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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술관 나들이

양태순 수필가 허기, 갈망하는 것이 있다면 늘 있는 것. 배고픔이야 지난 일이 되었지만 또 다른 허기가 찾아왔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고,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가 있다면 비켜 가기 어려운 자질 적인 문제에 목이 마르다. 내 그릇의 크기를 못내 아쉬워하며 자책하는 허허로움이 정신을 파먹는다. 그럴 때면 가슴이 텅 비어있는 듯한 허기를 느낀다.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책을 읽어 무릎을 치는 문장 안에서 위로를 얻는 이도 있고,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작은 깨우침을 얻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덮어서 미뤄둔다. 예술에 소양이 모자라는 나는 그림으로 채워보려 마음 먹었다.미술관 나들이에 나섰다. 마침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전시회가 있었다. 88 서울 올림픽 기간에 펼쳐진 세계현대미술제의 작품 중 일부가 전시되는 기간이었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려 했지만 교육 기간이라 들을 수 없었다. 입구에 눈길을 사로잡는 붉은 새가 보였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을 가르며 날개로 균형을 잡은 채 위도 아래도 아닌 멈추어서 사방을 주시하는 듯했다. 참으로 멋진 새라 여겨 다가가서 제목을 보고는 웃고 말았다. 스위스 작가 피터 크나프의 ‘동풍IVA+동풍IVB’이었다. QR코드로 설명을 들으니 스위스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표현한 것이란다. 역시 내 안목은 수준 미달인 것이 분명했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바라지 말고 그저 즐기자는 마음으로 감상을 시작했다.제목 맞추기 게임을 시작했다. 맞추는 게 없었다. 그림에서 인간이 느끼는 어떤 아픔이나 슬픔이 느껴져서 제목이 이런 것을 포함하지 않을까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미술가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세계는 높기만 했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것이라지만 그림에 녹아 있는 숨결이 따뜻하다와 어둡다 정도가 한계였다. 발길을 멈추게 했던 몇 작품은 사진으로 남겼다.사진을 남기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한다. 미술관에서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뭉클한 감동이나 색채가 주는 신비로운 힘이 경이롭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에스앤에스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앨범에 수록되고 나면 먼지와 함께 잠들어버릴 줄 알면서도 진행형인 행동이다. 가는 곳마다 남기는 사진들은 그날의 즐거움과 감동, 동행한 이들과의 사교적인 친목에 힘입어 얼마간은 살아있다. 그리고 바쁜 일상에 밀려 추억의 서랍에서 낡아간다. 그 며칠을 위해 끊임없이 누르는 셔터의 의미가 다일까. 언젠가 뒤돌아보는 날이 많아질 때 이름의 뒤에 따라붙는 내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은 아닐까.미술가가 작품을 남기는 이유는 다를 것이다. 능력이나 재능을 갈고닦은 실력은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표현의 자유에 힘입어 빛을 발한다. 사물을 보는 데 있어서나 사람을 관찰하는 행위를 통해 세상의 온갖 감정이나 감동이 마음속에서 끓어오를 때면 표출해야만 할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싶다. 보이는 대로의 모습이기보다는 생각이라는 회로를 거쳐 작품이 형상화된다. 그 속에는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혼을 쏟아부은 정신적인 부분이 있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다. 자신을 위한 것이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세계를 향한 눈을 비틀어 주어 정확하게 인지하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추측해본다.미술이란 내게는 늘 어려운 분야다. 그림, 조각, 건축, 공예, 서예 등. 오늘 제목 맞추기 게임에서 하나도 맞추지 못한 실력이니 알만하리라. 그래서 하지 못한 숙제에 걱정이 달라붙듯 전시회 일정을 알아도 선선히 관람하기가 쉽지 않다. 어렵다고 뒤로 미룰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조금씩 다가가려 한다.알지 못하는 분야에 관심을 주는 일은 열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관람하는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여 내 것으로 만들려면 편리와 빨리 글자를 멀리해야 할 것이다. 묵묵히 눈으로 마음으로 보고 또 보는 것만이 이해의 길로 들어선다고 믿으며 애정을 쏟아야 하는 일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풍경화를 시작으로 한 발짝 내디딘다.무엇인가를 채우는 일은 부푸는 만월이다. 지적인 허기와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과정에서 만나는 깨달음은 빗방울 같은 두드림으로 가슴을 넓혀준다. 만월의 그득함이 내게로 옮겨 앉는 일이다.

2022-11-16

단풍잎 손

정미영 수필가 쌀쌀한 가을비가 쏟아졌다. 한 차례 내린 비로 아파트 화단에 단풍잎이 떨어져 소복이 쌓였다. 비 그친 뒤에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단풍잎을 두 손 가득 머리 위로 던지고는 환하게 웃었다. 흩어지는 웃음 방울을 따라 옛 추억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아들이 어렸을 때, 집 근처 해맞이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옆에는 키 큰 은행나무가 빼곡하게 서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에 달라붙던 은행잎, 그 한 잎을 손에 들고 신이 난 아들을 보니 내 기분마저 상쾌했다.멀리 인공폭포 물이 세차게 흘러 내렸다. 쏴아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물소리를 듣자, 아들은 단숨에 달음박질하여 폭포수 앞에 다다랐다. 거친 숨을 고를 틈 없이 아들이 돌에 엎드려 물속에 손을 담갔다. 손가락에 물을 묻혀 연못가 돌 위에 그림을 그렸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려 놓고 ‘엄마 얼굴’이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사람 얼굴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엄마를 그렸다니 기뻤다.정자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폭포를 뒤로하고 난간에 걸터앉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노래하듯 소리치며 이리저리 뛰어 놀던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참을 찾았는데, 어느 순간 저만치 나무 뒤에서 아들이 활짝 웃으며 나타났다.“엄마, 선물.”불쑥 내민 손에 이름 모를 풀이랑, 단풍잎이랑, 나뭇가지가 한 움큼 들려 있었다. 예쁜 그 손!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아들이 선물한 아기단풍 잎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쫙 펼친 아들의 조그만 손을 닮았다. 갈바람과 뒹굴며 놀았던 탓에 잘 마른 단풍잎은 조금 까칠까칠했다. 문득 내 아이의 손을 만져 보았다. 부드러웠다. 엄마 손의 감촉을 느꼈는지 아이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법 세게 잡으며 ‘엄마’하고 불렀다.그 날 우리는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큰방에서 이불을 개키며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외마디소리가 들렸다.“앗, 뜨거워.”부엌으로 달려가니 아들이 싱크대 앞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다.“주전자가 뜨겁다는 것 몰랐어? 괜찮아? 큰일 날 뻔했잖아.”“소리가 나서….”엄마의 걱정 반 다그침 반 외침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사리 같은 왼손으로 오른 손의 둘째, 셋째 손가락을 가리키며 아프다고 했다.아들의 손을 얼음물에 재빨리 담갔다. 주전자를 짚었던 탓에 발갛게 부풀었던 손가락 끝이 다행히 가라앉았다. 조금 전에 불을 끈 가스레인지 위의 주전자에서 보리를 담은 망이 ‘딸그락딸그락’ 소리를 낸 것이 원인이었다. 과연 호기심 왕성한 네 살이었다. 소리가 궁금해 뜨거운 주전자를 만졌다니….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였다. 안아달라고 칭얼대며 품에 안겼다. 저도 놀랐을 터이고, 하루 종일 공원에서 뛰어다니며 논다고 피곤했을 터라, 안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다. 침대에 눕히고 난 뒤 새삼스레 아들의 손을 만져 보았다. 가슴이 찡했다. 이렇게 작을 수가!아들이 처음 세상에 얼굴을 내밀 때였다. 빛을 만난 순간에 두려워할까 봐, 안심하라고, 건강하게 태어나서 기쁘다고, 태어나자마자 손을 잡고 인사했었다. 그 사랑스럽고 귀엽던 아기 손이 해를 거듭할수록 장난이 심해졌다. 때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궁금증에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끔 미울 때도 있었다.해마다 이맘때쯤이다. 찬바람이 불어와 단풍잎들이 흩날릴 때면 지나온 일들이 떠올라 그립다. 아들이 엄마의 손길을 믿고 잘 자라주었듯이, 앞으로도 나는 아들이 살아가면서 삶의 고비를 겪을 때면 그의 손을 꼭 잡아 줄 것이다. 초록에서 빨강, 노랑으로 곱게 변하는 잎사귀처럼 때론 고맙기도, 때론 밉기도 했던 아들의 손을 기억하며, 나는 지금, 단풍잎 한 잎을 내 손바닥에 올려본다. 가을이 담겨 있다.

