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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친구 한 명

▲ 이순화시인 진실한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부자라는 옛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매달려 오로지 한 친구에게만 마음을 터왔다. 평생을 내 옆에서 살 줄 알았던 그 친구가 작년 이맘때쯤 고향인 예천으로 이사를 갔다. 친구는 거기서 화장품 가게를 한다. 그러니 일을 끝내고 충분히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면 적어도 밤 열시는 넘어야 한다. 친구는 가게 문을 닫고는 늘 내게 전화를 했다. “내일 올래? 그럼 모레는 올 수 있어?”그녀의 간청에 어렵사리 남편에게서 1박2일의 휴가를 얻었다.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질까봐 십 수 년이나 되는 지나간 세월을 곱씹으며 그녀에게 가려고 집을 나선다. 서둘러 나왔는데도 간발의 차로 4시33분 기차를 놓쳤다. 다음 기차는 밤 8시33분에 있다. 4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집에 가서 쉬었다 나와도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가슴 조이면서 나온 외출인지라 괜히 들어갔다가 발목이라도 잡히면 어쩌나 싶어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간 보내기에는 그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 도립도서관 간행물 열람실 문을 밀었다.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딱히 할일 없어 얼쩡거리고 있는 내 속을 들킬세라 에세이집도 들춰보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잡지도 뒤적인다. 벽시계의 분침은 멈춘 듯하다. 시간이 이렇게 더디 갈 수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가슴이 조여든다. 건성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내 모습을 남들이 눈치 챌까봐 숨죽여 도서관을 빠져나온다. 땅거미가 스멀스멀 밀려들고 있다. 시내 2번도로로 발길을 옮긴다. 꼭 봐야할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또박또박 걷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시간은 짙어가는 어둠에 눌린 듯하다. 자꾸만 진이 빠진다.오래전 이 거리에 우리들의 아지트였던 로즈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뭉크라는 현란한 간판이 붙어있다. 그래도 나는 로즈에 잠긴다. 발끝만 내디뎌도 쿵덕쿵덕 소리를 내는 컴컴한 나무계단을 몇 굽이 올라가야 로즈가 나왔다. 요즈음의 매끄러운 자동문과는 사뭇 달랐다. 뻑뻑하고 무거운 통나무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 거기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감미로운 음률이 흔들리는 조명아래 가득히 흘렀다. 성적인 매력이 온몸을 감고 도는 `Love Me Tender` 이나 `Let Me` 의 비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포퓰러 뮤직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열정을 다 쏟아서 좋아했던 시절이었다. 잡다한 추억에서 벗어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치고 배도 고프다. 자꾸만 쓸쓸해진다. 로즈의 추억도 잠시 나는 어둑한 거리에서 자꾸만 우울하다. 갑자기 흙먼지를 흠뻑 실은 바람이 등을 떠민다. 지루한 시간 줄이기를 끝내고 기차역을 향해 뛴다.대합실 안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으슥한 구석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본다. 거세진 바람이 굵은 비를 몰고 오더니 갑자기 장대비로 변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노루 몰이꾼에게 쫒기 듯 뛰고 있다. 우산을 준비해 왔다는 사실에 살짝 쾌감을 느낀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나는 얼마나 얄팍한가. 친구와 나는 오늘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에는 금오시장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에 가곤했다. 회포를 담아 기울이는 술잔들이 분주한 곳. 안주 감으로는 산낙지가 제일이었다. 말짱한 정신으로는 먹기가 징그러워서 쓴 소주 한잔을 꼴깍 마셨다. 목젖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맛. 점점 초점이 흔들릴 쯤 안주감에 젓가락이 갔다. 온 몸이 토막 난 채로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산낙지를 굵은 소금장에 꾹 찍었다. 자잘하게 잘린 낙지는 미꾸라지에 소금 뿌려 놓은 것처럼 몸부림쳤다. 엉겨 붙은 살점을 떼어내어 간신히 입에 넣었다. 입천장에 달라붙은 살점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나도 뒤질세라 혼신을 다해 혀를 굴렸다. 목구멍으로 넘어가기까지 낙지와 나의 싸움. 오늘도 역시 나의 승리로 끝났다. 그 맛에 포장마차를 찾았던 것 같다.머무르고 싶은 세월의 끈을 놓고 주위를 둘러본다. 북적대던 대합실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정지되었던 시간은 껑충 두 세 시간을 뛰어 넘었다. 영주 행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에 가슴은 겉잡을 수없이 두근거린다. 어느새 비는 가랑비로 잦아들어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사위는 온통 뿌연 안개, 플랫폼 건너 가로등 밑에서 친구가 살포시 웃음 짓고 서 있다. 우산 펴들 겨를도 없이 빗속을 뛴다. 어둑했던 마음이 차가운 빗물에 말끔히 씻겨 내린다.

2015-04-10

베이비박스

▲ 정상미 시인#여자 1휘젓기만 하고 떠난 바람 때문인지 모른다. 그녀에게 남자는 바람이었다. 그녀는 학교를 더 다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중에 꼭 다시 찾으러 오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젖은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박스를 열었고 아기를 내려놓았다.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으며 심장은 쿵쾅거렸다. 걸음이 휘청거리고 머리는 매가 쪼아대는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무겁고 창백한 얼굴로 돌아섰다. 짭조름한 액체가 흘러 입으로 들어왔다. 모르겠다. 사물들이, 저 앞 빌딩이, 횡단보도가 다 흐려 보였다. 그녀는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여자 2그것은 불장난이었다. 게임이었다. 소녀는 재수가 없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덜컥 겁이 나긴 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키울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손가락 하나 떨리는 것도 없었다. 다만 누가 자신을 보지나 않을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리고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거추장스러운 쓰레기를 치우듯 말랑말랑한 물건을 밀어 넣었다. 소녀는 시끄러운 음악과 번뜩이는 조명이 돌아가는 클럽으로 갈까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곧장 어두운 피시방으로 향했다.#남자남자는 철없는 아내를 원망한다. 친자일 확률 0.001 퍼센트! 그는 도덕군자가 아니다. 두 딸을 키우기만도 빠듯한데, 어쩌란 말이냐. 생각 같아선 확 갈라서고 싶지만 딸들을 위해 참는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쉰다. 그러다 또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어렵다. 아내를 참 많이 사랑했는데 지금의 아내는 옛날의 그 아내가 아니다. 헤어질 생각은 없다지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온몸에 힘이 빠져오는 것을 느낀다. 이건 내가 원했던 바가 아니야, 눈 한 번 질끈 감고 결국 그는 철제문의 손잡이를 당긴다.#아기저벅저벅 발소리와 함께 왔다. 무거운 발소리였다. 소리가 끊겼다. 손잡이가 당겨지자 띠~, 하는 벨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나를 내려놓았다. 사막이었다. 혼자였다. 온기에서 떨어져 나올 때 나는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축축해지며 두려웠던 것일까. 포대기에 싸여 있었지만 사람의 품과 손맛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 그러나 훗날 나를 꺼내준 누군가의 손길을 원망하게 될 울음이었다. 날카로운 가시도 시퍼런 칼날도 들어있는 울음이었다.아기들이 버려지고 있다. 첫울음을 터뜨린 지 채 며칠도 되지 않은 여린 생명들이다. 누가 그렇게 버리고 갈까. 어디에다 버리는 것일까. 아기를 낳았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키울 수 없을 때 아기를 넣어두는 곳이 `베이비박스`란다. 이곳에 아기를 두고 가야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상황이 있겠지.처음 베이비박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아기를 넣어 다니는 캐리어이거나 일시적으로 아기를 맡겨두는 작은 공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불법이지만 합법적인 것처럼 영아를 유기하는 것이 베이비박스였다. 방망이로 세게 한 방 얻어맞은 것 같다. 그러니까 그건 사물함에 가깝다. 그렇다면 아기가 사물이란 말인가.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아기를 입양해 가는 스웨덴 정부의 사람들이 베이비박스의 실태를 조사하러 왔다. 먼 길을 날아온 그들이 차고 넘치는 서울의 베이비박스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했더라면, 미리 사회적 차원의 대책을 세웠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가는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무거운 짐을 안고 괴로운 심정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중에는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게 되리라. 그곳에 버려진 아기도 평생 상처를 안은 채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벚꽃이 진다. 갈 곳 모르는 꽃잎들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다.

2015-04-03

누워서 크는 콩나물

▲ 이은경수필가수필시대 기행 연재중 어릴 적 늦잠을 잘라치면 우리 할머니 잔소리 중 하나가 `해가 똥구녕을 찌르게 생겼다`였다. 그 꾸중은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잠들면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져서 웬만한 자극에도 꿈쩍 않던 나를 벌떡 일으킬 정도였다.지난 저녁에는 손님을 치르느라 몹시 피곤하였다. 피곤을 핑계로 해가 머리 꼭대기에 오도록 늦잠을 즐기려는 참이었는데 딸네 식구들이 출동했다. 자식을 먹이는 일에는 제 몸 아픈 것도 불사하는 것이 어미라니 피곤을 무릅쓰고 일어났다.아이들 조반준비를 하며 부엌바닥을 쓸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혼자서 돌아눕지도 못해 끙끙거리는 와중에 서울 사는 친구 J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오고 있는 중이라는 연락이었다. 점심 시간 무렵이니 밥이라도 한 끼 먹여야 하는데 내 상태는 그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외식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좀체 움직여지지 않는 허리가 걱정스러웠다.친구가 왔고, 나는 등산스틱을 의지하고 나섰다. 남편과 친구는 내 꼴이 우습다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통증을 표내지 않으려고 기꺼이 따라 웃었다. 허리를 반으로 접고 아슬아슬하게 걸어 마당을 내려갔다. 그런 내 모습에 할머니 모습이 겹쳐졌다.할머니는 허리를 반 접어 몇 발자국 걸으시다가 두 손바닥을 양 허리에 갖다 붙이시곤 허리를 천천히 피곤 하셨다. 다리는 동그라미를 그리듯 벌리고 무릎은 다 펴지 못하신 체였다. 늙어 고부라진 허리와 퇴행성관절염은 거동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몸으로 장사하시는 어머니를 대신해 우리 남매들을 먹이고 입히는 가사 일을 도맡아 하신 할머니였다.“한 시루 안에서 누워 자라는 콩나물이 있단다.” 무슨 이야기 끝이었는지 친구가 그렇게 말했고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앉아 있는 것도 통증 때문에 수월하지 않아서 할머니 생각에 잠기며 대화를 건성으로 하고 있던 참이어서 왜 그런 표현이 나왔는지 의아했다.“그래? 그 참 재미있는 표현이구나!”친구는 말갛게 웃으며 그 큰 입을 찢어 귀에 걸고는 말했다.“모르나, 첨 들어봤나? 니는 먼 놈의 작가라는기 그마이 무식하노?“그동안 나는 꽤나 잘 난 척 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그렇게나 신나는 일인지 몹시 흥분해서 웃어 제치는 것이었다.무식한 나는 움직이지 말고 안정해야 할 허리를 반 접고 등산스틱을 의지 삼아 친구에게 의리를 지키고 사흘을 드러누워 있다. 자꾸만 불어나는 체중을 말리려고 시작한 지난 보름간의 걷기운동이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 누워 있다 보니 밟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력이 아까운 운동도 그렇거니와 때맞추어 김치도 떨어지고 해야 할 집안일이 산더미다.할머니는 가끔 어머니께 아픈 다리를 하소연하시면서 손녀가 집 안 일을 조금이라도 돕게 하라고 청할라치면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셨다.“시집 가믄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부엌일을 뭐 하러 미리 시킨다는 거이야요. 기냥 두시라요” 나는 엄마의 응원에 힘입어 할머니의 아픈 다리나 허리를 모르는 척 했다.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을 당했다는 할머니는 피난민이었던 할아버지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할아버지의 장성한 아들이었던 내 아버지의 모난 눈총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다. 정화수 한 사발을 떠 놓고 가족을 축원하느라 손바닥이 닳도록 비비는 삶, 여느 어머니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사신 할머니의 인생은 참 지난했다.시루 안의 콩나물들처럼, 사촌들까지 모여 복작거리는 집에서 계집애라고 나 하나였지만 알아서 할머니의 고단함을 덜어드리지 못했다. 덜어드리기는커녕 친구들을 데려다 밥 먹이기 다반사였다. 나는 바로 할머니의 콩나물시루에서 누워 크는 콩나물이었던 것이다. 시집와서 소종가의 대소사를 거반 혼자서 감당해야하는 많은 일들은 그때 할머니를 돕지 않은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015-03-27

