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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꺼병이와 고양이

▲ 김병래시조시인 풀숲에서 웬 삐약삐약 소리가 들립니다. 들여다보니 깬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꿩병아리들이 오글거리고 있습니다. 닭병아리보다 몸집은 작지만 야생답게 반짝이는 눈빛과 삐약거리는 기세가 여간 아닙니다. 꿩병아리를 지칭하는 `꺼병이`가 `겉모양이 잘 어울리지 않고 거칠게 생긴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인기척에 숨어버린 것인지 어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앙증맞은 것들을 붙잡아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어미와 만나도록 얼른 자리를 피해 줍니다. 삐약삐약삐약 소리가 한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습니다.저만치 고양이가 한 마리 지나갑니다. 한눈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고양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군살이 없는 몸매와 경계심이 잔뜩 밴 행동이 그렇습니다. 요즘은 고양이를 집안에서는 잘 기르지 않아서인가 주위에 도둑고양이로 살거나 아니면 아예 산짐승으로 살기도 합니다.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들이 없는 숲에서 야생 고양이는 먹이사슬의 꼭대기를 차지하는 포식자(捕食者)인 셈입니다. 사뿐한 몸동작과는 달리 숲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아넣는 놈이지요. 아까 그 꺼병이들이 무사할지 걱정입니다.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낙원입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은 자연 상태, 즉 오염과 파괴가 안 된 생태계가 바로 정토낙원이지요. 땅 위에 그 이상의 파라다이스는 존재할 수가 없으니까요. 반세기 넘도록 사람의 발길이 통제된 휴전선 비무장지대가 동식물들에게는 낙원인 까닭이지요.그것은 그러나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과는 거리가 멉니다. 문명과 격리된 타잔이나 로빈슨 크루소를 꿈꾸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구상에서 건강한 생태계 이상의 낙원을 꿈꾼다는 것은 결국 욕심과 어리석음이 지어낸 망집(妄執)일 뿐입니다. 문명이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생태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일시적인 성과는 몰라도 소위 `지속 가능한` 세상일 수는 없는 것이지요.자유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종교적 구원이나 해탈이 아니라면 자유의 본질은 자연스러움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사람 역시 생태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연스러움이란 인위적 간섭이 없는 자연생태계의 균형과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요. 사자나 하이에나 같은 포식동물이 없는 초원이 얼룩말이나 가젤영양의 낙원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포식동물이 수시로 잡아먹어 개체수를 조절해 주지 않으면, 과잉번식으로 인한 먹이의 고갈되로 초식동물이 더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니까요.생태계의 먹고 먹히는 긴장관계를 벗어난 자유를 꿈꾼다는 것은 과욕이고 오만이고 오산입니다. 문명화된 인간사회라 할지라도 자유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나 아니면 남이라도 그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 남을 억압하지 않는 자유란 환상일 뿐이니까요.인류는 그동안 문명이라는 꾀를 동원하여 생태계의 균형과 질서를 파괴하면서 과잉번식을 해왔습니다. 칠십억이 넘는 개체수는 생태계는 물론 인류 자신에게도 재앙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다른 동물에 비해 수천 배나 많은 숫자니까요. 인류의 직접적인 훼손이나 배출하는 공해로 인해 멸종되는 동식물만도 해마다 100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제 인류에게 남은 과제는 파괴하고 오염시킨 자연에 대해 참회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닥쳐올 종말을 멈추고 지속가능한 삶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꺼병이들을 걱정하는 나보다는 고양이가 훨씬 이 숲에 잘 어울릴지 모릅니다. 벌써 숲의 일원으로 먹이사슬의 한 축을 루고 사는 것 같으니까요. 고양이가 꺼병이들을 잡아먹어도 꿩의 개체수는 아마도 적당 선에서 유지될 것입니다.

2016-07-08

한 청개구리의 특별한 여행

▲ 강길수 수필가 “제발 하루라도 더 살아다오!”“하늘아, 구름아 비를 내려다오!”콘크리트 옹벽 옆에 서서 삼사 미터 아래 있는 갈대밭을 보며 한 혼잣말이다.“어! 이게 뭐야.”빗자루로 차 화물칸을 쓸어내며 저절로 나온 소리다. 열무 잎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는데 그 속에서 청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 뛰어올랐기 때문이다.간밤에 어머님 기제사 모시러 고향집에 다녀왔다. 어제 저녁 무렵, 고향에서 제수씨와 아내가 소나기에 젖은 열무를 뽑아 골판지 상자에 넣어두는 것을 보았다. 청개구리의 특별한 여행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향을 출발하며 열무상자를 차에 싣고 왔었다. 아침 출근길에 차창으로 열무 잎 몇 조각이 화물칸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빗자루를 가져다 화물칸을 무심코 쓸어내렸다. 한데, 열무 잎 조각으로 보이던 것 중 하나가 청개구리였다니.청개구리를 잡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도망가려 하지 않는다. 등이 조금 말라 보였다. 불쌍한 마음이 든다. 잠시 갈등에 빠졌다. 길 건너 유수지(遊水池)에 놓아주면 좋겠으나, 거의 매일 먹이를 찾아오는 조류들이나 다른 포식자들의 먹이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그래서 마당 앞 농경지에 놓아주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작년에는 사료용 수수를 재배했는데, 바닥이 연중 젖어있었다. 올해는 휴경이다. 조심스럽게 청개구리를 갈대가 우거진 쪽으로 던져 놓아주었다. 청개구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청개구리는 외롭고 낯설테지만, 우거진 새 갈대밭과 어우러져 잘 살기를 바랐다.올해는 웬일로 가물까. 농경지의 풀들도 가물을 탔다. 청개구리가 걱정되었다.마당에 작업을 한다는 여직원의 말에 내려가 보았다. 청개구리를 놓아 준지 두 주쯤 지난 때였다.성토 차량이 통행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순간, 이 낮은 농경지가 거대한 청개구리의 무덤이 될 것이란 마음이 들었다. 저절로 이런 기도가 마음 가득 물들였다.“청개구리야! 제발 차가 안다니는 밤에 저 길을 건너 유수지로 탈출하려무나. 네가 생매장 당하기보다는 살 수 없다면 백로에게 먹혀 하늘을 날아보는 게 낫지 않겠니? 지금 네 앞에 죽을 위험이 닥치고 있단다.”청개구리는 이런 내 기도에 어떻게 응답했을까?“고마워요. 아저씨! 가뭄 끝에 오는 소나기가 너무 좋아 전 열무 잎을 타고 목욕 마치고 잠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아저씨네 차 화물칸이었어요. `이젠 죽었구나!` 생각했는데, 아저씨가 살려주어 물설지만 갈대밭에서 잘 지냈어요.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제가 바로 아저씨의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우리 동물들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보는 게 평생소원이거든요. 그래서 전 여기 그냥 살래요”라고 했을까. 아니면,“아저씨, 고마워요! 아저씨 차 화물칸에 실린 열무 잎을 타고 노는데 깊은 밤이 되자, 차는 제 고향 산골을 떠나 울긋불긋한 불들이 별빛처럼 빛나는 도회에 도착했지 뭐에요. 그 빛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데, 열무를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는 바람에 저는 바닥에 떨어졌지요. 전 살려고 죽은 듯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아저씨는 직장에 출근 했고, 저를 모르고 빗자루로 쓸어내렸어요. 제가 죽을 것 같아 달아나니까 잡아서 갈대밭에 살려주셨어요. 그래요. 전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싶어요. 전 오늘밤 저 유수지로 건너가겠어요”라고 했을까.내가 아는 청개구리의 특별한 여행은 여기까지다. 그 이후 청개구리의 운명을 알 수가 없다. 마치 나 자신이나 모든 존재의 운명처럼.

2016-07-01

유월의 노래

▲ 김병래수필가 유월의 아침 공기를 깨치며 뻐꾸기소리 들린다. 도라지꽃 산나리꽃이 마침내 꽃망울을 터뜨리듯, 초여름 이 산 저 산에서 뻐꾸기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시골에서 오래 살다 보면 사람의 오관(五官)이 자연의 변화에 민감해진다. 초여름의 한낮은 뭔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섭씨 30도를 육박하는 더위와 숨가쁘게 부풀어 오른 녹음방초들로 산과 들의 한껏 고조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질 즈음, 터질 듯 한 긴장감과 조바심을 깨뜨리며 드디어 뻐꾸기가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뻐꾹 뻐꾹 뻑뻐꾹 뻑꾹….동양화의 여백이 그림 속의 풍경을 더욱 그윽하고 운치 있게 하듯, 뻐꾸기 소리는 녹음 우거진 유월의 풍경을 한결 고즈넉하고 시정(詩情)이 넘치게 한다. 태양의 열기와 녹음의 울창함에는 반드시 뻐꾸기 소리를 더해야만 하나의 완성된 여름 풍경이 되는 것이다. 마치 조명과 배경이 아무리 좋아도 음향효과가 빠져서는 완전한 영상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뻐꾸기 소리는 수컷이 짝을 부르는, 그러니까 연가(戀歌)인 셈이다. 대개의 조류들처럼 뻐꾸기도 수컷이 노래를 불러 암컷들을 유혹한다.암컷들은 고작 `뿟, 삣, 삐이` 정도의 소리를 내는 것이어서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뻐꾸기 소리는 모두 수놈들의 소리인 것이다.녹음 우거진 여름 한낮을 짝을 찾는 수컷들의 애절한 노래 소리가 이 산 저 산을 메아리 칠 때, 암컷들은 숨을 죽이고 그 연가들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리라. 그리고는 마음을 끌고 영혼을 뒤흔드는 노래 소리의 임자를 찾아가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하리라.여기까지는 얼마나 낭만 적인가! 짝을 찾고 선택하는 기준이 오로지 한 소절의 연가뿐이라고 할 때, 그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일 것인가. 인간 세상에도 그 제도(?)를 도입해서, 남자는 결혼 적령기가 될 때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기울여 한 편의 시를 짓고 여자는 또 시를 보는 안목을 길러서, 그 한 편의 시에 담긴 사랑과 진실과 아름다움을 배우자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아마도 살다가 등 돌리고 갈라서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그런데, 뻐꾸기가 스스로 둥지를 짓지 않고 다른 새들의 둥지에다 탁란(托卵)을 해서 새끼를 키운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뻐꾸기 새끼의 유모로 선택되는 불행한 새들은 주로 개개비, 때까치, 멧새, 할미새, 종달새 등인데, 그들이 둥지를 틀고 산란할 때를 엿보고 있다가 주인이 둥지를 비운 사이에 그 알 중에 하나를 먹어버리고 제 알을 대신 낳아 놓는다.그런 줄도 모르는 가짜 어미 새는 열심히 알을 품는데, 제일 먼저 알에서 깨어난 뻐꾸기 새끼는 나머지 알들마저 둥지 밖으로 밀어내어 떨어뜨려 버리고 가짜 어미가 물어오는 먹이를 독식하면서 무럭무럭 잘 자란다는 것이다.무려 3, 4 주 동안이나 자기보다 몇 배나 덩치가 커지도록 남의 새끼를 위해 허겁지겁 먹이를 물어다 나르는 유모의 정성과 수고를 정작 어미 뻐꾸기는 모른체하고 있다니 세상에 이런 파렴치가 있는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지만, 일찍이 노자(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했던가. 그것에도 우리가 다 헤아리지 못하는 섭리가 있는 거라고 믿을 수밖에….딸의 소리에 한이 서리게 하려고 일부러 눈을 멀게 했다는 소리꾼의 얘기가 있듯이, 탁란의 숙명이 뻐꾸기소리를 더 애절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뻐꾸기의 구애 이벤트에 산천초목이 다 가담을 했으니 모두가 공범이라고나 할까.