2022-11-09

솜사탕과 풍선

배문경 수필가 하늘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다. 그 아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십여 미터씩 줄지어 서 있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나는 표정이다. 어른들도 옛 생각에 젖어 있다.신라문화제의 일환으로 각 기관이 행사를 진행했다. 경주문인협회에서는 향가 시 낭송대회와 독서삼품과 백일장을 개최했다. 가을이라 여기저기 놀이도 많고 볼거리도 많다 보니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 할 행사로 성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솜사탕과 풍선아트였다. 무료라는 배너를 설치하고 두 사람이 열심히 솜사탕 부스에서 분홍 설탕, 노랑 설탕, 보라 설탕을 넣고 동그란 솜사탕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엄마 손을 이끌고 와서는 하나씩 손에 쥐고는 달콤한 세상을 맛본다. 연인들의 표정도 달짝지근하다.하늘은 푸르고 아이들의 싱싱한 웃음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여기저기 장난치며 뛰노는 아이들이 있으니 대회는 사람들로 붐볐다. 긴 풍선에 기계로 바람을 넣자 길게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귀여운 푸들이 되고 해맑은 해바라기가 되었다. 천막 곳곳에 붙어있는 여러 모양의 풍선 모양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선물을 받으려고 긴 줄이다.어릴 적 운동회가 생각난다.나는 달리기 선수였다. 파란색 체육복을 입고 만국기가 휘날리는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서면 축제 분위기였다. 학교 입구 쪽은 커다란 가마솥에서 벌건 기름기가 도는 육개장이 김을 내며 끓고 있었다. 그 옆에는 낮술에 찌든 동네 아저씨 서넛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만국기가 운동장의 담장과 건물 기둥에 대각선으로 연결되어 펄럭였다. 나는 공책 서너 권을 옆구리에 끼고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단거리 육상과 멀리뛰기 선수였기에 운동회 날은 휘파람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특히 바통을 이어받아 운동장을 반 바퀴 도는 릴레이 경기에서 운동회의 승부가 결정되곤 했다. 지고 있을 때 그것을 승리로 이끄는 사람이 결국 그날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상대방을 이기고 바통을 넘겨줄 때 숨은 턱에 차고 응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울렸다. 여자아이들보다는 남자아이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 때가 많았다.그때도 운동장 한쪽에는 솜사탕을 만들어 팔던 아저씨가 있었다. 설탕을 한 숟가락 넣으면 빙빙 돌아가던 기계는 거미줄 같은 설탕 줄을 대신 내놓았다. 그러면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나무젓가락 끝에 감기 시작했다. 그러면 하얀 솜사탕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서로 기계 옆에 붙어 서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나 사서 베어 물던 아이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한쪽을 떼서 입에 넣으며 약을 올렸다.내가 솜사탕을 먹었을 때는 달라붙던 설탕의 눅진함이 입과 손가락에 쩍쩍 붙었다. 설탕의 달달함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지나간 시간은 늘 기억에 풍선처럼 부풀려져 있다. 갖가지 색깔의 풍선에는 상상의 바람이 가득했다. 작게 불면 볼품이 없고 크게 아주 크게 불다 보면 제 부피를 넘어서서 ‘펑’하며 터져 조각나 버리던 풍선, 각각의 인생처럼 다양한 색으로 하늘을 수놓듯이 다양한 삶이 인생길을 만든다.부풀어 터질듯했던 유년의 기억 속 편린들이다. 다양한 색의 솜사탕처럼 갖가지 꿈들이 세상에 무지개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지금의 저 아이들처럼 한껏 아름다운 꿈을 지니고 내달릴 힘들이 넘쳤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나이가 있다면 초등학교 때가 아니었을까.그러고 보니 어느 사이 풍선은 힘이 빠져 탄력 없이 손아귀에 쉽게 잡힌다. 솜사탕은 부풀었던 설탕의 꿈들이 녹아 혓바닥과 손가락에서 달짝지근한 맛으로 스며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점차 부피가 줄어드는 것인지 모른다.한때 부풀고 달아올라 뭔가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슴 벅차던 시절을 지나오니 이젠 바람이 빠져 말랑하다. 편안한 중년의 오후다.

2022-11-02

노을풍경

양태순수필가 지난해부터 노을이 보고 싶어 올여름 꽃지해수욕장을 찾았다. 노을 명소로 가는 내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어 숨조차 참아가며 지켜보았다. 노을꽃이 막 만개하려는데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회색으로 덮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수평선을 물들이는 장관을 볼 수 있겠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동행한 이들은 이미 해가 꼴깍 넘어갔다고 돌아서자는데 먼 길 달려온 아쉬움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노을맞이는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짧은 시간에 찬란함이 스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온과 바람, 대기의 맑은 정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색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섰다 사라지게 하는 노을, 그런 노을이 보고 싶었다. 사는 동안 겪은 숱한 감정을 색으로 보여주는 이력서 위의 잔잔한 위로가 느껴지는 노을 말이다. 짬을 내어 노을맞이를 나섰다. 도심의 가로수에는 가을이 도착하고 있었다. 지난달 시퍼렇던 잎들이 쏟아지는 햇살에 붉은빛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나무 그늘이 적시는 보도블록도 흰색에서 좀 깊어진 회백색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골길로 방향을 잡았다.창문을 내리고 달렸다. 간들바람이 지나며 머리카락을 사라락 흔들자 달큼한 향기가 달려들었다, 곧 들이 다양한 노랑으로 펼쳐졌다. 벼가 노랗고, 누렇고, 황금빛으로 익어서 바람을 따라 물결쳤다. 어쩔 수 없는 농부의 딸인지 보는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오래된 기억들이 먼지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가을 들녘은 언제나 흥겨웠다. 주고받는 막걸리 사발이 넘치고 자식들에게 약속을 남발하는 부모님의 어깨가 펴지는 때였다. 그에 비해 일거리는 곳곳에 넘쳐났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어둠이 처마를 지나 마당에 내려앉을 때쯤 손을 털고 저녁상에 앉았다. 저 들 어딘가에 있을 보고픈 이들을 쫓느라 눈길을 멀리까지 보냈다. 경적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볕내를 맡으며 넓은 들을 지나 한적한 카페에 들렀다. 유자를 머금은 향긋한 차를 마시며 카페를 기웃거리는 가을 풍경을 즐겼다. 카페 주변은 밭과 논이 었다. 창밖으로 계절을 건너가고 있는 억새의 흰 미소와 붉은 감이 만들어내는 등롱이 햇살 아래 느긋하다. 일바지를 입고 막바지 고추를 따는 아주머니의 굽어진 허리, 가을걷이하는 농부의 어깨에도 가을이 또랑또랑 익어가고 있었다. 참 푼푼한 가을이다.오후의 해는 짧았다. 카페를 나설 때 유리문에 빛이 고이고 있었다. 저무는 기운이 스멀스멀 들을 가로질러 오고, 계단을 내려오듯 태양이 성큼성큼 서산을 향했다. 해가 가는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천천히 속도를 맞추며 따라갔다. 산그림자 길어지는 산굽이를 지나고 물그림자 어룽지는 저수지를 지나 사과밭을 지났다. 옅은 그늘이 점점 진해지며 길게 내 뒤를 따라왔다. 어느 순간 파랗던 하늘에 색이 섞이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여유를 버리고 달려 산마루에 차를 세웠다.능선 너머가 물들기 시작했다. 붉은 해가 산마루 위에서 호흡을 가다듬는 듯 하늘 자락이 붉으스름해지면서 하늘과 땅의 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땅의 색이 조금씩 짙어지다 경계를 지우듯 한가지 색으로 넓이를 키운다. 산들이 검푸르게 변하는 동안 하늘 모퉁이는 파랑에 은색, 금색, 주황, 빨강이 겹쳐졌다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다른 색깔의 고무찰흙을 주물러 섞었을 때처럼 오묘한 색으로 물들고 있다. 거기에 지나가는 흰구름이 포개지니 남보라색이 스며들듯 피어났다. 마치 작은 산들 허리를 감싸 안고 계곡물이 찰랑거리는 듯하다. 황홀한 빛깔, 사람의 마음을 벅찬 감동으로 가득 채운다.노을맞이가 끝나고 머릿속 파노라마가 이어졌다. 마음만 부자였던 시절, 단골가게에서 주전자에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를 베이스로 두런두런 일과를 풀어놓았던 무싯날의 말랑했던 시간들에 풍덩 빠졌다. 마음을 나누고 마음을 받았던 따뜻한 기억들이 가득했다. 지나간 날의 어느 페이지든 색색의 감정이 흘렀겠지만 훈훈한 정은 노을빛이었다. 어느덧 인생시계가 가을에 접어들었다. 생각의 갈래를 정리하여 단순화 시키는 작업이 아직은 길을 헤매는 중이다. 그러나 오늘의 노을맞이에 덧그리는 붓질이 살아갈 가을에 고운 노을풍경으로 피어날 수 있기를.

2022-10-26

‘지란지교를 꿈꾸며’

정미영 수필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편지를 자주 썼다. 우리 집이 멀리 이사를 했던 탓에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늘 함께 했던 친구들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단 1명도 없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니 낯가림이 심했던 나로서는 섬에 고립된 것처럼 막막했다.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집 전화가 소통의 매개체였지만, 밤 9시까지 야간 학습을 하고 난 뒤에 통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 아버지들이 퇴근하셨던 저녁 6시를 지나 남의 집에 전화를 건다는 것은 예의범절에 어긋난다고 부모님들에게 가르침을 받던 때였다.소소한 일상을 편지지에 옮겨 쓰고 나면 내 마음에 만족감이 꽃물 스며들 듯 번졌다.그 때 내 정신적으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편지였다.편지에는 습관처럼 우정에 관한 글귀를 적어 보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했던 것이 유안진 교수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였다.참된 우정에 대한 작가 개인의 소망을 진솔하게 나열했는데, 나와 친구들도 그러자고, 무수히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의 사귐처럼 맑고 깨끗하고, 변치 않은 우정을 꿈꿨다.그 덕분이었을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더니 단짝 4명 중 1명의 친구와 마주보며 살고 있다. 결혼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방에 정착했는데, 친구 또한 같은 이유로 지금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40년 가깝게 이어지는 인연이 필연처럼 감사하다.시인의 작품에 드러나는 소망을 나는 적잖이 경험하고 있다. 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친구는 내가 아무 때나 찾아가 커피 한 잔을 달라고 해도 귀찮아하지 않는다. 끼니를 거르고 찾아가도 싫어하지 않고 집밥을 차려주며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봐 준다.나는 취미가 많지 않은 사람이다. 아날로그 유형이라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다루는 것이 능숙하지 않고, 음치라 노래를 못하고 몸치라 댄스를 못해, 문화센터에서 배울 생각은 아예 엄두를 못 낸다. 운동 신경이 둔해 시작하고 싶은 운동 또한 마뜩찮다.그런데 재주 없는 나에게도 관심이 가는 것이 하나 있다. 수필쓰기다. 내 친구는 내가 사유의 문장이나 감동적인 문장, 창의적으로 돋보이는 글을 쓰지 않더라도 타박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에 후회하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도록 응원한다. 잘하지 못해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다 보면, 훗날 성실성에 따른 예술적 성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살아온 경험으로 터득했으리라.‘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책에서 작가는 성현처럼 생활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나 또한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무조건 인내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내 안의 감성을 친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라 생각되며, 우리 사이에 더욱 신뢰가 쌓일 것이다.‘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다.’ 나는 내 친구가 나 외에 다른 특별한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질투하지 않겠다. 친구가 좋아하는 보랏빛 수국 속에서, 따뜻한 허브 차 속에서, 나를 가끔 떠올려 준다면 기쁘겠다.나는 우리가 수의를 입게 되는 날까지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빛이 흐려지고 기운이 쇠약해 져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더더욱 없기를 기도한다. 남편이나 자식보다 더 오랫동안 나를 지켜본 내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녀 또한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가슴 무너지는 일인가. 이것만 약속된다면 나는 세월 가는 것에 결코 초조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다.‘세월이 흘러 묻힌 자리에 지란(芝蘭)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났으면.’ 나와 친구도 꼭 그랬으면, 참 좋겠다.

