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까지 꽃잎 날리던 나뭇가지에 지금은 연구 잎사귀가 꽂혀 있다. 향기 머물던 자리엔 누군가 서성인 발자국이 얼룩덜룩하다. 오래전 어머니가 상추 가꾸던 텃밭에 오늘은 내가 쑥갓을 심는다. 흙에 버려져 반쯤 파묻힌 플라스틱 통에서는 민들레가 피어났다. (중략) 어디에도 빈틈은 없다. 꿰맨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어제의 갈피를 오늘이 뚫듯, 오늘의 간극은 내일의 에테르로 메꿔진다. 꽃 진 자리에 곧 새똥 같은 열매가 돋으니, 지워졌다 새겨지는 오랜 내력이 인류세가 지난 다음에도 계속될 것 같다. 그러니 지금 헐렁헐렁한 틈도 참을 만하고, 내가 곧 지워져도 괜찮다. 고개를 끄덕끄덕, 살래살래, 갸우뚱… 어쨌든, 다 좋다. ………. 시간에 빈틈은 없다. 시간 속에 빈틈이 생기긴 하나, 시간은 “꿰맨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곧 그 빈틈을 메꾸기 때문. “오래전 어머니가 상추 가꾸던 텃밭”에, 오늘엔 “내가 쑥갓을 심”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은 “어제의 갈피를 오늘이 뚫”으며 이어지고, 인류세 이후에도 “지워졌다 새겨지는” 내력은 지속될 테다. 하여 시인은 “내가 곧 지워져도” 시간은 이어질 것이어서,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5-01
다섯 평밖에 안 되는 텃밭 이랑이 구불구불한 건 성격이 구불구불한 내가 괭이질해서 생긴 일 고추잠자리가 구불구불하게 날아다니는 건 고추밭 이랑이 구불구불해서 생긴 일 (중략) 어릴 적 고향에서 고추밭 매러 가시던 부모님 따라가서 고추에 앉은 고추잠자리 잡으려던 순간 똑바로 날아가 버리던 건 이랑이 똑발라서 생겼던 일 수백 평 비탈밭 이랑이 길고 길었는데도 이쪽에서 저쪽까지 똑발랐던 건 쟁기질하시던 부모님의 성격이 똑발라서 생겼던 일 … 마음은 노동의 자세를 만들고 그 자세는 노동 산물의 형태를 만든다. 시인은 자신이 괭이질한 텃밭 이랑이 구불구불한 건 자신의 “성격이 구불구불”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랑이 구불구불하자 고추잠자리도 “구불구불하게 날아다”니게 되었다는 것. 반면 옛적 부모님이 갈았던 이랑은 똑발랐으며, 그래서 고추잠자리도 “똑바로 날아”갔다고. 일하는 자의 마음은 이렇듯 대지와 생명체의 삶을 결정짓는다. <문학평론가>
2025-04-30
반쯤 허물린 담장을 경계로 서 있는 벚꽃 나무 아래 이 빠진 항아리가 빗물을 삭히고 있네 그 안으로 벚꽃 잎이 날아드네 한때는 간장으로 된장으로 고추장으로 속을 채웠을 그가 금이 가고 깨어진 몸으로 이름 모를 풀들을 키우고 있네 곁에 선 철쭉의 젓 몽우리를 딴딴하게 하네 그 환한 것들의 뒤란을 오글오글 타오르게 하네 … 이제 노쇠하여 ‘이 빠진’ 낡은 항아리. 한때는 간장이나 된장, 고추장을 담고 있었지만 이젠 빗물만 삭히고 있는. 하나 저 “금이 가고 깨어진 몸” 안으로도 “벚꽃 잎이 날아드”는 것, 존재의 아름다움은 쓸모를 다한 존재자에게도 방문한다. 그러자 저 깨어진 몸이 하고 있는 일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름 모를 풀들을 키우고” “철쭉의 젓 몽우리를 딴딴하게 하”면서 “뒤란을 오글오글 타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28
꽃나무의 표정이 흐릿해지는 사월 초저녁, 떨어지는 꽃잎이 뭇별을 띄워낸다. 잎을 다 떨구고 나서도 꽃나무가 꽃나무로 남듯, 이목구비가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도 사랑의 발음을 온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어디선가 그도 나처럼 저녁의 흐릿한 표정을 살펴 가며 기억나지 않는 눈코입귀를 성기게 새겨가고 있으리라. 떨어진 꽃잎까지 다 게워낸 후에야 아득한 훗날을 꿈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의 저 꽃나무 같은. … 별이 뜨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의 봄날. 그 시간엔 지나간 일들이 기억나고, 그대의 얼굴은 흐릿하지만 지울 수 없는 사랑의 잔영이 떠오른다. 떨어져나간 사랑의 시간들은 지금 떨어지고 있는 저 꽃잎 같고ㅈ 하나 이 시간엔 헤어진 그대도 ‘나’의 “눈코잎귀를/성기게 새겨가고 있”을 터, 이별의 아픔은 어떤 믿음으로 전환된다. 꽃잎을 다 떨어뜨린 이후의 꽃나무처럼 “아득한 훗날을 꿈”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문학평론가>
