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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구시민대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올해도 어김없이 숲은 일어서고 있다. 초록과 연두(軟豆)로 무장한 신록의 나무들이 팽팽하게 봉기하는 4월과 5월의 숲.이영도 시인은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간 젊은 같은 꽃사태”로 절창(絶唱)‘진달래’를 시작한다. 4월 혁명으로 산화해간 이 나라 청춘들의 붉은 피와 산야에 하염없이 피어나는 진달래를 대비한다. 오랜 세월 응어리진 한이 일순 터지듯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의 개화를 선연히 드러내는 것이다.해마다 봄은 그렇게 온다. 시인이 진달래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는 초록 초록한 색으로 산마루를 치달려 오르며 일어서는 숲을 예찬한다. 그것은 분명 지난 겨울 추위와 눈보라와 설한풍(雪寒風)을 이겨낸 자들의 장려(壯麗)한 저항의 결실일 터다. 이즈음 이 나라 산천을 돌아보는 것은 자연이 베푼 위대한 축복을 확인하는 일이다. 살아있음을 명명백백하게 확인하는 환희의 순간이 바야흐로 우리 곁에 있다.다정다감한 김영랑 시인은 울안의 모란으로 봄날의 서정을 그려냈으되, 눈 들어 먼 산 바라보면 거기 또 다른 봄의 일어섬이 있다. 혹자는 봄날에 꽃을 보며 찬탄하지만, 나는 일어서는 숲과 봉기하는 산야에 경탄한다. 거역할 수 없는 뭇 생명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침묵의 환호는 얼마나 깊고 웅장하며 창대한가?! 사계의 운항법칙에 순응하는 초목의 생동은 해마다 인간세의 번다함과 유한함을 깨우치곤 한다.2017년부터 시작된 ‘대구시민대학’이 올해로 세 해를 맞았다. 불초한 나도 인문학 강연 한 자락에 이름 올린다. 4월 25일 한반도를 노려보는 대륙과 해양세력이라는 제목으로 대구 시민들을 만났다. 대구시청별관에 마련된 강연장에는 200여 청중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순(耳順) 고비를 넘긴 분들이 다수였으나, 간간이 젊은 축들도 강연에 몰입하여 아연 흥미로운 이야기 마당이 펼쳐진다. 대구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사념.처절하게 실패한 역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중심으로 일본과 청나라의 침략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무능한 왕과 부패한 벼슬아치들의 행악질로 사그라지던 나라의 명운을 건져낸 임란의 의병들이 무명의 백성이었음을 밝힌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황태극 앞에 온몸과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인조의 참혹한 몰골과 ‘환향녀(還鄕女)’와 ‘호로자식(胡虜子息)’을 말한다. 실패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왕조의 붕괴는 필연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21세기 우리도 실패를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병자호란을 다룬 ‘최종병기 활’(2011)은 가공인물 ‘남이’를 등장시켜 747만 관객을 동원한다. 조선 신궁으로 이름을 떨치던 남이가 ‘육량시(六兩矢)’로 무장한 청의 명궁 쥬신타를 혼내주는 허무맹랑한 영화. 반면에 김훈 작가의 소설원작에 기초한 ‘남한산성’(2017)은 385만 관객을 불러 모은다. 우울하고 참람(僭濫)한 실패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완미(頑迷)하고 썰렁한 객석.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논어, 위정편)라고 갈파했다. 말을 바꾸면 이쯤 되리라. “실패한 것을 실패했다고 하고, 성공한 것을 성공했다고 하는 것, 그것이 성공하는 것이다” 실패를 외면하고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우리는 멀리 나아갈 수 없다. 패배를 인정하고 그것의 원인과 과정 및 결과까지 통렬하게 성찰해야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다.시민들에게 나는 힘주어 말하고자 했다. 우리는 미-중-일-러 사이에 낀 새우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최소 돌고래다. 우리만 우리의 힘과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우리 국민이 하나 되어 만들어온 결과다.대구시민대학 강연장을 나서는 청중들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워 보였다. 이참에 시민대학을 개설한 대구시에 재삼 감사와 축복을 전하고자 한다.

2019-05-01

광주에서 대구를 생각하다!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작은 원룸에 둥지를 튼 지 어느덧 두 달. 경북대와 전남대 교환교수제에 따라 광주에서 1년을 보내기로 한 때문이다. 광주와 대구의 거점 국립대학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남대와 경북대. 그동안 학생교류는 지속적(持續的)으로 진행됐으나, 교수교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경북대와 전남대 양교 총장이 교환교수제에 합의함으로써 실질적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거기에 첫 번째로 동승(同乘)한 셈이다.예전에 민교협 회의나 국교련 회의차 광주에 들른 적은 있지만, 장기체류는 이번이 처음이다. 관찰자나 관광객이 아니라, 거주민의 한 사람으로 광주를 살펴봄은 초로(初老)의 인생살이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리라 희망한다. 역마살 탓인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나라 곳곳을 떠돌며 지난 20년을 살아왔다. 자동차로 획득한 이동의 자유와 떠돌고자 하는 욕망에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사계절 정착민으로 광주에 머물고 있다.대구나 광주, 어딜 가나 눈에 밟히는 것은 시장이며 노점상이다. 거주지 부근에 있는 말바우 시장은 2, 4, 7, 9일이 장날이다. 열흘 가운데 나흘이 장날인 셈이다. 그때마다 길거리에 영감과 노파들이 노점(露店)을 펼치고 줄지어 앉아들 있다. 쑥과 냉이, 달래에서부터 양배추와 대파, 각종 한약재 등속을 펼쳐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얼마 전에는 홍어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양동시장에도 들렀다. 노점은 거기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러다가 대구의 크고 작은 재래시장이 떠올랐다. 그곳에 터를 잡은 숱한 노점상들의 모습과 매무새가 새삼스레 기억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도처(到處)에 깔린 24시간 편의점과 각종 마트와 슈퍼마켓, 소규모 점방과 대규모 할인매장들이 두 도시의 닮은꼴을 형성한다. 간간이 들려오는 누추하고 낡은 트럭의 녹음방송이 광주와 대구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고단한 나날을 영위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상념이 찾아든다.거리거리에서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노인들의 행장(行狀)도 광주나 대구나 매한가지다. 빈자는 어디에도 있고, 그들의 팍팍한 삶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하되 대구와 광주는 확연히 다르다. “기억하고 행동할게요” 현수막이 내걸린 문흥초등학교 정문. 4·16 세월호 대참사 5주기를 추념(追念)하는 노란 현수막.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광주에 정착한 데는 까닭이 있다.‘무등 공부방’에서 열린 김용운 선생 초청강연 진행자는 대구의 성리학과 광주의 실학을 대비하여 말한다. 과거를 투영하는데 거금을 들이는 대구와 소액을 미래에 투자하는 광주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조선의 성리학과 빛나는 과거와 벼슬자리와 가문을 추억하는 대구와 실패한 조선의 성리학과 민초들의 신산(辛酸)한 삶과 미래를 떠올리는 광주. 아마도 그런 차이가 5.18 민중항쟁의 광주와 간첩과 폭도 운운하는 대구의 차이일지도 모른다.지난주에 문을 연 산수동의 인문연구원 ‘동고송(冬孤松)’ 창립대회는 은성(殷盛)했다.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출판기념회를 겸한 개원식에 60명도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가난한 지역 문사들의 후원을 자처한다.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폭력적인 군부정권 아래서 12년 도피 생활을 했다던 황광우 소설가가 잠시 운을 뗀 지난날의 회억(回憶)은 참으로 따스하고 인간적인 것이었다.대구에서 광주로 올 때 어떤 분들은 대구에 없는 ‘무등 공부방’을 아쉬워했다. 반면에 대구에는 ‘지식과 세상’이나 ‘대경인문학협동조합’ 그리고 ‘가락 스튜디오’같은 곳이 있다. 그런 단체와 기관이 서로 어울려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화합과 상생, 과거와 미래를 터놓고 논하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4월 하순의 상념이다.

