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몽주, 두루두루 넓은 꿈

나는 불후(不朽)를 생각하지 않았다 풀잎 끝 이슬이 곧 햇살에 추락해도 맑고 고운 뜻은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세상의 거친 바람과 빗속에서도 사람의 길을 지키고자 했다 약발 다한 왕조의 귀퉁이에서 버리면 산다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징검다리가 되어 나 하나의 희생으로 명분이라도 생긴다면 참 즐거운 일, 운제산 기상이 훗날까지 이어지고 형산강 물길이 동해에 퍼지듯 사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구나 혹은 그럴 수도 있구나 반추하면서 나, 몽주, 꿈을 두루두루 펼쳐 세상이 아름답기를, 그 누구도 불후를 꿈꿀 수 없다 그래서 불후가 된다. 몽주 어른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정치는 잡놈들이 하는 짓이다. 그런데 몽주를 영천에서도 팔고 용인에서도 판다. 세상살이가 그런 것이니 생각하면, 더욱 아득하다. 두루두루 넓은 꿈을 펼치기에는 세상은 협소한 비탈길이다. 버티고 살아야 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1-08

하선대

포항 동해면 마산리와 입압면의 경계에 하잇돌이라고도 불리는 하선대가 있다. 왜 풍광이 좋은가 살펴보니 아득한 전설이 있다. 하늘의 내려옴 바다와 인간의 조화 그 궁극의 합일, 하선대는 바로 그런 곳이다. 연오랑 세오녀의 바다이기도 한 그곳은 드넓게 사람들의 넉넉한 삶의 배경이 된다. 윤슬이 반짝이는 곳 사람들이 천천히 거니는 곳 의식과 안목이 넓어지는 곳, 하선대에 서면 신화와 역사와 전설이 펄럭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꼴 잘난 포악한 용왕이 개과천선하여 사람의 길을 따라 지극한 마음공부를 통해 지상의 평화를 열고 하늘의 근엄함은 이곳에서는 다정한 풍경이 된다. 하늘과 바다가 결혼을 한 곳, 이곳 하선대에서는 인간의 꽃이 핀다. 시시비비를 알고 수오지심을 알고 측은지심을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하늘과 바다와 어울려 성장한다는 사실에 하선대의 바다는 자못 비장하지만 겸손의 끝에 선다. 열린 마음의 자세로 물길을 다듬고 바람을 길들여 하선대는 존재의 마지막에서 우리 곁에 남는다. 풍악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우리 마음의 소리가 이미 각자의 가슴에 스며들어 있으니, 이 파도 소리가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한발 더 나아가 하늘과 바다가 우리를 궁휼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또 그것이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향하는 착한 연민임을 상기시키는 따스한 호흡임을 하선대는 증명한다. 그리하여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지나 우주를 뚫을 기세로 당당하지만 하선대는 늘 우리 곁에 있다. 누이와 같고 어머니와 같고 아, 아! 아버지와 같다. 평범한 바다라고 할 수도 있다. 전설이 보태지면 의미가 다를 것 같지만 암만 살펴봐도 평범한 바다다. 그런데 물소리가 좋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무책임하지만, 그냥 물소리가 좋다. 묻지 마라, 귀찮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2-25

