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똘히 걷다가 휘영청 밝게 뜬 super moon을 봅니다 여태껏 본 달 중 가장 크고 멋진 달입니다 마냥 들뜬 나는 입을 열고 쏟아내고 싶은 수다가 있었습니다 귀를 열고 듣고 싶은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념 없이 혼자였습니다 필자도 ‘슈퍼 문’을 보고 그 아름다움과 황홀함에 넋을 잃고는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떠벌이고 싶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주위에 마음 편히 그 아름다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대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사무치는 고독감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시인도 이러한 경험을 했던 것이리라. 자연이 가끔씩 제공해주는 기막힌 아름다운 현상에 인간은 더욱 초라해지는 모습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날이다. 문학평론가
2024-12-26
모여 있는 이유를/ 한 번쯤 물어야 한다 백 년 전 황토현이 그랬고/ 아우내 장터가 그랬고/ 지구의 모처들이 그랬듯 자작나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있다 모여든다는 것/ 장미 넝쿨이 담장으로/ 폭죽 터지듯 피는 여름이 그렇고/ 다랑논과 밭이 그렇고/ 넓이를 따지지 않는 계절이 그렇다 자작나무 숲을 보면/ 세상의 것들 대부분/ 차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산다/ 서로 같은 처지를 곁에 두고/ 희끗희끗 위로하고/ 위로받고 있다 왜 모든 존재자들은 모여 있는 것일까. 시인은 묻는다. 저 자작나무들을 보라. 자발적으로 모여 있지 않는가. 여름 담장의 장미 넝쿨도 그렇다. 논과 밭, ‘아우내 장터’, 계절 자체, “세상의 것들 대부분”이 그렇다. 시인의 대답은 “같은 처지를 곁에 두고” “위로하고/위로받”기 위해서라는 것. 하지만 이 모임은 무기력하지 않다. 장미넝쿨은 “폭죽 터지듯” 붉고, “백 년 전 황토현”에서는 혁명의 힘이 되지 않았던가. 문학평론가
2024-12-25
욕설 한번 되게 먹여 주리라 벼르던 사람이 초인종 누르고 현관문을 연다 들어서는 순간 결심을 놓쳐 버리고 ‘어서 와’라며 조금 반겨 버리고 말았다가빠지던 숨을 고르다가 마침 씻고 있던 딸기 한 알 그 입안에 넣어 주고 말았다 나도 모르는 비겁한 순발력이었다 함부로 웃음을 내놓진 않았지만 제대로 역정을 내놓지도 못했다 마친 딸기를 씻던 중이어서. 아마 욕설을 퍼부으려고 한 대상은 시인의 남편 아닐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은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하지만 집에 들어온 그에게 욕은 하지 못하고 씻고 있던 딸기 한 알을 그이의 “입안에 넣어 주고 말았다”고.‘딸기는 힘이 세다’라고 할까. 신선한 과일을 씻는 행위와 욕설은 어울릴 수 없는 일, 게다가 딸기는 남에게 먹이고 싶을 만큼 맛있지 않는가. 화를 누르고 기쁨을 나누게 하는 딸기의 힘! 문학평론가
2024-12-23
순백의 어둠 속, 눈의 거대한 침묵 속에서, 한 아이가 한숨 쉬며 비통하게 말하는 중이었다. “오, 그들이 저 위 둥지 속 하얀 새를 죽여서, 솜털이 가슴팍에서 퍼덕거리며 떨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여전히 솜털은 저 거무스름한 광채 사이로 떨어졌다. 눈새 때문에 울고 있는 아이 위로. 1차 세계 대전에서 39세 나이로 전사한 영국 시인 에드워드 토마스의 시. 이 시가 보여주는 아이의 시적인 상상력은 폭력에 노출된 세계에서 형성된 것 같다. 눈(雪)을 ‘그들’이 죽인 ‘하얀 새’의 “퍼덕거리며 떨어지”는 ‘솜털’로 보는 상상력. ‘그들’은 누구인가. 적의 군대일까? 여하튼 신은 “거대한 침묵” 속에 있고, “순백의 어둠 속” “거무스름한 광채”는 이 세계의 폭력성을 암울하게 드러내는 상징적 색채이다. 문학평론가
2024-12-22
