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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연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까까머리 학창시절 피천득의 ‘인연’은 언제나 가슴 통증으로 다가왔다. 몇 번을 읽어도 그와 아사코의 가슴 시린 사연은 익숙해지지 않는 생채기였다. 어린 아사코와 대학생 아사코, 그리고 점령군의 아내가 되어버린 아사코. 피천득에게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좋아하게 해준 연두색이 고왔던 우산 이야기는 지금도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그와 아사코의 세 번에 걸친 만남은 악수도 없이 절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뾰족한 지붕에 뾰족한 창문이 달린 집에서 함께 살자 했던 아사코. 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허망하고 황망하다. 인연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불가(佛家)에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緣)을 묶어서 인연이라 한다. 대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이 관계 맺는 것을 인연이라 말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설정과 진행 그리고 결과를 통칭해서 인연이라 한다.인터넷에 올라온 어느 무녀(巫女)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신내림으로 강신무가 된 그녀의 글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생과 이생 그리고 후생에 대한 말이 그러했다. 원수지간의 전생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생에서 구현된다는 말. 왜 하필 전생의 원수가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해로(偕老)를 함께 하는 것일까?!붙잡아도 떠날 인연은 작별을 고하고, 아무리 험하게 대해도 남을 사람은 옆에 남는다는 글을 읽으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그래서 그녀는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고 한다. 문제는 거기서 출발한다. 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내가 싫은 사람 막아서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 아닌가. 마치 대각(大覺)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무연(無緣)하게 생각을 전달하는 무녀의 심사가 문득 궁금하기도 하다.사람 하나 보내는 일은 세상 하나와 작별하는 것과 같다. 사랑을 잃은 기형도가 ‘빈집’에서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하고 울먹이는 것은 공감이 간다. 그녀가 떠난 빈집의 문을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잠그는, 홀로 남겨진 시인의 고독과 황량한 내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사내의 어깨 주위로 켜켜이 내리는 어둠이 눈에 밟히는 듯하다.하지만 그들의 인연은 필시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의지나 욕망이 다른 사람의 그것과 충돌하고 파찰음을 낼 때,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난파할 때 인연은 작별을 고한다.하나의 인연이 혹은 사랑이 또는 관계가 지나가면 크고 작은 흔적이 나이테처럼 생겨난다. 말 못 할 마음으로 흔적과 상처를 돌이키다 보면 그래도 다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채우기 시작한다. 영원한 작별 후에도 어디선가 새로운 생은 시작되는 법이므로.인연이 다한 사람 하나 보내고 한밤중 어둑한 방 그늘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문득 ‘인연’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야! 어디서 무얼 하든 부디부디 행복하기를!

2020-05-27

사람과 사람 사이

김규종경북대 교수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격의(隔意) 없는 유대관계에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무엇보다 ‘격의 없는’이라는 어휘가 좋다. 양자가 속마음을 툭 터놓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이나 마음의 장벽이 없는, 문자 그대로 흉허물없이 속내를 모두 드러낼 수 있는 사이가 격의 없는 관계다.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을 우리는 친구나 동지라고 부른다.하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현대 사회에서 격의 없는 유대관계는 희귀하며, 이런 현상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집단 따돌림으로 자살을 택하거나. 히키코모리로 자발적인 유폐를 선택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러하다. 혼술과 혼밥과 혼산을 생각해도 날로 소원(疏遠)해지는 인간관계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을 위로하고 대화상대가 돼주는 인공지능 로봇이 나오는 세상이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격의 없는 사이가 아니라면 적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필수적이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통해 네 가지 인간관계를 조명한다. 45센티미터 이내의 친밀한 거리 (포옹과 키스), 45∼120센티미터까지 개인의 거리 (악수), 120∼360센티미터까지 사회적 거리 (모임), 360센티미터 이상 공적인 거리 (관람).우리가 누군가와 친구나 연인 혹은 지인 관계를 맺을 때 순서를 생각해보면 홀의 지적에 자연스레 동의하게 된다. 멀리서 바라만 보다가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거리를 좁히고, 악수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소수의 인간은 포옹과 키스하는 친밀한 거리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친밀한 거리로 넘어가는 경우는 영화에서만 가능하다.정보통신이 현저히 발달한 현대에서는 인터넷상의 거리도 문제가 된다. 누군가 잘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무단으로 틈입(闖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면서 이런저런 댓글을 달기도 하고, 무언가 충고하는 글을 남기기도 한다. 글 쓰는 본인이야 스스로가 대견하고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읽는 사람에게는 고통이자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뭐지, 또 들어왔나, 왜 저런 거야, 누구 허락을 받았나?!’본인이야 격의 없는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싶기도 하겠지만, 상대방은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면,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것이 예의고 염치다. 격의 없는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옳다. 싫다는 사람을 끈덕지게 추적할 때 인간관계는 피로와 짜증과 분노로 아수라판이 되고 만다.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것은 옛말이다. 그렇게 해도 괜찮았던 시절은 완전히 지나갔다. ‘스토커 처벌법’이 그래서 나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스토커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인터넷상에서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댓글로 얼마나 많은 연예인이 고통받고 있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적절한 거리를 생각했으면 한다.

2020-05-20

5·18 광주항쟁 40주년에 부쳐

김규종 경북대 교수해마다 5월이면 조기(弔旗)를 내걸었다.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조기를 걸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후에는 4월에도 조기를 내다 걸었다. 작년에는 전남대 교환교수로 파견 나가는 바람에, 올해는 코로나19로 정신 놓는 바람에 4월의 조기게양은 무산됐다. 하지만 5월 광주를 어찌 잊을쏜가?! 더욱이 올해는 광주항쟁 40주년 아닌가!작년 5월 17일 저녁에 광주 국립묘지를 찾았다. 25년 만에 찾은 망월동 묘역은 예전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학회에 갔다가 후배들과 함께 김남주 시인 묘지 앞에서 묵념한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으나, 장소를 찾아내기 어려웠다. 전남대 철학과 김양현 교수께 문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5·18 항쟁으로 산화하신 분들과 다소 떨어진 곳에 잠들어있는 김남주. 나는 그이가 없는 광주와 5월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그날 밤 광주의 옛 도청과 금남로를 떠돌면서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전남대로 파견 나온 이유는 5.18 광주항쟁 때문이었다. 죄의식과 부채의식이 40년 세월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까닭이다.부산 출신 대학원 선배는 1983년 매운 겨울, 광주와 남도를 떠돌다가 귀환했더랬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으면서도 광주를 찾아갔던 그의 심사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김남주의 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읽으면서 시대의 비극과 부조리를 깨달아갔던 시절. 60년대 김수영, 70년대 김지하, 80년대 김남주로 이어지는 시대의 저항자들로 희미하게나마 빛났던 시간대.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 아니라, 3김 시인’이었다. 망월동의 시인은 예전처럼 말이 없었다. 5월 3일 전남대 인문대 1호관에서 있은 ‘김남주 기념홀’ 개관식에서 환하게 웃기만 하고 침묵했던 것처럼.1980년 5월 광주에서 40년 세월이 흘렀다. 내 머리에도 허옇게 서리가 내렸다. 기나긴 세월에 우리는 87항쟁과 직선제 쟁취, 1998년 평화적 정권교체, 2017-18년 촛불항쟁과 탄핵을 넘어서 3050클럽 가입까지 수많은 성취를 해왔다.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광주를 모욕하는 극우주의자들의 망동을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 발포 책임자는 반성하는 기미조차 없다.진정한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은 발포 책임자와 그 후예가 광주항쟁에서 산화해간 영령들과 유가족에게 석고대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40년 세월 광주와 광주 시민들을 능욕한 극우주의자들을 정당하고 엄중하게 징벌해야 한다. 광주와 광주항쟁의 역사를 더럽히도록 더는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어린것들과 그들이 마주할 미래와 미래기획을 위해서도 광주와 광주항쟁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잘못된 과거와 작별하려면 대낮처럼 깨어있는 정신으로 과거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악마 같은 살인자들과 그 후예가 다시는 설레발 치지 못하도록 역사의 관에 ‘탕탕’ 소리 나게 대못을 두들겨 박아야 한다. 미래는 과거의 처절한 기억과 살을 도려내는 고통의 환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광주항쟁 40주년의 교훈이다.

