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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빵과 함께

배문경 수필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빵 한 조각에서 출발한다. 가지치기 노동자였던 그에게 빵은 가족의 생계를 연명하기 위한 목숨이었다. 추운 겨울 일거리를 찾지 못해 힘없어 돌아오는 길, 빵집에서 갓 구운 빵 냄새는 그를 기다리는 배고픈 조카들과 오버랩되었다. 그는 빵을 훔쳐 달아나다 붙잡혀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빵 한 조각 때문에 젊은 청년 장발장은 삶에서 19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여러 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그는 마흔넷에 출소한다. 그 대가는 너무 혹독했다. 그에게 빵은 신(神)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세월에 따라 빵에 대한 개념이 달라진 것일까. 장발장이 그토록 갈망하던 빵이 지금은 하나의 캐릭터로 변해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고 있다. 최근 90년대 감성이 인기를 끌고 옛것에 대한 레트로 열풍이 불자 spc삼립은 20여 년 전 ‘포켓몬빵’을 다시 생산했다. 그때도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만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포켓몬스터 캐릭터 카드가 든 빵은 품절 사태를 가져올 만큼 인기가 있다.빵 맛을 찾는 것이 아니라 빵에 들어있는 159개의 포켓몬 ‘띠뿌띠뿌씰’ 빵에 든 캐릭터에 관심이 쏠려있다. 연예인이 나오는 프로에서 조차 60개의 빵을 뜯어 뮤와 뮤츠 스티커 찾기를 했다. 이제 빵은 빵이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빵들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던진다. 호빵맨이란 만화 또한 아이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어릴 적 아이들 사이에서는 보리개떡이 간식으로 만점이었다. 보리쌀 간 것과 밀가루를 섞은 것에 막걸리를 부었다. 뜨뜻한 곳에 놓아두었다가 팥과 콩 등을 대충 흩뿌려 쪄내면 밀가루의 네다섯 배로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만든 빵은 배고픈 그 시절 들고 다니며 친구들과 놀며 먹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지금의 보리떡과는 다르게 단맛도 없고 고소한 맛도 없지만 감자나 고구마로도 성이 차지 않던 그 시절 아이들의 군것질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최근엔 빵지 순례라는 기행도 있다. 경주를 찾는 여행객들은 신라 천년의 역사여행을 와서 맛집을 찾고 황리단길에서 경주 다보탑이 새겨진 십 원 빵을 먹는다. 그러고는 인증샷을 찍어 SNS에 올린다. 미니 핫케이크 모양의 찰보리빵도 대세다. 빵은 선교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전하면서 말이다. 첨성대와 불국사가 경주를 지키는가 했더니 빵이 한 몫을 차지했다. 주령구는 통일신라시대 귀족들의 술자리 흥을 돋우는 놀이도구로 14면체의 14가지의 벌칙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놀이문화이다. 이런 주령구 모양의 빵도 신라의 문화전수자로 나섰다.빵은 어디든 함께 한다. 두 탑이 노을 아래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감은사지, 문무대왕 수중능의 파도치는 감포 바다, 바다에서 돌꽃이 피어나는 주상절리가 보이는 창가, 연둣빛 보리밭에 푸른 바람이 일렁이는 황룡사, 어디서든 입을 즐겁게 하는 빵이면 힘들었던 시간이 설탕처럼 달콤하게 녹아내린다.중학교 때 짝꿍은 학교 앞에서 빵집을 했다. 그 친구가 과학이나 생물 시험을 치면 늘 빵점이라서 놀림을 받았다. 0점 시험지에 맛있는 빵이 붙어서 맛난 점수가 되었다. 빵점이건 백 점이건 우린 또 빵이란 단어 앞에서 조금 약해지고 아무렇지 않게 빵 한 조각을 떼서 입에 넣는다. 실실 웃음이 난다.초등학교 시절, 체육 선생님은 육상을 끝내고 온 우리들에게 급식으로 주고 남은 밀가루 빵을 모았다. 그것을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넣고 바싹하게 튀겼다. 땀 흘린 뒤에 운동장 계단에 앉아 파란 하늘을 보며 땀을 식혀가며 먹던 고소한 맛,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잊을 수 없는 빵맛이다.빵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음식 중의 하나다. 새 번역 성경이 나오면서 떡으로 번역했던 것을 밥으로 바꿨다고 한다. ‘빵순이’라 불리는 내게 빵은 밥이나 마찬가지이다. 삶을 되돌아보면 빵은 나의 역사와 함께 하며 나를 살렸다. 누가 내게 ‘신神과 함께’냐 묻는다면 ‘빵과 함께’라고 대답할 것이다.바쁘게 뛰어다니느라 때를 놓친 오후, 커피 한 잔에 바싹하고 고소한 오리지널 스콘을 떼먹는다.

2022-05-11

내나무

정미영수필가 봄기운이 완연한 내연산 수목원을 걷는다.싱그러운 나뭇가지들이 연초록 바람을 일으키며 눈인사를 건넨다. 나뭇잎 속에 담겨 있는 바람의 지문을 열심히 정독하는데, 묘목을 심느라 애썼던 어릴 적 추억이 찰랑거리는 바람결에 실려 온다.초등학교 오 학년 때였다. 집 가까이 신축 학교가 들어섰기에 친구들과 그곳으로 등교했다. 전에 다녔던 학교까지는 강둑을 걸어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늘 뭉쳐 있던 다리를 만지며, 앞으로 다리 고생은 줄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다리 대신에 손 고생이 시작되었다. 새로 지은 학교 운동장에는 돌이 많았다. 매주 월요일 조회 때나 체육 시간은 물론, 틈만 나면 돌을 주워 화단 한쪽에 돌무더기를 쌓았다.선생님들께서 돌 줍기를 시키신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뛰다가 넘어졌을 때 돌이 있으면 다칠 가능성이 높았다. 또 돌과 시멘트를 섞어 건물 뒤편 구석진 곳에 낮은 울타리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서너 마리의 토끼를 풀어놓고 키웠다.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만의 추억 만들기를 하자고 하셨다. 집에서 꽃씨나 묘목을 가지고 오라고 당부하셨다. 친구들 대부분은 구하기 쉬운 꽃씨를 가지고 왔다. 우리 집에는 마침 아버지가 마당에 심으려고 했던 동백 묘목이 있었다. 나는 신문지에 뿌리를 둘둘 말고는 비닐봉지에 넣어 조심스레 들고 갔다. 나무를 가지고 온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친구들은 나무에 관심을 보였다. 심을 장소를 물색하고 학교 창고에서 삽이며 호미를 들고 와 구덩이를 팠다. 선생님의 지시대로 땅은 알맞은 깊이로 파였는지 삼십 센티미터 자로 재어보는 개구쟁이도 있었다. 나는 뿌리가 상하지 않게 손으로 흙을 덮고 발로 다지며 잘 자라기를 빌었다.추억 만들기는 선생님의 나직한 가르침이었다. 선생님은 평소에 우리가 주워 나른 돌멩이를 가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를 빙 둘러쌌다. 그러고는 이제 묘목은 장대비에도 끄떡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동안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돌들이 고마웠다. 짜증스럽던 돌 줍기가 보람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선생님은 나에게 이름표를 만들라고 하셨다. 나는 나무 이름과 소망하는 것을 빼곡히 적었다. 내가 만든 이름표를 보고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셨다.동백나무가 ‘내나무’라고 말씀하시며, 내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셨다.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는 풍속이 있었다. 아이를 족보에 올리면서 집 주위나 논두렁에 몇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딸 앞으로는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위해서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 딸이 커서 시집갈 날을 받으면 그 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주었다. 아들의 경우는 관을 짜는 데 사용되었다.‘내나무, 내나무’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부를 때마다 동백나무는 소중한 의미로 마음에 담겼다. 날마다 키 재기를 했다. 자주 들여다보며 물을 주고 말을 걸었다. 걱정이 있거나 비밀이 있을 때 친구들 몰래 찾아가 내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지끈거렸던 머릿속이 한결 나아졌다.나만의 작은 나무가 있어 생활이 즐거웠다.학교는 점점 신나는 곳이 되었다. 나는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갔다. 무릎을 굽히고 내 키를 낮춰 악수하듯 이슬 맺힌 동백나무를 살며시 잡으며 속삭였다. 꽃망울을 맺어주어 고맙다고.시간이 흘러 꽃송이가 붉게 터졌다. 꽃봉오리에 코를 박고 한참을 머물러 있으면 가슴이 찌르르 떨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감동이 전해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벅차다. 투덜이 여학생이 긍정적인 소녀로 바뀐 것은 모두 내나무 덕분이었다.나무 계단을 올라 수목원 전망대에 오른다. 드넓게 펼쳐진 숲이 바다가 되어 일렁인다. 초록 물결이 출렁대자, 어릴 적 교정에 심었던 내나무가 떠밀려와 품에 안긴다. 동백나무와의 추억들이 열심히 여물어 간다.