진전리 구판장

경주에서도 포항에서도 어정쩡한 곳에 잔뿌리 내린 세월 이마 위의 잔설 소모되어 낡았어도 그래도 정갈한 시간이 진열되어 있네 별 아니면 올려다 볼 일 없는 냇물 아니면 내려다 손 내밀 일 없는 라면 끓이듯 간편한 삶 못마땅함이 보글보글 끓는 냄비와 같은 일상 솜을 씹듯 두부 한 점 우물거리면 그래도 달래양념장 향긋함이 콧등을 짚는다 코팅 된 과자봉지처럼 빛나던 시절은 언제였는가 달콤함에 저당 잡혔든, 그렇게 부풀어만 있었던, 기실 편방(偏旁)이거나 부수적(附隨的)이었던, 하산의 의미를 총총 재촉하며 바라보는 저 널려있는 시간과 사건들이여 문득, 처연하게 찬란한 아직 남아 있는 길의 보푸라기 반짝 빛나다가 사라지는 것들의 야무진 허술함 처마에 걸린 명태코다리가 바람, 바다, 산의 울음에 건조되면서 시간을 관통한다, 상처는 스스로 여며야 한다. 진전리는 오천에서 경주 기림사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인데, 거기에 조그만 구판장이 있다. 두부와 도토리묵과 국수를 판다. 듬성듬성 등산객들이 들리는 곳이다. 뼈에 좋은 동동주를 주는데 마음에 더 특효약이다. 자궁과 같다. 느릅나무 아래 앉으면, 저승이 보인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2-18

죽도시장 대성막걸리

부엌에 덧댄 쪽마루라도 임금님의 침상이지 그렇게 잠든 어머님의 주름살에 파르르 떨리는 형광등 불빛이 잔설(殘雪)로 내리면 단골이라는 이름으로 등쳐먹은 세월이 벽마다 가득하다 살며시 냉장고에서 막걸리 한 사발 퍼서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 장아찌 몇 점과 멸치 몇 마리 경계의 벼린 눈빛 스파링 상대처럼 긴장하면서 도열하여 이내 종종걸음으로 입으로 집합할 운명 인생은 싸우는 거야, 상대도 없는 자유로운 술집 주인이 있어도 없어도 시스템 작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계산은 알아서 바가지에 넣을 것 마신 잔은 조용히 한쪽으로 밀어놓을 것 공화국은 이런 것이라고 민주의 기본은 이런 거라고 생기발랄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소굴 대성막걸리 팔순 어머니의 내공은 이렇게 정리된다 씨팔놈들아, 니들 꼴리는 대로 해라 돈도 필요 없다, 니 스스로 쪽팔리지 않으면 된다, 그 쫑알거림의 사자후, 그 그물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잔술로 속을 달래고 공짜 술도 너무 많이 얻어먹었다. 서울에서 고생한다고, 그 한 잔 못 주겠느냐고, 열심히 살아라, 말씀하셨다. 그 세월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 아쉽게도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지금은 사라졌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2-04

오천 장날

상설장이 되었다 해도 오일장은 잊으면 안 돼요 냄새를 확인하고 추억을 상기하고 옛날 떡과 술떡을, 도라지와 냉이를 상업적이지 않게 먹고 살 수 있거든요 라이센스 없는 토박이 장꾼들 습관처럼 출근하는 사람들 구석구석 노인네들 다 모여 콘크리트 담장 아래 쪼그리고 앉아 꼬박꼬박 졸며 봄 햇살 보다 더한 온기를 확인해요 안부 전하면서, 죽지 않으면 보고 또 본다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제철 봄나물 마중 나오신 거 캐고 뽑아 드리워 주신 거 야박한 가격에도 선뜻 내미는 손 핏줄 빳빳한 마른 손 짓이기 듯 비비는 어설픈 악수 오일장의 자기증명, 그 허술하지만 야무진 목숨들 칼국수 다섯 그릇 시켜 일곱 명 나눠 먹고 동해댁 문덕댁 용산댁 우리 잊지 말아요 멀고 먼 시선 아지랑이에 묻히고 인생, 엄지 검지 모아 팽 하니 푸는 콧물 같은 것 해 지기 전에 버스를 타야지 마지막 버스는 너무 늦기도 하고 우리 운명 같아서 지랄 같아 종일 앉아 있어 시큼한 허리 부축하며 이천원 나물 향기 열댓 봉지 헐렁한 봉지에 담아 집으로 가는 오천 오일장 아쉬워 머물고 싶어도 가슴에만 담아둘 마지막 풍경 더 이상 뜨거운 것은 없어도 더 이상 시들 거 없어도 다음 장날 못 나오면 와병 중이거나 죽은 줄 아시게. 해도동에서 태어났지만 오천에서 오래 살았다. 삶의 언어를 거기서 배웠다. 바탕을 형성하는 인성은 고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낮은 것은 언제나 은은하다. 금빛이 아니라 은빛이어서 늘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흰 머리카락이 더 늘어가고 있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0-16