2020-05-13

BBC가 민족 정론지?!

김규종 경북대 교수한국인들 사이에 ‘BBC가 민족 정론지’라는 말이 유행한다. 코로나19가 지구촌 전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외국의 주요언론은 한국정부의 민주성과 투명성 그리고 강력한 진단역량에 주목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반면에 ‘조중동’ 같은 신문은 ‘우한 코로나’와 ‘중국인 입국금지’ 같은 후진적인 행태로 일관해 수준 높은 독자들의 질타(叱咤)를 받았다. 아직도 극우 유튜브 수용자들과 낙후지역 독자들은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한국 독자들이 외신을 신속하게 번역하여 SNS에 올리는 일이 일상화된 세상에 우리는 살아간다. 정보통신 강국의 국민답게 한국인들은 세계적인 문제와 동향 그리고 사실관계를 판단하면서 더는 보수신문을 믿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강화된 시기는 2019년에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를 시작했던 때로 알려져 있다. 한국정부가 강력한 대응에 나서자 보수지들이 앞다투어 일본에 고개 숙이라는 논조(論調)를 펼쳤던 그때 국민은 대거 그들을 버렸다.2020년 한국의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세계 42위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 31위를 기록했지만,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50위, 2014년 57위, 2015년 60위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70위로 역대 최하위를 기록해 언론자유가 후퇴한 대표국가가 되었다. 한국의 보수언론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선진국’ 미국과 일본의 순위는 45위와 66위다.언론자유지수가 전임정권과 비교해 현저히 상승하고 있지만, 언론인들의 수준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인 듯하다. 그 결과 ‘BBC 민족 정론지’ 주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참 우울한 일이다. MBC 피디 출신인 정길화 아주대 교수는 한국언론의 문제를 조급성, 전문성 부재, 정파성(政派性)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남보다 앞서 기사를 송출해야 한다는 성과주의가 만들어낸 조급성은 기사의 신뢰도를 낮춘다. 인터넷상에 올라온 기사에서 우리는 비문(非文)과 틀린 맞춤법으로 범벅된 경우를 너무도 자주 찾아낸다. 전문성 없이 글을 쓰다 보니 기사의 내용과 질이 저급할 수밖에 없다. 저질 유튜브나 찌라시 수준을 넘지 못하는 기사도 적잖다는 얘기다.정파성은 정당과 인물 그리고 지역을 특정해서 당위론적으로 기사를 제작하는 행태를 말한다. 기자가 속한 집단과 출신에 기초하여 색안경을 끼고 대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나날이 강고해지고 있다. 공정과 신속, 정확성과 무정파성을 전제로 해야 함에도 언론사와 종사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론의 소명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닌가.외신이 늘 옳다는 주장은 당연히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모든 나라에는 고유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민족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언론마저 해외직구 해야 하나’라는 자조적(自嘲的)인 말이 떠돌고 있음은 우려스럽다.그러하되 한국에도 BBC 같은 정론지가 나와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2020-05-06

지구의 날과 코로나19

김규종 경북대 교수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다. 심각하게 오염된 지구환경을 돌이켜봄으로써 인간과 지구의 공동 운명체를 각성하도록 인도하는 날이다.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해상원유 유출사고를 계기로 촉발된 지구의 날이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된 원년은 1990년이라 한다. 그해 150여 나라가 참가하여 지구를 보호해야 인류도 생존해나갈 수 있음을 확인한다.코로나19로 인해 인간활동이 크게 제약을 받자 지구대기가 맑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4월 10일 CNN에 따르면, 극심한 미세먼지로 악명높은 인도 북부 펀자브주 주민들에게 160㎞ 이상 떨어진 히말라야산맥이 보인다고 한다. 코로나19의 세계적인 유행에 따라 인도 정부는 3월 22일 이동제한령을 발령했다. 차량운행이 대거 줄고,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그 결과 대기 오염도가 최대 44% 감소함으로써 설산(雪山)이 맨눈으로 보인 것이다.이런 현상이 인도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각종 영상은 세계 곳곳의 하늘이 맑아졌음을 보여준다. 우리도 올해는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공습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오늘날 일부 식자들은 21세기를 ‘인간세’라 규정한다. 인간으로 인해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다. 그것을 코로나19가 잠시 멈춰 세운 것이다.노자는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갈파했다. 사단논법은 당연히 사람은 자연을 따르는 것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자연은 스스로 그리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지구나 자연환경과 똑같은 의미는 아니겠으나, 인위적인 행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폐해를 강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인간욕망의 무한대를 긍정하고 성장해온 현대사회의 맹점을 지적한다.제어되지 않은 욕망의 정점이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으로 극대화되고, 그것은 쓰레기로 전락할 숱한 물품으로 이어진다. 주위를 돌아보면 우리는 거대한 쓰레기더미에 포위돼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하며 쌓아둔 물건이 얼마나 많이 나뒹굴고 있는가.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주창한 데에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사람도 과식하면 속이 더부룩하고 고통받기 마련이다. 대략 60조 톤으로 측정되는 지구도 인간으로 인해 끝없이 고통받고 있다. 자연계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 멸종위기종은 얼마나 많은가?! 누가 그것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있는가. 현대판 도도새라 할 수 있는 수많은 생명의 숨통을 옭아매고 있는 인간의 거칠고 우악스러운 탐욕이 이제는 멈추었으면 한다.얼마 전 마당에서 일하다가 슬며시 담장 아래로 모습을 감추는 황구렁이를 보면서 한편으로 놀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하, 아직은 살만한 모양이구나, 생각한다.지구의 날에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상상한다. 코로나19가 인간과 지구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듯하여 입가에 역설(逆說)의 미소가 감돈다.