생애 가장 길었던 전화

▲ 전상준 수필가대구수필문예대학 강사 재윤이와의 통화다. 내 생애 가장 길었던 전화다. 그는 첫돌 지나지 않는 둘째 손자다. 사십 여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숨소리만 들었다. 처음엔 `행복은 찾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란 말을 떠올리며 즐거운 여행을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다녀간 녀석의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댄다. 며늘아기는 서울 가면 쉽게 볼 수 없으니 있을 때 실컷 정 나누기해야 한다며 연신 손자를 안겼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며칠째 몸살감기로 앓아누운 아내가 급하게 나를 찾는다. 병원 응급실에라도 가자고 할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손에 전화기를 들고 받아보란다. 며늘아기다. “아버님 집에 있는 전화기 아직 통화료 내지 않아도 되지요.” 엉뚱한 질문이다. 순간 평소 잘 통화되던 전화기에 문제라도 생겼나 싶어 긴장했다. 엉겁결에 아직은 무료라 답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재완이가 갑자기 놀이터에 가자고 못살게 한단다. 재완이는 첫째 손자로 재윤이 형이다. 형은 네 살이고 동생은 두 살이다. 재윤이가 잠이 막 들어 같이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주위에 부탁할 사람도 없단다. 큰놈 데리고 어린이놀이터에 잠깐 다녀올 테니 작은놈 좀 봐 달란다. 한 고집하는 재완이니 달래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에 이해가 간다. 한데 손자는 서울 있고 나는 대구에 있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참 희한한 세상이다.잠든 재윤이 옆에 전화기를 두고 놀이터에 나간다. 오 분 정도의 간격으로 전화 수화기를 들어봐라. 재윤이가 잠에서 깨어나 우는 소리가 들리면 자기 휴대전화로 연락해라. 설명을 들으니 아주 간단하다. 신문이나 책을 보면서도 아이를 볼 수 있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허락했다.전화기를 귀에 대어본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깊은 잠에 빠져 행복한 꿈을 꾸고 있나 보다.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예찬`이 생각난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어린이의 자는 얼굴을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졌고` `고운 나비의 나래, 비단결 같은 꽃잎, 세상에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얼굴`로 `더 할 수 없는 참됨과 더 할 수 없는 착함과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추고 그 위에 또 위대한 창조의 힘까지 갖추어 가진 어린 하느님`으로 만들었다. 어린이의 참모습을 바라본 마음이다. 영혼까지 맑게 하는 힘을 느낀다.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행복이 `내 여기 있소`하며 미소 짓게 한다. 그것도 잠깐이다. 방해하는 사람도 없는데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가끔 느껴지는 재윤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시계를 본다. 아직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았다. 전화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다. 전화기를 너무 멀리 놓고 간 것은 아닐까. 요에 솜이 많은 것은 아닐까. 잠버릇이 좋지 못해 엎어 자는 것은 아닐까. 방정맞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괜히 불안하다.완하게 가는 시계만 거듭 본다. 재윤이에게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울기라도 해 울음소리라도 크게 들리면 좋겠는데…. 옆에 자는 아내에게 불안한 속내를 드러내며 전화해도 괜찮을까 묻는다. 몸이 불편한 아내는 세상이 귀찮은 모양이다. 마음대로 하지 왜 자는 사람 자꾸 깨우느냐며 타박이다. 일각이 여삼추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조바심이 나 안절부절못하겠다. `그래 재완이도 삼사십 분은 놀아야지` 하며 위로를 삼는다.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전화기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드디어 일이 났구나. 재윤이가 자다가 일어나 어미가 없으니 방 밖으로 기어가다가 머리를 문에 크게 부딪친 모양이다.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며늘아기에게 전화했다. “아버님, 재윤이 벌써 울어요.” 하며 대답이 예사롭다. 초조한 심정을 그대로 전달할 수도 없고 “그래 `쿵` 소리가 났다. 집에 빨리 가 봐라.” 하고는 전화기에 온 신경을 모은다.답답함을 참으며 기다린 지 십 여분. “재윤이 아직 자고 있는데요.” 거참, 이럴 수가! 분명히 `쿵` 소리가 났었는데. 다행이다.

2015-03-20

명이

▲ 김숙현수필가 봄나물이 택배 상자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하얀 줄기 위로 날개를 펼친 명이 이파리가 소담스럽다. 절인 명이가 먹고 싶다던 작은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물을 절여서 애들 먹일 생각에 손길이 분주해진다. 짙은 고동색 간장에 투명한 식초를 섞고 하얀 설탕을 함께 해서 팔팔 끓였다. 온 집안에 간장과 식초 냄새가 진동한다. 반가운 고향 나물을 받아들고도 한편으론 애처로운 쓰라림을 느낀 것은 생면부지인 그의 소식을 함께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즈음이었지. 어릴 적 고향에선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동네 아낙들이 커다란 행주치마를 허리에 두른 채, 목에다 걸개를 하고 산천을 누비며 명이 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가까운 야산을 한 바퀴 휘돌아오는 아낙의 보자기는 산달이 꽉 찬 산모의 배처럼 불룩해져 있었다. 산 어귀에서부터 허리춤을 실룩거리며 안고 온 아낙의 나물 보따리를 풀어헤치면 망사처럼 생긴 껍질을 한 겹 두른 명이 나물이 방 한가득 이었다. 내가 어릴 적 명이는 아주 이른 봄에 눈 속에서 자라는 산나물이었다. 울릉도를 개척할 즈음, 긴 겨울을 지나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눈이 녹기 시작하면 산에 올라가 눈을 헤치고 이 나물을 캐다 삶아 먹으면서 생명을 이었다고 해서 그 이름을 명이라고 불렀다고 전해 들었다. 내가 아는 명이는 그것이 전부였다.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명이를 뜯기 위해 산을 찾는 아낙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대신 등산화를 신고 포댓자루를 짊어 진 남정네의 발길들이 산으로 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뿌리를 뽑아 먹던 명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잎을 먹는 고급 쌈 채소로 둔갑을 하더니 몸값이 천정부지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명이 철이 되면 바다를 건너온 낯선 사내들이 울릉도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문 산악 장비를 갖추고, 자일을 메고 이른 새벽 산으로 출근하는 산사나이들은 땅거미가 지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서너 개의 나물 자루를 산 아래로 굴리며 내려오곤 했다. 그들은 한 철 금싸라기를 긁어모으고 명이가 자취를 감추는 늦봄이 되면 명이랑 함께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디서 온 아무개가 올봄에는 얼마를 벌어서 갔다더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더 이상 명이는 명을 이어가는 산나물이 아니었다. 봄이 되면 건장한 사나이들을 산으로 유혹하는 금싸라기가 되어 있었다.고향을 떠나온 뒤 소문으로 전해 들은 그도 그런 부류의 사나이였다. 덥수룩한 콧수염과 구레나룻으로 봤을 때 젊은 시절 여자 꽤나 울렸을 거라는 고향 지인의 말을 이따금씩 전해 들었다. 지인은 그가 하루 나절에 칠팔십만 원을 거뜬하게 벌어 온다며 아마도 그는 전생에 산다람쥐였을 거라는 칭찬을 했었다. 그랬던 그는 돌아가는 길도 남달랐다. 명이철이 끝나기도 전에 산에서 실족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그는 울릉도가 화산섬이라 푸석한 바윗돌이 해동되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생리를 간과했을 것이다. 노다지를 캔다는 생각은, 봄을 맞은 산속의 생명이 제 흥을 못 이기고 흙 위에 들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얀 눈 속에 숨어 있던 명이의 생명력은 차가운 얼음의 한기를 품고 자란 매정함에서 온다는 진리도 그는 몰랐던 게다. 날이 풀리고, 얼어붙었던 바위가 녹으면, 들떠 있던 흙들도 자리를 잡아가고 나무들도 뿌리를 다지며 함께 살아간다는 섬마을의 진리를 간과한 채, 뿌리가 들뜬 나뭇가지에 자일을 메고 몸을 의지한 게 스스로 명을 단축한 원인이 돼버렸다. 가슴을 더욱 쓰리게 하는 건 산다람쥐를 닮은 그처럼 노다지를 캐다가 유명을 달리하는 이들의 얘기가 해마다 한두 번씩은 꼭 들린다는 것이다.명이 잎이 검푸른 멍으로 서서히 물든다. 반지르르한 푸르름을 포기하고 검푸른 투명함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이제는 숙성 기간이다. 간장의 짠맛과 식초의 새콤함, 그리고 설탕의 달콤함까지 어우러지고 나면 환생하는 명이의 맛이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난 명이는 달콤쌉쌀한 맛만 남아서 입안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 남는 알싸한 느낌은 무슨 맛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답이 없다.명이는 더 이상 명(命)이 아니다.

