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세포들이 살아난다 슬픔과 지루함이 사라진다 권태와 묵은 때가 사라진다 무지와 타성이 사라진다 하얗게 생각이 증발해 간다 어디까지 가야 영원에 닿을까 생고생을 자처하며 한 발자국씩 움직일 때마다 엉덩이와 잔등은 규칙과 불규칙 사이에서 엇박자를 낸다 앞선 사람들이 찍어놓은 발자국에 발을 포갠다 땀방울이 고인다 호흡이 턱까지 차오른다 발품을 팔면 나를 만날 수 있을까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구절초가 나를 본다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나를 본다 나의 보폭은 줄어들지 않는다 일시적이라도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의 상태에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시인은 ‘산행’을 추천한다. “생각이 증발”하면서 “나른한 세포들이 살아”나는 산행. 이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다. 영원으로 가는, “땀방울이 고”이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 나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나. 이 ‘나’의 발견은 구절초나 소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인지하면서 이루어진다. 문학평론가
2025-02-02
나무 밑에서는 아이들이 떠들며 논다 나는 까치에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꼬마들은 아예 아무 생각 없으리라 까치에게도 아무 생각 없을 것이다 까치는 아이들을 사람으로 안 보는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앉는다 작년의 그 까치일까 내년에도 올까? 아이들만 있다면 더욱 허전할 내 마음이 까치가 있어 치료 받는다 까치가 온 것도 모르고 옆 호의 부부는 방 안에서 키득거린다 까치가 왔으니 생각들을 끄자 까치가 먼 데서 찾아왔으니 인천하고도 송림동 이 산동네를 까치가 와서 어린이들과 같이 놀고 있으니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며 산다. 문학적, 철학적 생각이 아니다. 대개 생활 문제, 돈과 관련된 생각이다. 그러니 그 생각은 우리를 부자유에 얽맨다. 저 떠들며 노는 아이들과 “아무 생각 없을” 까치들이 어울리는 장면은, 생각으로 가득 찬 어른에겐 자유로운 존재로 보인다. 시인은 저 장면을 보면서 잠시라도 “생각들을 끄자”고 마음먹는다. “먼 데서 찾아” 온 까치가 “내 마음”을 치료해준다고 느끼면서. 문학평론가
2025-01-23
살아 있는 동안 말할 줄 알았던 자 묵언 한 발짝 한 발짝 길을 잃고 길을 가는 벚꽃 터지는 정적 실바람처럼 가랑이를 빠져나가는 마곡사 계곡 길 종잡을 수 없는 청명(淸明), 떠날 때 잠깐 주인이었던 이유 여행 가방에서 살짝 삐쳐 나온 셔츠 끝에서 나풀댄다 간명한 표현으로 인생의 깊은 의미를 길어올렸던 김종삼 시인. 장무령 시인은 그로부터 ‘묵언’으로 “살아 있는 동안 말할 줄 알았던 자”를 읽는다. 시에 따르면, 이 묵언의 말은, “마곡사 계곡 길”에서 시인이 만났던 “길을 잃고 길을 가는” 정적과 같다. “종잡을 수 없”지만 ‘청명’한 바람 같은 말. 이 청명한 말이 가방 위로 삐쳐 나온 셔츠를 나풀대게 할 때, 삶은 잠깐이나마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1-22
발바닥이 간지러운 삼월이야 벌써 세 번째 밤을 질러 장례식장을 들렀지 까치발로 담 너머를 훔치듯 뒤뚱대던 풍등이 날아오르듯이 구멍 하나 남기지 않고 하늘을 끌고 사라지듯 축하드립니다 봄! 입김이 얼음 알갱이로 바뀌는 문 뒤로 조심스레 봉투를 전하고 국밥 그릇 속 고깃점으로 망자를 맛보다 돌아오지 봄밤은, 딱히 헤드라이트가 필요 없을 만큼 산수유 개나리도 조등을 내걸어 사나흘은 배웅을 나서는 때 겨울이 가고 도래한 삼월의 초봄. 하나 기쁜 날일수록 슬픈 일이 겹친다. 이 아름다운 봄밤에 시인은 세 번씩이나 장례식장을 들르고, 국밥을 먹으며 “망자를 맛보다 돌아”온다. 망자와의 인연과 그의 삶에 대한 기억을 되씹어보는 것이리라. 삶의 풍등은 “하늘을 끌고 사라지”고, 봄을 알리는 “산수유 개나리”는 조등을 내걸어 밤을 밝힌다. 봄날과 죽음의 풍경을 대조하며 삶의 아이러니를 씁쓸히 조명하는 시다. 문학평론가
