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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누가 산을 옮길 것인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산이 내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가겠다!” 무하마드의 명언이다. 깨달은 자 무하마드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가 말한다.“저산이 당신에게 온다면 당신을 따르겠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에 무하마드는 그렇게 응수(應手)한다. 산이 움직일 리 만무하다. 하지만 공간이동 측면에서 본다면 산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나, 내가 산 쪽으로 가는 것이나 큰 차이 없다. 믿음은 신통력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우공이산(愚公移山)`의 주인공 우공은 문자 그대로 어리석은 인간이다. 미력(微力)한 인간의 힘으로 산의 돌을 깨고 흙을 옮겨 산을 평지로 만들고자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믿은 우공의 자신감은 근거가 있었다. 대대손손 산 옮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땐가 대사를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심산이었다. 결국 상제(上帝)가 손을 들고 산을 옮겨주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열자(列子)` `탕문`에 실려 있다.무하마드 이야기는 진취적인 적극성을, 우공 이야기는 연면 부절하게 이어지는 끈기와 대물림을 설파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인도하는 동력(動力)은 인식과 사유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에 도전하려는 의지와 자신감이 동행하면 성사 가능성은 한결 높아진다. 역사는 적잖은 성공사례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 똬리 틀고 있는 실패에 대한 불안감이다.추석명절에 큰아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요즘 청춘들의 염량세태(炎凉世態)에 귀를 열게 됐다. 가능하면 안전하고 실패할 확률이 적은 영역에 몰리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원인 하나가 거기서 발원(發源)한다고 아들은 꼬집는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라는 부모의 성화도 성화지만, 젊은이들 스스로도 도전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승(勝)하다는 것이다. 쌍방과실 아닐까, 생각한다.젊은이들의 오만에 가까운 패기와 거듭되는 실패를 기성세대가 용인하고 격려함은 `청춘은 외상`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이려니와 국가의 명운(命運)을 담당하게 될 청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은 기성세대의 의무사항이다. 젊은 거지를 박대(薄待)하지 않는 풍습은 고금동서 마찬가지다. 청춘의 무모한 도전과 끝 모를 좌절(挫折)을 보듬고 전진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나이든 축들의 당연한 의무가 아닐 수 없다.2015년 추분을 지난 한국의 가을은 음산(陰散)하다. `헬조선`으로 명명되는 이 나라의 현재는 20~30대 청춘의 도살장(屠殺場)이자 지옥(地獄)으로 표현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신분제로 억압된 대다수 청춘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도 미래의 나라도 아닌 지옥이 돼버렸다. 그런 지옥을 만든 자들은 필자를 포함한 기성세대다. 기성세대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넘어간 청춘들은 지옥 타파에 무관심하다.지옥을 무너뜨리고 천국을 만들려는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든 것 역시 우리 기성세대다. “가만히 있어라!”하는 말이 절대적인 명제가 되어버린 동토(凍土)의 나라.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나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행동하지 않는 청춘들의 소굴(巢窟). 남들처럼 숨죽이며 대세에 편승(便乘)하는 허다한 청춘들의 행렬. 그들에게 마취제를 투약하는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의 넘쳐나는 허언(虛言).옥황상제가 산을 옮겨주는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산은 언제나 의연(毅然)하게 그 자리를 지킬 것이며, 결코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우리가 산으로 가거나, 산을 옮기는 방도(方途)만 남은 셈이다. 이제라도 청춘들에게 적나라한 `헬조선`의 지금과 여기를 까발리고, “가만히 있으면 다 죽는다!”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기성세대가 청춘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好意)일지도 모른다.

2015-10-02

하나의 사건, 세 가지 시선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1951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라쇼몽`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에 의지한다. 1915년 작 `라쇼몽`과 1922년 작품`덤불 속`이 그것이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과 제목을 헤이안 시대 경도(京都)의 `라쇼몽`으로 설정하고, 사건과 등장인물은 `덤불 속`에서 끌어온다. 영화는 `라쇼몽`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세 사람의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원작에 없던 설정이다.이 글의 목적은 영화와 원작의 세밀(細密)한 분석이 아니다. 백주대낮에 일어난 사무라이 살인사건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 핵심이다. 아내를 말에 태우고 길을 가던 사무라이가 다조마루라는 산적에게 살해당한다. 그런데 살인사건과 직접 연루(連累)된 세 사람 이야기가 모두 다르다. 사무라이는 죽은 무당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명징하게 확인한다.다조마루는 말한다. “사무라이를 죽이지 않고 그의 아내를 겁탈하고자 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쓰러져 우는 여자를 남겨두고 덤불 밖으로 도망치려하자 사무라이의 아내가 `당신이든 남편이든 어느 한쪽은 죽어야 한다. 두 남자에게 치욕(恥辱)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래서 남편의 밧줄을 풀어주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서 그자를 죽였다. 결투(決鬪)가 끝나고 보니 여자가 사라져버렸다.”사무라이의 아내는 말한다. “산적에게 강간당하고 난 다음 남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나를 경멸하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정신을 잃어버렸다가 깨어보니 나무에 묶인 남편만 있고 산적은 사라졌다. 남편의 싸늘한 경멸과 증오의 눈빛은 여전했다. 나는 치욕과 분노, 노여움 때문에 남편 가슴에 단도를 꽂아 넣었다. 나 역시 죽으려고 여러 번 시도(試圖)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청수사`에 몸을 의탁(依託)하고 있었다.”사무라이의 죽음을 둘러싼 세 사람의 증언은 확연히 갈린다. 다조마루는 결투를 해서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한다. 아내는 사무라이 남편을 죽인 장본인(張本人)이 자신임을 확인한다. 사무라이 자신은 자결로 목숨을 버렸다고 증언한다. 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영화도 소설도 누가 사무라이를 죽였는지, 명확하게 확인해주지 않는다. 그저 우리에게 문제를 제기할 따름이다. 왜 이토록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는가?!우리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듣는다는 교훈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성 (屬性) 가운데 하나다. 중요한 어떤 사안(事案)에 대해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할 경우에도 우리는 어느 정도 심중(心中)에 결정을 내린 연후에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나 그것에 가까운 조언이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고 때로는 결론을 유도(誘導)하기도 한다.내가 원하는 답변이나 조언을 해주는 사람을 우리는 동지나 친구 내지 멘토라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결론을 제시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리석은 자 혹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린다. 여기에 사태의 핵심과 맹점(盲點)이 자리한다. 동일한 눈길로 동일한 곳을 동일한 목적으로 바라볼 때 붕당(朋黨)과 파벌(派閥)과 만장일치가 생겨난다.`우리가 남이가` 하는 의식은 그런 분위기와 조건 속에서 스멀스멀 형성된다.왜 다른가,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나와 다른 결론은 어떤 결과를 잉태(孕胎)하는가, 그런 것을 살피는 작업이야말로 21세기를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무지개에 담겨 있는 일곱 가지 색깔은 모두 다르지만 지극한 조화로움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선물한다. 일컬어 `화이부동`이라 한다. `동이불화`를 넘어서는 `화이부동`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보셨는가?!