2016-06-24

붉은 맛에 물들다

▲ 김주영수필가 새벽 바다의 파도 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지난 밤 세차게 불던 바람이 잔잔해졌다. 일출사진을 찍으러 바다를 찾았다. 캄캄한 어둠속의 기다림은 설렘이다. 설렘은 붉게 눈으로 가슴으로 스며든다.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를 이기고 돌아오는 어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항구에 서 있는 여자아이와 아주머니를 바라본다. 귀항하는 배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바람이 거세었던 지난밤에 모녀는 얼마나 가슴 조이며 기다렸을까. 나는 슬그머니 사진기를 가방에 넣었다. 사진 찍는 것을 포기하고 그들을 바라본다. 여자아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 마다 연신 웃어주었다. 배 한척이 도착하자 여자아이는 항구 쪽으로 뛰어갔다. 사라져가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느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만선의 꿈은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저 가족이 함께 마주앉는 온기 넘치는 밥상은 얼마나 달고 감사한가.생각이 여유롭지 못할 때 바다를 찾는다. 먼 바다에서 밤을 지새우고 돌아오는 고깃배들, 뱃고동 중저음소리에 마음이 고요해진다. 바다는 늘 나에게 넉넉함을 안겨준다. 나는 바다가 좋다. 그 중에서도 구룡포 호미곶 앞 바다를 좋아한다. 새벽 일출은 물론 오후의 일몰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해안 어디서든 일출을 볼 수는 있지만 일몰을 보기란 쉽지 않다. 호미곶은 일출과 일몰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해 지는 시기에 따라 독수리바위가 해를 품는 풍경도 만날 수 있다.서쪽 하늘이 붉게 빛난다. 붉고 화려하게 물드는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뜨겁던 여름 한 낮의 시간들이 형형색색으로 흩어지는 빛의 채색이다. 저 화려한 빛이 사라지면 곧 어둠이 내리겠지 생각하는 순간, 숙연해진다. 하루가 조용히 저물고 있다. 내가 스쳐 지나온 시간과 걸어갈 시간을 생각하게 하는 붉은 노을이다. 뭉게구름들 위로 노을이 번졌다 사라진다.유년의 기억 속으로 다시 붉게 번진다. 해넘이 바다는 그리움이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릴 때였다. 아버지 등 뒤에 그려진 붉은 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시작되는 과정은 매순간 매혹적인 시간이다. 하늘에서 시작한 붉은색은 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붉게 물든 바다가 점점 옅어지면 어둠이 찾아온다.어두워지기 시작하니 허기가 느껴진다. 바다에 오면 늘 물회가 먹고 싶어진다. 포항의 겨울 별미가 과메기라면 여름 별미는 물회다. 물회는 주재료가 싱싱한 생선이니 더위에 지쳤을 때 입맛 돋우는 음식이다. 도다리, 광어, 오징어, 전복 등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물회 이름이 달라진다. 밥과 함께 먹지만 국수와 함께 먹으면 그 맛 또한 감칠맛난다. `생선회를 어떻게 물에 말아 먹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생선회를 찬물에 말아먹으면 살이 쫀득쫀득해져서 식감이 살아난다. 매콤하고 담백한 맛을 알고부터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어렸을 적, 아버지는 장날이면 싱싱한 횟감을 사와서 물회를 해주셨다. 한 숟가락 떠 먹여주시던 그 붉은 국물 맛은 어른이 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매콤하면서 달콤한 그 맛. 입맛이 없을 때 새콤달콤한 물회가 먹고 싶어진다. 물회는 아버지가 요리해주신 사시사철 보양음식이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의 물회는 먹을 수 없다. 고추장 붉게 푼 얼음물에 회를 넣어 말아주시던 아버지의 그 손맛이 그리운 날이다.새벽 어둠속에서 붉게 떠오르는 동해의 일출이 설렘이라면 태풍이 지나간 바다에 붉게 채색된 노을은 그리움이다. 잠시 멈춰 그리운 것에 붉게 물들어 보았다. 밤바다를 거닌다. 방파제에는 밤낚시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바다냄새가 코끝에 시원하게 머문다. 붉은 맛에 물든 하루다.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무더운 여름도 살맛난다. 눈과 귀는 정화되고 입맛도 되찾은 하루다. 삶의 오감을 깨우는 붉은 맛에 물들고픈 날에 다시 바다를 찾을 것이다.어둠이 내리면 등대의 불빛이 바다에 물든다. 빛의 경계에 서서 다시 생(生)에 붉게 물들어 본다.

2016-06-17

인재(人災) 후렴

▲ 이순영 수필가운전면허증을 갱신했다. 절차에 따라 먼저 시력검사를 했다. 스푼처럼 생긴 눈가리개로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 눈으로 시력 측정 판을 보았다. 검사관이 가리키는 숫자와 그림이 두 겹 세 겹으로 일렁거리더니 어느 순간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답답함과 당황스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와 얼른 눈을 가렸던 가리개를 떼고 측정 판을 보니 잘 보였다. 나의 행동을 본 흰 가운을 입은 검사관은 번개같이 `그렇게 하면 불합격 처리합니다.`라고 말했다. 기계처럼 냉정한 그 말에 겁이 덜컹 났다. `불합격`에 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시 검사관이 하는 지시대로 착한아이처럼 왼쪽 눈, 오른쪽 눈을 가리고 보이는 대로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결과는 오른쪽 눈은 영점 팔, 왼쪽 눈은 영점 오란다.오른쪽 눈에 의지해서 운전을 하고 있는 셈이니 매우 위험하다는 말과 함께 양쪽 눈의 시력이 차이가 많으므로 안과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은 후에 안경을 반드시 쓰고 운전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안경을 쓰니 앞이 환하게 보인다.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니 안전하게 운전을 할 수 있다. 비 내리는 날 밤길운전도 불편함이 거의 없다.어머니께서 백내장 수술을 하셨다. 어머니는 의사선생님께 양쪽 눈을 한꺼번에 수술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의사선생님은 수술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만분의 일이라도 잘못 될 수 있어요, 의사는 만분의 일의 실수로 볼 수 있지만 환자는 백 퍼센트 실패인거예요. 완전실명이 될 수도 있으니 한쪽 눈을 먼저 하고 안정이 된 후에 다른 한쪽 눈을 마저 하자고 했다. 완전실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어머니의 표정은 긴장이 역력했다. 정해진 날에 왼쪽 눈을 먼저 수술한 후, 안대로 눈을 가리고 오른쪽 눈에 의지하여 생활했다.오른쪽 눈을 수술하고는 왼쪽 눈으로 산천초목을 보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가벼운 여행도 할 수 있었다.어머니는 불편한 기간이 오래되더라도 의사선생님의 말 듣기를 참 잘 했다고 한다.또 인재(人災)다.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열아홉 살 청년이 희생되었다. 우리의 아들이 밥 먹을 틈도 없이 혼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참변을 당했다.2인1조로 현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매뉴얼은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매뉴얼과 시스템을 운운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도 유리 상자 속에 갇힌 박제가 되려는가.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못하는 형국이 언제까지 이어지려는가.행정안전부를 안정행정부로 바꾼 까닭은 무엇일까. `안전`을 명칭의 첫 글자로 앞세워도 효과는 크지 않는가보다. 안전한 사회를 원한다면 단순화가 특효약이 아닐까 싶다. 개인이든 단체든 안전규정을 어긴 책임자는 예외 없이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그들을 엄정하게 감독하면 통탄할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나. 또 사고의 뒷수습을 공식처럼 되풀이만 하려나.각계에서 진실을 규명하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한다고 야단일 것이고, 몇몇 사람만이 처벌을 받을 것이고, 처벌 받은 이들은 관행과 억울함 사이에서 가슴을 두드릴 것이고, 솜방망이 처벌에 힘없는 서민은 분노할 것이고, 이어서 여론이 들끓을 터이고, 백성들은 슬퍼하며 희생자를 추모할 것이고, 그곳에는 리본이 꽃잎처럼 바람에 나부낄 것이며, 마침내 잊어지고 고요해지리라.자연재해도 미리대비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거늘 하물며 인재임에랴. 후렴구만 언제까지 목청껏 외칠텐가.

