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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짬짜면`을 드시나요?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어떤 사안(事案)이나 대상을 판단할 때 당신이 의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성인가 감성인가. 그도 아니면 제3의 요인이 존재하는가.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는가. 맛과 향이 전혀 다른 음식을 앞에 두고 곤혹(困惑)스럽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짬짜면`이라는 기발한 음식이 만들어진 배경은 여기 있다. 곤욕(困辱)스러운 선택을 일거에 날려버린 창조적인 비방(秘方) `짬짜면`.얼마 전 흥미로운 통계가 발표됐다. `인구의 90% 이상이 국토의 2.44%인 도시지역 내 주거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전체인구 5천132만 명 가운데 91.66%인 4천705만 명이 특정지역에 몰려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특정지역에 사람이 대거(大擧) 몰리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층간소음과 보복운전 같은 문제가 떠오를 것이다. 제한된 공간에 다중(多衆)이 어울려 살다보니 공간의 입체화가 필수적이다. 좁은 땅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고층화는 필연이다. 똑같은 형태의 거주공간이 만들어지고, 똑같은 장소에서 먹고 자는 판박이 인생이 전국 도처에 일상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층간소음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경쟁만능과 승자독식의 야만상태를 당연시하는 한국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가정교육은 오래전에 소멸(消滅)했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세상. 공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회에서 공중도덕 같은 범주는 시대착오적(時代錯誤的)인 덕목에 불과하다.보복운전도 비슷한 맥락(脈絡)을 가진다. 서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가 십상인 과속사회의 생존법칙은 `빨리빨리!`다. 그것은 양보와 겸양의 미덕이나, 여유로운 운전과 거기서 얻어지는 보고 생각하는 즐거움을 앗아간다. 서둘러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强迫)만 남을 뿐이다.아파트나 연립주택에 살면서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침저녁으로 청소하면서 탁자나 의자의 소음방지에 마음 쓰는 사람은 얼마인가. 햇볕 바른 날 이불을 털면서 아래위층 생각하며 자제하는 사람은 또 얼마일까.`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는 거룩한 얘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반성적인 유일자(唯一者) 인간이다. 돌아봄이 없으면 나아감이 불가(不可)하고, 돌아봄에 철저하지 않으면 금수(禽獸)로 전락함은 필연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속도와 쏠림과 경쟁은 기초적인 성찰과 반성적 사유마저 유린(蹂躪)하고 있다. 어디로 나아가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돌이킬 여유 없이 저돌적(猪突的)으로 전진 운동할 따름이다.소음과 매연, 열섬현상과 열대야, 층간소음과 보복운전이 일상화되어 있는 공간에 92%의 국민이 몰려 사는 나라. 국민들은 저마다 속도전에 나서야 하지만 불확실한 결과로 인해 괴로운 나라. 경제적인 양극화와 청년실업을 말하면서도 나와 내 자식은 예외(例外)라고 믿는 국민들의 나라. 자신이 이성적인 존재임을 확신하며 오늘도 활기차게 경쟁만능의 한복판으로 질주하는 인간군상의 나라 한국.하지만 당신의 선택이 얼마나 이성적인지 생각해 보셨는가. 당신의 거주공간과 거주형태와 생활양식에 당신의 이성적 판단과 실천이 얼마나 작용했는지, 생각해보셨는가.쏠림현상이 세계적으로 가장 우심(尤甚)한 한국인들의 사유와 인식의 기저(基底)에 자리하는 공포와 희열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대열에서 이탈하면 그 즉시 패배자의 낙인이 찍히는 숨 막히는 사회의 억압이 장마처럼 눅눅하다.인간은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판단하지만, 92%는 타성(惰性)과 관성(慣性)으로 결정한다. 우리가 보낸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내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랜 관성과 타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자꾸 거울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결단(決斷)해야 한다.“짜장인지, 짬뽕인지?!” 오늘도 `짬짜면`을 주문하고 있을지도 모를 당신에게 권하노니, 과감하게 선택하시라!

2015-07-31

쿠바와 미국의 국교정상화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카리브 해에서 세계사의 전환을 알리는 횃불이 타올랐다. 지난 20일(현지시각) 쿠바와 미국의 국교가 재개(再開)되었다. 1961년 국교단절 이후 54년 만의 일이다. 쿠바 역사학자 에우제비오 레알은 공산당 기관지 `그라마` 인터뷰에서 “1961년 미국에서 내려졌던 쿠바 국기가 다시 올라가기까지 53년 11개월 18일을 기다렸다”고 술회(述懷)했다. 기나긴 세월이다.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작년 12월17일 국교 정상화를 전격적(電擊的)으로 선언했다. 지난 4월 파나마에서 열린 미주기구 정상회의에서 그들은 상호협력을 재확인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5월에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지난 1일 양국 대사관 재개설 협상타결을 공식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쿠바와 미국의 단절된 국교가 재개된 것이다.쿠바혁명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무장투쟁(武裝鬪爭)을 통해 1959년 1월 1일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혁명을 말한다. 쿠바혁명은 1953년 7월 26일부터 시작되어 1959년 종결(終結)됨으로써 6년 가까운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체 게바라는 이때 피델 카스트로를 도와 혁명을 완수하게 되었다.에스파냐의 오랜 식민지였던 쿠바는 1902년 이후 독립을 얻었지만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 때문에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 아래 있었다. 사탕수수를 주로 재배했던 쿠바의 토지는 미국 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대다수 국민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독재정권의 부패(腐敗)도 심각하여 여러 차례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미국의 비호(庇護) 하에 진압되었다.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바티스타 같은 불의(不義)하고 부정(不正)하며 타락(墮落)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공화국을 건설한 것이다. 미국은 쿠바혁명을 수용하지도 않았고, 카스트로 정권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당시 세계는 냉전(戰)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스탈린의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쇼프는 쿠바의 공산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때 발생한 사건이 이른바 `쿠바 미사일 사태`였다.제3차 대전의 위기가 목전(目前)에 다가왔고, 존 에프 케네디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사태를 지휘 통제한다. 결국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고, 1964년 10월 실각(失脚)하기에 이른다.그럼에도 쿠바에 대한 소련의 비호는 1991년 소연방 해체 직전까지 지속된다. 미국이 지난 5월에야 비로소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쿠바를 해제한 것은 양국의 긴장과 대립관계가 얼마나 깊고 너른지 보여주는 사례다.쿠바혁명을 완수한 이후 50년 세월 권좌(權座)에 있었던 피델 카스트로는 2008년 2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移讓)한다. 그리고 2011년 4월 완전히 은퇴를 선언한다. 쿠바혁명 이후 52년만의 일이었다. 하나의 시대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조지 부시 정권이 끈질기게 추진한 대 테러전쟁 여파(餘波)와 장기간에 걸친 미국의 봉쇄로 쿠바의 사회 경제적 여건(與件)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워싱턴에서 있은 쿠바 대사관 개관식에서 로드리게스 장관은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經濟制裁) 해제와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부지반환 등을 요구했다. 로드리게스 장관은 “봉쇄의 완전해제와 미국이 불법으로 점령한 관타나모 부지반환 등이 양국의 국교 정상화로 나아가는 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두 나라가 풀어가야 할 문제가 만만치 않음을 시사(示唆)해주는 대목이다.이란 핵협상 타결과 함께 오바마의 외교적 승리가 현저하다. 구시대를 종식(終熄)하고 21세기 신시대를 열어가려는 강대국 지도자의 모습이 약여하다.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북한이다. 북한의 고립탈피와 국제외교 무대의 등장은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통일로 가는 첩경(捷徑)이다. 우리가 북방외교로 중국, 소련과 수교하여 동북아시대를 연 것처럼 북한도 고립을 버리고 신질서에 과감하게 동참하기 바란다.

2015-07-24

소통과 경청에 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소통(疏通)`이 오늘날처럼 각광받은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그만큼 온전하게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反證)이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막힌 것이 트여 서로 통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소통되지 않는다 함은 쌍방에 막힌 것이 있거나, 어느 일방만 통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쌍방 모두 내면에 아무 막힘도 없음을 확인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 소통이 가능하다.예외도 있지만, 자고이래로 말은 소통의 첫 번째 수단으로 기능해왔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함의(含意)를 갖는다. 정보전달에서 사소한 감정표출에 이르기까지 말의 영역은 무한대로 확산한다. 문제는 발화(發話)된 말이 수신대상에게 얼마나 올바르고 적시(適時)에 전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곡해(曲解)하거나, 절실한 시간대를 지나 수신하는 경우 말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다.교육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라,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왕왕 있다. 상당수 학부모가 자녀들과 대화하기 어렵다고 토로(吐露)한다. 쓸모 있고 가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줘도 시큰둥하다는 것이다. 부모는 절실한데, 자식들은 무심하거나 냉담(淡)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부모와 소통하는 것이 달갑지 않다는 학생들도 적잖다. 물론 아무런 어려움 없이 부모자식 간의 소통에 도달하는 경우도 많다.소통하기 어려워하는 부모에게 나는 묻는다. “자녀 말을 얼마나 많이 들으세요?”나이든 세대는 소통의 개념을 오해(誤解)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달하는 것으로 소통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자식과 한 시간 대화한다면, 부모는 50분 이상의 대화시간을 독점(獨占)한다. 설령 자식에게 말할 기회를 준다 해도 거기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는 자세를 보이는 부모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소통의 가장 중요한 첫 단추는 경청(傾聽)이다. 목을 기울여 상대방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경청이다. `청`이라는 한자어에는`귀가 왕(王)이 되는 미덕`이란 뜻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말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주의 깊게 들어준다는 의미가 듣는 행위다. 듣는 일은 생각보다 매우 어렵다. 하물며 상대의 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챙겨 듣는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오늘날 우리는 예외 없이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익숙해있다.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시라. 말하는 자는 많고, 귀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사적(私的)인 공간이든, 식당이나 영화관 같은 공공장소든 한국인들은 말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문제는 그런 심각한 상황을 어느 누구도 인지(認知)하지도 않을뿐더러,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말의 요체(要諦)가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껄여대는 것에 있다고들 생각한다. 그래서 말은 많은데, 소통은 안 되는 것이다. 부모자식 간 대화에서 소통은 더욱 어렵다. 마이크 잡은 부모가 일방적인 훈계(訓戒)로 시작해서 방송을 끝내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는 자랑스럽게 말한다.“나만큼 자식들하고 소통 잘하는 사람도 없죠!”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이다. 그것도 가공(可恐)할 언어폭력이다.자식의 영혼과 육신을 괴롭혀놓고 하는 말이 `소통했다`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면 먼저 들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부모문제로 자식과 얘기하는 부모는 별로 없다. 자식문제가 화제(話題)의 중심이다. 그러면 자식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왜 괴로워하고 우울한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자식의 마음을 열게 하고 그것이 발화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야 하는 것이 순서 아닌가!자식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부모라면 자식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雰圍氣)를 먼저 만들어줘야 한다. 자식들이 스스럼없이 내면을 토로하고 고민을 상담(相談)할 수 있는 부모가 되기란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 그것은 언제나 귀를 열어두고 자신의 입은 봉쇄(封鎖)해야 가능하다.소통의 제1과 제1장은 말하고자 하는 욕망(慾望)은 최대한 누르고, 들으려는 의지(意志)는 하늘 끝까지 확장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2015-07-17

