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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북매일과 시민기자제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경북매일이 흥미로운 알림장을 게재했다. 신문사가 ‘시민기자제’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이다. 문자 그대로 신문의 독자가 신문기자가 되어달라는 취지다. 전통적인 종이신문은 신문제작자와 구독자를 엄밀하게 구별한다. 기자와 독자 사이에 기사 생산자와 수요자라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넘사벽’이 존재했다. 그런 강고하고 유구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무너뜨림으로써 언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것이 경북매일의 의지다.알림장에 따르면, 경북매일은 ‘시민참여 저널리즘’을 추구해왔다고 한다. 어느 일방의 주장이나 입장이 아니라, 독자의 견해를 적극 수용해왔다는 얘기다. 여기 더해 경북매일은 급변하는 언론지형을 직시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한 다양한 매체가 등장했고, 1인 미디어도 성장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지난 2000년 2월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창간했고,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인터넷매체가 출현했다.요즘에는 ‘유투브’가 대세를 장악하면서 1인 ‘유투브’를 포함한 1인 미디어가 극성(極盛)하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전제한 언론지형이 부지불식간에 바뀌고 있는 것이다. 상황변화의 중핵에는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자리한다.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각종지식과 정보를 손바닥 안에서 가능하도록 인도한 스마트폰. 게다가 사진과 동영상을 실시간 탑재할 수 있는 능력까지 제공하는 기술문명의 총아 스마트폰.인간의 대표적인 욕망에는 물욕, 권력욕, 명예욕이 있을 터. 전자의 두 가지 욕망은 충족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문화 권력으로 표상되는 글쓰기를 통한 명예확보는 어렵지 않다고들 생각한다. 한국인은 대단히 역동적이며 강렬한 참여욕망의 소유자다. 구경꾼도 좋지만, 대상의 평가와 기준에서 단호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다. 1인 미디어나 참여 저널리즘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시민이 독자이자 동시에 기자가 된다면, 거기서 생겨나는 긍정적인 효과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 보면, 우선 그것은 기사의 공정성과 객관성 제고(提高)로 나타나리라 믿는다. ~카더라, 하는 유언비어와 가짜뉴스가 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 기사의 기본 가운데 하나가 ‘육하원칙’이다. 기사에 반드시 들어가는 시공간과 사건주체, 인과율(因果律)이 글의 객관성과 신뢰도를 고양(高揚)하지 않을 수 없다.글을 쓰면서 시민기자는 모자라고 넘치는 능력과 덕성을 확인하게 된다. 넘치는 것은 버리고, 모자라는 점은 보충함으로써 개인능력 신장과 명징한 자의식 및 세계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남들이 써왔던 기사를 비판적으로 독서함으로써 일방적인 수신자이자 소비자의 영역과 본분을 내던져 버림으로써 새로운 세계와 대면할 것이다. 지역과 사회를 넘어서 국가와 동아시아, 세계를 감촉하는 새로운 인식능력 확보! 이 얼마나 장쾌(壯快)한 변화인가?!경북매일은 시민들이 보내는 정치-사회-문화영역의 원고를 검증하여 채택된 글에는 원고료를 지불하고, 신문에 게재할 예정이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기다. 글로써 문명(文名)을 날리고, 고료도 챙기고! 신문사도 마찬가지 이익을 얻는다. 시민의 참여도를 높임으로써 기사가 다양해지고, 질적인 수준도 높아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자연과학과 공학, 의학 같은 전문기사는 신문사의 전문성을 강화하여 언론의 전문화에 일조할 것이다.경북매일이 희망하는 시민기자제가 정착하게 된다면 21세기 한국사회에 만연한 가짜뉴스와 편 가르기, 지역감정과 불신풍조같은 전근대의 소산이 현저히 감소할 것이다. 시민기자제의 성공적인 안착에 기초한 경북매일의 욱일승천(旭日昇天)과 건승을 기원한다.

2019-03-06

3·1운동 100주년에 부쳐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00년은 긴 세월이다. 1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민초(民草)들은 100년 후인 2019년을 상상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19년 순조 19년을 살았던 조선의 백성들이 100년 후인 1919년을 상정하기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하되 21세기 19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2119년을 가늠하려 한다. 시공간의 무한축소와 과학기술문명이 호모사피엔스에게 부여한 선물 덕분이다. 100년 뒤 세상은, 인류는, 지구는, 우주는 어떤 양상일 것인가?!어릴 적 3월이 되면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로 시작하는 유관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만 열일곱 살이 되기 전에 운동에 참여하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부르짖었던 열혈 선구자 유관순. 이화학당 2년생으로 운동에 참가하고,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유관순. 그녀는 100년 뒤 우리나라와 한민족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까?!이른바 33인의 민족 지사들이 하나둘 변절하여 일제 앞잡이로 전락해갔던 것과 대조적으로 순국의 길을 걸었던 유관순.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잔악한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았던 시대의 등불 유관순. 죽어가면서 그이는 조선의 푸르른 하늘을 그리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해방된 조국의 장려(壯麗)한 모습이었을까, 민족 전체가 하나 되어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100년 뒤의 2019년 모습이었을까?!그이가 살아생전 헤아릴 수 없었던 100년 세월 한반도에는 너무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3·1운동 100주년에 각별하게 떠오르는 것은 친일부역자 무리의 색출과 처벌에 실패했다는 뼈아픈 현실이다. 반민특위의 와해(瓦解)로 무산된 반민족행위자 척결은 지금까지도 짙은 암운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부역 매국노들이 반공 투사로 탈바꿈하면서 이 나라 민초들과 독립 운동가들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하는 말로 유명한 약산 김원봉은 3·1운동의 영향으로 1919년 12월 항일무장투쟁의 선두였던 ‘의열단’을 조직한다. 일제가 320억원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 했던 신출귀몰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다. 그러나 해방 후에 약산은 친일부역 악질매국노 노덕술에게 갖은 고문과 치욕을 경험한다. 독립 운동가를 반공의 이름으로 고문하고 승승장구했던 반공 투사들!이런 일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반공 투사들은 훗날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던 숱한 지식인과 청년들을 투옥·고문하고 죽음으로 몰고 갔다. ‘빨갱이 사냥꾼’이 된 것이다. 그것의 정점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분연히 일어선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 죽음의 질곡으로 몰아갔던 사냥꾼들과 그 후예가 제1야당의 간판 아래 버젓이 활개치고 있다.열여덟 나이에 세상을 버린 유관순 열사는 이런 정황을 알고 있을까.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혁명가이자 전설적인 항일전사 김원봉은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깨달았을까?! 그가 꿈꾸었던 민족해방과 조국의 본령이 쥐새끼나 다름없는 친일 매국노와 그 후예에게 처절하게 짓밟힐 것을! 그자들을 대한민국의 역사와 민족의 이름으로 영원히 추방하여 다가올 새로운 100년의 미래를 그리는 작업이 절실하리라.과거를 돌이킴은 지난날의 과오(過誤)를 성찰하고, 다가올 날들의 기획에 필수적이다.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자들의 무리가 역사를, 열사를, 투사를, 민주화 운동가를 다시는 모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소과제일 것이다. 그것은 100년 뒤를 생각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시대적 소명이다.

2019-02-27

울분장애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세상 살면서 사통오달(四通五達) 인생을 향수하는 이는 많지 않다.그것은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아서, 나와 같지 않은 타자로 인해, 기획한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혹은 기대치 충족의 불가(不可)로 인해서 발생한다. 어떤 이들은 불의한 시공간과 부당한 억압으로 울분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열사나 위인으로 존숭하는 유관순이나 윤봉길, 김구 같은 분들이 그러하다. 공적인 영역의 거룩한 울분을 제외하면 우리는 일상의 영역에서 울분을 경험한다.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울분(鬱憤)은 ‘답답하고 분함 내지 그런 마음’을 일컫는다. 한자말을 들여다보면 나무와 나무, 바위로 길이 막혀 답답한 형국과 분노로 인해 감정이 북받치는 상황임을 보게 된다. 명약관화한 길과 해결방도가 있음에도 에둘러야 하거나, 그럼에도 길이 속 시원하게 현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조바심과 갑갑증을 호소한다. 대개의 경우 울분은 내재적 원인이 아니라, 자아를 둘러싼 인간과 관계와 사건이 원인제공자로 등장한다.얼마 전 한국인의 울분을 점수로 환산한 기사가 눈에 들었다. 한국인 성인남녀의 14.7%에 이르는 사람들이 중증(重症)의 울분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얘기. 동시대 도이칠란트 성인들은 불과 2.5%만 그런 증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도이칠란트 국민의 6배 가까운 한국인이 중증의 울분상태에서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이다.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토록 높은 비율의 울분을 강제하고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지구 유일국가 대한민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 기사에 따르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정의 부재 및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무시하는 사회구조가 울분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사회-경제적으로 하위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중산층이나 상위층에 속하는 사람보다 울분지수가 높았다. 예컨대 작년에 급격하게 오른 부동산 보도에 분노하고 절망한 사람들 대다수는 무주택자 하위계층이었다. 그들은, 당연한 얘기지만, 민주화된 한국사회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직장을 구하는데 무진 애를 먹거나, 일터에서 온전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들도 극심한 울분장애를 경험한다고 한다.기사를 읽다가 생각한다. 국민소득 3만 달러시대 한국사회에 가장 결정적으로 결여된 미덕이 무엇인지 숙고한다. 그것은 평등과 공정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사회-경제-정치-문화적인 불평등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불공정과 불의의 수인(囚人)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부모와 국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까닭에 ‘스카이캐슬’은 불가피하게 우리의 일생을 불평등과 불의로 낙인(烙印)하고 강제한다.여기 더해 소수지만 뼛속 깊이 타락하고 부패한 정치 모리배들의 끈질긴 행악질이 우리의 울분을 자아낸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을 여전히 폭도들과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우겨대는 극우 악질분자들의 패악(悖惡)은 우리의 정서를 극도로 자극한다. 부패-무능-타락-패거리주의로 엮인 정파의 인간들이 아무 수치심 없이 외쳐대는 간첩과 폭도 운운은 범죄수준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해서 그자들이 얻는 것은 국회의원의 한시적인 특권일 뿐.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분간하지 못하고 내갈기는 그자들의 언사는 토악질마저 불러일으킨다. 그자들이 유수한 대학과 육사 출신이라며 사람들을 호도(糊塗)하는 양상을 보노라면 을사오적(乙巳五賊)이 절로 떠오른다.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역사도 민중도 국가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희대의 도둑질 괴수집단. 장자는 도둑질에도 다섯 가지 도(道)가 있다고 일갈했다. 성(聖), 지(智), 용(勇), 의(義), 인(仁)이 그것이다.국가와 역사와 민중을 도둑질하지 않는 품격과 자질을 갖춘 자들의 공간으로 국회가 거듭날 때 우리의 울분지수도 하락하지 않을까.

