지 짧아 강단이 있었다. 아이들은 할머니 집을 지날 때 머리카락이라도 보일까, 몸을 담벼락 아래로 낮추고 깨금발로 걸었다.외삼촌도 가는 곳마다 바람을 일으켰다. 인물 좋고 언변이 좋았기에 늘 사람들의 중심에 섰다. 근거 없이 떠도는 풍문도 외삼촌의 입술을 스치면 솔깃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거짓도 진짜처럼 믿어 외삼촌의 말에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땅문서가 들썩거리기까지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를 도모하던 외삼촌이 사라졌다. 알고 보니 야반도주였다. 외할머니집 앞에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장독 질자배기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술기운으로 내지르는 고함이 골목을 울렸다. 어떤 이는 대문을 밀치고 들어와 입에 거품을 물고 삿대질을 해댔다. 심지어 파출소 소장까지 찾아와 외삼촌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며 해가 질 때까지 안방에 드러누웠다. 사나워진 민심은 오래도록 대문 앞을 뒤흔들었다.이런저런 소문이 마을에 날아들었다. 외삼촌이 바닷가 어느 마을에서 뱃일한다더라, 서울 어느 뒷골목에서 봤다더라, 헛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건너 사실처럼 담장을 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도 낯선 사람이 다가와 넌지시 묻기도 했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소문이 잠잠해지면 또 다른 소문이 바람을 타고 왔다.풍문도 뜸할 무렵이었다. 새벽 동살과 함께 소식 하나가 대문을 두드렸다. 외삼촌이 죽었다는, 꽤 구체적인 소식이었다. 울부짖을 법도 하련만, 외할머니는 사람들을 물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태연하게 이부자리를 갠 다음 앉은뱅이 경대를 끌어당겼다. 속내는 감출 수 없다는 듯 빗을 드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외삼촌이 뿌린 씨앗은 곳곳에서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외할머니는 여장부답게 그것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사과하고, 물어주고, 때로는 자식 대신 잘못을 빌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외할머니의 강단 있는 오지랖이 통했는지, 엉키고 꼬였던 사태는 빨리 수습되었다.거울 앞에 꼿꼿하게 앉은 모습은 외할머니만의 시위였다. 바람 앞에 먼저 나서 잡다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지이기도 했다. 외할머니에게 빗질은 마음을 흐트러트리는 바람을 변주하는 의식이었고 비녀는 마음을 단속하는 빗장이었다.“음” 이순혜 수필가 비녀를 지르는 소리는 숱한 언어를 함축하고 있었다. 대범한 여장부라고 해서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으랴. 외할머니도 자신을 단속하던 모든 것을 풀어헤친 채 목 놓아 울고 싶었으리라.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회한, 자식을 먼저 보낸다는 통한, 부유하는 감정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다가 밖으로 나오려고 아우성칠 때 외할머니는 단음절로 묶어 내뱉었다.언제부턴가 외할머니는 경대 앞에 앉지 않았다. 마실이라도 나갈 때면 치맛자락을 스치는 바람에도 흔들렸다. 그 후 나는 경호원이 되어 나들이를 부축했다. 외할머니의 모습이 시나브로 헝클어지고 당신 스스로 빗질할 기력을 잃자, 마음의 빗장도 낡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비녀를 지르지 않은 날이 늘었다. 외할머니는 더는 허리를 세우지 못하고 다음 세상으로 가는 문의 빗장이 열리려는지, 며칠 동안 가만히 누워 눈망울만 끔뻑거렸다. 자정이 넘어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면서 외할머니는 눈을 감았다.할머니의 영정 앞에 향내가 피어오르고 대문에 조등이 내걸렸다. 외할머니의 오지랖이 얼마나 넓었는지 멀리서도 조문객이 찾아와 회자정리(會者定離)를 했다. 사람들은 할머니의 삶을 한데 모아 간단한 말로 비녀를 질렀다.“ 저 노인네, 이제는 쉴 때도 되었다.”바람 많은 삶답게 할머니가 떠나는 날에도 바람은 불었다.

2023-05-21

마늘밭에서 하루

마늘 고랑에 푸른 물결이 일렁인다. 마늘잎 하나가 바람에 살랑대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여다본다. 벌써 알싸한 맛들이 아우성이다.마늘밭 고랑에 서니 손과 발이 빨라진다. 마늘잎 가운에 있는 줄기를 잡고 마늘 대를 뽑는다. 아랫부분을 잡아당기면 부드럽고 여린 줄기가 달려나오는데, 그 촉감이 매끄럽다. 땀이 눈에 닿아 따갑도록 한참을 솎아 바구니가 불룩하다.마늘종은 이맘때 솎아내야 한다. 제때 솎아내지 않으면 뿌리로 모아야 하는 영양을 줄기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이때는 일손이 턱없이 모자라 나처럼 어설픈 손도 보탠다. 막 연둣빛으로 물들이는 마늘종을 하나씩 솎아 넓고 큰 바구니에 부려놓는다. 허리는 아프지만, 마늘밭이 일으킨 멀미는 오히려 즐겁다. 마늘종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더 단단하게 여물어 갈 마늘 생각에 어지러운 멀미도 오히려 반갑다.마늘종장아찌는 고기를 좋아하는 가족에게 필수다. 간장과 설탕 식초를 일대일로 넣어 팔팔 끓인다. 이때 마늘종에 붓는다. 식히고 끓이고 붓기를 서너 번 한다. 그런 후에 냉장고에 넣어두면 일 년 내내 밥상에 올라 고기와 더불어 약방의 감초 이상의 대접을 받는다.우리가 먹는 음식에 마늘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을 정도다. 열무김치를 담글 때도 마늘은 눈에 띄지 않게 버무려 김치가 맛깔스럽게 익도록 돕는다. 또한, 나물을 무칠 때도 나물의 성질에 맞게 마늘은 있는 듯 나붓이 엎드려 있다.마늘의 매운맛은 중독된다. 소개팅에 나가 퇴짜를 맞고 돌아와 씩씩대며 고추와 마늘을 생으로 먹고 터뜨리는 울음, 싱싱한 회 한 점을 깻잎 위에 놓고 마늘을 얹어 먹으면 입안에 화기가 가득 찬다. 거기에 초고추장의 매운맛까지 더해져 스트레스가 날아간다.과일은 단맛을 내기 위해 여물지만, 마늘은 매운맛을 위해 여문다. 맵기로는 고추도 한몫을 하지만, 마늘은 마늘만의 매움이 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맛을 내랴. 마늘은 호기를 품고 익어간다. 입안에서 톡 쏘듯이 알싸하게 한쪽한쪽 여물어간다.오월, 지금부터 마늘의 여물기는 시작된다. 땅의 것을 받아들여 마늘은 매운맛을 품는다. 쓴맛, 아린 맛, 시쿰한 모든 맛을 땅속에서 누르고 발효시켜 매운맛을 만든다. 불의 기운을 뭉치고 물의 기운으로 즙을 내어 조제된 육 쪽, 천연 향기는 중독성이 강해 울면서도 씹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순혜 수필가 인생에 매운맛은 재채기처럼 온다. 눈물과 콧물을 쏙 빼면서 다가온다. 너무 매워 혀끝이 얼얼하고 입안에 감각이 사라진다. 동시에 식은땀이 난다. 이어서 정수리에서 땀방울이 생겨 이마를 타고 흐른다. 짠물이 흘러 눈에 들어가면 눈물이 난다. 울고 싶을 때 마늘 핑계를 대서라도 울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은 시원해진다.흑마늘 만들기는 매운맛이 숙성하며 단맛을 낸다. 매운맛으로 똘똘 뭉친 마늘은 밥솥에서 수분을 빼고 찰지고 담백한 단맛으로 변한다. 보름 정도 익어가며 숙성의 과정을 거치며 흑마늘 약이 된다. 강렬했던 단맛의 기억만 있다면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 불끈 두 주먹으로 파이팅을 외치며 한 일이 넘쳐흐르고, 앞선 이의 그림자만 좇아가며 맛보는 쓴맛도 있다.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서성거리고, 어쩌다 날린 한방이 또 허방일지라도. 단맛은 짧고 강하다 하지만 매운맛은 더 강력하고 오래 간다여물어 익어 제맛을 내는 것은 사람이나 마늘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마늘은 마늘답게, 사람은 그 사람의 모습대로 익어간다. 사람 향기를 내기까지는 솎아내 지기도 하고 이제 괜찮다 싶으면 가지치기를 당하기도 한다. 그렇게 솎기고 가지 처지면서 튼실한 나만의 향기를 낸다. 마늘은 마늘대로 나는 나대로. 이런저런 맛을 보며 사람의 맛으로 익어간다.

