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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사랑한다

등록일 2022-07-17 17:56 게재일 2022-07-1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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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회 노인대학 풍경

시간이 새긴 흔적은 고스란히 사진으로 남아있다. 몇 해 전 일이다.

노인대학을 개강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서예, 민요, 공예, 노래 등을 배운다. 학생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민요반에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한 할아버지가 있다. 민요 가락이 좋고 장구 치는 것이 재미있다며 싱글벙글한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할머니와 짝을 맞추어 율동할 때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부끄럼을 탄다.

어떤 할머니는 중풍을 앓은 후유증으로 걸음걸이가 시원찮다. 그 할머니 곁에는 항상 지팡이가 있다. 십 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삼십 분이 넘게 걸어온다.

나는 한글반 수업을 맡고 있다. 한글반 학생은 모두 열한 명의 할머니들이다. 책상 위에 박하사탕을 준비해 놓고 첫 수업을 했다. 기역니은부터 시작했다. 먼저 칠판에 써놓고 따라 읽게 하니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낭랑했다. 다음엔 ‘가나다라’였다. 기역이 혼자 외로워 ‘ㅏ’를 만나 ‘가’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가’로 시작하는 말을 찾아보자고 했더니 가지, 가방, 가랑비, 가오리…. 끝도 없이 이어졌다. 서너 평 남짓한 교실에 모여 앉은 할머니 학생들의 모습이 진지했다.

한글반 학생들의 평균 나이는 칠십이 넘는다. 배움의 시기를 놓친 분들이다. 젊어서는 먹고살기 바빠 글을 배우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그때는 그랬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글씨를 서너 줄 쓰고는 손이 떨린다며 연필을 내려놓는 할머니도 있었다. 칠십 평생 연필 잡은 건 처음이라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할머니 학생들도 숙제한다. 아주 열심히 한다. 내 준 것보다 더 많이 해온다. 손주들이 읽는 동화책에서 짧은 문장을 베껴 오기도 한다. 어찌나 정성 들여 써오는지 여덟 칸 공책에 담긴 글씨가 반듯하다. 동네 노인정에 가서도 숙제부터 한다고 자랑이다. 나는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준다. 목요일마다 할머니 학생들은 칭찬받기에 바쁘다.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생활한복을 곱게 입고 호박반지를 끼고 왔다. 보기 좋다고 내가 한마디 했더니 옆에 있던 할머니가, 아들이 해준 생일 선물이라고 거들었다. 서울의 유명한 백화점에서 샀다는 말도 덧붙였다. 공부는 뒷전이고 옷이며 반지 이야기로 한참 시끄러웠다.

다음 수업 시간이었다. 그날따라 할머니들의 목걸이와 반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은반지와 금반지를 나란히 낀 분, 아예 목걸이와 반지를 짝 맞춰 한 분, 그동안 장롱 깊이 모셔두었던 패물을 다 꺼내 치장하고 온 듯했다. 반지 낀 손을 자랑이라도 하듯 손놀림이 부산했다. 학기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한 할머니가 공책을 펴들고 내게 다가왔다. 대뜸 ‘아들아 사랑한다.’라고 써보라 했다. 남들보다 열심히 숙제해오던 분이었다.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이름까지 적어 오곤 했다. 그분이 내게 ‘아들아 사랑한다.’를 적어달라는 것이었다. 글을 배우면 제일 먼저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단다. 나는 코끝이 찡했다. ‘아들아 사랑한다.’라고 쓰고 내친김에 ‘어미야 너도 많이 사랑한다.’라는 말도 적어 주었다.

이순혜 수필가
이순혜 수필가

살아오면서 할머니는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영감님에겐들 그런 말을 했으랴. 처음으로 써보는 그 글에는 수천, 수만의 이야기가 담겼을 것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짧은 문장이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한마디야말로 칠십 평생 다져진 참사랑이 아닐까.

목요일이 기다려진다. 그날은 아침부터 설렌다. 노인대학 학생은 내게 한글을 배우지만 나는 그분들에게서 인생을 배운다. 중국 북송시대 시인인 소동파의 시구(詩句)인 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을 만난다. 이곳이 바로 청산일 것이다. 다음 수업 시간에는 낱말 찾기를 해 볼 생각이다. 종이를 잘라 낱말 카드를 만든다. 카드 한 장에는 이렇게 쓴다. 아들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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