2019-04-24

“이제 징글징글해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4월 16일 노란 ‘세월호 대참사’ 추모배지를 달고 거리에 나선다. 어언 5년 세월이 지나갔다. 5년 전 그날 저녁 구들방에 군불을 지피다가 뒷집 할머니에게 들은 참사는 차마 믿을 수 없는 전갈이었다.촌동네로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들은 천붕(天崩) 같은 소식.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텔레비전이 없기에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는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로 확인한다.당시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보여주던 흉악무도함 때문에 세상사와 절연하고 살아가던 터라 참사소식은 상상을 절(絶)하는 것이었다. 열여덟살박이 고2 학생들만 250명을 수장시킨 희대의 참극. 내가 ‘세월호’ 유가족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목숨 건 단식에 2박 3일 동참한 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304명 위폐에 분향하고 명복을 빈 일, 경북대 콜로키움에서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고작이다.강의실에서 “벌써 5년 전이로구나!” 했더니 학생들이 이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올해 신입생들이 19학번이므로 당시 고2였던 단원고 학생이 대학생이 됐다면 16학번, 4학년이 됐을 것이다.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는 행악질과 패륜이 자행됐던 지난 5년의 세월. 그것을 묵묵히 견디며 유가족들은 지난 3월 18일 광화문에 설치됐던 ‘세월호’ 천막을 철거하기에 이른다.그리고 불과 1개월 지난 시점에 터져 나온 자유한국당 전·현직 의원들의 폭력적인 망언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 금하기 어렵다. 차명진은 4월 15일 페이스북에 “세월호 유가족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처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처먹는다”는 글을 남겼다. 정진석은 “세월호 그만 좀 우려먹으라 하세요. 죽은 애들이 불쌍하면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죠. 이제 징글징글해요”라는 동조(同調) 글을 올렸다.그들의 언어에 담긴 핵심은 ‘자식들과 세월호를 징하게 회 처먹고 우려먹는’ 유가족과 현 정권에 대한 조롱과 짜증과 분노다. 그들에 따르면 ‘세월호’ 유가족은 5년째 자식들의 시체장사를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시체를 ‘회로, 찜으로, 뼈까지 우려내먹는’ 희대의 악마로 단원고 학부모들을 몰고 가는 자유한국당 의원들!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대통령 권력과 집권여당의 정치·경제적 이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인간으로서 최소한도의 품격과 절제와 사유의 언어가 결석한 자들이 나라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자리에 있다니, 정녕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언사에서 일본 수상 아베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한국정부가 툭하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치 쟁점화 하여 한일관계를 왜곡한다는 그자의 언사. 식민지 조선의 여성을 성적으로 노예화한 자신들의 범죄행각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고사하고 ‘또 위안부냐’ 하는 투의 신경질적이고 짜증스러운 반응!!우리가 역사를 거론하면서 과거를 반추함은 거기서 얻어내야 하는 교훈 때문이다. 패망한 나라의 유랑민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민초들의 처참한 형극(荊棘)의 길을 떠올려 재발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말하고, 그것을 돌이키는 것은 또 다른 참사를 미연에 예방하고자 함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502명이 숨지는 참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와 무소불위 최고권력. 언제까지 이런 대규모 참사를 되풀이할 것인가, 하고 국민들은 준엄하게 묻고 있는 것이다.너무도 슬프고 괴로운 백발의 유가족들에게 ‘회 처먹고, 찜 쪄먹고, 뼈까지 발라먹는’다고, ‘이제 그만 우려먹으라고, 징글징글하다’고 말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보다 의원자리와 대통령이 더 소중한 그자들. 우리는 당신들이야말로 정말 징글징글하다!

2019-04-17

산불과 식목일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봄날이 산야를 초록으로 물들이는 시기의 불청객이 산불이다. 녹음(綠陰)이 대지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4월의 건조함은 산불이 퍼지기 좋은 조건이다. 여기에 강풍이 불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다. 2000년 4월 7일 임야 2만3천 헥타르를 태우고, 재산피해 1천억과 이재민 850명을 만들어낸 고성산불을 기억한다. 천년고찰 낙산사를 태워버린 2005년 4월 4일 양양산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지난 4월 4일 고성-속초-강릉-동해-인제에 산불이 났다.동해가 고향인 지인이 보내온 휴대전화 사진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무너져 내린 기왓장들이 켜켜이 쌓여있고,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벽체만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문틀과 창틀은 검게 그을려 흉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푸른 하늘 아래 꼿꼿하게 서있는 침엽수림의 몸체도 검게 타들어간 상처가 역력하다. 민가를 할퀴고 간 화마(火魔)의 상흔은 너르고 깊다.지인은 부친의 산소가 걱정되어 고향을 찾았는데, 정작 친구의 집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를 위로하며 낮술 먹고 있다는 전갈에 유구무언이다. 언론에서는 산불진화에 공을 세운 산림청 ‘특수진화대’와 소방관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산림청 특수진화대는 일당 10만원을 받고 불을 끄는 비정규직이다. 이참에 그들을 정규직으로, 지방직인 소방관직을 국가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위에 적시(摘示)한 날짜가 공교롭다. 4월 4일과 4월 7일. 기시감이 없으신가?! 그렇다. 4월 5일 식목일 전후한 날이다. 요즘에는 식목일이 공휴일도 아니고, 식목행사가 대대적으로 행해지지도 않는다. 주5일제 40시간 노동이 일반화되면서 2006년부터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된 것이다. 더욱이 나무를 심기 좋은 시기는 4월 초가 아니라, 3월 중순이라고 한다. 지구 온난화로 해방이후 한반도 평균기온이 2∼4도 상승한 때문이다.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키우는 일도 그만큼 종요롭다. 자식농사의 핵심이 잘 키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학교 다니면서 해마다 워커힐 부근 아차산에서 송충이를 잡았다. 식목일 전후로 모든 학생이 도시락 싸들고 아차산 입구에 모이는 것이다. 배급받은 나무젓가락으로 어른 검지나 장지 크기의 송충이를 2-3가마 잡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송충이를 잡고 나면 우리는 풀독과 쐐기 통증으로 고생해야 했다. 양호실에서 발라주는 암모니아수가 치료의 전부였지만 크게 괴로운 줄도 몰랐다. 아차산 인근을 지나칠 때면 짙푸른 녹음으로 뒤덮인 산세에 내심 흐뭇하다. 저기 어딘가에 어린 시절 우리의 땀이 서려있지 아니한가, 하는 것이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외삼촌에 등장하는 아스트로프가 나무를 만지면서 느끼는 소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일제의 가혹한 약탈과 6·25 한국동란, 그 후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흉물스러웠던 우리의 산야는 면모 일신했다. 대한민국은 핀란드, 일본, 스웨덴의 뒤를 이어 세계4위의 산림강국이다. 국토전역이 초록으로 넘쳐나는 조림(造林)의 나라가 된 것이다. 아프리카 신생국가들도 조림을 배우러 일본이나 도이칠란트가 아니라 한국을 찾는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나라 가운데 한국처럼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조림에 성공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봄철이면 되풀이되는 산불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너무 안이하다. 이번 산불을 교훈 삼아 소방헬기를 즉각 도입하고, 산불진화에 헌신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으면 한다. 아울러 산불과 관련한 일부 후안무치한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인신공격과 정치공세는 완전 진화·소멸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화마보다 처참한 것이 무책임한 험담과 폭언이므로!

2019-04-09

한국판 ‘푸거’는 가능할까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나이 들어 세상과 인간을 들여다볼라치면 문득 허망해질 때가 있다. 인간과 세상에 드리워진 선명한 모순의 그림자 때문이다. ‘사랑’과 ‘이차돈의 사’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 나는 춘원(春園)의 필력에 감읍했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극복하고 지고지순한 사랑과 지극한 도에 이르는 인물을 형상화하는 대가의 솜씨. 훗날 그가 봉은사에 칩거하며 썼다는 반성문 ‘산중일기’도 친일부역의 흠집을 지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의 망연자실함이라니!15-16세기 신성로마제국 신민(臣民)으로 거부(巨富)가 된 야코프 푸거(Jakob Fugger)라는 인물이 있다. 푸거는 아우그스부르크의 평민 출신으로 젊은 시절 베네치아에서 금융과 복식부기를 배운다. 유럽의 근대 혹은 르네상스를 열어젖힌 요소로 우리는 원근법, 대학, 아르스 노바, 기계시계, 금속활자 등을 거명한다. 하지만 일상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된 복식부기를 빼놓을 수 없다. 루카 파촐리(Luca Pacioli)는 1494년 ‘산술집성’에서 복식부기를 다룬다.파촐리가 이론적으로 복식부기에 접근한 수도사이자 수학자였다면, 속세의 장사치 푸거는 세계교역의 중심지 베네치아에서 복식부기를 배우고 익힌 인물이다. 근대적인 은행업의 본산 베네치아에서 장사에 눈을 뜬 푸거는 제국의 변방 아우그스부르크가 좁다하고 활동영역을 넓혀간다. 직물업, 은행업, 광산업에 손대고, 정치와 종교와 결탁하여 고리대금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1525년에 타계했을 때 그가 소유한 부는 유럽 총생산의 2%에 이르렀다고 한다.헝가리 구리광산을 경영하면서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노동 선동가를 처형하는 악행도 서슴지 않은 푸거. 그는 마인츠 대주교 선정과 관련하여 교황 레오10세와 결탁해 면죄부 판매이익 절반을 챙기기도 한다. 고로 루터의 종교개혁 여파로 발생한 독일농민운동 (1524-1525) 과정에서 푸거가 공격의 표적이 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정작 이상한 일은 그토록 돈에 집착한 푸거가 세계최초의 사회복지주택 ‘푸게라이(Fuggerei)’를 지었다는 사실이다.그는 1521년에 5만㎡ 부지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단거주시설을 건설한다. 두 채의 집으로 시작한 푸게라이는 오늘날 67동의 건물 142가구를 포괄한다고 전한다. 푸게라이 거주요건은 가톨릭 신자로서 하루에 세 차례 기도를 하고, 연 0.88유로의 집세를 내면 된다고 한다. 1년에 1천300원의 집세로 거주 가능한 녹지(綠地)와 아늑한 방과 마당이 딸린 집단거주시설! 푸거는 그런 시설을 500년 전에 생각해내고 구현한 인물이다.그의 동시대인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1516-1517년에 그린 푸거의 초상화를 보면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 이지적으로 보이는 넓고 단단한 이마, 먼 곳을 응시하는 단호한 두 눈, 얇지만 꼭 다물려 있는 입술, 강력하게 발달한 굵고 두툼한 목. 그가 입고 있는 검정색 겉옷과 자줏빛 숄은 거부의 옷차림이 아니라, 경건한 수도사나 구도자의 옷처럼 보인다. 돈으로 한평생 정치와 종교를 주무르고, 세계최고 갑부가 된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래서일까. 나라도 하지 못한다는 가난구제에 나서서 ‘푸게라이’를 지은 모순적인 행태를 보인 까닭은. 뜬금없이 500년 전 유럽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우리가 아직도 낯설어하는 보편적 복지나 토지공개념 같은 공적 영역의 담론과 실천부재 때문이다. 유럽의 보편적 복지나 무상교육을 부러워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부자 되세요!’라는 구호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여지없이 청와대 대변인의 사퇴와 장관 후보자 낙마(落馬)로 허망하게 종결된다.삼성총수의 개인주택 2채의 공시가격이 736억원이며, 보유세 합계만 12억원이라 한다. 돈 많이 벌어 호화로운 집을 사지 않고, 가난뱅이들을 위해 공공주택을 지은 푸거와 현저한 대비(對比)가 아닐 수 없다. 이참에 한국의 부자들, 권력자들, 지식인들은 조금만이라도 돌아보면 어떨까?!