서른 즈음에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서른 즈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다. 청춘도 사랑도 잃고 날마다 이별하며 살아가는 서른 초입(初入)의 인생을 한탄하는 노래다. 주도적으로 삶을 시작하는 30대 치고는 적잖게 비관적(悲觀的)이다. 공자는 서른 살에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그는 35세에 노나라의 정변(政變) 때문에 제나라에 잠시 몸을 의탁한다. 제나라 군주였던 경공이 정사(政事)를 묻자, 공자는 주저 없이 “君君臣臣父父子子”라 말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경공의 영혼(靈魂)을 뒤흔든 간명(簡明)한 명구(名句)가 아닐 수 없다.예수는 나이 서른에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과 3년의 공생애를 통해서 예수는 인류역사에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겨놓았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요!” 하고 시작하는`산상수훈`은 기독교신자가 아니어도 모두가 아는 구절이다.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 편에 서있던 예수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 후에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고타마 싯다르타는 스물아홉 나이에 아내 야쇼다라 공주와 아들 라훌라를 버리고 야반(夜半)에 궁성(宮城)의 담을 넘는다. 각고(刻苦)의 6년 세월 정진(精進)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싯다르타. 그가 들여다본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도 비참(悲慘)한 것이었다. 그는 깨달음을 구하는 대중에게 설법(說法)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섭 형제에게 홀연히 들려주는 `우루벨라의 산상수훈`은 가히 압권(壓卷)이다.성인(聖人)으로 모시는 이들의 인생에서 30대는 정신적으로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시기다. 예수와 석가처럼 중생(衆生)을 제도하거나, 공자처럼 일세를 풍미(風靡)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요즘같이 인문학 열풍이 드센 시기에 이들의 가르침은 금과옥조가 아닐 수 없다. 공자의 사선(死線)을 넘는 철환(轍環)과 싯다르타의 죽음 직전까지 이른 고행(苦行), 예수의 골고다와 책형을 우리는 기억한다.그들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려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깨달음, 나눔, 공존(共存)과 동행(同行)이다. 평생을 배움으로 일관한 공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명언(名言)을 남긴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과 시험(試驗)을 넘기며 예수는 인류를 위한 위대한 경지에 이른다. 가죽과 뼈가 하나 될 만큼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정진을 거듭하여 고타마 싯다르타는 해탈(解脫)에 도달한다.그렇게 그들은 중생을 위한 위대한 여정(旅程)에 올랐고, 깨달음에 이른다. 그래서다. 새파란 청춘 30대 성인들이 지나간 고난(苦難)의 길을 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너도나도 하나같이 먹고살기 힘들다고 한다. 아니, 잘 먹고 잘 살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의 물질문명(物質文明)은 비약적인 발전과 진화(進化)를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적(精神的) 진보(進步)와 성찰(省察)은 진척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모두 힘들고 괴롭고 외로워 죽을 지경(地境)이라고 하소연이다. 나라 안팎이 그러하고, 세대를 불문(不問)하고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속 시원한 출구는 보이지 않고, 대형사고와 정쟁(政爭)으로 민생은 피폐하다 못해 파열 직전이다. 이럴 때, 모든 것이 막히고 혈로(血路)는 보이지 않을 때, 그때 공자와 석가, 예수를 생각하자. 그리고 다시 생각하자. 30대 그들이 도달한 아스라한 높이의 깨달음과 구원의 길을!나는 김광석을 음유시인이라 부른다. 그에게 문학관 한 자리 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이만큼 지난 세기 90년대 청춘을 위로한 시인은 없었으므로!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우리의 30대도 변했으면 한다. 사랑도 젊음도 중요하고, 이별과 만남도 소중하다. 그러하되 시공간의 현저한 축소가 야기한 세계사적인 변화를 냉철하게 통찰하고 세계를 선도하는 청춘이 되면 어떨까 한다.

2015-07-10

`6·29선언`과 삼풍참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그게 같은 날이야?!” 살다가 이런 말을 내뱉는 수가 있다. 우연히 날짜가 겹치는 경우에 그러하다. 한국의 현충일 6월 6일은 러시아가 사랑하는 시인 푸쉬킨의 생일날이다. 그는 1799년 6월 6일 출생했다. 우리의 개천절 10월 3일은 도이칠란트가 재통일을 이룬 날이다. 1990년 10월 3일 분단(分斷) 도이칠란트는 하나가 되었다. 그런 날이 오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하필이면?….”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얼마 전 6월 29일을 지나면서 속내가 답답했다. 같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29일과 1995년 6월 29일이 겹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87년 평화대행진을 기억한다. 전두환-노태우-김복동으로 이어지는 육사 동기들의 권력유희를 끝장내려는 거대한 행진을 기억한다. 1987년 6월 10일-18일-26일로 이어진 시민들의 행렬(行列)과 함성(喊聲)을 기억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이른바`6·29선언`이다.`6·29선언`으로 만들어진`87체제`아래서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 우리는 지난 세기 87년에 만들어진 틀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타자기로 글 쓰고, 공중전화로 통화하고, 엽서와 편지로 마음을 공유했던 시기였다. 일상과 관계와 사건이 아주 천천히 흘러갔던 최후의 `총체성(總體性)`이 방문했던 시간대. 그래서다. `87체제`가 지나치게 낡고 우리와 무관(無關)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런 연유(緣由)다!`6·29선언` 이후 딱 8년 만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502명이 사망하고 900명 넘는 사람이 부상당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붕괴 참사였다. 때마침 검찰청에 일이 있어서 그곳을 찾아 백화점 전체를 빙 둘러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사건을 뇌리(腦裏)에 기억하려는 노력의 소산(所産)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거대한 괴물(怪物)처럼 널브러져 있는 잔해더미에서 기괴함을 넘어 공포(恐怖)를 느낀 것은 나뿐이었나?!세계화 원년이라 일컬어지는 1995년에 발생한 `삼풍참사!`그것은 창대한 예고편이었다.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사건(1995), 국제통화기금 사태(1997), 씨랜드 화재사건(1999),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2003),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와 현재 진행형인 `메르스 창궐`까지! 얼마나 많은 참사가 더 일어나야 우리는 참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삼풍참사`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그 이후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국가는 무능했고, 권력과 집권자들은 냉담했으며, 국민들은 무심했다. 한국인들의 기억력은 38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우스개가 돌았다. 한 달만 끌면 잊힌다는 것이 정설이다. 1862년 출간된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인들의 기억력이 불과 6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음을 한탄했다!국민이 언제든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위험천만(危險千萬)한 상황을 방치(放置)하는 권력과 권부(權府)의 행태는 반복되고 있다. 전면적인 성찰이나 대비책은 만들어진 적도 없고, 온전하게 작동된 적도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토록 인명(人命)을 경시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낡아빠진 `87체제`의 모순(矛盾)을 극복하고 21세기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세계정세를 응시해야 하는 시점에 정파내부의 권력투쟁이라니. 그리스의 국가부도사태가 현실화되고, 중국의 `일대일로`정책이 빛을 발하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논쟁`이 뜨거운 시점이다. 그런데 내 조국은 어떠한가?! 정치권력을 능가(駕)하는 재벌경제의 중추 삼성의 `메르스 사태`와 제일제당 CJ의 국가농락이 기승을 부린다.우리가 참사의 기억(記憶)으로부터 자유(自由)롭고자 한다면, 우리를 강제(强制)하는 `87체제`를 극복(克服)하는 방도(方途) 외에는 없어 보인다. 국민의 알권리와 천부인권과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우리 스스로 얻어가는 도리밖에는 다른 수가 없을 듯하다. 모진 가뭄으로 대지가 신음하고 `4대강 사업`으로 강물이 병들어가는 한여름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5-07-03

