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의혹 사건은 지난해 말 대선 정국을 뒤흔든 대형 이슈였다. 여야 정치권이 첨예하게 대립한 가운데 경찰이 조사에 나섰고 당시 수사 실무책임자가 권은희 송파서 수사과장이다. 경찰은 그러나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둔 12월 16일 밤 국정원 여직원의 컴퓨터에서 댓글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해 정치적 논란을 자초했다. 이후 경찰 수사 과정에서 부당한 외압이 있었다는 권 과장의 폭로가 나왔고 경찰은 국정원 직원들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선거를 코 앞에 두고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정치적 사건에 경찰 지휘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면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한 행위다.
이런 의혹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다. 대선을 사흘 앞두고 서둘러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도록 지시한 게 바로 김 청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발표로 인해 경찰은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 했고 수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전 청장이 대선 이후를 겨냥해 줄서기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쏟아졌다. 나중엔 수사 외압 의혹이 불거졌다. 김 전 청장은 직권을 남용해 진실과 다른 수사결과를 발표하게 했고, 경찰공무원법상 정치운동 금지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민주당 등으로부터 고발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청장이 최근 보이는 행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김 전 청장은 지난 7일 서울에서 수 백 명의 하객이 몰린 가운데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경찰 재직 중 자신의 업적을 주로 소개한 책이다. 오는 15일엔 고향인 대구에서도 출판기념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내년 지방 선거 또는 국회의원 선거를 겨냥한 행보라는 분석이다.
피선거권이 있는 김 전 청장이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야 누가 뭐랄 수 없는 일이다.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 본인이 당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직 서울경찰청장으로서 경찰 조직과 구성원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렇게 거리낌없이 행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의 지시에 따른 발표 때문에 전체 경찰이 정치적 중립성을 크게 의심받게 됐고 부하 직원이 외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마당이다. 야당으로부터 고발당해 검찰 조사도 앞두고 있다. 정치적 행보를 하더라도 관련 의혹을 해소하는 게 먼저다. 자신 때문에 경찰 조직 전체가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게 됐다는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김 전 청장은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는게 옳을 것이다.