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 어떤 색깔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법, 김상미 시인에게는 녹색이 그렇다. 그에게 이 색은 쓸쓸함을 깊이 느끼게 한다. 쓸쓸함의 감정이란 그에게 무엇인가. “모든 것을 갉아먹는” 바람 같은 것, 그래서 몸과 마음을 슬게 하는 것이다. ‘굳센 내면’도 무너뜨리게 만드는 쓸쓸함은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일어난다. 시간이 멈추는 실연으로 인한 쓸쓸함, 하여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를 사는 삶. 문학평론가
2025-04-02
그때 뱀이 뱀을 벗고 새로운 생을 구불구불 뒤틀면 풀숲으로 사라져 갔다 (중략) 빛 속으로 뱀처럼, 나는 나를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벗고 영원한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영겁의 둘레에 가라앉아 한 개의 피리가 되는 꿈을 꾸면서, 조용히 똬리를 틀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혼다 하시시는 한국 시인들과도 친한 일본의 시인. 우리 모두 갑자기 “나를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 않는가. “뱀이 뱀을 벗”듯이 말이다. 그것은 “새로운 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 시인은 “영원한 저편으로/사라지”는 생을 열망한다. 그는 사라져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영겁’ 속에서 “똬리를 틀”면서 “피리가 되”고 싶은 것. 즉 영원히 음악을 연주하는 생이다. 우리는 나를 벗는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문학평론가
2025-04-01
연습된 표정에 빙의 되어 살아왔으니 나의 유일한 성공은 정면이 나의 얼굴이라고 믿는 너의 오해 손에 닿는 촉감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굴곡진 슬픔의 근육들 때문이지 아직도 모르겠니? 뒷모습을 네가 보았다면 또박또박 새겨진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 텐데 텅 빈 이면만이 나의 진실이었으므로 답하지 않음으로 답했으므로 연인이나 친구처럼 친밀한 관계에서도 위 시의 표현대로 “연습된 표정에 빙의 되어” 사는 것이 사실이다. 그 표정의 정면을 ‘너’가 “나의 얼굴이라고 믿”기를 원하면서. 하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그 정면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네가 읽어주는 것일 터이다. 그 진실이란 표정 뒤에 있는 텅 빈 이면지에 슬픈 근육들로 새겨지는 마음. 이 마음은 시각이 아니라 “손에 닿는 촉감”, 그 낯선 감각에 의해 읽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5-03-31
2025-03-30
2025-03-27
사내의 생활에는 별 변화가 없다 사내는 단지 사회 상황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위치가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내의 머리통에는 뉴스의 내성이 생겨 매일 좀 더 많은 양의 뉴스를 원한다 뉴스가 없는 날 아아 사내는 미칠 것 같다 사내는 전쟁이든 최첨단의 정보든 유언비어든 스캔들이든 뭐든지 새로운 것을 원한다 좀 더 새로운 것에 미쳐가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내는 라디오 이어폰을 뇌에 박고 뉴스를 기다리며 잠자리에 든다 뉴스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의 삶. 위의 시를 시인이 쓸 땐 라디오를 통해 뉴스를 들었다면, 현재 우리는 유튜브에 중독되어 뉴스를 보며 산다. 여전히 “매일 좀 더 많은 양의 뉴스를 원”하면서. 새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소비하면서 현대인은 그 “좀 더 새로운 것에 미쳐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현대인의 “생활에는 별 변화가 없”는 것. 뉴스는, 새롭게 변모하나 늘 동일한 현대의 모순을 확연히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5-03-25
한 발만 더 디디면 벼랑인데 바로 저기서 뿌리를 내리는 소나무가 있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는 늘 바르르 떨고 있는데, 에멜무지 금방 새로 변해 날아가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아슬함으로 잔뜩 발돋움한 채 바르르 떨고 있는데, 아직도 훌쩍 날아가지 않고 서 있는 저 나무가 기다린 것은 무어냐 예로부터 시인은 자연 사물의 속성이나 현상에서 인간이 따라야할 드높은 정신이나 의지의 표상을 찾아내곤 했다. 위의 시에 나오는 소나무 역시 그러한 표상. 아슬아슬하게 벼랑에 매달려 있는 소나무. “새로 변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벼랑 끝에 매달려 있지만, 소나무는 마치 이 극한의 지점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목숨의 끝에 이르기까지 무엇인가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듯이. 문학평론가