2019-04-03

‘줬다 뺏는’ 기초연금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분노한 촛불이 새로운 권력을 탄생시킨 지 어느덧 2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간다. 2016년 늦가을부터 2017년 신춘에 이르는 장정(長程)으로 우리는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대통령과 집권세력을 교체했다. 그것은 낡고 타락한 지배권력을 일소하고,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의 본령에 충실하라는 국민들의 지상명령이기도 하다. 백성이 주인이며, 모든 사람의 입에 쌀밥이 들어가는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다.사정이 그럴진대 실제 돌아가는 상황은 그다지 탐탁지 않다. 세간에 떠도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기초연금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만65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국가가 설정한 소득기준금액 이하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노인에게 제공하는 돈을 기초연금이라 한다. 지금까지 정부는 소득하위 20% 노인들에게 월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했지만, 다음달부터 30만원으로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좋은 일이되, 호사다마(好事多魔)인가?!보건복지부 추산에 따르면, 월30만원의 기초연금 수급대상 노인은 154만 명 정도라 한다. 그 가운데 정부에게 생계급여를 받는 37만명에게는 일명 ‘줬다 뺏는 기초연금’이 되리라 전한다. 3월까지는 월20만원을 줬다 뺏고, 4월부터는 30만원을 줬다 뺏는다는 것이다. 돈 1만, 2만원이 아쉬운 노인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이렇게 무책임한 행정을 일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적폐 자체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야기한다.‘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해결은 2016년 민주당의 국회의원 총선거 공약이기도 하다. 민주당은 2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2018년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기초수급 노인들에게 월10만원을 추가로 지급하는 방안에 합의했지만, 본회의에서 좌절되었다. 거기 소요되는 예산은 고작 4100억 원이다. 왜 ‘고작’인가?! 2019년 예산총액은 470조원에 달한다. 전체예산의 0.1%도 되지 않는 미미한 액수의 예산확보에도 실패한 집권여당은 대체 무엇하는 집단인가?!한국노인들의 빈곤비율은 2015년 기준 46%에 이른다. 100명 가운데 46명이 빈곤선 아래서 살아간다는 얘기다.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의 평균 빈곤비율은 12.5%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구 예산확보에만 눈이 벌개져서 수천억 예산을 막판에 끼워 넣어 지역구에 ‘투하’하는 식으로 국민세금을 탕진(蕩盡)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침저녁으로 우리가 듣고 있는 ‘적폐 중의 적폐’가 아닐 수 없다.대통령과 장관들은 툭하면 ‘포용적 복지국가’를 말한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을 그대로 놔둔 채 포용적 복지국가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가진 자들을 위한, 가진 자들의, 가진 자들에 의한 포용적 국민국가인가, 되묻고 싶다. 우리가 촛불을 들고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자와 졸개들을 내친 까닭은 정반대되는 세상을 염원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한 무리를 준엄하게 징벌한 까닭도 민주공화국을 염원한 때문이다.‘적폐’라는 것은 과거에 누적된 폐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적폐는 ‘지금과 여기’에서도 끊임없이 생산되고 축적되어 우리의 미래와 다음 세대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다. 가난한 노인들에게 월10만원도 제대로 보태주지 못하는 정권은 우리가 꿈꾸고 염원한 권력이 아니다. 누군가는 말한다. 대통령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을 개정하면 기초연금 수급이 보장될 수 있다고. 국민들은 크고 엄청나며 역사적이고 미증유의 거대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김학의, 장자연, 버닝썬, 그런 문제를 정의롭고 합당하게 해결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다. 하되 당장의 생계가 아득한 노인들과 사회최하층 국민을 따뜻하게 보듬고, 그들에게 따사로운 밥과 옷과 집을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적폐청산이자 사회통합 아닐까?! “줬다 뺏는 기초연금, 당장 해결하라!”

2019-03-27

‘시’를 보다 ‘시(詩)’를 생각하다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이창동 감독은 과작(寡作)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97년 ‘초록 물고기’로 데뷔했으니 2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그는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버닝’을 연출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관객동원 면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한다. 2007년 전도연이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덕에 160만 관객이 들었을 뿐, 여섯 편 관객이 340만이 안 된다. 자고 나면 천만 영화가 나오는 세상에 희귀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얼마 전에 윤정희가 주인공으로 나온 ‘시’(2010)를 다시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치매 초기 단계의 초로(初老) 여인 미자가 어린 시절 꿈이던 시 쓰기에 도전한다. 동네 문화원에서 주관하는 시 강의에 떼를 쓰다시피 해서 수강하는 미자. 강사인 김용탁 시인은 ‘시는 일상 곳곳에 있으며, 시상(詩想)을 구하려면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애정을 가지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공책을 들고 다니면서 시상을 찾아 헤매는 미자는 아름답다.문제는 미자의 일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이창동 영화가 그렇듯 미자에 관한 정보는 전혀 넉넉지 않다. 이혼하고 홀로 부산에서 살아가는 딸이 하나 있고, 그녀 소생(所生)의 외손자를 데리고 사는 66세의 미자. 중3 종욱이는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게 하나 없는 천둥벌거숭이다. 게임과 전화기와 늦잠과 짜증에 익숙한 종욱. 그런 연장선 위에서 종욱은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한다. 여기서부터 ‘시’는 종잡기 어려운 길을 간다.‘시(詩)’는 문자 그대로 절집의 언어다. 절제와 은유와 깊이와 혜안(慧眼)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시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빛나던 20대 청춘 호시절에 나도 시를 쓰고자 했다.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으되,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대상(對象)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도 없었고, 깊이 있는 사유와 인식에 이르는 독서도 태부족했다. 무엇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의 최종지점이 부재했으므로, 물러섬에 거리낌이 없었던 탓이 크리라.시는 혁명가의 몽상과 더불어 창공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시인들의 평전과 시집을 언제나 품고 다녔다. 그들의 시를 읽고 여러 번 고쳐 읽으면서 시를 기억하려 노력했다. 소설가 정한숙 선생은 “시는 기억하지 않으면 제맛이 안 나!”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일까?! 난 적잖은 한국시와 시조(時調)와 한시(漢詩)를 기억한다. 특이한 것은 러시아 시인들의 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아흐마토바의 ‘저녁에’와 예세닌의 ‘귀향’, 기피우스의 ‘바느질하는 여인’ 같은 시편을 즐겨 읽으면서도 오래 기억하지 못함은 무슨 연유일까?! 그렇지만 러시아 시인들이 보여주는 섬세함과 애틋함, 안타까움과 의식의 전변(轉變) 같은 것은 독자인 나를 언제나 격동(激動)시킨다. 참 잘 쓰네, 하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아마도 내가 시를 쓰지 못한 결정적인 까닭은 재능이 없어서일 것이다.영화에서 시인은 말한다. “요즘은 시가 죽어버린 시대에요. 아무도 시를 읽지 않고, 시집을 사지도 않잖아요?!” 시를 읽지도, 시집을 사지도 않는 시대에 청춘들은 무엇으로 세월과 만나는지, 언제나 그것이 궁금하다. 술도 안 먹고, 책도 읽지 않고, 시는 못 본 척하고, 시대와 역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무엇이 21세기 우리의 청춘들을 설레게 하는가! 취직인가, 성적인가, 게임인가, 영화인가, 사랑인가. 종잡을 수가 없다.2500년 전에 중니(仲尼)는 ‘불학시 무이언’이라 설파했다.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쓸 말이 없다는 얘기다. 시를 통째로 기억해 자신의 언어로 삼았던 고대의 선비들은 그것을 길잡이 삼아 평생을 살아갔다. 곧 4월이 오면 이영도의 ‘진달래’가 시나브로 떠오를 것이다. 매화가 채 지기도 전에, 벚꽃이 아직 피기도 전에 나는 ‘진달래’를 그리워하고 있다.

