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숲에 드는 순간 쭈욱 뻗어 올라간 곧은 다리 보얗게 팔목을 드러낸 연초록 잎들을 보며 이팔청춘 나무들이라 이름 부르고 싶어졌다 장마가 휩쓸고 간 뒤 햇빛에 그을리며 다리에 근육이 야무지게 붙을 때쯤이면 사랑의 감미로움에 눈을 뜨고 이별의 뜨거운 번갯불이라도 한바탕 맞고 나면 더더욱 고요해질까 아픈 성장통을 아직은 까마득히 짐작조차 못 하는 싱그러운 봄 숲의 나무들 지극히 아름다운 이팔청춘 나무들, 가만히 불러보았다 젊은이들을 보면 자신의 청춘 시절을 떠올리는 나이가 되면, 봄날 연초록 잎들만 보아도 마음이 설레고 서글퍼지나 보다. 이 싱그러운 ‘이팔청춘 나무들’에서 “사랑의 감미로움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의식의 창에 영사되기 때문이겠다. 아직 아픔을 “짐작조차 못 하는” 나이, 하지만 머지않아 “이별의 번갯불”에 몸을 태우게 될지 모르는 인생의 봄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웠던, 잃어버린 계절. 문학평론가
2025-03-04
생전의 당신께 손발톱 한번 잘라 줄 새 없이 아침볕 서리 녹듯 가셨는데 구월 불 회오리 쏟고 있는 봉분에는 덤벼들기라도 할 것처럼 억새들만 장검 날을 세우고 있더이다 게을러터진 나를 꾸짖듯 말입니다 등에 진 예초기는 심동맥 찢어지겠다 싶게 발광하며 진저리 치구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름 아닌 나를 깎는 일이었습니다 시인은 부모님 묘를 찾아와 벌초하는 중인 듯하다. 초가을이 되어 어느새 자란 억새들이 ‘불 회오리’와 같이 거센 기세로 마치 시인의 게으름을 비난하듯 날카롭게 검처럼 솟아있다. 진저리치는 예초기는 시인의 죄스런 마음-찢어지는 심동맥-을 대신 드러낸다. 그는 언제 “생전 당신께/손발톱 한번 잘라” 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깨닫는다. 부모님 묘의 벌초란 반성의 예초기로 자신을 깎는 일이라는 것을. 문학평론가
2025-03-03
민들레가 피고 별이 반짝이는 건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향기나 소리도 흩어져서 살아 있는 겁니다. 흩어지면, 더 빛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외로우면 더 빛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빛나고 있습니다. 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또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단순한 진실을 전해준다. 위의 시도 그렇다. 별이 반짝일 수 있는 것은 별빛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빛나는 것도 없다. 흩어지기에 삶의 향기는 더욱 살아난다. 하여, 사라짐에 대해, 사라지기에 남겨진 외로움에 대해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당신’도 시인 앞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당신도 외로울 것이다. 하나 사라져 외롭기에 당신은 빛난다. 문학평론가
2025-02-26
선명히 보이는 북극성 말수가 적은 미녀 저녁 하늘의 붉은 구름 바람 속의 영국인 꼭 쥔 손의 도끼 배에서 기르는 늙은 고양이 새벽녘 밝아오는 하늘 모양 한창 물이 오른 혼혈 여인 모두 다 좋다 다 모두 좋다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전위 시인, 이상과 윤동주가 좋아했던 시인인 콕토의 시. 위의 시는 세계를 대하는 예술가의 마음을 보여준다. 그가 접하는 세계의 존재들이 모두 좋고 아름답다는 것. 우연히 마주친 존재자들, 하늘을 보았을 때 본 북극성과 붉은 구름이나 옆에서 마주하게 된 영국인과 고양이, 혼혈 여인까지 말이다. 다 좋으니까 예술가는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문학평론가
2025-02-25
