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생을,아름다운 하루하루를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생’-삶-은 언제나 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버리고 또 다른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반복의 연속이다. 그래서 삶은 허무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반복하는 것이 ‘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하루를 쓰고 버려도 우주가 항상 새로운 ‘생’을 ‘리필’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생’은 우주의 선물이며 축복받은 것이다. 반복의 허무는 이렇게 극적으로 역전되어, ‘생’은 기쁨을 주는 것으로서 긍정된다. 문학평론가
2022-08-04
몸과 마음을 버려야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곳아내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와 시안에도들렀다내 생의 마지막 투병하는데절두산 부활의 집을 계약했다고 한다신혼 초 살림 장만하듯 아내와 반겼다절두산은 성지순례로 가족과 들렸던 곳낮은 나에게도 지상의 집을 사랑으로주셨다머리가 없는목 잘린 순교의 산오, 나도 드디어 못 하나를 얻었다무두정無頭釘부활의 집 지하 3층에서망자와 함께 이제사 천상의 집 지으리라시인은 삶의 마지막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위의 시를 썼을 것이다. 그는 성지 절두산에 있는 ‘부활의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할 결심을 한다. ‘절두산’은 고종 초기 대원군에 의해 천주교 신자가 목이 잘려 순교-병인박해-한 곳이어서 ‘절두’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시인은 그가 마지막으로 이승에 남길 못은 목 잘린 순교자들처럼 머리가 없는 무두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2022-08-03
오래전 그녀와 통했던 비인 앞바다에 갔다가물결이 채색한 무지개빛 조개껍데기를 주워 와흰 접시 맑은 물에 넣어서 서탁에 얹어두고오래오래 들여다보았더니스무 살 봄풀 같은 아내를 다시 만났네물속에 어떤 사물을 넣었을 때, 그 사물은 어느덧 아름다웠던 시절을 현실화한다. 오래전 아내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에서 가져온 조개껍데기를 접시 위 맑은 물에 넣고 들여다보니 스무 살 시절 아내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 물은 오래전에 펼쳐졌던 사랑을 다시 복원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물위에 쓰는 글 역시 그러하지 않겠는가. 물속에 용해된 글도 마법처럼 현실화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시인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고독을 살고 있는 것일 테다. 문학평론가
2022-08-02
사랑은 넝쿨손입니다철골 철근 콘크리트 담벼락그 밑으로 흐르는오염의 띠 죽음의 띠시뻘건 쇳물녹물을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 (부분)생명 작용의 미세한 산물들은 사랑을 드러낸다. 이 사랑 덕분으로 우리는 생명의 힘에 따른 인연으로 맺어진다. 생명을 낳고 되살리는 사랑. 그래서 사랑은 죽음을 생산하는 근대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다. 죽음-철-을 끌어안으면서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저 작은 ‘푸른 이파리’는 생명의 근원이자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린 이파리 한 잎이야말로 이 세계, 이 우주를 존재하게 해주는 근원이다. 문학평론가
2022-08-01
얇은 옷을 트렁크에서 꺼내 입고녹야원 푸른 잔디에 앉았다햇살이 따가웠다 잘 가꾸어진 꽃을 쓰다듬으며‘분명 겨울이 아니야’그날 밤 몸은 심하게 열이 올랐다, 연신 콜록거렸다몸이 인정하지 않던 겨울에몸이 중심을 잃었다부겐베리아가 빨갛게 웃고 있는 바깥실내는 온통 포인세티아로 장식 돼있다여기는 지금 꽃 지지 않는 겨울마음을 가져오지 못한 몸은감기에 시달리는 중 (부분)‘부겐베리아’나 ‘포인세티아’는 모두 빨간색 꽃들이다. 그 빨간색은 심장의 색깔이라고 한다면 그 빨간색은 겨울을 견디는 마음을 전해준다. 추위를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도는 겨울에도 지지 않는 붉은 꽃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화자는 그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미리 봄을 맞이하고자 하다가 그만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감기로 인한 열병은 겨울을 나는 성숙을 위한 고통일 게다. 문학평론가