2019-03-20

불평등과 천지불인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도덕경’ 제5장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킨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간략하게 번역해보면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은 인하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천지를 다른 말로 바꾸면 자연이 된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에 내재한 불편부당과 무심을 강조하는 말이 천지불인이다. 노자의 사유에 따르면, 자연의 본원적인 속성은 ‘인하지’ 않다는 것이다.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은 진도 9.0의 강진으로 1900년 이후 네 번째로 강력한 지진이었다 한다. 1995년에 일어난 진도 7.8 고베지진의 180배 위력을 발휘했다고 하니 그 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대지진의 여파로 사망-실종자가 2만 5천명을 넘고, 피해주민이 33만명을 헤아린다고 하니 지진피해가 흔치 않은 한반도 거주민의 상상을 뛰어넘는 재해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런 참혹한 자연재해가 왜 일어나는가, 하는 점이다.지진으로 최고 20m 높이의 ‘쓰나미’가 발생하고, 후쿠시마 원자로 폭발로 대참사가 발생한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다. 왜 자연은 인간에게 너그럽고 관대하지 않느냐, 하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하기야 자연재해가 인간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공룡 멸종을 불러왔다는 지구와 소행성 충돌은 측량하기 어려운 우주의 티끌에 거주하는 지구 생명체의 유한성을 몸서리치게 경각시킨다.그러하되 천지불인은 감당한다 해도 ‘성인불인’은 전혀 뜻밖이다. 만백성을 어버이처럼 긍휼히 여기고 인자하게 보듬어야 할 성인이 ‘인하지’ 않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특별한 애착 없이 무심하고 초연하게 백성들을 대하는 위대한 정치 지도자를 어찌 성인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그것은 ‘인’에 대한 노자의 반감을 표출하고 있는성싶다. ‘인’을 숭상한 공자의 유가에 대한 직접적인 반발이 아닌가 한다. 그것을 입증하는 구절이 ‘도덕경’ 제18장에 나오는 ‘대도폐유인의’이리라. ‘커다란 도가 사라져버리니 인과 의가 나오게 된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노자가 생각한 도의 본질은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이었다.‘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며,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노장(老莊)의 도가에서 내세운 극상의 도는 ‘자연’에 있다. 고로 자연의 본성이 인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따르는 성인 역시 인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름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하되 인간적인 것을 희구하는 21세기 현대인은 뭔가 아쉽다. 자연도 성인도 ‘인하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나만의 바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다. ‘자연보호’를 외치는 일부 지각 있는 분들의 거룩한 외침이 허망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나는 천지불인은 허하되, 성인불인은 21세기에 맞춰서 수정했으면 한다. 현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들은 유구한 자연을 따르되, 어질고 자상하며 인자했으면 한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숱한 가난뱅이들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과 아무런 기댈 언덕 없는 사람들에게 그 끝을 모를 정도로 ‘인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이자 원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근자에 보도되는 한국사회의 우심(尤甚)한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춘추전국시대의 노자를 새삼 생각한다. 인위가 아닌 무위자연에 의지했던 고대의 사상가를 떠올리면서 인간 불평등의 오랜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하지 못한다!”는 옛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인간다운 공동체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백일몽을 꾸어본다.

2019-03-13

경북매일과 시민기자제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경북매일이 흥미로운 알림장을 게재했다. 신문사가 ‘시민기자제’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다. 문자 그대로 신문의 독자가 신문기자가 되어달라는 취지다. 전통적인 종이신문은 신문제작자와 구독자를 엄밀하게 구별한다. 기자와 독자 사이에 기사 생산자와 수요자라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넘사벽’이 존재했다. 그런 강고하고 유구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무너뜨림으로써 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것이 경북매일의 의지다.알림장에 따르면, 경북매일은 ‘시민참여 저널리즘’을 추구해왔다고 한다. 어느 일방의 주장이나 입장이 아니라, 독자의 견해를 적극 수용해왔다는 얘기다. 여기 더해 경북매일은 급변하는 언론지형을 직시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한 다양한 매체가 등장했고, 1인 미디어도 성장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지난 2000년 2월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창간했고,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인터넷매체가 출현했다.요즘에는 ‘유투브’가 대세를 장악하면서 1인 ‘유투브’를 포함한 1인 미디어가 극성(極盛)하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전제한 언론지형이 부지불식간에 바뀌고 있는 것이다. 상황변화의 중핵에는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자리한다.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각종지식과 정보를 손바닥 안에서 가능하도록 인도한 스마트폰. 게다가 사진과 동영상을 실시간 탑재할 수 있는 능력까지 제공하는 기술문명의 총아 스마트폰.인간의 대표적인 욕망에는 물욕, 권력욕, 명예욕이 있을 터. 전자의 두 가지 욕망은 충족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문화 권력으로 표상되는 글쓰기를 통한 명예확보는 어렵지 않다고들 생각한다. 한국인은 대단히 역동적이며 강렬한 참여욕망의 소유자다. 구경꾼도 좋지만, 대상의 평가와 기준에서 단호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다. 1인 미디어나 참여 저널리즘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시민이 독자이자 동시에 기자가 된다면, 거기서 생겨나는 긍정적인 효과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보면, 우선 그것은 기사의 공정성과 객관성 제고(提高)로 나타나리라 믿는다. ~카더라, 하는 유언비어와 가짜뉴스가 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 기사의 기본 가운데 하나가 ‘육하원칙’이다. 기사에 반드시 들어가는 시공간과 사건주체, 인과율(因果律)이 글의 객관성과 신뢰도를 고양(高揚)하지 않을 수 없다.글을 쓰면서 시민기자는 모자라고 넘치는 능력과 덕성을 확인하게 된다. 넘치는 것은 버리고, 모자라는 점은 보충함으로써 개인능력 신장과 명징한 자의식 및 세계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남들이 써왔던 기사를 비판적으로 독서함으로써 일방적인 수신자이자 소비자의 영역과 본분을 내던져 버림으로써 새로운 세계와 대면할 것이다. 지역과 사회를 넘어서 국가와 동아시아, 세계를 감촉하는 새로운 인식능력 확보! 이 얼마나 장쾌(壯快)한 변화인가?!경북매일은 시민들이 보내는 정치-사회-문화영역의 원고를 검증하여 채택된 글에는 원고료를 지불하고, 신문에 게재할 예정이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기다. 글로써 문명(文名)을 날리고, 고료도 챙기고! 신문사도 마찬가지 이익을 얻는다. 시민의 참여도를 높임으로써 기사가 다양해지고, 질적인 수준도 높아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자연과학과 공학, 의학 같은 전문기사는 신문사의 전문성을 강화하여 언론의 전문화에 일조할 것이다.경북매일이 희망하는 시민기자제가 정착하게 된다면 21세기 한국사회에 만연한 가짜뉴스와 편 가르기, 지역감정과 불신풍조같은 전근대의 소산이 현저히 감소할 것이다. 시민기자제의 성공적인 안착에 기초한 경북매일의 욱일승천(旭日昇天)과 건승을 기원한다.

2019-03-06

3·1운동 100주년에 부쳐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00년은 긴 세월이다. 1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민초(民草)들은 100년 후인 2019년을 상상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19년 순조 19년을 살았던 조선의 백성들이 100년 후인 1919년을 상정하기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하되 21세기 19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2119년을 가늠하려 한다. 시공간의 무한축소와 과학기술문명이 호모사피엔스에게 부여한 선물 덕분이다. 100년 뒤 세상은, 인류는, 지구는, 우주는 어떤 양상일 것인가?!어릴 적 3월이 되면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로 시작하는 유관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만 열일곱 살이 되기 전에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부르짖었던 열혈 선구자 유관순. 이화학당 2년생으로 운동에 참가하고,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유관순. 그녀는 100년 뒤 우리나라와 한민족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까?!이른바 33인의 민족 지사들이 하나둘 변절하여 일제 앞잡이로 전락해갔던 것과 대조적으로 순국의 길을 걸었던 유관순.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잔악한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던 시대의 등불 유관순. 죽어가면서 그이는 조선의 푸르른 하늘을 그리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해방된 조국의 장려(壯麗)한 모습이었을까, 민족 전체가 하나 되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100년 뒤의 2019년 모습이었을까?!그이가 살아생전 헤아릴 수 없었던 100년 세월 한반도에는 너무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3·1운동 100주년에 각별하게 떠오르는 것은 친일부역자 무리의 색출과 처벌에 실패했다는 뼈아픈 현실이다. 반민특위의 와해(瓦解)로 무산된 반민족행위자 척결은 지금까지도 짙은 암운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부역 매국노들이 반공 투사로 탈바꿈하면서 이 나라 민초들과 독립 운동가들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하는 말로 유명한 약산 김원봉은 3·1운동의 영향으로 1919년 12월 항일무장투쟁의 선두였던 ‘의열단’을 조직한다. 일제가 320억원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 했던 신출귀몰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다. 그러나 해방 후에 약산은 친일부역 악질매국노 노덕술에게 갖은 고문과 치욕을 경험한다. 독립 운동가를 반공의 이름으로 고문하고 승승장구했던 반공 투사들!이런 일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반공 투사들은 훗날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던 숱한 지식인과 청년들을 투옥·고문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 ‘빨갱이 사냥꾼’이 된 것이다. 그것의 정점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분연히 일어선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 죽음의 질곡으로 몰아갔던 사냥꾼들과 그 후예가 제1야당의 간판 아래 버젓이 활개치고 있다.열여덟 나이에 세상을 버린 유관순 열사는 이런 정황을 알고 있을까.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혁명가이자 전설적인 항일전사 김원봉은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깨달았을까?! 그가 꿈꾸었던 민족해방과 조국의 본령이 쥐새끼나 다름없는 친일 매국노와 그 후예에게 처절하게 짓밟힐 것을! 그자들을 대한민국의 역사와 민족의 이름으로 영원히 추방하여 다가올 새로운 100년의 미래를 그리는 작업이 절실하리라.과거를 돌이킴은 지난날의 과오(過誤)를 성찰하고, 다가올 날들의 기획에 필수적이다.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자들의 무리가 역사를, 열사를, 투사를, 민주화 운동가를 다시는 모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소과제일 것이다. 그것은 100년 뒤를 생각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시대적 소명이다.

