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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권영호수필가 사람들은 새해 이른 새벽 산으로 오른다. 일출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불그스름한 여명을 앞세우고 떠오르는 해덩이를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다. 그들은 해님을 향해 한결같이 저마다 더 윤택하고 탄탄한 인생길로 바꾸어 달라며 소망한다. 나도 사람들 따라 새해 이른 새벽 산으로 오른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다. 산 위로 오르는 초입 길은 지난여름, 소나기에 흙이 씻겨 내린 탓에 알몸으로 드러난 뾰족한 송곳 돌, 날카로운 칼 돌로 즐비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 돌들을 요리조리 피하지 않고도 뚜벅뚜벅 걸어 갈 수 있다. 밑창이 단단한 등산화를 신었기 때문이었다.한참을 올라갔다. 산밭 울타리로 심어놓은 탱자나무 옆, 토끼 길을 지나야했다. 앙증스런 탱자나무는 가시 달린 가지를 겁 없이 길 쪽으로 쭈욱 뻗어 가뜩이나 좁은 길을 반쯤이나 가로막았다.위세 당당한 훼방꾼처럼 턱 버티고 서있는 탱자나무 가지의 높이와 길이에 맞추어 온몸을 낮추었다가는 펴며 간신히 그 길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산 중턱, 어머니 산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메고 온 배낭에서 꺼낸 막걸리 잔을 정성껏 올렸다. 간밤에 내린 진눈개비로 덮인 잔디 위에 엎드렸다. 산소 옆 잣나무 가지에서 노닥거리던 겨울바람들이 기어 내려와 목덜미로 파고든다.예순 여섯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가난한 아버지를 만나 남의 집 대문 옆 단칸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던 어머니의 인생길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조금 전, 산으로 오르는 초입 길을 뒤덮었던 모난 돌들보다 훨씬 더 뾰족했던 가난의 편린들을 어머니는 맨발로 밟고 지나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남들이 신고 있는 고무신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이게 바로 당신의 운명이려니 했다.앙칼스런 탱자나무 가시로 뒤덮인 좁은 길로 접어들었을 때, 배움이 없었던 내 어머니는 혼자서 얻은 지혜와 용기만을 믿었다. 어머니는 우리 오남매를 바싹 가슴 속에 묻었다. 얇은 옷조차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등을 탱자나무 가시에게 성큼 내어주시고는 게걸음으로 조심조심 그 길을 빠져나오셨다. 그러자니 어머니는 얼마나 겁이 났을까. 얼마나 그 길이 멀게만 느껴졌을까.세월이 흘렀다. 언제나 당신에게 무거운 등짐이었던 우리 오남매가 모두 결혼을 했다. 이제 오남매는 멍든 어머니의 몸을 추슬러 드릴 때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어머니의 발바닥에 생겼던 굳은살이 척 벌어졌고 가시에 찔린 등 언저리가 깊게 곪아 있었다. 몸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늦게서야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나는 괜찮다고만 했다.우리 오남매는 그런 어머니를 위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예쁜 꽃들이 피어날 행복의 길을 만들어 드렸다.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오남매가 어머니를 부축하여 겨우 올려놓은 행복의 길에서 한 발자국을 떼는가 싶더니 그만 풀썩 주저앉아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일으켜도 어머니는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끝내 어머니는 홀연히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길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십여 년 전, 우리 곁을 떠나가신 내 어머니는 아직도 돌아올 길을 마련하지 못하신 모양이다.산소 앞에 꿇어 앉아있으면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에 가슴이 조여든다.고개를 들었다. 산꼭대기로 오르는 오솔길 위로 떨어진 다복솔잎들이 폭신한 융단처럼 깔려있었다. 그 오솔길은 솜처럼 가벼운 구름들이 떠있는 쪽빛 하늘로 이어져 있었다.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이다. 아니다. 당신 대신 외아들인 내가 걸어보라고 내어주신 그 길이었다.`어머니. 이 아름답고 편안한 길을 함께 걷고 싶습니다. 당신이 좋아하셨던 손자랑 손녀와 함께 말입니다.`

2016-02-12

세월의 훈장

▲ 신형호수필가 오랜만에 가족들과 동해로 여행을 갔다. 늦은 오후 철썩이는 파도가 창을 밀고 들어올 듯한 민박집 2층에 짐을 풀었다. 멀리 대왕암이 손에 잡히는 대본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민박집 2층은 다섯 개의 방이 붙어있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가 수평선 위를 걸어오고, 밤에는 달빛이 물결 타고 춤추는 선경이 펼쳐진다. 저녁 8시가 좀 지났을까. 왼쪽 방으로 남자 손님들이 들어가는 기척이 난다. 조립식 건물로 방음시설이 약해 조용히 누워 있으면 옆방의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따로따로 방에 있지만 한 방에 있는 느낌이다.자려고 누웠지만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체기가 있던 막내아이는 오전의 내연산 산행이 피곤했는지 벌써 깊은 잠에 빠져 다행이다. 벽 저편에서 주고받는 소리가 높아진다. 옆방에서 술자리가 벌어진 모양이다. 들리는 목소리로 짐작해보니 70대 후반의 노인인 듯싶다. 걸걸하고 쉰 목소리의 한 분이 길게 얘기를 하고, 나직한 목소리의 두 분이 맞장구를 치는 듯하다. 한세월 살아온 분들이 삶의 필름을 돌리고 있다.술이 혈관 속을 한 바퀴 돌았을까? 갑자기 노래가 들려온다. 쉰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엔카를 부른다. 느린 듯 감돌아 이어지는 트로트 곡조 비슷한 노래이다. 일행들도 서너 소절을 따라 부르더니 곧 잠잠해진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지난날의 얘기를 이어간다. 한 잔의 녹차가 식을 무렵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런 여행지의 옆방에서 늦은 밤 일본노래를 듣는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무슨 연유로 이런 노래를 부를까? 일본 노래를 부를 연배면 아마 여든을 넘긴 분들이 아닐까?여든이라! 고희(古稀)를 넘기고, 다시 강산이 한번 요동친 나이다. 가장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기를 일제 강점기 말기라는 암흑기에 보낸 분들 일 것이다. 해방을 맞자마자 한국전쟁을 겪고, 격랑의 산업 전성기와 민주화시기를 거쳐 오늘까지 살아온 분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무슨 얘기를 하였을까? 흘러간 청춘의 봄날이 그리워 그 시절 노래를 부르는 것일까?사람은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생길 때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노래는 젊은 시절 배운 유행가일 것이다. 적당한 분위기와 곡차 한 잔이 들어가면 금상첨화이다. 세월은 가는 게 아니라 쌓인다고 했다. 켜켜이 쌓아온 세월 속에 술잔을 앞에 놓고 삶을 되돌아보는 것일까? 열이틀 휘영청 달빛에 젖은 감포 앞바다를 창 밖에 두고, 죽마고우와 살아온 세월의 훈장을 꺼내 보는 것이리라. 가슴 벅차게 행복한 날도 있었을 테고, 설움에 겹도록 마음 저린 날도 있었을 것이다. 애절한 가락에 나도 코끝이 찡해진다.가만히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순이 지난 나이이다. 내 청춘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지난날은 돌이켜 볼 수 있지만, 앞날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갖은 상념이 동영상처럼 지나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떠오르기도 한다. 먼 훗날 삶을 돌아보면 내 세월의 훈장은 어떤 것일까?문득, 몇 달 전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옆방의 노인들과 비교해본다. 전문 관리직으로 퇴직한 팔순 노인의 사건이다. 대기업 임원의 자식을 둘이나 두고 노년에도 짜인 건강관리로 활기차게 살아왔다. 누가 봐도 복 받은 분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분이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원인이었다.다음날 아침, 1층 식당에서 옆방 손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80대로 추측되는 깔끔한 노인 세 분이셨다. 백발이 멋있는 한 분과, 골이 파인 팔자 주름과 저승꽃이 듬성듬성 핀 두 분의 얼굴에서 세월의 훈장을 읽을 수 있었다. 막역지우들과 겨울여행을 나온 것이리라. 멋지게 사는 분들이다. 아름다운 우정을 상상해본다.“해장해야지.”하면서 반주로 맥주 한 병을 주문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창밖의 수평선으로 눈을 돌렸다.