2015-03-13

등대

▲ 서혜정수필가·서진종합상사 대표 천장이 빙그르르 돈다. 아침밥을 먹고 석양이 지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하던 일을 멈추고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에는 여러 종류의 먹거리로 가득 찼지만 내키는 것이 없다. 한참 망설이다 두유 하나 꺼내 들고 창가로 간다. 어둠살이 내리기 시작했으니 고향으로 벌초 간 아버지가 돌아오실 시간이다. 한껏 목을 빼고 골목 어귀를 내다본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맵다. 다소 맹랑하긴 하나 내가 기다리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고모가 살뜰히 챙겨줬을 보따리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으니 오늘도 틀림없이 우리 부녀 입맛에 꼭 맞는 것들을 보냈을 터다. 이번에는 뭘 주었을까? 지난번에 보내 준 고추 튀각은 고소했고 우엉 김치는 밥도둑이 따로 없었는데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드디어 양손에 짐 보따리를 든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한껏 상기된 얼굴로 짐을 받아 든다. 허리가 휘청인다. 무엇이 들었기에 이렇게 무거운 걸까? 손톱이 얼얼할 정도로 용을 써 매듭을 풀어보지만, 쉬이 열리지 않는다. 요리조리 돌려가며 겨우 푼 보자기 안에는 어른 주먹만 한 감자와 양파, 아침 이슬이 묻어날 것 같은 진보라색의 가지. 줄 세워 둔 군인처럼 반듯한 미나리며 상추, 부추가 손질되어 있다. 입성이 걸지 않은 아우는 감자볶음을 좋아하고 조카는 생나물 없이는 숟가락을 들지 않으니 맞춤 식재료이다. 또 다른 보따리는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한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이 토종의 냄새다.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고 버무린 쌈장과 검지만 탁하지 않은 간장, 거기에 맑은 노란빛의 참기름까지. 여기서 끝이면 서운하다. 공들여 화장한 듯 고운 빛깔을 내는 깻잎 무침과 군내나지 않은 김장 김치, 구색도 골고루 갖췄다.고모 나이 아홉 살, 전쟁 통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충격이 잦아들기도 전에 돌림병으로 아우 둘까지 한날에 놓쳤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동생이 아버지와 막내 고모다. 하루아침에 가장이 된 할머니는 남은 자식들 키우느라 밤낮없이 일만 하였고, 고모는 다니던 학교마저 관두고 동생 둘을 건사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아우들을 향한 내리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언제였던가. 고모가 농사일로 몸살이 났다. 안타까운 마음에 퇴직하고 집에 있는 아버지에게 일을 시키라고 했더니 아까워서 못 그러겠다고 한다. 고모 인생에서 동생은 자식과 버금가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 동생이 장가가서 얻은 조카였으니 그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겠는가.유년 시절 나는 잘 걷지 못했다.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파서 중간중간 쉬어야만 했다. 한 날은 유치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십분 남짓 걸리는 짧은 거리를 걷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거짓말처럼 고모가 나타났다. 밭에서 일하는데 까마득히 먼 곳에서 시작되던 내 울음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더라는 거였다. 그 길로 쫓아 왔노라 말하는 고모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몇 해 전,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준비 기간도 길었지만 온 열정을 바쳤던지라 상심이 컸다. 여러 달을 허송세월로 보내던 중에 고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청구를 듣겠거니 했는데 뜬금없이 당신 등대의 불이 꺼지려고 한다는 거였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반응이 없으니 내가 당신의 등대라고 했다.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위해 불을 비춰주는 것이 등댄데 어찌 내가 그런 존재란 말인가. 몸도 성치 않고 엄마가 없어서 밑반찬까지 신경을 써줘야 하니 고모에겐 짐 덩어리가 맞다. 놀리는 듯한 고모의 말에 불퉁거렸더니 인생을 살다 보면 짐이 사람을 살리는 약일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신이 아니면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근심 덩이인 내가 삶의 의미가 되어 버린 것일까? 그때는 이해되지 않던 말이 고모의 허리가 굽어질수록 아버지의 검은 머리칼 숫자가 줄어들수록 알 듯하다.`삐리링. 삐리링` 밥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지난날을 걷고 있는 나를 깨운다. 큰 대접에 하얀 쌀밥을 뜬다. 오늘만큼은 소식(小食)하는 우리 부녀의 오랜 식습관이 무너지리라. 아버지에게는 어머니 같은 누나, 나에게는 생명수 같은 고모가 마련한 밥상임을 알기에 푸지게 먹을 것이다. 모쪼록 더디게 소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5-03-06

침대는 섬이다

▲ 이다안수필가 침대에 몸을 눕힌다. 아들 녀석이 귀가하는 시간까지 완전한 자유다. 종일 침대에 누워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조용하고 편안하다. 꼭 섬에 온 듯하다. 침대 위가 섬이라고 상상해 본다. 어느 한적한 남해의 작고 예쁜 섬. 한가로이 바다를 바라보며 피곤한 일상을 위로받는 심정으로 눈을 감는다. 정말로 바다가 보이는 것 같다. 배를 타고 저 멀리 보이는 나의 섬에 도착한다. 내 섬 주위에는 손만 뻗치면 전화기, 핸드폰, 노트북, 리모컨과 몇 권의 시집과 소설집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는 일 말고는 섬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정렬되지 않은 널브러진 물건들이 긴장감을 풀어준다. 책 읽다가 잠 오면 자고, 지루하다 싶으면 TV보고, 그것마저도 재미없다 싶으면 인터넷사이트를 유영하기도 한다.두어 평 남짓한 `침대섬`. 섬에 있는 동안 내가 디딘 거실과 주방, 집안 곳곳은 뭍이 된다. 뭍은 오늘 나와 떨어져 있다. 하기에 뭍에서의 나는 없고 오직`침대섬`에서의 나만 존재할 뿐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게으름 그 자체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시간을 즐기기 위해 나는 열흘에 이틀 정도는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고 섬 생활을 즐긴다. 부족한 잠과 결핍된 생각들을 채워주는 보약 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어떻게 종일 그렇게 지낼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시간 개념 없이 `침대섬`에서 즐기는 거드름은 에너지로 다시 생성된다.바쁘게 코앞의 일만 처리하며 살다 보니 놓치는 일들이 많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과 잠시 잊고 살았던 사람들도 생각나고 무엇보다 여유가 생겨나 좋다. 사색과 공상에 잠기다 보면 뜻하지 않았던 생각을 퍼 올릴 수 있다.때로는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들이 뒤섞여 본성을 건드리기도 한다. 내 위주로 판단한 모든 것들을 개조해 보고 싶기도 했다가, 이내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또 살아가는 맛을 찾는다. 인생이 이분법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방향을 돌려가며 생각하다 보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다. 다만 차이일 뿐이다.어느새 섬에도 어둠이 내려앉는다. 낮과 밤이 만나는 시간은 왠지 허전하고 쓸쓸해진다. 낮도 아닌 밤도 아닌 경계의 시간은 어쩌면 시간 속에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이 시간은 민감하고 예민해진다. 나도 그 시간 속에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 탓일까? 길 잃은 아이 마냥, 갑자기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위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잠시 방향감각을 잃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눈에 익은 살림살이가 낯설게만 느껴진다.예전에 나는 행주와 걸레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난히 깔끔을 떨며 살았다. 눈 뜨면 닦고 눈 감기 전에도 닦는 일을 충실히 했다. 전업주부인 나는 주부로서의 본분을 다한 셈이다. 그 성실함에 부지런함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성실한 부지런함을 가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실하면서 부지런하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부지런함을 부정하고 싶었다. 성실하기만 하면 되는데 부지런하기까지 한 삶이 재미없어졌다. 주부라는 본분은 성실히 하되 조금은 게을러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내가 요즘 생각하는 성실한 게으름이다. 가정주부로서 밥상은 책임지면서 매 끼니때마다 설거지 하는 것이 아니고 가끔은 오늘처럼 게으름을 피우면서 한꺼번에 하는 요령을 알았다. 이제는 행주와 걸레를 싱크대 위와 바닥에 있는 것으로 구별하면 되는 게으름의 도를 터득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보니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도 생겼고 고단한 몸도 훨씬 편해졌다.나는 성실한 게으름으로 일상의 피로를 가끔 침대섬에서 보낸다.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그만이다. 눕고 싶으면 눕고, 앉고 싶으면 또 그렇게 하고 누구의 간섭,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어떤 격식과 형식이 필요 없는 이곳이 좋다.좁아도 한없이 넉넉하고 외로워도 행복한 섬, 그 어떤 섬도 내겐 나의 침대섬만큼 편안한 곳은 없다. 그런 성실한 게으름이 나는 참 좋다.

