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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늙어 간다는 것

▲ 김병래 수필가 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우람하고 기품이 있다. 오래된 시골마을에는 으레 그 마을과 유래를 함께한 나무가 한두 그루씩은 있다.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나 당집 옆에 선 노거수들은 마을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갖은 풍상을 이겨내며 꿋꿋이 살아온 내력이 공경과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나무뿐만이 아니라, 오래된 건축물이나 유물들도 그 담아온 세월에 값하는 대접을 받는다. 대단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물건이 아닌 단순한 생활용품도 오랜 세월의 무게가 실리면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세월이란 한갓 덧없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성소멸하는 삼라만상의 내력인 것이다.사람도 한때는 노인을 공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농경사회가 그렇듯이 노인이 가진 노하우야말로 그대로 삶의 지혜가 되었던 시절이었다. 살아온 세월만큼 축적된 삶의 내용이 그만큼의 의미와 가치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눈부신 과학의 발달을 가져온 산업화시대를 거쳐 동서고금을 하나로 잇는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노인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세상에선 노인은 그저 구닥다리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지혜보다는 지식이 우선인 현실, 경륜보다는 첨단이 우위인 사회에서 노인들이 설 자리란 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런데도 경제사정과 의술의 발전으로 평균수명은 늘어나서 바야흐로 노령인구가 사회적 골칫거리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년퇴직을 하고도 수십 년이나 남은 생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자식들까지 외면을 해서 경제적 노후대책조차 막연한 지경에 이르면 실로 처량하고 우울한 말년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우선은, 청장년기에 못지않게 노년기도 인생의 한 중요한 시기라는 인식이 있어야겠다.나는 노인들도 젊게 살아야 한다는 말에 별로 동의하고 싶지가 않다. 화사한 옷차림에 염색을 하고 주름을 없애고 젊은 아이들 흉내를 내는 것이 노인들이 할 바람직한 행동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고 청년은 청년다워야 하듯이 노인은 노인다워야 자연스러운 것이다. 봄날의 신록이 싱그럽듯이 가을의 단풍도 찬란하고, 잎을 다 지운 겨울나무 역시도 그 나름의 품격과 아름다움이 있다. 늙어가는 것도 엄연하고 종요로운 인생의 한 과정인 것이고, 성장기의 풋풋함과 청년기의 무성함 못지않게 노년기의 쇠락과 허허로움도 아름다운 모습이고 절실한 정서일 수 있는 것이다.갈수록 머리카락은 성글어지고 치아는 부실해져서 생의 일차적인 쾌락인 맛과 멋은 거의 포기를 하게 된다. 폭삭 늙어버린 외모로 남의 시선을 끌 일도 없어지고 제대로 씹을 수가 없으니 먹는 것도 즐거움이 되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무슨 낙으로 살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대신 외모보다는 내면으로, 사람보다는 자연에 가까워지는 거라고나 할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편안함이 있고, 거칠고 소박함에서 오는 불편함이 오히려 삶의 절실함에 닿게 한다.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꽃을 내려올 때 보았다는 시구처럼, 인생의 내리막길에도 풀꽃이 있고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잎사귀들이 보이는 것이다. 늙음을 특별히 예찬하고 싶은 심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청춘을 돌려달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인생이 아름다운 거라면 자연스럽게 늙어가서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2016-12-02

안대를 떼어내고

▲ 강길수 수필가약국 문을 나선다. 기분이 참 좋다! 밝은 햇살이 망막을 파고들어도, 덴바람이 수술한 눈동자를 덮치며 지나가도 개의치 않는다. 이틀 만에, 그리도 지루하게 느껴지던 안대를 발걸음도 가벼이 떼어 버렸기 때문이다. `군날개` 제거 수술을 한 오른쪽 눈동자가 붉게 충혈 되어 있어도 날아갈 듯이 마음은 가볍다. 사오년 전 여름, 집에 보관하고 있던 쌀에 바구미가 생겼다. 아내와 상의 끝에 옥상에서 말리면서 바구미를 쫓아내기로 하였다. 쌀의 양이 제법 되어, 야외용 돗자리 3개에다 쌀을 고루 펴 널었다. 마르며 쌀이 갈라지는 것을 줄이려 그늘에서 말렸다. 또 날아드는 참새 떼와 비둘기 떼 때문에 쌀을 지켜야 했다.바구미가 많이 먹은 쌀은 보기에 거의 삼분지일은 쌀가루로 변해보였다. 해질녘 쌀을 거둬들이기 전,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플라스틱 바가지로 쌀가루를 바람에 날려 보냈다. 그러던 중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달라지며, 쌀가루가 내 눈에 수 차레 날아 들어갔다. 이태를 이렇게 여름에 옥상에 쌀을 널어 말리며 지냈다.재작년 가을에 오른쪽 눈동자 결막에 흰 얇은 막 같은 것이 보여 안과에 갔더니 `군날개`란 진단이 나왔다. 시력에는 영향이 없으나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겁이 났다. 의사에게 발병 원인을 물어 보았다. 몇 가지가 있는데, 눈에 균이 오염되어 일어날 수 있는 등이 그것이라고 설명했다.뇌리에 바구미 쌀가루 생각이 떠올랐으나, 그게 원인인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수술 마치면 일주일간 안대를 끼고 살아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미련스레 일 년 반 이상을 미루었다. 거울을 보니 얇은 막이 눈동자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그저께 수술을 했다.약물 마취 등 준비를 마치고, 군날개의 막을 제거하는 수술이 시작되었다. 마른 손바닥을 재빨리 비빌 때 나는 소리 같은 가벼운 기계음이 잠시 귀를 거스른다 했는데, 벌써 수술이 끝났단다. 물약을 넣고, 고정식 안대를 설치했다. 적어도 이틀은 왼쪽 한눈으로 지내야 했다. 사물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아 불편했다. 한눈만 안보여도 이렇게 불편한데, 두 눈 다 보이지 않는 분들은 얼마나 어렵게 지낼까.안대를 제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틀 동안 한 줄 치기도 몇 배로 힘들던 자판을 이전처럼 두드리며 생각해본다.우선, 친절하고 성의껏 내 눈을 수술해 주고, 보살펴 준 의사와 간호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다음으로, 한쪽 눈이 안 보인다고 혼자서 많이 불편해 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스스로에게 책망하는 마음이 앞선다. 앞을 못 보는 많은 분들과, 몸이 불편한 수많은 사람들에 비하면 내 이 작은 불편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비록 남들에게 표는 내지 않았지만, 이틀을 묵묵히 참지 못한 자신의 감추고 싶은 모습이 부끄럽다. 그 다음으로, 건강을 포함한 많은 일들을 자꾸 미루어 왔던 지난날의 내 삶의 모습이 또 확인되어 스스로에게 미안한 생각이 또다시 든다. 하여, 어느 영성운동에서 배웠던 `삶은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우친다.끝으로, 정신치료를 포함한 의료기술이 더 빨리 완벽하게 발전하여, 인간은 물론, 나아가 모든 생명체의 `생로병사` 중에서 `병`만이라도 완벽하게 해결할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제발 이 푸른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군대`와 `전쟁`을 없애고, 그 자원과 기술로써 `생명체의 병마`를 극복하는 길로, 우리 인류가 하루빨리 나아가기를 소망하고 기도한다. 그 길이야 말로, 인간이 진정 `만물의 영장`이 되는 길이 될 것이므로….

2016-11-25

연극을 보고 난 후

▲ 김주영 수필가 여름을 건너온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다. 마로니에 공원도 가을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벤치에 앉아 코끝에 닿는 바람의 상큼함을 느낀다. 젊은 청년들이 다가와 연극표를 건넨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과 한바탕 웃을 수 있다는 기대에 표를 샀다.`죽여주는….` 극장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니 연극이 기대된다. 기다리는 사람들 옆에 줄을 섰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젊은 부모들도 몇몇 보인다. 자녀와 함께 연극을 보며 주말을 보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부모와 함께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은 교육이다.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내 옆에 앉았다. 연극은 관객 참여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연이 시작되고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아이와 부모들은 즐겁게 공연을 관람하는데 공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대 위에는 TV에서도 모자이크 처리되어 보여지는 장면과 죽음에 대한 소재가 이야기되어지고 있다. 배우들의 과감한 표현들로 관객들은 모두 웃고 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반전을 준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폭력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같이 웃고 있는 부모들은 아이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인가? 연극내용을 극화시키고 웃음을 유도하기 위해서 선택된 소재로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객석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유독 나 혼자만인가? 아이들은 이 연극을 보고나서 죽음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면 어쩌나?연극을 마치고 배우들에게 어떤 의도로 표현을 했는지, 폭력적인 장면의 심각성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았느냐고 질문을 했다. 하지만 배우들은 어느 누구도 기획의도를 모르고 있었고 단순히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고 돈벌이로 연극을 하고 있었다.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TV를 사지 않는 경우와 거실을 서재로 꾸민 지인들도 있다. 거실을 서재로 꾸며 놓고 자녀와 함께 책 읽는 시간을 많이 가진다. TV를 생활환경에서 배제 시키는 것은 폭력적이거나 자극적인 화면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TV 프로나 대중매체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표현할 때 박진감 넘치면서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TV 시청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습득해지는 영향은 심각할 수 있다. 폭력적인 화면을 바라보면서 공포감에 대해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폭력을 인식할 수도 있다. 시청한 내용을 습득하여 흉내 내거나 주인공 등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어린이와 10대 청소년들은 그런 무의식적 습득에 의한 심각성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그 시기에 습득한 것들이 가치관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함께 나들이 나온 부모들도 나처럼 제목에 호기심이 자극했거나 출연하는 배우 몇 사람 때문에 이 연극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이들과의 함께 웃는 시간이 좋아서 그냥 있었을까? 연극을 보면서 심각성을 인지했다면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인격형성 발달의 중요한 시기가 유아기이기 때문이다. 유아기에는 호기심도 많고 자기중심적 관점으로 사물과 상황을 판단 한다. 그렇기에 작품에 등급심의가 있다. 하지만 연극작품에서는 너무도 관대한 것 같다. 영상물들은 등급심의가 있어서 나이제한이 있다. 나이별로 관람 가능한 등급을 정하는 것은 부적절한 표현이나 내용으로부터 아동이나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대학로 연극에는 그런 규제가 없는 듯하다. 창작의 자유가 있다지만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표현은 제도적으로 관리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2016-11-18

