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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트럼프로 흔들리는 미국

김규종 경북대 교수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출간한 ‘문명의 붕괴(원제 Collapse)’를 읽고 깨우친 바가 많았다.서책의 부제(副題) ‘과거의 위대했던 문명은 왜 붕괴했는가’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要諦)를 적절하게 설명한다.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유일한 생명체로서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기획하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런 까닭에 지나간 날들은 화석화되거나 허울만 남은 빈껍데기가 아니라, 오늘을 인식하고 내일로 인도하는 나침반과 다르지 않다. 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서책에서 지은이는 사회가 붕괴하는 다섯 가지 요인을 거명한다. 환경 훼손, 기후변화, 적대적인 이웃의 존재, 우호적인 이웃의 지원중단이나 감소, 사회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그것이다.코로나19로 인한 확진자가 세계적으로 7천만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160만을 돌파했다는 우울한 전갈이 들려온다. 급속한 세계화의 물결로 전례 없는 바이러스의 재앙을 경험하고 있는 인류가 어떤 재앙과 마주할 것인지 예측 불가능하다. 사스와 메르스, 에볼라 바이러스의 창궐은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훼손으로 인한 인재(人災)였다. 코로나19도 다르지 않다.그러나 우리는 기후변화와 환경 훼손이 가져올 폭력적인 결과에 전연 무심하다. 스웨덴의 환경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정치가는 많지 않다.트럼프나 브라질 대통령 보우소나루 같은 자들은 툰베리를 모욕하고 무시하기 일쑤다. 집에 가서 친구들과 영화나 보라는 그들의 말투는 매우 공격적이고 안하무인이다.트럼프가 붕괴시키고 있는 것은 지구적인 차원의 환경과 기후문제만은 아니다. 이번 미국 대선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세계인에게 실망을 넘어 좌절과 충격까지 던져주고 있다.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의 용광로이자 인종전시장이며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양키 아메리카 제국의 민낯과 속살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자신이 패배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소인배 트럼프는 미국 사회의 근간 가운데 하나인 ‘승복(承服)의 문화’를 붕괴시키고 있다. 그는 2000년 대선에서 억울한 패배를 감수하고 승복했던 앨 고어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있다. 고어는 당시에 조지 부시 후보보다 전국적으로 54만 표를 더 얻었음에도 미국의 전통을 따랐다. 트럼프는 자명한 패배를 수용하지 않고 버팀으로써 미국 사회를 분열과 혼란으로 몰고 가고 있다.그는 다이아몬드 교수의 지적을 외면하고 있다. ‘사회문제(대선)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 그것이 핵심이다. 미국인들이 이번 대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그것이 미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살펴볼 일이다.트럼프의 행동이 2024년 대선을 노리는 정치적인 술수인지, 자신을 향하는 법의 칼날을 회피하기 위한 술책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세계 제1의 제국 미국과 미국인들이 감내해야 할 고난은 조만간 현실화할 것이다. 그의 깊은 성찰과 사유를 촉구한다.

2020-12-15

아, 울산대학교!

김규종 경북대 교수바다를 처음 보았던 것은 고2 수학여행 때였다. 동대구역에서 해병대 군용트럭이 우리를 포항에 자리한 해병대 숙소로 데려갔다. 해병대 1일 입소를 통해 호연지기를 키워주겠다는 교장의 의지였다. 그때 처음 갯내음을 맡고 나서 내가 한 일은 바닷물을 맛보는 것이었다. 바닷물은 짰다, 아주 심하게. 내게 바다는 그렇게 다가와서 지금까지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울산에서 3수로 괴로워하던 친구가 보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5월의 대학축제를 팽개치고 도착한 울산은 현대의, 현대에 의한, 현대를 위한 도시였다. 현대 직원용 아파트에서 이틀 묵으면서 방어진과 주전 바다를 보고, 경주를 경유(經由)해서 서울로 돌아온 일이 엊그제처럼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런 울산을 지난주에 다시 다녀왔다. 이번에는 목표지점이 울산대학교로 바뀌었다.어느 도시에도 그곳을 대표하는 대학이 있기 마련이다. 울산과학기술대학교(유니스트)가 있지만, 명실공히 울산의 간판 대학은 울산대학교다. 울산광역시에 거점 국립대학교가 없어서 서운하지만, 그래도 울산대학교는 분명 자타가 인정하는 울산의 명문대학이다. 차가운 초겨울 날씨를 뚫고 울산대학교 인문관에 도착한 즉시 ‘뭔가 이상한데’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일까?!복도와 화장실에서 감촉되는 싸늘한 냉기는 과객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대학을 방치(放置)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970년 울산공대를 모태로 시작된 울산대학교 50년 역사가 아련했다. 설립자인 정주영 회장의 배움을 향한 갈망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진 울산대학교. 고려대학교 공사판에서 부러운 눈으로 학생들을 보면서 향학의 꿈을 키웠던 청년 노동자 정주영.나는 한국의 유일한 기업가로 정주영을 꼽는다. “임자, 해봤나?” 대형 유조선에 물을 가득 채워 서산 간척지의 악명 높은 물살을 이겨낸 신화의 정주영. 그런 희대의 인물이 설립한 울산대학교가 위축되고 찌그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삼성의 성균관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울산을 대표하는 대학을 이렇게 홀대하는 것은 정말로 뜻밖이었다. 대학의 위축과 몰락은 도시의 위축과 몰락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킨다.위대한 현대의 신화를 학문과 교육에서 뒷받침해야 마땅할 울산대학교가 오후의 햇살 속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하루였다. 오늘날 사립대학의 발전과 융성은 재단의 풍부한 물적 지원과 대학 자체의 자율성과 교수들의 책임감으로 이루어진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 체제를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사립대학 재단들은 하루빨리 배워야 한다. 대학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다.너무나도 자명한 이치를 망각한 허다한 재단과 이사장과 총장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미래와 어린것들이 구슬프다. 그들에게 다가올 희망의 광명이 환하게 퍼질 날을 고대하면서 다시 한번 말한다. “현대여, 울산대학교에 투자를 아끼지 마시라!”