2015-09-25

소세키와 근대일본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의 소설 `풀베개`(1906)를 읽다가 상념에 잠긴다. 명치시대(1868~1912)를 살아간 지식인이자 문사(文士)로 시대의 고민을 소설로 풀어낸 소세키. 소세키라는 이름은 `수석침류(漱石枕流)`에서 따온 것이다. “돌로 양치질하고, 물로 베개를 삼다”는 의미다. `수석침류`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고집쟁이나, 지기 싫어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 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 같은 초기작품을 읽어보면 완미(頑迷)한 고집불통이나 벽창호 소세키를 떠올리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고루한 딸깍발이 정도는 연상 가능하지만. 그러나 그의 개인사를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역시 뭔가 있다. 그는 국비 유학생으로 1900년 4월부터 1902년 12월 초까지 영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유학생활 중에 정신질환 수준의 모진 신경증에 시달린다.문제의 핵심은 일본인으로서 영국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강박증이었다고 한다. 일본이 유럽의 신문물을 열광적으로 수용해 근대국가로 전환해나갔던 명치 격동기를 살아야 했던 문사의 여린 내면세계가 문제였던 것이다. 소세키는 일찍이 한시(漢詩)와 일본의 하이쿠, `만엽집(萬葉集)` 그리고 일본 선승(禪僧)들의 세계와 회화 (繪畵), 노 같은 전통연희의 세례(洗禮)를 받은 지식인이자 교양인이었다.느닷없이 불어 닥친 근대 혹은 영국으로 표상되는 유럽의 서슬은 그의 내면풍경을 모질게 흩어버린다.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뇌와 방황이 시작된다. `풀베개`는 그런 정황(情況)을 드러내는 역작이다. 소설에는 동양적인 것과 일본의 정수(精髓)를 대변에 두고, 유럽적인 것과 영국의 미학을 차변에 두고 벌이는 대결이 펼쳐진다. 하지만 소설의 본령에는 근대를 자각해가며 고뇌하는 지식인의 형상이 자리한다.정신질환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했던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던 소설 창작이 훗날 소세키를 전업 작가로 변모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초기창작 대부분이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라는 점이다. 소세키 소설은 구미(歐美)의 관점에서 보면 무엇인가 어설프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럼에도`풀베개`를 읽으면서 나는 동시대 조선 혹은 구한말을 떠올리면서 적이 당혹스럽고 안타까웠다.그가 사유하고 인식하면서 맞닥뜨렸던 근대일본의 초상(肖像)과 작가의 내면세계가 도달한 지적-정신적 수준이 도저했던 것이다. 명치유신이 경과한 지 40년 만에 소세키가 포착한 근대유럽 내지 영국은 새삼 놀라운 것이었다. 불과 2년 반 정도의 영국 체류에서 그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의 반감(反感)과 깨달음을 양립시켰다. 그의 사유 근저에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누가 있기는 했을까`하는 의혹이 머릿속을 맴돈다. 소세키와 동시대를 살았던 조선의 누가 서양미학과 동양 내지 조선의 미학을 이항(二項) 대립시키면서 출구를 모색했을까. 한편으로는 모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하려는 의식적이고 자각적인 노력을 경주한 조선인은 누구였을까! 주어진 것을 답습(踏襲)하지 않고, 나름대로 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길을 열고자 분투한 선각자가 있기는 한 것인가?!장구(長久)한 세월 중국의 지적-정신적 자산의 세례에 감사하고, 100년 세월 일본과 미국을 모방해온 한반도 아니었는가?! 한반도에 터를 둔 어떤 정신사적-사상사적 물줄기가 지구 공동체를 흐뭇하게 적시고 있는가?! (물론 나는 `동학(東學)`에 문외한(門外漢)이어서 그것만은 예외로 둬야 한다.) 모든 고전유산과 근대적인 것을 인접국에 신세지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은 2천년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소세키는 모방하는 자신의 내면세계가 수용되지 않아서 그토록 괴로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각성(覺醒)한 일본의 지식인이자 근대인으로 자아 정체성에 대해 끝없이 문제를 던짐으로써 일본의 미래가 되었다. 오늘날 일본이 가지고 있는 모방의 솜씨와 창조의 재능은 명치시대를 살아간 소세키 같은 지식인들의 고투(苦鬪)와 분발에 그 물줄기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15-09-18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1930년대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암살`이 1천300만 관객을 향해 순항하고 있다. 36년의 일제강점기는 한민족 최대의 수치인 을사늑약과 경술국치가 결과한 것이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촉발된 상해임시정부와 의열단 결성은 꺼져가던 식민지 해방운동의 교두보로 작용한다. 그것은 나석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쾌거로 이어진다. 약산 김원봉 선생이 주도한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15인을 구성원으로 결성된다.“정의(正義)의 일을 맹렬(猛烈)하게 실행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체가 의열단이었다. 1923년 1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이 의열단의 이념과 활동방향에서 절대적인 지침(指針)이었다. `선언`에서 단재 선생은 `민중직접혁명`과`평등주의`를 내세운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정치(武斷政治)에서 문화정책(文化政策)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에 따라 국내외의 독립 운동가들은 문화주의(장덕수), 외교론(이승만), 준비론(안창호) 등을 제기한다. 신채호 선생은 그와 같은 활동을 미온적(微溫的)이라 평가하면서 `폭력적 민중혁명`을 제창한 것이다. 외교나 문화 같은 방식으로 일제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단재는 혁명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암살(暗殺)과 파괴(破壞)를 제시한다.조선총독과 고관, 군 수뇌부,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친일 토호세력 제거가 암살 대상이었다. 단재 선생은 열거된 일곱 부류에 속하는 자들을 죽여도 좋다고 하여 `가살(可殺)`이라 명명했다. 그런데 김구 선생이 주도한 임시정부 역시 `7가살`이라는 이름으로 척결대상을 지정했는데, 단재의 `가살`과 동일한 범주의 인물이었다. `의열단선언`에서 제시된 파괴 대상으로는 조손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경찰서 등이 포함되었다.나석주 의사는 1926년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이봉창 의사는 일제의 심장부 동경에서 히로이토에게 폭탄을 던짐으로써 제국의 수도 역시 안심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폭탄투척은 중국인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런 형태의 물리적 폭력을 통한 조국 해방운동 내지 독립운동은 민족적 자긍심과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밀알로도 기능했다.하지만 193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점차 왜소해진다. 허다한 인텔리들은 모던뽀이와 모던껄로 전락(轉落)하여 `암살`의 미츠코 같은 인물로 타락(墮落)한다. 그런 와중에도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은 의연(毅然)하게 조국해방과 독립의 외길인생을 걸어간다. 약산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요새 돈으로 환산하면 300억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일제에게 약산은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요즘 새누리당과 교육부 장관이 앞장서서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난리법석이란 소식이 들린다. 21세기 대명천지에서 특정정파와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교과서를 만들어 다음세대를 가르치겠다는 반민주적인 발상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21세기는 국가의 개입보다는 시민들의 다원성과 자율성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가 중요한 시기다. 국가 간의 첨예(尖銳)한 이해관계와 시각 차이를 깊이 있게 조명하는 작업도 유의미하다.역사 교과서 국정화보다 약산 김원봉 같은 망각된 독립 운동가들이나, 6·25를 전후한 시점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민간인 학살 같은 피어린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하리라 믿는다. 잘못된 역사는 반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야 `암살`같은 영화를 보면서 우리 어린것들이 새삼스럽게 한국사를 성찰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오늘 우리의 결정 하나가 훗날 역사가 된다는 엄중(嚴重)한 사실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한다.

2015-09-11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순천에서 인물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하지 말고, 벌교에서 힘자랑 하지마라!”는 옛말이 있다. 나는 그것을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읽었다. 젊어서 마주한 이 말의 함의를 깨닫게 된 것은 나중 일이다. 세 지역의 특성을 설파한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가나 몸과 마음을 낮추라는 경구(警句)로 읽으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경험 일천할 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여기저기서 깨지고 혼나고 세상살이 이치 조금씩 배우면서 아하, 그런 말이었네 한다. 나는 그것을 단출하게 줄인다. “강호(江湖)에는 고수가 많다!” 인간의 견문이 좁고 제주장이 강하면 세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에 자기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중세의 천동설을 떠올리면 충분하다. 우주의 한 모퉁이, 은하계의 변방에 미미하게 자리한 태양계의 혹성을 하늘의 중심으로 보았으니 말이다.얼마 전에 한옥(韓屋)을 30년 지었다는 대목(大木)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신축가옥에 물이 새는 문제에 이르렀다.“큰 나무가 제자리를 잡으면 작은 나무가 그 뒤를 따르고, 따라서 비 샐 일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고로 비가 샌다는 것은 애초에 기둥이나 들보가 온전하게 제자리를 집지 못한 탓이라는 얘기다.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고수는 다르구먼!`이런 고수는 일상에 깊이 침윤하여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집으로 말한다. 농부가 곡물이나 청과로, 어부가 어물로 말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청나라 말기의 명신 증국번이 떠올랐다.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인물로 역대 청나라 조정에서 최강최고의 실권을 틀어쥐었던 한인(漢人)이 증국번이다. 자희태후(서태후)의 서슬을 용케 피해 고종명한 증국번.그가 철없던 아우 증국전에게 보낸 칠언고시가 생각난 것이다. “左列鐘銘右謗書 人間隨處有乘除 低頭一拜屠羊說 萬事浮雲過太虛. 좌열종명우방서 인간수처유승제 저두일배도양열 만사부운과태허.” 거칠게 옮겨보면 “왼쪽에는 공적조서가 오른쪽에는 비방하는 서책이 빼곡 하네. 인생 굽이굽이에는 좋은 일과 궂은 일이 있는 법. 머리 숙여 도양열에게 절해야 할 것이다. 세상만사 뜬구름처럼 허공(우주)을 지나갈 터이니!” 이런 정도 뜻이다.막강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조심스럽게 운신한 증국번은 중국역사에 길이 이름자를 남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태평천국`의 신도들에게 그는 만고(萬古)의 역적이겠지만 말이다.세 번째 행에 나오는 `도양열`은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장자`의 `잡편` 양왕(讓王)에 등장하는 인물이다.그는 허다한 공적을 세웠으나 끝내 왕의 부름을 받들지 않고 자신의 본업에 충실했다.요즘 세상에 작은 공을 부풀리지 않는 사람, 자기과시(自己誇示)에 열을 올리지 않는 사람, 어디서 불러주지나 않을까 줄을 대고자 하지 않는 사람 만나기 어렵다. 누구나 이름자 날리고 권력 잡아 한밑천 두둑이 챙기고자 혈안(血眼)이다. 그들은 공적조서는 보잘 것 없지만, 비방문서는 넘쳐난다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의 중심에 자신이 자리한다는 착각(錯覺) 속에서 오늘도 분망하다.그들이 양(羊)이나 잡는 하찮은 인간에게 절하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은 아무리 잘 지은 집에 살아도 내면으로 물이 새는 법이다. 안에서 새는 쪽박이 밖으로 나간들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경(自警)하는 의미로 증국번의 칠언고시를 읽는다. 거기 의미를 더해준 고수가 한옥을 짓는다는 대목이었다.나이 먹을수록 주변 사람을 비방하고, 자신을 추어대는 지식인이 너무 많다. 대문짝만한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깨알 같은 남의 허물은 기막히게 들춰내는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설령 그런 자가 비판적이고 견실한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쓰임새보다는 해로움이 훨씬 많은 법이다.이런 세파(世波)에 묵묵히 제길 가는 강호의 뭇 고수들이 새삼 고마운 것이다.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