겨우 살기

▲ 김병래 수필가 인류의 역사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지배하는 역사였다. 의식주를 위해 땀 흘려 수고하는 것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었지만 그 대가는 대부분 강자들의 차지였다. 이 땅위에 세워진 찬란한 인류 문명의 유산이란 것 치고 강자의 위세와 영화와 안락을 위해 약자들의 눈물과 피땀과 희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이 인류가 구가해 마지않는 문명의 본질이고 인간 세상의 실상이다. 인간사회도 일견해서는 약육강식하는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지만, 동물들은 생존에 적당한 양 이상은 결코 탐하는 법이 없는데 비해 인간의 욕망은 블랙홀처럼 밑도 끝도 없다는 점에서 천양지차다. 말하자면 탐욕이 있고 없음에 인간과 동물이 구분지어 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문명이란 결국 탐욕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문명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생물학적 조건이나 지구 생태계는 유한하다는 것에 파국적 비극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 파국적 징후들이 지금 도처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갈수록 심각성을 더해 가는 환경의 오염과 생태계의 파괴, 자원의 고갈이 그것이다. 각계의 뜻 있는 인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인류의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귀담아 듣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다.걷잡을 수 없게 가속도를 더해 가는 문명을 추락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보다 높은 강도의 편익과 쾌락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온갖 재화(財貨)가 또다시 더 큰 욕구를 확대재생산하고, 그 악순환의 소용돌이가 자연의 질서에 대해 인류를 무정부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문명의 급류에, 무정부상태의 소용돌이에 함몰되고 휩쓸려가는 인간들에게는 추락에 대한 예감이나 속도에 대한 자각증상이 별로 없다는 것이 사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텔레비전의 `동물의 세계`를 보고 있노라면, 인류가 오늘날 무엇을 향해 어떤 모습으로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인류가 편익과 쾌락과 변화의 속도감에 탐닉해 있는 동안 지구 생태계의 질서로부터 얼마나 멀리 이탈해 버렸는지, 그리고 그 일탈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자연은 극히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자연이 그러하므로 나도 그렇게 하리라`남의 집 다락방에서 렌즈를 갈아 호구하며 살다간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하지만 그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킨 오늘의 인간들로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도 오히려 죄스러워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인간의 덕목은 `겨우 살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겨우 살기란, 쉽고 편하게 살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간신히, 어렵게 살자는 것이다. 전력투구로 땀 흘리며 절실하게 산다는 것이고, 최한의 것으로 자족하며 산다는 것이며, 훼손하고 오염시킨 자연에 대해 부끄럽고 죄스럽게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분별한 쾌락의 중독에서 치유되는 길이며, 탐욕의 노예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길이며, 파괴된 생태계를 회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류가 진정한 생명의 자리를 찾는 일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길이며, 동서고금의 성인현철들이 한결같이 모범을 보여준 안빈낙도에 이르는 길이다.

2016-11-11

입장 바뀐 날

▲ 강길수 수필가수능시험이 있는 달, 11월 첫날이다. 마침 날씨도 수험생들의 마음이라도 닮았는지 갑자기 초겨울같이 추워졌다. 종교단체들에선 수험생을 위한 기도 같은 신앙 행사들이 벌써 진행되고 있다. 수년 전, 난생처음 시험 감독을 했던 날이 떠오른다. 그것도 국가기술자격 시험 감독을 했다. 참여하는 한 단체에서 시험 감독을 해보겠느냐고 제의하기에 동의하고 나가게 된 것이다. 그 몇 년 전만해도 늦깎이 공부로 학점을 따겠다고 열심히 시험을 보았던 나다. 김건모의 노래 중에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는 가사의 노래도 있었지만, 아침에 집을 나서며 수험자에서 감독으로 바뀐 입장을 경험해 본다고 생각하니, 걱정도 되고 또 야릇한 호기심도 발동하였다.간단한 사전 교육을 받고 시험장에 들어갔다. 한 시험장에 두 명의 감독이 배정되었다. 수험자들은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했다. 다른 시험장에는 60대도 있다 했다. 나는 감독이 처음이기에, 경험 있는 아들 같은 또래의 공무원과 한 조가 되었다. 시험이 잘못되지 아니하도록 살피어 단속하는 감독으로서의 기본업무 외에, 여러 부수적 일이 주어졌다. 신분증으로 수험자의 신원을 확인한다든가, 시험지와 답안지카드의 배부, 회수 출석자와 결석자의 파악, 통계 질문에 대한 대답, 공지사항 판서 및 공지, 시험 시작과 종료의 알림과 같은 것들이다.함께 배정된 젊은이는 아마도, 내가 초보감독이고 나이도 자기보다 많다고 보아 스스로 알아서 잘 해주는 바람에, 나는 눈치껏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했다. 그리하여, 내 첫 시험 감독 일은 생각보다 쉽게 잘 끝났다. 아침 8시 20분에 도착, 오후 네 시경에 마쳤더니 다리가 좀 아팠다. 하지만, 하루 감독하고 받은 일당은 거금 일십 만원이었다. 아내는 오만원 짜리 두 장이 든 봉투를 받아들자, 무척이나 좋아했다.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첫 직장에 취업하면서부터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병행한 나는, 아마도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랜 기간 시험을 쳐야 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시험을 치를 때도 이따금씩 생각한 일이지만, 시험 감독을 하고 보니 더 명료해진 생각이 있다. 바로 `인간은 왜 두 가지의 존재론적 시험을 치러내야 할까?`하는 생각이다. 하나는 모든 생명체, 나아가 모든 존재가 치러야하는 생존시험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만이 치르는 시험이다. 바로, 인간이 만들어 사람의 우열을 가리는 시험이 그것이다.우주 안에서 은하나 태양계, 행성, 위성들과 그 안에 존재하는 분자나 원자, 그보다 더 작은 입자나 파동, 그리고 힘(에너지)들이 치르는 시험도 분명 있을 텐데, 나는 그에 대한 지식과 감각은 사실 무디다. 그러나 우리 지구별 생태계의 생명들이 치르는 시험은 조금은 알고 또, 느낄 수 있다 싶다. 바로, 모든 생명체는 `적자생존의 시험`을 치러내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내가 시험 감독을 한 시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위적인 시험을 치러내며 살아야 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면 할 이야기가 많고 가슴이 답답해진다.나는 생각했다. 인간이 진정 영혼과 이성을 가진 지성의 존재라면, 시험과 관련해 그에게 걸맞은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를. 그때, 분명히 내 이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인간이 진정 인간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스스로 만든 시험만이라도 치르지 않고, 지구별의 모든 사람이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지구촌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그리될 때, 인간은 그전까지 모르던 새로운 세상, 다른 차원에 올라선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아울러 믿어졌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모두가 인격적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는 내 마음이 그려낸 하나의 꿈,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았을까.