2022-07-31
고작 칠일 울려고땅 속에서 칠년을 견딘다고더 이상 말하지 말자매미의 땅속 삶을사람 눈으로어둡게만 보지 말자고작 칠십년을 살려고우리는없던 우리를 얼마나 살아왔던가환한 땅 속이여환한 없음이여긴긴 없었음의 있음 앞에있음이라는 이 작은 파편이여우리에게 없음으로 인지되었던 땅 속의 삶이야말로 매미에게는 환한 삶이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인간중심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때, 인간의 삶은 “긴긴 없었음의” 삶을 살아간 매미의 삶보다 열등하다. 인간에게는 없음을 살 수 있는 능력, 땅 속의 삶을 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매미보다 훨씬 떨어지기에. 이에 매미를 따라, 시인은 없음이 있음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전복적인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7-28
일하지 못해 상처받았거나상처받아서 일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실업명세서를 드립니다일을 멈추고 주저앉아시간을 멈추고하루를 멈추고 말을 멈추고 사랑을 멈추고세상을 멈추는 순간의 당신에게‘수고했습니다 고맙습니다’두툼한 실업봉투 다달이 건네줄 수 있다면월급날 으쓱했던 당신의 시간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요오늘은 월급날일하지 못하는 당신을 생각합니다일하지 못하는 당신의 마음에 지금 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부분)위의 시는 실업 시간에 놓인 당신에게 “월급날 으쓱했던 당신의 시간을 되돌려”주는 연대의 정신을 말해준다. 이 정신은 ‘실업명세서’라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상처받아서 일하지 못하는 당신”의 손을 잡는 이미지를 통해 제시된다. 이러한 ‘이미지-사유’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암시해준다. 그것은 삶이 삶을 나누는 연대의 시간, ‘공통체의 시간’을 창출하면서 살아가는 길이다. 우리 모두 떠나가며 만들어야 할 길. 문학평론가
2022-07-27
한 달에 한 번은 죽음 쪽으로 가서 이쪽을 돌아봅니다계절이 바뀔 때마다 탄생 이전으로 가서 여기를 바라봅니다생각하기 전에 평화라고 속으로 말합니다생각하고 말하고 난 뒤에도 평화라고 말합니다나지막이 평화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립니다이것이 평화보다 먼저 평화가 되는평화보다 먼저 평화를 사는 몇 안 되는 방법입니다 (부분)위의 시에 따르면 평화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평화 자체가 될 때, 즉 “평화보다 먼저 평화를” 살 때 비로소 도래한다. 생각 이전에 ‘평화’라고 속으로 발화하게 되는 상태, 이는 우리가 평화로서 존재하고 있는 상태다. 이렇듯 우리 자신이 평화가 되었을 때, “생각하고 말하고 난 뒤에도” “평화라고 말”할 수 있게 되리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평화를 생각하며 읽은 시. 문학평론가
2022-07-26
노래하는 당나귀를 보았는가 무거운 짐 이고 지고앞만 보고 걸어가는 무심한 눈길짓누르는 돌덩이 아래서 흘러나오는경쾌한 노랫소리그에겐 이미 짐이 없다부서지기 쉬운 자들이 짐을 진다천천히 가지만 언젠가는 사막을 통과한다가녀린 나비가 바리케이드를 넘는다날개 한 잎 상하지 않았다 (부분)저 당나귀는 엄혹하게 착취 받고 있지만 경쾌하게 노래 부를 줄 안다. 이 능력은 당나귀의 잠재력과 존엄성을 증명하며, 그 노래는 “언젠가 사막을 통과”할 미래를 품고 있다. 노래 부를 수 있는 자는 “짓누르는 돌덩이”를 지고 있을지라도 자유로운 존재다. 그래서 그는 “부서지기 쉬운 자”이긴 하지만, ‘가녀린 나비’처럼 가볍게 하늘을 날 수 있으며, “날개 한 잎 상하지 않”고 “바리케이드를 넘”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2-07-25
아프다몹시 문란하지 않으면가족은 탄생할 수 없다창문 저 밖남의 가정은 다 안락해 보이고창문 저 안나의 가정은 다 안락사로 보이듯그 순간 미처 걷지 못한불쌍한 빨래들이백기처럼펄럭펄럭손을 흔든다꼭 엄마 같은 그림자다(부분)시인에 따르면 문란하지 않으면 사랑이 탄생할 수 없으므로, 가족도 탄생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사랑의 문란을 몸으로 겪는 이들이다. 배고픈 이들은 가족끼리 서로를 뜯어먹으면서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문란한 사랑이 엮는 문란한 가족의 이미지는 “백기처럼/펄럭펄럭/손을 흔”드는 ‘빨래들’로 현현한다. 쓸모없듯 방치된 저 빈손의 펄럭임이야말로 사랑의 문란이며 고통이고 아름다움이다. 문학평론가