2020-12-08

문학은 우리를 위안하는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얼마 전에 정지창 선생이 ‘문학의 위안’이라는 서책을 출간했다. 조금 낯설지만 정겨운 느낌의 제목이 눈길을 끈다. “문학작품은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완화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미학적 구조물”이라는 설명이 와 닿는다. 그는 인생은 고해라는 자명한 사실을 위로하고, 삶에 지쳐버린 사람에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를 북돋우는 미학적 구조물로 문학을 포착한다.희곡은 물론 시와 소설마저 독자들의 외면을 받는 20세기 20년대에 문학에서 위안을 구하는 선생의 자세는 놀라운 것이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문학을 벗하는 한국인이 있는지 궁금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화기에 눈과 코와 얼굴을 밀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홍수에서 느닷없이 문학과 위안이라니?! 이런 담대한 기획의 이면에는 노장의 패기와 경륜이 담겨있을 것은 정한 이치다.3부로 구성된 서책 가운데 나는 1부에 등장하는 ‘고은과 그의 시대’와 ‘백무산이 만난 최제선’을 주의 깊게 읽었다.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여 억압과 폭정에 저항했던 고은 시인의 편력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펜’ 하나에 의지하여 불의하고 부당한 권력과 맞서 싸운 기개(氣槪) 높은 시인은 이제 코로나 블루 만큼이나 우울한 만년과 대면하고 있다.신화는 깨지게 되어있다지만, 이토록 허망하게 하나의 시대가 뭇매를 맞고 소멸하는 것은 참혹한 일이다. 일초 선생의 기행과 괴담은 익히 알려졌으나, 그것의 붕괴가 삽시간에 진행되는 바람에 우리는 거기 담긴 함의마저 제대로 읽지 못하고 눈감아버린 것은 아닌가! 시대가 사람을 낳고, 사람은 시대를 만드는 법!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하는 김상헌의 시조 가락이 가슴을 저민다.1990년 시집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로 노동시의 지평을 넓힌 백봉석. 부모가 지어준 ‘봉석’이라는 이름 대신 무산, 프롤레타리아로 자신을 자리매김한 시인. 그가 찾아낸 실패와 좌절과 회한의 인물 최제우의 본명은 최제선이었다. 어리석은 민중을 구하겠다고 새로 지은 이름 제우(濟愚)처럼 봉석도 노동자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산(無産)이란 이름을 가진다.“스스로 일어나 스스로를 구하라/ 그리 일어나 스스로 구하는 자 모두 한울이라/자신의 모가지를 허공에 베어버린/선생이여/수운 선생이여/어찌 허공으로 세상을 내리쳤더란 말입니까” (‘최제선’ 부분)백성이 스스로를 구하기를 바랐던 혁명가 최제우는 모가지를 길게 드리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자신의 존재를 넘고,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허공을 가르는 칼을 만들었던 최제우. 하지만 빈틈없는 세상은 그를 살해한다. 최제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는 백무산의 비애가 바로 곁에 있다. 무너지고 스러진 시인들의 형상에서 작가는 시의 위안과 우리가 떨치고 나갈 동력을 찾는다. 문학은 언제까지 우리를 ‘위안’할 수 있을 것인가?!

2020-12-01

시조와 하이쿠

김규종 경북대 교수하버드 대학교 한국학과에 재직하는 푸른 눈의 교수 말이 가끔 떠오른다. 하버드 한국학과 학생들의 시조 생산량이 한국의 모든 시조 시인의 생산량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시조를 짓는 일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어휘 운용능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단시조(평시조)는 3장 6구 45자 내외의 정형화된 형식을 가진다. 단시조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다소 길어진 형식이 장시조(사설시조)다.현대시조로 오면 이런 틀이 작동하지 않는다. 1968년 발표된 이호우의 ‘개화’ 같은 작품이 좋은 본보기다. 이런 방식으로 문학 장르는 탄생과 변화-발전 및 쇠퇴와 소멸을 거듭한다. 세상만사 모든 것은 태어남과 사멸을 운명으로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북아 세 나라의 정형화된 시가형식은 각기 다른 양상을 가진다. 5언절구(고시)나 7언절구(고시)의 한시(漢詩)와 우리의 시조, 그리고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비교해보는 일도 흥미롭다.고려 후기에서 조선전기에 형식이 마련된 시조는 적어도 600년의 역사를 가진다. 일본의 하이쿠는 마쓰오 바쇼(1644∼1694)가 기틀을 세웠으니, 350년 정도의 연륜을 가진다. 5-7-5 17음절을 바탕으로 창작되는 하이쿠에는 계절을 나타내는 어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예컨대 “두견새 운다 지금은 시인이 없는 세상”이라는 바쇼의 하이쿠에서 우리는 봄이라는 계절을 읽는다, 두견새(접동새, 자규)가 주로 우는 시절이 5-6월 봄철이기 때문이다.일본에서 하이쿠를 짓는 사람은 적어도 700만 이상이다. 세계적으로도 하이쿠는 널리 알려진 단시(短詩) 형식이다. 예전에는 하버드에서도 하이쿠를 많이 가르쳤는데, 요새는 한류의 영향으로 시조를 배우는 학생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시조의 본고장인 한국에서 시조를 즐겨 쓰는 사람들 숫자는 많지 않다. 시조를 쓰는 일이 대단히 어렵거나 불가능한 작업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 생각한다.시를 짓는 일은 나와 자연과 인연과 시공간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삶이 맞닥뜨린 지금과 여기를 생각하며, 주변의 자연과 관계와 인생 전반을 통찰하는 행위가 시를 짓는 일과 결부된다. 제한된 시공간에서 아웅다웅하면서 살아가는 눈물겨운 일상의 연속선에 인생은 자리한다. 그런 장구한 세월이나 한 대목이 툭, 소리 내며 끊어지는 관계와 사건을 맑은 눈으로 들여다보는 일이 시를 창작하는 행위에 내포돼있는 것이다.요즘처럼 세상 사는 일이 만만찮고 번거로우며 고달픈 시점에는 이런 작업이 여타의 수동적인 행위보다 유용하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텔레비전의 수용자가 되는 일보다 연필 한 자루 들고, 종이에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정갈하게 표출하는 행위는 내면의 평정하고 안온한 세계와 만나게 한다. 번다한 일상의 소용돌이를 잠시 피해서 자신의 세계로 침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를 일이다.누구나 한때는 시인이었고, 누구라도 시인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오늘 밤에는 하늘의 별과 달을 올려다보며 시상(詩想)에 문득 젖어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2020-11-24

왕가위와 ‘동사서독’

김규종경북대 교수‘아비정전’(1990)이나 ‘중경삼림’(1995) 같은 영화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당대 동아시아 영화 관객들의 우상으로 군림한 왕가위. 그는 1995년 ‘동사서독’으로 엇갈린 남녀의 인연과 애증을 무협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한국 관객이 기억하는 그의 대표작은 ‘화양연화’(2000)일 것이다. 21세기 들어 왕가위는 ‘2046’(2004),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8), ‘일대종사’(2013) 같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그의 영화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동사서독’은 허무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몽환적인 장면묘사가 곳곳에 나오고, 인물들의 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긴 했는데, 무슨 영환지 모르겠다고 하는 관객도 적잖다. 왕가위 사단이 대거 등장하는 ‘동사서독’의 고갱이는 부차적인 인물들의 몫이다.해마다 복사꽃 필 무렵 서독 구양봉(장국영)을 찾아오는 동사 황약사(양가휘). 그는 절친인 맹무살수(양조위)의 아내 도화(유가령)을 사랑한다.서독은 고향 백타산에 두고 온 여인 자애인(장만옥)을 잊지 못한다. 그의 형수가 되어 아이까지 있지만, 자애인 역시 서독을 그리워한다. 객잔에 모룡연(임청하)이 찾아온다. 모룡연은 황약사와 술을 마시며 담소하다가 어느 사품엔가 그의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망각하는 황약사.사막에 자리한 서독의 객잔은 이들 등장인물이 모여들어 각자의 사연과 인연을 풀어놓는 간이역 같은 공간이다. 이름만으로도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하는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 ‘동사서독’. 그래서 관객은 감독이 전달하려는 문제의식을 잘 포착하지 못한다. 배우들의 광휘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배경에 취해버리는 어리숙한 관객의 면모가 약여(躍如)하다.그들을 전경(前景)에 두고 홍칠(장학우)과 그의 아내, 당나귀 소녀(양채니)가 등장한다. 동생의 원수를 갚고자 하지만, 가진 것이 달걀 몇 알과 당나귀밖에 없는 소녀. 고향에서 남편을 찾아와 함께 가기를 고집하는 촌스러운 아내를 둔 살수 홍칠. 그는 소녀의 원한을 풀어주고 아내와 함께 사막을 건너 길을 떠난다.오래전에 자애인이 듣고자 했던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고향을 등진 서독은 홍칠이 떠난 다음 독백한다. “오래도록 사막에 살았지만, 나는 사막을 보지 못했다.” 서독의 독백에 사태의 핵심이 있다. 자애인이 죽은 다음 객잔을 불태우고 표표히 길 떠나는 서독.우리는 화려하고 은성(殷盛)한 사랑 이야기에 넋을 놓고 영화에 빠져든다. 왕가위는 위장막에 은폐된 사랑의 본질을 말한다. 당신을 좇는 인연에 따르라는 단출한 가르침이다. 소녀의 애끓는 호소를 물리치고, 아내와 함께 장삼이사의 길을 가는 홍칠.아마 그것이 왕가위가 바라보는 사랑의 종착점일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엇갈리고 애달파하면서 고통과 한탄, 연민과 그리움으로 괴로워하고 있는가! 그것을 놓아버리라고 왕가위는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붙잡을 수 없는 계절이 한사코 겨울로, 겨울로 달려간다.