2015-09-04

고소공포증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영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스릴러 장르로 호가 난 사람이다. `현기증`(1958)이 그의 영화 가운데 하나다.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는 스코티 형사를 둘러싼 치정(癡情)과 돈을 줄거리로 삼은 멜로 스릴러다. 자신의 키 높이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졸도(卒倒)하는 그의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은 유별난 데가 있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은 꽤 많은 사람들이 겪는 증상(症狀)이다.나도 높은 곳을 즐기지 못하는 인간이다. 언젠가 영암 월출산에 갔다가 절벽 양쪽을 연결하는 현수교(懸垂橋)를 왕복해야 하는 곤욕(困辱)을 치른 일이 있었다.강고한 철물 구조물로 이루어진 다리는 탄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람도 없고, 날씨도 청명했다. 큰맘 먹고 다리를 건너기는 했는데, 정상으로 가려니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경사를 이룬 철제 계단들이 머리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여름날 해가 길다지만 오후 5시를 넘긴 산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정상까지 올랐다가 하산하려면 세 시간은 넉넉히 걸릴 듯했다. 이쯤해서 물러서는 것이 상책(上策)이란 판단이 들었다. 문제는 방금 전에 건넜던 철제 구름다리를 다시 건너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상까지 무리해서 갈 것이냐, 아니면 두렵더라도 다리를 다시 건널 것이냐,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순간이 다가왔다.판단은 짧고 신속했다. 목전(目前)에 화사하고 장려(壯麗)하게 펼쳐진 철제 계단들의 아득한 행렬이 훨씬 두려웠기 때문이다. 철제다리 건너 하산하는 마음이 그다지 무겁지 않았음을 기억한다.하지만 고소공포증에 억눌린 심신과 영혼(靈魂)은 심히 낯 뜨거운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고백하기도 언짢고, 아쉬움을 토로(吐露)하기도 마땅치 않은 상황의 수인(囚人)이 되어버린 느낌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높은 곳에 오르는 일은 현대생활에서 다반사(茶飯事)다. 고층아파트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든지,비행기를 탄다든지, 등산하다 낭떠러지를 지나가야 한다든지, 그야말로 숱한 경험이 고소(高所)와 대면하는 일이다. 문제는 고소공포증이 쉽게 극복되는 증상이 아니라는 것이다.사람마다 증상도 각양각색이다. 비행기 타는 것은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13층 이상 아파트 베란다는 끔찍하다.4-50층 고층 아파트에 아무 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운 까닭은 그래서다. 그 아스라한 높이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대화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인간이 저토록 높은 곳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침팬지와 갈려나온 것이 500만 년 전인데, 인간에게 진화 이전단계의 공통 유전자가 아직도 강력하게 살아남아 있다는 얘긴가?!베를린 유학시절 30m 높이의 지붕에서 노동(動)하는 시간제 일자리를 구한 적이 있었다.사흘 만에 그 자리를 그만둔 데에는 십장(什長)과 나의 불화가 결정적이었지만, 고소공포증도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상사혐오증과 고소공포증이 결합하여 시간당 급여(給與)가 비교적 괜찮은 일자리를 포기한 셈이다. 그 덕인지 몰라도 `게오르크 렘케`공장에서 5주 연속으로 중노동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나쁜 현상만은 아니다. 공포로 인해 우리는 많은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과속하면서, 급경사와 대면하면서, 옆 차와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운전한다.우리가 독버섯에 중독되지 않고, 과식으로 위장을 혹사(酷使)시키지 않는 것도 공포 때문이다. 적절한 수준의 공포는 인간관계나 사회관계에서 필수적인 덕목이다. 공포가 없다면 약육강식의 세상이 될 것이다.`현기증`에서 스코티는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고소공포증을 극복한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사랑으로 인해 발생한다. 도저히 고쳐질 것 같지 않던 공포마저 극복하도록 인도하는 사랑의 위대한 힘이라니! 나는 우리 사회의 고관대작들과 정치 권력자와 돈 많은 자들과 문화 권력자들의 공포를 기대한다. 국민과 가난한 자와 문화 수용자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그들이 조속(早速)히 회복하기 바란다.

2015-08-28

청량한 장대비를 기다리며!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가뭄이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청량(淸凉)한 비를 대망(待望)한다. 찔끔찔끔 내리는 비가 아니라, 대기와 대지의 열기를 날려줄 장대비를 기다리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인 물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농부 입장에서 보면 비처럼 고마운 것이 세상에 다시없다. 대지와 햇빛과 어울려 풍성한 수확을 약속해주는 비 아닌가?! 보름 넘도록 비 구경하기 어려웠던 실정이고 보면 지금 창밖에 내리는 비는 귀한 손님이다.사람이 아무리 좋은 기계를 발명한다 해도 비처럼 골고루 대지를 적셔줄 수는 없다. 비는 한 방울도 허투루 낭비되는 법이 없다. 특정한 논밭이나 과수원에만 비는 오지 않는다. 비는 골고루 내린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다. 미우나 고우나 자연은 품안의 대상물을 모두 포용한다. 하지만 지나치는 경우도 적잖다. 노자는 그것을 일컬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했다. 하늘과 땅, 즉 자연이 `인`하지 않다고 설파한 것이다. 왜 그런가?!탄생과 죽음은 자연의 본원적인 `섭리(攝理)`다. 천지자연의 법칙은 그 생겨남과 소멸함에 더하고 빼는 일을 하지 않는다. 이른바 “당면할 일을 당면하면서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유한(有限)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중생이 볼 때는 심하다 싶을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화산이나 지진, 태풍 같은 자연재해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불만과 저항감이 들 것이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일본에 불어 닥치는 태풍이 없었다면, 일본인의 3분의 1 정도는 사멸(死滅)했을 것이라는 정보도 있다. 태풍이 인간에게 자연재해로만 다가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다량의 비와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가져다주는 이로움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는 말이다.이해득실(利害得失) 면에서 현대인은 일면만을 취하려한다. 손해 보거나 양보하거나 물러서는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누구나 이득을 보고자하고, 먼저 가려하며, 앞만 보고 전진한다. 성공한 자의 이야기만 난무(舞)할 뿐, 양보한 사람, 물러선 사람,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승리하고 성공하는 사람보다 패배하고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인간은 실패에서 배우지, 성공에서 배우지 않는다.오죽하면 `엄친아`라는 희대(稀代)의 명언이 만들어졌겠는가?! 비교함으로써 자식의 진을 빼는 엄마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은 미래가 없다. 비교하는 엄마는 얼마나 대단하고 잘났는지, 생각해 보았는지 궁금하다. 모두가 1등하면 3등은 누가 하고 꼴찌는 또 누가 할 것인지 진지하게 숙고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꼴찌 없이 3등 없고, 3등 없이 1등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왜 외면하는 것일까. 단역 없이 조연 없고, 조연 없이 주역 없다!10여 년 전에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이`다이나믹 코레아!`라는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다. 정적(靜的)인 일본사회보다 훨씬 역동적인 한국사회를 일컬은 말이다. 그 안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한국사회의 저력과 미래의 가능성만큼은 긍정적인 것이었다. 이제는 그런 동력마저 시나브로 사라져간다. 서열과 위계로 획정되어버린 숨 막히는 사회구조의 폐쇄회로(閉鎖回路)가 눈을 번득거린다.하지만 나는 희망을 가지기로 한다. 앞날을 환하게 밝힐 우리의 어린것들이 아직 꿈과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한국사회의 청량한 장대비가 될 것이다. 특정한 지역과 계층과 패거리만을 대표하는 이 나라 정상배(正常輩)들의 가공할 폐쇄지향성을 말끔히 때려 부수고 21세기 세계화시대를 환하게 열어 가리라 믿는다. 아침 내내 내리던 비가 서서히 그치고 구름 뒤로 햇살이 환하다! 곧 바람이 불 것이다!

2015-08-21

한국사회, 어디로 가는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여름이 정점이다. 만나면 하는 말이 “덥다, 더워!”다. 그래도 은행과 산수유, 모과와 석류는 소리 없이 익어간다. 어디선가 말매미 우는소리 귀가 소란하다. 여름은 그렇게 깊어간다.얼마 전 흥미로운 자료가 나왔다.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행시 합격자들의 의식조사 결과다. 5급 예비 사무관인 그들의 정치적 성향은 크게 진보 40%, 중도 35%, 보수 25%로 나뉜다고 한다. 관심을 끄는 항목은 그들의 83%가 한국사회의 가장 큰 힘을 재력(財力)을 꼽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92%가 부(富)의 공정한 분배가 우리나라에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계층이동(階層移動)이 가능하다`는 항목에는 70%, `우리사회가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한다`는 항목에는 67%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정치적 성향의 분포(分布)는 크게 유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대정신(時代精神)과 권력구조 및 언론과 사회 환경의 영향이 지대(至大)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본디 민심이야 조변석개(朝變夕改)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돈으로 표상(表象)되는 재력과 부의 분배문제다. 언젠가 고 노무현 대통령이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명언(名言)을 남긴 바 있다. 여기서 시장은 대기업과 재벌, 특히 삼성을 가리킨다고 전해진다. 3공부터 5공까지 정치권력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에는 재벌 회장들이 앞 다투어 정치헌금을 내곤 했다. 재계(財界)가 정치권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다.21세기 새로운 천년 벽두(劈頭)부터 우리는 휘청거렸고, 정치권력은 서서히 경제권력 앞에 주눅 들기 시작했다. “부자 되세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조악(粗惡)하기 그지없는 서책들이 불티나게 팔렸던 암흑기(暗黑期)를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그 결과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여주는 통계치가 예비 사무관들의 의식조사다.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지 않는 사회, 계층이동 가능성이 현저하게 약화된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달달 볶아도, 그래서 이른바 `스카이` 들어가도 졸업하면 백수(白手)가 될 확률이 절반이다. 공부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한국사회의 불의와 불평등은 가진 자들의 부패(腐敗)와 무능, 타락과 패거리주의에서 발원한다. 요즘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롯데재벌` 형제의 혈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려 67년 동안 롯데를 다스려온 신격호가 소유한 지분은 불과 0.05%다. 친족 지분 다 끌어 모아도 2.41%밖에 안 된다. 기막히게 조작된 거미줄 식 순환출자구조로 유지해온 악덕재벌 아닌가? 416개의 순환출자구조가 그물처럼 짜여있는 것이 롯데의 자산이자 자랑이다.한국재벌 기업들의 이런 비윤리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순환출자구조는 줄어들되 근절되지는 않았다. 재벌이 가진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다. “돈은 귀신과도 통한다!”는 의미의 `전가통신(錢可通神)`이란 고사성어가 있는 것을 보면 돈의 위력이 막강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들을 장악하고 지도 편달해야 하는 최고 권력 담당자들과 정당 및 행정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와 타락(墮落)이다. `관피아` 논쟁을 낳으면서 우리를 절망케 했던 관료들 아닌가?한여름 땡볕 아래에서 나는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의 거대한 전변(轉變)을 꿈꾼다. 개인과 가족, 친인척과 패거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깨끗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들의 출현을 간절히 희구한다. 보름 지나면 스러지는 매미가 아니라, 천년을 사는 주목(朱木)처럼 의연하고 당당한 인간들이 다스리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고 싶다! 여름이 깊어야 가을이 오는 법이다. 입추 말복 지나면 처서 오리니, 바람도 선선해지리라!