2023-05-07

다무포를 아시나요

야무진 꿈을 꾸었다. 이십 대였나, 삼십 대였나, 동해안 국도를 걸어서 종단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꿈은 액자 속에 흐릿하게 갇히고 현실은 형광의 도시를 누비느라 바빴다. 어쩌다 한 번씩 답답한 액자를 벗어나 빨주노초파남보 하늘을 그리고 싶다. 이런 날은 무작정 집을 나선다. 서너 시간 혼자 어슬렁거릴 곳을 찾는다.고래가 머무는 곳, 구룡포에서 호미곶으로 이어진 해파랑길 14코스인 다무포 고래마을이다. 골목이 뿜어내는 소리는 낮고 가늘다. 그 소리를 담은 집들은 모두 오수에 빠진 듯하다. 4월의 봄바람도, 방파제에 한 번씩 부딪히는 파도도, 갯바위에 앉아 꾸욱, 꾹 대는 갈매기도 풍경을 이루는 화소이다.하얀 등대가 보이는 의자에 앉는다. 등대는 바닷길에 불 밝히느라 꼿꼿한 채 서 있다. 굵은 비, 가는 비 내려도, 태풍으로 속의 것들을 다 긁어 토해낼 때도 흔들림이 없다. 따뜻해진 봄 바다 그 위로 갈매기 서넛 난다. 그래, 지금쯤 수평선 너머 고래가 떼를 지어 오고 있겠다. 4월과 5월쯤 고래 산란기에는 이곳 먼바다에 고래가 나타난다. 그 종류가 20여 종이 넘는다. 바다 향해 귀를 쭈욱 열자 멀리서 고래 소리가 다양하게 들리는 듯하다.다무포의 맑고 적당한 수온은 고래가 새끼를 낳고 회귀하기 좋은 조건이다. 해마다 이때쯤 수십 마리씩 고래는 다무포 앞바다를 찾는다. 한때 고래잡이로 마을 주민들은 넉넉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1986년 국제협약에 의해 상업적인 포경이 금지되었다. 그 이후 마을 길목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라지고 활기로 가득했던 집안도 더는 들썩이지 않았다. 이십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행히 2008년 고래생태 마을로 지정되었다. 수평선 저 멀리 고래 떼가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관심이 생겼다는 것은 벌써 행동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음이다. 다무포 마을의 쇠락이 멈추고 그곳에서 작은 꿈틀거림이 음쑥음쑥 자란다. 2019년 ‘포항시 도시재생 마을공동체 역량강화 사업’에 선정되어 마을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따가운 여름 햇볕과 함께 골목이 들썩거렸다. 마을 담벼락 곳곳에 하얀색 페인트를 입히고, 그 위에 미역 그림이 한들거린다. 미역 줄기 사이로 물고기가 춤을 추고, 거북이 한가로이 노닌다. 담벼락마다 다른 그림과 조형물은 이 곳을 찾는 이에게 다채로운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이순혜 수필가 바다에서 담벼락으로 옮겨 온 고래가 타일 속에서도 헤엄친다. 여럿이 그린 고래는 그들만의 고래로 골목을 가득 채운다. 가만 들여다보니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 그리고 학부모도 참여했다. 하나씩 짚어가며 고래를 불러들인다. 그의 이름들을 부르자 어느 유치원, 어느 초등학교 몇 학년이라 쓴 명찰을 앞세우고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이들은 커다란 한 마리 고래가 되어 담벼락을 꽉 채운다. 포항시에 따르면 4월에서 5월 해안선을 따라 헤엄치는 고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동해에서 고래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오늘은 먼바다의 고래가 다무포 마을 골목에서도 만난다.나란히 어깨를 맞춘 파란 지붕 따라 골목을 걷는다. 아까부터 따라온 담벼락의 고래도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춘다. 누구는 이곳의 로맨틱한 풍광이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닮았다고 한다. 산토리니에는 고래가 없는데, 고래가 머무는 이곳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산토리니에 가면 다무포 마을에 가봤니? 라고 물어볼 것이다.한 번쯤 마음을 빼앗길 만한 곳을 찾는다면 이곳에 오시라. 고래가 머무는 파란 지붕과 하얀 담벼락이 있는 다무포에. 마음 한 켠에 잔잔하게 흐르는 여유를 갖고 싶다면. 따스한 봄날의 여기 풍경은 가장 빛나고 반들반들한 마음 한 곳에 저장할 만하다. 곳곳에 쉬어가기에 괜찮은 상상의 의자가 당신을 기다린다. 저 수평선 윤슬이 반짝이는 곳에 고래 한 마리가 튀어 오른다. 나는 고래 등을 타고 동해를 유람하는 꿈을 상상하겠다.

2023-04-23

‘시피사모’의 개구리 떼창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꿈틀거릴 때다. 어둑한 데서 꽁꽁 웅크렸다가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났다. 몇몇 마음에 맞는 이들과 수목원 나들이 한다. 이곳은 계절 따라, 절기 따라 다양한 핑계를 대며 수시로 찾는 곳이다.한 시간 남짓 차를 타고 달리면 경북수목원이 나온다. 수목원은 해발 500~900m로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분지로 이루어졌다. 수목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샘하는 늦겨울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친다. 따뜻하게 데운 보온병을 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호수를 향한다. 갓길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간들바람 등에 타고 햇볕을 향해 왁자지껄하다.호수로 가는 길 오른쪽 산비탈은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런데도 서둘러 봄 단장 중이다. 지난해 심었다는 맥문동에 새 볏짚을 덮느라 일하시는 분들의 손길이 바쁘다. 그에 비해 왼쪽 양지바른 곳에 터 잡은 식물들은 이른 봄볕을 쬐느라 기지개를 켠다. 자주 오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수목원의 나무들이 주는 미세한 흔들거림은 늘 새롭다.마음이 있는 곳이라 벌써 오감이 열린다. 호수가 아직 보이지도 않는데 먼저 귀가 열린다. 저 멀리 윙윙 윙, 개굴개굴하는 소리가 수목원을 들썩인다. 또 코가 발름거린다. 비릿하다. 그런데 어제의 비릿함이 아니다. 꾸덕꾸덕한 비릿함이다. 수목원의 햇볕에 무장해제 되었나 보다. 이제 눈마저 시원하다. 나뭇가지마다 꽃을 피우려 꽃눈이 빼꼼하다. 모든 감각이 호수로 향한다.개구리들의 노래가 시작된 곳이 어디일까. 호숫가 가장자리 길섶이 소리에 누웠다 일제히 일어난다. 조심조심 다가가니 개구리들은 소리를 멈추고 호수로 냅다 줄행랑을 친다. 순식간에 길섶이 뒤에서부터 파도처럼 눕더니 개구리 떼들이 지나간다. 꼭꼭 숨어있던 개구리들이 물속으로 달린다. 무리에 합류하지 못한 개구리는 슬금슬금 기어간다. 이마저도 놓친 개구리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사랑하느라 무리에서 멀어진다. 개구리 노랫소리가 호수를 맴돌아 수목원을 가득 채운다.시를 읽고 피아노를 사랑하는 모임 ‘시피사모’가 있다. 커피 마시며 수다를 나누다 가볍게 결성한 모임이다. 가만 보니 그 중 한 사람은 수준급의 피아니스트요, 시를 읽고 나누는 시문학 강사이며 얼마 전까지 컴퓨터 지도를 한 강사, 손만 대면 집 안 구석구석이 환하게 환골탈태하는 달인 한 사람, 이렇게 회원은 넷이다. 한 사람을 빼고는 피아노 건반하고는 멀어 보이는 조합이다. 이순혜 수필가 뒷방으로 밀려있던 먼지 뒤집어쓴 피아노를 조율했다. 시피사모는 멋진 꿈을 그렸고, 그 후로 심장이 떨렸다. 봄바람이 불면 우리가 배운 것을 거리공연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선포했다. 꿈은 크게 그리고 그 시작은 작게, 첫 곡은 개구리 동요였다. 딩, 딩, 딩 한 음 한 음을 눌렀다. 거의 두 달 만에 개구리 전곡을 연주했다. 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모두 피아노 앞에 모여 개구리 노래를 불렀다.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네. ~’ 집에서 연습할 때는 틀리지 않았는데 같이 노래 부르며 피아노 치니 두어 군데 틀렸다. 손에 땀이 났지만, 우리는 그렇게 훤한 낮에 노래를 떼창을 했다.수목원의 산개구리 합창은 남성 중창단이다. 중, 저음의 묵직한 베이스음이 아래서 노래 각을 잡는다. 어쩌다 긴 울음 끝에 개구리 테너가 오선지에 튀어 오르기도 한다. 걸음을 멈추고 앉아 무슨 노래를 부르는가 싶어 귀를 더 연다. 조금만 귀를 기울여 들으니 개구리들은 일정한 음의 길이를 내고 있다. 여럿이 한 무더기의 음을 내는 듯하다. 잘 꾸며진 중창단 한 사람이 내는 목소리 같다. 개구리 합창단의 노랫말은 어떨까, 자꾸 궁금해진다. 허공에 그린 원고지에 ‘개구리 합창’ 제목을 적었다가 ‘시피사모’라 다시 썼다.어느 토요일 저녁, 영일대해수욕장 한 모퉁이에서 개구리들의 합창이 들리는 듯하다.