2016-06-10

잔칫집

▲ 손달호 수필가이제 어지간히 헤맸나 보다. 회귀 본능 같은 것을 자주 느낀다. 예식장 뷔페에서 고급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는데도 허전하다.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이들도 같은 정서일 것이다. 귀소성은 훗날 거개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 같다. 옛날 도장간에서 받았던 잔칫상은 보통 집에서 먹던 밥상하고는 달라 애최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윗말 할머니가 부조한 감주가 혀를 감치고는 목구멍으로 꿀꺽해 버렸다. 토종 메밀묵을 젓가락으로 집기가 간지러웠다. 놋젓가락과 메밀묵이 겉도는 것 같다. 메밀묵을 초고추장에 묻히면 입안에서는 침이 곤두박질한다. 쫄깃한 잔치 국수를 빼놓으면 잔칫집에 온 기분이 안 날 것이다. 가마솥에서 우려낸 멸치 다시 물에 국수 한 줌 적시고는 양념간장을 얹어 준다. 비싼 재료도 안 쓰고, 별난 요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국수만의 풍미는 잔칫집의 터줏대감이었다. 요즘 아무리 느껴 보고 싶어도 좀처럼 그 맛을 만나기 어렵다. 옛날의 잔치 국수는 여전히 물음표다.씩씩거리며 도장을 빠져 나오면 마당에는 교배례가 시작되었다. 사모관대를 두른 신랑이 정중히 엎드리면 신부의 족두리가 땅바닥에 닿으며 백년가약을 다짐한다. 시자가 받쳐 든 모형 기러기가 두 사람의 금슬이 어떠해야 함을 귀띔한다. 초례상 위에서 교배례를 지켜보던 송죽(松竹)이 쪽빛으로 화답한다. 당가 집 떠꺼머리 머슴이 눈알을 반들거리며 침을 삼킨다. 군침이 도는 색다른 눈요기다. 집례의 창홀 소리가 뒤란에까지 무겁게 깔린다.합근례를 끝으로 상을 물리면 구경꾼들 속에서 폐백이 이어진다. 폐백상에 놓인 삼실과에 윤이 난다. 열매를 주렁주렁 다는 대추는 자손의 흥성을, 밤은 자손에 대한 조상의 내리사랑을, 접을 붙여서 생산되는 감은 혼인을 의미한다는 말씀을 잔칫날 어른들로부터 듣는다.폐백을 보고나면 어김없이 새신랑 다루기로 접어든다. 얼굴에 숯검정을 바르고는 뒤로 넘어뜨려 발바닥에다 매를 친다. 장모를 불러 감춰 뒀던 음식을 꺼내오게 함이다. 새신랑 입에서 첫 `장모` 소리를 이끌어 내는 것도 이 때다. 사위에게 매를 칠 때 안절부절못하는 장모의 안달을 놀이꾼은 즐긴다. 큰손 치려고 다락방에 숨겨 두었던 등심살, 육회, 문어, 치자로 물들인 갖가지 전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위가 맞는데 상객인지 뭔지 장모 눈에는 뵈는 게 없다.오늘 최신식 고급 예식장에 가서 축의금을 내밀었더니 답례로 봉투를 줬다. 점심 식사로 대체하는 모양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받고는 바로 옆 실로 옮겨간다. 그렇다. 또 다른 집의 하객으로 가야 되는 것도, 축의금으로부터 봉투를 건네받는 모습도 이젠 어색하지가 않다. 수모가 안내하는 판에 박힌 폐백은 통과의례에 불과하니 고유한 폐백 문화를 지켜보는 구경꾼도 없어졌다.갑자기 로비에 와글대는 하객들이 다 축의금으로 보인다. 옛날 정성껏 부조한 감주나 곡주가 지금은 봉투로 해결되는 시대에 나는 서 있다. 정성이나 인정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예식장 안은 규격품, 기성품으로 채워져 있다. 뷔페 문화는 이것의 극치다.옛날 잔칫집은 다양한 문화가 숨 쉬는 날이었다. 유가의 품격이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입체적 풍속을 후손들에게 보여주는 날이기도 했다. 옛 어른들은 말씀으로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합일을 중시했다. 초례상이나 폐백에 담긴 의미를 어른들이 들려주는 것은 이것의 실천적 모습이었다. 손수 담근 술로 신명을 풀었던 잔칫날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날이었다.예식장에서 볼 일을 마친 나는 주머니 속의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순간, 옛날 잔칫집에서 듣던 집례의 홀기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부선재배(婦先再拜), 서답일배(壻答一拜)`.

2016-06-03

금단현상

▲ 김병래수필가·시인 담배를 끊은 지 몇 달이 지나도록 흡연욕구가 가시지를 않는다. 오랜 세월 담배연기에 절고 찌든 체질을 원상회복하기란 쉽지 않을 터이니 금연의 괴로움을 아주 떼어놓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 같다. 담배를 끊기 어려운 것은 물론 중독성 때문이다. 장기간 지속적으로 흡연을 하게 되면 니코틴에 만성중독이 되고, 그것을 갑자기 중단하거나 사용량을 급격히 줄이면 금단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지속적으로 음용하던 물질을 갑자기 중단하거나 줄일 경우 발생하는 생리적이나 심리적 반응을 금단현상이라고 하는데, 술이나 담배와 같은 기호품이나 각종 향정신성 약물들을 끊었을 때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중독성 때문이다.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중독이란 말이 쓰인다. 도박중독에서부터 게임중독, 쇼핑중독, 심지어는 일중독이란 말까지 있다. 요즘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스마트폰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그 역시 중독이라 할 수 있다. 돈이든 권력이든 종교든 오락이든 그것에 빠져들어 헤어나지를 못하면 중독인 것이다. 당연히 끊기가 어렵고 갑자기 중단하면 금단현상을 일으키게 마련이다.금단현상은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술이나 마약, 도박 등을 끊지 못한 채 결국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특히나 청소년들의 인터넷 게임중독도 이젠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가 되었다. 언젠가 게임에 중독된 중학생이 게임을 못 하게 하는 어머니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도 극단적인 금단현상의 한 예가 될 것이다. 호기심이나 치기로 가볍게 시작한 것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집착을 하게 된 경우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이 만성중독의 일반적인 현상이다.중독이 성실이나 열정과 잘 구별되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신념 따위에 중독이 된 경우가 그렇다.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대단한 성실과 의지로 인식되어서 존경받을 만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상당한 재물이나 권력, 명예 등을 성취하고 외관상 성공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때문에 정서가 고갈되고 인성이 피폐해지는 등 다른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의지가 꺾이고 성취의 길이 막혔을 때 극심한 금단현상을 겪게 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중독이냐 아니냐는 집착의 정도로 알 수가 있다.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으면 물론 중독이 아니다. 가진 것을 잃거나 좌절했을 때 그 충격과 혼란에서 헤어날 수가 없으면 중독을 의심해도 좋을 것이다. 담배를 즐기면서도 무병장수 하는 사람에겐 니코틴중독이 별 문제가 없듯이 중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집착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흡연욕구를 참아야 하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담배에 맛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겪을 필요가 없는 괴로움이다. 사람이 겪게 되는 괴로움이 대부분 그렇다. 애초에 탐욕하고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는 괴로움이 의외로 많은 것이다.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도 마약 못지않은 중독성이 있어서 그것에 연연하고 집착할수록 붙잡기 위해 노심초사하게 되고, 욕망이 좌절되거나 얻은 것을 잃었을 때 견딜 수 없는 충격과 고통을 받게 된다.그렇다고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꿈과 열정과 노력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할 뿐이다. 다만 무엇에건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과도하게 욕심내어서 중독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욕망에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금단현상이 주는 교훈이다.

2016-05-27

매실차

▲ 김주영 수필가 매실을 깨끗이 씻어 채반에 받쳐둔다. 청매실과 황매가 반반이다. 꼭지를 따고 상처 난 것들을 골라내고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린다. 매실의 무게만큼 설탕을 준비한다. 유리병에 매실을 한 켜 넣고 그 위에 설탕을 넣고 켜켜이 매실과 설탕을 담는다. 맨 위쪽에 남은 설탕을 모두 붓고 뚜껑을 닫아둔다. 날짜를 적어 통에 붙이면 올해의 매실담기의 첫 과정은 끝이다. 이제 매실과 설탕이 적당히 녹아서 발효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처음에는 매실에 설탕이 녹는 것을 바라본다. 설탕이 녹고 그 녹은 물에 매실이 절여진다.몇 해 전 담아둔 매실로 차 한 잔을 만들어 마신다. 설탕과 매실, 서로 다른 두 성질이 서서히 스며드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으니 벗 생각이 난다. 매실차를 유난히 좋아하는 그 친구와의 인연의 시간을 생각해본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서로의 생각들은 단단한 덩어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의 생각들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서로 참 많이 닮아있다. 비슷하니까 어울리지 하고 말을 하지만 우리 둘은 결코 비슷하지도 닮지도 않았다. 서로의 생각이나 주장은 늘 다르다. 하지만 어떤 일과 문제를 해결했던 과정을 가만히 되짚어 보면 매실이 익어 가는 과정과 참 많이 닮은 듯하다.어떤 문제점이 생겼을 때 서로의 생각들이 양보가 없으면 결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양보하는 마음은 매실이 숙성되어가는 과정에서 공기가 필요한 것과 닮았다.몇 해 전 매실을 담을 때 일이다.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베란다 유리창이며 벽이 설탕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매실담은 통 하나가 폭발했다. 뚜껑은 열려있고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온 사방으로 튀어있었다. 베란다에 놓아둔 몇 개의 통에서 유독 하나가 왜 폭발했을까? 베란다 청소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통만 공기가 통하지 않게 꼭 닫은 것이 원인이었다. 매실 액을 만들 때 뚜껑을 꽉 닫아도 문제지만 또 너무 느슨하게 풀어놔도 문제가 된다. 뚜껑을 느슨하게 열어두면 설탕이 쉽게 녹는다. 녹는 과정에서는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설탕 녹은 물에 매실이 푹 절여질 쯤 달달한 향이 진해진다. 하지만 그 달콤한 향에 초파리들이 침투를 한다.매실 액을 만드는데 매실과 설탕의 촉매 역할은 공기와 빛이다. 넘쳐도 모라지도 않아야 한다. 빛이 넘치면 신맛이 강해지고 공기가 넘치면 초파리가 생긴다.친구와의 만남에서 촉매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시간과 배려이다. 처음 만났을 때 서로의 생각들은 매실처럼 단단한 알맹이다. 두 생각들이 부딪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는 배려와 시간이 필요했다.공기는 나와 친구의 관계에서 배려이고 빛은 시간이다. 생각들이 부딪칠 때 각자의 주장만 강조하면 그 의견들은 조율 할 수 없다. 생각은 한쪽으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매실 액을 담을 때 설탕도 적당히 들어가야 제 맛이 나듯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적당한 것이 좋다. 배려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친구의 생각이 자신과 다른 걸 알면서 배려가 넘쳐 잘못된 판단인줄 알면서도 내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적당한 배려와 시간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매실 액을 만드는 첫 과정에서 설탕이 녹기 시작할 때 거품이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설탕이 어느 정도 녹으면 고요해진다. 사람의 인연도 그러하다.매실이 빛과 시간에 잘 숙성되어가듯 나도 벗과 배려와 시간 속에 성숙되어 왔다. 시간이 흐르고 그 의견들이 조율되면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달달한 우정이 생겼으리라. 매실차 한 잔 마시러 오라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찻물을 준비하는 마음이 바빠진다.