2022-10-19

스마일치즈김치

배문경 수필가 천년의 미소라고 불리는 얼굴무늬 수막새를 본다. 천 년 전의 미소가 저랬을까. 넉넉하고 평화롭다. 일부분이 달아나고 없어도 미소는 온화한 할머니 같다.지난 7일은 세계 미소의 날이었다.‘세계 미소의 날’은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과 사람들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와 친절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도록 하자는 뜻에서 제정되었다. 매년 10월 첫 번 째 금요일이다.재즈보컬가수 넷킹콜의 ‘Smile’을 카카오 톡으로 지인에게 아침인사로 보냈다. 몇 해 전 아카데미주연상을 수상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Joker)’ 예고편에 사용된 곡이다. 그러고 보니 이모티콘에 다양한 미소가 있다. 하나 혹은 두세 개를 인사말과 함께 보냈다. 우리 일상이 미소로 시작된다면 좋지 않을까싶은 마음에서였다.어느 순간 자고 일어나면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휴대폰 알람소리에 일어나 씻고 거울을 보고 다듬고 옷을 입고 출근하는 일이 그렇다. 그래서 사는 일이 지겹고 행복하지 않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매일 매일, 일상의 지겨움에 지칠 때 즈음해서 주말이 있고 명절이 있고 국공일이 있다. 미소 짓는 날이라고 하니 웃음이라도 한 번 날려본다. 실없다싶어도 세상은 나비효과라는 것도 있으니 하루가 즐거울 수도 있지 않을까.얼마 전, 리어카에 뻥튀기를 담아서 끌고 다니며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리어카의 전부를 팔아도 삼사만원이 될 듯 말 듯 했다. 간호사회에서 나오는 연말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의 얼굴을 쳐다보던 할머니는 “나는 이렇게 살아도 자식들이 객지에서 먹고 살만하고 집에서 무료하게 있기 싫어서 리어카를 끌고 나온 사람이다. 날 도와주기 보다는 다른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고 얘기했다. 치아가 다 썩어 내려앉아 앞니가 몇 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큰돈은 아니지만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극구 사양하며 자리를 떠나버렸다. 서서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미안함과 민망함을 느꼈다.가끔 주머니에 있는 몇 천원으로 뻥튀기를 사드리곤 했는데 그 후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실수가 아니었나 싶다. 리어카에 뻥튀기를 파는 그분이 나보다 마음부자였다. 미소부자였다. 뻥튀기를 살 때 그분의 행복도 함께 샀어야했는데 어설픈 눈으로 내가 더 미소가 많다고 착각했다. 뵐 때마다 웃으며 담소라도 나눴더라면, 하시는 일이 값진 일이라 여겼다면 발길이 이어졌을텐데 후회가 밀려온다.‘세계 미소의 날’을 제안한 인물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스마일 아이콘을 고안한 미국의 디자이너 하비 볼(Harvey Ball)이다.그는 그가 1963년 고안한 스마일 아이콘의 본질적인 의미를 더 잘 살릴 수 있는 기념일을 만들어 진정한 미소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비 볼의 고향 우스터에서 매년 세계 미소의 날 기념행사가 진행된다. 기념행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간의 웃는 얼굴 풍선, 길바닥 그림, 아카펠라 콘서트, 서커스 공연, 파이 먹기 대회 등이 펼쳐진다.하지만 세계 미소의 날이 있는지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많으리라. 아직 코로나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하다보면 상대로 저절로 웃음을 띠게 된다. 리어카를 끌며 뻥튀기를 팔던 할머니도 리어카에 폐휴지를 담아 끌고 가시는 노인도 오늘 하루는 편안했으면 좋겠다. 노을 지는 하늘 보며 편안하게 허리를 펴며, 살아있어 행복하다고 주름진 얼굴에 웃음 가득했으면 좋겠다.그 날 이후 서툰 동정을 보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짓지 못하고 깊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던 가난에 대한 무시는 혹여 없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할머니는 어쩌면 미소가 가난한 나를 동정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행동을 반성하며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나 염화미소를 떠올리며 연습했다. 간혹 사진을 찍을 때처럼 ‘스마일, 치즈, 김치’를 반복했다.덕택일까. 방송에서 세계 미소의 날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2022-10-12

고구마를 캐며

양태순 수필가 가을볕이 흐뭇한 미소를 흩뿌리는 오후다. 나는 찐 옥수수를 들고 고구마 밭으로 가다가 넘어질 뻔했다. 저 혼자 깨춤을 추던 발이 조붓한 둑길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남우세스럽게 고꾸라지지는 않았지만 생채기가 난 발가락이 시원한 것이 운동화가 달아났나 보다. 신발을 찾으려고 풀숲을 헤치자 놀란 풀무치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한 풍경에 눈길을 떼지 못하고 날갯짓에 빠져든다.눈에 익은 느낌은 과거로 이어지는 때가 많다. 열두 살 무렵의 나는 고구마 밭에서 고구마 캐는 대신 메뚜기 잡느라 바빴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한 고랑씩 맡아 줄기를 걷어내고 고구마 수확하느라 열심이었지만 뒤처져 따라가는 내 호미질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 밭에는 굼벵이가 더러 있었다. 어머니가 땅심을 키운다고 수시로 퇴비를 내고 분뇨를 뿌린 탓이었다. 크고 잘 생긴 고구마를 캐서 손에 들고 자랑하려고 하면 굼벵이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인물 훤한 고구마에만 흠집을 내놓기 일쑤였다.우리 집은 물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지만 그 때는 대부분 물고구마를 심었다. 모양과 색깔에 신경 쓰지 않고 그저 크고 많이 생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굵기는 해도 모양이 볼품없고 굼벵이가 파먹어 얽은 고구마가 많았다. 지나치게 굵은 것보다 배가 살짝 나오고 아담하면서 몸매가 매끈한 것이 상품 가치가 좋은데 말이다. 형제들이 먹은 것은 당연히 뒷전으로 밀려난 것들이었다. 별다른 요리법이 없던 때라 삶아 먹는 것이 다였지만 그 맛을 어디에 비할까.우연히 텃밭이 생겼다. 농사는 질색인 나지만 집과 가까워 텃밭을 가꾸어볼 마음을 내었다. 어머니의 훈수로 밭을 갈고 고구마를 심었다. 유기농 거름도 사서 주고, 잡초를 뽑고, 때맞춰 물을 주며 정성을 들였다. 그 덕인지 줄기가 곧잘 뻗어나가며 잎이 진녹색을 띄어 땅 속에서 알이 쑥쑥 자라고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형제들과 같이 먹을 생각에 군침을 삼키며 가을을 기다렸다.오늘은 형제들이 모여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한 고랑씩 맡아서 캐기 시작했다. 호미가 흙 속을 부드럽게 파고들어야 하는데 텅텅 튕겨져 나오는 듯 한 소리가 났다. 그래도 묻혀 있는 고구마에 대한 기대로 팔에 힘을 주어 호미질을 했다. 처음 드러난 실체는 엄지손가락 굵기였다. 낙심하지 않고 반 고랑을 캐어 봐도 씨알은 형편없다. 거의가 손가락 크기이고 간혹 먹을 만한 크기가 있었다. 게다가 땅 깊은 것만 안 고구마 때문에 다들 손에 물집이 생겼다. 형제들은 캐낸 고구마를 들고 난리다. 이걸 어떻게 먹느냐고. 아무래도 내년 농사 위해 빡시게 일 하는 것 같으니 저녁은 격하게 차려야 한단다.나는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누어 먹을 생각에 몹시 설렜다. 이토록 부실한 놈을 숨기느라 잎들이 그리 무성한 줄 상상도 못했다. 나는 민망한 속내를 숨기고 내가 지은 것이니 가져가서 잘 먹으라고 했다. 밭둑에 앉아있는 어머니는 우리가 하는 양을 보며 웃으시지만 아쉬운 마음까지 숨길 수는 없는지 고랑에 둔 눈길을 차마 거두지 못한다.이번에도 겉모습에 속은 듯하다. 무성한 줄기 아래에 토실한 고구마가 있으려니 믿었는데 헛꿈이었다. 겉이 번드르르할수록 실속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주 속는다. 거침없는 입담에 속아 물건을 사기도 하고 꼼꼼히 살펴보고 들어야 하는 보험도 상대의 말솜씨에 넘어가 후회하기도 했다. 아마도 마음보다 눈이 먼저 반응하는 모양이다.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데는 다양한 요소가 있다. 외적인 것에는 빼어난 말솜씨와 다양한 표정, 몸에 배어있는 움직임이 있고 내적인 것에는 스며 나오는 인품과 말투, 상대를 향한 따뜻한 시선,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다. 한 면만을 보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는다. 늘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고구마를 캐면서 또 배운다. 눈만 믿지 말고 여러 요소를 두루 참작하여야 한다는 것을.언제쯤이면 마음창이 맑아질까. 한 꺼풀 아래에 숨어있는 보석을 알아보려면 구름과 바람을 부지런히 키질하여 깜깜한 하늘에서 빛이 나는 별, 그 별의 키질을 배우면 될까.