2020-11-18

전태일

김규종 경북대 교수“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1967년 3월 17일 전태일이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함께 그를 옥죈 것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근로기준법과 업주들의 부당노동행위였다. 청계천에 있는 의류공장 보조 재단사와 재봉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동료 여공들의 가혹한 노동조건과 부당해고에 맞선다.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에 노동운동조직 ‘바보회’를 결성한다. ‘바보회’는 1970년 9월 ‘삼동회’로 거듭나면서 노동운동의 거점이 된다.1970년 11월 13일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근로기준법화형식’을 결행하려 한다. 평화시장 의료공장 업주들과 경찰이 이들의 시위를 저지하자 전태일은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른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하는 구호를 외친 전태일은 병원으로 이송되나 끝내 절명한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 일이다.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부당하고 불의한 세상에 죽음으로 항거한 그의 투쟁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1984)을 잉태하는 밑거름이 된다.“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밋빛 헛된 꿈을 싹둑 잘라/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미싱을 타고 장군같이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 ‘시다의 꿈’ 부분전태일이 분신한 지 15년 세월이 흘렀으되, 변하지 않는 노동조건과 생활고. 박노해는 “파리한 이마 위로 새벽별 빛난다”로 시를 맺으며 다가올 날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는 신자유주의로 전환하여, 오늘날 상당수 노동자가 외주기업 하청 노동자로 전락한다. 그 결과 지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10,173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해마다 1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죽음의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세상은 무너지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사람이 사람값을 온전하게 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재벌과 대기업을 위한 일회용품이 아니라, 세상을 구성하는 소중한 일원으로 수용될 때만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선진국 대열에 오를 것이다.전태일이 분신한 지 50년 세월이 흘렀다. 반세기 동안 우리가 이룩한 성취도 대단하지만, 그 뒤에서 소멸해간 숱한 생명과 인연과 관계를 생각할 때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그것을 어린것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우리의 시대적인 과제가 아닌가 한다.

2020-11-11

고독사

김규종경북대 교수코로나19가 계속되면서 고독사(孤獨死)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는 전갈이 들린다. 고독사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자택에서 사망한 사람이 상당한 시일이 지나서 발견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가족이나 친구는 물론, 이웃과도 왕래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홀로 임종을 맞이하고, 그 시신마저 뒤늦게 발견되는 고독사가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해마다 약 3만 명이 고독사한다고 알려져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부 차원에서 고독사 숫자를 집계하지 않는다.고독사 통계 대신 무연고(無緣故) 사망자 집계를 내고 있으며, 지자체가 지역의 고독사를 관리하는 형편이다. 2012년 749명의 무연고 사망자가 2018년에는 2천549명으로 늘어났다. 이런 추세는 코로나19로 나빠진 경제상황과 맞물리면서 증가추세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일본에서도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이후에 가족해체와 무연고자, 비혼자와 독신자가 급증하면서 고독사가 늘어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역시 비혼자와 미혼자, 저출산과 고령화 그리고 가족해체 등이 급속하게 진행됨으로써 고독사 숫자의 증가는 불가피한 사회현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일본의 20대 여성 고지마 미유가 펴낸 서책 ‘시간이 멈춘 방’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만22세에 유품정리와 특수청소 업무를 시작한 작가는 고독사한 사람들이 남긴 물건을 본떠 미니어처를 제작하여 고독사의 실체를 알리기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고독사 가능성은 열려 있고, 죽음은 불가항력의 자연현상임에 주목한 것이다.젊은 나이에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에 감동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낀다.미니어처 제작을 언제까지 할 것인지, 하는 질문에 대한 지은이의 답변이 인상적이다. “모든 이가 고독사와 자기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 되면 그만두지 않을까 싶다.” 고독사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현실임을 모두가 인식하게 될 때까지 고독사 관련 미니어처 제작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지난 10월에 문재인 대통령은 “기초 생활 수급자가 고독사의 절반을 넘고 있으며, 실태를 더 면밀하게 살피고 필요한 대책을 신속히 마련해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고독사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최하위계층 사람들을 따사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제도개선을 통한 원조방책을 세우는 일은 위정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본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2020년 3월 국회는 ‘고독사 예방과 관리에 관한 법률’을 마련했다. 이 법률은 사회문제로 대두된 고독사의 개념 정리와 실태 조사, 그리고 고독사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위한 제도 기반을 준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독사가 바다 건너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우리 앞에 제기된 시급한 사회문제라는 엄중한 상황인식을 공유함으로써 적극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고독한 죽음이 하루빨리 해결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0-11-04

