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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국민은 지금 배가 고프다

노병철수필가 국가 정책은 다수의 국민이 이해하고 그 정책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판단하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국가의 폐단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세계화’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우루과이 라운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도 활동하고 선진국이라는 나라만 놀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했다. 하지만 그런 세계화의 노력이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대중 정부의 정책은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햇볕 정책’이다. 다른 말로 하면 ‘퍼주기 정책’이라고도 말한다. 남북정상회담까지 성사하면서 북한에 대한 포용적인 접근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협력을 증진하고자 했으나 북측의 기만에 놀아났다는 질책만 듣게 된다. IMF 때 급한 나머지 좋은 기업 마구잡이로 팔았다는 소리까지 들었었다. 이명박 정부의 개발 우선 정책은 지방 균형발전 같은 것은 뒤로 미루고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경제 정책을 극대화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지방은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았고 4대강 사업으로 경제는 운하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해외 자원 개발한답시고 브로커에게 속아 그네들에게 넘어간 국가 세금이 거의 천문학적 숫자로 밝혀졌다. 국민의 세금은 대통령의 주머닛돈이 절대 아닐 텐데 이해가 가지 않은 일이 너무 많이 벌어졌었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창조경제’는 공무원조차 그 실체를 잘 몰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나중 탄핵받고 그 실체가 최순실에 의한 창조인지 대충 알게 되었다. 당시 대구시는 ‘창조 사과’를 도시 브랜드로 정하고 본격적인 홍보에 나섰다가 망신만 당했다. 그만큼 ‘창조경제’라는 것에 대한 감조차 잡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영국의 경영 전략가 존 호킨스에 의해 정립된 경제용어를 정부 관료들이 제대로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문재인 정권이 미국 유학파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워런 버핏의 경제론을 많이 따라 그동안 유지해 왔던 재벌 부양정책에서 가져다주는 낙수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고 소득주도성장을 주도했다. 하지만 급속한 인건비 상승은 자영업자들의 숨통을 조였고 집값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한 어설픈 정부로 인식되고 말았다. 그럼, 윤석열 정부는 기본 정책 기조를 어디에다 두고 있을지 찾아봐도 무엇하나 제대로 나오는 것이 없다. 초반에는 규제 완화와 민간 주도 성장을 핵심 경제 정책으로 들고나왔다. 이명박 시절 정책을 갖다 쓴 느낌이 들 정도였으나 사회정책에서 그 유명한 ‘공정’이란 말이 등장한다. 나중 명태균 보고서로 정책 회의를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최순실같이 일개 사인에 의한 정책 장난이었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경제 정책은 명확성이 중요하다. 정책이 분명하게 제시되지 못하면 경제 주체들의 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공무원들도 올바른 정책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특히 관치 금융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아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권력욕에 국민경제는 내팽개치고 좌우 논쟁으로 혼란만 야기하는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묻고 싶다.

2025-01-23

‘개소리에 대하여’

노병철수필가 ‘On Bullshit’라는 수필이 있다. 미국 철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가 20년 전에 쓴 책이다. 우리나라에선 ‘개소리에 대하여’로 번역되었다. Bullshit은 헛소리, 허튼소리로 점잖게 번역이 되는데 이 책은 조금 과격하게 ‘개소리’로 번역하고 있다. 이 책에 요지는 거짓말쟁이(liar)와 개소리쟁이(bullshitter)를 구분한다. 거짓말은 진실을 알고 상대를 속이는 것이고 개소리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소리는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조차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말로 ‘아니면 말고’식이다. 종이신문과 몇 안 되는 공중파 방송에 의해 정보를 전달받던 시절에 우리는 참과 거짓을 언론에서 표현한 그대로를 믿었었다. “신문에 났어.”라는 이 한마디로 모든 논쟁은 종결됐다. 따라서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사명감이 있었고 불의에 항거하는 기개가 남달랐다. 그게 기자정신이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결과물을 기사로 내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 타협이란 것이 없었다. 아무리 사장이라고 해도 기자가 쓴 기사를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권력의 감시자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언론이 입법, 사법, 행정의 뒤를 이은 제4의 권력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은 변하고 언론도 변했다. 권력과 타협하기 시작했고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쏟아내고 권력을 향한 용비어천가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우린 언론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잘 예로 드는 것이 나폴레옹 이야기다. 유폐돼 있던 코르시카를 탈출해서 시시각각 파리로 진격해 오는 상황에 따라 그를 지칭하는 단어가 식인귀, 괴물, 폭군에서 나중에는 ‘황제 보나파르트 폐하’라는 극존칭으로 변하는 아부 근성을 말한다. 권력의 입맛에 맞춰주는 속칭 ‘빨아주는 기사’를 생성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런 거짓 기사에 놀아났다. “당신이 신문을 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정보가 없는 사람이다. 당신이 신문을 읽는다면, 당신은 잘못된 정보를 얻는 사람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자 정보는 메이저 언론만 가질 순 없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정보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사건의 사진이 몇 분도 되지 않아 사진으로 전송되어 버리고 주요 메이저언론만 장악하면 국민의 생각도 바꿀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은 군사정권 종식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그 한 예가 이번 계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계엄군의 행동을 안방에서 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사건을 입맛에 맞게 덮으려야 덮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럼에도 왜곡 보도는 여전하며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기사, 선동과 날조,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사용한 기사 등 질이 낮거나 자극적인 기사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린다. 유튜브 같은 매체도 언론 역할을 한답시고 여기저기서 방송을 해댄다. 일부는 돈을 벌기 위해 자극적인 것을, 화면을 만들어 송출한다. 사람들의 관심도를 높여 돈을 벌기 위해 거짓 뉴스가 판을 친다. 이런 잘못된 기사나 방송에 현혹되어 자칫 어설픈 정치 논단까지 일삼게 되고 만다. 정말 주의할 일이다.