2025-04-27
오늘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우리의 별 볼 일 없는 이들/ 그 끔찍한 얼굴의/ 아름다움이/ 나를 흔들어 그러하라 하네. 까무잡잡한 여인들,/ 일당 노동자들-/ 나이 들어 경험 많은-/ 푸르딩딩 늙은 떡갈나무 같은 얼굴을 하고선/ 옷을 벗어던지며/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그리고 나란히 함께 하는/ 그대들 얼굴도 나를 흔드네-/ 앞장선 시민들-/ 하지만 같은/ 방식은 아니게. … 20세기 미국 대표시인 윌리엄스의 시. 그가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말해준다. 시는 예쁜 모습에 매혹되어 쓰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얼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쓰는 것. 가난하고 일에 지친 이들의 “늙은 떡갈나무 같은” 얼굴에서 말이다. 그들이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시인을 흔든다. 거리의 시위에서 “나란히 함께”,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앞장선 시민들”의 얼굴 역시 시를 끌어 올린다. <문학평론가>
2025-04-24
다리를 다쳐 얼마간 전동 휠체어 신세를 졌다 (중략)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커피를 마시는 것도 전동 휠체어에 앉아서 했다 자판을 가로지르는 두 손, 컵의 온기와 섞여드는 손의 온기, 발의 감각과 페달의 감각이 하나가 되어갔다 내 가장자리는 어디일까 전동 휠체어와 노트북과 컵의 가장자리까지를 나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피부를 지닌 존재로서 철이나 플라스틱이나 세라믹과 연결된 이 몸을 …. ‘나’라고 한정지을 수 있는 ‘가장자리’는 어디까질까. 나와 연동되어 움직이는 사물들도 “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사물 역시 “피부를 가진 존재”이기에, 사물과 접속할 때 나와 사물의 ‘온기’가 섞여들며 “감각이 하나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경계는 무엇인가. 둘 사이의 경계를 뚜렷이 나눌 수 없다면, 사물은 단순한 이용 대상이 아닌 것이다. 사물은 인간과 섞여드는 나름의 주체이기에. <문학평론가>
2025-04-23
개미는 턱 힘이 세다 이를 악물고 살았기 때문이다 시냇물도 여울목에 다다르면 몸이 거칠다 몇 번이라도 꺾이며 밀려온 탓이다 산들바람마저 폭풍의 언덕에선 머릿결이 난폭하다 사람계곡을 헤매다 기어코 홀로 선 절벽 울부짖다 ….. 선하고 순한 존재자들은 거칠게 살 수밖에 없다. 세계가 그렇게 놔두지 않기 때문. 그래서 가녀리다고 그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저 작은 개미 역시 “이를 악물고/살”아야 했기에 “턱 힘이”이 세지 않는가. 살살 흐르던 시냇물도 여울목에선 거세지고, 부드러운 산들바람 역시 난폭해질 때가 있는 것. 산하를 부드럽게 비추어주던 달도 “사람계곡을 헤매다” 보면, ‘기어코’ 절벽에 홀로 서서는 붉게 울부짖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22
미역국 대신 비타민 한 알 챙겨 먹고 야간자율학습하는 딸 마중을 간다 너무 빨리 도착한 손이 문자를 읽고 차 한 대 없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태어난 날 교문 앞에서 기다려주는 것 친구들이 해준 과자목걸이 주렁주렁 매달고 나타난 딸과 종종 아빠가 자가용을 태워준다는 친구를 골목 입구까지 택시로 데려다주는 것 그리하여 자꾸 차를 얻어 타기 미안해 오늘은 그냥 버스 타고 갈래요 하던 딸에게 조금은 미안함을 덜어주는 것 엄마가 끓여 준 미역국을 먹지 않고 등교하여 급식으로 나온 미역국을 안 먹었다는 말에 바지 주머니 속 손수건 만지작거리다가 슬며시 잡아본 딸의 손이 생크림케이크처럼 보드랍다 ….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는 말을 진실로 느끼게 해주는 삶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시. “차 한 대 없는” 시인이 딸에게 소소한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과 생일날 “엄마가 끓여 준 미역국을 먹지 않”아서 “급식으로 나온 미역국을 안 먹었다는” 아이의 마음이 찡하게 교차한다. 그 교차를 시인도 알고 있다. 딸의 손을 “슬며시 잡아”보는 것을 보면. 그러자 삶을 기리는 보드라운 생크림케이크가 불을 밝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21