2020-04-22

선진의 조건

김규종 경북대 교수한국인들은 요즘 ‘국뽕’에 취한 상태다. 날마다 외신이 전하는 코로나19 소식 때문이다.세계 전역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유일한 예외가 대한민국이다. 한국산 진단키트를 공급해달라는 국가가 130개가 넘고, 우리의 방역방식을 공유하겠다는 나라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시자 빌 게이츠도 4월 10일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코로나19 대응에서 한국이 최고라고 찬사를 보냈다.코로나19가 창궐하던 얼마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극적인 반전에 환호작약하는 것은 이 나라 백성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동시에 저명 학자들과 언론들은 앞다투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상을 예견하느라 여념이 없다.우리가 지금까지 떠받든 ‘선진국’들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판국이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의 상황에서 선진의 조건이 무엇일까, 문득 생각한다.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이라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왔다. 우리의 사유와 행동과 미래기획과 꿈의 절대적인 기준은 늘 선진국이었다. 우리의 기준인 KS는 그저 그런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숱한 방송사와 기자들은 ‘미국과 유럽, 일본’ 같은 선진국 타령을 되풀이하고 있다.그런데 하루아침에 선진국들이 대한민국을 배우겠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들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던 기자들은 어안이벙벙한 모양이다. 세계 각국의 수뇌가 한국 대통령에게 경쟁하듯 전화하고 원조와 조언과 협력을 구하는 상황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그래서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나가는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숙고하는 것이다.생존을 넘어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보장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생명과 안전에 필수적인 보건의료는 물론이려니와 교육과 계몽, 민주주의, 과학기술, 법과 제도, 문화와 예술, 교양과 문명 같은 요소가 선진의 조건으로 거명 가능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보건의료 부문에서 세계적인 공인을 받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지구최강 미국마저 허망하게 무너지는 판국에!코로나19의 침공과 미국의 붕괴는 의료 민영화가 주범이다. 오바마케어를 무산시킨 트럼프가 붕괴의 수괴지만, 미국의 의료보험체계는 부자를 기준으로 한다.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니라, ‘유전생존 무전죽음’이란 등식이 성립한다. 실제로 미국 코로나19 사망자의 7할이 흑인이다. 빈자는 죽어 나가고 부자만 살아남는 나라를 우리는 선진국 운운하며 천조국으로 모셔왔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이제는 국민을 위한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우리가 세계 최강이자 선진이라 자부해도 틀리지 않을 성싶다. 문제는 사회의 여러 부문과 분야에서 선진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리라. 이래저래 유쾌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2020년이다.

2020-04-15

긴급재난지원금

김규종 경북대 교수누구에게나 남다른 기억이 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져도 기억의 사진첩에서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경험은 삶을 풍성하게 인도한다. 요즘 정부와 지자체,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긴급재난지원금’은 오래전에 잊힌 사건을 소환한다.러시아 문학을 연구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환경 때문에 서도이칠란트로 유학을 가야 했던 시절의 일이다. 소련과 중국을 적성국(敵性國)으로 분류하여 학문을 위한 최소한도의 자료마저 차단함으로써 반공을 넘어 멸공 공화국을 꿈꾼 박정희-전두환 시대. 그런 이유로 적잖은 연구자가 일본이나 미국, 유럽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던 암흑기.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한반도가 세계의 관심을 받았던 무렵의 이야기다.쾰른에서 어학과정을 마칠 무렵 아이가 태어났다. 당시 도이칠란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상태였다. 서도이칠란트에 주둔한 미군이 20만을 헤아리고, 국민 1인당 GDP가 2만 달러 부근이었던 때였다. 그런 나라가 10만이 넘는 외국 유학생들을 무상으로 교육하고 있었다. 피부색과 국가와 언어를 불문하고 서도이칠란트 학생과 외국 유학생을 똑같이 대우한 나라.아이가 태어나자 1년 동안 양육비(Erziehungsgeld)로 다달이 600마르크 (한화 27만원), 어린이수당(Kindergeld)으로 50마르크를 주는 것이었다. 속지주의를 채택한 나라의 법률에 따라 아이는 자동으로 서도이칠란트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노동자 자식이든, 재벌 자식이든, 외국인 아이든 간에 똑같이 양육비와 어린이수당을 준 서도이칠란트. 이런 혜택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더욱 큰 놀라움은 베를린에서 이어진다.지도교수를 찾아 1989년 초에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나는 그해 여름 중소기업 ‘게오르크 렘케’에서 6주 동안 육체노동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루 6-8톤의 물량을 컨베이어 벨트로 처리하는 중노동이었다. 거기서 나는 분단상태의 서베를린 시민에게는 양육비가 2년간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구청의 양육비 담당자에게 에이4 용지 1매 분량의 편지를 쓴다.‘서도이칠란트의 학문발전을 위해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게오르크 렘케’에서 노동한 나에게 양육비를 지급해달라’는 내용이었다. 2주 후에 나는 ‘미지급된 양육비를 다달이 나의 계좌로 송금하겠다’는 담당자의 답장을 받는다. 600마르크의 양육비를 아무 조건 없이 추가 지급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참, 대단한 나라로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0만이 넘는 외국 유학생들을 공짜로 교육하고, 각종 혜택을 자국민과 똑같이 베푼 분단의 나라 서도이칠란트. 얼마 전 통일 도이칠란트는 코로나19로 인해 곤경을 겪는 내외국인에게 긴급재난지원금 5천유로(한화 673만원)를 지급했다. 지급에 걸린 시간은 단 사흘. 포퓰리즘 얘기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국가다! 예전의 특별한 기억을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나의 조국에서도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커지는 봄날이다.

2020-04-08

일본의 두 얼굴

김규종 경북대 교수2020년 동경 올림픽이 1년 연기되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와 일본 정부는 2021년 7월 23일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로 했다.코로나19의 세계적인 대유행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강행을 주장한 아베 정권에게 적잖은 타격을 안겨준 결정이라 하겠다. 중국에서 발원한 코로나19가 세계 전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지금도 일본열도는 무풍지대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의 대응전략이 얼마나 올발랐는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혹자는 예정대로 올림픽 개최를 해보려는 아베 때문에 코로나19 검진 수치가 지나치게 작다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일본인들의 거리 두기와 손 씻는 습관 덕에 바이러스 전파가 미미하다고 주장한다. 아베 정권의 얄팍한 정치 술수를 경원시하는 한국의 호사가들은 일본의 코로나19 진행이 어떤 양상을 보일 것인지, 적잖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반면에 지난 2월 중순 일본인들의 트윗은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 몇 가지 인용한다.“신형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격리자에 생활비 지급…. 외국인 포함 = 한국”“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국이 어쩌고’를 해온 일본인과, 그것에 의문을 품지 않고 오로지 동조하며 ‘일본 스고이(대단해)’를 해온 일본인. 자기 발밑을 보지 못한 것이다, 라는…. 당연하지만, 누구를 리더로 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한국은 여기서 국민을 버려두면 데모 나지요. 일본은 아무리 국민을 버려도 자민당 압승이니까.”외국인까지 포함하여 코로나19 감염자를 찾아내서 치료하되 무상으로 진행한 한국. 그런 한국을 보면서 올림픽이라는 목표 때문에 검진 자체를 포기하다시피 한 일본. 그러면서도 ‘재팬 이스 넘버원’이라는 신화에 매몰돼 일본이 대단한 나라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일본인. 한국인들이 촛불시위로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자를 내쫓은 사례를 언급하면서 자민당에 속수무책 끌려가는 일본 국민의 무비판성과 비활동성을 힐난하는 글이다.하지만 일본은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교수의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읽으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유라시아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정치하고도 호쾌한 시각을 보여주는 스기야마 교수의 식견은 놀라운 것이었다.그런데 그의 논거는 거의 일본인들의 저서에 기초한다. 수많은 일본인 연구자들이 유라시아 곳곳을 누비면서 필요한 자료와 문헌을 제공해주는 덕분이다.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 다치바나 다카시에 따르면, 그는 학부에서 그리스어로 플라톤을, 라틴어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프랑스어로 베르그송을, 도이치어로 비트겐슈타인을 읽었고, 학과 이외 시간에 히브리어로 진행된 구약성서 강독까지 참가했다고 한다.경북대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강의 자체가 아예 없다. 반면에 전남대에서는 30년 가까이 그리스어 원전강의가 이뤄지고 있다니 경하할 일이다.일본은 타산지석이자 놀라운 귀감(龜鑑)의 본보기로 작용하는 가깝고도 먼 나라임을 새삼 실감하는 시절이다.

