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영혼들을 위해마르지 않는 깊고 맑은 우물을 파는상이군인 한 사람을 보았다의탁할 곳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쉼터가 되어주는 사람베트남 투이호아 전투에서부비트랩에 두 다리를 잡아먹히고나락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다는 사람그 덕택에마음 속 신비로운 통로를 보게 되었다고쑥스럽게 머리를 긁는 사람 (부분)위의 시의 상이군인은 “깊고 맑은 우물을 파”서 우리를 적셔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두 다리를 잃었지만, 그때 거의 죽을 상황에서 살아났다는 데에 더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 신비로운 통로가 뚫릴 수 있었던 것. 그는 절망 속에서 삶의 신비를 경험하고는 희망을 얻게 된 자신의 체험을 “의탁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그들의 쉼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7-06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끝이 무엇인가.완성으로 매듭지어졌으면 좋겠다.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 알 듯하다.어머니의 병상 명상은 과거와 미래의 성찰이리라.당신 완성을 위해 끝 간 데로 나아가는 어머니,미련을 지우고 매순간 완성의 마침표로 향하듯이말이 점차 없어져도 아름다운 당신을 위하여삶의 소중하고도 오랜 추억을 위하여어머니는 명상으로 아들에게 일깨우고 있으리라.길 위에서 그 뜻을 눈물로 느낀다.시인은 어머니의 속내로 난 길을 걷는다. 그 길은 어머니의 삶이 닦아놓은 개인적 역사일 것이다. 병상의 어머니는 “완성의 마침표로 향하”여 그 길을 걸으시고 있다. 어머니에게 그 행보란 명상을 의미할 터, 어머니가 명상-행보를 멈추지 않는 것은, 당신의 추억과 삶의 아름다움이 온전하게 매듭짓기 위해서다. 또한 그 매듭이 아들에게 삶의 길에 대해 무엇을 일깨울 수 있으리라고 어머니는 생각하셨으리라. 문학평론가
2022-07-05
아침이 녹는다밤새 더럽혀진 눈이 녹인다녹는다는 것은 검은 것의 미아,하얀 것은 검은 것이 지워버리는 미로,녹인다는 것은 눈과 눈 사이에 머무는 것이다‘검은 것’(밤)으로 ‘하얀 것’(아침)을 녹여버리면서, 즉 하얀 눈이 검게 더럽혀지면서 생기는 “눈과 눈 사이”(이 ‘눈’은 雪의 의미와 目의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에 머물며 사는 길이 있다. ‘검은 것’의 ‘미아’가 된 눈. 그러나 이때 하얀 것 안에 ‘미로’가 생겨난다. 더럽혀지는 눈과 지워지는 눈 사이에 생기는 이 ‘미로’는, “붉은 고기 덩어리처럼” 처절한 죽음의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다. 문학평론가
2022-07-04
나무라고 나직히 읊조리면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짜릿한 전율남을 탐하지 않고도단지 빛과 수분만으로도 넉넉히 자라는엽록소그러면서도 나무라고 부르는 입술 속 타액까지나무라고 바라보는 두 눈의 눈물까지모조리 빨아들이는이. 중. 적. 식. 물. 성‘나무’라는 말을 “나직히 읊조”릴 때, 나무의 자연성이 몸으로 들어오고 몸은 전율을 느끼면서 자연으로 빨려 들어간다. ‘나무’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저 자연은 수동적인 이미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말을 통해 나무(자연)는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 마술적인 말 ‘나무’는 바로 시를 비유할 터, 시는 자연을 능동적으로 변환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자연과 밀접히 접속시킨다. 문학평론가
2022-07-03
