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4·13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났다. 많은 언론사가 절대적으로 틀린 예측결과를 사과하는데 적잖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틀려도 유만부동(類萬不同) 아니었는가? 그렇게 틀린 여론조사로 민심을 예단(豫斷)했으니, 망신살이 뻗쳐도 단단히 뻗친 셈이다. 언론사의 체면치레는 조만간 끝날 것이다. 언제 그랬느냐 하고 그들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 길 떠날 것이다. 근면한 살육자(殺戮者) 하이에나처럼! 문제는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21세기를 살아갈 내재적인 동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관건(關鍵)이다. 본래 선거는 미래권력을 선출하는 행위다. 물론 선거에는 회고적(回顧的)인 의미도 담겨 있지만, 선거의 핵심은 미래를 지향한다.2016년 4월 한국의 정치지형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20세기 중후반을 누비던 인사들이 주축이다. 60~70대가 주역을 맡고, 그 아래 세대가 조연과 단역으로 나오는 재미없는 드라마가 한국정치다. 통렬한 풍자(諷刺)와 신랄한 비판, 그리고 상큼한 대안제시가 사라진 정치판은 개그 콘서트보다 못하다.이쯤에서 우리는 미래로 가는 길을 물어야 한다. 21세기가 어느새 15년이나 지났건만 한국정치는 1970~80년대에 매몰(埋沒)되어 있다. 스마트폰과 인공지능(人工知能)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그늘에 갇혀 산다. 첨단 과학기술의 세례(洗禮)를 날마다 경험하지만 우리의 사유와 인식, 그리고 경험은 흑백 가정용 전화기 시대에 묶여 있다.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용이 바뀌면 형식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우리는 어떤 내용으로 21세기를 채워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준비하지도 않는다. 그저 외부에서 주어지는 지식과 정보를 답습(踏襲)하고 소화하는데 열중한다. 소련을 필두로 한 실존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崩壞)한 지 25년 세월이 흘러갔다. 동서 도이칠란트가 재통일되고, 유럽연합이 자연국경을 포기하고 출범했다. `흑묘백묘론`으로 시작한 중국은 `도광양회`를 거쳐 `대국굴기`를 지나 `돌돌핍인`의 지경으로 우뚝 일어서고 있다.그런데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우리는 반도(半島) 아닌 섬에서 살고 있다. 대륙을 향한 상상력은커녕 분단극복을 위한 그 어떤 진실한 노력도 없다. 세계적인 불황과 경기침체로 `헬조선` 담론(談論)이 일상화되었지만, 그것의 대안(代案)은 여전히 부재중이다. 여기서 필요한 학문이 인문학이며 그 가운데서도 역사학(歷史學)이다.“역사가는 돌아앉은 예언가”라는 말이 있다. 그런 형안(炯眼)을 가진 역사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하지만 우리에게는 역사교수나 역사교사는 많아도 역사가는 없다. “역사에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 배운다!”는 속설을 입증하는 소논문만 판치는 세상 아닌가? 시대를 통찰하고 미래를 통관하는 장쾌(壯快)한 시각을 가진 신진기예가 배출되어야 함에도 현실은 막막하다.지역과 세대와 수저를 넘어서는 탁월한 담론이 나오고, 그것을 둘러싼 치열(熾烈)한 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5천년 문화민족을 자랑하는 우린데, 어찌하여 세계적인 사상가나 철학자, 역사가 하나 없단 말인가! 안으로는 우리 민족과 국가의 명운(命運)과 어린것들을 사유하고, 밖으로는 전 지구적인 삶의 양상과 미래를 기획(企劃)하는 현인(賢人)의 등장을 고대한다. 그나 그녀가 아니라, 그들이라면 훨씬 더 유쾌할 것이다.20세기 담론과 정치철학, 그리고 행동방식으로 21세기를 살아감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번 총선 결과가 보여주는 핵심이 그것이다. 세계의 변방(邊方)이나 주변부에서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오르려는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치열하게 시공간을 사유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깨어있는 인문학자, 역사가와 철학자의 등장을 고대(苦待)하는 시각이다.
2016-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