2020-04-01

사재기 없는 나라

김규종 경북대 교수논어 ‘위령공편’에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가 나온다. 군자는 어려움을 당하면 굳게 지키지만, 소인은 어려움을 당하면 함부로 행동한다는 말이다.사람의 됨됨이는 어려운 지경이나 곤궁한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사람은 끝까지 어려움을 견디지만, 대다수는 허둥대기 마련이다. 뛰어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의 나뉨은 여기서도 선연하다.코로나19로 세계 곳곳이 아우성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감염병이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간 것이다. 바이러스는 국경도 인종도 빈부귀천도 가리지 않는다. 외견상으로는 평등세상이 구현된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처럼 국민 전체가 의료보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경우에는 평등한 면모가 드러나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는 불평등이 극을 달린다.의료 민영화로 인해 의료적 불평등과 아울러 미국에서는 사재기 광풍이 한창이라는 전갈이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고 미국인들은 식량과 물, 손 소독제와 마스크, 휴지와 약품을 챙기려고 떼 지어 상점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휴지를 차지하려고 매장에서 주먹다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는 얘기는 예사롭지 않다. 우리를 더욱 경악시키는 미국인들의 행태는 총기와 탄약의 매출이 급신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CNN 보도에 따르면, 최근 3주 동안 총기매출은 68%, 탄약매출은 309% 늘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해 정부기능이 마비되면 물자와 식량이 부족해지며, 약탈이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영화 ‘컨테이젼’에 나온 상황이 재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생존을 위해 이웃 사람이 나와 가족을 약탈할 경우를 대비해 총기와 탄약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총기류를 제외한 다른 물품의 사재기 현상은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신사의 나라로 한국인들에게 칭송받는 영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상파 보도에 따르면 영국인 간호사가 48시간 교대근무 이후 상점에 들렀지만, 사재기 때문에 텅 빈 매대를 보아야만 했다고 한다. 불과 48시간 생존을 위한 최소한도의 식료품 구입도 원활하지 않은 실정이다 보니 코로나19가 불러온 심리적 공황상태가 얼마나 우심한지 알 만하다.이런 와중에 영국의 BBC를 위시한 외신이 ‘사재기 없는 나라’로 칭송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코로나19가 가장 극심한 대구나 청도, 경산 어디서도 사재기 바람은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을 나는 우리 국민의 상부상조 정신과 이웃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대구·경북을 도우려는 전국의 따사로운 손길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2천500년 전에 공자가 설파한 ‘군자고궁’ 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인류가 지켜나가야 할 미덕일 것이다.국경과 인종과 역사와 문화를 떠나 우리 모두 한 형제임을 자각하면서 코로나19 사태를 슬기롭고 용감하게 극복해나가면 좋겠다.

2020-03-25

걷기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경북 성주가 고향인 가수 백년설의 대표곡은 1940년에 발표된 ‘나그네 설움’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요즘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면 80년 세월이 무상하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하는 ‘나그네 설움’은 고향 떠난 자의 한없는 인생역정을 노래한다. 떠돌이로 10년 넘어 반평생을 살아온 나그네는 해거름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인다.태평양전쟁을 목전에 둔 일제강점기 조선의 나그네는 도보에 의지하여 길을 떠돌았다. 식민지 백성 처지에 승용차나 열차는 언감생심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걸어야 했던 데에는 까닭이 있을 터이나, 우리는 내막을 알지 못한다. 나도향의 ‘그믐달’에 나오는 야반도주한 파락호(破落戶)일지도 모르고, 최서해의 단편소설 ‘탈출기’의 주인공 도배장이 나운심의 후예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걷고 걸었고 걸을 것이다. 인간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장정 기준으로 30킬로미터 내외가 고작이라는 게 정설이다. 시간당 3∼4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니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과거 보려고 한양 가는 조선의 선비는 편도 보름치 양식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오늘날처럼 탄탄대로나 신작로가 아닌 구불구불한 길과 가파른 산길과 언덕길을 가야 했던 사람들의 행장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그렇지만 당대 지식인들은 자신의 걸음으로 사유와 인식의 지평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모사피엔스의 첫 번째 조건이 직립보행 아닌가! 영장류 가운데 인간처럼 직립보행이 일상화된 종은 없다. 오늘날 스마트폰 때문에 인류가 고릴라나 침팬지 혹은 오랑우탄처럼 등이 구부정해지는 것은 별도로 쳐두자. 똑바로 서서 걸으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각종 상념과 기획을 보듬고 걷는다.누구는 건강을 생각하여 일삼아 걷지만, 우리는 걸으면서 과거와 미래, 행과 불행, 관계와 절연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근대 이전의 나그네는 사유 속도와 걷는 속도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한 예외가 아니면 그들은 일상의 속도에 맞춰서 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물을 인식하고 관계를 성찰했다. 시속 300킬로미터 가까운 고속철로 이동하는 현대인은 성찰하지도 사유하지도 않는다.걷지 않는 현대인은 똑똑한 전화기를 들여다볼 따름이다. 만물의 창이자 만능소통의 마당이 되어버린 스마트폰은 사유와 인식, 성찰과 무관하다. 거기서 쏟아지는 숱한 정보와 지식은 이용자를 암담하게 만든다. 급기야 그들은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손쉬운 해결책을 찾아낸다. 정보와 지식의 바다에 일엽편주 돛단배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비판적인 정신과 영혼을 사상한 채 한낱 엄지족으로 전락해 버렸다.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려면 정처(定處)가 있어도 걸어야 한다. 구부정한 영장류가 아니라, 직립보행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걸으면 살고, 멈추면 죽는다. 거리에 봄꽃 한창이다.