2016-11-04

어떤 솔거

▲ 이순영수필가 성주(城主)가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다. 신하들에게 성안에 쓸 만한 환쟁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한 신하가 있는 대로 보는 대로 그려내는 귀신같은 솜씨를 지닌 환쟁이가 있다고 아뢰었다. 성주 앞에 불리어 온 그는 한 치의 감정도 동요됨 없이 열흘 정도 성안에 머물게 해 준다면 성주의 영정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성주는 흡족해했고, 화가는 그날부터 성안에서 성주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에서, 어떤 때는 나무그늘에 숨어서, 성주가 잠을 깨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관찰을 멈추지 않았다. 성주는 그림은 그리지 않고 자기만 따라다니는 환쟁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화가는 담담하기만 했다. 어느 날 화가가 명상에 잠겨 있을 때 우두머리 신하가 불쑥 찾아와서 심문을 하듯 훈계를 해도 화가는 흔들리지 않았다.관찰을 한 지 이레 째 되는 날, 그의 머릿속에는 성주의 모습을 수 천 조각으로 나눌 수도 있고, 다시 결합할 수도 있고, 어느 한 부분을 확대할 수도 있고, 축소 할 수도 있을 정도로 훤하게 조각 되어 있었다. 붓을 들기 시작하자 숙식을 잊은 채 몰입하여 그림을 그렸다.화가는 두루마리에 완성된 영정을 성주 앞에서 펼쳤다. 그림이 서서히 나타나자 성주는 노발대발하여 당장 치우라고 고함을 질렀다. 끝까지 펼쳐진 그림 속에는 터질듯 한 볼, 뚱뚱한 몸집, 두껍고도 큰 입, 어느 부분이든 실물과 똑 같았다. 더구나 그림에서 풍기는 분위기까지도 성주 그 자체였다. 심술과 탐욕덩어리가 그대로 그림 속에 녹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은 완벽한 성주의 모습임을 알면서도 성주님을 모독했다고 야단을 치고, 화가를 감옥에 가두었다.다음 날, 성주는 다른 사람을 불러와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는 닷새 만에 아주 인자하고 후덕해 보이는, 흡사 부처님의 온화한 모습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성주는 기뻐서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었고, 갇혀 있던 화가는 형장으로 끌려 갔다. 혼신을 다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 그 사람의 체취까지 그림으로 표현한, 진정한 화가는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조정래의 `어떤 솔거의 죽음` 줄거리이다.화가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오만한 성주 뿐 아니다. 그 성주에게 비굴했던 신하들과 또 다른 화가였다. 양심을 속이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 신하들이 성주의 눈을 멀게 했다. 진실 된 신하가 위대한 성주를 탄생시키기도 하고, 훌륭한 성주가 참된 신하를 만들기도 하여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덕을 베풀어 만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성주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지혜로운 신하는 없었다. 권력 앞에 굽실거리는 비굴한 신하들만 가득했다.요즈음 신문 펼치기가 두렵다.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 힘든 정보들이 난무한다. 이런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마치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다. 혼란스럽고 답답하기 짝이 없다. 국내외적인 정치, 경제, 문화, 교육…어느 분야에도 서광이 밝지 못하다. 항간에는 대한민국의 국운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말도 떠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으며, 또한 권력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는 사회, 진실과 정당함이 인정되는 사회, 국가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고 지켜주는 사회, 그리하여 국민이 국가를 믿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할까. 묵묵히 진리와 진실만을 추구하다가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또 다른 `어떤 솔거`가 없는 세상이기를 소망해본다.

2016-10-28

청포도

▲ 김주영 수필가 청포도를 산다.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맛, 단맛과 신맛의 조화로움이 미각을 자극한다. 새콤달콤한 맛이 좋아 청포도를 사게 된다. 내가 처음 청포도를 먹었던 것은 열 살쯤 여름방학 때였다. 아버지께서 마당에 열린 포도를 한 알을 따서 입어 넣어주셨던 그 맛. 달달하고 새콤한 맛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맛이 아닌 줄 알면서도 샀다.상큼하고 싱그러운 맛이 입 안 가득 번지고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알알이 맺힌다.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노래들이 그리워진다. 흘러간 옛 노래를 들으면 어린 시절 아버지 곁에서 조잘거리는 어린아이가 되는 듯하다. 그 작은 꼬마아이가 이제는 술을 한 잔 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의 첫사랑은 아버지이다. 새콤하고 풋풋한 날의 기억.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은방울자매의 노래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포도가 나오는 계절이 되면 꼭 포도주를 담그셨다. 어릴 적 술에 절여진 포도를 먹고 취했던 기억이 떠올라 빙긋이 웃어본다. 마루 끝에 누워서 아버지가 듣고 계시던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날 나는 기분 좋게 취했다.노랫가락에 취하고 그리움에 취한다. 은방울 자매의 `첫사랑에 취한 맛`을 듣는다. `사랑이 많다해도 첫사랑만 못해요 첫사랑에 취한 맛 달콤한 포항포도주` 노랫가락에 흘러나오는 포도주는 어떤 맛이었을까? 수입와인을 마시며 지금은 사라져버린 술맛이 궁금해진다. 화이트와인의 주재료는 청포도이다. 씨나 껍질을 넣지 않고 포도즙만을 숙성해서 만들어 상큼하고 향긋하다.청포도 향 그윽한 술과 그리움에 취하니 `청포도`시가 읊조려진다.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시인은 고향에 함께 지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청포도에 담았다. 시인의 고향은 안동이다. 하지만 시인은 결핵요양차 포항의 송도원에 머물렀다. 그때 일월동에 있는 포도밭을 구경하고 시상을 떠올려 시를 썼다고 한다.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밝은 내일의 기다림과 염원을 담아 쓴 시(詩). 민족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청포도에 상징하여 개인의 서정으로 잘 표현한 시이다. `청포도`의 시에 나오는 바다는 포항 바다이다. 하지만 시의 배경이 포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애국정신의 숭고함을 기억하고자 포항에는 청포도 시비가 세군데 있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밭에서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을 호미곶에 있는 시비 앞에서 시를 읊조리며 상상해보기도 했다.노랫가락과 문학작품에는 있는 포도밭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시가 개발되면서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포도밭도 그 중 하나 일 것이다. 해방이후 포항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국내외에 알려졌고 국내 최초 해외수출 기념 음반까지 내었다고 한다. 와인을 좋아하다보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와인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 한 적이 있다. 그 때 처음으로 국내와인을 마셔보았다. 한국적인 독특한 맛이 있었다. 같은 품종의 포도로 만들어도 술맛은 지역마다 다르다. 술마다 독특한 향과 맛이 그 지역의 대표음식과 잘 어울렸다.생선요리와 잘 어울리는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은 수천 년 전 바다였던 토양도 있다. 술맛은 포도가 생산되는 토양, 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포항에서 생산된 청포도로 만든 술맛은 어땠을까? 바다 향이 담긴 청포도로 만든 와인은 생선회와 잘 어울릴 것 같다. 아버지는 생선회를 무척 좋아하셨다. 회를 드실 때는 어머니가 담근 포도주와 함께 드셨다. 아버지와 술을 한 잔 마시며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함께 했던 바닷가의 추억들이 푸르게 일렁인다. 어린 시절 청포도 같은 새콤달콤한 날이 그립다.

2016-10-21

구월에 핀 아카시아꽃

▲ 강길수 수필가한가위 연휴 하루 전. 마침 쉬는 날이라 양학산에 올랐다. 저 아래 보이는 7번 국도엔 차량들이 한가위 꿈을 싣고 꼬리 물고 달린다. 하늘엔 아직 철 이른 메밀잠자리들이 한가위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가하다. 멀리 형산강 너머 보이는 제철소. 내 눈부신 계절이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곳. 발걸음도 가볍게 늘 가던 코스를 걸어 반환점 부근에 갔을 때다. 십년 전쯤, 새 길을 내기 위해 산자락을 절개한 비탈에 당국에서 소나무 묘목을 심었었다. 남향을 향해 있어 햇빛을 많이 받는 절개지여서,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심은 어린소나무가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한데, 그 소나무들이 이젠 많이 커 사람 팔뚝 굵기만큼 자란 것이 대부분이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서쪽 가장자리 쪽엔, 심지도 않은 아카시아나무가 솟아 나 함께 자라고 있다. 인근에서 뿌리로 뻗어왔는지, 씨앗이 떨어져 움텄는지 모르겠다. 아카시아나무는 소나무보다 훨씬 더 크다. 능선위에서 시가지 모습과 한창 자라나는 소나무와 아카시아나무 등을 살피다가, 얼핏 눈에 익은 것이 스쳐 지난 것 같아 다시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웬일일까? 활짝 핀 아카시아 꽃 일곱 개를 단 꽃송이 하나가 보이는 게 아닌가. 장미라든가 진달래, 개나리 등이 다른 계절에 핀 경우는 많이 보았어도, 구월에 핀 아카시아 꽃을 만난 것은 처음이다.어린 시절 봄날, 들에서 소꼴을 망태에 뜯어 담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서던 우리 집 대문간. 그 옆에 함께 사는 커다란 아카시아나무 꽃이 온 사방으로 내뿜던 진한 향기. 지금도 눈만 감으면, 코 속 후각세포에 고스란히 간직된 향. 우리나라 벌꿀의 7할을 차지한다는 아카시아 꽃 꿀. 목재는 고급가구 재료로 없어서 못 쓴다는 아카시아나무. 북미가 원산지이지만, 구한말 일본무역회사 사람이 처음 심어, 일제가 우리 산을 망치려고 심었다는 오해도 받은 아카시아나무. 옛적에 군불나무로 많이 때며 손을 찔려 미워도 했던 무서운 가시 달린 아카시아나무….제철 아닌 구월 열사흘에 만난 아카시아꽃. 꽃을 보는 순간, 지구 온난화로 알래스카의 만년설이 한해 수십 미터씩 산 아래부터 위로 녹아내린다는 얼마 전 뉴스가 뇌리를 스쳤다. 시베리아 영구 동토가 녹아, 땅 속 메탄가스가 방출되며 온난화를 가속한단다. 이 산에도 전에 보이던 이름 모르는 산꽃들이 안 보이는 것이 적지 않다. 기후 변화가, 시대의 변동이 확 피부에 와 닿는다.휴대폰을 꺼내 아카시아꽃 사진 세 장을 찍었다. 사진을 확대해보니, 한 송이에 꽃 일곱 개가 피었다. 봄에 피는 것은 한 송이에 꽃 이삼십 개가 달린다. 구월에 만난 꽃 일곱 개 핀 하얀 아카시아꽃송이라니. 이 아카시아나무는 왜 가을에 꽃 한 송이를 피워냈을까. 변해가는 환경에 나처럼 헷갈리는 걸까.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대의 징표와 메시지로 피어난 것일까.자연도, 지구 어머니도 변해가는 현장을 구월에 핀 아카시아 꽃을 통해 또다시 생생하게 만났다. 사람도 자연 속의 일원인 이상, 내가 모르는 변화를 하고 있을게 틀림없다. 지난 밤, 이웃 경주에서 우리나라 관측사상 가장 강한 진도 5.8의 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느끼기엔 70년대 중반인가, 총각시절 해도동 하숙집에서 저녁을 먹고 동료들과 잠시 담소하던 중 발생했던 지진과 비슷했다. 기후변화와 늘어나는 천재지변. 생물들의 변화와 멸종. 갈수록 폭력성의 가속페달을 더 세게 밟아대는 어리석은 인간 공동운명체….나는, 우리가족과 우리나라, 또 우리지구촌은 어떻게 이 변화의 물결을 헤쳐나아가야 할까. 그래도 오늘, 스피노자의 사과나무를 나부터 심어야 하는가.일곱 아카시아꽃아, 너는 대답을 알고 있니…?

