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명예회장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험난했던 우리 국가의 현대사이다. 그는 철강 불모지 대한민국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세계 9위 무역대국의 기반이 되는 공업 입국의 기초를 다진 우리 경제계의 거목이다.
1927년 기장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에서 공부하다 해방과 함께 귀국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이 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역사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5.16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던 고인은 1963년 텅스텐 수출업체 대한중석 사장이 되면서 경제인으로 변신한다. 이 때 만년 적자인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종합제철소 건설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고인을 이야기할 때면 감초처럼 등장하는 `동해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필사의 각오도 이 대목에서다. 자본도 경험도 없이 시작한 제철소 건설작업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1970년 마침내 제철소가 착공됐을 때를 회고하는 원로 포스코맨들의 경험담이다. 바닷바람만 몰아치는 포항 영일만 해변에 의지 하나로 제철소를 건설하면서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필사의 각오를 직원들에게 피력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세계 4위 철강사로 성장한 포스코 역사 40년 중 26년을 최고경영자로 책임을 맡았던 그는 1987년 현역 철강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철강의 노벨상인 베세머 금상을, 1992년에는 세계적 철강상인 월리코프상을 받기도 했다.
고인은 1980년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본격 정치에 몸을 담게 된다. 포철 회장을 겸임하면서 11대부터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역정은 경제계에서만큼 성공적이진 못했다. 1990년 민정당 대표를 맡았고 대권에도 다가가는 듯 했으나 19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포철 명예회장직까지 박탈당한다. 이 후 1997년 포항 북구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정계에 복귀한 뒤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 이른바 DJP 연합을 만들어 총리직에 오르면서 명예를 회복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 지금처럼 나라가 경제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힘들고 혼돈스러울수록 더욱 큰 어른이 생각나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 나라 걱정일랑 전부 내려놓고 부디 평안히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