2025-01-21
어느 분의 댓글에서 하룻밤을 묻어가시라는 인사를 보았다 분명 ‘하룻밤을 묵다’라고 적을 것을 오타가 난 것이리라 어둠 속 갈 곳 없는 하루가 버거워 무작정 달려가 어머니 치마폭에 고개를 묻고 펑펑 눈이 짓무를 때까지 울어본 사람은, 거친 어머니 손이 잔등을 쓸쓸 쓰다듬으며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던 잠이 있었던 사람은, 하룻밤을 묵은 것이 아니라 하룻밤을 묻은 것이다 (하략) ‘묵다’는 여정 가운데 쉰다는 것.‘묻다’는 무엇인가를 땅 안으로 넣어버린다는 것. 어쩌면 댓글을 단 분은 오타를 내지 않은 것 아닐까. 그도 어느 ‘하룻밤’, “어머니 치마폭에 고개를 묻”어본 일이 있는 이라면. 살면서 쌓인 설움을 쏟아내고 묻을 수 있는 넒은 품을 가진 존재자, 그는 어머니밖에 없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잔등을 쓸쓸 쓰다듬으며” 눈물을 다 받아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줄 수 있는 이는. 문학평론가
2025-01-20
꽃차와 뿌리차의 차이에 대하여 생각한다 뿌리는 제 뿔로 어둠을 부러뜨리며 나아갔을 것이므로 그도 땅 속의 꽃에 다름 아니다 꽃차를 마실 때 나의 표정이 우아하여 보이기를 꿈꾸지 않는다 도라지차를 마실 때 땅속에서 핀 힘겨운 꽃잎과 지상에서 만나야 했던 보랏빛 연민들도 함께 마셨다 별처럼 하얀 꽃잎일 때도 있었다 꽃잎의 가녀린 아름다움. 그것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 생명을 밀어 올리며 나타난 고투의 결과다. 도라지 뿌리는 꽃과는 반대 방향으로, 지하의 어둠 속으로 “제 뿔로” 파고 들어간 고투의 결과로 형성된 것. 하여 이 뿌리 역시 아름답다 할 수 있지 않는가. 지하를 비추는 “별처럼 하얀 꽃잎”처럼. 그 아름다움은 꽃차를 마실 때와는 달리 쓴 맛이 돌기도 하겠지만, 그 맛이야말로 삶의 깊이를 담아 그윽하지 않는가. 문학평론가
2025-01-19
끝도 없이 적막한 수평선 그 적막 모서리마다 나무를 심고 싶어 둥둥 떠다니는 수중 나무를 걸릴 것이 없이 떠다니다 길 잃은 배를 인도하는 바다 나무를 풍랑에 뒤집힌 뱃조각에 매달린 어부들 허리 감아올리는 나무를 물 없는 사막에도 나무를 심는데 지천으로 뻗은 수평선에 나무를 심으면 등대 없이도 항해의 길, 순탄하겠지 (하략) 수평선에 나무를 심는다는 발상이 재밌다. 수평선 위의 나무는 어떤 역할을 할까. 사막에 심은 나무는 생명이 열리는 장소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테지만, 수평선 위의 나무는 이와는 다른 역할을 한다. 난파된 배를 인도하고 뱃조각에 매달린 어부들을 끌어올리는 역할. 그러니까 파괴된 삶을 구원해주는 역할. 나아가 항해의 길을 밝혀주는 등대 역할도 할 것이다. 우리 삶의 바다에도 이런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문학평론가
2025-01-16
어디가 피곤한 나그네의 마지막 거처가 될까 남국의 야자나무 그늘일까 라인 강변의 보리수나무 밑일까 나는 낯설은 사람의 손으로 묻히는 것은 아닐까 사막 같은 데에 아니면 해변의 모래 속에서 잠드는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좋다 그 곳이 어디건 하늘이 나를 에워싸고 밤에는 별이 등불을 켜고 내 위를 비출 것이다. 독일의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하이네의 시. 혁명 시인 김남주가 감옥 안에 있을 때 옮겼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삶은 나그네처럼 정처 없이 흘러간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시인은 이 나그네로서의 삶이 안락하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하나 삶의 의미는 안락한 끝에 있지 않다. “그 곳이 어디건” “내 위를 비출” 별처럼 빛나는 이상을 따라 나가는 삶이야말로 시인에겐 가치 있는 삶이다. 문학평론가
2025-01-15