2022-07-24
어두울 무렵하늘이 닫고 있는 붉은 꼬리를 배경으로저무는 방식을 습득하고 있는 수평선이발뒤꿈치를 들고 환하게 뒤를 잠그고 있다궤적을 반짝이며 사라지는 유성처럼버려도 좋은 꼬리 하나쯤 있어그 꼬리에 몸을 묻고오래 저물고 싶다(부분)노을의 붉은 끝자락으로부터 유성의 꼬리를 연상하는 것을 보면, 이 시인이 세계의 현상을 얼마나 끈덕지게 관찰하면서 시적인 ‘이미지-사유’를 오래 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저 사라지는 노을의 “꼬리에 몸을 묻고/오래 저물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다. 그래서 시인은 유성처럼 사라지는 저 하늘의 노을을 오래도록 응시하면서, 저 “환하게 뒤를 잠그”는 ‘수평선’의 ‘저무는 방식’을 터득하려 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7-21
아주 사적인 생각에 빠져뼈다귀들이 설설 끓고 있다거품이 악성 댓글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담 든 몸에 파스 붙이듯이름을 계속 갈아 붙이고 살던 남자가아파트 11층에서 떨어졌다, 단풍 붉게 물든 늦가을회 뜨고 남은 살점 군데군데 붙어 있는 뼈다귀가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어디론가 헤엄쳐 가고 있다짠물에 새기던 사소한 고독의 가시 무늬익명탕이 홀로 졸아들고 있다(부분)“악성 댓글” 같은 거품을 내며 끓고 있는 눈앞의 ‘서더리탕’은 광어의 것인지 우럭의 것인지, 도미의 것인지 모르는 뼈다귀들로 만든 ‘익명탕’이다. 11층의 남자나 당신과 같은 익명. 그러니 “이름을 계속 갈아 붙이”면서 살다 죽은 남자는 당신이기도 하리라, 죽은 남자나 당신, 그리고 ‘나’ 역시 서더리탕의 뼈다귀들처럼 “사소한 고독의 가시 무늬”만을 남기고 “홀로 졸아”드는 익명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7-20
어릴 적 뒹굴던 과원(果園)이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인 흙냄새모든 것의 자궁이면서도제 것 하나 없는 해탈인 흙이후광처럼 두르고 다니던 냄새로작은 섬 하나 짓고 싶어졌습니다당신이 깊이 뿌리 내리고푸르게 타오르는 물 한 그루로 서 있을 (부분)모든 씨앗들은 흙속에서 자라면서 자신의 삶이 가진 가능성을 현실화한다. 하여 시인은 흙을 ‘자궁’이라고 지칭한다. 또한 모든 삶은 자신의 생명이 다 하면 빈 몸으로 흙속에 묻혀 흙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흙은 삶과 죽음을 모두 품고 있는 것, 시인은 이 흙의 냄새가 “어릴 적 뒹굴던 과원이 내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라고 말한다. 이 냄새가 그에게 근본문제-삶과 죽음-에 일찌감치 눈 뜨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7-19
이곳 바닷가 기슭에서머리칼의 기억을 풀어헤치며늙지도 않는 당신의 서문(序文)을 꺼내 읽는다밀려왔다 쓸려가며넘나들었던 숱한 피멍의 숨소리가 들려오는저 격정의 세계에발가벗고 뛰어드는 아이들의새파랗게 질린 얼굴늘 푸름이 바탕이라서 늙을 것 같지가 않다바다와 하늘이 하나가 되던 날,말없이 등을 다독이며 돌아섰던 난바다영영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억겁의 창문을 열고 뜨겁게 밀려들고 있다한순간도 멈추지 않을 태세다.당신이 눈앞의 저 바다와 겹쳐진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저 ‘난바다’가 “말없이 등을 다독이며 돌아섰던”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늙지도 않은 저 바다는 “영영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시인 앞으로 ‘뜨겁게’ 밀려들고 있다. 바다는 “숱한 피멍의 숨소리”를 통해 자신의 ‘격정’적인 영혼을 드러내고, 이 바다를 마주한 시인 역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저 ‘파랑’의 세계처럼 새파란 존재로 변화된다. 문학평론가
2022-07-18
새 한 마리 전봇줄 위에 앉았더니허공에 길을 만들며 숲으로 사라졌다새가 날아간 숲에는자작나무 그림자 흔들리고마른풀들이 새가 날아간 방향으로 몸을 누인다멀리서 보면 고요한 산속더러 파다한 세상이갈대로 출렁이며 일어선다무거운 짐 부려놓듯 나뭇잎이 떨어지고벗어버릴수록 가벼워지는 생숲에서 길을 만난다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그러자 정적에 싸여 있던 세상이 “갈대로 출렁이며 일어”서고, “자작나무 그림자 흔들리”며, “새가 날아간 방향으로” “마른풀들이” 몸을 누인다. 새의 비상은 “무거운 짐 부려놓듯” 떨어지는 나뭇잎의 추락과 상통한다. 그 비상은 존재자들의 “벗어버릴수록 가벼워지는 생”을 드러내기에. 하여 허공을 나는 저 새가 그린 궤적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이 나아갈 길-소멸로 향한-을 발견한다. 문학평론가