유유자적 요트 위에서 지는 해를 구경한다 뱃전에 매단 등에 소리 없이 불이 오고 우리는 근심 하나씩 바다에 떨궈 갔다 세월에 밀려나도 당당한 너를 보며 통영에서 비운 서녘이 내려놓은 한 편의 시가 친구야 황혼에 드니 일몰이 더 찬란하다 … 시인은 ‘유유자적’ ‘지는 해’를 구경하면서 아마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저 일몰은 “세월에 밀려나”고 있는 삶의 시간을 뜨겁고 아름답게 비춘다. 하여, 시인은 삶의 저녁에 들어서며 얻게 된 근심을 저 당당하게 사라지는 일몰의 “바다에 떨궈” 갈 수 있었던 것, 나아가 그는 황혼의 시간인 “일몰이 더 찬란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저 찬란함이야말로 삶이 얻게 되는 ‘한 편의 시’임을 발견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04-20
고독이여, 날 내버려두지 마요 당신의 팔로 안아줘요 당신의 손으로 나를 잡아줘요 그 손이 차가울지라도. (중략) 내게서 멀어지지 마요, 고독이여 나의 유일한 친구는 당신이니까요 나의 아픔을 이해하는 당신이 약속해줘요 언제나 나와 동행할 거라고. 날 저버리지 마요, 고독이여 당신이 가버리면 누가 밤새 나의 꿈을 지켜주겠어요? 그리고 누가 밤마다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 현재 한국외대 교수인 멕시코 출생 문학인 알폰소의 시. 우리는 고독하지만 고독하지 않다. 적어도 고독이 함께 하니까. 하여 위의 시의 화자는 고독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고독에게 자신을 안아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 그도 그럴 것이 고독에 빠진 자에게 “유일한 친구는” 고독밖에 없으며, 고독한 자의 아픔은 고독이 가장 잘 이해할 것이기 때문. 고독은 고독한 자의 꿈을 지켜주며 그의 독백을 들어주기에. <문학평론가>
2025-04-17
아득한 밤, 쿠키하고 나 하고 의논 중이다…. 쿠키를 먹는 순간 소리가 날 테고, 부스러기도 나올 거고, 꿀꺽 넘기는 소리가 날 테고, 꿀꺽 넘기는 소리가 날 테고, 주스도 마실 테고, 그러면 나는 뭔가를 포기해 버린 아이에게 오늘은 무슨 응원의 말을 보낼 수 있을까, 화를 내면 안 되는데, 무슨 희망의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하며 쿠키를 쥐고 있다 (중략) 어눌한 밤, 쿠키 하고 나 하고 이불 하고, 무서운 적막과 속삭이는 중이다…. 밤색 몸과 마음에 대해서, 쿠키하고 나 하고, 거실 형광등과 고민하는 중이다…. 분노도 오해도 잘 숨기는 관계에 대해서 위의 시의 화자는 홀로 방에서 쿠키를 먹으며 “뭔가를 포기해 버린 아이”에 대해 생각한다. 한데 그는 홀로 있지만 홀로 있지 않다. 그를 둘러싼 사물들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먹는 쿠키, 그가 덮고 있는 이불, 거실 형광등과 무서운 적막까지 그의 대화 상대자다. 우리는 고독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위의 시는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과 대화하며 산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5-04-16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개피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야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자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이 맑음 속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리 ..... 군사독재 시대 끝자락인 1980년대 중반에 발표된 시. 우리는 그러한 독재 시대로 되돌아갈 뻔했다. 우리 시가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기다려야” 하는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었던 것. 그래서인지 위의 시는 지금도 깊은 감회를 가져온다. 가을 대기의 ‘엄숙한 투명’ 속에서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시인. 그 모습은 ‘아슬한 꼭대기’에서 혼자 남아 익어가는 감과 같다. <문학평론가>