가짜편지

김규종 경북대 교수며칠 전 삼성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했던 인물.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권력은 시장(市場)으로 넘어갔다”고 일갈했을 때, 시장이 뜻하던 바는 삼성. 삼성 총수가 6년 넘도록 투병하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10·26과 하루 차이라는 우연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절대권력도 엄청난 돈도 결국에는 죽음 앞에 무의미해진다는 자명한 사실.그들도 사랑 때문에 밤을 새우거나 가슴이 아파 몇 날 며칠 두문불출 괴로워한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 18년 권력을 휘둘렀던 전직 대통령과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면서 이 나라 삼척동자도 아는 재벌총수. 그들이 사랑하는 여인으로 번민의 밤을 하얗게 밝혔을지, 그것이 알고 싶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김수영 시인처럼 나는 왜 사소한 일에 관심이 있는지 모를 일이다.그의 죽음에 즈음해서 가짜편지가 시중에 떠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가 손수 썼다는 편지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아프지 않아도 해마다 건강검진 받아보고, 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많이 마시며”로 시작하는 장문의 편지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양보하고 베푸는 삶을 설교하는 대목도 이채롭다.사람의 가치가 비싼 옷과 자동차와 집이 아니라, 건강한 몸이라고 설파하면서 만족할 줄 알라고 편지는 충고한다. 중간 이후는 스스로 자책하면서 늙고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무한한 재물추구는 나를 그저 탐욕스러운 늙은이로 만들어 버렸어요. 내가 한때 누렸던 돈, 권력, 직위가 이젠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뿐….”자신의 성취와 소유를 이토록 강렬하게 부정할 줄 아는 비판능력의 소유자! 편지를 읽으면서 곳곳에서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 ‘좋아요’를 눌렀다. 젊은이들은 너무 황망히 서둘러 살지 말기를, 나이든 축들은 행복한 만년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 내가 알던 재벌총수 이건희와 너무도 다른 모습에 당혹스럽기도 했다.삼성은 편지가 가짜라고 확인한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아쉬움과 허망함이 동시에 몰려온다. 숱한 불법 탈법 무법 초법(超法) 위법을 감행하면서 거대재벌 총수로 등극한 사람이 저리 자상하고 따뜻한 인물이었다니, 하는 희열의 순간은 아주 짧았다. 만일 우리나라 유수의 재벌 가운데 누군가 저런 편지를 유훈으로 남기면서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빌 게이츠 같은 사람 말이다.가짜로 드러났지만, 많은 사람이 감동과 기쁨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도록 한 편지는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膾炙)될 듯하다. 우리의 확증편향과 선택적 기억을 단박에 날려버리는 청량한 한줄기 소낙비 같은 편지였으므로! 가짜도 이런 가짜는 닦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나뭇잎처럼 말이다. 하나의 시대가 조용히 저물고 있다. 21세기가 흘러간다, 붉게 물든 단풍잎처럼!

2020-10-28

신중년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나이 지긋한 축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가 ‘낭만에 대하여’ 일 것이다. 환하게 빛났던 한때를 추억하며 ‘다방’에서 중년 마담이 따라주는 ‘도라지 위스키’를 홀짝거리는 후줄근한 가수의 표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노래. 100세 시대라 불리는 요즘 50-60 나이대의 사람들을 신중년이라 부른다. 예전의 40-50대 정도와 비슷한 정열과 체력과 욕망으로 무장한 신중년. 그들을 노인이라 부르면 서운해하리라.인생의 절반을 살았고, 나머지 절반으로 달려가는 신중년. 이 무렵 누구나 생각이 많아진다. 젊어서 한칼 했던 사람일수록 뭔가 이루려는 의욕과 투지로 넘쳐난다. “나는 아직 한창이야, 내가 뭐 어때서! 이 정도면 쓸만하지, 안 그래!” 거울 들여다보면서 신중년 사내들은 혼잣말한다. 신중년 가운데 일부는 퇴직하여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이 되기도 하고, 일부는 아내 눈칫밥 얻어먹으며 산이나 공원을 떠돈다.신중년에 필요한 작업은 살아온 삶의 내력을 돌아보는 일이다.인생에 목적이나 의도는 없겠으나,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온 날들인지, 총체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은 남은 생을 요긴하게 살아가는 데 적실한 전제다. 주역 ‘계사편’에 “척확지굴 이구신야(尺8816之屈以求信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자벌레가 몸을 구부리는 것은 그것을 펴기 위함이다, 하는 뜻이다.성찰 없이 전진만 하는 삶은 피 끓는 청춘의 몫이지, 피가 식어가는 신중년의 몫은 아니다. 젊은 날 신중년을 매혹하고 열에 들뜨게 했던 오욕칠정(五慾七情)과 거리 두면서 세상과 사회를 돌이키는 작업이 소중하다. 그렇다 해서 반드시 이성적이거나, 매사에 사려와 냉정 그리고 신중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신중년에게도 어린아이 같은 맑고 투명한 치기(稚氣)와 장난스러움 그리고 패기가 요구되기도 한다.문제는 대다수 신중년이 너무 차갑고 계산적이거나, 반대로 너무 철이 없고 이기적이라는 데 있다. 양자의 조화로움을 유지하는 신중년은 나이를 먹어도 쉬 늙지 않을뿐더러, 고유한 매력으로 주위를 환하게 한다. 그러하되 신중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지 않음을 직시하면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다.생명 가진 모든 것은 소멸한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철칙(鐵則)이다. 주위를 돌아보시라. 얼마나 많은 요양원과 요양병원이 성업하고 있는지. 그곳에 갇혀있는 수많은 노년도 한때는 신중년의 시기를 거친 분들이다. 누구도 그곳에 포획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 허여한 일정한 육체와 정신을 탕진하고 나면, 어쩔 도리없이 여생을 거기서 보내야 한다.그곳에 가기 전에 골똘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의 삶은 어떠했으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관계와 인연은 어떻게 정리하고, 몸과 마음은 또 어떻게 갈무리할 것인지.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 차지다.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깊이 사유하는 신중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0-10-21

행복을 찾아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벨기에의 시인이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아동극 ‘파랑새’는 행복을 찾는 틸틸과 미틸 남매 이야기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찾아온 마술 할멈이 건넨 녹색 모자를 쓰고 파랑새를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얘기다. 병을 앓고 있던 할멈의 딸이 나으려면 파랑새가 있어야 하기에 그런 부탁을 한 게다. 남매는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행복의 궁전, 미래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파랑새를 구하지만, 마침내 자기들 집에서 파랑새를 찾는다.많은 사람이 삶의 목적을 행복에서 찾는 세상이다. 본디 삶에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운명처럼 주어진 삶의 조건을 의식하면서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살아갈 뿐. 더욱이 행복은 추상적이어서 계량하기도 힘들거니와, 사람마다 체감하는 영역과 강도도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는 행복을 입에 달고 산다. 왜 그럴까?!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부탄 영화 ‘교실 안의 야크’를 보고 나서 다시 행복을 떠올렸다. 영화는 20대 중반의 게으른 초등학교 교사 ‘유겐’을 주인공으로 진행된다. 부탄에서는 모든 교사와 의사가 국가 공무원이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가 제공된다. 사범대학을 마치면 의무적으로 5년 동안 교사로 근무해야 한다. 유겐이 마지막으로 발령받은 곳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외진 루나나 초등학교다.해발 4800미터에 위치하고, 56명 인구에 9명의 학생을 가진 루나나. 영화는 루나나에서 유겐이 맞닥뜨리게 되는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사건과 사람들을 잔잔하고 따뜻하게 풀어간다. 무엇보다도 마을 처녀 살돈이 부르는 ‘야크의 노래’와 노래에 얽힌 사연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루나나 사람들에게 우유와 고기, 털은 물론이려니와 연료로 쓰이는 똥까지 제공하는 야크. 야크는 그들에게 툰드라 유목민의 순록과 같은 동물이다.루나나 사람들이 가장 슬퍼할 때가 야크를 잡는 날이라 한다. 티베트로 팔아넘길 야크를 잡던 촌장이 가장 아끼던 야크를 죽여야 했던 사연을 품은 야크의 노래. 살돈은 마을에서 가장 늙고 순한 야크 ‘노르부’를 유겐에게 주고 잘 보살피라고 한다. 야크를 교실에 데려와 학생들과 함께 있도록 하는 유겐. 마을과 사람들에게 동화되면서 유겐은 자신이 목동이라 생각하지만, 촌장은 그를 야크라고 말한다.교실 안의 야크는 진짜 야크 ‘노르부’이기도 하고, 루나나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면서 존중과 사랑을 받는 유겐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겐은 겨울이 오기 전에 루나나를 떠나고 그토록 열망한 호주로 이주한다. 시드니 어느 술집에서 ‘야크의 노래’를 부르는 유겐. 우리는 유겐이 언젠가 루나나로 돌아가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촌장의 말이 폐부를 찔러온다. “부탄이 행복지수 세계 1위라는데, 젊은이들은 행복이 외국에 있다고 생각해서 여길 떠나요.” 행복을 찾아 떠난 틸틸 남매나 유겐이나 행복이 어디 있는지 훗날에야 깨닫게 되는 셈이다. 여러분은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는지, 궁금하다. 행복은 정녕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우리나라에 있는 것일까?!