뜨거운 모래 하릴없는 둥근 손안으로 가벼이 흘러가는데, 마음은 하루가 너무 짧았음을 느꼈네. 금빛 해변 흐리게 하는 습기 찬 가을의 문턱 가까워지자 갑작스러운 불안함이 내 맘을 사로잡네. 손은 시간의 모래 담는 항아리, 박동하는 내 마음은 모래시계라네. 온갖 헛된 축이 커져만 가는 그림자 말 없는 시계 판의 바늘 그림자 같구나.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이탈리아 탐미주의-허무주의 시인 단눈치오. 위의 시는 그의 허무주의가 잘 드러난다. 시간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 “시간의 모래 담는 항아리”인 손 아래로 시간은 스르륵 빠져나간다. ‘박동’하는 마음은 모래시계처럼 점점 비워지는데, 하루는 너무 짧아 마음은 불안함에 사로잡힌다. 오직 남는 것은 “헛된 축이 커져만 가는” 시간의 그림자 뿐, 저 아름다운 금빛 해변은 점점 흐려지고…. 문학평론가
2025-01-14
내게 언제나 정답던 이 호젓한 언덕, 이 울타리, 지평선 아스라이 시야를 가로막아 주네. 저 너머 끝없는 공간, 초인적인 침묵과 깊디깊은 정적을 앉아 상상하노라면, 어느새 마음은 두려움에서 멀어져 있네. 이 초목들 사이로 바람 소리 귓전을 두드리면, 문득 난 무한한 고요를 이 소리에 견주어 보네. 이윽고 내 뇌리를 스치는 영원함, 스러져 버린 계절들, 또 나를 맞아 숨 쉬는 계절, 이 소리, 그리하여 이 무한 속에 나의 상념은 빠져드네. 이 바다에선 조난당해도 내겐 기꺼우리. 19세기 초에 활동한 이탈리아 낭만주의 시인 레오파르디. 그는 이탈리아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는다고. 위의 시는 그의 낭만주의를 잘 보여준다. 눈앞엔 울타리가 시야를 가로막지만, 시인의 눈은 그 너머 “끝없는 공간”을 상상한다. “무한한 고요” 속에서 영원함을 느끼며 자신을 둘러싼 계절이 숨 쉬고 있음을 인지한다. 이 상상의 세계는 무한한 바다와 같은데, 시인은 기꺼이 이 바다에서 조난당하기를 선택한다. 문학평론가
2025-01-13
대답 좀 해보세요! 나는 아버지를 흔들어 봅니다 통로마다 어둠이 있고 아버지는 묵언으로 삽니다 꽉 잠긴 아버지는 늘 한군데만 지키고 서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그것은 소음에 진저리치며 두통을 앓기도 합니다 가족력은 아닙니다 비밀에도 층계가 있습니다 가족 사이 층계가 많아질수록 아버지는 점점 완고해집니다 그러다 스스로 층계에 갇혀 비밀번호를 잃어버린 아버지, 아직도 번호를 찾지 못했습니다 황폐해진 대문을 열어 가끔 갇힌 고양이를 풀어주곤 합니다 아버지의 궁전에는 비밀이 녹슬어 갑니다 녹슨 열쇠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대답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저기 계신다. 예전보다 더 말이 없으시다. 무엇인가를, 어떤 비밀을 지키려고 하시는 듯이. 시인은 그 비밀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비밀에도 층계가 있”어서 들어가기 버겁다. ‘아버지’는 “층계에 갇혀 비밀번호를 잃어버린” 것, 비밀을 드러내놓으시지 않는다. 다만 갇힌 고양이와 대화하시는 아버지. 노쇠해진 아버지를 둔 분들도 아버지의 침묵과 맞닥뜨릴 때가 있을 테다. 이 침묵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5-01-12
(전략) 내장이 캄캄하도록 시커먼 블랙커피를 마신 날 잠은 오지 않고 늦가을 기러기들이 물어다놓은 별들이 밤새처럼 지저귀는 가지 위에서 바람의 육질로 슬슬 갈아낸 검은 먹지에 이가 시린 하얀 송곳 글씨로 한 점 의혹 없이 전모를 드러낸 별자리 살얼음 잡힌 김칫독 싱건지국물 같이 짱짱한 섣달 무명 다듬잇돌 같이 차디찬 별을 품고 누웠는데 밤새는 밤새도록 새빨간 간(肝)만 쏙쏙 빼 먹었다 곶감처럼 늦가을 새까만 밤하늘. 시인이 마시는 블랙커피의 색깔과 같다. 시인은 지금 가을 밤하늘을 마시고 있는 것. 마음이 어둡다. 하나 바람의 육질로 슬슬 갈아낸 먹지” 같은 가을밤 하늘엔 “하얀 송곳 글씨” 같은 별들을 “기러기들이 물어다놓”고, 시인의 마음은 그 차디찬 별들을 품는다. 그러자 별들은 밤새처럼 지저귀며 시인의 “새빨간 간”을 곶감 빼먹듯 쏙쏙 밤새도록 빼 먹고, 시인의 마음은 더욱 아픈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1-09