2016-10-14

갑질과 공감능력

▲ 김병래 시조시인 돈이든 권세든 가진 자들의 횡포가 거의 엽기적이다. 기내식 땅콩을 봉지째 주었다고 비행기를 돌려 사무장을 내리게 한 항공사 부사장의`갑질` 사건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얼마 전에는 3년 동안 운전기사를 열두 번이나 갈아치운 재벌 3세 사장의 갑질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A4용지 140장 분량의 매뉴얼을 만들어 운전기사가 지키지 못했을 경우 폭언과 욕설을 서슴지 않았다니 그 치밀하고 집요함이 가학증과 편집증을 의심하게 한다. 제자와 조교에게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좌절감을 느끼도록 갑질을 하는 교수, 부하 검사를 자살에 이르게 한 부장검사, 백화점 여직원의 뺨을 때리고 주차장 아르바이트생 무릎을 꿇리는 고객, 아파트 경비원을 `종놈` 취급하는 입주민…. 가히 갑질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처에 널린 것이 갑질의 행태다.하기야 쥐꼬리만 한 권력만 있어도 휘두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진대 갑질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해진 것만은 아닐 터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고 갑질의 피해자 역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겐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모진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중에 모진 시어머니가 되고, 폭력을 대물림하는 가정이나 집단이 그러하듯 갑질은 또 다른 갑질을 낳고 조장하는 풍토를 만들기도 한다.갑질을 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공감능력의 부족이다.남의 사정과 고통, 감정 등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일수록 남을 괴롭히는 짓을 예사로 하게 되는 것이다.물론 그 정도가 심해지면 가학증(Sadistics)이나 사이코패스(psycho-path)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요즘 들어 그런 현상이 부쩍 늘어나는 것은 어려서부터 여러 형제들과 부대끼고 동무들과 어울리는 대신 혼자서 전자오락에나 몰두하는 습관 때문일 것이다.재계나 학계, 법조계의 소위 지도급 인사들이 오히려 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그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경쟁과 성취에만 골몰하느라 공감능력을 함양할 기회를 갖지 못한 까닭일 것이고..전에는 사람의 능력을 재는 척도가 주로 지능지수(IQ)였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감성지수(EQ)와 도덕지수(MQ)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머리만 좋은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부와 권세와 명예의 공든 탑이 공감능력과 도덕성의 부족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패가망신 하는 예를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시대에 공감능력의 함양이 아이들 교육에 제대로 반영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공감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우선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남의 아픔을 이해할 것이며 굶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알겠는가. 자기 이부자리도 정돈하지 않는 아이가 자식을 위해 힘들게 일하는 부모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경험에는 직접경험만 있는 게 아니다. 독서를 통한 간접경험도 있고 봉사활동을 등을 통해서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이해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문학작품에는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이 들어있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봉사활동을 하다보면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국민소득이 올라간다고 선진국이 되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갈수록 범죄와 자살률이 증가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경제력이나 국방력에 못지않게 국민들 각자의 공감능력 향상이 살기 좋은 나라의 기반이 된다는 자각이 절실한 현실이다.

2016-10-07

수채화 같은 망중한(忙中閑)

▲ 김주영수필가 경주여행은 망중한(忙中閑)에 그리는 수채화 같은 여행이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좋다. 그러나 행선지를 미리 정하면 여행은 훨씬 알차고 의미 있다. 나는 가끔 여행을 하면서 여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어디로 떠나야 할까 고민을 하다보면 어느덧 마음은 여행을 시작한다.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하고 그곳에 얽힌 역사와 전설을 미리 공부하는 일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여행은 설렘이다. 설렘은 늘 어디론가 나를 떠나게 한다. 바쁜 가운데서도 멀리 떠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여행지가 경주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다녀온 여행이 초등학교 수학여행이었고 그곳이 경주였다. 어릴 적 가을밤에 느꼈던 첫 설렘, 어른이 된 지금도 경주는 새로운 설렘으로 이어진다. 유적과 유물을 통해 오래전 살았던 이들의 삶을 느끼고 교감할 수 있다. 선조들의 역사와 얼을 함께 호흡하는 일은 특별한 설렘이다. 천 년을 넘나드는데 어찌 아니 설렌단 말인가.신라 천 년의 고도답게 경주는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역사유적지구` 중에서 신라왕조의 궁궐터였던 월성지구를 좋아한다. 계림, 첨성대, 반월성, 안압지를 걷는다. 천년의 숨결을 걸으면서 느끼기 좋은 곳이다. 반월성에서 동북쪽으로 십여 분을 걸으면 안압지가 나온다.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 바라보는 기능으로 만들어진 궁원이었다. 통일신라 시기 영토 확장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한 강력한 왕권이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궁전을 짓는 데 중점을 두고 지은 궁전이다.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며 연회를 베풀었고 한다.안압지는 걷는 여행의 백미이다. 바람결 따라 푸른 하늘에 그려지는 구름을 바라보며 마음도 구름 따라 일렁인다. 기와지붕 너머로 황금빛 노을이 그려진다. 붉게 물드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천년의 숨결을 눈으로 보는 것 같다. 안압지 주변을 산책하면 내가 신라의 왕족이 된 듯하다. 어둠이 처마 끝에 내려앉으면 안압지는 화려한 야경으로 또 한 폭의 새로운 그림을 펼친다. 어둠속에서 빛과 어우러지는 안압지의 야경은 그 옛날 신라왕족도 누려보지 못한 풍경이 아닌가?안압지를 돌아 반월성을 걸으면 그 길에서 만나는 사계는 늘 새롭다. 봄이면 들판 가득 노란 유채 밭에 마음을 잃고, 초여름에는 홍련과 백련의 고즈넉함에 빠져든다. 황화코스모스의 황홀함과 가로수 길의 알록달록한 단풍에 물들어 볼 수도 있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은 코끝이 시리도록 그 길에서 신라천년의 숨결에 그저 취하면 된다. 매번 다른 얼굴로 맞이해줘서 정답다.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 느리게 경주에 물들고 싶다. 울창한 굴참나무 숲에 정적을 깨뜨리는 딱따구리의 맑은 소리와 그 짧은 파장에 놀라 떨어져 내리는 단풍잎 하나. 아름다운 수채화 한 폭이 그려진다. 형형색색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 잎 하나 가슴에 얹고 불국사 경내를 돌아 석굴암에 올라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은 또 어떨까?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다시 경주를 찾고 싶다. 또 한 편의 수채화 같은 망중한을 그려 보고 싶다. 가을밤이 깊어지는 소리에 잠 못 이룬다.

2016-09-30

“내다”