2020-10-14

세계 한인의 날

김규종경북대 교수지난 10월 5일은 ‘세계 한인(韓人)의 날’이었다. ‘세계 한인의 날’은 거주국 내 재외동포의 권익신장과 역량강화, 한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 고양, 동포들의 화합 및 모국과 동포 사회의 호혜적 발전을 도모하고자 제정되었다. 세계 곳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한인 동포의 숫자는 700만 정도로 추산된다. 대구와 부산, 울산의 인구를 합친 정도의 한인들이 디아스포라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오랜 세월 한반도를 거점으로 살아온 한국인은 특정한 시기와 인물을 제외하면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전쟁은 숱한 인명 살상과 참화를 불러온다. 우리는 대륙(중국)과 해양(일본)으로부터 900여 차례 침략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대륙이나 해양으로 전쟁하러 나간 경우는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쓰시마 정벌과 나선정벌, ‘더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베트남전쟁 정도가 아닐까?!한인들의 외국 이주는 크게 네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1860년대 이후부터 1910년 사이다. 조선왕조의 가혹한 수탈과 억압을 피해 노동자와 농민들이 중국과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한다. 두 번째 시기는 일한합방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부터 8·15해방에 이르는 1945년까지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농민과 노동자들은 만주와 일본으로, 독립지사들은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지로 떠나갔다.세 번째 시기는 1950년대 초부터 1962년까지의 시기로 전쟁고아, 유학, 결혼 등의 이유로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했다. 네 번째 시기는 정부의 이민정책이 실행된 1962년부터 지금까지다. 대표적인 본보기가 분단 서도이칠란트로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한 일이다. 1963년에서 1977년까지 파견된 광부가 7천936명, 간호사가 1만1천57명으로 2만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머나먼 이역(異域)으로 떠나갔다.쾰른과 베를린에서 공부하면서 한인 간호사와 광부들과 만나면서 디아스포라의 실체를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환갑나이에 보훔에서 현역으로 탄을 캐던 초로의 광부와 ‘장기수후원회’를 열정적으로 돕던 쾰른의 간호사가 기억에 남는다. 1997년 문민정부가 ‘재외동포재단’을 설립하고, 1999년 국민의 정부는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공포하면서 재외 한인들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이런 선행작업에 기초하여 참여정부는 2007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10월 5일을 ‘세계 한인의 날’로 정하고 법정기념일로 제정한다. 아울러 10월 5일을 전후로 한 10월 3일 개천절과 10월 9일 한글날에 이르는 기간을 ‘재외동포주간’으로 설정-기념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 부는 케이팝, 케이방역, 영화와 드라마, 방탄소년단 등의 선도적인 수용자인 해외 한인들의 성실한 삶에 고개 숙인다.그러하되 ‘재외동포주간’ 첫날에 ‘개천절 집회’를 강행하는 자들과 경찰의 실랑이는 우울한 풍경이었다. 처참한 코로나19 상황에 정치적 목적을 탐하는 자들의 야욕이 아프게 다가온다.

2020-10-06

스가 요시히데 내각 출범을 보면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지난 9월 16일 아베 신조 후임으로 스가 요시히데가 일본의 99대 총리로 취임한다. 그는 2014년부터 지난 9월까지 관방장관을 역임하면서 아베의 하수인 노릇을 한 인물이다. 총리를 포함한 내각 인사를 보면 전임 아베 정권의 인물 8명이 고스란히 유임되었다. 스가는 아베의 동생을 방위상에 임명함으로써 아베 정권의 기조를 강화하는 태도를 보인다. 아베가 지금까지 보인 반한정책 철회는 당분간 없을 듯하다. 일제 강점기 징용공 관련 대법원판결 불복과 위안부 문제 처리에서 문재인 정부는 원칙적인 입장을 천명해왔다. 하지만 자국에 유리한 결과를 고집한 일본 정부는 소재-부품-장비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는 강경책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한일 관계는 역대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가는 이런 정책을 견지할 것이라는 평가가 주조다.일본 내정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 우려되는 바가 적잖다. 더욱이 일본은 중국과 함께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아닌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더라도 일본은 한반도의 명운과 긴밀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663년 백강 전투와 1592년 임진왜란, 1895년 을미사변,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는 모두 일본과 관련된 사건이다.올해는 일본 제국주의 압제에서 해방된 지 75주년이다. 그동안 우리는 세계 최빈국에서 3050클럽에 가입하는 쾌거를 이뤘고, 1998년에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이른바 ‘역동적인 대한민국’의 위상이 날로 웅혼해지는 시점이다. 반면에 일본은 2010년 중국에 밀려 세계 경제순위 3위로 내려앉은 후 과거의 영화(榮華)를 추억으로 간직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패전국가에서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던 일본의 추락은 숱한 평가와 해석을 낳고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일본의 정체(停滯)를 말하고 싶다. 일본 사회의 역동성이 약화하여 미래를 추동하거나 견인할 세력이 사라진 현실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온전한 정권교체는 2009년 8월 30일 민주당이 자민당을 대신한 2년의 경험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일본은 자민당 일당 독재라는 말이 나와도 유구무언이다.어느 나라든 대안세력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야당이나 시민사회단체라 부른다. 수권 능력을 갖춘 실력 있는 야당과 정부의 실정과 부패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시민사회의 존재가 나라의 명운을 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무력한 야당과 미약한 시민사회로 인해 미래를 열어나갈 구심력과 추동력을 스스로 상실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은 이것을 깊이 성찰하고 사유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강한 이웃이자 경쟁하는 국가로 재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선량하고 능력 있는 이웃이야말로 커다란 선물 아니겠는가?!

2020-09-23

누가 변화를 두려워하랴?!