2019-02-27

울분장애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세상 살면서 사통오달(四通五達) 인생을 향수하는 이는 많지 않다.그것은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아서, 나와 같지 않은 타자로 인해, 기획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혹은 기대치 충족의 불가(不可)로 인해서 발생한다. 어떤 이들은 불의한 시공간과 부당한 억압으로 울분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열사나 위인으로 존숭하는 유관순이나 윤봉길, 김구 같은 분들이 그러하다. 공적인 영역의 거룩한 울분을 제외하면 우리는 일상의 영역에서 울분을 경험한다.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울분(鬱憤)은 ‘답답하고 분함 내지 그런 마음’을 일컫는다. 한자말을 들여다보면 나무와 나무, 바위로 길이 막혀 답답한 형국과 분노로 인해 감정이 북받치는 상황임을 보게 된다. 명약관화한 길과 해결방도가 있음에도 에둘러야 하거나, 그럼에도 길이 속 시원하게 현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조바심과 갑갑증을 호소한다. 대개의 경우 울분은 내재적 원인이 아니라, 자아를 둘러싼 인간과 관계와 사건이 원인제공자로 등장한다.얼마 전 한국인의 울분을 점수로 환산한 기사가 눈에 들었다. 한국인 성인남녀의 14.7%에 이르는 사람들이 중증(重症)의 울분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얘기. 동시대 도이칠란트 성인들은 불과 2.5%만 그런 증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도이칠란트 국민의 6배 가까운 한국인이 중증의 울분상태에서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이다.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토록 높은 비율의 울분을 강제하고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지구 유일국가 대한민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 기사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정의 부재 및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무시하는 사회구조가 울분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사회-경제적으로 하위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중산층이나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보다 울분지수가 높았다. 예컨대 작년에 급격하게 오른 부동산 보도에 분노하고 절망한 사람들 대다수는 무주택자 하위계층이었다. 그들은, 당연한 얘기지만, 민주화된 한국사회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직장을 구하는데 무진 애를 먹거나, 일터에서 온전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극심한 울분장애를 경험한다고 한다.기사를 읽다가 생각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시대 한국사회에 가장 결정적으로 결여된 미덕이 무엇인지 숙고한다. 그것은 평등과 공정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사회-경제-정치-문화적인 불평등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불공정과 불의의 수인(囚人)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부모와 국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까닭에 ‘스카이캐슬’은 불가피하게 우리의 일생을 불평등과 불의로 낙인(烙印)하고 강제한다.여기 더해 소수지만 뼛속 깊이 타락하고 부패한 정치 모리배들의 끈질긴 행악질이 우리의 울분을 자아낸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을 여전히 폭도들과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우겨대는 극우 악질분자들의 패악(悖惡)은 우리의 정서를 극도로 자극한다. 부패-무능-타락-패거리주의로 엮인 정파의 인간들이 아무 수치심 없이 외쳐대는 간첩과 폭도 운운은 범죄수준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그자들이 얻는 것은 국회의원의 한시적인 특권일 뿐.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분간하지 못하고 내갈기는 그자들의 언사는 토악질마저 불러일으킨다. 그자들이 유수한 대학과 육사 출신이라며 사람들을 호도(糊塗)하는 양상을 보노라면 을사오적(乙巳五賊)이 절로 떠오른다.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역사도 민중도 국가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희대의 도둑질 괴수집단. 장자는 도둑질에도 다섯 가지 도(道)가 있다고 일갈했다. 성(聖), 지(智), 용(勇), 의(義), 인(仁)이 그것이다.국가와 역사와 민중을 도둑질하지 않는 품격과 자질을 갖춘 자들의 공간으로 국회가 거듭날 때 우리의 울분지수도 하락하지 않을까.

2019-02-20

웃음과 눈물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거나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면 평정심과 분별력이 쇠해진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무고(誣告) 수준으로 꾸며대며 음해하는 자나, 자명한 사실마저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와 대면할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 지경에 이르면 장삼이사들은 분노하거나 대경실색하기 십상이다. 음모와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인 사람이 창졸간(倉卒間)에 그런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면 크게 노하여 붉으락푸르락하기 마련이다.웃음에 관한 서책을 읽다가 혼자 미소짓는다. ‘현자들은 무엇을 보고 웃나’하는 부제(副題)를 가진 ‘웃음의 철학’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공감한 것이다. 서양철학의 근간이라 거명되는 플라톤은 철학에서 웃음을 추방시킨 인물로 호가 나있다고 한다. 이성과 덕을 논의하는 자리에 웃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생각을 피력한 플라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부박(浮薄)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 판결을 받은 사건이 그를 웃음과 격절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플라톤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의 일정분량을 웃음과 희극에 할애한다. 스승과 결이 다르게 웃음을 바라본 셈이다. 하지만 ‘시학’의 본령이 서사시와 비극에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 역시 웃음에 많은 하중(荷重)을 부여한 것 같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은 웃음에 관한 유의미한 저작이다. 형사추리소설 형식으로 웃음과 희극을 다루면서 ‘시학’제2권을 추적하고 있으니 말이다.“만물의 근원은 원자와 공허다. 다른 모든 것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사념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을 내세운 철학자가 데모크리토스다. 특정한 공간을 채우는 가장 작은 단위이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물질적인 요소가 원자다. 그런 원자와 원자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 즉 공허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데모크리토스. 우리는 그것을 ‘원자론’이라 부르고, 그것은 무신론과 직결된다. 원자와 공허의 세상에 신을 위한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과도한 운동이나 지나친 정숙을 경계하고 알맞은 정도(metron)를 추구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웃는 철학자’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인간과 세상사를 유쾌하게 웃은 인물이었다. 그가 명랑함을 기질적으로 타고 났는지, 혹은 동시대인들의 어리석은 광대놀음을 비웃었는지 알 도리는 없다. 그러하되 그가 남긴 명언은 음미할 만하다. “바보들만 삶에 대한 기쁨이 없다.” 지나친 진지함과 엄숙함을 경계하는 경구 아닐까?!반면에 ‘침울한 현자’로 알려진 헤라클레이토스는 유명한 인간혐오자로 타인과 교제를 끊고 산에 들어가 외롭게 살았다.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부도덕으로 인해 분노상황에 직면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그런 행위를 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애도했던 비관주의 철학자가 헤라클레이토스였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은 분노하지 않고, 웃음이나 눈물로 분노를 극복한 셈이다. 그들은 끝내 분노하지 않았던 것이다.흥미로운 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60세로 세상과 작별했다면, 데모크리토스는 100세에 이르러 고통 없이 태연하게 죽음과 대면했다는 사실이다. 웃음의 힘은 눈물의 그것을 능가하는 모양이다. 한국인들은 자칭 의사이자 우심한 건강병환자로 평생 살아간다.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대할 때마다 우국충정과 지역사랑으로 분노와 울분과 흥분으로 밤잠 설치는 분도 적잖다. 무병장수를 희구하는 그들에게 ‘웃고 사시라!’는 조언을 전하고 싶다.분노는 분노로 해결되지 아니하고, 복수는 복수로 마감되지 않는 법. 분노를 야기하는 대상의 본질을 통찰하고 시원하게 웃음보를 날려 보내는 것이 자신과 세상에 유익한 선택일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훼손하고 모욕하는 모리배(謀利輩)들에게 분노하기보다는 풍자(諷刺)의 매서운 웃음으로 제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2019-02-13