발이 닿지 않아서 바닥이 사라져서 좋습니다 흔들려서 흔들리기 좋아서 한시도 멈추지 않아서 멈출 수가 없어서 앞으로 뒤로 꼭 그만큼만 가고 그만큼만 돌아와서 물러나도 더 물러설 수 없어서 물러난 곳이 하늘이어서 공중에 매달려서 날 수 있어서 아주 잠시 나비가 되어서 아이가 되고 놀이가 되고 구름이 되어서 그리고 지상에 닿았을 때 잠시, 어지러워서 좋습니다. 땅에 “발이 닿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나비가 되”거나 “구름이 되어서” 말이다. 이는 아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위의 시는 이 마음을 그네 타기를 통해 매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른은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산다. 하지만 앞뒤로 흔들리는 그네를 타면, 어른들도 하늘로 잠시나마 물러서서 “공중에 매달려서/날 수 있”게 해준다. 우리에게 황홀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2-19
이 한겨울에 우리 다시 만나니 슬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 눈물과 미소로 너를 바라본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 살아있는 네가 눈부셔 우린 꼭 이겨낼 거야 저들에겐 총이 우리에겐 빛이 (중략) 저들에겐 탐욕이 우리에겐 영혼이 저들에겐 총칼이 우리에겐 사랑이 저들에겐 파멸이 우리에겐 희망이 우리 인생의 ‘별의 시간’에 다치지 말고 지치지 말고 빛으로 모이자, 될 때까지 모이자 44년 만에 갑자기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총을 든 군인이 민의 기관인 국회를 침탈했다. 이후 열린 여의도 탄핵 집회에서 이 시를 처음 접했다. “저들에겐 총이”라는 말이 비유가 아닌 현실이 되었음이 지금도 가슴을 아프게 친다. 하나 탐욕을 위해 국민에게 겨눠진 그 ‘총칼’을, ‘우리’가 사랑과 희망으로 “빛으로 모”일 때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시인의 전언 역시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평론가
2024-12-18
니체를 풀밭에서 침실로 옮긴다 달그림자 찌걱거리는 소리 니체가 나체(裸體)로 날바닥에 눕는다 니체를, 벌거숭이별 하나를 어떻게 안착시켜야 오늘 밤 잠이 잘 올까 니체의 나신(裸身)을 끌어안고 침대에 덜컹 눕는다 한밤중에 핀 쑥부쟁이 꽃들이 쿵쾅쿵쾅 온몸에 폭죽 터진다 니체가 꽃핀다 니체는 거짓을 벗어던지고자 한 고독하고 독창적인 ‘사상가-시인’이다. 시인은 이 니체를 사랑한다. 풀밭 하늘 위에 ‘벌거숭이별’로 둥둥 떠 있는 니체를 옮겨 자신의 침실로 옮기는 것을 보면. 그는 이 별을 이곳에 안착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니체의 나신을 끌어안는다. 그러자 ‘온몸에’ ‘쑥부쟁이 꽃들’이 폭죽처럼 터진다. 시인의 온몸에 니체가 꽃피는 것이다. 사상에 대한 사랑을 감각적으로 보여준 흥미로운 시. 문학평론가
2024-12-17
손짓보다 계곡물이 먼저 건너간 곳에 커다란 나무가 벗은 한여름을 모아 누군가 낙엽하트를 만들어 놓았다 버석한 사랑 속으로 어른 두셋 풍덩 뛰어들 수 있는 큰 하트를 참 부지런한 사람도 다 있군 무심코 중얼거리는데 사랑의 장례를 치른 거라며 너는 사랑무덤이라고 했다 지나간 사랑을 낙엽으로 덮으면 타올랐다 온도를 다독일 수 있으려나 들여다본 네 눈 속에도 사랑이 지고 있었다 한여름 속에 함께 누웠던 네가 나를 두고 걸어 들어가 사랑무덤에 홀로 눕는다 여름이 지나고, 이제 겨울 앞. 낙엽이 졌다. 누군가 만든 커다란 ‘낙엽하트’를 ‘너’는 ‘사랑무덤’이라 지칭한다. 한창 타올랐던 여름의 사랑은 이제 지고, 그 사랑의 흔적을 가지고 지나간 사랑을 기념하듯 하트를 만들었기 때문. 그 하트 밑에서 사랑의 열기는 천천히 식어갈 터, 화자는 그런 말을 하는 ‘너’의 눈에서 지고 있는 사랑을 읽는다. 나아가 ‘네’가 그 사랑무덤에 홀로 들어갈 것임을 슬프게도 감지한다. 문학평론가
2024-12-16
어머니 당신의 희디흰 대리석 발 앞에 꽃을 놓아 드리려고 꽃을 땄습니다 (중략) 당신이 수천 개 뿌리 끝 마디마디에 스며들어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자란다고 안심했습니다 평화로운 새벽 흠 없이 하얀 새벽별이 있어 시작되는 모든 것의 선봉에서 빛난다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이별로 화석화된 가락 따스한 채로 굳은 가축의 젖 어머니 전 당신의 연속입니다 몽골의 현대 시인 바오긴의 시. 시인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조각상일까. 시인은 그녀의 “이별로 화석화 된” “대리석 발 앞에/꽃을 놓아드”리고는, 어머니의 육화라고 여겨진 그 꽃이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자”란다고 상상한다. “하얀 새벽별”은 “모든 것의 선봉에서” 빛나는 어머니의 혼. 이 별빛을 받으며 그는 어머니가 물리는 ‘젖’을 느끼고, 자신이 “당신의/연속”임을 깨닫는다. 문학평론가