2022-04-27

무소유와 에세이

배문경수필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마하트마 간디가 했던 말을 시작으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수필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은 법정스님이 향년 77세로 입적하신지 12년이 되었다. 넘치는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번들거리는 세상의 욕망에 맑고 향기로운 스님의 정신을 느껴보고 싶다.밝은 성격의 단짝 친구가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 어두운 시절, 사회의 등불로 혜성처럼 나타난 법정 스님이었다. 그의 ‘무소유’와 ‘서 있는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발간된 에세이집은 사회적인 갈등과 반목에서 벗어나는 시원한 사이다 느낌이었다. 많은 매스컴과 입소문은 큰 화제가 되었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새 책이 나올 때면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는 친구에게 법정 스님은 신적인 존재였다. 절친의 손에 들려있던 ‘무소유’를 나도 받아 읽었다. 나는 책을 읽고 친구만큼 감동을 받지는 못했지만, 친구는 좀체 마음을 다잡지 못하더니 2학년 여름방학에 승려가 되겠다며 승가대학엘 들어갔다.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고야 말 것 같은 느낌에 친구에게 필요한 것까지 준비해 주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절에 들어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마도 간호사가 되어 다시 오라는 승가대학의 요구에 실망하여 집으로 되돌아온 듯 했다.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서야 비구니가 되기 위해 운문사 승가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친구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달려가 상을 치른 후 친구 집 서재에서 ‘무소유’를 다시 읽게 되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정말 친절하고 특별히 나를 잘 챙겨주신 분이었다. 책을 읽으며 삶의 집착과 소유하는 마음을 덜어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세월은 급류처럼 흘러 우리는 서로 다른 삶을 바쁘게 살았다.법정 스님의 글에서는 맑은 바람과 은은한 난향이 느껴졌다. 난을 애지중지하다 결국 집착에 끌려 다닌다는 생각에 타인에게 주는 순간 이미 스님의 그 마음은 난 향기로 가득해졌을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난 것이다. 세속에 사는 나에게도 욕망에서 벗어나길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넌지시 공감하도록 설득하는 글이었다. 매력적이었다.문장은 군더더기가 없다.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놓여있는 문장과 문장이 돋보였다. 깊이 사유한 글이란 이런 것이란 느낌도 받았다. 뒷 문장이 앞 문장을 설명해주고 깔끔하니 담백하고 모든 글이 더 이상 줄일 수 없도록 적절했다. 오랜만에 다시 펼친 법정 스님의 글은 세월 탓인지 문장이 옛 글의 느낌이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아직 그대로 나의 가슴에 먹먹한 메시지를 던져준다.또 승려라는 신분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더욱 정확하게 자신을 수련할 수 있다는 점은 글에서도 읽혔다. 혼자 기거하는 불일암에 한여름 더위에 낮잠이라도 잘 수 있으련만 스님은 계율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나무를 뾰족하게 깎기도 했다. 남이 아니라 나를 흐트러지지 않게 지키기 위한 노력은 놀라웠다. 그리고 스님은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했다. 세속과 절집이 어떻게 균형을 잡고 스님과 신도들이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는지 그 길을 알고 계시는 듯했다. 330만 부가 넘게 팔려나간 초대형 베스트셀러인 ‘무소유’가 세상에 나오자 김수환 추기경마저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 할 만큼 전설을 만들어냈다. 그 후 친구는 법진이란 이름으로 운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승려의 길을 걷게 되었고 나는 동국대학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각자가 맡은 일을 하면서도 법정 스님이란 화두를 안고 출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고심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수학 방정식처럼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녀를 승려의 길로 제시한 사람이 법정 스님이라면, 수필이란 글이 내게로 와 닿아 큰 숙제처럼 날마다 끙끙거리는 것 또한 법정 스님의 책 인연 때문이다.돌이켜보면 한 사람의 인생에 씨알 하나 던져 놓는 일,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법정 스님이 아니라 다른 누구였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주제를 생각하며 만드는 연(聯)과 연(聯) 사이에서 넘실대는 푸른 보리처럼, 유난히 빛나는 벚꽃 잎처럼 세상에 청량한 바람 한 점 일으킬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2022-04-13