2023-04-09

탱자나무 골목을 달리다

유년의 기억은 골목에서부터 시작된다. 한길처럼 넓거나 쭉 뻗은 곳이 아니라 옆으로 새어 나온 구불구불한 골목이다. 친구들과 담벼락 아래 앉아 구슬치기와 딱지치기하며 놀았던 곳. 그 골목길을 뛰어가던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부모님의 결혼은 읍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잘생긴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가난했고 외모조차 평범했다. 누가 봐도 기우는 혼사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벌인 일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없었다. 처음에 교사 생활을 하다가 미래가 없다며 그만두었다. 곧 작은 도시에서 보험회사를 차렸지만, 그것도 고객과의 실랑이로 금방 접었다. 하는 것마다 성과가 없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시장 모퉁이서 국수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긴 외할머니께서 아버지를 불러들였다.아버지는 외가 동네에 방을 얻었다. 대문 곁에 조그만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부모님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종일 들에 나가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해도 살림은 좀처럼 일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에 대한 욕심이 없었고 남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지 못하는지라 먹고 사는 것에 늘 허덕였다.또 처가붙이로 살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자주 골목 밖으로 나돌았다. 마음이 밖에서 서성이다 보니 농사일은 항상 어머니 몫이었다. 술 때문에, 여자 때문에, 이곳저곳 늘어놓은 외상값 때문에 어머니의 속을 어지간히 태웠다. 저녁때가 되면 골목 저쪽에서부터 술에 젖은 질펀한 노랫가락이 아버지를 앞섰다. 밭에서 일한 어머니의 수고는 뒷전이고 시원한 김칫국부터 찾았다. 그러고는 구판장에 가보라고 재촉했다. 묻지 않아도 외상장부에 한 줄 더 그었다는 말이다.어느 날, 어린 남동생이 마당에서 놀다가 물통에 고꾸라졌다. 물을 많이 먹어 눈동자가 뒤집히고 몸이 축 늘어졌다. 뒤란에 있던 부모님은 놀라 뛰어나왔다. 순식간에 동생을 업은 아버지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끼고 골목을 냅다 달렸다. 지금껏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민첩했던 적은 없었다. 병원을 향해 달음박질하던 모습은 평소의 아버지가 아니었다.골목을 달리다 캑캑거리는 소리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뛰는 것을 멈추었다. 등에 업혀 있던 동생의 배가 홀쭉해진 것을 보고서야 골목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동생이 토해낸 멀건 물이 아버지의 땀과 섞여 흘러내렸다. 새파랗게 질렸던 아버지는 동생의 얼굴에 핏기가 돌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시 가득한 탱자나무 골목은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의 문이었다.골목은 추억 속에서도 일한다. 초등학교 때였다. 평소에 나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었다. 배가 고프면 내가 먼저 상위의 밥을 먹어야 했고, 도시락 반찬도 언니와 동생의 것에 코를 킁킁거리며 확인하는 날이 적지 않았다. 하루는 마루에 앉아 밥을 먹는데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다. 이순혜 수필가 순간 나는 얼굴이 벌게졌고 목에 걸린 가시를 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어도 보고 밥을 한 숟가락 가득 넣어 꿀꺽하고 삼켜도 보았지만 깊이 박힌 가시는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 등을 세게 쳐도 가시는 빠지지 않았다.순식간에 가슴이 조여 왔다. 나는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구르면서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채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업고 골목을 달렸다. 아버지는 내 신발을 들고 어머니를 뒤따랐다. 마을 입구까지 뛰어가는데 희한하게도 목에 있던 가시가 사라졌다. “엄마, 가시가 빠졌나 봐.” 부모님은 골목에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내렸다.탱자나무 골목에서 아직도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내 부모님의 소리다. 동생을 업고 뛰던 아버지, 나를 업고 뛰던 어머니의 숨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골목이 품은 추억은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빠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오늘처럼.

2023-03-26

파락호 숨은 뜻은

고택의 문턱이 낮아 선뜻 들어서는 걸음이 가볍다. 어디론가 가려는 듯 어머니와 아들 형상의 모자석이 길손을 맞는다. 그뿐인가. 하늘의 구름이 내려와 앉은 천운석, 마당에 떡하니 앉아 복을 부르는 복두꺼비,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바위, 학봉선생구택(鶴峯先生舊宅)에는 형상들이 주인이다.참봉 김용환 선생은 희대의 기인이었다. 안동의 양반 부호들에게 은밀하게 자금을 받고 강제로 모금도 하였다. 대대로 내려오던 땅 13만 평을 팔아 보태고 300년을 내려오던 학봉종가를 팔았다. 그러면 문중에서 다시 사들이고 팔기를 3번이나 반복했다. 이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본 일제는 요시찰 인물로 지정하고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런 참봉이 별시(別市)가 열리면 어김없이 노름판에 나타났다. 노름판에는 전국의 한량과 노름꾼들이 모여들었다. 새벽녘까지 판돈이 부풀면 참봉은 엉뚱한 행동을 벌였다. 화가 난 듯 첫닭이 운 뒤의 갑오(9끗)만도 못하다며 판돈을 몽땅 머흐럽게 생긴 상대에게 침 한 번 뱉고 줘 버렸다. 또 새벽 몽둥이야! 라고 소리치면 누군가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며 판돈을 빼앗아 가 버렸다.참봉은 매사에 철두철미했다. 일부러 노름판에서 낯선 한량이나 투전판에서 거금을 날렸다는 소문을 냈다. 명분을 만든 셈이다. 여름에도 참봉의 사랑방에는 화롯불이 꺼지지 않았다. 독립군에게 지원한 자금을 적바림한 종이 쪼가리, 사진 한 장 남기지 않고 철저히 태워 없앴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천하의 노름꾼, 파락호(破落戶)라 불렀다. 김 참봉은 스스로 손가락질받는 사람이 되었다. 세간의 불명예스러웠던 온갖 소문들을 뒤로한 그는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독립을 위해 피를 나눈 동지가 아들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을 때도 그는 입을 다물었다.의로운 일은 숨겨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나라를 위해서는 수치스러움을 감당하고 독립을 위해서는 가진 재산을 아낌없이 퍼주었던 참봉, 나라 사랑하는 일에 한 사람의 선 굵은 행동으로 우리는 백 년이 지나 그의 이름을 부르고 기억한다.살아 천년, 죽어 천년 간다는 주목(朱木)이 고택 곳곳에 있다. 별다른 주목(注目)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관심을 받은 나무가 주목이다. 선생도 살아서는 노름꾼, 한량, 파락호로 기억되다 지금에서야 사철 푸른 성품이 알려졌다. 선생은 살아 백 년도 못 살았지만, 그 정신은 죽어 만 년이 갈 것 같다.내 아버지도 별시가 열리는 곳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돈을 따기 위해 눈동자가 번뜩이는 날이었다. 노름꾼들이 깔아 놓은 멍석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는 힘이 넘쳐났다. 종지 안에 윷을 넣고 아버지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고는 종지를 흔들며 멍석 가운데로 던졌다. 아버지는 놀이로 가산은 탕진했고, 꾼들에게는 만만한 허릅숭이였다. 이순혜 수필가 오일장, 대폿집 모퉁이에 노름판이 생겼다. 화투 몇 장을 손가락에 끼우고 콧김을 불어 기를 모았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는 눈치 싸움에 배포를 부려보지 못하고 화투장을 일찍 내려놓았다. 마지막에 다 털리면 개평 몇 푼 얻어 독주를 마셨다. 아버지가 말하는 세상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김 참봉이 교차한다. 아버지는 내일을 속절없이 기다렸지만 김 참봉은 내일을 열기 위해 돈과 명예를 다 던졌다. 아버지는 입으로 세상을 탓했지만 김 참봉은 몸으로 세상을 바꾸었다.종택을 한 바퀴 돌아 사랑채 마루에 앉는다. 마루 구석에 빛바래고 먼지 쌓인 방명록이 펼쳐져 있다.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누군가 “사랑채 제비처럼 처마 밑에라도 깃들고 싶다.”라는 글을 남겼다. 나 또한 잠시 눈을 감고 파락호, 그 숨은 뜻에 깃들어본다. 바람 소리에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본다. 먼 봉우리 위에 구름 몇 점 하얗게 내려다보신다. 나는 여기서 살아서 주목받지 못했던 아버지와 참봉을 기억한다. 이제 죽어 천년 간다는 나무 아래 참봉이 품었던 때를 넘어 더 이어지길 바란다.

2023-03-12

철길, 그 아름다운 간격

철길 숲을 걷는다. 한때 사람이 떠나고 돌아오던 철길은 숱한 전설을 남기고 길게 누웠다. 오후의 햇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나비 몇 한가히 날아다닌다. 철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나비처럼 가벼워 보인다.이길 어디쯤에서 남편을 만났다. 이십 대의 남편과 나는 넓은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 많았다. 홀로 가는 길보다 둘이 가면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함께라면 이루어 내고 둘이라면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우리는 삶의 종착역까지 동행하기로 약속했다. 손을 잡고 나란히 출발했다. 남편으로 아내로 충실히 가정을 이끌어갔다. 자신의 역할에서 마주쳐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나가 토라지면 하나가 다가와 다독거렸다. 모든 것이 나란할 것 같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 보잘것없는 티가 크게 보이기도 했다.이 낯설지 않은 차이는 일상생활에서도 나타났다. 나는 성격이 급해 매사에 부뚜막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었다. 외출할 때, 나는 필요한 물건을 후다닥 챙기고 현관에서 매번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은 뒤에 따라오면서 가스레인지를 점검하고 화장실 문을 다시 열어 소등을 확인했다. 나는 빨리 가자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남편이 눈치를 채지 못하게 신발의 끈을 느슨하게 늘어놓거나 겨울 부츠의 지퍼를 열어놓고 기다렸다.아이 교육에서도 생각은 달랐다. 나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어떤 과외를 하는지 무슨 학원에서 공부하는지 안테나를 쭉 뽑아 레이더를 작동시킨다. 이곳저곳의 정보를 얻으려고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다. 그 덕에 상담을 예약하고 아이들에게 너희는 이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며 경쟁 속으로 내몰았다. 남편은 이런 나를 매번 나무라며 혼자서 할 수 있게 기다려 주라고 핀잔을 줬다. 과도한 경쟁이 아이들을 망친다고 혀를 찼다. 자꾸 부딪치다 보니 서로를 튕겨 마음도 조금씩 멀어졌다. 자주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남의 집 남편 대하듯 거리를 두었다.어느 날, 느지막이 일어난 남편은 집을 나갔다. 저녁 무렵에 들어오는 남편의 손에 약봉지가 가득하였다. 멀쩡한 사람이 난데없는 약봉지라니, 남편은 병원에서 받아 온 약봉지를 건넸다. 무심히 약봉지를 들여다보니 식후에 먹어야 하는 약이 수두룩하다.남편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남편은 가정을 이끌어가는 기관차였다. 혼자 숨 가빴을 남편의 폐, 울화를 감당했을 간, 노동에 짓눌렸을 척추, 생의 하중을 떠받쳤을 무릎,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펌프질했을 심장, 남편은 몸이 아파도 혼자 속앓이했고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할 것 같아 표현하지 않았다.오늘은 한 사람을 위한 저녁을 준비한다. 부엌에서 나는 도마와 칼의 장단도 오랜만에 정박이다. 남편의 숟가락에 반찬 하나를 올리며 당신을 위한 거라며 먹어 보라고 했다.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얼굴은 이미 해사하다. 이것저것 반찬을 권하자 전부를 받아먹는다. 몸에 좋은 건 같이 먹자며 남편이 내 숟가락에도 같은 반찬을 올려준다. 이순혜 수필가 부부의 길은 동행을 약속한 순간부터 소실점까지 가는 여정이다. 살다가 더러는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헤매기도 하고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숨 가쁜 언덕을 넘고 세월의 다리를 건너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때로는 삐걱거리기도 하고 어떤 길에서는 덜커덕거리기도 했지만 서로 밀고 당기며 오늘까지 동행했다.부부는 평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열차와 같다. 그 열차의 철로가 뙤약볕에 느슨하게 늘어지거나, 눈보라에 얼어붙어 다가가기 힘든 일이 생기기도 한다. 평행인 철로는 하나가 궤도에서 벗어나면 한쪽이 바투 당겨야 한다.어느덧 공원에 저녁이 내려앉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저만치에서 남편이 느릿하게 걸어온다. 잠시 기다렸다가 남편의 손을 꼭 잡는다. 맞잡은 손이 느슨하지도 팽팽하지도 않게 간격을 유지한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철길을 나란히 걷는다.