2025-03-24
눈썹과 아이라인을 그린다 상사 앞에서는 눈꼬리가 처지지 않게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킬 때는 두 눈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중략)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얼굴부터 살핀다 이마와 눈가에 주름 개선제를 바른다 아내의 잔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두 개의 직장을 가진 남자는 잠자기 전 화장을 지우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우면 맨 얼굴로 돌아가는 남자 화장한 얼굴이 자기 얼굴인지 클렌징한 얼굴이 자기 얼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뒤척뒤척 남자도 화장을 한다. 화장은 세상의 시각에 맞추어 자신의 얼굴을 가꾸는 행위. 직장에 가면 상사와 ‘아랫사람’ 앞에서 그들에 걸맞은 표정을 꾸며야 한다. 집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내의 심기에 표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 중년이 된 남자는 돈벌이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화장하는 삶을 힘겹게 살아야 한다. 위의 시는 유머러스하지만, 이젠 진짜 자기 얼굴이 헷갈리게 된 현대인의 생활을 씁쓸하게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5-03-23
스무 살의 나는 하루에도 아홉 번씩 죽었다 서른 살의 나는 이따금 생각나면 죽었다 마흔 살의 나는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죽는 법을 자꾸 잊는다 무덤 속에서도 자꾸 살아난다 사는 일이 큰 이득이란 듯, 살고 살아나면 살아버린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 산문이 있었다 그걸 쓰느라 죽을 시간이 없었다! 위의 시의 ‘죽음’은 물론 상징적 죽음이다. 기성의 나를 죽이고 다른 내가 되는 과정이 고통을 동반한 성장이다. 시에 따르면, 스무 살 때 이런 시적인 죽음이 많이 일어난다. 하나 이 죽음은 ‘마흔 살’이 되면 ‘웬만해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나이엔 “죽는 법을 자꾸 잊”거나 죽어도 무덤에서 소생하기에. “서른과 마흔” 사이는 ‘산문’을 써나가야 하는, ‘살아버려야’ 하는 시기, 이땐 “죽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5-03-20
옆자리에 개를 데려온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이 개를 안고 다른 사람은 곁에 앉고 둘은 서로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랑하면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개를 안고 비를 바라보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 개에게 간식을 주고 자기들의 책을 잃겠지 처마 아래서 사람들이 우산을 턴다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살 테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논하는 이들은 사랑 속에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사랑을 갈구하니까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것. 비 내리는 풍경을 “개를 안고” 무심히 바라보는 저 커플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에 빠져 있어서 무심히 개에게 간식을 주고 각각 책을 읽는 이들의 모습은 미소를 띠게 만들면서도 부러움을 일으킨다. 문학평론가
2025-03-19
방 보러 다니다가 본 가지런히 쌓인 연탄 위로 흰 눈이 어색하니 내려앉고 있었다 싸늘한 하늘을 뒤집어쓴 골목 어귀 어쩌다 저 깊은 지층은 이 동네까지 올라와 있나 (중략) 아랫목이 사라진 요즘의 방들이지만 연탄이 쌓여 있는 집들은 아직도 따뜻한 아랫목이 있다는 뜻이지 이미 우주에는 별들이 많고 방 한 칸은 몇억 광년 밖에서 깜빡깜빡 식어가고 있다 몇억 년 전의 지층에 신세 지고 있는 달과 가까운 집들이 있다 이제 도시 시내에서 연탄을 보긴 힘들다. 하지만 뒷골목 언덕 달동네에는 문 앞에 놓인 연탄을 볼 수 있다. 연탄을 때야 하는 가난한 이들의 집. 위의 시는 연탄이 깊은 지층에서 올라온 것이며, 이 드러난 지층과 달빛이 만나는 곳이 “달과 가까운 집”인 달동네 집이라며 우리의 시각을 전도한다. “아직도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그 집들이 한낱 가난한 곳이 아니라 우주와 지하가 만나는 성스러운 장소라는 전도. 문학평론가
2025-03-18