2016-05-20

저녁

▲ 차성황수필가 순대 같은 골목길 안이 어둠으로 꽉 채워졌다. 허리가 꾸부정해진 늙은 나무 가로등이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불을 밝혔다. 아버지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늘 똑같은 노래였다. 특정한 가사부분만 무한 반복하여 부르셨다. 때로는 구슬프게 부르시다 어떨 때는 군가처럼 목소리를 높여 부르셨다. 아버지의 노래는 언제나 희미한 가로등 불빛과 술에 절어 있었다.달이 산을 딛고 서 있었다. 사무실의 창문들도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였다. 하루 온종일 의자 속에 묻어 두었던 하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고단함이 발끝까지 전해졌다.동료들이 하나 둘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여기저기 사무실의 불빛들이 도미노처럼 꺼져갔다. 바로 옆 사무실에는 전구들이 박쥐처럼 까맣게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퇴근을 결심하였다.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귀신같이 찾아오는 배고픔이었다.아버지의 늦은 퇴근은 무서운 저녁으로 기억되었다. 세상의 부당함과 당신 삶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오셨기 때문이었다. 잠자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잠을 다 깨우고 장남하며 나의 볼에 입맞춤을 하셨다. 지독한 술 냄새와 까칠하고 따가웠던 굵은 수염의 공포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의 퇴근과 저녁이 무서웠다.카톡하는 소리가 반갑다. 객지에서 생활하는 두 딸들이 언제부턴가 내 퇴근시간에 맞추어 카톡을 보내오기 시작하였다. `아부지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아부지 아부지 우리 아부지 힘내세요` 같은 내용이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내가 처음 보는 우스꽝스러운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 와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이들과 소통하는 저녁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다.나는 결코 아버지와 같은 저녁을 보내지 않으리다. 내 아이들에게 공포스럽고 무서운 저녁의 기억은 남겨주지 않으리다.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약속이었다. 술을 달고 오지 않는 퇴근길, 세상의 고단함까지 나와 함께 현관문을 넘지 않는 그런 저녁을 다짐하였다. 출근이 뿌듯함이라면 퇴근은 고마움과 감사함이었다. 아침이 희망이라면 저녁은 그 희망을 다시 정비하고 새롭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며 기회였다.이제 결혼생활 26년에 오십 대 후반이 되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나도 아버지가 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보니 내 아버지의 퇴근길과 저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한 아버지의 고단한 저녁들이 지금의 밝은 내 저녁을 가져다 주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휴대폰 벨이 울린다. 마눌이라는 글씨와 함께 아내의 목소리가 이내 귀에 가득해졌다. 늘 하는 이야기다. 마누라 보고 싶어도 천천히 운전조심 하란다. 아내의 목소리 너머로 보글보글 김치찌개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은 아내의 손 맛 때문에 더 행복해진다.달이 아파트 22층 옥상 위에 걸터앉아있었다. 아까 사무실에서 봤던 그 달이었다. 29년째 하는 퇴근길이지만 늘 새롭고 즐겁다. 아침에 나가서 다시 돌아오게 해주는 마법 같은 시간이 저녁이다.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오겠다고 한 가장의 약속을 지켜주는 것 또한 저녁이다. 퇴근이 좋고 저녁이 고맙다.오늘 저녁에 다시 한 번 약속하였다. 아버지처럼 치열하고 열심히 살더라도 아버지와 같은 저녁, 아버지와 같은 퇴근길은 결코 흉내 내지도 않으리다. 그것이 팔순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의 소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내일 저녁 아내의 반찬이 기대되고 두 딸의 카톡과 새로운 이모티콘이 벌써 궁금해지는 저녁이다.

2016-05-13

인연

▲ 김종숙수필가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이 되었다고 아들이 짐을 챙기며 준비를 했다. 엄동설한의 칼 같은 바닷바람에 고생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자며 말렸다. 중개사 자격증도 있으니 내 사무실에 와서 일을 배우라고 했다. 잠을 설쳐가며 취득한 자격증 썩히지 말고 아버지 사무실에 보기 좋게 걸어놓자고 설득을 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아들이 생각할 시간을 달란다. 하룻밤을 자고 나더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는지 중개업에 대한 업무를 이것저것 물어본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건설회사에 가지 않고 아버지 일을 도우며 열심히 배우겠다고 했다.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는 아들이 여간 반갑고 든든한 게 아니었다.따뜻한 봄날 여성 손님 두 분이 부동산에 관련하여 상담을 하러왔다. 상담을 마치고 나가는 손님에게 옆자리에 있던 아들이 벌떡 일어나 잘 가시라는 인사를 하니 손님이 돌아보면서 총각이 참 좋다고 했다. 뒤따라 배웅하던 내가 그럼 저 총각 중매 한번 해 보라고 되받았다. 나가다 말고 돌아선 손님이 우리도 딸이 있단다. 그럼 멀리 갈 것 없이 따님 한 번 보자고 했다. 딸은 타지에 있어 방학이라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 기다릴 테니 따님이 오면 연락을 주시라고 다짐을 하고 3개월을 기다렸다.무더운 여름날 그 손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멀리 있는 딸이 고향에 왔다며 아들과 한 번 만나 보자고 한다. 친구들과 해수욕장에 놀러간 아들을 불렀다. 땀을 뻘뻘 흘리는 아들을 데리고 약속 장소로 갔다. 그 손님은 예쁜 딸과 함께 와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고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인의 장단점이랑 미래에 대한 계획들을 물어보았다. 대답을 하는 말씨와 태도를 눈여겨보니 며느릿감으로 손색이 없을 것 같아서 둘만이 시간을 갖도록 해 주었다.둘이서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헤어졌다는 아들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었다. 예쁘고 야무지고 성품도 좋은 것 같으니 한 번 더 만나 보라고, 여자는 한 번을 봐서는 모르는 거라며 채근을 했다. 손님에게 아가씨 한 번 더 보자며 연락을 하였다. 학교로 갔다며 그럼 겨울방학 때 다시 한 번 만나자고 하여 그러자고 했다.연말이 되어 먼저 전화했다. 아직 딸이 오지 않았는데 오는 대로 연락을 하겠단다. 얼마 후에 그쪽에서 연락이 왔다. 아들과 아내를 대동하고 약속 장소로 갔다. 이번에는 데이트를 길게 해봐라, 짧은 시간에 여자의 소양을 다 알 수 없다. 여자는 행동과 교양과 지식이 함께 갖추어져야지 지식만 있어도 안 되고 예쁘기만 해도 안 된다. 아버지 이야기를 참고하라며 거듭 당부했다. 함께 다녀온 아내가 다 좋은데 키가 좀 작다며 아쉬워했다. 100%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우리 분수에 그만하면 차고 넘치는 며느릿감이라고 했다.고흥과 포항으로 서로 근무지가 다르다 보니 견우와 직녀처럼 동서를 오가면서 일 년이 지났다. 서로에 대해 충분히 교감을 한 다음 두 집 가족들이 다시 모였다. 부족한 것은 서로 이해하고 상의하면서 열심히 잘 살기를 바라며 뜻을 모았다. 일가친척과 지인들의 축복 속에 혼례를 치렀다. 근무지가 달라 한 달에 한두 번 만나기도 힘든 어려움이 있었는데, 일 년 후에 며느리가 포항으로 직장을 옮길 수 있게 되어 드디어 온전한 신혼살림을 차리게 되었다.며느리가 포항으로 옮겨오자 금세 손자가 태어났다. 아내가 애지중지 그 손자를 키웠다. 연달아 또 손자가 태어나고, 우리 부부는 복덩이가 셋이나 덩굴째 굴러들어 왔다며 행복감에 힘든 줄을 몰랐다.며느리 역시 요즈음 젊은 사람 같지 않게 효도를 잘한다. 고등학교 교사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을 해서 힘들고 피곤한 중에도 매일 양가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를 거르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며느리를 늘 고마워하면서 가족의 기념일 때마다 혼자서 음식을 준비해 두 집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그러다 보니 사돈끼리 한 달이 멀다하고 만나게 된다.멀고도 가까운 게 사돈지간이라지만, 이제는 친구처럼 가족처럼 부담과 허물이 없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라 인연이라는 걸 특별히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과분한 은총으로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2016-04-29