복숭아 나뭇가지 위 늙은 호박 한 덩이 묵상에 드셨다 애호박 때부터 사는 법을 수학한 수행자다 복숭아 나뭇가지 저만치 늙은 어머니 혼자 호미질하신다 어려서부터 체험 시를 써서 흙에 새기는 육필 시인이다 늙은 호박과 늙은 어머니가 조응한다. 둘 다 자연의 삶을 사는 존재자들이기에. 시에 따르면, 수행과 시는 이 자연의 삶에 그 본질이 있다. ‘애호박’ 때부터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마치 묵상하며 수행하듯 홀로 살아온 늙은 호박. ‘어려서부터’ 흙에서 혼자 호미질하며 살아온 어머니. 이 호미질이야말로 ‘체험 시’를 “흙에 새기는” 행위이다. 생존을 가능케 하는 노동은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5-02-24
꽃 피는 속도로 산맥을 넘어가면 전파가 지지직거리는 절벽 아직 정리하지 못한 사랑같이 창을 열면 흰 새의 날갯짓 손에 잡힐 듯하고 먼저 흘러온 강물이 뒤따라온 강물에 몸을 섞는 강면 창을 닫으면 물결 흘러와 머리맡을 적시는 방 짧은 기억 긴 추억 홀로 그렇게 누구나 “긴 추억”을 남기는 “짧은 기억”을 갖고 있을 테다. 아름다우나 순간의 섬광 같은, 잃어버려서 사는 내내 슬픈 추억으로 남게 된 기억. 시인은 ‘강변 모텔’에서, “먼저 흘러온 강물”과 “뒤따라온 강물”이 뒤섞이는 것을 창 아래로 내려다보며, 떠오르는 추억과 현재가 뒤섞이는 삶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손에 잡힐 듯”한 “흰 새의 날갯짓”처럼 아름답게 비상하는 ‘짧은 기억’을 슬픈 마음으로 바라본다. 문학평론가
2025-02-23
모든 삶을 생각하니 그 끝에 죽음이 버텨 그 끝의 죽음을 생각하니 모든 삶이 버텨 메아리다 이쪽에서 부르면 저쪽에 꽃혀 죽음을 캐내려면 삶을 이리저리 들춰내야 삶을 캐내려면 죽음을 이리저리 들춰내야 죽음과 삶을 각자 떼어놓으니 반 토막이다 내가 내린 상상력이 반 토막이라 생각하니 삶의 그 모든 것이 갑자기 시들시들하다 죽음과 삶을 같은 줄기로 가지런히 세우니 모든 게 살 갖추어진 줄기다 부족함이 없다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 아래 “모든 삶이 버”티고 있다. 우리는 이 평범한 사실을 잊고 산다. 시에 따르면, 이는 반 토막의 상상력으로 사는 것이다. 삶을 부르면 죽음이 대답하고 죽음을 부르면 삶이 대답한다. 메아리다. 죽음이 있어 삶은 ‘시들시들’함을 멈춘다. “죽음을 이리저리 들춰내야” 삶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낸다. 삶과 죽음이 같은 줄기에 있음을 인식할 때, 존재의 살이 부족함 없이 드러난다. 문학평론가
2025-02-20
밤이 되자 먼 곳이 더 훤히 건너다보이는데도 그 어떤 말조차 건너가지 못하고 어떤 다른 말이 되어 되돌아올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게 두려워서 밤이라서 뱀은 운다 한껏 목을 추어올릴 뿐 자기가 뱀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서야 그제야 우는 것을 멈춘다 할 말을 잊은 듯 귀만 남아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런 말이 있어도 안으로만 소용돌이치는 젖은 귀만 대신 남게 되어서 그래서 한갓 진흙덩이로 되돌아왔을 뿐이라고 생각하자 힘없이 울어 댄다 울다 보면 자기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고 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뒤집는 시. 이 시에서 뱀은 말을 건넬 수 없는 슬픈 짐승이다. “먼 곳이 더 훤히 건너다보이”지만 뱀의 말은 타인에게 건너가지 못한다. 뱀은 이 슬픔을 표현할 수도 없다. 울려고 해도 온몸이 목울대인 뱀은 “목을 추어올릴 뿐”일 수밖에 없기에. 하여 뱀에게 ‘할 말’은 “안으로만 소용돌이치”고 “젖은 귀만 대신 남”는다. “자기를 잊게”되기를 바라며 속으로만 “힘없이 울어”댈 뿐인 뱀. 문학평론가
2025-02-19
일어서라, 일어서라! 우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별들의 그림자와 함께 소식이 왔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야 할 시간이다. 그들은 달빛의 엄호 아래 그들의 갈 길을 정하고 집들을 비웠다. 달은 별로 힘이 없지만. 우리의 언어는 침묵에 의하여 기록된다. 운하의 수문이 가늘게 틈을 내며 열린다. 도로표지판이 방향을 바꾸었다. 우리가 사랑의 이정표를 기억한다면, 水面 위에서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읽을 수 있으리라! 전후의 독일 시인 귄터 아이히의 시. 세상은 전위만 찬양하지만 후위의 삶도 있는 것. 후위의 언어는 “침묵에 의하여 기록”되고, 그들 “사랑의 이정표”는 “눈보라 속에서”나 읽을 수 있지만 말이다. 하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후위도, 일어서서 집들을 비우고 “다른 사람들처럼 가야” 할 때가 있다. “별로 힘이 없“는 달빛 아래에서라도. 결국 이 후위의 움직임이야말로 세상을 바닥에서부터 변화시킨다…. 문학평론가