꽃을 여윈 나무들이연 초록으로 일어서면내 몸도 물이 오른다얼마나 허리둘레가 늘었니?눈 도장 찍는바람이 건네주는 그늘 아래잠시 앉아 볼 때목젖까지 그리움이 올라오고내가 할 일은누군가에게 숨통을 열어주는여름 숲으로 우거지는 것(부분)나무들의 연 초록은 이별한 꽃에 대한 그리움의 색이다. 시인은 이에 동화되어 “목젖까지 그리움이 올라”온다. 이때 시인은 나무가 그 초록으로 “여름 숲을 우거지”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무는 그리움의 초록으로 ‘일어서’서 “누군가에게 숨통을 열어”준다는 것. 시인은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울지라도, 나무들처럼 우거져 타인에게 숨통을 열어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일은 바로 시 쓰기일 터이다. 문학평론가
2022-06-30
집으로 돌아올 때 가로등은 해가 지고 해가 뜰 때까지 혼자 점멸하지요 우린 이 생을 무사히 마칠까요 떠돌아다니다 죽고 미쳐죽는 그 일 말이지요 살아 한 순간 같은 거리에 놓인 적 없지만 그래도 한데 묶여있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건 집으로 돌아갈 때지요 꽃을 닮은 가로등이 당신 목뒤의 칩을 감지하지요 꽃잎이 활짝 펼쳐지면 집안으로 들어가고 밤새도록 꽃잎이 지켜보겠지요 그래도 당신은 뒤척이겠지만(부분)‘창조’의 동인이기도 했던 김명순 시인은 알다시피 시와 소설, 그리고 희곡도 썼던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불운한 삶을 살아야 했고 결국 가난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시인은 김명순 시인과 같은 불우한 운명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동시에 그녀와 아름다움(꽃) 속에 같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그녀에 대한 동병상련의 우정을 마음에 품는다. 문학평론가
2022-06-29
바람과 햇볕이 안부만 묻고 간폐가 앞마당에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단죄를 받고 있는 헤스터 같다해인지 홍시인지 잠시 착시를 느낀새 떼들이 붉은 살점을 먹기 위해육박전 공중전 지상전흙바닥에 잔여물까지흔적도 없는 허기란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단죄를 받는 것보다허기란 전쟁과 살인의 주범이라는 것(부분)‘폐가’는 인간 문명이 무너진 장소를 의미한다고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문명이 무너진 장소는 쓰레기장이 된다. 그런데 이곳에는 오직 홍시 하나가 “단죄를 받고 있는 헤스터”처럼 감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헤스터’는 ‘주홍글씨’의 주인공인 ‘간통녀’ 헤스터 프린을 지칭하는 것 같다. 홍시를 흔적도 없이 먹은 행위는, 영혼의 허기를 비난행위로 채우는 군중의 공격성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6-28
선운사 절문 앞에 늦도록 앉아 있었네꽃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다보고 있었네죽음이 이미 와 있는 방문 앞보다더 깊고 짙은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꽃들동백을 홀로 바라본다는 일은,큰 산 하나 허물어져 내릴 만큼 고독한 일어쩌면 기억도 아득한 전생에서부터늑골 웅숭깊도록 나는 외로웠네꽃핀 숲보다 숲 그늘이 더 커 외로웠네하여 봄볕에 흰 낯을 그을리며 나는선운사 절문 앞에 한 오백 년 죽은 듯이 앉아동백이 피고 지는 소리를 다 듣고 말았네(부분)“죽음이 이미 와 있는 방문”을 바라보고 있는 선운사 동백꽃들. 이 “동백을 홀로 바라본다는 일은” 시인 역시 동백과 함께 죽음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는 일, 하여 시인은 자신의 외로움이 “기억도 아득한 전생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동백이 다 떨어진 동백숲이 “어떻게 마음을 정리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삶과 죽음의 숱한 과정들, 그 사랑과 고통의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는지를 한 순간 다 꿰뚫어보게 된 것. 문학평론가