2016-02-05

서안의 온천궁

▲ 안연미 수필가 이곳은 중국의 찬란한 역사가 숨 쉬는 곳 서안(西安)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의 온천궁과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다. 흥했던 국운이 황제와 애첩의 사랑 놀음에 패망의 길을 걸었던 안타까운 역사의 고장 서안의 화청궁(華淸宮)을 어찌 지나칠 수 있으랴. 입구에 들어서자 화려한 전각 앞에 너른 연못이 먼저 반긴다. 여산(驪山)이 감싸 안은 이름 높은 그 화청지다. 현종과 양귀비가 밀어를 속삭이며 수없이 거닐었을 연못이 아니던가. 달콤했던 그들의 애틋한 사랑이 오래도록 이어지지 못함이 안타깝기만 하다. 황제들의 삶이 묻어있을 겨울 온천탕이 슬쩍 궁금해진다.발길을 옮긴 곳은 황제들의 어탕(御湯) 유적박물관이 있는 앞마당이다. 정원 중심부에는 키가 크고 풍만한 육체를 자랑하는 양귀비 석상이 우뚝 서 있다. 절세미인 양귀비라 해서 유심히 보았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다. 양귀비의 발은 중국여인에게 행해졌던 전족관습에 의해 발길이가 10센티미터도 안 된다 하였거늘 석상의 양귀비 발은 작지도 않고 아주 고운 발이다. 전족으로 구부러진 흉한 발을 차마 조각하지 못한 것인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황제들의 온천탕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당태종의 온천 성진탕(星辰湯)이다. 이곳 온천수는 온도와 좋은 수질 덕분에 천하제일의 어천(御泉)이요, 동방의 신천(神泉)이라고까지 칭송받은 곳이다. 현종과 양귀비의 욕탕보다 100년이나 앞서 지었다는 당태종의 성진탕은 원래는 노천탕으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목욕을 한 곳이다.천장도 없는 황제의 온천탕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밤이다. 솟구치는 뜨거운 온천수는 여산주변을 수증기로 가득 채워가며 이곳 황제의 욕탕에 도달한다. 차가운 청옥석의 냉기가 서서히 온천수의 황금비율을 맞출 즈음, 국사(國事)에 지친 태종 황제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탕 안으로 들어간다. 황제가 온천수에 몸을 녹이는 동안 엄동설한(嚴冬雪寒) 밖에서 황제의 안위(安危)를 지키던 신하들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른다. 매서운 바람은 눈과 한데 섞이어 머리 조아리고 있는 신하들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다행히도 황제는 신하의 독설도 능히 받아주던 성군(聖君)이 아니던가. 추위에 떨고 있던 그들을 누각 안으로 들어오도록 배려해 주는 황제를 위해 신하들이 무릎을 꿇어 머리를 조아린다.성군이 머물렀던 곳의 온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건만 세월의 흔적 속에 후세 사람들은 황제의 욕탕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발 빠르게 앞서 가던 여행 안내원이 가리키는 곳은 관원들의 욕탕이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리던 요리사와 관원들이 쓰던 욕탕에는 황제가 목욕했던 물을 다시 이용했다는 것이 흥미롭다.당태종이 백성들한테 성군으로 불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던가. 당태종은 신하 위징의 수많은 간언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서 자신의 잘못과 욕심이 지나치지 않도록 스스로 채찍질 했던 지혜로운 황제였다. 그는 역대 황제들의 잘못된 행실과 뛰어난 업적을 자신의 거울로 삼았다. 성군과 패군의 갈림길은 과욕을 어찌 다스리는가에 달렸나 보다.부귀영화를 누리며 시절 모른 현종과 양귀비 옆에는 국운을 걱정하고 충언하는 신하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어찌하여 모두가 과욕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현종은 온천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수없이 보았을 터인데 역대 황제의 거울 교훈을 잊었단 말인가. 역사거울을 통해 당나라 현종이 교훈으로 삼고 실천했더라면 모든 일에 정도(程度)를 지킨 성군으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뿐이랴. 안녹산의 군대를 피해 고달픈 피난길을 걷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태평성대가 무너진 것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성난 군사들 앞에 양귀비의 목숨을 내어주는 비통함은 겪지 않았을 것을….

2016-01-29

껍데기 인생

▲ 이근진 수필가 결혼기념일을 맞아 바다 여행을 마련했다. 겨울 파도의 사나운 모습과 제철 만난 게살 맛이 생각난 때문이기도 했고,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전화로만 `친구로 지내자`고 한 스님의 절이 그 쪽에 있으니 내친 김에 한번 만나보리라 작정한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왜 찾아 가냐며 의아해 하는 아내에게 군대 동기 만남의 희귀함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군대 동기이니 우리는 `당연히 친구`라며 일방적으로 반말을 해왔다. 그와 군대 생활을 같이 한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제대 후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한 부대에 있었던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전화 통화를 자주 하게 되었다. 얼굴 한번 본 일 없었지만, 그가 동기를 강조하는 통에 `됐나? 됐다!`를 외친 이후, 소위 말하는 니네돌이로 말까지 트는 사이가 된 것이다.그가 주지로 있는 절은 대게로 유명한 강구항 인근에 있었다. 작지만 아담한 대웅전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넓은 주차장 위쪽에 정결하게 보이는 요사채가 있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깊숙하고 길다란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받아 평안한 분위기가 풍기는 아담한 절이었다.합장 인사를 받았다. 친구하자는 예의 그 주지 스님이다. 통통한 양 귓볼이 도드라져 보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미소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인상이다. 내겐 합장이 익숙지 않았지만 처음 대하는 자리인지라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두 손을 모아 인사에 답했다.전화기로 주고받은 임마, 얌마도 있었지만 군발이 젊은 시절을 같은 부대에서 부대꼈다는 사실 하나가 우리를 스스럼없이 가깝게 했었나 보다. 대면은 처음인데도 호칭부터 서로에게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한동네 살던 옛 친구를 만난 듯이 허물없는 대화들이 한동안 오갔고, 그는 우리를 자기 거처로 안내했다.대웅전 입구의 사랑채에 구유 크기의 넓은 차 탁자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자리에 앉으니 진입도로 입구부터 건물 전체가 조망되었다. 군대 생활 내내 위병소 근무만 했다던 주지 스님 다운 건물들의 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놓은 차의 맛이 특이해서 재료를 물었더니 감 껍데기 차라면서 그는 스님의 본성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생명체에는 알맹이도 중요하지만 그 알맹이를 보호해 주는 껍데기도 중요하다`고.거처하는 방은 마치 학생의 하숙방 같이 단촐 했다. 온돌방에 이부자리와 갈색 책상 하나, 그리고 모니터 두 개를 연결한 PC가 전부였다. 벽에는 운동복이 한 벌, 무늬 없는 장롱 두 짝이 윗목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옹색하고 초라한 세간이 속인(俗人)인 나의 눈에는 약간 서글프게 느껴졌다.군 생활 때라며 사진 몇 장을 보여 주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의 배경에 나타난 내무반 풍경이, 우리가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업보를 물어볼까. 아니지. 스님이 된 사유나 들어 보자고 해도, 스님 된 것을 후회하지 않냐고 해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오랜만의 만남, 아니 얼굴 튼 초면이니 어찌 그냥 있을 것이냐며 스님 손을 이끌었다. `스님은 곡차를 마시시오, 나는 곡주를 드마.`고 했더니 보름 제(祭)마다 제 절을 찾는다는 보살님 식당으로 가잔다. 한상 그득 주안상이 차려졌다. 스님 전용 곡차 병이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찻잔과 술잔이 뒤엉겼다. 몇 순배가 돌자 그가 설파했다. `곡차나 곡주는 원래 같은 것이다. 기쁨을 함께하는 환호의 박수요, 슬픔을 나누는 위로의 손잡이이다. 우정을 묶어주는 튼튼한 밧줄이며 오해를 뚫어주는 송곳이요, 가식과 허례를 벗겨주는 솔직함`이라고….껍데기 인생을 이야기했다. 자식들을 언제까지 보듬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네는 껍데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 취기가 오를수록 나는 그를 부러워했다. 그러나 스님친구는 오히려 나의 껍데기 인생이 부럽다고 했다. 아내가 결론을 내려줬다. `서로를 부러워하라`고.

2016-01-22

바지랑대

▲ 김옥매 수필가 햇살이 내린다. 배롱나무 꽃잎에 앉아 발갛게 타들어 간다. 흙 담장에 기댄 접시꽃은 장마에 지친 얼굴을 매만진다. 세상을 모두 태워버릴 태세로 덤벼드는 더위에 맞서있다. 잠시 서 있었는데도 내 몸은 뼛속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온종일 불볕더위와 싸워야 하는 남편의 그은 얼굴이 생각난다. 짐을 가득 싣고 뜨거운 사막을 걸어가야 하는 낙타처럼 고단한 그의 모습이 이불 위에 어린다.첫 만남에 설렘은 없었다. 싫지 않은 정도였다. 가난한 복학생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저녁을 사 준다기에 분식집으로 이끌었다. 밥을 먹고 왔다며 그가 남긴 김밥, 그것이 부부의 인연으로 자랐다. 이상형이 아니었단다. 오늘 하루도 공쳤구나! 생각했을 테지. 자기가 남긴 김밥을 날름날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예뻐 보였단다. 가랑비에 옷 젖듯 우리는 서서히 젖어들었다.사슴처럼 기대어 단꿈을 꾸던 날이 아련하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부러움 없는 일상이었다. 고요한 숲에 돌개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남편의 일터를 휘저어 버린 거센 바람의 위력에 절망했다. 그의 어깨가 점점 내려앉았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처자식의 눈망울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절망의 끝에서 작은 끈 하나를 잡고 떠나던 뒷모습이 어제 같다. 그렇게 그는 떠돌이 인생을 시작했다.휴일이면 오가는 차비가 아까워 숙소를 지켰다. 살림이 하나 둘 일어갈수록 몸은 더욱 지쳐 갔으리라. 어깨에 얹힌 짐의 무게를 참고 또 참았으리라. 당신은 여자로 태어나서 참 좋겠다던 그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얼마나 힘들면 그런 말을 할까. 배웅하고 돌아온 어느 저문 날, 마시다 만 커피 잔에 형광등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까맣게 태운 마음 한 자락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무엇이 남편을 커피 한잔 마실 여유도 없이 내몰았는가. 문밖에 등 굽은 가을이 어찌 내 맘을 알았는지 찌르르 찌르르 울어 주었다.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며 주말 부부인 나를 부러워하는 눈길, 나도 모르게 서서히 남편의 부재에 익숙해져 갔다. 조심스럽게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치열한 적지에 그를 내몰아 놓고 이래도 되는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가. 또 얼마나 이기적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울증이 올 수도 있음을, 그것보다 낫지 않을까 애써 합리화시키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려 했다. 취미생활의 종류가 차츰차츰 늘어났다. 그즈음 노력의 결과로 남편의 나무에도 열매가 익어 갔다. 여유가 생긴 남편은 주말이면 어김없이 집을 찾았다. 꼼짝없이 남편에게 맞춰야 하는 현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숙소를 지킨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일 터. 짚신장수와 우산장수 아들을 둔 부모처럼 마음이 복잡해졌다.늘 자신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했다. 아내의 다양한 취미 생활에 진심으로 관심을 두었다. 풍물은 쇠가 최고인데 이왕이면 쇠를 배우지 그랬냐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휴일에 홀로 집에 남겨져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내며 심술을 부린다.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아이처럼 함께 놀아 달란다. 홀로 지내야 했던 외로움의 시간이 그동안 상처로 곪아 있었나 보다. 고름을 철철 흘리며 아픔을 호소하는 그의 모습이 내 책임으로 다가왔다.버티고 버텼을 것이다.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마땅한 핑계를 잡은 듯 자신을 놓아버린 것이 아닐까. 이제야 알았다. 남편은 내 인생의 줄을 받쳐주는 바지랑 장대였음을. 늘 씩씩하게 그 자리에 있었기에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그의 고통을 짚어보지 않았다. 무심한 아내였음이 부끄럽다. 그가 더 지치기 전, 그의 곁에서 젖은 빨래를 말리는 바람이 되고 싶다. 장대 끝에 잠자리로 내려앉아 지친 마음 어루만지는 약손이 되고 싶다.