2015-08-07

`짬짜면`을 드시나요?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어떤 사안(事案)이나 대상을 판단할 때 당신이 의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성인가 감성인가. 그도 아니면 제3의 요인이 존재하는가.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는가. 맛과 향이 전혀 다른 음식을 앞에 두고 곤혹(困惑)스럽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짬짜면`이라는 기발한 음식이 만들어진 배경은 여기 있다. 곤욕(困辱)스러운 선택을 일거에 날려버린 창조적인 비방(秘方) `짬짜면`.얼마 전 흥미로운 통계가 발표됐다. `인구의 90% 이상이 국토의 2.44%인 도시지역 내 주거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전체인구 5천132만 명 가운데 91.66%인 4천705만 명이 특정지역에 몰려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특정지역에 사람이 대거(大擧) 몰리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층간소음과 보복운전 같은 문제가 떠오를 것이다. 제한된 공간에 다중(多衆)이 어울려 살다보니 공간의 입체화가 필수적이다. 좁은 땅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고층화는 필연이다. 똑같은 형태의 거주공간이 만들어지고, 똑같은 장소에서 먹고 자는 판박이 인생이 전국 도처에 일상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층간소음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경쟁만능과 승자독식의 야만상태를 당연시하는 한국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가정교육은 오래전에 소멸(消滅)했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세상. 공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에서 공중도덕 같은 범주는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덕목에 불과하다.보복운전도 비슷한 맥락(脈絡)을 가진다. 서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가 십상인 과속사회의 생존법칙은 `빨리빨리!`다. 그것은 양보와 겸양의 미덕이나, 여유로운 운전과 거기서 얻어지는 보고 생각하는 즐거움을 앗아간다. 서둘러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强迫)만 남을 뿐이다.아파트나 연립주택에 살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침저녁으로 청소하면서 탁자나 의자의 소음방지에 마음 쓰는 사람은 얼마인가. 햇볕 바른 날 이불을 털면서 아래위층 생각하며 자제하는 사람은 또 얼마일까.`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는 거룩한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반성적인 유일자(唯一者) 인간이다. 돌아봄이 없으면 나아감이 불가(不可)하고, 돌아봄에 철저하지 않으면 금수(禽獸)로 전락함은 필연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속도와 쏠림과 경쟁은 기초적인 성찰과 반성적 사유마저 유린(蹂躪)하고 있다. 어디로 나아가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돌이킬 여유 없이 저돌적(猪突的)으로 전진 운동할 따름이다.소음과 매연, 열섬현상과 열대야, 층간소음과 보복운전이 일상화되어 있는 공간에 92%의 국민이 몰려 사는 나라. 국민들은 저마다 속도전에 나서야 하지만 불확실한 결과로 인해 괴로운 나라. 경제적인 양극화와 청년실업을 말하면서도 나와 내 자식은 예외(例外)라고 믿는 국민들의 나라. 자신이 이성적인 존재임을 확신하며 오늘도 활기차게 경쟁만능의 한복판으로 질주하는 인간군상의 나라 한국.하지만 당신의 선택이 얼마나 이성적인지 생각해 보셨는가. 당신의 거주공간과 거주형태와 생활양식에 당신의 이성적 판단과 실천이 얼마나 작용했는지, 생각해보셨는가.쏠림현상이 세계적으로 가장 우심(尤甚)한 한국인들의 사유와 인식의 기저(基底)에 자리하는 공포와 희열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대열에서 이탈하면 그 즉시 패배자의 낙인이 찍히는 숨 막히는 사회의 억압이 장마처럼 눅눅하다.인간은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판단하지만, 92%는 타성(惰性)과 관성(慣性)으로 결정한다. 우리가 보낸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랜 관성과 타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자꾸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결단(決斷)해야 한다.“짜장인지, 짬뽕인지?!” 오늘도 `짬짜면`을 주문하고 있을지도 모를 당신에게 권하노니, 과감하게 선택하시라!

2015-07-31

쿠바와 미국의 국교정상화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카리브 해에서 세계사의 전환을 알리는 횃불이 타올랐다. 지난 20일(현지시각) 쿠바와 미국의 국교가 재개(再開)되었다. 1961년 국교단절 이후 54년 만의 일이다. 쿠바 역사학자 에우제비오 레알은 공산당 기관지 `그라마` 인터뷰에서 “1961년 미국에서 내려졌던 쿠바 국기가 다시 올라가기까지 53년 11개월 18일을 기다렸다”고 술회(述懷)했다. 기나긴 세월이다.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작년 12월17일 국교 정상화를 전격적(電擊的)으로 선언했다. 지난 4월 파나마에서 열린 미주기구 정상회의에서 그들은 상호협력을 재확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5월에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지난 1일 양국 대사관 재개설 협상타결을 공식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쿠바와 미국의 단절된 국교가 재개된 것이다.쿠바혁명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무장투쟁(武裝鬪爭)을 통해 1959년 1월 1일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혁명을 말한다. 쿠바혁명은 1953년 7월 26일부터 시작되어 1959년 종결(終結)됨으로써 6년 가까운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체 게바라는 이때 피델 카스트로를 도와 혁명을 완수하게 되었다.에스파냐의 오랜 식민지였던 쿠바는 1902년 이후 독립을 얻었지만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 때문에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 아래 있었다. 사탕수수를 주로 재배했던 쿠바의 토지는 미국 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대다수 국민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독재정권의 부패(腐敗)도 심각하여 여러 차례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미국의 비호(庇護) 하에 진압되었다.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바티스타 같은 불의(不義)하고 부정(不正)하며 타락(墮落)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공화국을 건설한 것이다. 미국은 쿠바혁명을 수용하지도 않았고, 카스트로 정권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당시 세계는 냉전(戰)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스탈린의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는 쿠바의 공산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때 발생한 사건이 이른바 `쿠바 미사일 사태`였다.제3차 대전의 위기가 목전(目前)에 다가왔고, 존 에프 케네디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사태를 지휘 통제한다. 결국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고, 1964년 10월 실각(失脚)하기에 이른다.그럼에도 쿠바에 대한 소련의 비호는 1991년 소연방 해체 직전까지 지속된다. 미국이 지난 5월에야 비로소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쿠바를 해제한 것은 양국의 긴장과 대립관계가 얼마나 깊고 너른지 보여주는 사례다.쿠바혁명을 완수한 이후 50년 세월 권좌(權座)에 있었던 피델 카스트로는 2008년 2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移讓)한다. 그리고 2011년 4월 완전히 은퇴를 선언한다. 쿠바혁명 이후 52년만의 일이었다. 하나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조지 부시 정권이 끈질기게 추진한 대 테러전쟁 여파(餘波)와 장기간에 걸친 미국의 봉쇄로 쿠바의 사회 경제적 여건(與件)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워싱턴에서 있은 쿠바 대사관 개관식에서 로드리게스 장관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經濟制裁) 해제와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부지반환 등을 요구했다. 로드리게스 장관은 “봉쇄의 완전해제와 미국이 불법으로 점령한 관타나모 부지반환 등이 양국의 국교 정상화로 나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두 나라가 풀어가야 할 문제가 만만치 않음을 시사(示唆)해주는 대목이다.이란 핵협상 타결과 함께 오바마의 외교적 승리가 현저하다. 구시대를 종식(終熄)하고 21세기 신시대를 열어가려는 강대국 지도자의 모습이 약여하다.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북한이다. 북한의 고립탈피와 국제외교 무대의 등장은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통일로 가는 첩경(捷徑)이다. 우리가 북방외교로 중국, 소련과 수교하여 동북아시대를 연 것처럼 북한도 고립을 버리고 신질서에 과감하게 동참하기 바란다.