2022-06-27
이것은꽃의 압축파일이다감 씨를 반으로 따개면흰 배젖에 감싸여 오뚝 서 있는고염나무 한 그루내 아기집 속에 있던 1mm의 아기초음파 영상 같은감 씨 속엔감나무의 숨겨진 전생이 있다감나무로 성형되기 전고염나무였다는 DNA단감을 먹고 씨를 심어보면 안다시인은 위의 시에서 대상의 속 끝까지 파고들어 시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는 ‘감 씨’에서 “꽃의 압축파일”을 찾아내고는, 나아가 감나무가 “고염나무였다는 DNA”를 발견하며, 그리하여 감 씨가 품고 있는 전생과 가능성까지 읽어내는 것이다. 어떤 대상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드러내는 시인의 작업은, 감 씨가 품은 가능성이 고염나무로 현실화되는 것처럼, 그 대상의 시적 부활을 향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6-26
새벽 해가 부옇다간월호에서 잠을 자던 별들이모래바람 뒤집어 쓰고 눈만 껌벅 껌벅풀잎의 심장에 사는 파아란 불씨가 비척비척새벽 성당의 종소리 처얼철 금이 갔나?옥천사 공양을 알리는 범종소리 누렇게 시들어가고아직은 간절하게 두 손 비는 벌나비 더러 볼 수 있다호흡이 가쁜 부춘산 노송개들도 산소통을 하나씩 물고 다닌다모래바람에 점령당한 세계. 상황은 절박하고 심각하다. 풀잎의 심장은 ‘비척비척’거리고 노송 역시 바람이 폐에 들어왔는지 호흡이 가쁘다. “개들도 산소통을 하나씩 물고 다”닐 정도다. 모래를 돈으로 치환하면 어떨까. 돈에 지배당한 세계. 그러나 “아직은 간절하게 두 손 비는 벌나비 더러” 있다는 것에 시인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저 ‘벌나비’처럼 돈이 아닌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6-23
천성이 명랑소녀였을 것 같던 내 어머니는철없던 열일곱 살에 시집 온 그날부터명랑한 일이 별로 없었나 봅니다때 맞춰 꽃이 피고 지고, 새가 울던그 아름다운 오랜 세월 동안을 먼산바라기로…어느 때부터인가 머리 한 쪽이 쑤신다며눈이 붉어지고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생기더니마치 억지로라도 명랑하고 싶은 사람처럼하얀 가루로 된 싸구려 두통약 ‘명랑’을무시로 입안에 가득 털어넣곤 했습니다한국의 여성들은 결혼하고 난 후 한 집안의 며느리로, 부인으로, 어머니로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잃고 살아가야 하는 그녀들은, 소녀시절 명랑하게 살 수 있었던 고향이 그리워 ‘먼산바라기로’ 우두커니 있곤 할 것이다. 시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을 터, 그녀에게 명랑이 다시 찾아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약을 통해서이다. 두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복용하는 약 명랑. 씁쓸하고 서글픈 아이러니다. 문학평론가
2022-06-22
나도 내 꽃 피우고 싶다바닷가 모래언덕 밋밋한 풀숲 지나잡풀 사이 흰 색 작은 꽃이 웃는다고 하지기름진 흙 아닌, 모래 틈에 솜털 박고꽃자루에서 내려앉아 한참을 기어가도비스듬히 누워 피고 쓰러지지 않는 꽃내가 가진 것은, 봄 가뭄에도잔털 돋아난 이파리가 제 멋에 춤추게 할모래 한 줌뿐, 바람 불면 흩날리는 모래알들더 이상 잃지 않으려고 다독이며 잠든다(부분)시인은 “내 꽃 피우고 싶다”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영혼의 아름다움이 현현된 ‘시’를 의미할 테다. 시인은 큰 욕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흰 색 작은 꽃”을 피우기를 갈망할 뿐이다. 하지만 그 꽃은 “한참을 기어가도” “쓰러지지 않는 꽃”이어야 한다. 가난하고 척박한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의 의지를 잃지 않는 꽃. 이 꽃을 피우기 위해 시인은 한줌의 모래알이라도 “더 이상 잃지 않으려고” 자신을 다독인다. 문학평론가