2022-10-05

식혜

정미영 수필가 식혜를 만들기 위해 무명 자루를 꺼냈다. 엿기름을 흘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주둥이를 꽉 조여 맸다. 따뜻한 물에 담가 조물조물 만져 보니 감촉이 좋았다. 우러나온 물이 뽀얀 젖빛이었다.나는 아기를 낳으면 모유를 먹이고 싶었다. 아기를 보듬어 안고 눈을 맞추는 엄마의 모습, 실컷 먹고 활짝 웃는 아기의 얼굴, 얼마나 행복할까 기대했다. 아기의 작은 몸짓조차 흘려버리지 않으려면 엄마와 아기가 교감해야 된다고 믿었다. 그 첫걸음이 모유를 먹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 첫아이를 낳고 산후조리원에서 몸조리를 했다. 환경이 낯설었는지 입맛이 없었다. 산모가 잘 먹어야 젖이 나온다고 했지만 미역국조차 먹기 힘들었다. 결국 초유마저 나오지 않았다. 아이가 배고파 보채는 게 안타까워 분유를 먹였다.조리원에 있던 산모 중에 나만 모유를 먹이지 못했다. 첫 출산이라 내가 유독 예민했는지, 아니면 체질 때문이었는지, 모유를 먹이는 엄마들이 부러웠다. 때때로 나 자신에게 서운했다. 다른 엄마들의 모유 먹이는 모습은 왜 그리도 당당하고 쉬워 보였는지. 남들은 잘도 젖을 물리는데 나는 왜 내 아이에게 못해 줄까. 안타깝고 미안했다. 모유를 못 먹이는 것이 마치 자식 사랑이 부족해 그런 것만 같아 자꾸만 스스로를 괴롭혔다.미안함 때문일까? 엿기름을 물에 담가 우리다보면 젖먹이를 둔 엄마처럼 가슴이 찌르르해진다. 뽀얀 엿기름물이 마치 모유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엿기름물을 받아 식혜를 만들어 내 아이에게 먹이는 일이 즐겁다. 엄마 젖을 먹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처음 식혜를 만든 것은 아이의 돌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이가 고열에 시달렸다. 마침 시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해열제를 먹여도 열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나에게 식혜를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엿기름의 찬 성질이 열을 금방 떨어뜨린다며 만드는 법을 대강 알려 주셨다.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아이가 나을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곧바로 엿기름을 사다가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해 보았다. 아이가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다음 날 아침, 밥솥을 열었다. 여섯 시간 정도 지나면 밥알이 서너 개 떠오른다고 했는데 밥알과 함께 엿기름이 빼곡히 떠 있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어머니, 밥알 아닌 것도 많이 떠있어요!”“밥알 말고 떠 있는 게 뭐꼬, 밥솥에 엿질금 물만 넣었제?”“엿질금도 깨끗이 씻어서 같이 넣었는데요.”어머니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아차, 싶었다. 나는 어머니의 설명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깨끗이 씻은 엿기름을 버리기가 아까워 쌀 안치듯이 물과 함께 밥통에 넣었다. 곡진하게 삭을 줄 알았다.결국 다시 식혜를 만들었다. 두 번째는 성공이었다. 그 걸 먹고 아이의 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나을 때가 되어서 그랬는지, 엄마의 서툰 솜씨가 안쓰러웠는지, 아무튼 나았으니 다행이었다. 그 때 맛을 본 탓인지 아들은 음료 중에 식혜를 가장 좋아한다.아이가 식혜를 좋아하니 자주 만든다. 시장에 갈 때면 아예 엿기름을 서너 봉지씩 사다 놓는다. 아이에게 먹일 것이므로 엿기름을 사면서 꼼꼼히 따져본다. 어디에서 만들었는지, 제조일자는 최근인지. 요즈음은 봉지에 만든 사람의 얼굴 사진까지 박아 놓는 경우도 있다. 믿고 사라는 말일 테다.예전에는 집집마다 엿기름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엿기름을 만들 때 싹을 내기 위해 시루에 보리를 넣고 물을 주며 길렀는데, 기른다고 해서 ‘기름’이라 불렀단다. 집집마다 만들었으니 장맛이 다르듯 엿기름에 따라 식혜 맛도 달랐으리라. 그래서 이왕이면 엿기름 봉지를 고를 때 손맛 좋게 보이고 연륜이 묻어나는, 할머니 사진이 찍힌 것으로 고른다. 식혜 맛을 내기 위한 나름의 묘책이다.식혜가 알맞게 식었다. 단내가 은은하다. 아들이 연신 입술을 달싹인다. 엿기름으로 빚은 내 마음의 모유, 한 그릇 넘치게 퍼 담는다.

2022-09-28

그 후

배문경수필가 녀석의 눈이 훑고 지나갔다. 덩치가 커서 드리운 그늘도 넓다. 팔을 사방으로 펼치고 지나면 큰 나무도 쓰러지고 다 지어놓은 과실도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칼날같이 매서운 입김으로 집을 삼키고 강의 너비를 넓혀놓는다. 지나간 자리마다 새로운 길이 생기고 있던 길은 사라진다.방에서 자던 오빠도 처음엔 빗물이 방으로 들어오자 걸레로 슬슬 닦았다고 했다. 불어난 개울물이 안방으로 들어올 때도 이 정도야 뭐라고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둔 여수로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촌집의 앞뒤가 포위당했다. 낮은 곳에 있는 논들은 벼들이 고스란히 물속에 갇힌 수생식물이 되었다. 마당으로 내려서자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단다. 오빠는 어둠 속에서 겁이 덜컹 났다고 했다.그래도 추석 차례상을 차렸다. 집을 떠나 가까운 거처에서 밤 대추 곶감 잘 구워진 생선과 삼색 나물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매와 탕이 오를 즈음 바깥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 햇살이 서서히 빛을 발한다. 술을 한 순배 돌리고 다시 모두 절을 했다.친정이 있는 곳으로 향할 때까지도 이렇게 난리가 나 있을 줄은 몰랐다. 세간은 육이오전쟁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물건들이 길바닥에 나와 구정물에 절여졌다. 냉장고며 주방용품, 옷장과 옷들이 흙탕물과 섞여 널브러져 있었다. 오빠는 연신 호스를 연결해서 흙탕물을 씻었지만, 밖에 설치된 수도 하수구가 막혀 애를 먹었다.옛 기록을 보면 ‘태풍’이란 단어 대신 ‘영풍폭우(獰風暴雨·거센 바람과 거친 비), 대풍우(大風雨·큰 바람과 비), 구풍(98B6風·회오리치는 세찬 바람) 등으로 기록했다. 자연재해를 온전히 겪은 당시 선조들에게 바다는 더욱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닷길로 떠난 중국 명나라 사행길 기록을 담은 ‘죽천이공행적록(竹泉李公行蹟錄)’도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한 사명감과 숭고한 업적을 위해 떠났을 것이다.“회오리바람이 급히 일어나 산 같은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배가 물결에 휩쓸려 백 척 물결에 올라갔다가 다시 만 길 못에 떨어지니 어찌할 방책이 없어 하늘에 축원할 뿐이라. 밤이 깊은 후 바람의 기세 더욱 심하여 배 무수히 출몰함에 지탱하지 못하네. 부사가 탄 배가 가장 험한 곳에 정박해 배 밑 널빤지가 부러져 바닷물이 솟아 역류하여 배 안으로 들어오니 사람들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더라. 부사가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고 뱃머리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축문을 지어 깨끗한 비단에 싸 바다에 넣고 군관과 노졸로 하여금 옷을 벗어 틈을 막고 또 막게 하더라.”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자연현상은 두려운 존재이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지구는 점점 더워지고 곳곳에 기후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국지성 폭우가 유럽의 도시를 휩쓸고 태풍도 점점 강해진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머지않아 사라지고 북반구 빙하도 사라진다. 그러면 해수면이 올라가 해안은 물에 잠기게 된다. 그 두려운 존재는 점점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누런 벼가 가득하던 곳이 태풍이 지나자 돌밭으로 변했다. 동네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손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어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이 답을 하듯 곳곳에서 사람들을 보내왔다.돌이 덮인 논밭에는 세상의 포클레인은 다 이곳에 집결한 것처럼 돌을 밀어내고 있다. 길거리에 덮인 진흙을 씻어내려고 다른 지역의 이름표를 단 소방차들이 달려와 물을 뿌렸다. 자원봉사자들이 건네는 도시락으로 속을 채운다. 물이 쓸고 간 자리에 사람들의 훈기가 들어앉았다.정신을 차리고 집을 돌아보니 그나마 이가 나가지 않은 밥공기와 국그릇이 의지하듯 포개져 있다. 접시들도 흙탕물을 씻고 겹겹이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눌러 앉아있다. 어제의 좌절을 벗고 씻고 닦은 바닥과 높은 곳에서 잘 버틴 몇 벌 옷을 까슬한 바람에 옷걸이에 걸어 말린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바람에 온몸이 한 점씩 꾸덕꾸덕해지고 있다. 물에 젖어 쓸 수 없게 된 삶터를 사람들이 일으켜준다.

2022-09-21

삶의 종점을 내려다보며

정미영 수필가 비바람이 하릴없이 들이치는 날이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국화원이 소슬히 떨고 있다. 오늘 떠나는 망자의 삶에도 비바람이 많았는지, 국화원이 슬픔을 응축한 채 웅크리고 있다.작년, 신축 아파트 담장 너머에 이층 건물이 들어섰다. 세련된 외벽에 국화꽃 한 송이와 국화원이라는 글자만 간판으로 걸려있어 몇몇 사람들은 미술관인줄 착각하지만, 이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례식장이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에 존재와 부재의 형체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서로 껴안고 이별하는 공간이다.나는 조문객의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며 가늠해 본다. 가까운 이와의 별리가 주는 슬픔의 깊이를.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는 사람,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 울음을 삼킨 채 눈물을 훔치는 사람 등 죽음 앞에서는 같은 상실의 무게를 지닌 것 같아도, 톺아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농도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공무원이셨던 친정아버지는 출장을 떠난 길 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비보를 접하고 황망히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보았던 안내판에 쓰인 망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내 아버지지만, 더는 부를 수 없는,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는 공허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영정사진을 쳐다보면 짙은 슬픔의 농도로 무거워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그 날의 장면들이 오버랩 될 때면 장맛비에 봇물 터지듯 가슴속에 눈물이 쏟아져 차오른다. 먹먹하게 온몸을 짓누르는 강렬한 슬픔이 상실감으로 변주되어 내 마음속으로 재빨리 휘감아 흘러 들어온다.며칠 전,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죽음을 대하는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무겁고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고인은 삼 년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했다. 죽음의 유예기간 동안 아흔여섯 살의 고인과 가족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고, 서로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시간이 많았단다. 그런 연유로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지인은 평온하게 전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서아프리카 가나에서는 댄싱 장례식이 유행이라고 한다. 상여꾼들이 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는 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로 장례식장을 흥겹게 축제 분위기로 이끈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추모하는 엄숙하고 차분한 진행이 아니라 템포 빠른 음악과 경쾌한 춤을 통해 고인과 작별하고 유가족과 조문객을 위로한다고 한다.나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고인의 생전 삶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이켜보는 것은 좋은 의미인 것 같다.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준비가 필요한 일은 각자의 죽음을 잘 대비하는 일임에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현재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서로가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별 연습을 미리 해보면 좋을 성 싶다.웰다잉(Well-Dying)! 가족들이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훈훈한 내 장례식 풍경을 만들려면 평소에 자주 떠올려야 될 단어다.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금기(禁忌)를 상기(想起)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 성찰을 통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각인된 의미 있는 장례에 대한 나만의 인식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어느덧 나도 계절을 알리는 인생시계의 시침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오늘, 나의 장례식 장면을 두 눈 감고 상상해 본다.향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듯하더니 울컥, 미세한 애잔함이 눈물로 변해 뚝뚝 흘러내린다. 장례식장의 차가운 공기, 껴안고 흐느끼는 가족들,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삶의 종점, 먼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내가 닿을 곳이다.나는 지금, 나의 장례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국화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2022-09-14