2019-02-20

웃음과 눈물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거나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면 평정심과 분별력이 쇠해진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무고(誣告) 수준으로 꾸며대며 음해하는 자나, 자명한 사실마저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와 대면할 경우가 그러하다. 그런 지경에 이르면 장삼이사들은 분노하거나 대경실색하기 십상이다. 음모와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다혈질인 사람이 창졸간(倉卒間)에 그런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면 크게 노하여 붉으락푸르락하기 마련이다.웃음에 관한 서책을 읽다가 혼자 미소짓는다. ‘현자들은 무엇을 보고 웃나’하는 부제(副題)를 가진 ‘웃음의 철학’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공감한 것이다. 서양철학의 근간이라 거명되는 플라톤은 철학에서 웃음을 추방시킨 인물로 호가 나있다고 한다. 이성과 덕을 논의하는 자리에 웃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생각을 피력한 플라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부박(浮薄)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선고 판결을 받은 사건이 그를 웃음과 격절하도록 했는지도 모른다.플라톤의 뒤를 이은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의 일정분량을 웃음과 희극에 할애한다. 스승과 결이 다르게 웃음을 바라본 셈이다. 하지만 ‘시학’의 본령이 서사시와 비극에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그 역시 웃음에 많은 하중(荷重)을 부여한 것 같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은 웃음에 관한 유의미한 저작이다. 형사추리소설 형식으로 웃음과 희극을 다루면서 ‘시학’제2권을 추적하고 있으니 말이다.“만물의 근원은 원자와 공허다. 다른 모든 것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사념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을 내세운 철학자가 데모크리토스다. 특정한 공간을 채우는 가장 작은 단위이되,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물질적인 요소가 원자다. 그런 원자와 원자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 즉 공허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 데모크리토스. 우리는 그것을 ‘원자론’이라 부르고, 그것은 무신론과 직결된다. 원자와 공허의 세상에 신을 위한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과도한 운동이나 지나친 정숙을 경계하고 알맞은 정도(metron)를 추구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웃는 철학자’라는 별칭을 가진 그는 인간과 세상사를 유쾌하게 웃은 인물이었다. 그가 명랑함을 기질적으로 타고 났는지, 혹은 동시대인들의 어리석은 광대놀음을 비웃었는지 알 도리는 없다. 그러하되 그가 남긴 명언은 음미할 만하다. “바보들만 삶에 대한 기쁨이 없다.” 지나친 진지함과 엄숙함을 경계하는 경구 아닐까?!반면에 ‘침울한 현자’로 알려진 헤라클레이토스는 유명한 인간혐오자로 타인과 교제를 끊고 산에 들어가 외롭게 살았다.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부도덕으로 인해 분노상황에 직면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그런 행위를 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애도했던 비관주의 철학자가 헤라클레이토스였다.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은 분노하지 않고, 웃음이나 눈물로 분노를 극복한 셈이다. 그들은 끝내 분노하지 않았던 것이다.흥미로운 점은 헤라클레이토스가 60세로 세상과 작별했다면, 데모크리토스는 100세에 이르러 고통 없이 태연하게 죽음과 대면했다는 사실이다. 웃음의 힘은 눈물의 그것을 능가하는 모양이다. 한국인들은 자칭 의사이자 우심한 건강병환자로 평생 살아간다.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대할 때마다 우국충정과 지역사랑으로 분노와 울분과 흥분으로 밤잠 설치는 분도 적잖다. 무병장수를 희구하는 그들에게 ‘웃고 사시라!’는 조언을 전하고 싶다.분노는 분노로 해결되지 아니하고, 복수는 복수로 마감되지 않는 법. 분노를 야기하는 대상의 본질을 통찰하고 시원하게 웃음보를 날려 보내는 것이 자신과 세상에 유익한 선택일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훼손하고 모욕하는 모리배(謀利輩)들에게 분노하기보다는 풍자(諷刺)의 매서운 웃음으로 제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2019-02-13

영화와 현실의 거리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그거 소설 아니야, 정말 극적(劇的)이네, 같은 말과 동의어로 떠오르는 것은 영화 같네, 일 것이다. 드물긴 하지만 발생 가능한 사건을 두고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끌어들여 표현한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고, 세계는 극장이다!”라는 공식에 충실한 극작가였다. 모든 것이 열려 있고 가능해진 르네상스 시대를 연극무대로 실현한 인물. 그래서인지 모르되 그의 드라마에는 예기치 못한 발견과 급전(急轉), 희귀한 살인과 배신이 난무한다.영화관에서 ‘가버나움’을 보다가 문득 현실과 영화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작년에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가버나움’은 무거운 문제를 제기한다. 열두어 살 난 소년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것이다. 소년은 여동생 남편을 칼로 찔러 복역(服役)하고 있던 터. 범죄자 아들을 두었다고 괴로움과 고통을 호소하는 부모. 부모에게 아이를 그만 낳으라 일갈(一喝)하는 소년 자인. 무엇인가, 그의 속내는?!우리는 자인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동네 약국을 전전하면서 거짓말로 약사를 속여 마약 성분이 함유된 약을 구하는 자인. 그것이 그들 가족의 든든한 생존담보가 된다. 시리아 난민으로 6년 넘도록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자인의 가족. 하지만 자인의 동생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도 우리는 모른다. 얼마 전에 생리를 시작한 여동생 사하르. 그녀에게 생리대 구할 돈이 있을 리 없다. 속옷으로 생리대를 만들어주는 자인.불편한 걸음걸이로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사하르.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잡아내는 영사기. 그토록 어리고 여린 소녀를 동네 점방 주인에게 팔아넘기는 자인의 부모. 사하르의 절망적인 거부와 자인의 맹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건장한 사내에게 넘겨진다. 딸아이를 팔아서라도 목구멍에 풀칠해야 하는 자인의 부모. 자식을 낳아 팔아버리는 비정(非情)한 부모를 인정할 수 없는 자인. 그들의 대결 구도로 영화는 진행된다.‘가버나움’을 보면서 의외의 사실에 문득 놀라게 된다. 1982∼1983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80년대 말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베이루트. 영화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내전 시기에 발생한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선연하게 재연한다.가출한 자인이 케냐에서 온 불법 체류자 라힐과 만남으로써 영화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객석을 인도한다. 거액을 주어야 얻을 수 있는 여권을 손에 넣으려는 라힐. 그녀의 어린 아들 요나스를 돌봐주며 생계를 잇는 자인. 그들의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동거가 냉엄한 현실과 맞닥뜨림으로써 자인은 오갈 데 없는 요나스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다. 관객은 자인이 언제 요나스를 포기할 것인지에 집중한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익숙한 현실이므로!베이루트에는 불법 체류자들의 아이를 사들여 외국에 내다 파는 인신매매단이 성행하고 있다. 자인은 말도 하지 못하는 젖먹이 요나스를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한다. 자신의 경험과 타고난 심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인. 그가 보여주는 영웅적인 투쟁과 인간애에 우리는 가슴 먹먹해진다. 그는 사하르를 포기한 부모와 확연히 다른 인간이다. 너무 이른 나이의 혼인과 임신으로 인한 사하르의 비극적인 운명과 자인의 칼부림이 영화를 극적인 소용돌이로 몰고 간다.출생기록도 없는 소년이 법정에서 소리친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생물적 욕구로 자꾸만 아이를 낳는 자인의 부모. 그것에 반기(反旗)를 든 소년 자인. 천륜이 무너지는 세상을 아침저녁으로 확인하는 21세기 한국사회가 그나마 나을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안도. 어쩌면 그런 안도감으로 영화관을 맥없이 나섰는지도 모르겠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막장을 애써 외면하는 부실한 인간의 자화상을 확인하면서!….