2015-02-27

그 여자의 사랑

▲ 조병렬수필가 사랑만큼 고귀한 것이 있을까? 그 여자의 사랑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푸른빛이 애처롭게만 보이던 어느 날. 28세 처녀가 충청북도 음성꽃동네를 찾아왔다. 그녀는 고아로서 18세가 되면서부터 보육원에서 나와 독립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주위에 아무도 돌봐 줄 이 없는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몸을 파는 수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고의 십 년 세월에 마지막으로 붙은 이름은 자궁암 말기 환자였다.평소에 그녀가 어머니로 부른 그분은 다행히 악덕 포주는 아니었다. 그분은 죽살이 고개를 힘겹게 넘고 있는 그녀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서울의 큰 병원에까지 가 보았으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다시 지필 수는 없었다. 많은 노력을 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찾아온 종착역이 이곳이었다. 평생토록 한 번도 옳게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받게 하면서 마지막 생을 보듬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그때부터 그녀는 오로지 중환자실에서 전혀 거동하지 못하는 다른 환자들을 돌보는 것으로 밤낮을 잊고 봉사의 길을 걸었다.그런 생활을 하던 중에 27세가 된 한 청년의 병간호를 하게 되었다. 그는 경직성 마비증 환자로서 말도 할 수 없고 몸 하나 까딱하지 못하였다. 단지 큰 소리로 우는 것과 눈꺼풀을 움직여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남자 곁을 수개월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지내는 날이 계속되었다.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점차 정분이 쌓여 갔을까? 보통 세인의 눈으로 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고 비극적인 만남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릴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애절하여 간단히 보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사랑의 가치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이들 남녀의 정분도 사랑이라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사랑과는 분명히 다를 것만 같았다. 이들의 사랑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도, 시베리아로 유형(流刑)을 떠나는 카추샤의 뒤를 따라가는 네플류도프의 사랑도 아닐 것이다. 설렘이나 열정의 사랑뿐만 아니라 위안과 치유의 사랑도 더없는 고귀한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사랑의 힘은 육체적 통증도 잊게 하였던가. 그렇게 불편한 육체를 가진 두 사람의 몇 개월도 사랑이고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태울 수 있었던 위안의 사랑과 생명의 불꽃도 불과 8개월 정도뿐이었다. 마지막 혼불을 태우듯 그녀는 최후의 막음불질을 끝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자신의 모든 장기를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기증하면서, “이런 몸도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요?”라는 한마디 말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가 죽던 날 밤, 아무도 청년에게 그녀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청년은 하염없는 눈물만 쏟고 있었다고 한다.사별의 순간에도 사랑의 심령(心靈)은 서로 통하는 것일까. 사랑의 힘은 육체적 아픔과 죽음의 고통마저도 잊게 할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숭고하고도 비장한 사랑의 힘 앞에 나는 그냥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을 사랑으로 승화한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이곳 꽃동네의 푸르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오래도록 전해지고 있었다.극단적인 절망의 늪에서 한 오라기의 행복을 갈구했던 삶 앞에서 그들이 보여준 숭고한 사랑의 의미를 오래도록 내 가슴에 담아 두고 싶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따뜻한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을 담지 못한다면 어찌 인생을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남에게 뿌려줄 사랑의 씨앗이 담겨 있고, 남으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아야만 행복의 싹을 틔울 수 있는 씨앗도 뿌려져 있다.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이 없는 인생이란 한 줄 외줄에 걸린 슬픈 존재라고.

2015-02-13

커피를 마신다

▲ 정아경수필가·독서지도사 `향이 나는 사람`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순간, 내 후각은 예민해졌다. 오른팔 왼팔을 번갈아가며 내 냄새를 맡는다. 셔츠의 목을 쭈욱 당겨 얼굴을 셔츠 속에 박고 들숨을 길게 마셔보기도 한다. 젖가슴에서 올라오는 것은 냄새라기보다 먼저 후끈한 열기다. 무수한 냄새가 뒤섞인 듯도 하고 그저 작고 작은 것들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도 같다. 은근하지만 밀도 높은 살 냄새, 분명 냄새를 맡고 있지만 나는 나의 냄새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그는 내게서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일까? 향은 존재의 문이다. 운식이는 내게 논술 수업을 받는 중학교 일학년생이다. 녀석이 부모님과 어디 여행을 다녀오느라 이주일만에 나타났을 때 녀석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소리쳤다.“입구부터 쌤 냄새가 나요.”“냄새? 운식아, 쌤 냄새가 어떤 거야?”“그런 거 있어요. 쌤 냄새~.”“좋아? 나빠?”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향은 기억의 통로이다. 팔공산으로 가는 과수원을 지날 때는 가끔 퇴비냄새가 난다. 그러면 나는 차문을 열고 서행하며 깊은 숨을 들이쉰다. 생각지도 못한 고향의 기억들이 불쑥불쑥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흙에 묻혀 사시는 아버지가 떠오른다. 산사입구에 들어설 때 옅게 피어오른 향내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곤 한다. 향을 피우고 독경하는 정갈한 아버지의 모습을.향은 사랑의 촉매이다. 연애할 적 그와 다툰 뒤 소원해진 적이 있었다. 먼저 화해를 신청할 줄 알았던 그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고 냉전은 꽤 길어졌다. 어느 날 나는 그의 자취방을 말없이 찾아갔다. 남산동 골목 끝자락 후미진 문간방. 그곳에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우리 둘 만의 올망졸망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 시간들을 다시 확인하고 나면 뭔가 선명해질 것도 같았다. 방은 비어 있었다. 나는 벽에 걸린 그의 재킷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그의 냄새가 내 가슴으로 들이쳤다. 그의 냄새가 부드럽게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고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 따뜻함에 울컥해져 방안을 둘러봤다. 윗목에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구나. 지금도 냉전이 길어지면 그의 옷에 얼굴을 묻어본다.향은 에로스의 완성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에로틱한 장면을 생각하면 커피향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였는지 책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데, 주인공인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 전엔 으레 커피를 마시곤 했다. 게임하듯 서로를 탐색하는 긴 시간이 흐르고야 하나가 되려는 갈망의 시간이 온다. 그녀는 매번 뜨거운 커피를 아주 천천히 마신다.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소로록 커피를 마시는 그녀에게 생은 온전히 그녀 편인 듯했다.어느 날, 내게도 그런 명장면을 연출할 기회가 왔다. 두 아이가 캠프를 떠났다. 집근처 구이 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오랜 만에 그의 팔짱을 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느리게 걸었다. 그리고 침대에서도 느리게느리게 걸었다. 나는 가능하면 몽롱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그에게 속삭였다.“커피 좀 타줘.”순간 들려온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는 내 꿈을 산산조각 냈다.“늦은 밤에 무슨 커피, 하여튼 중독이야.”완전한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꿈 꿀뿐. 너와 나의 만남은 너와 나의 시간 속에서 항상 미끄러진다. 결국 완전한 만남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한다. 아니, 모든 시간은 떠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떠남은 내 속에 그대의 집을 짓고, 그대 속에 나의 집을 짓게 한다.향은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우리 육신이 물과 바람과 먼지로 돌아간 후에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은 향이 아닐까 싶다. 자신만의 고유한 향이 한줌 남아 허공을 맴돌다 어느 시간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기억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닐까.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 커피향을 맡으며 당신의 문을 두드린다.

2015-02-06

나쁜 놈

▲ 권춘옥수필가·수미문학회 이사 연락이 안 된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하다. 텔레비전이 저 혼자 지껄이고 있다. 아들을 낯선 도시에 떨궈 놓고 올라와서는 관심을 의도적으로 끊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사는 내 삶이 싫어 아이만큼은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냥저냥 지냈다. 다 큰 자식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침에 메시지를 남겨뒀으니 점심시간이나 그것도 아니면 퇴근하는 저녁때쯤이면 답이 오겠거니 했다. 사흘이 지났다. 메시지도 미확인인 채로 있다. 휴대폰이 고장 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요즘 세상에 한나절이면 수리가 다 되는데 이 무슨 변괴인가. 다른 이유가 하나둘 고개를 쳐들었다. 학생들 데리고 오지 캠프라도 들어가서 불통인가. 몸이 아파 결근했는가. 아직 적응이 덜 된 차에 윗선과 마찰이 생겨 애꿎은 휴대폰을 집어 던졌는가. 계약서에 있는 부동산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 거처에 가 봐달라고 할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비상연락처 하나 만들어 둘 것을. 때늦은 후회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타지에 간 지 채 한 달도 안 된 터라 그럴 겨를도 없었다. 코 구멍만 한 원룸에 관리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 동네처럼 이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할수록 갑갑했다어떻게든 아들에게 닿아야 했다. 메일함을 열었다. 휴대폰이 안 되면 노트북에라도 파고들어야 했다. 먼지가 부옇게 쌓인 주소록에서 아이 이름표를 뽑아 편지를 썼다. 아들아. 이 메일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네 휴대폰이 안 되니 적막강산이구나. 집 전화도 없지. 자식 찾는다고 근무하는 학교로 전화 걸기도 민망하지. 해서 생각 끝에 메일을 보낸다. 한 번쯤 전화라도 해주지. 네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내일은 할 수 없이 네가 근무하는 학교로 전화를 해볼까 생각 중이다. 너에게 닿지 못하는 오늘 밤이 꽤 길겠다. 이 메일을 보는 대로 바로 연락해다오. 도장 찍듯 전송 버튼을 콱 눌렀다. 입력하신 아이디는 존재하지 않거나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은 휴면 아이디라 전송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길.아들이 공군에서 훈련받던 시절이었다. 늦은 밤 막 잠자리에 들려는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지역 번호이어서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끊어버렸다. 베개를 툭툭 치며 머리를 누이는데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이 침대 밖으로 퉁겨졌다. 아들이 입대한 진주의 지역 번호였던 것이다. 잠든 남편 깰세라 숨죽여 거실로 나가 밤새도록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쪽으로 연락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눈앞을 뿌옇게 만들었다. 얼마 후 휴가 나온 아들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 긴 줄도 마다 않고 전화를 걸었는데 다시 줄 맨 뒤쪽으로 가서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막사로 돌아와 애꿎은 베개에게 화풀이 했다 한다.학교는 마침 토요일이라 전화 받는 사람이 없다. 급기야 아들의 여자 친구가 떠오르지만 주저했다. 흘려들은 기억을 쥐어 짜 근무처 이름을 알아냈다. 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떨린다. 상냥한 아가씨가 받는다. 아들의 여자 친구 이름을 대자 저쪽에서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갑자기 그 많던 언어들이 서로 차례를 미루며 뒷걸음질 친다. 이쪽 사정을 죄다 말했다. 아가씨의 친절함 끝에 묘한 웃음이 대롱대롱 매달려 전화기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이른 아침시간이다. 근무가 없는 날이라 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을 판이니 전화벨이 어서 울리기를 기다렸다. 전화번호가 떴다. 마지막 번호 네 자리가 아들의 그것과 같다. 저희는 메신저로 서로 연락 중인데, 안 그래도 어머니께 말씀드리라고 했었는데 안 했나 보군요. 혼내세요.나쁜 놈, 저 편하면 그만이지. 저 고달파야 `엄마`하고 찾을 테지. 아니 이젠 그럴 일도 없겠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제 여자 친구와 먼저 나눌 것이다. 우리도 부모 걱정시킬까 봐 쉬쉬하며 덮지 않았던가. 참을 성 없는 내가 더 나쁘다. 아들이 아픈 것이 아니라 휴대폰이 아프다니 다행이다. 아, 엄마. 무슨 일이 있으면 학교에서 집으로 연락을 하죠. 그리고 휴대폰 고치러 갈 시간은 어디 있어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 붙들려 있는데. 오늘 겨우 시간이 나서 고쳤어요. 그리고 학생 휴대폰 빌려서 문자 넣었었는데, 안 갔어요?