2023-02-26

그날은 달도 비밀을 지켰어

사과가 택배로 배달되었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지인이 보낸 것이다. 제법 묵직한 걸로 보아 올해 사과 농사는 풍년인가 보다. 택배 상자를 열어 보았다. 빨간 홍옥이 가득하다. 사과 따느라 애쓴 지인 얼굴이 상자 안에서 빨갛게 웃고 있다. 사과를 소분해 냉장고에 넣고 몇 개를 식탁에 두었다.아침햇살이 빨간 홍옥을 밀치고 들어와 더 빨갛다. 사과 한 개를 깎았다. 사과 한 쪽을 먹기도 전에 벌써 침이 고인다. 과즙이 그득한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참 달콤하다. 사과를 씹으면서 달콤하고 살벌했던 첫서리에 관한 추억이 떠오른다.숙이네 집에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마을 공동 빨래터가 있다.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거기서 기다리면 친구들이 하나둘 모였다. 과수원집 숙이는 사과 궤짝에서 꺼낸 사과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주로 벌레 먹거나 흠집이 있었다. 그것도 달았다. 그날 밤, 우리는 우물가에서 어깨를 맞대고 정신없이 사과를 먹었다.배가 그득해지자, 이제는 몸이 근질근질했다. 재미난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돌아보니 친구들 눈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먹다 남은 사과를 한 쪽에 밀쳐 두고 모두 일어났다. 숙이네 창고에 들어가 빈 포대 하나를 꺼냈다. 여기에 가득 따서 오자는 약속을 하고 빨래터를 벗어났다. 삼삼오오 나누어 조심스럽게 사과밭에 숨어들었다. 정신없이 사과를 따서 포대기에 담는데, 소리가 왜 그리도 크게 나는지.“이런 도둑고양이를 봤나!”사람 소리가 났다. 맑은 달밤의 적막을 뒤흔드는 소리였다. 웅성거리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고 퍽퍽 매질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사과나무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숨을 죽이며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열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소리와 크게 혼내는 동네 오빠들의 음성이 들렸다. 혼쭐나는 친구들은 모두 남자아이들이었다.사과 서리를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과나무에 시커먼 달이 걸려 있었다. 하늘빛이 급하게 변하고 사위는 고요했다. 달님이 마치 우리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남자아이들이 걱정되었다. 한참을 혼나더니 동네 오빠들은 돌아갔고, 친구들의 흐느끼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우리는 그제야 나무 아래서 나왔다. 서리한 사과를 나무 아래 그대로 두고 과수원에서 벗어났다. 바로 동네 우물가에 갈 수가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동네를 빙 돌아 늦게 우물가에 갔다. 거기서 한참을 남자아이들을 기다렸다.빨래터에 비치는 달빛에도 겁이 났다. 훤한 달빛에 선뜻 나오지 못하고 나무 뒤에 한참을 숨어 있었다. 숨소리조차 죽이며 남자친구들을 걱정했다. 이순혜 수필가 발 없는 소문이 동네를 몇 바퀴 돌았다. 같이 사과 서리를 갔지만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는 쏙 빠졌다. 지난밤에 남자아이들이 숙이네 사과 과수원을 서리한 이야기만 소문이 돌았다. 며칠 동안 남자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동네 선배들한테 서리하다 들켜서 맞았다는 이야기만 골목을 가득 채웠다.시골 마을에서 같이 자란 우리 또래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주로 여자들이 주도해서 온 산천을 돌아다닌 것 같았다. 그날 밤 사과 서리를 하자는 이야기도 아마 여자 친구들이 먼저 꺼냈지 싶다. 그런데 벌을 받은 것은 남자친구들이었다. 아무도 그날의 일에 대해 변명이나 원망하지 않았다.첫서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과수원 주인집 숙이를 앞세우고 사과를 서리했지만, 숙이네와 관련 없는 동네 오빠들에게 들켜 남자친구들이 혼나는 사건이었다. 남자친구들은 여자친구들이 꼬드겨서 그랬다고 불지 않았다. 달도 우리의 소행을 빤히 내려다보았지만 고자질하지 않았다. 남은 사과를 다시 입에 넣는다. 사과즙이 쪼르륵 흘러내린다. 달콤하고 살벌했던 추억이 생각나 웃음이 난다. 내 친구 다섯 숙이와 경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비밀은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 남자친구들은 또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사과 서리에 관한 기억의 한 페이지를 공유하고 있으려나.

2023-02-12

뽕나무에 청어가 사라졌다

어릴 적,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 읍내에서 십 리를 더 가야만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쪽에 넓은 들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농사지을 평평한 땅은 없었다. 부모님은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골짜기를 개간했다. 밤낮없이 비탈밭에 돌을 걷어내고 쟁기질했다. 그러고는 한 달에 두어 번 시장에 나가 산골에서 먹을 수 없는 생선을 사 왔다. 찬 바람이 부는 이맘때 어머니는 청어과메기를 몇 두릅 사 왔다. 그러고는 뒷마당에 있는 뽕나무에 걸어놓았다.초등학교 다닐 때, 양잠이 성행했다. 마을에 누에를 치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자 부모님도 덩달아 양잠업에 뛰어들었다. 산비탈 밭에 뽕나무를 심었다. 봄이면 아버지는 여린 뽕나무 가지를 지게 한가득 져 왔다. 마당 한 곳에 부려 놓으면 우리는 가지를 훑어 뽕잎을 땄다. 오월 끝자락의 뽕잎은 마당에서도 초록으로 물들었다.봄의 산비탈은 간식 창고였다. 우리는 사이다병을 구해 산에 갔다. 한 손에는 뽕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겼다. 반들반들한 속살이 보이는 꼬챙이를 들고 사이다병에 오디를 따 넣었다. 그리고 사이다병에 넣은 오디를 꼬챙이로 열심히 찧었다. 팔이 얼얼할 정도로 찧으면 오디는 사이다병에서 뽀글뽀글 거품을 냈다. 그러면 사이다병 주둥이를 입에 대고 끄트머리를 탁탁 치면 국물이 졸졸 흘러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순수 무결점 오디주스인 셈이다. 이미 손과 입은 시커먼 보랏빛으로 물들었고,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깔깔댔다.누에를 칠 때는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방 하나를 언니와 같이 사용하는 것도 싫은데 누에와 같이 자는 것도 싫었다. 딸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막무가내로 누에 방을 만들어 버리는 부모님은 더 싫었다. 그러함에도 벽 한곳에 누에 방을 천정까지 닿게 했다.밤마다 꿈길이 무서웠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그때부터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형광등을 켜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불을 끄고 누우면 또 소리가 났다. 서너 번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켰다를 반복하다 스르르 잠에 빠졌다. 또 빗소리에 놀라 화들짝 깨면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였다. 아침이면 내 머리맡에는 까맣고 동그란 누에똥이 수북했다. 누에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채반에 있던 누에가 자는 내 얼굴에 떨어졌다. 손가락만 한 누에가 꼬물꼬물 내 몸에서 돌아다닐 때는 몸이 뻣뻣했다. 이순혜 수필가 그래도 새하얀 누에고치를 보면 마음이 맑아졌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고치는 순백의 색이라 여러 가지 상상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지우기도 했다. 잘록한 허리와 통통한 몸은 소설에서 읽었던 여자 주인공 같아 혼잣말로 여러 사람의 대사를 하며 놀았다. 한참을 갖고 놀다 어머니를 도왔다. 겉에 묻은 가느다란 실을 떼고 자루에 차곡차곡 넣었다. 시골에서 유일하게 현금을 만질 수 있는 때라 우리도 한몫 거들었다.겨울이면 뽕나무가 들썩거린다. 추위가 시작되면 뽕나무에 걸어 두었던 과메기를 꺼내느라 수시로 나무를 기웃거렸다. 어머니는 자주 마루에 앉아 꾸덕꾸덕한 청어 과메기의 껍질을 벗겼다. 누런 쌀 포대기에 대가리 자르고 내장 걷어내고 뼈를 추리고 살점을 발라냈다. 두레 밥상에 앉은 우리는 밥그릇에 초장을 담아놓고 어머니의 손을 살폈다. 아버지 한 입, 어머니 한 입, 우리들 한입, 차례대로 먹었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오래 남았다. 청어의 비릿함보다 고소함이 더 강했다.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루었던 뽕밭은 사라졌고 뒷마당 뽕나무에 걸쳐놓았던 과메기도 사라졌다. 내 유년의 따스한 윗목의 그리움 한 조각도 사라졌다. 그래도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에 삼백 년 된 뽕나무가 있다고 하니 참 다행이다. 어쩌면 거기 뽕나무가 들썩이고 있을지도. 봄이 오면 그곳으로 가리라.