2019-02-06

예타면제와 균형발전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월 29일 정부는 사업비 24조원에 이르는 23개 사업의 예비타당성 (예타) 조사를 면제했다. 예타조사는 국가예산으로 추진하는 대규모 공공사업이 경제성, 정책성, 지역균형발전에 부합하는지 여부에 따라 사업실행여부를 평가하는 사전조사를 뜻한다. 그것은 정치권력을 장악한 개인과 정파의 자의적인 국가예산 오남용을 방지하는 최소의 안전장치다. 그런데 촛불로 출범한 정권이 지난 정권들의 그릇된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정부가 내세운 예타면제 근거는 국가의 균형발전이다. 경제부총리는 “수도권과 여타지역의 격차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 오기 전에 균형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예타면제의 일차적인 목적이며, 경제 활력 제고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말한다. 이런 논조는 1월 24일 대통령의 지적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우리가 경제성보다 균형발전에 중점을 두고 있음에도 예타조사를 통과하지 못하는 지자체 사업이 많아 예타면제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효율적인 예산집행을 위해 국가가 여러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라 전체를 고르게 발전시키기 위한 방향이라면 쌍수 들어 환영해야 마땅하다. 그러하되 예타면제 대상사업 선정을 둘러싼 작금의 논란은 면밀히 들여다볼 구석이 없지 않다. 우리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 4대강 사업이나 경인 아라뱃길 사업 같은 대표적인 혈세낭비 사례 때문이다.200만 년 넘게 흘러 자연스레 조성된 강을 마구잡이로 파 뒤집고 시멘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강을 죽이는데 불과 2년 만에 24조원의 거액을 탕진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4대강 사업.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과 얼추 비슷한 시기인 2009년 중국은 ‘항주오 (港珠澳) 대교’를 착공하여 2018년 준공한다. 홍콩과 주해, 마카오를 바다 위로 연결하는 세계최장의 기념비적인 다리로 길이가 55km에 이르며, 해수면 다리길이만 해도 23km에 이른다.왕복 6차선 다리로 홍콩과 마카오를 연결함으로써 그동안 자동차로 4시간, 배로 1시간이 소요되던 홍콩-마카오 운행시간이 30분대로 단축됐다. 우리가 일쑤로 얕잡아보는 중국의 저력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중국을 사회주의 통제사회라고 하지만 그들은 국가경제와 인민의 복리민복을 위해 22조원 예산으로 세계건설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자연을 파괴하고 천문학적인 예산을 탕진한 4대강 사업과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다.예타면제는 예산낭비 우려와 아울러 정치적 판단을 고려해야 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내년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다. 중요한 선거를 목전에 두고 권력을 장악한 정권이 예산을 전횡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도입된 것이 예타조사다. 따라서 24조원이 투입될 공공사업의 예타면제는 ‘이하부정관 (李下不整冠) 과전불납리 (瓜田不納履)’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여기저기서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시점이다. 그런 연유로 청년 일자리 창출과 사회 저소득층의 사회적 안전망확충 같은 사안이 절박한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토건사업에 거액의 예산을 집행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시간과 더불어 예타면제 사업이 얼마나 타당성 있는지 여부가 드러날 터이나, 무엇인가 찜찜한 생각이 고개를 내밀고 있음은 진지하게 부정하기 어렵다.예타면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원칙에 입각하여 원칙을 지키고 원칙에 따라 평가받겠다는 현 정권의 정치철학이 훼손되지 않을지, 하는 우려라고 할 수 있다. 정권이 내세운 금과옥조(金科玉條)인 ‘원칙’을 타협하고 한 걸음 물러섬은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자세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예타면제를 재삼재사 숙고하여 국가예산의 효율적인 집행과 나라 전체의 균형발전을 이뤄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9-01-30

어린왕자와 동주평전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오래 전에 읽은 책을 다시 만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있는지, 왜 하필이면 그 책을 읽었는지. 여러 가지 소회가 찾아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옛사랑이나 까맣게 잊힌 친구와 재회하는 일과는 결이 다른 감정과 추억이 찾아드는 것이다. 더러는 책갈피의 색 바랜 흑백사진이나 잘 마른 낙엽 혹은 행간에 적어 넣은 단상이 젊은 날을 반추하도록 인도한다.연말부터 프랑스 문학을 읽고 있다. 기존에 읽은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위스망스의 ‘거꾸로’, 보마르셰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 몰리에르의 ‘타르튀프’와 ‘서민귀족’에 카뮈의 ‘페스트와 졸라의 ‘목로주점’을 덧댔다. 프랑스 작가는 아니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한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이케타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추가되었다.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순정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를 원작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연히 그것도 독서목록에 더할 요량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로 한 시점에 등장하는 인간군상과 그들이 마주했던 시공간과 사건이다. 혁명전후 100여 년 프랑스와 유럽을 뒤흔들었던 전변(轉變)의 인물들은 어떤 세상과 인생을 꿈꾸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그런 점에서 ‘페스트’와 ‘어린왕자’는 한 발 비켜서 있다. 특히 ‘어린왕자’가 그러하다. 거대한 역사적 사변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강력한 심장의 고동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언제나 혁명과 사건과 투쟁과 갈등을 당연한 전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도 아이는 태어나고, 사랑과 이별이 있으며, 지진과 해일이 덮치는 와중에도 장미는 피어나기 때문이다.약관 스무 살 무렵 내가 아침저녁으로 들고 다닌 서책은 ‘어린 왕자’와 ‘윤동주 평전’이었다.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아서 영어로 된 ‘어린왕자’와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윤동주 평전’이었다. 기실 학부시절에 나는 그다지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한잔의 좋은 술, 한편의 좋은 영화, 한판의 좋은 바둑’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휴강했다. 그럼에도 윤동주, 서정주, 김소월, 김수영 같은 시인들의 작품은 줄기차게 읽고 생각했다.‘어린왕자’는 읽다가 덮고, 감동하고 다시 읽고 심호흡하며 느끼곤 했다. 그러다 마음에 다가오는 친구나 여성이 있으면 군말 없이 선물했다. “한번 읽어보세요!” 하는 말과 함께. 그런 서책을 수십 년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읽노라니 옛 생각이 스멀스멀 찾아온다. 지금도 기억에 선연한 것은 여우가 말한 ‘길들인다는 것’의 함의다. 관계를 맺는다는 말로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설파하는 여우. 왕자는 별에 두고 온, 여리지만 자만심 강한 장미를 떠올린다.선로 변경원의 말처럼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하지 못한’ 어린왕자가 황량하고 삭막한 지구에 와서 여우의 도움으로 깨닫게 된 삶의 진리는 길들인다는 것이었다. 여우는 말한다.“우리는 자신이 길들인 것만 진정으로 알 수 있어. 너의 장미가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네가 길들인 대상에 대해 넌 영원히 책임져야 해.”‘어린왕자’를 읽은 다음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길들인다는 것’의 묵직한 함의는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동주의 ‘서시’를 좋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왕자와 그가 길들였던 장미가 깊은 밤 B612호에서 환하게 빛나는 하늘을 우러르는 버릇도 그 시절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이젠 ‘어린왕자’와 ‘동주평전’을 전할 사람 하나 없으매, 그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2019-01-23