재래시장

▲ 손달호 수필가 죽도 재래시장에 갔다. 뿌연 새벽인데도 시장 골목이 왁자지껄하다. 장날, 무싯날이 없는 소문난 죽도시장답다.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푸짐하여 마음이 발걸음을 따돌리고 저만치 앞서 갔다. 쫀득한 강냉이를 까먹으며 장 구경도 좋았고 양념 냄새 풋풋한 국수도 사 먹을 수 있어 더욱 신났다. 내 수준엔 이런 재래시장 풍경이 언제나 잘 맞다.아침 공기에 목청이 트인 채소 장수 아주머니의 신바람 나는 노랫소리에 지나가던 손들이 몰린다. 감자, 오이 장사 아주머니도 곁에서 질세라 적재 칸에 올라 앉아 호객에 열을 올린다. 싱싱한 미주구리 파는 할머니의 손길은 이미 바빴다. 마디 굵은 손가락 사이로 집은 것의 반쯤은 흘러내리고 아슬아슬하게 걸린 두어 마리를 덤으로 주면서 덕담까지 건넨다.“무 썰고 미역 좀 넣고 무쳐서 자셔 보라고, 내가 막 퍼 준다 아이가.“어느 장사꾼한테서는 사람들이 물건을 잡아당기며 서로 사 가려고 한다. 손은 부지런히 놀리지만 말은 간간이 오갈 뿐이다. 양파가 불티가 난다. 물건 자랑을 떠벌리는 일도, 값을 흥정하는 일도 없다. 장사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으로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풋풋한 종대 끝에 달린 양파가 밭에서 금방 기어 나온 듯하다. 잘 생긴 놈은 말이 필요 없이 스스로 팔려 나간다.보따리, 리어카 사이로 장세를 거두러 다니는 구청 직원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노점 장세는 오백 원이었다. 봇짐장수에게는 밑천이 안 들어가니 결국 소비자에게 그만큼 덕인 셈이다. 물건 값에 가게 세나 인건비가 끼어들지 않기 때문이다.할머니가 팔러온 시금장 단지 앞에 앉아 시금장 담는 특강을 들었다. 구수한 시금장만큼이나 깊은 맛 나는 할머니의 입담이 정겨웠다. 홀로 사시면서 별로 입 다실 일이 없으셨던지, 내가 잘 들어주자 할머니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했다.얼추 십여 분이나 고분고분하게 잘 들어줬다는 값어치로 마디 굵은 손가락에다 시금장을 쿡 찍어 내 입안에 쑤욱 넣어 주셨다. 토속적인 시금장 맛에다 할머니 손가락의 온기까지 빨고 있으니 문득 옛날 외할머니의 향수가 밀려와 시금장 먹은 속이 시큼했다.어느덧 나는 외할머니의 추억에 젖어 있었다. 이럴 땐 할머니의 팔을 붙잡고 선술집으로 들어가 탁주 한 추발로 속을 헹궈내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이 일었다.시장은 우리 삶의 현주소이다. 우리의 정서와 문화가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체감하게도 한다. 성실히 살아가는 서민의 모습에서 희망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그뿐인가. 시장은 소박한 인정이 남아 있는 곳이다. 콩나물 한 옴큼 쓱 집어서 덤으로 얹어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풋고추 몇 개 더 주는 것이 인정이라면, 이것의 실천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요즘 고급 백화점, 대형마트가 성황을 이루고 동네 재래시장이 죽어 간다고 한다. `편리함`에 대한 신드롬이다.더운 날씨에 이 골목 저 골목 다닐 필요 없이 엘리베이터로 한꺼번에 해결된다. 한 곳에서 잡화를 구입할 수 있는 시간의 경제성도 있다. 하지만 비싼 땅, 고급 건물, 수많은 종업원 등은 소비자가 부담해야할 몫이다.새벽 일찍 재래시장에 나가면 생산자로부터 농산물을 받을 수 있다. 밭에서 바로 거둬온, 숨 쉬는 채소들이다. 백화점처럼 비쌀 이유도 없다. 보관대에 넣어 두지 않아 위생을 염려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신선한 것을 싼 가격으로 준다는데 굳이 마트만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땀으로 키운 것을 돈으로 장사하려는 대형마트들. 노지에서 기른 것은 노지에서 사고파는, 인정이 풋풋한 사람살이를 느끼게 해 주는 재래시장을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16-04-22

봄길을 걷다

▲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이웃에 사는 친구와 봄나들이를 했다. 어디라고 목적지를 정하지는 않고 차를 타고 가다가 한적한 시골길에 내려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발길 닿는 대로 한나절을 걸어 다녔다. 길섶에는 파랗게 자란 풀들이 성큼 다가선 봄을 알리고 있었다. 이상기온으로 예년보다 앞당겨진 봄이라고는 하지만 어느새 풀들이 이만큼이나 자랐을 줄이야. 벌써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었고 수양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도 연둣빛 새움이 돋아나고 있지만, 수북하게 자라난 풀빛에서 더 봄을 실감하는 것은 내가 시골 태생인 때문일 것이다.파랗게 자란 봄풀은 농사일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아낙네들은 보리밭 김매기를 시작하고, 아이들은 겨우내 외양간에 갇혀있던 소를 몰고나가 풀을 뜯기는 계절이 온 것이다. 2월 영동에 며느리들 문설주 붙잡고 운다는 말이 있듯이, 봄이란 그렇게 힘겨운 노동의 시작을 의미하던 시절이었다.산자락에는 진달래가 만개했다. 나에게 진달래는 무엇보다 허기를 떠올리게 하는 꽃이다. 진달래꽃을 흔히 참꽃이라고도 하는 것은 아마도 먹을 수가 있는 꽃이라는 뜻일 것이다. 뒤를 이어서 피는 철쭉은 독성이 있어서 먹을 수 없는 것과 구별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춘궁기로 일컬어지던 시절에 나는 배가 고프면 뒷산에 올라가 입안이 퍼래지도록 진달래꽃을 따먹었다. 맛으로 먹어본 게 아니라 허기를 달래려고 먹은 거였다.약간 시큼한 맛이 나는 그 꽃을 보면 지금도 구미가 동한다. 어려운 시절에 많이 먹었던 음식들은 질려서 보기도 싫어지는 법이라는데 나는 왠지 그렇지가 않다. 꽁보리밥이든 진달래꽃이든 세월이 가도 그때의 그 절실함이 그다지 퇴색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같다.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그 식욕이야말로 생의 저 밑바닥에 가 닿는 삶의 절실함이 아니었을까. 친구와 나는 진달래꽃 무더기 앞에서 한참이나 꽃을 따먹었다. 마치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에 대한 허기를 채워보려는 것처럼….저수지 가에 선 버드나무에 파랗게 물이 올라 있었다. 물오른 버드나무가지를 보면 버들피리를 만들고 싶어지는 것도 시골에서 자란 사람의 정서일 것이다.밋밋한 버들가지를 꺾어서 손아귀로 비틀어 속 줄기를 빼내면 굵은 빨대처럼 생긴 껍질이 남는다.그 한쪽 끝을 깨끗하게 잘라서 겉껍질을 살짝 벗기면 그것이 떨판 구실을 해서 버들피리가 된다.버들피리를 만들고 싶은데 칼이 없었다. 깨어진 유리조각이라도 있는가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버들피리 하나 못 만들면 시골내기가 아니다. 어려서 시골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대개 그런 임기응변에는 익숙하다.자기 일은 모두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했던 옛날 시골 아이들이 뭐든지 엄마가 다 챙겨주는 요즘 아이들과 다른 점이다.친구와 맨손으로 버들피리 만들기 시합을 했다. 칼이 없으니 이로 버드나무껍질을 잘라야 한다. 그런데 그 자른 단면이 고르지 않아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내가 먼저 보란 듯이 소리를 냈다. 조금 후에 친구도 성공을 했다.우리는 장한 일을 해낸 아이들처럼 흐뭇해져서 마음껏 버들피리를 불어댔다.버들피리 소리에는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들이 들어 있다. 그 척박했던 삶의 곤고함과 궁핍했지만 질박하고 무구했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그리움의 선율이되어 흐른다.`먼먼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와서 이제는 초로에 접어든 두 남자가 어느 봄날 석양이 내리는 시골길을 버들피리를 불며 가고 있었다.