▲ 이순영수필가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개똥`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오, 개또이~!” 반가움이 앞서 별명을 부르고 말았다. 그런데 “개똥이 아니고 내다.”라는 굵직한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한테 `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급하게 머릿속 안테나를 작동시켜 찾아보았지만 낯선 목소리의 주인은 탐지망에 잡히지 않았다. “누구세요?”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야, 내다, 내. 니 내 모르겠나.”라고 쏜살같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전화를 끊어버리는 게 아닌가. 서너 시간이 지나서 같은 번호의 전화가 또 걸려왔다.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더니 다짜고짜 하는 말이 “순영아, 내다. 니 진짜 내 모르겠나.”하지 않은가. 나를 알고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한 것 같은데 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슬몃슬몃 보이는 나에게 황소 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 사람도 몇 안 된다. 해서 나도 “야, 니 누고. 이름을 밝혀라.”라고 씩씩하게 대응을 했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뚱딴지같다.나를 모르겠나, 섭섭하다, 너무하다, 그럴 수가 있나, 따위의 말만 되풀이 하더니 또 전화를 끊어버린다. 모임에 가 있는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한테 전화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 동무도 가관이다. 지금이라도 오면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말을 해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책장구석에 있는 졸업앨범을 펼쳤다. 흑백사진 속에서 까까머리 남학생들이 눈에 힘을 가득 모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입을 꼭 다물고 근엄한 표정들이 한결 같다. 남아(男兒) 열다섯에 못할 일이 무엇 있겠느냐는 표정이다. 나무에 기대어 교모(校帽)를 약간 삐뚤게 쓴 녀석도 정색이긴 마찬가지다. 산이라도 옮길 기세다. 동무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들여다보니 활짝 핀 나리꽃 같은 웃음이 절로 난다.길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나에게 밤송이를 던졌던 진이일까. 염소주인 찬이는 아니겠지. 운동장에서 소리 지르는 염소를 쫓아내고 교실로 오다가 뒤에서 쫓아 온 염소에게 고무줄 바지가 벗겨졌던 동무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학교 앞 신작로를 씽씽 달리던 눈이 까만 국이와 운동장에 여학생들이 모아 둔 돌멩이를 리어카에 싣고 유난히 천천히 가던 형이도 있었지. 키가 작고 얼굴이 뽀얀 아이였는데…. 하얀 새 운동화에 몰래 검정색 물감을 뿌려 나를 몹시 속상하게 했던 녀석, 그 악동이 사십 년도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자수를 하려고 행여나 전화한 건 아닐까. 장난꾸러기 동무들을 생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앨범을 넘기며 주소록까지 살펴도 잃어버린 기억조각은 찾을 수가 없었다.늦은 저녁, 전화기에 개똥이 또 나타났다. 이름을 꼭 알아내리라 마음을 먹고 전화를 받았다. 내 딴에는 머리를 썼다. “사실은 네 이름이 뱅글뱅글 도는데 말이 얼른 안 나오네.” 내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개똥이는 알고 소똥이는 모르느냐, 냉정하게 그럴 수 있느냐, 해도해도 너무하다며 넋두리까지 한다. 얄팍한 나의 전략은 한 방에 날아가고 말았다. 갈수록 태산이다. 소똥이는 또 누구란 말인가.그래. 내가 나도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찌 알겠느냐고 했다. 통쾌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마치 폭포수 같았다. 전화기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동무들이 나를 놀리면서 함께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동창회에 참석 하지 못한 나를 대상으로 동무들이 더 재미있어 하는구나, 여기니 비록 같은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함께 있는 것 같았다. 나를 기억해주는 동무들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이런저런 이유로 신명이 나지 않는 작금에 나를 한달음에 단발머리 소녀가 되어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준 동무들이 고맙다. 그런데 걱정이다. 다음에는 꼭 이름을 불러달라고 한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동무. 대관절 `내다`는 누구일까.

2016-09-23

전통문화

▲ 손달호 수필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치관이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다. 거추장스럽고 소모적인 것은 시대에 맞게 변용되어야 한다.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도 당연하다. 다수의 정서에 빠르게 움직여야 남에게 뒤처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변 상황을 빙자하여 고유의 전통을 과소평가하거나 낡은 인습으로 치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품위 있고 격조 높은 삶을 추구해 왔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만족도에 질량을 느꼈었다. 이런 정신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꺾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 되었고, 역사의 가시덤불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뎌온 버팀목이었다.불필요한 부분은 걷어내되, 바탕에 흐르는 정신은 살려야 한다. 정신은 형식을 존중하는데서 출발한다. 밖에서 갖춰지는 엄숙한 형식은 안으로의 마음을 여물게 한다. 마음 안에서 정성이 일어나게 만든다. 우리 선조들은 제물은 주과포혜뿐이라도 격식을 따졌다. 물질은 빈약해도 예를 소중히 여기는 올곧은 사고를 지녔었다. 말씨 하나에도 격조를 찾았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품위를 지켰다. 서릿발 같은 자존심은 우리 민족을 지켜온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다.몇 년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튿날 신문 일 면에 엘리자베스의 생일상이 화려한 색상으로 보도가 되었다. 궁중의 예법을 좇아 격식을 갖춘 생일상을 바라보며 감동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신문은 생일상을 진두지휘한 조옥화 여사와 하회 류씨 종부의 애국심을 기리는 덕담으로 메워졌다. 영국의 신사도에 맞서는 우리의 선비 문화에 자존감이 인 것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하회 마을에서 전통문화로 손님을 맞이한 정부의 지혜는 보는 이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어쩌면 하회 마을에서의 생일상이 그분을 감동시킬 최상의 프로젝트였을지 모른다. 서울의 명동이나, 포스코, 대덕 연구 단지 등은 엘리자베스의 환심을 사기에는 미덥지 않다. 그녀의 눈이 그 이상으로 세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흔들기가 어려운 것은 고령의 여왕이 얼마나 지구촌을 누볐겠는가.종요로운 상황에서 전통문화가 요긴하게 쓰였다. 동방의 문화가 숨 쉬는 생일상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취한 여왕의 함박 미소는 우리 문화의 수준을 웅변해 준다. 누가 뭐래도 두 분은 애국자임에 틀림없다. 생일상은 전통문화의 진실한 표백이었고 효과적인 홍보 콘텐츠였다. 앞으로 인터넷을 통해 하회 마을을 찾는 지구촌의 방문객이 한꺼번에 몰릴 것만 같았다.하지만 지금까지 흥분으로 설렜??마음이 금방 가라앉았다. 오히려 그 마음자리에 슬픈 감정이 일어났다. 미래에 엘리자베스 3세가 한국을 찾을 때는 누가 생일상을 차릴 것인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서구의 가치가 우선시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밀려난 전통문화의 현주소는 이런 사정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급할 때는 선조가 남긴 문화를 기웃거리면서 이를 소중하게 전해 주려는 기성세대도, 계승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대도 눈에 띄질 않는다.유대 겨레가 수억의 아랍권에서 아니, 이 지구상에서 큰 소리 치는 것은 온전히 문화의 힘이다. 그들은 자기네의 고유문화로 유대의 끈을 단단히 죄고선 끊임없이 외면적 능력을 키워 나간다. 탈무드와 성경은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만든 지혜의 지침서이자 삶의 교과서이다. 안으로는 탈무드와 성경 읽기를 실천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우고, 밖으로는 국가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지적 교육에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다.우수한 인재를 가진 민족이 힘 있는 나라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고, 세계적인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 민족이다. 칼 마르크스, 로버트 위너, 레오 칠라드, 스피노자가 또한 그렇다. 노벨상의 상당수를 그들이 차지했다. 세계의 심장부에는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은 지구촌의 실질적인 조정자였다.퇴색되어 가는 전통문화를 바라보다 유대 겨레가 생각남은 왜일까?

2016-09-09

시간여행

▲ 김주영 수필가 사진은 찍는 순간 과거의 시간이다. 사진의 기록성은 사진이 가진 힘이다. 카메라가 발명되고 사진을 미술로부터 독립하여 발전시킨 사진가들도 사실성과 기록의 힘에 주목했다. 사진을 찍으며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본다. 산책만 하여도 여행을 떠나온 듯하다. 풍경들을 사진에 담는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사진으로 바라보는 일출의 순간은 언제보아도 늘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시각각 명도와 채도를 바꾸며 꿈틀거리는 먹빛은 마치 거대한 공룡이 잠에서 깨어나는 듯하다. 심해 어디쯤에서 밤새 참았던 호흡을 일시에 내뿜으며 치솟는 태양을 바라보는 일은 황홀경 그 자체다. 수많은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점 하나를 포착해내는 게 사진이다. 사진은 그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게 한다. 사진을 보면서 순간의 기록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시간여행을 한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공유하고 기록된 시간을 소유한다.기록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고대나 현대나 다르지 않다. 고대인들은 주로 동굴이나 바위에 그림을 그려 기록으로 남겼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겪으며 형성된 시간의 퇴적을 만나기에 좋은 곳이 고분벽화나 암각화이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즐기고 싶은 날은 유적지를 찾는다.영일칠포리암각화에 가면 선사시대에서 산책을 즐기는 듯하다. 암각화란 바위나 동굴 벽에 동물그림이나 기호 같은 문양이 새겨진 것이다. 지나온 시간을 만나는 것은 살아있는 신화를 만나는 일이다. 이정표를 따라 좁게 난 산길을 올라가면 `암각화 가는 길`이라는 작은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칠포리 암각화는 `흥해읍 칠포해수욕장 서쪽의 곤륜산 계곡 옆에 놓여있는`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모두 세 군데 있다고 하는데 쉽게 볼 수 있는 바위는 오솔길 옆에 있는 서북향 사암(砂巖)바위다. 길이 3m, 높이 2m 크기로 새겨진 그림이 실패처럼 보인다. 선각(線刻)으로 새겨진 무늬를 자세히 살펴보면 칼 손잡이처럼 생겼다. 새겨진 문양은 석검의 날이 분리되어있는 모양이다.그림들 밑으로 희미한 선의 흔적이 보인다. 먼저 새긴 그림들이 풍화작용으로 마모되면 그 위에 다시 마찰을 가해서 새긴 흔적처럼 보인다. 제사의식 때마다 바위에 마찰을 가한 교접 주술적의미로 추측해 본다. 신성하게 여기는 바위에 마찰을 가함으로써 그 자체가 성행위적 주술이 아니었을까? 암각화의 그림은 농경시대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주술행위의 결과물인 것 같다.영일칠포리암각화는 청동기시대 바위위에 새겨진 그림이다. 주술행위로 추측되는 선들은 풍년과 다산의 의미를 담은 선조들의 기원이었다. 농경의례에서의 간절한 소망이 선과 선 사이로 느껴진다. 암각화에 대해 정확히 전해지는 문헌기록은 없으나 새겨진 그림을 토대로 청동기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암각화를 사진에 담는다. 청동기시대의 시간이 새겨진다. 불어오는 바람에도 신성함이 느껴진다. 암각화의 새겨진 무늬를 바라보며 시공간을 넘어 선조들의 삶과 조우해본다.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프레임에 담으며 시간여행을 즐긴다. 그곳에 미래의 시간이 함께 공존한다.오후 빛에 내 그림자의 무늬가 길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나는 천천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시간의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시간을 찾아 여행을 나선다. 시간여행이 즐거운 것은 현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은 하나의 점이다. 시간여행은 일상적인 내 삶에 추억을 하나 보태는 것이 아니라 삶에 질문을 던지게 한다. 시간여행의 정거장은 현재다.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다. 시간은 영원히 흐르고 흐른다. 하지만 삶은 영원하지 않기에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서녘에는 어느덧 해가 진다. 오후 햇살을 등에 진 내 그림자, 암각화 무늬 같다.