맞이하다, 슈룹(우산의 옛말) 아래서

양태순 수필가 곧 추석이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태풍이 지나간다. 늘 탈이 없이 지나가길 바라지만 올해는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추석맞이를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슈룹이 간절하다.태풍 ‘힌남노’가 지나간 자리는 끔찍하다. 시간당 쏟아부은 폭우로 포항의 일상이 마비되었다. 뉴스 화면에서 확인하는 곳곳의 침수 지역과 하천 범람, 정전 상태 등이 놀랍고 무섭다. 이맘때면 수확 직전인 과일, 막바지 힘을 내는 벼농사와 고추 농사가 재해 앞에 속수무책 당했으리라. 떨어지고 잠기고 무너진 처참한 모습에 망연자실도 잠시 모두가 원상복구에 손을 보탤 것이다.어감의 차이가 미묘한 말이 있다. 사전에 찾아보면 어떻게 다른지 차이를 모르겠는 단어가 있다. 평안과 안녕처럼 맞이하다와 맞다가 그렇다. 맞이하다는 오는 것을 맞다, 맞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오는 어떤 때를 대하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엇비슷한 경우 둘 다 사용 가능하다고 한다. 태풍을 맞이하다와 태풍을 맞다가 아리송하다. 지금껏 맞이하다는 기쁘고 좋은 일에만 써왔는데 말이다.그래서 맞이하는 일에는 가벼운 설렘이 따라온다. 손님을 맞이하려면 집을 깨끗이 하고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중에도 기분이 좋다. 새해를 맞이할 때면 지난해를 돌아보고 반성할 것은 하고 잘한 것은 뿌듯해하며 새날을 향한 다짐으로 희망에 부풀기도 한다. 생일이나 승진, 기념일에는 마음껏 축하하기 위해 작은 선물과 꽃을 준비하며 대상자보다 준비하는 사람이 더욱 설레게 된다. 일련의 과정이 번거롭긴 하지만 함께 하는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에 기꺼이 행한다.맞다는 불시에 찾아오는 불청객인줄 알았다. 예정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맞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한 상황을 만든다고 믿었다.이번 태풍이 그런 상황이었다. 며칠간 뉴스에서 태풍 ‘힌남노’를 대비해야 한다, 어마무시한 초강력 태풍이라는 둥 엄청 열심히 홍보했다. 어디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당황하면서도 나름 대비를 했다. 일 층에 가게가 있는 사람들은 모래주머니를 쌓고 중요한 것은 높은 곳에 올렸고 집에는 창문 테이핑을 하고 자동차를 지하 주차장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태풍은 상상하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악질인 태풍을 맞다고 해야만 할 것 같다.인생에서 맞아야 할 것은 많다. 자연재해가 일부이긴 하지만 더 많은 경제적 감정적 문제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픔, 사고로 인한 정신과 신체의 어려움,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한 불안, 좌절, 사회생활에서 맞는 관계의 복잡성이 맞서 싸워야 할 문제다. 이럴 때마다 최선을 다해 견디다 보면 지나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혹독한 태풍이 지나고 파란 하늘에 건재한 태양처럼.비가 오는 날 우산이 없으면 씁쓸하다. 사실 우산을 쓴다고 비를 다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신발이나 종아리는 축축하게 젖기 십상이다. 덩치가 큰 사람은 어깨도 젖는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은 우산이 걷는데 방해가 되는 듯해도 쉽게 우산을 접지 못하고 살대가 부러지거나 찢어져야 포기가 된다. 아마도 붙잡은 우산이 미약하지만 의지가 되는 든든함이지 싶다. 어릴 때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부모님은 우산같은 존재다. 아주 어릴 때는 친구와 싸웠을 때 무조건 내편이 되어 우는 나를 어르고 달랬다. 친구를 혼내주지 않아도 힘이 되고 든든했다. 살면서 궂은일, 험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기댈 수 있는 뒷배가 되어주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나보다 더 기뻐하는 바보다.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루어도 내리사랑은 변함없이 비를 맞지 않도록 기꺼이 우산이 되어준다. 언제나 자식을 향한 마음길을 열어두고 눈비 걱정하며 그 그늘로 몸을 들여 쉬어가라 무언의 눈길로 어루만진다. 슈룹, 이름 안에 사랑을 내주고 가없는 사랑을 품는 뜨거움이 묻어난다.올 추석에도 보름달이 뜰 것이다. 어깨가 젖을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이 쓰기도 하는 우산이다. 그것은 서로를 생각하는 따뜻함이다. 사랑이 가득한 우산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상처를 보듬으며 오순도순 맞이하는 추석을 그려본다.

2022-09-07

낭산(狼山)의 말(言)

배문경수필가 말이 씨가 된다. 바닥에 떨어진 말 한마디가 뿌리를 내리고 잎을 무성히 달아 꽃을 피우기도 한다. 말의 힘을 느끼며 나는 낭산(狼山)을 오른다. 도리천(忉利天)으로 가는 길에 여름 웃자란 소나무와 나무 백일홍이 길을 연다. 어디서 후드득 날아오르는 새들이 낯선 이의 방문에 저들끼리의 언어로 숙덕인다.413년 8월에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났다. 형상이 누각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졌다. 실성왕이 ‘지금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놀고 있다. 복 받은 땅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낭산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했다. 훗날 고승 명랑법사는 ‘신들이 노니는 숲’이라 해서 낭산의 남쪽을 ‘신유림(神遊林)’이라고 말했다.낭산은 높지도 깊지도 않다. 사람이 오르며 하늘을 보기 좋은 곳이다. 더위에 숨을 헐떡이며 닿은 곳에는 푸른 잔디로 곱게 단장된 큰 봉분이 있다. 아귀가 맞는 돌을 능을 쌓기 위해서 주위에 일 이단으로 둘렀다. 단지 비석에 선덕여왕릉이라고 하니 이곳이 내가 찾던 그 곳이다. 항공사진으로 찍힌 선덕여왕의 능은 신비하고 신성했다. 이곳에 신라의 여왕이 자리 잡고 환생을 꿈꾸며 누워계실지도 모르겠다. 숱하게 본 영화, 드라마에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들어도 질리지 않는 묘한 내용들이다. 왕(王)과 왕(王)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야말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했고 만들고야 만 대단한 여왕이 아닌가.“아무날 내가 죽을 것이니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라”삼국유사에 따르면 그곳은 낭산의 남쪽이라 했다. 그날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니 낭산 양지에 장사를 지냈다. 30여년 후 문무왕이 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 四天王寺)를 지었다. 사천왕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니 선덕여왕의 신령함을 알게 되었다. 지혜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여왕이 죽음을 예견하고 사천왕이 떠받칠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심금(心琴)을 아련히 울려줄 것까지 계산에 넣은 것은 아닐까.말은 말하는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듣는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더 큰 의미나 가치가 된다.후배가 소원을 말했다. 그녀는 스페인에 가보고 싶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정확히 3년 뒤에 스페인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순할 순順에 여자 희姬자를 쓴다. 본인은 까칠한 성격이지만 남들이 그렇게 불러주니 순하게 살아진다고 말했다.나는 글월 문(文) 서울 경(京)의 이름을 쓴다.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에서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의 힘이란 상상 이상일 수도 있겠다. 자꾸 불러주고 들려주면 알게 모르게 그리 된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글밭으로 한 걸음씩 가고 있었던 셈이다.선덕(先德)은 대방등무상경의 선덕바라문에서 유래하였고, 도리천의 왕이 되길 바라서 선덕이란 이름을 썼다.진평왕릉과 선덕왕릉이 낭산 일원에 들어서면서 낭산은 왕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신들이 머무는 공간에 왕이 다른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신라인들이 평안을 빌던 낭산이 이제 염원을 이루게 해줄 기도처로 자리매김한다.‘이리 낭(狼)’자를 쓴 ‘낭산(狼山)’이다.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는 “동쪽의 큰 별을 ‘랑(狼)’이라 한다”. 그래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란 다른 설도 있다. ‘남산’의 오자가 아닌 ‘낭산’은 분명 경주 시내에 있는 해발 100m의 구릉이다. 짐승의 형상이든 큰 별을 의미하든 낭산은 그곳에서 선덕여왕의 능이 세상의 중심에 있게 한 산이다.선덕여왕도 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신라의 튼튼한 초석을 다지기 위해 분황사며 영묘사, 황룡사 9층 목탑 등의 사찰을 지었다. 첨성대를 올리고 반월성을 거닐며 신라의 백성을 위해, 국가의 안전을 부처님께 빌었을 일이다. 영험한 여왕의 기도가 곳곳에 남아있을 법하다.낭산에서 내려가는 길에 산새가 길을 열고 솔솔 바람 한 점 시원하게 아미(蛾眉)를 훑고 지나간다.

2022-08-31

동반자

정미영 수필가 시간의 곡선을 따라 흐르던 푸른 바람 줄기가 소나무에 부딪쳐 태고적 소리를 내는 오후다. 토함산 숲, 햇살로 잘 엮은 빗살문을 열어젖힌다. 수천 년 쌓여진 바람층의 느낌표를 음미하며, 불국사 주차장을 지나 동리목월문학관을 찾아간다. 바람결에 문인들의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가만히 느낌표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인다.문학관은 김동리 소설가와 박목월 시인의 문학과 삶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다. 동리문학관에는 작가의 대표작인 ‘황토기’가 애니메이션으로 상영되고, ‘무녀도’의 내용이 담긴 모형들이 있다. 목월문학관에는 테마 공간을 목실과 월실로 구분하여,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구성해 놓았다.저마다 공간에는 작가들의 서사가 넘쳐흐른다. 두 분의 문학적 성취를 천천히 음미하며 박목월 시인의 문학 동반자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향한다. 시인이 문학의 길로 나아가는 데 김동리 선생님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글귀를 읽고 또 읽는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고독감을 달래고 문학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단다. 또한 조지훈 시인과 박두진 시인을 만나면서 문학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는 전시 글을 읽으니 내 가슴에 짙은 여운으로 남는다.나에게도 문학의 동반자가 있다. 포항수필사랑 동인들이다. 십칠 년을 만났으니, 정분이 나도 보통 난 것이 아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남편보다 오래 붙어 있고, 취미가 같으니 사춘기 딸보다 소통이 더 잘 된다. 수필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을 열었기에, 때로는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나의 편이다.우리는 격주로 만나 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모임에 성실하게 참석하기 위해서 모두가 잠든 새벽에 수필을 쓰려고 깨어 있을 때가 많다. 고요함 속에서 촉촉한 안개 속살 더듬거리듯 나 자신 안에 고인 언어들을 탐닉한다. 내 안의 수많은 느낌표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린다. 꽃잎이 떨어져 날리면 어느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그런 탓에 꾸준히 수필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편린들을 부여잡아 초고를 쓰고 퇴고를 거치면, 한 편의 잘 다듬어진 글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설렘 가득 안고 글을 챙겨 길을 나선다. 문학의 동반자인 나의 정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다.조지훈 선생님도 박목월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1942년 봄비가 꽃잎처럼 흩날리는 날, 경주로 찾아왔던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박목월 작가는 한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건천역에서 조지훈 작가를 기다렸고, 그런 그를 조지훈 시인이 알아보고 플랫폼에서 내리자마자 얼싸 안았다는 장면은 유명하다. 그 후로 두 작가는 열흘 동안 매일 문학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분이 문학적 동반자로 거듭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고향인 영양으로 돌아간 조지훈 시인은 목월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거기에는 ‘목월(木月)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완화삼(玩化衫)’ 시가 적혀 있었다.“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 리/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조지훈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감격한 목월 시인도 밤새 화답시 ‘나그네’를 준비했다.“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시를 써서 마음을 주고받았던 두 작가는 대단히 낭만적이다.나도 수필로써 동인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다. 내 문학적 동반자들의 글을 가슴으로 읽고, 정독하며, 경청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달콤한 수필 향기가 오랫동안 널리 퍼지기를 기원해 본다. 문학관의 존재가 새삼 고맙다. 이곳을 방문한 덕분에 오랫동안 수필 주위를 맴돌고 싶은 나에게, 글 쓰는 실력만큼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한지 깨닫게 해준 날이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감해야 한다는 관계의 중요성을 동리목월문학관에서 깨닫는다.