한일 국교정상화 50년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지난 22일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50주년 되는 날이었다. 한국 대통령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양국 대사관을 방문(訪問)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다는 기사가 한일 양국에서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도통 어안이 벙벙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내걸고 최소한의 대화조차 거부해왔던 현 정부 아닌가?! 그런데 뜬금없이 화해와 경축 분위기로 밀월관계(蜜月關係)를 연출하다니!지난주에 3박4일 일정(日程)으로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여행이 주는 설렘과 낯섦의 흥취(興趣)는 어릴 적 추억이니 생략(省略)하자.반면에 일본 국영방송 NHK 텔레비전 방송이 나의 시선(視線)을 붙들었다. 한낮임에도 일본 국영방송은 중의원(衆議院)의 예산안 처리과정, 집단적 자위권(自衛權)에 대한 여야의 입장차이,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한 야당의 공세와 총리 사과(謝過)까지 낱낱이 생중계하고 있었다.밤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NHK는 그리스의 채무 불이행 가능성과 관련한 유럽 재정장관회의 개최를 둘러싼 논점(點)을 보도했다. 그리스 사태가 몰고 올 세계경제와 일본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특파원 보고 형식으로 집중 조명하는 것이다.그리스 집권당 `시리자`와 치프라스 총리의 입장과 유럽연합 지도국가인 도이칠란트의 메르켈 총리가 가지고 있는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장면은 인상적(印象的)이었다.국영방송이 투명(透明)한 정보공개에 앞장서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하고, 정치현안에 대한 이해를 확대하려는 노력이 눈에 보였다.젊은 날 도이칠란트 유학시절에 받은 인상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일본의 풍경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다만, 1945년 8월 15일을`종전(終戰)`이 아닌,`패전(敗戰)`으로 규정하는 대목은 찜찜했다. 그들에게는 한일 국교정상화라는 표현보다`일한기본조약`이란 표현이 익숙한 듯했다.한국 국영방송 KBS는 그 시각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여러분이 판단하시라!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반추하고 현재를 분석하면서 미래를 사유하는 기획이라도 있었던가?!지난 2년 반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정부는 어째서 대일관계를 냉각 일변도로 몰고 갔는지, 아시는가?! 느닷없는 친밀감 표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 언론에서 제기하는 미국 눈치 보기, 아시아 외교무대에서 자초한 고립탈피, `메르스`같은 국내문제 탈피와 경제난국 때문이 아니기 바란다.국교정상화 50년에 돌아볼 것은 해양과 대륙 사이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백제 패망이후 663년 8월 금강 부근에서 있었던 백제-왜 연합군과 신라-당나라 연합군의 백강전투, 1592년부터 1598년의 임진왜란 (壬辰倭亂),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민비의 일본군 파병요청,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1945년 일제의 패망과 식민지 조선해방,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다.모든 역사에는 온갖 굴곡(屈曲)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난날을 어떻게 성찰(省察)하고 반추(反芻)하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는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일갈(一喝)했다.우리는 고대와 중세, 근대를 관통(貫通)하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장구한 역사에서 어느 정권이나 정파 혹은 개인과 문벌의 욕망은 민족과 국가의 명운에 비하면 참으로 하잘것없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흐른다 해도 민족과 역사는 영원하며, 개인과 정파의 영광과 오욕(汚辱)은 한시적이기 때문이다.이해관계 때문에 훨씬 크고 무겁고 소중한 것들을 도외시(度外視)하는 어리석음이 반복되면 안될 일이다. 한일관계의 복원(元)은 반가운 일이되, 그것에 내재한 역사적 함의(含意)를 망각(忘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또한 간절하다.

2015-06-26

욕취선여(欲取先予)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전국시대 진나라 대부 지백(智伯)은 꾀가 많았다. 지백은 어떻게 하면 이웃한 작은 나라 구유(仇由)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먹어치울까, 하는 문제를 고민한다. 그는 구유의 왕에게 사신을 보내, 진나라 왕이 구유의 왕에게 종(鐘)을 보내고자 한다는 말을 전한다. 아울러 종이 들어갈 수 잇을 정도로 길을 넓히라고 요구한다. 구유의 왕은 크게 기뻐한다. 하지만 종이 들어올 수 없는 험난한 지형이 문제였다. 구유의 왕은 신하들과 문제를 상의한다.작은 나라 구유였지만, 충신은 거기에도 있었다. 모두가 진나라 왕의 선물(膳物)을 받으려는 왕의 결정에 동의하는데, 적장만 (赤章曼) 한 사람이 홀로 반대한다. 그의 논지는 명쾌했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종을 바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소국이 대국에게 존경과 복속의 의미로 종을 만들어 바치는 것이 상례(常禮)입니다. 지금 진나라에서 종을 줄 테니 길을 넓히라 함은 종과 함께 진나라 군대가 들어온다는 것을 뜻합니다.”어리석은 구유의 왕은 크게 분노하며 적장만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장만은 즉시 가솔(家率)을 데리고 깊은 산중으로 숨어버린다. 지백의 꾀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공짜로 종을 줄 까닭이 있겠는가?! 구유는 간단히 병합된다. 이것은 우리가 `욕취선여`를 말할 때 즐겨 인용하는 고사(古事)다. “얻고자 한다면 먼저 주어라!”노자는 `도덕경` 제36장에서 이것을 구체화한다. 일컬어 `장욕탈지 필고여지(將欲奪之 必固與之)`라 한다. “장차 그것을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주어라!” 이것은 아주 오랜 지혜이기도 하다. 주고받는 관계에 내재한 순수함을 배제한다면, 어떤 경우라도 적용 가능한 이치다. 요즘은 잠잠한 산업스파이 같은 경우도 좋은 본보기다. 적절한 보상책을 내걸고 경쟁기업의 기밀정보를 빼내는 산업스파이 전략은 `욕취선여`의 기본을 따른 것이다.엊그제 6월 15일은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된 지 15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갈등으로 점철(點綴)된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탈피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을 모색하려는 취지(趣旨)에서 나온 것이다. 그 이후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에 `10·4 공동선언`이 나와서 남북의 긴장관계가 완화되는 조짐(兆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권 교체이후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경색(梗塞)되고 긴장관계가 조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북 경제협력의 창 (窓) 개성공단마저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는 형편 아닌가?!현 정권은 틈나는 대로 `통일대박`을 언론에 흘린다. 남북통일이 가져올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북한의 붕괴(崩壞)나 흡수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남한의 압도적(壓倒的)인 경제력과 한미일 공동방위조약이나 요즘 회자(膾炙)되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등으로 북한은 더욱 움츠리고 있다. 급기야 6월 14일 북한인 미사일 3대를 동해로 발사하기도 하였다. 남북관계의 경색과 대치국면이 장기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통일대박`이 현실화되는 첫 번째 조건은 남북한 상호신뢰 구축(構築)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붕괴 이후 당시 서도이칠란트 헬무트 콜 수상은 동베를린의 `노이에스 포룸` 같은 정치세력을 포함하여 온갖 노력을 다해 양국의 신뢰구축에 진력(盡力)한다. 콜은 그 결과를 가지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과 소련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1990년 10월 3일 재통일의 쾌거 (快擧) 뒤에는 1969년 이후 일관되게 추진된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자리한다. 20년 가까이 진행된 양국의 인적-물적 교류가 사태진전의 기폭제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수사(修辭)로 들리지 않는, 진정성 있고 실현 가능한 남북관계의 재정립과 평화통일의 길을 `욕취선여`의 오랜 가르침에서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2015-06-19

참새와 `메르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엿새 전 일이다. 이층 베란다 의자에 앉아서 먼 남산을 바라보던 참에 재미난 풍경이 보인다. 참새 두 마리가 거봉 포도나무 아래서 부리를 비벼대고 있는 것이다.부리를 비벼대던 참새 한 마리라 허공(虛空)을 가르고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겨진 참새가 다급한 듯 목소리를 높인다. 잠시 후 다시 날아온 참새가 녀석에게 무엇인가를 전해준다. 아하! 그것은 먹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참새들은 연인관계가 아니라, 모자(母子) 내지 모녀관계인 것이다. 내 머릿속을 환하게 밝혀준 장면이 떠오른다.작년 이맘때 집을 나서다가 새 우는 소리에 찾아보았더니 둥지에서 떨어진 어린 참새였다. 동네에 뱀이 심심찮게 출몰하고, 길고양이들도 적잖은 터! 참새를 손에 들고 이웃을 전전했다. “바빠서 참새 돌볼 겨를 없어요!” “집에 참새 볼 사람이 없네요.” 그러다가 초로(初老)의 신사가 흔쾌하게 어린 참새를 받아들었다. “제가 길러보지요!”그 후의 일은 확인하지 못했다. 창공을 비상(飛翔)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그러니까 포도나무 아래서 울어대던 녀석은 작년 그 참새처럼 깃털이 다 자라기 전에 둥지에서 떨어진 게 분명했다. 이소(離巢)하기 전에 성질 급한 녀석들이나, 부주의한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미로서는 이중고(二重苦)를 감내(堪耐)해야 한다. 아직 둥지에 있는 녀석들도 돌봐야 하고, 지상(地上)에서 애타게 어미를 부르는 덜떨어진 놈도 살펴야 하는 것이다.아래층으로 내려와 거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선다. 녀석이 다급하게 날갯짓을 해보지만 기껏해야 1~2m 낮게 날 수 있을 뿐!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온다. 마음속으로 녀석의 행운(幸運)을 기원(祈願)하면서!그리고 나흘 전 오후! 촌구석을 찾아온 손님들과 집밖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녀석을 보았다. 이번에는 앞집 담장 부근에서 짹짹거리고 있다. 맑은 눈을 들여다보고 날갯죽지를 살피고 야생초 덤불 속에 내려주었다. 속히 날개가 자라나서 하늘을 날아다니기를 소원(所願)하면서!다시 하루가 지났다.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녀석이다. 이번에는 거처(居處)가 바뀌었다. 폐가(廢家)가 되어버린 옆집 마당이다. 망초와 며느리밑씻개가 점령해버린 초록(草綠)의 공간에서 녀석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조용히 다가서보지만 어디 있는지 종잡기 어렵다. 하지만 목소리로 보건대 녀석은 아주 건강(健康)하다. 어디선가 어미가 먹이를 물고 대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녀석이 온전하게 자라나 창공(蒼空)을 비상할 때까지 어미는 분명히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어디선가 먹잇감을 찾고, 시시각각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을 심사숙고 하면서 새끼 주위를 배회(徘徊)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이 오면 멋진 축하비행을 함께할 것이다. 참으로 극진(極盡)한 모성(母性)이다.황망하기 이를 데 없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있다. 초동대응(初動對應)만 제대로 했더라면 별 탈 없이 지나갔을 터. 정권의 무능(無能)과 타락(墮落)과 부패(腐敗)의 진면목(眞面目)을 재확인하는 사건이 `메르스 사태`아닌가?! `세월호 참사`를 고스란히 재현(再現)하는 권부(權府)와 행정관료들의 무능과 태만과 타락이 불러일으키는 혼란의 극치가 국민을 분노와 경악으로 몰아가고 있다.어미참새는 부주의하고 혈기 방장(方壯)한 어린것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다. 늙은 참새 같은 어머니는 자식과 손자들의 안위(安危)가 걱정되어 사태촉발을 미연(未然)에 방지한다.그러하되 국민을 상전(上典)으로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고 받들어야 할 권부와 정권과 행정관료들의 행태는 참새의 지혜만도 못한 것이다. 이들을 믿고 다시 몇 년을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새삼 흐려져 온다.