2015-01-30

민들레 피는 골목

▲ 박현기수필가·동성교역 대표 마당 한 귀퉁이 시멘트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민들레가 피었다. 마당뿐만 아니라 사무실 앞 담벼락 밑에도 몇 송이가 무리를 지어 얼굴을 내밀었다. 봄바람 두어 번 스쳤을 뿐인데 갑자기 어디에서 날아와 저 험한 곳에 뿌리를 내렸는지 모를 일이다. 물도 없고 거름도 없어 가녀리고 왜소하다. 뿌리나 제대로 내렸는지 몇 번을 들여다본다. 저 혼자 생글거리는 모양새가 제법 꽃답지만, 도시의 시멘트 사이에서는 왠지 그 모습이 애잔하다. 그 여리고 앙증맞은 몸매 어디에 그런 강인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는지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택가도 아니고 상가지역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 사무실이 있다. 이십여 년째, 내 건물은 아니지만 마당과 창고를 주인처럼 사용하고 있으니 세입자들이 자주 바뀌는 다른 집과는 달리, 나는 주위에서 거의 토박이 대접을 받고 있다.어느 날 사무실 앞에 고물상이 들어섰다. 원래 널찍한 마당이었는데 땅을 파고 계근대를 설치한 날부터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조용하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폐지와 고철을 집어 올리는 크레인 소리, 십 원이라도 더 받아가려는 노인의 원망섞인 소리, 망치로 드럼통 쪼개는 소리, 그리고 먼지…. 환경문제로 인한 이웃 간의 다툼이 남의 일인 줄 알았더니 내가 환경과를 찾아가야 할 판이었다.고물상 주인에게 이사를 가라고 몇 번의 경고를 보냈다. 그때마다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할뿐, 신경 거슬리는 소음과 먼지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주민들의 진정서를 받아 환경청에 고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때마다 힘없이 봐달라는 소리만 되뇌인다.며칠 후 저녁때, 고물상 주인과 할머니가 맥주 몇 병을 들고 왔다.“너무 그러는 것 아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할머니의 표정에는 간절함과 울화가 교차하고 있었다. 다짜고짜 사람을 잘못 봤다며 너무 그러지 말란다. 속속들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십여 년을 이웃해 지내면서 동네의 폐지와 고물을 주워서 아픈 할아버지를 봉양하는 사정을 어렴풋이 알기에 가능하면 도와드리려 했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젊은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내가 사장을 잘못 봐도 너무 잘못 봤다” 영문 모르고 당하자니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뭔지 말씀이나 해 보십시오” 그제야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맥주잔을 불쑥 내밀었다. 고물상 주인이 아들 못잖은 조카란다. 제법 큰 사업을 하다가 IMF때 부도가 난 이후로 되는 게 없었단다. 마지막 호구지책으로 벌인 일이니 이웃 간의 정으로 좀 봐달라는 거였다. 두 사람이 찾아온 이유를 알았지만, 앞으로의 쾌적한 환경을 위해서는 모르쇠로 밀어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한마디가 나를 주춤거리게 했다.“있는 사람은 다 이렇게 제 욕심만 차리나? 내가 사람을 진짜 잘못 봤다.” “할머니 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욕심만 차리는 사람은 더욱 아닙니다.”했지만, 그 말 한마디에 젠장! 나는 졌다. 이해하고 참기로 했다.`있는 사람`이란 말과`잘못 봤다`는 절규가 묘하게 나를 자극했다. 잘 보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슬그머니 물러섰다. 바보!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의 풍경이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유모차에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 아이의 손을 잡고 빈병을 가져오는 새댁, 그 모든 쓰레기를 일일이 분리하는 주인, 더러 학생과 아가씨도 재활용품을 들고 와 몇 푼의 돈을 받아가는 그 모습이 잔잔한 동심원을 점점 넓혀가는 것이었다. 나는 한번이라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마당 귀퉁이 시멘트 틈새에도, 굳건한 담벼락 아래에도 민들레가 피었다. 유난스레 기복이 심한 올해의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작은 꽃잎을 앙증스레 하늘거리다가, 더러는 바람에 실려 떠나기도 하고, 더러는 자동차 타이어에 무참히 깔리기도 한다. 그래도 내년에 또 필 것이다. 아침에 출근을 하니 고물상 주인이 골목을 깨끗이 쓸어놓았다. 다행히 민들레를 뽑지는 않았다. 말간 골목에 노란 민들레가 아늑하고 정감어린 풍경으로 다가온다. 폐지와 고물을 들고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민들레를 닮았다. 소음과 먼지 속에서 또 한 번의 봄날이 간다.

2015-01-23

금은화가 피었습니다

▲ 권현숙수필가 달달한 향기를 풀어놓는 봄은 황홀하다. 오뉴월이면 금은화도 사방으로 향기를 풀어낸다. 담장과 좁다란 수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빌라와 산이 이웃해있다. 1층에다 동향(東向)이라 햇살결핍에 시달릴 걸 뻔히 알면서도 선뜻 이 집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산 때문이었다. 갓 내린 커피를 들고 주방 창가로 간다. 창을 활짝 열어젖힌다. 밖에서 기웃대던 꽃향기가 냉큼 안으로 들어온다. 뻐꾸기소리도 잽싸게 따라 넘는다. 상쾌하다. 꽃향기가 커피향기에 잠시 밀려난다. 꽃무더기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향기롭다. 담장 위의 금은화는 밤새 안녕할까?“헉, 저게 뭔 일이래?”황급히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창가로 바짝 붙어 선다. 분홍셔츠에 등산화까지 단단히 챙겨 신은 웬 낯선 할머니 한 분이 꽃을 따고 있다. 노랑나비 두 마리가 정신없이 할머니 주위를 맴돈다. 날갯짓에 황망함이 묻어난다. 저러다 꽃들이 몰살 되진 않을까 내 마음도 조급해진다. 어찌해야 하나. `뭐하는 짓이에요.` 냅다 소리라도 질러볼까. 속으로는 열두 번도 더 솟구치는 소리가 당최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내가 참 바보 같다.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 할머니의 손놀림은 더 빨라지고 옆에 놓아둔 비닐봉지의 배는 점점 불러간다.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창가에서 전전긍긍이다. 그새 꽃은 삼분의 일이나 사라졌다. 할머니의 소행을 몰래 폰 카메라에 담는다. 문우 H선생에게 사진과 함께 속상함을 잔뜩 담은 문자를 날린다. 답장 대신 전화가 온다. 후딱 달려 나가 할머니께 부탁드려 보란다. H선생의 말에 선바람으로 달려 나간다. 남은 꽃이라도 지켜야한다.봄이 오자 비탈에도 거짓말처럼 새싹들이 돋아났다. 겹겹이 쌓인 돌들 틈새로 띄엄띄엄 용케도 뿌리를 내린 모양이다. 가장자리를 따라 돋아난 강아지풀과 밉상덩어리 환삼덩굴마저도 예뻐 보였다. 초록이 더해지자 비탈에는 생기가 돌았다. 거기서 피어난 금은화를 처음 보았을 때 눈물 나게 반가웠다. `인동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금은화는 해를 거듭할수록 튼실하게 영역을 넓혀갔다. 뻗어 나온 덩굴은 탐스러운 꽃무더기를 이루었다. 봄이면 희고 노란 꽃들을 환하게 피워내는 모습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갑작스런 인기척에 할머니가 놀라실까 헛기침을 했다.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낼까 쭈뼛대는데 할머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여전히 손은 멈추지 않는다. 꽃을 따지 말라고 까칠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여기에 핀 꽃까지 꼭 그렇게 따셔야겠냐고, 눈물겹게 피어났을 꽃들이 가엽지도 않느냐고 앙칼진 목소리로 마구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할머니 앞에 서니 말은 보들보들 강아지풀 꼬리가 되어 기어 나온다.“할머니, 위험하게 어째 거기까지 올라가셨대요. 그 꽃은 따서 뭐 하시게요? 따시더라도 다 따진 마세요. 이런 곳일수록 꽃이라도 환해야지요.”생각 따로 말 따로 튀어나온다. 기가 막힌다.“꽃이 하도 탐스러워서 따보는 거유. 아까워서 말이지. 안 그래도 땡볕이 뜨거워서 그만 내려갈까 했다우.”내 표정을 읽었는지 할머니는 머쓱해하신다. 꽃차로 달여 마실지 효소를 담글지 하시며 일어서는 할머니 손에는 제법 불룩해진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돌담 위에서 기다시피 내려오신 할머니는 뒷골목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꽃무더기의 절반이 휑하다. 반쯤 밀다가 만 떠꺼머리 같은 몰골을 보니 내 가슴도 휑해진다.금은화는 한 덩굴에 흰색과 노란색의 꽃이 섞여 핀다. 수정이 되기 전에는 흰색, 수정이 된 후에는 노란색으로 변한다. 이미 수정 된 꽃들을 곤충들이 다시 찾아드는 헛수고를 덜어주려는 꽃의 배려란다. 동시에 효율적인 수정을 돕는 일이기도 하다니 배려가 향기만큼이나 감미롭다. 종의 번성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꽃들도 잘 아는 모양이다.위험한 비탈에다 굳이 텃밭을 만드는 사람들과 꽃을 따버린 할머니의 욕심이 씁쓸하다. 욕심이란 이기심에서 생겨난다. 이기심을 조금만 덜어내면 우리네 세상도 한결 더 향기로워질 텐데. 식어버린 커피 맛이 너무 쓰다.