2020-03-18

문제는 손이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코로나19로 ‘마스크 5부제’가 실행 중이다. 차량 5부제는 익숙하지만, 마스크 5부제는 어색하고 떨떠름하다. 고도의 물질문명 세계에서 마스크를 구하려고 5일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스크를 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마스크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자기나 가족 몫으로 할당된 마스크를 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쓰임새로 본다면 마스크는 나보다는 남을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마스크는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해서 침의 분말이 공중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타인의 기침이나 재채기가 날아올 수도 있다. 재채기나 기침할 때는 옷소매로 입을 가리라고 보건당국이 권고하는 까닭은 그래서다.그럴 바에는 마스크를 쓰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하다. 마스크 대란(大亂)이 일어난 까닭이 거기 있다.청도 화양읍 토평리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마스크를 쓰고 앞마당을 배회하는 풍경은 다소 비극적인 데가 있다. 한 달 넘게 폐쇄된 경로당에도 못가고, 아낙들이 마실 오는 일도 없어진 마당에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양상은 우울하다. 5일 장에 나가야 구할 수 있는 마스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대처(大處)에서 살아가는 자식들이 보내줬을 터다. 그것은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한 마스크 ‘사재기 광풍(狂風)’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코로나19가 전염되는 경로 가운데 코보다 치명적인 부위는 손이다. 손은 몸 가운데서 가장 활용도가 높고 가장 더러운 부위다. 손을 묶어버리면 우리는 그야말로 속수무책(束手無策)이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손으로 만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라. 신발 안에 모셔져 있는 발과는 쓰임새가 천양지차다.영화 ‘컨테이젼’은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여러 생각 거리를 제공한다. 2020년 코로나19를 빼다 박은 것처럼 닮은 상황도 나온다. 그 가운데서 내가 중시하는 대목은 손이다. 어린 돼지를 다루다가 앞치마에 대충 손을 문지르고 나온 주방장과 악수하는 등장인물. 그녀의 손과 맞닿은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 나간다. 이내 세계 전역으로 감염병이 퍼지고 대혼란이 발생한다.영화 끄트머리에서 우리는 감염병의 근원을 알게 된다. 바나나 서식지를 공격받은 박쥐가 돼지농장에 날아가서 배설한다. 어린 돼지가 박쥐 배설물을 먹고, 돼지는 주방장에게 전달된다.코로나19 바이러스의 숙주(宿主)로 지목된 동물이 돼지와 박쥐였으니 족집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바이러스의 숙주가 아니라,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경로인 손이다.주방장의 손에서 시작된 바이러스 전파경로는 2020년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지는 세상의 온갖 물건을 통해서 바이러스는 전파된다. 우리는 하루에 3천번 정도 얼굴을 만진다고 한다. 손은 얼굴을 만지기 전에 무엇을 만졌을까?! 명심하시라. 마스크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을 잘 씻는 일은 훨씬 더 중요하다.

2020-03-11

늙어감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우르크의 지배자 길가메시는 폭정을 일삼다가 신들이 보낸 엔키두의 공격을 받는다. 일주일 넘게 싸우던 두 용사는 싸움의 허망함을 깨닫고 친구가 된다. 길가메시는 삼나무숲의 수호자 훔바바와 싸우라는 신들의 명령에 따라 훔바바를 퇴치하고, 여신 이슈타르의 구애를 받지만 거절한다. 그 대가(代價)로 엔키두를 잃어버린 길가메시는 영생불사를 염원한다. 우트나피슈팀에게 불로초를 얻지만, 뱀에게 도둑맞고 인생무상을 수용한다.‘길가메시 서사시’의 기둥 줄거리다. 현대의학은 요즘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작동하고 있다. 인간수명 500세 프로젝트가 가동 중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최장수명은 120세 전후로 알려져 있다. 그것을 4배로 확대하는 기획이 진행되는 것이다. 어째서 인간은 장구한 세월을 살고자 욕망하는가. 무엇이 그들에게 영생불사를 꿈꾸게 하는가.며칠 전 어머니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마음 졸였다. 연세를 생각하면 정신이나 육신이 건강한 편이어서 걱정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악화하는 것을 보노라니 속이 찡해온다. 언제부턴지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 삶의 의욕도 입맛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평소의 생동감과 호기심 그리고 잔소리마저 실종되어 다른 사람처럼 돼버린 모친을 보는 것은 아픔이었다.막내는 노인성 우울증 같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모친이 총무로 있는 경로당이 장기간 폐원한 상태여서 말동무도 없고, 마실도 나가시지 않았다는 게다. 온종일 텔레비전만 보다가 삼시 세끼 쓰디쓴 입맛으로 최저수준의 섭생으로 일관한 지 어언 1개월. 그로 인해 육신과 정신건강이 저하된 상태에서 공간 지각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것이다.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대가족은 자취를 감췄다. 그 대신 1인 가구는 나날이 늘어만 간다. 나이든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가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50∼60대다. 한국전쟁 이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711만에 달하는 중장년 세대를 가리켜 베이비붐 세대라 한다. 전체인구 가운데 14.3%에 이르는 베이비붐 세대는 우리나라의 중추를 이루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자녀양육과 부모봉양의 무거운 등짐을 진 마지막 세대다.베이비붐 세대의 일원으로 모친의 노화와 약화에 속수무책으로 두 손만 비비고 있는 형국이니 속이 쓰리다. 그나마 며칠 지난 후 점차 기력을 되찾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도감이 생겨나기도 한다. 가벼운 실내운동과 따사로운 햇살 아래 동네 한 바퀴 도는 여유로운 산책을 권고한다. 형제들에게 잦은 방문과 대화, 유쾌한 소일거리를 함께 찾아보자는 식으로 모친의 안쓰럽고 아슬아슬한 늙어감과 마주한다. 길가메시도 붓다도 진시황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탄생과 죽음은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필멸의 존재로 우리는 생로병사의 수인(囚人)이다. 노화와 죽음이라는 필연을 새삼 되새기는 시간이 코로나19와 함께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2020-03-04

우한폐렴과 TK코로나

김규종 경북대 교수‘코로나19’가 극성이다. 코로나19는 애초 ‘우한폐렴’이나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불리다가 질병관리본부 건의로 코로나19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지난 2월 11일 감염증의 정식명칭을 ‘COVID19’로 결정했지만, 영어표현이 길고 생소해 코로나19로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특히 대구와 경북의 확진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지역 거주민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천지 대구교회와 청도 대남병원 확진자가 전체 확진자의 70% 가까운 비중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잖게 충격적이다.중국 호북성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를 막아보자면서 통합당과 보수언론이 줄기차게 주장한 것은 ‘우한폐렴’과 ‘중국인 입국금지’였다. 2015년에 마련된 세계보건기구 명명법 기준에 따르면 특정지역 이름을 따서 감염병 명칭으로 삼는 것은 국제법상 올바르지 않다. 정부는 1월 27일 보도자료를 통해 ‘우한폐렴’ 대신에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라는 명칭을 권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통합당 전신인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은 우한폐렴 명칭을 고수했다.대구와 경북에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자 보수언론은 대구 경북 거주민을 우롱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2월 20일 ‘중앙일보’에 “파장 커지는 TK 코로나”를 필두로 2월 21일 채널A는 “대구 코로나”, SBS는 “대구 고담시티”, 연합뉴스 텔레비전은 “대구발 코로나”를 줄지어 보도한다. 여당 국회의원과 대구시장이 대구와 경북을 모욕하지 말라고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해야 할 정도로 대경 지역민을 폄훼하고 모독하는 짓을 서슴지 않은 것이다.가관인 것은 ‘우한폐렴’을 주장한 통합당 의원이 “대구 코로나” 명칭에 반대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중국에 혹시나 흠이 갈까 봐 우한폐렴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펄쩍 뛰던 사람들이 이제 아예 대구 코로나라고 부르나”라는 희한한 논리를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정부가 우한폐렴 대신 코로나19를 사용하는 것이 중국 눈치 보기나 사대주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한폐렴은 되고, 대구 코로나는 안 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2월 20일 통합당 원내대표 일갈도 흥미롭다. “국민이 알기 쉽게 맨 처음에 사용했던 우한폐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 정부가 중국 눈치를 너무 보고, 제대로 대응조치를 하지도 못하면서 중국 심기만 살피고 있기 때문에 이를 부각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지금 우한폐렴 명칭을 쓰고 있다.” 국민의 낮은 눈높이를 고려하고, 정부의 대중국 저자세를 비난하려고 우한폐렴 명칭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초기에 중국을 오가는 항공기 운항을 금지한 이탈리아에서 확진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인 입국금지를 주장하는 자들의 단견을 웅변한다. 바이러스가 행정적인 국경을 따라 이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엄중한 환란을 맞이하여 정쟁을 중단하고 국민과 더불어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절실한 시점이다.