김규종 경북대 교수언젠가 솔깃한 말을 듣고 실천에 옮긴 적 있다. 바라는 소원이 있으면, 마음속에 가두지 말고 날마다 글로 쓰라는 것이다. 간절한 소원을 위해 뛰어내리는 ‘와호장룡’과 달리. 혼잣말로 소원하는 것보다 소원을 글로 쓰면 손과 눈과 마음이 함께 움직여서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소원을 쓰려고 만년필도 사고, 공책도 준비했다. 그날부터 최소 3년 동안 날마다 소원을 썼다. 드물게나마 잊어버린 날이 있지만, 꾸준하고 진지하게 소원을 쓰고 또 썼다.소원은 소박한 것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문필가!’ 고작 12글자로 이루어진 소원을 가졌던 날들을 돌이켜본다. 20대 청춘의 나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로 시작하는 노래를 즐겨 부르곤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다시 거침없이 흘러도 검은 머리에 백발 돋아나도 사람 사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저 돈 많은 사람 숫자만 늘었을 뿐.그러던 어느 날, 소원 쓰기를 그만두었다. 그것은 도달할 수 없이 아스라한 저 너머의 신기루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면 세상이 변해야 한다. 그런 세상은 어느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왜냐면 변화가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언제나 변화와 개혁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은 없다.변화를 말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율배반이다. 나이 먹으면서 깨닫게 된 대목이다. 세상을 향한 손가락질과 비난의 눈길과 매서운 말길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 이토록 자명하고 단순한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사람을 한탄하고 시대를 나무랐던 자신에게 되묻는다. “너는 변하고 있는가?!” 고개를 흔들면서 자탄(自嘆)한다.자신의 정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당성을 믿는 사람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거처(居處)하는 세상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돌처럼 굳건하다. 지금과 여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항상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진 것, 지킬 것, 누릴 것 많은 사람은 변화를 싫어한다. 그래서 보수와 수구(守舊)는 변화와 거리를 둔다. 변화는 진보와 혁명의 편에 선 자의 전유물이다.세상과 다중(多衆)에게 향했던 손가락으로 내 가슴과 머리를 가리키면서 중얼거린다. ‘너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이유는 너무 자명하다. 나는 하나의 타자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고유한 사고방식과 습관과 가치관, 역사의식과 행동방식이 있다. 그것은 석영이나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흉중에 자리한다.어떻게 바꾸겠는가?! 그것을 바꾼다 해서 전혀 다른 꿈같은 세상이 열리기라도 한단 말인가?!세상을 바꾸려 했던 시절을 보내니 남은 명제는 단출하다. “그래도 나는 변할 것이다!” 변화를 향한 더운 열망이 오늘도 나를 재촉한다. 벌개미취가 봄처럼 환한 아침나절 지나간다!

2020-09-16

이리나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1990년 10월 3일 동서 도이칠란트가 재통일되면서 남북의 분단상황이 더욱 괴롭게 느껴지던 무렵의 이야기다. 유학의 피로와 염증이 있던 데다가, 육체적·정신적 소모가 상당해서 일상의 하중을 견디기 어려웠다. 항시적인 피로와 체중감소로 집 근처 내과를 찾았다. 50대 초반의 여의사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루마니아 태생이며 ‘이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 체호프의 ‘세 자매’에 등장하는 막내딸 이리나가 생각났다.무슨 일로 왔는지 물으면서 차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나의 신상 하나하나를 캐묻기 시작한다.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상당히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야경꾼으로 일하고 있는데, 낮과 밤을 바꿔 살아야 하는 일이어서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가깝게는 부모님의 건강 이력부터 멀게는 조부모에 형제들까지 소급해가면서 요모조모 캐묻는 이리나의 진지함과 성실함에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1시간도 넘게 걸린 질의응답을 거쳐 그녀는 일주일 후에 자신이 지정한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당시 나는 유학생 신분으로 한 달에 1만5천원 정도를 의료 보험비로 지출했다. 물론 보험은 3인 가족 전원에게 적용됐다. 종합검진을 받고, 약속한 날짜에 이리나의 병원을 찾아갔다.그녀는 간단한 결론을 준비하고 있었다. 양자택일하라는 것이었다.“학위논문을 포기하거나, 야경 일을 관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에 큰 사달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야경 일을 내려놓는 것이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안양에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것도 선택 밖의 일이었다.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이리나에게 물었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요?” 하는 질문에 그녀가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한다.소견서의 골자는 나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야간근무를 주간근무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나와 나의 두 번째 대면은 30분 정도로 끝났다. 소견서 덕분에 나는 야경(夜警)꾼이 아니라, ‘주경(晝警)’꾼이 될 수 있었다. 야경으로 학업을 유지하던 주변의 유학생들은 그런 나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대목은 다른 곳에 있었다.환자 한 사람과 1시간 이상 의료상담을 하면서 도이칠란트 의사들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고 신기했다. 지금도 한국인 의사들은 환자 1인에게 5분 이상의 시간을 허여하지 않는다. 내원자가 많을수록 의료비는 올라가고 그것이 고스란히 의사 개개인의 수입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가정의나 부자들의 개인 전담의가 아닌 담에야 어떤 한국인 의사가 환자에게 1시간의 상담과 진료시간을 베풀고 있는가?!그런 도이칠란트조차 의대 입학정원을 5천명 이상 늘리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구 천명당 의사 수가 4.6명이라는 도이칠란트의 의사들이 의대 정원확대를 반긴다고 한다. 우리는 2.3명 혹은 2.6명이라 한다. 한국의 의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2020-09-09

파업하는 의사들에게!

김규종경북대 교수코로나19가 창궐하는 시점에 광화문 광장에 모인 정계와 종교계 인사들이 목청껏 독재를 주장한다. 진정한 독재자들과 학살자들이 권좌에 앉아 있을 때, 저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던가?! 세계적인 유행병의 추상같은 위협 아래 근근이 살아가는 시민들 보란 듯 의사들이 진료를 거부한다. 의사들은 이것을 ‘파업’이라 부른다.파업은 사회적 약자가 노동조합 같은 조직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집단행동을 가리킨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권이 제법 신장한다. 군부독재 시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노조가 만들어지고, 노동자들의 인권과 권익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높아졌다.그러나 노동현장에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보장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국민의 정부’를 자처한 김대중 정권은 2000년 6월 3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롯데호텔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한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파업 당시 대테러 임무를 담당하는 경찰특공대를 파업 현장에 투입하고, 다목적 발사기, 테이저건 등 대테러 장비도 사용한다. 경찰은 헬기 6대로 유독성 최루액 20만ℓ를 노동자들에게 투하하기도 했다.반면에 2000년 봄 ‘의약분업’으로 촉발된 의사들의 파업에 대해 국민의 정부는 전전긍긍으로 일관한다. 의사들은 2000년에만 최소 세 차례의 전국규모 파업을 단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찰의 물리력이나 폭력이 행사됐다는 기록은 없다. 국가 공권력이 사회적 약자와 정치-경제적 강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본보기다. 오늘날 의약분업 체계를 부정하는 의사는 없다. 필수 불가결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정부가 의료 서비스의 지역 불균형 해소, 필수의료 강화,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8월 21일부터 대학병원 전공의와 전임의가 파업을 시작했다. 의사들은 9월 7일부터 전면파업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 2000년 봄날 경북대 도서관 앞에서 마주친 의대생이 생각난다. 파업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전단지를 내민 학생에게 나는 화를 내고 말았다.“1980년 서울의 봄과 대구의 봄에, 1987년 6월 항쟁 때 자네 선배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나?!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을 알고 있나?! 파업은 사회적 약자가 강자에게 생존권을 주장하는 거야.” 의사의 파업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확연히 다르다. 노동자는 자신의 지위와 목숨을 걸고 파업하지만, 의사의 파업은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의사는 환자와 함께해야 한다. 정부의 의료정책이 성에 차지 않아도 최고 지성인답게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해야 한다. ‘제네바 선언’에 기초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가운데 한 문장만 인용한다. “종교나 국적, 인종이나 정치적 입장, 사회적 신분을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하겠다.” 그만하고 환자 곁으로 돌아오시라!