영화와 현실의 거리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그거 소설 아니야, 정말 극적(劇的)이네, 같은 말과 동의어로 떠오르는 것은 영화 같네, 일 것이다. 드물긴 하지만 발생 가능한 사건을 두고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끌어들여 표현한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고, 세계는 극장이다!”라는 공식에 충실한 극작가였다. 모든 것이 열려 있고 가능해진 르네상스 시대를 연극무대로 실현한 인물. 그래서인지 모르되 그의 드라마에는 예기치 못한 발견과 급전(急轉), 희귀한 살인과 배신이 난무한다.영화관에서 ‘가버나움’을 보다가 문득 현실과 영화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작년에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가버나움’은 무거운 문제를 제기한다. 열두어 살 난 소년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것이다. 소년은 여동생 남편을 칼로 찔러 복역(服役)하고 있던 터. 범죄자 아들을 두었다고 괴로움과 고통을 호소하는 부모. 부모에게 아이를 그만 낳으라 일갈(一喝)하는 소년 자인. 무엇인가, 그의 속내는?!우리는 자인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동네 약국을 전전하면서 거짓말로 약사를 속여 마약 성분이 함유된 약을 구하는 자인. 그것이 그들 가족의 든든한 생존담보가 된다. 시리아 난민으로 6년 넘도록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자인의 가족. 하지만 자인의 동생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도 우리는 모른다. 얼마 전에 생리를 시작한 여동생 사하르. 그녀에게 생리대 구할 돈이 있을 리 없다. 속옷으로 생리대를 만들어주는 자인.불편한 걸음걸이로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사하르.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잡아내는 영사기. 그토록 어리고 여린 소녀를 동네 점방 주인에게 팔아넘기는 자인의 부모. 사하르의 절망적인 거부와 자인의 맹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건장한 사내에게 넘겨진다. 딸아이를 팔아서라도 목구멍에 풀칠해야 하는 자인의 부모. 자식을 낳아 팔아버리는 비정(非情)한 부모를 인정할 수 없는 자인. 그들의 대결 구도로 영화는 진행된다.‘가버나움’을 보면서 의외의 사실에 문득 놀라게 된다. 1982∼1983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80년대 말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베이루트. 영화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내전 시기에 발생한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선연하게 재연한다.가출한 자인이 케냐에서 온 불법 체류자 라힐과 만남으로써 영화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객석을 인도한다. 거액을 주어야 얻을 수 있는 여권을 손에 넣으려는 라힐. 그녀의 어린 아들 요나스를 돌봐주며 생계를 잇는 자인. 그들의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동거가 냉엄한 현실과 맞닥뜨림으로써 자인은 오갈 데 없는 요나스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다. 관객은 자인이 언제 요나스를 포기할 것인지에 집중한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익숙한 현실이므로!베이루트에는 불법 체류자들의 아이를 사들여 외국에 내다 파는 인신매매단이 성행하고 있다. 자인은 말도 하지 못하는 젖먹이 요나스를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한다. 자신의 경험과 타고난 심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인. 그가 보여주는 영웅적인 투쟁과 인간애에 우리는 가슴 먹먹해진다. 그는 사하르를 포기한 부모와 확연히 다른 인간이다. 너무 이른 나이의 혼인과 임신으로 인한 사하르의 비극적인 운명과 자인의 칼부림이 영화를 극적인 소용돌이로 몰고 간다.출생기록도 없는 소년이 법정에서 소리친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생물적 욕구로 자꾸만 아이를 낳는 자인의 부모. 그것에 반기(反旗)를 든 소년 자인. 천륜이 무너지는 세상을 아침저녁으로 확인하는 21세기 한국사회가 그나마 나을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안도. 어쩌면 그런 안도감으로 영화관을 맥없이 나섰는지도 모르겠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막장을 애써 외면하는 부실한 인간의 자화상을 확인하면서!….

2019-02-06

예타면제와 균형발전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월 29일 정부는 사업비 24조원에 이르는 23개 사업의 예비타당성 (예타) 조사를 면제했다. 예타조사는 국가예산으로 추진하는 대규모 공공사업이 경제성, 정책성, 지역균형발전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사업실행여부를 평가하는 사전조사를 뜻한다. 그것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개인과 정파의 자의적인 국가예산 오남용을 방지하는 최소의 안전장치다. 그런데 촛불로 출범한 정권이 지난 정권들의 그릇된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정부가 내세운 예타면제 근거는 국가의 균형발전이다. 경제부총리는 “수도권과 여타지역의 격차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 오기 전에 균형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예타면제의 일차적인 목적이며, 경제 활력 제고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말한다. 이런 논조는 1월 24일 대통령의 지적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우리가 경제성보다 균형발전에 중점을 두고 있음에도 예타조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지자체 사업이 많아 예타면제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효율적인 예산집행을 위해 국가가 여러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라 전체를 고르게 발전시키기 위한 방향이라면 쌍수 들어 환영해야 마땅하다. 그러하되 예타면제 대상사업 선정을 둘러싼 작금의 논란은 면밀히 들여다볼 구석이 없지 않다. 우리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 4대강 사업이나 경인 아라뱃길 사업 같은 대표적인 혈세낭비 사례 때문이다.200만 년 넘게 흘러 자연스레 조성된 강을 마구잡이로 파 뒤집고 시멘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강을 죽이는데 불과 2년 만에 24조원의 거액을 탕진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4대강 사업.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과 얼추 비슷한 시기인 2009년 중국은 ‘항주오 (港珠澳) 대교’를 착공하여 2018년 준공한다. 홍콩과 주해, 마카오를 바다 위로 연결하는 세계최장의 기념비적인 다리로 길이가 55km에 이르며, 해수면 다리길이만 해도 23km에 이른다.왕복 6차선 다리로 홍콩과 마카오를 연결함으로써 그동안 자동차로 4시간, 배로 1시간이 소요되던 홍콩-마카오 운행시간이 30분대로 단축됐다. 우리가 일쑤로 얕잡아보는 중국의 저력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중국을 사회주의 통제사회라고 하지만 그들은 국가경제와 인민의 복리민복을 위해 22조원 예산으로 세계건설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자연을 파괴하고 천문학적인 예산을 탕진한 4대강 사업과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다.예타면제는 예산낭비 우려와 아울러 정치적 판단을 고려해야 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내년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다. 중요한 선거를 목전에 두고 권력을 장악한 정권이 예산을 전횡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도입된 것이 예타조사다. 따라서 24조원이 투입될 공공사업의 예타면제는 ‘이하부정관 (李下不整冠) 과전불납리 (瓜田不納履)’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여기저기서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시점이다. 그런 연유로 청년 일자리 창출과 사회 저소득층의 사회적 안전망확충 같은 사안이 절박한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토건사업에 거액의 예산을 집행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시간과 더불어 예타면제 사업이 얼마나 타당성 있는지 여부가 드러날 터이나, 무엇인가 찜찜한 생각이 고개를 내밀고 있음은 진지하게 부정하기 어렵다.예타면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원칙에 입각하여 원칙을 지키고 원칙에 따라 평가받겠다는 현 정권의 정치철학이 훼손되지 않을지, 하는 우려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내세운 금과옥조(金科玉條)인 ‘원칙’을 타협하고 한 걸음 물러섬은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자세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예타면제를 재삼재사 숙고하여 국가예산의 효율적인 집행과 나라 전체의 균형발전을 이뤄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9-01-30

어린왕자와 동주평전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오래 전에 읽은 책을 다시 만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있는지, 왜 하필이면 그 책을 읽었는지. 여러 가지 소회가 찾아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옛사랑이나 까맣게 잊힌 친구와 재회하는 일과는 결이 다른 감정과 추억이 찾아드는 것이다. 더러는 책갈피의 색 바랜 흑백사진이나 잘 마른 낙엽 혹은 행간에 적어 넣은 단상이 젊은 날을 반추하도록 인도한다.연말부터 프랑스 문학을 읽고 있다. 기존에 읽은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위스망스의 ‘거꾸로’, 보마르셰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 몰리에르의 ‘타르튀프’와 ‘서민귀족’에 카뮈의 ‘페스트와 졸라의 ‘목로주점’을 덧댔다. 프랑스 작가는 아니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한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이케타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추가되었다.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순정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를 원작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연히 그것도 독서목록에 더할 요량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로 한 시점에 등장하는 인간군상과 그들이 마주했던 시공간과 사건이다. 혁명전후 100여 년 프랑스와 유럽을 뒤흔들었던 전변(轉變)의 인물들은 어떤 세상과 인생을 꿈꾸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그런 점에서 ‘페스트’와 ‘어린왕자’는 한 발 비켜서 있다. 특히 ‘어린왕자’가 그러하다. 거대한 역사적 사변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강력한 심장의 고동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언제나 혁명과 사건과 투쟁과 갈등을 당연한 전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도 아이는 태어나고, 사랑과 이별이 있으며, 지진과 해일이 덮치는 와중에도 장미는 피어나기 때문이다.약관 스무 살 무렵 내가 아침저녁으로 들고 다닌 서책은 ‘어린 왕자’와 ‘윤동주 평전’이었다.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아서 영어로 된 ‘어린왕자’와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윤동주 평전’이었다. 기실 학부시절에 나는 그다지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한잔의 좋은 술, 한편의 좋은 영화, 한판의 좋은 바둑’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휴강했다. 그럼에도 윤동주, 서정주, 김소월, 김수영 같은 시인들의 작품은 줄기차게 읽고 생각했다.‘어린왕자’는 읽다가 덮고, 감동하고 다시 읽고 심호흡하며 느끼곤 했다. 그러다 마음에 다가오는 친구나 여성이 있으면 군말 없이 선물했다. “한번 읽어보세요!” 하는 말과 함께. 그런 서책을 수십 년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읽노라니 옛 생각이 스멀스멀 찾아온다. 지금도 기억에 선연한 것은 여우가 말한 ‘길들인다는 것’의 함의다. 관계를 맺는다는 말로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설파하는 여우. 왕자는 별에 두고 온, 여리지만 자만심 강한 장미를 떠올린다.선로 변경원의 말처럼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하지 못한’ 어린왕자가 황량하고 삭막한 지구에 와서 여우의 도움으로 깨닫게 된 삶의 진리는 길들인다는 것이었다. 여우는 말한다.“우리는 자신이 길들인 것만 진정으로 알 수 있어. 너의 장미가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네가 길들인 대상에 대해 넌 영원히 책임져야 해.”‘어린왕자’를 읽은 다음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길들인다는 것’의 묵직한 함의는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동주의 ‘서시’를 좋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왕자와 그가 길들였던 장미가 깊은 밤 B612호에서 환하게 빛나는 하늘을 우러르는 버릇도 그 시절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이젠 ‘어린왕자’와 ‘동주평전’을 전할 사람 하나 없으매, 그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2019-01-23