2015-01-16

눈꽃 열차

▲ 이복희수필가 Y문학회에서 강원도 태백으로 눈꽃 열차 테마여행을 갔다. 태백도 겨울 기차여행도 처음이어서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동대구역에는 남극의 펭귄 떼 같은 인파가 대합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더욱 들뜨고 상기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 플랫폼에 대기한 기차 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갔다. 기차는 수많은 인파를 삼키고도 무거운 내색 하나 없이 기운차게 출발했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며 아련한 추억을 잠깐씩 되새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잔설 위로 다시 눈이 퍼붓기 시작한다. 눈꽃 테마에 때맞추어 눈이 내려주니 행운이다. 18년을 멈추지 않고 레일 위를 달리는 영화 `설국열차`의 설경도 떠오른다. 열차는 간이역마다 서고, 사람들은 그때마다 오르내리고 기차는 또 달린다. 거의 다섯 시간이나 가다 서다를 반복했지만 지루한 줄 몰랐다. 철암역에 도착하자 터진 콩자루에서 콩알 쏟아지듯 인파는 눈발 속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태백의 눈꽃 축제장은 다양한 볼거리로 넘친다. 백설기를 덮어 놓은 세상에 만리장성, 숭례문, 만화 캐릭터 등 환상적인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조각가의 살아 숨 쉬는 혼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 위에 또 다시 눈발이 하얀 떡고물처럼 흩어져 내렸다. 가정이라는 둘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고 새로운 곳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은 휘날리는 눈과 더불어 하늘로 날아오르게 한다. 눈밭에 뒹굴다보니 머릿속이 포맷한 것처럼 백지가 된다. 그 위에 나만의 추억을 하나하나 스케치한다. 세월이 흘러 태백을 떠올리면 스케치한 그림이 파노라마로 떠오를 것이다. 추억의 창고가 차곡차곡 채워져 알부자가 된 것 같다.오후 5시경 철암역을 뒤로한 채 기차는 온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여행사 직원이 음악을 틀겠다고 안내멘트를 하자마자 트로트 메들리가 쏟아진다. 잔잔한 경음악이나 겨울가요려니 한 기대가 깡그리 무너진다. 아줌마 부대가 여기저기에서 일어선다. 볼그댕댕한 얼굴을 보니 기분 좋게 술도 한잔씩 한 모양이다. 처음에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금방 기분이 고조되는지 막춤 판이 벌어진다.꽃놀이를 다녀 온 관광버스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던 꽃무늬 블라우스의 어머니가 어슴푸레 떠올랐다. 알듯 모를 듯 동네 어른들과 좁은 버스통로에 어우러져 흐느적거리는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여태 보아온 단아함과 거리가 멀었다. 꽃무늬 옷보다 더 발그레한 얼굴과 마주치자 내가 더 부끄러워 외면해 버렸다. 내 나이 불혹을 지나고 보니 그때 어머니를 이해 할 것 같았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는 야외놀이가 일상의 무거운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는 어머니의 숨구멍이었던 것이다. 나의 외면은 어머니를 내 틀에 가두고 이런 어머니가 되어 달라는 욕심이었다.몇 년 전 친구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제주도 여행을 간적 있다. 패키지 여행이라 자유시간이 없었다. 죽이 잘 맞는 친구들과의 시간이라 관광가이드의 말을 뒷전으로 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 마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이끌었다. 추억의 거리에 들어서 관광을 하는데 디스코 음악이 흘렀다. 흥에 겨워 주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친구들과 고고에 막춤까지 추었다. 아이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쳐버렸다. 그때 아이들의 마음이 내가 예전 엄마가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춤을 추던 모습을 볼 때 같았으리라.눈꽃열차의 6호 객실은 알고 보니 나이트클럽과 같은 곳이다. 우리 일행 중에 몇몇이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흥을 돋운다. 나도 모르는 손에 이끌려 시늉만 내다 앉아버렸지만 딱히 싫지는 않다. 처음엔 낯설어 어색했지만 함께 박수를 쳐다보니 나도 흥이 나기는 한다.어둠이 내리자 차창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애처롭다. 지치지 않는 저 몸짓은 아마도 꾹꾹 눌러 둘 수밖에 없었던 한 생의 말 못한 이야기일 것이다. 생전 어머니가 그랬듯이 일상에서 벗어나자 몸의 언어로 한꺼번에 터져버린 불덩이 아닐까. 자유에 대한 갈망이 평상시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춤으로 이어졌으리라. 내 몸에 자연스레 배여든 억눌린 여성성에 공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관객으로 있는 내 모습이 어설프기만 하다.

2015-01-09

존 필더의 달력

▲ 손숙희대구 수필문학회 회장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우편국 소인이 찍힌 소포를 받았다. 안전포장에 흠 하나 없이 배달된 이 선물은 로키산맥의 일부 콜로라도의 풍경이 담긴 사진달력이다. 지난 27년 동안 우리는 이것을 집안의 중심이 되는 자리에 걸어두고, 그 광활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살아왔다. 가족사 속에 자리할 우아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막연히 먼 곳을 그리며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보였다가 사라지거나, 세월 농익은 어느 날 손에 잡히기도 한 실상이기도 하였다. 꿈을 꾼다는 것은 화창한 봄날 가로수를 따라 걸을 때 마른 가지를 헤치고 돋아나오는 잎들의 속삭임을 듣는 마음이다. 신록의 희망이다.중학교 음악 시간에 한 노래를 배우면서 달빛 출렁거리는 콜로라도의 풍경을 꿈꾼 적이 있었다. 세월인가, 그 곳이 어느 날 내게로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눈 덮인 산맥의 꼭대기, 청람 빛 하늘과 산봉우리가 맞닿은 그 곳에 보름달이 시린 얼굴로 떠 있다. 소복인 듯, 눈옷을 입은 나무숲은 태고의 설경을 그린다. 로키의 산자락 콜로라도의 계곡에 겨울이 빙하로 내렸다.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천연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내던 사진작가 존 필더(John Fielder)의 콜로라도 풍경사진이다. 날마다 조금씩 변하는 자연의 신비가 작가의 눈에 포착되어 사진 속에 담겼다. 새롭게 창조되는 자연의 순간들이다.그는 평생을 콜로라도의 산, 들, 바위, 숲, 호수의 빼어난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연말이 되면 12장의 사진을 골라 작품달력을 만들어 선보인다. 그 지역의 가이드북을 제작한 것은 더 오래전이었다. 그는 사진작가이자 교사이며 출판업, 환경보호, 청소년 환경체험 등 지역의 자연을 지키는 환경운동가라고 소개한다. 생애의 사명으로 자연 사랑을 완성해가는 길을 걷고 있는 분 같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렌즈를 통과해 혼을 지닌 예술작품으로 태어났을 것이다.작년에는 이 달력 제작 30주년 기념으로 그 동안 선보인 수작들 55편을 골라 주간 약속달력(Engagement Calendar)을 펴냈었는데, 올해도 두 종류를 함께 받았다. 약속메모나 간단한 일기를 쓸 수 있게 페이지를 편집해 놓았는데 나는 단 한 칸에도 글씨를 쓸 수 없었다. 한 해의 여행으로 잠시 지나가며 느끼는 즐거움보다 오래도록 그곳의 비경을 소유하는 행복을 누리겠다는 생각에서였다.스물일곱 해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성탄과 새해 벽두에는 이 기쁨을 누린다. 산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좋아하다가도 문득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이런 기쁨을 준적이 있었던가를 돌아보게 한다. 채우지 못하고 헐렁하게 보낸 시간의 조각들을 주워 담듯이 못다한 일들을 열 두 장의 갈피에다 차곡차곡 챙겨 둔다.발신인은 어린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의 언니.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5년 연상의 중학생이었는데, 공부도 뛰어났지만 늘 문학서적을 애독하였고 입담 좋게 우리에게 전하기를 즐겨하였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유럽을 거쳐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정착한 후에도 관심 분야의 공부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50대의 나이에 톨스토이 작품을 원서로 읽겠다고 러시아에 어학연수를 다녀올 만큼 열정과 용기와 결단력이 대단한 분이다. 대학 입학선물로 영문판 `북경서 온 편지`를 보내주었고, 김춘수 시인의 시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해준 적도 있었다.젊은 시절, 유럽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왔을 때에도 고색창연한 문화와 세계명작의 배경이 되었던 곳들을 꿈꾸게 했다. 여행의 바람이랄까, 출발의 동기를 강하게 심어준 그분은 일흔이 넘은 지금도 로키의 하이킹과 낯선 곳의 여행을 즐긴다고 한다. 인생을 스스로 제단하고 자신의 것으로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으로 마지막까지 나에게 도전을 주문하는 선배이다.로키산맥을 넘어 서부로 향하던 개척자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던 대자연의 품, 콜로라도 강물 위에 비치는 달과 철따라 피어나는 꽃들이며 푸른 숲을 만날 꿈은 오랜 세월을 이어 온 노래였다. 내일이면 늦을까.넉넉한 대지를 바라보며 살아온 세월을 선물한 이에게 간절하도록 고마운 마음을 띄워 보낸다.

2015-01-02

장갑

▲ 김미숙수필가·농부 장갑을 잃어버렸다. 겨울이면 애지중지 손에 붙이고 다니던 장갑이다. 손가락 마디마디, 불어 닥친 칼바람도 막아 주고 흰 눈이 펑펑 오던 날 눈을 맞아도 따뜻하게 감싸주던 것이다. 갈색 앙고라 손가락장갑은 색깔도 튀지 않고 무난했다. 장갑은 내가 가는 곳 어디든지 나의 손과 함께 동행 했다. 겨울이 깊어갈 때 추위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쪽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농사를 짓는 나는 여름에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일을 해야 하지만 농한기인 한겨울은 내 손도 휴식의 시간이다. 여름 내내 거칠었던 손은 겨울이면 하얗게 꽃이 피는 시기이기도 하다.집에서 공항까지 장갑을 끼고 출발을 했었다. 일주일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행 하고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장갑을 찾았다. 가방 속 여기저기 있을 곳을 다 뒤져봐도 장갑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추위에 몸부림치는 내 손은 허허 벌판에 서 있었다. 무말랭이처럼 오그라지고 쭈글쭈글한 모양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지만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사연이 있는 장갑을 잃어버려서 올겨울 내내 나는 아쉽기만 했다.지난 해 연말이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날씨가 추운데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전화였다. “올 겨울은 어떻게 보낼래?” 친구는 겨울만 되면 나의 손 걱정을 했다. 나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손바닥에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통하지 않아서 장침을 맞을 때가 있었다. 침을 맞은 자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고 얼룩이 졌다. 친구가 그 손을 본 후부터는 은근히 걱정이 늘어졌다.사실 그 친구는 남의 걱정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은 몇 년 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직금과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사업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마저 궁색해졌다. 한 달 벌어서 한 달 먹고 사는 처지가 현실이고 보니 그녀도 돈벌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동안의 호시절은 다가고 식당에서 맨손으로 설거지를 해야 하고 음식도 만들어야 했다. 공장에서 먼지를 덮어 쓰고 양말을 뒤집는 작업을 정리해서 거래처에 납품을 하고 마트에서도 무거운 물건을 들어 날라야 했다. 그렇게 험한 일을 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언제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 손부터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은 감촉이 아주 좋았다.그런 그녀가 잠깐 만나자고 했다. 근무 시간인지 가운을 입고 있는 그녀는 백화점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내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달싹거렸다. 함박눈이 펑펑 오던 날 나의 거친 손이 생각나서 장갑 한켤레를 샀는데 이제야 연락을 한다고 했다.커피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봉투 속에 든 갈색의 장갑을 꺼내더니 내 손에 끼워줬다. 남은 한쪽마저 끼고 나니 따스한 온기가 장갑 속에 가득 찼다.그녀에게 힘을 내라고 내가 격려를 해 줘도 시원찮을 텐데 추위를 많이 타는 나를 위해서 그녀가 오히려 내 손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로부터 받은 선물을 흔적도 없이 잃어버렸으니 어찌 마음이 상하지 않겠는가.그녀의 남편이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마주한 술 잔 앞에서 그녀의 얘기를 몇 시간 째 들어줬다. 평이했던 삶 속에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도, 속내를 너나들이 할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고 했다.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주거나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반병을 더 마신 듯 했다. 그러면서 가까운 친구로 남았고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가 만나도 우정을 나누는 한결 같은 사이가 되었다.눈이 펑펑 내린다. 겨울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듯하다. 평생을 살면서 마음이 서로 통 할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몇 명의 친구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그들에게 얼마만큼 따스한 손이 되었는지 갸우뚱해 본다. 마음을 열어 놓고 이렇게 대화가 통하고 아껴주는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니 칼바람의 찬 겨울이 춥게 느껴지지 않는 요즘이다.