2015-07-24

소통과 경청에 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소통(疏通)`이 오늘날처럼 각광받은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그만큼 온전하게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反證)이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막힌 것이 트여 서로 통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소통되지 않는다 함은 쌍방에 막힌 것이 있거나, 어느 일방만 통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쌍방 모두 내면에 아무 막힘도 없음을 확인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 소통이 가능하다.예외도 있지만, 자고이래로 말은 소통의 첫 번째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함의(含意)를 갖는다. 정보전달에서 사소한 감정표출에 이르기까지 말의 영역은 무한대로 확산한다. 문제는 발화(發話)된 말이 수신대상에게 얼마나 올바르고 적시(適時)에 전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곡해(曲解)하거나, 절실한 시간대를 지나 수신하는 경우 말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다.교육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라,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왕왕 있다. 상당수 학부모가 자녀들과 대화하기 어렵다고 토로(吐露)한다.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줘도 시큰둥하다는 것이다. 부모는 절실한데, 자식들은 무심하거나 냉담(淡)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부모와 소통하는 것이 달갑지 않다는 학생들도 적잖다. 물론 아무런 어려움 없이 부모자식 간의 소통에 도달하는 경우도 많다.소통하기 어려워하는 부모에게 나는 묻는다. “자녀 말을 얼마나 많이 들으세요?”나이든 세대는 소통의 개념을 오해(誤解)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달하는 것으로 소통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자식과 한 시간 대화한다면, 부모는 50분 이상의 대화시간을 독점(獨占)한다. 설령 자식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 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는 자세를 보이는 부모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소통의 가장 중요한 첫 단추는 경청(傾聽)이다. 목을 기울여 상대방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경청이다. `청`이라는 한자어에는`귀가 왕(王)이 되는 미덕`이란 뜻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주의 깊게 들어준다는 의미가 듣는 행위다. 듣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어렵다. 하물며 상대의 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챙겨 듣는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오늘날 우리는 예외 없이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익숙해있다.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시라. 말하는 자는 많고, 귀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사적(私的)인 공간이든, 식당이나 영화관 같은 공공장소든 한국인들은 말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그런 심각한 상황을 어느 누구도 인지(認知)하지도 않을뿐더러,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말의 요체(要諦)가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껄여대는 것에 있다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말은 많은데, 소통은 안 되는 것이다. 부모자식 간 대화에서 소통은 더욱 어렵다. 마이크 잡은 부모가 일방적인 훈계(訓戒)로 시작해서 방송을 끝내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는 자랑스럽게 말한다.“나만큼 자식들하고 소통 잘하는 사람도 없죠!”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것도 가공(可恐)할 언어폭력이다.자식의 영혼과 육신을 괴롭혀놓고 하는 말이 `소통했다`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면 먼저 들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부모문제로 자식과 얘기하는 부모는 별로 없다. 자식문제가 화제(話題)의 중심이다. 그러면 자식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왜 괴로워하고 우울한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자식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것이 발화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자식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부모라면 자식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雰圍氣)를 먼저 만들어줘야 한다. 자식들이 스스럼없이 내면을 토로하고 고민을 상담(相談)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기란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귀를 열어두고 자신의 입은 봉쇄(封鎖)해야 가능하다.소통의 제1과 제1장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慾望)은 최대한 누르고, 들으려는 의지(意志)는 하늘 끝까지 확장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2015-07-17

서른 즈음에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서른 즈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다. 청춘도 사랑도 잃고 날마다 이별하며 살아가는 서른 초입(初入)의 인생을 한탄하는 노래다. 주도적으로 삶을 시작하는 30대 치고는 적잖게 비관적(悲觀的)이다. 공자는 서른 살에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그는 35세에 노나라의 정변(政變) 때문에 제나라에 잠시 몸을 의탁한다. 제나라 군주였던 경공이 정사(政事)를 묻자, 공자는 주저 없이 “君君臣臣父父子子”라 말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경공의 영혼(靈魂)을 뒤흔든 간명(簡明)한 명구(名句)가 아닐 수 없다.예수는 나이 서른에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과 3년의 공생애를 통해서 예수는 인류역사에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겨놓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요!” 하고 시작하는`산상수훈`은 기독교신자가 아니어도 모두가 아는 구절이다.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 편에 서있던 예수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 후에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고타마 싯다르타는 스물아홉 나이에 아내 야쇼다라 공주와 아들 라훌라를 버리고 야반(夜半)에 궁성(宮城)의 담을 넘는다. 각고(刻苦)의 6년 세월 정진(精進)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싯다르타. 그가 들여다본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도 비참(悲慘)한 것이었다. 그는 깨달음을 구하는 대중에게 설법(說法)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섭 형제에게 홀연히 들려주는 `우루벨라의 산상수훈`은 가히 압권(壓卷)이다.성인(聖人)으로 모시는 이들의 인생에서 30대는 정신적으로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시기다. 예수와 석가처럼 중생(衆生)을 제도하거나, 공자처럼 일세를 풍미(風靡)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인문학 열풍이 드센 시기에 이들의 가르침은 금과옥조가 아닐 수 없다. 공자의 사선(死線)을 넘는 철환(轍環)과 싯다르타의 죽음 직전까지 이른 고행(苦行), 예수의 골고다와 책형을 우리는 기억한다.그들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려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깨달음, 나눔, 공존(共存)과 동행(同行)이다. 평생을 배움으로 일관한 공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명언(名言)을 남긴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과 시험(試驗)을 넘기며 예수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경지에 이른다. 가죽과 뼈가 하나 될 만큼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정진을 거듭하여 고타마 싯다르타는 해탈(解脫)에 도달한다.그렇게 그들은 중생을 위한 위대한 여정(旅程)에 올랐고, 깨달음에 이른다. 그래서다. 새파란 청춘 30대 성인들이 지나간 고난(苦難)의 길을 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너도나도 하나같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한다. 아니, 잘 먹고 잘 살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의 물질문명(物質文明)은 비약적인 발전과 진화(進化)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적(精神的) 진보(進步)와 성찰(省察)은 진척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모두 힘들고 괴롭고 외로워 죽을 지경(地境)이라고 하소연이다. 나라 안팎이 그러하고, 세대를 불문(不問)하고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속 시원한 출구는 보이지 않고, 대형사고와 정쟁(政爭)으로 민생은 피폐하다 못해 파열 직전이다. 이럴 때, 모든 것이 막히고 혈로(血路)는 보이지 않을 때, 그때 공자와 석가, 예수를 생각하자. 그리고 다시 생각하자. 30대 그들이 도달한 아스라한 높이의 깨달음과 구원의 길을!나는 김광석을 음유시인이라 부른다. 그에게 문학관 한 자리 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이만큼 지난 세기 90년대 청춘을 위로한 시인은 없었으므로!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우리의 30대도 변했으면 한다. 사랑도 젊음도 중요하고, 이별과 만남도 소중하다. 그러하되 시공간의 현저한 축소가 야기한 세계사적인 변화를 냉철하게 통찰하고 세계를 선도하는 청춘이 되면 어떨까 한다.

2015-07-10

`6·29선언`과 삼풍참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그게 같은 날이야?!” 살다가 이런 말을 내뱉는 수가 있다. 우연히 날짜가 겹치는 경우에 그러하다. 한국의 현충일 6월 6일은 러시아가 사랑하는 시인 푸쉬킨의 생일날이다. 그는 1799년 6월 6일 출생했다. 우리의 개천절 10월 3일은 도이칠란트가 재통일을 이룬 날이다. 1990년 10월 3일 분단(分斷) 도이칠란트는 하나가 되었다. 그런 날이 오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하필이면?….”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얼마 전 6월 29일을 지나면서 속내가 답답했다. 같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29일과 1995년 6월 29일이 겹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87년 평화대행진을 기억한다. 전두환-노태우-김복동으로 이어지는 육사 동기들의 권력유희를 끝장내려는 거대한 행진을 기억한다. 1987년 6월 10일-18일-26일로 이어진 시민들의 행렬(行列)과 함성(喊聲)을 기억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이른바`6·29선언`이다.`6·29선언`으로 만들어진`87체제`아래서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 우리는 지난 세기 87년에 만들어진 틀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타자기로 글 쓰고, 공중전화로 통화하고, 엽서와 편지로 마음을 공유했던 시기였다. 일상과 관계와 사건이 아주 천천히 흘러갔던 최후의 `총체성(總體性)`이 방문했던 시간대. 그래서다. `87체제`가 지나치게 낡고 우리와 무관(無關)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런 연유(緣由)다!`6·29선언` 이후 딱 8년 만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502명이 사망하고 900명 넘는 사람이 부상당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붕괴 참사였다. 때마침 검찰청에 일이 있어서 그곳을 찾아 백화점 전체를 빙 둘러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사건을 뇌리(腦裏)에 기억하려는 노력의 소산(所産)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거대한 괴물(怪物)처럼 널브러져 있는 잔해더미에서 기괴함을 넘어 공포(恐怖)를 느낀 것은 나뿐이었나?!세계화 원년이라 일컬어지는 1995년에 발생한 `삼풍참사!`그것은 창대한 예고편이었다.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사건(1995), 국제통화기금 사태(1997), 씨랜드 화재사건(1999),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2003),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와 현재 진행형인 `메르스 창궐`까지! 얼마나 많은 참사가 더 일어나야 우리는 참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삼풍참사`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그 이후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국가는 무능했고, 권력과 집권자들은 냉담했으며, 국민들은 무심했다. 한국인들의 기억력은 38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우스개가 돌았다. 한 달만 끌면 잊힌다는 것이 정설이다. 1862년 출간된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인들의 기억력이 불과 6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음을 한탄했다!국민이 언제든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위험천만(危險千萬)한 상황을 방치(放置)하는 권력과 권부(權府)의 행태는 반복되고 있다. 전면적인 성찰이나 대비책은 만들어진 적도 없고, 온전하게 작동된 적도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토록 인명(人命)을 경시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낡아빠진 `87체제`의 모순(矛盾)을 극복하고 21세기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세계정세를 응시해야 하는 시점에 정파내부의 권력투쟁이라니. 그리스의 국가부도사태가 현실화되고, 중국의 `일대일로`정책이 빛을 발하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논쟁`이 뜨거운 시점이다. 그런데 내 조국은 어떠한가?! 정치권력을 능가(駕)하는 재벌경제의 중추 삼성의 `메르스 사태`와 제일제당 CJ의 국가농락이 기승을 부린다.우리가 참사의 기억(記憶)으로부터 자유(自由)롭고자 한다면, 우리를 강제(强制)하는 `87체제`를 극복(克服)하는 방도(方途) 외에는 없어 보인다. 국민의 알권리와 천부인권과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우리 스스로 얻어가는 도리밖에는 다른 수가 없을 듯하다. 모진 가뭄으로 대지가 신음하고 `4대강 사업`으로 강물이 병들어가는 한여름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5-07-03