2025-04-15
내 유년의 들판 손톱을 깎으면 그대로 나비 떼 되어 날 것 같았던 이제 그 노쇠한 들판 꽃무리 누워 빛바랜 고해성사의 시간 그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멸의 고유명사 그때 그 나비 넘나들며 꽃향기 움막 한 채 짓기 여념 없는데 내 외로운 생의 일기는 시방 일몰의 페이지에 이르다 들꽃이 한때 들판을 의지함같이 나비여 꽃이여 형편없이 떠돌다 이제는 들판처럼 누워야 할 생이여 “일몰의 페이지에 이”른, ‘빛바랜’ 시간에 다다랐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 나이. 위의 시인은 그 나이에 다다랐다. 그의 시간은 더욱 짙은 서정과 만난다. 그 시간에 다다르면 더욱 유년을 기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깎은 손톱이 그대로 나비가 되어 날아갔던 아름다운 기억을. 그 나비는 바람 불면 날아가 “형편없이 떠돌다” “들판처럼 누워야 할” 들꽃으로 변화되어 있다. 우리 ‘생’의 운명을 보여주는 들꽃으로. 문학평론가
2025-04-14
가을비 그친 아침이다 뒷산 언덕길이 시작되는 트랙 펜스 아래 자그마한 짐승 한 마리 죽어있다 간밤의 비로 온몸에 젖은 흙투성이를 묻히고 꿈꾸듯 모로 누워 네 발을 가슴께로 모은 채 모처럼 깊은 잠을 자고 있구나 뾰족한 턱과 길고 날카로운 발톱 뭉툭한 꼬리를 가진 네 이름을 알 수 없어 나는 미안하다 우리는 도로에서 죽은 짐승을 보곤 한다. 이 짐승에게도 삶이 있고 고통이 있었을 터, 시인은 그 주검을 그저 지나치지 않는다. 무명의 짐승이라도 그 영혼을 위로해주고 인간으로서의 미안함을 표명한다. 도로 위 짐승의 죽음은 문명에 의한 것이기에. 하나 죽음은 또한 “온몸에 젖은 흙투성이를 묻히”며 살아야 하는 고단함의 끝을 의미하기에, “모처럼 깊은 잠을 자고 있구나”라고 시인은 죽은 짐승을 위로한다. 문학평론가
2025-04-13
나는 본 적이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한 쌍의 돼지를 죽은 돼지 곁을 맴도는 돼지를 어찌하여 내가 이곳에 이르렀는가 묻지 않는 돼지를 도망가지 않고 도살자의 발치에서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돼지를 존엄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덕목일까. 위의 시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저기 돼지들이 길을 잃고 도심 한복판에 있다. 한 마리는 죽어 있고 그 “돼지 곁을 맴도는 돼지”가 또 한 마리 있다. 그 돼지는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지 묻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또한 “도망가지 않고” 도살자에 의한 자신의 죽음을 끝내 맞이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죽은 동료 옆을 지키는 저 돼지가 생의 존엄성을 더욱 드높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10
혼자 고통을 견디다 쓰러진 자들은 대개 엎드린 상태로 발견된다 지구에서 쓰러지면 지표면만큼 휜다 육교처럼 엎드린 채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아무도 부축하지 않는 생은 지구가 업고 간다 구부러진 자들은 두 손으로 지구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 엎드린 채 죽어간 자들을 바로 누여 장례를 치르려면 기다려야 한다 지구가 내려놓을 때까지 우리는 모두 대지의 자식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맞아주는 존재자도 대지다. “고통을 견디다 쓰러진 자들은” 대지에 엎드리고는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생의 끝자락에서, 그래도 마지막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지구의 목”이다. 지구는 그렇게 죽어가는 이들을 받아들이며 안아준다. 지구의 마지막 모성이다. 고통스런 지상의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래도 위안 받는 것은 대지의 따듯함이다. 문학평론가
2025-04-09