2023-01-29

우리 동네 詩香千里

꽃이나 나무, 향수 등에서 나는 좋은 냄새를 향기라 한다. 시(詩)의 향기란, 마음으로 시를 읽을 때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시향(詩香)이라 할 수 있다. 시가 뿜어내는 향기는 천 리를 간다고 해서 시향 천리(詩香千里)라는 말이 있다. 시(詩)향이 천 리를 가는 동안 무엇을 마주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향기를 뿜어낼까. 시(詩)의 향기는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존재해 시를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가슴 한곳에 쟁여두었던 그리움을 퍼 올리기도 한다. 이것뿐인가, 한 편의 시를 읽고 눈물을 닦아내는 이도 있으니 말이다. 시향(詩香)을 통해 인향(人香)이 만리(萬里)를 갈 수 있음이다.하늘이 높아지는 9월, 포항시 남구 효곡동 문화센터에서 시문학 수업을 개강했다. 시문학 수업은 깊은 산속 옹달샘 같은 시를 찾아 여럿이 나눠 읽고 느끼며 마음의 갈증을 해소했다. 옹달샘이 품은 시는 추억의 퍼즐 조각이 되었다. 누구는 그 조각 따라 깊은 산골 고향마을에 닿기도 하고, 누구는 도시의 작은 골목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시가 뿜어내는 향기 따라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를 담은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산으로 들로 바다로 떠나는 시향의 여행자가 되었다.금요일 아침, 시(詩)문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은 들떴다. 한 줄의 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어설픈 시인이 되어 펜을 들기도 했다. 우리 곁에서 소중하지만 잊혀가는 것들을 찾아내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에 의미를 부여했다. 숱한 의미가 함유된 메타포에 우리의 추억을 갈무리했다.시를 읽고 음악에 맞춰 낭독하는 시간이 제법 흘렀다. 어디선가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찬바람이 불어오니 옷깃을 여미고 이제 우리는 시문을 닫아야 할 때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시의 향기를 맡았지만, 이제는 홀로 시를 찾아 각자의 방법대로 시향을 맡아야 한다. 곧 문화센터 시문학 교실이 동면에 들 시간이다.짧은 이별이 아쉬워 문집을 만들었다. 문집 이름을 공모해 시(詩)향으로 정했다. 이번 학기 중에 만났던 시중에 내가 뽑은 최고의 시를 소개하고,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는 코너를 마련해 짧은 생각을 실었다. 물론 ‘나도 시인이야.’라는 코너를 빼놓지 않았다. 시인은 아니지만 몇 분이 시를 쓰는 용기를 내주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한 학기 동안 수업 중의 사진을 찍어 이모저모에 실었다. 이순혜 수필가 전문성이 있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우리 동네 시향을 맡을 수는 있다. 우리의 손길이 닿은 페이지, 페이지마다 시문학 교실의 수강생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컴퓨터 자판의 글씨가 아닌 각자의 필체대로 써 내려간 시는 열 명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첫사랑의 아련함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그가 살아가고 있을 어느 도시를 가고 싶다는 분, 수업 중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재미있게 한 편의 시를 완성한 분, 노동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괜히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는 분, 그날 접한 시를 낭송으로 수업 분위기를 이끌어주시는 분, 그들의 모습이 그들만의 향기로 전해져 왔다.추위가 물러가면 머지않아 남쪽에서 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릴 것이다. 그때쯤 우리는 봉해 두었던 시향을 풀어 볼 것이다. 어떤 이는 시향에 마음이 더 촉촉해졌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시인이 되어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묶어둔 시향에서 먼지가 날릴 수도 있겠다. 그러면 어떠한가. 우리는 이미 시향을 펼치고 있을 텐데.우리 동네 시향 천리(詩香千里)가 오래도록 은은하게, 더 멀리 퍼지기를 바라며 두 손을 포갠다.

2023-01-08

사그랑주머니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시로 쓰는 자서전’ 수업할 때였다. 어르신들의 삶을 이야기로 나누고 그것을 받아 적으니 모두 시가 되었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몇 부분으로 나누어 질문하고 어르신들의 생각을 끌어냈다. 결혼할 때는 어떠했는지, 그땐 그랬지요, 라고 맞장구를 쳐 드렸다. 아이들 키울 때는 어떠했는지? 그래도 그때가 제일 좋았다며 어르신들은 이미 추억 속에 가 있었다. 금방 웃으시다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도 있다며 시무룩해하셨다. 끝없이 달려 나오는 이야기를 녹음하고 기뻤을 때는 기쁜 표정으로 추임새를 넣었다.그날은 사진을 보고 시를 쓰는 수업이었다. 어르신들이 갖고 온 사진은 다들 꽃 속에 찍은 것들이다. 예쁘게 차려입은 옷은 봄 산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같은데, 표정은 어둑해 보였다. 가물가물한 추억이 된 사진을 보고 오늘에서야 어르신들이 환하게 웃는다. 언제, 어디를 누구와 갔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마다 사진에 관한 추억을 반죽하고 부풀리느라 교실이 시끌벅적했다.“옜다, 선물이다.”“니, 엄마 보고 싶제?, “니, 엄마도 있고, 나도 있다.”엄마 친구가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설악산 어느 바위 뒤에서 세 명이 찍은 사진이었다. 꽤 오래된 사진 속에 젊은 엄마가 보였다. 한 장의 사진은 추억으로 가는 빗장을 열어주었다.생각해 보니 젊은 엄마는 싸움을 잘했다. 산비탈 돌짝밭에서는 크고 작은 돌멩이와 숨바꼭질하듯 싸우고 동구 밖에서는 논에 물 대는 일로 이웃과 자주 싸웠다. 옆집 논에서 물길을 돌려야 할 때는 아버지를 앞세우고 뒤에서 요목조목 큰 소리로 따졌다. 그 무엇보다 엄마가 제일 잘하는 것은 자식들을 위한 모든 싸움이었다.엄마 주머니에는 항상 먹을 것이 있었다. 산골 마을에 어스름이 내리면 엄마는 대문을 들어서고 수돗가에 하루치 노동을 부려놓았다. 우리는 엄마 곁에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의 양쪽 주머니에는 이것저것 먹을 것이 나왔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아무것도 없는 날은 부엌에서 눈 깜박할 사이 주전부리를 만들어 냈다. 이순혜 수필가 사진 속의 엄마를 뚫어지게 보았다. 사진 너머 있는 엄마의 무심한 표정에 자꾸 눈길이 갔다. 힘든 농사일에서 잠시 벗어나 친구들과 어울려 나들이해서 좋을 텐데, 여행이 즐겁지 않았는지. 엄마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만약 단 몇 초라도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이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갑자기 교실이 시끌벅적거린다. 모두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다.한 사람씩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정했다. 흑백에서 컬러사진까지 다양했다. 이제는 그때를 생각해보자고 했다. 엄마 친구도 설악산의 어느 바위 사진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엄마와 같이 죽도시장에서 옷도 사고 신발도 샀다고 했다. 설악산의 커다란 바위를 보았던 그날은 힘들게 산에 올랐지만 힘들었던 만큼 많은 것을 보았단다. 마치 햇살이 따스한 고향 집 툇마루에 앉아 있는 듯했다. 손에는 강원도 어느 산골짜기에서 구입한 ‘효도 관광’이라고 쓴 등 긁개를 들고서.아마도 그날은 강원도 어떤 간식을 먹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 고이 싸 온 간식을 우리에게 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아주 맛있게 먹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엄마의 부른 배를 두드렸을지도 모를 일이다.그날의 기억은 이제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나는 사진 속 엄마 옷 주머니를 훑어보았다. 아직은 밋밋하지만,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엄마의 사랑이 불룩했을 것이다.엄마는 그랬다.