2016-09-02

나리꽃, 기쁨과 슬픔

▲ 강길수수필가 오래 전 한 여름….동해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섬 같은 바위산에서 우연히 나리꽃군락을 만났었다. 하늘나리꽃이었다. 온 산 양지바른 곳에 붉은 정열을 뿜어내는 나리꽃이 참 많이도 모여 피어있었다. 푸른 바다를 얼싸안고 예쁜이대회라도 하는지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만 와락 나리꽃을 좋아하게 되었다.며칠 뒤, 구식카메라를 들고 하늘나리꽃을 찍으러 갔었다. 렌즈 안쪽에 나도 모르게 습기가 오염되어 사진이 선명하지 못했다. 일 년을 기다린 끝에, 설레는 마음으로 또 갔었으나, 이번에는 그 많던 나리꽃이 날씨 탓인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슬펐다.그런데 몇 년 전 여름, 도심에 가까이 있어 자주 가는 등산로 초입 양지바른 비탈진 곳에, 아름다운 나리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있는 게 아닌가! 헤어졌던 첫사랑을 만난 듯, 얼마나 반갑고 기뻤던지…. 다시 올 때, 디카사진을 꼭 찍어 연중 내내 나리꽃을 만나리라 마음 먹었다.하지만 이틀 뒤 디카를 가지고 갔을 때, 나리꽃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왈칵 솟구치는 슬픔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또 일 년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 제발 나리꽃을 가져 간 사람이 뿌리는 두고 갔기를 기도하면서….매미소리가 다시 여름 하늘을 힘차게 유영하였다. 어느새, 일 년이 후딱 갔나보다.세상살이에 묻혀 살던 나는, 미안하게도 만날 하늘을 보면서도 하늘나리꽃 생각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 사흘 전, 그 산에서 만난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오는 길이었다. 꼭 일 년 전 나리꽃이 피었던 그 자리에, 두 송이의 나리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는 모습이 내 동공에 비치는 아닌가! 옆 사람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나는, “어! 나리꽃, 그 것도 두 송이네!”하고 감탄했다.아마도 나리꽃이 나를 불렀거나, 그 꽃을 만나고픈 내 잠재의식이 작동했는지 무심결에도 나리꽃을 찾고 있었던 게다.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무지막지하게 꺾여버린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나리꽃은 덤을 얹어, 두 송이의 꽃을 아름다이 피어냈던 것이다. 올해는 제발 무사하여 자기가 핀 자리에서 그 목숨 다할 때까지, 사람들과 짐승들과 곤충, 풀과 꽃들과 나무들, 공기와 구름과 하늘, 해와 달과 별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나누어 주기를 나는 간절히 빌었다.이틀 뒤, 나리꽃과의 신나는 재회를 위하여 일부러 조금 일찍 나리꽃 코스로 갔다.그러나 나리꽃은 올해도 또,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나리꽃을 잃은 슬픔과 사람에 대한 실망이 또다시 밀려왔다. 그때, 속에서 오래 감추어져 있던 말 한마디가 불쑥 솟아났다. 그 옛날 우리 둘째가 첫돌을 앞둔 어느 가을, 우리 집 작은 화단은 탐스런 국회가 만발했었다. 예쁜 국화꽃에 반해, 꽃을 꺾으려던 젊은 이웃집 젊은 아주머니를 크게 부끄럽고 당황케 했던 말이….“꽃은 두고 보는 거야!”제발, 나리꽃이 시집간 그 집에서, 내가 못다 준 사랑보다 훨씬 더 높고 진한 사랑을 받기를 두 손 모으는 마음 간절했다.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억누르며, 나는 또 일 년을 기다리기로 맘먹는다. 그리고 못다 찍은 디카사진 대신, 마음의 메모리에 이틀 전 본 두 송이 하늘나리꽃을 예쁘게 찍었다.아마도 내년에는, 나리꽃나무가 더 많은 송이의 예쁜 꽃을 피워내겠지!

2016-08-26

여름나들이

▲ 손진숙 수필가 사계절 중 여름은 나와 가장 인연이 깊다. 무엇보다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자 할머니는 산후조리에 좋다는 늙은 호박을 고며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이 더위에 딸을 낳아 가지고….”그늘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나는 판에 반갑지 않은 손녀가 태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할머니의 심사에도 열불이 피어올랐으리라. 내 위로 오빠가 셋 있는데도, 육이오전쟁 통에 작은아들을 잃어 아버지가 외아들이 된 터라 할머니는 손자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채 이 세상에 여름나들이를 나왔다.몇 살 때였는지 아슴푸레하다. 아버지는 친지들과 포항 송도해수욕장 나들이에 나와 작은오빠를 데리고 갔다. 어른들은 먹고, 마시고, 내기를 즐겼지만 동무가 없는 나는 마땅히 할 놀이가 없었다. 오빠는 가끔씩 바닷물에 들어가 헤엄을 치다가 나오곤 했지만 나는 물이 무서워 그마저 할 수 없었다.그리고 뜨거운 모래와 북적이는 사람들이 싫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천막에서 먼 눈길로 하늘빛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개봉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파도 따라 교차하며 철썩거렸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한 유일한 여름나들이였다.그 시절, 시골 사람들에게는 약물탕 가는 게 중요한 여름나들이에 속했다. 비지땀을 흘리며 콩밭을 다 매고나면, 맑은 날을 택하여 약물탕엘 갔다. 객수(客水)가 들면 맛도 없어질뿐더러 약효도 떨어진다 하여 비 오는 날은 피했다. 약물을 신령한 처방약으로 믿었던 것 같다. 체증이나 장염 같은 내장의 병은 약물을 먹어서 다스리고, 땀띠나 종기 같은 피부의 병은 약물을 맞아서 치료했다. 한여름 논밭 일에 탈진한 몸으로 받아들이는 물은 더욱 시원하고 달았으리라.외갓집이 있는 마을의 약물탕에 갈 때면 엄마와 함께 하는 즐거움에 촐랑거리며 따라다녔다. 약수를 맞고 온 뒤, 어머니 등에 났던 땀띠가 스러진 걸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여름나들이로 한숨 돌리게 된 어머니가 짓던 희미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몇 살 때였는지 역시 어렴풋하다. 여름날 해 질 무렵이었다. 외할머니가 사립문을 밀고 들어왔다. 마당에 내놓은 평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평소 `옴마니반메훔`을 읊조리곤 하던 할머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외할머니와 함께 양동마을 `심인당(心印堂)`에 밤나들이를 갔다.나는 골목을 쏘다니며 옥수숫대나 탱자나무 울타리에 앉은 풍뎅이를 잡거나, 풀숲에 숨은 반닷불이를 손 안 가득히 잡았다. 꼬물거리고 반짝이는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에 도취되었다가 날려 보내는 아쉬움을 무제한 즐겼던 것 같다. 그게 만남과 헤어짐의 전주곡이었음을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평상에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은하수가 흐르고 생풀을 베어 지펴놓은 모깃불에서는 매캐한 연기와 알싸한 향(香)이 풍겨 나와 여름밤 마당에 깊숙이 드리우곤 했다. 심인당에 갔던 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늦은 밤에야 담 모퉁이를 돌아 사립문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할머니들은 그 여름밤 길동무가 되어 새로운 길나들이를 준비했던 것 같다.삶은 나들이의 연속이다. 외할머니, 아버지, 할머니가 순서 없이 이 세상나들이를 끝냈다. 여러 해 전 어머니마저도 나를 낳은 날짜, 사흘 지나서 훌쩍 먼 나들이를 떠나고 말았다.올여름도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다. 여름에 만난 인연은 가을이 오기 전에 헤어지고 마는, 어쩌면 여름은 슬픈 계절이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여름이 또다시 나를 버려두고 나들이를 떠나려는 태세다.