2015-06-12

시시비비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1년 전 대구의 어느 방송사에서 나에게 제안한 프로그램 이름이 `시시비비`였다. 우리 사회가 당면(當面)하고 있는 문제를 다각도(多角度)로 조명하고 대안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2일 화요일 방송사 프로그램 개편에 따라 `시시비비` 마지막 방송을 하게 되었다. 적잖은 소회(所懷)가 들었다. 시시비비에 대한 여러 가지 상념(想念)이 찾아든다. 내가 보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1년 전이나 매한가지다.조선중기 선비이자 문인이었던 허후는 만년(晩年)에`시비음(是非吟)`이란 7언 고시를 남긴다.“시비진시시환비(是非眞是是還非)/불필수파강시비(不必隨波强是非)/각망시비고착안(却忘是非高着眼)/역능시시우비비(力能是是又非非)”우리말로 번역해보면 이렇다. “진정 옳은 것을 시비하면 옳은 것도 그른 것이 되니, 시비의 물결을 억지로 따를 필요는 없다네. 시비를 잊어버리고 눈을 높은 곳에 두면,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할 수 있을 것이네.”허후는 젊어서 대쪽 같았고, 시비분별(是非分別)에 남달랐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랬던 사람이 나이 들어 시비분별의 허망함과 무의미를 홀연(忽然)히 깨달았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선비라면 누구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알 것이고, 그 가운데 네 번째 덕목(德目)이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표현되는`지` 아니겠는가! 맹자의 인의예지에 동중서가 신을 합한 것이 오상이며, 이것은 오륜(五倫)과 더불어 다섯 가지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었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인은 `측은지심`으로, 의는 `수오지심`으로, 예는 `사양지심`으로, 신은 `광명지심`으로 연결된다. 그와 같은 오덕을 실천할 수 있다면 세상은 한결 살만하고 아름다우며 풍성(豊盛)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 그러한가?!정치적으로 보건대 우리는 아직도 이른바 `87체제`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촉발(促發)된 국민들의 분노와 연민(憐憫)과 연대(連帶)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87체제`다. 그해 6월을 뜨겁게 달구면서 기득권(旣得權) 세력의 백기투항(白旗投降)을 이끌어낸 6월 항쟁의 함성(喊聲)이 귓전에 또렷하다. 당시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불의에 저항하고 분노하며 연대할 줄 아는 시민의식을 체현(體現)하고 있었다.하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15년 6월 시점에 주위를 돌아보면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세월호 참사`1주년이 넘었지만, 알려진 것은 없고 이제 그만하자는 목소리만 높아간다. 유가족들의 애끓는 심사(心思)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사람들도 적잖지만, 망각(忘却)의 늪으로 빠져드는 인총(人叢) 또한 적잖다. 경북대 총장 부재상태가 10개월로 접어들었지만, 이 문제의 심각성과 대응방안을 부심(腐心)하는 교수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훨씬 많은 수의 교수들은 연구와 강의, 프로젝트로 분주한 것이다.자유롭게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비분별이 마땅히 필요하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아니하고, 이해관계(利害關係)나 친소관계(親疎關係)에 따라 사태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우리가 남이가?!”하는 허언(虛言)의 노예나 종복(從僕)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매 허후가 만년에 도달한 시비분별의 덧없음과 쓸모없음은 젊은 날의 치열함과 시비지심이 있었기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음습(陰濕)하고 추악(醜惡)하며 냄새 나는 곳이 적지 않다. 그와 같은 환부(患部)를 과감히 도려내고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공동체(共同體)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시비지심 같은 분별이 여전히 절실(切實)하게 요구된다 할 것이다. 시비를 넘어서는 달관(達觀)의 경지는 허후처럼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추구(推究)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그러니 오늘도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분별하고 실천궁행(實踐躬行) 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어떠한가!

2015-06-05

토요일 동성로 풍경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대구에 23년 넘게 살고 있지만 나는 대구 도심(都心)을 모른다. 서울에서도 23년 넘게 살았지만 서울 도심도 잘 모른다. 원인은 공간지각력 부족과 인산인해(人山人海)를 꺼리는 천성(天性) 탓이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어디든 간 곳을 기억의 저장고에 입력해 재활용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아침에 간 길을 저녁에 기억해내지 못한다. 이른바 길치라 한다. 하지만 나는 내비게이션을 거의 쓰지 않는다.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불편하다. 허다한 인총(人叢)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화상을 확인함은 불편한 일이다. 그들의 활기와 소음과 안하무인(眼下無人)에서 울화와 짜증이 이는 것은 나만의 일인가?!그럼에도 어쩔 도리 없이 도심에 나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대구 도심에 나가는 경우는 영화를 볼 때, 시위(示威)에 동참(同參)할 때 혹은 방송이나 강연(講演)에 참가할 때다. 지난 토요일 23일 오후 2시 무렵 동성로에 나갔다. 서명(書名)을 받기 위해서다. 대구경북의 거점(據點) 국립대 경북대학교 총장 부재사태가 9개월을 넘어섰다. 문제해결을 위해 3월 18일 경북대 민교협이 주최한 토론회가 열렸다.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참가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한목소리를 냈다. 그 결과 4월 초부터 교수들의 움직임이 생겨났고, 그것은 다시 1만인 서명운동으로 번져갔다.토요일 하오 동성로는 활기로 넘쳐났다. 가두홍보를 시작한 사학과 교수의 목소리에는 생기와 사명감이 흠씬 묻어났다. 3년 전 이맘때 대구 문화방송 낙하산 사장 반대서명 때 일이 떠올랐다. 제 입맛에 맞는 자들을 동원(動員)해 언론을 장악하고 여론을 주물럭거리는 5년짜리 단임 대통령의 행악질은 군내가 풀풀 나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에도 언로(言路)에 재갈을 물려서는 나라가 온전치 않은 법 아닌가!우리가 좌판(坐板)을 낸 옆자리에서 시민단체가 `세월호 참사` 관련 서명을 받기 시작한다. 거기서 나는 대구의 살아있는 양심을 본다. 상당수 시민들이 오가는 걸음을 멈추고 `세월호` 서명에 동참하고 있었다. 우리 서명대가 비는 경우가 많았다. 경북대가 대구에서 상실하고 있는 국립대 위상(位相)을 확인하는 것 같아 우울했다.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이런 소모적(消耗的)이고 서글픈 서명 작업이 사라질 것인가?! 지식인을 30년 넘도록 거리로 내모는 나라가 과연 얼마나 정상적인가, 하는 비감(悲感)도 찾아온다. 국립대 총장 자리를 권부(權府)의 입맛에 맞는 사람 앉히려는 권력자 앞잡이들과 거기 편승(便乘)하는 교수들의 행태는 도를 넘은 것이다.자유와 자율을 빼면 대학에 무엇이 남는가?! 대학에 허여(許與)된 학문의 자유와 지배구조의 자율성을 권부와 권력자가 앗아가면 어찌 되는가?! 특정인의 홍은(鴻恩)을 기대하는 교수들의 과잉충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청와대 5년 세입자를 향한 단심가(丹心歌)가 시대정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인가?!“천하에 도가 없으면 몸을 숨기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간다!” 공자는 그렇게 후학(後學)을 가르쳤지만, 춘추말기의 무도(無道)하고 혼란한 지경에 13년 가까운 세월 철환(轍環)으로 일관한다. 그는 등용(登用)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 길만이 천하를 구원하는 방도라고 생각했다. 아니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길이 다르면 함께할 수 없다!”는 말도 이해한다.네 시간 남짓한 시간에 440명 정도 서명을 받았다. 서명한 분들에게 우리가 준비한 탄원서(歎願書)와 온라인 서명 안내장(案內狀)을 내주었다. 경북대와 여타 곳곳에서 우리가 받은 서명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 그것을 들고 교육부와 국회를 방문할 것이다. 그들과 함께 경북대 총장 부재상황을 극복하는 방안(方案)을 모색하려고 한다. 대한민국 대표 국립대 경북대학교에 여러분의 성원(聲援)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2015-05-29