2024-12-15
눈사람에게서 눈을 뺏어왔다 내 안에 있는 아홉 살 아이를 꼬드겨서 한 일이었다 마음은 그러라고 神이 내게 넣어준 것이었다 눈을 빼앗기고 사람이 된 눈사람이 집까지 쫓아왔다 같이 살자고 했다 ‘눈사람’은 누구일까? 그 ‘눈’은 雪의 의미만 아니라 目의 의미도 있겠다. 후자의 의미에서는 화자가 뺏어온 ‘눈’은 눈사람의 영혼이라고 할 테다. 그 영혼을 화자는 뺏어온 것인데, 그것은 화자 속에 있는 “아홉 살 아이”가 “꼬드겨서” 가능했다고. 그 아이는 신이 주신 순수함의 능력일 터, 누구에게나 신이 마음에 불어넣어준 ‘아이’가 있겠다. 눈사람은 그 아이를 따라 화자를 쫓아와 “같이 살자고” 한다. 사랑이다. 문학평론가
2024-12-12
멧돼지가 내려와 자꾸만 봉분을 허문다는 소식에 부모님 합장하기로 했다 천천히 무덤 열고 관 뚜껑 걷어내니 드디어 아버지가 보인다 누런 뼛조각 몇점 보인다 차곡차곡 쌓아놓은 유골 정수리에 손바닥 올리니 눈물 흐른다 아버님 어서 가요 어머님이랑 함께 모실게요 두분 오래 떨어져 힘드셨지요 필자도 할아버지 이장 때 본 뼛조각에서 아우라를 느낀 일이 있다. 시인은 합장하고자 관 뚜껑을 걷어내고 평생 함께 살아왔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뼛조각을 본 후, “차곡차곡 쌓아놓은 유골 정수리에/손바닥 올리”고 아버지를 느껴본다. 어머니와 떨어져 땅속에 있었던 아버지의 외로움이 느껴졌으리라. 가족의 유골은 단순한 뼛조각이 아니다. 죽었으나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입 가진 유골이다. 문학평론가
2024-12-11
(전략) 베인 자리의 살은 겹겹의 층을 이루고 있고 몸의 끝으로 갈수록 혈관은 좁아지고 갈래는 더 많아진다 잔뿌리 같은 혈맥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상처를 가만히 누르면 피가 멈춘다 여기는 피가 나올 곳이 아니니 원래 가던 길로 가세요 헝겊으로 손가락을 감싸 쥐고 바닥에 눕는다 등 밑으로 우툴두툴한 선로가 가로놓여 있다 피가 굳어서 딱지가 되거나 벌려졌던 살이 미세하게 접합되어 가면 출구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터널은 동굴처럼 느껴진다 바늘귀를 찾는 실 끝처럼 멀리서 기차가 천천히 터널을 향해 다가온다 우리는 가끔 살을 베여 얼른 ‘지혈’하는 일을 겪곤 한다. 시인은 이 지혈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피를 마음에 숨겨둔 기억이라고 생각한다면? 지혈은 그 기억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막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출구를 찾지 못한 ‘피-기억’은 동굴 같은 터널을 돌아다닐 것이다. 시는 이 터널을 돌아다니는 피를 기차로 환유한다. 시인의 내면 깊숙한 터널을 돌아다니는 ‘기억-기차’로. 문학평론가
2024-12-10
나비가, 흰나비가 어깨를 친다 고개를 떨군 슬픔의 무게만큼 무겁게 코끝을 스치며 날개를 흔든다 걱정하지 마 봄햇살이 따뜻하게 감싸니깐 난 흰나비가 되었거든 구름 밖으로 날아갈 거니깐 굵은 못 꽝꽝 박은 목관 틈새를 뚫고 가볍게 어둠을 벗어날 테니깐 (중략) 미안해하지 마, 날 딛고 일어서는 널 지켜주고 싶네 삶에 끌려 욕심부린 날들은 무명지에 둘둘 말아서 화장터에서 함께 태워버리게나 재가 된 내 뼛가루는 가볍게 강물에 날려버리게나 항아리에 넣어 다시 땅에 묻지 말게나 미련 없이 털고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에 힘이 붙도록 내 이름조차 비워주게나 날 부디 잊게나, 잊어주게나 시인은 화장터에 있다. 어떤 지인이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그이의 육신이 사라지는 시간, 시인은 그의 영혼이 화한 나비의 말을 듣는다. 나비는 ‘죽은 이’의 영혼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비는 슬퍼하는 시인을 위로한다. “날 딛고 일어서”라고. 그리고 자신을 완전히 잊어달라고, “내 뼛가루”까지 “강물에 날려버”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야 “가볍게 어둠을 벗어날” 거라는 것.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하게 하는 시다. 문학평론가