2016-04-15

냉이

▲ 손진숙 수필가 시장에서 사 온 냉이를 씻는다. 옆으로 벌린 잎에 비해 뿌리는 아래로 벋어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뿌리째 먹는 나물로는 냉이가 으뜸일 것이다. 흐르는 물에 잎을 흔들어 씻은 다음 뿌리를 쓰다듬어 내린다. 긴 겨울, 땅속에서 견뎠을 고난이 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온다. 순탄치 못한 삶을 말해 주듯 살갗이 거칠기만 하다. 제법 큼직한 흉터가 나 있기도 하다. 흉터의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싸한 아픔이 가슴께에 밀려든다. 지난날 내가 겪은 상처의 뿌리도 뽑아내면 이 냉이 뿌리와 닮지 않았을까. 상처 난 뿌리에서 향기가 풀려 나온다.소녀 시절, 이맘때면 이웃 또래들과 함께 냉이를 캐러 다니곤 했다. 가까운 밭이랑을 살피며 캐다가 양에 차지 않으면 아예 들로 나갔다. 때로는 철둑 넘어 산비탈 밭을 헤매기도 했고, 강 건너 마을 과수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것은 여자아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새봄맞이 행사였다. 나물 캐기는 여자아이들이 외출할 수 있는 합당한 명분에 속했다.이른 봄의 속삭임을 엿들으러 나선 발길. 강물이 깨어나는 소리, 햇살이 데워지는 기미, 새싹이 꿈틀대는 기척들과 설레는 만남이었다. 밭이랑에 파릇파릇 움터 있는 냉이를 찾는 일은 앳된 소녀들이 희망의 무지개를 찾는 일이었다.사과나무 아래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계집애들은 눈망울을 탐험가처럼 두리번거렸다. 채 물러가지 않은 추위 속에서 냉이를 발견했을 때의 그 기분이라니. 이른 봄의 차가운 기온도, 멀리서 걸어온 피곤도, 스르르 녹이는 환희였다. 땅바닥에 최대한 납작 등을 맞대고 추위를 견디며 무성히 자라 꽃피울 날을 기다리는 냉이. 그 낮은 기다림 속에 시골 소녀의 꿈이 얼비치기도 했다.할머니는 냉이 나물을 좋아했다. 냉이 나물이 밥상에 오르면 맛나게 먹었다. 내가 마구잡이로 캐 담은 냉이 바구니를 던져 놓고 놀러 가버리면 할머니는 귀찮은 줄 모르고 하나하나 다듬었다. 흙을 털어내고, 떡잎을 떼어내고, 잔뿌리를 잘라내어 말끔한 새 인물로 바꾸었다. 활동이 어려워 적적하던 할머니의 소일거리로 안성맞춤이었을까. 할머니는 냉이를 다듬으며 지나가버린 봄날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쳤는지도 모른다.냉이를 살짝 데쳐 물에 담가 둔다. 저녁 식탁에 올리려고 나물을 무치려다 보니 담갔던 물이 냉이의 잎보다 더 진한 초록빛이다. 어디서 그런 고운 빛이 나왔을까? 초록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눈을 뗄 수가 없다. 한참만에야 주방의 좁은 창으로 하늘을 내다본다. 연청색 하늘 자락에 구름 조각들이 냉이꽃처럼 피어나 있다.냉이 무침을 식탁에 올려놓으니 집 안에 향내가 넘친다. 들판의 봄이 실내에서 활짝 기지개를 켜는 듯하다. 그 향기로운 맛을 본 가족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오늘, 시장에 들러 냉이를 사온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가족들의 냉이꽃 같은 미소를 바라보는 마음이 뿌듯하다.냉이 무침에 절로 젓가락이 간다. 입 안에 냉이 향이 가득하다. 고향의 산과 들이 눈에 잡힐 듯 선연하다. 냉이 나물을 씹기 시작한다. 달고 고소하다. 씹으면 씹을수록 몸 안에 새봄의 기운이 퍼져간다. 냉이 뿌리를 닮은 내 마음의 뿌리에 난 상처에서도 봄 향기가 풍겨 나올 듯하다.

2016-04-08

새봄, 오솔길에서

▲ 강길수수필가 마르첼리노.어린 시절, 이른 봄날 도랑가 오솔길. 개나리꽃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샛노란 빛의 경이로움이 지금도 내 마음 영상에 살아있어. 도랑가엔 흐드러지게 개나리꽃 샛노란 빛의 축제가 벌어졌지. 그 아래 졸졸졸 흐르는 도랑물 사이 돌에 앉아 버들강아지를 따 먹던 시절 말이야. 어느 틈에 수양버드나무가지 꺾어 만든 피리가 아이들 입에 물리고, 순식간에 봄 도랑은 버들피리 오케스트라가 벌어지곤 했잖아.그럴라치면, 숨 쉴 겨를도 없이 산천을 온통 분홍빛 진달래꽃 곧, 참꽃이 수놓아버리고 말았지. 아이들은 참꽃 꺾고, 따먹기에 혼이 나가버려 시간가는 줄도 몰라 점심 거르기가 일쑤였지.“이놈들아, 애들이 참꽃 따 먹으면 문둥이가 잡아먹는다!”어른들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로 아이들을 닦달하였지만, 우리들은 아랑곳 않던 날들. 모두가 입술이 시퍼렇토록 참꽃을 따 먹고, 손에 손마다 가득 꺾어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서던 골목길. 처음엔 꾸중하시던 부모님들도 나중엔 포기하셨는지, 되레 어느 산에 가면 더 붉은 진달래꽃이 있다고 알려주기까지 하셨지.마르첼리노.나의 새봄은 그 때가 최고였던 것 같아. 젊은 날, 조금 쏘다닌 봄도 있었지. 자기가 뭐 문학도나 철학도 라도 된 듯, 제 최면에 걸린 마음을 달고 이곳저곳 쏘다녔으니. 그러나 이미 그 때는 어린 날 같은 순수한 봄은 아니었어. 너도 알다시피 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길을 숨 가쁘게 달리던 봄들이었으니 말이야.자기도 모르게 나이가 들고나니, 왜 자꾸 어린 시절의 봄날들이 떠오르는지…. 역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인가봐. 아니면, 아직도 나는 치기어린 소년에 불과한 거지. 이제 봄은 이만큼 오는데, 내 마음의 봄은 언제 또 오실까. 영영 오지 않으시려는가. 세파의 때가 너무 많이 묻은 게지. 평생 월급쟁이가 무슨 때 낄 여유나 있었느냐고? 그래도 개나리, 진달래 피는 봄은 이처럼 오는데, 참꽃 따 먹던 봄은 오지 않고 있구나.마르첼리노.문자 없는 편지를 왜 너에게 보냈는지 나도 설명할 재간이 없다. 그저 그렇게 보내고 싶었을 뿐이야. 아마도 오시는 봄을, 내 하잘 것 없는 언어로 오염시키지 말고 그대로 전하고 싶었는지도 몰라.`할아버지!` 그 어떤 단어보다 연륜의 흐름이 단박 전해왔지. 처음 길에서 아이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의 그 황망함이란…. 며느리 둘을 다 본 아직도, 마음 이편에선 `아니야!`한다. 저편에선 `그래도 세월은 간 거야`하고. `재미없는 늙은이`로 되어 가는 게 인생이라고? 오! 서글픈 내 삶의 오솔길이여.글 주제 정하기가 쓰는 것만큼이나 힘이 드는구나. 정해진 것이라면 잘하든 못하든 쓸 텐데. 어찌 보면 이것도 욕심이지. 연습으로 하는 것이니, 무엇이든 주제삼아 쓰면 될 텐데 말이지.`기쁨은 관계 속에서 온다!`고 하는데, 그런 관계가 이 새 봄엔 샛노란 개나리꽃같이, 분홍 진달래꽃처럼 맑게 너에게도, 또 나에게도 새롭게 오시기를 빈다.새봄, 오솔길에서.오늘 예서 이만 쓸게.안녕!

2016-04-01

회초리

새 학기가 시작 되었다.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이 학교로 향한다. 발걸음이 경쾌하다. 예쁘고 해맑은 아이들을 보니 최근 세상을 경악하게 하는 자녀폭력과 유기에 관한 뉴스들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한다. 몹쓸 짓을 한 가해자들은 어린 시절 가족의 따스한 관심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바람직한 부모는 적당한 당근과 채찍으로 아이를 양육해야 하리라. 당근만 주면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채찍만 가하면 폭력적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어릴 적 나는 아버지의 매를 맞으며 자랐다. 거짓말은 하면 절대 안 되었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했다. 어겼을 경우에는 굵은 회초리를 해오라는 불호령이 내려졌다. 아버지의 명령은 나에게 법이나 다름없었다. 쌓아둔 나무더미에서 아버지의 팔 힘을 가늠하며 회초리를 찾고 있으면 어머니께서 내 새끼손가락보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손에 쥐어주며 방으로 들어가게 하셨다.고개를 푹 숙이고 아버지 앞에 회초리를 내밀면 `이것도 회초리라고 해 왔느냐`는 소리가 천둥 같이 지나가고, 공기를 가르는 날렵한 싸리 나뭇가지는 뼛속까지 아리게 했다.아버지는 마치 대문 옆에 서 있는 커다란 엄나무 같으셨다. 온몸에 가시를 돋우고, 악귀를 쫓는다는 엄나무. 마치 우리들에게 못되고 나쁜 버릇이 스며들지 못하게 지키는 수호신 같았다.어머니는 달랐다. 큰소리로 나무라지도 않았다. 아버지께 혼이 난 다음날은 반듯하게 접은 양면괘지를 책가방 속에 넣어 두셨다. 퍼렇게 멍든 종아리가 많이 아프지, 매 맞고 울지도 않아서 엄마마음은 더 아프다, 씩씩하게 학교 잘 다녀오라는 따뜻한 편지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빈 편지지 일 때도 있었다. 푸르스름한 새벽, 연탄불에 밥 짓는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의 회초리보다 더 철들게 한 어머니의 따스한 회초리였다.내가 두 아이의 어미가 되었다. 연예인이 되겠다는 아이의 투쟁과 맞선 적이 있다. 아이는 침묵과 단식으로 대항했고, 가정의 분위기는 살얼음 위를 걷는 형국으로 변했다. 그 때 어머니가 생각났다. 호통을 치거나 매를 들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철이 들게 하셨던 어머니의 편지 회초리였다.꽃그림이 있는 분홍빛 편지지를 사 왔다. 첫 줄에 아이의 이름을 쓰고, 사랑한다는 말을 적었다. 이어 쓸 말이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한참 동안 쓰고 보니 내 넋두리가 되고 말았다. 아이가 읽으면 어미의 잔소리 밖에 되지 않을 내용이었지만 곱게 접어 내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잠든 아이의 책가방 속에 살며시 넣어 두었다.하교시간에 맞추어 아이가 좋아하는 갈비찜을 만들어 두고 귀가하는 아이를 맞이했다. 뾰로통한 얼굴에 살짝 어리는 고운 빛을 보았다. 갈비찜을 가득 담은 접시를 상 위에 올리며 아주 반가운 목소리로 같이 먹자고 했더니 슬그머니 젓가락을 들었다.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이야기만 나누며 아이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아이는 고기 한 점을 집어 내 숟가락에 얹어 주었다. 매듭이 풀릴 것 같았다. 텔레비전을 켰다. 아이가 리모컨으로 채널을 고정시켰다. 나는 가장 멋진 연예인의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아이는 왕방울 눈으로 쳐다봤다. 엉켰던 실이 풀리기 시작했다.모 대학교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 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려면 할 일은 한 가지 뿐이다. 학교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 `끼`와 `생각`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책상 정리를 하는 손놀림이 가벼웠다.다음 날 아침, 등교한 아이의 책상 위에 봉투가 놓여 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쓴 답장편지였다. 봄 햇살보다 더 따사로웠다. 채찍보다 당근이 더 강한 회초리였다.