2025-02-18
한 번씩 일렁이는 집 묵묵했던 바닥에 의심이 묻어난다 각박한 모서리마다 둥글게 닳고 닳아 빠져나갈 수 없는 층과 층 사이 안락함과 두려움의 두터운 벽 사이 두 눈 질끈 감고 침묵 중인 건 아닌지 오래전 속 깊이 생긴 실금 어긋나지 않게 다독이는 건 그 틈으로 빛바랜 해가 지기 때문인지 어깨 짓누르는 세간살이 젖은 짐으로 낡아 가는 바닥에게 묻고 싶다 삶에 안정을 얻고, 벽에 둘러싸인 집안에서의 생활을 자연스레 받아들게 되었을 때, 과연 ‘지금 이 삶이 내가 추구하던 삶이었던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위의 시도 그런 질문을 던진다. 현재 생활 아래 있는 바닥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안락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층과 층 사이”의 ‘두터운 벽’이, 지금껏 견지해왔던 삶의 바닥에 실금을 내고 있지 않는지 의심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02-17
길은 길게 기더라 배밀이로 기어서 갈 길 올 길을 빤히 보여주거나 대문 앞까지 안전하게 길손을 배송하더라 (중략) 길은 제 방식의 길을 버리지 않는 고집이 있더라 나서부터 물 발자국 아래 기었고 밟혔고 움직이는 목숨들의 길이 되는 생 자기는 맨바닥까지 낮추는 이타의 길, 눈부셔라 연달래 꽃장화를 신은 듯 갓길 꽃빛도 곱더라만. 시는 사물의 이미지를 재창출하여 삶과 세계를 새로이 생각하게 이끈다. 위의 시는 ‘길’의 이미지를 재창출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나, 우리 삶을 밑에서 받쳐주는 존재자가 있다. 길이 그렇다. 길은 “자기는 맨바닥까지 낮추는/이타의 길”을 살아간다. 길은 자신을 배밀이로 간신히 밀어내면서, “움직이는 목숨들의 길이 되”어 살아가는 것. 가끔 길의 이 고단한 길을 “갓길 꽃빛”이 곱게 단장해주기도 하지만. 문학평론가
2025-02-16
아름다운 것은 쉽다 수리 발톱 같은 뿌리로 흙을 틀어쥐고 흙 속의 피를 빨아올려 태양계속에 벨벳보다 부드러운 수백 겹의 겹눈을 굽는다 푸르고도 연하고도 날카로운 가시는 대기 속의 화농을 쿡 찌른다 조롱도 자부심도 이 밀도 앞에선 잠잠 들어간 자는 나올 수도 나온 자는 들어갈 수도 없으니 이 감옥에서는 늘 불 냄새가 난다 (하략) 위의 시에 따르면, 장미는 역설적이게도 공격성을 통해 아름다움을 얻는다. “흙 속의 피를 빨아올”리고 태양빛을 받아 부드러운 이파리들을 구워내는 불로 사용하니. 이 공격성은 연하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로 대기 속의 화농을 찔러 터뜨리는 데서도 나타난다. 하여 그 가시로 대기는 더 깨끗해지는 것, 세계의 정결함을 지켜내는 가시는 장미 넝쿨을 함부로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요새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2-13
함성과 비명, 피비린내는 가라앉고 주검이 널렸던 골짝은 역사가 되었다 공주에서 부여로 통하는 우금치골 도대체 어디로? 분노에 떨며 솟아올랐던 호미, 낫, 쇠스랑, 대나무 창 회오리치던 바깥세상에서 볼 때 그들의 주먹이야 바위를 치는 계란 여기를 빠져나갔어도 어차피 죽음이 기다렸을 거라면 떠도는 혼백들에게 위로가 되랴 너무 몰랐다 안방에서 큰소리치던 권력자들도 운명이라 체념하던 천한 것들도 좁혀오는 그물에 갇혀 파닥이던 물고기 방향도 모르고 내달리던 울분. “안방에서 큰소리치던 권력자들”은 모른다. 민중 속으로 퍼져나가는 분노를. 해소되지 못한 분노는 언젠가는 터질 터이다. 피비린내를 동반하면서. 동학 민중 봉기처럼. 비록 그 봉기가 “바위를 치는 계란”과 같았다고 하더라도, “좁혀오는 그물”처럼 “어차피 죽음이” 다가왔을 세상, 죽임을 당한 동학 농민들은 자신의 봉기를 후회하지 않으리라. 민중의 울분을 무시하는 권력이란 결국 몰락함을 역사는 가르쳐준다. 문학평론가