병원에 다녀왔다 명절 지나 입원한 지인의 몸살감기 속을 다녀왔다 공업사에 다녀왔다 계절이 바뀌고 기온이 달라지니 20년 된 애마가 고장 났다 고달픔 속을 다녀왔다 아침에 거울을 보니 얼굴에 세월이 묻어 있다 주름이 하나 더 보인다 어느 속을 다녀와야 될까 사람도 자동차도 거울도 지금 환절기를 앓는 중 얼굴에 묻어 있는 세월과 함께 늘어난 주름을 확인하는 시기. 감기몸살을 앓는 시기. 몸과 마음이 고장 나는 시기. 이 “타고 넘는” 시기가 지나면 다시 평온하고 건강한 삶이 올까. 하나 계절은 영원히 순환하지만, 슬프게도 삶은 순환하면서 끝을 향해 나간다. 주름은 다시 펴지지 않으며 낡은 ‘애마’는 고쳐도 새로워지진 않는다. 하지만 시인은 비관에 빠지지 않는다. 애써 이 시기를 ‘환절기’라고 지칭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01-08
만남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려면 동해안 방파제도 좋지만 해안선 절벽을 따라 기찻길을 걸어볼 일이다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바다에 바짝 붙은 레일 위를 하염없이 걷다가 아래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잠시 앉아 기슭에 와 닿는 부딪힘이 얼마나 무량한지 그렇게 땅이 잉태한 생명 얼마나 꿈틀거리는지 물보라 피어오르는 언덕의 허리 뒤트는 소나무와 우루루 몰려오는 바다를 맞아볼 일이다 동해안을 달리는 기차에서 바다의 풍경을 보곤 했지만, 이때 바다를 만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인은 그 기찻길을 걸어보며 아래의 바다를 근거리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바다가 “우루루 몰려오는” 것을. 그러면 “기슭에 와 부딪”치는 바다의 ‘무량함’을 느낄 수 있으며, “땅이 잉태한 생명”-바다-의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다는 것. 힘들고 지치는 삶이 계속되는 사람이라면, 시인의 제안을 실천해볼 만하겠다. 문학평론가
2025-01-07
머리가 춤을 춘다 금암초등학교, 중앙여중, 대학문에 걸린 얼굴이 내려다본다 환한 빛에 갇힌 젊은 날들이다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기대가 스크린 앞에 그는 서 있다 ‘박재된 환영이 되어버린’ 갇힌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어 꿈은 바스러지고 쌓았던 기대가 넘어지면 조그만 손가락으로 그리던 이게 뭐지? 그때 보여준 환한 웃음이 나이가 지긋해진 이들이라면, “환한 빛에 갇힌 젊은 날”을 추억할 때가 많을 것이다. 특히 “꿈은 바스러지고/쌓았던 기대가 넘어지”고 만 이들은 더욱 그럴 테다. 이제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이들. 필자 같은 이 같은. 환영은 박제되어 버렸고 “두근거리는 기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된 삶. 다만 미래를 가졌던 시절을 추억하는 삶. 그러나 추억이 다시 미래를 세울 수 있지도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갖는 삶. 문학평론가
2025-01-06
꿈틀꿈틀은 나의 유일한 저항 수단 아무리 걸어 봐도 먼 내일 햇볕은 눈물겨운 분신의 최적 조건 밟히고 말려지는 건 가문의 오래된 장례법 차마 눈 뜨고도 못 볼 일 많아 눈 감고 어둠 속으로 기어들기도 했다 가끔, 풀잎에 기대어 나비를 꿈꾸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한 끗 차이 오늘도 비명 한번 없이 쥐똥나무 꽃향기 쪽으로 직진 중이다 뼈 없는 설움이 깊다 ‘꿈틀꿈틀’ 몸을 비틀며 땅위를 기어가는 지렁이. 서민 역시 이렇게 기어가다 “밟히고 말려지”며 사라지는 삶을 살지 않는가. 서민 역시 나비가 되어 날아가기를 꿈꾸지만, “눈 감고 어둠 속으로 기어”들곤 하는 것이다. 서민이란 누군가. 지렁이처럼 “뼈 없는”, 재산도 ‘빽’도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비명 하나 없이” 묵묵히 지금도 “꽃향기 쪽으로 직진”한다. 그것만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듯이. 문학평론가