대동제 유감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언제부턴가 대학축제가 `대동제`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생겨난 새로운 풍속도(風俗圖) 아닐까 한다. 1970년대 후반까지 대학축제는 소비문화의 재탕(再湯)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수봉의 `축제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쌍쌍파티가 대학축제의 정점(頂点)이었다. 남녀교제가 제한(制限)되었던 시절에 합법적인 시공간(時空間)에서 남녀가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이었다. 그런 달콤함과 달착지근한 시간대를 넘어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원인을 미국에서 찾아내고, 전두환 일당을 학살자(虐殺者)로 규정하는 세대가 축제와 학생운동을 주도(主導)하게 된 것이 1980년대 초다.축제라는 이름에 내재(內在)한 무차별적(無差別的)인 소비문화와 대중문화 추수주의(追隨主義)를 극복하고자 내걸었던 명칭변경(名稱變更)이 아마도 `대동제` 아니었을까?!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소소한 차이를 극복하여 커다란 하나가 되자는 공동체(共同體) 의식의 발로(發露)가 `대동제`란 이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2천500년 전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주창한 공자가 무척이나 행복해할 것 같다.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한다는 주장을 편 공자 아닌가. 서로 화합(化合)하되 같지 아니한 경지(境地)를 `화이부동`이라 한다. 일곱 빛깔 무지개를 연상(聯想)하면 편할 것이다. 각기 다른 빛깔을 가지고 있기에 같지 않지만, 다 같이 모여 찬란한 무지개라는 화합의 마당을 연출하는 무지개. 각각의 빛깔이 스스로를 주장하지만, 그것들은 화합하여 아름다운 무지개를 형성(形成)해낸다. 고유함을 잃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화합하는 전체를 만들어내는 오묘(奧妙)함이 있다.`동이불화` 한다는 것은 실상(實狀)은 같지만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소인 하나하나는 별반 (別般) 다르지 않다.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관계 (利害關係) 때문에, 지역성 (地域性) 때문에, 혈연과 학연 때문에, 패거리주의 때문에 결단코 화합하지 못한다. 각자의 목표(目標)와 속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엇비슷한 인간들끼리 갑론을박 (甲論乙駁) 하며 각축(角逐)하는 꼴이 승냥이들이 썩은 시체 놓고 아귀다툼 하는 꼴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일컬어 `동이불화`라 한다.1980년대 대학에서 태동(胎動)한 대동제는 `동이불화`를 버리고 `화이부동`의 세계를 지향(志向)하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행사였다. 대학은 거대한 용광로(鎔鑛爐)였고, 시대를 고뇌(苦惱)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망(熱望)하는 청춘으로 대학은 활기가 넘쳐났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강의실에서 시국토론회가 연중무휴(年中無休)로 열렸던 백화제방(百花齊放)의 시기 1980년대. 그렇게 그들은 `87체제`를 만들어갔던 것이다.오늘날 대학의 대동제는 한마디로 요약(要約)하면 사흘연속 `술판`이다. 술판을 준비하는 학생도 오가며 술 팔아주는 교수와 학생도 사흘 내내 술과 안주 냄새로 골치를 썩여야 하는 `대주제(大酒祭)`가 되고 말았다. 비위생적(非衛生的)인 안주(按酒)와 터무니없는 바가지, 공허(空虛)한 연예인들 이야기와 프로야구 얘기. 그런 허접한 언어들과 버려진 안주 따위의 악취(惡臭)가 알코올과 뒤섞인다. 대동제는 그것들이 남긴 잉여(剩餘)의 감정과 차고 넘치는 금전(金錢)으로 해마다 점철(點綴)되고 있다!이제 그만 했으면 한다! `87체제`가 녹슬고 군내 나는 것처럼 대동제 역시 그 역사적인 소명이 다한 것 같다. 이제 그만 놀아 제키고 교정에서 냄새 나는 술판 거두고 각자 연구실(硏究室)과 강의실(講義室)과 도서관(圖書館)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술은 술집이나 밥집에서 먹고 마시면 되지 않겠는가?!대동은 술이 아니라, 이웃의 슬픔과 절망(絶望)과 고독(孤獨)을 보듬으려는 보편적인`연민(憐憫)`과 `동정(同情)`에서 발원한다. 술에 취한 눈을 크게 뜨고 사위(四圍)를 둘러보라. 거기서 대동은 비로소 시작할 것이니!

2015-05-22

공포와 연민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기원전 330년 무렵 아리스토텔레스는 전대미문의 서책 `시학`을 출간한다. 일찍이 인류가 가져본 적 없던 문예이론서 `시학`. 언뜻 보면 `시`에 관한 서책처럼 보이지만, 실은 문학에 관한 전문서적이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공을 들인 대목은 비극이다. 역사와 비극을 견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의 특수성(特殊性)과 비극의 보편성(普遍性)을 설파하면서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을 “공포와 연민(憐憫)에 기초한 카타르시스”라고 생각했다. 비극의 주인공이 경험하는 운명의 격랑(激浪)과 고통에서 발원하는 공포를 관객이 경험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낌으로써 감정을 정화(淨化)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폴리스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가능성을 비극이 제공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락과 교훈에 기초한 고전적인 미학을 정초(定礎)한 게다.이쯤해서 21세기 한국사회의 공포와 연민을 잠시 돌이켜보자.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는 공포는 있지만 연민은 없다. 어쩌면 공포가 만연해 있는 `공포사회`라고 한국사회를 단정(斷定)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하루 40명 넘게 자신을 죽여 버리는 끔찍한 자살 공화국, 매년 2천명 넘게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의 지옥, `세월호 참사` 같은 대형 사건사고가 빈발하는 후진적인 재난(災難) 공화국.사정이 이럴진대 일상화된 재난과 자살 공화국에서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한국인에게 공포는 공기나 물처럼 자연스러운 동반자(同伴者)가 되고 말았다. 공연장이나 공사판에서 열 몇 사람 죽어나간다 해도 웬만한 한국인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과 말투로 일상(日常)을 영위해 나간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죽음에 무신경해진 공포사회의 단면(斷面)이다.만연한 공포와 달리 한국사회에 연민은 완전히 결여(缺如)되어 있다. 이웃이나 그 너머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이나 재난 따위에 가슴 아파하거나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배제(排除)된 연민의 감정은 가족이나 제한된 틀 안의 인간관계로 과잉(過剩) 표출된다. 그리하여 과잉의 가족주의(家族主義)와 연고주의(緣故主義)가 횡행(橫行)한다. 여기서 혈연과 지연과 학연의 괴물(怪物)이 꿈틀댄다.지난 4월 28일 `세월호 참사(慘事), 1년을 말하다!` 콜로키움을 경북대에서 개최했다. 단원고 희생자 김동엽 학생의 부모님을 모신 특별한 자리였다. 두 시간 남짓 진행된 행사를 마치고 돌아본 강당에서 낯익은 교수들의 얼굴은 대여섯 남짓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공포와 충격(衝擊)`이었다. 아아, 이것이 경북대 교수사회의 민낯이구나! 뒤통수가 얼얼했다. 가슴에 서늘한 썰물이 일었다.대학의 존립근거 하나가 `정의(正義)와 불의(不義)`를 구별하여 가르치는 일이다. 한국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정리(情理)를 가르치는 것이다. 지식과 기능의 전수(傳受)는 그와 같은 사회적-윤리적 교양에 기초할 때 비로소 제 구실을 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시민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덕성(德性)과 소양(素養)을 함양(涵養)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하지만 그날 나는 보고야 말았다. 만연(漫然)한 공포사회에 완전 결석한 연민사회의 실상을 그날 목도하고야 말았다. `세월호 참사`가 나와 가족과 친구와 친지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아버린 허다한 인간들의 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실체를! 하기야 “이제 그만하자!”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외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형편이다. 또 다른 대형공포를 예감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杞憂)일까?!공포와 연민에 기초한 카타르시스를 공동(共同) 체험하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하나로 결속(結束)하여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울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공포는 차고 넘치는데, 연민은 사라진 한국사회를 보면서 허망(虛妄)하고 다시 허망하다. 황망(慌忙)하고 다시 황망하여 몸과 마음을 건사하기 어려운 봄날이 저물어간다.

2015-05-15

오월의 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나이를 먹다보면 호불호(好不好)에도 변화가 생겨난다. 계절에 대한 선호가 그렇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혈기 방장(方壯)했던 시절엔 여름이 제일 좋았다. 성장과 부패(腐敗)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드러나는 열렬한 생장과 타락의 계절. 불혹(不惑) 무렵에는 겨울의 싸늘한 냉기(氣)와 거기서 발원하는 처연함 같은 게 좋았다.인생 최종 3막이 시작됨을 느끼는 나이. 요즘 나를 매혹(魅惑)하는 계절은 봄이다. 허름한 농가주택으로 이사한 뒤로 봄에 대한 예찬은 날로 더 깊어진다.삼월부터 찾아오는 봄의 전령(傳令)이 화사한 색깔로 마당을 수놓고 나면 진짜 봄이 온다. 나는 그것을 초목의 봉기(蜂起)라 부른다. 마당에는 내가 바라지 않은 풀들로 그득하다. 나는 그들에게 `불원초(不願草)`란 이름을 붙여준다.사람들이 말하는 잡초(雜草)에 대응(對應)해서 내가 생각해낸 신조어(新造語)가`불원초`다. 세상에 잡스러운 풀이 있는가?! 인간이 쓸모를 기준(基準)으로 삼아서 잡초라고 규정하는 것에 나는 동의(同意)하지 않는다. 잡초들의 눈으로 볼 때 쓸모 있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언제나 그런 문제(問題)에 대한 대답을 `불원초`들에게 물었으나, 녀석들은 빙그레 웃을 뿐 시원스런 대답(對答)을 해주지 않는다.`불원초`가 마당 곳곳을 해방군처럼 점령(占領)하고 나면 가까운 논에서 개구리들의 합창소리 들려온다. 낮이고 밤이고 영상 20도의 기온은 나로 하여금 이층 베란다로 나가도록 한다. 온 누리의 뭇 생명이 잠에 빠져드는 한밤중에 슬며시 베란다 의자에 앉아 상념(想念)에 젖어드는 기쁨은 뭐라 형언(形言)하기 어렵다.작년 2월 무렵 통독(通讀)한 `레 미제라블`의 미리엘 주교를 떠올리는 즐거움으로 오월의 밤을 보냈더랬다. 주교관 뜰을 서성대면서 밤마다 천상(天上)의 하느님과 대면했던 미리엘 주교. 위대한 신성의 확인과 유한한 인간의 미소(微小)함으로 괴로워했던 미리엘. 그가 장발장에게 내준 촛대는 주인공을 어떤 길로 인도했던가?!하지만 `레 미제라블`에서 나는 예술원 회원이 아닌 학술원 회원 위고의 신랄(辛辣)한 지적에 몇 번이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153년 전에 주장한 무상교육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1862년에 출간된 `레 미제라블`에서 위고는 당당하게 말한다. “무상(無償)으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야만(野蠻)이다!” 오늘날 유럽의 대표적인 교육 강국, 그러니까 프랑스와 도이칠란트, 핀란드의 무상교육 이념의 주춧돌을 놓은 이가 빅토르 위고인 셈이다.봄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오월의 아름다운 밤에 생각한다. 왜 우리는 무상교육을 하지 못하는가?! 왜 무상급식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가?! 프랑스와 도이칠란트처럼 요람(搖籃)에서 무덤까지 모든 교육을 왜 무상으로 실행하지 못하는가?! 국가가 시민들에게 베풀어야 할 최소한도의 도리 가운데 하나가 무상교육 아닌가?!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무상으로 대학원 교육까지 국가가 책임지면 아니 되는가?!많은 사람들이 재원(財源)을 걱정한다. 전임(前任) 정권에서 환율(換率) 강제 조작(操作)으로 170조 이상의 부자감세를 강행(强行)했고, 이른바 `사자방 (4대강, 자원외교, 방위산업) 비리(非理)`로 나라 체면(體面)이 말이 아니다. 그런 천문학적인 비용을 재벌(財閥)들에게 퍼주지 않고, 정상적인 국정운영으로 똥별들의 행악질을 막아내고, 예산을 절감(節減)한다면 무상교육은 결코 강 건너 등불이 아니다!막힌 봄날이 시나브로 여름을 향해 매진(邁進)하는 시점에 나라의 안위(安危)와 민초들의 허덕허덕한 삶을 생각한다. 미리엘 주교처럼 천상과 교감(交感)하는 지상의 영혼은 아니지만, 이 나라에 거주하는 우울하고 힘없는 민초들의 근심걱정이 덜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밤 나는 베란다에서 오월의 밤과 다시 만날 것이다!