한일 국교정상화 50년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지난 22일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50주년 되는 날이었다. 한국 대통령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양국 대사관을 방문(訪問)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다는 기사가 한일 양국에서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도통 어안이 벙벙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내걸고 최소한의 대화조차 거부해왔던 현 정부 아닌가?! 그런데 뜬금없이 화해와 경축 분위기로 밀월관계(蜜月關係)를 연출하다니!지난주에 3박4일 일정(日程)으로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여행이 주는 설렘과 낯섦의 흥취(興趣)는 어릴 적 추억이니 생략(省略)하자.반면에 일본 국영방송 NHK 텔레비전 방송이 나의 시선(視線)을 붙들었다. 한낮임에도 일본 국영방송은 중의원(衆議院)의 예산안 처리과정, 집단적 자위권(自衛權)에 대한 여야의 입장차이,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한 야당의 공세와 총리 사과(謝過)까지 낱낱이 생중계하고 있었다.밤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NHK는 그리스의 채무 불이행 가능성과 관련한 유럽 재정장관회의 개최를 둘러싼 논점(點)을 보도했다. 그리스 사태가 몰고 올 세계경제와 일본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특파원 보고 형식으로 집중 조명하는 것이다.그리스 집권당 `시리자`와 치프라스 총리의 입장과 유럽연합 지도국가인 도이칠란트의 메르켈 총리가 가지고 있는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장면은 인상적(印象的)이었다.국영방송이 투명(透明)한 정보공개에 앞장서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하고, 정치현안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려는 노력이 눈에 보였다.젊은 날 도이칠란트 유학시절에 받은 인상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일본의 풍경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다만, 1945년 8월 15일을`종전(終戰)`이 아닌,`패전(敗戰)`으로 규정하는 대목은 찜찜했다. 그들에게는 한일 국교정상화라는 표현보다`일한기본조약`이란 표현이 익숙한 듯했다.한국 국영방송 KBS는 그 시각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여러분이 판단하시라!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반추하고 현재를 분석하면서 미래를 사유하는 기획이라도 있었던가?!지난 2년 반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정부는 어째서 대일관계를 냉각 일변도로 몰고 갔는지, 아시는가?! 느닷없는 친밀감 표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 언론에서 제기하는 미국 눈치 보기, 아시아 외교무대에서 자초한 고립탈피, `메르스`같은 국내문제 탈피와 경제난국 때문이 아니기 바란다.국교정상화 50년에 돌아볼 것은 해양과 대륙 사이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백제 패망이후 663년 8월 금강 부근에서 있었던 백제-왜 연합군과 신라-당나라 연합군의 백강전투, 1592년부터 1598년의 임진왜란 (壬辰倭亂),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민비의 일본군 파병요청,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1945년 일제의 패망과 식민지 조선해방,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다.모든 역사에는 온갖 굴곡(屈曲)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난날을 어떻게 성찰(省察)하고 반추(反芻)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는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일갈(一喝)했다.우리는 고대와 중세, 근대를 관통(貫通)하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장구한 역사에서 어느 정권이나 정파 혹은 개인과 문벌의 욕망은 민족과 국가의 명운에 비하면 참으로 하잘것없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민족과 역사는 영원하며, 개인과 정파의 영광과 오욕(汚辱)은 한시적이기 때문이다.이해관계 때문에 훨씬 크고 무겁고 소중한 것들을 도외시(度外視)하는 어리석음이 반복되면 안될 일이다. 한일관계의 복원(元)은 반가운 일이되, 그것에 내재한 역사적 함의(含意)를 망각(忘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또한 간절하다.

2015-06-26

욕취선여(欲取先予)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전국시대 진나라 대부 지백(智伯)은 꾀가 많았다. 지백은 어떻게 하면 이웃한 작은 나라 구유(仇由)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먹어치울까, 하는 문제를 고민한다. 그는 구유의 왕에게 사신을 보내, 진나라 왕이 구유의 왕에게 종(鐘)을 보내고자 한다는 말을 전한다. 아울러 종이 들어갈 수 잇을 정도로 길을 넓히라고 요구한다. 구유의 왕은 크게 기뻐한다. 하지만 종이 들어올 수 없는 험난한 지형이 문제였다. 구유의 왕은 신하들과 문제를 상의한다.작은 나라 구유였지만, 충신은 거기에도 있었다. 모두가 진나라 왕의 선물(膳物)을 받으려는 왕의 결정에 동의하는데, 적장만 (赤章曼) 한 사람이 홀로 반대한다. 그의 논지는 명쾌했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종을 바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소국이 대국에게 존경과 복속의 의미로 종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 상례(常禮)입니다. 지금 진나라에서 종을 줄 테니 길을 넓히라 함은 종과 함께 진나라 군대가 들어온다는 것을 뜻합니다.”어리석은 구유의 왕은 크게 분노하며 적장만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장만은 즉시 가솔(家率)을 데리고 깊은 산중으로 숨어버린다. 지백의 꾀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공짜로 종을 줄 까닭이 있겠는가?! 구유는 간단히 병합된다. 이것은 우리가 `욕취선여`를 말할 때 즐겨 인용하는 고사(古事)다. “얻고자 한다면 먼저 주어라!”노자는 `도덕경` 제36장에서 이것을 구체화한다. 일컬어 `장욕탈지 필고여지(將欲奪之 必固與之)`라 한다. “장차 그것을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주어라!” 이것은 아주 오랜 지혜이기도 하다. 주고받는 관계에 내재한 순수함을 배제한다면, 어떤 경우라도 적용 가능한 이치다. 요즘은 잠잠한 산업스파이 같은 경우도 좋은 본보기다. 적절한 보상책을 내걸고 경쟁기업의 기밀정보를 빼내는 산업스파이 전략은 `욕취선여`의 기본을 따른 것이다.엊그제 6월 15일은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된 지 15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갈등으로 점철(點綴)된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탈피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을 모색하려는 취지(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이후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에 `10·4 공동선언`이 나와서 남북의 긴장관계가 완화되는 조짐(兆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 교체이후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경색(梗塞)되고 긴장관계가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북 경제협력의 창 (窓) 개성공단마저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는 형편 아닌가?!현 정권은 틈나는 대로 `통일대박`을 언론에 흘린다. 남북통일이 가져올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북한의 붕괴(崩壞)나 흡수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남한의 압도적(壓倒的)인 경제력과 한미일 공동방위조약이나 요즘 회자(膾炙)되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등으로 북한은 더욱 움츠리고 있다. 급기야 6월 14일 북한인 미사일 3대를 동해로 발사하기도 하였다. 남북관계의 경색과 대치국면이 장기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통일대박`이 현실화되는 첫 번째 조건은 남북한 상호신뢰 구축(構築)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붕괴 이후 당시 서도이칠란트 헬무트 콜 수상은 동베를린의 `노이에스 포룸` 같은 정치세력을 포함하여 온갖 노력을 다해 양국의 신뢰구축에 진력(盡力)한다. 콜은 그 결과를 가지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과 소련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1990년 10월 3일 재통일의 쾌거 (快擧) 뒤에는 1969년 이후 일관되게 추진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자리한다. 20년 가까이 진행된 양국의 인적-물적 교류가 사태진전의 기폭제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수사(修辭)로 들리지 않는, 진정성 있고 실현 가능한 남북관계의 재정립과 평화통일의 길을 `욕취선여`의 오랜 가르침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2015-06-19