2025-02-12
올해도 살아서 벚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평생 몇 번쯤 벚꽃을 보는 걸까요 철 드는 게 열 살쯤이라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일흔 번쯤 서른 번, 마흔 번인 사람도 흔하니 얼마나 적게 보는 것일까 훨씬 더 많이 본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조상의 시각도 섞이고 겹쳐서 흐릿해진 탓이겠지요 요염하다 해도 아리땁다 해도 섬뜩하다 해도 포착하기 어려운 꽃 색깔 꽃보리 아래를, 슬슬 걸어가면 일순 고승처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보통 상태 일본 시인 노리코가 노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쓴 시. 매년 피고 지는 벚꽃을 본다는 일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 시인은 계속 살아 벚꽃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계속 보다보면 “훨씬 더 많이 본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인데, 그것은 조상의 시각이 자신의 눈에 겹쳐지기 때문이라는 것. “포착하기 어려운 꽃 색깔”을 가진 벚꽃은 삶 속의 죽음을 드러내기에 그렇다. 죽음이야말로 ‘보통 상태’라는 것을. 문학평론가
2025-02-11
가을이 소멸되어 가는 끝자락 적상산 안국사에 올라가 보면 산천은 갈갈 가을 색으로 앓고 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신선하여 깊고 마음마저 깊어지는 극락전 앞에 서서 먼 산을 향하면 구름안개 물결치는 파도도 보이고 겹쳐 있는 산 능선이 유독 아름답다 욕심 없이 살라는 가르침 뒤로 자연과 사람이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겠다 삶의 한 구비를 돌아 삶의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이라면, 저 “가을이 소멸되어 가는” 풍경과 삶을 겹쳐놓게 될 테다. “자연과 사람이/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갈갈 가을 색으로 앓고 있”는 산천이 보여주는 풍경은 아름답다. 바람도 신선하다. 새로 청명한 삶을 맞이할 마음이 생긴다. ‘나’에게 저 아름다운 자연이 스며들며, 남은 삶을 자연처럼 “욕심 없이 살라는 가르침”을 건네준다 문학평론가
2025-02-10
떠남과 머묾이 한자리인 강물을 보며, 무언가를 따지고 누군가를 미워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나쁜 생각인 줄 모르고서 흘러도 답답히 흐르지 않는 강을 보면서, 누군가를 따지고 무언가를 미워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상하지 않고 오직 나만 피 흘리는 중이란 걸 모르고서 그리고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 줄도 까맣게 모르고서 사실, 저 강물이 암시하듯이 누군가를 떠나고 누군가에게 머무는 것이 삶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평화롭지 않다. 시에 따르면 “무언가를 따지고/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고생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고생 속을 헤매는 삶은 흘러도 흐르지 않는 것 같고, 이 따짐과 미움이 결국 자기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 그것이 “아무것도 상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정말 다행이라고 시인은 한 번 더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2025-02-09