생강나무와 수필가

배문경수필가 봄은 노란빛을 뿌리며 온다. 겨우내 메말랐던 땅속을 뚫고 산수유가 노란 폭죽을 터뜨리기 시작하자 담장 울타리에도 노란 개나리가 ‘나도 여기 있어요’라며 손을 흔든다. 또 한 개의 노랑은 생강나무 꽃이다. 산수유가 익숙하다 보니 숲에서 만난 생강나무를 보고도 산수유일 것이라 짐작하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생강나무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이들에게 섭섭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산수유는 열매를 약으로 쓰기 위해서 중국에서 들여온 나무다. 그래서 대부분 집 근처에 심었다. 하지만 생강나무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나무로 주로 산에서 자란다. 그러니 두 나무를 구분하는 기준점은 어디에 사느냐이다.또 생강나무와 산수유나무는 꽃 생김새로 구분을 하는데 산수유나무는 꽃 한 송이에 암·수술이 함께 있는데 반해 생강나무 꽃은 암·수꽃이 각각 따로 있다. 생김새와 향기가 각각 다른 두 나무를 이제 숲에서 보면 노란 꽃이라고 성급히 산수유라 부르지 말고 생강나무라 불러주자.나무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해서 생강나무다.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의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여름부터 겨울눈을 만들기 시작해 잎눈과 함께 좀 더 큰 꽃눈을 만든다. 많은 꽃이 피기 전에 먼저 벌과 나비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생강나무, 벚나무, 목련, 진달래, 매화나무, 산수유가 모두 이런 선택을 했다. 이 꽃들은 성질이 급하다.김유정 소설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와 생강나무처럼 성질 급한 점순이가 “산 중턱에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라고 나온다.알싸하고 노란 동백꽃이라고 분명 작가가 써 놓았지만, 독자들은 남쪽 지방의 빨간 동백꽃으로 흘려 읽었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고 부른다.장기읍성에 갔을 때도 노란 꽃이 피어 있기에 산수유인지 생강나무 꽃인지 잠시 헷갈리다 통합검색을 통해 겨우 알아냈다. 노란빛은 비슷할지 몰라도 모양은 확실히 다르다. 생강나무 꽃은 가지에 바짝 붙은 채로 둥글게 뭉쳐있고, 산수유는 꽃자루가 길어 활짝 펼쳐서 핀다. 또, 줄기 끝이 녹색이고 갈라지지 않았다면 생강나무고 줄기가 갈색이면 산수유다.경주에도 산수유가 무더기로 피어나 봄 소풍 가기에 좋은 곳이 있어 한달음에 달려갔더니 온통 노란 세상이다. 햇빛조차 무더기로 피어났다. 건천 백석암으로 가는 길에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온몸을 다해 피어 올린 노란 꽃들이 환호성을 불러일으킨다. 무채색의 겨울이 끝났다고 누군가 세상을 향해 노란 물감을 흩뿌린 듯하다.꽃은 필 때마다 각 각의 이름으로 봄을 빛낸다. 우리는 그때마다 잠시 고개를 끄덕일 뿐 더 기억에 담아두지 않는다. 꽃이 피어야 겨우 저 자리에 그 나무와 꽃이 있었음을 다시 상기하게 될 뿐이다. 대충 보아 넘기고 어설피 보아왔다는 뜻이다. 그때는 기억해도 시간이란 저장창고는 자꾸만 망각의 공간을 넓힌다.수필집을 출판하며 지인들에게 보냈더니 잘 받았다는 인사가 되돌아 왔다. 몇 해가 지나 우연히 만나자 어르신들은 “아이쿠, 배시인!”이라고 인사를 건넨다. 나는 멋쩍게 ‘수필가입니다’ 라고 한두 번 정정해 드리지만, 다음에 만나면 또 시인이라 불렀다. 일 년에 한 번 뵐까 말까 싶으니 그것 또한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싶어 웃고 만다.내심 나는 수필가로 불리기를 원하지만 나를 자세히 모르는 이들은 나를 시인으로 불러준다. 그런데 수필가면 어떠하고 시인이면 어떠랴. 산수유도 생강나무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피어 있는 것은 아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많은 이들에게 자연의 혜택을 선사하듯 나 또한 그리하면 될 것이다.수필가(隨筆家)가 생강나무 꽃 같다. 시인이나 산수유로 대치되어 버리는 상황이 조금은 아쉽다. ‘아쉬워 마라. 나는 평생 산수유로 불렸다’며 생강나무를 못 알아보는 나를 나무라는 듯해서 봄의 말을 노랗게 새겨듣는다.

2022-03-23

사랑 후에 오는 것들

정미영수필가 기억의 정원에서 그리운 추억들을 불러내 이름표를 붙여 주고 싶었다. 희미해져 가던 실루엣이 뚜렷한 흔적으로 남았다. 때로는 바람결에 실려 다니는 말들을 내 마음에 빼곡하게 걸어 놓고 날마다 행간을 놓칠세라 열심히 읽었다. 아담한 수필이란 집을 짓기 위해서다.몇 년 전,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공연장에서 신명나는 사물놀이를 구경했다. 김덕수 명인이 태평소를 불며 등장하자 관객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복을 몰고 가는 길놀이로 시작된 공연은, 사물놀이패의 꽹과리, 징, 장고, 북의 화려한 연주와 조화로움으로 어깨춤을 유발하더니 농악을 기본으로 사물굿판이 펼쳐졌다. 상모꾼의 상모돌리기에서 절정을 이룰 때에는 흥겨운 장단에 내 어깨도 다른 관객들과 어우렁더우렁 들썩이고, 덩달아 손도 박자를 맞추기에 바빴다.공연이 끝난 뒤였다. 전율이 찌르르 온 몸을 에둘러 나가도 가슴에는 한 줄기 짙은 감동이 여운으로 자리 잡았다. 공연 시간은 짧았지만 구경꾼들의 영혼을 맑게 해 주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내 마음에도 수필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와 누군가의 가슴을 두드릴 수 있다면. 누군가의 가슴에 스며들어 희망을 주고 기쁨을 준다면 좋으련만.나는 수필을 사랑한다. 울림을 주는 글을 쓰기 위해 매일 언어의 바다를 헤엄치며 살고 있다. 좋은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는 소재가 중요하다. 글감이라는 보물을 찾으려고 나는 항상 두리번거린다. 학창 시절에 소풍의 재미는 보물찾기에 있었다. 나무 밑이나 화단 근처, 돌무더기를 뒤지며 찾던 종잇조각. 학생이었을 때 내 눈빛이 그 순간만큼 반짝거릴 때가 있었던가. 글감 찾기는 내 생활 속에서의 보물찾기다. 빛나는 글감이 떠오르면 며칠을 머릿속에서 반죽하고 숙성시킨다.자아 성찰의 시기를 거친 내 글쓰기는 주로 밤늦은 시각에 이루어진다. 모두가 잠든 뒤에 수필을 쓰려고 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마음이 추웠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듬지를 비추는 달빛 한 점이 있어 차가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었다. 고요히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한 마리 새처럼 조용히 의자에 파묻혀 한 줄씩 적어 내려갔다. 깊은 밤을 지새울 만했다.가끔 언어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싶을 때도 있다. 주옥 같이 펼쳐지는 언어의 황홀경에 흠뻑 취해 있다가도, 쓰는 작업이 힘에 겨워지면 수필에서 달아나고자 버둥거린다. 하지만 새벽바람의 기척으로 해가 강물 속에 풀어지는 모습을 보면 또 다시 삶의 아포리즘을 받아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햇귀와 타전을 시작하고는, 윤슬을 머금은 수필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수필을 사랑한 후에 오는 것들을 기대하며.내 사랑의 결실은 책이 출판되는 것이다. 드디어 며칠 전 2022 Prose Quartet ‘작은 것들’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작가가 StoryLab 숨비에서 기획하고 주최하는 산문 축제에 초대를 받아, 앤솔로지를 출판하고 3월 한 달간 전시회 및 낭독회를 진행한다. 작가들이 보내는 울림과 공감의 파장을 독자들이 폭넓게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꽃샘바람이 불어와도 아파트 화단의 홍매화 꽃눈은 얼지 않았다. 봄꽃이 피어나기를 오매불망 지켜보는 나의 시선 때문인지 앙증맞게 피어났다. 이른 봄, 산책을 나가면 붉게 물들기 시작한 매화 나뭇가지가 나를 향해 봄 내음을 물씬 풍기며 반갑게 손짓한다. 마음 가득 봄빛으로 물들이면 무채색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세상이 훨씬 곱게 보일 거라며, 나보다 인생을 오래 살아온 나무가 나를 위해 덕담 한 마디 따스하게 건네주는 오후다.헤아릴 수 없는 깊은 음률로 내 방 창문을 환한 햇살이 두드리고 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내 가슴 안에 담겨 있던, 기록되지 않은 단어와 추억을 소환하여 수필이란 이름의 옷을 입혀 준다. 수필을 사랑한 후에 오는, 또 다른 것들을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분주할 것이다.