시간강사를 묻으려 하는가?!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묻어버린 희대의 사건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한다. 550년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의 종결자 진시황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차단하려 저지른 행악질이다. 진나라는 효공 (孝公) 이래 법가(法家)로 부국강병에 성공한다. 전국 7웅 가운데 최약체였던 변방의 진나라를 강성대국으로 인도한 장본인은 상앙(~ 기원전 338)이었다. 그의 행적은 사마천의 ‘사기열전’ 가운데 ‘상군열전’에 빼곡하다.상앙은 가혹하리만큼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다가 효공의 죽음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으로 생애를 끝막음한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그가 제정한 법령이었다. 통행증이 없으면 손님과 함께 객사(客舍)의 주인이 벌을 받는 연좌제를 만들었던 상앙. 자신의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운 비운의 개혁가 상군. 사마천은 상군의 비참한 최후를 각박한 천성에서 찾았다. 인간 위에 군림한 포악한 법령제정과 실행자의 최후를 경계한 것이다.진시황 ‘정(政)’은 분서를 하되 의약, 점복 (占卜), 농서분야의 서책은 태우지 않았다. 국가의 경제적 기반인 농업에 긴요한 서책과 백성의 질병과 건강관련 서적, 국가 중대사를 논의할 때 필수적인 복서(卜筮)관련 서적, 예컨대 ‘역경’ 같은 서책은 온전히 보존했다. 자신의 정치적 기획과 실행에 반대하는, 말만 많은 유생(儒生)들의 사유와 인식의 기반이 된 서책을 진시황은 공리공론으로 몰면서 관련 서적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생매장한 것이다.2019년 가을학기부터 강사법이 전면적으로 실행된다. 전임정권들이 뜨거운 감자로 인식하여 네 번씩이나 ‘폭탄 돌리기’ 식으로 미루고 미뤘던 강사법.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시대적 요청이라는 사명의식에 기초하여 강사법을 미루지 아니하고 실행하기로 한 것이다. 학기 중에만 강사료를 받고, 방학 기간에는 무일푼으로 지내야 했던 강사들의 물질적 보상과 최소한의 교원 신분 보장을 골자로 한 내용의 강사법 시행이 목전에 이른 셈이다.나는 원칙적으로 강사법 시행에 적극 찬동한다. 강사와 교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間隙)의 심연을 오래 보아온 사람으로서 강사법은 강사를 위한 작지만 단단한 디딤돌로 작용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문제는 국가와 대학당국이 강사법 시행에 따른 재정문제를 논의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학기부터 경향각지(京鄕各地)의 크고 작은 대학들이 강사 목줄 조르기에 들어갔다. 강사들의 대량해고가 목전에 있다.올 가을에 대학이 선발하는 강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강사들은 창졸간(倉卒間)에 실업자로 전락하게 된다. 강사법에 따르면, 시간강사 1인에게 최소한 2과목을 부여해야 한다. 따라서 기존에 대학에서 1과목만 강의했던 강사들의 밥줄은 자동적으로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문제에 직면하여 교육부도, 대학도 명쾌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야기하는 결과는 불을 보듯 자명하다. 진보적인 총장이 들어선 상지대, 성신여대, 평택대 같은 대학은 기존의 강사들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주고 있다.“진리탐구의 도량인 대학이념을 구현하고, 학문후속세대의 연구를 위해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강사고용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긴 장마 끝에 찾아든 청량한 빗줄기이자 감로수처럼 보인다. 세계교역 7위이자 경제규모 13위라는 나라에서 미래의 동량(棟梁)을 키워내는 강사들의 물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는 국가의 실체가 허망하다. 봉건시대 절대군주 진시황은 지식인 입막음용으로 분서갱유를 실행했다. 금전이 최고의 가치인 후안무치의 사회에서 강사를 물질적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그들을 생매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강사를 살리고 대학을 학문의 공론장으로 일으켜 세우는 노력이 화급한 시점이다.

2019-01-16

반(反) 유토피아 소설과 아베 신조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20세기는 격동의 세기다. 전기와 석유, 내연기관과 플라스틱, 컨베이어벨트 시스템 등으로 대표되는 2차 산업혁명이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가능케 한다.그와 아울러 러시아와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1∼2차 세계대전, 한국동란과 베트남전쟁, 사회주의의 퇴조와 소련 및 동구 실존 사회국가들의 몰락 같은 사회·정치적인 격랑(激浪)이 지구촌을 강타한다.미증유의 역사적 사변을 목도한 대중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그래서일까. 지난 세기 초중반에 세계적인 반 유토피아 소설이 등장한다.첫 번째는 사회주의 소련의 작가 예브게니 자먀틴이 집필한 ‘우리들’(1924)이다.‘은혜로운 분’이 홀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되, 이름도 없이 숫자와 기호로 표시되는 다수 대중은 자유의지를 완전 망각한 채 누구나 동일한 일상을 영위해 나간다.인간이 주고받는 사랑이 전체주의 체제를 전복(顚覆)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란 확신을 가진 여주인공 I 330. 그녀는 사랑에 호응하는 남자 D 503을 자유의 편으로 인도한다. 그들이 경험하려는 신생(新生)과 신세계의 열망이 어떠한지, 과연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는지, 거기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무엇인지, 그런 면이 우리의 흥미를 자아낸다.1932년에는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장편소설 ‘멋진 신세계’를 출간한다.태어날 때부터 알파부터 감마 등급까지 인간을 배양기에서 생산하는 미래사회. 등급에 따라 세계를 지배하는 10인 총통의 일원이 될 수도 있고, 하수구 청소부로 전락할 수도 있다.2535년을 시대배경으로 하는 ‘멋진 신세계’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배제한 전체주의 통제사회를 그려낸다.가족과 가정, 일부일처제가 폐지되고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라는 논리가 지배적인 세계국가에서 사랑을 매개로 한 남녀관계는 허용되지 않는다.거주민들은 괴롭거나 불편하거나 외로움을 느끼면 ‘소마’라는 알약을 먹는다. 행복감과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소마는 그들에게 열락과 희열을 제공한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는 말로 세뇌된 그들에게 야만인 구역의 청년 존이 나타남으로써 사건이 역동성을 얻게 된다.자먀틴과 헉슬리의 뒤를 이어 조지 오웰(1903∼1950)이 1949년에 ‘1984’를 세상에 내놓는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등장한 희대(稀代)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빅브라더로 상정한 소설이 ‘1984’다.“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대형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고, 텔레스크린으로 사람들을 감시하는 통제사회.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이란 표어가 내걸려 있는 오세아니아 진리부의 건물.소설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잠재된 저항의식으로 줄리아와 금지된 사랑을 하고 해당(害黨)행위를 하다가 고문실에 구금된다.2 더하기 2는 4라는 자명한 이치를 부정해야 하는 스미스. 2 더하기 2의 해답은 빅브라더와 당이 결정한다. 스탈린과 소련 공산당의 ‘무오류설’을 주창했던 1940년대 소련의 실상을 풍자하고 공격하는 조지 오웰. 그것에 대한 저항은 역사의식과 자유의지로 무장한 대중의 각성과 투쟁에 있다고 믿은 오웰.반 유토피아 소설을 거명한 까닭은 아베 신조 때문이다. 정치적 입지가 취약해질 때마다 한반도를 물고 늘어지는 아베의 술수가 고약하다. 한반도 분단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북한 핵을 과장해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헌법을 수정하려는 아베. 한국 해군함정과 일본 초계기의 충돌을 문제삼아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아베 신조. 그의 행악질을 보면서 각성한 대중의 힘이 작용하는 한국과 깊이 잠든 이웃나라 일본을 떠올리는 것이다.

2019-01-09

두 발로 꼿꼿하게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동면(冬眠)에 들어간 반달곰은 무술년이 기해년으로 바뀐 것을 알고 있을까.어제 떠오른 태양과 내일 떠오를 태양은 하나임에도 새해 일출 여행객은 줄어들 기색이 없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무리지어 동해안으로 출정하게 하는가?! 오며가는 누추하고 피로한 여정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도록 하는 흥분제 성분은 무엇인가. 미련일까, 회한(悔恨)인가 그도 아니면 신년에 거는 다대한 꿈과 기대일까.구랍 31일 동료교수의 반가운 전화를 받는다. 무겁지 않은 덕담과 회고 끝자락에 그의 모친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얘기를 듣는다. 여든한 살 연세에 걷지 못한다는 전언(傳言)은 사뭇 무겁게 들려왔다. “고관절이 안 좋아서 늘 누워만 계세요.” 문득 85세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골골하지만 아직은 경로당 출입이 자유로운 어머니. “밥 지을 사람 없어서 경로당도 문 닫게 생겼어야.” 명석한 총무로 성가(聲價)를 올리는 모친의 걱정스런 목소리.나이든 사람에게 암보다 치명적인 상황은 걷지 못하는 것이다. 걷는 데 문제없는 사람은 이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 나도 아툴 가완디의 서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 Being Mortal를 읽었을 때조차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자기 마음대로 화장실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당신은 몰라요!” 서책에 나오는, 걸을 수 없게 된 할머니의 말이다. 극심한 위통(胃痛)에 시달리다 한밤중에 찾아간 응급실에서 사태의 진실과 대면했다. 내가 누운 침상 맞은편에 70초반의 남성이 누워있었다. 링거와 투석기를 꽂은 채 익숙한 자세로 누워있던 그이. 잠시 뒤에 견디기 어려운 악취가 풍겨져 나왔다. 그렇다. 그가 누운 채 기저귀에 대변을 날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낮은 비명과 코를 움켜잡는 인총의 종종걸음이 들리고 보인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이미 걸을 수 없는 중환(重患)의 몸이었으니.어쩌자고 저런 몸이 되었을까, 생각한다. 생각하다 나를 돌이키니 같은 꼴이다. 걸을 수 있는 다리 유무(有無)의 차이만 있을 뿐! 젊어서 육신과 영혼을 소진하다 못해 질탕하게 날려버린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백지 한 장 차이 아닌가! 온몸에 소름이 돋고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하다. 잠시의 희열과 광기에 휩싸여 날려 보낸 술잔과 희떠운 허언(虛言)과 육체의 기진상태를 자초했던 청춘시절. 그 결과 찾아든 칼로 찌르는 위통. 어릴 적부터 들어온 ‘지덕체’ 삼위일체가 이젠 우습게 느껴진다. 지식을 선두에 두고 몸을 꼬리에 두는 어리석음이 한눈에 보인다. 몸이 부실하거나 부재하면 지식 역시 탐탁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다. 몸의 손상과 정지는 지식의 손상과 멈춤을 유발한다. 그러나 지식의 부재나 작동불능 상태에도 몸은 스스로 거동하고 작동한다. ‘의식주’가 아니라 ‘식주의(食住衣)’가 되어야 하는 이치와 동일하다. 관념의 수인(囚人)으로 살아온 구시대 유습의 자취가 완연하다.요컨대 “건강한 육신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법!”.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스스로 설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요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자립(自立)이란 어휘는 두 발로 꼿꼿하게 대지를 딛고 하늘과 태양을 떠받치는 형상이다. 타자의 도움 없이 제 발로 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자립이다. 강자들의 시선과 언동에 구애받음 없이 당당하고 의연하게 갈 길을 선택하는 것이 자립의 근본이다. 지난해 남과 북, 북한과 미국은 적대행위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관계설정에 합의했다. 그것은 남과 북의 자립과 역량에서 출발한다. 홀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의 초입(初入)에 도달한 원년이 무술년 2018년이다. 기해년을 맞으며 나는 자립과 선택적 역량강화를 희망한다. 누워서 민폐를 끼치는 사회와 국가가 아니라, 두 발로 꼿꼿하게 자립하면서 주위에 광명을 던지는 화사한 청춘처럼!