2024-12-09
벌써 일주일째 계속 엄마 생각뿐이다 잠깐 또 잠깐 멈춰 서서 삐걱거리는 바구니를 안고 옥상으로 서둘러 가셨지 난 아직 솔직한 인간이어서 소리 지르고 발버둥 쳤지 젖은 빨래는 남한테 맡기고 날 옥상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저 말없이 올라가 빨래를 너셨지 욕도 않고, 날 쳐다보지도 않고 빛나며 펄럭거리는 옷들은 바람에 높이 올라 빙빙 돌았지 울지 않을 텐데, 하지만 이제 늦어버렸지, 얼마나 거대한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보는 걸 하늘에 둥둥 더 있는 회색 머리 하늘 물에 푸른 가루를 푸시네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하다 요절한 헝가리의 국민 시인 어틸러의 시. 30대에 접어든 그의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담았다. 시인이 아이 때 본, 엄마의 이미지가 선명한 한 장면이 펼쳐진다. “날 쳐다보지도 않고”옥상으로 올라가는 ‘엄마’, “날 옥상으로 데려가 달라고” 울면서 따라가는 아이. 그리고 시인은 “빛나며 펄럭거리는 옷들” 속에서 “빨래를 너”시는 엄마가 “얼마나 거대한 사람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닫는다. 문학평론가
2024-12-08
새를 잠들게 하려고 새장에 헝겊을 씌운다고 했다 검거나 짙은 회색의 헝겊을 (밤 대신 얇은 헝겊을) 밤 속에 하얀 가슴털이 자란다고 했다 솜처럼 부푼다고 했다 철망 바닥에 눕는 새는 죽은 새뿐 기다린다고 했다 횃대에 발을 오그리고 어둠 속에서 꼿꼿이 발가락을 오그려붙이고 암전 꿈 없이 암전 기억해, 제때 헝겊을 벗기는 걸 (눈뜨고 싶었는지도 모르니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최근 발표한 시. 시 제목과 시 본문에 사용된 괄호는 어떤 의미일까. 마음 안에 품은 말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겉으로 드러내기 힘든. “(밤 대신 얇은 헝겊을)” 씌우는 일은 새가 암전 속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까. “꿈 없이/암전” 속에서의 “꽃꼿이/발가락을 오그려붙이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 그것은 고통일지도 모르지만, 이때 “하얀 가슴털이” “솜처럼 부”풀 수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4-12-05
노을 비치는 돌담에 기대 널배 하나 서 있다 소금기에 전 몸은 붉어지지 않는다 석양에 물든 바다가 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몰골을 타고 들어오는 바다 냄새를 찾다 뻘에 박힌 장화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루도 뻗히게 보냈으리라 머지않아 몸이 작아져 바다가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하늘만 보일 때 물도 뭍도 아닌 곳에 깊이 가라앉아 배였다는 것을 기억해 줄 누군가를 오래 기다릴 것이다 돌담까지 밀려오는 어둠에 숨어 널배 한 척 아직 서 있다 “돌담에 기대” 서 있는 ‘널배 하나’에서 시인은 노동의 고단함을 읽는다. “뻘에 박힌 장화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오늘 하루도 뻗히게 보냈”을 널배의 노동. 이 노동으로 몸은 바다의 소금기에 절지만, 널배는 저 석양 속 바다는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반면 “머지않아 몸이 작아”지며, 결국 “물도 뭍도 아닌” 뻘에 깊이 가라앉을 널배의 삶. 자신이 “배였다는 것을 기억해 줄/누군가를 오래 기다”리면서. 문학평론가
2024-12-04