시간강사를 묻으려 하는가?!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묻어버린 희대의 사건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한다. 550년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의 종결자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차단하려 저지른 행악질이다. 진나라는 효공 (孝公) 이래 법가(法家)로 부국강병에 성공한다. 전국 7웅 가운데 최약체였던 변방의 진나라를 강성대국으로 인도한 장본인은 상앙(~ 기원전 338)이었다. 그의 행적은 사마천의 ‘사기열전’ 가운데 ‘상군열전’에 빼곡하다.상앙은 가혹하리만큼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다가 효공의 죽음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으로 생애를 끝막음한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그가 제정한 법령이었다. 통행증이 없으면 손님과 함께 객사(客舍)의 주인이 벌을 받는 연좌제를 만들었던 상앙. 자신의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비운의 개혁가 상군. 사마천은 상군의 비참한 최후를 각박한 천성에서 찾았다. 인간 위에 군림한 포악한 법령제정과 실행자의 최후를 경계한 것이다.진시황 ‘정(政)’은 분서를 하되 의약, 점복 (占卜), 농서분야의 서책은 태우지 않았다. 국가의 경제적 기반인 농업에 긴요한 서책과 백성의 질병과 건강관련 서적, 국가 중대사를 논의할 때 필수적인 복서(卜筮)관련 서적, 예컨대 ‘역경’ 같은 서책은 온전히 보존했다. 자신의 정치적 기획과 실행에 반대하는, 말만 많은 유생(儒生)들의 사유와 인식의 기반이 된 서책을 진시황은 공리공론으로 몰면서 관련 서적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생매장한 것이다.2019년 가을학기부터 강사법이 전면적으로 실행된다. 전임정권들이 뜨거운 감자로 인식하여 네 번씩이나 ‘폭탄 돌리기’ 식으로 미루고 미뤘던 강사법.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시대적 요청이라는 사명의식에 기초하여 강사법을 미루지 아니하고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학기 중에만 강사료를 받고, 방학 기간에는 무일푼으로 지내야 했던 강사들의 물질적 보상과 최소한의 교원 신분 보장을 골자로 한 내용의 강사법 시행이 목전에 이른 셈이다.나는 원칙적으로 강사법 시행에 적극 찬동한다. 강사와 교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間隙)의 심연을 오래 보아온 사람으로서 강사법은 강사를 위한 작지만 단단한 디딤돌로 작용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문제는 국가와 대학당국이 강사법 시행에 따른 재정문제를 논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학기부터 경향각지(京鄕各地)의 크고 작은 대학들이 강사 목줄 조르기에 들어갔다. 강사들의 대량해고가 목전에 있다.올 가을에 대학이 선발하는 강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강사들은 창졸간(倉卒間)에 실업자로 전락하게 된다. 강사법에 따르면, 시간강사 1인에게 최소한 2과목을 부여해야 한다. 따라서 기존에 대학에서 1과목만 강의했던 강사들의 밥줄은 자동적으로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문제에 직면하여 교육부도, 대학도 명쾌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야기하는 결과는 불을 보듯 자명하다. 진보적인 총장이 들어선 상지대, 성신여대, 평택대 같은 대학은 기존의 강사들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주고 있다.“진리탐구의 도량인 대학이념을 구현하고, 학문후속세대의 연구를 위해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사고용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긴 장마 끝에 찾아든 청량한 빗줄기이자 감로수처럼 보인다. 세계교역 7위이자 경제규모 13위라는 나라에서 미래의 동량(棟梁)을 키워내는 강사들의 물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는 국가의 실체가 허망하다. 봉건시대 절대군주 진시황은 지식인 입막음용으로 분서갱유를 실행했다. 금전이 최고의 가치인 후안무치의 사회에서 강사를 물질적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그들을 생매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강사를 살리고 대학을 학문의 공론장으로 일으켜 세우는 노력이 화급한 시점이다.

2019-01-16

반(反) 유토피아 소설과 아베 신조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20세기는 격동의 세기다. 전기와 석유, 내연기관과 플라스틱,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등으로 대표되는 2차 산업혁명이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가능케 한다.그와 아울러 러시아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1∼2차 세계대전, 한국동란과 베트남전쟁, 사회주의의 퇴조와 소련 및 동구 실존 사회국가들의 몰락 같은 사회·정치적인 격랑(激浪)이 지구촌을 강타한다.미증유의 역사적 사변을 목도한 대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그래서일까. 지난 세기 초중반에 세계적인 반 유토피아 소설이 등장한다.첫 번째는 사회주의 소련의 작가 예브게니 자먀틴이 집필한 ‘우리들’(1924)이다.‘은혜로운 분’이 홀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되, 이름도 없이 숫자와 기호로 표시되는 다수 대중은 자유의지를 완전 망각한 채 누구나 동일한 일상을 영위해 나간다.인간이 주고받는 사랑이 전체주의 체제를 전복(顚覆)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란 확신을 가진 여주인공 I 330. 그녀는 사랑에 호응하는 남자 D 503을 자유의 편으로 인도한다. 그들이 경험하려는 신생(新生)과 신세계의 열망이 어떠한지, 과연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지, 거기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무엇인지, 그런 면이 우리의 흥미를 자아낸다.1932년에는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장편소설 ‘멋진 신세계’를 출간한다.태어날 때부터 알파부터 감마 등급까지 인간을 배양기에서 생산하는 미래사회. 등급에 따라 세계를 지배하는 10인 총통의 일원이 될 수도 있고, 하수구 청소부로 전락할 수도 있다.2535년을 시대배경으로 하는 ‘멋진 신세계’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배제한 전체주의 통제사회를 그려낸다.가족과 가정, 일부일처제가 폐지되고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라는 논리가 지배적인 세계국가에서 사랑을 매개로 한 남녀관계는 허용되지 않는다.거주민들은 괴롭거나 불편하거나 외로움을 느끼면 ‘소마’라는 알약을 먹는다. 행복감과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소마는 그들에게 열락과 희열을 제공한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말로 세뇌된 그들에게 야만인 구역의 청년 존이 나타남으로써 사건이 역동성을 얻게 된다.자먀틴과 헉슬리의 뒤를 이어 조지 오웰(1903∼1950)이 1949년에 ‘1984’를 세상에 내놓는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등장한 희대(稀代)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빅브라더로 상정한 소설이 ‘1984’다.“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대형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고, 텔레스크린으로 사람들을 감시하는 통제사회.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이란 표어가 내걸려 있는 오세아니아 진리부의 건물.소설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잠재된 저항의식으로 줄리아와 금지된 사랑을 하고 해당(害黨)행위를 하다가 고문실에 구금된다.2 더하기 2는 4라는 자명한 이치를 부정해야 하는 스미스. 2 더하기 2의 해답은 빅브라더와 당이 결정한다.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의 ‘무오류설’을 주창했던 1940년대 소련의 실상을 풍자하고 공격하는 조지 오웰. 그것에 대한 저항은 역사의식과 자유의지로 무장한 대중의 각성과 투쟁에 있다고 믿은 오웰.반 유토피아 소설을 거명한 까닭은 아베 신조 때문이다. 정치적 입지가 취약해질 때마다 한반도를 물고 늘어지는 아베의 술수가 고약하다. 한반도 분단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북한 핵을 과장해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헌법을 수정하려는 아베. 한국 해군함정과 일본 초계기의 충돌을 문제삼아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아베 신조. 그의 행악질을 보면서 각성한 대중의 힘이 작용하는 한국과 깊이 잠든 이웃나라 일본을 떠올리는 것이다.

2019-01-09

두 발로 꼿꼿하게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동면(冬眠)에 들어간 반달곰은 무술년이 기해년으로 바뀐 것을 알고 있을까.어제 떠오른 태양과 내일 떠오를 태양은 하나임에도 새해 일출 여행객은 줄어들 기색이 없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무리지어 동해안으로 출정하게 하는가?! 오며가는 누추하고 피로한 여정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도록 하는 흥분제 성분은 무엇인가. 미련일까, 회한(悔恨)인가 그도 아니면 신년에 거는 다대한 꿈과 기대일까.구랍 31일 동료교수의 반가운 전화를 받는다. 무겁지 않은 덕담과 회고 끝자락에 그의 모친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얘기를 듣는다. 여든한 살 연세에 걷지 못한다는 전언(傳言)은 사뭇 무겁게 들려왔다. “고관절이 안 좋아서 늘 누워만 계세요.” 문득 85세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골골하지만 아직은 경로당 출입이 자유로운 어머니. “밥 지을 사람 없어서 경로당도 문 닫게 생겼어야.” 명석한 총무로 성가(聲價)를 올리는 모친의 걱정스런 목소리.나이든 사람에게 암보다 치명적인 상황은 걷지 못하는 것이다. 걷는 데 문제없는 사람은 이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 나도 아툴 가완디의 서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를 읽었을 때조차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자기 마음대로 화장실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당신은 몰라요!” 서책에 나오는, 걸을 수 없게 된 할머니의 말이다. 극심한 위통(胃痛)에 시달리다 한밤중에 찾아간 응급실에서 사태의 진실과 대면했다. 내가 누운 침상 맞은편에 70초반의 남성이 누워있었다. 링거와 투석기를 꽂은 채 익숙한 자세로 누워있던 그이. 잠시 뒤에 견디기 어려운 악취가 풍겨져 나왔다. 그렇다. 그가 누운 채 기저귀에 대변을 날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낮은 비명과 코를 움켜잡는 인총의 종종걸음이 들리고 보인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이미 걸을 수 없는 중환(重患)의 몸이었으니.어쩌자고 저런 몸이 되었을까, 생각한다. 생각하다 나를 돌이키니 같은 꼴이다. 걸을 수 있는 다리 유무(有無)의 차이만 있을 뿐! 젊어서 육신과 영혼을 소진하다 못해 질탕하게 날려버린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백지 한 장 차이 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돋고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하다. 잠시의 희열과 광기에 휩싸여 날려 보낸 술잔과 희떠운 허언(虛言)과 육체의 기진상태를 자초했던 청춘시절. 그 결과 찾아든 칼로 찌르는 위통. 어릴 적부터 들어온 ‘지덕체’ 삼위일체가 이젠 우습게 느껴진다. 지식을 선두에 두고 몸을 꼬리에 두는 어리석음이 한눈에 보인다. 몸이 부실하거나 부재하면 지식 역시 탐탁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다. 몸의 손상과 정지는 지식의 손상과 멈춤을 유발한다. 그러나 지식의 부재나 작동불능 상태에도 몸은 스스로 거동하고 작동한다. ‘의식주’가 아니라 ‘식주의(食住衣)’가 되어야 하는 이치와 동일하다. 관념의 수인(囚人)으로 살아온 구시대 유습의 자취가 완연하다.요컨대 “건강한 육신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스스로 설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요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자립(自立)이란 어휘는 두 발로 꼿꼿하게 대지를 딛고 하늘과 태양을 떠받치는 형상이다. 타자의 도움 없이 제 발로 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자립이다. 강자들의 시선과 언동에 구애받음 없이 당당하고 의연하게 갈 길을 선택하는 것이 자립의 근본이다. 지난해 남과 북, 북한과 미국은 적대행위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관계설정에 합의했다. 그것은 남과 북의 자립과 역량에서 출발한다. 홀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의 초입(初入)에 도달한 원년이 무술년 2018년이다. 기해년을 맞으며 나는 자립과 선택적 역량강화를 희망한다. 누워서 민폐를 끼치는 사회와 국가가 아니라, 두 발로 꼿꼿하게 자립하면서 주위에 광명을 던지는 화사한 청춘처럼!