2022-08-24

조계사의 연꽃 향기

전재영 동국대 출강 최근 장맛비가 세차게 쏟아붓던 시간대에 불교의 총본산인 조계사를 몇 번 찾았다. 빗줄기가 더위를 식혀주듯 내 마음속 번뇌를 조금이나마 씻기 위해서였다.자비로운 표정으로 온 세상을 끌어안은 부처님 앞에서 들려오는 고매한 스님의 청아한 목탁 소리, 겸허히 빗물을 받아내는 사리탑의 경건함을 기대하며 조계사 앞에 다다랐다.그러나 사찰 일주문 앞에 펼쳐진 색다른 풍경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곳에는 고성을 지르며 종교단체를 비방하는 시위꾼들로 북적였다. 신성한 기도 시간, 지나가는 행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의 여유로움을 방해하는 모습으로 보여서인지 영 민망했다. 당연, 그 시위가 비록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보일 리 없었다.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비판과 반대 의견은 늘 있어 왔다. 또 다양하고 균형 잡힌 시각은 사회 발전을 견인한다. 그러나 도처의 시위현장에서 심심찮게 보이는 물리력을 동원한 무질서한 시위나 인격살인에 가까운 비방 및 모욕행위, 고성방가 수준의 배려 없는 행위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목이 터져라 남을 물러가라며 누군가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그들을 보면 팍팍한 삶의 애수와 고초가 느껴져 간혹 애처로운 마음이 든 적도 있다. 하지만 모든 문제나 갈등은 단지 목소리만으로 해결되기란 어렵다. 문제의 원인과 현재의 상황을 면밀하게 바라보고 건설적인 견해를 합리적이고 성숙한 방법으로 표현할 때 다른 이들의 공감을 더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번뇌를 잊고자 사찰을 찾은 중생의 번뇌와 시름이 쉽사리 사그라지지는 않지만, 세찬 빗줄기를 말없이 받아내는 연꽃잎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비를 베풀어 타인을 포용하라는 듯 작은 깨달음을 준다.불교는 연(蓮)꽃과 깊은 연(緣)을 가졌다.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 피어나는 꽃이면서도 그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청정과 깨달음, 성스러운 진리를 상징한다.연뿌리에는 질펀한 늪 바닥에 처해 있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본성을 간직하여 세상을 정화한다. 중생들의 몸은 비록 어지러운 사바에 있지만 정(淨)하게 지녀 세상을 구제해야 한다는 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연꽃잎은 잎사귀에 흙탕물 한 점이 없다.쟁반 같은 뽀송한 연잎은 물방울을 동그랗게 말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한 점도 취함이 없이 그대로 떨어뜨린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신성하게 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한다.또한, 연꽃은 꽃을 피우면서 동시에 씨를 품는다고 하여 꽃과 씨가 동시에 탄생하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모든 결과는 이미 원인을 품고 있음에 비유하며, 태어남과 동시에 불성을 지니게 됨을 상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꽃은 성스럽고 아름답지만 아무리 만개해도 결코 요염하지 않으며 향도 자극이 없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 향기는 멀어질수록 그윽하기만 하다.퇴계 이황 선생은 만년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서당 동쪽에 네모진 조그만 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했다.‘정우’란 ‘깨끗한 벗’이란 뜻으로 곧 연을 가리킨 말이다. 이러하니 연(蓮)은 화중군자(花中君子·꽃의 군자)로 불린다. 송 주돈이(周敦履)는 그의‘애련설’(愛蓮設)에서 연을 “꽃 가운데의 군자로다”라고 칭송하기도 하였고, 초나라의 굴원(屈原)은 연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었다.해가 중천을 지나면 하루의 노고를 연지(蓮池)에 부리고 정하게 꽃잎을 오므리면 연대 밑으로는 개구리밥과 생이가 방석처럼 깔고 앉아있으니 연지불국(蓮池佛國)이 아닐 수 없다.개구리들이 개굴개굴 아무리 시끄럽게 울어도 연꽃이 피는 사찰경내의 염불 소리는 극락음이다. 물론 조계사 앞 일주문을 지나면서 본 집회 시위 현장 또한 그 나름의 이유는 있을 터다. 다만, 그곳이 한국 불교의 중심이니 연꽃이 주는 깊은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길 권한다.

2022-08-17

다리, 잇다

양태순수필가 여름을 이고 가는 여행이다. 집을 떠나면서 잡다한 생각을 구겨 넣고 문을 잠갔다. 따라오지 못하게 빗장까지 질렀다. 태양이 조각조각 쏟아져 대지를 굽는 열기에 코끝이 후끈해도 짜증이 나지 않는 것은 기분 탓일 거다. 잠시 일상으로부터 비켜서는 홀가분함에 마음이 부푼다.목적지는 신안 퍼플섬이다. 가고 오는 길이 멀지만 더 늦기 전에 다녀오자는 말에 친구들이 기껍게 찬성했다.차가 출발하자마자 수다가 폭발했다. 학교 때의 친구라 서로의 친구가 겹치기도 해 이야기의 소재는 풍성했다. 때로는 서로의 수다가 허공에서 얽혀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샘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과거에서 현재를 넘나드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흥미진진했다. 간간이 튀어나오는 고향 사투리가 이야기를 더 찰지게 녹여냈다. 이야기의 대상이 들으면 언짢을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사는 것이 이 맛이라는 듯 웃으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훌쩍 지나 천사대교에 이르렀다.천사대교는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신안군이 천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다.입구에서 본 다리는 장관이었다. 다리의 주탑에 연결된 케이블은 은실로 짠 주렴처럼 아른거리고 바다와 하늘 사이로 천천히 달리는 차가 천사 날개를 지날 때는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듯했다. 파란 물을 잔뜩 머금은 하늘을 콕 찔러보고 싶은 아찔한 설렘이었다.몇 개의 짧은 다리를 더 지나 퍼플섬에 도착했다. 안좌도, 만월도, 박지도로 연결된 다리는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보라색 일색인 집과 건물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신비스러웠다.보이는 곳마다 포토존이어서 그곳에서 만난 여행팀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추억을 쌓았다. 전동차를 타고 반월도를 둘러보는 내내 길가에는 버들 마편초가 한들거리며 반겨주었다. 원래는 자생하는 도라지꽃이 많아서 퍼플이었지만 지금은 오래 볼 수 있는 버들 마편초로 바꾸었다고 한다.비탈진 밭에는 고구마와 참깨가 많았다. 참깨를 보며 꺼낸 친구 이야기가 대박 사건이었다.들어보니 참깨를 받은 사돈이 전화를 해서 ‘사돈, 방앗간에서 중국산이 섞였다는데 아니지요?’ 했더니 ‘사돈이라서 중국산을 쪼매만 섞었니더’ 했단다. 솔직한 사돈 때문에 우리는 기막혀하면서도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퍼플교를 걷는 내내 포즈 잡으며 시시한 이야기로 깔깔거렸다. 그러는 동안 서로를 향한 다리는 더 단단해졌다.다리는 사이를 이어준다. 뭍과 섬, 섬과 섬, 길과 길,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게 한다. 이미 열린 길을 거리는 더 가깝게 마음은 더 두텁게 해주는 역할이다. 다리가 오래도록 튼튼하려면 오가는 이의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이번 여행은 새 다리를 놓기도 했다. 내 마음에서 신안으로 퍼플섬으로 다리를 놓았다. 많은 다리를 지나며 쌓은 이야기들이 기억 저장고에서 반짝이고 있을 게다. 언제든 꺼내면 2022년 여름과 함께 아련한 시간으로 피어날 것이다. 방송에서 또는 다른 사람의 여행 경험담에서 희미해진 다리가 다시 진해지기도 할 테지만 말이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는 자칫 끊어지기 쉽다. 사소한 실수가 쌓이거나 친하다고 번번이 예의를 무시하면 그 틈으로 의심의 물이 스며든다. 추억으로 이어진 줄에 어느덧 구린내가 날 때면 위험한 순간이다. 재빨리 귀를 세우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만에 빠져 눈치코치 모른다면 자기도 모르는 새 다리는 없어지고 만다.아름다운 다리를 건넌 친구들과의 다리는 더욱 견고해졌다.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서로의 마음을 잇는 다리를 덧대고 삐걱대지 않도록 속마음 헤아리기와 배려란 기름칠을 꼼꼼하게 했다. 같이한 세월만큼 우정도 추억도 돈독해지는 너와 나, 우리의 다리가 오래 이어질 것을 믿는다.친구들, 참깨에 중국산 참깨는 섞으면 안 된다. 그것만 명심하자.