2020-02-26

기록영화 ‘위로공단’

김규종 경북대 교수한국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을 담아낸 ‘기생충’이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하다. 여전히 한국인들은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기생충’을 화제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울하고 답답한 우리의 내면을 활짝 열어준 ‘기생충’이지만, 영화가 전달하는 주제는 무겁고 우울하다.세상의 부조리와 모순과 상처를 보듬는 장르로 나는 기록영화를 꼽는다. 그것은 필시 ‘송환’의 김동환 감독의 지론에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록영화가 세상을 바꾼다!” 2004년 개봉된‘송환’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기록영화다. 자생적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십 년 수형생활을 견뎌온 장기수들의 일상을 잡아내면서 분단으로 고통받는 인간군상의 내면을 천착한 ‘송환’.2003년에 개봉돼 화제를 모은 기록영화 ‘영매’는 다른 차원의 삶을 그려낸다. 세습무와 강신무의 일상과 고뇌를 담아낸 ‘영매’는 무당들의 세계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대를 이어 무당일을 하는 세습무와 신내림으로 무당이 되어야 했던 여인들의 고단한 행장(行狀)을 보여준다. ‘송환’이든 ‘영매’든 기록영화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다채로운 면면을 드러내는 까닭에 여기저기 눈물바다가 만들어진다.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 역시 영화를 보는 동안 왼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2015년 개봉된 ‘위로공단’은 1970년대 동일방직과 와이에이치 사건 그리고 1985년 구로공단 연대투쟁, 2005년 기륭전자 사태, 2013∼14년 캄보디아 유혈사태까지 다룬다. 40년 남짓한 시간대를 포착하는 감독의 시선은 과거를 거쳐 미래를 향한다.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하되 정곡을 찌른다. “우리는 노동과 노동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고 있는가?!”‘다산 콜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말이 끝내 잊히지 않는다. “1970년대가 공순이의 시대였다면, 요즘은 콜순이의 시대일 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산업화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1970∼80년대 수출역군으로 불렸던 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을 대표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우리는 동일방직과 와이에이치 사건을 거명한다. 여공들에게 똥바가지를 뒤집어 씌우고, 대량해고를 일삼은 사업가들. 그들 배후에서 이득을 취한 정치인들.와이에이치 사건으로 촉발된 부마항쟁과 10·26은 유신의 숨통을 끊는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그것은 1985년 구로지역 연대투쟁으로 발화한다. 극단 ‘천지연’의 ‘선봉에 서서’ 공연이 이뤄진 것은 1987년 영등포의 ‘성문밖교회’였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모여 ‘선봉에 서서’를 열창했는지, 지금도 가슴이 떨려온다.‘위로공단’ 끄트머리에서 한국인 노동자와 같은 임금과 상여금을 요구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요구에 우리는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노동 없는,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2020-02-19

오스카와 블랙리스트

김규종 경북대 교수2020년 2월 10일 아주 반가운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과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온종일 한국언론은 야단법석 북새통으로 시끌벅적하여 잔칫집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세계가 신음하고 있던 와중에 들려온 낭보(朗報)에 한국인 모두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참 좋았다.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재능을 선보인 봉준호는 ‘괴물’(2007)과 ‘설국열차’(2013)로 관객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문학교수,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연작(連作)을 7권까지 출간한 나는 일찍부터 그의 놀라운 성실성과 꼼꼼함에 감복한 터였다.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를 영상으로 고스란히 살려낸 ‘살인의 추억’은 정말로 살 떨리는 ‘봉테일’의 극치였다. 당대의 사건사고와 시대상황을 손에 잡힐 듯 그려내는 치밀함과 준비자세는 실로 놀라웠다.‘괴물’의 도입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주한미군이 독극물을 한강에 무단으로 방류함으로써 괴물이 태어났음을 보여주는 기막힌 장면. 이 나라 금수강산을 무참하게 도륙하는 강대국의 정복자 이미지를 간명하게 포착하는 장인의 솜씨. 근미래 인류의 처참한 양극화와 계급투쟁을 그려낸 ‘설국열차’ 역시 호모사피엔스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짚어낸 수작(秀作)이다.오스카 4관왕 소식에 정치권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나는 자유한국당 논평이 궁금했다. 봉준호 감독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불이익을 제공한 정치인들의 집합소가 자유한국당 전신 새누리당 아닌가! 그들이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대중이 쉽게 접하고 무의식중에 좌파 메시지에 동조하게 만드는 좋은 수단인 영화를 중심으로 국민의식 좌경화 추진.”문화를 통한 국민의식 좌경화를 꾀하면서 반미와 정부의 무능을 부각한 대표적인 영화로 그들이 꼽은 영화가 ‘괴물’이었다. 당시 집권당이자 이명박-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받들어 모신 집단의 의식수준이 그 정도였다.‘기생충’을 바라보는 자유한국당 인사들의 의식 역시 다르지 않다. “체제전복의 내용을 담고 있는 전형적인 좌파영화”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그런데 2월 10일 자한당 대변인 논평은 전혀 달랐다.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수상은 세계에 한국영화, 한국문화의 힘을 알린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공당의 입장이 이렇게 조변석개해도 괜찮은지 궁금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을 국민의식을 좌경화하는 인물로 낙인찍고 불이익을 준 장본인들이 갑자기 희희낙락하는 저의는 무엇인가.더욱이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오스카상 수상을 우한 폐렴으로 침체와 정체,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에 전해진 단비 같은 희소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한 폐렴으로 절망에 빠진 나라가 우리나라인가, 중국인가, 그것을 묻고 싶다. 우한 폐렴이란 말 대신에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2020-02-12