2022-03-16

골목에 갇힌 고래들

양태순수필가 마을은 공동체의 공간이다. 사람들이 모여 유기체적 조직을 이루고 삶을 공유 또는 정서적 유대를 이루어 나가는 곳이다.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인 공급을 위해 노력하고 손을 번성시킨다. 그리고 골목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정으로 맺어준다. 각각의 역할이 어우러지면 마을은 살아서 움직인다.날이 좋아 나선 길이 신화마을에 닿았다. 마을은 고요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할머니 세 분을 보았다. 여기저기 고개를 디밀었다. 분홍담 너머로 들여다본 집은 벽이 무너지고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했다. 그런 집이 여럿이었다. 낮은 처마여서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여 멀리서 서성이다 돌아선 집들은 곰팡이꽃이 자라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도 뒤죽박죽 쌓아둔 물건과 다 닳은 신발, 소쿠리가 보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고래 그림 앞에서 멈췄다. 수영하는 아이가 헤엄치는 고래의 턱을 만지자 고래는 할아버지 같은 웃음으로 반긴다. 금을 넘어 파란 물이 밀려왔다. 내 주위에는 마을에서 본 갖가지 고래들이 꼬리를 휘저으며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다. 마음이 포실해지려는 찰나였다. 게시판에 펄럭이던 월세 이십 만 원, 방 하나 부엌 하나 벽보가 잉잉 울었다. 문득 이 마을에는 벽화 속에 갇힌 고래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연약한 고래들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신화마을에는 한때 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였다. 공단에는 일손이 필요했고 돈벌이가 필요한 사람이 몰려들었다. 한 지붕 세 가족으로도 집이 모자랐다. 공단에 출근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으므로 월급날은 온 마을이 흥으로 들썩였고 밤낮없이 발소리, 싸움소리, 웃음소리가 골목골목을 누볐다. 수돗가에서 엉덩이 부딪치며 투덕거려도 미운 정 고운 정을 나누는 사람냄새가 있는 마을이었다.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도시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번듯한 주택이 늘어났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더 나은 곳으로 이사 가기를 꿈꾸었고 그 꿈을 차근차근 이루어갔다. 자전거를 이용하여 출퇴근하던 사람들이 자동차에 흠뻑 빠졌다. 그동안 정들었던 마을을 떠나기 싫어 뭉그적대던 사람들도 자식 교육을 앞세워 슬금슬금 보따리를 샀다. 그렇게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생활 전선에서 물러난 퇴역일꾼들 뿐이다.신화마을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자란 고향마을도 그랬다. 새마을운동의 잘 살아 보자는 구호를 믿고 집집이 아들과 딸을 도시로 떠나보냈다. 처음에는 생활비에 보태라고 꼬박꼬박 보내주던 돈은 객지에 가정을 이루자 끊어졌다. 때마다 찾아오던 고향 나들이 횟수가 줄어들더니 번거롭다며 이사를 재촉했다. 싫다고 보채던 가족들은 편의를 따라 도시를 택했다. 골목이 조용해지고 빈집이 늘었다. 지금은 허리 굽은 어른들만 오종종 모여 옛이야기에 열을 올린다.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프리즘에 갇힌 동네가 되었다. 삶의 공간은 생물처럼 움직인다는 것을 망각한 탓이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개발의 바람과 최신 문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랬더라면 들어온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며 다양한 각도로 투영되어 새빛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우리의 각성이 한 박자 늦어서 안타깝다.마을이든 사람이든 변화하는 물결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지나온 시간에 얽매여 편한 상태에 천착하면 발전은커녕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게 된다. 하나 둘 떠나간 마을의 쓸쓸한 마을지기가 될 것이고, 새로운 물결에 탑승한 떠들썩한 이들 옆에서 곁가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다 그물에 걸린 고래가 바다를 그리워하듯 프리즘에 갇힌 채 바깥을 기웃거린다.신화마을에는 고래가 많다. 벽화에 담긴 고래, 하늘을 나는 고래, 오래된 골목을 휘휘 돌아다니는 고래들이다. 그 고래를 보러 오는 관광객을 향한 지느러미는 안간힘이다. 더 넓은 세상과 더 푸른 세상을 향한 몸짓은 물꼬를 틔워 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듯하다.하늘은 시리도록 파랗고 구름은 바람의 장난질에 가벼운 춤사위다. 고래벽화를 보고 있는 동안 마을 골목에 갇혀 있는 고래들을 풀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망치로 벽을 부수면 고래는 지느러미 펄럭이며 바다로 가겠지. 바다로 가는 여정은 설렘이 반짝이는 시간이다. 내 가슴이 쿵쾅댄다.

2022-03-09

개화(開花) 즈음

배문경수필가 툭, 겨울을 뚫고 매화가 가지에 꽃잎을 열었다. 제주도부터 꽃소식을 들고 달려오는 봄바람의 발걸음 소리가 분분하다. 꽃소식에 점심시간에 황성공원을 걷다가 칼바람에 겉옷을 목까지 당겨 잰걸음으로 돌아왔다. 겨울 끝이라고 방심한 탓이다. 입춘이라고 봄에 들어서려다 문지방에서 넘어질 뻔했다. 겨울은 조금 더 기다리라고 아직 방을 뺄 생각이 없다.나는 매화를 좋아한다. 유유상종이라고 얼마 전 매화만 그리는 친구의 전시회에 갔었다. 매화 가지가 작은 종지에 꽃물이라도 떨어뜨릴 듯이 어사화처럼 둥글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바탕색이 파랑일 때와 붉을 때 매화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림을 그린 친구도 한복을 곱게 여밀 때와 원피스로 정장을 차려입었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달라 화들짝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파란 바탕의 매화를 보니 고흐의 ‘아몬드 꽃이 피는 나무’가 오버랩 된다. 일본 에도시대 서민층 사이에 유행하던 목판화 우키요에가 도자기를 감싸고 바다를 건너 고흐에게까지 당도했다. 새로운 화풍에 놀란 화가들이 앞 다투어 흉내를 내기 시작했고, 고흐는 자신의 그림 곳곳에 일본을 담았다. 고흐의 ‘꽃피는 매화나무’는 히로시게의 ‘가메이도 매화정원’을 유화로 모사한 작품으로 용이 누워 있는 것과 같은 판화인데 고흐가 유화로 모사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일본 땅에서 피어난 매화가 바다 건너 저 멀리에서 다시 피어난 것 같다.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김홍도는 매화를 무척 사랑했다. 하루는 매화나무를 팔 사람이 왔지만, 김홍도는 살 형편이 아니었다. 때마침 그림의뢰를 하는 사람이 사례비로 3천냥을 주자, 김홍도는 2천냥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800냥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며 함께 술을 마셨다.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했다. 남은 200냥으로 겨우 쌀과 나무를 들였다고 하니 단원의 고결한 성품과 의연함을 느낀다.매화만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꽃이 있을까. 매화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일찍 피는 ‘조매(早梅)’, 추운 날씨에 핀다고 ‘동매(冬梅)’, 눈 속에 핀다고 ‘설중매(雪中梅)’라 한다. 중국 양쯔강 이남 지역에서는 매화를 음력 2월에 볼 수 있기에 매화를 볼 수 있는 음력 2월을 ‘매견월(梅見月)’이라 부른다. 가족들과 즐겨 치는 화투의 두 번째가 2월 매화인 것이 우연은 아닌 듯하다.대학 다닐 때 차편이 불편했던 나는 정원에 매화가 구름처럼 피어나던 친구 집에서 얹혀살다시피 했다. 아침이면 한 상 차린 밥상에 허겁지겁 내가 밥숟가락을 옮기면 친구는 늘 서너 숟가락 뜨고는 가자고 재촉했다. 어머니는 늘 좀 더 먹으라며 친구에게 애원하다시피 했지만 깨작거리곤 했다. “야야, 더 먹어라, 이렇게 잘 먹으니 얼마나 좋아”라며 잘 먹는 나의 식성을 칭찬하셨다. 열여덟의 허기지던 나는 어느새 쉰 고개를 넘은 지 오래다. 그 사이 친구 어머니는 치매로 인해 자녀들의 보살핌을 받는 형편이다.어떤 이는 치매의 한자를 어리석다는 뜻의 ‘치매(癡呆)’가 아닌 ‘치매(致梅·매화에 이르는 길)’라고 한다. 치매(致梅)는 무념무상의 세계에 이른다는 뜻으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라고 낭만적으로 표현한다. “누구세요”라는 어머니의 말이 엄마 손 잡고 놀러 나갔다가 길을 잃은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 같다. 울컥 눈물이 나다가도 자신의 병을 안다면 더 고통스러울 터인데,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는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에 치매를 감당해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이야말로 절망적이다. 다만 치매(癡呆)일지라도 치매(致梅)로 가는 길이라고 서로의 등을 어루만지며 한겨울을 이겨내고 있다. 저 어머니 머리에 환하게 피어나는 매화야말로 자식들의 세상을 밝히고자하는 매화등은 아닐까.봄으로 들어선다는 입춘과 동면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 사이에 있는 우수(雨水)를 지나도 겨울은 물러날 기색도 없이 영하의 날씨를 고집한다. 하지만 제주도를 출발한 꽃소식이 통도사 홍매화를 피워 올렸다. 이제 갓 어린아이 새끼손톱만 한 발긋한 꽃망울이 가지를 뚫고 올라온 것이 보인다. 추위 속에서도 매화가 꽃문을 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대견하다. 그래도 봄은 곧 올 터이니 나는 매화 향에 그윽이 잠겨 볼 참이다.