2020-09-02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김규종 경북대 교수8·15 광복절을 빙자해서 반사회적인 ‘건국절’ 행사가 거행됐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부르는 일군의 무리가 광화문 광장에서 전광훈 목사를 선봉에 내세워 문재인 독재 운운하면서 나라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경찰 추산으로 2만, 주최 측 추산 4만이니까, 대략 3만을 참가자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대개 60대 이상의 나이든 축들이 성조기와 태극기, 게다가 일장기에 욱일기까지 들고 ‘문재인 아웃’을 외쳤다. 참으로 해괴한 풍경이다.광복절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300만에 이르는 활동가들의 피어린 독립운동을 발판으로 35년 만에 얻어낸 기쁜 날이다. 가슴 벅찬 감동의 날에 일장기와 욱일기를 흔들어대며 현 정부를 독재라고 외쳐댄 저들은 대체 누구인가?! 일장기와 욱일기를 흔들어댄 것은 일제 강점기의 토착 왜구들조차 꿈꾸지 못한 짓 아닌가. 그런 치 떨리는 짓을 당당하게 해대는 저들의 혈관에는 어느 나라 국민의 피가 흐르고 있는가!이른바 ‘광복절 집회’는 소위 보수 기독교 계열 종교인들과 전·현직 미래통합당 의원들과 극우 유튜버가 합세해서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일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면면은 다음과 같다. 차명진, 홍문표, 민경욱, 김진태, 박찬종, 김경재 등 전·현직 미래통합당 의원들과 전 자유한국당 당 대표 법무특보 강연재, 엄마부대 주옥순 대표, 신혜식 극우 유투버 등등.문제는 또 있다. 코로나19의 전국적이고 전방위적인 전파에 있다. 사랑제일교회와 관련한 코로나19 확진자가 875명에 달하는 상황인데도 일부 신도의 도주와 검거, 검진 거부에서 나타난 반사회적인 행위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미래통합당은 8월 16일 대변인 명의의 구두 논평에서 “정부-여당은 광화문 인근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람이 정부의 실정을 비판한 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국민이 가장 우려한 코로나19 확산 문제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 방역에 동참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했다. 한쪽에서는 비상대책위원장이 뙤약볕 내리쬐는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다른 한편에서는 극우적인 행태를 두둔하는 모순을 보인 셈이다.권력을 잡으려면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건전보수에서 극우까지 모두 포괄하는 보수정당은 지구상에 없다. 그것은 극좌에서 건전진보까지 전부 포괄하는 진보정당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권력을 얻으려면 무엇이 급선무고, 무엇이 해서는 안 될 것인지 앞뒤를 분명히 가려야 한다. 양손에 떡 들고 두 개 다 먹으려다가는 모두 잃기 마련이다. 대상을 정확히 선별하여 제대로 대응하고 행동해야 한다.지금은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이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전대미문의 난감한 상황에서도 권력만을 탐하는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행태는 국민의 비난을 받기 쉽다는 점, 그것을 간과하지 않기 바란다.

2020-08-26

종교와 과학

김규종경북대 교수K-방역으로 불리며 세계적인 찬사의 대상이었던 대한민국에 코로나19 대유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8월 4일부터 17일까지 2주 동안 신규 확진자 1천126명 가운데 65%에 이르는 733명이 지역 집단감염 사례로 보고되고 있다. 그동안 해외유입 사례는 190명 17%에 불과하다. 8월 12일 서울시 성북구 사랑제일교회에서 발생한 집단감염이 전국으로 확산하고 있다.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사랑제일교회 관련 확진자는 19일 낮 12시 기준 623명이다. 대구·경북의 최근 사랑제일교회 방문자는 80명이며, 대구에 주소를 둔 시민은 33명이다. 이 가운데 서구와 달성군 주민 2명이 확진자로 드러났다. 경북도민 가운데 교회 방문자는 47명이며, 상주, 포항, 영덕 거주자 5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8·15 광복절 집회에 대구·경북에서는 최소 수백에서 최대 1천여 명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집단감염이 가시화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보수 기독교 단체로 알려진 일군의 교회가 기본적인 방역수칙을 어기면서까지 집단감염을 자초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 과학의 발전과 비호 없이 종교의 융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48년 유럽에서 발생한 흑사병은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되었다. 신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려고 유럽인이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유대인학살과 마녀사냥이었다. 1450년부터 1550년까지 독일에서만 10만 명의 마녀가 화형을 당한다.신의 은총과 사랑으로 흑사병을 극복하려고 교회에 모여 기도했던 숱한 사람이 집단감염으로 죽어 나갔고, 그 후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것은 잘 알려진 바다. 과학은 자신의 이론이나 방법론이 잠정적이고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 예상하며, 그것이 완벽하거나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에는 나만 옳다거나 나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도그마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관찰과 실험, 반복-검증된 결과를 토대로 잠정적인 진실을 주장한다. 종교는 예배 공간과 교리 그리고 개인의 도덕률을 전제로 성립한다. 모든 종교에는 나름의 예배 공간이 있다. 그곳은 대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으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종교의 교리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차이를 드러낸다.개인의 도덕률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지만, 그 고갱이는 공동체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집단의 존립과 번영을 위해 다수 공동체가 희생을 감내하고 죽음조차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것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신앙의 자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타자의 파멸과 죽음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철회해야 마땅하다.종교와 과학은 인간 생활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과학에 기초한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전을 고려하면서 이제 종교도 타자와 공존하는 법을 심도 있게 숙고해야 할 때다.