2022-12-18

경운기

가난했던 아버지는 반평생 땅 한 평 가지지 못했다.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운 산비탈을 개간하여 고구마나 콩을 심어 놓으면 짐승이 제 주인인 듯 먼저 다녀갔다. 실망한 아버지는 점점 바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산골의 아침 햇살이 방안으로 들이닥치면 그제야 이불에서 빠져나왔다.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걸음이 재발랐다. 동살이 잡히면 채마밭에서 웃자란 풀을 향해 호미를 들었다. 고추, 상추, 호박이 잘 여물 수 있게 고랑을 돋우고는 부엌으로 우물가로 잰걸음을 걸었다. 어머니 덕분에 우리 집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봉수대처럼 산골 마을의 아침을 알렸다. 그러나 우리 집 살림살이는 쉽게 볕이 들지 않았다갑자기 어머니 걸음이 빨라졌다. 새마을 개발위원과 이장을 만나 머리를 맞대더니 이웃의 논과 밭을 무시로 드나들었다. 뭔가를 도모하는가 싶더니 읍내에 나가 경운기를 덜컥 샀다. 농사일에 서툴렀던 아버지는 돈이 없다는 것은 참 좋은 핑계였다. 더욱이 경운기처럼 덩치 큰 농기구를 들인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경운기가 집에 오는 날, 아버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구령에 맞춰 출정식을 하고 우리를 경운기에 태웠다. 어머니는 대문을 활짝 열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버지의 심장도 경운기 엔진처럼 힘이 넘쳤다. 스타트 레버를 수십 번 돌려 퉁, 퉁, 탕, 탕, 탕 경운기 엔진과 펌프질한 아버지의 심장이 밭으로 나갈 준비를 끝냈다.동창을 벗기는 것은 아버지의 경운기 소리였다. 비알밭을 맴돌고 있던 콩새는 아버지 연장 끄는 소리에 숨죽이고 경운기 소리에 댓 걸음 도망쳤다. 산비탈에서 탕탕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논에서, 하천 밭에서 저녁노을을 물릴 때까지 경운기 소리가 났다.타작할 때면 경운기에 줄을 걸어 탈곡기를 돌렸다. 경운기 소리 못지않게 탈곡기도 ‘아롱시롱’ 떠들어 댔다. 그 소리에 신이 난 우리는 마당과 뒤안을 쏘다니며 놀았다.하루는, 평상시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막 모퉁이를 돌아가다가 경운기가 갑자기 산언덕으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방향을 돌려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급기야 아버지는 조종간까지 놓쳐버렸다. 그 순간, 아버지는 거칠게 발버둥 치는 경운기에서 뛰어내렸다. 어머니까지 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도망갔다.어머니는 평생을 같이한 당신이 그럴 수 있느냐고 따졌다. 다 늙어서 혼자 살려고 줄행랑치는 꼴이 볼썽사나웠다며 어머니는 분한 마음을 쏟아냈다. 겁이 나서 얼떨결에 그랬다고 아버지가 해명했지만, 경운기 사건이 소문이 나자 아버지는 대문 밖을 나가지 않고 집 안에만 머물렀다. 이순혜 수필가 경운기 시동 거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지런에 어지간히 시달린 경운기였지만, 헛간 구석으로 밀려나 녹이 슬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리면 덜컹거렸던 몸을 쉬고 또 가야 할 곳을 생각하며 이우는 별을 헤아렸던 때가 가물가물했다. 후둑 후두두 헛간 슬레이트 지붕에 비가 내려도 아버지는 경운기를 돌보지 않았다.아버지도 다리에 힘이 빠졌다. 헛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경운기와 마루에 힘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는 그렇게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한 하늘 아래에서 아버지와 함께했던 경운기도 탕탕거렸던 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헛간에 오도카니 놓인 경운기에 아버지는 더는 시동을 걸지 않았다.아버지의 전성기도 이울었다. 뜨거운 심장 소리를 내며 한 시대를 풍미하던 아버지는 더는 경운기 시동을 걸지 않았다. 마당 구석에 있던 경운기는 텅텅 힘 빠진 소리를 내며 옆집 아재네로 옮겨졌다.경운기는 일머리를 모르는 아버지에게 자존심과 같은 존재였다. 그 자존심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기력도 쇠하여졌다. 그렇게 경운기가 없는 헛간은 오래도록 고요에 들었다.어디선가 탕탕탕 경운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2022-12-04

뒤늦은 태풍이 할퀴고 간 숲길이다. 고갯길 마루에 참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다. 몸이 한쪽으로 휘어졌다가 다시 뻗었다. 그 모양으로도 어제의 곡절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소임을 다했다는 듯, 가지 끝에는 듬성듬성 도토리를 달고 있다.나무의 품에 많은 것들이 다녀갔을 것이다. 딱새, 곤줄박이, 산비둘기들이 깃들어 새끼를 키워냈을 테고, 나약한 벌레들이 천적의 눈을 피하려고 시시때때로 몸을 숨겼겠다. 한여름 그늘을 드리우면 더위에 지친 사람이 땀도 식혔을 것이다. 썩은 밑둥치의 굵기로 보아 나무는 꽤 넓고 넉넉한 품을 지녔을 것 같다.어머니의 품에는 늘 흙냄새가 났다. 어머니의 옷에 묻은 흙은 빨래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종일 논밭으로 오가다 보면 옷자락에 흙이 가실 날이 없었다. 바깥에서 놀다가 어머니를 보고 달려들면 흙 묻는다며 나를 밀어냈다. 따뜻한 품이 그리울 때, 잠든 어머니의 품에 슬쩍 파고들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나를 꼭 안아주곤 했다.어머니의 손은 뭐든지 만들어냈다. 시장에서 천을 떠와 재봉틀에 드르륵 박으면 예쁜 치마가 되고 티셔츠가 되었다. 부뚜막에 먹을 것이 없어도 어머니가 잠시 설치면 푸짐한 밥상이 툇마루에 올라왔다. 고봉밥 한 그릇 뚝딱 비운 우리는 배를 두드리며 잠들 수 있었다.어머니의 품은 넉넉했다. 봄바람이 불면 어머니는 새싹을 틔워 내고, 여름이면 뙤약볕을 견디고 태풍 한두 개쯤은 거뜬히 이겨냈다. 그러고는 단단하게 응축한 열매를 내주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가을 하늘을 받치고 있는 탐스러운 과일을 달고 있는 나무였다. 그 품에 깃든 우리는 아무 탈 없이 더 넓은 세상을 향한 꿈을 꿀 수 있었다.서른이 다 되어 어머니의 품을 떠났다. 결혼이라는 울타리로 내 품을 만들었다. 그 안에서 아이를 낳고 길렀다. 어린 생명이 가만히 누워 입만 방긋거릴 땐 우유를 먹이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때는 뒤에서 손을 뻗어 행여 넘어질까 조심했다. 잠시라도 아이를 품에서 놓을 때면 늘 마음이 쓰였다.아이들에게 훈훈한 품을 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언제든 와서 쉴 수 있게 넉넉한 그늘을 만들었다. 봄에는 상큼하고 파릇한 냄새로 불러들이고 여름에는 쭉쭉 뻗은 가지로 시원한 바람을 몰고 왔다. 가을에는 온갖 달콤한 열매로 먹는 일에 풍족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겨울, 그 황량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댈지라도 꿋꿋했다.새도 알을 품는다. 암컷은 둥지에 앉아 수컷이 사냥해 온 먹이를 전달받아 새끼에게 조금씩 찢어 먹인다. 새끼를 지키기 위한 황조롱이의 정성은 도심 빌딩 속에서도 알 수 있다. 몸에 밴 습성은 높은 곳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직선으로 하강하기에 높은 건물이 제격이다. 어린 새끼를 지켜보는 암컷과 수컷의 눈매는 번뜩인다. 이들의 운명은 그들의 품이 가장 완성할 때까지 먹이를 물어다 준다. 이순혜 수필가 새는 새끼가 둥지를 떠나 날아오르면 더는 새끼를 돌보지 않는다. 육아가 끝나면 새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자식이 떠나도 늘 품을 마련하고 자식을 기다린다. 자식을 끌어안고 젖을 먹이는 포유류(哺乳類)이기 때문이다. 내 품에 자식을 안는 것, 자식 때문에 언제까지나 자신이 희생하는 것, 이는 포유류의 기쁨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다.어떤 작가는 모성의 완성은 자식을 품에서 내보내는 일이다. 라고 말했다. 머지않아 나도 자식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모성은 완성했지만, 그때부터는 ‘기다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끔 돌아오는 아이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더 넉넉한 품을 마련해야 한다. 내 어머니가 그랬고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듯.내려오는 길, 다시 한 번 쓰러진 참나무를 본다. 참나무는 온 힘을 다해 살고 이제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 옆에서 작은 참나무가 가지를 뻗으며 품을 넓히고 있다.