2016-03-25

그녀의 얼굴이 해쓱하다. 이생의 삶이 사라져 간 공간에 그녀와 나는 또 다시 마주 보고 섰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 했던 순간들이 아스라이 느껴진다. 생사를 넘나들던 그녀의 삶이 시간을 거슬러 환원된다. 현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와 피할 수 없이 맞닿아 있다. 고향친구의 모친상으로 모교 동기생들과 장례식장을 찾았다. 조문객들 틈에 멀찍이 앉아 있던 그녀가 불편한 몸을 가누며 내손을 잡아당겼다. 흰 머리카락이 드러난 긴 생머리를 동여매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주름살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세상은 그녀를 현실 밖으로 밀어낸 듯한 착각이 들었다.오래 전, 그녀는 교통사고로 한동안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전신의 반 이상을 붕대를 감은 채 부기가 부석한 얼굴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의식이 돌아온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고통의 수위를 넘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보였다. 드러내지 못하는 속내가 회한으로 엉겨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으리라.그녀의 삶이 마치 폐허처럼 허물어져 낯설게 다가왔다. 미동 없이 누워 있는 몸에는 링거 줄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었다. 병실 밖 풍경에 눈길이 머문 순간, 코끝의 매운 느낌이 단지 그녀 때문만은 아니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가는 생명줄을 이어가고 있는, 세상과 단절된 중환자실의 어둡고 무거운 풍경 때문이기도 했다.그녀와 나는 고향에서 학교를 같이 다녔다. 흉허물 없이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친구였다. 도시의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소식이 뜸해졌고, 종내는 연락이 두절 된 채 시간이 흘렀다. 결혼을 하고 친구들이 하나 둘 연락이 되면서 소식이 닿았다.가슴이 답답할 때면 해안가를 한 바퀴 돌고 온다며 뜬금없는 기별이 올 때도 있었다.막 잠에서 깬 듯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녀의 남편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느 가정의 일상과는 다른 무거운 기운이 앉은 자리를 불편하게 했다. 남편과의 잦은 충돌로 그녀의 삶은 살얼음판을 걷듯 위태로웠다. 지칠대로 지친 그녀는 그에게로 향했던 마음을 거두었다.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육신의 장애다.몇 차례의 수술 끝에 겨우 목발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됐다. 성대를 다쳐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뱉어 내는 말에는 삶의 강한 애착이 묻어난다. 수없이 나락으로 곤두박질 쳤을 시간들이 그녀를 짓눌렀다.세상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애초부터 잘못된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믿었던 남편의 배신은 그녀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까지 이어졌으니 말이다. 헛된 욕망이 빚어낸 현실 앞에 인간의 이기심이 어디까지인지 그 한계를 묻고 싶었다.세상바람에 휘청거리던 그녀가 답답했다. 집착의 끈을 놓고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이 또한 세상의 잣대로 저울질한 입바른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고선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 버렸고, 먼 길을 지나와 버렸다.팽팽한 삶의 끈을 움켜쥐고 안달복달한 지난날들이 스친다. 과거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현실을 흔들기도 한다. 현실과 맞닿은 미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삶의 과제들을 떠안긴다. 더디 흐르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어느새 반백의 문턱에 서고 보니 잃을 것도, 움켜쥐고 누릴 욕심도 없다. 세상 밖으로만 촉을 세우던 일도 내 안으로 귀를 연다. 예민하고 발끈했던 성정이 한결 둥글어졌다. 꺾이지 않는 유연함을 세상바람에 흔들리며 체득한다. 그녀도 그랬으면 좋겠다.

2016-03-18

지팡이

▲ 이영숙 수필가 아침 청소를 하고 할 일없이 빈둥거리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경주 남산의 진달래가 우리 보고 싶어 울다가 눈이 벌겋게 되었으니 진달래보러 등산 가잔다. 구름 한 점 없는 용장골 하늘은 갓 세수한 말간 얼굴이다. 올봄은 흐리거나 비가 온 날이 많아 칙칙했는데 봄의 끝자락에 와서야 맑고 고운 얼굴로 벙긋이 웃는다. 용장골로 올라가는 남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새로운 맛이다. 계절은 제 이름에 어울리게 산을 꾸며 놓고 우리를 부른다.봄꽃의 화사함, 여름의 녹음, 가을의 풍성함, 어느 화가가 있어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계절을 채색할 수 있으랴. 순백의 겨울은 가슴까지 비우게 하며 나를 품어 안는다.자연의 위대하고 웅장함에 감사할 뿐이다. 눈이 짓무르도록 우리를 기다린다던 진달래꽃은 흔적도 없고 연초록 잎사귀들이 햇살에 반짝인다.고이산 중턱쯤에 이르렀다. 갑자기 더워진 탓인지, 방에만 뒹구느라 약해진 체력 때문인지 숨이 코끝에서 펄렁인다. 둔해진 몸을 감당하느라 힘이든 발이 미끄러지기를 수도 없이 한다. 용을 쓰면서 이 나무 저나무 잡아당기느라 손바닥에는 이미 진달래가 다시 피었다. 이젠 몸 하나 감당하기도 벅차다. 무엇엔가에 의지하지 않고는 산에 오를 자신이 없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막대기 중 듬직한 것을 골라 지팡이로 삼았다. 지팡이를 짚으니 산에 오르기가 훨씬 편하다.사실 지팡이는 본인이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지팡이는 어르신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선물로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조상들은 나이에 따른 지팡이를 선물로 받았다. 50세가 되면 가장이라고 하여 자식들이 만들어 주었고, 60세가 되면 향장이라 하여 동네에서 만들어 주었다. 70세가 되면 나라의 경사이기에 국장이라 하여 나리에서 만들어 주었고, 80이 되면 아주 큰 경사여서 임금이 지팡이를 하사하고 조장이라 하였다. 내 나이 60이 넘었으니 향장을 받음직 하지만 만들어 줄 이 없으니 스스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었다.산을 오르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이제 여기 저기 연초록 잎이 눈에 들어왔다. 뾰족하게 얼굴을 내민 앉은뱅이 꽃이 금방이라도 필 듯 뱅긋이 웃는다. 미끄러워 밉기만 하던 소나무 마른 잎에서 솔 향이 올라왔다. 헉헉대던 숨결이 잦아들었다. 긴 휘파람을 날렸다. 그 소리에 놀란 듯 솔방울이 뚝 떨어졌다.굴러가는 솔방울을 보다가 아침에 남편과 다툰 일이 미안해졌다. 양치를 하려고 치약을 짜는데 치약이 없다. 남편에게 앞 베란다 벽장에 있는 치약을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남편이 치약을 두루룩 굴렸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에 짜증을 내었다. 주거니 받거니 말이 길어지다 보니 언성이 높아지고 눈물 한 자락을 짜 내고 말았다.`남편이 지팡이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량보다 많은 약을 먹어 축 처진 나를 업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던 남편이었고, 예순 아홉에 저 세상으로 떠난 엄마를 못 잊어하는 아픈 가슴을 다독여 주는 이도 남편이었다. 딸아이를 낳고 둘째를 잃어버렸을 때 내 눈물을 닦아 주는 이도 남편이었다. 인생 굽이굽이 어렵고 힘든 일 같이 헤쳐나간 지팡이. 고위산에 오르는 지팡이를 내가 만들듯 인생 지팡이도 내가 다듬고 아껴야 하는데 작은 일에 토라지고 화내고 상처 주었다.지팡이 덕분에 쉽게 산꼭대기에 올랐다.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바람이 싱그럽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지팡이를 챙겼다. 보물을 간수하듯 옆에 둔 지팡이를 보았다. 내 육중한 체구를 감당하느라 날렵하던 끝이 무디어졌다.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고맙기도 했다. 까탈스런 내 성깔을 고이 참아주느라 내 남편의 신경도 저렇게 무디어졌겠지. 오늘 저녁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불고기에 맥주 한 컵과 웃음 한 쟁반 차려야겠다.

2016-03-11

내게서 멀어지는 것은

▲ 김철순 수필가 독 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난다. 뚜껑을 여니 검은 봉지 틈으로 새순들이 핼쑥하게 목을 빼고 있다. 당근, 감자를 사서 잠시 넣어둔다는 게 한 달이 지났다. 저들이 싹까지 틔우며 얼마나 구시렁거렸을까. 싱크대 바닥에 쏟으니 곪은 상처에 상한 물이 배었다. 그 와중에 감자 세 알은 탄탄히 버티고 있다. 이들은 내 기억 밖에 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을 무심하게 독에 가두어 저들의 꿈을 저버렸다. 싹 한 잎 틔우는 농부의 정성보다 화폐의 가치만 느끼던 무지가 부끄럽다. 상한 뿌리가 살아서 내 물컹한 건망을 깨운다.한 친구를 참 좋아했다. 그녀는 음악을 즐기고 사색적이라서 이야기가 잘 통했다. 여행도 같이 다니고 좋은 생각이 나면 편지도 자주 보냈다. 그녀는 이루지 못할 지독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아내 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우연히 만난 인연에 그녀는 흠뻑 빠졌다. 상기된 사랑 이야기 끝은 늘 어두웠다.그들 사랑은 멀리서 바라보는 신비로운 늪이었다. 아쉬운 만남은 그녀를 더 황홀하게 하고 물안개 같은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 남자는 한 사람을 선택했다.그녀는 비 맞은 꽃잎처럼 젖었다. 내팽개쳐진 연정이 어두운 골목을 굴러다녔다. 언젠가 건너야 할 세찬 강물이었다.그리움도 강물처럼 흘려보내고 미련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깊은 사랑의 빈자리에 어둠은 질척이며 몸을 삭힌다.한참 후 친구는 고향에 있는 사과밭에 머무르며 넉넉한 시골 냄새로 마음을 식히고 있었다. 가끔 살이 오른 풋사과를 자기 마음인 양 청색 잉크로 그려 내게 보냈다. 그것은 겉모습이었다.매미가 자지러지던 여름날, 친구는 수면제를 마시고 잠자듯 떠나버렸다. 풋사과 같은 생을 열병으로 녹였다.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영원한 평온으로 감당했다. 설익은 생이 우물 안에서만 하늘을 보았다. 막내딸을 보내는 노모의 한이 절절했다. 세상에는 재주 많은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울타리도 맥없이 허물어졌다.내 삶도 한동안 사는 게 무력했다. 슬픔의 응어리는 내게 통증이었다. 꿈속에 불쑥불쑥 나타나 바스러지도록 웃기도 하고 해진 옷차림으로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녀의 잔상에서 벗어나려고 다른 일에 몰두했지만, 문득문득 다가오는 목소리에 괴로웠다.벗어날 수 없는 시간에 통째로 흔들렸다. 나를 움켜잡던 생각들도 차츰 작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혹독한 시련이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행인처럼 지나갔다.그녀의 흔적을 태우는 연기 속에 누가 내 신발까지 태워버렸다. 그녀의 슬리퍼를 끌고 강으로 갔다. 헐거운 슬리퍼가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스물네 해를 부수어 한 줌 가루로 강물에 몸을 뉘었다. 내 저린 속울음도 흰 물살 위에 띄워 보냈다.끝없이 흘러가다 갈대를 만나면 노래를 부르고 물살이 세어지면 가슴이 확 뚫리도록 달릴 것이다.오래 잊는다는 것은 마음에서 멀어진 것이다. 생각이 깜박거릴 때는 번개처럼 살아나지만, 건망의 수위가 높아지면 불씨까지 꺼진다. 꼭 해야 할 일도 기억 저편에 물러앉아 나를 시험하듯 기다린다.마음속에 지우고 싶은 생각은 돌덩이가 되어 더 심술을 부린다. 지독한 몸살을 앓은 후에야 슬며시 자리를 비킨다. 힘든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면 그 또한 고통이다. 잊힌다는 양면성에 아쉬워하기도 하고 평온해지기도 한다. `망각은 신이 준 귀중한 선물`이라는 명언에 수없이 밑줄을 긋는다.