2019-01-02

환갑(還甲)과 환갑(換甲) 사이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여덟 살 때 외할머니 환갑잔치가 있었다. 열흘 넘도록 음식준비로 집안이 시끌벅적했고, 어른들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어린 우리들은 구수한 냄새 넘쳐나는 부엌을 날랜 다람쥐처럼 넘나들며 이것저것 입에 넣기에 신이 났다. 우리가 알았던 정보는 ‘환갑’이란 어휘뿐이었다. 그것에 담긴 의미 반추는커녕 기본적인 뜻풀이조차 알지 못했던 천둥벌거숭이였던 시절.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그때의 활기와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흥분이 기억에 새롭다.마침내 그날이 왔다. 은비녀로 곱게 쪽머리하신 할머니가 토끼조끼와 한복치마로 한껏 멋을 내고는 병풍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셨다. 의자 앞에는 그 동안 준비한 갖은 음식물이 담긴 거대한 잔칫상이 놓였고. 반백의 할머니가 엄숙하고 긴장된 독사진을 찍는 동안 우리는 옆에 서서 침만 삼키고 있었다. 이제는 구겨지고 탈색한 흑백사진으로 남은 그날 정경은 1960년대 한국농촌의 흔한 ‘환갑잔치’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세월이 물처럼 바람처럼 달처럼 제비처럼 흐르고 또 흘렀다. 산천이 의구(依舊)하지 못한 지 어언 다섯 차례가 지나고 내가 외할머니 나이가 되었다. 서럽고 안쓰럽던 1960년대가 충격과 격동의 70년대로, 혁명적 파란의 80년대를 지나, 희망과 절망의 나락 90년대를 거쳐, 대망(待望)의 21세기 첫 번째 10년을 경유해, 2018년 세밑에까지 이른 것이다. 여덟 살 까까머리 소년의 머리에도 허옇게 상고대가 피어올랐다.모든 세대는 지나간 세대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명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이전시대의 위대함과 풍요로움을 예찬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4.19세대나 유신세대를 기리는 광주항쟁세대 혹은 87세대처럼, 요즘 세대는 87세대를 우러른다는 인상을 준다.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거대담론’을 향수(鄕愁)하는 일부 청년세대에 국한될지라도, 그것은 시대와 역사를 향한 깨어있는 인간의 자연발생적인 예찬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미소(微小)한 것들로 충만한 시대를 살다보면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것들에 눈이 많이 가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않고 터져 나오는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에 대중은 더 이상 유념하지 않는다. 유치원 사태에 대해서는 어린아이 부모들과 유치원 주인들이, 카풀문제에 대해서는 택시업자와 정부 당국자가, 시리아 철군문제에 대해서는 극소수 세계주의자들만이 귀추(歸趨)를 주목하면서 사태추이를 관망한다.대중은 먹을 것, 탈 것, 볼 것, 놀 것에 열광하지만, 그것들마저 이내 시큰둥하게 대한다. 사정이 이러니 10년이나 20년 혹은 한두 세대 이후의 미래전망이나 기획이 들어설 최소한의 공간조차 없다. 그러하되 60년 세월은 지극히 무겁고 엄중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현동 정동유 선생은 ‘환갑(還甲)’을 그저 60갑자 한 바퀴를 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육십갑자로 바뀐다는 의미로 ‘환갑(換甲)’을 이해했다. 한 바퀴 돌았으니 자동적으로 그 다음 바퀴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바퀴에 진입했다고 생각하는 동적이고 입체적인 사고방식이다. 나이만 많이 먹은 허다한 철부지들이 거들먹대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매우 적실한 사유가 아닐 수 없다.새로이 시작될 육십갑자를 목전에 두고 나는 요즘 간단치 않은 육체적 재건축에 나서고 있다. 이미 우심한 내장질환에는 치료약으로, 신통찮은 이는 이리저리 덧씌우고, 급기야는 백내장 수술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렇게라도 수리해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올 인생 3막을 대비하고 있는 셈이다. 58개띠들의 상승(常勝)과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한다!

2018-12-26

시(詩)와 국어 ‘불수능’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올해 대학 수학능력시험은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특히 국어 31번 문제는 천문학, 역사학, 철학, 과학이 뒤얽힌 기나긴 지문(地文)을 이해한 극소수의 학생만이 풀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예술 관련서적을 두루 통독(通讀)해온 사람으로서 문제의 어려움을 통감한다. 거기 덧붙여 한 가지 의문이 문득 고개를 든다. ‘무슨 까닭으로 이토록 난해한 문제를 냈을까?’ 누구를 위한, 무엇을 겨냥한 문제인가, 하는 물음!1913년 3월 러시아의 스물네 살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저녁에’라는 단출한 서정시를 창작한다. 바이올린 연주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고, 식탁의 얼음 접시에는 신선한 바다냄새를 풍기는 생굴이 담겨 있다. 노란 속눈썹 아래 웃고 있는 남자의 두 눈은 마주앉은 여인을 사랑스러운 새나 고양이 바라보듯 한다. ‘나는 믿을만한 친구요!’ 라고 말하면서 그는 여인의 옷을 건드린다.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와 처음으로 단둘이 있음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도한다.여기서 독자들께 문제를 내보겠다. 굴 접시 옆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남녀가 마주앉아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이번 학기에 러시아 문학사를 가르치다가 학생들에게 아흐마토바의 ‘저녁에’를 소개했다. 칠판에 4연 16행의 시를 러시아어로 쓰고, 세 번 한국어로 번역해 주었다. 그리고 독자들께 제시한 똑같은 문제를 내보았다. 여러분은 분명히 어렵지 않게 정답을 떠올릴 것이다. 무척 쉬운 문제이므로! 그렇다. 백포도주와 레스토랑.몇 년 전에 어떤 학생은 ‘초장’이라고 말했다가 꿀밤을 맞은 적 있었다. 박장대소하던 학생들과 어울려 나도 큰소리로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하기야 초장없이 생굴을 먹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와사비장을 찍어 먹을 수도 있으련만! 문제는 학생의 내면에 자리한 ‘문화’ 혹은 ‘관습’이 내게는 생경(生硬)했다. “그렇다면 초장말고도 젓가락과 앞 접시도 있어야겠구나!” 슬며시 부아가 나서 나는 그렇게 응대했다.그럼에도 우리는 유쾌했으며, 그들의 대면장소가 레스토랑이라는 사실을 당연지사로 이해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남녀가 저녁나절에 벗들을 젖혀두고 오붓하게 두 사람만의 첫 대면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번학기 학생들은 ‘초장’은커녕 만남의 장소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초장 얘기를 꺼냈지만 웃는 학생은 없었다.“여러분은 생굴을 어디서 먹어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저녁안개가 퍼져 나가는 여러분의 집에서 바이올린 소리 들으면서 굴을 먹나요?”나의 내부에서 현악기의 줄이 툭, 하고 끊어진 것같은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종강(終講)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의 나로서는 맥이 탁,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해왔던 숱한 문학논의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저토록 단순한 글줄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형식주의니 상징주의니 자연파니 위스망스의 ‘거꾸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그래서다. ‘불수능’이니, 융합이니, 천문학과 철학, 역사와 과학이 모여 짜낸 기막힌 텍스트니 하는 것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평이(平易)하고 간명한 서정시 하나 이해할 능력이 없는 학생들이 거점 국립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판국에 무슨 융합이란 말인가? 그래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누구를 위한 시험이며, 왜 필요한 것인지, 재삼재사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란 생각 말이다.시험을 위한 시험, 난해함을 위한 난해함이 아니라, 짧은 글이라도 온전하게 이해하도록 인도하는 그런 시험이 되기 바란다.