형산강 하구(河口)

들숨과 날숨을 나란히 교차시키는자맥질을 통해수평을 지향하는 강물의 긴 여정을지켜 보았네갈숲과 언덕들이무던히 응원해 주었네고마운 나날들윤슬이라고 했나우리는 반짝이고 빛났다그렇게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을동시에 경험하면서먼 길이 먼 길이 아니었네맑은 종아리 튼튼해지며바다로 가네돌아오지 않을 거야잠시 머뭇거려도 멈춤은 없었지참 기특했어, 장점이었지바람과 구름이 협박하면서도또 힘이 되었지대체로 조화로웠지기술이 아니라 기교였지차선이 최선이었어지금 의미 없어도 그것이 화석이 되면언젠가 발굴이 될까의미 없음이 최고의 효율이야아득한 가능과 희망, 그것이 없다면우리는 이미 강물이 아니야. 오직 나아가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시간에 의해 나아가고 있다. 거기에 얼마만큼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동적 삶이라면 더욱 좋겠다. 성과는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한다. 최선이면 된다. 성공과 능력을 지껄이는 자들은 무시해도 좋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0-09

숙자는 힘이 세다

숙자라는 사람이 있다죽도시장이라는 큰 세상에 산다그는 키가 커서 멀리 보는 게 아니라마음이 높아서 그럴 거다세상의 장터인 죽도시장을 지키는 사람으로그 길목에서 바람을 감지한다태평양에 어제 밤에 오줌을 누었단다새침하게 내륙의 향기를 바다에 풀었단다비린내 나는 사람의 온기가 아니어도꽉 차게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그런 사람이 있다세상이 살만 하다는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이 된다짜고도 씀씀한, 늘 그렇게,그의 생업처럼 사람과의 관계를숙성시키고 버무릴 줄 아는,젓갈이 왜 아름다운 밑반찬인가그렇게 숙자는 사람을 사랑하는힘이 센 사람이다나팔꽃 같고 사르비아 같다그런가 하면 쌍욕으로 무례를 응징할 줄 안다나는 그런 것에서 용기를 얻었다우리 곁에는그런 사람이 꼭 있다그래서 산다실핏줄이 동맥보다 못 하랴.숙자라는 사람은 개인인 동시에 죽도시장 대부분의 상인을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들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편향되지 않고 묵묵하게 인생의 서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오페라보다 화려하다. 그러나 결코 사치스럽지 않다. 검소하면서도 조금도 누추하지 않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08-21

과메기

빨랫줄에 내어 걸린청어며 꽁치는먼 바다의 소리를그 공복에다 차곡차곡 담는다바람에 걷어차이고햇살에 희롱당하고 나면슬슬 부아가 치밀어몸이 굳는다분노도 절망도 짜내어결국엔 건조한 바다가 된다부질없는 저항의 시간을 보내며그렇게 기름기를 온통 빼고도저 반짝거리는 최후의 형해(形骸)는차라리 부활의 깃발이리라과메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우리의 미래가 된다죽음과 주검을 극복하는향기가 된다마르고 뒤틀려도좋은 음식이 되어당신과의 입맞춤약간 비릿하나죽을 때까지의 여운이 되어.홍어가 있듯 과메기도 있다. 개복치는 또 어떤가. 존재를 설정하고 앞과 뒤의 배경을 설명하는 언어로서 과메기는 불세출의 독보적인 명사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최초의, 최후의 물건이자 명징한 상징이다. 포항의 역동성은 이 짜부러진 생선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시작된 듯하다./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