2022-06-21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는 매립의 땅기다리지 않아도 어둠이 내리는 새 역사때가 되면 날개 돋은 새끼들이 태어났다땅 위에서 저공을 배운 어린 식솔들은모래 헤엄을 지치다 물갈퀴를 얻었던 것이다뒤웅뒤웅 과식한 탓에 졸고 있는 틈새불콰한 가로등이 바닥을 핥고 있다그들의 둥지 속을 샅샅이 훔치고 있는이카로스를 닮은 하루의 눈빛잃어버린 천국에 대한 기억마저 매립해버리는 도시-‘매립의 땅’-에서 살아야 하는 저 오리 새끼. 저 오리 새씨는 결국 모래의 무게에 짓눌려 하늘을 날 수 없을 테지만, 허망한 날갯짓으로나마 “땅 위에서” “모래 헤엄을 지치다 물갈퀴를 얻”게 된다. 시 쓰는 자 역시 하늘을 날 수는 없겠지만, 그는 시를 쓰는 몸부림을 통해 저 오리 새끼처럼 저공비행을 배우고 물 위를 건널 수 있는 물갈퀴를 얻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6-20
손 하나 들이밀고 시집 왔니라너로 허먼 시할애빈디내게는 영 마뜩찮은 분이었제아무렴, 글만 아는 집안이래두풀 한 포기에 베인 손이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열흘을 가야?논으로 밭으로 내달리다흰 쌀밥 고봉으로 퍼드리먼에미 손은 머슴손이어,에미 손은 머슴손이어,오장이 뒤틀리게 사무쳤니라마당 한 귀퉁이 무쇠솥이 끓는데어머닌 행주도 대지 않은 손으로뚜껑을 열고뜨건 물을 푹푹 퍼 나르시네논밭의 일을 다 하고도 집에 들어오면 가사를 해야 했던 어머니. 그녀의 ‘에미 손’은 어느새 ‘머슴손’과 같이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남성중심주의적인 사회, 노동보다 글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죽도록 일만 하는 머슴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 하지만 시인은 도리어 뜨거운 뚜껑을 맨손으로 열 수 있는 ‘푸른 손’에서 글쟁이 남성들은 가질 수 없는 어떤 힘-민중의 힘-을 발견한다. 문학평론가
2022-06-19
목욕탕에 앉아 옆 사람의 등을 밀면서뼈는 활, 신경은 시위 아닌지 가늠한 적이 있다가슴에 화살 하나 장전한 다음줄을 놓자마자날아갈 것 같은날아가서 과녁 꿰뚫을 것 같은등뼈는 배를 닮았다굳게 뻗은 용골 위로 흰 돛 펼치고산 너머 둥둥바다 건너 훠이훠이실어다주는꿈은 등뼈를 닮았다(부분)등뼈는 육신의 중추를 이룬다. 그래서 “꿈이 등뼈를 닮았다”는 말은, 꿈이야말로 삶의 중추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등뼈는 활 또는 배를 닮아서 꿈을 닮은 것이기도 하다. 등뼈는 주어진 운명을 거슬러 저 한계 너머로 삶을 실어다주는 배와 닮은 동시에, 화살을 저 너머의 과녁으로 날리는 활과 닮았다. 한계 너머의 ‘삶-과녁’이란 삶이 꿰뚫고자 희망해왔던 꿈의 대상일 터, 꿈은 그 대상에 데려다 주는 동력이다. 문학평론가
2022-06-16
길마저 몸을 숨겨버린 하늘새벽에 가닿기 전우리는 별처럼 반짝일 수 있을까아직 폭풍우는 그치지 않았는데가시 돋은 바람은 언덕 하나 넘었을까길이 어디냐 물어도 대답 없는 어둠뿐밤하늘 살갗 뚫고불그스레한 낯빛 하나가 막 지고 있다.망월, 그 언덕에 (부분)길은 보이지 않고 폭풍우는 그치지 않는 밤. 이는 현 세상에 대한 상징적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비록 언제 올지 모를지라도 새벽이 오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어둠 속의 그림자 되어 달을 바라본다. 달은 새벽의 도래라는 희망을 전망으로 바꾸어주는 상징물이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존재하지만 그의 희망이 체현된 달을 바라보면서 이 어둠의 현실 너머를 전망하며 살아나간다. 문학평론가