2020-08-19

사학비리와 공영형 사립대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지난 7월 14일 한국인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한국 대표 사학 연세대의 비리가 교육부 감사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연세대 송도캠퍼스 전 부총장의 딸과 연루된 대학원 입시비리를 비롯해 학사비리와 회계비리가 민낯을 제대로 드러냈다. 이른바 명문사학 연세대의 비리가 이 정도라면, 여타 사립대학은 어느 수준일까, 모골이 송연(悚然)할 지경이다. 이참에 한국의 고질적인 사립대학 문제를 심도 있게 성찰하고, 대안을 마련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은 대학교육을 내팽개침으로써 전국에 수많은 사립대학이 세워진다. 오늘날 대학생들의 80%가 사립대학에 재학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립대학의 원조라 불리는 미국의 두 배 수준이다. 국가는 사립학교법인 설립자가 사회에 재산을 환원한 것으로 생각하여 설립자에게 각종 세제 혜택과 사학 경영권을 보장했다. 하지만 설립자들은 대학을 이윤 창출의 도깨비방망이 혹은 화수분으로 생각하여 사학비리가 양산되었다.사학비리가 창궐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70년 장구한 세월 이어진 부패의 구조화와 조직화가 문제다. 사학비리는 역사화-체계화되어 가보나 훈장처럼 대물림되고 있다. 둘째로 2005년 열린우리당(더불어민주당)이 개정한 사립학교법을 2007년 한나라당(미래통합당)이 개악(改惡)함으로써 사학의 효율적인 관리가 매우 부실하다. 셋째로 사학의 이해당사자들이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 종교계 등에 포진하여 부정부패 카르텔을 전방위적으로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립대학의 부정부패를 뿌리째 끊어내려면 국가가 주도하는 감사의 상설화가 절실하다. 그와 함께 사립대학을 건전하게 육성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공영형 사립대학은 여기서 출발한다. 사학을 건강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시의적절한 방안이 공영형 사립대학이기 때문이다.공영형 사립대학이란 국가가 대학 운영비를 50% 이상 책임지는 대신에 이사진의 50% 이상을 공익이사로 구성하여 반(半) 국립처럼 운영하는 제도를 말한다. 공영형 사립대학 제도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2017년 7월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계획’에 포함된 사업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자 100대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고등교육의 공공성 확보, 대학서열 구도 완화, 지역균형발전 등을 위해 논의 중인 대안이기도 하다.그러나 대통령의 임기가 3년이 지났음에도 공영형 사립대학 제도는 기획재정부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2018년에는 교육부가 요구한 812억 예산 전액을 기재부가, 2019년에는 87억 증액요구를 국회가 모두 삭감해버린 것이다. 올해는 교육부 주도로 상지대, 평택대, 조선대 등이 공영형 사립대학 연구에 돌입하였다. 기재부도 내년 예산안 확정 이전에 교육부와 예산편성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낭보(朗報)도 들려오고 있다. 3050클럽에 속한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위상과 미래기획을 위한 공영형 사립대학 제도 도입은 국가균형발전과 부합하는 좋은 방안이 아닐 수 없다. 관계부처의 적극적인 대처를 기대한다.

2020-08-12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얼마 전에 영화 ‘1987’을 다시 보았다. 1987년 6월항쟁 30주년을 맞이하여 당시 상황을 정면으로 다룬 장준환 감독의 ‘1987’은 전국관객 723만을 모았다. ‘1987’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하다가 목숨을 잃은 서울대생 박종철을 전반부에서 다룬다. 후반부에서는 1987년 6월 9일 연세대 정문에서 시위하던 청년학도 이한열의 투쟁과 죽음을 보여준다.불과 30년 전에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대학생 살해사건이 새삼 끔찍하게 다가왔다. 대공업무를 전담하는 경찰관들이 종철이 머리를 욕조에 강제로 밀어 넣어 질식사시킨 희대의 고문 살인사건. 45도 이상 각도로 최루탄을 발사해야 함에도 수평으로 직격(直擊)하여 한열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전투경찰.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삼복염천에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다.‘정의’라는 어휘가 반복되는 장면에서 사유가 흔들리곤 한다. 5공의 전두환 일파가 내세운 ‘정의사회구현’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명칭이 왜 자꾸 겹치는지! 분명히 그들은 한글을 공용어로 쓰는 한민족의 같은 일원이었으나, 그들의 정의는 너무도 달랐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다. 최고 권력자와 하수인들의 정의와 천주교 신부들의 정의가 왜 그토록 다른지, 영화는 묻는다.권부의 기득권 수호를 빨갱이 사냥으로 포장하면서 부하들을 다그치는 박처원 치안감의 종횡무진 활약상은 1980년대의 무차별적인 광기를 몸서리치게 재현한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 나라, 벌써 김일성이한테 멕혔어야!” 하고 강변하는 그의 서슬이 하늘을 찌른다. 당대 2인자로 불렸던 안기부장 장세동의 위세도 두려워하지 않는 박처원. 1950년 월남하여 대공업무의 전설이 되었지만, 그 역시 좌우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로 보이는 인간.그들에 맞서는 함세웅과 김승훈 신부, 김정남과 이부영의 정의는 민초(民草)들의 바람과 직결돼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전말(顚末)을 밝힘으로써 사회정의를 바로 잡겠다는 그들의 신념은 베드로의 반석처럼 단단하다. 영화가 흥미로운 까닭은 이들 양대 세력 사이에 자리한 이름 없는 소시민들의 행적이 곳곳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편에 서는가, 그것이 정의의 궁극적인 향배(向背)를 결정할 터였다.민주주의는 일상적인 국민투표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여론의 형태로 발현된다. 그래서 구시대의 반민주적인 정권과 앞잡이들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거나, 여론조작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매주 발표되는 대통령 지지율이나, 여야의 지지율도 여론의 동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2016년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 ‘군주민수(君舟民水)’는 의미심장하다.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인데, 물은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요즘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명시적인 대결과 충돌이 화제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정의와 권력 그리고 민주와 독재의 고갱이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볼 일이다.

2020-08-05

무엇을 바꿀 것인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고교 시절 내 마음을 움푹 패게 한 구절이 있다. “만상의 본질은 부패에 있다.” 팍스 로마나를 구현한 5현제 가운데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말이다. ‘페이터의 산문’이란 제목으로 국어책에 실린 이양하 선생의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극한 권력을 누렸으나, 세상만사 덧없음과 금욕주의를 설파한 아우렐리우스. 그가 만상에 담긴 허망과 사멸의 본질을 논하면서 구체화한 어휘가 ‘부패’다. 부패는 생로병사의 순환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방편(方便)이다. 부패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자연계의 사멸과 생성은 불가능하다. 백골이 진토(塵土) 되는 일이 없어, 시신이 세상을 하염없이 떠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생명 탄생을 헤살 놓거나, 원천 봉쇄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 현현(顯現)한 모든 것이 짧은 시간에 퇴락하여 부패로 귀결됨을 지적한 황제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우리는 영생불사의 존재로 자신을 사유한다. 나에게는 죽음이나 소멸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미망(迷妄)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치열하고 당당하며 아등바등 이를 악문다. 한 걸음 물러서면 벼랑 끝이라는 생각에 하나같이 앙앙불락(怏怏不樂)이다. 거기서 온갖 소음과 원망과 아귀다툼과 갈등과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발원한다.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것처럼 ‘호모 데우스’가 창궐하는 21세기다. 사멸할 운명의 호모사피엔스가 종언을 고하고, 영생불사하는 ‘데우스’로 인간이 탈바꿈하리라는 불길한 예언. 분명코 인간은 ‘길가메시 프로젝트’로 500세 인생의 도전에 성공할 것이다. 불멸하는 신의 반열에 오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고 행복할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하지만 부패하지 않는, 변하지 않는, 언제나 똑같은 인간이란 얼마나 큰 재앙일 것인가?!‘세상을 바꾸는 문필가’로 평생을 살고자 했던 패기만만한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은 점은 내가 언제나 옳은 것도, 진실한 것도, 선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너무도 많은 허점과 오류, 극복 불가능한 탐욕과 분노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삶을 돌이키면서 그런 미망을 던져버렸다.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세상을 바꾸려면, 사람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 외려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 사람을 잃고 나서, 관계가 파탄 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우치게 된 명징한 사실이 그것이다. 누구도 타인을 바꿀 수 없다.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의 표정 하나하나 살피고, 그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도 늦게 깨달은 것이다. 잃어야 얻는다는 단순한 이치 하나를 깨닫는 대가(代價)가 자못 컸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고쳐 쓸 수도, 바꿀 수도 없다.” 아직도 세상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하되, 세상은 나름의 법칙으로 돌아간다. 더디고 꾸물거리는 느림보의 법칙으로!

2020-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