2018-12-20

인권과 혁명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 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지구촌을 건설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권을 명시한 선언이다. 영장없는 체포와 구금, 추방으로부터 자유,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와 결사(結社)의 자유 등이 인간의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로 거명된다. ‘인권선언문’ 제1조는 간명하되 대단히 인상적이며 선진적이다.“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서 평등하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기에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어디선가 본 것같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프랑스 삼색기(三色旗)의 영혼과 정신이 인권선언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유, 평등, 형제애.’ 자유는 본디 권력과 부, 명예를 가진 자들이 주장하는 덕목이며, 평등은 노동자와 농민같은 사회적 약자가 내세우는 권리다.그 양자의 대립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한 것이 ‘형제애’다. 따라서 형제애는 자유와 평등 모두를 아우르는 지극히 보편적인 미덕이자 가치라 할 수 있다.지난 10월 21일부터 프랑스에서 ‘노란조끼’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프랑스 정부의 유류세와 자동차세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촉발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이면(裏面)에는 마크롱 정부의 반(反)서민 친(親)부자·기업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깊은 반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는 부자들의 전유물인 호화자동차, 귀금속, 요트에 부과된 부유세를 폐지하고, 기업의 법인세를 2022년까지 25%로 인하할 방침이다.반면에 노동자의 초과근무수당 인하, 담배와 석유제품 소비세 인상, 연금 실수령액 축소 등으로 서민의 삶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파리 시내 곳곳에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하고, 개선문과 박물관이 훼손되고 있다.이번 ‘노란조끼’ 시위는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위를 대하는 프랑스 시민들의 자세다. 72%의 시민이 노란조끼 시위를 지지하지만, 85%의 시민은 폭력시위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90%에 이르는 절대다수의 시민은 시위대를 대하는 정부의 조치와 정책대응 방안이 위중한 사안(事案)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그래서일까. 거리에 나붙은 구호는 각양각색이다. “마크롱 사퇴”, “자유와 평등”, “1789, 1968, 2018” 등은 물론 ‘프렉시트’(Frexit)의 구호도 있다.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968년의 68혁명 정신을 2018년에 이어나감으로써 제3의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시위대에 혼재해 있는 것이다.드물지만 영국의 ‘브렉시트’를 따라 프랑스의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프렉시트’ 주장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보니 정치의 나라, 민주주의의 최선진국 프랑스의 면모가 약여(躍如)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한 인물 가운데 ‘분노하라’의 저자 슈테판 에셀이 떠오른다. 20대 프랑스 청년들이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을 외면하고 일신의 안녕과 영달에 눈 먼 세태를 통렬하게 공격했던 에셀. 그가 기초한 인권선언과 위배되는 2018년 프랑스는 자발적인 ‘노란조끼’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양상이다. 정치적인 기본권은 물론이려니와 사회적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정부에 감연히 맞장뜨는 시민들이라니! 2016∼2017년 비폭력적인 촛불혁명으로 행정권력을 교체한 우리의 위대한 시민의식을 축복하면서 ‘노란조끼’ 시위대의 요구가 조만간 관철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2-13

행복도와 계영배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엊그제 달력을 넘기다보니 허전하고 쓸쓸하다. 마지막장 달력에 새겨진 ‘12’가 크게 다가온다.‘어이쿠, 또 한 해가 가는구먼!’ 해마다 연말이면 예외없이 터져나오는 탄성(歎聲)이다. 그렇게 다시 세월이 가고 스스럼없이 나이의 문턱을 넘는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시간에 편승해 퍼런 녹이 슬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백두(白頭)의 계급장을 단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다. 차마 부끄러운 일이다.각설하고, 엊그제 한국인의 ‘행복도’ 조사결과가 언론에 발표됐다. 2018년에 유엔에서 내놓은‘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5.87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32위라 한다. 더욱이 2012~2015년 세계인의 행복도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157개국 가운데 96위를 기록했다. 부자 나라들과 비교해도 불행하고, 가난한 나라들과 견줘도 행복하지 못한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왜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근원은 어디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유학시절에 거리나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안녕하세요” 대신에 “행복하시죠?!” 하고 묻곤 했다. 익숙한 인사를 대체하는 낯선 방식에 대부분 당황해했다. 그런 인사를 받은 적 없었다는 게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표정의 그들을 보면서 내심 만족스러웠다. 행복을 구하고자 만리타국에 나와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현자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부족함’에서 찾았다고 한다. 재산과 외모, 말솜씨와 체력, 명예같은 덕목에서 완전함이나 채움이 아니라, 다소 부족한 상태가 행복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허다한 한국인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를 욕망하는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적빈(赤貧)과 질병과 불화로 괴로운 분들도 물론 적잖을 터이지만.‘도덕경’ 44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갈 수 있다.”태상노군은 이런 결론의 전제를 명예와 육신, 육신과 재화 가운데 어느 것이 소중한가의 문제에서 출발한다.여러분은 건강과 명예, 돈 가운데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결론은 자명하다. 육신을 버려두고 탐하는 모든 것은 한낱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과욕의 희생양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열흘 넘게 위장의 통증에 시달리면서 문득 깨달은 것은 젊은 시절 스스로 탕진하고 소진시킨 육신의 건강이었다.불철주야 주구장창 불태운 영혼과 육신이 고갈되면서 여기저기 수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업자득, 자승자박,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다.이 모든 것의 원인 제공자는 나 자신이다. 원인은 필시 괴수(怪獸) 리바이어던의 크기를 능가하는 거대한 탐욕의 깊고도 너른 뿌리의 활착(活着)일 것이다.최인호 ‘상도’에는 임상옥의 ‘계영배(戒盈杯)’가 나온다. 계영배는 ‘가득참을 경계하는 술잔’이다. 자신의 욕망을 경계하고자 했던 임상옥은 그 결과 조선최고의 장사치가 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三毒) 가운데 하나를 올바르게 징치하고 경계할 때 행복은 어느 결에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그러하되 ‘행복하세요!’

2018-12-06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를 보내며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나이 들면서 세상과 작별하는 사람의 면면이 눈에 밟히는 경우가 늘어난다. 젊은 시절에는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먼 곳에 있는 매우 추상적인 대상으로만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가까운 사람의 부음이 홀연히 찾아들면 흠칫 놀라게 된다.그런 놀라움의 순간이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세월과 시간은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평등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가 세상을 버렸다.1941년에 출생했으니 우리 나이로 78세. 아버지의 친구이자 ‘맘마 로마’를 연출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조감독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한 그는 1962년 ‘냉혹한 학살자’로 영화감독이 된다. 베르톨루치가 남긴 대표작으로 사람들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거명하곤 한다. 상당한 예설(藝褻)논란을 불러일으킨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나이더가 출연한 영화다.내가 베르톨루치를 떠올리는 까닭은 ‘마지막 황제’ 때문이다. 모택동 사후 10년 동안 이뤄진 중국의 개혁개방과 맞물려 세계적 관심을 집중시킨 영화 ‘마지막 황제’.영화가 개봉된 1987년에는 ‘패왕별희’의 천개가와 함께 5세대 감독이라 불리는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이 제작된다.그는 ‘국두’ , ‘홍등’ , ‘귀주 이야기’, ‘인생’ 같은 영화로 중국 현대사의 굴곡진 가시밭길을 강렬한 영상과 서사로 선보인다. 장예모와는 다른 색깔과 향기로 베르톨루치는 우리를 20세기 초부터 시작해 부의가 생을 마감하는 1960년대 중반의 중국으로 인도한다. 1908년 3살 꼬마 부의의 황제등극, 1911년 신해혁명, 1912년 청나라 멸망과 더불어 시작된 부의의 파란만장한 인생, 그리고 중국사의 파노라마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마지막 황제’. 단출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인 베르톨루치의 저력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영화에서 감독이 주시하는 대목은 자립적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 ‘애어른’ 부의가 공산당 지도자의 가르침으로 어떻게 재탄생하는가이다. 중년에 이르도록 제 손으로 세수조차 하지 못하고, 혼자서 옷도 입지 못하는 허수아비 인간 부의를 자주적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공산관료. 하지만 유능한 관료도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서슬을 피하지 못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베르톨루치는 담담하게 그려낸다.아마도 그런 점이 1987년 아카데미 9개 부문 수상으로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에 기초한 개혁개방으로 은인자중 도광양회의 자세로 자본주의 길을 걸어온 중국의 가까운 과거를 되짚는다는 의미를 가진 영화. 무엇보다도 모택동의 개인우상화와 절대권력 확립을 위해 시작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호소력을 얻었던 듯하다.그러다 2003년에 베르톨루치는 68혁명을 청춘들의 육신과 욕망으로 풀어내는 ‘몽상가들’로 관객과 만난다. “상상력에게 자유를!”, “모든 억압하는 것을 억압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세계사적인 대사건 68혁명. 유럽은 물론이려니와 대서양 건너 미국과 태평양 너머 일본까지 진출한 위대한 68혁명의 내재적인 의미를 청춘남녀의 육신과 사랑으로 해석하려는 60대 감독 베르톨루치의 눈물겨운 의욕과 분투가 돋보인 영화 ‘몽상가들’.대한민국에서 베르톨루치는 유명하거나 대중적인 감독이 아니다. 그가 다룬 영화의 주제가 관객들에게는 난해하거나, 무겁거나,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하되 지난 세기 영화판의 대가(大家) 가운데 하나가 불귀의 객이 되었음은 자못 아쉬운 일이다. 그의 영면을 기원한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1-29