2022-11-20

두 얼굴

경주 남산에는 많은 얼굴이 있다. 감실부처, 석불입상,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등 바위마다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의 형상은 같은 것 같지만 가만히 비교해보면 다 다르다. 얼굴에서 손의 위치까지 나름의 의미를 품고 있는데, 오늘은 아직 못 본 부처님을 찾아 비탈길을 오른다.열암 골짜기 7부 능선쯤 축대에 오르자, 시커먼 그늘막이 가로막는다. 그 안에 커다란 너럭바위 하나가 놓여 있다. 좀 더 자세히 보려 허리를 숙이고 다가갔다. 아랫면에 얼굴이 있었다. 코가 땅에 닿을 듯 말 듯 5cm 차이로 땅을 바라보고 있다. 말로만 듣던 엎어진 부처님이다.한눈에 보기에도 부처님은 잘 생겼다. 오뚝하게 솟은 코와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는 타원형 얼굴을 잘 받쳐준다.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에 후덕한 성정이 도드라져 보인다.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목주름(三道)이 보여준다. 풍화가 비켜 간 얼굴은 너무도 말짱해서 오히려 신비롭게 느껴진다.이렇게 수려한 부처님이면 오롯이 서서 세상을 향해 자비로운 미소를 지어야 한다. 그런데 왜 엎어져 천년이 넘도록 땅을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이 골짜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언제, 누가 또 어떻게 발견했을까.저만치 언덕 위에 석불좌상이 보인다. 다가가 보니, 멀리서 보던 모습과 다르다. 여러 조각을 잇고 붙여 원형을 복원했으나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석불좌상은 목이 잘리고 광배 자락이 동강이 났다. 새는 어깨에 앉았다가 똥이나 싸고 가고 비는 깨끗이 씻어줄 것이다. 그런데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누군가의 소행이 틀림없다. 부처님의 이지러진 입을 보면서 나도 안타까워 얼굴이 일그러지고 만다.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 매년 이곳을 찾는 등산객이 무엇에 홀린 듯 앉아 있다가 동강 난 석불좌상의 불두를 발견했다. 그래서 당국에 신고했고 문화재 담당관이 근처를 돌며 깨진 부처님의 잔해를 찾았다.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쉴 겸 숨을 고르는데 그 아래 빈 곳이 있었다. 고개를 숙여 보니 가지런히 모은 손이 보였다고 한다. 엎어진 부처님은 그렇게 발견되었다. 세상의 얼굴이 험상궂을 때였다. 못 배우고 힘없는 백성은 귀족들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일하고도 제대로 품삯을 셈하지 못해 허방에 농사를 짓는 날이 많았다. 가난은 가난을 물고 늘어지고 배부른 귀족의 배는 나날이 불러갔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불공정한 세상을 나무라지 않았다. 분노에 찬 백성들은 들고일어나 무엇이든 두드려 부수었다.‘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고 그 소리가 성난 우렛소리처럼 커서 말이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모두 놀라….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조선명종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한반도에도 지진이 일어났다. 어느 날 땅이 흔들렸다. 기왓장이 떨어지고 담장이 무너졌다. 천재지변은 곧 하늘이 내리는 벌이다. 여진으로 땅이 밤낮없이 몸을 떨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인간 세상이 험악해지자 분노를 참지 못한 하늘이 세상을 흔들어버렸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순혜 수필가 부처님도 지진으로 엎어졌다고 추정된다. 엎어진 김에 쉰다고 오늘까지 쉬어버렸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꼴 보기 싫은 세상인데 일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외면한 부처는 천년 넘도록 얼굴을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다. 두 눈 부릅뜨고 나무라던 석불좌상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인간의 두 얼굴이 만들어낸 아이러니다.이지러진 얼굴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석불좌상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것이 바로 너희 세상의 얼굴이라고 꾸짖는 것일까. 아니면 너희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면 나 하나쯤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다고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일까. 문득, 어리석은 백성을 용서하시라 무릎 꿇고 싶다.내려오는 길에 엎어진 부처님을 다시 본다. 부처님이 일어나 만신창이가 된 부처님을 보면 가슴이 얼마나 아플까. 이제는 일어나세요. 청하자니 세상의 얼굴이 부끄럽다.

2022-11-06

독도야 잘 있느냐

독도, 홀로 있어 외로운 섬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보고 싶고 가고 싶고 쓰다듬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에서 자꾸 멀어졌다. 이번에는 큰마음 내서 나서기로 했다. 검푸른 망망대해에 외롭게 떠 있는 바위섬, 그곳에 있는 내 나라의 땅을 밟고 물비린내를 온몸으로 마셔보리라. 거기에는 질기게 뻗고 있을 풀뿌리, 갖가지 날짐승이 날아들고 있겠지. 달뿌리풀, 날개하늘나리, 섬괴불나무, 보리밥나무, 뿔쇠오리, 노랑지빠귀, 물수리, 괭이갈매기 등 이름도 예쁜 생명이 어우렁더우렁 군락을 이루고 있겠지.포항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지천명을 훌쩍 넘겼다. 호미곶에서 일출을 맞고 수평선 너머에는 독도가 있고, 이제는 독도를 만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 이사부, 안용복…, 동남쪽으로 난 뱃길을 따라가 보자. 지금껏 책으로만 익혔든 지식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나선 길이다. 머리로만 사랑한다고 외친 곳, 독도의 등을 한 번쯤 쓰다듬어 주련다.아름다우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속속들이 알고 싶어진다. 독도가 그렇다. 심해 2천m에서 우뚝 솟아오른 동도, 서도는 동해 위에 핀 돌꽃이었다. 바닷속에는 해조류가 너울거리고 이를 터전으로 고기들이 별천지를 이룬다. 아름다움 아래 감춰진 보물은 그뿐만 아니었다. 망간단괴, 해양 심층수, 천연가스 등 돈으로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바다는 우리의 미래를 풍요롭게 하는 자원의 보고였다.우리 땅의 동쪽 끝을 보고 싶어 배에 올랐다. 백 번 듣느니 한 번 보고 느끼는 게 낫지 않으랴. 이제는 손으로 바위를 만지고 괭이갈매기는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 직접 듣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항상 그곳에 있을 독도 경비대 아저씨들에게 인사 한마디 나누고 싶었다.독도를 알아가는 거리만큼 바닷길은 험난했다. 파도가 점점 높아져 배가 울렁거렸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궐기문장이 두 주먹에 아로새겨질 때쯤 뱃머리가 도동항에 닿았다.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고 요란한 울릉도 바람이 나를 맞았다. 독도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기대에 바람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도동항에 내렸다. 한나절이 지나자 거칠었던 울릉도의 바람은 온순했다. 이순혜 수필가 다음 날, 바다는 길을 열어주었다. 어떤 이는 삼 대가 공덕을 쌓아야 길을 열어준다고 했다. 삼 대가 공을 쌓지는 못해도 독도에 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들어주었나 보다. ‘어여 오라’고 독도는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이했다. 독도에서 꼭 하고 싶었던 게 있다. 마음껏 발로 쿵쿵거리며 뛰어다녔다. 사람 반 괭이갈매기 반 그리고 비릿한 냄새하고 눅눅한 바람이 하나가 되었다.동행한 벗들과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괭이갈매기를 찍고 서도와 동도를 카메라 셔터에 부지런히 담았다. 하나라도 빠짐없이 모두 담고 싶었다. 두고두고 꺼내 보려면 더 많은 것을 담아야 하겠다.웅성대는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갔다. 동해의 맑은 물이 독도의 끝자락에 닿은 곳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이 물이 흘러 더 동쪽으로 가겠구나. 거기에는 이곳을 노리는 무리가 있겠지. 오래전부터 있는 아름다운 이곳을 그들의 방법으로 흩트려 놓는구나. 내 마음을 알았는지 파도가 철썩거리며 바위에 와 부딪힌다. 가장 동쪽에 있는 우리 바닷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비록 독도에 머무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 여운은 오래갈 듯하다. 독도야 잘 있거라.

2022-10-23

교차로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네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서남북에서 밀려온 차들이 붉은 신호에 멈춰 선다. 잠시 기다리는 그 짧은 사이에도 내달리고 싶은지 차들이 쿨럭거린다.오늘은 교차로가 시끄럽다. 대형트럭 한 대가 교차로 한가운데 서 있고 그 주변으로 차들이 끼어들어 꼬리를 문다. 신경전을 벌이듯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며 으르렁거린다. 차들로 뒤엉킨 교차로를 바라보니 생각이 복잡해진다.내가 처음 운전면허증을 따고 도로에 나갔을 때, 핸들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로 위, 차들의 물결에 떠밀려 곁눈질도 못 하고 앞만 보고 달렸다. 어깨가 뻐근해지고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렸다. 방향지시등을 켜고도 제때 차로를 바꾸지 못해 몇 바퀴를 돌기 일쑤였다. 운전이 서툴러 설설 기면서도 질주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차를 부리는 데 조금 익숙해질수록 내 자동차 속도계도 점점 올라갔다. 탁 트인 도로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자동차가 도로에 착 붙는다는 느낌의 쾌감은 짜릿했다.그러나 내 자동차의 속도는 한없이 올라갈 수만은 없었다. 어느 날, 앞선 화물차를 바짝 뒤따르다가 교통경찰에게 붙잡혔다. 질주를 막은 교통경찰에게 짜증이 났다. 신호를 보고 진행했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따졌다. 내가 목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붉히자, 웃음으로 대하던 경찰관이 음주 측정까지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면허증을 보여주고 범칙금 통지서를 받았다. 며칠 내내 기분이 찜찜했다. 그것이 내 인생에 주는 빨간 경고장인지 몰랐다.운전에 재미가 붙어 자동차를 몰 듯 나의 일상에도 점점 속도가 붙었다. 일하는 보람도 있었다. 더 좋은 차 더 넓은 집, 욕망이 커질수록 속도도 빨라졌다.마음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몸이 따라오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점점 숨이 가빠왔다. 아니나 다를까, 종합검진을 받았더니 여러 군데 고장이 나 있었다. 의사는 호르몬의 균형이 깨진 게 큰 문제라고 했다.“그동안 빨간불이 몇 번 켜졌을 텐데….” 의사는 안타깝다는 듯 내뱉었다.인생에 건강의 빨간불이 켜지자 내 질서가 뒤엉켰다. 일하거나 청소하는 소소한 일상까지 혼돈에 빠졌다. 평소 잘 다니던 골목길도 얽히고설킨 미로처럼 보였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저만치 이탈해버린 시간이 뽀얀 먼지처럼 흩날렸다.사람의 몸도 기계처럼 고장 난 부품을 바꿔 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큰 수술을 했다. 이순혜 수필가 수술하고 시골집에서 잠시 쉼표를 찍었다. 와글와글한 생활의 소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병원 특유의 냄새에서 멀어지고 싶었고, 달릴 줄만 알았던 나에게 호흡의 정리가 필요했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적적하다 싶으면 길섶 돌멩이에 말을 걸고 키 작은 풀꽃에 웃음을 보냈다.날마다 집 근처 숲에 들어갔다. 숲에 있는 표정 있는 것들이 느낌표로 다가왔다. 손바닥만 한 땅 움켜쥐고 들풀은 꽃을 피우고 알곡 몇 톨만 먹고도 새들은 노래를 불렀다. 많은 것을 차지하려 않고 순서도 다투지 않았다. 주어진 조건에서 생명을 꽃 피우고 열매를 만들면서 제 몫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작은 풀꽃들도 저러한데 나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숨차게 달려 온 것일까. 다짐과 다짐을 거듭한 뒤 어설프지만, 나만의 답안지를 들고 돌아왔다.세상의 시간은 잠시도 멈춤이 없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도 건물이 올라가고 도로가 확장되고 있었다. 나란히 달렸지만, 앞서간 사람이 많았다. 누구는 그동안 큰상을 타고 작품집을 출판했다. 봄꽃이 있으면 가을꽃도 있고, 먼저 피는 꽃도 있고 나중에 피는 꽃도 있지 않은가. 큰 숨 한 번으로 마음이 그득해졌다. 그래, 멀리 가야 하니 내 속도를 잃지 말자. 어우렁더우렁 덜컹거리는 것에 익숙해져야겠다.