2014-12-26

겨울바람

▲ 허창옥대구수필가협회회장약사 첫눈이 먼저 내리고 바람이 나중에 불었다. 눈은 포근하였으나 바람은 차가웠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미 함박눈의 군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눈이 한나절 내렸다. 한나절을 나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눈의 밀도가 낮아지고 그 춤사위의 짜임새가 엉성해지더니 시나브로 그치고 말았다.그때 세찬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이 가로수 플라타너스를 사정없이 후려치니 남은 잎들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서 포도 위를 날아다니고 굴러다닌다. 눈의 정취에 취한 건 잠깐인가 싶은데 이제 시작한 바람은 오래전부터 휘몰아친 것 같다. 춥다. 따뜻한 실내에 있으면서도 나는 추위에 떨고 있다. 추위를 몹시 타는 건 내 몸이 태생적으로 습득한 무슨 조건반사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음력 섣달 스무이레 깊은 밤에 어머니는 나를 낳았다. 만삭의 어머니는 밤이 깊도록 한 말이나 되는 가래떡을 썰고 있었다. 대가족이 쇨 설날 준비에 몸이 무겁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었단다.게다가 여섯째로 태어날 아기가 그리 큰 긴장감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오, 핏덩어리 나는 섣달의 추위 속에 느닷없이 던져졌다. 뼈 속까지 스며든 그 추위를 내 몸은 여태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마다 내가 옴짝달싹하지 못할 만큼 주눅이 든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몸이 그렇듯 겨울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음에도 내 정서는 그러나 완연히 다르다.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 특유의 무채색 정경이 좋고 산야가 함께 묵언수행에 들어간 것 같은 일종의 적막이 좋다. 산 너머 혹은 강 건너에 필경은 있을 봄, 옹색하게 움츠러든 모든 상황이 끝나고 말리라는 희망을 표상하는 그 봄을 기다리는 묵연한 인내가 좋다.몸과 마음이 느끼는 겨울이 서로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미루어 생각하건대 회귀본능이 아닐까한다. 몸이 객지를 떠돌아다닐수록 마음은 고향에 깃드는 법이다. 내게 겨울은 고향이 아니겠는가.누구나 그렇듯이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나도 세모정서에 젖어서, 놓쳐버린 것들을 낱낱이 들추어보며 아쉬워하고, 새해에 이루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내었다. 그리하여 초등학생의 방학계획표처럼 필시 그대로 해내지 못할 계획들을 세우곤 했었다. 그게 나빴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라도 했기에 약진은 아닐지라도 미미한 발전이나마 있었을 게 아닌가.웬만큼 나이가 들고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채색으로, 적막으로, 묵연히 인내하면서 가만히 섣달을 보낸다.희망을 품지 않는다고 절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소망조차 없을 수는 없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절감하는 게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비켜설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 나이를 먹자. 나이를 잘 먹자. 나이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순응하자.`아름답게` `기품 있게` 를 화두로 삼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격이 닿지 않는 난제였다. 젊게 살자, 그 또한 분에 넘치는 그야말로 분수 모르는 일임에랴. 그러니 그저 나이를 잘 먹자고 물러설 수밖에. 가능하면 창밖에 나서서 바람을 안아보자. 피하지 말자. 그 또한 순응이리니. 순순해지자. 편안해지자.글을 쓰는 동안도 바람은 여전히 플라타너스 가지들을 흔들고, 지나가는 이들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다. 마치 쇼팽의 `겨울바람`이 연주되는 듯 환청이 일어난다. 세찬 바람이 건반을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오선지가 휙 날아가고 그 오선지를 물고 있던 음표들이 하나하나 떨어져나가서 작은 잎사귀들처럼 바람에 흩날리는 것 같은 환시가 일어난다. 그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어쩌면 보이지 않는 바람을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 내 문장에서도 바람소리가 났으면 좋겠다는 정녕 꿈같은 생각을 했었다.눈이 내렸고 눈바람이 불고 있다. 겨울바람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내다보며 내일의 나를 생각한다. 더 순순해지자. 더 많이 편안해지자.

2014-12-19

어떤 내조

▲ 윤애자 수필가22년째다. 한 달에 한 번은 어김없이 화투판이 벌어진다. 질리지도 않는가. 볼거리 먹을거리가 널린 세상에 우리의 문화생활은 좀처럼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네 집이 돌아가면서 음식을 준비하고 집으로 초대를 한다. 엉뚱한 생각인지 몰라도 일 년이면 한 집에서 세 번, 22년을 곱하면 66번이다. 무시로 모이는 횟수까지 합하면 머잖아 한 가정 100회 특집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남편이 처음 대구에 와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 부부 모임을 한다. 남편을 제외한 세 친구는 그때 교제하던 아가씨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그래선지 지금도 그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금새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나만 모르는`그때를 아시나요`가 재방송 된다. 낡은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누비고 다녔던 이야기, 누군가는 양다리 걸쳤다가 지금의 아내에게 들통 난 이야기, 쌍쌍이 데이트하러 가는 곳마다 남편이 눈치 없이 따라 다녔던 이야기로 배꼽을 잡는다. 노총각이었던 남편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그들은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준 죽마고우 같은 친구들이다.비산동의 어느 한옥 집 문간방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그들을 초대했다. 단칸방에 소꿉놀이 같은 살림살이였지만 창문을 열면 주인집 꽃밭은 온전히 우리 차지였다. 팔달시장에서 채소 도매를 하는 주인 부부와 아이들이 나가고 나면 팔십 노모는 종일 꽃밭에서 살았다. 라일락이 한창인 마당에 야외용 가스렌지를 놓고 삼계탕을 끓였다. 비좁은 단칸방은 교대로 밥을 먹어야 했다. 남편들이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나가있는 동안 나는 부인들과 뜨거운 삼계탕을 먹으며 낯을 익혔다. 혼수로 해온,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새 담요를 깔고 고스톱 신고식을 치렀다.아이들까지 북적이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수월한 편이다. 그렇더라도 내 집에 오는 손님이고 모임이다. 청소하고 시장 봐서 음식 장만하다보면 어느새 현관 앞이 떠들썩하다. 저녁상을 물리기 바쁘게 화투판이 등장한다. 원활한 현금 유통을 위해 잔돈을 준비하는 것도 유사가 할 일이다. 일전을 앞둔 남편들의 표정이 호기롭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는 심사인가. 변화를 외치던 아내들까지 팔을 걷어 부친다. 부부라고 봐 줄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지난달에 거금을 잃었다는 최 사장이 오늘은 기필코 만회를 하겠다며 큰소리친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결혼할 당시에 남편은 조그마한 공장을 하고 있었다. 말이 공장이지 손바닥만 한 자리에 중고 선반 몇 대에 직원은 한두 명이었다. 신경 쓰고 노력한 것에 비하면 한 달 성적표는 초라했다. 그런 남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공장에 간식을 챙겨가는 것이 전부였다. 틈틈이 부침개도 구워가고 감자도 삶아 갔다. 겨울이면 붕어빵이 식을세라 종종걸음을 치기도 했다.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기름때에 절은 공장은 여름이면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생각 끝에 냉동실에 물수건을 얼렸다가 직원들에게 돌렸다.다른 모임에서는 문화생활도 하고 레저 활동도 하는 그들이 유독 우리 모임 때는 고스톱을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모르긴 해도 그들만의 정체성과 끈끈한 우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돈도 시간적 여유도 없던 시절, 만나면 소주잔에 고스톱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아니었을까. 낡은 유물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놀이라고 치부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지나온 세월과 우정이 담긴 의식적 행위가 아니겠는가. 나이와 체면을 던져 버리고 잠시나마 순수하고 자유롭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열망 같은 것 말이다. 청춘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지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있는 한 화투판의 열기는 식지 않을 것 같다. 한 끼 먹자고 시장을 보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어찌 보면 낭비고 번거로운 일일 수도 있다. 맛집이 지천이다. 전화 한 통이면 예약도 가능하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모임이라도 밖에서 하자던 아내들이 언제부턴가 고스톱 판에 끼기 시작했다. 무용담처럼 반복되는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을 상기시키는 그 자리가 그들이 세상을 헤쳐 나가는 또 하나의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변화와 반란을 포기하고 함께 동화되는 것, 그 또한 아내의 역할이고 내조가 아닐까.