남쪽 팽나무 언덕 바닷가에도 그때 그날처럼 사윈 동백꽃 목 톡톡 부러지고 있겠지 못다 핀 꿈 활짝 피워보고 싶어 쥐어뜯듯 허공을 후비며 떨어졌을 꽃 모가지들 바다는 비늘을 벗듯 실 빛살 껴안은 채 잔 숨 몰아쉬는데 마른버짐 돋은 주홍빛 살점들만 땅바닥에 뒤척이며 서걱서걱 진저리 친다 사월이면 남쪽바다는 왜 시리도록 꽃물이 드는 걸까 둥지 찾고 있는 그들을 깊이깊이 가두어 두고 이제 사월이면, 언제나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된다. 현재 사월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참사에 희생된 아이들을 사월에 지는 동백꽃에 비유하는 위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 속으로 떨어진 “꽃 모가지들”로. 하여, 사월의 진도 앞바다는 “주홍빛 살점들만” “서걱서걱 진저리” 치는 이미지로 현상하면서, “시리도록/꽃물이” 들게 되는 것이다. 그 바다 속에는 여전히 “둥지를 찾고 있는” 아이들이 갇혀 있는 채로. 문학평론가
2025-03-17
잠시 죽은 척 한다면 깊은 잠보다 편안할 건데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더 좋겠지 천국에 가면 아무도 못 만날 것이 두렵기에 잠시 죽은 척 한다면 깨어나 사람들이 웃는지 우는지 볼 것이고 나는 웃을 건지 울 건지 귀신이 사람보다 행복할까? 잠시 죽은 척 한다면 작은 삶이 흘러가도록 침묵할 것이다 사람들이 영안실로 몰려온다면 그대로 죽어도 괜찮겠지! 응웬테호앙링은 1982년 생 베트남의 비교적 젊은 시인. 그는 “잠시 죽은 척” 해서라도 “깊은 잠보다 편안”한 상태를 잠시라도 갖기를 원한다. 그러면 자신의 죽음에 사람들이 “웃을 건지 울 건지” 알 수 있다는 것. 그는 지옥으로 가길 원한다. 천국에는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나아가 ‘~척’이 아니라 “그대로 죽어도 괜찮겠”다는 그의 독백은 현 베트남 젊은이의 고단하고 우울한 심정을 잘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5-03-16
떠돌던 바람이 늦은 저녁의 눈을 읽을 때면 수련 잎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저녁은 소리 내어 일러 주었다 다시 책을 읽는다 아득한 독서의 속도에 부딪혀 나는 까마득히 정신을 잃는다 어둠의 심장을 깊숙이 베어 물며 입술을 닦는 그대 나는 무수히 죽어나 살아난다 숲속에는 피 냄새가 진동해. 나뭇잎들이 수군거리며 숲의 낌새를 읽었다 읽다 빠져나온 책 속이 캄캄하다 우리는 세계의 무엇인가를 읽으며 살아간다. 그것은 세계가 알려주는 어떤 뜻과 자신의 마음을 겹쳐놓는다는 것이다. 위의 시의 시인은 ‘저녁의 눈’을 읽고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저녁에 그는 책을 읽고 있다. 존재를 빨아들일 만큼 강렬하게 읽히는 책을. 그 책을 숲에 비유한다면, 그 숲에는 “무수히 죽거나 살아”나는 ‘나’의 “피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캄캄한 무(無) 위에 펼쳐진 숲. 문학평론가
2025-03-13
미끄러운 세상을 지나 헐벗은 비탈을 지나 부끄러운 마음을 지나 동지를 지나 허전해진 동면의 밤을 지나 돌아가는 곳 따뜻한 아랫목 할머니의 온기를 따라 가족들이 웅크리고 발을 넣던 곳 고구마를 구우며 깊게 묻어둔 감자를 들어내며 화로의 숯들이 발갛게 익던 곳으로 어릴 때, 추운 겨울날 거리를 걸을 때 오직 생각했던 것은 어서 귀가해 ‘따뜻한 아랫목’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인생 자체가 겨울이 된 현재, 나를 품어주는 아랫목은 없다. 시인도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닐까. 미끄럽고 헐벗은 세상과 부끄럽고 허전한 마음을 지나 귀가할 수 있는, “가족들이 웅크리고 발을 넣던 곳”이 예전엔 있었지만, 이제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위의 시가 슬픔을 주는 건 이 때문이겠다. 문학평론가
2025-03-12
아버지 성묘 다녀 온 겨울 숲에는고라니 발자국들이 지그재그로 찍혀 있었다 고라니가 숨어서 보았을 텐데,차례상 거두는 손길에 참 실망했겠다 북어포 찢어 던져놓고 올 걸곶감 서너 개 뿌려줄 걸 돌아오는 길,하트모양 발자국들이 배고프다고내 마음밭을 헤집었다여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작은 징표도 지나치지 않고 마음 쓰는 시인의 영혼. 성묘 다녀오며 시인은 하트 모양의 고라니 발자국을 발견한다. 그 모양은 배고파하는 생명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시인은 성묘 상에 올려놓았던 음식의 일부라도 던져놓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묘 안에 계시는 아버지가 자신의 묘로 시인을 불러들이는 이유가, 숲속의 생명들에게 조금이라도 음식을 나눠주라는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문학평론가
2025-03-11