2022-08-10

다시 간호법으로

배문경 수필가 대한간호협회에서 발간한 ‘코로나 영웅, 대한민국을 간호하다’라는 책을 읽는다.전북이 고향인 김성덕 간호사는 대구동산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의료지원을 했다.그가 집을 떠날 때 가족을 설득하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난다. 세 자녀와 남편이 꼭 가야하느냐는 말에 “지금 아니면 언제 가느냐? 나는 간호사(registered nurse·RN)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라고 당당하게 가족을 설득시켰다. 코로나 현장 파견을 마치고 자가격리에 들어갔던 그녀가 촌집에서 혼자 기거했던 것도 다시 떠오른다.나는 왜 그녀처럼 모든 것을 훌훌 벗고 그 당시 코로나로 힘들어했던 그 곳에 지원서를 내지 못했을까. 아마 전국의 RN들이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미안하고 안타깝고 그래서 오랜 시간 자책하며 병원에서 조금 더 코로나로 힘든 직원과 환자를 도우려고 노력했다.그 당시 4대 일간지 1면에는 코에 반창고를 붙인 간호장교의 사진과 유사한 사진들이 실렸다. RN들이 이마에 길게 패인 주름과 콧등에 반창고를 붙인 채 기쁜 모습으로 훈장처럼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그들은 3킬로나 되는 방호복을 입고 15시간 환자들을 위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강행군을 했다. 어떤 시민은 봉투에 비누 두 개와 “의료진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메모를 같이 보냈기에 받는 사람들이 눈물이 났다고 했다.올 가을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예견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4차 접종을 하느라 병원은 분주하다.얼마 전 경주간호사회 주관으로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서른한 살, 간호사가 되었습니다’를 쓴 배윤경 작가 겸 간호사인 그녀와 북토크를 진행하였다. 그녀는 러시아어를 전공해서 취업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혼자 다녀왔다. 그리고 간호대학을 다시 도전해 취업까지 한 아주 똑똑하고 열정적인 여성이다. 그녀의 글에서 보여지듯 RN의 길은 멀고 험하다.RN은 삼교대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환자의 질환으로 인해 나타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인수, 인계받는 과정이 릴레이로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신규RN이 질환과 환자를 이해하고 습득할 시간이 1달에서 3달이다. 미국의 경우 1년 과정이 주어진다. 신입RN의 많은 수가 일 년을 못 넘기고 자리를 떠난다. 신규RN에게 주어지는 환자의 목숨은 커다란 부담이며 두려움이다.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서 예민하고 날카롭다.이미 이 과정을 겪은 RN은 다시 신규간호사의 교육까지 맡아야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병원은 환경의 처우개선과 RN의 인원을 늘여야하다. RN이 일 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다.이미 많은 논문에서 발표되듯이 칠년에서 십여 년의 숙련된 RN이 환자를 간호할 경우 질환 치유율(治癒率)이 훨씬 높다. 그래서 경력RN의 중요성은 배제될 수 없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갖가지 요구를 들어주는 과정은 지난(至難)하다.이런 상황 속에서도 많은 RN들이 환자를 위한 봉사를 진행했다. 순천향대학병원 간호부는 10월 4일 ‘천사 데이’를 맞아 환자와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봉사활동은 ‘건강한 삶은 간호사와 함께, 건강한 100세를 위한 혈압관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오전 9시부터 3시간 동안 이어졌다.환자와 보호자들이 오가는 곳에서 RN들은 혈압과 혈당, 체지방 등 검사를 진행했다. 건강 상담을 통해 혈압관리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내용을 접했다. 더 많은 병원들이 서비스를 늘일 수도 있으리라.초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복합적 질병을 간호하며 치매와 만성질환으로 건강에 대한 서비스는 더욱 필요하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의료법이 시행되고 있다. 경력RN이 현장에서 다양한 질환을 간호할 수 있는 ‘간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국민들에게 안정적인 간호가 실천되어야 한다.양질의 의료서비스가 모든 국민에게 돌아가도록 ‘간호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참간호의 아름다운 현장을 꿈꾼다.

2022-08-03

매미

정미영 수필가 어제는 아침부터 온종일 여름비가 내렸다. 거실 창문에 빗물이 고여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모처럼 창틀에 쌓인 먼지를 닦으려고 했다. 창문을 열다가 매미 한 마리가 방충망에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아파트 16층은 웬만한 나무 우듬지보다 훨씬 높다. 이곳에서 만난 매미는 반가움을 넘어 뜻밖이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매미 날개가 젖을까봐 신경이 쓰였다. 제비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듯 다행히 빗물이 들이치는 곳이 아닌 장소에 본능적으로 몸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척 대견스러웠다.방문객의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손전화를 찾았다. 나 혼자 호들갑을 떨다 결국 방충망을 건드렸다. 놀란 매미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건너편으로 날아갔다. 매미가 조용히 쉴 수 있게 혼자 둘 것을. 매미 사진을 들여다보며 아쉬움을 달랬다.하루가 지난 오늘은 햇볕이 쨍쨍한 날이다. 전형적인 한여름 날씨를 보여 주려는 듯 후텁지근한 오후다. 갑자기 매미 울음소리가 수직으로 치솟는가 싶더니, 수평으로 눕기를 반복한다. 밀도 높은 울림소리의 방출이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답다. 유달리 내 귀를 자극하는 커다란 소리에 혹시나 하고 작은 방 창문을 올려다본다.매미가 방충망에 붙어 자신의 존재를 우렁차게 알린다. 어제 우리 집에 방문했던 그 매미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면서 자세히 살펴본다.몸매가 좀 더 통통한 것 같기도 하고, 다리가 좀 더 가느다랗게 긴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려면 어떤가, 연일 찾아와 생의 편린 중에 하나를 나에게 펼쳐 보인다고 여기니 매미가 정겹다.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선다. 매미는 대략 7년간의 땅 속 생활을 마치고 일주일 정도를 땅 위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친다고 들었다. 수컷 매미는 살아있는 동안 구애를 하기 위해 배 안쪽에 있는 울림주머니를 맹렬하게 빨리 움직이는 것일 텐데, 암컷 매미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지 않고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아 안쓰럽다.몸피를 뚫고 큰 소리로 우는 매미일수록 암컷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집 안을 뒤흔드는 소리로 짐작을 하건데 필히 울음통이 커서 매미들에게는 매력적일 것 같다. 얼른 자기 짝을 만나면 좋으련만. 사랑을 찾지 못하고 애타게 울고 있는 매미를 응시하다 보니, 사랑에 버림받아 매미가 된 트로이 왕자 티토노스가 불현듯 떠오른다.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미남 왕자 티토노스를 보자 한눈에 반했다. 그를 에티오피아에 있는 자신의 궁전으로 데려가 남편으로 삼고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에오스는 인간인 남편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걱정했다. 제우스에게 티토노스를 불사(不死)의 몸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제우스는 에오스의 부탁을 들어주어 영원히 죽지 않게 만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늙지 않는 불로(不老)의 몸은 주지 않았다고 한다.에오스의 사랑은 점점 식어갔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피부가 주름투성이인 노인으로 티토노스가 변하자, 그를 궁전의 구석방에 가두고 청동 문을 잠가 버렸다. 슬프게도 티토노스의 몸은 점점 쪼그라들더니 작아져서 결국에는 요람에 눕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우스는 티토노스를 불쌍히 여겨 매미로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매미는 벽에 붙어 에오스를 애타게 부르며 울고 있었다는 비극적인 그리스 신화다.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명한 대사로 인해 한 동안 내 가슴이 먹먹했던 것처럼, 변해버린 에오스의 사랑 때문에 매미로 변한 티토노스의 이야기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영원성을 믿고 싶은 나를 절망스럽게 만든다.요즘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이 칭찬 받는 세상이다.그러나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사랑만은 변덕을 부리지 않고 영속성을 유지하면 좋으련만. 우리 집을 찾아온 매미도 서둘러 사랑을 찾아 결실을 맺고 난 뒤,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자신의 일대기에 한 줄 적히기를 바란다. 매미를 관조하며 사랑의 가치를 가늠해본 시간이다.

2022-07-27

안기러 가다

양태순 수필가 차가 느리게 달린다. 파도와 갈매기가 썸타듯 지분거리는 해안도로를 벗어나니 너른 내(川)가 펼쳐졌다.바다에 물들었던 눈이 파란색을 걷어 올리기 전 물소리가 젖어 들었다. 투명한 물소리가 차르르차르~찰 음악처럼 감겨들어 더없이 느긋하다.구부러진 길이 펴졌다 다시 구부러지는 동안 내가 따라왔다. 넓은 내를 꽉 채우지 못한 물길이 크고 작은 바위를 돌아서 혹은 틈을 비집고 저만의 길을 유유히 가고 있다. 깎인 바위가 둥그스름하다. 아마도 바위에 내려앉은 햇살이 고즈넉이 시간을 둥글게 익혔나 보다. 15킬로미터나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에서 제각각인 바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불영사 일주문 앞에 섰다. 천축산불영사 현판이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라 다그치는 듯하다. 부처의 그림자가 있는 절, 지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닿은 곳이다. 거대한 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많은 번뇌가 일어섰다 사그라지고 다시 안개처럼 피어나는 길 잃은 마음을 문밖에 두고 문턱이 없는 경계를 넘었다.솔향이 달려와 반겼다. 길옆으로 늘어서 있는 소나무가 인사를 하듯 수굿이 가지를 살랑이고 있다. 한껏 들이켜서 깊숙하게 채운다.숨어있는 새소리도 정겹다. 꽁지깃 까딱까딱 흔드는 재롱둥이 새가 눈앞에 있는 듯 흐뭇하다. 눈을 돌리니 하늘을 가린 나뭇잎 틈으로 들어온 빛이 빗질을 열심히 하는지 잎새들이 반짝인다. 모두가 청량한 향기로 다가온다. 살짝 내리막길을 따라 걷는 걸음에 자박자박 박자가 실린다.초록이 빚어낸 풍경에 눈도 마음도 시원해진다. 솔숲을 지나니 굴참나무와 싸리나무, 나무를 기어오르는 덩굴들이 어우렁더우렁 어울려 있다. 서로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제자리에서 자신만의 색을 내는 모습에서 마음 수양이 한참 부족한 자신을 발견한다.늘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에 미련이 많다. 미처 채워지지 않는 물질적 정신적 허기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고약한 심보를 떼어내고 싶으나 쉽지 않다. 가끔 뒤죽박죽인 채로 날이 선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해 난감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마음이 고단하다. 이제는 정말 내려놓자 다짐한다.다리 아래로 계곡물이 출출 흘러간다. 없는 길을 만들며 수천 년을 굽이져 낸 길에는 갖가지 조형물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보탠다. 흔한 너럭바위를 비롯하여 새, 얼굴, 부처, 동물 등속이 보는 이의 심상에 따라 형상이 보인다. 내 마음이 부처면 남도 부처로 보인다는 말에 공감하는 순간이다.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불영사에 도착했다. 신라시대 기암절벽을 끼고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절, 저절로 신심이 우러나는 곳은 아니다. 일주문을 지나 걸어오는 동안 세속의 부질없는 생각들을 다 부려놓고 천축산에 폭 안기면 세상만사 다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절이다. 나보다 바람이 먼저 도착해 내 소식을 전했는지 품 벌려 맞아주는 불심이 향기롭다.불영지에 연꽃이 아련하다. 법영루 물그림자가 바람의 무늬를 밀어내고 연잎 위에 법경을 펼쳐놓았다.가만히 귀를 연다. 마음을 내리치는 죽비 소리에 속이 뜨끔 따가워진다. 모두가 내 탓이고 내가 부족한 탓이다, 방언 터지듯 고백한다. 슬며시 불심에 기대어 ‘그러나 오늘만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안아주세요.’ 털어놓는다.산에서 내려다보는 부처를 올려다본다. 불쌍한 중생이라 안타까워할지 측은지심으로 기회를 줄지 아리송하다. 아무렴 어떨까.내가 내 마음 둘 데 없어 안기러 왔으면 안기면 그만인 것을. 천 근의 무게로 짓누르던 화기와 슬픔이 한쪽으로 비켜났는지 속이 편안하다. 아늑한 품속 같은 불영사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물소리 바람 소리 휘휘 몰려 와 경전을 풀어낸다. 받아적는 손이 바쁘다. 거리가 멀어 그림자로 다녀가는 부처의 마음을 마음에 들이며 고요히 두 손 모은다.