2016-08-19

영일대의 꽃이 피는 밤

▲ 김주영수필가 황홀한 밤이다. 화려하게 불꽃들이 수를 놓는 듯하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불의 씨앗들이 캄캄한 밤하늘에 흩뿌려진다. 하늘로 올라간 씨앗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낙화를 바라보는 것 같다.모래사장 위에서 불꽃을 바라보았다. `포항국제불빛축제`는 불과 빛의 도시 포항을 대표하는 여름축제이다. 올해도 영일대해수욕장과 형산강체육공원에서 축제가 열렸다. 축제기간 중 영일대해수욕장에서 펼쳐진 불꽃 축제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10여만 발의 폭죽들이 쏘아 올려졌다. 밤바다를 배경으로 불꽃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노라면 폭죽이 터진다는 말보다 밤하늘에 꽃이 핀다고 해야 할 것만 같다. 불꽃들은 꽃잎처럼 밤하늘에 나부낀다. 모래톱 위에서 음악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불꽃의 낙화를 보고 있으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불빛축제가 열리는 영일대해수욕장은 한 여름 밤의 새로운 휴양지가 되었다. 해마다 축제를 보러오는 관람객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어머니와 함께 관람하기로 했다. 아흔의 어머니가 인파들 사이에서 축제를 즐기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걱정이었지만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곳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밤바다 야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불꽃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순간 내 곁에 서 계시던 어머니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바라보신다. 펑펑 터지는 소리에 놀라셨나보다.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시는 듯하여 돌아가려하자 어머니는 “곱다 참 곱다” 하시며 밤하늘을 바라보고 계셨다.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며 집에 돌아와서도 연신 불꽃이야기를 하셨다. 무서움을 느꼈냐는 내 질문에 “처음에는 난리통처럼 난리가 난 줄 알았다”하며 빙그레 웃으셨다.어머니는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폭죽소리, 함성소리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일까? 경험에 의한 두려움이 무의식으로 나타났나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불꽃놀이를 함께 본 후로 아이들은 큰소리만 들리면 불꽃을 보러 가자고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큰소리에 대한 경험은 불꽃놀이로 연상이 되었던 것이다. 경험은 참으로 중요하다. 경험에 의해서 생겨난 인식이 오랫동안 무의식에 남아서 긍정과 부정의 생각으로 나타나게 된다. 부정적 무의식은 새로운 좋은 경험으로 긍정적 무의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부정적 무의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기에 삶은 풍요로울 수 있다. 어머니에게 오늘 밤의 경험은 두려움보다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축제기간에 찍은 사진들의 색감은 붉고, 푸르고 화려한 꽃처럼 보인다. 한 장의 사진에 `영일대의 꽃이 피는 밤`이라고 제목을 붙어본다. 노란 불꽃들이 꽃처럼 활짝 피어 있다. 밤바다의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불꽃들이 어우러져 그림을 그려놓은 듯하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흐의 그림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 떠오른다. 파리를 떠나 아를에 도착한 고흐가 론강의 밤풍경에 매료되어서 그린 그림. 고흐의 여러 작품 중에서 좋아하는 그림이다. 푸른 밤의 풍경, 강가를 거니는 연인들, 황금색의 별빛과 강물에 비친 불빛의 그림자. 황홀한 노란빛이 꿈과 희망을 주는 것 같아 이 그림을 특별히 좋아한다.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흘러내린다. 폭염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긴다. 요즘은 전국적으로 다양한 축제들이 열리고 있다. 계절별 지역별로 주제도 다양하다. 매일 축제가 열린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축제의 성격과 의미도 변화되었다.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며 여가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더위 속에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며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행복한 경험은 삶의 또 다른 에너지가 된다. 영일대 밤바다의 불꽃놀이를 바라본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여름 밤의 아름다운 기억은 뜨겁고 화려한 삶의 꽃으로 피어나지 않을까? 어둠속에 솟아오른 폭죽들이 화려한 꽃으로 핀다. 허공에 핀 불꽃들은 별빛처럼 반짝인다. 불의 씨앗들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듯 어머니 마음에 행복한 기억의 꽃이 피어나길 바래본다.

2016-08-12

온라인 인연

▲ 강길수 수필가2002년 7월 13일. 한 인터넷포털 사이트를 통해,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 사는 어떤 여성 교포를 알게 된 날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십사 년째가 된다.`은하수별`이란 닉네임을 쓰는 그녀와 이메일을 통해 이런저런 소식과 관심사를 서로 주고받으며 보냈다. 소녀시절 온 가족이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간 은하수별은, 옷가게를 하면서 삶을 꾸려 자수성가한 분이었다. 온라인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반갑게 그녀의 온 가족도 우리 집안같이 가톨릭신자였다. 이 점에서, 나는 은하수별이 마치 한 가족처럼 느껴졌다. 어느 땐가 그녀가 음성메일을 보내왔기에, 나도 서툰 솜씨로 음성메일을 보내기도 했다.사업 파트너 여부의 검토를 위해 여러 종류의 마시는 차 샘플을 받기도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열장이 넘는 한 한국 신부님의 신앙생활 피정(避靜) 지도 시디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또 아르헨티나 산 포도주, 왕새우, 안데스 산의 고 순도 암염(岩鹽)도 선물로 받았다. 그에 반해, 나는 매년 발간되는 보리수필 동인지와 내 발표 글이 실린 계간 수필 전문지, 그리고 내가 편찬책임을 맡았던 대해성당 25년사등을 보낸 것이 고작이다.메일이 오간지 10년째 되는 해엔, 그곳에 함께 사는 남동생이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져 동생부부가 한국에 검진받으러 온 적이 있다. 그때, 먼 길을 마다않고 은하수별 동생부부는 이곳 까지 우리를 찾아왔었다. 우리부부는 정보화시대 인연의 우연성과 소중함을 체험하며, 지구반대편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온 얼굴도 모르는 은하수별의 남동생 부부와 만났다. 그녀의 남동생 요한씨와 부인 글라라씨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광주에서 네 시간씩이나 고속버스를 타고 온 것이다. 제주도에 이어, 홍도를 다녀온 다음 날 바로 이곳으로 왔단다. 저녁식사를 요한씨의 건강을 고려해 채식으로 함께하고, 포스코와 북부 해수욕장 등지의 야경을 함께 구경한 다음 일찍 호텔에서 쉬게 해 주었다.고향이 원주인 요한씨는 초등학교시절 누나와 함께 온가족이 아르헨티나에 이민을 갔는데도, 우리말을 하나도 잊지 않고 잘했다. 비결을 물어보니, 젊은 날 한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게서 한국어를 배웠다 했다. 자신은 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 주면서 품앗이처럼 서로 가르치고 배웠단다.다음날. 주일이어서 우리 두 부부는 함께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주임신부님과 인사도 나누었다. 구룡포에서 점심을 하고, 호미곶을 총총 들른 후 바로 경주로 향했다. 첨성대와 박물관 관람으로 경주 돌아보기는 만족해야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떠날 시간은 금방 왔다.슬프게도 요한씨는 다음해 9월, 고국에서 치료 후 돌아 간지 달포 만에 지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피붙이를 떠나보낸 가족들의 고통을 누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상심한 가족과 은하수별의 슬픔이 머나먼 이곳 내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그 여파로 이메일도 뜸해지기도 했다.인연이란 무엇일까? 또, 인연이란 어떻게 맺어지는 걸까? 시대, 개인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인연…. 인연의 법칙으로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 해탈을 통한 구원의 길을 안내하는 가르침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웃사랑과 하늘사랑이, 고통이란 길을 통해 은총으로 주어지는 구원의 길에 대한 가르침도 생각났다.경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요한씨 부부를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은 아쉬움과 기쁨, 변해가는 정보화기술 시대의 한가운데를 사는 존재감으로 가득했다. 인터넷 웹사이트, 가상공간을 통해 안 인연이 현실로 이루어진 지난 이틀을 생각하며 7번 국도를 달려오는 발길은, 내일을 잉태하는 석양으로 아련히 물들어갔다.

2016-08-05

성욕과 문명

▲ 김병래시조시인 언제부턴가 `섹시하다`는 말이 보통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말로는 `관능적이다` `성적인 매력이 있다`는 의미라서 젊잖은 자리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이었다. 원래 사람을 목전에 두고 성적 매력 운운하는 것은 상대를 품격 있게 대접하는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적인 것을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야비하고 천박한 음담으로 여겼는데 이제와서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전혀 거리낌이 없어진 것은 그만큼 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개방된 때문일 것이다.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성욕(리비도)은 `생의 본능`인 `에로스의 에너지`라는 것인데, 그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고착, 퇴행, 억압 등의 병적 증후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 정신분석학적 견해에 힘입어서 성(sex)의 해방이니, 표현의 자유니 하는 말로 표현되는 성에 대한 새로운 가치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한마디로 성이란 숨기고 감출 것도 아니고 윤리나 제도의 틀에 가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성을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거나 무조건 터부시 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해방이 되어야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방종과 난잡으로 이어지는 것은 오히려 성을 황폐화시키는 폐단이 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남녀 간의 애정행위와 무분별한 성욕해소는 당연히 구별이 되어야 한다. 성욕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 사회의 성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욕을 남녀 간 애정문제와 분리해서 본다면, 그것은 식욕(食慾)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본능적인 욕구의 하나인 것이다.식욕이 일차적으로는 생명의 존속을 위한 영양공급에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성욕은 종족보존을 위한 생식기능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고, 부차적으로는 둘 다 쾌락을 수반한다는 점이 유사한 것이다. 그런데 식욕이든 성욕이든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본능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현존하는 인류의 식욕과 성욕은 이미 자연상태의 원시적 본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문화적 요소가 유입된, 여타의 동물들이 가진 본능과는 구별이 되는 `문명화 된 본능`이라는 것이다.문명화 된 본능의 특징은 상당부분 자동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생상태의 동물들은 식욕이나 성욕을 자유의지로 통제할 필요가 없지만, 인간은 그것을 스스로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생의 동물들은 필요 이상의 과식이나 번식을 위한 것이 아닌 성행위를 하지 않는데 비해 인간은 얼마든지 과도한 식욕이나 성욕으로 인해 건강이나 생명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식욕이든 성욕이든 그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니만치 결코 폄하하거나 금기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존은 물론 삶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식욕이 동한다고 마구잡이로 먹었다간 배탈이 나거나 비만이 되고, 또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것을 훔쳐 먹어서는 절도죄가 되는 것처럼, 적절하게 절제되지 않은 성욕은 자신의 건강은 물론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인류의 문명은 부단히 성욕을 왜곡해왔다. 문명이 개입된 성은 번식보다는 쾌락의 수단으로 변질이 되었다.정보화 시대에 넘쳐나는 음란물과 성에 대한 불건전한 정보는 성본능의 왜곡과 변질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는 갈수록 증가하는 성범죄와 무관할 수가 없는 것이다.특히나 청소년들이 불건강한 성적 자극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은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각종 공해의 문제와 더불어 불건강한 성문화 역시 또 하나 인류의 난제가 되고 있다.