2022-03-02

악착과 애착

백후자수필가 같은 길인데 다른 길 같다. 몇 년 전 여름에 찾았을 때랑 사뭇 달라 보인다. 계절이 다르니 그럴 만도 하겠지. 그때는 지나쳤던 저수지 앞에 멈춰 선다. 파리한 물결이 매섭게 맞이한다. 물결 안은 바람이 주머니 속까지 들어와 헤집고 설친다. 오늘은 무언가가 마음을 헤집을 듯하다.영지사는 신라 태종 무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웅정암이었다.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선조 36년에 다시 중창하면서 영지사로 개명했다. 영조 50년에 중수가 이루어졌고, 1992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대웅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20호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 건물이다.고찰인데도 불구하고 대웅전 단청의 빛깔이 바래지 않고 화려하다. 해체 복원 작업을 하면서 새로 색을 입힌 흔적이 역력하다. 고찰에 들어서면 오래된 빛깔이 주는 느낌이 참 좋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모아지면서 차분해진다. 고색창연한 느낌을 잃어버린 것 같아 많이 아쉽다.영지사 대웅전에는 다른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천장 들보의 반야용선대에 악착같이 매달린 악착동자다. 청룡과 황룡이 이끄는 용선대에 열 한 개의 종이 나란히 줄지어 있고, 그 중간쯤에 악착동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반긴다.악착은 ‘작은 이 악(齷)’과 ‘이 마주 붙을 착(齪)’이 합쳐진 말이다. 어떤 일에 기를 쓰고 덤벼들거나 끈기 있고 모질게 달려들어 해낸다는 뜻으로 널리 쓰인다.악착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부처님 경전에는 전해지는 바가 없지만 명나라 운서 주굉 스님이 편찬한 ‘왕생집’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명나라 경도에 유통지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평생 염불에 온 정성을 쏟았다. 쉰 두 살의 나이에 병을 얻어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더욱 간절히 염불하였다. 그때 이웃에 살던 이백제라는 사람이 먼저 죽고 유통지도 죽었다. 그런데 아침에 숨이 멎었던 유통지가 정오 무렵에 다시 소생하여 가족들에게 말하였다.“정토로 가는 배를 탔소. 그 배에는 나를 포함하여 서른여섯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소. 이백제도 그 배에 타고 있더군. 그러니 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오.”어안이 벙벙한 가족들을 보며 유통지는 말을 이었다.“너무 서둘러 가다보니 옷이 이 모양이고 염주도 잊었지 뭐요. 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염주도 챙겨야 하니 좀 도와주구려. 배를 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소.”가족들은 서둘러 유통지의 옷을 갈아입히고 목에 염주를 걸어 주었다. 잠시 후 유통지는 배로 돌아갔다.이 이야기를 모태(母胎)로 여러 가지 설(說)이 돌고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악착같이 수행정진하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둔다. 뜻하는 일에 악착같이 매달리면 이루지 못할 바가 없다는 의미다. 줄을 타고 용선에 매달린 악착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비록 외줄에 매달렸지만 평온해 보인다.조용히 눈을 감는다. 악착같이 살았던 때가 있었던가를 더듬는다. 그동안 크게 이루어놓은 건 없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나날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건 인정하련다. 인간의 욕심이라는 게 한이 없고, 그 욕심 안에서는 만족이라는 단어가 꼭꼭 숨겨진 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나를 얻으면 둘을 갖고 싶고 둘을 얻으면 셋을 노리는 게 욕심이다. 이젠 내려놓는 연습도 필요해 보인다.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면 평생 줄에 매달린 듯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자신의 삶을 함부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나름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 하고자 하는 일,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온 힘을 쏟는다. 또한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잡은 줄을 놓지 않는다. 때로는 줄이 끊어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도 있겠지. 그래도 악착같이 일어나 매달리는 것이 삶이다.악착같이 산다는 것,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다.

2022-02-23

소못 소랑햄수다

정미영 수필가 “소못 소랑햄수다.”제주도 동백나무 수목원인 카멜리아힐에서 장식용 족자에 쓰인 문구를 본다. 정말 사랑합니다, 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란다. 나는 곧장 동백나무 꽃말을 떠올려본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역시 필연성 높은 소품이군! 수목원 관리자가 숨겨 놓은 퀴즈문제를 나 혼자 맞힌 것처럼 값싼 자기도취에 빠져 나무 사이를 걷는 내내 뿌듯해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꽃향기를 따라 친구의 애틋했던 첫사랑이 떠올라 내 마음이 어지럽다.친구는 지독한 몸살을 앓았다. 스쳐가는 바람에도 마음이 들뜨는 대학 새내기,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상대는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사랑은 사치라고 했다. 그래도 친구는 멈추지 않고 가슴앓이를 했다. 슬픈 시만 골라 읽고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만 들었다. 떨어지는 꽃잎에도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사랑을 떠올렸다.어느 날, 가느다란 손가락을 잘근 씹으며 선운사 동백꽃을 봐야겠다고 했다. 발끝을 내려다보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더니 무릎을 세우고는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친구의 작은 몸집 어디에 그토록 많은 눈물이 숨어 있었는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 큰 눈물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시나브로 잊히는 듯했다. 동백꽃이 질 때쯤, 친구는 다시 선운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저러다 자그만 몸이 형체도 없이 삭아 내릴 것만 같아 지켜보는 내가 조바심이 났다. 어쩌면 선운사에 가서 동백꽃을 실컷 보고 가슴 가득 채우고 나면 힘든 사랑을 완벽하게 잊어버리지 않을까.우리는 기어이 고창 선운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서 우리 둘은 침묵했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오히려 힘들게 할 것 같아 어색해도 참았다. 그 대신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 송창식의 ‘선운사’ 노래에 몰입했다.‘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가던 길에 갑자기 비가 흩뿌렸다. 내리는 빗소리가 내 마음을 착잡하게 했다. 꽃이 또 떨어지겠구나, 괜스레 안타까웠다. 맑은 날 붉게 벙근 꽃봉오리를 보는 것이 훨씬 좋을 텐데. 노랫말처럼 바람 불어 설운 것보다 비가 와서 더 설운 날이 되면 어쩌나 애가 탔다. 내 마음을 모르는 비바람이 속을 휘휘 젓고 다녔다.다행히 도착할 즈음 비가 그쳤다. 멋스러운 선운산의 풍경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선운사 입구에서 절 뒤쪽 산자락에 빽빽이 들어선 삼천 그루의 동백나무 속에 친구가 부디 아픈 사랑을 묻을 수 있기를 바랐다.친구는 꽃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토록 간절히 원해 찾아왔지만 막상 보려니 두렵단다. 한 자락 남아 있던 그리움이 낱낱이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까 무섭다고 했다. 친구의 몸 속 깊은 곳에 고여 있던 그리움이 흔들리고 있었다.나뭇가지에서 막 떨어지는 꽃송이가 있었다. 꽃의 추락이었다.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지 않고, 꽃봉오리째 툭 떨어져서 슬프게 느껴졌다. 내 눈에는 꽃이 질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가장 화려할 때 떨어지는 것 같아 더욱 애절해 보였다.친구의 사랑도 왠지 동백꽃을 닮은 듯했다. 피었다가 떨어지는 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간 첫사랑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 빛나게 푸르러야 할 사랑이 금세 이울고 있었다.동백꽃 화가로 유명한 강종열 화백의 그림 속을 노닐 듯 까멜리아힐을 걷다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에 고개를 든다. 꽃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문득 생각해 본다. 꽃이 져야 열매를 맺듯, 기쁜 사랑이나 아픈 사랑을 경험한 후에 내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라는 것을. 그러니 친구든, 가족이든,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아야겠다. 소.못.소.랑.햄.수.다.