2022-07-20

책(冊)탑을 보며

거실에 책장 세 개가 모두 빈틈없다. 책꽂이 위도 앞쪽도 숨을 못 쉴 만큼 책으로 들어찼다. 딸아이 사진조차 구석으로 쏠렸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밀리고 구겨진다.일요일 아침 눈 뜨자마자 거실의 모든 물건을 꺼내고 책들도 바닥에 쏟아냈다. 이젠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챙길밖에 도리가 없다. 어제도 그저께도 누군가로부터 책이 왔다. 지인이거나 낯선 사람이 쓴 수필집이 봉투째 책상에도 쌓였다. 수필잡지, 개인 수필집, 동인지, 목차를 보면 알 만한 사람들의 이름이 책의 곳곳에 박혔다. 때론 펼친 책자에 나의 이름 석 자도 종이 위에 무늬 진다.바닥에 쌓인 책들이 탑처럼 높아졌다. 묵직한 서사가 초석이 된다. 그 위에 처마의 날렵함처럼 잘 써진 글들이 감탄을 자아내며 층을 이룬다. 수필의 근간을 만들어 갈 수필들이 한 층, 한 층 높이를 만든다. 그리고 어떤 책은 풍탁이 되어 바람이 지나갈 때면 청아한 소리로 세상에 한 줄기 고운 바람이 된다. 탑 꼭대기에 이르러 당대에 이름 석 자를 논할 문장가가 쓴 글이 떡하니 차지한다.그러고 보니 각각의 수필은 모두 그 사람의 사상, 문학에 대한 열정, 그리고 평생의 철학이 글자를 통해 우러났다. 때론 흥미롭게 가끔 눈물을 머금게 하고 파안대소를 낳게 한다. 어디 그뿐이랴. 황제에서 철학자, 교수와 소설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써놓았다. 에세이는 바로 삶을 우려낸 곰국 같은 글이다.나의 이야기에서부터 부모, 형제, 친구와 스승의 이야기다. 이웃과 고객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주인공도 다양하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부터 큰 사상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삶의 희로애락이 그 속에서 춤을 춘다. 들판에 핀 꽃 한 송이나 길가의 은행나무나 나무 백일홍과 다르지 않을 우리의 인생이 긴 강물처럼 풀어져 흐른다.흐트러지지 않도록 빨간 노끈으로 묶어보니 결코 작은 양이 아니다. 책장 두 개 분량의 책이 나를 빤히 본다. ‘어쩔거냐고? 너 또한 세상 어느 구석진 자리 시끄러운 자리에 냄비받침처럼 쓰일 이름자 하나 갖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다. 오죽하면 냄비받침이란 책 제목을 내놓았을까. 세상을 꿰뚫어 본 혜안이 아닌가. 그 책은 차마 노끈으로 묶을 자신이 생기지 않는 동류의 아픔이 느껴졌다. 배문경수필가 혼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는 사이 책탑은 쌓여가고 내려놓지도 펼치지도 못하는 작금의 사태에 커피 한잔을 마시며 창밖을 본다. 한 사람의 전 생애가 담긴 자서전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기막히고 답답한 사연이 녹아있다. 나의 동감 없이 서운해할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마음을 나누어 가져야 하지 않을까. 비슷하지만 조금씩은 다른 훈계도 있다. 삶의 지혜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곁에 많다. 따뜻한 커피 향기 같은 내용이 한 스푼의 설탕만 넣으면 하루가 행복할 그런 수필이 나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책탑을 다시 바라본다.내가 저 무거운 탑을 아파트에서 땅으로 내려놓으면 경비아저씨는 부녀회와 얘기해서 종이 무게로 몇 푼에 팔 것이다. 마음의 무게는 정녕 사라지고 활자의 무게마저 무시된 채 종이의 무게만큼 금이 그어진다. 나의 책조차 누군가에 의해 쓰레기통에서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온 생애가 녹아있다고 발문에 써놓았던 책은 김칫국물에 버무려져 빗물에 녹아 내려지고 구겨진 채, 아이쿠.책탑은 높아져 가는데 현관은 멀기만 하다. 지인의 북카페에 연락해서 무료 나눔을 하고 싶다고 했다. 차 한 잔 마시며 풍경 한 번 책 한 줄 읽으면 좋을 것 같았다. 차 트렁크에 실으며 그간 넘치도록 받은 관심에 감사하며 힘들게 책을 옮겼다. 카페 창가로 햇살이 한 줌 들어오더니 음악에 섞여 커피 향이 짙다. 커피와 어울리는 수필 한 편을 꺼내 읽어본다. 자리 때문일까. 글이 노랑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정원에 심어진 진분홍색 송엽국과 우단동자와 수레국화 사이를 오간다.무너진 책탑의 일부분이 꽃들 사이에서 배시시 웃고 있다.

2022-07-13

구두

정미영 수필가 수술 받았던 친정어머니의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하셨다. 병원에 함께 다녀올 요량으로 신발장에서 어머니의 빛바랜 운동화를 꺼냈다. 몇 년째 편하다는 이유 때문에 한 켤레의 신발로 생활하다 보니 군데군데 실밥이 터지고 뒤축이 닳아 테석테석했다. 어머니의 고단한 삶이 신발에 스며든 것 같아 마음이 먹먹했다.수술 전, 어머니의 무릎 통증은 오래 지속되었다. 약을 먹어도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길을 가다보면 몇 발자국을 못가 절뚝일 때도 있었고, 겨우 발걸음을 옮기는가 싶으면 이내 주저앉았다. 가까운 곳에 볼일을 보러 가는데도 남들보다 시간이 두 배로 걸렸다. 앉을 데가 있으면 무조건 쉬어야 했고, 마땅한 데가 없으면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쉬어야만 걸을 수 있었다.늘 푸른 물이 돌 것 같던 어머니의 육신이 쇠약해져 갔다. 내 어머니만큼은 세월이 비켜가기를 빌었는데, 자연의 섭리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음이 눈물겨웠다. 보다 못해 수술을 권했지만 한사코 망설였다. 나는 자식의 입장을 먼저 걱정하는 어머니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더는 수술을 늦추기가 어렵다는 진단을 받았기에 어머니에게 퇴행성관절염 말기라는 설명을 하며 날짜를 잡았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다.어머니가 병실에 있는 동안, 나는 구두를 사러 갔다. 전부터 어머니에게 구두를 사드리려고 했는데, 내 살아가는 형편을 핑계로 계속 미루었다. 구두를 고르는데, 어머니에게 묵혔던 구두에 대한 빚이 한 순간 빗장뼈를 세워 고개를 내밀었다.초등학교 때, 우리 집 앞에 개울이 있었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자주 빨래놀이를 했다. 그 날도 세수 대야에 비누와 신발 몇 개를 챙겨나갔다. 신발로 물을 퍼내어 대야를 가득 채우고 나서 개울에 떠내려 보냈다. 그러고는 잽싸게 뛰어가 건져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한참을 뛰어다니면 지쳤다. 헐떡이는 숨을 고를 겸 물가에 자리를 잡고앉아서 신발에 비누칠을 했다. 이왕 빨 것을 찌든 때가 있는 빨랫감이나 걸레를 들고 갔더라면 칭찬 꽤나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발에 어머니의 구두가 섞여 있었다. 가난했던 아버지가 내 입학식 때 신고 가라고 큰맘 먹고 어머니께 사다준 신발이었다. 그 뒤로 어머니가 구색을 맞춰야 하는 자리에만 신고 나갔던 하나뿐인 구두였다.나는 잠시 뒤에 알았다. 구두는 물에 빨면 안 되고, 불 옆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을. 말린다고 연탄보일러 주위에 젖은 운동화와 함께 구두를 세워 두었더니 일그러지고 눌어붙어 영영 신지 못하게 되었다.정작 어머니는 야단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자식 걱정이 먼저인 분이었다. 구두를 태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혼날까 봐 불안해 한다는 사실에 더 신경을 쓰셨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미안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어머니에게 구두를 사드려야지, 스스로에게 다짐했다.구두를 장만해 병실에서 꺼내 들고, 얼른 회복해 꽃구경 가자고 말씀드렸다. 자식이 마련한 선물을 귀하게 여겨 어머니는 구두를 들여다보며 흐뭇해 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나는 새삼 코끝이 찡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새 구두를 신지 못했다. 무릎이 성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새 것보다는 예전 것이 좋다며, 운동화를 신었다. 어머니가 건강하실 때 진작 구두를 사다드렸다면 좋았을 것을, 후회가 밀려들었다.“엄마, 미안해.” 내 후회의 탄식이 길게 여음을 남겼다.나는 예전에 어머니의 구두를 연탄불 옆에 두었다가 눌어붙게 했던 날의 용서를 다시금 구했다. 어머니는 이제껏 마음에 두고 있었느냐며 본인은 벌써 잊었다고 말씀하셨다.오늘도 늙으신 어머니는 자식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셨다. 세월이 흘러도 덜어지지 않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결이 소실점으로 향한다고 해도 끝없는 그리움으로 내 가슴 속에 은은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노모의 사랑이 짙어지는 오후였다.

2022-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