거대한 유리천장입니다. 사람들이 눈송이로 내려 유리 위에 소복소복 쌓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려도 방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 안은 저렇게 따뜻한데, 몸을 녹여 물로 수증기로 되돌아갈 수 있는데. 다른 길을 찾아보자 라고 말하며 구름 위의 물방울들은 동요합니다. 그러다 한 물방울이 뛰어내립니다. 어쨌든 우린 함께 있잖아. 난 저기로 갈래. 결심한 나도 뜁니다. 아득한 추락의 느낌, 단단한 물의 분자가 눈으로 바뀌는 팽창의 순간을 지나고…. 사뿐히 내려앉습니다. 그리고 느낍니다. 두껍고 거대한 유리천장에 잔금이 가는 소리.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해방에 도달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해방은 광장을 거쳐야 함을 말해준다. “우린 함께 있”다는 각성과 더불어, ‘유리천장’ 때문에 도저히 따듯한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여겨졌던 마음을 바꾸고, 그 유리천장 위로 함께 뛰어내리는 것. 그때 물방울은 눈으로 팽창하며 유리천장을 무너뜨리고 해방의 삶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 광장은 이 해방을 향한 ‘함께 함’의 상징적 공간이라 하겠다. 문학평론가
2025-02-06
황혼이 길을 잘못 찾아들어 항구의 저녁이 유난히 아름다웠다고 하자 주머니에 손을 찌른 사람들의 눈이 붉었던 것은 드럼통에 지핀 불이 메웠기 때문이라 하자 왜 아늑한 것들은 멀리서 반짝이는지 어떤 저녁에는 코에 익은 비랜내도 오래된 노래처럼 서러워지는 거라고 하자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은 새들이 좁쌀 같은 온기를 물고 날아갔기 때문이라 하자 삶의 황혼에 들어서기 시작하는 이는 황혼이 깔리는 늦가을 날 하늘을 보면 유독 쓸쓸함을 느낄 테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 앞에서는 슬픔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위의 시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이제 삶을 뒤돌아보게 되는 나이엔 “아늑한 것들”이 “멀리서 반짝이고”, “보이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 모든 감각들이 “오래된 노래처럼 서러워”진다. 하나 이때가 가장 삶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는 나이인 것. 문학평론가
2025-02-05
나는 맞은편 기슭으로 가련다 강물이 하늘의 색깔을 고쳐 쓴다 나도 고쳐 쓴다 나는 움직인다 나의 그림자가 기슭에 물든다 번개에 타버린 나무같이 나는 맞은편 기슭으로 가련다 맞은편 기슭의 숲 속에서 고독한 산비둘기 한 마리 푸드득 놀라서 내게로 날아온다 세계를 유랑하는 중국의 저항 시인 베이다오의 시로, 시인의 다짐이 잘 드러나 있다. 그에게 저항이란 “맞은편 기슭으로 가”는 일, 그곳은 “강물이 하늘의 색깔을 고쳐” 쓰기에 “나도 고쳐” 쓸 수 있어서다. “번개에 타버린 나무같이” 된 자신의 그림자가 물들 수 있는 곳. 번개란 진실을 말함일까. 여하튼 기슭에서의 삶은 고독을 사는 일이나, 그곳에서 고독한 ‘산비둘기’가 시인에게 날아와 동지가 되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5-02-04
지나온 날 돌아보면 뜨거운 여름은 혁명 성장기 가을과 겨울은 비폭력 혁명 수행기 꽃 다투어 피는 봄은 혁명 대폭발기 그렇다 푸른 숲 연초록 논밭은 영구평화론을 위한 무위이화 근거지였던 것이다 날은 저물고 길은 아득한데 나는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영구혁명론은 세습되는 것이다 혁명은 폭동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것, 현실에 쫓기며 자신의 삶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이들 중 일부는 혁명을 꿈꾸기도 한다. 진정한 혁명은 무엇인가. 시에 따르면, 자연의 시간은 영원히 순환하는 혁명을 보여준다. 저 “푸른 숲 연초록 논밭”이야말로 영구혁명을 통한 영구평화를 이루어낸 존재자이며, 노자가 말한 저절로 이루어지는(무위이화) 혁명과 평화의 근거지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세습되는 영구혁명론. 문학평론가
2025-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