2022-02-16

마음 계산법

양태순수필가 울진 매화리에 갔다. 만화 원작을 그린 벽화가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골목길을 걷다 보니 추억이 돋는 그림이 많다. 만화가 이현세가 직접 그렸다는 벽화 앞에서 천천히 읽으며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 만화를 고등학생 때 읽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만 기억날 뿐 세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읽으면서 엄지는 왜 오혜성보다 마동탁을 더 좋아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나를 위해 야구 경기에서 져달라는 엄지의 부탁 앞에서 기가 막혔다. 혜성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짐작되어 가슴이 쩌정 울렸다. 그때도 지금도 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가정은 만약을 포함한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라면, 만약에 그렇다면을 생활에서 사용할 때가 있다. 이런 말은 대개 어떤 대처 방법을 묻는 뒷말이 따라붙는다. 듣는 상대방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게 된다.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가사로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영화가 있었다.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영화 개봉과 동시에 주제가는 온통 거리를 점령했다. 커피숍과 백화점을 비롯하여 젊은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었다. 데이트하는 연인 사이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면, 기뻐하는 일이면 다 해줄 거야? 이런 질문으로 연인을 시험에 들게 하여 답이 마음에 안 들어 다투기도 했다. 친구는 이 노래를 좋아했고 우리는 손잡고 다니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내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만화였다.나는 학생 때 만화가게에 자주 갔다. 안타나 홈런처럼 깔끔한 직설화법에 매력을 느꼈다. 시리즈로 빌리면 다섯 권에서 열 권이 넘는 것도 있었다. 용돈 대부분을 거기서 썼다. 밤새 읽느라 눈동자가 뻑뻑했다. 주제는 주로 축구, 야구, 복싱 등 스포츠 경기에서 갖은 고난을 이겨내고 선수로서 성공하는 스토리였다. 결론은 뻔했지만 만화책을 놓을 수 없었다. 소설처럼 문장이 화려하거나 사건을 베베 꼬지 않는 단순 명쾌함이 좋았다.나는 지금도 해피앤딩을 좋아한다. 드라마에서 고생 끝에 성공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살게 되었다는 결말에 웃음이 난다. 속 시원한 답을 주지 않고 시청자의 상상에 맡기는 열린 결말을 만나면 짜증이 난다. 현실이 갑갑한데 드라마라도 행복하면 엔도르핀 충전으로 다운되었던 기분이 업되고 피곤한 뇌도 쉴 수 있으면 일석이조라고 생각한다.매화리에서 나에게 물어본다. 상대방을 위해 뭐든지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외인구단 오혜성은 시합에 져주기 위해 일부러 야구공에 눈을 맞기도 했다. 내 몸을 다치거나 꿈을 버리면서까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내것을 아무것도 잃지 않는 선에서 타협할 확률이 높다. 아마 신체나 정신 둘다를 포기하지 않는 가정하에서 최선이란 이름을 붙일 것이다.나는 아직도 둘을 주고 하나를 얻는데 익숙하지 않다. 반값에 물건 사는 것은 좋아하지만 마음 계산법은 다르다. 목도리를 선물하면 장갑을 받고 싶고 밥을 샀으면 커피는 얻어먹고 싶다. 늘 받기만 하는 것은 미안해서 거리가 멀어지고 늘 주기만 하는 것은 쪼잔해서 불만이 쌓일 것 같다. 서로 간의 마음이 오고가야지 일방통행은 찜찜하고 눈치가 보여서 싫다. 마음을 쌓는데는 똑 부러지는 계산 말고 넉넉한 어림이 좋지 싶다.요즘은 언택트 시대다. 마주 앉아 밥 한번 먹기도 어렵다. 이 시기만 지나면 얼굴 보자는 인사를 한 지 2년이다. 그 사이 연락처에 오른 인물들 대부분과 마음의 거리가 늘어났다. 가족과 친구 몇 명만이 전화와 잠깐의 만남을 이어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주파수 반경을 벗어났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과 나누는 정을 대신하는 것은 없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연결선 선로를 보수해야겠다.곧 봄이 오고 매화가 필 것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홀로 고군분투하여 만개한 매화는 늘 반갑고 어여쁘다. 힘들여 꽃을 피워 대가 없이 향기를 멀리까지 나누어 준다. 참 대견하다. 이번 봄에는 마음 계산법을 내려놓고 줘도 줘도 더 주고 싶은 일방통행 사랑법을 실천하리라. 두루 봄소식을 전하는 전화기에서 단내가 나고 웃음이 넘쳤으면 한다. 매화나무가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2022-02-02