2019-01-02

환갑(還甲)과 환갑(換甲) 사이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여덟 살 때 외할머니 환갑잔치가 있었다. 열흘 넘도록 음식준비로 집안이 시끌벅적했고, 어른들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어린 우리들은 구수한 냄새 넘쳐나는 부엌을 날랜 다람쥐처럼 넘나들며 이것저것 입에 넣기에 신이 났다. 우리가 알았던 정보는 ‘환갑’이란 어휘뿐이었다. 그것에 담긴 의미 반추는커녕 기본적인 뜻풀이조차 알지 못했던 천둥벌거숭이였던 시절.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그때의 활기와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흥분이 기억에 새롭다.마침내 그날이 왔다. 은비녀로 곱게 쪽머리하신 할머니가 토끼조끼와 한복치마로 한껏 멋을 내고는 병풍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셨다. 의자 앞에는 그 동안 준비한 갖은 음식물이 담긴 거대한 잔칫상이 놓였고. 반백의 할머니가 엄숙하고 긴장된 독사진을 찍는 동안 우리는 옆에 서서 침만 삼키고 있었다. 이제는 구겨지고 탈색한 흑백사진으로 남은 그날 정경은 1960년대 한국농촌의 흔한 ‘환갑잔치’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세월이 물처럼 바람처럼 달처럼 제비처럼 흐르고 또 흘렀다. 산천이 의구(依舊)하지 못한 지 어언 다섯 차례가 지나고 내가 외할머니 나이가 되었다. 서럽고 안쓰럽던 1960년대가 충격과 격동의 70년대로, 혁명적 파란의 80년대를 지나, 희망과 절망의 나락 90년대를 거쳐, 대망(待望)의 21세기 첫 번째 10년을 경유해, 2018년 세밑에까지 이른 것이다. 여덟 살 까까머리 소년의 머리에도 허옇게 상고대가 피어올랐다.모든 세대는 지나간 세대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명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이전시대의 위대함과 풍요로움을 예찬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4.19세대나 유신세대를 기리는 광주항쟁세대 혹은 87세대처럼, 요즘 세대는 87세대를 우러른다는 인상을 준다.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거대담론’을 향수(鄕愁)하는 일부 청년세대에 국한될지라도, 그것은 시대와 역사를 향한 깨어있는 인간의 자연발생적인 예찬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미소(微小)한 것들로 충만한 시대를 살다보면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것들에 눈이 많이 가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않고 터져 나오는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에 대중은 더 이상 유념하지 않는다. 유치원 사태에 대해서는 어린아이 부모들과 유치원 주인들이, 카풀문제에 대해서는 택시업자와 정부 당국자가, 시리아 철군문제에 대해서는 극소수 세계주의자들만이 귀추(歸趨)를 주목하면서 사태추이를 관망한다.대중은 먹을 것, 탈 것, 볼 것, 놀 것에 열광하지만, 그것들마저 이내 시큰둥하게 대한다. 사정이 이러니 10년이나 20년 혹은 한두 세대 이후의 미래전망이나 기획이 들어설 최소한의 공간조차 없다. 그러하되 60년 세월은 지극히 무겁고 엄중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현동 정동유 선생은 ‘환갑(還甲)’을 그저 60갑자 한 바퀴를 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육십갑자로 바뀐다는 의미로 ‘환갑(換甲)’을 이해했다. 한 바퀴 돌았으니 자동적으로 그 다음 바퀴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바퀴에 진입했다고 생각하는 동적이고 입체적인 사고방식이다. 나이만 많이 먹은 허다한 철부지들이 거들먹대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매우 적실한 사유가 아닐 수 없다.새로이 시작될 육십갑자를 목전에 두고 나는 요즘 간단치 않은 육체적 재건축에 나서고 있다. 이미 우심한 내장질환에는 치료약으로, 신통찮은 이는 이리저리 덧씌우고, 급기야는 백내장 수술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렇게라도 수리해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올 인생 3막을 대비하고 있는 셈이다. 58개띠들의 상승(常勝)과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한다!

2018-12-26

시(詩)와 국어 ‘불수능’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올해 대학 수학능력시험은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특히 국어 31번 문제는 천문학, 역사학, 철학, 과학이 뒤얽힌 기나긴 지문(地文)을 이해한 극소수의 학생만이 풀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예술 관련서적을 두루 통독(通讀)해온 사람으로서 문제의 어려움을 통감한다. 거기 덧붙여 한 가지 의문이 문득 고개를 든다. ‘무슨 까닭으로 이토록 난해한 문제를 냈을까?’ 누구를 위한, 무엇을 겨냥한 문제인가, 하는 물음!1913년 3월 러시아의 스물네 살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저녁에’라는 단출한 서정시를 창작한다. 바이올린 연주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고, 식탁의 얼음 접시에는 신선한 바다냄새를 풍기는 생굴이 담겨 있다. 노란 속눈썹 아래 웃고 있는 남자의 두 눈은 마주앉은 여인을 사랑스러운 새나 고양이 바라보듯 한다. ‘나는 믿을만한 친구요!’ 라고 말하면서 그는 여인의 옷을 건드린다.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와 처음으로 단둘이 있음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도한다.여기서 독자들께 문제를 내보겠다. 굴 접시 옆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남녀가 마주앉아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이번 학기에 러시아 문학사를 가르치다가 학생들에게 아흐마토바의 ‘저녁에’를 소개했다. 칠판에 4연 16행의 시를 러시아어로 쓰고, 세 번 한국어로 번역해 주었다. 그리고 독자들께 제시한 똑같은 문제를 내보았다. 여러분은 분명히 어렵지 않게 정답을 떠올릴 것이다. 무척 쉬운 문제이므로! 그렇다. 백포도주와 레스토랑.몇 년 전에 어떤 학생은 ‘초장’이라고 말했다가 꿀밤을 맞은 적 있었다. 박장대소하던 학생들과 어울려 나도 큰소리로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하기야 초장없이 생굴을 먹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와사비장을 찍어 먹을 수도 있으련만! 문제는 학생의 내면에 자리한 ‘문화’ 혹은 ‘관습’이 내게는 생경(生硬)했다. “그렇다면 초장말고도 젓가락과 앞 접시도 있어야겠구나!” 슬며시 부아가 나서 나는 그렇게 응대했다.그럼에도 우리는 유쾌했으며, 그들의 대면장소가 레스토랑이라는 사실을 당연지사로 이해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남녀가 저녁나절에 벗들을 젖혀두고 오붓하게 두 사람만의 첫 대면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번학기 학생들은 ‘초장’은커녕 만남의 장소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초장 얘기를 꺼냈지만 웃는 학생은 없었다.“여러분은 생굴을 어디서 먹어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저녁안개가 퍼져 나가는 여러분의 집에서 바이올린 소리 들으면서 굴을 먹나요?”나의 내부에서 현악기의 줄이 툭, 하고 끊어진 것같은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종강(終講)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의 나로서는 맥이 탁,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해왔던 숱한 문학논의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저토록 단순한 글줄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형식주의니 상징주의니 자연파니 위스망스의 ‘거꾸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래서다. ‘불수능’이니, 융합이니, 천문학과 철학, 역사와 과학이 모여 짜낸 기막힌 텍스트니 하는 것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평이(平易)하고 간명한 서정시 하나 이해할 능력이 없는 학생들이 거점 국립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판국에 무슨 융합이란 말인가?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누구를 위한 시험이며, 왜 필요한 것인지, 재삼재사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생각 말이다.시험을 위한 시험, 난해함을 위한 난해함이 아니라, 짧은 글이라도 온전하게 이해하도록 인도하는 그런 시험이 되기 바란다.

2018-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