공감과 분노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중하게 여기는 덕목은 공감이다. 공감은 등장인물들이 처하는 대립과 갈등, 절체절명의 위기와 전락, 위대한 승리와 치명적 패배를 목도하면서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는 행위다.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다!”는 것에서 공감은 시작한다. 그것이 슬픔이든 분노든, 한탄이든 자조(自嘲)든, 증오든 사랑이든 문학의 주인공과 독자가 공유하는 감정과 인식의 교류에서 공감은 생겨나고 확산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강의실에서 공감이 자취를 감췄다. 소설이나 희곡, 시를 읽지 않는 세대가 주축이 되어버린 염량세태의 당연한 풍경이다. 대학입시를 위한 ‘축약본’ 독서를 끝으로 대다수 청춘은 문학과 영원히 작별한다. 줄거리와 주인공,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독서 아닌 독서가 청춘의 영혼을 피폐시킨다. 이런 양상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하며 드라마 결말을 궁금해 하는 대중 심리와 친연관계를 가진다. 촌각을 다투는 조급한 시대에 사건 진행과정과 인물의 복잡다난한 내면세계에 대한 천착은 사치스런 과업이 되고 만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가 어렵다는 대학생들이 등장한 까닭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30대 중반의 주인공 오그레가 60대 경험주의자 조르바에게 삶의 비의(秘意)를 깨쳐가는 과정이 다각도로 그려진 소설.거기 덧대진 세계열강의 하수인(下手人)이자 약소국 그리스의 운명, 그리스정교의 부패상과 작가의 풍자가 뒤섞인 거대한 섞어찌개 ‘희랍인 조르바’의 난해함을 호소하는 21세기 대한청년.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현대소설의 내용마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판국이니 ‘공감’은 언감생심이다. 등장인물의 사유와 인식, 행위가 무엇을 지향하며, 왜 그리 되었는지, 작가가 그려내려는 지향점마저 모호한데 무슨 공감이 가능하겠는가! 최소한도의 상황인식과 판단능력이 인물과 사건에 대한 공감의 기초임은 자명한 이치. 하되 상황전개와 갈등과 결말로 치달아가는 서사(敍事)가 이해되지 않는데 어떤 공감이 생겨나겠는가. 한국사회에 완전 결석한 공감과 충만한 증오를 ‘세월호 폭식사건’에서 확인한다. 유민 아빠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장기간 단식을 결행하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보란 듯 자행된 ‘폭식 퍼포먼스’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300명도 넘는 망자(亡者)들의 아픈 영혼과 유가족의 고통을 백주대낮에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조롱하는 인간의 탈을 쓴 백정들의 광대놀음. 거기 어디서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미소(微小)한 징표라도 있는가?! 광대들의 일장 탈놀음은 무지와 야만성뿐 아니라, 공감능력 부재에서 기인한다. 인간을 향한 최소한도의 예의도 법도도 갖추지 못한 무지몽매의 야만성이 타자(他者)의 처절하도록 아픈 심성을 결단코 헤아리지 않고 비웃으려는 공감의 진공상태와 만난 것이다. 그들은 하마의 썩은 사체를 앞 다투어 뜯으며 주린 배를 채우려 괴성 질러대는 하이에나와 다르지 않다.공감해야 비로소 우리는 분노할 수 있다.사태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분노는 커진다. 그래서 수주(樹州)는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순교의 길을 떠난 논개를 추모하면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다!”고 노래했다. 분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와 악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불의와 부정을 징벌하는 정의로운 행위의 예비단계다.우리는 시대와 공간에 최대치의 공감을 인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사유와 인식, 행동을 재삼재사 숙고하고 헤아리면서 공감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하고 폭력적인 분노가 아니라,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분노를 잉태할 것이다. 그것의 출발은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문학과 정직하고 차분하게 대면하는 일이다.

2018-11-22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 텔레비전 인문학 대담 프로그램에서 2018년 이전의 200년 동안 발생한 주요 사건을 ‘08년’ 끝자리로 살펴보니 흥미로운 일이 많았다. 우선 1818년 5월 5일 카를 마르크스가 탄생한다. 1867년 출간된 ‘자본’으로 150년 넘도록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마르크스. 영국의 메리 셸리는 1818년에 장편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한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副題)를 가진 소설에서 그녀는 인간이 생명의 창조주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100년 전으로 소급하면 1918년에 천만 넘는 전사자를 야기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원년이다. 1968년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열도를 휩쓴 ‘68혁명’ 발발연도다.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1998년에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 사태로 모진 고초를 겪은 해다.2008년에는 세계금융위기가 촉발된다.그리고 올해 2018년에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지구촌 마지막 냉전지대의 암운(暗雲)이 걷히기 시작한 원년이다. 실로 많은 사건이 ‘08’년 들어간 해에 일어났다.우리가 유념하지 않는 1918년 11월 11일은 제1차 대전종전 기념일이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달리던 승용차에 19살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씨프가 두 발의 총탄을 발사한다.목과 배에 중상을 입은 두 사람은 수십 분 후 절명한다. 희생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하자마자 러시아와 도이칠란트, 프랑스, 영국 등이 줄줄이 참전하기에 이른다. 그것을 일컬어 1차 세계대전이라 한다. 20세기하면 우리는 이내 ‘문명’과 ‘야만’의 두 얼굴을 동시에 연상한다.제2∼3차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가능하게 했던 과학기술문명의 중흥기 20세기. 제1~2차 세계대전으로 미증유의 인류 도살장으로 변모한 야만의 시공간 20세기. 그 첫 번째 흑역사를 알린 사건이 1차 대전이다. 더욱이 1918년 봄에 미국에서 발생해 세계 18억 인구 가운데 6억이 감염되고 5천만을 희생시킨 에스파냐 독감은 우리의 음산한 기억을 더 어둔 색조로 채색하도록 한다.지난 11월 11일 유럽과 세계전역의 70여 개국 정상은 100년 전 그날의 역사적인 종전을 다각도로 기억하고 추념했다.적국(敵國)으로 쌍방에게 총구를 겨눴던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과 도이칠란트의 메르켈 총리가 얼굴을 맞댄 사진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크나큰 상흔을 남긴 1차 대전의 교훈을 잊지 않겠다, 그런 대규모 전란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 중심에 유럽연합의 핵심인 프랑스와 도이칠란트가 굳게 자리를 지키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사진이다. 마크롱은 기념식 연설에서 1차 대전의 교훈을 발판삼아 편협한 국가주의와 포퓰리즘, 타국에 폐쇄적이고 적대적인 노선을 거둬들이자고 촉구했다.그의 발언은 ‘아메리카 넘버원’을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다.하지만 기념식에 불참한 트럼프는 파리외곽의 미군 전몰자 묘역을 참배한 뒤 귀국한다. 세계가 지역 블록화와 상호주의로 나가는 시점에 자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의 행동은 1995년에 시작된 세계화에 역행하는 돌출행위로 간주된다.그런데 어쩌랴! 한반도 운명의 미래가 상당정도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에 달려있음을?! 전임 오바마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한 전략적 인내로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야했던 위기의 남북관계가 변화조짐을 보이고 있음은 천행(天幸)이 아닐 수 없다.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2020년 미국 대선 정국에서 장쾌한 변곡점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1차 대전종전 100주년을 맞이하는 나의 소회다. 그것이 설령 대단한 ‘견강부회(牽强附會)’라 해도 말이다.