봉황이 단청하다

백후자수필가 골짜기를 돌아든다. 산이 산을 겹쳐 안았다. 활엽수가 침엽수를 안고 침엽수가 등성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안았다. 안고 안긴 풍경을 안고 안동 봉황사로 들어선다. 봉과 황이 조화를 이룬 봉황이 살고 있으려나. 용마루 위로 한 쌍의 봉황이 날아오를 것만 같다. 봉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13년에 창건되었다. 누가 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관음전, 만월대, 범종각, 만세루, 천왕문 등 여러 전각과 딸린 암자까지 갖춘 규모가 꽤 큰 사찰이었다. 하지만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 극락전, 남덕루, 요사채, 산신각이 있다. 봉황사는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 17세기 말경엔 대웅전만 다시 중건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당당한 격식을 간직한 조선 후기의 불전으로 보물 제2068호로 지정되었다. 천장의 우물반자에 그려진 오래된 단청과 빗반자의 봉황 그림이 고찰의 품위를 더해준다. 대개 사찰의 대웅전 법당 안에는 용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봉황사는 봉황 그림만 보인다. 구석구석을 살펴도 온통 봉황이다. 여러 사찰을 다녀 보았지만 봉황만 그려진 사찰은 처음이다. 봉황사에는 대웅전 단청에 유래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사찰을 창건할 당시였다. 단청을 할 화공이 왔다. 외모가 수려하고 품격이 남달라보였다. 그는 주지스님을 찾아 고아(高雅)한 모습으로 고개 숙여 청했다.“스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무엇인지 말씀해 보십시오.”“대웅전 단청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해주십시오.”“어찌 그러시는지요?”“신성한 기운이 빠져나갈까 염려하는 마음입니다.”주지스님은 화공의 청을 받아들여 그곳에 기거하는 모든 스님과 보살에게 당부했다.“대웅전 단청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들여다봐서는 안 됩니다. 혹여나 산사를 찾는 이가 있을 경우에도 꼭 그리하여야 합니다.”주지스님의 당부가 있었지만 스님들은 그곳을 지날 때면 궁금증을 누를 수 없었다. 문살에 바싹 귀를 들이대고 안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다. 안에선 고요를 감싸 안은 붓질 소리만 공기를 타고 흘렀다. 붓질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하마터면 문을 열뻔한 일도 종종 생겼다. 어느 날엔 문틈을 비집고 보려다가 주지스님께 불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자그마한 호기심이 큰 화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호기심을 다스리는 것 또한 수양입니다. 그것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어찌 도량을 닦는다 할 수 있겠소.”이후 스님들은 마음을 닦으며 야릇한 호기심을 눌렀다.며칠에 걸쳐 단청을 그리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화공을 못 보았다. 희한한 일이었다. 공양간에서 일하는 보살이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중얼댔다.“화공은 밥도 먹지 않고 일을 하나.”공양간 보살은 괜한 선심이 발동했다. 주섬주섬 먹을 것을 챙겨 대웅전으로 향했다. 주지스님의 당부 말씀은 새까맣게 잊고 보살은 대웅전 문을 빼꼼히 열었다.“화공님….” 어찌된 일인가. 열심히 단청을 칠하던 화공이 봉황이 되어 훨훨 날아가 버렸다. 법당 앞쪽은 단청을 다 그렸지만 뒤쪽은 아직 미완이었다.인간의 심리가 얄궂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다. 전해 온 이야기 가운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인간의 얄궂은 호기심으로 인해 대부분 일을 그르치고 만다. 단청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아서 잘 마무리 되었다면 어떤 이야기가 전해왔을지 궁금하다. 화공은 봉황이었을까. 단청을 끝냈다면 봉황이었던 화공이 사람이 되었을까. 전설 속으로 들어가 알아보고 싶다.봉황사 경내를 둘러보는데 보살님이 부른다. 점심공양하고 가라고 몇 번을 이른다. 때마침 출출한 차에 공양간으로 들어가 맛있게 비빈 비빔밥 한 그릇 비웠다. 주지스님이 상을 물리며 그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오는데 봉지 하나를 쥐어준다. 몇 쪽의 떡이 들어있다. ‘아, 이것이 봉황사의 인심이었구나.’오래전 단청 화공을 부른 공양간 보살님의 마음이 보인다.

2022-01-26

흔들리지 않아야 되는 것들

정미영 수필가 아르떼뮤지엄에서 거장들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만났다. 명화를 담은 빛의 정원에서는 르네상스부터 상징주의까지 서양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 모네, 피카소, 클림트 등의 작품들이 벽면 가득 펼쳐질 때마다 내 몸의 세포 인자들은 감동으로 소용돌이쳤다.설렘의 순간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사진을 찍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그림이 천장까지 펼쳐질 때에는 사이프러스나무 옆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다. 여행의 흔적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았다.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보았다. 고흐의 그림들을 살펴보는데 문득 전시관에서 만나지 못했던 화가의 다른 작품이 떠올랐다. ‘감자 먹는 사람들’이 연상되면서, 자연스레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썼던 편지도 생각났다. 고흐는 동생의 생일에 맞추어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내고 싶었지만, 마무리 짓지 못했다는 말을 서두로 자신의 예술관을 적었다.“나 또한 물질적 어려움에 주춤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에 무너져 파묻혀 있을 수는 없을 거야.”나는 이 문장에서 목울대가 울컥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고흐는 살면서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직면했을 텐데도, 가난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고흐는 위대했다.산다는 것은 어쩌면 평생 흔들리며 사는 것임에랴. 깃발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면 깃발이라 할 수 없고, 나무도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움켜잡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린다고 했다. 우리네 삶도 무수히 환경에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고 살아간다. 그러니 인생을 ‘나답게’ 살기 위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한두 개쯤 가지고 있어도 좋을 성싶다. 고흐의 예술적 신념이나 학생들의 공부 루틴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들로 개인의 내면은 단단하게 여물고 성장하리라.학생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도서관이 있다. 도서관은 초등학생들의 방학이 시작되면 특강 준비로 분주해진다. 우리 아이들이 방학동안 보람되게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강의를 기획하는 것이다. 특강은 차시별로 관련 책을 읽고 주제와 연계한 다양한 글쓰기 독후활동 및 북아트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프로그램은 어린이들의 창의력을 키워주고 다양한 영역으로 사고력을 확장시켜 준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다.그런 의미로 도서관 운영 원칙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2020년 여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시행된 사회적 거리두기 등의 방역 조치로 대면 수업으로 진행되던 강좌들이 열리지 못할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도서관 관계자들은 집에서도 안전하고 즐거운 독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비대면 강의를 제공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강의를 해오던 내 삶의 조각들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온라인 쌍방향 수업을 할 때였다. 학생들은 어색함도 없이 눈빛을 반짝이며 수업에 집중했다. 그 때 나는 심훈 소설 ‘상록수’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일제의 압박으로 학생 인원을 줄여야 했던 영신의 안타까움과 배우고 싶어도 쫓겨나야 했던 학생들의 서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장면이었다. ‘누구든지 학교에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 나무에 오르고 담에 매달려서도 배우고자 했던 아이들의 얼굴과 코로나19로 외출이 힘들지만 비대면 도서관 수업에 열의를 다하는 학생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고마웠다. 지금도 그 때 학생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주인공 영신처럼 콧마루가 시큰해진다.2022년 1월, 올해도 도서관의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이들이 인문학에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매개체가 되고 싶다는 내 꿈도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었다. 독서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이 책을 통해 다양한 간접 경험을 쌓으며 세상과 소통했으면 좋겠다. 그 따뜻한 여정 속에서 학생들이 흔들리지 않고 꿈과 희망을 노래하기를 나는 소망해 본다.