2016-01-15

밥의 항변

▲ 최종희수필가·여름문학 편집장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보다 각별한 사이도 드물지 싶다. 미안하다는 뜻을 전하거나, 고맙다는 인사말을 대신하거나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할 적마다, 내 이름을 거론하며 속내를 표현할 때가 많다. 누구를 막론하고 집에서나 밖에서나 하루에도 몇 번씩 나와의 만남을 즐긴다. 처음에 어색한 이들도 나와 함께 하는 횟수만큼 정이 쌓여간다고 할 정도니 이만하면 그 역할을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아마 이러한 지위는 호위무사와 궁녀들을 대동하는 왕의 행차와도 맞먹을 것 같다. 나는 거의 혼자서 상 위에 오르는 법이 없다. 가는 곳마다 육, 해, 공군이 동행하기 마련이다. 채소와 생선과 육류들이 번갈아 따라다닌다. 그래도 그들 위에 군림하기는 싫다. 육즙이 좔좔 흐르는 고기의 자리를 탐한 적도 없고, 푸른 빛깔이 감도는 싱싱한 야채의 자리를 넘보지도 않는다. 예쁘고 화사한 쟁반에서 분에 넘치는 겉멋을 부리기보다, 소담스런 공기에 다소곳하게 담겨 있기를 원할 뿐이다.그러한 내가 있기까지 나를 거쳐 간 수많은 손길을 기억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울어댄 소쩍새의 수고로움보다, 한 톨의 쌀을 맺으려고 농부들이 흘린 피와 땀의 노고가 더 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언감생심 거드름을 피울 여유조차 없다. 사람들의 몸속에서 영양분을 만들어 활력을 불어넣는 본연의 의무를 다하기에 분주하다.가끔은 유구한 역사를 지켜온 나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지극정성으로 기울인 노력은 오간 데 없이, 시금치를 먹어 건강해졌다며 근육 자랑을 하는 뽀빠이를 보면 섭섭함이 밀려온다. 온갖 재료와 색상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한 빵이 호시탐탐 아침 식탁을 넘볼 때는 심기가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누가 뭐라 해도 예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가끔은 들려오는 세상사 소식에 따라 기분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어떤 날은 괜히 으쓱해진다. 건강의 중심에서 나를 꼭꼭 챙기는 사람들이 많아 존재의 필요성을 실감할 때나, 배고픈 이들을 위해 선뜻 자신의 몫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인정스러움에는 가슴이 훈훈해진다. 때론 분노가 치밀 때도 있다. 뇌물죄로 줄줄이 엮어가는 소식을 접하면 기가 막힌다. 자신들의 죄는 뉘우칠 기미가 없고 애꿎은 내 이름을 들먹이며 변명만 늘어놓기 일쑤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짓이라는 핑계가 들릴 때면 억울하기 짝이 없다.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이 저질러 놓은 마음 탓이면서 오히려 내가 원인인 것처럼 돌려 덮어씌운다. 그러고서도 진작 거물들은 미꾸라지 빠져나가듯 용케 도망쳐 버리고, 조종당한 힘없는 아바타들만 잡혀가는 현실에 한숨이 난다.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나를 취하기 위해 등이 휘어지도록 삶의 무게에 시달려야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막강한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이 차려 놓은 밥상을 빼앗으려 드는 파렴치한 행동에는 분통이 터진다. 이것을 밥그릇 싸움이라 부르며, 마치 생존전략의 대명사인 양 당당하게 나를 끌어들인다. 결코, 내가 모든 원인을 제공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제 다시는 함부로 내 이름을 들먹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이 벌이는 끝도 없는 쟁탈전에 동네북으로 취급당하는 것을 극구 사양한다.나에게도 소망이 있다. 요즘은 디지털 문화의 발달로 한 개의 상품을 다양한 목적으로 재창출하는 원 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use) 시대이다. 영화는 한 개의 상품이지만 극장 상영뿐만 아니라, 비디오, 만화, 게임, 캐릭터 등 다양한 관련 상품을 파생시켜 이익을 낳게 한다.디지털 시대에 몸담은 나도, 여러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포만감을 느끼게 하고, 삶의 질을 풍성하게 만드는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 분홍빛이 감도는 연인들에게 솜사탕처럼 달콤한 사랑을, 마음을 나누고 싶은 벗들에게는 끈끈한 우정을, 외로운 이들에게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정을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6-01-08

그림속의 크리스마스

▲ 신미경 수필가 내 살아온 날의 흔적이 담긴 상자에 있던 빛바랜 크리스마스카드를 펼친다. 순간 흰 눈이 뒤덮인 고즈넉한 시골의 교회당이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다.마치 내가 살았던 시골의 예배당을 옮겨놓은 듯한 풍경이 옛 추억들을 하나둘 깨운다.불심이 강했던 할머니의 호통 때문에 우리 남매는 교회를 다니지 못했다.그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삼 남매는 묘한 설렘과 흥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는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팥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아멘”을 외쳤다. 아마 넉넉지 못한 시대를 사는 할머니는 손주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못해 어쩔 수 없이그때만큼은 교회에 드나드는 것을 눈감아 주었으리라.“거기서 나쁜 거 가르치지는 않더라.” 하며 종교에 관한 당신의 완곡한 신념도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 앞에서는 꺾이곤 했다.온갖 색깔의 꼬마전구로 불 밝힌 트리로 꾸며진 이국적인 교회 안 풍경은 시골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집에서는 맛보지 못한 여러 종류의 과자와 사탕들이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도 관심은 온통 트리 밑에 수북이 쌓인 선물 상자들과 단내를 풍기는 간식거리에 곁눈질하던 까까머리와 단발머리의 아이들이었다. 풍족한 물질문명 속의 요즘 세대들은 그때의 동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전깃불이 꺼지면 별빛만이 시골 마을을 비추고 차가운 고요가 감돌았다.새벽녘에 밖에서 들리는 언니 오빠들의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성가 소리는 잠결에 들어도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도시에서는 밤새도록 들리는 자동차 소음 때문인지 성가를 듣기 힘들었다.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고요한 시골 길 밤하늘에 퍼지는 그 성가만큼은 아직도 그립다.어느 해 크리스마스 아침. 불교인 우리 집에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루돌프 사슴들을 이끌고 썰매를 타고 온 흔적이 있었다. 그 해는 산야가 온통 흰 색으로 뒤덮인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머리맡에 놓인 아버지의 늘어진 양말 안에는 뭔가 불룩한 것이 들어 있었다. 자식들의 환호성에 부모님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으며 우리는 세 개의 양말 안에 들어 있던 선물을 꺼냈다. 갈색 얼굴에 흰 눈물이 그려진 그 당시 유행하던 `못난이 삼 형제 인형`이 우리 삼 남매 선물이었다. 낙향해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였지만 한때는 배우를 꿈꾸며 도시의 변두리에서나마 문명을 접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랬기에 아마도 산타클로스의 의미를 시골서 키우는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으리라.맏이인 난 부모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나이였지만, 두 동생의 환한 웃음을 보며 부모님이 보내는 무언의 눈빛에 장단을 맞춰야 했다. 절대 가난의 그 시절 아이들에 비해, 요즘은 선물의 무게도 무거워져야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을 짓게 할 수 있다. 요즘 산타가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아마도 신용불량자가 되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못난이 인형의 뺨에 그려진 흰색 눈물이 닳고 닳아 그냥 눈물 모형만 남아 있을 정도로 간직하며, 작은 것 하나에도 오래도록 기뻐했던 그 시절이 이제 내게는 없는 것 같다. 세속적인 욕심이 비교적 적은 편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고 다니지만, 그 욕심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반대급부의 이득에 흐뭇해하는 영악함에 씁쓸해질 때가 있다. 그 옛날 인형 세트를 다 받은 것도 아니고, 세 개 중 하나만 달랑 받았음에도 가슴속엔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그 마음들을 다시금 느낄 날이 올까. 어른들에게도 크리스마스의 축복이 주어진다면 그 시골에서의 단발머리 작은 여자애가 느꼈던 작은 행복과 동심 속으로 다시 한 번 발 디뎌 보고 싶다.