2018-11-15

대국굴기의 모순과 민낯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11월 초하루 중국 강소성 남경대학교에서 낯선 장면이 포착된다. 100여 명의 대학생들 앞에서 연설하던 몇몇 학생이 사복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에게 속절없이 제압당한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봉변을 당한 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 열독(閱讀) 연구회’ 소속으로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고 토론해 왔다고 한다. 사회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면서 강성대국의 길을 걷고 있다는 중국에서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싶을 뿐이고, 습근평 주석의 부름에 호응했을 뿐이다. 학교는 왜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가!”이것이 제압당한 학생의 연설일부다. 남경대학 당국은 5년 전 창립돼 철학과 부속 모임으로 활동해온 연구회의 등록갱신을 거부함으로써 연구회를 ‘미등록단체’로 만들어버린다. 그러자 연구회 학생들이 대학의 정치적 결정권을 가진 후진보 서기와 면담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면서 시위에 돌입한 것이다.학생들은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물리적 폭력에 저항하지 못했다. ‘사복’들은 중국정부의 공안 소속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문제는 남경대학은 물론 북경대학과 인민대학의 마르크스주의 학습모임도 탄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자발적으로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습모임을 억압하는 사태가 백주대낮에 일어나고 있다니?!분석가들은 이번 사태가 지난 5월 이후 독립노조 결성문제로 노사갈등이 이어져온 ‘자스사태’와 관련된 것이라 보고 있다. 중국 명문대의 마르크스주의 학습모임 소속 대학생들이 7-8월에 문제의 진원지인 광동성 혜주(惠州)에 위치한 용접기 제조업체 ‘자스’를 찾아가 노동자 시위에 동참하면서 ‘노동자 권익보호’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경찰은 8월 24일 관련 학생 50여 명을 연행하고 모임을 해산시키기에 이른 것이다.지난 2018년 5월 5일은 카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되는 날이다. 이날 습근평 주석은 “마르크스주의는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사상의 무기를 제공하고 중국을 낡은 동방대국에서 인류사상 전례 없는 발전의 기적을 이루게 했다”고 마르크스 이념을 격찬한 바 있다. 나아가 중국정부는 젊은이들이 경박한 서구사상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던 터였다. 이런 차원이라면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열독하는 모임은 적극 권장해도 부족할 판이다.등소평의 도광양회와 강택민의 화평굴기를 지나 습근평의 돌돌핍인으로 대국굴기를 지향하는 중국이 마르크스주의를 억누르는 것은 괴이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사태의 핵심은 중국이 대국굴기로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도한 빈부격차와 지역격차 문제에 좌파 청년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우파당국과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평한 분배, 즉 ‘균분’이야말로 중국이 자랑해온 대표적인 덕목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심대하게 훼손되고 있는 당대중국.해안지역과 내륙지역의 빈부격차, 도시와 농촌의 격차, 공식적인 부문과 비공식적인 부문(지하경제)의 격차같은 삼중(三重)의 격차로 신음하는 중국. 극심한 환경오염과 자원고갈같은 문제도 중국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열렬한 청년좌파의 목소리가 쉬이 잦아들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중국의 모순이자 민낯이다. 여기에 중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경제전(經濟戰)이 덧붙여지고 있는 셈이다.압축-고도성장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중국의 향후변화 과정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우리처럼 중국도 민주주의와 경제적인 번영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 그것이 궁금하다.

2018-11-09

유치원 사태를 보면서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린다고 우리나라가 북새통을 떠는 시각, 쾰른에서 어학과정을 공부하던 때 겪은 일이다. 조용한 거리에 유모차 부대가 출현한다. 아이들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유치원 교사들이 경찰이 쳐놓은 줄을 따라 거리행진을 하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내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시위하는 까닭을 듣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유치원 교사봉급이 너무 작아서 봉급인상 시위를 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온 때문이다. 당시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주의 지배정당은 진보성향의 사회민주당이었고, 당연히 그들은 유치원을 포함한 교사와 교수의 봉급인상에 인색하지 않았다.그럼에도 주 재정이 녹록치 않아서 교사들의 요구에 응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유치원 교사들은 물론이고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들이 동조시위를 벌인 것이다. 학부모들에게 왜 시위에 동참하는지 묻자 흥미로운 답이 돌아온다.“아이 돌보는 유치원 선생님 봉급이 작으면, 그들은 제2, 제3의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겠어요?!”그때까지 대한민국이 우주의 중심이라 알고 살아온 나는 적잖은 충격과 신선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나, 선생님 봉급 올려달라고 시위하는 학부모들이 있네!’ 거기서 나는 라인강의 기적, 철학과 음악, 대학과 정치의 나라 도이칠란트의 저력과 합리성을 대면했다.교사의 낮은 봉급이 야기할 유치원 교육의 저급한 수준과 아이의 정서적인 불안에 동조한 부모들의 유모차 시위행진은 심히 유쾌한 것이었다.얼마 안 있어 유치원 교사 처우개선 방안이 나왔고, 유치원은 정상화되었다.분단돼있던 당시 서도이칠란트의 국민총생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20만 미군주둔을 감당했고, 전 세계에서 온 13만 외국유학생을 공짜로 교육시켰다.그들은 국적 불문하고 유치원과 초중등학교는 물론 대학과 대학원까지 무상으로 교육하고 있었다.반값등록금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사립유치원 비리가 불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래서다. 모든 교육기관을 공적 기관으로 설립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도맡아 경영함으로써 균질적인 교육을 완전 무상으로 보장해온 도이칠란트. 그런 곳에서 교육 담당자들의 비리를 찾아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한국유치원총연합회가 이번 사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실망을 넘어 분노마저 느끼는 사람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터. 자신들의 도덕성이 교육 공무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징계 공무원 수치를 들이대는 걸 보면 유구무언이다.자기들이 설립한 유치원이 사유재산임을 주장하면서 폐원과 폐쇄 운운하는 양상을 볼라치면 가관(可觀)에 점입가경이다. 그러니까 돈벌이 수단으로 유치원을 세워서 경영했단 얘기 아닌가.이 나라 초중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마구잡이로 접수한 사학재단의 행악질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참람하고 다시 참람해 하늘 우러르기가 두렵다. 어디 돈 벌 곳이 없어서 교육계에 추악하고 더러우며 악랄한 촉수(觸手)를 뻗쳤단 말인가?! 교육 한답시고 어리숙한 정부와 무능하고 부패한 공무원, 돈 없고 마음 약한 학부모 등골을 빼먹어온 사학재단과 그 앞잡이들의 ‘돈 놓고 돈 먹기’는 이제 근본부터 잘라야 한다.세계경제의 한 축을 지탱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썩어 문드러진 것은 정부와 최고 권력자들의 수수방관이 근본 원인이다. 이참에 교육의 근간까지 낱낱이 들여다보고 대수술을 감행해야 하리라 믿는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1-01

사람을 죽인다는 것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생명 가진 것을 죽이는 일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기르던 화초나 수목 하나 죽어도 가슴이 서늘한 법이므로. 하물며 움직이는 생명체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는 대단한 결단이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얼마 전에 어깨 위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서 필시 ‘모기려니’ 하고 잡아 죽였다. 아뿔싸?! 그것은 모기가 아니라, 작은 거미였다. 성마른 판단과 행위로 거미의 생목숨을 빼앗았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사람마다 꺼려하는 생명이 있다. 나는 쥐와 뱀이 불편하다. 파리와 모기, 바퀴벌레와 돈벌레(그리마), 지렁이와 노린재도 반갑지 않다. 하지만 지렁이나 그리마 혹은 거미 등속은 웬만해서 죽이는 법이 없다. 축축하고 규모가 큰 지렁이는 삽이나 호미로 녀석의 본향(本鄕)인 흙이나 풀 속으로 던져준다. 모기와 파리같은 골치 아픈 족속을 해결해주는 거미는 아예 죽일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그런 거미를 무심코 죽였으니!직접적인 살해는 아니더라도 에둘러 상대방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 소설가 조리스 위스망스(1848-1907)는 ‘거꾸로’(1884)에서 이렇게 쓴다.“살로메는 책임감도 감정도 없이 마치 고대 그리스 신화의 헬레네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 바라보는 모든 것, 만지는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짐승이었다.”구스타프 모로가 그린 ‘살로메’ 연작을 보면서 그녀의 파괴적인 양상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소설가는 한 걸음 나아가 살로메를 ‘기괴하고 냉담한 짐승’이라고 비난한다. 고혹적이고 음란한 춤으로 의붓아비 헤롯을 기껍게 하고, 그 대가로 어미 헤로디아와 공모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살로메. 살로메는 망나니의 칼을 빌려 요한의 목을 친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이지만, 그것의 근저에는 살로메의 파괴적이고 냉담하며 음산한 육욕과 살인본능이 시커멓게 꿈틀거린다. 두려운 일이다.‘일리아스’에서 다루는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트로이의 파리스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노라면 무엇 때문에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헬레네 하나를 구출하기 위해서?! 유부녀의 몸으로 국제적인 애정행각을 벌인 헬레네를 구하려고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단 말인가?!문제는 그 이후에 있다. 10년 전란이 전개되는 동안 헬레네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파트로클로스와 헥토르, 아킬레우스같은 영웅들이 스러져나갈 때 그리스 최고의 미인은 어디서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위스망스는 헬레네를 살로메와 동렬에 올려놓고 날카로운 비난의 화살을 쏘았을 것이다. 죽음의 서약을 하고 헬레네에게 청혼했던 숱한 그리스 청년들의 열망을 냉담한 그녀는 간단히 무시해버린 게 아니었을까!지난 10월 14일 일어난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으로 한국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잔혹범죄 용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국민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따라 피의자 얼굴도 언론에 공개된 상태다. 심신미약을 이유로 살인자를 감형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청원이 100만을 넘어섰다. 일부 언론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분노범죄’의 일상화를 공론화한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생겨나는 살인자가 1년에 400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한때는 ‘동방의 등불’이자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렸던 평화애호 민족의 나라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잔인한 범죄가 차고 넘치는 나라로 전락한 것일까?! 돈과 권력의 화신이자 범죄의 무리가 권력과 돈을 독점하면서 생겨난 단면 아닐까, 생각한다. 생명의 소중함마저 백안시(白眼視)하는 살풍경한 세태교정을 이제라도 시작할 때다.

2018-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