2022-06-15
중의 처소들이 미분양된 동절기바닥에 쌓인 처방전은 둥지의 흔들리는 문패다알약이 몸 안으로 들어가면 초인종처럼 벨이 울리고늦가을 길을 걷다가 낙엽 하나 들어 올리는 것도 날개를 다는 일인데팔과 날개를 바꿀 때 잃어버린 나사는 찾을 수 있을까?시인은 알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아프다. 날개를 상실했다. 날개 대신 노동하는 팔을 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여 새들이 거주하는 ‘공중의 처소들’에 거주할 수 없다. 하지만 동경하는 하늘의 세계와 병든 자신의 심신 사이의 거리에 대한 아픈 인식은 시인의 시 쓰기를 추동하는 동력이 될 터. 아직 ‘미분양된’ 처소들이 아직도 하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한 시인은 그 처소들로 ‘비상’하겠다는 꿈을 접지 않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6-14
크고 유명한 병원이 있는 동네라면아무 버스나 잡아타도 병원에 갈 수 있다공단에서 병원으로, 각돌 구름을대학에서 병원으로, 방석처럼 깔고 앉은 태양이병원에서 병원으로, 끝없이 끝없이아파질 날들은편리하게 수송될 필요가 있다우리는 머지않아 만난다 버스 안에서울상을 들켜버리고 쉽게 낙담하는 마음을 알아보면서죽을 뻔한 경험 속에서도 오로지 웃음거리를 찾기 위해서버스 차창에 누군가 손가락 글씨를 적어둔 흔적다음 순서는 무엇입니까(부분)사람들은 병들었다. 특히 노동자(‘공단’)나 젊은 학생들(‘대학’). 사실 사회가 아픈 이들로 가득 차 있으니 사회 자체가 병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미래는 “아파질 날들”이며, 현대성은 그 날들로 사람들을 “편리하게 수송”하는 데에 있다. 버스 차창에 적힌 “다음 순서는 무엇입니까”란 손가락 글씨. 제목에 따르면 ‘다음 순서’란 “마침내의 날”일 것이다. “죽을 뻔한” 날이 아니라 진짜 죽음이 이루어지는 날. 문학평론가
2022-06-13
장미꽃이 피어 있었어가장자리가 환했었지웃음을 나눴던 우린여전히 초록이었어시간은 멈춰 있었어흔적으로 눌린 기억나란히 손잡은 채반듯하게 누워서겹겹이 소원을 빌며글자를 새겼어우리는 입을 다문 채아름답게 짓눌렸어“가장자리가 환”한 장미꽃처럼 피어 있었던 ‘우리’의 사랑은 이제 압화(押花)로만 남아있다. 그 시절 서로 웃음을 나누웠던 ‘우리’는 푸릇푸릇한 초록이었다. 시간이 멈추고 아름다움만 존재했던 사랑. 이 사랑스러운 이미지는 이제 “흔적으로 눌린 기억”으로만, 즉 압화로만 존재한다. 서로 손을 붙잡고 누워서 환하게 피어 있던 ‘우리’는 그 시간이 멈춘 상태에서 “아름답게 짓눌”려 압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6-12
오래전 시인은문 열어라 꽃아, 독백을 중얼거렸고다른 시인은문 열어라 하늘아, 은산철벽 앞에 서 있었다이제 우리는 가라앉아 있는 것들과 마주하기이미 지나간 일이라 말하는 자들과 대치하기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이 아닌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보여주어야 한다문 열어라 마음아마음아 문 열어라꽁꽁 얼어붙은 바다 아래꽝꽝 선언하는 광장 향해 (부분)“가라앉아 있는 것들과 마주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듣고 모아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 이제 시인인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이라고 이은규 시인은 ‘선언’한다. 그것은 광장이 된 “바다 아래”-세월호가 가라앉았던-에서 표명되는 선언들을 듣고 그 선언들을 시의 선언으로 변환-채시-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래전 시인”의 길을 따라 “마음아 문 열어라”라며 바다 아래 광장을 향해 귀를 열고 서 있어야 한다. 문학평론가
2022-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