광주를 떠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세상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 끝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밤과 낮의 교체, 사계절의 운항,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도 같은 궤적을 가진다. 생로병사로 점철되는 인생도 시작과 중간과 끝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기체에 지나지 않는다. 만남과 작별에는 과정의 필연성이 내재해 있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필연 혹은 인과율의 거대한 손길이 잠재해 있는지도 모른다. 2019년 2월 18일 시작된 광주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경북대와 전남대의 교수 교환제도에 기초하여 1년 가까이 진행된 나의 광주 삶이 바야흐로 끝나가고 있다. 날마다 점심이나 저녁자리에서 그동안 신세진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아쉬움을 함께 하고 있다.기나긴 인생살이에서 1년 시간은 짧은 기간이다. 더욱이 나이 들면 시간의 흐름이 신속하게 느껴지는 법이어서 광주에서 체류한 1년은 그야말로 순간의 일처럼 느껴진다.1980년 5월 광주항쟁 이후 언젠가 광주에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살인과 폭력이 절정에 달했던 80년 5월 광주에 진 마음의 빚이 오랜 부채(負債)처럼 떠나지 않았던 때문이다. 광주와 전남대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도 그것이었다. “왜 광주에 왔는가?” 하지만 정작 광주항쟁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관념적 사치 혹은 철지난 바닷가 같은 쓸쓸하고 우울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책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보고 들었던 광주와 살면서 실감한 광주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것을 제한된 지면(紙面)에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불과 한 해를 살아보고 광주의 전모를 알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관심이 있었기에 무탈하게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동고송 (冬孤松)’ 여러분이 보여준 우의와 관심은 오래 기억할 것이다.작년 4월 19일 개관한 사단법인 동고송. 광주의 가난하고 어려운 문인들을 도와주고자 창립한 동고송. 나는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 창립 기념일에 동고송을 찾은 일이 있다.훗날 동고송 관계자들이 내게 연락을 하고, 나의 대중강연에 몸소 찾아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나를 불러 ‘서향재’에서 유라시아와 격동의 20세기 강연을 청하고, 지난주에는 축령산을 함께 산보하며 재회를 기약한 것이다.나와 비슷한 연배의 가난한 식자들이 십시일반 추렴하여 후학들을 위해 사단법인을 만들고, 함께 모여 인문학을 공부하며 세상을 논한다.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런 작업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다. 가난한 문인이 어디 광주에만 있으랴! 하지만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곳은 광주가 유일한 것 같다. 이런 아름다운 면면이 항쟁 40주년을 맞이하는 광주의 든든한 자산이라 생각한다.헤어지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이들에게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대구에서도 실천해보리라 다짐한다. 고맙고 정다운 광주여, 이제 안녕! 다시 만날 때까지!

2020-02-05

성묘하고 나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조상의 산소를 찾아 인사하고 묘소 돌보는 것을 성묘라 한다. 성묘는 설날과 한식, 추석에 주로 이뤄진다. 지난 설에도 나의 성묘는 어김없이 이어졌다. 서울 모친댁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음성군 생극 공원묘지에 19년째 누워계신 선친을 찾은 것이다. 급작스레 닥친 아버지의 별세로 인해 사촌형이 서둘러 구한 묘터가 공원묘지였다. 나는 기회 닿는 대로 그곳을 찾아 선친께 소주 한 잔 권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설이나 추석 당일에는 그야말로 입추(立錐)의 여지 없을 만큼 인산인해다. 고속도로가 막히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여서 당일을 피해 이튿날에 묘소를 찾는다. 온화하기가 4월 중순 같은 1월 26일 정오 무렵 산소에 당도한다. 차를 세워두고 비탈진 언덕길을 느릿느릿 오른다. 등에 실린 소주병이 듬직하다. 언제부터인지 선친묘소까지 차 타고 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게으름과 속도에 대한 자발적인 저항이랄까?!소주 한 잔 올리고 묵상에 든다. 까마귀 울음소리와 어린아이 우는 소리 들린다. 사방팔방 눈길 닿는 모든 곳에 자리하는 묘소들의 장려(壯麗)한 대열. 그리고 넘쳐나는 햇살과 정밀(靜謐)에 가까운 고요가 공원묘지임을 알려준다. 시원스레 열린 전망 아래 수백 수천의 사연을 담은 사자들의 집이 묵연(默然)하다. 아하,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토록 단출하다면 생사의 갈림길 역시 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나이 먹고 나서 결혼식은 가지 않아도 장례식은 거의 빼놓지 않는다. 경사에는 사람 하나 없어도 그만이되, 애사에는 인총 하나 그리운 법 아닌가. 설령 무연한 분이라 해도 그의 자제와 맺은 연이 각별하니 짬을 내서 상가에 들르는 것이다.아버지 산소에서 병풍처럼 서 있다가 홀연히 찾아온 생각은 단순한 것이었다. 죽음이 지척인데 인간은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고 다투며 욕하고 사는구나.세월이 흘러서 나와 형제들마저 소멸하게 되면 아버지 묘소는 어찌 될 것인가. 여기 누워있는 저들의 묘소는 또 어떻게 될 것인지, 사념한다. 모친은 화장(火葬)을 주장했는데, 형과 아우가 산소 쓰자 해서 이리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세월 아니겠는가. 한 세대 남짓 지나면 불귀의 객이 될 것은 자명한 이치. 이런 묘터를 구하고자 했던 형제들의 바람 또한 더불어 스러질 터.길을 달리고 달려 당도한 산소에서 인생의 허망함과 일상의 누추함을 떠올리자니 마음이 짠하다. 살아서 영화를 누리지 못한 부친이나, 늘그막에 병들고 쇠약해진 육신 탓에 괴로운 모친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하되 그것 역시 우리에게 허여된 숙명 같은 굴레라고 서둘러 변호한다. 다만, 한 가지. 허욕과 탐욕에서 자유롭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저이들도 얼마나 많은 욕망과 희망과 기대를 이고 지며 살았을까, 생각하니 안쓰럽다. 들숨은 있되 날숨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망연히 깨우친 미망 아니었을까, 하는 상념. 성묘하고 나서 만감이 교차하는 산등성이에 태양만 홀로 장렬(壯烈)하다.

2020-01-29

살처분과 공장축산

김규종 경북대 교수세종은 젊어서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세종실록 2년 8월 29일 기록이다. 하지만 세종은 상사(喪事)를 당하면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 달 넘도록 고기반찬 없는 소찬(素饌)으로 일관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수많은 고기로 넘쳐난다. 소와 돼지, 닭과 오리는 물론 바다에서 잡고 기른 허다한 어류가 밥상에 오른다. 5천년 한민족 역사에서 이토록 먹을거리가 풍요를 구가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새옹지마(塞翁之馬)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세상에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고 불귀의 객이 되어야 하는 수많은 생명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다. 더욱이 각종 전염병 때문에 살처분된 숱한 생명을 돌이키면 가슴이 먹먹하다.보도에 따르면, 2010년 구제역 발생 이후 2018년까지 여덟 차례 구제역으로 38만 마리의 소와 돼지, 일곱 차례 조류인플루엔자로 6천900만 마리의 닭과 오리가 살처분되었다고 한다. 2019년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살처분된 돼지 47만 마리까지 더하면 지난 10년간 7천만 마리의 생명이 가축 전염병 예방이라는 목적으로 죽임을 당해 이 땅에 묻혔다.어디 그뿐인가. 2010년 이후 가축 전염병으로 인한 살처분에 소요된 비용만 4조원에 이른다. 농가 피해보상 외에도 가축사체와 오염물을 소각-매립하고, 전염병 발생지역의 소독과 매립지 관리에 거금이 소요된 것이다. 여기에 매몰지에서 발생하는 사체 침출수 유출로 인한 토양과 수질오염이 추가된다.요즘에는 살처분 가축을 묻을 매몰지를 구하는 일도 어렵다고 한다.살처분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도 우심하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가축매몰 참여자 트라우마 실태조사’에 따르면 대상자의 76%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사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2011년 충남의 축협 직원이 살처분 작업으로 인한 극심한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생명을 산 채로 땅에 묻어야 했던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이 눈에 밟힌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대안(代案)을 찾아야 한다.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수십만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생매장하는 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일 것이다. 가축 전염병 창궐은 멧돼지나 야생조류뿐 아니라, 공장식 밀집축산에도 있다. 가축 전염병이 급속도로 전파되는 이유는 공장식 밀집축산에 있기 때문이다. 비좁은 축사 안에 대규모로 가축을 양산하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올리는 것도 좋겠지만, 인간과 가축이 공존하는 토양은 마련해야 한다. 인간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도살되고 매몰되는 가축이 아니라, 기본적인 동물복지라도 준수하는 환경이 요구된다. 세종이 드신 소와 돼지, 닭과 오리는 평온한 환경에서 자란 가축이었을 터다. 우선 거기까지라도 가면 어떨까.