꽃은 하늘로 날고 싶어 얼굴 속으로 하루종일 햇빛을 모았네 뒤통수로는 비를 맞았네 툭하고 목을 끊어주길 하늘로 둥둥 떠오르게 누군가 목을 끊어주길 여름내 기다렸네 피고 또 피었네 가느다란 끝에서 숨을 쉬었네 꽃은 하늘로 날고 싶어 얼굴 속이 점점 깊어졌네 목구멍이 검게 타올랐네 툭하고 목을 끊어주길 하늘로 둥둥 떠오르게 누군가 목을 끊어주길 기다리고 기다렸네 꽃은 하늘로 날고 싶어 우리는 꽃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입장에서 평가하곤 한다. 정작 꽃의 입장은 어떨까? 위의 시는 꽃의 입장을 상상한다. 꽃이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것은 “하늘로 날고 싶어”서라는 것. 하여 꽃은 누군가 자신의 목을 끊어주길 기다리며 피어난다. 지기 위해 피어나는 꽃. 피어남은 비상에의 갈망으로 “하루종일 햇빛을 모”으면서, “얼굴 속이 점점 깊어”지고 “목구멍이 검게 타오”르는 고통을 짊어지는 삶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2-03
환희의 기억이 별반 없는 나는 주로 밤이면 내가 살아온 길을 신랄하게 아파했다 그런 날이면 아주 일찍 죽은 자들은 지금쯤 다시 살아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성의 있게 이름을 불러 보곤 했다 어머니, 누님 구자이모 아랑삼촌 명환이 문성이 따지고 보면 이건 나를 부르는 소리다 죽은 나를 돌려 세우고 살아났으면 무언가 새로 켜기를 기대하는 것 끄지 말고 켜기를 (중략) 나는 지속되고 싶은 게 아니라 두근거리고 싶은 것이다 시인은 일찍 죽은 자들을 아프게 기억하면서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정성껏 부른다. 이 행위는 결국 “나를 부르는” 일이다. 시인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삶 역시 죽어버렸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하여 죽은 이들의 재생을 위한 호명은 내가 “죽은 나를 돌려 세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삶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 켜”는 삶, 단지 지속하는 삶이 아니라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사는 삶이다. 문학평론가
2024-12-02
사람들이 칭찬한다 해도 그걸 믿을 이유가 없으니 누군가 그대를 칭송하면 모략을 기다리라. 자신을 믿으라, 모두가 그대를 도우리라 그대의 수고와 지혜를 양쪽에서 붙잡고서. 순진함은 닥쳐오는 모든 재앙의 담보이니 어디에 알맹이 없는 허튼 소리의 칭찬이 필요한가? 속아 넘어간 다른 이들처럼 나 또한 속았노라 그대는 유령을 따라 달리겠는가? 슬픔에 흔들리지 말고 자기 정신을 단련하라 의심스러운 유혹에서는 귀머거리가 되라. 자신에게 몰두하고 심장의 본질을 얻으라, 거기에는 주위에 없는 진실이 있으니 아바이 꾸난바이올릐는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카자흐스탄의 국민 시인. 주로 삶의 교훈을 전하는 시를 썼다. 위의 시는 21세기에 사는 우리 마음에도 새겨지는 현재성이 있다. “허튼 소리의 칭찬”에 속아 넘어가지 말 것. 순진함은 찬양할 가치가 아니라 “모든 재앙의 담보”이며, 오직 “자신에게 몰두하고 심장의 본질을 얻으라”는 것. 이때 비로소 타인은 그대를 속이려는 이가 아니라 돕는 존재가 되리라는 것. 문학평론가
2024-12-01
다 부서진 별들이 부엌 바닥에 수북하다 개수대 배수구에도 건조대 언저리에도 행주로 훔쳐 담으면 반짝거리는 분노 발뒤꿈치에 박혀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환멸 갇혀 사는 자의 감정이 페달 쓰레기통에 차곡차곡 넘쳐난다 가루가 된 별들이 거실로 흘러 들어간다 안방으로 화장실로 해무(海霧)처럼 전진한다 그래도 같이 살아요, 우리는 밥을 함께 먹는 짐승들이잖아요 밤하늘의 별은 부서지면 찔레꽃이 된다 집게발을 잘라내고 뒷덜미를 움켜잡으며 꽃가루 같은 별들이 새벽하늘을 갈아 끼운다꿈을 상징하곤 하는 “밤하늘의 별”들. 알다시피 생활에 치이다보면 그 별들은 부서져버리곤 한다. 그때부터 우리는 환멸에 갇혀 살 터, 하나 시인은 “가루가 된 별들이” 해무처럼 생활공간을 떠다니며 ‘전진’하고는 “찔레꽃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여 그는 부서진 별들의 가루-꽃가루-들이 새로이 “새벽하늘을 갈아 끼”우리라면서, 같이 사는 “우리는 밥을 함께 먹는 짐승들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