참새와 `메르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엿새 전 일이다. 이층 베란다 의자에 앉아서 먼 남산을 바라보던 참에 재미난 풍경이 보인다. 참새 두 마리가 거봉 포도나무 아래서 부리를 비벼대고 있는 것이다.부리를 비벼대던 참새 한 마리라 허공(虛空)을 가르고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겨진 참새가 다급한 듯 목소리를 높인다. 잠시 후 다시 날아온 참새가 녀석에게 무엇인가를 전해준다. 아하! 그것은 먹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참새들은 연인관계가 아니라, 모자(母子) 내지 모녀관계인 것이다. 내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준 장면이 떠오른다.작년 이맘때 집을 나서다가 새 우는 소리에 찾아보았더니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참새였다. 동네에 뱀이 심심찮게 출몰하고, 길고양이들도 적잖은 터! 참새를 손에 들고 이웃을 전전했다. “바빠서 참새 돌볼 겨를 없어요!” “집에 참새 볼 사람이 없네요.” 그러다가 초로(初老)의 신사가 흔쾌하게 어린 참새를 받아들었다. “제가 길러보지요!”그 후의 일은 확인하지 못했다. 창공을 비상(飛翔)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그러니까 포도나무 아래서 울어대던 녀석은 작년 그 참새처럼 깃털이 다 자라기 전에 둥지에서 떨어진 게 분명했다. 이소(離巢)하기 전에 성질 급한 녀석들이나, 부주의한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미로서는 이중고(二重苦)를 감내(堪耐)해야 한다. 아직 둥지에 있는 녀석들도 돌봐야 하고, 지상(地上)에서 애타게 어미를 부르는 덜떨어진 놈도 살펴야 하는 것이다.아래층으로 내려와 거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선다. 녀석이 다급하게 날갯짓을 해보지만 기껏해야 1~2m 낮게 날 수 있을 뿐!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온다. 마음속으로 녀석의 행운(幸運)을 기원(祈願)하면서!그리고 나흘 전 오후! 촌구석을 찾아온 손님들과 집밖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녀석을 보았다. 이번에는 앞집 담장 부근에서 짹짹거리고 있다. 맑은 눈을 들여다보고 날갯죽지를 살피고 야생초 덤불 속에 내려주었다. 속히 날개가 자라나서 하늘을 날아다니기를 소원(所願)하면서!다시 하루가 지났다.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녀석이다. 이번에는 거처(居處)가 바뀌었다. 폐가(廢家)가 되어버린 옆집 마당이다. 망초와 며느리밑씻개가 점령해버린 초록(草綠)의 공간에서 녀석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조용히 다가서보지만 어디 있는지 종잡기 어렵다. 하지만 목소리로 보건대 녀석은 아주 건강(健康)하다. 어디선가 어미가 먹이를 물고 대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녀석이 온전하게 자라나 창공(蒼空)을 비상할 때까지 어미는 분명히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선가 먹잇감을 찾고, 시시각각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을 심사숙고 하면서 새끼 주위를 배회(徘徊)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이 오면 멋진 축하비행을 함께할 것이다. 참으로 극진(極盡)한 모성(母性)이다.황망하기 이를 데 없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있다. 초동대응(初動對應)만 제대로 했더라면 별 탈 없이 지나갔을 터. 정권의 무능(無能)과 타락(墮落)과 부패(腐敗)의 진면목(眞面目)을 재확인하는 사건이 `메르스 사태`아닌가?! `세월호 참사`를 고스란히 재현(再現)하는 권부(權府)와 행정관료들의 무능과 태만과 타락이 불러일으키는 혼란의 극치가 국민을 분노와 경악으로 몰아가고 있다.어미참새는 부주의하고 혈기 방장(方壯)한 어린것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다. 늙은 참새 같은 어머니는 자식과 손자들의 안위(安危)가 걱정되어 사태촉발을 미연(未然)에 방지한다.그러하되 국민을 상전(上典)으로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고 받들어야 할 권부와 정권과 행정관료들의 행태는 참새의 지혜만도 못한 것이다. 이들을 믿고 다시 몇 년을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새삼 흐려져 온다.

2015-06-12

시시비비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1년 전 대구의 어느 방송사에서 나에게 제안한 프로그램 이름이 `시시비비`였다. 우리 사회가 당면(當面)하고 있는 문제를 다각도(多角度)로 조명하고 대안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2일 화요일 방송사 프로그램 개편에 따라 `시시비비` 마지막 방송을 하게 되었다. 적잖은 소회(所懷)가 들었다. 시시비비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想念)이 찾아든다. 내가 보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1년 전이나 매한가지다.조선중기 선비이자 문인이었던 허후는 만년(晩年)에`시비음(是非吟)`이란 7언 고시를 남긴다.“시비진시시환비(是非眞是是還非)/불필수파강시비(不必隨波强是非)/각망시비고착안(却忘是非高着眼)/역능시시우비비(力能是是又非非)”우리말로 번역해보면 이렇다. “진정 옳은 것을 시비하면 옳은 것도 그른 것이 되니, 시비의 물결을 억지로 따를 필요는 없다네. 시비를 잊어버리고 눈을 높은 곳에 두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할 수 있을 것이네.”허후는 젊어서 대쪽 같았고, 시비분별(是非分別)에 남달랐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랬던 사람이 나이 들어 시비분별의 허망함과 무의미를 홀연(忽然)히 깨달았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선비라면 누구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알 것이고, 그 가운데 네 번째 덕목(德目)이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표현되는`지` 아니겠는가! 맹자의 인의예지에 동중서가 신을 합한 것이 오상이며, 이것은 오륜(五倫)과 더불어 다섯 가지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었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인은 `측은지심`으로, 의는 `수오지심`으로, 예는 `사양지심`으로, 신은 `광명지심`으로 연결된다. 그와 같은 오덕을 실천할 수 있다면 세상은 한결 살만하고 아름다우며 풍성(豊盛)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 그러한가?!정치적으로 보건대 우리는 아직도 이른바 `87체제`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촉발(促發)된 국민들의 분노와 연민(憐憫)과 연대(連帶)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87체제`다. 그해 6월을 뜨겁게 달구면서 기득권(旣得權) 세력의 백기투항(白旗投降)을 이끌어낸 6월 항쟁의 함성(喊聲)이 귓전에 또렷하다. 당시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불의에 저항하고 분노하며 연대할 줄 아는 시민의식을 체현(體現)하고 있었다.하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5년 6월 시점에 주위를 돌아보면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세월호 참사`1주년이 넘었지만, 알려진 것은 없고 이제 그만하자는 목소리만 높아간다. 유가족들의 애끓는 심사(心思)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도 적잖지만, 망각(忘却)의 늪으로 빠져드는 인총(人叢) 또한 적잖다. 경북대 총장 부재상태가 10개월로 접어들었지만, 이 문제의 심각성과 대응방안을 부심(腐心)하는 교수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훨씬 많은 수의 교수들은 연구와 강의, 프로젝트로 분주한 것이다.자유롭게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비분별이 마땅히 필요하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아니하고, 이해관계(利害關係)나 친소관계(親疎關係)에 따라 사태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우리가 남이가?!”하는 허언(虛言)의 노예나 종복(從僕)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매 허후가 만년에 도달한 시비분별의 덧없음과 쓸모없음은 젊은 날의 치열함과 시비지심이 있었기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음습(陰濕)하고 추악(醜惡)하며 냄새 나는 곳이 적지 않다. 그와 같은 환부(患部)를 과감히 도려내고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공동체(共同體)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시비지심 같은 분별이 여전히 절실(切實)하게 요구된다 할 것이다. 시비를 넘어서는 달관(達觀)의 경지는 허후처럼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추구(推究)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그러니 오늘도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분별하고 실천궁행(實踐躬行) 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어떠한가!

2015-06-05

토요일 동성로 풍경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대구에 23년 넘게 살고 있지만 나는 대구 도심(都心)을 모른다. 서울에서도 23년 넘게 살았지만 서울 도심도 잘 모른다. 원인은 공간지각력 부족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꺼리는 천성(天性) 탓이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어디든 간 곳을 기억의 저장고에 입력해 재활용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아침에 간 길을 저녁에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른바 길치라 한다. 하지만 나는 내비게이션을 거의 쓰지 않는다.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불편하다. 허다한 인총(人叢)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화상을 확인함은 불편한 일이다. 그들의 활기와 소음과 안하무인(眼下無人)에서 울화와 짜증이 이는 것은 나만의 일인가?!그럼에도 어쩔 도리 없이 도심에 나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대구 도심에 나가는 경우는 영화를 볼 때, 시위(示威)에 동참(同參)할 때 혹은 방송이나 강연(講演)에 참가할 때다. 지난 토요일 23일 오후 2시 무렵 동성로에 나갔다. 서명(書名)을 받기 위해서다. 대구경북의 거점(據點) 국립대 경북대학교 총장 부재사태가 9개월을 넘어섰다. 문제해결을 위해 3월 18일 경북대 민교협이 주최한 토론회가 열렸다.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참가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한목소리를 냈다. 그 결과 4월 초부터 교수들의 움직임이 생겨났고, 그것은 다시 1만인 서명운동으로 번져갔다.토요일 하오 동성로는 활기로 넘쳐났다. 가두홍보를 시작한 사학과 교수의 목소리에는 생기와 사명감이 흠씬 묻어났다. 3년 전 이맘때 대구 문화방송 낙하산 사장 반대서명 때 일이 떠올랐다. 제 입맛에 맞는 자들을 동원(動員)해 언론을 장악하고 여론을 주물럭거리는 5년짜리 단임 대통령의 행악질은 군내가 풀풀 나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에도 언로(言路)에 재갈을 물려서는 나라가 온전치 않은 법 아닌가!우리가 좌판(坐板)을 낸 옆자리에서 시민단체가 `세월호 참사` 관련 서명을 받기 시작한다. 거기서 나는 대구의 살아있는 양심을 본다. 상당수 시민들이 오가는 걸음을 멈추고 `세월호` 서명에 동참하고 있었다. 우리 서명대가 비는 경우가 많았다. 경북대가 대구에서 상실하고 있는 국립대 위상(位相)을 확인하는 것 같아 우울했다.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이런 소모적(消耗的)이고 서글픈 서명 작업이 사라질 것인가?! 지식인을 30년 넘도록 거리로 내모는 나라가 과연 얼마나 정상적인가, 하는 비감(悲感)도 찾아온다. 국립대 총장 자리를 권부(權府)의 입맛에 맞는 사람 앉히려는 권력자 앞잡이들과 거기 편승(便乘)하는 교수들의 행태는 도를 넘은 것이다.자유와 자율을 빼면 대학에 무엇이 남는가?! 대학에 허여(許與)된 학문의 자유와 지배구조의 자율성을 권부와 권력자가 앗아가면 어찌 되는가?! 특정인의 홍은(鴻恩)을 기대하는 교수들의 과잉충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청와대 5년 세입자를 향한 단심가(丹心歌)가 시대정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인가?!“천하에 도가 없으면 몸을 숨기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간다!” 공자는 그렇게 후학(後學)을 가르쳤지만, 춘추말기의 무도(無道)하고 혼란한 지경에 13년 가까운 세월 철환(轍環)으로 일관한다. 그는 등용(登用)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 길만이 천하를 구원하는 방도라고 생각했다. 아니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길이 다르면 함께할 수 없다!”는 말도 이해한다.네 시간 남짓한 시간에 440명 정도 서명을 받았다. 서명한 분들에게 우리가 준비한 탄원서(歎願書)와 온라인 서명 안내장(案內狀)을 내주었다. 경북대와 여타 곳곳에서 우리가 받은 서명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 그것을 들고 교육부와 국회를 방문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경북대 총장 부재상황을 극복하는 방안(方案)을 모색하려고 한다. 대한민국 대표 국립대 경북대학교에 여러분의 성원(聲援)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2015-05-29