밤도 당신을 닮았다. 깊은 가슴 속에서 소리 없이 우는 머나먼 밤, 피곤한 별들이 지나간다. (중략) 밤은 괴로워하고 새벽을 열망한다. 소스라치는 불쌍한 가슴. 오, 닫힌 얼굴, 어두운 고뇌여, 별들을 슬프게 만드는 열기여, 말없이 당신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당신처럼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닫혀 있는 죽은 지평선처럼 당신은 밤 아래 길게 누워 있다. 소스라치는 불쌍한 가슴, 머나먼 언젠가 당신은 새벽이었다. 체사레 파베세는 2차 세계대전 전후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작가. 위의 시는 한국처럼 서구에서도 ‘당신-님’이 시의 기둥이 되어왔음을 알게 해준다. 위의 시에서 당신은 밤과 같다. “피곤한 별들이 지나”가고, “깊은 가슴 속에서/소리 없이 우는”, “닫힌 얼굴”의 “어두운 고뇌”로 가득한 밤. 그래서 “새벽을 열망”하는 밤. “당신처럼 새벽을 기다리는” 시인은, 하나 “언젠가 당신은 새벽”이 될 것을 믿는다. 문학평론가
2025-04-08
엉겅퀴를 쓰다듬다가 찔레도 며느리밑씻개풀도 쓰다듬는다 찔리는 맛이 좋아서 이러다가 엄나무 아카시아 철조망도 쓰다듬을까 세상 무정이 베풀어주는 무관심의 은혜에 감사하다가도 무소속으로 누려온 자유가 때로는 역겨워져 자해하고 싶었다고 피범벅 두 손이 고백한다 장미에게 바치고 싶었다고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단 한 번이라도 순수와 황홀에 봉사와 헌신의 의무를 스스로 무겁게 짐 져 보고 싶었다고. 회한이 마음에 사무쳐올 때가 있다. 이젠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 문득 지금의 삶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시인은 그 사무침이 깊어 일부러 가시 있는 풀들을 쓰다듬는다. “찔리는 맛이 좋아서”다. ‘무소속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순수와 황홀에 봉사와 헌신”하지 못했다는 회한에 따른 자해. 이로써 그는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07
기적 소리 배인 작업복을 벗고 밖으로 나서니 하늘이 갈라졌다 갈라진 하늘의 반은 뒤로 가고 반은 앞으로 갔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걸어갔다 내 안으로 난 길을 따라 내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그대를 만나러 갔다 거기에서 다시 소란과 기차와 슬픔과 음행을 만나야겠다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서, 돌아오고 있는 그대를 만나야겠다 그리하여 용서 없이 사랑해보련다, 할! 시인은 어느 날 하늘이 갈라지는 일을 경험한다. “반은 뒤로 가고 반은/앞으로” 가는 하늘. 물론 이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어서, 하늘에 난 그 길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것. 시인은 그렇게 갈라진 마음의 안팎으로 난 길을 따라 “그대를 만나러” 간다. 예전에 “소란과 기차와 슬픔과” 운명을 같이 했던, “돌아오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돌아오는 그대를 만나 “용서 없이”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문학평론가
2025-04-06
흘러간다 물고기들 사이로 물풀에 찢기며 모래알을 들썩이게 하며 흘러가는 것만을 할 수 있다는 듯이 흘러가다 문득 뿌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끌려 올라가다 막다른 골목을 밀며 나아가고 골목은 자꾸 뾰족해지고 길어지고 갈라지고 고여서 깊어지는 감정 같아서 가라앉고 쓸려 가고 넘쳐흐른다 시냇물 성에 폭포 입김 빙하 바다로 출렁이는 이름들 새벽이면 잎사귀 위에 흔들리는 네가 있다 ‘너’를 기억한다. ‘너’의 ‘이름들’을. 이름들을 기억에 떠올릴 때마다 감정이 동반된다. 기억의 흐름은 마음의 흐름과 함께 하는 것, “흘러가는 것만을 할 수 있다는 듯이 흘러”가는 마음은 “물풀에 찢기”면서 “막다른 골목을 밀며” 아프고 어지럽게 나아간다. 그렇게 마음을 채우는 ‘너’의 이름들은 시냇물이라든지 폭포, 바다가 되어 출렁이는데, 결국 ‘너’는 새벽의 ‘잎사귀 위’에 다다라 고요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