2015-12-18

언덕 위의 여자

▲ 이필영 수필가 그림속의 커다란 시곗바늘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전시주제는 `하느님의 시간`이다. 인간은 창조주가 돌리는 거대한 시간의 바퀴 속에 살고 있다고, 화가는 자신의 종교적 인생관을 겸손하게 말한다.창조주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인간의 삶이란 것이 진정 탄생도 죽음도 창조주의 시간 속에 예정되어 있는가.갑자기 시곗바늘이 빙빙 돌아가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며 한 여인의 얼굴이 나타나서 함께 회전한다. 오직 하느님만 바라본 인간의 시간을 살다가 하느님의 시간 속으로 홀연히 사라진 여인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문밖출입을 제한했던 그는 끝내 홀로 죽었고 임종의 시간은 아무도 몰랐다.부음을 접한 날, 신을 향한 사랑으로 세상의 유혹에는 두 눈 친친 동여매고 하얗게 늙어갔던 그의 일생을 떠올리며 신을 원망했다. 삶의 내용이 어떠했던 독신의 말로는 혼자 쓸쓸히 죽어 나가는 것뿐인가. 언제든 닥칠 우리의 죽음은 어떤 현실로 주변에 알려질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는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처럼 우리의 죽음도 한 통의 전보로 혈육인 누군가에게 전해질까. 독신의 지인들은 너울처럼 덮치는 불안에 전율했다.선대부터 부유했고 고위공직자의 딸이었던 그는 호사스럽게 성장했지만 일찍부터 수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뼛속까지 서린 자존심과 호의호식을 미련 없이 버렸다. 수도원에 입회한 날 그는 환하게 웃었지만 정신에 반해 몸이 견디지를 못했다. 수도생활 중 가장 혹독하다는 수련기에 걸핏하면 쓰러졌다. 수련기를 마치고 병자 같은 몰골로 그가 휴가를 나온 날, 수녀원에서 조그만 보따리가 배달되었다. `본원의 규칙을 수행하기 어려운 부적격자로 결정되었다`는 쪽지가 든 소지품이었다.수도생활이 좌절되자 그는 독립된 공간을 원했다. 딸이 애련했던 부친은 본가와 외길로 이어진 언덕진 곳에 유럽의 엽서에서나 봄직한, 70년대 초반의 소도시에서는 보기 드문 그림 같은 집을 지어주었다. 부모의 슬하를 떠나면서 그는 자신의 거처를 수도공간으로 삼고 부모 외에는 누구이든 예고 없는 방문은 차단했다.일찌감치 많은 재산을 물려받자 어느 날부턴가 그는 `언덕 위의 여자`로 불려졌다. 새로 부임한 지역의 은행지점장이 그의 집에 인사를 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문밖출입이 없자 언덕 위의 집은 더욱 높게만 보였고 그는 점점 베일에 싸여갔다.얼굴을 감춘 지 십년이 훌쩍 넘어갔다. 선망이 슬금슬금 악의적 소문을 토해냈다.정신병에 걸렸고 귀신같은 몰골로 변했다는 괴상한 소문이 너풀거릴 즈음 그의 집을 방문했다. 계단을 한참 올라 당도한 대문에는 덩굴장미가 화려했고 담장이 성벽처럼 둘러쳐졌다. 초인종을 누르자 까만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대문을 열었다. 소문과는 달리 활짝 웃으며 포옹을 해주었는데 어둔 구석이 없었다.대문이 닫히고 언덕 위의 집을 방문했던 나와 일행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너나없이 얄팍한 월급으로 청춘의 한때를 통과하고 있었기에 그의 삶에 무한한 동경을 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독실한 신앙도 없었고 평생 허리띠를 졸라매도 따라잡지 못할 부도 탐만 났지 가질 길은 요원했다. 입을 꽉 다물고 걷던 누군가 갑자기 괴성을 질렀다. 불공평하다고 하늘에 주먹질을 해댔고 무거운 기분을 털어내느라 소리 높여 웃었다.며칠인지도 모른 채 발견된 주검, 장례미사에 참석한 지인들은 평생을 하느님만 바라본 그의 종말이 처연해 인간의 기준으로 신을 원망했다. 그러나 그의 조카신부는 아무도 몰랐던 임종의 시간을 `고인은 세상 누구도 모르게, 오직 하느님만 아는시간에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고 장엄한 의미를 부여했다.

2015-12-11

책상2

▲ 김현정수필가 눈을 감고 책상에 엎드려 봅니다. 참으로 편안해집니다. 마음속의 자잘한 주름들이 곱게 펴지는 듯합니다. 책상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제게는 소중한 벗이며 지기(知己)입니다. 지기에게 다가갈 틈이 나지 않으면 더러는 조급증 같은 것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가끔은 그와 마주앉아 몇 날이고 책의 행간 사이로 거닐고 싶습니다. 일상에서 비껴나기도 그리 쉽지 않아서 번번이 벼러 보기만 할 뿐입니다. 생각들을 모으고 걸러서 종이를 채워 가는 일도 여의치 않으면 작은 공간에서 골똘히 생각에 젖어 보기도 합니다. 투박하고 듬직한 지기는 본래 떡메를 받쳐 주던 떡판이었습니다. 몇 손을 거쳐 어찌어찌하여 키 낮은 책상이 되어 저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슴을 쓰다듬어 보면 감촉이 부드럽습니다. 넓은 가슴 펴고 있는 지기가 고향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의 날개를 펴 봅니다.이제 지기는 저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오도카니 기다림의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서 그리움이 번지듯 그는 갈빛으로 짙어지고 있습니다. 저의 슬픔도 기쁨도 다 알고 있다는 듯 은은한 빛으로 말을 건네옵니다.그대여 저와 함께 밤마다 불을 밝히며 꿈꾸기를 그치지 마세요. 먼저 살다 간 이들이 속울음을 울면서 꿈을 이루지 않았습니까.요절한 허난설헌, 사랑하는 이를 부르다 정신병동에서 사라진 까미 끌레유, 오직 진리만을 갈구하며 삶을 소진한 시몬느 베이유. 이들의 아픈 흔적들은 살펴보셨나요. 슬픔을 형상화시킨 자취가 아픔으로 전이(轉移)될 것 같아 되새겨 보고 싶지 않다고요.`의유당 관북 유람 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를 보셨나요. 의유당 김씨는 순조 29년(1829년)에 남편 이희찬이 함흥 판관으로 부임할 때 따라가서 그 부근의 명승 고적을 두루 다니며 쓴 기행문입니다. 조선의 현실에서 남편의 외방 임지에 아내가 따라갈 수는 없었지요. 잠영세가에서 더구나 범절과 덕행이 남다른 부인으로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지요. 한양에서 함흥까지 남편을 수행하고 게다가 명승지까지 여행한 그들 부부의 금실이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시대를 뛰어넘어 풍류를 즐긴 멋진 부부였나 봅니다. 북산루(北山樓) 기행은 여유로움에 취해 있는 듯합니다.“풍류를 일시에 주하니 대모관 풍류라 소리 길고 화하야 가히 들음 즉하더라. 모든 기생은 쌍지어 대무하야 종일 놀고 날이 어두우니 돌아올 제 풍류를 교전에 길게 잡히고 청사초롱 수십 쌍을 고이 입은 기생이 쌍쌍히 돌고 섰으며 횃불은 관 하인이 수없이 들고나니 가마 속 밝기 낮 같으니 밖곁 광경이 호말을 헬지라 붉은 사에 푸른 사를 이어 초롱하였으니 그렇게 어룽지니 그런 장관이 없더라.”의유당은 규중의 소녀자임을 잊고, 스스로를 승전하고 돌아온 장정으로 생각했다가 머리를 만지고 치마를 보고서야 아녀자임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남성 못지않은 호기와 인품에서 동시대의 여인들과는 거리가 먼 여유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규방을 떨치고 나와 기생과 하인을 데리고 거기다 고을 원님의 호위까지 받으며 여행하였고, 뛰어난 문장을 남긴 의유당의 호방함이 부럽지 않은지요. 슬프도록 아름답게 살다 간 이들은 우리의 마음을 울려 주지만 대범하고 다복한 이들의 맥도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요.모처럼 마음이 풋풋해집니다. 이름을 남긴 이들의 발자취가 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한 떨기 별이 되어 빛나지 않겠습니까.이름을 남기고 빼어난 문장을 남긴 이들의 자취도 빛나지만 지기가 살아온 모습에 더욱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오랜 세월 동안 많은 생명들을 거느리며 키워 온 당신의 생애는 더없이 순결합니다. 그대는 혼신을 다해 식솔들의 양식이 되었고 포근히 감싸 주었습니다. 이제는 더 맑은 눈빛을 간직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갈색 빛을 띄우며 이렇게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언제나 엷은 미소를 머금고 저의 주위를 말없이 살펴보렵니다. 그대의 얼굴에 언제나 윤기가 어리도록 애써 보렵니다.

2015-12-04

가을의 송사

▲ 남영숙 수필가 햇살이 날을 세우고 덤벼들던 여름 동안 가을이 영영 올 것 같지 않아 몹시 그리웠다. 이제 그 그립던 가을도 짙어졌다.한두 잎 우아하게 떨어지던 잎들도 지친 것인가. 건듯 부는 바람에 빗물처럼 쏟아져 땅 위에 눕는다. 떨어져 누워야 제 소명을 다 하는 것인 듯 그렇게.며칠 전 올해 세 번째의 조문을 다녀왔다. 달포 전의 문상 때 팔순을 넘겨 떠난 지인의 부친 앞에서는 그저 경건하였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러나 후배의 영정 앞에서는 눈물이 그렁하게 고인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감으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질 것이어서 자꾸만 눈물을 삼키었다.무성영화처럼 세상의 소리는 다 죽고 검은 옷의 상주와 문상객들의 동작만이 활동사진처럼 분주하였다. 영정사진 속의 그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어느 한때, 자신의 세상과의 빠른 결별을 모르고 있던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저 맑은 웃음이라니. 그가 웃고 있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렇게 처연해지지 않았을 것이다.우리 앞의 길 위로 무엇이 놓여 있을 것인지 모른다는 것에 우리는 암묵적인 동의를 한다. 어드멘가 우리를 부르는 그 무소불위의 힘은 인간이 세상으로 왔던 차례를 지켜주지 않는다. 모두가 그러하듯 그도 자신만의 지도와 나침반으로 항해하다가 거센 물결을 만나 그 소용돌이에 부서지고 만 것이다.그렇게 일순 삶의 경계 이쪽저쪽으로 나뉘어졌다. 사람살이의 허망함이여 그 씁쓸함이여.죽은 자에 대한 애절한 정은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결별이란 얼마나 캄캄한 것이냐. 슬픔에 대한 저항력은 생기지 않는 것일까. 슬픔이 올 때마다 면역 없어, 또 아프다.여인답지 않게 성품이 호방하고 너름새가 푼푼하여 같이 있으면 유쾌해지는 사람이었다. 그와의 아름다운 기억은 문신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선배라고 부르며 사진틀을 박차고 나올 듯하다. 우리의 생은 돌아갈 것을 전제로 출발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토록 망연할까. 성미 급한 사람, 어찌하여 그 길을 그리 서둘렀는가. 사위어가던 신체의 기관이 물의 흐름을 잠가버린 얼음처럼 일시에 기능이 정지되었으리라. 이제 그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은 흐름을 멈추어 다시는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껍데기 속에 갇혀 육신과 함께 소멸해갈 것이다. 육신과 결별한 그의 영혼은 윤회하여 다음 생에서 는 장생을 누려야 하리.언제인가 한 친구가 악에 받친 우리들만 살아남았다고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아까운 한 사람이 가버렸다. 그리고 또, 남은 자들의 남루한 삶의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장례식장을 나선다.이제 나무들은 거의 벌거벗었다. 떨어져 누운 낙엽에 한 해를 마감하는 우수가 묻어 있다. 주변은 철시한 상가처럼 쓸쓸하다. 그 속을 조문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온다. 누구의 영전으로 가는가. 깊은 추모를 위하여, 그저 사람의 도리를 위하여 모두들 분주하다. 그들이 이곳을 떠나는 순간 고인은 잊혀진다. 그것이 사람의 매정함이다. 아니 삶의 매정함이다.한 줄기 회한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가 병상을 지키기 얼마 전 만날 수도 있었다. 서로의 일정이 엇갈려 내일, 모레 하던 터였다. 얼마 후, 전화통화에서 그가 잠들었다는 가족의 말만 들었을 뿐, 그와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또 한 번의 통화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유추해 보면 그때, 그는 이미 영면(永眠)으로 바투 다가서고 있었던 듯하다. 그토록 황망히 그는 가버렸다.그렇게 미룰 것이 아니었다. 간단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쳇바퀴에 치여 서로 만나지를 못했다. 무슨 우선순위가 그리 많았던 것일까. 그때 한 번 보았더라면 이렇게 아쉽지는 않으리.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세상의 모습, 아름다운 가을을 그에게 헌정하고 싶다. 이제, 이승에서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그가 몹시 그립다.