2015-05-08

거울을 보다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通路)는 시각이다. 그 다음이 청각과 후각, 촉각 순서라고 한다.“눈이 보배”라거나,“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은 근거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얼굴이나, 눈과 코, 귀를 보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등도 볼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몸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지독한 역설(逆說)이다. 외물(外物)을 보는데 가장 종요로운 눈이 자신을 보는 데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란 얘기다. 여기서 `거울`의 쓸모가 생겨난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과 몸을 인식한다. 나르키소스처럼 거울이 아니라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미치광이가 된 자도 있다. 그러하되 고정된 상(像)을 안정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눈은 거울과 비교(比較)할 수 없다.시대를 선구적(先驅的)으로 살았던 이상은 `거울`에서 나직하게 말한다.“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구료마는/ 거울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거울` 3연)앞 연(聯)에서 시인은 이미 거울 속의 절대고요와 상반(相反)되게 맺히는 상에 대해 적시(摘示)한다. 소리도 없고, 시인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귀도 두 개나 있으며, 왼손잡이인 거울 속의 시인! 거울에 내재한 모순(矛盾)과 대립의 상황을 날카롭게 꼬집은 `거울`. 하지만 뒤이어 시인은 거울의 미덕을 낮은 목소리로 예찬(禮讚)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감촉(感觸)하지는 못하지만, 거울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자아의 모습 확인에 고마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설령 완전한 상은 아니지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거울에게 시인은 적잖은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마음도 잠시, 시인은 극적(劇的)인 반전(反轉)을 결말처럼 제시한다.“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거울`마지막 행)시인이 거울의 도움을 받아서 만나고 있는 시적(詩的) 자아는 병들고 근심 많은 사람이다. 문제는 거울 속에 있는 그 사람을 근심해줄 수도 없고, 진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거울 속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분명 동일인이고, 단 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안의 나는 어떤 소통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차폐(遮蔽)되어 있다.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대화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듣지 않거나, 자기 견해만 끝끝내 관철(貫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가슴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발라버리고, 머릿속은 아스팔트로 도배(塗褙)한 사람들과 대화한다는 것은 영혼이 죽어버린 사물과 말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생명이 완전히 연소되어 설화석고(雪花石膏) 마냥 `물화(物化)된` 인간과 대화해야 한다는 것은 고문 이상이다. 문제는 그런 자들이 인간다운 영혼과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지배하는 끔찍한 세상이다.그런 자들의 양산(量産)과 지배집단의 근저에 깔린 것은 이상이 `거울`에서 말한 것처럼 반성적 자아성찰과 대상인식의 결여다.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바깥의 내가 왜 어떻게 다른지 돌이키는 시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날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인간의 영혼에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와 시멘트와 설화석고가 자리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보시라! 21세기 대명천지 대한민국의 지배집단이 보여주는 철면피(鐵面皮)한 무도함과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난 지금, 송파구 세 모녀 자살사건이 있은지 1년도 넘은 지금 한국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누구도 부채의식이 없는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사회와 지배집단의 흉물스러움이 새삼 끔찍한 아침이다!

2015-05-01

4·19혁명 55주기

▲ 김규종경북대 교수·인문대학“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漫)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위엔 하늘이 무거운데/연련(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山河.”해마다 4월 19일 그날이 오면 즐겨 암송(暗誦)하는 시 `진달래`전문이다. `진달래`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적잖다. `진달래`를 지은이는 시조시인 이호우의 여동생이며, 유치환의 연인 이영도다. 이영도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유치환은 죽을 때까지도 시로 읊었다. 여러분도 아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나니라” 하고 시작하는 `행복`을 기억하시리라.20대에 청상과부 된 이영도가 유치환의 구애(求愛)를 오래도록 거절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이영도는 그의 끈질긴 구애에 감동하여 마음을 내준다. 훗날 이영도는 자신을 낳아준 고향 청도에 정착하고, 아내와 자식이 있었던 유치환은 부산으로 발령받는다. 여기서부터 유치환과 이영도의 편지를 매개로 한 사랑이야기가 시작한다. 그 절정(絶頂) 가운데 하나가 청마의 `행복`으로 드러난 것이다.그러하되, 나는 청마(靑馬)의 어떤 시보다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를 사랑한다. 산등성이 곳곳을 마치 꽃 사태라도 난 것처럼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를 4·19혁명 당시 피 흘리며 죽어간 청년들과 선연(鮮然)히 대비시킨다. 그리고는 이린 영혼들을 보내고 욕되게 살아남은 나이 먹은 자의 우울과 슬픔을 영탄조로 노래한다.청춘들이 흘린 피 값으로 얻어낸 자유와 민주주의를 공짜로 향수하는 기성세대의 절망적인 무력감과 무임승차에 대한 죄의식을 아프게 지적한다. 절창(絶唱)이다.지난 19일 4·19혁명 55주년은 혼란과 탄식과 한숨 속에서 시나브로 스러져갔다. 작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로 인한 유가족의 슬픔이 하늘을 찌른다. 그분들을 위로하고 원통한 혼령을 위하여 모인 시민들에게 경찰은 차벽과 최루액과 물대포를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鎭壓)했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이 나라 국민 304명이 고스란히 수장된 그날의 절망과 슬픔은 현재 진행형이다.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원외교`의 불똥을 맞은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의 자살과 그가 남긴 부패정치인 명단으로 나라 전체가 기우뚱하고 있다. 일국의 총리가 사임을 발표하고 수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더 많은 고위직들이 뇌물수수(物授受)로 철창에 가야할지 모르는 정국이 마냥 어수선하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진 자들이 21세기 대명천지에 뇌물을 받아 챙겼다니! 그자들이 입만 열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지껄여댄 이른바 `국격`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그런 혼란과 절망과 탄식(歎息) 속에 4·19혁명은 조용히 잊혀졌다. 이승만 독재 12년에 저항하여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200여명의 청춘들은 2015년 4월 완전히 망각된 채 저승의 강을 배회(徘徊)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고귀한 투쟁과 죽음으로 얻어낸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저 우리의 공염불 (空念佛) 속에만 자리하는 듯하다.얼마 전 전북 정읍의 고등학생 1천여명이`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影幀)과 촛불을 들고 질서 있게 거리를 행진하여 화제가 되었다. “세월호 인양하라!” “시행령 폐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의 의지를 발현했다고 한다. 4·19 혁명정신이 아직도 이 나라 어린 영혼들에게 살아있음을 입증(立證)한 것이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나이 먹은 인간으로 한편 미안한 마음이고, 다른 한편 고마움을 느낀다.`진달래`의 이영도 시인이 살아있다면 반가운 얼굴로 이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기막힌 사월의 향훈(香薰)이 언젠가 이 땅에 차고 넘치는 축복(祝福)으로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4·19혁명은 오늘도 시퍼렇게 우리 곁에 살아있다. 시인과 함께!