2016-07-29

“뭘 해도 못 믿죠?”

▲ 김주영 수필가 청소년기는 어른과 어린이의 중간시기이다. 신체적인 변화는 물론 정서의 발달에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인격형성에도 중요한 과정이다.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인격체로 거듭나며 자아발견을 하는 시기이다. 사춘기라는 큰 변화를 겪는다.대학생 아들을 둔 나는 자녀의 청소년기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이해를 하며 키웠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빵점짜리 엄마였다. 생각과 욕심이 앞섰기에 이해는커녕 대부분의 시간을 야단치는 데 허비했다. 아이의 인격은 뒷전이었고 부모의 권위가 우선이었다.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보여준 아들의 행동은 무언의 항변이거나 반항이었을 것이다. 나는 늘 공부만을 강요했고 아이가 컴퓨터게임이라도 하고 있으면 독서실로 내몰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작정하고 독서실을 가겠다는 아들에게 칭찬을 해주었어야 했지만 나는 불시에 가방 검사를 했다. 아들은 이런 엄마의 극성스런 행동을 예견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아주 당당하게 검사에 응했다. 가방 안에서 담배가 나왔다. 기가 막혔다. 무슨 현행범이라도 잡은 듯 그 날 이후 더 심하게 야단을 쳤다. 점점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홀로 아프고 힘들었다. 그 때 아들이 반항하듯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엄마는 늘 내가 뭘 해도 못 믿죠?”피우지 않았다는 아들의 말을 듣기는커녕 다그치기만 하였다. 그 사건을 계기로 관계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소통의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대학교 입학 후 어느 날 아들과 술을 한잔 할 기회가 있었다. 술잔이 오가고 얼굴이 불콰해지자 아들은 담배사건에 대한 진실을 털어놓았다. 늘 잔소리를 퍼붓는 엄마가 미웠고 담배는 피우기 위해서 가지고 다닌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그걸 엄마가 보는 순간 아들에게 실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한다. 아들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면 그때라야 엄마 스스로도 공부에 대한 집착을 버릴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담배 사건은 아들에 대한 기대감의 변화와 소통의 전환점이 되었다. 늘 내 입장에서만 말을 했고 상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에 아이 스스로가 선택한 엄마 길들이기의 한 방법이었던 셈이다.아들의 경우는 비행을 위장한 긍정적 자기 노출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과 책임을 아이에게 떠넘긴다. 너는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한다. 세상 부모들은 누구나 자녀에게 많은 기대를 하게 된다. 나 또한 그러했고 많은 부분에서 조급증을 냈다. 자녀의 개성을 존중하기보다 내 욕심을 먼저 내세웠으니 늘 잔소리가 차고 넘치지 않았을까?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녀에 대해 느긋한 유형과 조급한 유형이다. 나는 전적으로 조급한 엄마였다. 대학생이 된 지금도 아이의 생각과 선택을 존중하기보다 내 생각과 경험을 먼저 내세우게 된다. 자녀교육이 성공할 확률은 느긋한 유형의 부모가 훨씬 높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녀가 실수를 하더라도 관대하게 넘어가며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지름길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곁에서 지켜주는 방법이다.최근에 대학생 아들과 또 한 번 큰 갈등을 겪었다. 휴학계를 내고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들이 포기하기를 강요했다. 내가 가진 삶의 경험을 근거로 아들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가.현명하고 여유로운 부모가 되는 것은 이론처럼 쉽지가 않다. 조금 돌아가면 어떤가. 조금 늦으면 또 어떤가. 생각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그것을 향해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믿고 바라봐주자. 그 선택으로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고 있으니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가.

2016-07-22

말짱 도루묵은 없다

▲ 손진숙 수필가 어느 해 `여름문학캠프`에 참가했을 때였습니다. 유독 내 입맛을 끄는 반찬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도루묵조림이었습니다. 손가락 두어 개 정도의 크기라 한두 입에 쏙 들어가고, 부드러운 살이라 씹어 삼키기 좋으며, 삼삼한 간에 구수한 맛이 감돌았으니까요.캠프에서 돌아온 이튿날이었습니다.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서 생선가게 앞을 지나는데 불현듯 도루묵 맛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맛을 내 손으로 살려내고 싶어 도루묵 한 무더기를 샀습니다.냄비에 담은 도루묵에다 갖은 양념을 넣고 잠길락 말락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고는 국물이 졸아들게 하느라고 가스 불을 조금 강하게 켜 놓았어요. 졸아드는 짬을 이용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방에 들어가 펼쳐진 신문을 보았어요.기사 하나를 다 읽고 거실에 나오려고 방문을 여는 순간 탄내가 훅 코에 끼쳐왔습니다. 재빨리 가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도루묵이 새까만 먹옷으로 갈아입었지 뭡니까.가스 불을 급히 끄고 막 뒤처리를 하려는 참인데 퇴근한 남편이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코를 막은 채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젖히고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았기에 이 냄새가 나도록 음식을 태우나”며 핀잔을 하였습니다. 핀잔은 좀체 그치지 않았습니다. 콩이야 팥이야 잔소리를 늘어놓았어요.`그만 좀 하세요.`라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치밀었지만 백번 내 잘못한 일이니 참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어요.근사한 맛을 흉내 내 가족의 입맛을 돋우려던 내 계획은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습니다.본래 도루묵은 우리나라 근해에 살고 있는 물고기입니다. 임진왜란 때 몽진(蒙塵) 길에서 무척 시장하던 임금님이 한 어부가 바친 `묵`을 먹어보고 너무 맛이 좋아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답니다. 그런데 난이 끝나 궁궐로 돌아온 임금님이 문득 그 은어가 생각나서 가져오라 하여 먹어 보니 몽진 길에서 먹은 그 감칠맛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도로 묵이라 불러라” 명했답니다. 한껏 올랐던 묵의 위상이 도루묵으로 순식간 곤두박질쳐버린 겁니다.오기가 뻗친 나는 이튿날 다시 도루묵을 샀습니다. 전날의 실패에 대한 설욕전을 펼 요량으로 양을 배로 늘렸습니다. `망할, 물이 적어서 그랬던 거야!` 도루묵이 잠기도록 넉넉하게 물을 부었습니다. 불도 중불로 낮췄어요.도루묵이 익을 동안 딴 짓을 하지 않으려고 냄비 앞을 얼쩡거리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문학에 풍부한 지식을 갖춘 지인이었습니다. 한동안 전화 두절이더니 한가한 모양인지 문학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도루묵조림에 신경이 쓰여 건성으로 장단 맞추던 것이 다양한 문학 소식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지인의 입담에 흠뻑 빠지고 말았답니다. 경청하면서 맞장구도 치고, 질문도 하고, 웃기도 하고, 감탄도 하며 문학 저변에 대한 잡담에 정신을 팔다가 깜짝 놀라 냄비를 돌아보니 제법 센 김이 뿜어지고 있었습니다.황급히 전화를 끊고 냄비에게 달려갔지요. 얼른 뚜껑을 열고 보니 이게 또 웬 변고랍니까. 자작하니 익어 있어야 할 도루묵이 푹 삶아져 흥건한 국물 속에 잠겨 있으니 말입니다.전날은 물이 모자라 말썽이던 것이 다음날은 넘쳐서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모자라거나 넘치면 말짱 헛일이 된다는 걸 도루묵이 몸소 확인해 보인거지요.`묵`이었다가 `은어`가 되고 도로 `묵`이 된 것은 결코 물고기의 탓이 아닙니다. 도루묵은 수심 100~400m의 바다에서 자유를 꿈꾸는 선량한 물고기일 따름입니다. 순하디 순한 물고기일 뿐이랍니다. 말짱 도루묵은 없습니다. 굳이 도루묵이 있다면 사람들이 붙인 새로운 이름일 뿐입니다.

2016-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