2015-11-27

카나리아

▲ 조경숙 수필가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카나리아에 비한다. 뒤집어 말하면 카나리아 목소리가 그만큼 곱다는 말일 것이다. 아침 햇살이 퍼질 때 침대에서 듣는 새소리를 상상하며 카나리아 한 쌍을 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가. 바이올린 선율보다 곱고 아름다운 노래를 기다렸는데, 눈만 말똥말똥 거리며 쳐다보기만 한다. 낯선 환경 탓인가 싶어 며칠 두고 보기로 했다. 기다린 보람도 없이 한 달이 지나도 벙어리 행세다. 울지 않는다는 암컷만 두 마리 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중저음으로 맑고 투명한 소리를 내는 롤러 카나리아를 살 걸 그랬나. 살짝 후회도 되었다.사람도 기분이 좋아야 흥얼거리거나 노래를 부른다. 좁은 조롱에 갇혀 있으니 스트레스를 어찌 안 받겠는가. 베란다를 똥밭으로 만든다며 반대하는 식구들을 뒤로하고 풀어주었다. 조롱에는 먹이를 먹을 때나 목욕할 때만 들어가고, 분재들 사이로 왕복 달리기를 하듯 이쪽저쪽으로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날이 갈수록 참기름을 바른 듯 깃털은 윤기가 나고 눈도 더 초롱초롱해졌다. 어느 날부터 참새처럼 “짹”하고 단조 음을 내면서 암컷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노래를 못하는 놈이라고 무시하는지 암컷은 본 척도 않는다.“너 인마. 카나리아 맞아. 왜 노래를 못해. 마누라와 떨어져 살래?” 암수가 같이 있으면 울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수시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날도 새장 청소하면서 잔소리를 늘어놓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중학교 다닐 때 성악시험 치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반 아이들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주어진 곡 `금발의 제니`를 불렀다. 워낙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던 나는 교단에 서고 보니 멀미가 나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여러 사람 앞에 서 본적이 별로 없는데다 노래까지 하려니 오죽했을까.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시작하자 바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음치란 몇 백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 한데 바로 너로구나.” 순간, 반 친구들이 책상을 치며 뒤로 넘어가는 시늉까지 하는 바람에 교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이 성악시험으로 추락해 버린 것만큼 자존심을 건드린 상처는 깊었다.그 후 친구들이 비웃을까 겁이 나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음악 시간이면 친구들이 노래할 때마다 죄 없는 입술만 피가 나도록 물어뜯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보니 음악 선생도 그 학교로 전근을 왔다. 복도에서 서로 마주쳤을 때 먼저 나를 아는체했다.“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네. 이름이 뭐니?”내가 어물거리는 사이에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듯이 박장대소를 하면서“아. 맞아. 음치.”음악 선생은 늦은 확인사살까지 날렸다.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음악 선생도 잊고 그때 기억도 퇴색되어 희미하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려면 장벽 앞에 선 것처럼 먼저 가슴이 답답해 왔다. 직장에서 회식하고 2차로 노래방에 간다 하면 약속을 들먹거리며 엉덩이를 뺄 수밖에 없었다.누가 머리 나쁜 사람을 새대가리라고 하는가. 음치라는 말 한마디에 노래와는 담을 쌓고 사는 나와는 달리 녀석은 발성연습에 몰입했다. 평소에 높은 곳을 좋아해 빨래 건조대라든가 창틀 꼭대기에 즐겨 앉더니 조롱에 틀어박혔다. 땅거미가 내리기도 전에 자는 녀석이 새벽부터 어둑어둑할 때까지 끊임없이 목청을 돋우었다. 득음을 위해 폭포나 동굴 속에서 고된 수련을 하는 소리꾼이 따로 없다. 드디어 “삐리리릭 삐리리릭 쪼르록”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정도는 아니지만 예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카나리아는 목을 한껏 부풀리며 노래를 한다. 폼이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명창이다. 자기 목소리가 별로인 것은 안중에도 없이 자아도취에 빠진 수컷 옆에 언제 사랑을 나누었는지 암컷이 알을 품고 있다.

2015-11-20

커피 한 잔 마십시다

▲ 조명래수필가·영남수필문학회장 `커피 좋아하신다고요? 그럼 혹시 커피열매를 본 적은 있는지요? 바알갛게 익어가는 커피열매를 단 한 번이라도 보면 아마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커피를 즐겨 마시는 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커피를 즐겨 마셔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앞에 두고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언제부턴가 나에게 있어 커피는 편안함과 여유를 주는 정신치료제가 되었다.안타깝게도 요즘 들어 아내로부터 제발 커피 좀 줄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여전히 그 맛과 향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어 걱정이다. 건강상의 문제로 인하여 커피를 마시면 큰일 난다는 의사의 처방이 있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이 커피를 계속해서 마실 것이다.그런데 커피에 대한 나의 막연한 짝사랑에 변화가 생겼다. 지난여름 하와이 여행길에서 커피열매를 직접 본 후부터는 커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커피가 좋아졌다. 커피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나 할까.빅 아일랜드 코나(Gona)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커피농장 방문이 잡혀 있었다. 커피농장이 다 그렇고 그렇겠지 하는 생각에다가 전날 해발 3천m의 마우나케어(Maunakea)에 다녀와 그런지 약간은 심드렁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내 평생 언제 또 올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10여 분이나 달렸을까. 커피농장에 닿았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우산을 들고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는 밭으로 갔다. 얼핏 보면 익기 전의 도토리나 풋대추와 흡사한 모양의 커피열매가 가지마다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바알갛게 익어가는 것들과 아직 푸른 것들이 섞여 있는 것도 있었다.푸르고 붉은 커피열매에 빗물이 맺혀 있는 모습이 고왔다. 참으로 고왔다. 제 자리에서 그냥 곱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풋풋한 가슴을 앞세우고 달려들어 내 눈을 찔렀다. 손을 뻗어 움켜쥐고 쥐어짜고 싶을 만큼 색깔이 고왔다. 나도 몰래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운 것을 보고 온 몸이 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실내로 안내되어 수확한 커피열매를 자루에 담아 쌓아 둔 곳에서 부터, 껍질을 벗기는 공정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커피 시음장, 커피 판매장까지 차례로 구경을 했다. 그러나 커피 열매가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얼른 밖으로 나왔다. 좀 전에 보았던 곱디고운 커피열매들이 계속 눈에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모처럼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코나에서 사온 100%짜리 원두 봉지를 열어 먼저 코로 냄새를 맡는다. 향이 여전함을 확인한 후 한 숟가락 떠내어 분쇄기로 갈아낸다. 커피메이커에 필터를 찾아 끼우고 적당량의 물을 붓고 스위치를 누른다. 이내 물이 끓으면서 커피냄새가 방안 가득 번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어제 마신 커피에는와이키키의 칼칼한 파도소리와코나 해변의 바람 냄새가 들어있더니오늘 아침 커피 잔에는폴리네시안 소녀의 눈빛이 들어있네달콤한 사랑까지 들어있네심장을 뛰게 하는붉은 영혼의 열매아, 내 사랑 커피!커피잔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커피를 신이 내린 음료라 했다는 말에 깊숙이 긍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2015-11-13