2020-01-22

게으름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더러 억장으로 취하는 때가 있다. 나이 먹고 몸이 부실한 것도 원인이겠으나, 강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술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주독으로 고단해진 육신을 추스르다 보면 성찰의 시간이 찾아온다. 구토와 오심으로 괴로워한 적도 있으나, 요새는 그런 일이 없다. 그것도 음주 행각으로 얻어낸 작은 지혜이거나 깨달음이려니 생각한다.나른해진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지난 일을 회억하거나 흐뭇한 추억에 잠기는 날도 있다. 아마 그것이 음주 다음 날의 유쾌한 선물일 것이다. 온종일 빈둥거리면서 몸과 마음을 분망한 일상과 격절(隔絶)하는 한가한 하루! 술을 싫어하거나 홀짝거리는 정도의 애주가는 빈둥거림의 미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세상과 대면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자크 러클레르크의 ‘게으름의 찬양’(1936)을 선물받았다. 버트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1935)을 인상 깊게 읽었기로, 같은 부류의 서책이려니 짐작했다. 러셀은 모든 지구 거주자가 하루 4시간 노동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문제는 누군가는 전혀 노동하지 않으면서 부를 축적하고, 어떤 이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것이다.세상에는 온종일, 매달, 매년, 종신토록 놀고먹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적잖은 자들이 그런 놀라운 행운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아무리 일해도 하루 세끼 배불리 먹지 못하는 인간도 아주 많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조국과 부모 때문에 이런 편차가 생겨난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말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그런 까닭에 우리는 흙수저와 금수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그것이 운명이나 되는 것처럼.러클레르크 신부가 게으름을 찬양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속도’에 있다. 너무 신속하게 변해가는 세상과 거기 편승해서 ‘더 빨리’를 외쳐대는 20세기 초반 유럽의 풍경을 그려낸다. 2차 대전으로 느림이 찾아왔다는 그의 생각은 무척 새로운 것이었다. 수많은 인명살상을 가져온 전쟁의 참화가 아니라, 속도경쟁에서 빠져나오도록 인도한 전쟁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혜안과 통찰! 하지만 2차 대전 직후 인간은 우주로 날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에 도달한다. 옥토끼가 절구질한다는 항아의 달에 사람이 꿈처럼 발자취를 남긴 것이 벌써 50년 전 일 아닌가?! 결국 그것은 지구 자전속도를 능가하는 속도에서 비롯된 일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300킬로미터의 시속으로 전국을 오가고, 시속 1000킬로미터 내외로 지구를 왔다 갔다 한다. 그야말로 속도에 빠져서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현대인의 특징처럼 각인된 시대다.느림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해준다고 러클레르크는 말한다. “우리의 삶이 제대로 인간적이려면 거기에는 느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주 큰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올해에는 나도 어느 정도 빠름에서 놓여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궁금한 빈들거리는 하오가 느릿하게 지나간다. 여러분의 하루는 어떤가, 궁금하다!

2020-01-15

서향재에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리던 1월 6일 월요일 저녁. 광주 동명동에 자리한 ‘서향재(書香齋)’에 도착한다. 서책의 훈향이 퍼져 나가는 집, 서향재. 이곳에서 30년 넘도록 시민들이 모여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누고 토론해왔다고 한다. 한 세대에 이르는 긴 세월, 세 번째 월요일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향재 독서모임 이름이 ‘세월회’라고 말한다.그날 모임에서 나는 ‘유라시아와 격동의 20세기’라는 주제로 강연했다.유라시아를 횡단하는 포괄적인 인문학 서책을 기획하고 있던 터라, 그 일부를 파워포인트로 정리해 선보인 것이다. 20세기 전체를 어찌 90분 남짓한 시간에 다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19세기에 강연 일부를 할애하였기로 시간은 더욱 짧아지고 말았으니.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20세기의 고갱이는 얼추 전달한 듯하다. 서향재에 빼곡하게 놓인 의자가 모자라 몇 사람은 마룻바닥에 앉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된다. 듣는 이들은 불편했겠으나, 말하는 자로서는 퍽이나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유명하지도 대단한 인간도 아닌 자의 강연을 함께 해준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따스하게 다가온다. 청도의 농가주택에 살면서 붙인 당호가 ‘파안재(破顔齋)’이니, 파안재 주인이 서향재로 마실 나가서 한 마디 전한 셈이다. 그 말은 하지 않았으나 속은 훈훈한 저녁이었다. 돌이켜보면 2차 대전 후에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것이 20세기 한복판의 일이다. 우리로서는 잊을 수 없는 숱한 사건과 사변이 꼬리에 꼬리를 문 20세기 후반기지만, 세계사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론 1-2차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커다란 전쟁은 없었으나, 한국동란을 필두로 베트남전쟁과 걸프전이 뒤를 이었다.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천안문사태로 숱한 인명이 살상되었다.20세기를 두 가지 말로 요약한다면 필시 문명과 야만이 되리라. 한편으로는 과학과 기술이 불러온 물질문명과 의약과 보건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삶의 질이 풍요로워진다.다른 한편으로는 1917년 사회주의 10월 혁명과 내전, 1-2차 세계대전과 국지전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화가 벌어진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중동의 전운은 전쟁의 참화를 예고한다. 1월 3일 있은 미군의 카셈 솔레이마니 이란 군사령관 폭살(爆殺)이 좋은 본보기다.이라크를 방문 중인 이란의 전쟁영웅 솔레이마니를 처단해버린 미국의 처사에 국제사회가 분노하고 있다. 남의 나라 한복판에서 은밀하고 야비하게 군사작전을 실행하는 나라가 어찌 인권과 민주주의를 운운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2차 대전 이후 세계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의 악행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21세기 스무 번째 벽두에 자행한 행악질은 실로 경악스럽기 그지없다.서향재에 모인 시민들과 함께 차분하게 돌아본 20세기의 교훈은 단출하다. 야만을 경계하면서 문명을 유지-발전시키는 것이다. 묵묵히 자신과 사회와 세계와 역사를 돌이키고 사색하는 시민들의 서향재는 오래도록 환하게 빛나리라.

2020-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