2015-04-24

`세월호 대참사` 1주기에 즈음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햇살이 부시도록 눈을 찔러오는 화사(華奢)한 봄날이다. 자연의 이법(理法)이라지만, 봄의 신비(神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자 불립문자(不立文字)다. 저 숱한 생명들은 어디 숨어 있다가 이처럼 불시에 인간세상을 급습(急襲)한단 말인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어처구니없는 인간중심 서사(敍事)도 있기는 하다. 그러하되 사람으로 살아있음을 황홀하게 여기는 빛나는 시절이 주변에 차고 넘치는 계절이다. 그런데 형언(形言)하지 못할 이 봄날을 슬픔과 절망과 한숨과 분노(憤怒)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대참사` 유가족들이다. 단원고 2학년 아이들의 부모들은 특히 그러할 것이다. 애지중지(愛之重之) 길러온 17년 세월을 단숨에 무화(無化)시켜버린 참사의 기억은 그이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깊은 굴곡(屈曲)을 남겼을 터. 새삼 더 보탤 말조차 없다. 그저 황망(慌忙)하고 다시 황망할 따름이다.1년 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沈沒)했다. 사망자 295명과 실종자 9명의 대참사로 기록된 사건이 일어난 지 1년 세월이 흘렀다. 지난 1년 동안 `세월호 대참사`를 두고 참으로 많은 말과 사건과 충돌(衝突)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한반도라는 공간과 21세기 초(初)라는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기에 발생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인과율(因果律)에 의지해야 하는 숙명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시체로 장사하는 사람들이”이라는 식으로 사람의 심장을 도려내는 극한적(極限的)인 말이 횡행(橫行)했다. 광화문 단식농성장 부근에서 폭식(暴食)함으로써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야만의 행태도 나왔다. “교통사고 난 거니까 보상해주면 그만”이라고 폭언하는 고위층 인사도 속출(續出)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자식을 기르는 부모이자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疑懼心)이 찾아왔다.300명 넘는 사람들이 무고(無告)하게 수장(水葬)됐는데, 이 나라에서 변한 것이 있는지 돌이켜본다. `세월호 대참사` 이후에도 크고 작은 사고로 상당한 인명(人命)이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정말로 변한 게 있는가! 작년 2월 하순 송파구 세 모녀 자살사건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술렁인 적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 모녀는 한 달 남짓 지나자 시나브로 잊혀졌다. 죽은 사람들만 안타깝고 구슬픈 것이다.하지만 `세월호 대참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본원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는 전쟁수행 같은 초법적인 권한까지 가진 막강한 공권력(公權力)을 바탕으로 한다. 개인과 국가가 충돌하면 개인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처럼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日淺)하고 공권력이 막강한 나라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사람들은 어느새 하나 둘 외면(外面)하고 손사래 치기 시작한다. `그만 하자`는 것이다. 이제 잊자고 말한다. 그만하면 충분(充分)하다고 말한다. 정녕 그러한가!그렇게 고개 흔들고 욕지거리까지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만일 당신의 생때같은 자식이 느닷없이 죽어나가도, 그만 하자고 할 것인가! 온 국민의 눈앞에서 생중계(生中繼)되는 텔레비전 속에서 당신 아이가 죽었는데도 그만 잊자고 말할 것인가! 왜 죽었는지, 어째서 정부(政府)는 단 하나의 생명(生命)도 구하지 못했는지, 원인도 알지 못하는데 그만 덮자고 할 것인가!사건발생과 진척양상 및 귀결(歸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낱낱이 밝혀져야 `세월호 대참사`는 덮을 수 있다. 그래야 원통한 영혼(靈魂)도 없고, 유가족도 가정과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총체적 (總體的) 진실이 전부 밝혀져야 비로소 우리도 안도(安堵)의 한숨을 내쉬면서 각자 경험하고 있는 만큼의 미안함과 죄의식(罪意識)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세월호 대참사` 해결(解決)은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다.

2015-04-17

인문학은 살리고, 인문대학은 죽여라?!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 그츨쌔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기에 꽃이 좋고 열매가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도 아니 그치기에 시내를 이뤄 바다에 이르나니.)필자가 학창시절 즐겨 암송(暗誦)했던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제2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선왕조 건국에 서린 역사적 연원(淵源)과 인과성(因果性)을 나무와 물에 빗댄 명편(名篇)이다. 이런 비유가 그저 당대에만 유의미했다면 우리의 기억 너머로 사라졌을 터.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것을 보면 비유에 담긴 함축과 의미가 시공(時空)을 초월하고 있음을 알겠다.근자(近者)에 교육부장관이 대구 가톨릭대학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 대학 총장을 한껏 치켜세우는 기사를 읽었다. 내용인즉 그 대학 총장이 앞장서서 대학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단행(斷行)했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구조조정 가운데 하나가 인문대학 폐교(閉校)였다는 점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4년제 대학에서 인문대학을 자발적으로 없애는 총장. 그것을 기특(奇特)하고 가상하게 여겨 머리 쓰다듬어주는 장관. 뭔가 거시기 하지 않은가?!하기야 교육부장관이 취임하고 맨 처음 찾아간 대학이 중앙 대학교였으니 알아볼 징조다. 두산이란 재벌이 인수해 기업 입맛에 맞춰 대학에 칼부림을 한 첫 번째 쾌거(快擧)를 이룬 곳이 중앙 대학교 아니었는가! 돈벌이 될 만한 단과대학과 학과는 증설하고, 기초학문과 순수학문은 통폐합을 단행한 것이다. 여기 적용된 논리가 시장 친화형 기업 구조조정이다.중앙 대학교는 교양필수 교과목으로 철학이나 역사, 문학 대신에 `회계학`을 강요하여 세간의 빈축(嚬蹙)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뚝심의 두산 아닌가?! 프로야구에서도 가장 끈적거리는 뒷심으로 호가 나있는 곳이 두산이니 유구무언(有口無言)이지만…인문대학 문을 닫고, 인문대학 학과들을 마구잡이로 잘라내는 대학과 그것을 격려(激勵)하고 손뼉 치는 주무장관(主務長官)의 행태라니.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구축을 국정 4대 기조로 삼은 현 정권과 화합하는가. 인문대학을 없애고, 학과 문을 닫아걸고, 학생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이 문화융성을 위한 적절한 행동지침(行動指針)인가?!더불어 기이(奇異)한 점은 현 정권이 인문학 대중화(大衆化)에 두 팔을 걷어붙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모두에게 인문학으로 세례(洗禮)를 주려는 것처럼 나라 전체에 인문학 바람이 드세다. 크고 작은 인문학 관련기획 사업이 하루가 멀다않고 공지되고, 인문학 강연은 전국 방방곡곡 열리지 않는 곳이 없다. 조그만 시골 중등학교도 예외가 아니다. 좋은 일이다!하되, 문제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인문학의 뿌리는 인문대학이다. 문학과 철학과 역사가 대학 안에서 교습되고 연구되어 대를 잇지 않는다면 인문학이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인문대학이 고사(枯死)하고, 관련학과가 문을 닫으면 인문학이 말라죽는 것은 당연지사다.현 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인문학의 대대적인 보급과 교양수준 제고(提高)를 위해서라도 인문대학과 관련 학과들의 존속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철학과, 역사학과, 어문학과가 결석(缺席)하는 대학에서 어떻게 인간적이고 창의적(創意的)인 인재가 양성되겠는가!인문학은 태곳적부터 경세제민(經世濟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목표로 한 유서 깊은 학문이다. 지난 세기 제2차 대전 이후 학문의 급속한 분화로 인한 인문학의 유체이탈과 `넘사벽`의 어려움으로 인해 궤멸(潰滅)을 길을 자초(自招)한 것이 인문학이다. 그런 인문학이 이제 대대적인 자기반성과 대안모색의 일환으로 저잣거리로 달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이런 판국에 국민에게는 인문학을 장려하는 정책을, 현장에서는 인문대학을 죽이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자 자승자박(自繩自縛)의 모순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뿌리 없는 나무에서 화사(華奢)한 꽃이 피어나 달콤새콤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본말이 전도된 그릇된 대학정책은 이제 거둘 때도 됐다.한밤중인데도 창밖에 벚꽃이 대낮처럼 환하다. 버찌도 물론 풍성할 것이다!

2015-04-10

바이칼과 작별하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2월 9일 오전 10시 15분 우리는 사람 좋아 보이는 운전기사 세르게이의 낡아빠진 승합차로 알혼 섬 최북단으로 방향을 잡는다. 영하 20도 내외의 냉기가 상큼하게 얼굴을 어루만진다. 이 정도 추위는 별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다. 승합차는 생각보다 강건하고 힘차게 작동한다. 바이칼의 두터운 얼음장 위를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회청색 승합차. 얼음의 나라 바이칼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여주려고 세르게이는 곳곳에서 승합차를 세운다. 암벽 위쪽에서 종유석(鐘乳石)처럼 자라난 얼음 줄기들이 예리(銳利)한 창날처럼 즐비하고, 아래쪽에서는 깨지고 갈라진 얼음장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바이칼!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이곳이 범상(凡常)한 장소가 아님을 천명(闡明)하듯 강렬하고 매섭다.아, 그때! 시퍼런 하늘 저편을 홀로 나는 맹금류(猛禽類)의 거대한 날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어떤 생명도 부지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멸(死滅)의 시공에 저토록 아름답고 강력한 비행체가 생명으로 자라고 있음은 축복이다. 거칠 것 없는 한겨울 창공을 차고 오르는 괴조(怪鳥)의 날갯짓은 바이칼 얼음장 위에서 얼어붙은 온대(溫帶)의 나그네를 위축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이윽히 멈춰서는 세르게이의 승합차. 그가 준비한 것은 바이칼 특산인 오물을 쌀과 함께 조리한 따끈한 점심이었다. 비릿한 맛 하나 없는 깔끔한 식사가 홍차와 곁들여지고, 약간의 보드카가 흥취를 돋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세상의 그림자가 절연된 바이칼 얼음장 위에서 소풍 나온 듯 담소(談笑)하며 부랴트족의 점심을 누리는 호사(豪奢)는 기막힌 것이었다.앞서 걷던 일행 가운데 하나의 입에서 경탄(驚歎)이 흘러나온다. “물이다!”왼쪽과 오른쪽의 얼음장이 서로 충돌(衝突)하여 둘 사이에 두 자 남짓 수로(水路)가 생겨 있었다. 그 사이로 과연 물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을 들이밀고 물을 마신다. 상큼하고 서늘한 바이칼의 얼음물이 식도(食道)를 타고 내장 (內臟) 깊숙하게 흘러내린다. 내장의 세포(細胞) 하나하나를 일깨우는 바이칼의 칼칼한 얼음물!바이칼은 지구 최대의 민물호수다. 지구의 71%가 물이고, 29%가 육지라고 한다. 지구 물의 97%는 바닷물이고, 담수(淡水)는 고작 3%에 지나지 않는다. 그 3%의 물 가운데 20%의 물이 바이칼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우리 민족의 시원(始源)을 바이칼에서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 방면에 문외한(門外漢)이어서 나는 바이칼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하되 태곳적 우리 조상들이 바이칼에서 존재와 이동을 시작했다면 나쁜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소감(所感)이다. 그것은 바이칼에 내재한 크고 너르고 넉넉하며, 거칠되 우아하고, 강력하되 부드러운 바이칼의 이중성에서 기원하리라 믿는다. 음양(陰陽)의 조화처럼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만물의 생성원리로 작용하는 대립(對立)과 항쟁(抗爭)의 기운이 한껏 느껴지는 한겨울의 바이칼!오늘이 지나가면 바이칼과 작별해야 한다. 그러면 언제 다시 바이칼을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다. 청춘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노년의 시계추는 주저(躊躇)하지 않고 서둘러 나를 향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한 9박 10일의 여정이 끝나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에 시작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 아닌가. “적절한 순간에 끝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명민(明敏)한 안톤 체호프는 `사랑에 관하여`에서 말하지 않았던가!그날 밤 우리 일행은 은성(殷盛)하고 화사(華奢)한 작별잔치를 벌였다. 보드카와 맥주와 압생트를 앞에 두고 크고 작은 웃음과 한탄과 노래와 춤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다시 오지 못할 동행의 시공(時空)과 관계를 떠올리며 서로의 미래를 축원(祝願)했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흘러도 우리가 공유했던 그날들과 허다한 눈과 바람과 얼음장과 자작나무와 허허벌판과 을씨년스러운 정거장 풍경은 한사코 나의 손목을 잡아끌 것이다. `저 아늑하고 아련한 추억의 모퉁이로! 안녕, 바이칼이여! 한겨울 이르쿠츠크여! 그리고 올가와 아나스타샤의 러시아여!`