애매한 동거

▲ 권동진 수필가·`수필미학` 편집장 어느 통신회사에 근무하는 여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전격적인 꼬드김과 중매로 수 십 만원의 몸값을 지급하고 동거가 시작되었다. 세상에 공짜가 있겠는가. 동거비용으로 청구하는 금액은 월평균 오만원이다. 휴일도 국경일도 없는 애첩 노릇에 인색하다고 타박이라도 하련만 함부로 약정을 어기지는 않았다. 가끔은 “배고파요.”를 부르짖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이유인즉 그는 충전된 에너지만 고집하는 편식가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그는 나날이 쇠퇴해가는 옆지기의 기억력 탓으로 업무가 더 가중되었다. 꼼꼼히 일정을 챙겨주고, 길 안내 임무를 맡기도 한다. 너무 의지하려는 옆지기 때문에 수시로 신열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명대로 살 수 있을지 걱정이다.그는 손때 묻은 정을 미끼로 인정머리 없고 사무적인 경우도 있다. 몸이 천근만근 젖은 솜처럼 무거운 아침에도 단 한 치 양보와 오차 없이 모닝콜을 울려댄다. 일어나기 귀찮아 이불 속으로 파고들기라도 할까 봐 날짜와 시간까지 들먹이며 보챈다. 융통성이라곤 찾아 볼 수조차 없다. 유별난 여인네의 바가지 등살이 이보다 심할까.출근 시 그를 제일 먼저 챙긴다. 곁에 없으면 손도 마음도 허전하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떨어지면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의 역할은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중에서도 급한 상황에 부닥칠 때 돋보인다. 출근길에 애마가 고장 나서 긴급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있다. 그가 저장해둔 정보로 직접 도움을 요청하니 위치 추적을 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출근을 서둘러야 하는 급한 상황에 얼른 동의했더니 발신 위치를 알아내고 손쉽게 찾아와 서비스해 준다. 초행길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오는 서비스가 신기하다. 그가 옆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그물처럼 섬세한 정보망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아부하지 않는다.고립무원의 산중이나 인적 끊긴 낯선 해안에서도 그를 곁에 두면 마음이 든든하다. 거리에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스산한 바람이 불 때, 오봉산에 올라 금호강 낙조를 바라볼 때, 궂은비가 추적추적 내릴 때 내 시선은 자주 그에게 멈춘다. 주름지지 않은 감성 탓인지, 막연한 그리움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날 온종일 침묵하는 그를 보노라면 왠지 야속하다.분신 같은 그에게 결점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옆지기의 일상을 다 알고 있음에도 비밀을 보장할 수 없단다. 문명의 부산물인 그가 비밀을 폭로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야 없으리라. 하지만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감추고 싶은 이야기와 모든 통화 내용을 알 수 있다니 유감이다.그뿐인가.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잦은 형식적인 언어를 남발한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은 식상하다. 간절함과 애절함이 사라져 버리고 빈 껍질 같은 언어들만 난무하는 시대이다. 출처가 묘연한 전자적 언어와 폭력적 언어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다. `불금`이 뭔지 모르는 엄마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무시하는 세상이다. `불금`은 불타는 금요일을 줄여서 하는 말이란다. 약정 위반으로 과도한 청구금액을 감당하지 못하고 빚쟁이로 몰리어 스스로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인기를 누리며 스마트하다는 그를 무작정 멀리할 노릇도 아니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살아 있는 생물체는 자기 방어와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필연적인 동거라 하더라도 심리적인 거리 유지가 필요하다. 나와 그 사이에도 보편적인 원리가 적용된다. 그와 서먹한 사이가 되더라도 내 일상에 지장이 없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싶다. 삶이 힘겹고 헛헛해도 잠시 그의 손을 뿌리치고 고독이 밀려오는 길목에 서 있겠다. 눈에 보이는 경계가 없고 가늠하기 애매한 동거라 할지라도 편리함을 빙자해 주객이 뒤바뀌는 바보가 되기는 싫으니까.그가 부른다, 반가워서 확인을 누르니 대리운전 메시지다.`쳇 오늘 누가 술 마신대`

2015-11-06

자격증 시대

▲ 임춘희수필가·범서통상 대표 스마트폰을 연다. 주말이라 자유를 즐기며 바깥으로 나간 두 녀석에게 전화한다. 가족회의가 있으니 빨리 들어오라고. 큰 녀석은 새삼스러운 나의 제안에 반기를 들었고 작은 녀석은 저녁 식사는 할 수 없지만 한잔하자고 한다. 맥주와 소주에 안주로는 과일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너비아니를 준비한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린다. 요즘은 자격증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종류도 다양하게 생소한 것들도 많다. 너나없이 써먹지 않아도 장롱 속에 눌러앉은 자격증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도 부모 자격증을 주는 곳은 없다. 만약 그런 학원이나 학교가 있어 자격증을 준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부모 되는 법을 배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운다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어른과 아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리라. 궁금증을 풀어 주는 국어사전처럼 부모 사전이라도 있다면 살아가기 편하겠지.생각에 잠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도 모르게 무모한 행동을 하게 된 적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 생각은 들어보지도 않고 윽박지르고 옴짝달싹을 못 하게 한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아이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부모가 되는 학교가 있다면 허둥대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간절한 생각이 나를 흔든다.가슴은 두방망이질은 한다. 입술도 떨린다. 이 마음을 전하지 않고는 숱한 밤을 지새우며 애를 태워야 할 것이다. 자식이지만 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용서를 구해야 그게 부모의 도리이리라. 그동안 내 감정에 치우쳐 소리를 질러댄 적이 많았다. 때론 부부 싸움 끝에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또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성적을 무조건 올리라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이들이니까 개구쟁이 짓을 하느라 집안을 어질러 놓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를 들었다. 나의 생활 방식에 맞추라고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았던가. 또 새로운 일을 접할 땐 서툰 건 당연한데 봐 주지 못하고 재촉했다. 혼자서 아빠 몫까지 다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자존심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아이들을 괴롭혔다. 모두가 어쭙잖은 욕심 때문이었으니. 뒤돌아보니 후회스러운 일이 하나하나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세 식구가 식탁에 앉는다. 얼마 만인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지만, 함께 식탁에 앉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일요일 저녁 친구들과 어울려 마음껏 놀고 싶었을 텐데 선뜻 달려와 주니 고맙다. 들뜬 기분에 평소에 아끼던 양주 한 병을 꺼낸다. 조각 얼음 몇 개 컵에 넣고 술을 붓는다.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아이들은 의아한 눈빛이다. 술잔을 드는 순간까지도.사랑하는 두 녀석 앞에 굳게 다문 입술을 연다. 우물 바닥에 깔린 크고 작은 자갈을 갈퀴로 끌어 올리듯.“야들아, 엄마를 용서해 도고. 엄마가 자격 미달이라 그동안 너그들 마구잡이 대했던 것 말이다. 엄마 자격증을 주는 학교가 있었으면 제대로 공부해서 엄마 노릇을 잘 했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남들처럼 온전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 거 까지도.”눈물을 질근 거리며 용서를 구했다. 작은 아이는 엄마가 눈물까지 보이는 것에 마음이 짠했던지 고개를 푹 숙인다. 큰 아이가 입을 열었다.“엄마, 뭐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을 해요. 내 주위에 친구들도 아빠 없이 사는 사람 많아요. 엄마는 성공한 사람 측에 들어요. 그래서 우리도 따라 하려고 노력중이고요. 남들은 아빠 엄마가 같이하는 일을 엄마는 혼자 다 해내셨잖아요. 덕분에 우린 이렇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누가 뭐래도 엄마가 자랑스러워요. 어린 나이라 그때는 잘 몰랐는데 요즘 와서 엄마의 삶을 생각해 보면 대단하다 싶어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마음이 아프기도 해요. 이젠 저희가 힘이 될게요. 든든한 보호자가 될 테니 염려 마세요.”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시간도 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이젠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된 걸 잊었다. 자식으로 인해 난 엄마 자격을 딴 셈이다. 아직 더 갈고 닦아야 하겠지만 …

2015-10-30

기억의 자리

▲ 김태숙수필가 “어렵게 멀어져 간 것들이 / 다시 돌아올까 봐 / 나는 등을 돌리고 걷는다.(중략)도망치는 동안에만 아름다울 수 있는 / 길의 어귀마다 여름꽃들이 피어난다.(하략)”- 나희덕 `기억의 자리` 중에서`5일의 마중`은 돌아오지 않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급변하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한 여자와 그것을 되찾아 주려는 남자의 애틋하고 눈물겨운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중국의 마오쩌둥이 주도하던 문화혁명의 여파로 단란하던 한 가족의 삶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남편의 피랍으로 충격을 받은 아내는 특정 기억의 한 부분이 지워지는 심인성 기억장애라는 병을 진단받는다. 영화는 도입부를 지나면서 `3년 뒤 혁명은 끝이 났다.` 라고 짤막한 자막으로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리지만 주인공들의 고달픈 여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마치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는 것처럼.혁명은 끝났지만, 역사가 남긴 상흔으로 얼룩진 그들의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남편은 천신만고 끝에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기억을 잃어버린 아내와 퇴락한 세월의 흔적뿐이다. 아내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보내온 편지에서 5일에 집으로 돌아간다고 적힌 편지 내용만 줄곧 기억하며 매달 5일이 되면 어김없이 남편을 마중 나간다. 돌아온 남편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채 역 앞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린다.굴곡으로 이어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훼손된 시간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상기`의 힘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고 복원하는 일일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에서처럼 크로노스를 극복하고 카이로스로 되돌아가는 일이다.크로노스는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이다. 크로노스 안에서 우리의 삶은 단지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 허무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영혼 안에서 나란히 겹쳐 놓임으로써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초자연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 잃어버린 것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존재의 시간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작용이 연속성을 지니기에 가능한 일이다.상기의 힘으로 다시 찾은 카이로스는 삶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준다는 점에서 희망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세 가지의 현재 시간만 있을 뿐이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론) 이처럼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현재뿐이다.우여곡절 끝에 피랍되었던 남편은 돌아왔지만, 헛되이 흘러가 버린 그간의 시간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녀는 불운한 시절 한순간의 기억만 지워진 채 훼손되지 않은 시간에 머물면서 기다림이란 희망에 기대어 지난날을 복원하려고 애쓴다. 잃어버린 크로노스의 시간 대신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우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재를 경험한다. 기억이란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발견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상기라는 것은 지나가 버린 시간을 복원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고통을 견디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망각이 부재라면 기억은 존재다. 기억은 의식의 심층부에 퇴적되어 흐르다가 어디에선가 다시 삶으로 피어난다. 그러므로 기억은 삶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보라가 흩날리는 역사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주인공의 모습이 절망으로 비치지 않고 희망으로 빛나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2015-10-23