2025-01-05
한껏 몸을 이완시키고새어 나오는 수만 갈래의 생각을빗소리에 조용히 내려놓습니다벌거벗은 모습을 거울 앞에 비추듯상념 속에 떠돌던 내가어색하게 마주 앉은 지점입니다생각은 빗방울 숫자보다 많습니다모서리가 부서진 비의 다정을 듣습니다발각되고 싶지 않은 길 하나 만들어잡념을 쑤셔 넣고 꿀떡 삼키겠습니다(후략)나이가 들면서 “수만 갈래의 생각”에 정신이 산란해지곤 하지 않는가. 위의 시는 이 ‘잡념’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보여준다. 비 오는 날, “한껏 몸을 이완시키고”“모서리가 부서진 비의 다정을” 들으며 빗소리 앞에 자신을 세우고 자신의 나신을 거울 앞에 들여다보듯 응시해 보라는 것. 그러면 “발각되고 싶지 않은 길 하나 만들”어 그 길 안에 “잡념을 쑤셔 놓고 꿀떡 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1-02
나 저 깊은 밤의 끝에 대해 말하려 하네 나 저 깊은 어둠의 끝에 대해 깊은 밤에 대해 말하려 하네 사랑하는 이여 내 집에 오려거든 부디 등불 하나 가져다주오 그리고 창문 하나를 행복 가득한 골목의 사람들을 내가 엿볼 수 있게 1967년 32세의 나이로 요절한 이란 여성 시인 파로흐자드의 시. 우울에 빠진 여성의 삶을 드러낸 시인으로 유명하다고. 위의 시 역시 극한에 다다른 우울을 슬픈 이미지로 보여준다. 마음의 밤은 깊어 어둠은 끝에 다다랐다. 시인은 “사랑하는 이”에게 호소한다. ‘내 집’에 올 때 “등불 하나”와 “창문 하나를” 가져와달라고. 그의 마음엔 창문 하나 없었던 것, 그래서 “행복 가득한 골목”을 볼 수도 없었다는 것. 문학평론가
2025-01-01
나뭇가지 속 식물의 수액 속에서 박동하는 저 힘은 시詩 속에도 깃들어 있다 단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 입맞춤 속에서 욕망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저 힘은 시 속에도 움트고 있다, 단지 숨죽인 채 잠잠히 있을 뿐. 나폴레옹의 꿈속에서 러시아와 설원을 정복하라고 부추기며 꿈틀대는 저 힘은 시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단지 꼼짝 않고, 가만히 있을 뿐. 폴란드의 현대 시인 자가에프스키의 시. 시인은 시를 식물과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식물은 수동적이고 아무 움직임도 없는 존재로 보이지만, 그 “수액 속에”는 박동하는 힘이 꿈틀댄다. 시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런 힘을 가졌다. 시 속에는 입맞춤을 통해 통하는 사랑처럼 욕망의 힘이 흐르고, 나폴레옹에게 러시아 정복의 야망을 부추겼던 꿈처럼 시의 힘은 세상을 정복하는 거대한 힘으로 나타날 테다. 문학평론가
2024-12-30
중심은 늘 먼 데 있었네 나는 변방의 자식 태생과 부모를 원망하고 형제를 배척했네 주변을 경계하며 외로 존재했네 그럴수록 나는 더 변방, 변방의 변방으로 밀려났네 빈방의 어둠 속에서 탄식만을 읊었네 살면서 오래 중심을 기웃대며 넘보기도 하고 밤잠 설치며 코피를 쏟기도 했지만 다행히 나는 실패했네 중심은 닿을 수도 머물 수도 없는 가없는 높이 같아서, 한때 중심의 신도였으나 이제 변방의 기수로 자처하네 먼 하늘 해설피 열리는 풍경과 새들의 합창이 경쾌한 소음이 되는 눈부신 변방 어쩔 수 없는 변방의 자식이었네 태생 때문에라도 중심에서 밀려나 변방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중심으로 들어가고 싶은 그들의 욕망이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중심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기에. 변방에서 살아온 시인 역시 중심에 들어가는 데 실패했지만, 그는 그 실패가 다행이었음을 깨닫는다. 변방에서의 삶을 긍정하면, 저 먼 하늘 풍경과 새들의 경쾌한 합창을 즐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문학평론가
2024-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