대동제 유감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언제부턴가 대학축제가 `대동제`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생겨난 새로운 풍속도(風俗圖) 아닐까 한다. 1970년대 후반까지 대학축제는 소비문화의 재탕(再湯)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수봉의 `축제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쌍쌍파티가 대학축제의 정점(頂点)이었다. 남녀교제가 제한(制限)되었던 시절에 합법적인 시공간(時空間)에서 남녀가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이었다. 그런 달콤함과 달착지근한 시간대를 넘어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원인을 미국에서 찾아내고, 전두환 일당을 학살자(虐殺者)로 규정하는 세대가 축제와 학생운동을 주도(主導)하게 된 것이 1980년대 초다.축제라는 이름에 내재(內在)한 무차별적(無差別的)인 소비문화와 대중문화 추수주의(追隨主義)를 극복하고자 내걸었던 명칭변경(名稱變更)이 아마도 `대동제` 아니었을까?!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소소한 차이를 극복하여 커다란 하나가 되자는 공동체(共同體) 의식의 발로(發露)가 `대동제`란 이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2천500년 전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주창한 공자가 무척이나 행복해할 것 같다.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한다는 주장을 편 공자 아닌가. 서로 화합(化合)하되 같지 아니한 경지(境地)를 `화이부동`이라 한다. 일곱 빛깔 무지개를 연상(聯想)하면 편할 것이다. 각기 다른 빛깔을 가지고 있기에 같지 않지만, 다 같이 모여 찬란한 무지개라는 화합의 마당을 연출하는 무지개. 각각의 빛깔이 스스로를 주장하지만, 그것들은 화합하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형성(形成)해낸다. 고유함을 잃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화합하는 전체를 만들어내는 오묘(奧妙)함이 있다.`동이불화` 한다는 것은 실상(實狀)은 같지만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소인 하나하나는 별반 (別般) 다르지 않다.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관계 (利害關係) 때문에, 지역성 (地域性) 때문에, 혈연과 학연 때문에, 패거리주의 때문에 결단코 화합하지 못한다. 각자의 목표(目標)와 속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엇비슷한 인간들끼리 갑론을박 (甲論乙駁) 하며 각축(角逐)하는 꼴이 승냥이들이 썩은 시체 놓고 아귀다툼 하는 꼴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일컬어 `동이불화`라 한다.1980년대 대학에서 태동(胎動)한 대동제는 `동이불화`를 버리고 `화이부동`의 세계를 지향(志向)하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행사였다. 대학은 거대한 용광로(鎔鑛爐)였고, 시대를 고뇌(苦惱)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망(熱望)하는 청춘으로 대학은 활기가 넘쳐났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강의실에서 시국토론회가 연중무휴(年中無休)로 열렸던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기 1980년대. 그렇게 그들은 `87체제`를 만들어갔던 것이다.오늘날 대학의 대동제는 한마디로 요약(要約)하면 사흘연속 `술판`이다. 술판을 준비하는 학생도 오가며 술 팔아주는 교수와 학생도 사흘 내내 술과 안주 냄새로 골치를 썩여야 하는 `대주제(大酒祭)`가 되고 말았다. 비위생적(非衛生的)인 안주(按酒)와 터무니없는 바가지, 공허(空虛)한 연예인들 이야기와 프로야구 얘기. 그런 허접한 언어들과 버려진 안주 따위의 악취(惡臭)가 알코올과 뒤섞인다. 대동제는 그것들이 남긴 잉여(剩餘)의 감정과 차고 넘치는 금전(金錢)으로 해마다 점철(點綴)되고 있다!이제 그만 했으면 한다! `87체제`가 녹슬고 군내 나는 것처럼 대동제 역시 그 역사적인 소명이 다한 것 같다. 이제 그만 놀아 제키고 교정에서 냄새 나는 술판 거두고 각자 연구실(硏究室)과 강의실(講義室)과 도서관(圖書館)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술은 술집이나 밥집에서 먹고 마시면 되지 않겠는가?!대동은 술이 아니라, 이웃의 슬픔과 절망(絶望)과 고독(孤獨)을 보듬으려는 보편적인`연민(憐憫)`과 `동정(同情)`에서 발원한다. 술에 취한 눈을 크게 뜨고 사위(四圍)를 둘러보라. 거기서 대동은 비로소 시작할 것이니!

2015-05-22

공포와 연민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기원전 330년 무렵 아리스토텔레스는 전대미문의 서책 `시학`을 출간한다. 일찍이 인류가 가져본 적 없던 문예이론서 `시학`. 언뜻 보면 `시`에 관한 서책처럼 보이지만, 실은 문학에 관한 전문서적이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공을 들인 대목은 비극이다. 역사와 비극을 견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의 특수성(特殊性)과 비극의 보편성(普遍性)을 설파하면서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을 “공포와 연민(憐憫)에 기초한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했다. 비극의 주인공이 경험하는 운명의 격랑(激浪)과 고통에서 발원하는 공포를 관객이 경험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낌으로써 감정을 정화(淨化)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폴리스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가능성을 비극이 제공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락과 교훈에 기초한 고전적인 미학을 정초(定礎)한 게다.이쯤해서 21세기 한국사회의 공포와 연민을 잠시 돌이켜보자.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는 공포는 있지만 연민은 없다. 어쩌면 공포가 만연해 있는 `공포사회`라고 한국사회를 단정(斷定)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하루 40명 넘게 자신을 죽여 버리는 끔찍한 자살 공화국, 매년 2천명 넘게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의 지옥,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사건사고가 빈발하는 후진적인 재난(災難) 공화국.사정이 이럴진대 일상화된 재난과 자살 공화국에서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한국인에게 공포는 공기나 물처럼 자연스러운 동반자(同伴者)가 되고 말았다. 공연장이나 공사판에서 열 몇 사람 죽어나간다 해도 웬만한 한국인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과 말투로 일상(日常)을 영위해 나간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죽음에 무신경해진 공포사회의 단면(斷面)이다.만연한 공포와 달리 한국사회에 연민은 완전히 결여(缺如)되어 있다. 이웃이나 그 너머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재난 따위에 가슴 아파하거나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배제(排除)된 연민의 감정은 가족이나 제한된 틀 안의 인간관계로 과잉(過剩) 표출된다. 그리하여 과잉의 가족주의(家族主義)와 연고주의(緣故主義)가 횡행(橫行)한다. 여기서 혈연과 지연과 학연의 괴물(怪物)이 꿈틀댄다.지난 4월 28일 `세월호 참사(慘事), 1년을 말하다!` 콜로키움을 경북대에서 개최했다. 단원고 희생자 김동엽 학생의 부모님을 모신 특별한 자리였다. 두 시간 남짓 진행된 행사를 마치고 돌아본 강당에서 낯익은 교수들의 얼굴은 대여섯 남짓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공포와 충격(衝擊)`이었다. 아아, 이것이 경북대 교수사회의 민낯이구나! 뒤통수가 얼얼했다. 가슴에 서늘한 썰물이 일었다.대학의 존립근거 하나가 `정의(正義)와 불의(不義)`를 구별하여 가르치는 일이다. 한국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정리(情理)를 가르치는 것이다. 지식과 기능의 전수(傳受)는 그와 같은 사회적-윤리적 교양에 기초할 때 비로소 제 구실을 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시민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덕성(德性)과 소양(素養)을 함양(涵養)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하지만 그날 나는 보고야 말았다. 만연(漫然)한 공포사회에 완전 결석한 연민사회의 실상을 그날 목도하고야 말았다. `세월호 참사`가 나와 가족과 친구와 친지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아버린 허다한 인간들의 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실체를! 하기야 “이제 그만하자!”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외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형편이다. 또 다른 대형공포를 예감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杞憂)일까?!공포와 연민에 기초한 카타르시스를 공동(共同) 체험하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하나로 결속(結束)하여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공포는 차고 넘치는데, 연민은 사라진 한국사회를 보면서 허망(虛妄)하고 다시 허망하다. 황망(慌忙)하고 다시 황망하여 몸과 마음을 건사하기 어려운 봄날이 저물어간다.

2015-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