2015-04-03

바이칼, 그 첫날의 기억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2월 8일 오전 6시 40분 몰려드는 한기(寒氣)와 뒤숭숭한 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실내온도는 21도! 허공에 나가 있는 팔이 차갑게 느껴진다. 성에가 끼어 뿌연 창밖으로 이르쿠츠크 시내 모퉁이가 조금 보인다. 얼마만의 성에인가! 생각은 불현듯 파스테르나크 원작의 `지바고 의사`로 달려 나간다. 내전(內戰)의 모스크바를 버리고 우랄의 유리아친으로 옮아간 지바고가 새벽에 유리창에 맺힌 성에를 긁던 장면이 선하다. 라라의 이름을 그리듯 정성껏 써내려가는 의사이자 시인인 지바고. 새벽녘 잠에서 깨어난 그가 맞이하는 늑대 울음소리와 한겨울의 냉기! 혁명(革命)과 아무 관계도 없을 듯 보이는 유리아친. 하지만 지식인은 어디를 가도 시대와 역사(歷史)와 관계(關係)에서 한 발짝도 자유롭지 못하다.사회주의 10월 혁명에 열광(熱狂)하지만 혁명이 가져온 범용(凡庸)함으로 등을 돌리는 지바고. 하지만 그는 반혁명분자가 아니었다. 그는 역사의식과 시인의 영혼을 가진 사회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동란(動亂)의 시대를 살아간 시인이자 지식인이었다. 그의 복잡다단한 흉중(胸中)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랑영화로 변용한 데이비드 린!우리는 오전 10시 15분 승합차로 델타호텔을 출발한다. 쉬지 않고 달린다면 4시간 반 정도면 알혼 섬에 도착할 수 있다고 운전기사는 말한다.2시 50분부터 승합차는 얼어붙은 바이칼 위를 질주(疾走)한다. 평균 50센티미터 이상 단단하게 얼어붙은 바이칼은 맑고 푸르렀다. 3시 반쯤 바이칼을 건너 다시 육지를 달리는 승합차. 우리가 부랴트인 아줌마 올가의 민박숙소(民泊宿所)에 도착한 최종시각은 오후 4시 반 무렵이다.올가가 준비한 간편식으로 배를 채우고 우리는 알혼 섬의 대표적인 명소(名所)인 부르한 바위를 찾아 나선다.시베리아의 샤먼들이 제사(祭祀)를 모신다고 전하는 부르한 바위. 바위는 밑동부터 꽁꽁 얼어붙어 있다. 하기야 어디 부르한 바위뿐이랴! 어디를 둘러보아도 꽝꽝 얼어붙은 바이칼의 내장(內臟)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이윽고 찾아온 일몰(日沒)은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자연을 실감(實感)하게 한다. 일찍이 노자는 `천지불인`과 `성인불인`을 말했다. 인간의 궁극적인 모범인 자연의 섭리(攝理)를 `불인(不仁)`하다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편벽 고루함이 없는 보편적 존재로서 자연의 속성을 일컫는다. 그러하되 손가락 마디마디에 전해지는 통점(痛點)과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는 한기는 필설(筆舌)로 형언(形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인간이 경험하는 시공간과 인과율(因果律)마저 망각(忘却)케 하는 바이칼의 원시적인 자연력은 놀라웠다.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온몸을 웅크리게 하는 바이칼의 압도적(壓倒的)인 추위는 체감(體感)한 자들만의 몫으로 남는 듯하다. 바이칼의 위용(威容)과 거룩함은 나의 내면까지 얼어붙도록 한다. 동행한 이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하며 무연(無緣)하게 바람과 얼음과 하늘을 마주하는 도리밖에 없었다.언젠가 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天池)의 위용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적이 있었다. 2004년 8월 초의 일로 기억한다. 천지에서 나는 작은 인간이자 미미(微微)한 존재로 스스로를 각인(刻印)했다.한여름 비바람 속에서 30분도 안 되는 짧은 동안 자연의 거대한 운무(雲霧)의 장막을 열어주었던 천지. 천지의 시퍼런 물 앞에 그저 압도되었던 미숙한 인간임을 자인(自認)해야 했다. 그런 느낌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천지는 너무나 먼 곳에서 나를 압도했다. 바이칼은 내 발 아래 있으면서도 나를 억압한다.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으되, 그 압도적인 면모(面貌)에서 차이는 없다. 한여름의 천지와 한겨울의 바이칼은 많이 다른 듯 보이지만 어쩌면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우주의 먼지 같은 지구의 미소(微小)한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의 허명(虛名)과 희언(戱言)과 어설픔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그들은 동료(同僚)다.잠자리에 들기 전 하늘을 우러른다. 뭇별이 투명한 대기를 뚫고 저무는 달과 이야기하고 있다. 영하 30도로 치달리는 냉기를 느끼며 마지막 일정을 생각한다.

2015-03-27

시베리아의 진주 이르쿠츠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2월 7일 아침 7시 무렵 도착한 이르쿠츠크는 콧날이 시리도록 매서웠다.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기온이 선사하는 상큼하지만 날카로운 기운은 체내(體內) 세포(細胞)들의 긴장을 야기(惹起)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세 대의 택시에 분승(分乘)한 우리 일행은 `비즈니스 델타호텔`에 여장(旅裝)을 풀었다. 작고 아담한 호텔이지만, 외관(外觀)부터 말끔하고 미끈한 것이 세련미(洗煉味)를 자아내고 있었다.따뜻한 물을 마음껏 써보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새삼스레 물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떠올리며 나흘 만의 샤워에 몸을 맡긴다. 가벼운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닐까!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린다. 그것은 도시가 자아내는 묘한 매력 때문이다. 1825년 12월 14일 제정 러시아의 전제군주 니콜라이 1세의 즉위에 반대하는 청년 장교들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봉기(蜂起)를 일으킨다. 그들을 가리켜 데카브리스트, `12월 당원`이라 부른다. 1812년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개선문을 지나 파리와 프랑스의 선진문물에 눈을 뜬 귀족 장교들이 염원한 것은 공화정이었다.전제군주 니콜라이가 그것을 용인(容認)할 리 없었고, 그들 가운데 주모자급은 처형당하기도 하고,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 유배(流配)당한다. 모스크바에서 무려 5천 킬로미터 떨어진 동토(凍土)의 땅 이르쿠츠크! 족쇄(足鎖)에 채워진 채 걸어서 유배지로 와야 했던 열혈청년 귀족들의 유배행렬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아내들이 마차를 타고 뒤를 이었다는 사실이다.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의 선진문화를 이르쿠츠크로 이식(利殖)했던 고상하고 우아한 여인의 자태는 동상(銅像)으로 남아있다. 그들의 삶이 남긴 자취가 볼콘스키 박물관이나 트루베츠코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기약도 없는 유배지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었던 귀족 아낙들의 기품(氣稟) 있는 삶은 매혹적이었다. 그것이 남긴 결과가 시베리아의 진주 이르쿠츠크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도시의 간선도로는 이제는 폐기(廢棄)된 카를 마르크스 거리와 레닌 거리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앙가라 강변에는 레닌의 최후최대 정적 (政敵) 콜차크 제독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영화 `제독의 연인`(2008)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처음 알려진 콜차크. 도심에는 사회주의 10월 혁명의 주역 레닌의 동상이 서 있다. 이르쿠츠크의 모습에서 나는 러시아의 저력(底力)과 포용(包容)을 독서한다.이르쿠츠크 기행(紀行)을 풍요롭게 해준 것은 모스크바에서 6시간 비행(飛行)을 거쳐 우리를 찾아온 박정곤 교수다. 교육방송이나 서울방송에서 전파(電波)를 탄 그이는 상당한 지명도를 가진 러시아 지역학 전문가다. 바쁜 짬을 내서 장거리 비행을 마다않고 날아온 그이에게서 한국인의 따뜻한 정겨움이 듬뿍 묻어난다.이르쿠츠크 시내탐방을 마친 일행은 처음 보는 압생트에 매료(魅了)된다. 70도의 짜릿함을 간직한 연초록 색깔 고운 압생트의 독특한 향기는 고혹적(蠱惑的)이었다. 인상파 화가(畵家) 고흐에게 `황반변성(黃斑變性)`을 일으키게 하여 그 유명한 노란색 해바라기 그림을 낳게 했다는 술 압생트. 19세기 후반기 가난한 노동자들과 문사(文士) 그리고 화가들의 유일한 벗이었던 압생트.압생트로 인해 이르쿠츠크의 밤은 한층 아름답고 풍부해지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먹을거리 샤슐릭과 함께한 압생트의 향미(香味)는 귀국할 때 보드카 대신 압생트를 선택하도록 나를 인도(引導)하였다. 거리의 시리도록 찬 기운(氣運)도, 낯선 도시의 정경(情景)도 나그네의 심사(心思)를 뒤흔들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아름다운 사람과 멋진 술과 맛난 음식 덕분이었을 것이다.내일은 한국인들이 반드시 가보고 싶어 한다는 바이칼로 떠날 것이다. 약간의 취기(醉氣)와 더불어 기대치(期待値)는 최고도(最高度)로 상승(上昇)하고 있었다.

2015-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