2022-07-17
태풍이 지난 후고요를 되찾은 바다어부는 갈매기와낙조를 나누어 갖는다산사에서 울리는 북소리는가슴과 머리와 피부에서작은 감동을 나눈다바람 소리 파도 소리천둥소리 새 소리낙엽 밟는 소리자연의 소리는 거짓을 나누지 않는다꽃과 벌은 나눔으로 꽃은 열매를벌은 꿀을 얻는다 (부분)자연의 존재자들은 거짓을 나누지 않는다. 그 자연의 존재자들이 나누는 나눔은 사랑의 행위이다. 낙조를 나누는 어부와 갈매기는 자연의 인력-사랑-으로 맺어져 있다. 북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의 “가슴과 머리와 피부”도 “작은 감동을” 나눈다. 이 나눔이 없다면 신체의 유기성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이 세계의 뭇 삶들이 계속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순리이며, 이 순리는 나눔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7-14
숨어든 방안에서 홀로 어둡다.맨 몸 켜켜이바랜 누더기 같은 비애가 마른다.어둠이 따뜻하다는 것, 이제 알겠다.기다림은 없다, 없으므로딱딱하게 굳어진 초인종 더는 누르지 못하고다들 망설이다 되돌아 갈 것이다.빈 옷장 같은 방열어젖히듯 떠나버릴 것이다.젖은 채 개어 넣는 몸속거품 같은 씨앗 한 움큼말라가며 자란다.내성(耐性)이다. (부분)시인은 어느새 “바랜 누더기 같은 비애가” 말라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인의 몸은 욕망이 아니라 비애로 젖는다. 하여 그는 몸속에 “젖은 채 개어 넣”어져 말라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 “거품 같은 씨앗 한 움큼/말라가며 자란다”는 것을 시인은 깨닫는다. 자신이 고독한 삶을 견딜 수 있는 삶의 내성을 얻었으며, 내면에 시라는 ‘거품’으로 변환되는 씨앗이 자라고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7-13
새벽 바다는 외롭고 깊고 쓸쓸하다흐린 수평선 쪽으로 어둠 밋밋하게 물러가며구름 사이로 붉은 울음을 토하고갈매기들 한 줄로 나란히 파도 위에 앉아참선(參禪) 삼매경(三昧境)에 빠져있다이런 새벽은 달항아리 같아외롭고 깊고 쓸쓸한 것들이그득해져서 아름다운 그늘이 된다이 시는 새벽 바다가 아름다운 그늘이 된다는 역설적 발견을 보여준다. “밋밋하게 물러가”는 어둠의 자리를 차지하는 ‘구름 사이’의 “붉은 울음”, 그 울음이 떨어지고 있는 바다 위에 나란히 앉아 “삼매경에 빠져 있”는 갈매기들. 이들이 연출하는 쓸쓸한 새벽의 풍경은 ‘달항아리’처럼 세계를 둥글게 품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저 세계는 달항아리 속처럼 깊고 그득해져서 세계의 그림자-그늘-를 드러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7-12
내가 나에게편지를 쓴 적이 있네오른손으로 쓰고 왼손으로 받았네뜯지도 않고 불살랐던불 꺼진 창문, 떠나온 그 주소에는이제 누가 살고 있을까,뜨내기들은헐렁한 외투와 낡은 구두뿐이지만허허벌판을 첩첩 살아가네내 왼손이 오른손을 잡아피가 흐르네나는 여전히 오래된 여행이라네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데 오른손이 쓴 그 편지를 왼손이 “뜯지도 않고 불살랐”다고 하니, 그 편지에는 기억하면 안 되는 기억이 담긴 듯하다. 하지만 시인은 그 불태워버린 기억을 되살리고자 “내 왼손이 오른손을 잡”는다. 하여, 되살아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시인은 “헐렁한 외투와 낡은 구두” 차림으로, 그가 살아온 삶이 열어놓은 기억의 공간, 그 피 흐르는 상처의 공간을 방랑하고자 한다. 문학평론가
2022-07-11
당신은 잠에서 깬 듯 구름을 갈아엎어 씨를 뿌리고영문 모르는 새떼들 아직 하늘에 떠 있지찬란한 적막을 탐닉하던 붉은 노을이나무들의 귀를 당겨세상에는 없는 은유법으로 속삭이는 것을 보았지잎을 다 버린 나무들의 모세혈관이하늘에 탁본되고 있었지 (부분)잠자고 있다가 깨어나 “구름을 갈아엎어 씨를 뿌리”는, 즉 비를 내리게 하는 당신은 신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구름을 만들어 뿌리는 씨-비-는 세계에 신성을 스며들게 할 것이다. 신성이 스며든 세계에서는 ‘붉은 노을’이나 ‘나무들’ 등이 서로 “세상에는 없는 은유법으로 속삭”이고, 모든 존재자들이 서로를 비추며 ‘탁본’되는 관계에 놓이게 될 터, 그렇게 저 풍경은 신성-당신의 씨-을 표현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