나, 신나게 땅에 떨어질래 곽 찬 한 알의 온 무게로, 전속력으로 땅에 처박히겠어. 단숨에 땅을 들이받겠어 이 순간이 영원인 것처럼, 내 둥근 몸이 전 지구인 것처럼 단단한 땅을 부수고, 흙이 울리는 소리를 들을래 사방에 부서지는 사과 향기를 흩뿌리겠어, 황홀하도록 꼭지와 씨앗이 도려내진 채 청과상 쇼윈도에 갇히느니 냄새 없는 무늬처럼 비닐에 담겨 누군가의 접시로 실려가 조용하고 우아한 칼놀림 아래 같은 크기로 8등분 되느니 아, 차라리 떨어져 깨지겠어, 속살 드러낸 난만한 붉음이 되도록 큰 소리로 소란스레 바람을 일으키면서 쿵! 모든 삶은 추락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저 나무에 매달린 사과처럼. 위의 시의 사과는 그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온 무게로” “땅에 처박히겠”다고 다짐한다. 하여 자신의 추락이 “단단한 땅을 부수고” 흙을 울리도록 하겠다고, 쇼윈도에 갇히거나 누군가에게 먹히느니 완전히 깨어져 “사방에 부서지는 사과 향기를 흩뿌리겠”다고 말이다. 아마 시인이란 존재는 이런 다짐을 하는 이가 아닐까 한다. 문학평론가
2025-03-10
그것은 아름답고 둥근 푸른 눈의 바보 같은 영원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스스로를 영원의 하얀 눈(目)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제 오로지 영원만이 그것을 이해한다 영원의 포옹은 그것의 욕망을 닮아 말이 없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영원의 모든 그림자를 제 안에 포착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다른 어떤 아름다움도 그것은 알아채지 못한다 오직 영원밖에는 머리로 그 대가를 치룬 이것밖에는 바스코 포바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살았던 모더니즘 시인. 위의 시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으나 응시하지는 않는 조약돌 한 개를 보여준다. 시인은 그 조약돌에서 영원을 향한 갈망을 발견한다. 그것이 영원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영원의 하얀 눈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을 읽어내면서. 조약돌은 ‘제 안’에 있는 “영원의 모든 그림자를” ‘포착’하면서 영원을 찾아내는 바, 그 탐색은 “사랑에 눈이 멀어” 이루어진다. 문학평론가
2025-03-09
마음이 울적할 때 따뜻한 침대에 누우면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더는 힘들게 애쓰지 말고, 가을바람에 떠는 나뭇가지처럼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면 된다. 그런데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좋은 침대가 하나 있다. 다정하고, 속 깊고,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우리의 우정이다. 슬프거나 냉랭해질 때면, 나는 거기에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힌다. 따스한 우정의 침대 안에 내 사고(思考)를 맡겨 버리고, 외부의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나 자신을 방어할 필요도 없어져서 마음은 이내 누그러진다. 괴로움에 울던 나는 우정이라는 기적에 의해 강력해져 무적이 된다. 동시에 모든 고통을 담을 수 있는 든든한 우정을 가졌다는 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 젊은 시절 그는 산문시를 썼다. 위의 시에서 그는 우정을 “누우면 기분이 좋아”지는 침대로 비유한다. 들어가면 깊고 다정한 느낌을 주는,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침대. 외부의 추위를 막아주는 우정 안에서 그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기적적인 힘을 가질 수 있었다고. 우정이 삶의 침대가 되었던 때를 기억해본다.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힐 수 있었던 우정의 공간을. 문학평론가
2025-03-06
나는 놀이하는 천재를 좋아한다. 나는 천재의 잔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때론 덜 깨친 천재의 재치를 좋아한다. 절망을 모르는 것처럼 반짝이는 혜안으로 즐긴다. 즐기는 만큼 천재의 놀이는 재미있다. 남에게 선사하기보다 자신에 충실하느니. 목숨을 걸고 놀이를 즐기는 그. 나는 그러한 모습을 너무 좋아한다. 너무 가까이서만 보면 지루할지 몰라 그와의 적당한 거리에 서서 그의 몰두를 본다. 그는 시퍼런 칼날은 숨기면서 여유롭게 흔들리지 않고 그는 오줌 찔끔찔끔 싸면서도 태연자약으로 거기 있고 이처럼 의연한 천재가 있어 세상이 아름답다. 나는 놀이하는 천재를 내 마음에 키우고 있다. 그는 언제든지 내 마음속에서 행복해한다. 나와 천재는 둘이 아닌 것처럼 사느니. 천재란 교육 받아 형성된 것이 아닌,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 누구나 그런 재능이 있지 않는가. 어떻게 자신 안의 그러한 재능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자질이 있다면, 그것이 ‘천재’ 아니겠는가. 위의 시에서 시인이 좋아하는 ‘천재’는 놀이하는 재능이다. 자신에 충실하며 절망을 모르고 “목숨을 걸고 놀이를 즐기는” 천재. 시인은 그 천재를 마음 안에 키우고 그것과 “둘이 아닌 것처럼” 살아 행복하다고. 문학평론가
2025-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