2016-03-04

성형시대

▲ 김옥순수필가 햇장을 떴더니 짜다. 소금이 많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매사를 건성으로 듣고 해치우는 삶의 방식이 문제였다. 이 무슨 낭패인가. 된장은 일 년 동안 밥상에 올라갈 긴요한 음식이다. 장 담는 일은 연중 가장 큰 행사인데 무신경, 무성의로 짜다 못해 소태가 된 저 된장을 어떻게 할까. 친정어머니가 보시더니 생콩을 흐물흐물하도록 삶아 된장에 잘 섞어두라고 하셨다. 이를테면 된장에 성형을 한 셈이다. 두어 달 뒤 장독 뚜껑을 열었더니 샛노란 된장이 빛깔도 고와 군침이 돈다. 잔뜩 기대하고 한 뚝배기 끓였는데 장맛이 영 아니다. 콩 특유의 비린내에다 시큼한 냄새까지 나는 것이 장맛도 아니고 콩 맛도 아니다. 이번에는 콩을 많이 넣어서 싱거워진 모양이다. 게다가 일찍 뚜껑을 연 나의 성급함까지 보태어졌으니! 성형용으로 들어간 콩이 분수 모르고 설쳐대면서 된장과 화합도 못 하고 저 스스로 숙성도 못한 결과였다. 다시 어머니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소금을 골고루 뿌리고 꼭꼭 눌러서 없는 듯이 한쪽에 밀쳐두라 하셨다. 성급하게 뚜껑을 열었다가는 된장을 아예 망치게 된다고도 엄포를 놓으셨다. 시간을 충분히 두라는 뜻이리라. 지시대로 그렇게 했다. 빨간 고무대야를 덮어서 눈에 안 띄는 장독대 구석에 멀찌감치 두었다. 이태가 흘렀을까. 조심스레 된장독을 열었다. 된장독 뚜껑을 여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에도 잘못되면 큰일이 아닌가. 만약에 저번처럼 된장을 못 먹게 된다면 저 많은 된장을 어찌해야할까. 요즘은 버리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다. 위층에 꺼멓게 딱지가 두껍게 앉아있었다. 마치 어릴 때 넘어져서 상처가 아문 무릎에 생긴 딱지 같았다.조심조심 딱지를 걷어내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았다. 뜻밖이었다. 된장은 완벽했다. 성형용으로 들어간 생콩이 짠 된장과 더불어 오랜 세월 동안 발효되고 숙성되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무법자처럼 침입한 콩을 수용하자면 짠 된장 역시 고충도 많았을 터였다. 한쪽은 밀어내고 또 한쪽은 파고들다가 뒤엉켜서 충돌한 시기도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자리와 틈을 내주지 않으려는 짠 된장과 비집고 들어오려는 콩의 생존경쟁이 아니었겠는가. 그 둘은 오랫동안 부딪치면서 어떻게 살아남느냐를 깨달았을 것이다. 묵은 장과 성형의 하모니였다. 화합의 결과물인 된장을 보니 문득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결혼으로 소식이 끊겼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친구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었다. 안부를 나누는 동안 내 눈길은 그녀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어릴 적 그녀는 사각 턱이었고 볼우물이 패여 있었는데 성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턱을 깎고 지방이식을 한 친구의 얼굴은 울퉁불퉁하고 이상한 모습이었다. 부동산으로 졸부가 되면서 저질러진 일이었다. 경제적 풍요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과 우월감에 젖어 살았었다.친구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칩거생활을 했다. 얼굴 윤곽이 제자리를 잡고 자기 피부로 젖어들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동안은 후회와 괴로움의 시간이었다. 또한, 자기성찰의 시간이었다. 친구는 그 시간이 자기 안의 허영심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과도한 욕심으로 망가진 얼굴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친구는 복지시설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진정한 생의 의미를 찾은 친구를 보니 아팠던 만큼 얻은 것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도도함과 사치로 휘날리던 그녀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외형의 모습과 내면의 것들이 부딪히면서 빚어낸 얼굴은 삶의 모습까지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모처럼 그 친구를 초대했다. 조촐한 나물 반찬에다 묵은 장으로 된장을 끓였다. 오랜 시간 묵히고, 삭이며, 어르고, 달래며 저 스스로 숙성된 된장을 보니 참으로 귀하다. 이참에 나도 성형이나 한번 해 볼까. 거울을 보니 뜯어고칠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서라, 다 그만두고 가슴이나 뜯어고쳐야겠다. 사랑과 양보의 미덕으로 후덕하게 살아가는 넉넉한 가슴 말이다. 벨이 울린다. 친구가 온 모양이다.

2016-02-26

두 손 마주 잡고

▲ 김정호수필가 음력 7월. 하얀 보름달이 세상을 밝히고 있는 밤이다. 어제는 한여름 소나기가 한줄기 시원하게 퍼붓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물안개가 아주 옅게 깔린 오늘 저녁 공기가 상쾌하다.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걷기 운동을 위해 길에 나선다. 매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이면 가끔 혼자서 걷는다. 집에서 출발하여 가산산성 입구 진남루를 거쳐 남원리를 돌아오는 코스는 한 시간 정도 걷기 운동에 적당하다. 짙은 솔향기를 마음껏 마시며 열심히 걷는다. 시골에 계시는 연로하신 부모님 걱정, 또 서울에 홀로 떨어져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 생각, 도토리 키 재듯 고만고만하게 잘 자라고 있는 손자 녀석들의 화사한 얼굴을 그린다.팔공산 자락에 민가가 많지 않아서인지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는 인적이 드물고 한적하다. 게다가 밤이라고는 하지만 한여름의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산책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수월찮다. 참으로 다행이다. 호젓한 산길을 걷고 있는데 저만치 한 쌍의 남녀가 다정스럽게 손을 잡고 천천히 걷고 있다. 같은 색 같은 모양의 운동복으로 보아 아마도 신혼부부인 것 같다. 부러울 만큼 다정스러워 보인다.누구나 신혼 시절에는 풋풋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이런저런 세파에 시달리며 살다 보면 때로는 사랑을 잊고 살 때가 잦다. 그냥 무덤덤하게 친구처럼 동반자로서 사랑의 감정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다.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사가 생각난다. 기혼자들에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느냐?`라는 질문이 있었다. 대다수 여성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대답했고, 남자들은 지금의 아내와 다시 결혼하고 싶다고 답했단다. 결과는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우리나라 고유의 유교적 관념으로는 `여필종부(女必從夫)라고 하여 여자는 남자를 따르는 것이 미덕으로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을 선택하리라 믿었다.우리 부부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떤 답을 할까? 특히 아내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당신이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나와 결혼하겠느냐고 장난삼아 물어볼 수도 없다.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떨까. 여성 대다수가 아니라고 답했다고 하니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시작된다. 나 역시 모든 남자의 대답과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나도 또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은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당장 내 곁에서 살 비비며 살아가는 곱고 순수한 내 반쪽을 남에게 내어준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명쾌한 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앞서서 걸어가는 젊은 부부를 뒤로하고 열심히 걷는다. 갑자기 아니지, 그건 아니지 싶다. 하늘의 축복이 있어 만약에 당신과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단호하게 당신을 놓아주고 싶다. 22살 어린 나이에 나를 만나 그 많은 사연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해낼 수 있을까. 가난한 살림의 집안 8대 종부로 들어와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시난고난하게 살아왔다. 그래도 남자의 자존심은 있어 고생하는 아내 등 한 번 다독여주는 일에도 인색했지만, 아내의 고생만큼은 잘 알고 있다. 혹시라도 절대자의 능력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기회를 준다면 좋은 사람 만나 고생 좀 덜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보라고 축복해주고 싶다.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떤 운명에 의해 부부의 인연을 맺어 이제까지 잘 살아왔으니 남은 삶이라도 아름답게 보내고 싶다. 살아가야 할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은 것은 분명할지니, 조금은 서럽고 억울하더라도 붉은 입술 꼭 깨물며 두 손 마주 잡고 따뜻한 사랑의 정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2016-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