2014-12-12

비밀의 정원

▲ 윤영수필가계간 `문장` 편집위원 쏟아지는 폭우 속에 한 시간을 달려온 곳은 첩첩산중이었다. 어디쯤일까. 아름드리 소나무를 겁 없이 휘감아 올라가는 칡넝쿨 이파리는 쉴 새 없이 빗소리를 낸다. 간간이 산자락에 일궈 낸 밭뙈기가 보이나 주인은 없고 양팔을 내린 허수아비만 비딱하게 서 있을 뿐. 그는 도대체 내게 뭘 보여주겠다고 우중을 달려왔을까. 좁은 오솔길로 그를 따라 나는 말없이 뒤따른다. 족히 삼십여 분은 걸었을 게다. 길섶에 묻은 빗물에 치맛단이 흥건하게 젖었다.`이쯤에 너와집 한 채 만들어 놓을 테니 당신 가끔 놀러 와요.`라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건만 난 대답하지 않는다. 습한 것을 싫어하거니와 한껏 멋을 내고 온 나의 모양새가 가늘게 내리는 비에 좀 전에 보았던 허수아비 꼴이니 기분 좋을 리 없다.금맥이 쏟아질 지형도 아니고 열정이 들끓는 청춘도 훨씬 지난 나이고 보면 프러포즈를 할 일도 만무하잖은가. 금강산 비경을 넘어서 강산풍월을 가질 만큼의 절경도 아닌듯하니 궁금증은 더없이 간절하다. 앞서 가던 그가 엷은 미소를 보이며 뒤돌아서 서 한마디 던졌다.“사실은 나도 몇 달 전 이곳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다 발견한 곳이야.”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나는 아찔했다. 아무리 미지수라는 확장언어를 끌고 왔다지만 답변치고는 대가가 엄청나다. 경계를 가르는 무엇하나 없지만 정원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꽂아야만 밟을 수 있을 만치 신비감마저 들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쳐진 깊은 골짜기가 무릉도원이다. 건너편은 자작나무숲을 배경으로 허브꽃이 목차처럼 정렬되어 있고 보리수며 살구가 농염하게 익었다.수양버들나무 아래 녹슨 철제의자에 앉았다. 오스트리아나 함부르크 어디쯤에서 가져 온 듯 한 둥근 원목 시계는 아홉 시를 살짝 넘긴 채 멈춰 있다. 나는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그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찍었다는 느낌보다 박았다는 느낌이 들자 마음조차 추슬러지는 묘한 기분은 뭘까. 목 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 이곳은 울음을 뱉어내기에 안성맞춤이다.딱히 응어리질 것도 없지만 슬프거나 서러울 일도 없지만 고맙고 감사함에도 눈물을 부를 수가 있구나 싶었다. 그가 여느 날처럼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모른 채 무덤 속으로 갔을 수도 있었겠지.잔디밭 끝 자락쯤 갔을 때 비로소 인기척이 들렸다. 산중에 보금자리 튼 새 둥지처럼 초록지붕을 한 일자형의 자그마한 집이 보인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그대로 살린 도랑가에 수국이 환하다. 예순에 가까워 보이는 중년 부부가 흔들리는 수국 꽃숭어리 앞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뭐 볼 꺼 있습디꺼?”나는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의 한 표현을 빌려“먼 후일, 또 기억하게 되겠지요.”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귀나무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잔디밭으로 퍼진다. 하필이면 왜 이곳에 정착했느냐고 묻는다면 이것 또한 실례가 되려나. 어쩌자고 산중에 수천 평의 정원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기껏해야 낮이면 산비둘기나 산줄기를 지나가는 바람이 보고 밤이면 부엉이나 지천으로 둘러쳐진 달맞이꽃이 관객의 전부인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남편이 아내를 위해 마련해준 선물이 아니라면 아내가 남편을 위해 마련해 준 선물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나는 흠씬 물기 머금어 거뭇거뭇한 곡선의 나무계단을 다시 오른다. 비밀의 정원에서 우리들만의 비밀 하나를 만들어 놓고 청동아치형 꽃밭을 지나고 오솔길을 지난다. 뭐니뭐니 해도 이 순간 최고봉은 이곳으로 데려다 준 그의 말에 답해주는 게 아닐까.“너와집 지으면 놀러올게요.”그가 비밀스럽게 웃었다. 내려올 때 무겁던 치맛단이 새털보다 가볍다. 그곳에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천국을 느끼고 왔다면 당신은 믿어줄까.여전히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다만 사진 몇 장이 휴대폰 속 앨범에 남아 있는 걸로 보아 필시 꿈속을 헤맨 건 아니었을 게다.

2014-12-05

우체통 앞에서

▲ 견일영수필가수필문학독서회 강사 나는 갓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 학생처럼 우체통 앞에 정중히 섰다. 조심스레 통속으로 편지를 넣으려다 다시 봉투에 적힌 이름과 주소를 확인해 본다.순간, 그가 이 편지를 받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하고 몇 번이고 망설인다. 갑자기 어둡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서로 좋아했는데, 설마 언짢아하지는 않겠지. 억지로 마음이 편안한 쪽으로 자문자답해 본다.다시 편지 봉투를 살펴본다. 흔한 이름이지만 내 가슴에 새겨진 소중한 그 이름 석자! 그 세 마디 이름 때문에 얼마나 기다리고, 슬퍼하고, 원망도 많이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미워했던 것 같다. 무슨 악연이었던가. 불가에서는 전생에 가장 악연이었던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다시 만난다고 했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나도 전생의 죄 갚음으로 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나는 어제 받은 전화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올해의 첫눈으로는 참 많은 눈이 쏟아지고 있는데 휴대 전화벨이 울렸다.“여보세요.”내가 응답을 하자마자 느닷없이“거기도 눈이 많이 오지요?”나는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예에…. 어디십니까….”하고 황급하게 물어보는데 전화가 찰깍 끊겼다. 나는 육감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귀에 익은 그의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신호음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창밖에는 함박눈이 쉴 새 없이 내리고, 혹시나 하는 기다림만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그 옛날, 새마을 노래가 한창 열풍을 일으키던 때, 나는 그 소녀와 헤어지고 먼 곳으로 떠났다. 그래도 미련은 있었던지 철없는 소리로 “우리 첫눈 올 때 만나요”하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그리움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짙어지고, 어느 하늘 아래 살아 있는지 궁금증만 더해갔다. 풍문에는 저 남쪽 어느 도시에서 아주 부자가 되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가끔 소녀는 꿈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는 한마디의 말도 보내 주지 않았다. 필시 큰 원한을 품고 있으려니 하고 나 자신을 나무라며 죄책감으로 몸살을 앓았다.그 동안 첫눈이 오늘처럼 분명하게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겨울에 내리는 남부지방의 눈이란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어정쩡한 눈비로서 첫눈이라고 단정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몇 년이 지나자 꿈같은 언약은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서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조차 모르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잊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와 헤어진 후 이렇게 많은 눈이 첫눈으로 펑펑 쏟아지기는 처음인 것 같다.그날 밤 나는 긴긴 편지를 썼다.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설움들을 다 들어내어 썼다. 어린아이의 반성문처럼 내 잘못만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매정한 전화처럼 내용을 다시 읽어보지도 않은 채 봉투에 확 집어넣고 봉했다.나는 우체통 앞에서 나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바보 같은 빨간 통을 유심히 본다. 옛날에는 둥근 우체통이었는데 왜 네모로 만들었을까. 이 통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을까. 남이 보지 못하게 꼭꼭 풀칠을 한 편지들,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하겠는가. 내가 쓴 사연보다 더 미련하고 쑥스런 사연들도 있겠지. 아무거나 수용하는 천치 같은 우체통.나는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나보다 더 못난 사람의 글이 이 통속에 있으리라는 상대적 위안으로 용기가 솟아 오른 것이다.편지를 밀어 넣었다.“철썩”통속에 편지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돌부처처럼 서 있는 우체통이 오늘처럼 위엄 있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갓 입학한 초등학생처럼 얌전히 그곳을 떠났다.

2014-11-28

`부터`와 `까지`

▲ 조낭희 수필가·인문학 강사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기다림을 통해 자기를 반추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며 내면을 성숙시켜 나간다.부처님 앞에서 지극 정성으로 자식의 앞날을 비는 부모의 간절한 기다림이나 시간을 공유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는 연인들의 애틋한 기다림, 흐르는 세월 속에 상처가 아물기만을 바라는 체념 섞인 기다림도 있다.뿐만 아니라 오지 않을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며 평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큰 기다림 앞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의연하게 대처한다.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은 시간의 족쇄에 묶여 노예처럼 살아가기 십상이다. 약속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는 초조해 하기 일쑤다. 느긋하게 시간을 깔고 앉아 여유를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신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기다림은 결과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다리는 모습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직업까지 어느 정도 감지될 정도이다.평소 나는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인생의 깊이를 제대로 모르는 경박한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정작 나는 스스로에게 몹시 실망했던 적이 있다. 지난 스승의 날 대학 동기들과 교수님을 뵙기로 하였다. 교수님을 뵐 기회가 종종 있었지만 조촐하게나마 예를 갖춰 식사 대접을 한다고 하니 기분이 남달랐다.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의 변화된 모습을 그려보며 아침부터 묘한 설렘을 안고 허둥거렸다. 바쁜 일과를 서둘러 마치거나 뒤로 미루어 놓은 채 일찌감치 약속 장소로 향했다. 텅 빈 예약석에 교수님 혼자 계실 것을 우려하여 십여 분 일찍 도착한 것이다.아무도 없는 방에 다소곳이 자리를 잡고 앉아 친구들을 기다린다. 가끔씩 지나치는 종업원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모처럼의 고독을 즐긴다. 이 정도에서는 누구나 우아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7시를 넘기면서 옆 테이블에 손님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술렁거리는 주변 분위기 속에 혼자만 고독한 섬마냥 머쓱해진다. 갑자기 모든 것이 어색하다.약속 시간을 넘기면서부터 자꾸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거슬린다. 멀뚱거리며 시간만 축내는 하릴없어 보이는 주부로 비쳐지는 것까지는 괜찮다. 이 옷 저 옷 걸쳐 보고 수도 없이 화장을 고쳐대며, 모처럼의 외출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삼류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비쳐지진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고통스러워져 온다.나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많은 친구들의 늑장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하다가 서둘러 온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불안감까지 파고든다. 약속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키는 교수님도 오늘따라 웬일이실까? 혹시 건망증이 심한 내가 착각을 한 건 아닌지 테이블 밑으로 조심스레 수첩을 펴본다. 장소와 시간 모두가 정확하다. 그 때 낯익은 낱말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나를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 7시까지!바쁜 도시 생활에서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버린 `까지`라는 흔한 조사 때문에 이십여 분이 이토록 불안했던 걸까. 언제까지 말미를 주겠노라고 흔히 소설 속에서 악덕 고리대금업자가 거드름을 피우며 내뱉는 말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말이 아닌가. 나는 수첩을 뒤져`7시부터`라고 고쳐 적었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읽을거리가 없는 것도 다행이라 위안했다.여기까지 와서 볼썽사납게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것조차 우습지 않은가. 간간이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왁자한 웃음소리가 정겹다. 기계처럼 정시에 만나 필요한 말만 나누다 뿔뿔이 흩어지는 만남을 상상해 본다. 습관적으로 출입구를 향해 눈길을 돌릴지라도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인간적이다.마음이 편안해져 갈 때 교수님이 환한 웃음으로 들어오신다. 뒤이어 친구들도 약속이나 한 듯 차례차례 나타난다. 혼자만 촌각을 다투며 살아온 것처럼 호기를 부리던 모습을 잊고 나도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부터`와 `까지`의 차이로 맛본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혼자서 행복했던 그 순간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2014-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