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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 서정

등록일 2022-06-19 19:10 게재일 2022-06-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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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북구 흥해읍 곤륜산 활강장.

우리네 삶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붓을 잡고, 악기를 다루는 사람은 악보를 보며, 글을 쓰는 사람은 펜을 든다. 인류가 시작한 처음부터 우리의 삶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슬퍼하거나 노하거나, 기쁘고 즐거운 일은 항상 있다. 때론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그렇게 살아간다. 이웃과 더불어 살며 와글와글하는 세상사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무작정 떠난 길이다. 한참을 걷다가 바다를 바라보는데, 하늘에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호젓한 날갯짓을 보니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새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은 어디에 가나 있었다. 고샅길에서 공깃돌을 주울 때도, 길가 작은 연못에도 구름을 머금은 채 내려와 있었다. 하늘도 마음이 있는지 먹구름이 끼다가 비가 오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을 쏟아냈다. 흐린 날에는 우울하고 맑은 날에는 개고, 하늘의 표정은 어린 마음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가끔 하늘은 두려운 존재였다. 서쪽 하늘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을 보면 가슴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밀려왔다. 기억의 창고 한구석에 감춰둔 용서받지 않은 잘못이 쥐구멍을 찾아 허둥댔다.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면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이 지붕 아래로 숨어들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감수성이 터지던 시절, 말간 하늘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을 보면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무거운 책가방과 교복을 벗어 던지고 숙제와 시험이 없는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다.

하늘을 보며 때로는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구름 위에 누워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면 낙타를 탄 여행자를 만나고 아라비아 양탄자를 탄 소년도 만나겠지. 내가 사는 세상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은 나는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세계를 일주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다.

삶의 개척자가 되고 나서 하늘을 보지 않았다. 땅의 것에 충실 하느라, 주부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며 모든 것은 가족 중심으로 돌아갔다. 배낭을 메고 산길을 걸으며 하늘빛 서정을 담는 일은 일상에서 제외되었다. 하늘을 보며 상상하는 일은 한가한 몽상가의 사치이고 현실주의에 빠진 내게 비생산적인 일이었다. 하늘은 내 심상에서 점점 멀어졌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숨을 돌릴 무렵, 하늘에 매달리는 일이 생겼다. 땅의 것을 채우기에 바빴던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았음이다. 그런데도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병이 왔는지 원망했다. 또 왜 나냐고 회색빛 하늘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다 두려움이 밀려와 살려달라고 하늘을 보고 떼를 부렸다.

이순혜 수필가
이순혜 수필가

수술을 앞두고 오히려 차분했다. 지금껏 쏟아냈던 다짐을 되새기며 나붓이 엎드렸다. 앞으로 하늘을 볼 수 있게만 해달라고. 수술실에 들어갈 때까지 하늘만 생각했다. 스르륵 앞이 캄캄해졌다.

긴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자 가장 먼저 하늘이 보고 싶었다. 휠체어에 앉아 바라본 하늘이 이토록 시리고 투명하다니. 뜨거운 눈물이 온몸을 적셨다. 상상의 날개는 살아있는 자에게 주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숱한 이야기가 하늘로 올라가 숨어있었다.

하늘 깊이 낚싯대를 드리우면 선녀를 닮은 물고기가 입질할 것 같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가 금빛 두레박을 타고 내려올 것 같았다. 상상의 그물을 깊이 올렸다가 내리면 싱싱한 이야기들이 은빛 비늘을 파닥이며 우르르 쏟아졌다.

하늘은 다채롭다.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다가 사라지고, 온갖 그림을 그렸다가 어느새 싹 지워버린다. 소나기를 퍼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말갛게 능청을 떤다. 가끔은 무지개를 띄워 사람들의 마음을 채색한다.

심상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푸른 도화지, 만약 하늘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무채색일 것이다. 하늘하늘, 하늘은 어감조차 가볍다. 사람의 마음에 바탕색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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