2025-01-16

노인과 음식

노병철 수필가 장염과 식중독은 비슷하다. 설사와 복통, 구토와 발열이다. 노로바이러스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건 식중독이 아니라 장염을 말한다고 알면 된다. 식중독은 오염된 음식에 의해 발생하기에 살모넬라, 대장균 같은 독한 녀석들 이름이 나온다. 장염이나 식중독 구분은 병원에 맡겨놓으면 되고 우선 중요한 것은 상한 음식이나 비위생적인 음식을 아깝다고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노인에겐 절대적인 말이다. 젊을 땐 어느 정도의 균을 퇴치할 능력이 몸에 존재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면역력이 줄어 조금만 이상해도 탈이 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식중독균은 끓여도 죽지 않는다. 끓였다고 안심하고 먹다간 큰일 난다. 옛날엔 다 먹었는데 괜찮다고 우기지 말고 제발 젊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하면 된다. “한겨울엔 괜찮다. 옛날엔 다 먹었다.” 이런 말씀을 하던 어머니가 식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만큼 오래된 음식은 먹지 말라고 했건만 노친네 고집이 장난이 아니다. 버리기엔 아깝다고 먹은 음식 때문에 병원비만 수천 배 더 들어갔다. 돈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온 식구들이 병간호하랴 병문안하랴 난리였다. 자식들이 서울서 내려오고 부산서 올라오고. “엄마가 자식들이 보고 싶어 상한 음식을 억지로 먹었나 보다.”라고 동생들이 위안을 주지만 모시고 있는 우리 부부는 좌불안석이다. 어떻게 모셨으면 상한 음식을 엄마에게 드렸냐고 야단을 치는 것 같다. 특히 엄마를 모시고 있는 장남인 나는 집사람에게 더 죄인이 되고 만다. 집에서 엄마와의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제일 큰 문제가 위생 문제이다. 걸레 빨다가 음식 만지고 하는 통에 손녀들이 기겁한다. 청소도 하지 말고 음식도 하지 말라고 애원해도 들은 체 만 체이다. 냄비 태워 먹은 것이 열댓 개가 넘고 집안이 메케한 탄 냄새가 가실 날이 없을 정도다. 어머니 손맛은 자식들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주면 주는 대로 먹었던 시절. 즉 아주 익숙한 맛이란 뜻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음식 솜씨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나 역시 집사람 음식 솜씨를 잘 모른다. 신혼 때는 정말 이상한 음식을 먹으라고 들이민다고 생각할 정도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엄마 손맛에 익숙한 나로선 엄마한테 가서 좀 배워오라고 할 정도였다. 지금 우리 애들은 지네 엄마 음식 솜씨를 환상적이라 극찬을 하지만, 거의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나로선 어쩌다 먹는 집밥을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진짜 그정도로 맛있다면 흑백요리사에 나갔을 것이다. 결론은 우리가 엄마의 손맛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익숙한 맛이란 이야기이지 결코 맛이 진짜 있거나, 위생과 결부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상위에 놓인 된장찌개에 온 식구들이 입에 빤 숟가락을 넣던 시절은 지났다. 이젠 앞접시가 일반화된 시대이다. ‘꼰대’. 권위적인 나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자신이 항상 옳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은 항상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노인이라고 영국 BBC방송은 꼰대를 오늘의 단어로 소개하면서 풀이한 내용이다. 노인들도 이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시대정신에 맞게 사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2025-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