밀림을 꿈꾸며

▲ 정기임 수필가 뉴질랜드는 겨울에도 나뭇잎이 풋풋하다. 간간이 비 뿌리고 바람 향기로운 겨울이 뉴질랜드에 있다. 아이들 뒤치다꺼리와 숨 쉴 틈조차 없던 직장 일을 송두리째 둘둘 말아 툭, 내던진 홀가분함이 어깨에 날개를 달았는가. 구름 위를 날던 열두 시간의 비행 내내 간지러움을 태운 듯 입술이 자꾸 헤실거렸다. 오클랜드 공항은 겨울이고 오월이었다. 오랜 세월 웅숭깊어진 나무들과 얄핏한 얼음에 싸인 듯한 대기 속으로 내리는 비가 부드러웠다. 지루한 장맛비도, 헐떡거리며 사람을 놀랬키는 소나기도 아니었다. 우주만물을 주관하는 어느 절대자가 물뿌리개로 생명을 키우듯 고루고루 조심스럽게 내렸다.우리 일행은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길을 달려 로토루아로 갔다. 유황이 풍부한 폴리네시안 온천수는 까칠한 일상의 찌꺼기를 고요히 밀어내고 상쾌한 매끄러움을 몸속으로 돌돌 불러들였다. 우리는 아이처럼 신이 났다. 몰래 숨겨온 스무 병 남짓한 소주와 공항 면세점에서 산 발렌타인 현지에서 산 맥주를 마셔대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자유가 계속되던 사흘째 밤, 술과 안주가 바닥났다.뉴질랜드의 밤은 적막했다. 음식점은 일찍 문을 닫고 술집은 드물고 노래방도 없었다. 24시 편의점은커녕 일반 마트조차 저녁 8시가 되면 셔트를 내린다. 하루 일을 마친 사람들은 가정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조용하게 산다고 했다.술과 안주를 구하러 낯선 도시, 인적 드문 밤거리를 헤매던 일행이 돌아왔다. 라면 두 봉지와 마른 멸치를 겨우 구했다. 라면을 먹을 일회용 젓가락을 3개 얻으려고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돈을 주고 샀다고 했다. 말이 다르니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고생을 한 모양이다. 아시아 먼 나라에서 어렵게 찾아왔는데 일회용 젓가락 하나 서비스 하지 않다니. 그깟 몇 푼이나 한다고.그러고 보니 사흘을 머무는 숙소 어디에도 일회용품이 없었다. 종이컵 칫솔 면도기 머리밴드 커피나 녹차티백은 물론 냉장고에는 물병이나 음료수 캔도 없었다. 종이에 싸인 비누와 작은 플라스틱 통 샴푸가 전부였다. 고개만 들면 펼쳐지는 울울창창한 숲을 숱하게 지니고도 나무를 원료로 하는 편리한 일회용품 사용에 이렇게 인색하다니. 풍성하게 소유만 했지 살아가는 편리를 찾을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 같았다.여행가이드가 말했다. 뉴질랜드는 자연을 보존해 세세손손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노력한다. 환경을 오염시킬까 제조업체도 설립하지 않고 필요한 공산품은 수입해서 아껴 사용한다. 주변 바다 밑에 석유가 내장된 걸 알지만, 오염될 바다와 자연환경을 염려해 개발하지 않는다. 석유도 전량 수입해서 사용한다고.얼마 전, 국제 보디페인팅 페스티벌 진행 보조요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스티로폼 도시락에 점심과 저녁 식사가 담겨 나왔다. 치킨과 음료도 일회 용기에 포장되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간식이나 식사를 마치면 필요가 끝난 물품들이 일회용 종이봉투에 가득 넘쳤다.페스티벌 시상식이 진행되는 화려한 무대 주변으로 일회용품으로 포장된 음식을 먹거나 사용하는 관객이 3만 명이 넘었다. 일회용 폐기물로 가득 찬 일회용 가방들이 만 개는 만들어졌을 것이다. 엄청난 일회용품 소비요 폐기물의 엄청난 생산이다.아름답게 보디페인팅(bodypainting) 했던 여러 나라 모델은 덧칠한 색채를 말끔히 지우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뉴질랜드 맑은 숲에서 태어나 첨단기술과 과학으로 일회용 컵이나 젓가락, 도시락으로 변신해 모델을 빛나게 도와주었던 나무들은 어디로 갈까. 초원도 없고 숲은 드물고, 제조업체와 자동차가 많아 공기마저 탁한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무참히 버려졌으니 `나는 다시 밀림으로 돌아가지 못 하는구나` 탄식하겠지.

2015-10-16

불청객

▲ 박영희수필가 “언니들, 여기 와서 노래 한 곡해요.”시아버님의 일흔세 번째 생신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창밖 시월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내리는 햇살은 투명했다. 나와 동서들은 무난히 상차림을 잘 끝내 가벼운 마음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강둑길을 지나던 낯선 차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온 차에서는 낯선 여인들이 내렸다. 커피 보따리며 케이크 상자를 든 그녀들의 옷차림이 어쩐지 예사롭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아버님과 그녀들은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나누었다.시아버님 친구 몇 분이 더 오시고, 거실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간다. 나는 어머님의 표정을 살폈다. 우려와 달리 크게 언짢아 보이지는 않는다. 큰어머님과 고모님도 덤덤하다. 남편은 일찌감치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시동생 두 명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와 동서들은 떨떠름한 기분이 되어 무심한 척 주방에서 얘기를 나누지만, 왠지 저쪽이 궁금하다. 그래도 고개를 들고 쳐다보기가 민망하다.파티가 끝나고 커피를 잔에 부어 앉아 계신 어른들께 쭉 돌린다. 향긋한 커피 향이 온 집안 가득 풍긴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방으로 들어가 있던 남편이 갑자기 거실로 나오더니 화난 목소리로 여인들을 향해 이제 그만 가보라고 버럭 한마디 한다. 갑자기 찬물이 확 끼얹어진 듯 분위기는 어색하고도 냉랭하다. 평소 고지식하기로 소문난 남편이다. 그도 뭔가 불편했던 모양이다.저녁이 되어 삼 형제 부부는 대구로 향했다. 차 안에서 돌아본 시댁은 정적이 감돌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남편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정체불명의 불청객이 정 다방의 여인들 임을 확인한다. 통화하는 목소리에 화가 덜 식었음이 역력하다. 가족들이 모처럼 모인 집안 행사에 그것도 아이들도 있는 집에 갈 데 안 갈 데 구분 못 한다면서 안 좋은 소리를 퍼붓는다. 평소 같으면 말렸을 나도 묵묵히 앉아있다. 다음날 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로회장인 시아버님의 생신을 축하해 주기 위해 단골 다방에 친구가 전화해서 이벤트를 부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해하라고 한다.다음 해 시부모님 두 분은 예고도 없이 홀연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첫 명절이 되어 거실에 모여 앉았다. 시동생의 고향 친구들도 함께였다.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는 그들은 남편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 남편의 유연하지 못한 스타일은 배꼽 잡을 얘깃거리다. 그들은 술자리에서 그때 사건을 끄집어낸다. “그건 행님이 잘못했니더.”라며 하늘 같은 형님에게 충고한다.그들의 관계를 불건전하게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다해 어르신들을 챙기는 다방 아가씨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관해 얘기한다. 그들의 말투는 익숙하지 않지만, 세상의 또 다른 지혜를 깨닫게 해 준다. 그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밤늦도록 얘기꽃을 피웠다. 천방지축이던 자신들 젊은 날의 치기와 예사롭지 않던 시부모님과의 추억담 한 구절씩을 읊으며 많이 웃고 울며 우리는 시부모님과 그날을 그리워했다.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문득 시동생 친구의 말이 떠올랐고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남편도 그랬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다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 불건전하다는 생각을 굳게 깔고 있었던 것 같다. 시골에 남아 있는 할아버지들과 다방 아가씨들 사이에 새롭게 형성된 문화를 굴곡의 시선으로만 보려 했다. 남편은 왜 그렇게 화를 냈으며 난 그것에 동조했을까. 남편과 나는 어떤 가치의 잣대로 그리 경계를 치고 싶었던 것일까. 돌이켜보니 그날의 사건 이후 한동안 시아버님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았다. 섭섭하셨다는 거다. 우리 자식들이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이상으로 지켜야 할 더 중요한 그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시아버님은 생전에 무척 살가운 분이었다. 오늘따라 아버님이 무척 그립다.

2015-10-09

달로 가는 길

▲ 이아세수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매서운 추위였다. 마당으로 나온 나는 무심코 올려다 본 까만 하늘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희고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그 자리에 멈추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였다. 저것이 무엇일까. 구멍에서 하얀 빛이 꿈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당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주의 이름 모를 외계의 생명체가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주변의 모든 것이 숨죽이고 숙명처럼 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나도 빛 속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추위가 자신의 힘을 한껏 발휘하던 깊은 밤.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가지가 그 구멍에 살짝 걸쳐져 있지 않았다면 난 그것이 달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추위가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라 내 등을 떠밀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달의 유혹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빛 속의 나는 이제 막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새끼였다. 처음 본 것을 어미라 여기 듯 저 나뭇가지만 잡으면 나는 달에 갈 수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달이 커져가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지가 내 속을 태웠다. 그렇게 환한 밤이 거짓말처럼 이야기가 되어 깊어갔다.아침에 올려다 본 나무는 열세 살 계집아이가 올라가기에는 너무 높았다. 달로 가는 길을 만들었던 가지는 하늘에 닿아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 처음부터 있었던 나무. 난 나무에 대해 알아야 했다. 달에 가려면 나무가 출발점이 되는 것이니까.나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의 출발점은 조금씩 잊혀져갔다. 그러다 내가 어른이 된 후 우연히 가죽나무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달로 가는 길을 찾던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다.대나무처럼 순을 먹는다 하여 죽(竹)나무라 불리는 나무가 있다. 그런데 이 죽나무와 너무나 흡사한 나무가 하나 더 있다. 생김새는 같은데 냄새가 지독하고 독성이 있어 그 순을 사람이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가짜 죽나무라는 의미로 가죽나무라 불리게 된다. 쌍둥이처럼 닮은 것 중 쓸모없는 하나를 가죽나무라 이름 붙였으니 다른 하나를 그냥 죽나무라 부르기 심심했는지 진짜를 의미하는 참죽나무라 불렀다. 다른 한편에서는 가죽이 가짜 중을 의미하는 가승(假僧)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름의 유래야 어찌되었든 가죽나무는 가짜라는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가죽나무의 순을 따서 먹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가죽나무의 순은 사람이 먹을 수 없다 하였는데 어찌된 일일까.어쩌다 이런 오해가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가죽나무라 불리는 나무가 사실은 참죽나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진짜를 가짜라 부르면서도 그 순을 따서 먹고 있다. 그럼 진짜 가죽나무는 무엇이라 부를까. 그것도 그냥 가죽나무다. 진짜도 가짜, 가짜도 가짜가 되어있다.그래도 신기한 것이 사람들이 말로는 다 가짜라 하면서도 진짜를 은연중에 찾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겨울밤의 이야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는 것처럼.살다 보면 종종 어느 것이 가죽나무인지 참죽나무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보는 나의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신이 서질 않을 때도 많다. 흑과 백을 구별하는 것이 모호하거나 아니 굳이 구별을 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그럴 때 난 눈을 감고 유년의 아름다웠던 겨울 저녁을 떠올린다. 맑은 달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진짜이면서 가짜라 불리는 나뭇가지를 잡아 본다. 그럼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그날 밤의 하얀 빛이 내 몸 구석구석 피가 되어 돌아다닌다. 항상 바로 눈앞의 현재를 살아야 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나에게 달로 가는 길을 만들어 주었던 가죽나무의 가지는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2015-10-02