2022-01-19

무인상을 떠올리며

오전 내내 시끄러웠다. 아래층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망치를 치고 두드리는 뭇소리까지 들려왔다. 공사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현장을 보러 갔다. 유리 슬라이딩 문 안에서는 벽면의 타일을 깨고 이젠 쓸모없어진 장식물을 부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닥엔 자재가 뒹굴고 꽉 닫힌 공간으로는 먼지가 빠져나가지 못해 뿌옇게 고여 있었다.안쪽을 들여다보자 나이든 늙수그레한 인부 한 사람과 러시아계의 노동자 두 사람이 제대로 마스크도 하지 않고 등산용 스카프로 대충 입을 가린 채 먼지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입구에 작업을 지시하는 사장님을 잠시 불러내서 “마스크라도 좀 드릴까요?”라고 의견을 제시하자 “저들도 숨쉬기 힘든데 일이 빨리 진척이 없어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가변 벽 너머 창문이 있으니 일부를 부수면 먼지가 빠져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옆방으로 가서 밖으로 난 창문을 힘껏 열어 젖혀두었다.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에 다시 가서 보니 먼지는 좀 가라앉고 가변 벽이 부서져 뼈대만 남은 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부서진 벽의 잔해 등을 실어 나르고 식사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카페가 있던 자리도 이용의 목적이 달라지니 남김없이 벽면과 장식이 부서지고 사라진 상태였다.올여름 시 낭송을 야외에서 한다며 간 원성왕의 무덤인 괘릉이 생각난다. 작은 연못이 있던 자리를 돌로 메워 그 위에 묘를 만들었는데 물이 자꾸 배여 나와 왕의 시신을 땅에 놓아둘 수 없어 허공에 매달아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부른다는 설화이다. 그 능 앞의 무인상과 문인상은 정교한 조각이 훌륭해 여러 예술작품에도 제법 인용이 되곤 한다.그 무인상의 부리부리한 눈매와 곱슬한 머리를 보아 신라와 활발하게 무역을 하던 때 흘러들어온 페르시아 사람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한다. 손에 든 긴 칼을 보면 신라왕의 호위무사를 하겠노라 달려온 용병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인상의 뒷모습을 보니 주머니를 차고 있다. 이국땅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노라 고향을 떠나온 상인이었을까를 상상해본다. 그들이 아마도 안강읍에 위치하는 흥덕왕릉의 호위무사로도 간 모양이다. 신라인에 비해 덩치가 크고 단호하면서 부리부리한 눈매가 신뢰를 주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그들이 보디가드를 했다면 왕도 훨씬 편하게 눈을 감고 이승을 떠나지 않았을까. 저승에 간 후까지 왕을 호위하는 무사로 곁에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그러고 보니 1960년대에 서독으로 갔던 많은 이들이 떠오른다. 광부와 간호조무사들이 그 험한 곳에서 살아남아 당시 대통령을 만나 눈물 흘리던 모습은 늘 마음의 한구석을 무겁게 만든다. 시체를 알코올로 닦거나 병원에서 모두가 외면하던 가장 더럽고 힘든 일을 해야 했던 이들과 컴컴한 탄광 속에서 이빨만 하얗게 드러내고 웃던 이들. 탄광의 저주인 진폐증에서 그들도 자유롭지 못했다. 배문경수필가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사람들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영하의 날씨에도 새벽 노동은 이루어지고 한여름 폭염에도 공사는 진행될지니, 우리의 삶이 영속적이듯이 노동의 하루도 그렇게 이어진다. 새벽 어두컴컴한 도로의 길섶에 버스가 선다. 그곳에서 벗어난 외국인노동자들이 어둠과 함께 걷는다. 그들만의 언어로 피곤한 밤을 견딘 동료들과 대화가 깊다. 이제 따뜻한 잠자리에서 편안한 아침을 맞길 바라는 마음으로 옆을 스친다.카페가 사라진 자리로 종합 검진실이 자리 잡을 것이다. 새롭고 환한 의료 환경이 제공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바닥은 무엇으로 채워질지 광고 간판은 어떤 걸 사용할지 얼마 후 이전 개업하게 될 새로운 공간이 먼 곳에서 달려온 낯선 사람의 손에 의해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나의 삶도 두 손이 만들어낸 하나의 생(生)이란 건축물이다. 한 사람의 건축물이 매일 새롭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인간의 역사가 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위해 잠시 무인상을 닮은 노동자들의 안녕을 마음으로 빌어본다.

2022-01-12

달빛조각 춤사위

양태순수필가 겨울 밤하늘은 시푸르다. 파랑물을 잔뜩 머금은 무명처럼 시린 차가움으로 깊이를 더한다.툭 건드리면 물방울이 아니라 은가루가 좌르르 쏟아질 것만 같다. 피터 팬의 손을 잡고 하늘을 날아가는 웬디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자꾸 하늘을 더듬는다. 그럴 때면 내 머리에 숨어있던 기억들이 말랑말랑 파랗게 살아난다.달이 나를 따라다닌 적이 있다. 친구 선이집을 찾아가는 길이나 배꼽마당에 숨바꼭질 할 때, 뒷간에 볼일 보러 갈 때면 나를 따라왔다. 떡하니 나서서 내가 너를 지켜준다는 자랑이 아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은근하게 동무해준다. 든든하게 지켜주니 밤마실이 무섭지 않아 자주 친구집을 찾고는 하였다.섣달 보름날 달빛의 촉감은 벨벳 같았다. 절기상 엄청 추울 때인데 구름의 두께가 두꺼워진 푸근함이 있었다. 둥두렷이 떠오른 달의 주위에 오리온자리, 황소자리를 비롯한 별자리가 선명했다. 마치 땅으로 내려올 것처럼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공기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그 달빛이 가장 장관을 이룬 곳은 장독대였다. 마당 귀퉁이 장독대에 다다른 달빛은 교교했다. 둘레를 감싼 보송한 빛에 의해 검은 항아리는 은가루가 묻은 듯 은빛이 돌았다. 어머니께서 떠놓은 정화수에 별들이 내려왔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바람조차 살곰 지나다녔다. 그 무엇도 깨뜨릴 수 없는 신성함이 깃든 장소였다.나는 거미줄에 낚일 곤충을 기다리는 거미처럼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너무 신비스러워 숨이 막혔던 풍경은 감동이었다. 그후 고요하다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그밤의 장면이 재생되고 재생된다.그날부터 달은 그저 달이 아니었다. 뭔가 내가 모르는 비밀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아득히 먼 조상들부터 정화수를 떠 놓고 기원하던 의식이 단순히 무속적인 행위만은 아닐 거라고. 과학의 진실과는 별개로 작용했다. 성년이 되어 하늘 보는 날이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 달빛이 창으로 스미는 날이면 두근거리며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밤 이후로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며칠 전 바닷가를 걷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한 곳에서 은빛 군무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 밤바다는 검게 누워서 가는 코골이를 하듯 가릉거리는데 등대 주위에서 날비늘 같은 것이 파닥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물결에 음표를 걸어두고 엷은 날개를 파르르 흔드는 빛무리였다. 넋을 놓고 보았다.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조각조각 나뉘어 희게 반짝이는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하늘에는 분명 달이 있었다.수십 년이 지난 섣달 보름이 다시 소환되었다. 그밤이 고요의 대명사라면 이밤은 바다에 생을 펼친 이들에게 축원을 바라는 신성한 춤사위였다. 욕심을 닦아낸 각자의 원을 조각에 담아 하늘로 올리는 숭고한 기원제 같았다.긴 세월 달은 하늘에 있었다. 믿지 못할 전설이 이어져 왔고 별자리에 얽힌 영웅들의 이야기도 전해 왔다. 그 모두가 이야기로만 끝난다면 우리의 가슴에는 물기가 마르고 심장은 딱딱해지지 않을까.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세계와 과학이 풀지 못하는 상상의 공간이 있으므로 인간은 보다 겸손해지리라 생각해본다.나는 두 번의 신비한 경험을 했다. 이제 달하면 달나라에 가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신성한 무엇으로 기억되는 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무엇을 담아 달을 보는지에 따라 그 형태는 무수히 변할 것이다. 때로는 신령함이나 엄마를 대신할 포근함이 될 것이나 더러는 무시무시한 심판관으로 다가올 것이다.가슴에 새겨본다. 달이 조각으로 나뉘어 쏟아져도 빛의 형태가 변하지 않듯 마음이 조각으로 나뉘어 여럿에게 가더라도 마음은 줄어들지 않고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내게는 아직 감염되지 않은 싱싱한 마음이 있다. 아까워하지 말고 두루두루 나눠줘야겠다.

2022-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