2022-09-25

금붕어는 살아있을까

진한 커피로 식곤증을 몰아낸다. “쾅” 대포 소리같이 우렁차지만 짧은, 몇백 년 된 나무가 한순간에 쓰러질 때나 나는 소리였다. 덜덜덜 책상이 마구 흔들렸다.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지진인가, “움직이지 마” 아이들에게 소리 질렀다.나는 있는 힘을 다해 책상을 붙들었다. 꽉 잡은 손에도 아랑곳없이 책상은 책을 흩뜨리고 연필을 굴렸다. 두려움에 확장된 아이들의 눈동자가 나에게 쏠렸다. 눈빛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도 한 아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요동치자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리려 한다. 어디선가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어항 유리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 순간, 금붕어 한 마리가 어항 밖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러고는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물살에 휩쓸린 다른 금붕어는 바닥으로 쏟아졌다. 바닥에는 금붕어들이 파닥거리며 뛰어올랐다. 흔들림이 진정되었다.휴대전화, 지갑, 자동차 열쇠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겁에 질린 아이들을 다독이며 계단을 내려가는 길은 한층 한 층이 십층을 오르내리는 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휴대전화가 요란스럽게 들썩거렸다. 놀란 학부모들이다. 아이의 안위를 묻고는 당장 데리러 오겠단다. 내 전화기에도 불이 났다. 아들과 딸이 엄마의 안부를 챙기느라 전화기가 뜨겁다.나는 자동차를 공터에 주차하고 이곳저곳을 서성거렸다. 문득, 파닥거리며 물을 찾고 있을 금붕어가 생각났다. 하루에도 수십 번 어항 속을 들여다보았다. 먹이를 줄 때나 둥둥 떠다니는 부유물을 걷어 낼 때도 살폈다. 커피잔을 들고서도 어항 앞을 서성거렸고 책을 읽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어항을 보았다. 금붕어가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다가가 어항을 건드려 보기도 했다. 그러면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모습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수시로 안부를 물으며 눈길을 보낸 금붕어였다.몇 시간이 지나고 집에 들어가 먼저 금붕어를 살폈다. 바닥에 널브러진 금붕어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길쭉한 타원형의 물방울 안에 쓰러져 있다. 다행히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이 바닥에 있었다. 어항이 깨지면서 쏟아진 물이었다. 한 마리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기운을 차렸는지 꼬리를 들었다가 다시 떨어뜨렸다. 급한 대로 투명한 볼에 수돗물을 받았다. 축 늘어진 금붕어를 그릇에 담고 물을 넣었다. 그런데 꼼짝하지 않는다. 급하게 하느라 물의 온도에 신경 쓰지 못했다. 낯선 물의 온도에 놀라고 몇 시간째 방치된 몸이 회복하기에는 힘이 드는가 보다. 그런데도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금붕어가 살기 바랐다. 투명한 볼에 두었던 금붕어가 꼬물꼬물 헤엄을 치고 있었다. 위독하던 자식이 살아난 양 기뻤다.수족관으로 전화했다. 좀 더 넓은, 환경이 좋은 새집을 구해주고 싶었다. 모래, 자갈, 수초 등 새 친구를 들인 수족관은 반들거리며 빛이 났다. 이렇게 살아난 금붕어가 새로 마련한 수족관에서 여유롭게 헤엄친다. 금붕어도 살아났고 일상도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후유증은 남았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한 일이 자주 생겼다. 윗집에서 청소기 돌리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몸이 경직되고, 윗집 아이들이 거실을 뛰어다녀도 집이 무너질 것 같아 불안했다. 휴대전화의 진동 소리에도 지진이 일어난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아이들이 잊지 않고 물었다. 물에서 벗어난 금붕어는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금붕어가 놀랄 때는 어떤 반응을 하는지, 금붕어도 우리처럼 소리에 놀랐는지, 아파하는지. 아이들도 금붕어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에 환호를 질렀다. 생명은 무엇보다 귀하다. 나, 아이들, 금붕어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만약 금붕어가 죽었다면 또 다른 후유증이 되어 한참 나를 괴롭힐 것이다. ‘금붕어야. 살아주어서 고맙다’

2022-09-04

채독

자금산 기슭에 내려앉은 덕동마을은 어머니의 품같이 편안하다. 고택 사이를 거닐다 덕연관 앞에 섰다. 이곳은 대대로 내려온 고문서, 생활 용구, 농기구 등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전시관 입구에 부끄러운 듯 돌아앉은 채독이 눈길을 끈다. 채독은 나무 항아리다. 싸리나무의 낭창한 성질을 이용하여 큰 장독처럼 모양을 빚어 안쪽과 바깥쪽에 창호지를 바른다. 채독은 통풍이 잘되어 주로 마른 곡식을 갈무리하거나 옷을 보관하는 데 사용한다.내 기억에도 우리 집 마루 가장자리에 늘 채독이 놓여 있었다. 그 채독에는 아버지의 옷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일 년에 서너 번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하루가 멀다고 옷을 내어놓고 바람을 쐬게 했다.어머니께서 채독에 정성을 쏟았지만, 아버지는 집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람처럼 드나들었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는 소문만이 앞마당과 뒤란을 서성거리며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시장 모퉁이 신식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둥 사방공사 감독으로 그곳의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둥 가는 곳마다 소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을 다 가릴 모양으로 어머니는 창호지로 채독을 덧바르고 덧발랐다.소문은 현실이 되어 대문에 들어섰다. 문을 밀치고 아버지와 낮도깨비 같은 여자가 들이닥쳤다. 볼에는 하얀 분을 덕지덕지 발라 분가루가 날렸고, 입술이 튀어나와 붉은 루즈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비로드 치마를 받치고 있는 굽 높은 구두는 도회의 냄새를 풍겼다. 꼿꼿이 턱을 세운 여자 뒤에는 낯선 듯 두리번거리는 사내아이가 멀뚱히 서 있었다.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물 한 사발 떠오라고 우물가를 향해 소리쳤다.어머니의 손놀림이 거칠어졌다. 빨래를 빡빡 치대고, 거품을 내어 헹구기를 반복했다. 많은 소문을 하얗게 삭이던 어머니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평생 눈 감고 귀 막고 어린 자식 건사하고 살면서 덤덤히 견디었던 목울대가 출렁거렸다. 그러면서도 부엌으로 들어가 그을음이 가득한 아궁이에 솔가지를 쑤셔 넣으며 따슨밥을 지었다.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부엌문을 넘어와도 어머니는 솥뚜껑에 흐르는 눈물로 뜸을 들였다.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차린 밥상을 아버지는 어제도 먹은 것처럼 편안히 받았다. 이순혜 수필가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여름이었다. 아래채에 머물던 도시 여자가 삶은 감자로 늦은 아침을 먹을 때였다.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이가 죽었단다. 강에서 멱을 감다 장마로 불어난 물살을 헤쳐 나오지 못해 주검으로 돌아왔다. 엄마를 형님이라고 부르던 여자는 땅을 치며 울었다. 몇 날을 넋을 잃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아이 이름만 불렀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지친 어느 날, 인연의 줄을 놓아버리듯 집을 나갔고, 우리 집안은 오랫동안 정적에 갇혔다.시간은 제 낯을 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돌아간다. 선선한 바람이 불 때쯤 어머니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 어머니의 배는 채독의 볼록한 허리를 닮아 날마다 불어난 배를 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달이 차고 우리 집 대문에 금줄이 쳐지고 숯덩이와 드문드문 빨간 고추가 걸렸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고 어깨가 넓어 모두가 장군감이라 좋아했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마음이 하늘에 닿아 아들을 우리 집에 보내줬다고 입을 모았다.밖으로만 나돌던 아버지가 남동생을 자주 무릎에 앉혔다. 채독의 효험이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옷을 켜켜이 쟁여 놓으며 정성을 쏟은 어머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바람이 잠잠해졌다.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아서인지, 마루에 터줏대감으로 놓인 채독을 어루만지며 정성을 다한 어머니의 소망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는 더는 대문을 열고 떠나지 않았다.어머니의 간절함은 애초부터 그곳에 가득 차 있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이다. 덕연관을 나오니 나지막이 앉은 산자락에 싸리꽃 향이 가득하다.

2022-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