차향에 마음을 뺏기다― 다산 초당을 찾아서

▲ 박경혜 수필가조붓한 산길이 마음을 잡는다. 가을볕이 설익었는데도 구절초, 들국화가 한창이다. 봄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수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가을꽃의 매력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자잘한 꽃들이 한껏 풍만해지려고 몸을 부풀리는 중이다. 이른 시간이라 길을 안내하는 이슬 맺힌 풀들의 모습이 더 청초하다. 다산 초당 가는 길. 그분이 걸어가신 유배 길을 따라 걷는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걷던 길이라 생각하니 애달픈 마음이 먼저 길을 나선다. 불혹의 나이에 유배라는 이름으로 산길을 오르며 그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풀꽃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그분의 눈길이 스쳐 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길섶의 모든 풀이 예사롭지 않다.귀한 인연은 따로 있는 것일까. 귀양을 간 다산은 주막에 들러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고 한스러워 한숨만 쉬고 있었다. 낙망하고 있는 그분이 범상해보이지 않았던지 주막집 여주인은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기르셔야 하지 않겠는가!”하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흘려듣고 말수도 있었을 한갓 늙은 주모의 말이 다산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던가. 그는 주막의 방 한 칸을 얻어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집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니 귀하디귀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많이 배우고 잘 난 사람만 좋은 스승이겠는가. 적재적소에서 만난 사람이 가장 좋은 인연이고,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이 걸어 오르던 산길이다. 드러난 뿌리들이 밟히고 밟혀 반질반질 윤이 난다. 땅 위로 솟구친 나무뿌리가 세월을 엮어 만든 아치가 있다. 이곳을 다녀간 한 시인이 `뿌리의 길`이라 이름 붙이고 시를 지었다. 다산은 모든 길의 뿌리였다는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나이도 더 된 것 같은 뿌리를 어루만져 본다.초가로 지어진 다산초당이 허물어지고 없다. 대신 그곳에 기와를 올린 건물이 우뚝하니 서 있다. 소박하고 정갈한 초당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아니어서 좀 실망스럽다. 다만 작은 연못에 돌을 쌓아 만든 아담한 연지석가산이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린다.일행이 걸음을 재촉한다. 다산이 차를 배우러 수없이 걸었던 백련사 가는 길을 따라 밟는다. 도중에 `해월루`가 있다. 사방이 훤하게 트였고,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인다. `바다 위에 뜬 달`이라는 뜻으로 지었다니 그 이름에 걸맞게 수려하다. 정말이지 팔베개하고 누우면 시 한 수가 절로 읊어 질 것만 같은 풍광이다. 다산의 주옥같은 시들 중 다수가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혜장선사와 자주 만나 담소를 나누고 우정을 쌓던 곳도 바로 여기다.이른 아침이다. 수확한 차 중에서도 가장 향이 좋고 으뜸인 우전차를 들고 백련사를 나선 혜장과 따뜻한 물을 준비해 초당을 나선 다산이 해월루에서 만난다. 온 산에 가을이 깃들고 풀벌레소리도 요란한데 서로 반가이 마주하여 안부를 확인한다. 은은하게 우러나는 차향에 마음을 담아 주거니 받거니 시 한 수가 뚝딱이다. 찻물이 떨어지고 햇발이 성글어 질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담소가 이어진다. 해가 서산에 걸릴 즈음에야 내일을 기약하며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로 돌아선다.현대인은 빨리 빨리라는 말에 길들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산다. 성급한 인스턴트에 익숙해질 후대의 자손들에게 차를 덖고 말리고 향을 우리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르쳐주기 위해 다산은 그리도 열심히 공부했던가. 차를 만들고 우려내는 일은 짙은 향과 더불어 상대방을 오래 내 몸에 간직하고 기억할 시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문득 그런 사람이 내게 몇이나 되나 짚어보는데 생각이 진전되지 않는다. 가슴에 돌멩이 하나가 얹힌다.나는 누군가의 뿌리가 되어준 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살아오며 깊은 향이 나는 사람을 소홀히 하여 잃은 적은 없었는지, 또 내가 누군가의 향 짙은 차이기를 무심결에 놓쳐버린 적은 없었는지.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을 거쳐 다시 뿌리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동안에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이 많다. 어느새 가을볕이 제법 이울어 있다.

2015-09-18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 오는 것이었다 ― 토산못 이야기

▲ 이경희수필가·경일대 외래교수 토산못에 노을이 내려앉는다. 못둑 너머로 보이는 서녘 하늘에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간다. 흑백으로 떠오르는 토산못의 풍경은 내 무의식과 육체에 깃들어 있다가 미명 속에서 하나둘씩 형체를 드러내는 물체처럼 되살아난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좇아가듯 나를 찾아 나선다. 토산못은 내 생의 수원지 혹은 뿌리의 은유와 같은 공간이니까. 못둑에 도열해 있던 큰 나무가 환영처럼 떠오른다. 작은 여자아이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동무와 같이 못둑을 걸어간다. 이 못에서 멱을 감고 스케이트를 타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내 의식 속 유년기의 공간은 빛나는 폐허다. 생의 기저를 이룬 공간에 대한 천착은 파편화된 시간에 대한 복원작업이다. 시간에 매몰된 기억을 하나씩 건져 올려 꿰매고 연결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이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 오는 것`이라는 시구를 발견하던 시점부터다. 솔직히 몇 년 동안 낡은 언어와 진부한 감상이 직조된 회고조의 글쓰기에 조금 질려있던 참이다. 하지만 나도 늙음을 향해 간다는 자각은 냉혹한 진실이 아니던가. 생의 비등점에서 끓어오르는 비애가 목까지 차오르면 유년기의 고향을 떠올린다. 그곳은 무쇠 난로의 온기처럼 따스하다.토산못은 내 고향 경산 진량에 있는 저수지다. 큰 강을 모태로 두지 못한 대지는 늘 물이 귀했다. 게다가 지층이 청석이라 물을 오래 머금지 못하고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토산못은 대구 근교의 낚시터로도 유명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논에 필요한 물을 대는 중요한 수원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아낙들의 빨래터였으며,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지금은 일부가 매립되어 예전보다 크기가 줄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을 앞산에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토산못에는 가시연꽃, 물밤, 말나물 등이 자랄 정도로 맑은 물이 그득했다. 못둑에는 아름드리 물버드나무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던 셈이다.바다를 처음 본 것이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그때까지 토산못이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였다. 억울하게 죽은 아기 귀신이 다른 아이를 잡아간다는 속설이 난무하던 시절, 토산못에는 익사사고가 잦았다. 여름 방학과 얼음이 녹을 무렵 동네 아이가 한 명씩못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들을 별나게 단속했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동네 아이들은 낡은 팬티만 걸치고 토산못으로 뛰어들었다. 세숫대야를 앞에 쥐고`쫑대`라 부르는 보 근처에서 헤엄을 치면서 놀았다. 겁이 많았던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를 바라보거나 그것도 심심하면 풀각시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봄볕이 도타워지면 못둑에 연둣빛 풀이 돋아났다. 놀다가 배가 고픈 아이들은 간식으로 삐삐순(삘기순)을 뽑아 먹었다. 피막을 까면 나오는 연한 새순을 먹으면 단맛이 났다. 삐삐순이나 찔래순을 먹고 나면 입안에 풀 향기가 가득했다. 초여름 손이 미처 닿지 못하는 풀숲에 숨어있던 산딸기를 향한 유혹은 얼마나 강렬하던가. 성장기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만난 몇 개의 풍경은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입체적으로 복원시켜 준다. 그 첫 번째 공간이 토산못이다. 다행스럽게도 토산못은 아직도 고향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산못의 풍경은 변했다. 가장 안타깝고 아쉬운 것이 못둑의 나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 나무가 만들어주던 그늘의 넉넉함과 그 사이를 불어오던 바람의 결은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본래 생이란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보행처럼 지난하고 완강하지 않던가. 그 길에서 가끔 돌아보는 유년의 시공간은 생생하고도 아련하다. 유년기는 식물성의 시간이다. 경쟁이나 생존의 절박함이 없는 무균실과 같은 시간이기에 순결한 자연의 나를 만날 수 있다. 존재와 공간은 운명적으로 엮어진다. 그 공간에 피어나던 작은 풀꽃 같던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는 사실은 슬픈 진실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쓸쓸하지만 감미롭다. 실존적 삶에 매장당한 기억과 공간을 탐사하는 일은 미래의 나를 맞이하는 준비이기도 하다.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오는 것이기에.※에세이 제목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 오는 것이었다`는 이문재의 시 `소금창고`에서 따왔다.

201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